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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마무리

글머리에서 밝힌 것처럼 중요 고구려 고분은 이미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조사되었다. 그러나 조사 후 정식으로 보고된 예가 거의 없어 지금까지도 개별 고분의 조사 경과와 조사자, 조사 내용에 대한 이해가 크게 부족한 실정이다.
여기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 고구려 고분 조사 후에 제출된 『조선고적도보』Ⅱ의 사진과 당시 일본학계에 보고된 논문과 강연회 원고, 세키노의 원본 야장 등을 종합하여 우선 1913년도까지 평양 부근에서 조사된 개별 고구려 고분의 조사 경과와 내용을 파악하려고 노력하였다. 마침 최근 도쿄대학에서 발견된 세키노의 야장 자료와 총독부에서 파견나갔던 이와이 기수가 그린 고구려 고분의 측량도와 내부 실측도, 오타와 오바쓰네키치가 그린 고분벽화의 모사가 큰 참고가 되었다. 물론 이러한 원본 자료는 그 자체로도 자료로서의 의미가 크기 때문에 이를 고분별로 정리하여 소개하였다.
이 연구를 통해 우선 1910년부터 시작된 고구려 고분의 조사를 담당한 조사단의 성격이 분명해지고 전반적인 조사 흐름과 방법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그동안 사진만 공개되었던 사동 고분의 조사 내용을 파악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매산리 고분군은 알려진 2기만이 아니라 원래 5기가 조사되었음을 새롭게 밝히고, 여태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고구려 고분 3기의 구조와 내용을 미공개 야장 자료와 함께 소개할 수 있었다. 강동(江東)의 대표적인 고구려 고분인 한왕묘에서는 원래 보고된 것보다 훨씬 많은 기와 유물이 도쿄제국대학으로 반출되어 소장되었음을 밝혀냈고, 이를 조사하여 개별 기와 유물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번 정리를 통해 일제강점기 초기 ‘고적 조사’가 진행되는 과정과 진행 풍경이 비교적 선명하게 복원되었다. 고적 조사를 수행하는 세키노에게 고구려 고분의 정보를 준 것은 당시 평양에 거류하던 많은 일본인이었고, 이들은 대부분 지역의 유지였다. 군인 신분으로 강서 대묘와 중묘를 굴착한 오타는 물론 당시 고구려 고분에 관심을 가지던 많은 일본인들 대부분이 사전 절차 없이 여러 고구려 고분을 굴착한 정황도 드러났다.
고구려 고분 조사에 동원된 조선인 인부들은 관리의 편의를 위하여 머리에 흰색 두건을 씌웠다. 한왕묘의 발굴에서는 인부가 매몰되자 작업 중의 조선 인부들이 작업을 거부하고 귀가하는 정황이 드러나는데, 당시 조선인의 일반적인 고분관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고구려 고분은 1913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조사되었다. 해방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조사된 수많은 고구려 고분 역시 보고서가 제출되지 않았다. 지속적인 재검토 작업을 통해서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여 총괄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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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자료번호 : ku.d_0003_0010_00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