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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신북면 화상리 고분군

화상리 고분군에 대해서도 『조선고적도보』Ⅱ 에 약간의 도면과 사진이 소개되었을 뿐 정작 조사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조사 경과와 내용은 세키노가 1914년 2월자 『건축잡자(建築雜誌)』 326호에 실은 「朝鮮江西の高句麗古墳」이 가장 자세하기 때문에 이를 중심으로 도보의 사진과 세키노 야장을 참조하여 조사 내용을 정리 한다.
화상리 고분군은 위에서 설명한 매산리 고분군에서 서북으로 약 1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화상리의 구릉 위에 수십 기로 이루어진 고분군이다(圖 195). 사진을 통해 보면 매산리 고분군과 마찬가지로 구릉 위에 다수의 고분이 분포하는 것이 멀리서도 보인다. 그 분포를 보면 남쪽 4기가 동서로 열을 이루며 배열되고, 그 다음 약간 북쪽으로 치우쳐 4기가 다시 서쪽으로 가면서 열을 만들고 있다. 가장 북쪽에도 3기가 동서 방향에 가깝게 열을 이루고 있다(圖 194).
두 번째 열의 동쪽에 위치하는 고분이 가장 크고 현실 내에 벽화도 확인되는데 벽화의 일부에 연화문이 있기 때문에 조사단은 이를 ‘대연화총(大蓮花塚)’ 이라고 하였다. 현재는 감신총으로 통용되는 고분이다. 대연화총에서 북쪽으로 163m 정도 떨어진 지점에 4·5기의 고분이 있는데, 그 중 가장 서쪽 고분 현실에 벽화가 있다. 그런데 고분의 천장에 별모양의 문양이 있기 때문에 이를 ‘성총(星塚)’ 이라 하였다(圖 194).

1) 조사 경과

화상리의 고구려 고분은 세키노가 조사하기 한 해 전인 1912년에 이왕직 사무차관인 스에마쓰 쿠마히코(末松熊彦)가 굴착해서 보고한 것이지만 그 내용은 불분명하다(關野 1914a).
고분군의 조사에는 세키노, 구리야마, 야쓰이, 이마니시가 참가하고 총독부에서 파견된 이와이가 고분의 실측을 맡았으며 이왕가박물관 촉탁의 신분으로 수행한 오타와 오바가 고분벽화의 모사를 담당하였다. 세키노가 고려한 고구려 벽화고분 조사 시의 전공에 따른 역할분담이다. 세키노의 야장에는 1913년 9월 24일과 25일에 작성된 화상리 대연화총의 약측도가 남아 있다(圖 209〜214). 즉 화상리 고분군 조사는 상술한 매산리 고분군과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다. 세키노 조사단은 약 1km 정도의 거리를 두고 떨어진 두 고분군을 작업 진행 상황에 맞추어 왕래하면서 동시에 내부 조사를 진행했음이 틀림없다.
고분에는 세키노 일행이 조사에 착수하였을 때 이미 석실로 통하는 출입구(도굴구)가 있 었을 가능성 이 있다. 『조선고적도보』Ⅱ의 사진에는 석실 내부에서 퍼 낸 것으로 보이는 토사 무더기가 봉토 앞에 쌓여 있다(圖 196). 그런데 세키노의 야장에는 석실 내부에 토사가 차 있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보면(圖 212) 세키노에 의한 고분의 내부 관찰이 끝난 다음에, 도면과 벽화의 모사 작성을 위해 오바와 이와이가 석실 내부의 토사 반출과 정리 작업을 계속했음을 알 수 있다. 석실 내부로 유입된 토사 때문에 세키노가 그리지 못한 석실 바닥과 벽면 하단을 이와이는 자신의 도면에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圖216, 217). 쌍영총과 안성리 대총(용강 대총)의 조사가 이미 26일부터 시작되는 것을 보면 세키노에 의한 화상리 고분의 조사는 9월 24일과 25일 양일로 한정되었을 것이다.

2) 대연화총

대연화총(大蓮花塚)은 그 내부가 현실과 전실로 이루어진 이실묘인데 전실의 남쪽 거의 중앙부에 긴 연도가 달린다(圖197~211, 212). 전실은 장방형으로 크기가 작은 편인데, 동서 약 242cm이고, 남북 152cm 정도이다. 전실 좌우벽에는 장방형 감실이 만들어져 있는데, 이 고분이 감신총으로도 불리는 이유이다. 감실은 세키노의 야장에서 그 크기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동벽의 감은 상부 폭이 60cm, 하단 폭이 약 75cm, 높이가 110cm 정도이다. 반대쪽(서쪽)의 감실은 이보다 약간 작아서 상단 폭이 59cm, 하단 폭이 69cm, 높이가 약 108cm이다. 전실의 네벽은 모두 위로 올라가면서 안쪽으로 만곡하며 천장에 도달한다. 전실 천장은 곡선적으로 좁아져 오던 벽을 방형으로 마무리하였다. 전실 벽면 전체가 석회로 미장되어서 고임돌에 의한 모줄임 시설은 관찰할 수 없다. 전실 천장의 높이는 토사가 바닥에 깔려 명확하지 않으나 대략 217cm 정도이다. 벽면과 천장에는 전면에 회를 바르고 각 화면에는 여러 주제의 벽화를 그려 넣었다. 네 벽 모서리에는 굵은 기둥이 그려져 있고 기둥 머리 위에 이중으로 두홍을 얹었다. 남벽의 서쪽 아래에는 마차 바퀴가 그려져 있고 가까이에 인물이 표현되었다. 전실 서쪽의 감 안에는 인물이 대좌 위에 앉아 있다. 대좌의 아래에는 연좌(蓮座)와 같은 장식이 그려져 있고 그 좌우에는 각각 시자(侍者)들이 늘어서 있다. 감실(龕室) 내 인물의 상방에는 휘장을 묶은 듯한 문양이 있고 그 좌우 공간은 ‘王’자로 채웠다. 감의 좌우 측벽에는 시자 2인이 아래·위로 그려졌다. 또한 감실의 좌우 벽에도 상·하로 부인 입상을 배치하였다. 동벽 쪽의 감 안에도 동일하게 인물을 그려 두었는데 역시 좌우에 시종이 늘어서 있다. 왼쪽에 공물(供物)을 들고 오른쪽에는 깃발 같은 것을 들었다. 인물 위로 걷어둔 휘장이 표현되었으며 그 뒤쪽으로 일종의 화염문을 배치하였다. 측벽에는 또한 각각 두 인물이 있다. 감 좌우벽에 있는 2인 중 위의 오른쪽에 있는 인물은 두 손을 맞잡고 서있고 왼쪽의 인물은 무엇인가를 들고 있다. 아래의 인물은 화면이 박락되어 분명하지 않다. 북벽 현실로 들어가는 입구 서쪽 아래에는 세 사람이 무릎을 꿇고 앉아서 공양하는 모습을 그렸다. 상부 및 동쪽은 박락되어 분명하지 않다.
전실 네 모서리의 두공(斗拱) 위에는 4면에 들보가 걸쳐진 상태를 그렸는데 들보면에는 당초문을 그리고 그 위로 일종의 화염문을 장식하였다. 북벽에는 연화를 그리고 양쪽으로 주작을 마주보게 배치하였다. 마주보는 주작 사이에는 작은 새가 여러 마리 표현되어 있다. 전실의 연도에서 입구 좌우 벽과 동쪽 벽은 박락이 심하고 서쪽에는 기마 인물 4명이 표현되어 있으나 식별이 어렵다. 전실과 현실의 중간 입구 동벽에는 커다란 인물이 그려졌지만 분명하지 않고 서벽은 박락되어 식별하기 힘들다.
현실은 전실과 연결 통로를 사이에 두고 북쪽에 위치하는데, 동서가 262cm이고 남북이 261cm로 정방형에 가깝다. 현실벽도 전실과 마찬가지로 곡선을 그리며 천장으로 이어지는데 그 위에 고임돌을 이용하여 2단으로 평행내어쌓기 하고 그 위에 천장석을 덮어서 마무리하였다. 현실의 벽면 전체에는 두껍게 석회를 발랐으나 군데군데 박락이 진행되었다. 현실의 네 모서리에는 두공을 얹은 기둥이 그려진 벽화가 있다. 그 위에 들보를 올린 점은 전실과 같으며, 남벽은 이 들보 위에 화염문을 장식하였다. 운기문을 그리고 그 중앙에 주작을 그렸지만 박락되고 다리만이 보일 뿐이다. 서쪽에는 소나무가 표현되었고 동쪽은 박락되었다. 동벽은 전부 붕괴되었고 서벽은 들보(梁) 위에 소나무 같은 것을 그리고 아래에 산과 수목을 도안하였다. 말을 타고 시위를 당기는 수렵 장면이 그려져 있다(關野1913b).
현실과 전실을 연결하는 통로는 자연석에 석회를 먹이면서 쌓았다. 통로의 천장은 전실에 설치한 감실과 그 높이를 같이 하였는데 통로의 벽면도 석회로 마무리 미장한 것이다. 전실의 동벽에는 도굴 구멍이 나 있는데 세키노는 이 구멍을 통해서 고분 내부로 들어갔을 것이다. 세키노의 야장에는 고분 바닥면이 그려져 있지 않다. 이는 연도와 석실 내부로 일정 정도 토사가 유입되었기 때문에 관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이의 실측도에는 바닥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면 세키노의 조사 뒤에 이와이에 의한 추가 조사가 계속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연도를 포함한 전실, 현실의 축조에는 적당한 크기의 돌들이 사용되었는데 축조 과정에서 석회를 먹인 것이 관찰된다. 바닥 부분의 실측도에도 폐쇄 시설은 관찰되지 않는다.
세키노의 야장에는 전실의 감 서면에 있었던 기둥과 인물상을 채색하여 그린 것이 있다. 전실 서쪽 감실의 북쪽 벽에 설치된 기둥 사이의 여인, 주인공이 앉은 곳의 연화문 대좌, 전실 북벽 상부에 그려진 연화문 등도 채색되어 남아 있다(圖213~214).

『조선고적도보』의 도면과 사진

圖194_화상리 고분군의 분포도
圖195_화상리 고분군의 원경
圖196_화상리 대연화총 발굴 광경
圖197_대연화총의 실측도 각종
圖198_대연화총의 내부 투시도
圖199_인물상(사진)
圖200_동쪽 감실(사진)
圖201_현실 남벽 상부의 주작(사진)
圖202_인물상(모사도)
圖203_주인공 좌상(모사도)
圖204_서쪽 감실 좌·우벽의 인물상(모사도)
圖205_전실 북벽 서측의 인물상(모사도)
圖206_서쪽 연도의 기마 인물상(모사도)
圖207_전실 남벽 서측의 인물상(모사도)
圖208_각종 인물상(모사도)

세키노의 현장 기록

圖209_세키노의 현장 기록 1
圖210_세키노의 현장 기록 2
圖211_석실 천장도
圖212_측단면도
圖213_대연화총 부분 벽화
圖214_대연화총 인물
圖215_대연화총 벽화

와이의 측면도

圖216_대연화총의 측단면도
圖217_대연화총의 실측 도면

오바의 벽화 모사도

圖218_오바의 대연화총 모사도

3) 화상리 성총

화상리 성총(星塚)은 대연화총에서 북쪽으로 160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이와이가 그린 고분 실측도를 참고하면 성총은 남쪽으로 달린 연도 입구를 굴착해서 찾아낸 다음 석실 내부로 들어가서 조사한 것으로 보인다. 성총은 연도가 남쪽으로 달린 단실묘인데 현실 평면형은 장방형이다. 현실은 동서가 198cm 정도, 남북이 238cm인데 바닥에서 천장석까지의 높이는 약 288cm이다.
현실의 네 벽은 상하로 수직적이지만 천장으로 가면서 만곡하다가 천장에 이르러 3단의 평행내어쌓기와 2단의 삼각모줄임이 확인된다. 마지막으로 1장의 큰 천장석을 덮어서 마무리하였다. 고분의 네 벽과 천장의 마무리는 정연하지 않은 편이지만 표면은 석회로 말끔이 화장하였다. 문미석은 연도 천장보다 한 단 내려서 쌓았다. 현실에 붙은 연문의 바깥에는 폐쇄석의 흔적이 바닥 쪽에서 확인된다. 연도의 좌우벽에는 일부 석회 미장이 떨어져 나간 부분이 있는데 이를 통해 자연석을 쌓아서 석실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실 북벽과 서벽에도 박락된 석회 미장 사이로 고분 축조에 사용된 석재들이 관찰된다(圖228).
석실 내부에 그려진 벽화를 살피면 우선 네 벽의 모서리에 기둥과 공포를 그렸다. 남벽 입구부 연문 위 쪽에는 주작을, 서쪽에는 연화와 같은 것을 그렸다. 오른쪽에는 간단하지만 인동과 닮은 문양을 표현하였다. 동벽에는 청룡을 닮은 동물이 있는데 뿔과 눈, 꼬리 등이 희미하게 보일 뿐이다. 그 위에는 거꾸로 된 연화문을 크게 그려 놓았다. 북벽에는 현무를 그린 것 같지만 분명하지 않다. 연화를 거꾸로 매달아 놓은 듯한 그림 위로 인물이 그려져 있다. 서벽에는 백호를 그린 듯하나 아주 희미하고 중앙에는 연꽃을 배치하였다(圖223).
화상리 성총의 조사에서 세키노는 고분의 분포 약도, 동벽에 그려진 문양, 남벽 동남 모서리의 기둥과 공포 등을 일부 채색까지 해가면서 그렸으나, 정작 고분 내부 구조에 대한 정보를 담은 도면은 확인되지 않는다(圖224~227). 고분의 내부 구조를 알 수 있는 석실 도면의 작성은 이와이가 맡았는데 봉토의 형태는 따로 그리지 않았다(圖228).
벽화는 다른 고분과 마찬가지로 오타와 오바 쓰네키치가 그렸다.

『조선고적도보』에 보고된 사진

圖219_화상리 성총 연도부 굴착
圖220_성총 남벽의 주작
圖221_천장과 모서리의 벽화
圖222_성총 석실 실측도
圖223_석실 내부 투시도(현실에서 바라본 연도)

세키노의 야장

圖224_화상리 고분군의 분포도
圖225_화상리 성총의 메모
圖226_남벽 서남 모서리에 그려진 벽화
圖227_동벽에 그려진 벽화

이와이의 도면

圖228_화상리 성총의 실측도 각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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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북면 화상리 고분군 자료번호 : ku.d_0003_0010_006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