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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매산리 고분군

1) 매산리 고분군의 조사 경과

매산리 고분군은 진남포에서 서쪽으로 약 780m 정도 떨어진 구릉 위에 위치하며 행정구역상 온천군 화도리에 속한다.
조사 당시 약 20여기의 봉토가 확인되었다(圖177). 2기나 4기씩 짝을 이루어 동서로 늘어섰는데 세키노는 이러한 고분의 분포가 국내성 주변의 고분 분포와 닮았다고 판단하였다(關野1914a).
매산리 고분군은 남쪽에서부터 동서로 몇 기의 고분이 나란히 늘어선 분포를 보인다(圖163). 가장 남쪽에 2기가 열을 이루고 두 번째 행(行)은 고분 3기가 동서로 배열되었는데 가장 동쪽의 것이 사신총(狩塚)이고, 두 번째 행의 중간에 위치하는 고분이 남총(南塚)이다. 3번째 행도 3기가 동서로 열을 이루는데 그 중 가운데에 위치하는 것은 석실이 드러나 있었다. 그 내부를 조사하고 이름을 중총(中塚)이라 하였다. 다섯번째 열에서 비교적 대형 고분 2기가 열을 이루나 서북쪽의 고분만이 석실 내부를 확인할 수 있었기에 이를 조사하고 북총(北塚)이라 명명하였다. 고분군의 가장 북쪽에는 4기의 고분이 서북으로 약간씩 치우치며 늘어서 있다. 매산리 고분군을 찍은 원경사진을 보면 논으로 경작되는 계단식 사면 위에 형성된 구릉에 고분이 열을 지어 있어 한 눈에 고대의 고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圖164, 165).
원래 『조선고적도보』Ⅱ에는 사신총(四神塚, 狩塚) 사진만이 게재되어 단독으로 고분이 조사된 것으로 이해하기 쉬우나, 세키노가 작성한 야장의 고분 배치도를 관찰하면 당시 모두 5기의 고분을 조사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조사되지 않은 나머지 고분들은 석실 자체가 붕괴되어 대규모 굴착 작업 없이는 내부 조사가 불가능한 것들이었다(圖177). 이 중 4기의 고분에는 각각 이름을 지어주고 석실 내부를 간단히 그렸지만 가장 북쪽에 위치하는 고분은 조사했다는 표시가 있을 뿐으로 자세한 기록은 없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세키노의 고분 약측도는 특히 학술적인 가치가 높기 때문에 이를 모두 소개하고자 한다.

2) 매산리 사신총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매산리 사신총은 조사 후 일시적으로 수총(狩塚)이라 불리기도 하였는데, 매산리 고분군 중에서 유일하게 벽화가 확인된 것이다. 매산리 고분군 중에서 사신총(狩塚) 발굴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전년에 이어 두 번째 조사에서 이루어졌다. 매산리 고분군을 세키노에게 처음 제보한 사람은 당시 진남포에 출장 중이던 전매국장 우에바야시 케이지로(上林敬次郞)이다. 그는 1912년에 매산리에 벽화가 있는 고분이 있다 하며 조사를 의뢰했지만, 세키노는 일정이 맞지 않아 당시 총독부 영선과 기사인 이와이와 오타에게 대신 발굴을 부탁하여 조사하게 하였다. 이 때 작성된 사진과 도면, 그리고 벽화의 모사를 본 세키노는 1913년의 고적 조사에서 가장 먼저 조사하기로 결정하였다. 조사는 9월 23일 개시되었으며, 세키노는 구리야마와 함께 평양을 출발하여 진남포에 도착한 후 동리산 수도 수원사무소 관사에 여장을 풀고 조사에 들어갔다. 다른 반으로 나뉘어져 흑교리에서 세형 동검과 그 공반 유물을 조사하고 낙랑토성을 답사하던 야쓰이와 이마니시도 다음 날인 24일 매산리 현지에 도착하여 조사에 합류하였다(內田2001; 高橋2001).
사신총의 조사 내용 역시 세키노의 보고를 바탕으로 정리하였다(關野1913).
조사 시 세키노는 매산리 사신총 봉토의 외형이 흙만두와 같다고 하였다.
『조선고적도보』Ⅱ의 사진을 보면 연도가 있는 봉토의 일부에 약간의 굴착흔이 있다. 물론 1912년에 1차 조사가 있기 전에 전매국장이 벽화의 유존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전에 이미 도굴되었음이 분명하다. 세키노가 내부를 조사하고 약측한 것은 23일이다. 이는 조사에 착수하여 곧바로 석실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세키노가 조사할 당시 이미 현실 남벽의 일부가 파괴되어 있어 그 구멍을 통해 겨우 석실 내부로 출입할 수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圖165).
이 고분의 현실은 연도가 동쪽으로 치우쳐 설치된 단실묘인데, 동서 길이 333cm, 남북 길이 305cm, 높이 132cm의 장방형 석실이다. 연도는 길이가 115cm, 너비가 약 100cm, 높이가 약 132cm이다. 현실은 네 벽을 곡선적으로 축약시킨 다음 평행으로 3단 내어쌓기를 하고 그 위에 2번에 걸쳐 삼각고임돌을 놓고 천장석으로 마감하였다. 벽은 적당한 크기의 석재를 쌓아서 만들었는데 석재의 틈새에는 석회를 섞은 점토로 충전하였다(圖166, 167, 181~184). 벽면은 석회를 4번 겹쳐서 발랐는데 3번째 발라진 석회까지는 짚을 섞었음이 확인된다. 가장 바깥쪽의 화면에는 고운 석회만을 발랐다(關野1913a, b).
현실의 네 벽에는 소위 사신도를 그렸는데, 넓은 면에는 인물과 말을, 남벽에는 주작을 서로 마주보게 그려 넣었다. 동벽에는 청룡을, 뒤의 약간 높은 곳에는 기마 인물을, 중앙의 위에는 태양, 즉 삼족오를 그려 넣었다. 서벽에는 백호를 그리고, 중앙 상부에 수렵도가 있다. 말을 탄 사람이 앞서 달리는 두 마리의 사슴을 향해 활 시위를 당기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그 위에는 태음, 즉 두꺼비를 그렸다. 북벽 중앙에서 약간 동쪽으로 치우쳐서 네 사람이상 위에 앉았는데 그 좌우에는 기둥을 세워 그 기둥이 천개와 같은 것을 받치고 휘장을 쳐서 중앙과 좌우 단에 한식(幹飾)을 만들었다. 그 사이에 휜 봉의 끝에 방울을 매단 형상을 표현하였다. 네 명의 인물 중에서 동쪽의 한 사람은 남자인데 가장 크고 정중하게 앉아 있다. 아마 이 사람이 주인공일 것이다. 다른 세 사람은 부인이거나 첩일 것이다. 사람의 동쪽에는 사람이 말을 끄는 모습을, 서쪽에는 현무를, 그리고 그 위쪽에는 북두칠성을 그렸다. 천장 아래의 두 번째 고임돌에는 일종의 운문을 세 군데 씩 만들었다. 세 번째 고임돌에는 연속하는 당초문과 같은 것을 만들어 두었다(關野1913a, 1913b).
조사 당시 각 벽면에 그려진 벽화는 벽을 타고 내린 누수된 빗물로 인해 훼손이 진행된 상황이었다. 도쿄대학에 남아 있는 고분 석실의 실측도로 보아 연도는 적당한 크기의 돌로 쌓아서 만든 다음 그 위를 석회로 발라 마무리했음을 알 수 있다. 네 벽의 벽면에 발린 석회는 비교적 보존 상태가 양호하나 하단을 따라 박락이 진행되는 부분도 관찰된다(圖173~176). 조사 후 세키노는 매산리 사신도를 1913년 기준으로 1500년 전이라 하여 당시 발견된 고구려 벽화고분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 판단하였다(關野1913b).

『조선고적도보』에 보고된 사신총(수총)의 사진과 도면

圖163_매산리 고분군 분포도
圖164_매산리 고분군의 원경
圖165_조사 중인 매산리 사신총
圖166_매산리 사신총 석실 도면
圖167_매산리 사신총 측단면도(북벽, 서벽)
圖167_매산리 사신총 측단면도(남벽, 동벽)
圖168_매산리 사신총의 모줄임부 벽화(사진)
圖169_사신총의 인물도(사진)
圖170_사신총의 인물도(모사도)
圖171_사신총의 인물 세부
圖172_현실 북벽의 말 끄는 인물
圖173_사신총의 청룡(사진)
圖174_기마 인물상(사진)
圖175_수렵도(사진)
圖176_매산리 사신총 남벽의 주작(사진)

세키노의 현장 기록

圖177_세키노가 작성한 매산리 고분군 분포도
圖178_현장 조사 기록
圖179_사신총 현실의 천장
圖180_사신총의 측단면도

이와이의 석실 도면

圖181_매산리 사신총의 평면도
圖182_매산리 사신총의 남벽(왼쪽)과 동벽(오른쪽)
圖183_매산리 사신총의 북벽(왼쪽)과 서벽(오른쪽)
圖184_사신총의 천장 실측도

오바의 벽화 모사도

圖185_매산리 사신총의 청룡
圖186_사신총의 주작
圖187_사신총의 인물상
圖188_사신총의 수렵도

3) 매산리 남총

매산리 남총(南塚)에 대한 보고는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세키노가 1913년 9월 25일 작성한 야장에 그려진 약측도(圖 189)를 바탕으로 고분의 성격을 살피기로 한다.
세키노가 그린 남총의 야장에는 동서 방향의 입단면도와 천장도가 그려져 있다. 이를 관찰하면 고분은 연도가 동쪽으로 치우친 단실묘임을 알 수 있다. 고분의 축조에는 적당한 크기의 돌이 사용되었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른 것이 분명하다. 현실벽은 거의 수직벽으로 축조되었고 남쪽과 북쪽의 천장에는 네 번 단을 주면서 면을 좁혔고 동서는 두 번 단을 만들었다. 그 위에는 두 번에 걸쳐 모서리를 삼각모죽임한 다음 천장석을 덮어 마무리하였다. 세키노의 야장에 표현된 석실 모서리 부분에 석재의 이음선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석실 안쪽의 천장부 전체에 석회를 두껍게 발랐음을 알 수 있다.
연도와 현실이 만나는 연문에는 이맛돌이 연도보다 한 단 낮게 설치 되었다. 석실은 남북 길이가 250cm, 동서 길이가 182cm이다. 연문의 폭은 86cm이다. 조사 당시 연도와 석실 내부에는 토사가 절반 이상 차 있었는데 현실 천장이 뚫렸다는 기록이 없고 도면에도 표현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연도를 통해 석실로 들어가 조사를 한 것으로 판단된다.
야장에는 “지금 석회는 거의 전부가 박락되어 일부만이 남은 석면(石面)이 노출되었음”이라는 관찰 소견이 간략하게 적혀 있다.
圖189_세키노가 약측한 매산리 남총

4) 매산리 중총

매산리 중총(中塚) 역시 『조선고적도보』Ⅱ는 물론 어디에도 보고가 확인되지 않는 고분인데, 세키노가 남긴 야장 자료에 고분 약측도 2장의 남아 있다(圖 190, 191).
야장에 1913년 9월 24일이라는 주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남총보다 하루 일찍 조사된 것이다. 고분은 연도를 동쪽으로 치우쳐 달아낸 단실묘이다. 현실의 평면형은 장방형으로 동서 길이가 247cm, 남북 길이가 283cm이다. 연문의 폭은 83cm이고, 문 시설의 길이는 87cm 이다.
조사 당시 현실 바닥에는 토사가 3분의 2이상 찬 상태였는데, 현실 천장과 토사의 상면은 227cm 정도의 공간을 유지하고 있었다. 네 벽은 거의 수직벽으로 천장은 고임돌을 3단 내어쌓기하여 면적을 줄인 다음 그 위는 두 번의 삼각고임으로 모서리를 줄인 다음 천장석을 덮어 마무리하였다. 고분은 네 벽과 천장 표면을 석회가 곱게 화장한 것으로 보이는데 천장석 아래에 바른 석회는 박락된 것으로 기록하였다.
야장에는 “전부 석회를 칠했는데 잘 남아 있다. 네 번에 걸쳐 석회를 발랐는데 약간 회색을 띤다”라는 관찰 소견이 적혀 있다.
석실의 내부 공간이 협소하고 벽화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사진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출토 유물에 대한 언급도 없다.
圖190_매산리 중총의 측단면도
圖191_매산리 중총의 천장도

5) 매산리 북총

매산리 북총(中塚)도 세키노 야장에 석실의 입단면도와 천장 그림 이 남아 있다.
고분은 연도를 약간 동쪽으로 치우쳐 달아낸 단실분인데, 현실은 남북이 동서보다 긴 장방형이다. 현실의 네 벽은 수직벽인데 천장은 남총, 중총과 거의 유사라게 3단으로 평행내어쌓기하여 면을 줄이고 모서리에도 2단으로 고임석을 놓아 면을 줄인 다음 천장석을 덮어 마무리하였다. 천장의 표현 방법으로 보아 석실 내부는 축조를 끝낸 후 석회로 표면을 곱게 발랐음을 알 수 있다(圖 193).
현실의 크기 정보는 약측도의 해당 부위에 적어 두지 않았다. 그런데 천장도의 모서리에 연필로 써둔 척 단위의 추치가 있는데 이를 계산하면 현실의 남북이 264cm, 동서가 약 232cm이다. 이렇게 되면 현실의 규모가 너무 작기 때문에 이것이 현실의 크기를 나타낸 것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연도는 현실의 천장보다 낮게 축조하고 연문의 이맛돌은 그 아래로 더욱 내려서 결구하였다.
북총 역시 연도에서부터 유입되기 시작한 토사가 현실의 일부를 덮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세키노 일행은 남쪽의 연도로 난 좁은 도굴갱을 따라 현실로 들어가 조사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봉토에는 연도를 향해 거의 수직으로 도굴갱이 형성되어 있었다.
매산리의 다른 고분과 마찬가지로 출토 유물에 대한 정보는 없다.

세키노의 매산리 고분 조사 현장 기록

圖192_북총의 측단면도
圖193_북총의 천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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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산리 고분군 자료번호 : ku.d_0003_0010_006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