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고구려문화유산자료

강서 삼묘의 조사

강서 삼묘의 조사 결과 역시 정식으로 보고되지 않았다. 『조선고적도보』Ⅱ에 약간의 사진이 소개되었을 뿐이다. 강서 삼묘의 발굴 경과와 내용에 대해서는 세키노가 1913년 1월 고고학회 열회(列會)에서 강연한 내용이 구체적이다. 그리고 같은해 『미술신보(美術新報)』12-4에「새로 발견된 고구려시대의 벽화」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논문도 참고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세키노의 강연과 보고를 충실히 참고하면서 비록 본문은 없지만 『조선고적도보』Ⅱ의 사진, 그리고 세키노의 야장 자료 등을 비교하면서 강서 삼묘의 조사 과정과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조사 경과

1909년 세키노는 고적 조사를 위해 평양에 체재하였는데, 이때 평양일보 사주인 시라카와로 부터 평양 남쪽 5리(약 2km)에 있는 강서군 우현리(遇賢里)에 3개의 대형 고분이 있고 이를 군수가 굴착했었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그렇지만 일정상 조사할 수가 없었다. 1911년 한왕묘 조사 과정에서 내린 폭우로 강동에 있는 한왕묘로 가는 것이 불가능해진 틈을 타 3일 간 강서 삼묘를 방문하고 군수가 발굴할 당시를 기억하는 인부들을 수배하여 그들로부터 고분의 내부 구조에 대해 청취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출토 유물은 없었으나 해골 하나가 현실에 있어 이를 군수가 가져갔다는 진술을 확보하였다.주 001
각주 001)
출토된 두개골은 군수가 나쁜 일이 생길 것을 걱정하여 이를 땅에 묻어버렸다고 하는데, 이를 평양교회의 학교 생도가 다시 가져가 세키노가 조사할 당시에는 이것이 학교에 보관되어 있었다.
닫기
그리고 대묘와 중묘는 네 벽을 돌로 정교하게 쌓았고, 천장은 정교한데 벽에 회화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인부들은 현실벽에 칠장생이 그려져 있다고 세키노에게 진술하였는데 더 상세하게 묻는 세키노에게 인부들은 입을 모아 같은 말을 하였다.
그런데 강서에 군인으로 주둔한 적이 있는 도쿄미술학교 일본화과 학생인 오타 후쿠조가 1904년 경에 군수가 강서 고분을 발굴한 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동료 병사들과 같이 그 고분을 굴착하고 그려온 스케치를 1911년 12월에 세키노에게 보여주었다. 그가 보여준 스케치는 연필로 그린 거친 그림이었지만 세키노는 이것이 고구려 시대의 것임을 알았다. 이것이 결정적인 발굴 동기가 되었으며, 세키노는 이 고분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면 벽화를 모사하려고 마음먹었다. 1912년 9월 16일 일본을 출발하여 경성을 거쳐 9월 22일 강서에 도착하여 9월 23일부터 발굴 조사를 시작하였다.
강서 삼묘는 삼묘리 마을 앞으로 넓게 펼쳐진 평야 한가운데에 조영된 것이다. 그 남쪽의 것이 가장 크고 서북 쪽의 것이 그 다음으로 크고 동북쪽의 것이 가장 작다. 이를 크기에 따라 대묘(大墓), 중묘(中墓), 소묘(小墓)라 한 것인데, 발굴 당시의 야장에는 제1총, 제2총, 제3총으로 적혀있다.
조사에 착수할 당시 세키노는, 강서군수와 오타, 그리고 1906년 일본인 우체국장이 다시 굴착한 것으로 전하는 대묘와 중묘보다는 아직 도굴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한 소묘 조사에서 유물 출토를 기대하였다. 발굴은 3기를 동시에 굴착하여 중묘는 2일째, 대묘는 3일째, 소묘는 좀 더 품이 들어 5일째 오후가 되어서야 현실에 도달할 수 있었다. 대묘와 중묘의 경우 이미 여러 번 굴착된 것이라서 작업이 비교적 빨리 진행된 결과이다. 그러나 소묘를 발굴한 결과, 출토 유물은 물론 벽화도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크게 실망한 세키노는 이들 고분이 이미 1,000년 전 발해 때에 도굴된 것으로 판단하였지만 그 구체적인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1) 강서 대묘
세키노에 의해서 강서 삼묘의 조사가 이루어지는 것은 1912년 9월 22일에서 27일 사이이다. 조사하는 과정에서 시간을 내어 간성리 연화총도 조사하였음이 확인된다.
강서 대묘 조사 당시 이와이가 작성한 측량 도면에 의하면 조사는 봉토의 정상에서 남쪽 연도를 따라 길게 굴착하며 진행하었다.주 002
각주 002)
강서 대묘의 측량도에는 봉토 외면을 따라 평판을 옮겨가며 삼각 측량한 흔적이 붉은 색으로 남아있다. 봉토의 높낮이도 적절하게 표현되었는데 필적으로 보아 총독부 영선과의 이와이가 작성한 것이다(圖80 참조).
닫기
이미 천장에도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이우영과 오타가 굴착할 때 만들어진 구멍일 가능성이 있으나 분명하지 않다. 세키노의 조사에서는 석실 상면과 연도 앞을 말끔하게 깎아낸 다음 연도를 통해서 출입하며 내부를 조사하고 벽화를 모사한 것으로 추측된다.
고분의 크기는 봉토의 직경이 53m이고 높이가 9m 정도이다. 봉토의 거의 중심에 석실을 설치하고 남쪽을 향해 연도를 달아냈다. 현실은 사방 3m 정도이고 천장 높이는 3.48m이다. 구조는 네 벽 모두 정연하게 조정된 큰 돌로 쌓았는데 북쪽 벽은 2개의 돌로, 좌우 벽은 3개의 돌로 벽을 만들었다. 남벽의 중앙에는 연도 입구가 있는데 그 좌우는 각각 1매의 돌로 만들었다. 벽의 높이는 2.15m이다. 벽의 상부는 30cm 정도 안으로 기울었고 천장은 정교하게 기교를 부린 구조이다. 먼저 벽면에서 이중의 평행고임으로 모줄임하고 하단 고임석의 모서리를 경사지게 가공하여 결구한 정교한 구조이다. 세 번째 고임석은 네 모서리에 경사지게 네 장의 돌을 덮어 만들었고 네 번째 고임석은 벽면과 평행하게 쌓고 마지막으로 천장석을 덮어 마무리하였는데 조사 시에 이미 모서리가 깨진 상태였다(圖59, 73, 80, 81).
연도의 바깥쪽은 이미 파괴된 상태였는데 현실 입구는 5장의 큰 돌을 겹겹이 쌓아서 막았음이 확인되나 조사 당시에는 4장만 남아 있었다. 원래 연도의 입구와 중간 부분, 연도의 바깥쪽 모두를 폐쇄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조사 시에는 파괴되어 분명히 확인할 수 없었다. 세키노는 당시 한왕묘 등의 발굴 경험을 통해 고구려 고분의 현실 입구는 돌문을 세워 막는 것이 보통이라 판단하였지만, 강서 대묘는 보다 견고하게 막기 위해서 큰 돌을 겹쳐 쌓은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천장의 머릿돌에는 당시 사방 60cm 정도의 구멍이 나 있었는데, 도굴 과정에서 생긴 것이 분명하다.
현실의 내부는 점토가 깔린 상태로 부장 유물은 없었고, 나무와 칠파편이 산란했다. 바닥 가장자리에는 사방 벽에 붙여서 돌을 돌렸고, 중앙은 석재 시상을 두 개 놓았는데 다리가 있었다(圖59, 81). 그리고 조사 시에는 천장석 상부의 덮힌 흙에서 칠파편을 확인하였다. 칠파편은 오바와 오타가 모사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것인데 수습하여 경성박물관에 두었다. 세키노는 고분의 당초 상태를 생각하여 도굴자가 시상 위에 있던 목관을 도굴하여 부장품을 석실 밖으로 꺼내는 과정에서 버려진 것으로 생각하였다. 석실 내부는 강동의 한왕묘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판단하였다(關野1914a, 1914d).
석실 내부는 석회를 바르지 않고 천장은 평행고임으로 내어쌓기하고 모서리도 삼각고임돌로 모를 죽였다. 강서 대묘는 벽면에 석회를 바르지 않고 커다란 화강석 만으로 만들었는데 그 표면은 정으로 정성스럽게 쪼아 평평하게 만들었다(圖62, 64, 65). 세키노는 일본에서도 구하기 힘든 양질의 석재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평평하게 만든 석면 위에 곧바로 벽화를 그린 것이다. 그것은 석회를 바르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박락의 위험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돌 틈 사이로 오랜 기간 물이 침투하여 벽면을 타고 내리기 때문에 화면이 더러워진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었다(圖62, 64).
벽화 그림에서 현실 남면의 입구 주연(周緣)에는 인동당초문(忍冬唐草文)을, 그 좌우에는 주작(朱雀, 서로 마주보는 鳳凰)을, 동벽(東壁)에는 청룡(靑龍), 서벽(西壁)에는 백호(白虎), 북벽에는 현무(玄武)를 그렸다. 천장의 고임돌 측면에는 초화(草花), 천인(天人) 등 여러 종류의 그림을 그렸다. 첫 번째 내어쌓기 면에는 인동당초문(忍冬唐草文)이 그려졌는데 그 기법을 법륭사 몽전관음(夢殿觀音)의 광배와 닮았다 하였다. 두 번째 고임돌에는 천인과 동물들이 그려져 있는데 세키노는 이를 십이지신(十二支神)과 관련이 있다 판단하였다. 세 번째 내어쌓기 면의 아래 턱 부분에는 연화와 봉황을 그리고, 그 측면에는 서로 마주 보는 기린을 그렸다. 네 번째 고임돌의 아래 부분에는 연화(蓮花)와 당초(唐草)를, 측면(側面)에는 봉황(鳳凰) 두 마리를 마주 보게 그렸다. 천장의 마감석에는 용을 그렸는데 조사 당시 이미 심하게 박락된 상태였다(關野1914a, 1914d)(圖61~70).
조사 성과를 총괄하면서 세키노는 강서 대묘에 출토 유물이 없는 이유를 『수서(隋書)』에 나오는 고구려의 장례 풍습을 들어 원래 고구려 무덤은 박장(薄葬)이라고 판단하였다(關野 1914a, 1914d). 그는 대묘에서 확인된 천장의 황룡이 중국 양(梁)의 숙시중신도비(肅侍中神道碑) 조각에서 보이는 문양과 동일하다 판단하고 봉황도 법륭사(法隆寺) 천개(天蓋)의 봉황 및 옥충주자(玉蟲廚子)의 그것과 닮았다고 보았다. 천인은 북위 때 만들어진 중국 낙양(洛陽) 용문석굴(龍門石窟) 조각에 보이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여겼다. 강서 대묘의 벽화는 연구를 거듭할수록 양과 북위, 일본 아스카 시대의 것과 가장 가깝다는 것이 세키노의 판단이었다.
고분의 연대에 대해서는 단정하지 않았지만 1350년(1912년 기준) 전으로 보아 한왕묘보다 150년 정도 늦는 것으로 보았다. 연대와 규모로 보아 대묘는 왕릉이 틀림없다 판단하여 국왕의 추호를 평원왕의 무덤으로 비정하였다. 고구려는 많은 경우 소재지의 이름에서 국왕의 추호를 따는데, 평원왕이란 아마도 평원에 묻었다는 의미에서 왔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대묘는 그러한 입지를 나타낸다 보았다. 평원왕은 수 초에 사망했는데 선왕인 양원왕이 고지나 남쪽을 의미하기 때문에 대묘의 입지와는 맞지 않다고 보아 평원왕 설을 고수하였다(關野1914a, 1914d).

『조선고적도보』에 보고된 강서 대묘 도면과 사진

圖58_강서 삼묘 전경 사진
圖59_강서 대묘의 내부 구조 실측도
圖60_조사 후의 강서 대묘(철책이 둘러쳐져 있음)
圖61_강서 대묘의 내부 투시도
圖62_남벽 동측의 주작(사진)
圖63_남벽 서측의 주작(사진)
圖64_동벽의 청룡(사진)
圖65_동벽의 청룡(모사도)
圖66_서벽의 백호(사진)
圖67_북벽의 현무(사진)
圖68_북벽의 현무(모사도)
圖69_북측 천장 평행모줄임부의 비천(모사도)
圖70_천장 모줄임부의 여러 그림(모사도) 1
圖70_천장 모줄임부의 여러 그림(모사도) 2
圖70_천장 모줄임부의 여러 그림(모사도) 3

세키노의 강서 대묘 조사 당시 현장 기록

圖71_강서 삼묘 현장 기록
圖72_강서 삼묘 현장 기록
圖73_강서 대묘 석실 실측도
圖74_강서 대묘 현장 기록
圖75_강서 대묘 벽화 스케치
圖76_강서 대묘 보존 방침 메모
圖77_강서 대묘 보존 방침 메모
圖78_강서 대묘 보존 방침 메모
圖79_강서 대묘 석비의 벽화(사진)

이와이의 강서 대묘 도면

圖80_강서 대묘의 분구 및 석실 측량도(이와이 작성)
圖81_석실 실측도

오바의 강서 대묘 벽화 모사도

圖82_동벽의 청룡
圖83_남벽의 주작
圖84_서벽의 백호
圖85_북벽의 현무
圖86_모줄임부 괴조
圖87_천장의 황룡
圖88_석비의 벽화
圖89_모줄임부의 보상화문
圖90_모줄임부의 초화문

현재의 강서 대묘(2006년 정인성 촬영)

圖91_강서 대묘 근경(남에서)
강서 대묘 위성사진
圖92_강서 대묘 입구(남에서)
圖93_강서 대묘(남동에서)
圖94_남벽 좌측의 주작
圖95_모줄임부의 벽화
圖96_천장의 벽화
圖97_청룡
圖98_강서 대묘 천장
圖99_강서 대묘의 모줄임부 벽화 1
圖100_강서 대묘의 모줄임부 벽화 2
圖101_출입구 바닥의 레일 흔적(일제강점기 설치) 1
圖102_출입구 바닥의 레일 흔적(일제강점기 설치) 2
圖102_출입구 바닥의 레일 흔적(일제강점기 설치) 2-1
(2) 강서 중묘
강서 대묘와 동시에 굴착한 중묘는 대묘와는 달리 연도부 만을 굴착하였다. 한왕묘와 강서 대묘의 경험을 통해서 고구려 봉토 석실분의 연도가 남으로 달린다는 것을 주지하고 굴착했을 가능성이 높다.주 003
각주 003)
이미 연도를 따라 여러 번 굴착되기 때문에 세키노도 굴착 후에 연도부를 되메우기한 흙만을 제거했을 가능성이 크다.
닫기
세키노의 야장을 보면 9월 24일에 중묘의 내부를 약측했는데 이는 대묘의 내부를 약측한 것보다 3일이나 빠르다. 상면을 제외한 연도부가 토사로 채워진 것으로 표현된 도면을 볼 때(圖116), 세키노가 현실 내부로 들어간 방법은 연도의 토사를 전부 제거하지 않은 상태에서 부분적으로 확보된 연도 공간을 따라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총독부 건축 기수인 이와이가 그린 도면에는 연도 공간이 확보되어 있기 때문에 조사 마무리 단계에는 연도의 토사를 전부 제거했을 가능성이 높다.
강서 중묘는 대묘보다 약간 작고 내부 천장 구조는 비교적 간단하다. 현실의 넓이는 동서가 3.3m, 남북이 3.4m이며 연도의 길이는 7.63m 정도이다. 현실벽은 사면을 모두 1장의 돌로 만들었는데 2번에 걸쳐 고임돌을 사용하여 평행내어쌓기를 하고 천장석을 덮어 마무리하였다. 이는 모서리를 삼각고임한 다음 천장석으로 마무리하는 대묘와 다른 점이다. 내어쌓기 고임돌과 천장석 사이에는 부분적으로 석회가 사용된 점도 대묘와는 다른 점이다. 현실 바닥의 시상은 1매석으로 만들었다. 현실 입구에는 원래 2장의 돌로된 문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파손되었다. 문의 전방 90cm 지점에도 큰 돌을 세워서 막은 흔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전방에도 문주석을 세우고 석비를 달아서 연도를 폐쇄할 수 있게 하였지만 모두가 파괴되어서 조사 당시에는 전모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강서 중묘의 현실 내에는 대묘와 마찬가지로 부장 유물이 없고 단지 목관파편과 칠파편만이 확인되었을 뿐이다(圖104~127).
현실 내부의 벽화는 강서 대묘와 유사한데, 세키노는 두 묘의 조성 연대는 비슷하지만 축조 기술면에서 대묘가 앞선다고 보았다(關野1914a, 1914e). 네 면의 벽에는 남쪽에 주작, 동쪽에 청룡, 서쪽에 백호, 북쪽에 현무를 그렸다. 첫 번째 고임돌과 두 번째 고임돌에는 당초문을 그렸는데, 세키노는 이것이 일본 법륭사 등에서 관찰되는 아스카 시대의 그것과 동일한 것이라 판단하였다. 천장 중앙의 마감석은 그 중앙에 연화를 그리고 그 주변에 일월의 공간을 각각 둥글게 만들어 삼족오와 두꺼비를 그려 넣었다. 세키노의 보고에 의하면 중묘의 벽화도 대묘와 마찬가지로 중국 회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이라 판단하였고, 강서 대묘 피장자인 왕의 비빈(妃嬪)이나 왕자의 무덤이라 하였다(關野1913b).
2006년에는 필자도 강서 중묘에 들어가서 그 내부 구조를 관찰할 수 있었다. 세키노의 관찰과 중복되는 부분을 빼고 그 특징을 이야기하면 우선 천장의 중앙에 연꽃이 그려져 있고 그 가운데 네모난 홈이 있다. 홈은 바깥보다 안쪽이 더 넓어 무엇인가를 끼워서 걸 수 있는 구조이지만 분명히는 알 수 없다(圖131, 132). 홈에는 부분적으로 석회가 묻어 있다. 천장은 대묘보다 낮으나 천장 중심에 그려진 연꽃과 천장 네 모서리를 잇는 선을 따라 홈이 파였는데 가장자리가 깊고 중앙으로 갈수록 얕아진다(圖131). 이는 천장을 높게 보이려는 고안이다. 현실 바닥은 상면을 가공한 큰 돌을 깔았는데, 시상은 남아있지 않다.
연도와 연결되는 현실의 바깥에는 1매석으로 가공한 문주석과 턱을 높인 문지방이 설치 되었다. 좌·우의 문주석에는 석비를 고정시키기 위해 설치한 장부 구멍이 관찰된다. 장부 구멍은 바깥에서 볼 때 오른쪽 것이 파손된 상태이다. 원래 쌍여닫이 문을 달기 위한 장치이지만 문 안쪽을 두꺼운 판석으로 폐쇄하고 그 모서리를 석회로 보강한 흔적이 남아 있다. 고분 축조 당시에는 쌍여닫이 문을 달려고 하였으나 장부 구멍이 파손되어 대형 판석으로 바꾸어 연도를 폐쇄했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고적도보』에 보고된 강서 중묘의 사진과 도면

圖103_조사 후 출입구가 복원된 강서 중묘
圖104_내부 실측 도면
圖105_강서 중묘의 청룡(사진)
圖106_남벽의 동쪽 주작(사진)
圖107_남벽의 서쪽 주작(모사도)
圖108_강서 중묘 서벽의 백호(모사도)
圖109_강서 중묘 현실 동북 모서리(사진)
圖110_현실 북벽 내어쌓기면의 인동당초(사진)
圖111_현실 북벽 내어쌓기면의 벽화(사진)
圖112_중묘 현실 내어쌓기면의 벽화(모사도) 1
圖113_중묘 현실 내어쌓기면의 벽화(모사도) 2
圖114_중묘 현실 내어쌓기면의 벽화(모사도) 3
圖115_현실의 천장

세키노의 강서 중묘 현장 기록

圖116_강서 중묘 측단면도(위)와 천장도(아래)
圖117_세키노의 현장 기록
圖118_강서 중묘 현실 측단면도
圖119_강서 중묘 현실 각 부분의 벽화

이와이의 강서 중묘 측량 도면

圖120_강서 중묘 분구 측량도
圖121_석실 내부 실측도

오바의 강서 중묘 벽화 모사도

圖122_강서 중묘의 청룡(모사도)
圖123_강서 중묘의 백호(모사도)
圖124_강서 중묘의 주작 1(모사도)
圖125_강서 중묘의 주작 2(모사도)
圖126_강서 중묘의 현무(모사도)
圖127_강서 중묘의 천장

현재의 강서 중묘(2006년 정인성 촬영)

圖128_서북쪽에서 본 강서 중묘
圖129_동북쪽에서 본 강서 중묘
圖130_남쪽에서 본 강서 중묘
圖131_강서 중묘의 천장
圖132_천장의 연화문
圖133_바닥에서 확인되는 레일 흔적 (일제강점기에 설치)
(3) 강서 소묘
강서 소묘는 방형 현실의 남쪽에 중앙 연도가 달린 단실묘인데 세키노의 기대와는 달리 부장 유물은 물론 벽화도 발견되지 않았다. 봉토는 대묘·중묘와 마찬가지로 기저부가 방대형이고 분정(墳頂)은 봉토의 약간 뒤쪽에 위치한다. 연도부 바닥에는 상면이 가공된 두꺼운 판석을 깔았고 양 벽은 세장 방형으로 가공된 석재를 눕혀서 쌓았다. 천장에는 아래 면이 고르게 가공된 두꺼운 판석을 덮어서 마무리하였다. 개별 석재의 가공은 대묘나 중묘에 비해 거친 편인데 축조 과정에서 생겨난 틈에는 석회를 먹였다. 연도의 양쪽 벽면보다 돌출되게 설치된 문주석은 연도가 설치된 쪽의 좌우 현실벽의 돌과 같은 몸이다. 둥근 장부 구멍이 같은 몸에 좌우로 설치된 문미석이 횡으로 길게 문주석 위에 걸쳐져 있다(圖135, 136, 138).
현실의 네 벽은 장방형으로 가공된 비교적 큰 석재로 축조했는데 사방의 벽 상면을 경사지게 하여 면적을 줄인 다음, 다시 평행고임돌로 내어쌓기를 세 번하고 그 위로 삼각고임돌을 한 단 얹은 다음 천장돌을 덮어 마무리하였다. 현실과 연도의 축조에는 석재 사이에 석회를 채워 넣었는데 이는 천장에서도 관찰된다. 석재의 가공 기술과 축조 방법은 대묘·중묘를 닮았으나 상대적으로 석재의 가공이 거칠고 소재의 규격성도 떨어진다. 연도에는 현실 연문 바깥에 폐쇄석을 설치한 흔적이 있었다. 연도의 바깥쪽에도 폐쇄 시설이 있었을 것이나 조사 당시에는 완전히 파괴된 상태였다.
강서 소묘는 조사 후에 대묘, 중묘와는 달리 봉토에 대한 측량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석실에 대한 실측 조사가 이루어졌으나 세키노의 야장에 그려진 약측도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조사가 끝난 후 대묘와 중묘에는 봉토의 남쪽을 크게 절개하고 입구에 출입시설을 달았지만 소묘에는 그렇게 하지않았다. 그러다 해방 후 출입시설을 마련하였다(圖140).
강서 대묘와 중묘는 오바 쓰네키치가 주도하여 70여일 간에 걸친 작업 끝에 현실 내부 각 화면 벽화의 모사를 작성하였다. 완성된 벽화 모사는 그 비용을 부담한 이왕가박물관에 제출하였으나, 1913년 거행된 도쿄제국대학 각 분과대학 졸업증서 수여식에 황족이 참석한다 하여 이중 일부를 도쿄제국대학이 대여해갔다. 1913년 7월 10일 황족이 참석한 자리에서 세키노가 고구려 고분에 대한 강연을 마치고, 다음날인 11일 오전에는 관련 인사들을 초대하여 관람하게 하였다.주 004
각주 004)
필자 미상, 1913. 8. 5, 「朝鮮江西古墳壁畵模寫御覽」, 『考古學雜誌』 3卷 第12號.
닫기
지금 도쿄제국대학에 소장된 벽화 모사도 이때 대여된 상태에서 이왕가박물관으로 돌려주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그것과는 성격이 다른 것인지 추후 보강 조사할 필요가 있다.

『조선고적도보』에 보고된 강서 소묘의 사진과 도면

圖134_조사 전 상태
圖135_석실 측단면도
圖136_석실 천장도

세키노의 강서 소묘 현장 기록

圖137_강서 소묘의 현장 조사 기록
圖138_세키노가 그린 소묘의 측단면도와 천장도

현재의 강서 소묘(2006년 촬영)

圖139_강서 중묘에서 바라본 소묘
圖140_강서 소묘 입구
圖141_동남쪽에서 본 소묘
圖142_서남쪽에서 본 소묘
圖143_강서 소묘의 천장
圖144_서벽 축조 상태
圖145_연도 동벽 축조 상태
圖146_문미석의 장부 구멍
圖147_연도 벽석 세부
강서 삼묘는 조사 후 제한적인 내부 공개를 목적으로 복원되었다. 우선 벽화가 없는 소묘는 봉토를 원래대로 복구하였고 대묘와 중묘는 봉토의 전방 절개구를 그대로 두고 연도부에 출입구 시설을 한 다음 열쇠를 달아 관헌이 맡아서 관리하게 하였다(圖103). 복원과 관련된 기본 안을 세운 것은 세키노이지만 현장에서 공사를 담당한 것은 세키노의 고적 조사를 수행하던 조선총독부 토목국 영선과의 이와이(岩井) 기수였다. 물론 세키노의 추천에 의한 것이다. 도쿄제국대학 공학부 건축학과 출신인 이와이는 대총과 중총의 연도 입구에 철제문을 달고 현실에서 가까운 곳에는 목제 문을 만드는 공사를 시행하였다. 고분의 바깥에는 외부와 단절시키는 철조망을 쳐서 관리하였다(圖103). 이 때 만들어진 설계도의 청사진이 현재 도쿄대학박물관에 보관된 ‘세키노 컬렉션’에 포함되어 있다.
2006년 필자도 현지를 방문해서 이 고분을 관찰했는데 연도의 바닥에는 이 때 만들어진 문을 개폐하기 위한 바닥 레일이 호선(弧線)을 그리면서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圖102, 133). 물론 지금은 연도를 바깥쪽으로 더 달아내고, 그 바깥에 새로이 여러 겹의 밀폐 시설을 설치했기 때문에 당시의 레일은 사용되지 않는다.

  • 각주 001)
    출토된 두개골은 군수가 나쁜 일이 생길 것을 걱정하여 이를 땅에 묻어버렸다고 하는데, 이를 평양교회의 학교 생도가 다시 가져가 세키노가 조사할 당시에는 이것이 학교에 보관되어 있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강서 대묘의 측량도에는 봉토 외면을 따라 평판을 옮겨가며 삼각 측량한 흔적이 붉은 색으로 남아있다. 봉토의 높낮이도 적절하게 표현되었는데 필적으로 보아 총독부 영선과의 이와이가 작성한 것이다(圖80 참조).
     바로가기
  • 각주 003)
    이미 연도를 따라 여러 번 굴착되기 때문에 세키노도 굴착 후에 연도부를 되메우기한 흙만을 제거했을 가능성이 크다.
     바로가기
  • 각주 004)
    필자 미상, 1913. 8. 5, 「朝鮮江西古墳壁畵模寫御覽」, 『考古學雜誌』 3卷 第12號.
     바로가기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강서 삼묘의 조사 자료번호 : ku.d_0003_0010_005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