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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노 다다스 (關野貞, 1867~1935)

세키노는 1867년 일본 동북지방인 니가타(新潟)현에서 태어났다. 1895년에 도쿄대학공과대학 조가학과(造家學科)주 001
각주 001)
지금의 도쿄대학 공과대 건축학연구실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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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졸업하고 나라(柰良)현에서 고건축 등을 조사하는 기사(技師)를 거쳐 1901년 도쿄대학 공과대학 조교수가 되었다. 1902년에는 대학의 명령으로 한반도의 고건축과 각종 유적을 조사하였다. 이후 강점 초기 한반도에서 이루어진 고적 조사 사업과 조사단 인선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세키노는 한국의 고고학은 물론 건축사나 미술사와 관련된 연구사(硏究史)를 정리할때면 언제나 첫머리에 오는 인물로, 그가 1902년 조사를 기초로 1904년 제출한 『한국건축조사보고(韓國建築調査報告)』가 위에서 언급한 분야를 망라한 최초의 학술 보고이기 때문이다. 세키노는 1909년부터 매년 한반도에 대한 고적 조사를 실시하였으며, 이는 한일합방이 되고 난 후까지 이어졌다. 1916년 조선총독부령의「고적 및 유적보존규칙」이 시행되면서 고적조사위원회의 위원으로 촉탁되어 한군현(漢郡縣)과 고구려(高句麗)와 관련된 조사를 총괄 담당하였다. 1918~1920년 서양 유학 이후에는 직접 발굴 조사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해마다 한국으로 건너와 조사를 계속하였다. 또한 초창기 그가 조직한 조사단에 속했던 연구자들이 1930년대까지 각종 고적 조사 사업을 독점한 사실은 그가 강점기의 고적 조사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이러한 조사 성과를 수록한 『조선고적도보』를 제작하여 유학 중 프랑스에서 쥴리앙상을 수상하였고, 『조선예술의 연구(朝鮮藝術之硏究)』, 『조선미술사(朝鮮美術史)』 등의 조사 보고서와 저서를 집필하였다. 특히 낙랑군과 고구려 유적의 조사·연구에도 공을 들여 『낙랑군시대의 유적』의 도면·도판·본문, 『고구려시대의 유적』의 도면·도판을 간행하였다.
세키노가 남긴 방대한 양의 논문과 저서를 살펴보면, 당시의 다른 연구자들에 비해 한국 문화에 대한 편견이 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국 미술(예술)이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 성립한 아류라고 판단한 점과 통일신라시대에 절정을 이루고 점차 퇴보하여 조선 시대에는 볼 것이 없었다고 결론 내린 점 등은 세키노 역시 문화 상대주의 입장에서 한국 문화를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이 부족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일본 문화의 이해라는 큰 명제에서 한반도를 단순히 중국 문화를 일본에 전해주는 다리 역할 정도로 판단한 그의 한국관은 식민지 전 기간은 물론이고, 해방 후에도 일본 연구자들의 한국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 각주 001)
    지금의 도쿄대학 공과대 건축학연구실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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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노 다다스 (關野貞, 1867~1935) 자료번호 : ku.d_0003_0010_002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