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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스트여닫기 일제강점기 고구려 유적 조사·연구 재검토 (1) 정인성

    • 일제강점기 고구려 유적 조사의 개요

    • 리스트여닫기 세키노 다다스(關野貞) 조사단 표 1에서 보는 것처럼 중요 고구려 고분의 발굴 조사와 보고는 대부분 세키노가 독점적으로 실시하였다. 고구려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초기에 조선에서 이루어진 거의 모든 고적 조사의 중심에는 세키노와 그의 조수들이 있었다. 이를 본고에는 ‘세키노 조사단’이라 하였는데, 이해를 돕기 위해 조사단의 중심 인물인 세키노 다다스와 야쓰이 세이이치(谷井濟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번호유적 이름조사 일시유적의 소재조사자참고 문헌1대성산성 고분(사동고분)1910. 10平安南道 大同郡 林原面谷井(關野, 栗山)關野 外 19112용강 고분1910. 10平安南道 江洞郡 용강關野, 谷井關野 1914a, 關野 야장자료3한왕묘1911. 10平安南道 江東郡 馬山面關野, 谷井, 栗山關野 外 1914a·1927, 谷井 1911b4간성리1912. 9. 25평안남도 강서군 학림리關野, 谷井關野 19145강서 삼묘1912. 9平安南道 江西郡 江西面關野, 谷井, 太田, 小場太田, 小場·太田 1913, 關野 1913a·1913b·1913c·1914a·19l4e·1915b, 關野 外 1914b, 谷井 1912b6매산리 사신총(狩塚)1912.101913. 9平安南道 南浦府 大上面岩井, 太田, 關野關野 1913b·1914a·19l4e·19l4g7매산리 중총1913. 9平安南道 南浦府 大上面野, 谷井, 栗山, 今西關野 1914a·1914e·1914g, 關野 外 19278매산리 대연화총1913. 9平安南道 龍岡郡野, 谷井, 栗山, 今西, 太田, 小場關野 1914a·1914g·1915a, 關野 外 19279매산리 남총1913. 9평안남도 용강군關野, 谷井, 栗山關野 1914a·1914g·1915a, 關野 外 192710매산리 북총1913. 9평안남도 용강군關野, 谷井, 栗山關野 1914a·1914g·1915a, 關野 外 192711화상리 성총(新北面)1913. 9. 24평안남도 용강군關野, 栗山, 今西, 太田, 小場關野 1914a·1914g·1915a, 關野 外 192712화상리 대연화총(감신총)1913. 9. 25평안남도 용강군關野, 栗山, 今西, 太田, 小場關野 1914a·1914g·1915a, 關野 外192713안성리 대총(용강대총)1913. 9평안남도 용강군關野, 谷井, 栗山, 今西, 小場關野 1914a·1914g·1915a·1915b, 關野 外 1927, 谷井 1914c14쌍영총1913. 9평안남도 용강군關野, 谷井, 栗山, 今西關野 1914a·1914g·1915a·1915b, 關野 外 1927, 谷井 1914c15장군총1913. 10(중국) 집안關野, 谷井, 栗山, 今西關野 1914f·1914g16천추총1913. 10(중국) 집안關野, 谷井, 栗山, 今西關野 1914f·1914g17태왕릉1913. 10(중국) 집안關野, 谷井, 栗山, 今西關野 1914f·1914g18절 천정총1913. 10(중국) 집안關野, 谷井, 栗山, 今西關野 1914f19사아 천정총1913. 10(중국) 집안關野, 谷井, 栗山, 今西關野 1914f20오회분 제4총1913. 10(중국) 집안關野, 谷井, 栗山, 今西關野 1914f21삼실총1913. 10(중국) 집안野守, 谷井, 栗山, 今西關野 1914e·1914f22연화총1913. 10(중국) 집안野守, 谷井, 栗山, 今西關野 1914e·1914f23귀갑총1913. 10(중국) 집안野守, 谷井, 栗山, 今西關野 1914e·1914f24미인총1913. 10(중국) 집안野守, 谷井, 栗山, 今西關野 1914e25문악리 고분0平安北道 江界郡 文玉面野守, 谷井, 栗山, 今西關野 1914f26노산리 개총, 내리 고분, 토포리 고분, 호남리 사신총, 금사총 등1916. 10. 11平安南道 大同郡 柴足面野守關野 1917, 關野 外 193027황산 남록 삼실총, 황산 남록 이실총1916. 10. 11平安南道 龍岡郡 海雲面野守關野 1917, 關野 外 193028검산동 고분1916. 11平安南道 順川郡 仙沼面野守關野 1917, 關野 外 193029용강 두특산 고구려 고분1916. 8平安南道 龍岡郡黒板黒板 191730매산리 고분군1916. 8평안남도 용강군黒板黒板 191731만달산 고분 1, 2, 3호1917. 3平安南道 江東郡 晚達面谷井谷井 191732대고력 묘자 이실총1917. 7(중국) 집안關野關野 外 192933무개총1917. 7(중국) 집안關野關野 外 192934고총1917. 7(중국) 집안關野關野 外 192935석곽 노출총1917. 7(중국) 집안關野關野 外 192936대총1917. 7(중국) 집안關野關野 外 192937삼실총1917. 7(중국) 집안關野關野 外 192938환도성1917. 7(중국) 집안關野關野 外 192939평양 역전 고분1932平壤府榧本, 野守榧本 外 193340평양성 나성, 평양 만수대1935平壤府小泉小泉 1938b·198641광개토대왕비, 태왕릉, 장군총, 무용총, 각저총, 삼실총, 천추총, 모두루총 등1935(중국) 집안池内, 浜田 , 梅原通溝 1938·194042호남리 고분 1, 3호1936. 10平安南道 大同郡 柴足面小場, 有光, 澤小場 外 193743내리 고분군 1, 3호1936. 10평안남도 대동군 자족면小場, 有光, 澤小場 外 193744고산리 고분군1936. 10平安南道 大同郡 林原面小場, 有光, 澤小場 外 193745상리 고분군1936평안남도 대동군 임원면小場, 有光小場 外 193746산성자 주변 고분군1936(中國) 輯安梅原, 水野, 池內通溝 1938·194047고산리 고분 2기, 대보면고분 2기1937. 9平安南道 大同郡, 林原面·大宝面小場, 澤, 田窪小場 193848만달 산록 고분 18기1937. 10平安南道 江東 晚達面野守, 榧本, 田窪, 澤 1938野守 外

    • 리스트여닫기 1910년도의 조사

    • 리스트여닫기 1911년도의 조사

    • 리스트여닫기 1912년도의 조사

    • 리스트여닫기 1913년도의 조사

    • 마무리

    • 참고문헌

  • 리스트여닫기 일제강점기 고구려 유적 조사·연구 재검토 (2) 정인성

    • 머리말

    • 리스트여닫기 도리이 류조의 조사

    • 리스트여닫기 세키노 다다시의 1913년 조사 한편 당시도리이의 경쟁자이면서 「조선고적조사사업(朝鮮古蹟調査事業)」에서 일찌감치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도쿄대학 공학부 건축학연구실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도 1913년 9월 12일부터 12월까지 집안의 고구려 유적을 조사한다. 세키노는 도리이와는 달리 처음부터 조선고적조사의 일환으로 집안을 방문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촉탁이라는 신분으로 현지조사를 실시하였으므로 관련 비용은 조선총독부에서 부담했을 것이다. 조사단은 세키노 다다시를 단장으로 하고 야쓰이 세이이치, 이마니시 류, 구리야마 등이 보조하였는데, 사진촬영은 도리이의 조수이기도 했던 사와 슌이치가 담당했다. 즉 이 때의 조사에서 촬영되어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Ⅰ에 실린 사진은 그 대부분을 사와가 촬영한 것으로 이해해도 된다. 이마니시 류는 도쿄대학 문학부 사학과 출신이고 구리야마는 세키노와 마찬가지로 도쿄대학 공학부 출신의 제자이기 때문에 세키노가 꾸린 조사단은 그야말로 도쿄대학 조사단이라 할 수 있다. 1913년에 세키노는 바쁜 일정을 보내는데, 지난 글(정인성, 2008)에서 밝힌 것처럼 진남포에서 여러 고구려 고분을 조사한 다음 용강에서 쌍영총과 용강대총 등을 조사하고 육로로 북상하여 안주, 희천, 강계를 지나 압록강을 건너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에서는 11일간에 걸쳐 각종 유적을 조사하고 다시 압록강을 건너 아득령, 황초령을 지나, 함흥까지 가서 조사를 수행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조사과정에서 그는 그가 지나온 길이 고구려 시기에 집안에서 평양으로 혹은 함흥 방면으로 통하던 고대 교통로라고 판단했다. 즉 이는 관구검이 침입했을 때의 추격로로 판단하였는데, 세키노가 조사 전에 이미 관련 문헌을 꼼꼼히 파악하고 조사에 임했음을 확인시켜 준다. 즉 세키노의 현지답사라는 것은 관련되는 문헌기사를 현지답사를 통해 확인하는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13년의 집안 답사에서 세키노의 구체적인 동선은 현재 도쿄대학에 남아 있는 ‘세키노 컬렉션’ 세키노 다다시가 평생의 조사과정에서 남긴 방대한 양의 조사 기록으로 야장, 도면, 탁본, 사진류가 포함된다. 현재 도쿄대학의 총합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나 공과대학 건축학연구실에서 관리한다. 의 사진목록집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목록집은 세키노 다다시가 조선고적조사와 관련된 조사에서 촬영한 유리건판과 함께 총독부 박물관에 제출된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의 사진 목록은 대개 사진이 촬영되는 순서대로 작성된다는 사실(國立中央博物館, 1997)을 감안하면 집안에 도착한 세키노 조사단이 가장 먼저 조사한 것은 국내성이다. 그런 다음 산성자 산성으로 이동하여 조사하고, 그 주변에서 절천정총과 석총(아마도 형제총)을 현지조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다음 마선구로 다시 내려와 천추총과 오회분을 순서대로 사진 촬영하였다. 오회분의 개별 고분에 대한 조사를 마친 다음 태왕릉과 호태왕비를 차례대로 조사하고 광개토대왕릉은 가장 마지막에 조사하였다. 집안의 조사를 마친 세키노는 이후 아득령과 장진군, 황초령의 진흥왕순수비비각, 천불산 개심사로 이동하면서 조사를 계속하였는데(세키노 컬렉션 사진목록 참조), 이는 세키노가 강연에서 밝힌 동선과 대체로 일치한다. 여러 고분들을 제쳐두고 국내성과 산성자 산성을 가장 먼저 조사한 것을 보면 1913년의 조사에서 세키노가 가장 주목한 것은 고분이 아니라 국내성과 산성자 산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국내성과 환도성의 위치 비정 문제가 일본 학계의 중요한 이슈였고, 라이벌 관계였던 도리이가 세키노보다 한 발 앞서 집안을 답사하고 환도성과 국내성의 위치 비정 문제를 선점당한 것에 대한 반응으로 이해된다. 세키노는 답사 전에 일본고고학회에서 강연했을 때 국내성의 위치를 통구성 또는 산성자로 비정했지만 환도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 실지를 답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뭐라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조사 전인 같은 해(1913년) 3월 27일에 동양협회(東洋協會)에서 ‘만주 집안현의 고구려 시대 유적’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을 때 환도성의 위치를 통구에서 약 17~18리 하류에 있는 유수림자구 근처라고 판단했다. 『고고학잡지』에 수록된 답사보고를 살피면 세키노는 우선 압록강을 중심으로 집안분지의 자연지리적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 다음 통구 주위를 견고한 석성(石城)으로 구축했음을 설명하고 산성자(山城子)에는 자연지형을 절묘하게 이용한 산성자 산성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산성에 대해서 개괄한 세키노는 집안과 마선구, 산성자를 포함하여 집안에 1만기 이상의 고분이 있으며 이들 모두를 고구려 고분으로 판단하고 있다(關野, 1914c·1914d)圖13_소판석령을 오른 세키노 일행 (『조선고적도보』Ⅰ에서 전재) 세키노가 이때 집안의 석총들을 고구려 고분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은 학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1909년에 평양에서 석암리 벽돌무덤을 조사하고 그 전실묘를 고구려무덤으로 발표하였다가 도리이 류조의 비판을 받은바 있기 때문이다(정인성, 2006). 즉 일정 기간 세키노는 이미 도리이가 요동지역에서 고구려와 한족(漢族)의 고분을 분명히 구분하고 그 내용을 잡지에 공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평양의 벽돌무덤을 고구려의 것으로 판단하였다. 도리이가 적절한 비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학회장에서는 주류학자 세키노와 상반된 주장을 하는 도리이에 대해 심한 비난이 쏟아졌고, 그후 조선고적조사에서 그 역할이 크게 제한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도리이는 후일 세키노의 그러한 해석이 청일전쟁과 관련된 정치적인 해석이라고 의심했다(鳥居, 1953). 즉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중국문화와 구별되는 고구려 유적을 발견하는 것이 유리했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1913년에 이루어진 집안 조사는 세키노가 고구려와 낙랑고분의 차이를 현지 조사경험을 바탕으로 분명히 인식하는 계기가 된 점에서 중요하다. 또한 광개토대왕비를 관찰하고 동대자(東臺子)에서 건축물의 초석군과 많은 기와를 발견하는데, 이를 통해 통구(집안)가 고구려 시대에 오랫동안 국도(國都)로 기능하였음을 확신했다. 나아가 그 국도가 국내성인지 환도성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 있었는지에 의문을 가지면서 답사를 진행하였다. 세키노는 답사 결과 통구는 고구려의 국내성이고 산성자 산성은 고구려대의 위나엄성이라고 결론내리는데, 당시 참고한 문헌은 도리이의 그것보다 폭 넓어서 『고려사』, 『동국여지승람』, 『삼국사략』, 『동사강목』, 『문헌비고』, 『대한강역고(大韓疆域考)』 등을 아우른다. 세키노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에 근무하던 오다 쇼고의 도움으로 이러한 서적을 접할 수 있었다. 특히 정약용이 『대한강역고』에서 국내성을 초산 부근의 북쪽 강을 건넌 땅이라고 한 점을 주목했다. 그리고 『동삼성여지도설(東三省與地圖說)』에 처음으로 광개토대왕비가 소개되면서 “그 비가 출토된 통구의 땅은 개국내성(蓋國內城)의 근교가 된다”고 적어두고 있음을 참고했는데, 이는 시라토리와 같은 의견이다. 한편 환도성의 위치 비정을 둘러싸고 1906년에 발견된 관구검 기공비에 세키노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당시 관구검 기공비의 탁본을 일본군인 호리미[堀米]가 오가와[小川柳波]에게 건넸는데, 이를 확인한 오가와는 비석이 발견된 판석령을 환도성이라 했다. 이미 살핀 것처럼 도리이는 처음 통구가 국내성인 위나엄성이고 판석령이 환도성이라고 주장했다. 즉 국내성과 위나엄성을 동일시한 것이다. 그 뒤 1912년의 현지조사 후에 생각을 바꾸어 『동사강목』이나 『문헌비고』를 참고로 국내성을 환인의 오녀산성이라 하고 환도산성을 산성자라고 했다. 당시 문헌학의 마쓰이와 같은 연구자는 여전히 환도성을 판석령에 비정하고 『요사(遼史)』를 참고하여 국내성을 압록강의 상류인 임강현으로 비정하기도 하였다. 세키노는 정약용의 국내성 비정이 탁견이라 평가하면서 광개토대왕릉비의 발견으로 그 물적 증거가 확보되었다고 보았다. 그런데 판석령에서 관구검 비석이 발견되면서 다수의 연구자들이 이를 환도성으로 비정하는 것은 성급한 결론이라 하였다. 나아가 판석령 답사에서 산성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대안으로 산성자 산성을 지목한 도리이의 설을 평가하면서도 국내성 비정 문제에서는 대립각을 분명히 했다. 결과적으로 세키노는 국내성을 지금의 통구(집안)로 판단하고 위나엄성을 산성자로 비정했다. 그 근거로는 『삼국사기』유리왕조의 기사에서 말하는 국내, 위나엄성의 설명이 통구, 즉 집안의 그것과 유사함을 들었다. 또한 국내성은 발해의 신주(神州), 요대의 녹주(神州)에 해당한다고 확신했다. 집안 답사과정에서 이 문제를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하여 야쓰이와 이마니시에게 조사를 의뢰하였다. 두 사람이 마선구를 2리 정도 올라갔더니 길이 두 개로 갈라졌는데, 오른쪽을 택해 올라가니 다시 길이 나누어지는데 오른쪽을 선택하면 통화로 가고 왼쪽을 선택하면 대판석령을 지나 환인으로 통한다. 그런데 처음부터 왼쪽 계곡을 거슬러 올랐더니 소판석령이 나왔는데 관구검 비편이 나온 곳이 그곳, 즉 소판석령임을 확인했다. 당시 세키노도 도리이와 마찬가지로 비석의 출토 경위에 대해 현지에서 청취한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두었는데, 오광국의 증언을 그대로 옮겨 적고 있다. 처음 비석이 출토된 것은 이 소판석령의 고개 정상부 오른쪽에서 도로공사를 하다가 한 인부가 발견하고 이를 집안현 지사인 오광국에게 건네었는데 그는 이를 관구검의 기공비라고 판단하였다. 즉시 인부 10여 인을 사역시켜 비편이 발견된 지점의 돌들을 전부 조사시켜 다른 파편도 획득했다. 야쓰이와 이마니시의 현지답사 결과 그곳이 통구의 서북쪽 6리 정도에 해당하며 조망이 좋아 멀리 조선의 낭림산이 보이는 것을 확인했지만 주위에 성으로 인정할 만한 평지나 유적의 흔적을 확인할 수 없었다. 나중에 이 지역에 대한 상세한 지도를 손에 넣어 이를 확인해 보았더니 그곳이 통구에서 환인으로 가는 교통로로는 적합하지만 도저히 산성이 축조될 지형이 아니라고 보았는데, 앞에서 살핀 것처럼 그러한 결론에 이르는 과정이 도리이와 너무도 흡사하다. 이곳을 환도라고 비정하는 것은 직접 현지를 답사하지 않았던 결과라 비판하고 이곳을 환도라 추정하고 국내성을 임강현 부근으로 판단한 설도 성립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주목되는 것은 답사 후 환도를 산성자로 비정하는 도리이의 주장마저 비판한 사실이다. 그것은 산성자가 험하여 성내에 왕궁 등을 만들 공간이 없으며 겨우 창고지 정도가 인정된다고 하여 도저히 성내의 지형이 도성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보았다. 즉 도리이는 관구검 기공비 잔편이 출토된 소판석령을 환도산이라 하고 산성자 산성을 환도산이라고 했으나 세키노는 그 거리가 4리에 이르고 지세가 연속되는 산맥이 아니기 때문에 『위지(魏誌)』의 환도기사(丸都記事)인 ‘도어환도지하(都於丸都之下)’와 관구검의 기사를 참조하여 환도성은 환도산의 허리에 있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아 산성자성을 환도성으로 보는 설에 분명히 반대한 것이다. 세키노는 1913년의 조사범위가 통구지역에 한정되었기 때문에 환도(丸都)를 확인할 수 없었다고 했는데, 통구가 국내성이라면 『요사』 등의 기록으로 보건대 환도는 압록강의 하류 20리 지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다. 소판석령이 환도성이 아니라면 관구검 기사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관구검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왕이 환도성을 도망쳐 국내성에 이르러 강을 건너 조선의 강계로 들어가 도망하므로 이를 쫓아 함흥(咸興), 종성(鏡城) 부근까지 이르렀는데, 관구검은 귀로에 다시 환도를 통과하지 않고 우회하여 소판석령을 지나면서 그곳에 기공비만을 세워두고 곧장 환인으로 빠져 나간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세키노는 집안(통구)성이 국내성이지만 산성자성은 위나엄성이라고 판단하고 환도성은 『도리기(道里記)』나 『요사』의 기록을 근거로 집안에서 압록강을 따라 더 하류에 있는 유수림자 부근일 것으로 예상했다. 도리이와 세키노를 중심으로 문헌과 현지답사를 통한 국내성과 위나엄성, 그리고 환도성의 비정 문제는 그 후에도 한동안 논란이 되었다. 1914년에 시라토리는 환도성이 산성자에 있다는 도리이의 손을 들어 주었으나 국내성이 오녀산성이라는 설에는 반대하였다. 그 후 1935년에 이케우치 히로시는 집안을 답사하고 시라토리의 주장에 동조했다. 광복 후 중국 학자들은 집안의 성을 유리왕이 천도한 국내성이라 인정하고, 천도 동시에 쌓았다는 위나엄성은 본래 산성자 산성인데, 산상왕 재위시에 산성자 산성을 석성으로 고쳐 쌓은 다음 이를 환도성이라 부르고, 산상왕 재위 53년에 왕궁을 산성으로 옮겼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이를 반대하는 연구자도 있어 도리이와 세키노가 촉발시킨 국내성과 환도성의 위치 비정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계속되는 연구과제로 남아 있다(田村, 2001)

    • 리스트여닫기 세키노 다다시의 1917년 조사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는 1917년 여름에 압록강 유역을 다시 조사한다. 1913년도에 과제로 남겼던 환도성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때문에 집안의 고분에 대한 재조사를 포기하고 압록강을 따라 양쪽의 대안을 오가면서 위원군 밀산면, 위원군 위원하류역 고분, 운산군 동신면 용호동 고분, 집안 하류방면에 있는 유수림자 부근의 대고력자 고분, 이실총, 무개총 등을 조사하였다. 이때의 조사와 관련하여 1918년도에 간단한 행정보고가 이루어졌고 세키노는 경성에서 행정보고를 한 것으로 확인된다. 1920년에 『대정6년도 고적조사보고(大正6年度古蹟調査報告)』로 공간되었으나 그 내용은 1918년에 이루어진 행정보고를 엮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의 조사 기록은 1929년이 되어서야 『고구려시대(高句麗時代)의 유적(遺蹟)』으로 공간되었으나 아쉽게도 조사 내용에 대한 원고없이 도면과 도판만으로 이루어진 보고였다. 만년에 세키노는 이들 유구(遺構)의 원고를 쓰려고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세키노는 1917년 6월 11일에 기차로 경성을 출발하여 12일에 평안북도 운산군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야쓰이와 합류하여 동신면 용호동 고분군을 발굴조사하고 위원면 만호동 고분군 등을 조사한 다음 압록강을 건너 고력묘자, 고려묘자, 유수림자 고분군 등을 조사하였다. 그가 조사를 마치고 경성으로 돌아온 것은 7월 15일이다. 1920년의 보고에서는 동신면 용호동의 발굴내용을 가장 먼저 기록하고 있다. 조사 일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나 이와 관련된 정보는 ‘세키노 컬렉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세키노 컬렉션에는 당시의 조사일지 필체로 보아 세키노가 작성한 것은 아니고 야쓰이의 필체와도 다르기 때문에 구리야마가 작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가 남아있는데, 용호동 고분을 조사한 것은 정확히 1917년 6월 18일이다.圖50_세키노일행의 압록강변 조사 일지 일부 [1]세키노 컬렉션(도쿄대학 건축학연구실 소장)圖50_세키노일행의 압록강변 조사 일지 일부 [2]세키노 컬렉션(도쿄대학 건축학연구실 소장)圖50_세키노일행의 압록강변 조사 일지 일부 [3]세키노 컬렉션(도쿄대학 건축학연구실 소장)圖50_세키노일행의 압록강변 조사 일지 일부 [4]세키노 컬렉션(도쿄대학 건축학연구실 소장)圖50_세키노일행의 압록강변 조사 일지 일부 [5]세키노 컬렉션(도쿄대학 건축학연구실 소장)圖50_세키노일행의 압록강변 조사 일지 일부 [6]세키노 컬렉션(도쿄대학 건축학연구실 소장)

    • 그 후의 집안 조사

    • 참고문헌

  • 리스트여닫기 일제강점기 고구려 유적 조사·연구 재검토 (3) 정인성

    • 1916년도 이후의 평양지역 고구려 유적 조사 개요

    • 리스트여닫기 조사단원의 소개 1916년 이후에 이루어진 고구려 유적의 발굴조사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세키노조사단’이 주도한다. 조사와 관련된 자료를 살피면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를 단장으로 야쓰이 세이치, 오바 쓰네키치, 노모리 겐, 사와 준이치 등이 조사단의 중요 일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세키노와 야쓰이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인물정보를 확인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오가와 게이키치, 노모리겐을 먼저 살피고, 아울러 1930년대에 만달산록에서 고구려 고분 조사에 참가한 것으로 확인되는 가야모토 가메지로[榧本龜次郞]에 대해서도 간단히 살피고자 한다.

    • 리스트여닫기 1916년의 고구려 유적 조사 1916년도에 이루어진 대성산록과 그 주변의 고구려 유적 발굴조사는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세키노조사단’이 주도하였다. 이전의 세키노조사단에는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와 야쓰이 세이치[谷井濟一], 구리야마 준이치[栗山俊一]가 중심적으로 활동하였지만 1916년부터는 새롭게 오바 쓰네키치[小場恒吉], 노모리 겐[野守建], 오가와 게이키치[小川敬吉]가 가세하여 조사 진용이 더욱 짜임새를 갖추게 되었다. 1916년에 조사된 고구려유적에 대해서는 정식보고서가 발간되지 않았다. 『대정오년도고적조사보고(大正五年度古蹟調査報告)』와 『고구려시대의 유적(高句麗時代之遺蹟)』이 참고가 되지만 전자는 총독부에 제출된 조사복명서를 묶은 것이고, 후자는 한참 늦은 1929년에 본문 없이 도판만으로 발행된 것이어서 상세한 조사내용을 파악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조사내용을 좀 더 선명하게 알아내기 위해서는 조사 참가자가 조사 후에 일본에서 발표한 논문과 조사 당시의 원본 일지, 도면, 사진 등을 같이 종합해서 검토해야 한다. 조사 당시의 발굴일지는 도쿄대학교 건축학연구실에 보관된 ‘세키노컬렉션’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미 이 시리즈물의 제1집에서 공동연구자였던 사오토메 마사히로[早乙女雅博]가 부분적으로 활자화하여 보고한 바 있다(早乙女雅博, 2008). 다이쇼[大正] 5년에 세키노가 제출한 복명서를 살피면 세키노조사단은 먼저 대성산성(大成山城)에 올라 성벽과 성 내부를 답사한 다음 주변의 고구려 고분을 차례로 조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 대성산의 남록에 위치하는 안학궁지의 주변으로 모두 천 수백 기의 고구려 고분이 산재하는 사실을 확인했는데, 석총과 토총이 혼재하는 상황이라고 기술하였다. 훼손된 것이 많고 봉토를 남기는 경우에는 이미 도굴된 것이 대부분이라고 하였다. 장수원시장의 남쪽에 여러 기의 고분이 있어 일부를 조사한 다음 벽화가 발견된 고분을 노산리 개마총이라고 이름 붙였다. 또 장수원의 동북으로 약간 떨어진 대지 위에 약 20기의 고분이 확인되었는데 그중 조사된 고분을 내리 서북총이라 하였다. 대성산성의 동쪽으로도 고구려 고분군이 연속하는데 그중에서 4기를 조사하였다. 이를 각각 토포리 대총, 토포리 남총, 호남리 사신총, 호남리 금사총이라고 이름 붙였다.

    • 리스트여닫기 1917년의 고구려 유적 조사

    • 맺음말

    • 부록 1 참고문헌

    • 부록 1916~1917년도 고적 조사와 관련된 『關野貞日記』 번역(동경대학 건축학 연구실 소장)

  • 리스트여닫기 일제강점기 고구려 유적 조사·연구 재검토 (4) 정인성

    • ‘조선고적연구회’의 조사 개요

    • 리스트여닫기 조사단원 소개 1931년에 조선고적연구회가 설립된 이래로 고구려 유적은 위의 표에서 보는 것처럼 우메하라 스에지의 간헐적인 참여가 있었지만 대개 오바 쓰네키치, 노모리 켄, 고이즈미 아키오, 아리미쓰 교이치, 다쿠보 신고, 요네다 기요지, 사와 슌이치 등이 주도한다. 조선고적조사의 현장에서 일찍부터 사진촬영을 전담하던 사와를 제외하면 그 면면은 대개 조선 고고학의 2세대와 3세대들로 채워지는데, 이들의 인선에는 세키노 다다시와 구로이타 가쓰미, 그리고 교토의 하마다 고사쿠가 관여한다. 이 중 오바 쓰네키치와 노모리 켄 등에 대해서는 이미 전고에서 인물정보를 살핀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나머지 인물들에 대해 간단히 언급해 두고자 한다.

    • 리스트여닫기 1936년 고구려 고분 조사 조선고적연구회가 조직되어 1931년부터 각종 유적조사가 이루어졌지만 초창기에는 낙랑과 신라 유적의 조사에 집중된 경향이 있다. 당시 고적연구회가 평양에서 가장 먼저 실시한 조사는 남정리 116호분 즉 채협총의 발굴이었다. 발굴성과가 담보되는 유적을 고른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조선고적연구회의 설립에는 구로이타 가쓰미의 진두지휘가 있었다. 설립과정에서 귀족이나 기업인으로부터 고액의 자금원조를 받았으며 1933년부터는 조사된 낙랑 유적의 보고서 발간을 위하여 일본 학술진흥회로부터 매년 1만 5천 원의 자금 원조를 얻어내었다. 또한 궁내성은 매년 5천 원의 하사금을 내렸다고 한다. 이러한 자금은 낙랑과 신라 유적의 조사와 보고서 작성에 사용되었으며 백제나 고구려 유적에 대한 조사에는 거의 충당되지 않았다. 토포리와 호남리, 남경리 등지에서 고구려 고분이 발굴조사된 것은 1936년도의 일인데, 이때 새로이 고적조사 3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조사대상을 고구려와 백제로 확대하였다. 학술진흥원에서 3년에 걸쳐 매년 8천 원의 지원금을 제공하였으며 궁내성으로부터도 하사금이 있었다. 하사금을 이용한 유적조사는 고적연구회의 평의원인 구로이타 가쓰미, 하마다 고사쿠, 후지타 료사쿠, 하라다 요시토, 우메하라 스에지, 오바 쓰네키치가 주도했다. 그 결과 고구려 고분 발굴조사를 오바 쓰네키치가 전담하고, 지리적 조사를 후지타가 맏기로 하였다. 조사는 1936년 7월부터 시작하여 현장작업을 8월에 착수하기로 하였다. 조사의 제1목적은 고구려 고분의 구조양식 연구와 벽화의 발견이라고 하였으며, 그 내용을 정밀한 모사도로 작성하고 양질의 사진을 남기려고 하였다. 이는 외부의 자금지원으로 이루어지는 조사이기에 철저하게 성과를 의식하였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때문에 평양 주변에서 벽화 고분의 존재가 이미 알려졌으며 많은 고분이 산재하는 임원면(林原面)과 시족면(柴足面)을 대상으로 발굴대상 고분을 선정하였다. 현장에서의 조사는 이미 1910년대부터 고구려와 낙랑 고분을 조사해 온 오바 쓰네키치의 감독 아래 아리미쓰와 사와 쥰이치가 보조하여 9월 10일부터 실시되었는데 임원면과 시족면 일대를 답사하면서 20기 정도의 굴착조사 대상을 선정하였다. 선정된 고분 중 봉토분 7기는 매장주체부에 대한 조사까지 이루어졌으며 석총 2기는 외형조사만이 이루어졌다. 그 외 구조가 특이한 고분 1기를 추가로 발굴하였지만 나머지 고분은 대부분 조사 도중에 발굴을 포기하였다. 시족면 토포리에서는 7기의 고분을 굴착하였으나 1~3호분과 6호분을 제외하고는 도중에 조사를 중지하였다. 시족면 남경리의 경우 1,2호 모두 조사 도중에 굴착을 중지하였으며 호남리에서는 1호분 만을 8일에 걸쳐 조사하고, 2호는 조사 중지, 3호는 조사 중에 도굴된 사실을 확인하고 역시 조사를 중지하였다. 시족면 내리고분군에서는 당현동에 있던 1호분만을 조사하고 2호와 3호는 중지, 임원면 상오리에서는 3기의 고분조사를 도중에 모두 중단하고 만다. 같은 임원면 고산리에서는 당산동에 위치하는 제1호분만을 16일간에 걸쳐 조사하고 나머지 2기는 반나절 조사로 마무리한다. 결국 이러한 경과를 살피면 당초 조사의 목적을 고분의 구조와 양식의 확인, 그리고 벽화의 발견이라고 하였으나, 전적으로 후자에 치우진 조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벽화의 발견이라는 성과를 크게 의식한 조사라는 것인데, 외부 보조금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점을 십분 인정하더라도 20기 이상의 고분을 도중까지 파헤쳐 놓고 벽화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기록도 남기지 않고 조사를 포기했다는 사실은 납득하기 어려운 처사이다. 여기서는 조사보고서의 내용을 기본으로 정리하되 사진과 도면에서 얻어지는 관찰내용을 더하기로 한다.

    • 리스트여닫기 1937년도 고구려 고분 조사 1937년도의 조사는 전년도의 조사와 같은 체제 아래에서 진행되었다. 조사방침 역시 전년도와 같았으나 고분발굴에 더하여 새로이 사지(寺址)와 전지(殿址)에 대한 조사가 추가된 점이 특기할 만하다. 고구려 고분과 관련해서는 오바 쓰네키치의 지도하에 당시 조선고적연구회의 촉탁 신분이던 다쿠보 신고(田窪眞吾)와 문화재 전문 사진기사 사와 슌이치가 현장조사에 참가한 것으로 확인된다. 전년도에도 조사가 이루어졌던 고산리에서는 7기의 고분을 새로 발굴했으며 대동군 대보면에서도 5기의 고분을 발굴 조사했다. 이미 도굴된 형적을 남기는 고분이 많았지만 봉토와 석곽의 관계는 물론 곽실의 폐쇄 시설과 관련하여 많은 정보를 얻었다고 조사단은 밝히고 있다. 1937년 10월에는 강동군 승호리에서 이루어진 고구려 고분의 발굴조사에는 노모리 켄이 현장조사를 지도하고 사와[澤]와 가야모토[榧本]가 조사원으로 참가하여 모두 14기의 고분을 발굴조사 하였다. 이를 통해 조사단은 고구려 고분과 백제, 신라 고분의 상관관계가 어느 정도 분명해졌다고 평가했다. 1937년의 조사에는 기존의 연구원 이외에 조선고적연구회 촉탁인 다쿠보 신고와 구주대학 법문학부 강사였던 가가미야마, 평양부립박물관의 관원이었던 오노 타다아키[小野忠明]가 참가한 사실이 확인된다. 이때의 조사도 벽화 고분의 발견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던 것으로 명기하고 있다. 그리하여 벽화 고분이 있음직한 고분을 물색하고 다녔으며 전년도에 조사를 추진하다가 그만두었던 고분 중에서 구조가 특이했던 것도 조사대상에 포함시킨 것으로 보인다.

    • 맺음말

    • 참고문헌

  • 리스트여닫기 1945년 이전의 고구려 벽화고분의 조사 연구 (1) 사오토메 마사히로

  • 리스트여닫기 京都大學 總合博物館 所藏 山田嫄次郞 寄贈 고구려 기와의 검토 吉井秀夫·崔英姬

  • 리스트여닫기 일본소재 진파리 벽화고분 발굴조사 관계 자료에 대해서 후지이 가즈오 [藤井和夫]

    • 서론

    • 진파리 벽화고분 발굴조사

    • 리스트여닫기 아리미쓰 교이치 소장의 진파리고분 관계 자료에 대해서

    • 발문(跋文)을 대신하여

    • 참고문헌

    • 삽화 출전 일람

    • 리스트여닫기 부록 1 고구려 벽화고분 발굴조사 보고

    • 리스트여닫기 부록 2 새롭게 발견된 고구려 벽화고분에 대한 좌담회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조선총독부박물관 주임]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평양부립박물관 관장]요네다 미요지[米田美代治:조선총독부박물관 촉탁]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경성제국대학 사학과제2강좌 교수]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장]아리미쓰 지금부터 새롭게 발견된 벽화가 있는 고구려 고분의 좌담회를 개최하겠습니다. 이 좌담회의 사회를, 조사에 참여한 평양박물관장 고이즈미[小泉] 씨 평양박물관은 평안남도 평양부가 경영한 시설로 정식 명칭은 평양부립박물관이다. 개관은 1933년이고 초대 박물관장은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다. 에게 부탁드리겠습니다.고이즈미 좌담회의 사회를 맡게 된 것이 처음입니다. 평양에서 왔으니까 능숙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처음이니까 아무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우선 들어가기에 앞서 고분을 발견한 동기와 위치 등에 관한 것을 대략적으로 여러분에게 설명드리는 편이 나을 것 같으므로, 여기에 관해서 저부터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고분군이 있는 동명왕릉으로 말씀드리자면 평양지방에서는 유명한 능의 하나입니다. 평안남도에서는 기자릉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는 「조선유적일람」에서 「丙」(가장 우수한 甲 다음에 해당되는 것으로 특별보호가 필요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關野貞他, 1910). 과 동명왕릉이 능으로 지정되어 참봉(參奉) 조선시대의 가장 말단 관직. 종9품에 해당한다. 조선총독부가 설치된 때에도 그 관직은 계속 유지되었다. 을 두고 춘추제전을 하고 있습니다. 동명왕릉을 중심으로 그 배후에 송림이 있고 구릉 위에는 점점이 수십 기의 고분이 남아 있습니다. 진파리 고분군은 평양 시가지에서 동남쪽으로 약 24km인 평양시 력포구 무진리 (구 평안남도 중화군 동두면 진파리)에 있다. 일제강점기에 진파리 고분군에서는 동명왕릉을 포함한 약 10기의 고분이 발견되었다. 각 고분에는 고유번호가 매겨져 있었으나, 북한측이 1973년에 진파리 고분군을 재조사하면서 새로운 번호를 매겼다. 본문에 등장하는 진파리 제1호분은 ‘진파리 제9호분’으로, 진파리 제4호분은 ‘진파리 제1호분’이 되었다. 동명왕릉과 함께 고구려의 고분군으로서 대표적인 것이므로 몇 년 전부터 후지타[藤田] 선생이 조직적인 조사를 행한 후, 고적으로 지정해야 한다는 생각에 조사를 지시해 관계자가 종종 현지에 가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다른 분이 동명왕릉에 대해 이야기를 하실 줄 믿습니다만 매우 오래전 시대에 개조되어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 이외의 것은 외형은 거의 원래의 모습 그대로입니다만 오래전에 도굴당해 여지없이 파괴당했고 유물도 약탈당했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이 조사할 때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서 도굴 당시에 그림이 있는 것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이는 후지타 선생과 노모리[野守健] 씨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정식 조사를 할 때 살펴보려는 계획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올해는 낙랑고분의 조사를 하고 있었는데 거의 끝나갈 무렵인 6월 10일 경 담화회 이전의 조사기간에 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조사 참가자에도 기술에 차이가 있다. 즉 小川敬吉는 ‘(전략) 6월 17일부터 10일간’이라고 발언하고 있다(小川敬吉他, 1941, 84쪽). 그러나 1941년에 小泉顯夫는 ‘5월 중순 (중략) 神保부대의 부대원들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중략) 우리들은 (중략) 6월 1일부터 해당 고분의 조사를 수행했다’(57쪽)라고도 하고 있고, 1942년에 小泉顯夫는 ‘(전략) 6월 15일 米田군과 함께 현장에 도착, 동명왕릉의 제관(齊館)을 숙소로 해 조사를 개시했다’라고 하고 있다(13쪽). 또한 1986년에 小泉顯夫는 ‘(전략) 昭和 16년(1941) 5월도 반이 지난 무렵, (중략) 神保 부대가 중화방면에서 연습 중, 중화군 동두면 진파리에 있는 동명왕릉 (중략) 부근 일대에 산재한 고분군 중에 도굴로 인해 입구가 열린 고분이 있는데 훌륭한 벽화가 남아 있으므로 즉시 와 주기를 바란다’라는 전언을 받고 ‘다음날 경성에 전화해 藤田 박물관 주임에게 경위를 보고한 후 승낙을 얻어 (중략) 발굴조사는 5월 하순부터 시행하게 되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353~355頁쪽). 이렇게 한 사람에 의한 기술도 다르다. 이에 반해 아리미쓰의 「고구려벽화고분발굴조사보고」에 의하면 6월 16일부터 29일까지 조사가 행해졌다고 한다. 조사 참가자는 요네다 미요지[米田美代治], 사와 슌이치[澤俊一],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 오가와 게이키치[小川敬吉],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다. 에 평양의 육군 제44부대에 근무하고 있는 진보[神保]라고 하는 소좌가 있습니다만, 이 사람은 유화를 잘 그리는 사람으로 회화나 미술에 조회가 깊은 사람입니다. 이 진보 소좌가 우연히 이 지방에 부대를 끌고 연습을 가 바로 동명왕릉 배후의 산 뒤쪽에서 야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습중에 저에게 부대원을 보내 ‘동명왕릉의 배후에 야영을 하고 있는데 여기에 왕릉이 있고 고분도 있으며 지석묘가 있는 유서깊은 곳인 것 같으니 아는 게 있으면 알려주길 바란다’라는 의뢰를 받았습니다. 저는 연필로 갈겨 써서 건네 주었습니다만, 다음에 새로말을 탄 부대원이 와서 ‘고분군 중에는 도굴공이 그대로 남아 있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 4개나 있다. 부대원을 시켜 그 안을 살펴보게 했더니 안에 그림이 있는 것과 마주쳤다. 매우 아름다운 벽화로 금도 박아 넣은 장려한 것이다. 당시의 진파리 제4호분(현 진파리 제1호분)에 神保 소좌 등이 들어간 것이 된다. 꼭 와 주길 바란다’라고 하는 전문이 왔습니다. 하지만 낙랑고분 정백리 제216호분과 석암리 제214호분의 조사가 행해졌다. 의 조사 중이어서 바로 가기에는 곤란했기 때문에 도청 학무과에 전화를 해 일시적으로 구멍을 메우도록 했습니다. 당시의 조선에는 각 도청(道廳)에 학무과(學務課)가 존재했다. 小泉가 보고한 곳은 조선총독부의 평안남도 학무과다. 이후 요네다[米田] 촉탁이 조사 명령을 받아 평양에 와서 저희들도 다시 발굴을 하고 실측도를 작성한 후에 고분을 덮는 것으로 이번 조사를 마무리하게 된 것입니다. 동명왕릉은 중화군 동두면에 속하는 진파리라는 곳에 있습니다. 그곳에 가려면 보통 중화까지는 기차를 타고 가서 선원행 버스를 갈아타고 가던지, 아니면 평양에서 중화행 버스를 타고 간 후 선원행 버스를 갈아타 동명왕릉에서 내리는 것이 보통입니다(圖1). 평양에서 무진장리까지 가서 왕릉으로 가는 길도 있습니다만 대략 평양에서 5리(里)정도됩니다. 여기까지는 하루에 한 번밖에 버스가 없으므로 저희들은 중화를 통과해 가게 되었습니다. 왕릉의 배후에는 약간 높은 산이 있었습니다. 앞으로는 무진천이 흐르는 매우 경치좋은 땅으로 훌륭한 송림이 있고 깨끗한 물이 솟아나는 진주못도 있는 경승지(景勝地)로서도 매우 훌륭한 곳입니다(圖 2, 圖 3). 이런 곳에 만들어진 동명왕릉은, 그 진위의 여부는 별개로 하더라도 고구려의 고분으로서 매우 훌륭한 고분입니다. 아마도 고구려 시대 왕의 능이라고 생각합니다. 토지의 상태, 분묘의 형식으로 보아도 ‘왕릉으로 가장 어울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동명왕릉의 위치와 발견의 동기는 이상과 같습니다. 그럼 발굴의 처음부터 조사에 종사했던 요네다 촉탁에게 고분의 구조, 벽화의 배치 등에 관한 설명을 부탁드리고자 합니다.요네다 이번에 조사한 고분 구조에 관해서 말씀드리자면 대체로 고구려의 일반적인 형태와 구조를 가지고 있으므로 더 이상 설명드릴 필요도 없을 정도입니다. 우선 제1호분부터 대략적인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진보[神保] 소좌가 발견한 것은 제4호분입니다만 제1호분도 발굴을 시도하다가 도중에 그만둔 흔적이 있습니다. 봉토를 대략적으로 설명드리면 동서 약 80척, 남북도 비슷한 정도의 크기로, 원래의 형태는 대략 원형이나 방형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금은 많이 붕괴되어 원형으로 보입니다(圖 4). 봉토의 가장 높은 곳에서 약 13척 정도 파 내려간 곳에 고분의 입구가 있습니다. 종단면도(圖 5)가 나타내듯이 여기서부터 연도를 통과하면 문 부분이 있고 현실로 가게 됩니다. 저희들이 발굴할 때에는 파괴되어 있었는데 바닥 등도 심하게 파괴되어 있었습니다. 현실의 크기로 말씀드리지면 길이가 11척 3촌, 넓이가 8척 3촌 정도 입니다. 천장은 평면도의 점선과 같이 단(段)을 만들고 고임천장식으로 가장자리를 잘라낸 궁륭식 천장을 하고 있습니다(圖 6). 높이는 9척 5촌 정도이고 전체의 길이는 23척 정도 됩니다. 연도에는 회반죽을 밀어 넣었던 것 같으나 도굴에 의해 떨어져 나가 아랫부분만이 남아 있습니다. 또한 문비의 파편이 조금 남아 있었습니다. 연도에는 벽화가 없고 문 부분에서 벽화가 시작됩니다. 벽화의 대략적인 배치를 말씀드리면 문 부분의 좌우에는 무인도(圖 7)가 있는데 주색(朱色)으로 광배같은 것을 그리고 있습니다. 현실로 들어서면 동서남북에 사신(四神)이 배치되었습니다. 즉 동쪽에는 청룡, 북쪽에는 현무, 서쪽에는 백호, 남쪽에는 주작을 그리고 있습니다. 고임천장에는 인동문(忍冬紋), 운문(雲紋) 등을 교대로 그리고, 중심의 높은 부분에는 해와 달의 상을 그렸으며, 그 사이사이의 주요 부분에 점점이 연화문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가 대략적인 배치입니다만 벽화의 상세한 부분에 관해서는 뒤에서 설명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圖 1_평양부 부근 지형도圖 2_진파리 고분군 분포도圖 3_진파리 고분군 경관圖 4_진파리 제1호분 외관圖 5_진파리 제1호분 종단면도圖 6_진파리 제1호분 석실 실측도圖 7_진파리 제1호분 문 부분 무인 실측도 다음으로 제4호분입니다. 주위가 송림으로 되어 있는데(圖 8) 봉토는 무너져서 확실하지 않습니다. 실측을 하기도 곤란했습니다만 봉토의 대략의 크기는 사방이 90척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8척 정도 내려가면 연도의 위에 도달합니다. 구조는 제1호분과 닮아 있습니다(圖 9). 평면의 크기는 도면과 같습니다. 총체적인 크기는 21척(尺)입니다. 우선 연도의 입구에는 6, 7촌 정도의 두께를 가진 화강암의 판석이 있는데 이 판석을 세워 입구를 막았던 것 같습니다만 조사 당시에는 쓰러졌습니다(圖 10). 연도에서 문 부분, 현실 쪽으로 들어갑니다. 문 부분의 좌우에는 문장부를 끼우는 문동개가 있습니다. 돌문비는 파괴되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고 현실 안은 흙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조사도 간단히 끝낼 수 있었습니다. 이에 반해 연도 쪽의 흙이 굳어서 발굴이 힘들었습니다. 흙을 조금씩 파 나갔더니 회반죽이 남아 있는 부분이 나왔습니다. 뼈 조각 등도 나왔습니다. 연도에서는 옻칠을 한 목관금동제 못 8점과 옻칠 파편을 비롯해 늑골 일부와 골반 같은 인골이 출토되었다. 인골은 현실에 묻어 두었다고 하나 이후 이에 관해서는 불분명하다. 현실의 구조입니다만 제1호분은 작은 돌을 많이 쌓아 대체적으로 방을 만들어 두고 거기에 회반죽을 발라 마무리하는 구조입니다만 제4호분은 큰 화강암의 판으로 만들고 3분(分)에서 5분 정도 회반죽을 칠한 것 같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바닥에는 2장의 화강암을 깔려 있습니다. 바닥 돌의 밑에는 회반죽을 깔고 거듭 목탄 등도 깔았으며 그 밑에는 작은 돌 등을 깔고 있습니다. 구조에 관해서 드릴 말씀은 대략 이 정도입니다.圖 8_진파리 제4호분 외관圖 9_진파리 제4호분 석실 실측도圖 10_진파리 제4호분 종단면도圖 11_진파리 제1호분 현실 동벽의 벽화(❶ 청룡 ❷ 오바[小場恆吉]의 백묘 복원도(청룡))圖 12_진파리 제1호분 현실 서벽의 벽화(❶ 백호 ❷ 오바[小場恆吉]의 백묘 복원도(백호))圖 13_진파리 제1호분 현실 옥벽(북벽)의 벽화 1圖 14_진파리 제1호분 현실 옥벽(북벽)의 벽화 2(❶ 옥벽 좌측 벽화(수목) ❷ 옥벽 우측 벽화(수목))圖 15_진파리 제1호분 현실 전벽(남벽)의 벽화(❶ 전벽 좌측 벽화(주작) ❷ 전벽 우측 벽화(주작))圖 16_진파리 제1호분 현실 동벽의 벽화(❶ 비금운문 ❷ 운문실측도 ❸ 인동문실측도 ❹ 연화실측도 ❺ 연화실측도)圖 17_진파리 제1호분 현실 옥벽(북벽)의 운룡문 모사도圖 18_진파리 제1호분 현실 옥벽(북벽) 상부 고임천장圖 19_진파리 제1호분 현실 천장圖 20_진파리 제1호분 현실 천장 중앙의 일정과 월정(❶ 동쪽에 일정, 서쪽에 월정 ❷ 일정 복원도 ❸ 월정 복원도)圖 21_남정리에서 채집한 낙랑의 선토도약화상전圖 22_경주 황룡사지 부근에서 출토된 월정도약문 와당고이즈미 고분의 구조와 양식에 관해서는 지금까지의 설명으로 아셨으리라 생각합니다만, 횡혈식의 전형적인 고구려의 고분으로 입구의 연도를 통해 들어가면 훌륭한 화강암의 문비가 있는데 문은 폐쇄되어 있습니다. 제4호분은 큰 화강암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제1호분은 회반죽으로 막혀 있었습니다. 문은 양쪽으로 열리게끔 되어 있었습니다만 도굴할때 산산조각을 내 파편이 흩어져 있습니다. 문에서 안으로 들어가면 돌담을 쌓는 방법으로 만들어진 벽에 순백의 회반죽을 칠해 화장하고 그 위에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벽화의 상태에 대해 간략히 말씀드리자면 이 고분은 약간 비뚤어져 있기는 하나 남쪽에 입구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제1호분은 동쪽에 청룡(圖 11)이 있고 서쪽에는 백호(圖 12)가 있고 북쪽의 막다른 곳에는 현무(圖 13)가 그려져 있습니다. 현무는 거북과 뱀이 엉켜져 있는 형상으로 북방의 수호신입니다. 현무의 좌우에는 남종(南宗)의 화풍이라고 할까요, 그런 회화풍의 소나무(圖 14)를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남쪽에 있는 문 좌우의 벽면에는 주작의 그림(圖 15)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사신의 그림을 석실의 벽면에 그리는 화법은 고구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제1호분은 사신을 그리고 있는 공간에 많은 수의 운문(雲紋)과, 운문 사이에 인동당초문(忍冬唐草紋), 보상화문(寶相華紋)을 배치하고 있습니다(圖 16). 강서의 고분도 이와 같은 모양이라고 할까요, 사신의 배경으로 된 운문, 인동당초문 등이 그려져 있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합니다만 현재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오랜 시간에 걸쳐 소멸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서대묘와 강서중묘에는 사신도(四神圖)가 그려져 있다. 그러나 사신도가 그려진 벽면에는 사신도 이외의 그림은 보이지 않는다. 주로 고임천장에 운문, 인동당초문(忍冬唐草紋) 등이 그려져 있다. 이런 점이 이번에 발견된 벽화에서는 명료하게 보이는데 조선에서 발견한 벽화로서는 매우 특징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모양은 운문, 인동당초문 뿐만이 아니라 현무의 윗부분에는 절반 정도를 드러낸 비룡의 그림(圖 17)이 있고, 또한 청룡의 꼬리 부분 위에는 새가 그려져 있는 등(圖 16-❶), 지금까지 도안에서는 예가 없던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사방의 벽이 이런 상태입니다만 천장은 고구려의 벽화분에 보이는 운문, 당초문이 그려져 있습니다(圖 18). 이러한 천장의 양식을 고임천장식이라고 부릅니다만 이는 고구려고분의 한 특징으로서 계단상으로 쌓아 올라 간 제일 윗부분에 평평한 돌을 두고 덮은 것입니다. 네 구석에는 삼각형으로 돌을 두고 비스듬한 방형으로 만든 후 그 다음에 삼각형의 돌을 두어 방형을 만드는데 이것을 보통 고임돌이라고 합니다(圖 19). 이 고임돌의 각 면에는 전부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가장 윗부분에는, 강서고분으로 치면 중묘에는 연화의 모양이 있는데 천개를 아래로 드리운 것 같이 그리고 있고 대묘에는 반룡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번에 발견된 벽화의 천장에는 도안이 매우 단순하나 입구를 향해서 오른쪽인 동쪽에는 주위에 화염을 두른 주색(朱色)의 도형에 삼족오를 그렸는데, 소위 말하는 태양의 형상을 뜬 일상(日象)을 그리고 있습니다(圖 20 ❶, ❷). 서쪽에는 화염으로 주위를 그리고 토끼와 두꺼비가 약을 찧고 있는 것을 그리고 있습니다(圖 20 ❶, ❸). 지금 돌리고 있는 사진 속에도 있습니다만 낙랑의 고분에서 발견되는 전의 문양 중에도 이런 문양(圖 21)이 있는데 중국에서는 옥토섬서(玉兎蟾蜍)가 약을 찧는 것이 소위 달의 상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문양도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두꺼비가 잊혀지고 토끼만 남아 있습니다. 고구려에는 토끼가 없어지고 두꺼비만 그리고 있는 것도 있으나 이번에 발견된 고분에서는 두꺼비와 토끼가 절구 속의 약을 찧고 있습니다. 지난 해에 경주에서 발견된 와당(圖 22)에도 이런 모양이 있는데 백중합니다. 이 점에 관해서 깊은 흥미를 느꼈습니다. 이러한 네 벽과 천장의 모양이 선명한 색채로 남아 있습니다. 강서의 고분과 비교해 어느 쪽이 더 선명하냐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만, 어떤 점은 강서의 고분쪽이 선명하게 남아있으나 호의적인 눈으로 보아서 그런지 몰라도 총체적으로 이번에 발견된 고분이 강서의 고분보다 선명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회화를 하는 사람들은 현무의 좌우에 있는 소나무를 그리는 방법과 양식이 ‘동양에서의 회화로서는 가장 회화다운 오래된 것이다’라고 격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최초에 발견한 제4호분은 입구의 반 정도가 흙에 묻혀 있었는데 아마도 고구려가 신라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할 때 그 군대가 약탈과 폭행을 행한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조사 중 관에 사용된 목재가 연도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아마도 현실에서 연도까지 들고 나왔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금 도금을 한 못도 여기저기 남아 있었습니다.圖 23_진파리 제4호분 현실 동벽 벽화圖 24_진파리 제4호분 현실 서벽 남측 벽화圖 25_진파리 제4호분 현실 옥벽도(북벽) 현실에 들어서면 동쪽에는 청룡(圖 23), 서쪽에는 백호(圖 24)가 있습니다만 이것들은 매우 선명하지 않은데 제1호분과 같이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현무의 경우, 지금까지는 강서의 고분이나 제1호분에서 보이는 것들도 대략 뱀이 거북을 휘감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만 제4호분은 용을 한 마리 그리고 있을 뿐입니다(圖 25). 거북의 모습은 확인할 수 없습니다. 북쪽의 벽과 동·서쪽의 벽에 있는 용의 좌우에는 마주 보고 사람을, 천인(天人)이라고 말씀드려야 할까요, 여자의 화상이 있습니다. 거기에 붙어 있는 그림에 관해서입니다만 아마도 봉황이나 어떤 서조(瑞鳥)를 타고 있었던 것으로생각됩니다. 이러한 천인(天人)의 화상을 향해서 왼쪽에 그리고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용을 탄 남자의 상이 그려져 있습니다. 관은 왕이 쓰는 것 같은 면관(冕冠)이라고 하는 관입니다만 거기에 여기에 붙여 놓은 것 같은 화상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와 같은 그림이 각 벽면의 그림 좌우의 윗부분에 있는 벽면에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은 현실로 들어서서 오른쪽에 있는 청룡의 위쪽에 있는 부분인데 이 스케치는 아직 미완성이므로 그모양을 잘 알 수 없으나 사진에서는 더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圖 26_통구 사신총 현실 동벽 벽화圖 27_진파리 제4호분 현실 서벽 벽화 실측도圖 28_당시의 중장탕 로고마크圖 29_진파리 제4호분 현실 천장 1圖 30_진파리 제4호분 현실 천장 2(❶ 현실 청장 성좌 사진, ❷ 현실 천장 성좌 배치도 단지 제 생각입니다만 용의 양식으로 말씀드리자면 매우 고식(古式)의 회화 기법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사신도(四神圖)는 또 있습니다. 집안현에서 발견된 사신총에서도 이것보다는 조금 작지만 사신도가 발견되었습니다(圖 26). 이것들을 비교해 보는 것은 매우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아쉽게도 매우 불선명합니다. 여기저기에 약간이나마 선명한 부분도 남아 있는데, 이것으로 보면 매우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색채도, 선도 매우 선명히 남아 있는 부분이 있어서 만들어질 당시의 벽화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천인의 색채도 꽤 잘 남아 있고 아스카[飛鳥] 시대의 것과 매우 닮아 있습니다. 이 그림(圖 27)의 천인의 머리 부분에는 우리들이 중장탕(中將湯)의 광고(圖 28)에서 보는 바와 같은 꽃잎이 붙어 있는 비녀가 있습니다. 주위에는 운문이 있고 저 건너편에는 산악이 보입니다. 무엇보다도 고구려의 양식을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더우기 재미있는 것이 천장입니다. 고임천장 부분에는 당초문(唐草紋)이 있고 그 반대쪽에는 화살같은 모양이 있는데, 녹색, 군청색 등의 바림으로 채색되어 있습니다(圖 29). 이것들이 고임천장면에 쭉 그려져 있습니다. 요소요소에 지름 2촌 정도의 꽃모양에 비교적 얇은 금박을 잘라 붙여 놓았습니다. 간격은 20cm 정도입니다. 아마도 원래는 그 속에 꽃잎 모양 같은 것들이 붓으로 그려놓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천장 부분에는 운문(雲紋)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만 거의 대부분이 지워져 있는지, 아니면 불순물이 부착되어 숨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원래는 운문이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금박을 붙인 별자리가 점점이 배치되어 있는 것입니다(圖 30). 그 공간에는 아마도 운문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슴푸레한 고분 속에 입구쪽에서 가늘게 들어오는 빛을 받아 금박이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매우 훌륭한 장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연도를 메우고 있던 흙을 덜어 내었습니다만 좌우의 벽면에는 벽화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나 붉은 점토가 부착되어 있어서 거의 모양을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삼각형을 한 금박이 여기저기에 점점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금박을 잘 곁들인 벽화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공들여 씻어낸다면 명료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대체적인 벽화의 상태는 이상과 같습니다.圖 31_진파리 제4호분 현실 옥벽(奥壁) 중앙 묵서명圖 32_진파리 제4호분 현실 서벽 낙서 각명 그리고 흥미있게 생각했던 것은 제4호분의 현무가 있는 벽면의 남녀신상 가운데 부분에 붓으로 쓴 문자가 몇 행 남아 있다는 점입니다(圖 31). 여기의 이왕가미술관 1938년, 덕수궁 석조전의 오른쪽에 건축가인 나카무라 요헤이[中村與資平]에 의해 만들어진 신축 미술관이 세워졌는데, 기존의 창경궁 안에 있던 이왕가박물관과 덕수궁 석조전이 합쳐 이왕가미술관이 되었다. 관장이신 가쓰라기 스에지[葛城末治] 씨가 매우 열심히 읽으셨습니다만 겨우 숫자를 읽어낼 수 있는 정도로 아직 전부는 읽을 수 없습니다. 또한 못으로 긁어낸 듯한 글자가 있습니다(圖 32). 여기에 관해서는 알고는 있었지만 문자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을 경성제국대학의 스에마쓰[末松] 선생이 조사한 결과, 결국 신라시대에 해당하는 咸通 11년의 연호를 쓴 명문이나 낙서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도굴당한 연대나, 그 이외에도 고구려의 멸망에 의한 신라의 영역 문제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큰 재미있는 것입니다. 대략적으로 벽화에 나타나 있는 명문이나 낙서 상태는 이 정도입니다. 그럼 스에마쓰 선생께 이 낙서에 관해서 말씀을 부탁드리겠습니다.스에마쓰 저는 고분의 발굴 같은 것에 관해서는 전혀 경험이 없으므로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만, 조사 중에 이틀 정도 성가시게 해 드렸습니다. 그때의 감상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고고학이나 고미술, 회화 분야의 전문가 여러분에게는 그다지 재미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여기에 관해서 말해 보고자 합니다. 개개의 고분에 관해서는 지금까지의 설명으로 상세하게 알 수 있었고 훌륭한 사진에 의해 명쾌하게 아셨다고 생각합니다만, 제가 가서 이 고분에 관해 느낀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이 고분은 최근에 선전된 고분 중에서는 손에 꼽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용이 다른 것에 비교해 중요한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제쳐두고 일단 선전된 것이 제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고이즈미[小泉] 씨의 공적으로 돌려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데 라디오나 신문에서 거창하게 써댑니다. 제가 보러 갔던 것을 안 사람들은 반드시 이 고분이 어땠는지를 물어봅니다.이는 바로 선전의 공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분을 보고 돌아온지 얼마되지 않아 도쿄[東京]의 아사히신문[朝日新聞]에서 대단한 발견이 평양에서 있었다고 하는데 당신도 조사에 참가했다고 하니 학술란에 뭔가 써 달라는 의뢰가 왔습니다. 이는 선전의 영향이 도쿄에 까지 미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관해서는 거절했습니다만 이런 점만으로 보아도 대단히 큰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떠들어 대는 것은 거의 선전이지만 과장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절대연대를 정할 수 없다고는 하지만 대략 고구려 멸망 이전의 것으로 본다면 대략 몇 세기 경의 것이라는 것은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위에 색채를 가지는 회화가 있고, 그 이외의 것과 비교해 우수한지 어떤지는 제쳐두고라도 이런 것이 홀연히 쇼와[昭和]의 세상에 나온 것은 비상한 일입니다. 놀라는 것이 당연합니다. 아울러 조선에서 이러한 발견이 있었다는 점에 관해서는 놀랄 일이라거나 그 의의에 관해서는 거의 느낌이 없는 것 같습니다. 또한 잘 생각해 보면 조선 미술계의 특수성을잘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일본에서 이런 연대의 벽화가 발견된다는 것은 조금도 기대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중국이나 만주와 같은 대륙에서도 이런 일은 많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조선에는 낙랑의 고분이 중국에서조차도 진귀할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우수한 벽화를 가지는 고구려의 고분이 만주의 남쪽에서 조선 땅에 걸쳐 무수히 있다고 해도 될 정도입니다. 이 방면의 조사가 행해진 후 벌써 30년이 되나 여전히 조사에서 빠진 것이 나옵니다. 일본에 돌아오면 자주 조선에는 돈이 떨어져 있다고 하는 엉뚱한 질문을 받아 놀랍니다만 고고학계에는 실제로 돈이 떨어져 있습니다. 이는 매우 축복받은 환경으로 조선의 고고, 혹은 미술연구는 큰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조사 기관이나 연구자들은 인력부족, 경비부족 같이 매우 유감스러운 점도 있습니다. 조선 고고학계의 시설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은 유치하다고 밖에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박물관을 중심으로 한 30년간의 조사연구는 세계적인 효과를 올리고 있습니다만 조선의 실정에서 생각해 본다면 아직 미미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종류의 벽화를 가진 고분과 같은 보물이 언제, 어느 곳에서 발견될지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고분이 신문계 쪽에서 화제가 된 것만으로 그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현지에 가서 통감한 것은 벽화가 있는 고분은 강서(江西)에도 있고 집안현에서도 최근에 발견되었습니다만 이것들 중에서도 이번 고분은 특색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고 하면 동명왕릉으로 이야기되는 고분은 이번에 발견된 것이 아닙니다만 벽화가 있는 고분을 포함한 고분군을 총괄하는 위치에 있는데 이런 상태는 고구려고분에서는 다른 비슷한 예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북창리(北倉里)강서(江西)고분 등은 산기슭에 있는데 벽화를 가지고 있으나, 그것은 산 속에 흙무지가 있는 것 같은 것으로 예전부터 고분이 있다는 것을 주지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부근 일대, 즉 동명왕릉 지역은 가장 살아있는 고분, 이상한 이야기로 들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살아있는 고분입니다. 평양 부근에 동명왕릉 신앙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신앙의 성지로서 예로부터 신앙의 대상이 되었고 현재까지도 계속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천 여 년 간을 지낸 고분지대입니다만 이곳에 가서 느낀 것은 경성 부근에 있는 조선의 왕릉에 참배할 때의 느낌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 구릉은 실로 훌륭한 것으로 주위에 송림이 있고 그 가운데의 평탄한 땅에 왕릉이 있습니다. 소나무도 바로 그림에 있는 것과 같은 소나무가 심어져 있고 청결하고 깨끗한 성지의 느낌입니다. 천 몇백 년이 된 고분이 이렇게 살아있는 성지로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땅은 고구려고분으로서 이 고분이 최초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라에는 오릉(五陵)이 있습니다만 역시 경주 김씨의 선조의 묘로서 제를 올리고 돌보고 있는데 이에 상응하는 것입니다. 이외에는 경험이 별로 없어서 단언해서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이러한 묘는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의미로도 이 진파리의 고구려 고분지대는 특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비록 문외한이지만 지금까지의 이야기에서 빠진 것이 있어서 말씀드리면 왕릉 앞의 정자각(丁字閣)에는 14개의 초석이 있으나 정자각과는 그 시대가 다른 것 같습니다. 잘라 말씀은 드리지 않습니다만 이 초석은 고구려의 것이 아니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들은 전부 깨끗하게 남은 2척 5촌의 사각의 초석으로, 실로 정자각의 밑에 있을 만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묘의 축조나 혹은 그에 동반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 있습니다. 게다가 이 묘에 관해서 은근히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고구려의 왕릉이라고 하면 누구나 집안현을 생각하고, 집안현이라고 한다면 호태왕의 비를 떠올릴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그 호태왕릉비 명문의 반 이상의 내용은 국연(國烟), 관연(官烟), 등묘수(墓守)에 관한 기재입니다. 동명왕릉에 와서 바로 그 연호(烟戶)에 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왕릉의 산기슭에 부락이 있는데 17, 18호 정도입니다만, 아무래도 부락의 상태가 혹시 옛날 이렇게 큰 왕릉이 만들어지고 부속된 연호가 있었다고 한다면 이런 부락 상태이지 않을까라고 상상해 보았습니다. 구릉의 끝자락에는 붉은 고구려의 기와가 무수히 있습니다. 부락의 언덕 쪽에 참봉의 집이 있는데 당시의 돌담이지 않을까 라고 말해지는 돌담에 있습니다. 이 부락이 이 묘에 붙어 있던 것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된 것은 자유로운 상상으로, 혹시 이 왕릉에 호태왕릉비에 있는 것과 같은 연호가 있었다고 한다면 이런 부락의 형태였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까지는 벽화분에 관한 것이 아니라 동명왕릉을 중심으로 한 부근 일대의 풍경에 대한 느낌이었습니다. 이미 알고 계시는 분도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이 고분을 동명왕릉으로 인정하는 것은 물론 역사학 상의 인정이 아니라 신앙 상의 인정입니다. 이는 이미 조선 초기에도 인정되고 있습니다. 즉 중화 땅에 동명왕릉이라는 묘가 있다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12에 적혀 있습니다. 『동국여지승람』은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것이므로 더 이른 시기부터 인정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개국한 일찍부터 신라, 백제, 고려 등의 시조릉에 제를 올리게 한 기사가 보이는데 고구려의 시조릉은 아마도 이 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능이 매우 생생한 능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적어도 조선 500년의 신앙의 결과였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동국여지승람』이라고 되어 있으나 이는 발언자가 잘못 알고 있었거나 기록자의 오기에 의한 것으로 생각되는바, 정확히는 『세종실록지리지』일 것이다. 이 벽화가 있는 고분의 조사는 조금 전의 설명 그대로입니다. 일단 응급조치를 취해 놓았으므로 나중에 준비를 갖추고 계획을 세워 보존 방법을 강구할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저는 몰래 당사자 여러분에게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다른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도난을 당해 경찰에 연락하면 파출소의 순사가 와서 조사를 합니다. 좀 중대한 일이면 본서에서 나옵니다. 더욱 더 중대한 일이면 도(道)나 본부의 경무국(警務局)이 움직이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처음에 온 순사가 들쑤셔 어질러 놓고 지문 같은 것을 지운 후에 본서의 안목 있는 형사가 오는 결과가 됩니다. 혹은 순사가 오기 전에 집에 있던 사람이 현장을 망가뜨릴 염려도 있습니다. 이런 지방에 있는 고분들은 우선 박물관에 알리기 전에 지방의 사람들이 달라붙어 어지러놓아 버려 박물관에서 갔을 때에는 안타까운 일이 있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별 볼일 없는 고분의 경우에는 그다지 유감스럽지 않습니다만 어쩌다 그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일본에서 벽화라고 하면 호류지[法隆寺]의 벽화를 생각하게 됩니다만 그 보존에 관해서 기술이나 자금 같은 것이 동원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꿈만 같은 일이 현실로 되듯이 출현하는 조선의 벽화에 관해서도 나중에 조치를 불충분하게 취했다는 유감이 없도록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이 두 벽화도 영구보존이나 조사에 관해서 많은 수고를 끼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조사도 지금부터라고 생각합니다만 아무쪼록 고이즈미[小泉] 씨를 비롯해 박물관의 여러분들이 만전의 대책을 세워 사업이 완성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고이즈미 명문에 대해서 좀 더 말씀을 부탁드립니다.스에마쓰 제4호분의 왼쪽 벽에는 대칼로 긁은 듯한 자국이 있습니다. 벽면의 중앙에 『함(咸)』자가 있고 그 이외에 의미가 없는 글자도 있습니다. 왼쪽 아래에 뭔가 문자같이 보이는 것도 있습니다. 위에 동일하게 『咸』자가 보이므로 咸豐인가라고 생각해 조사했으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더우기 아랫쪽에는 간지(干支) 같은 것이 보입니다. 또한 『月』이라는 글자도 보입니다. 이는 아마도 연월일(年月日)이 있는 것인가라고 해서 조사한 결과, 『咸通十□年庚寅二月』라고 하는 글자가 보였습니다. 아리미쓰 교이치는 ‘咸通十一年庚寅三月’로 읽었다. 또한 그 오른쪽에 있는 글자를 ‘此日’로 읽었으나 불분명하다(小川敬吉他, 1941, 89쪽). 한편 小泉顯夫는 ‘咸通十年庚寅三月’으로 보고 있다(小泉顯夫, 1986, 359쪽). 연표를 찾아 살펴보면 통일신라의 끝 무렵, 조금 더 지나면 견훤·궁예 등이 일어나는 시대인데 당(唐)의 연호입니다. 대칼로 긁은 듯한 글씨로 난잡하게 적은 글자이므로 서체상으로는 어느 시대의 것인지 저로서는 알 수 없으나 『咸通十□年庚寅二月』라고 읽는다면 역법에도 어긋나지 않는 간지이므로 후세의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咸通十』뿐만이 아니라 더불어 『庚寅』이라고도 적혀 있으므로 이 당시에 고분의 입구가 열려 있었던지, 아니면 그 지방의 사람이 열어 보았던지 간에 그 당시의 명문으로 생각합니다. 이 앞에 몇 개의 문자가 있으나 잘 보이지 않습니다. 咸通十一年의 장난글이라고 한다면, 이런 신라의 낙서가 있는 고분이라고 하는 것이 이 고분의 특색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화제거리로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고이즈미 벽화고분을 중심으로 동명왕릉을 비롯한 십여 기의 고분이 현재까지 남아있게 된 것은, 스에마쓰 선생도 말씀하셨듯이 동명왕릉이라고 하는 것이 그 부근의 사람들에게 신앙의 대상이 되어 있었던 것이 또한 힘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왕릉이 고구려 동명왕의 능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습니다만, 그렇지만 규모상이나 양식상으로 말씀드리면 평양부근에서는 그다지 보이지 않는 양식입니다. 더불어 우리들이 실제 능의 주위에 설치된 돌을 살펴보면 직경 15척을 넘는 큰 돌을 이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고구려의 어떤 왕의 능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조금 전에 요네다[米田] 씨가 말한 바와 같이 고구려 분묘양식의 방형분입니다. 후지타[藤田] 선생의 말에 의하면, 이 고분은 밑에 2단밖에 돌이 남아 있지 않으나 역시 만주(滿州)와 집안현 방면에 남아 있는 고구려의 능묘와 같이 밑에서부터 위에까지 계단상이라고 할까요, 계단식의 피라미드형으로 쌓아 올린 방추대상의 고분이었다고 보입니다. 나중에 개조되어 현재와 같은 모양이 되었으리라 추정되고 있습니다. 만주 집안현 방면에 남아 있는 장군총이라고 불리는 분묘의 형태와 매우 닮아 있습니다. 만주, 조선에서 고구려 능묘의 조사를 하셨던 후지타[藤田] 선생께 동명왕릉의 형식, 구조 등에 관해서 말씀을 부탁드리고자 합니다.후지타 이야기를 듣고 느낀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동명왕은 고구려의 시조이자 백제의 시조로도 되어 있습니다. 『東明』이라고도 쓰고 『朱蒙』으로 쓴다거나 『鄒牟』라고도 쓰는데, 요는 『トム(도무)』나 『チュモ(추모)』라고 하는 음의 가차(假借)라고 생각하는데 북쪽 민족의 선조로 추앙되는 왕입니다. 고구려의 왕들에 대한 전설은 이미 아시는 바와 같이 아버지는 천신입니다. 어머니는 강의 신인데 이는 고구려도 백제도 같은 점으로 일종의 천손사상입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의 시조 대대로 전부는 아니지만 다음 해에 동명왕이 하늘로 올라갔는데 용이 하늘로 데려갔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원래부터 하늘에서 내려온 신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고구려의 주몽전에도 내려온 곳, 혹은 승천한 곳에 제사지내고, 승천한 선조에게도 제를 올린다고 되어 있는데, 다시 말해 하늘에 제를 올린다고 적혀 있습니다. 동명왕의 묘가 없어도 전혀 지장이 없지만 조선에서는 전에 사라진 제(諸) 왕국의 능에 매우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도 신라, 고구려, 백제 등의 왕릉이라고 안 것에는 제를 올리고 있습니다. 스에마쓰[末松] 군은 잘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지금의 능전(陵殿)이라고 하는 것은 총독부가 참봉사수호인(參奉祀守護人)을 두고 전국에 많은 사람들을 배치해 국비(國費)로 보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라의 3개의 왕릉사전(王陵祀殿), 혁거세에 제사를 지내는 숭덕전(崇德殿), 탈해왕에 제사지내는 숭신전(崇信殿), 미추왕에 제사지내는 숭혜전(崇惠殿)이다. 백제도 수로왕릉, 왕의 □□능, ‘□□’부분에는 왕명이 기재되어 있지 않다. 또한 원본에는 여기서 소개한 바와 같이 ‘首露王陵’을 금관가야의 왕릉이 아니라 백제의 왕릉으로 적고 있는데 기록자가 확실히 알아듣지 못했던 것이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왕의 능’이 아니라 ‘廟’였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게 본다면 ‘溫祚王의 묘’일 가능성도 있다. 고구려는 동명왕의 능뿐으로 평양에 수인전(祟仁殿)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자릉은 물론 고려 때부터 있었습니다. 전(殿)과 능(陵)이라고 하는 것은 위패를 제사지내는 곳과 묘입니다. 고려의 것은 가능한 한 조사해서 대부분에 참봉사수호인을 붙여 두었습니다. 개성 부근에 가더라도 깨끗하게 청소된 묘는 지키는 사람이 붙어 있는 묘라고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세계에서도 없어진 선대 왕조의 묘에 제사지내는 나라는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고적 보존이라는 의미에서 제를 올리는 곳은 있으나 선조의 능에 제사지낸다는 것은 중국에도 없는 일입니다. 이는 총독부가 처음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조선이나 고려에서 이미 하고 있던 것입니다. 혹시 신라에서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선조의 능에 제사지내는 것은 일반 사람들뿐만 아니라 위정자들도 해 온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로 동명왕에 대한 신앙이라고 하는 것에서 조선에서의 고구려의 묘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동명왕릉이 선정된 것이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전 설명한 벽화가 있는 고분은 대부분이 관유지입니다. 고구려의 묘로서 이토록 아름답게 되어 있는 곳은 없습니다. 고구려의 묘는 요네다[米田] 군의 설명으로 알 수 있습니다만 이 방의 절반 정도의 방의 위쪽을 비스듬히 인방을 건너지르고, 그 위의 사각으로 된 곳에 비스듬히 돌을 쌓는 것을 상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 원색을 이 흰 벽에 그렸다고 생각해 보면 조금 칙칙한 것이 아니었나라고 생각합니다. 집안의 사신총 벽화도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만 조금 칙칙함 이상으로 조금 강한 색으로 보입니다. 우리들이 현재 보는 것 같은 고색(古色)이라고 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차분함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종류의 묘의 구조는 우리들이 알고 있는 한은 고구려의 고분에서 주로 보이는 것으로 만주와 조선에 있습니다. 몽고, 페르시아에도 비슷한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이것이 과연 그 방면에서 온 것인지 아닌지는 추후 연구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총(冢)을 만드는 것은 전(塼)이나 돌을 쌓는 2가지가 있습니다만 전은 아치입니다. 우리들이 느끼는 것은 이 돌을 쌓는 법이 크지 않아서인지는 몰라도 완전해, 천장이 부서지지 않는 한 무너지는 일은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러한 고임쌓기식의 궁륭천장은 건축상으로도 튼튼한 것이기 때문에 천 오륙백 년 전의 것이 이렇게 잘 남아 있는 것입니다. 사진을 봐서 벽화의 대략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만 매우 뛰어난 것으로 이 이상 발달한 것이 없지 않을까라는 정도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점 등에 관해서는 熊谷(宣夫)씨 쪽에서 이야기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이 이상으로 발달한 것이 있을 수 없지 않을까요? 강서의 벽화보다도 능숙하게 뛰어난 천장에 그린 해와 달과 같은 최상의 도안이고 아리미쓰[有光] 군이 가져온 백제의 전(塼) 有光敎一와 米田美代治가 1937년(昭和 12년)에 실시한 扶餘 窺岩面의 유적발굴조사에 의해 출토된 봉황문(鳳凰紋), 귀형문(鬼形紋) 등의 문양전을 가리킨다(有光敎一, 1937a, b). 과 같이 최상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오히려 그 이상으로 훌륭한 것이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공간에 운문, 당초문 등을 아로새긴 점, 따로따로 떨어뜨리고 어디에서 통일되어 있는 재미있는 점은 이 이상의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에 가면 더욱 위대한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우리들이 볼 수 있는 한은 육조 말기의 것으로서는 최상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4호분은 금은을 잘라 박아서 붙인 것입니다만 도양(圖樣)을 보고 고이즈미[小泉] 군은 고식(古式)이라고 설명했습니다만 모사를 보면 조금 시대가 내려오는, 상당히 발달한 시대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집안의 제17호분 구로다 겐지[黑田源次]가 조사할 당시의 고분번호로는 서강(西崗) 제62호에 해당되는데 현재의 오회분(五盔墳) 제5호분(우산(禹山) 제2105호묘)에 해당하는 것이다. 에는 금박은 아니나 금도금을 한 동(銅)의 화형금구(花形金具)가 붙어 있었습니다만 채색의 선명함에 더해 금은의 선명한 색깔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우리들이 보는 것보다 더 찬란한 정도였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동명왕릉에 관해서입니다만, 사실은 재작년 이맘때쯤 잠깐 보러 왔었습니다. 그때 그곳에 사는 사람에게서 그림이 있다는 것은 들었습니다. 동명왕릉에는 예전까지는 벽화가 없다고 생각해 왔으나 1974년의 조사에서는 벽화가 발견되었다고 한다(김일성종합대학, 1976, 26쪽). 여기서 藤田亮策가 말하는 『동명왕릉』이 의미하는 것은 『동명왕릉과 진파리 고분군』이지 않을까라고 생각되나, 만약 글자 그대로 동명왕릉을 가리키고 있다고 한다면 동명왕릉에는 일찍부터 벽화가 있었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던 것이 된다. 그 전에 고이즈미[小泉] 군도 조사했었습니다만 이 정도의 것이므로 벽화 정도는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조선에서 고분의 보존 상태는 스에마쓰[末松] 군의 이야기와 같이 지방의 사람들은 신용할 수 없습니다. 현재 입구가 열려 있는 고구려 고분은 10기가 있습니다만 구경하러 온 사람들에 의해 황폐해지고 있습니다. 집안현에 있는 것도 황폐해지고 있습니다. 동명왕릉에 벽화가 있다고 해 떠들썩하게 해 두려고 사실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우선 지정하는 것으로 조사했었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듣고 달라붙은 군대에 의해 세상 밖으로 나왔으므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어떻게 된 것은 아닐까라고 걱정했었습니다만 걱정할 정도의 것도 없었고 평양에서도 신속히 조사를 해 장래의 전망이 선 점에 대해서는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진에 관해서입니다. 깜깜한 묘실 속에서 어떻게 사진을 찍었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예전에 우리들이 조사할 때에는 촛불을 들고 가거나 회중전등을 가지고 갔었습니다. 최근에는 이 사진을 찍은 사가 순이치[澤俊一] 씨의 발명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거울의 반사를 이용해서 직접 벽면에 비추는 것이 아니라 입구에 와지(和紙)를 붙이고 거기에 거울을 반사시켜 비춥니다. 이렇게 하면 와지가 빛을 분산시켜 균등한 밝은 광선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이 이왕가미술관의 2층에도 벽화의 모사가 있습니다만, 화가가 고생하며 그렸지만 램프를 휴대해 그렸기 때문에 색감이 충분하지 않다고 말합니다만 무리한 일입니다. 거울을 사용하는 것은 사실은 그다지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벽화의 모사에 관해서는 우리들 누구라도 인정하는 오바[小場] 씨도 램프 이용파입니다만 사가[澤] 씨의 거울로 밝게 하는 법이 나오면서 벽화라는 것을 생각하면 의례 거울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직접 해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궁리해 내는 것은 꽤 어려운 일입니다. 이와 같이 와지[和紙]나 거울의 반사광을 이용해 고분의 실내를 촬영하는 것은 澤俊一에 의해 발명된 것 같은데 몇 시부터 행해졌는지는 불분명하다. 또한 와지만이 아니라 트레이싱 페이퍼도 사용했다. 일상적으로 산광기로 트레이싱 페이퍼를 사용해 사진촬영을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와지 등의 사용은 간단히 응용한 생각에 의한 것일 것이다. 小場恒吉에 의한 1930년의 강서중묘 벽화모사 당시에는 거울의 반사광을 이용했던 것 같으나(早乙女雅博他, 2005) 이 좌담회의 藤田亮策의 발언에 의하면 小場恒吉는 램프를 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절 속에 있는 불상 같은 것도 동일한 방법으로 확실히 볼 수 있습니다.고이즈미 이번에 조사한 벽화고분의 이야기는 대략적으로 말씀드렸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다소 시간이 있으므로 다과를 드시면서 잡담을 하고자 합니다.아리미쓰 이것으로 좌담회를 마치고자 합니다. 첨석해 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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