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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스트여닫기 용만산성(龍灣山城) 출토지 요녕성 개원시 고산진 용만촌 용만소학교(遼寧省 開原市 靠山鎭 龍灣村 龍灣小學校)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2009 2009년 춘계 전국 제3차 문물조사 기간에 개원시 고산진 용만촌 용만소학교에서 소형 산성 유적을 발견하였음.산성 안에서 고구려 시기의 승문 기와편을 발견하였기 때문에 고구려 성지인 것으로 판정됨.구조특징 성지는 토축임. 성문은 서벽의 남부 쪽에 하나 있음. 남, 서, 북 3면의 성벽은 보존 상태가 비교적 좋으며, 동벽은 이미 허물어졌음. 성내 서남 모서리에서 저수지 흔적이 확인됨.역사적 의미 용만산성은 시하유역에서 발견되었음. 용만산성에 대한 해석은 요북 고구려산성의 배치, 분포 상황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데, 철령 경내 고구려 산성은 기본적으로 동북-서남방향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가장 동변에 서풍 성자산산성이 포진해 있으며 그 다음에 서남방향으로 개원 고성자산성이, 다시 서남방향으로 마가채산성, 그 다음에 최진보산성, 청룡산산성(장루자산성) 등이 배치되어 있는 형국임. 용만산성을 발견하기 전에는 철령 경내 고구려 산성 간의 거리는 팔과수 고성자산성에서 마가채산성 간 거리가 가장 멀었으나 용만산성이 발견됨으로 인해서 이 거리를 메꾸어 주게 되었음. 요북 지구 고구려 산성의 분포 배치는 비슷한 거리를 두게 되어 모두 균일하게 분포하게 되었음. 이와 같은 소형 고구려 성지는 기왕의 고고 조사에서도 일찍이 발견된 바가 있음. 환인 사도하자향(四道河子鄕) 마안(馬安)산성은 산등성이를 따라 축조한 성지로, 전체 길이 약 400m의 석축 산성인데, 용만산성의 구조 및 축조 재료와 차이가 있으므로 이는 축조 연대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큼. 그러므로 고구려 산성은 용만산성처럼 규모가 아주 작은 종류의 산성이 있음을 증명해 주며, 용만촌에서 멀지않은 초가외자촌(肖家崴子村)에서 일찍이 여러 기의 적석묘와 석관묘 한 기가 발견된 적이 있는데 용만지역에 거주했던 고구려인과 관련된 것인지의 여부는 계속 탐구해 보아야할 문제임. 이 용만산성은 마가채산성과 같이 시하유역에 배치되어 있는 소형 산성으로, 그 남쪽의 철령 최진보산성과 서로 마주하고 있어 세 산성은 흡사 세발 달린 솥(鼎足)의 형세를 띠는 모습으로 배열되어 있음. 2기의 산성(마가채산성, 최진보산성)은 마치 몸 뒤에서 공제하는 형세를 띠므로 고구려 말기에 서남 방향에서 당나라 군대가 공격해오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이 곳에 우선적으로 축조한 핵심 산성이었을 것으로 추정임. 그러므로 철령 경내 고구려 산성 및 그 분포의 배열 규칙에 대한 연구는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것으로 이해됨.자연환경 개원시 고산진 용만촌 동쪽 용만소학교에 위치함. 용만산성은 고산진 용만촌 동쪽에 위치하며, 시하(柴河) 유역의 충적평원 북측의 하안 대지상에 있으며, 시하의 북안에 위치함.유물정보 승문기와편(繩文瓦片) 1점참고문헌 · 周向永·許超, 『鐵嶺的考古與歷史』, 遼海出版社, 2010

    • 건재북 고분군(建材北 古墳群)

    • 남구 고분군(南溝 古墳群)

    • 시하보 고분군(柴河堡 古墳群)

    • 쌍룡천 고분군(雙龍泉 古墳群)

    • 리스트여닫기 마가채산성(馬家寨山城) 출토지 요녕성 개원시 마가채촌(遼寧省 開原市 馬家寨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0철령시문물관리소(鐵嶺市文物管理所)1980년대 이래 철령시 문물관리소에서 여러 차례 조사함.1985 1985년 9월 1일 철령시 문물보호단위로 공포됨.구조특징 마가채산성의 지세는 험준하며, 산성의 북쪽은 높고 남쪽이 낮으며, 말발굽 모양의 산세를 따라 성벽을 축조하였음. 전체 둘레는 약 1,488m(약 1.5㎞)임. 네 성벽의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함.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있는 구간은 남벽의 동단, 동벽의 중단, 북벽의 서단, 서벽의 남쪽 구간 등임. 산 정상에서 하천변까지 외곽 성벽(토벽)을 쌓았음. 성벽은 산등성이를 따라 축조하였고, 성벽의 축조는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남벽과 동벽은 마사토와 깬돌(쇄석)을 혼합하여 다져 축조하였음. 벽체는 대부분 허물어졌으며 산등성이와 일체를 이루어 구별하기 어려움. 북벽과 서벽은 대부분 쐐기형 돌로 축조하였는데, 일찍이 벽체를 마사토로 다져 축조한 적이 있음. 자세히 조사한 결과 돌로 쌓은 벽체를 확인할 수 있음(북방문물; 철령의 고고와 역사 225). 동벽 바깥은 마가채 댐임. 댐을 아직 건설하지 않았을 때, 그 아래는 자하(紫河)지류인 사하(沙河)가 흐르고 있었으며, 성벽은 높은 곳에 임해 아래에 잇닿아있는데 수직 고도가 약 30m에 가까움. 지세가 특히 험함. 동벽 부분의 벽체 구간은 돌출한 암벽을 이용한 천연 벽체임. 다만 연결해서 쌓은 곳은 현재 선명하지 못함. 동벽의 남단에서 벽체 위에 4개의 서로 연결된 트인 곳(豁口)이 남아 있음. 트인 곳(豁口)의 평균 너비는 2~3m임. 그 내측은 성을 둘러싼 회곽도이며, 회곽도의 너비 3~6m로 균일하지 않음. 남벽 구간의 성문 통로와 서로 연결되어 비상시에 통로를 이용하였을 것임. 북벽의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며, 특히 서쪽 구간(西段)이 가지런하게 잘 남아있음. 기단부 너비 2.5m, 잔고(殘高) 2m이며, 성벽 최대 잔존 높이는 약 5m임. 서벽은 대부분 산등성이 바깥쪽에 조축하였음. 성벽 내측의 산등성이에서 돌과 흙을 채취하여 성벽을 축조하였는데 외벽의 높이가 높을 뿐 아니라 내벽도 흙을 채취해서 벽체의 높이를 높게 할 수 있었음. 또한 흙을 채취한 다음 형성된 도랑은 통신 연락용 회곽도 및 방어진지로 사용할 수 있었음. 다만 성 내측의 도랑 조성 시기는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음. 1990년대 조사 당시 성벽과 산등성이 사이 도랑(溝)의 너비는 약 10m, 깊이 2m, 길이 34m였음. 남벽 서쪽과 동쪽 구간은 산등성이 바깥쪽 또는 산등성이를 따라 성벽을 축조하였음. 골짜기 입구인 남벽 중단의 평탄지에는 황갈색 사질토(砂質土)와 회갈색 니토(泥土)를 번갈아가며 판축하였음. 외벽의 허물어진 단면을 통해 사질토층(7~8㎝), 점토층(2.5~3㎝), 간층(0.5㎝) 등을 번갈아 판축한 층위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음. 성벽 단면은 사다리꼴로서 기단부 너비 8m, 높이 4.6m, 윗면 너비 1.5m, 전체 길이 40m 전후임. 종전에 마가채 중학교 정문이 있던 자리에도 높이 5m, 길이 10m의 토축성벽이 있었다고 함. 북벽 동단의 바깥쪽 비탈 아래에 남북방향의 골짜기(溝谷) 입구(谷口)에 토벽을 가로로 구축해 놓았는데, “차단벽(墻外墻)”임. 차단벽은 산성의 성벽과 접속해서 구축한 것이 아님. 남북 방향의 골짜기(溝谷) 길이는 약 300m 이고, 차단벽의 규모는 높이 15m, 길이 80m 정도임. 산성 서벽과 남벽이 만나는 곳에 서향으로 뻗어있는 벽체 하나가 있고, 벽체의 양측에 마을 주민들이 “고려호(高麗壕)”라 부르는 깊은 참호(溝)가 파여 있음. 성벽의 서남모서리에서 시작된 토벽은 동서방향의 산등성이를 따라 가다가 ‘V’자형으로 꺾여 해발 187.9m의 산봉우리 정상까지 이어짐. 그런 다음 이 산봉우리의 남측 산비탈을 따라 내려와 마가채촌 소학교 서벽 외측을 지나 계속 남향으로 사하(沙河)(정리자 주: 원문의 자하는 사하의 착오로 판단됨)까지 이어짐. 사하의 남안에서 토벽(土墻)이 다시 출현하여 서남방향으로 뻗어 가다 삼가촌(三家村) 북산의 서쪽 산비탈까지 이어짐. 보존상태를 살펴 보면 마가채 소학교 서쪽 바깥에 성벽 기초부와 벽체가 남아 있음. 잔고는 1.6m, 기초 너비 2m, 윗 너비 0.5m임. 재료나 구축방법은 산성 남벽 중단의 토축성벽과 유사함.역사적 의미 대형산성의 과도성(過渡城), 위성성(衛星城)설이 있음. 마가채산성은 아랍하(阿拉河)와 청하, 두 하천이 만나는 곳의 구릉산지 서단(西端)에 있어 특별히 중요한 지리적 위치에 자리하고 있음. 전쟁 발생 시 대성과 호응하여 대성을 호위, 공제하는 작용을 하며 또 중·소형 산성에 예측하지 못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대성도 병사를 파병하는 등 군사적 지원을 함. 고성자산성은 마가채산성, 용담사산성과 마찬가지로 철령 최진보산성과 서풍 성자산산성 2기의 대형산성 사이에 위치하므로, 지리위치상 2개의 대형산성과 방어체계상 연관 관계가 있을 것임(주향영·조준위·이아빙, 1996). 군사방어 및 지방거점성설이 있음. 마가채산성은 철령 청룡산산성, 개원 용담사산성, 개원 고성자산성 등 요하 상류 일대 고구려산성과 여러 측면에서 유사함. 입지조건에서 보면, 마가채산성을 비롯한 요하 상류 일대의 고구려 성들은 송료대평원에서 요하 지류로 진입하는 길목에 위치하였을 뿐 아니라, 하천과 나란히 달리던 산줄기에서 하천 연안의 충적평지 쪽으로 돌출한 지형에 자리잡고 있음. 축성방식에 있어서도 산성으로 진입하는 입구에는 제방과 같은 거대한 토축성벽을 구축한 반면, 성을 둘러싼 산등성이에는 대체로 흙을 성토(盛土)한 토벽 혹은 토석혼축성벽을 쌓았음. 그러므로 마가채산성은 요하 상류일대의 다른 고구려산성과 비슷한 시기에 축조되었고, 성격과 기능도 유사하였다고 추정됨. 입지조건을 볼 때 마가채산성은 송요대평원에서 사하연안으로 진입하는 전략적 요충지를 방어하기 위해 축조하였다고 추정됨. 더욱이 마가채산성에서 사하 상류를 따라가면 혼하상류나 휘발하 일대로 통하는 시하 연안이 나온다는 점에서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함. 그리고 산성 서쪽 산등성이와 소항시 연안의 토벽이나 북벽 바깥쪽 골짜기의 토벽 등은 마가채산성이 사하 하류에서 상류로 진입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줌. 한편 마가채산성은 둘레 1.5㎞로 서풍 성자산산성, 철령 최진보산성 등의 대형산성보다 한 등급 아래인 중형산성으로 분류되지만 주거용 공간은 비교적 넓은 편임. 성 중앙에는 사찰이 들어설 정도로 평탄한 대지가 있으며, 산등성이 안쪽 경사면에도 계단상 대지를 만들어 주거용 공간으로 활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됨. 따라서 마가채산성도 다른 고구려산성처럼 군사방어뿐 아니라 지방지배를 위한 거점성으로 기능하였다고 추정됨. 마가채산성은 송료대평원에서 사하·시하로 진입하는 전략적 요충지를 방어하는 군사적 기능과 함께 사하·자하 연안일대를 지배하기 위한 지방 거점성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였다고 추정됨(여호규, 1999) 고구려 연진성(延津城)설이 있음. 고구려 멸망이후 당이 요동지역의 고구려고지에 연진주를 설치하였는데, 『요사(遼史)』지리지에는 동경도(東京道) 은주(銀州) 연진현(延津縣)(발해의 부수현(富壽縣)) 경내에 연진고성(延津故城)이 있다고 나옴. 요대(遼代)의 은주는 철령이므로 연진주(延津州)는 대체로 철령 동북방 10㎞ 거리에 위치한 마가채산성으로 비정됨(왕면후, 1986; 왕면후, 1994; 풍영겸, 1994)자연환경 개원시 동남쪽 27㎞ 떨어진 마가채촌 북쪽 약 100m의 요(凹)자형 산골짜기에 위치함. 마가채산성 내부에는 마가채 중학교가 있었는데 2006년에 구정용천사(九鼎龍泉寺)라는 사원이 들어섰음. 마가채산성은 서북에서 동남 방향으로 길게 뻗은 산줄기의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음. 산줄기로 이어지는 서북을 제외한 나머지 방면은 하천이나 충적 평지와 잇닿아 돌출지형을 이루고 있음. 동쪽과 남쪽으로는 사하(沙河)가 구불구불한 물길(流路)을 따라 산성의 서쪽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강 연안에는 폭 1~2㎞의 충적평지가 기다랗게 펼쳐져 있음. 산성의 서쪽으로는 단자산(担子山)에 접해 있으며, 동벽 아래에는 마가채 댐이, 남쪽으로는 마가채촌이 넓게 펼쳐져 있음. 사하는 소규모 하천으로 서쪽으로 10㎞ 정도 흘러가다가 개원·철령 경계지점에서 사하 본류와 합류한 다음 곧바로 요하로 유입됨. 그리하여 사하 연안을 따라 서쪽으로 나아가면 송료대평원에 도달하며, 송료대평원을 통해 요하 하류나 상류 방면으로 나아갈 수 있음. 또 동쪽으로 사하 상류를 따라 10㎞ 정도 가면 자하(紫河) 연안이 나옴. 자하는 길림합달령산맥(吉林哈達嶺山脈) 서쪽 사면에서 발원하 요하의 지류 가운데 비교적 큰 하천으로 각 방면으로 통하는 교통로가 잘 발달하였음. 특히 마가채산성을 기준으로 볼 때, 동쪽으로 자하 상류를 거슬러 혼하(渾河) 상류나 휘발하 방면으로 나아갈 수 있음. 마가채산성은 송료대평원에서 사하를 거쳐 자하 연안으로 진입하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음.유물정보 능형격자문암키와(菱形格文板瓦) 1점, 격자문암키와(方格文板瓦) 1점, 철촉(鐵鏃) 1점참고문헌 · 王綿厚, 「隋唐遼寧建置地理述考」『東北地方史硏究』 1986-1, 1986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합이빈출판사, 1994 · 曹桂林·王鐵軍, 「鐵嶺境內五座高句麗山城簡介」『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王綿厚, 「鴨綠江右岸高句麗山城硏究」『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北方史地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4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再探」『北方文物』 1995-3, 1995 · 周向永·俊偉·李亞氷, 「遼寧開原境內的高句麗城址」『北方文物』 1996-1, 1996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李龍彬, 「鐵嶺境內高句麗山城的幾個問題」『東北史地』 2008-4, 2008 · 國家文物局,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 西安地圖出版社, 2009 · 周向永·許超, 『鐵嶺的考古與歷史』, 遼海出版社, 2010 · 魏存成, 「中國境內發現的高句麗山城」『社會科學戰線』 2011-1, 2011

    • 리스트여닫기 용담사산성; 용담산성(龍潭寺山城; 龍潭山城) 출토지 요녕성 개원시 위원보진 용왕취촌(遼寧省 開原市 威遠堡鎭 龍王嘴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27 1927년 10월, 일본인 팔목장삼랑(八木獎三郞)이 위원보(威遠堡) 일대의 유적과 함께 용담사(龍潭寺)와 봉화대(烽火臺)를 조사한 바 있음.1962 1962년 4월 개원현(開原縣)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됨1980철령시문물관리소(鐵嶺市文物管理所)1980년대 이래 철령시 문물관리소에서 여러 차례 조사한 바 있음.1984철령시문물관리소(鐵嶺市文物管理所)1984년 철령시 문물보호단위로 공포됨.1988 1988년 12월 요녕성 문물보호단위로 공포됨.구조특징 산성은 동쪽을 제외한 사방 전체가 7개의 산봉우리와 산등성이에 둘러싸여 있어 성벽은 7개의 상봉우리에 연접해서 만들었음. 또한 산줄기로 이어지는 서북쪽을 제외한 사면 전체가 구하(寇河)와 그 지류 연안의 충적평지와 잇닿아있음. 산성의 바깥쪽은 절벽에 가까울 정도로 경사가 가파르며, 산등성이 안쪽 경사면은 완만한 편이며 성 중앙에는 평탄한 평지가 비교적 넓게 자리잡고 있음. 산성은 동쪽의 좁은 입구를 제외한 사방 전체가 7개의 산봉우리와 산등성이로 둘러싸여 있음. 성벽은 7개의 산봉우리와 그것을 잇는 산등성이를 따라 성벽을 축조하였음. 평면은 불규칙한 방형임. 현재 성벽 잔고는 약 2.5m. 윗 너비 1.5m 전후임. 무너진 성벽구간을 보면 성벽은 깬돌(碎石; 잡석)과 마사토(山皮土)를 섞어서 축조하였음(토석혼축). 다만 서벽 남쪽 부분의 허물어진 단면에는 깬돌(碎石; 잡석)은 없고 황색의 사질토만 노출된 것으로 보아 흙만 성토(盛土)하여 쌓은 것으로 추정되며, 동문 양측에는 원래 석벽이 있었다고 함. 용담사산성은 기본적으로 마사토와 잡석을 섞어서 쌓은 토석혼축성벽임(토성 ; 왕우랑·왕굉북, 1994/ 석성 ; 주향영, 1994)역사적 의미 무순 고이산성, 집안 환도산성과 축선상에 있는 전략방어성설이 있음. 요하 북쪽의 동쪽 산(東部 山)구역의 철령, 개원, 서풍의 고구려산성은 모두 요하 좌안의 남북으로 하나의 축선에 건립되어 있어 무순 고이산성, 집안 환도산성과 한 줄의 전략방어선을 구성함. 성내 출토 유물로 볼 때도 무순 고이산성, 집안의 환도산성과 매우 일치함(조계림·왕철군, 1994). 대형산성의 과도성(過渡城), 위성성(衛星城)설이 있음. 용담사산성은 구하(寇河)와 엽혁하(葉赫河)가 만나는 곳에 위치함. 전쟁이 발생했을 때 대성과 호응하여 대성을 호위, 공제하는 작용을 하며 또 중 소형 산성에 예측하지 못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대성도 병사를 파병하는 등 군사적 지원을 함. 용담사산성은 마가채산성, 고성자산성과 마찬가지로 철령 최진보산성과 서풍 성자산산성 2기의 대형산성 사이에 위치하므로, 지리위치상 2개의 대형산성과 방어체계상 연관 관계가 있을 것임(주향영·조준위·이아빙, 1996). 군사방어 및 지방 거점성설이 있음. 용담사산성은 철령 청룡산산성, 개원 마가채산성, 개원 고성자산성 등 요하 상류 일대 고구려산성과 여러 측면에서 유사함. 입지조건을 보면, 이들은 송료대평원에서 요하 지류로 진입하는 길목에 위치하였을 뿐 아니라, 하천과 나란히 달리던 산줄기에서 하천 연안의 충적평지 쪽으로 돌출한 지형에 자리잡고 있음. 그리고 축성방식에 있어서도 지형조건에 따라 토벽과 토석혼축성벽 등을 다양하게 구사하였음. 그러므로 용담사산성은 요하 상류일대의 다른 고구려산성과 비슷한 시기에 축조되었고, 성격과 기능도 유사하였을 것으로 추정됨. 입지조건을 볼 때 용담사산성은 송료대평원에서 구하 연안으로 진입하는 전략적 요충지를 방어하기 위해 축조되었다고 추정됨. 용담사산성이 위치한 위원보 일대는 대흑산맥 남단과 길림합달령 서북단의 교차지점으로서 송료대평원에서 길림합달령으로 나아가는 교통로 가운데 가장 북쪽 진입로의 길목임. 이곳에서 구하 연안로를 거슬러 동요하(東遼河) 방면으로 나아갈 수 있을 뿐아니라, 소지류에 의해 종횡으로 연결된 충적평지를 따라 남쪽의 청하·자하·범하 연안으로도 진입할 수 있음. 따라서 용담사산성은 요하 상류의 송료대평원에서 구하로 진입하는 전략적 요충지를 방어하기 위하 군사방어성이었다고 추정됨. 위원보 일대는 명청대에도 요하 상류 일대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중진이었음. 한편, 용담사산성은 둘레 1,450m로 서풍 성자산산성, 철령 최진보산성 등의 대형산성보다 한 등급 아래인 중형산성으로 분류할 수 있지만 주거용 공간은 비교적 넓은 편임. 성 중앙에는 사찰이 건립될 정도로 평탄한 대지가 있으며, 산등성이 안쪽 경사면에도 계단상 대지를 만들어 주거용 공간으로 활용하였음. 따라서 용담사산성도 다른 고구려산성처럼 군사방어뿐 아니라 지방지배를 위한 거점성으로 기능하였다고 추정됨. 용담사산성은 송료하대평원에서 구하로 진입하는 전략적 요충지를 방어하는 군사중진이자 구하 연안일대를 지배하기 위한 지방 거점성이었던 것임(여호규, 1999).자연환경 용담산성은 개원시 동북쪽 위원보향 진가촌(陳家村)에서 남쪽으로 0.5㎞ 떨어진 용담산에 위치함. 위원보진(威遠堡鎭) 용왕취촌(龍王嘴村) 북쪽에 위치함. 성 안에는 현재 ‘칠정용담사(七鼎龍潭寺)’가 자리잡고 있음. 산성 동측에서 약 1.5㎞인 곳에서 구하(寇河)가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흘러와 청하(淸河)에 유입됨. 구하는 대흑산맥과 길림합달령(哈達嶺) 산간지대에서 발원하여, 서풍과 위원보 일대를 지나 노성진에서 청하와 합류한 다음, 개원시 북쪽을 에돌아 요하에 유입됨. 산성의 동, 서, 북쪽 3면은 7개의 산봉우리에 둘러싸여 있으며, 남쪽은 구하 하곡 평원지대로 지세가 비교적 개활함. 용담사산성에 올라서면 서남쪽으로는 광활하게 펼쳐진 송료대평원, 동북쪽으로는 구하 연안을 따라 기다랗게 이어진 충적평지가 한눈에 들어옴. 구하 중상류의 충적평지는 동료하(東遼河)와의 분수령 직전까지 이어져 있으며 또한 동남쪽으로 소지류와 야트막한 구릉을 통해 청하 연안의 충적평지와 이어져 있으며, 청하 연안의 충적평지는 다시 남쪽으로 시하·범하 연안의 충적평지와 종횡으로 연결되어 있음. 위원보 일대는 송료대평원에서 길림합달령으로 나아가는 여러 교통로 가운데 가장 북쪽 진입로의 길목으로 동료하 방면 뿐만 아니라 남쪽의 청하·자하(柴河)·범하(汎河) 연안으로도 나아갈 수 있는 요충지임.유물정보 능형격자문암키와편(菱形格子紋瓦片) 1점, 철제칼(鐵刀) 1점, 철촉(鐵鏃) 1점참고문헌 · 八木獎三郞, 「開豊線の龍潭寺及威遠山邊門地」『續滿洲舊蹟志』, 南滿洲鐵道株式會社, 1929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初探」『中國考古學會第五次年會論文集』, 文物出版社, 1988 · 細谷良夫, 『中國東北部における淸朝の史跡』, 東北大學, 1991 · 周向永, 「龍潭寺及龍潭山城」『文化博覽』 1994-9, 中國考古集成 編委會, 1994 · 周向永, 「龍潭寺及龍潭山城」『中國考古集成』 東北卷 兩晉至隋唐(二), 北京出版社, 1996 · 曹桂林·王鐵軍, 「鐵嶺境內五座高句麗山城簡介」『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합이빈출판사, 1994 · 王綿厚, 「鴨綠江右岸高句麗山城硏究」『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北方史地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4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再探」『北方文物』 1995-3, 1995 · 周向永·趙俊偉·李亞氷, 「遼寧開原境內的高句麗城址」『北方文物』 1996-1, 1996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馮永謙, 「高句麗千里長城建置辨」『社會科學戰線』 2002-1, 2002 · 李龍彬, 「鐵嶺境內高句麗山城的幾個問題」『東北史地』 2008-4, 2008 · 國家文物局,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 西安地圖出版社, 2009 · 周向永·許超, 『鐵嶺的考古與歷史』, 遼海出版社, 2010 · 張福有·孫仁傑·遲勇, 「高句麗千里長城調查要報」『東北史地』 2010-3, 2010 · 魏存成, 「中國境內發現的高句麗山城」『社會科學戰線』 2011-1, 2011

    • 리스트여닫기 고성자산성; 팔과수성자산성; 팔과수고력성(古城子山城; 八棵樹城子山城; 八棵樹高力城) 출토지 요녕성 개원시 팔과수향(구 팔과수진)(遼寧省 開原市 八棵樹鄕(舊 八棵樹鎭))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0철령시문물관리소(鐵嶺市文物管理所)1980년대 이래 철령시 문물관리소에서 여러 차례 조사함.1985 1985년 9월 1일 철령시 문물보호단위로 공포됨.구조특징 고성자산성의 모습은 멀리서 조망할 때 복두(覆頭)같으며, 정상부는 아주 평탄함. 성벽은 산등성이를 따라 구축하였는데, 서쪽이 트인 반원형의 산골짜기에 축조하였음. 규모는 전체 길이 약 1,100m임. 성벽은 산등성이를 따라 축조하였음. 성벽은 마사토(山皮土)와 깬돌(碎石)을 혼합해서 축조하였고 성벽은 토축임(왕우랑·왕굉북, 1994) 남벽과 북벽의 중간 지점에는 소성(小城)이 있는데, 현지 주민들은 이것을 “남(북)화원(南(北) 花園)”이라고 부름. 이러한 종류의 소성은 산등성이 바깥으로 돌출한 자연 산세를 이용해, 바깥으로 돌출한 성벽 내측에 내벽(內墻)을 보축하여 만들었음. 이는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 산봉우리 안팎에 모두 성벽을 축조한 것임. 이러한 종류의 시설은 산성의 방어와 관련 있음. 남측의 소성은 동서 길이 56m, 남북 최대 너비 14m임.역사적 의미 대형산성의 과도성(過渡城), 위성성(衛星城)설이 있음. 고성자산성은 아랍하(阿拉河)와 청하(淸河), 두 하천이 만나는 곳의 구릉산지 서단(西端)에 있어 특별히 중요한 지리위치에 자리하고 있음. 전쟁이 발생했을 때 대성과 호응하여 대성을 호위, 공제하는 작용을 하며 또 중 소형 산성에 예측하지 못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대성도 병사를 파병하는 등 군사적 지원을 함. 고성자산성은 마가채산성, 용담사산성과 마찬가지로 철령 최진보산성과 서풍 성자산산성 2기의 대형산성 사이에 위치하므로, 지리위치상 2개의 대형산성과 방어체계상 연관 관계가 있을 것임(주향영·조준위·이아빙, 1996). 군사방어 및 지방거점성설이 있음. 고성자산성은 철령 청룡산산성(장루자산성), 개원 마가채산성 등 요하 상류 일대 고구려산성과 여러 측면에서 유사함. 입지조건을 보면, 이들은 송료대평원에서 요하 지류로 진입하는 길목에 위치하였을 뿐 아니라, 하천과 나란히 달리던 산줄기에서 하천 연안의 충적평지 쪽으로 돌출한 지형에 자리잡고 있음. 그리고 축성방식에 있어서도 지형조건에 따라 토벽과 토석혼축성벽 등을 다양하게 구사하였음. 그러므로 고성자산성은 요하 상류일대의 다른 고구려산성과 비슷한 시기에 축조되었고, 성격과 기능도 유사하였을 것으로 추정됨. 입지조건을 볼 때 고성자산성은 송료대평원에서 요하의 지류로 진입하는 길목은 아니지만, 청하의 여러 지류가 갈라지는 분기점 바로 안쪽에 자리잡고 있음. 특히 고성자산성에서 청하 상류를 따라 동남쪽으로 가면 혼하, 휘발하의 분수령이 나오며, 이곳을 통해 압록강 중류일대로 나아갈 수 있음. 따라서 고성자산성은 송료대평원에서 청하를 거쳐 혼하나 휘발하 일대로 나아가는 전략적 요충지를 방어하기 위해 축조하였다고 파악됨. 삼면이 청하와 아랍하라는 천연해자로 둘러싸여 있고, 산줄기에 잇닿은 동쪽을 제외하면 삼면이 급경사인 돌출지형이라는 사실 등은 고성자산성이 군사방어성임을 단적으로 보여줌. 한편, 고성자산성은 둘레 1.1㎞로 대체로 중형산성으로 분류되지만 주거용 공간은 비교적 넓은 편임. 성 내부에는 동서 방향의 평탄한 골짜기가 두 갈래로 기다랗게 놓여 있고, 산등성이 안쪽 경사면도 아주 완만하여 주거용 공간으로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음. 그리고 성벽 안쪽 거의 전 구간에 병사용 주거지를 마련한 것으로 보아 내부 공간 가운데 상당 부분은 일반 주거용으로 활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됨. 연못을 중심으로 주변의 산비탈에서 토기편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것은 이를 반영함. 특히 서벽 안쪽 대지에서 기와편이 대량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이 부근에 상당히 중요한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충정됨. 따라서 고성자산성도 다른 고구려산성처럼 군사방어뿐 아니라 지방지배를 위한 거점성으로 기능하였다고 추정됨. 고성자산성은 송료대평원에서 청하 상류일대의 여러 소지류로 진입하는 전략적 요충지를 방어하는 군사적 기능과 함께 청하 연안일대를 지배하기 위한 지방 거점성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였다고 추정됨(여호규, 1999).자연환경 개원시 팔과수향(구 팔과수진)에서 동쪽으로 7.5㎞ 거리의 고성자촌(古城子村) 동쪽(동북 100m; 曹桂林·王鐵軍, 『遼海文物學刊』1994-2) 산에 위치함. 남쪽으로 청하(淸河)와 1.5㎞ 떨어져 있으며, 북쪽으로 청하의 지류인 아랍하(阿拉河)와 2.5㎞ 떨어져 있음. 아랍하는 동에서 서로 흐르다가 청하에 유입되며, 고성자산성은 두 하천이 만나는 곳의 구릉산지 서쪽 끝(西端)에 있어 특별히 중요한 지리위치에 자리하고 있음. 고성자산성의 서쪽으로는 충적평원이 펼쳐져 있는데, 남북 양쪽의 청하와 그 지류인 아랍하 연안에도 충적평지가 기다랗게 펼쳐져 있음. 청하와 아랍하는 산성이 위치한 동서 방향의 산줄기를 휘감으면서 나란히 서류하다가 산성 서쪽 3-4㎞ 지점에서 합류한 다음 서쪽으로 흘러나감. 그리고 팔과수향 소재지 서쪽 7㎞ 지점에서 서남류하던 연반하(碾盤河)와 합류하여 큰 하천을 이룬 다음 다시 서쪽으로 흘러나가고 있음. 현재 청하와 연반하 합류지점 서쪽에는 개원-청원간 도로의 소피둔 다리가 있고, 청하 하류에는 청하댐이 건설되었는데, 소피둔 다리 직전 지점까지 수몰되었음. 이처럼 고성자산성 서쪽 일대는 청하와 아랍하, 청하와 연반하의 합류지점으로서 청하 중상류 일대 가운데 충적평지가 가장 넓게 발달한 지역임. 그리고 송요대평원에서 청하를 거슬러오다가 청하 본류를 비롯하여 연반하와 아랍하 등 여러 방면으로 교통로가 갈라지는 분기점이기도 함. 특히 고성자산성에서 청하 상류를 거쳐 동남쪽으로 나아가면 혼하(渾河)·휘발하(揮發河)·청하의 분수령인 청원(淸原)·유하(柳河)의 경계지역이 나옴. 고성자산성은 청하 중상류의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음.유물정보 철촉(鐵鏃) 1점, 토제숟가락(陶匙) 1점, 그물추(網墜) 1점, 방추차(紡輪) 1점, 암키와편(板瓦片) 1점, 마포흔기와(布文瓦) 1점, 와편(瓦片) 1점, 돌절구(石臼) 1점참고문헌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初探」『中國考古學會第五次年會論文集』, 文物出版社, 1988 · 陳大爲, 『遼寧境內高句麗遺蹟』 『遼海文物學刊』 1989-2, 1989 · 細谷良夫, 『中國東北部における淸朝の史跡』, 東北大學, 1991 · 王綿厚, 「鴨綠江右岸高句麗山城硏究」『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합이빈출판사, 1994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北方史地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4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再探」『北方文物』 1995-3, 1995 · 曹桂林·王鐵軍, 「鐵嶺境內五座高句麗山城簡介」『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周向永·趙俊偉·李亞冰, 「遼寧開原境內的高句麗城址」『北方文物』 1996-1, 1996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李龍彬, 「鐵嶺境內高句麗山城的幾個問題」『東北史地』 2008-4, 2008 · 國家文物局,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 西安地圖出版社, 2009 · 周向永·許超, 『鐵嶺的考古與歷史』, 遼海出版社, 2010 · 魏存成, 「中國境內發現的高句麗山城」『社會科學戰線』 2011-1, 201

  • 리스트여닫기 서풍현(西豐縣)

    • 리스트여닫기 금성산산성(金星山山城) 출토지 요녕성 서풍현성 금성향 금성촌(遼寧省 西豊縣城 金星鄕 金星村)구조특징 성터의 평면은 정방형이고 잔존 높이는 2m임. 북쪽에 문이 하나 있음.자연환경 금성산산성은 요녕성 서풍현성 동남쪽 금성향 금성촌 북쪽 3리 거리의 금성산에 위치함.유물정보 니질홍갈색토기손잡이(泥質橋狀耳) 1점, 포문기와(布文瓦) 1점참고문헌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北方史地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4

    • 리스트여닫기 장가보산성(張家堡山城) 출토지 요녕성 서풍현 화륭향(遼寧省 西豊縣 和隆鄕)구조특징 산성은 산세를 따라 산등성이에 축조하였음. 성벽은 바위절벽을 이용해 성돌(석괴)로 쌓아 만들었음. 성문은 골짜기 입구쪽에 있음. 산성내에 우물(泉井) 및 저수지가 있음.자연환경 장가보산성은 서풍현 동남부 화륭향 성산촌 장가보 북쪽 산정상부에 위치함. 산성은 길림합달령산맥(吉林哈達嶺山脈)의 험준한 고개 사이에 자리잡고 있으며, 청하(淸河)와 연반하의 발원지임.참고문헌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합이빈출판사, 1994 · 王綿厚, 「鴨綠江右岸高句麗山城硏究」『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魏存成, 「中國境內發現的高句麗山城」『社會科學戰線』 2011-1, 2011

    • 리스트여닫기 항요산성(缸窯山城) 출토지 요녕성 서풍현 평강진 향요둔(遼寧省 西豊縣 平崗鎭 缸窯屯)구조특징 산 위에 위치하고 평면은 장방형임. 성벽은 토석 혼축 구조이며, 석벽 기초 잔고 2m임. 북쪽에 문이 하나 있음(북문). 산성 바깥쪽에서 큰 면적의 붉은색을 띠는 불에 탄 흙덩이, 붉은색 및 회색의 토기 구연부를 발견하였음.자연환경 항요산성은 서풍현 평강진 향요둔 동쪽 450m 거리에 위치함.유물정보 소토(燒土) 1점, 토기구연부(陶口沿) 1점참고문헌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再探」『北方文物』 1995-3, 1995 · 國家文物局,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 西安地圖出版社, 2009 · 魏存成, 「中國境內發現的高句麗山城」『社會科學戰線』 2011-1, 2011

    • 리스트여닫기 성자산산성; 양천자산성(城子山山城; 凉泉子山城) 출토지 요녕성 서풍현 양천진 성자산(遼寧省 西豊縣 凉泉鎭 城子山)연대 초축 시기는 4세기 중반 전후한 시기(여호규 1999) 고구려, 요~금 시대(국가문물국 2009) 6세기 말~7세기 전반(주향영 2009)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63 1963년 9월 30일 요녕성 문물보호단위로 지점됨.1973요녕성문물조사대(遼寧省文物調査隊)1073년 5월 요녕성 문물조사대에서 조사한 적이 있음.1991철령시, 서풍현문물관리소(鐵嶺市, 西豊縣文物管理所)철령시와 서풍현 문물관리소의 주향영(周向永), 조수리(趙守利), 형걸(邢傑) 등이 1970년대의 조사를 바탕으로 정밀조사를 실시하였음.(周向永·趙守利·邢傑, 1993 「西豊城子山山城」『遼海文物學刊』1993-2).1993 1993년 10월 5-7일에 맹상충(孟祥忠) 등과 서풍현 문물관리소의 조수리(趙守利), 형걸(邢傑) 등이 성자산산성 서남쪽의 토벽을 조사하였음(孟祥忠, 1993 「西豊城子山山城考」『瀋陽文物』1993-2).2007~2008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서문, 수구문, 망대 등을 발굴조사하였음(周向永, 2009 「西豊城子山山城始建年代再考」『東北史地』2009-02), (周向永·許超, 2010 『鐵嶺的考古與歷史』 遼海出版社).구조특징 성자산산성은 동서가 약간 길고 남북이 좁은 불규칙한 타원형을 띰. 성자산산성 동측의 주봉은 해발 760.3m이며 성내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임. 주봉에서 남북방향으로 양측에 각각 산줄기(지맥)가 뻗어 있는데 반고리 모양(半環狀)을 띠며 주봉 서측에서 만나 골짜기 입구(谷口)를 형성함. 산성은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으며 산등성이 안팎의 경사면은 모두 가파르며, 남벽과 북벽의 안쪽면은 비교적 완만함. 평지는 전체 규모에 비해 협소함. 주봉에서 골짜기 입구까지 동서간 거리는 약 1,500m, 양측 산줄기의 남북간 거리는 800~900m. 산성의 전체 둘레는 4393.4m(성문과 수구문의 너비는 미포함)이고, 그 중에 천연성벽(초벽장)의 길이는 322.8m, 인공성벽 길이는 4070.6m임. 동서 길이 1,350m, 남북 길이 975m, 둘레 4,409m(풍영겸, 1994)이라는 측정치와 동서 길이 1,350m, 남북 너비 875m(국가문물국, 2009)라는 측정치가 있음. 산성은 성벽, 성문, 수문, 망대, 외위성 등 몇 부분으로 나뉘어짐. 산성의 성벽은 모두 석축이며, 산등성이를 따라 축조하였으며 기복이 완연함. 벽체는 천연성벽(초벽장)과 결합하는 곳이 모두 10부분으로 견고하며, 오랜 시간이 지난 오늘까지도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음. 성벽(석벽)은 산세가 뻗어나간 방향을 따라 축조하였는데, 어떤 것은 산등성이에, 어떤 것은 산등성이 외측에 축조하였으며, 어떤 성벽은 자연 산세를 이용하여 초벽장을 병풍으로 삼았으며, 어떤 것은 천연 석벽 위에 석벽을 증축하였으며, 초벽장 사이의 빈 틈에도 전부 성돌을 쌓아 벽체와 초벽장이 마치 개 이빨처럼 서로 맞물려 있어 빈틈이 조금도 없음. 성벽의 보존 상태는 대부분 완전하며, 다만 일부분 성벽상에 수목이 자라서 파괴된 부분이 있음. 수문의 외벽 표면은 부근 주민들이 채취해가서 파손되었음.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성벽 구간은 남벽 중간 구간, 서벽 남쪽 구간과 중간 구간, 북벽의 중간 구간과 서쪽 구간, 동벽의 남쪽 구간임. 성벽의 높이는 일반적으로 안쪽이 낮고 바깥쪽이 높은데 지세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성벽의 높이가 균일하지 않음. 이는 방어에 편리함. 외벽의 높이는 최저 1.3m에서 최고 5m에 달함. 성벽의 두께는 평균 0.8-1.5m 사이임. 성문, 수구문(水門) 외벽은 약간 두터움. 파괴된 성벽의 단면을 관찰하면, 석벽의 내외벽 표면은 비교적 잘 다듬은 방형 혹은 장방형의 석괴를 쌓아 만들었음. 성돌은 바깥 면만 약간 다듬었으며, 바깥쪽이 크고 안쪽이 작은 쐐기형돌(楔形石)임. 벽체 중간은 불규칙하게 다듬은 깬돌(잔돌, 할석)로 채웠으며, 층단 엇물림식 축조방법(干揷的方法)을 채용하여 석벽이 일체가 되도록 견고하게 축조하였음. 성벽의 단면은 사다리꼴(梯形)이며, 기초는 너비는 평균 2-3m임. 성벽의 장력(拉拉力)을 강화하기 위해 초벽장(천연성벽) 부근의 험준한 곳에 길쭉한 돌(長條拉結石)을 설치하여 벽체를 견고하게 만들었음. 이러한 종류의 설치물은 서문에서 수구문 사이의 성벽 구간에서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음. 서풍 성자산산성 내에 골짜기(溝谷)가 종횡하고 평지는 매우 적어서, 모두 성안의 완만한 산비탈 혹은 지대가 낮고 움푹 패인 곳에 제언(攔水壩), 저수지, 건물지, 흙 구덩이(土坑), 산길(盤道) 등의 유적이 있음. 성 내에서 5곳, 성 바깥에서 1곳 등 모두 6개의 건물지를 발견하였음.역사적 의미 고구려 부여성설[이문신(李文信)·풍영겸(馮永謙), 1994]이 있음. 군사방어성 및 지방지배의 거점 기능설이 있음. 성자산산성 주성은 총 둘레 4㎞ 이상인 대형산성이지만 내부에는 평지가 아주 협소하며, 안쪽 산비탈도 매우 가파르기 때문에 주거용 공간으로 활용하기 힘듦. 이러한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산성 서쪽에 대동구(大東溝)와 성자구(城子溝)골짜기를 감싼 5㎞에 달하는 외위성(外圍城)을 축조한 것으로 추정됨. 그러나 외위성은 석성(石城)인 본성과 달리 토성으로서 본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에 축조되었다고 추정됨. 즉 성자산산성은 처음에는 군사방어성으로 구축되었다가 나중에 지방지배를 위한 거점성의 기능을 보완하였던 것임. 따라서 서풍 성자산산성은 요하 상류일대의 다른 고구려산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고, 처음에는 주로 군사방어성의 기능을 수행하였다고 추정됨. 입지조건이나 축성법 등이 성자산산성과 가장 유사한 철령 최진보산성의 지리적 위치를 살펴보면, 범하 북안에 위치한 최진보산성은 성자산산성처럼 압록강 중류일대에서 혼하 하류의 요동평원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요하 상류일대로 진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함. 즉 요하 상류일대의 고구려산성이 대체로 송료대평원에서 지류 연안으로 진입하는 길목을 방어하기 위해 구축된 반면, 성자산산성은 최진보산성과 함께 압록강 중류일대에서 휘발하(輝發河)나 혼하 상류를 거쳐 곧바로 요하 상류로 나아가는 전략적 요충지를 장악하기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임. 이처럼 성자산산성과 최진보산성이 고구려가 이 지역으로 진출한 초기 단계에 축조되었다면, 요하 지류 연안 길목에 위치한 다른 고구려산성들은 고구려가 이 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어느 정도 다진 단계에서 구축되었다고 추정됨. 성자산산성과 최진보산성의 입지조건이나 축성법이 압록강 중류일대의 고구려 초기 산성과 유사한 반면, 다른 고구려산성은 이들과 뚜렷이 구별된다는 점은 이를 반영함. 그리고 성자산산성이나 최진보산성은 진출 초기에 축조되었기 때문에 군사방어적 기능이 가장 먼저 고려되었을 것임. 두 산성이 다른 산성과 달리 험준한 산줄기 내부에 위치하였으며, 특히 성자산산성은 집안 패왕조산성(覇王朝山城)처럼 골짜기로 깊숙이 들어온 다음 산성 입구로 진입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반영함. 따라서 성자산산성은 4세기 중반을 전후한 시기에 군사방어성으로 구축되었다가, 고구려가 이 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다진 단계에서 지방지배를 위한 거점성으로서의 기능을 보완하기 위해 외위성을 축조하였다고 추정됨(여호규, 1999). 2007~2008년 조사시에 서문 남측 성벽 하단의 성돌을 채워 넣어 높은 곳에서 고구려 기와를 대량으로 발견하였는데, 주로 성벽의 기초부에서 집중 출토됨. 이로보아 고구려 시기 이후에 혼입되었을 가능성은 없고 성벽 축조 당시에 혼입된 것으로 파악됨. 또한 서문 안쪽의 북측 옹성벽을 발굴할 때는 성벽 아래에서 요대의 회색 포문 기와편이 대량으로 출토됨. 이로보아 옹성의 구조는 요·금대에 중건한 것으로 판단됨. 그동안 성자산산성에서는 완형 와당 1건, 와당 잔편 20건이 출토되었는데, 모두 6판 연화문와당으로 그 중 3개는 반원형 연잎이고, 그 사이에 삼각유돌형(三角乳突形) 연꽃 3개를 배치하고, 연잎과 연꽃 사이에는 ‘Y’자형 꽃술(蓮蕊) 6개를 배치하였음. 이러한 와당은 늦은 시기의 것으로 발해 와당과도 상당히 유사함. 또한 망대(5호 건물지)도 본대(本臺)에 계단을 설치한 감필법(嵌筆法) 축조방식보다 늦은 것임. 이로 보아 성자산산성의 초축시기는 6세기 말~7세기 전반으로 파악되며, 천리장성의 기점인 부여성으로 비정됨(주향영, 2009).자연환경 요녕성 서풍현 양천진에서 남쪽으로 7.5㎞ 떨어진 성자산에 위치함. 서북쪽 58㎞ 거리에 서풍현 소재지가 있음. 성자구(城子溝) 골짜기 입구에는 사슴농장이 있으며, 골짜기를 따라 남쪽으로 2㎞ 정도 가면 성자산산성의 서쪽 입구가 나옴. 그리고 골짜기에 개설된 지방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 개원시(開原市) 임풍향(林豊鄕)을 거쳐 팔과수향(八棵樹鄕) 고성자(古城子)산성으로 나아갈 수 있음. 성자산산성은 하천 연안로를 따라 청하(淸河) 유역, 북쪽으로 구하(寇河), 남쪽으로 시하(柴河)·범하(汎河) 일대까지 나아갈 수 있음. 특히 연반하(碾盤河) 상류쪽으로는 길림합달령(吉林哈達嶺)산맥을 넘어 휘발하(輝發河)·혼하(渾河)의 분수령 일대로 진입 가능함. 성자산산성은 비록 험준한 산줄기에 자리잡고 있지만, 하천 연안로를 통해 사방으로 나아갈 수 있는 교통로상의 요충지임. 성자산산성이 자리한 곳은 청하(淸河)의 지류인 연반하(碾盤河) 중류 연안임. 성자산산성의 북쪽을 지나가는 연반하 중류 연안에는 폭 1-2㎞, 길이 수십 ㎞의 충적평지가 하천을 따라 길게 펼쳐져 있으며, 이 충적평지는 하류방면으로 청하 연안으로 이어지며, 상류로는 발원지 직전까지 펼쳐져 있음. 산성의 동·남·서 삼면으로는 험준한 산줄기가 이어짐. 산성의 동쪽과 서쪽에는 유수천(楡樹川)과 성자구(城子溝)라는 골짜기가 남북방향으로 길게 놓여 있고, 골짜기 안에는 계절성 하천이 북류하여 연반하로 흘러들고 있음. 성자구 건너편에는 18개의 작은 봉우리로 이어진 산등성이가 남북으로 기다랗게 뻗어있음. 산성이 자리 잡은 성자산은 해발 760.3m로 상당히 험준함.유물정보 평기와(平瓦) 4점, 와당(瓦當) 2점참고문헌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初探」『中國考古學會第五次年會論文集』, 文物出版社, 1988 · 吳長山, 「西豊城子山山城」『遼寧大學學報』 1989-4, 1989 · 周向永·趙守利·邢傑, 「西豊城子山山城」『遼海文物學刊』 1993-2, 1993 · 孟祥忠·潘國慶·鄭淑雲, 「西豊城子山山城考」『瀋陽文物』 1993-2, 1993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합이빈출판사, 1994 · 曹桂林·王鐵軍, 「鐵嶺境內五座高句麗山城簡介」『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辛占山, 「遼寧境內高句麗城址的考察」『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辛占山, 「遼寧境內高句麗城址的考察」『中國考古集成』 東北卷 兩晉至隋唐(二), 北京出版社, 1996 · 孫力, 「遼寧的高句麗山城及其意義」『高句麗渤海硏究集成』 高句麗 卷(三), 哈爾濱出版社, 1994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北方史地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4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再探」『北方文物』 1995-3, 1995 · 李健才, 「再論唐代高麗的扶餘城和千里長城」『北方文物』 2000-1, 2000 ·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李龍彬, 「鐵嶺境內高句麗山城的幾個問題」『東北史地』 2008-4, 2008 · 趙俊傑, 「試論高句麗山城城墻上石洞的功能」『博物館硏究』 2008-1, 2008 · 周向永, 「西豊城子山山城始建年代再考」『東北史地』 2009-2, 2009 · 國家文物局,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 西安地圖出版社, 2009 · 鄭元喆, 「高句麗山城甕城的類型」『博物館硏究』 2009-3, 2009 · 周向永·許超, 『鐵嶺的考古與歷史』, 遼海出版社, 2010 · 周向永, 「西豊城子山·鐵嶺催陣堡兩山城中戍卒營地的相關問題」『東北史地』 2011-1, 2011 · 魏存成, 「中國境內發現的高句麗山城」『社會科學戰線』 2011-1, 2011

    • 리스트여닫기 옥진성자산산성; 천덕성자산산성(玉振城子山山城; 天德城子山山城) 출토지 요녕성 서풍현 천덕진 옥진촌(遼寧省 西豊縣 天德鎭 玉振村)구조특징 성벽은 산상에 축조하였음. 토석 혼축 성벽임. 성벽은 보존상태가 비교적 좋음. 잔고 3m임. 동벽 바깥에 2갈래의 보호벽이 있으며, 서북쪽 성 바깥에도 한 길의 보호벽이 있음. 북면에 문 하나가 있음.자연환경 요녕성 서풍현 북부의 천덕진(구 천덕현) 옥진촌(玉振村) 동남쪽 2리(里) 거리의 성자산에 위치함. 옥진성자산산성이 자리하고 있는 성자산은 동요하(東遼河)의 북안에 자리하고 있음.유물정보 토기편(陶片) 1점참고문헌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北方史地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4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再探」『北方文物』 1995-3, 1995 · 魏存成, 「中國境內發現的高句麗山城」『社會科學戰線』 2011-1, 2011

    • 주가둔성지(周家屯城址)

  • 리스트여닫기 철령현(鐵嶺縣)

    • 하유산성(下裕山城)

    • 리스트여닫기 최진보산성; 최진보관음각산성(催陣堡山城; 催陣堡觀音閣山城) 출토지 요녕성 철령시 철령현 이천호향서최촌(최진보향)(遼寧省 鐵嶺市 鐵嶺縣 李千戶鄕西催村(催陣堡鄕))연대 4세기 중반 전후(여호규, 1999)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3철령시박물관(鐵嶺市博物館)여러 차례 지표조사를 실시하였음. 『요녕문물』에 발표함. (曹桂林·裵躍軍, 1983, 「鐵嶺東南部的兩座古代城址」, 『遼寧文物』, 1983-4)1985철령시박물관(鐵嶺市博物館)1985년 7월 15일 철령시 문물보호단위(文物保護單位)로 지정되었다가 1988년 12월 20일 요녕성 문물보호단위로 공포됨.1992~1003 주향영(周向永), 왕조화(王兆華)에 의해 여러 차례 조사를 진행, 기존 발굴 작업의 기초위에서 비교적 비중있는 유적을 새로 발견하였음. 발표는 1996년에 이루어짐(周向永·王兆華, 1996, 「遼寧鐵嶺市催陣堡山城調査」, 『考古』1996-7).구조특징 포곡식 산성임. 조계림(曹桂林), 왕철군(王鐵軍)의 1994년의 조사내용에 따르면, 성벽은 구불구불하여 해발 260m의 산골짜기 둘레의 산등성이에 있음. 지세는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음. 평면형은 불규칙한 장방형임. 산성의 성벽은 산맥의 가파른 절벽을 충분히 이용하여 산세를 따라 돌을 쌓아 수축하였음. 지세가 낮을수록 성벽은 높아짐. 성벽은 산등성이 바깥에 지세가 좀 낮아진 곳에 쌓고 산세의 기복에 따라 축조하였음. 축조재료는 부근의 산돌을 이용하여 수축하였는데 성돌의 크기는 같지 않으며 틈을 눌러 쌓는 방법을 채용하고 일부분은 표면을 가공하였음. 성벽 기초는 가장 넓은 것은 약 3m이고 잔고 약 5m임. 성의 내측에 5~8m 너비의 마도(馬道)가 벽을 따라 돌고 네 모퉁이 야간 높은 곳에 흙을 쌓은 것이 있는데 그 당시 망대시설로 추정됨. 성문은 남쪽과 북쪽에 2개가 수축되었음. 북문은 북쪽 산마루 서측에 위치하고 남문은 산골짜기 서부에 위치함. 문의 동측은 성내에서 지세가 제일 낮은 곳으로써 여기에 인공으로 수축한 높이 약 12m, 길이 약 40여m의 토벽이 골짜기에 가로놓여 있어 현지 사람들은 “관문산(關門山)”이라고 칭함. 성내의 두도구(頭道溝), 이도구(二道溝)의 양지쪽 비탈과 산마루에 방형, 과저형(鍋底形)의 큰 흙구덩이들이 많이 있음. 구덩이 직경 5~10m로 같지 않고 깊이 약 1m임. 현지 사람들은 보통 “고려갱(高麗坑)”이라고 칭하며, 이는 군사 용도의 반지혈식 건축유적으로 추정됨. 조향영, 왕조화의 1996년도 조사에 따르면, 최진보산성은 불규칙한 장방형으로 엄지손가락을 편 손바닥 모양과 흡사함. 산성의 지세는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음. 성문 2곳(남문과 북문), 방수 제방(攔水堤壩)과 배수구(洩水口), 굴(石洞), 저수지, 각대 8개, 건물지 및 성벽 바깥의 참호와 석벽 등 보조 방어시설이 부분적으로 조성되어 있음. 성내에 남문과 북문을 연결하는 길(通道)이 있어 이 길을 경계로 동부와 서부,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며, 양 측에 산언덕(山岡)이 동서 대칭 분포한 모양을 띰. 성내에 샘물(水泉)이 여러 곳 있으며, 모두 언덕(골짜기) 사이의 웅덩이(洼地)에서 발원하여 저수지를 경유, 배수구(洩水口)를 지나 남쪽으로 범하(汎河)에 유입됨. 성내 중앙부의 북쪽으로 치우친 곳에 청대(淸代)의 “관음각” 이 있음. 이런 연고로 이 성을 “관음각산성”이라고도 부름. 성벽은 토축 성벽과 석축 성벽 두 종류가 있음. 토축 성벽 구간은 산성의 남쪽에 대부분 분포해 있으며, 대체로 성벽 유적이 뚜렷하게 잘 남아있음. 석축 성벽 구간은 오로지 북벽의 보존 상태가 좋으며, 나머지 대부분은 허물어졌음. 북벽 외측, 일부 성벽 구간에서 석괴더미가 흩어져 있는 것이 산견되며, 석괴 돌더미와 돌을 사용하여 쌓은 석벽은 성돌의 규격이 서로 유사하고, 원래 벽체가 허물어진 곳이기 때문에, 성벽 바깥의 치(馬面) 흔적일 것으로 추정됨. 다만 보존 상태가 비교적 좋은 성벽 구간 아래에서 이러한 흔적이 보임. 성벽은 모두 산등성이 바깥측에 축조하였으며 성벽 꼭대기의 높이가 산등성이와 같거나(平齊) 혹은 산등성이보다 약간 높음. 토축 성벽은 대체로 완만한 비탈이나 혹은 비교적 낮은 산정에 다져 축조하였음. 석벽은 비교적 가파르고 험준한 산등성이에 쌓아올렸음. 실측에 따르면 성벽의 전체 길이는 5,202m임. 성벽의 남벽은 모두 토축임. 서쪽 기점 해발 182.2m부터 동쪽으로 해발 193m까지에 이름. 남벽의 남쪽은 험준하고 가파른 벼랑(山崖)에 닿아있으며, 벼랑 아래는 범하인데, 현존 높이(存高)와 너비는 평균 1m 정도임. 남쪽이 범하(汎河)와 닿아있는 까닭에 맞은편의 강 연안은 개활한 지대이며, 또 전체 성곽에서 가장 낮은 곳에 속함. 남문과 암문, 배수구(洩水口)등 중요한 유적이 이 구간의 성벽상에 분포해 있음. 동벽의 전체 길이는 1,600m임. 남쪽의 해발 193m 지점에서부터 북쪽으로 해발 229.8m 지점까지, 다시 북으로 200m 더 간 모퉁이(轉角)까지가 동벽에 해당됨. 동벽에서 다만 남쪽 100m 길이의 성벽 구간은 토축 성벽이며, 나머지는 모두 돌을 쌓아올린 석벽임. 산세의 기복이 심하고 구불구불하여, 벽체의 뻗어나간 모양 역시 율동적인데, 이러한 산세의 원인으로 동벽의 중부 벽체 구간은 동쪽 해발 344.7m의 가장 높은 지점까지 뻗어있고 또 이곳 봉우리에서 북쪽으로 꺾여서 성벽이 삼각형의 돌출(凸) 부분을 형성케 하였음. 동벽의 축조방식은 다음과 같음. 이 구간의 성벽의 무너진 단면상에서, 석벽 표면이 비교적 장방형이거나 혹은 머리 부분이 크고 꼬리부분은 작은 쐐기형(楔形石)의 돌을 쌓아올린 것을 볼 수 있으며, 일부 표석(表石)이 떨어져나간 성벽 구간은 속(墻芯)이 드러나 있고, 벽체 내벽은 산의 몸체를 의지하였으며, 내외 벽체 사이에는 규격이 동일하지 않은 산돌(山石)을 채워 넣었으며, 간삽(干揷)방식을 채용하여 석벽의 겉과 안이 일체 되었음. 해발 251-313.1m 사이의 길이 300m 성벽 구간에는 산세가 가파르고 험해서 벽체가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석벽 중간에 길쭉한 납결석(拉結石)을 끼워 넣었음. 5m정도 간격으로 설치하였는데, 납결석과 벽체의 각도는 90도이며, 벽체 기단부터 꼭대기까지 켜켜이 쌓았음(分層放置). 북문에서 1,311m 떨어진 곳의 동벽 북쪽 구간에서, 성벽내 석구(石溝)유적이 보임. 구덩이는 성벽과 회곽도[마도(馬道);반도(盤道)] 사이에 굴착되어 있으며, 회곽도[마도; 반도] 가장자리(邊緣)에 기대여 있음. 성벽과 평행되게 뻗어있음. 석구는 명백히 인공적으로 다듬어 수정을 거치지 않았으며, 자연암석으로 벽(溝壁)을 만들었음. 커다란 암석을 만나서 뛰어넘어 다시 가면, 석구가 간헐적으로(단속적으로) 있음. 산등성이가 비교적 좁아서 혹은 암석이 들쭉날쭉하여 구덩이(溝)를 다듬기 어려워 성벽내측 가까이에 구덩이(溝)를 만들었음 이 구덩이 구간에서 가장 긴 구간 하나는 43.5m, 가장 넓은 곳 1.7m, 깊이는 0.5~0.8m 사이임. 석구는 동벽 북단의 끝점에서 성 바깥으로 뚫고 나와, 성벽에 트인 곳(豁口)을 만들었는데, 이러한 종류의 형태가 동벽 두 곳에서 모두 발견되었음. 이 밖에, 동벽 중간 구간에서 역시 트인 곳(활구)이 3곳 보이는데 트인 곳의 너비는 5-8m, 트인 곳 바깥 양측에 석괴 더미가 흩어져 있음. 해발 344.7m와 251.3m 봉우리 사이 석벽 바깥측에서 한 길의 외호(外壕)유적(석벽 바깥측의 참호)이 발견됨. 해발 313.1m 고점 서측 성벽 트인 곳에 돌을 쌓아 만든 건물지 한 곳이 있음(J3). 북벽은 동쪽으로 산성의 동북 모퉁이에서 서쪽으로 해발 316.4m의 각대(角臺)까지로, 북문을 기점으로 동서 두 구간임. 보존상태 : 북벽 서단은 보존상태가 좋으며, 현존 성벽의 높이 8m임. 북문 가까이 한 구간의 성벽은 겉면에는 돌을 쌓아 올렸고, 안에는 흙을 채워넣은 축조방식임. 북문에서 180m 떨어진 서단의 성벽 내측에 석축 건물지(J2)가 있으며, 서북각대 바깥측에서 참호(外壕) 유적이 발견됨. 회곽도[마도;반도] : 북벽내 서북 각대에서 J2 건물지까지 한 구간에 회곽도[마도;반도] 유적이 특히 뚜렷함. 동단 중부 성벽 꼭대기에 돌구멍(石柱洞) 하나가 남아있음. 길이는(邊長) 0.4m, 깊이는 0.5m임. 서벽은 해발 316.4-182.2m 두개의 산봉우리 사이의 성벽 구간이고 전체 길이는 700m임. 석축 성벽 구간이 대부분이며, 성벽이 허물어진 정황이 비교적 심함. 성벽의 기초가 남아 있지 않으며, 다만 산발적으로 남아있는 잔돌(碎石) 띠로 보아 서벽 방향임을 판단할 수 있음. 남단의 보존상태가 비교적 좋은 한 구간은 길이 130m, 현존 높이 1.2m, 너비 1m임. 무너져 흩어져있는 성돌로 보아 산등성이의 낮은 오목한 곳에는 원래 석벽을 비교적 높게 쌓았음을 알 수 있는데 그렇게 하므로써 양측의 성벽의 높이가 같도록 하였음. 서남 각대에서 북쪽 100m 되는 곳에 성벽이 트인 곳(豁口)이 하나 있음. 트인 곳(豁口)의 바깥으로 각대의 참호(溝壕)가 접해 있고, 안으로는 회곽도와 접해 있음. 이 구간의 성벽 남단 외측에 한 구간의 석벽 유적이 발견됨. 산성 성벽내외에서 모두 3곳의 건물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모두 석축으로, J1~J3으로 편호하였음. 서벽의 남쪽 구간과 중간 구간의 성벽 바깥에 또 참호(外壕)와 석벽 유적이 발견됨. 참호(外壕)는 서남 각대 바깥 비탈에서 시작해서 각대를 둘러싸면서 산세를 따라 북쪽으로 뻗어나가다가 臺 아래 북측의 성벽 트인 곳(豁口)에 성문 회곽도[마도;반도]와 서로 접해 있음. 이 구간의 참호(外壕) 길이는 82m, 너비 1.2m, 깊이 1~1.5m임. 유사한 참호(外壕)가 북벽 서쪽 구간에 있으며, 동벽 중간 구간의 성벽 바깥에서도 발견됨. 북벽 바깥의 참호(外壕) 길이 50여 m, 동벽 바깥의 참호(外壕) 길이 200m, 너비 약 1m 정도임. 산성 바깥 석벽은 서벽 남쪽 구간의 벽체 바깥 300m 지점에서 발견되며, 이 구간의 석벽 가운데에 빈틈(間空)이 있는데, 동서 두 구간으로 갈라짐. 동쪽 구간의 석벽은 벽체 아래의 골짜기(溝谷) 방향을 따라 축조되어 있는데 약간 동쪽으로 치우친(偏東北) 방향임. 서쪽 구간의 벽체는 동서 방향으로 축조하였음. 서쪽 구간의 석벽의 중부 북측에 원형의 대지(臺址)가 하나 있음. 대면(臺面)은 다져 정리하였으며 특별히 평평한데(平坦), 골짜기(谷口)의 병졸이 주둔하는 基址를 수호하는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됨. 석벽 유적(外墻)과 참호(外壕)는 골짜기(溝谷)의 양측에 위치해 있는데 이러한 종류의 분포 상태는 골짜기(溝谷)에서 성을 공격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됨.역사적 의미 유적의 시기에 관해서는 고구려 조기에 해당한다는 의견,(진대위, 1995), 고이산성 직후에 축조하였다는 의견,(왕면후, 1999), 고구려 4세기 중반을 전후한 시기의 유적이라는 의견(여호규, 1999) 등이 있음. 유적의 규모에 관해서는 동서 길이 2㎞, 남북 너비 1.5㎞, 전체 길이 5,032m라는 보고(曹桂林, 王鐵軍 1994)와 직선거리로 동서 길이 1,500m, 남북 너비 1,100m, 성벽의 전체 길이 5,202m(周向永, 王兆華 1996)라는 수치가 있음. 최진보산성에 대한 이름(城名) 고증에 관하여, 이미 발표한 자료 중에, 왕면후(王綿厚)의 남소성설(南蘇城說)이 있음. 남소성은 고구려의 중요 성지로 여러 차례 목저성(木抵城), 창암성(蒼巖城)과 함께 나란히 사서에 보이며, 그 위치가 목저성, 창암성 두 성과 비교적 지근 거리에 있는 성으로 역사가들은 대체로 남소성을 지금의 소자하(蘇子河)와 혼하(渾河)가 교차하는 곳에 위치했다고 생각하여, 이 설을 따름(왕면후, 1990). 고구려 금산성(金山城)설이 있음. 『신당서』 계필하력전(契苾何力傳)에 “乾封初, 高麗泉男生內附, 遣將軍龐同善, 高侃往慰納, 弟男建率國人拒弗納, 乃詔仁貴率師援送同善. 至新城, 夜爲虜襲, 仁貴擊之, 斬數百級. 同善進次金山, 虜不敢前, 高麗乘勝進, 仁貴擊虜斷爲二, 衆卽潰, 斬首五千, 拔南蘇, 木底, 蒼巖三城, 遂會男生軍. 手詔勞勉。仁貴負銳, 提卒二千進攻扶餘城”(건봉 초에, 고구려 천남생이 내부를 청하자, 장군 방동선, 고간을 파견하여 위로하고 받아들이려하였다. 동생 남건이 국인을 거느리고 와서 항거하였다. 이에 황제가 조서를 내려 인귀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동선을 지원하게 하였는데 신성에 이르러 밤에 적의 기습을 받아 인귀가 격돌하여 (고구려군) 수백급의 머리를 참수하였다. 동선이 다음으로 금산으로 나아가자 적이 감히 나아오지 못하였다. 고구려가 승리의 기세를 틈타 나아오자 인귀가 적과 부딪쳐 적의 대열을 두동강 내자, 대열이 곧 무너져 (고구려군) 5천급의 머리를 참수하였다. 남소, 목저, 참암 3개의 성을 함락하였다. 마침내 남생의 군대와 만나 황제의 조서를 건네주고 노고를 위무하였다. 인귀가 날랜병사와 이천명의 병졸을 이끌고 부여성으로 진공하였다.) 이라는 기사가 있음. 이 전쟁에서 쌍방이 진격하고 퇴각한 노선을 분석하면, 금산성은 당과 고구려가 교전한 주요 전장으로, 그 위치는 신성(무순 고이산산성)의 북쪽이다. 최진보산성은 규모가 크고, 또 신성 북쪽에 있는 제일 큰 대성이므로, 관련 자료를 종합해 볼 때, 최진보산성은 고구려의 금산성일 것으로 이해됨. 주향영, 왕조화도 금산성설을 주장함. 당나라 군대는 신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는데, 방동선(龐同善), 고간(高侃)이 남아 주둔하면서 지키고 있었음. 천남건이 밤에 신성을 기습하였으나 전후(展後)의 설인귀에게 격파되었음. 동선(同善), 고간(高侃)은 또 다음으로 금산으로 진격하였음. 설명하자면 밤에 신성을 기습한 적은 금산에서 왔고 또 금산으로 도망갔음. 龐同善 등은 북쪽의 금산에서 패하여, 신성으로 도망갔으며, 고구려는 승리의 기세를 타고 깊이 추격하였는데, 신성에 남아 주둔하고 있던 설인귀가 적의 측면을 둘러쌌을 때, 옆에서 공격하는 전술로써 “擊虜斷爲二, 衆卽潰”(적과 격돌, 적의 대열을 두동강이 내자 무리(적)가 곧 무너졌다)를 시전함. 그런 다음에 승리의 기세를 타고 남소, 목저, 창암성 3개의 성을 함락시켰고 내부한 천남생의 군대와 만나 哥勿城으로 돌아갔음. 금산성에서의 전투이후, 당나라 군내는 또 부여성을 함락시켰는데, 부여성의 위치는 지금의 서풍 성자산산성임. 산성의 북쪽에 있는 고구려산성중에서 발견된 대형 고구려산성은 둘인데, 모두 지금의 철령시 경내에 있음. 하나는 서풍 성자산산성이고 다른 하나는 철령 최진보산성임. 『삼국사기』에 기재되어 있는 “薛仁貴旣破我軍于金山, 乘勝將三千人, 將攻夫餘城” (설인귀가 이미 우리 군대를 금산에서 깨트리고, 승리의 기세를 타고 삼천명을 이끌고 부여성을 공격하였다) 기사도 부산성과 부여성을 이와 입술관계에 있는 성(脣齒之城)으로 설명하였음. 부산성은 부여성의 남쪽, 신성의 북쪽에 있음. 당나라 군대는 동남쪽 방향의 평양으로 나아가는 것이 목적이지만, 이곳에 도달한 주요 목적이 곧 군대가 나아가는 노정상에 있는 고구려 점거성을 제거하는 것으로 이를 반드시 선행해야 했기 때문임. 그렇게 하지 못하면 위험을 무릅쓰고 나아가다가 필시 앞과 뒤에서 협공을 받을 수 있음. 당나라 군대는 소량의 병력으로써 부여성을 깨트리는 것이 재능이므로, 부산성을 아래에 두고, 부여성의 남문이 크게 열려 있다는 것은, 이는 부산성이 신성의 북쪽에 있음을 말해줌. 그러므로 금산성은 지금의 철령 최진보산성으로 추정되는데, 실제 지리 위치의 조망과도 합치되므로 철령 최진보산성은 고구려 금산성이라는 추정 논리와 부합됨(주향영, 1994 ; 주향영·왕조화, 1996). 방어용 산성설이 있음. 최진보산성의 성격을 서남 5㎞에 위치한 청룡산산성과 관련하여 검토되기도 함. 최진보산성은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어 건물을 짓기에 불편할 뿐 아니라 생활도구도 거의 출토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방어용 산성으로 추정하는 반면, 청룡산고성은 내부가 평탄하고 기와편이 성내에 산포해있어 평지성의 면모가 강하도고 함. 즉 두 성은 방어용 산성과 주거용 평지성의 관례로 봄(조계림·배약군, 1983). 주향영과 왕조화의 1996년도 의견 역시 마찬가지임. 최진보산성 내에서는 다른 산성에서는 흔히 발견되는 기와 등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음. 그러나 최진보산성 서쪽 5㎞ 지점에 한 개의 소형 고구려산성 유적이 있는데 산성내에서 기와가 다수 발견됨. 이는 최진보산성이 이 곳의 소형산성과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반영하는 것임. 최진보산성은 군사방어 성격이 드러나므로 이 곳은 전시에 주요 방어 지점이었을 것임. 그러나 부근의 소성은 평상시에는 생산과 생활에 주력하다가 전시에는 최진보산성의 외위성으로서 방어를 담당하거나 혹은 작전에 맞춰 전략적 작용을 하던 곳일 것임. 한편, 조선 평안남도 순천(順川)에서 일찍이 요동성 벽화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이 그림에 묘사되어 나타난 “요동성” 성 바깥 동북, 서북 방향에 각각 방형의 소성이 그려져 있음. 이는 요동성의 외위 거점일 것으로 이해됨. 최진보산성 부근에 역시 장루자(張樓子)소형산성이 보이는데, 그 배치 구조가 순천 요동성 무덤 벽화에 그려진 것과 유사하므로, 이는 고구려가 중요 성지(城池)에 대하여 특수 방어를 시행한 분포(입지) 특징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줌(주향영·왕조화, 1996). 군사방어 및 지방거점성이라는 설이 있음. 최진보산성은 청룡산산성처럼 내부가 평탄하고 넓을 뿐 아니라 건축자재인 기와편 등이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평상시 거점 성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음. 반면 청룡산산성도 언덕산으로 둘러싸여있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산성으로 분류됨. 더욱이 두 성의 규모와 입지조건을 고려하면, 최진보산성이 주성(主城)이고, 청룡산산성은 최진보산성의 군사방어상의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축조한 보조성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음. 즉 최진보산성을 먼저 구축한 다음 청룡산산성을 축조하였을 가능성이 높음. 입지조건과 축성법에 있어서 최진보산성이 압록강 중류일대의 초기 산성과 깊이 관련된 반면, 청룡산산성은 요하 상류일대의 다른 성과 유사하다는 사실은 이를 반영한다고 여겨짐. 최진보산성은 범하 연안의 충적평지와 송요(松遼)대평원의 접경지대 안쪽에 위치하였음. 송요대평원에서 범하 연안으로 진입하든가 범하 연안에서 송요대평원으로 나아갈 경우, 반드시 거쳐야하는 전략적 요충지임. 최진보산성에서 범하를 거슬러 길림합달령을 넘어가면 혼하 상류의 청원(淸原) 남잡목(南雜木)이 나오는데, 남잡목에서는 소자하 및 혼하상류~휘발하(輝發河)를 거쳐 압록강 중류일대로 나아갈 수 있음. 반대로 범하 하류를 따라 내려가면 송요대평원을 거쳐 요동평원을 비롯하여 요서지역, 송화강 유역 등 각 방면으로 통함. 한편, 남쪽으로 나아가면 고구려의 신성으로 비정되는 무순 고이산성이 나오며, 동북방면으로도 요하 상류의 지류연안에 위치한 고구려 성들과 통함. 최진보산성이 위치한 범하·자하(紫河) 하류의 철령지역은 요하 중상류 일대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임. 요하 상류의 유로(流路)를 보면 철령 북방에서는 동남류하다가 철령 서쪽에서 방향을 꺾어 서남쪽으로 흘러가는데, 마치 철령을 중심으로 휘어진 활모양을 이루고 있음. 더욱이 길림합달령에서 서남으로 뻗어내린 여러 지맥가운데 철령 부근의 산줄기는 다른 산줄기와 달리 요하 직전까지 뻗어있음. 이러한 지형조건으로 인해 철령일대는 요하 동안의 송요대평원 가운데 일종의 병목구간으로서 요동평원과 그 북쪽의 자연경계를 이루게 되었음. 한대 요동지역의 군현가운데 가장 북쪽의 망평현이 철령 지역에 비정되고, 연진한대의 요동장성이 맞은편 법주시 일대를 통과한다는 사실 등은 이러한 지형조건과 관련되어 있음. 따라서 한대까지 철령 일대는 요동평원의 중국 군현지역과 남쪽으로는 요동평원, 북쪽으로는 요하 상류방면으로 나아갈 수 있을뿐 아니라, 서쪽으로는 요하를 건너 법고(法庫)를 거쳐 대릉하 중상류나 서요하 일대로 나아갈 수도 있음. 한편 최진보산성은 둘레 5㎞ 이상으로 대형산성으로 분류됨. 더욱이 성내부에는 주거용으로 활용할 수 있는 평탄한 대지가 넓게 펼쳐져 있고 곳곳에서 샘물이 솟아나 수원도 풍부함. 현재 성 내부에서는 반지하식 주거지로 추정되는 대형 원형구덩이가 다수 발견되었고 붉은색 기와편 등 고구려 시기의 건축자재도 출토되었음. 따라서 최진보산성은 다른 고구려산성처럼 군사방어뿐 아니라 지방지배를 위한 거점성의 기능도 수행하였다고 추정됨. 최진보산성은 송요대평원에서 범하 연안으로 진입하는 전략적 요충지를 방어하는 군사중진이면서 버마 연안일대를 지배하기 위한 지방거점성이었음(여호규, 1999).자연환경 요녕성 철령시에서 동남 17㎞(남쪽 20㎞) 정도 떨어진 철령현 이천호향서최촌(최진보향, 정부 소재지)에서 북쪽 1.5㎞에 위치함. 최진보향 범하(汎河) 북안의 관음구(觀音溝) 골짜기에 위치함. 범하(汎河)의 북안에 동서 방향으로 뻗어있는 청운산(靑雲山)산맥 중부에 위치함. 남쪽 무순시(撫順市) 고이산(高爾山)산성과 36㎞ 떨어져 있음. 서남쪽 5㎞ 거리에 언덕산에 들러싸인 청룡산고성(靑龍山古城)이 있는데, 범하(汎河) 연안의 충적평지를 사이에 두고 최진보산성과 서로 마주보고 있음. 자연환경에 관해 먼저 범하는 길림합달령(合達嶺)산맥 서남단의 철령·요원(遼源) 경계지역에서 발원함. 청운산의 남쪽 지세는 개활하며, 충적 평지가 매우 넓게 펼쳐져 있음. 관음구 골짜기는 단지처럼 생겼는데, 관음각이라는 사찰에서 골짜기 이름이 유래하였음. 골짜기는 범하 북안에 동서 방향으로 길게 뻗은 산줄기에 자리잡고 있는데, 남북 방향의 중앙 계곡과 그 좌우 계곡 등 3개로 이루어져 있음. 계곡 곳곳에서 샘물이 솟아나고 있으며, 이들이 골짜기 입구에서 모여 작은 물줄기를 이룬 다음 남쪽으로 흘러 범하로 흘러듬. 산성 남쪽으로는 범하 연안의 넓은 충적평지가 동서 방향으로 길게 펼쳐져 있으며, 북쪽에도 범하 지류 연안의 좁고 기다란 평지가 펼쳐져 있음. 동쪽과 서쪽으로는 범하 북안의 험준한 산줄기가 이어지고 있음. 특히 산줄기의 남쪽 사면은 험준한 절벽이며, 절벽 아래로 범하가 서쪽으로 흐르고 있는데 마치 천연 해자와 같음. 북쪽 사면도 경사가 아주 가파른 편임. 최진보산성은 사방이 험준한 요새지에 자리잡고 있음.유물정보 붉은색방격문(方格文)수키와잔편 1점, 니질붉은색토기편(泥質紅色陶片) 1점, 토기손잡이(陶器器耳) 1점참고문헌 · 曹桂林·裵躍軍, 「鐵嶺東南部的兩座古代城址」『遼寧文物』 1983-4, 1983 · 王綿厚, 「隋唐遼寧建置地理述考」『東北地方史硏究』 1986-1, 1986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初探」『中國考古學會第五次年會論文集』, 文物出版社, 1988 · 陳大爲, 『遼寧境內高句麗遺蹟』 『遼海文物學刊』 1989-2, 1989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합이빈출판사, 1994 · 曹桂林·王鐵軍, 「鐵嶺境內五座高句麗山城簡介」『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周向永, 「高句麗金山城考」『博物館研究』 1994-3, 1994 · 辛占山, 「遼寧境內高句麗城址的考察」『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辛占山, 「遼寧境內高句麗城址的考察」『中國考古集成』 東北卷 兩晉至隋唐(二), 北京出版社, 1996 · 王綿厚, 「鴨綠江右岸高句麗山城硏究」『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北方史地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4 · 田中俊明, 『高句麗の歷史と遺蹟』, 中央公論社, 1995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再探」『北方文物』 1995-3, 1995 · 周向永·王兆華, 「遼寧鐵嶺市催陣堡山城調査」『考古』 1996-7, 1996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馮永謙, 「高句麗千里長城建置辨」『社會科學戰線』 2002-1, 2002 · 李龍彬, 「鐵嶺境內高句麗山城的幾個問題」『東北史地』 2008-4, 2008 · 趙俊傑, 「試論高句麗山城城墻上石洞的功能」『博物館硏究』 2008-1, 2008 · 國家文物局,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 西安地圖出版社, 2009 · 鄭元喆, 「高句麗山城甕城的類型」『博物館硏究』 2009-3, 2009 · 周向永·許超, 『鐵嶺的考古與歷史』, 遼海出版社, 2010 · 張福有·孫仁傑·遲勇, 「高句麗千里長城調查要報」『東北史地』 2010-3, 2010 · 周向永, 「西豊城子山·鐵嶺催陣堡兩山城中戍卒營地的相關問題」『東北史地』 2011-1, 2011 · 魏存成, 「中國境內發現的高句麗山城」『社會科學戰線』 2011-1, 2011

    • 영서산성(嶺西山城)

    • 리스트여닫기 청산산성(靑山山城) 출토지 요녕성 철령현 이천호향 청산촌(遼寧省 鐵嶺縣 李千戶鄕 靑山村)구조특징 산상에 위치하고 평면은 방형임. 주거지는 복개(覆蓋)되었음.자연환경 청산산성은 철령현 이천호향 청산촌 동남쪽 100m 거리에 위치함.유물정보 석괴(石塊) 1점, 방형 벽돌(方塼) 1점, 회색포문기와편(灰色布紋瓦片) 1점참고문헌 · 國家文物局,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 西安地圖出版社, 2009

    • 후영반산성(後營盤山城)

    • 영반성지(營盤墻址)

    • 운반구유적(雲盤溝遺址)

    • 리스트여닫기 청룡산산성; 장루자산성(靑龍山山城; 張樓子山城) 출토지 요녕성 철령현 최진보향(이가보향) 장루자촌(遼寧省 鐵嶺縣 崔陣堡鄕(李家堡鄕) 張樓子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0철령시박물관(鐵嶺市博物館)여러 차례 조사함.2007 요녕성 성급보호문화재로 지정됨.구조특징 청룡산산성은 6개의 작은 산봉우리를 성벽으로 연결해 이루어졌음. 지세는 남쪽이 높고 북쪽은 낮으며, 성 안에 남북방향의 작은 언덕산이 있어 성내를 자연적으로 동서 두 부분으로 나누므로, 현지 주민들은 “동성(東城)”, “서성(西城)”이라고 부름. 성내 지세는 비교적 평탄하여 비록 산중에 있지만 성 바깥쪽 평지에 비해 10여m 높을 뿐이어서 평지성으로 여길 수 있을 정도임(조계림·왕철군, 1994). 청룡산산성은 비교적 잘 보존되었음. 성벽은 토축으로, 산등성이에 연결하여 축조했음. 자연적으로 낮고 오목한 곳은 인공적으로 평평하게 메웠음. 그러므로 성벽은 비교적 평평하고 완만하며, 기복이 심하지 않음. 성벽 기초의 너비는 약 8m, 윗너비 약 2m, 잔고 약 3~4m임(조계림·왕철군, 1994). 산성의 평면은 대체로 방형(조계림·왕철군, 1994)인데, 정방형(여호규, 1999), 타원형(주향영·왕조화, 2001)으로 보기도 함. 서성(西城) 구역은 남북방향의 기다랗고 좁은 골짜기(溝谷)임. 골짜기의 너비는 약 20m이며 길이는 서벽과 대략 같음. 골짜기 내 지세는 특히 평탄하며 계곡 입구(溝口) 북단은 비교적 좁아 상대적으로 폐쇄적인 “성안의 성(城中之城)”을 이루고 있음. 그 위치가 은폐되어 있기 때문에 골짜기는 비교적 규정적이며, 현지인들은 이 곳을 땅의 형상을 따라 “마권구(馬圈溝)”라 부름. 동성(東城) 구역은 상대적으로 넓은데 현재 대부분 밭으로 개간되어 경작되고 있음. 동성 구역 중부에는 동서방향의 말안장 모양의 등성이(山梁)가 있어 골짜기를 다시 남과 북 두 부분으로 양분하고 있음. 남부는 약간 작고 북부는 약간 큼. 성벽은 언덕산의 산등성이나 가장자리, 언덕산 사이의 평탄지 등에 축조하였는데,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임. 성벽은 겉모습만 보면 토성처럼 보이지만, 위치에 따라 다양한 축성법을 사용하였음(여호규, 1999). 토벽은 판축기법을 사용한 경우와 성토(盛土)만 한 경우로 분류됨. 동성 북벽이나 서성 북벽의 동단처럼 언덕산 사이의 평탄지에는 판축기법을 이용하여 토벽을 축조한 반면, 동성 남벽처럼 가장자리가 평탄한 언덕산에는 황갈색 사질토로 성토하여 성벽을 축조하였음. 특히 범하 연안으로 이어지는 동성 북벽은 청룡산산성에서 방어상 가장 취약한 곳이기 때문에 성벽을 튼튼하게 구축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음. 3-4단의 계단상으로 성벽을 축조한 것, 성벽 가장자리에 막돌을 한 두겹 깔아 성벽을 보강한 것 등은 이를 보여줌. 동성 북벽 중간에는 배수시설을 만들기 위해 성벽을 판 절단면이 있는데, 흙을 층층이 다져 쌓은 층위가 명확하게 드러나 있음. 언덕산의 산등성이에는 대체로 토석혼축법으로 성벽을 축조한 것으로 추정됨. 그렇지만 이 경우도 순수한 토석혼축성벽과 아래쪽에 돌로 성벽을 쌓은 다음 그위에 성토를 한 석축·토축 성벽으로 나누어짐. 동성의 동북모서리처럼 산등성이가 경사진 곳에는 성벽 윗면 곳곳에 성돌이 드러나 있는데, 이는 대체로 돌과 흙을 섞어서 축조한 순수한 토석혼축성벽으로 추정됨. 반면 서성 북벽 서단의 경우, 성벽 하단부 가장자리에는 성돌이 드러나 있지만 윗면에는 성돌이 보이지 않음. 이로 보아 서성 북벽 서단은 석축·토축 성벽일 가능성이 높은데, 실제 서성 북벽 서단과 이어지는 서벽 북단에서 석축·토축의 성벽 단면을 확인할 수 있음. 한편, 성 북벽 안쪽에는 너비 5m 전후의 회곽도(마도)가 둘러져 있음. 안쪽 가장자리 하단부에 돌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안쪽 경사면에 돌로 기초부를 다진 다음 일정한 너비의 평탄한 회곽도를 조성한 것으로 추정됨. 이와 같이 성벽의 입지조건에 따라 다양한 축성법을 활용하여 성벽을 구축하였음. 북벽은 언덕산(山崗) 양쪽에 나란히 축조하여 “요(凹)”자 형태의 벽체를 형성하였음. 북벽의 잔고는 약 8m, 전체 길이 386m임. 성벽 기초부는 석축임. 성돌은 일반적으로 약간 다듬었으며, 규격은 대체로 30×15×20㎝ 정도임. 틈새는 마사토(山皮土)와 작은 깬돌을 채워 넣었음. 성벽 기단부의 너비는 11.7m, 높이는 0.7m임. 성벽은 석축 기초부 위에 판축토벽으로 사다리꼴을 띰. 판축한 흙은 황갈색의 마사토이며, 안쪽에는 대량의 깬돌(碎石)이 섞여 있음. 북벽 서단 부근의 성벽은 서남방향으로 약간 굽었는데 북벽 서단 북쪽의 언덕산(山崗) 구간의 성벽과 서로 맞물려 북문 문길(門道)을 형성하고 있음. 북벽 동단 부근에 트인 곳(豁口)이 한 곳 있음(K1). 북벽의 트인 곳(豁口)은 성안에서 저수지로 출입하기 위해 개설하였음. 이 곳(此口)을 통해 출입함으로써 산문(山門)을 경유하지 않고 각수(用水)에 접근할 수 있음. 또한 이 트인 곳(豁口 K1)은 성내 동북부의 평대(平臺)시설(속칭 점장대)과도 관련이 있음. 트인 곳(豁口 K1)의 위쪽 너비는 11m, 바닥 너비는 1.5m임. 북벽 중간 구간의 벽체 기초부에는 원래 저수지로 배수시설(泄水涵洞)이 있었는데, 1972년에 훼손되었고, 그 뒤 빗물에 침식되어 너비 10여m로 확대되었음. 바닥에는 배수시설(涵洞)을 축조하는데 사용된 돌이 산재해 있는데, 석괴는 단단하고 크며 잘 다듬었고 대부분 납작하고 길쭉한 모양(扁長條形)임. 배수시설(涵洞) 북단의 벽체 기초 아래에 샘(泉水)이 한 곳 있음. 샘위에는 대량의 석괴가 퇴적되어 있는데, 샘(泉水)은 돌무지를 지나 저수지에 유입됨. 북벽이 아직 훼손되지 않았을 때, 북벽 벽체는 배수시설(涵洞) 및 그 샘 위를 경유하여야만 했음. 동벽은 산성의 네 성벽 가운데 가장 험준한 구간임. 절벽에 잇닿아있기 때문에 동벽 벽체는 기타 삼면의 벽체에 비해 비교적 낮음. 평균 높이는 1m가 안됨. 동벽 전체 길이는 554m임. 해발 128.4m 지점 부근에서 트인 곳(豁口)이 있는데, 고압선로를 깔 때 확장되었음. 너비는 약 5m. 이 트인 곳(豁口)의 단면상에서 다진 층(夯層)이 선명하게 확인됨. 다진 흙(夯土)은 황갈색의 마사토로 깬돌이 섞여 있음. 각 층의 두께 11㎝. 벽체 기단부 너비 2.5m, 윗 너비 0.7m임. 트인 곳(豁口)을 지나 남쪽으로 50m 가면, 성내부 통로(盤道)가 하나 있는데, 이 트인 곳(豁口 K2)을 지나 동벽을 따라 성 바깥으로 왕래할 수 있음. 성내부 통로(盤道) 종점에 천연의 탁자 모양(棚狀)의 암석이 하나 있는데 동벽 중부의 벽체 바깥에 위치하여 성벽을 등지고 아래로는 절벽에 잇닿아있음. 강을 사이에 두고 하곡 평지(谷地)를 마주 바라보고 있어 시야는 개활함. 천연 암석 아래에 약 4㎡에 달하는 평탄지가 있는데 평탄지는 인공적으로 다듬은 흔적이 역력하며, 성벽 아래에 있지만 멀리 감시하는 기능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음. 회곽도는 성내 언덕 “마안강(馬鞍崗)” 남측의 평지 가장자리를 경유해 동남 요망대를 통과한 후 남문으로 연결됨. 회곽도의 너비는 약 3m이고 길이는 86m임. 남벽은 해발 108.8m인 동남 요망대를 기점으로 서쪽의 해발 164.2m의 되는 서남 요망대까지 해당됨. 남문 있는 곳은 약간 안으로 오목하며, 그 나머지 벽체 구간은 모두 평탄하며 곧음. 남벽은 잔고 1.6m, 윗 너비 0.5m, 전체 길이 547.5m임. 동남 요망대에서 서쪽 38m 되는 곳에 물이 넘쳐 형성된 트인 곳(豁口)이 한 곳 있는데, 트인 곳(豁口) 저부에는 대석괴를 쌓아 만든 평평하고 가지런한 면(臺面)이 확인됨. 이 곳은 당시 남문 동측의 배수시설(泄水涵洞)로, 지금은 너비가 10여 m에 이름. 성내 지표에서 트인 곳(豁口) 바닥 석대면(石臺面)까지의 고도차는 12m임. 이곳에서 서쪽으로 65m 지점 되는 곳에 또 하나의 성벽 트인 곳(豁口 K3)이 있는데, 윗 너비 7.5m임. K3 바깥은 비교적 낮고 완만한 산비탈인데, 이 곳을 통해 산비탈 아래의 하곡 평지로 나아갈 수 있음. K3에서 서쪽으로 143m 쯤 되는 곳에 또 하나의 트인 곳(豁口 K4)이 있는데, K4는 서남 요망대 아래에 위치하며 요망대로 가는 통로로서 너비 10m임. 남문 서측 내벽에서 서남 요망대에 이르는 남벽 내측에 회곽도(마도; 반도)가 시설되어 있으며 너비 약 2.5m, 길이 390m임. 서벽은 남쪽 해발 164.2m의 가장 높은 지점인 서남 요망대에서 시작해서 북쪽의 해발 114.5m인 서북 요망대까지임. 서벽 전체 길이는 725.5m임. 서벽은 산성의 사면 벽체 가운데 가장 보존상태가 좋은 구간에 해당함. 서벽은 비교적 평평하고 곧은 산등성이상에 축조하였으며 서벽 내 회곽도는 평탄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서벽과 나란히 시설되어 있음. 회곽도 가장자리에는 현재 매우 많은 석괴가 남아 있는데, 이 석괴들은 통나무를 굴리고 돌을 퍼붓던(“滚木擂石”) 투석용 돌 용도로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됨. 서벽의 잔고는 약 5m, 기단부 너비가 약 7m, 윗 너비 1.5m. 전체 길이 725.5m임. 서벽 남단에서 36.5m 떨어진 곳에서 트인 곳(豁口 K5)이 한 곳 확인되었는데, 남벽의 트인 곳(豁口 K4)과 회곽도로 서로 통함. 상구(上口) 너비 7m, 저구(底口) 너비 1m. 트인 곳(豁口 K5) 양단에 바깥으로 돌출한 “철(凸)”자 모양의 시설물이 있는데, 모두 치(垜口馬面)와 유사함. 남쪽 측벽(南垜)의 기단 너비 12m, 북쪽 측벽(北垜)의 기단 너비 8m임. K5에서 북쪽 100m, 340m 되는 곳에서 각각 치(馬面) 하나씩 발견하였는데, 2개의 치(馬面)는 모두 반원형으로 벽체에 연결하여 축조하였음. 남쪽의 치(馬面) 길이 7.5m, 너비 2.5m. 북쪽의 치(馬面) 길이 6m, 너비 1.8m임. 북쪽의 치(馬面)에서 북쪽으로 287.7m 되는 곳에서 또 하나의 트인 곳(豁口 K6)을 발견하였음. 이 트인 곳의 북쪽에서 서북 요망대까지는 30.4m이고 K6의 윗너비 5m, 바닥 너비 0.6m임. 서벽은 서북 요망대에서 동남쪽으로 급격히 꺽여 북벽에 이르고, 양 벽체에 끼인 성내 좁은(銳角) 부분이 가늘고 길쭉한 형태(細長條形)의 엄폐된 벽체(掩體)를 이루고 있음. 성내에서 원형 구덩이(圓坑) 2곳과 파손된 석축성벽 한 구간과 점장대 한 곳을 발견하였음. 원형 구덩이는 점장대 위 및 남벽 중간 지점의 성벽 안측 산비탈에서 발견되었고 2개의 원형 구덩이는 모두 직경 5m, 깊이 0.5m임. 남벽 중간 지점 안측의 원형 구덩이에서 파괴된 석축시설이 조사됨. 드러난 짧은 벽체는 원형 구덩이 내 석축 건축물의 서북 모퉁이에 축조한 것임. 벽체의 남은 길이 1m, 너비 0.65m, 잔고 0.4m임. 벽체는 다듬은 방형의 커다란 돌덩이(大塊方石)로 축조하였고 혹은 작은 판석으로 평평하지 않은 곳을 메워 채웠음. 점장대는 동북모서리에 위치하며 삼각형 대지(臺地)로 조성하였는데, 각 변의 길이는 약 20m임. 북벽 바깥에 위치함. 고구려 산성의 저수지가 일반적으로 성내에 위치한 것과 비교해 특수한 형식에 속함. 저수지(연못)와 배수시설이 확인되었음. 저수지(水池) 서측은 성으로 진입하는 통로임. 동측에는 넓고 두터운 토벽이 있는데, 토벽의 현존 길이 35m, 너비 20m, 높이 약 6m임. 토벽 아래는 원래 돌로 축조한 배수시설(泄水涵洞)이 있으며, 북벽 아래의 배수시설(泄水涵洞)과 남북으로 대응하여, 현재는 11.7m의 트인 곳(豁口)을 이룸. 저수지의 평면은 타원형이며, 긴 지름의 너비 97m, 짧은 지름의 너비 5.5m임. 저수지의 중심에는 항상 물이 고여 있음. 성안은 밭으로 경작되고 있고 마을 사람들 이 배수구를 판 곳에서 흙으로 다져 축조한 성벽 단면과 길쭉한돌(三條石)로 쌓은 배수로를 볼 수 있음(조계림·왕철군, 1994). 건물지와 도로유적이 확인되었음(여호규, 1999). 동성(東城)의 높은 지대에 건물지가 있었고, 주변에는 기와편이 널리 산포되어 있다고 함. 또한 동성의 북벽 동단에 붉은색 방격문(方格文) 기와편이 흩어져 있고, 북벽 바깥쪽 저수지에 건물초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벽 근처에도 건물지가 있었다고 추정됨. 중앙의 언덕산의 동쪽 기슭 아래에는 동성의 북문과 남문을 연결하는 폭 4m 전후의 도로가 일직선으로 나 있음. 두 성문을 일직선으로 연결한다는 점에서 축성 당시에도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됨. 건물지는 주로 성의 동부쪽, 비교적 높은 곳에 분포함(조계림·왕철군, 1994).역사적 의미 최진보산성에 대해서는 먼저 주거용 평지성설이 있음. 청룡산산성의 성격을 동북 5㎞에 위치한 최진보산성과 관련하여 검토하기도 함. 최진보산성은 계곡에 자리잡고 있어 건물을 짓기에 불편할 뿐아니라 생활도구도 거의 출토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방어용 산성으로 추정하는 한편, 청룡산산성은 내부가 평탄하고 기와편이 곳곳에 흩어져 있는 등 평지성의 성격이 강함. 두 성은 방어용 산성과 주거용 평지성의 관계로서 청룡산 산성은 최진보산성에 대해 주거용 평지성의 기능을 가짐(조계림·배약군, 1983; 왕면후, 1994). 다음으로 고구려 은성(銀城)설이 있음. 철령 경내의 10여기 고구려산성 가운데 사료로 고증할 수 있는 곳은 몇 곳 안되며 그나마 교통 요충지에 있는 산성만이 고증이 가능함. 서풍 성자산산성은 고구려 부여성이고 철령의 최진보산성은 고구려 금산성이며 청룡산산성은 고구려 은성(延津州城)임. 『신당서』, 『구당서』, 『요사(遼史)』 등 기록에 따르면 청룡산산성의 축조연대는 고구려 말기이며 “연진주”라는 산성 이름은 당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안동도호부의 관할 하에 설치한 14개 주 가운데 하나임. 그 후 5백여년이 지난 후 거란인이 요북지역을 점령하고 이곳에 “은주”를 설치하였음. 『요사』지리지 은주편에 따르면 당시의 은주는 3개 현을 통괄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연진현(延津縣)이었음. 연진이라고 한 것은 옛 당나라의 연진성이 있었기 때문임. 연진이 요나라 시기 은주성 관할 하의 연진현이며, 연진현이 은주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것, 지리적으로 보아 청룡산산성은 철령(은주)과 18㎞ 떨어져있어 “(은주) 경내에 연진성이 있다”는 옛 사료의 기록과 맞아떨어짐(주향영·왕조화, 2001).자연환경 산성은 철령시에서 남쪽으로 18㎞ 정도 떨어진 최진보향(현재는 이가보향으로 통합됨) 장루자촌 서남쪽 1.5㎞ 떨어진 범하(汎河) 남안(좌안)의 청룡산에 위치함. 장루자마을이 바로 산성 옆에 있으므로 장루자산성이라고도 부름. 청룡산산성의 동북쪽으로는 범하를 사이에 두고 청룡산산성의 2배 규모에 해당하는 최진보산성과 5㎞ 정도 떨어져 있으며, 서로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움. 산성의 소재 위치는 동경 123도 59분, 북위 42도 11분임. 청룡산산성의 동편 아래로는 동쪽에서 흘러들어온 범하가 북류하다가 동벽 북단 근처에서 방향을 바꾸어 서북쪽으로 흘러나가고 있으며, 범하 건너편 동북쪽 충적대지에 장루자촌이 자리잡고 있음. 범하는 청룡산산성의 북벽에서 700m 떨어져 있는데, 산성의 동, 북 양면에서 반고리 모양을 띠며 동에서 서로 흘러가고 있어 성을 보호하는 천연 해자 역할을 함.유물정보 철제 솥(鐵鍋) 1점, 철제보습(鐵鏵) 1점, 철제 등자(鐵馬鐙) 1점, 철제칼(鐵刀) 1점, 철제전촉(鐵箭頭) 1점, 동제거울(銅鏡) 1점, 격자문(方格文) 기와편(瓦片) 1점, 망격문(罔格文)기와편 1점, 붉은색민무늬수키와편(素面紅筒瓦) 1점, 붉은색민무늬암키와편(板瓦殘片) 1점, 홍갈색내면마포흔(布文) 기와 1점, 호(大口陶罐) 1점, 건축재료(建築飾件) 잔편 1점, 생활토기(器皿) 잔편 1점, 능격문(菱格文) 기와 1점, 니질홍회갈색토기구연부(卷沿口沿) 1점, 니질홍회갈색대상파수(橋狀器耳) 1점, 철제차관(車輨) 1점참고문헌 · 曹桂林·裵躍軍, 「鐵嶺東南部的兩座古代城址」『遼寧文物』 1983-4, 1983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初探」『中國考古學會第五次年會論文集』, 文物出版社, 1988 · 陳大爲, 『遼寧境內高句麗遺蹟』 『遼海文物學刊』 1989-1, 1989 · 曹桂林·王鐵軍, 「鐵嶺境內五座高句麗山城簡介」『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辛占山, 「遼寧境內高句麗城址的考察」『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辛占山, 「遼寧境內高句麗城址的考察」『中國考古集成』 東北卷 兩晉至隋唐(二), 北京出版社, 1996 · 王綿厚, 「鴨綠江右岸高句麗山城硏究」『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北方史地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4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합이빈출판사, 1994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再探」『北方文物』 1995-3, 1995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周向永·王兆華, 「遼寧鐵嶺張樓子山城調查」『北方文物』 2001-2, 2001 ·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馮永謙, 「高句麗千里長城建置辨」『社會科學戰線』 2002-1, 2002 · 李龍彬, 「鐵嶺境內高句麗山城的幾個問題」『東北史地』 2008-4, 2008 · 國家文物局,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 西安地圖出版社, 2009 · 鄭元喆, 「高句麗山城甕城的類型」『博物館硏究』 2009-3, 2009 · 周向永·許超, 『鐵嶺的考古與歷史』, 遼海出版社, 2010 · 張福有·孫仁傑·遲勇, 「高句麗千里長城調查要報」『東北史地』 2010-3, 2010 · 魏存成, 「中國境內發現的高句麗山城」『社會科學戰線』 2011-1,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