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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상왕가 벽화고분(上王家 壁畵古墳)

  • 구분
    유적
  • 시대
    고구려
  • 위치
  • 유물번호
    S000852
  • 위치(출토지)
    遼陽市 本溪市 望水臺街道 上王家村
  • 지역
    본계(本溪市)
  • 유형
    고분
  • 형태사항
    6점  , 석실 
출토지
요양시 본계시 망수대가도 상왕가촌(遼陽市 本溪市 望水臺街道 上王家村)
조사내용
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
1957 9월. 요양 상왕가촌농업사가 전원에서 야채저장고(菜窖)를 파낼 때 벽화묘 1기를 발견함.
1958요령성박물관
(遼寧省博物館)
5월. 요령성박물관이 요령성문화국의 지시에 따라 정리조사를 진행함.
구조특징
묘실의 구조는 2개의 관실을 중심으로 앞쪽에 전실이 있고, 전실의 좌·우에 소측실로 이루어짐. 묘실은 전부 담청색의 남분혈암(南芬頁巖) 판석으로 축조, 돌 사이 틈새를 석회로 막았음. 판석이 매끈하여 그림을 그리기 쉬움.
묘문은 방형의 석판으로 막았는데 문 안쪽의 양측에는 2개의 단면 방형의 기둥석이 있고, 그 위에는 두공석을 괴었음. 기둥석은 문미를 받침. 아래에는 방형의 기초석을 두고 두 기둥 사이에는 문지방이 있으며, 안으로 들어가면 전실이 있음.
전실의 좌·우에는 작은 측실이 배치되었으며, 특히 좌측실에는 중간에 돌로 된 기둥을 하나 세우고 그 위에 천정을 만들었음. 전실과 관실 사이에 있는 기둥의 위에는 柱頭가 놓여 있고, 기둥의 너비와 주두의 아래부분 너비가 같으며, 주두 윗부분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사다리 모양을 띠고 있음. 전실의 후면은 좌우 병렬한 棺室에 접하고 있으며, 가운데 격벽 위에는 두공석이 있고, 대들보(橫梁)를 이룸. 두 관실 사이의 격벽에는 창을 내어서 두 관실이 서로 통하게 되어 있음.
천정은 대부분은 판석을 평평하게 덮었으나 전실은 4열로 판석을 서로 모줄임방식으로 쌓아 삼각고임천정(원보고서(『문물』1959-7)에서는 전랑의 천정을 “平頂方形天井(평정방형천정)”이라고 표현함.)을 이루며, 이런 구조는 요양에서 수차례 발견됨.
묘실의 후벽에는 문자를 새겼는데 석공이 고분 축조 이전에 임의로 석판 위에 새겼을 가능성이 있음. 상면에 문자가 새겨진 것으로 짐작되는 석재는 대략 요양 동산 일대에서 생산된 것임.
두 관실 안에는 각기 1개의 목관이 놓여 있는데 이미 부패하였고, 관못(棺釘) 50여 점만이 남아 있음. 관못의 위치를 보면 두 관의 길이는 약 2.3m 정도, 너비는 약 60-70㎝ 정도로 추정되며, 관못에 달라붙은 목흔(木痕)을 보면 관의 두께는 약 8㎝로 추정됨. 뼈대는 약간의 두골과 뼈부스러기(骨屑)만이 남아 있는데 석회침(石灰枕)과 두골의 위치를 보면 머리는 동쪽, 다리는 서쪽에 두었고, 바로펴묻기(仰面伸直葬) 형태를 취하고 있음. 우측관에는 남자, 좌측관에는 여자가 매장되어 있었음.
부장품은 매우 적은데 남자관에서는 비단꾸러미(絹包) 속의 철제 거울 1점과 우측 어깨 옆에서 청자 호자(靑瓷虎子) 1점, 여자관에서는 원형의 주칠(朱漆) 경대함(奩盒) 안에서 철제 거울 1점, 우측실의 명기대(明器臺)에서는 도반(陶盤) 2점 등이 출토되었음. 화폐는 두 관실 속에서 모두 70여 점이 출토되었는데 오수, 전륜오수, 화천 등 세 종류임.
벽화는 전랑 좌·우 측실 벽과 관실 앞 기둥에서 볼 수 있음. 우측실 후벽에는 묘주 단독 초상화, 좌측실 후벽에는 묘주 출행도, 기둥에는 구름을 그려 장식함. 다른 벽에서도 그림 흔적이 확인되기는 하나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없음. 벽화는 주·흑·황·백색 등의 색깔로 그렸는데 주색 위주임. 검은 색으로 윤곽을 그리고, 구도는 간단하고, 선이 호방하여 한위(漢魏)의 풍격과는 다름.
우측실정면벽에는 묘주의 연회도가 그려져 있음. 평상 위에 앉았고, 붉은 장막(幕)은 높이 매달고, 드리워진 장막(帷)에는 네 개의 매듭(流蘇)이 있음. 묘주는 평상 위에 단정히 앉아 있는데 머리는 머리카락을 모아 관을 쓰고, 입술은 붉고, 오른손에는 주미(麈尾)를 들고 있고, 입은 옷은 모호하고 명확치 않음. 묘주 앞에는 붉은 책상이 놓여 있으며, 등 뒤에는 붉은 병풍이 있음.
평상 우측에는 시립자가 한명 있는데 흑책(黑幘)을 쓰고 장포를 입고 허리를 맨 모습으로 묘주를 향해 홀(笏)을 받쳐 들고 있음. 머리 부분에는 “서좌(書左)”라는 글자모양이 묵서로 쓰여 있어 시위자의 신분을 보여줌. 병풍 뒤에는 시립자가 세 명이 있는데 모두 흑책을 쓰고 장포를 입고 허리를 맨 모습으로 묘주를 향해 笏을 받쳐 들고 있음. 평상 좌측에는 시립자 한명이 묘주를 향해 식사를 올리는 듯한 모습인데 사람이 모호하고 명확치 않으나 손에 들고 있는 잔(耳杯)이 보임.
좌측벽실 정면벽에는 거마출행도(車馬出行圖)가 그려져 있음. 기마수는 양측으로 각기 4인씩 2열종대로 배치되었는데 모두 흑책을 쓰고 장포를 입었으며, 두 손으로 홀을 받쳐 들고 있으며, 안장과 재갈이 모두 갖추어져 있음. 두 기마열의 가장 뒤편 가운데에는 누런 소가 이끄는 수레 1대가 있는데 바퀴는 흑색임. 수레 안에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흑관을 쓰고 손을 맞잡은 모습으로 묘주임. 수레를 이끄는 사람은 흑책을 쓰고 단포를 입었으며, 말고삐를 잡고 보행하고 있음. (좌)측실 오른쪽 벽에는 주·흑색의 굵은 선(粗線)이 드러나는데 방택(房宅)일 가능성이 있으나 이미 판별하기 어려움.
관실 앞의 기둥 벽화에는 떠도는 구름 문양이 그려져 있음. 관실벽에는 붉은색의 테두리선이 있는데 원래 벽화가 그려져 있었으나 물이 새어 침식당해 색깔이 대부분 박락되었을 가능성이 있음.
내부규모 및 특징
묘실 동서 길이 5m, 남북 너비 4m, 최고 높이 2.5m
전실 길이 2.36㎝, 너비 2m
우측실 길이 2.65m, 너비 0.96m, 높이 약 52㎝
좌측실 길이 2.4m, 너비 약 0.60m
역사적 의미
고분의 계통에 대해서 李慶發(1959년)은 요양벽화묘가 동한~위진시기에 축조되었으며, 이전에 10여기가 발견되었다고 보고되었다고 함. 그 가운데 위진시기의 벽화묘는 대다수 우측실이 좌측실보다 길고, 그림면(畵面)의 색깔이 간단하고, 묵선이 활달하고, 사자(死者)의 머리 아래에는 항상 석회침(石灰枕)이 있고, 부장품이 매우 적음. 이 상왕가벽화묘는 이런 특징 이외에 삼각고임천정을 갖추고 있는 점, 동시에 벽화의 내용 및 화법 등이 모두 북한 황해남도 안악3호분(일명, 冬壽墓)과 동일함. 그림 위의 제자(題字) 및 도반(陶盤)의 “徐(서)”자가 해서에 가까우며, 청자호자 등의 출토품을 보면 모두 이 벽화묘의 연대가 서진(西晉)보다 이르지 않고, 동진(東晉)보다 늦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고 함.
손수호(1997년)는 상왕가벽화묘가 무덤구조와 벽화내용상 고구려적 성격이 강하다고 봄. 무덤구조상 돌틈을 회로 메웠고, 무덤문이 요양이 2개인 것과 달리 고구려무덤과 같이 1개이며, 요양의 천정이 평천정형식인 것과 달리 고구려식의 삼각고임천장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지적함. 벽화내용상 묘주 연회도나 거마출행도 등의 묘사나 인물의 복색 등에서도 고구려적 성격이 집중적으로 드러난다고 봄. 특히 해당 벽화묘의 축조연대를 4세기말~5세기초로 추정하는데 당시 고구려가 요동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던 사실에 근거해 고구려 관리의 무덤으로 이해함.
고분의 연대에 대해서 李慶發(1959년)는 요양벽화묘가 동한~위진시기에 축조되었으며, 이전에 10여기가 발견되었다고 함. 그 가운데 위진시기의 벽화묘는 대다수 우측실이 좌측실보다 길고, 그림면(畵面)의 색깔이 간단하고, 묵선이 활달하고, 사자의 머리 아래에는 항상 석회침이 있고, 부장품이 매우 적음. 이 상왕가벽화묘는 이런 특징 이외에 삼각고임천정을 갖추고 있는 점, 동시에 벽화의 내용 및 화법 등이 모두 북한 황해남도 안악3호분(일명, 冬壽墓)과 동일함. 그림 위의 제자 및 도반의 “徐(서)”자가 해서에 가까우며, 청자호자 등의 출토품을 보면 모두 이 벽화묘의 연대가 서진보다 이르지 않고, 동진보다 늦을 수 없음을 보여줌.
손수호(1997년)는 상왕가촌 벽화고분의 축조연대를 4세기말~5세기초로 추정함.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근거를 제시함. 첫째, 이 무덤의 벽화주제내용과 무덤구조가 4세기 후반에 축조된 안악3호분과 거의 같다는 점을 제시함. 둘째, 무덤의 새겨진 묵서와 무덤에서 출토된 도반 밑굽에 쓰여진 글자가 해서에 가까운 글씨체로 5세기 고구려는 예서체(ex. 광개토왕릉비문)가 해서체(ex. 모두루묘지명)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고 봄. 셋째, 요양일대 벽화무덤과 같은 구조형식은 4세기 전반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중국 산동성 창산의 벽화묘는 묘지명에 의하면 남송 원가 원년(424)에 축조되었다는 점을 제시함.
강현숙(2005년)은 청자 호자는 위·서진·동진시대를 대표하는 부장품의 하나인데 상왕가촌 벽화묘의 청자 호자는 몸통과 구연 형태가 西晉代 호자와 동형임. 따라서 상왕가촌 벽화묘는 서진대 무덤으로 그 시기는 3세기말, 늦어도 4세기 초를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추정함.
청자 호자의 용도에 대해서는 호자의 용도에 대해 어떤 이들은 육조묘 중에 출토된 청자 호자는 주기·수기라고 하는데 호자의 형상에서부터 단순히 남성 묘주의 옆에서 나온 정황을 덧붙이면 익기(溺器)로 추정됨.
자연환경
본계시 망수대가도 상왕가촌(本溪市 望水臺街道 上王家村) 안에 위치. 고분은 요양시(遼陽市)에서 북쪽 교외 약 10里(≒3.92㎞) 거리에 위치함. 고분은 남쪽으로는 봉태자(棒台子)와 약 1리(≒392m) 떨어져 있으며, 동남으로는 철도를 사이에 두고 삼도호(三道壕)와 약 8리(≒3.14㎞) 떨어져 있음.
유물정보
철제 관못(棺釘) 1점, 철제 거울(鐵鏡) 2점, 청자 호자(靑瓷虎子) 1점, 도반(陶盤) 1점, 화폐(錢) 1점
참고문헌
· 李慶發, 「遼陽上王家村晉代壁畵墓淸理簡報」『文物』 1959-7, 1959
· 손수호, 「상왕가촌벽화무덤의 성격에 대하여」『조선고고연구』 1997-2, 사회과학출판사, 1997
· 강현숙, 『고구려와 비교해본 중국 한, 위·진의 벽화』, 지식산업사, 2005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上·下), 西安地圖出版社,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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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왕가 벽화고분(上王家 壁畵古墳) 자료번호 : ku.d_0001_0120_004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