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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미창구 6호분(米倉溝 6號墳)

  • 구분
    유적
  • 시대
    고구려
  • 위치
  • 유물번호
    S000152
  • 지역
    본계(本溪市)
  • 유형
    고분>봉토석실분
  • 형태사항
    가로: 14m, 세로: 11.7m, 높이: 1.3m  , 석실 
출토지
장군묘의 동남부에 위치(將軍墓 東南部 位置).
연대
장천 2호분과 동일시기인 약 5세기로 비정됨.
조사내용
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
1984요녕성고고연구소, 본계시박물관
(遼寧省考古硏究所, 本溪市博物館)
장군묘 발굴조사
1987본계시 환인현문물공작대
(本溪市桓仁縣文物工作隊)
장군묘 발굴조사
1991요녕성문물연구소, 본계시박물관, 환인현문관소
(遼寧省文物硏究所, 本溪市博物館, 桓仁縣文管所)
장군묘 및 주변의 소형묘 10여기 발굴
구조특징
현재 圓丘狀, 황토로 이루졌음.
내부규모 및 특징
-이미 파괴되어 墓頂은 남아 있지 않고 묘실 네 벽과 묘도 하부의 보존 상태는 양호함
-묘실은 장방형으로, 묘실벽은 괴석으로 축조되었고 일부분은 장대석으로 축조했으며, 묘벽은 내·외벽으로 나뉘며, 묘벽 안은 평평하고 가지런하며, 묘벽 밖은 가지런하지 않으며, 네 벽은 바닥에서 위로 들여쌓기함, 墓口는 남북 길이 2m, 동서 너비 1.25~1.37m, 현존 높이 0.8m, 북벽의 너비는 남벽보다 대체로 넓고, 묘실 동측에는 1개 관대(尸床)가 마련되어 있음, 관대는 작은 자갈과 소량의 작은 돌로 축조, 장방형, 길이 2m, 너비 0.64m, 관대 外側石이 관대 내측보다 0.06m 높게 테두리를 형성, 관대는 지면보다 0.09~0.18m 높음.
-묘도는 남벽의 서측에 위치하며 평면은 刀形, 방향은 200°이고, 북벽에는 서벽이 가장자리가 되어 묘도를 축조했는데, 묘도는 장방형으로 길이 1.8m, 상부 너비 0.68~0.75m, 하부 너비 0.85~0.9m, 현존 높이 0.8m의 규모임, 묘도 바깥쪽은 안쪽보다 넓으며, 바깥쪽은 현재 5층이 남아 있으며, 2매의 장대석으로 막음.
-관대 위와 서측 가장자리 위에는 대량의 불태워진 쇄골이 흑회색을 띠고 있는데 두개골, 척추골, 늑골 등으로 보임. 고분 안에는 목탄과 불태워진 흔적은 없어 시신은 외부에서 불태워진 후에 유골과 유골 잔편을 고분에 매장한 것으로 추정.
-고분내에는 철제 띠장식(桃形鐵扣飾) 2건, 철제 장식(環狀鐵鼻) 1건 등이 출토.
역사적 의미
고분 연대
장천 2호묘와의 비교 : 미창구 장군묘의 형상·구조·벽화내용·출토유물 등은 모두 길림 집안 장천 2호벽화묘와 유사함. 고분 구조는 모두 방형 평면의 4단 고임천정의 묘실과 墓道·左右 耳室·甬道로 이루어진 봉토석실묘이며, 황록색의 시유 화덕, 황색 시유 사이전연호, 장식문을 위주로 측면연화와 流雲王字 도안등으로 미루어 미창구 장군묘는 장천 2호분과 동일시기의 고분임. 『長川二號墓發掘紀要』에 의하면 장천2호분을 약 5세기로 비정하였음.
출토품 : 장군묘 출토품인 鎏金銅八瓣花形飾件, 銅帶扣 등은 비교적 늦은 고분에서 보이지 않으며, 3~4세기로 비정되는 羅通山城에서 이런 종류의 유물이 출토되었음.
고구려 벽화내용 : 이전복의 고구려 고분벽화의 시기구분 안에 따르면, 초기 벽화의 내용은 도안이 간단하고 묘주인이 생전의 각종 생활장면이 주요 제재가 되고 그 외 日月星辰, 奇獸飛禽·飛仙 등이 도안으로 사용되며 연대는 대체로 3세기중엽에서 4세기중엽에 해당. 중기 벽화의 내용은 묘주인의 생활과 더불어 불교내용과 사신도상이 출현하며 연대는 대체로 4세기중엽에서 5세기중엽에 해당. 말기 벽화는 벽면에 직접 그림을 그리며, 사신도가 주요 제재.
장군묘는 벽화내용 장식문 위주로 인물·산수의 화법이 보이지 않고 연화만 그려져 있지 않음. 연화문은 불교와 관련되나 아직 불교와 유관한 도안이 직접 그려져 있지 않아 불교가 처음 보급되는 단계로 보임. 문헌에는 소수림왕 2년(372)에 불교가 고구려에 전파되었다고 하므로, 장군묘는 중기에 조금 앞서는 시기로 비정하는 것이 합당할 것임.
고분형식 : 장군묘와 같은 봉토석실묘는 고구려시대 만기의 고분형식으로 대체로 4세기에 출현하여 5세기에 성행함. 특히 장군묘와 같은 구조는 무용총, 각저총, 집안 통구 산성하 332호묘 등이 대표적임. 무용총의 벽화에는 장천 2호묘와 미창구 장군묘의 측면연화와 유사한 도안이 있음. 이들 고분의 연대는 모두 4세기임.
이상과 같이 보고문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환인 미창구 장군묘의 시대는 4세기말에서 5세기초에 해당되지만, 장천 2호분은 구조와 벽화내용, 부장유물과 출토 기와들을 종합해 볼 때 4세기말이나 5세기초로 보기 어려운 점이 있음.

벽화의 의의
장식무늬 화법 : 장군묘는 耳室을 제외하고 주실 전체를 연화로 장식함. 연화는 측면연화로 이런 장식무늬 위주의 화법은 비교적 단조로우며 파악이 쉽지 않고, 일정 회화 수준에서 그리기 어렵지 않음. 그러나 전체 화면에서 본다면 배치가 합리적이고 구조가 정연하며 천장 고임부의 측면연화는 가로·세로, 좌·우 모두 열을 이룬 장식무늬위주의 화법은 지금까지 드물어서, 고구려민족의 회화예술사를 연구하는데 새로운 자료임.
불교적 세계관-연화문 : 장군묘 벽화의 주제인 연화문는 당시 고구려인의 불교 숭배와 관련됨. 불교가 고구려에 전파된 후 왕족 및 귀족를 거쳐 민간에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 특히 장군묘 묘실 안 전체를 연화로 장식한 것은 묘주인의 불교 신앙과 숭배를 반영한 것이며, 연화정토의 경계에 대한 갈구를 표현한 것임. 이는 불교가 당시 사회에서 성행했던 사실을 보여주며, 중국내 고구려 벽화고분 20여기 가운데에 연화가 표현된 것은 16기인데, 장군묘 이외에 집안 舞踊墓, 장천 1호묘, 오회분 4호묘 등이 있음.
묘실의 고임돌의 변형연화는 火焰狀과 같고 물결이 움직이는 듯한 형상이며, 바닥부 형상은 개구리 발과 같으며 둘씩 서로 붙어 있음. 이 도안은 묘주인 부부가 받침과 연꽃같이 떨어지지 않고 연화정토속에서 화생하여 극락세계에 함께 이르는 것을 상징함. 이런 연화 도안 역시 벽화에서 최초로 발견되어 벽화예술에 신자료를 제공함.
묘주의 신분과 중원문화의 영향-용무늬·流雲王字 도안 : 용무늬는 묘실 네 벽에는 들보가 그려져 있는데, 그 위의 용무늬를 장식은 이전의 벽화에서 볼 없는 최초의 예로, 고구려에서도 용의 형상과 그 의미에 대해 이미 이해하고 있던 것을 보여줌. 중원지구에서 용의 형상은 비교적 일찍 출현하는데 용은 富貴·吉祥·神權 등을 대표하며, 용의 형상은 더욱 복잡해지고, 제왕에게 독점되어 권력의 상징이 됨. 이 고분벽화의 용무늬는 고구려민족이 끊임없이 중원문화의 영향을 받았던 사실과 용을 부귀의 길상물로 여겼던 사실을 보여주며, 동시에 묘주인이 고구려왕과 일정한 관계를 가졌다고 짐작케 함, 流雲王字는 고임돌의 하부와 이실 안의 流雲王字 도안은 장천2호묘 벽화에 이미 발견되었음. 이 유운왕자 도안은 權貴를 상징하므로, 王字 역시 묘주인의 특수한 신분과 지위를 보여주는 사례로, 장군묘 봉토는 高大하여 묘주인의 권세와 특수한 신분을 보여줌.
죽음에 대한 인식-장고무늬 : 용무늬의 사이에 장고형 도안은 최초의 예로 가장 이른 시기의 장고 형상으로 오늘날 한국의 악기인 장고와 유사함. 장고 도안은 묘주가 연화가 가득한 정토속에서 화생하여 歌舞太平의 극락세계에 도달하는 것을 표현함. 또한 『北史』 고려전에 고구려인이 사후 장사지낼때 “鼓舞以作樂 以送之”하는 습속이 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장고는 고구려인이 죽음은 일종의 초탈이며 인간세상의 고해에서 벗어나 극락세계에 오르는 기쁜 일임을 상징함.

고분의 주인공
장군묘의 축조규모는 웅장하며, 구조는 빈틈없고, 제작은 정밀하고, 묘실벽은 모두 가공을 거친 대석으로 축조함. 두 관대 역시 온전한 대석을 가공하여 만들었음. 부장품은 적으나 대다수가 鎏金임. 이로 미루어 묘주는 적어도 왕족·귀족의 일원일 것임.
보고자는 『삼국지』 고구려전에 의하면, 206년 이이모와 발기의 왕위쟁탈과정에서 이이모가 왕위에 오르자 발기는 公孫康에 내투하였다가 돌아가 비류수 가에 머물었다는 기록과 결부시켜 묘주를 국내(집안)에서 졸본(환인)으로 옮겨간 발기세력과 유관하다고 추정함.
任傳興은 장군묘를 2차 遷葬한 주몽과 왕후의 합장묘로 보는 견해를 제시함, 寧會學은 주몽이 죽은 해와 고분이 축조된 시기 차이가 크고, 묘제가 맞지 않으며, 연화문 벽화는 불교수용이후 축조되었을 것이며, 고구려 매장습속에 ‘遷葬’이 없다는 점 등을 들어 비판하고, 장군묘의 주인공을 고국양왕 부부로 비정하고 함. 장군묘는 연화문벽화로 고분벽화의 내용에 따른 시기구분상 대략 기원 370~380년에 해당되며 이 시기는 소수림왕과 고국양왕대로, 고구려왕의 시호는 장지명을 따르고 있는데, 여러 왕들에게서 보이는 ‘故國’이란 시호 역시 ‘고국’이란 장지에 의해 붙여진 것임. 즉 ‘고국’은 고구려의 첫번째 수도를 지칭한 표현으로 오늘날 환인지역으로, 장군묘 건축시기 ‘고국’이란 장지명 시호를 가진 ‘고국양왕’이 장군묘의 묘주라고 주장.

수공제작술과 고분제작술의 발달
수공업제작술 : 장군묘에 부장된 鎏金銅飾件, 細如蠶絲의 金線, 대량의 철제공구 등은 고구려의 수공제작·冶鐵鍛造 기술이 일정 발전했던 것을 보여주며, 고구려시기의 경제상황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실물자료 제공함.
분구 축조술 : 봉토분구가 지금까지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고구려인이 건축방면에서 상당한 수준의 기술에 이르렀던 사실을 보여줌. 묘실 외부를 거석으로 보강하고 목탄·백회·진흙 등으로 깔은 방수시설, 황토 모래로 다져 지표면의 수분과 토사가 유실되지 않도록 하였으며, 봉토 동쪽과 북쪽의 부석시설은 묘실을 보강과 함께 종교와 예속 방면의 의미를 내포함.

매장습속
장군묘에서는 黃釉四耳展沿罐 3건이 출토된 것이 3이라는 홀수조합을 보여주는 사례가 고구려 장속의 하나인지는 좀 더 많은 발견을 기다려 볼 필요가 있음.
장군묘 남부의 봉토 중에 묘실 벽에 바짝 붙어서 大條石이 발견되었고, 하부에는 뒤집어진 靴形石 및 帶方孔의 판석이 확인됨. 이는 묘주인의 후손이 묘주인에게 비를 세워 공덕을 노래하기 위해 준비했으나 어떤 이유로 글자를 새기지 못하고 흙속에 묻었던 것으로 보임. 봉토 속에서 출토된 화형석는 고구려 장속의 일종으로, 장군묘 부근 5호묘의 墓道口 위에도 역시 화형석이 있으나 가공이 비교적 거칠음.
장군묘 주위의 소형묘들이 장군묘의 주위를 둘러싸고 분포한다는 점에서 장군묘의 배장묘로 보임. 배장묘는 장군묘와 동일시기 또는 장군묘보다 늦은 시기임. 배장묘는 刀形墓(6·7호)와 鏟形墓로 나뉨. 도형묘와 산형묘는 시기의 선후관계를 가진다고 봄. 소형묘는 두기씩 짝을 이루고 있으며(6·7호묘, 11·12호묘, 2·3호묘), 이것은 고구려 장속연구를 위한 새로운 자료를 제공함.
자연환경
정북 방향 약 10㎞ 거리에 환인현성이, 미창구 장군묘에서 동북 16㎞ 거리에 오녀산 산성이 있고, 서북 13㎞ 거리의 육도하자향에는 하고성자성터, 그 북쪽에는 상고성자 고분군이 자리함, 서북방향으로 동선영촌과 강을 마주보고 있으며, 동선영에는 고구려 시기 적석총이 있음.
유물정보
철제 띠장식(桃形鐵扣飾) 2점, 철제 장식(環狀鐵鼻) 1점.
참고문헌
· 桓仁滿族自治縣文物志編纂委員會, 『桓仁滿族自治縣文物志』, 1990
· 武家昌·魏運亨, 「桓仁發現高句麗壁畵大墓」『中國文物報』 9, 1992
· 武家昌, 「遼寧桓仁高句麗壁畵墓」『中國文物報』 18, 1993
· 辛占山, 「桓仁米倉溝高句麗“將軍墓”」『東北亞文明的源流的考古學硏究』, 1993
· 劉伊丹, 「淺談桓仁米倉溝高句麗將軍墓壁畵」『遼海文物學刊』 副刊, 1994
· 武家昌, 「桓仁米倉溝將軍墓壁畵初探」『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李春琴·孫雪蓮, 「桓仁高句麗壁畵」『高句麗歷史與文化』, 吉林文史出版社, 2000
· 전호태,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 사계절출판사, 2000
· 武家昌·梁志龍·王俊輝, 「桓仁米倉溝高句麗壁畵墓」『遼寧考古文集』, 遼寧民族出版社, 2003
· 寧會學, 「桓仁米倉溝將軍墓墓主考」『博物館研究』 2004-3, 2004
· 寧會學, 「桓仁米倉溝將軍墓所葬何人」『東北史地』 2004-4,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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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창구 6호분(米倉溝 6號墳) 자료번호 : ku.d_0001_0080_0050_04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