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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고력묘자 고분군 단2(高力墓子 古墳群 壇2)

  • 구분
    유적
  • 시대
    고구려
  • 위치
  • 유물번호
    S000046
  • 위치(출토지)
    連江鄕 高力墓子村 남쪽의 낮고 완만한 산마루에 위치. 현재는 수몰 단 2는 단1의 서북쪽 1.5m 지점에 위치
  • 지역
    본계(本溪市)
  • 유형
    고분>계장식적석총
  • 형태사항
    가로: 5.5m, 세로: 12.5m, 높이: 1m  , 석광 
출토지
원래 연강향 고력묘자촌 남쪽의 낮고 완만한 산마루에 위치, 현재는 수몰. 단2는 단1의 서북쪽 1.5m 지점에 위치(原來 連江鄉 高力墓子村 南側 低㟶 位置, 現在 水沒. 壇2 壇1 西北側 1.5m 地点 位置).
연대
1950년대 발굴
-상한 연대 : 기원 전후 시기, 고력묘자 고분군에서 출토된 토기의 태토와 제작 기술은 서한 말- 동한 초기 토기 특징을 지님: 대부분 모래가 섞인 홍갈색 혹은 황갈색, 소성도는 높지 않고 기형도 불규칙적. 기형의 특징은 方脣, 折沿, 束頸, 平底임. 이는 서한 말기로부터 동한 초기의 토기 특징임.
-하한 연대 : 고구려 만기, 고구려 고분 형식이 편년에 의하면 봉토분은 비교적 늦은 시기임. 따라서 고력묘자고분군은 고구려 전 기간에 걸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음.
1994년 발굴
-환인 경내는 고구려 초기 활동의 중심지구로 현성 서북의 오녀산산성은 이미 많은 학자들이 고구려 제1도성인 흘승골성으로 보고 있음. 고려묘자 적석총은 오녀산 산성과 비교적 가까운 거리로 양자는 일정한 관계가 있을 것이며, 적석묘의 내외 구조를 보면 고구려 조기 고분의 특징을 갖추고 있음. 토기가 모두 물레를 사용하지 않은 手製이며, 태토가 거칠고, 火候가 높지 않으므로 고구려 전기 토기보다 조금 이른 단계임. 또한 출토된 陶壺와 陶罐의 형식 특징은 각각 동일한 집안 동대파 M356에서 출토된 單耳陶杯, 고력묘자 고분군 19호 및 201호의 陶罐과 서로 유사함. 이 세 고분의 연대는 기원 1~3세기 또는 3세기로 추정됨. 고려묘자 적석총이 자리한 지리적 위치, 무덤 구조상의 원시성, 도편 중 일부는 漢式 鐵?가 출토된 바 있는 환인 龍家溝와 小荒溝 유적지 도편과 유사하므로, 고려묘자 적석총의 연대는 고구려 건국 초기, 즉 약 기원 1세기 또는 조금 이를 것으로 판단됨.
조사내용
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
1956동북박물관문물공작대
(東北博物館文物工作隊)
고려묘자촌에서 총 240여기 확인. 고분군 남단의 언덕에 대형 적석묘 70~80여기 집중 분포하는데 그 중 7기 고분 발굴
1958동북박물관문물공작대
(東北博物館文物工作隊)
고분 총 37기 발굴(連江村 6기 포함)
1964조중연합고고대
(朝中聯合考古隊)
박시형(김일성대) 등 북한측 9인과 이전복(길림성고고연구소) 등 중국측 합동 조사
1994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 본계시박물관, 환인현문물관리소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本溪市博物館, 桓仁縣文物管理所)
요녕성 문물고고연구소, 본계시 박물관, 환인현 문물관리소 혼강댐의 동남부 주위, 수몰된 고분군 주위에 수몰되지 않고 남아 있었던 곳으로 고분은 댐의 수면보다 5m 높은 곳에 위치한 것을 조사함
고분은 산돌로 축조한 연접묘 4기, 무덤 평면은 근방형 또는 장방형의 커다란 돌로 축조.
연접묘된 무덤을 ‘方壇’이라 칭하고, 발굴 순서에 따라 壇1~壇4로 편호.
구조특징
돌이 허물어져 단1과 단2의 사이를 메웠고, 동남쪽에는 1단의 階墻 축조, 벽면 정연함, 서북쪽에는 2단의 계장이 명확하고 높이 0.5~0.6m임.
동북과 서남쪽에는 3~4단 계장이 남아 있는 듯하나, 훼손이 심각하여 원상은 불명확함. 壇 정상부는 평평한 편이고 위에 석광이 1개 축조.
제3호 석광은 장방형에 가까운 형태로 길이 2.7, 너비 0.9~1.4m, 깊이 0.8m, 방향 42°.
고분의 적석분구 아래에 두께 20㎝의 燒石層이 있고, 고분 바닥에는 작은 할석과 자갈이 깔려있으며, 서남모서리에는 청남색 熔石이 집중.
중앙부와 서북 석광벽 아래 소량의 肱骨 잔편과 기타 쇄골 덩어리들이 산재함, 그 밖의 趾骨 粘面이 熔石 燒結面 위에 있음는데 굉골과 지골의 위치로 보아 원래 머리 방향은 동북쪽임.
석광 네 벽 아래의 돌무지는 불에 타서 홍갈색을 띔
역사적 의미
매장방식
44기의 고분 가운데 24기 고분-봉토분 10기, 기단적석총 8기, 봉토석실묘 1기, 대형의 무기단 적석총과 계단적석총 5기-에서 유골 발견, 무기단적석총과 계단적석총에서 발견된 頭骨과 四肢骨이 보존 상태가 양호, 두개골은 모두 묘실 後壁을 향하고, 다리는 묘문을 향함. 대다수 仰身直肢葬, 4기의 봉토분에서 屈肢葬과 俯身葬 등도 발견됨.
單人葬, 雙人葬, 三人葬
화장 : 제15호, 제20호, 23호 등의 3기 고분에서는 불탄 인골 잔편들이 발견됨

구조 특징 - 연접묘
열상 배치 : 고분군 남단의 積石塚 區域에서는 약 70기 고분이 정연하게 배열. 배열은 남단의 높은 자리에 1기, 바로 아래 북쪽에 2기, 다시 북쪽으로 4줄로 정연함. 북묘는 모두 남벽이 없이 남묘의 북쪽 벽에 이어 묘실 축조 이는 남묘가 먼저 축조되고 북묘가 이후에 축조되었음을 보여줌
분지 분포 : 4줄로 정연하게 배열되며, 북쪽으로 갈수록 동·서 두 방향으로 확장되어 나감. 이는 적석묘 구역 고분이 공동 조상을 갖고, 각 줄의 연접묘는 가까운 혈연 관계의 한 가족을 대표하며, 여러 줄의 연접묘는 공동 혈연 관계에 따라 동일한 묘지에 묻히는 씨족사회 생활 습속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됨.
이런 매장방식은 일명 연접묘(串墓)라 하며, 集安 七星山墓域의 木耳場 일대 및 禹山墓域의 남쪽 기슭에서도 발견됨.

주변 고구려 유적과의 관계
고력묘자 고분군은 환인지구 최대의 고분군으로 원래 혼강 서안에 위치, 서쪽으로 5㎞ 떨어진 혼강 맞은 편에는 고구려 조기 도성인 오녀산산성이 있고, 서북 약 2.5㎞ 원래 連江村 역시 비교적 커다란 고구려 고분군이 있음. 고력묘자 고분군은 오녀산산성 및 그 부근의 고구려유적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

1994년 발굴고분
구조 성격
연접묘 : 고려묘자 고분군 가운데 단1~단4 고분과 유사한 고분은 고력묘자 고분군 제15호 및 19호를 비롯하여 집안 東大坡 M356, 집안 轉山子 M191 및 162 등임.
계장식 축조: 고력묘자 고분군 제15호 및 19호의 계장은 동대파 356과 유사함. 모두 비교적 규칙적이며, 전체가 할석을 덮어 丘狀을 만들었음, 고려묘자 적석총은 계장 축조가 거칠고, 계단의 윤곽이 불명확하여, 전체를 봉하지 못하여 외관형태가 원시적으로 표현되어 있음.
지탱석 : 단3 및 단4의 계장 바깥의 분구 지탱석으로 커다란 돌을 1열 배치하는 방법은 다른 고분 중에서 일찍이 보였음. 다만 단1의 서북계장 바깥에 장대석을 비스듬히 기대는 법은 드문 예로, 후세의 고구려 태왕릉, 장군총 등 독립적 장대석을 호석으로 사용한 건축법과 무관하지 않을 것임.

석광과 장구
장구 : 석광 광벽에서 불태워진 흔적이 있으며, 석광 안에서 목곽에 사용된 꺽쇠나 관못은 보이지 않음. 고구려 조기 고분군 가운데 목곽이 간단히 끼워 맞추는 구조였거나, 곽이 없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함.
석광 : 곽이 없었다면, 석단을 쌓는 과정 중에 시신을 설치하는 곳에 미리 빈 구덩이를 남기거나, 석단을 모두 축조한 후에 묘의 위치에 따라 다시 적석을 헤치고 구덩이를 만드는 두 방법이 사용되었을 것. 전자가 비교적 시간과 노력을 절약한 방법임.

장례풍속에 관한 특이점
가족장 : 연접묘는 일종의 가족 고분으로, 가족을 모아 장례한 결과로 추정. 동일 단 위에의 여러 묘광은 아마도 일가족 중의 동년배일지도 모름. 고구려 후기 봉토분 가운데 “同墓異穴”이 바로 이런 “同壇異穴” 장속의 계승을 시사함.
화장 : 고려묘자 적석총은 보편적으로 화장을 채용, 다만, 불태워진 정도는 다름. 단3 위의 M5 및 M6는 심하게 불탔는데, 돌을 불에 타서 벌어졌고, 유리질화된 용석이 많으며 그 위에 커다란 땔나무 흔적이 명확히 보이므로, 불의 온도는 1000도보다 높았을 것임. 가장 위쪽의 단4에서 순차적으로 그 뒤의 단1~단3으로 더욱 불태워지는 추세를 확인할 수 있다.
묘광 바닥 : 다수의 묘실 바닥 위에 깬돌이 많이 보이며, 자갈은 극히 드물게 산재함. 이것은 후에 주로 자갈을 고분 바닥에 깔았던 방법과는 차별이 있음.
장속과 관련한 기록 : 北史기록에 의하면, 고구려 습속은 죽은 자를 매장한 후 “사자가 생시에 服玩하던 車馬를 취해 고분 옆에 두면 장례에 참석한 사람들이 다투어 취해서 간다”고 하였음. 이번 발굴 중 석광 바깥쪽 돌 틈 사이에서 토기편 등이 발견된 것은 이런 장속의 조기 반영인지 주목할 가치가 있음.
자연환경
산마루 양쪽 아래 계곡으로 작은 내가 서쪽으로 흘러 혼강으로 들어감. 산마루의 서북 1㎞ 거리에 고려묘자촌이 있고, 혼강 동안은 마을의 서쪽으로 1.2㎞ 떨어짐. 동쪽 산등성이를 건너 2.5㎞ 떨어진 곳인 연강촌에서도 남쪽 강안 부근에 고구려 시기 대형분이 있음.
서북쪽 5㎞ 떨어진 강 건너편에 오녀산성이 위치.
서쪽으로 약 15㎞ 떨어진 곳에 환인현성이 위치.
혼강댐 건설로 고분군은 수몰(연강촌과 고력묘자촌 수몰)
현재 환인현 혼강댐 동남부 가장자리에 일부 고분이 확인. 國有庫區 林場高句麗墓子工區에 속함. 현재 고분군은 댐의 수면보다 5m 높음.

유물정보
사질 홍갈색 토기(罐) 1건, 대상파수(板耳) 1건 출토
참고문헌
· 陳大爲, 「桓仁縣考古調査發掘簡報」『考古』 1960-1, 1960
· 정찬영, 「기원4세기까지의 고구려 묘제에 관한 연구」『고고민속론문집』 5, 1973
· 李殿福, 「集安高句麗墓硏究」『考古學報』 1980-2, 1980
· 陳大爲, 「試論桓仁高句麗積石墓的類型, 年代及其演變」『遼寧省考古·博物館學會成立大會會刊』, 1981
· 陳大爲, 「桓仁高句麗積石墓的外形和內部結構」『遼寧文物』 1981-2, 1981
· 方起東, 「高句麗石墓的演進」『博物館研究』 1985-2, 1985
· 魏存成, 「高句麗積石墓的類型和演變」『考古學報』 1987-3, 中國社會科學院考古研究所, 1987
· 桓仁滿族自治縣文物志編纂委員會, 『桓仁滿族自治縣文物志』, 1990
· 萬欣·梁志龍, 「遼寧桓仁縣高麗墓子高句麗積石墓」『考古』 1998-3, 1998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李新全, 「五女山山城及其周圍的高句麗早期遺跡」『고구려 문화의 역사적 의의』, 고구려연구재단,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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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력묘자 고분군 단2(高力墓子 古墳群 壇2) 자료번호 : ku.d_0001_0080_0050_02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