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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소시고분; 본계진묘(小市古墳; 本溪晉墓)

  • 구분
    유적
  • 시대
    고구려
  • 위치
  • 유물번호
    S000783
  • 위치(출토지)
    遼寧省 本溪市 小市鎭 地質學校 內
  • 지역
    본계(本溪市)
  • 유형
    고분>봉토석실분
  • 형태사항
    30점  , 석실 
출토지
요녕성 본계시 소시진 지질학교 내(遼寧省 本溪市 小市鎭 地質學校 內)
조사내용
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
1960요령성문화국
(遼寧省文化局)
1960년 4월 요령성 야금국(冶金局) 감탐공사(勘探公司) 04대(隊)가 석탄가스를 높이고자 공사를 시작하면서 이 고분을 발견. 묘의 천장부가 이미 드러났으며, 유물은 모두 꺼내가 버렸음. 현상에 의거해 묘실구조를 실측하고, 개략적인 현상을 기록함. 출토유물 전부를 회수하여 본계시 문화국에 보존하도록 함.
구조특징
고분의 방향은 172° 이고, 묘실은 석축으로 평면은 ‘丁’자형임. 묘실은 주실(主室), 전실, 좌, 우 이실(耳室) 등 세 부분으로 구성. 묘실의 네 벽은 모두 크기와 두께가 고르지 않은 돌로 평평하게 쌓음. 묘광은 지표에서 2m 아래에 위치. 천장은 3매의 커다란 판석을 덮었고, 그 위에 재를 한 겹 덮고, 다시 그 위에 다시 비교적 큰 자갈돌(礫石)을 덮었음. 묘문은 큰 판석 한매를 세워서 폐쇄하였고, 매우 견고함.
주실의 동서 양 벽은 모두 할석으로 층층이 가지런히 쌓았는데 아래에서 위로 가면서 들여쌓아 호형(弧形)을 띠고 있음. 벽면에는 한 겹의 백회가 발라져 있는데 두께가 3-5㎝에 달함. 주실 내 서측에는 판석을 깔은 시상(尸床)이 있음. 시상은 주실과 길이가 같으며, 너비는 50㎝임. 시상 아래에는 한 겹의 두께가 30㎝에 달하는 자갈을 깔았으며, 자갈 아랫면에는 한 겹의 비교적 얇은 판석을 깔고, 다시 그 아래에는 약 10㎝ 두께의 재를 깔았음. 주실 안에서 목판(木板)의 흔적과 갈색 칠편(漆片)이 발견됨. 칠편 위에는 붉은색(朱色) 무늬가 새겨져 있고, 묘 내에는 적지 않은 철정(鐵釘)이 나왔음. 어떤 것은 목흔(木痕)이 붙어 있었음. 이를 통해서 목관 장구(葬具)가 있었음을 알 수 있음. 목관 위에는 갈색의 칠이 발라졌고 꾳문양(花紋)이 그려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됨. 그 외에 현지인에 의하면 묘실 안에서 두개골 잔편과 넓적다리 뼈(腿骨) 잔편이 발견되었다고 함.
주실의 남부에는 동서향을 장축으로 하는 전실이 있음. 전실의 동서 양단에는 각기 하나의 이실이 축조되어 있음. 전실 바닥은 주실 바닥보다 대략 20㎝ 낮음.
두 이실은 두 겹의 판석을 깔아 작은 대를 이루며, 바닥은 전실 에 비해 20㎝ 높고 주실과 같음. 이실의 북벽은 모두 판석 한매를 세웠는데 길이 및 높이는 모두 75㎝, 너비 50㎝임.
내부규모 및 특징
묘실 벽 높이 1.5m, 묘실 바닥의 전체 길이 5m, 너비 1.9m
주실 남북 길이 2.5m, 동서 너비 1.75m
전실 동서 길이 1.3m, 너비 75㎝
이실 남북 길이 75㎝
역사적 의미
원보고자는 해당고분을 ‘본계진묘(本溪晉墓)’라고 명명함.
고분의 족속 및 연대에 관한 요령성박물관(1984년)의 연구가 있음. 이에 따르면, 이 고분의 구조는, 바닥은 자갈이 깔려 있으며, 천정 위에 자갈을 쌓아 올렸으며, 묘벽은 호형(弧形)을 이루고 있음. 묘실 안의 한쪽에는 석판으로 시상(尸床)을 마련하였으며, 부장품 가운데 재갈, 철제 장막걸이, 동제 허리띠고리, 금동장식, 토기의 무늬 등 모두 길림 집안 고구려 고분의 구조와 출토유물이 서로 동일하거나 유사함. 다만 묘실의 평면이 주실, 전실, 이실 등이 있는 점이 요양의 위진 벽화묘의 구조와 동일함. 따라서 이 고분은 진묘일 가능성도 있고, 한편 고구려 고분일 가능성도 있음. 이 고분의 구조와 출토유물의 특징은 본계 소시의 지리방위와 결합하여 현도군과 고구려가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상호 교류하고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음. 출토한 호(陶壺)는 큰 나팔모양 입(口)이 있고, 배(腹)에는 가로손잡이(橫耳)가 있는 기형과 비교하면 앞선 시기에 해당함. 고분 속에서 시유(施釉) 도기가 출토되지 않았음. 토기의 입 지름(口徑)과 바닥 지름(底徑)은 비슷하며,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점차 넓어지나 그다지 넓지 않고, 구연(口沿)은 밖으로 벌어졌으나 그다지 길지 않음. 재갈은 길림 집안 만보정 78호묘에서 출토된 금동제와 유사하며, 철제 장막걸이, 동제 허리띠고리, 금동 장식 등은 모두 길림 집안 우산하 41호묘 출토유물과 유사함. 그러나 이 가운데 그들 사이에 생활 습속과 장제(葬制) 방면의 일정한 연계가 있다는 것을 찾기 어려움. 각 방면에서 시대구분 할 수 있는 특징을 보면 그것들은 집안 우산하 41호묘의 축조 연대에 비해 이르고, 양진(兩晉)보다 늦지 않음(兩晉16國 시기). 묘실은 지하 2m에 위치하며, 봉토의 유무 및 점유면적의 크기를 알 수 없음. 천정 위에 일부 있는 것은 고분이 태자하와 탕하의 합류지점의 충적 평원에 위치한 까닭에 그 후에 퇴적한 것임. 묘실은 고도가 집안 우산하41호묘 보다 약간 낮은 것을 제외하면 그 나머지 길이 및 너비 등이 모두 그것과 차이가 없음. 집안 만보정78호묘와 우산하41호묘는 집안 지역에서 모두 중형 고분에 해당하며, 요동지역의 묘실과 비교하면 大墓에 속함. 집안 만보정78호묘는 방단광실적석묘이며, 꼭대기에는 개석이 없으므로 적석묘 가운데 비교적 이른 시기의 형식임. 우산하41호묘는 방단계제석실묘이며, 묘실 바닥이 지면과 평행하나 묘실에서 벽화가 발견되어 시대는 5세기 중엽에 상당함.
齊俊·丁曉强(1997년)의 연구에 따르면, 우선 고분구조와 축조방식은 자갈로 바닥을 깔고, 묘실 안의 한쪽에 석판으로 시상을 만들고, 천정은 판석으로 덮고, 자갈로 다시 봉하였으며, 묘벽은 호형을 이루고, 전실과 이실을 갖춘 특징 등이 집안 고구려묘의 구조와 매우 유사함.
부장품 가운데 Ⅰ식 관(罐)이 전연(展沿), 심복(深腹), 평저(平底)임. 그 형식은 집안 칠성산고분군(M1096)에서 출토된 관(罐)과 유사하며, 다만 토기의 색깔과 광택이 약간 구별됨. 또한 Ⅱ식 관은 어깨부에 수장문(垂帳紋)이 시문되어 집안 칠성산고분군에서 출토된 호(壺)의 무늬와 매우 유사함. 이런 수장문(垂帳紋)은 고구려 토기 가운데 비교적 대표성을 지닌 장식무늬임. 원래 본계진묘에서는 비교적 많은 금동장식과 재갈, 안장 장식, 금은장식, 철촉 등이 출토되었는데 집안 고구려고분 중에서 자주 보임. 비록 소시 지질학교 내의 ‘丁’자형 봉토석실묘의 무덤형식과 부장품은 해당 무덤이 고구려 중만기에 속하는 것을 반영했지만 대량의 유물은 오히려 집안 고구려 적석묘 출토의 유물과 유사함. 이로써 이들 공동요소가 동일민족문화의 기본특징을 반영했음을 볼 수 있음.
장속은 『後漢書』 및 『三國志』, 『梁書』, 『南史』등에서 고구려의 ‘후장(厚葬)’ 풍습을 전하고 있는데 소시의 ‘丁’자형 석실묘에서 풍부한 유물이 출토된 것과 부합함. 한편 고구려 고분이 적석묘, 적석석광묘, 봉토석실묘로 변화함. 소시 중심반점 석실묘 및 소시 지질학교의 ‘丁’자형 석실묘는 모두 묘 정상부를 봉토하였으며, 묘실 안에는 목질장구가 존재하고 있는데 이는 고구려 만기 무덤형식에 해당함. 이들 현상은 고구려민족이 주변 한족의 영향을 받은 것을 설명하며, 중국 위진 시기 묘장 습속의 결과를 받아들인 것으로 진묘(晉墓)라고 볼 수 없음. 소시지구에 분포하는 고구려 유적과 유물, 근래의 고고조사와 발굴로 실물자료는 사료에 기재된 것과 일치함. 고구려는 초기에는 환인지구에서 주로 활동했으며, 이후 집안으로 천도하였으며, 진나라 태원 10년(386)에 요동을 점령한 이래로 고구려 멸망 때까지 약 265년간 요동지역에서 활동했음. 이런 과정에서 소시 지구에는 고구려 고분 및 유지, 산성 등이 남겨졌는데 사료와 부합함. 본문에 기술된 고구려 묘장 및 출토유물은 대부분 고구려 만기의 유적과 유물임.
齊俊·梁志龍(2001년)의 연구에 따르면, 형식과 축조법은 소시 중심가 M1과 비슷한데 두 고분 모두 고구려 묘장으로 추정됨. 첫째, M1과 소시 진묘의 묘도는 모두 묘실 남면의 중앙부에 위치하여 평면의 형상이 고구려 봉토석실묘 가운데 산형(鏟形)고분과 매우 유사함. 그 외 묘벽을 안으로 들여쌓는 축조법이 확인되는데 고구려 봉토석실묘에서 다수 보여짐. 둘째, 동·서 두 벽의 감실은 환인과 집안지구의 고구려 고분에서는 보이지 않으나 한반도의 고구려 고분 가운데서 많이 발견되고 있음. 셋째, 고구려 봉토묘 가운데 묘실 바닥부는 일반적으로 모두 지표보다 높거나 평행을 이루며, 일부만 지하에 들어감. 소시 중심가 M1, M2 및 소시 진묘는 모두 지하에 들어가 있음. 이런 현상은 무순 전둔 및 와혼목(洼渾木)에서도 역시 보임.
고구려는 광개토왕 때에 여러 차례 요동 진출을 시도하여 결국 404년에 요동을 점령하게 됨. 소시지구는 고구려 수도인 국내성(현 집안)과 요동(현 요양) 사이에 위치하는데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하기에 앞서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땅이었음. 이와 같은 소시의 지리적 위치와 함께 소시진묘의 출토품의 특징을 참조해 보면, 소시 지구의 석실묘 고분의 연대는 4세기 후반~5세기 초반에 비정됨.
武家昌(2005년)의 연구에 따라 고분 구조와 축조방식을 보면, 고분의 형식과 구조, 묘실의 축조방법 등을 보면 고구려 고분과 매우 유사함. 그런데 고분 남부의 전실과 그 좌우에 이실 등이 설치되어 ‘丁’자형을 띠는 것은 요양 일대의 위진시기 고분에서 많이 보이는 형식임. (요양 상왕가(上王家) 벽화묘, 요양 삼도호(三道豪), 요양 남설매(南雪梅) 등) 요양 일대에서 발견된 ‘丁’자형 고분의 묘실 축조방식은 매우 정연하게 연구가 진척되었는데 골라 사용된 석재는 모두 비교적 큰 석판으로 이를 세워 쌓았기 때문에 묘실 및 이실의 구조는 매우 가지런함. 요양 일대에서는 이런 종류의 고분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는데 일반적으로 요양 일대의 묘실은 모두 대석판으로 천정을 평평하게 덮으며, 묘실은 평천정(平頂)의 건축방식을 보임. 그러나 소시고분의 무덤의 축조방식은 석괴로 층층이 쌓고 아치형(拱形)을 이룬 묘실은 발견되었는데 이 같은 축조방식은 고구려 무덤의 축조방식과 매우 유사함. 이는 요양 위진 시기의 동일 유형의 석판묘(石板墓)와는 다름. 판석이 아니라 할석을 사용한 것은 매장 습속에 의해 이런 축조방식이 결정된 것임. 소시고분의 축조 및 매장방식의 많은 특징은 고구려인의 무덤과 유사하므로 고구려인의 무덤이라 추정됨. 이 지역의 고구려인들은 요동지구 무덤형식의 영향을 받고, 그것을 수용하였으나 묘장 구조에서 석재의 사용 및 구조방법 등은 자기 민족의 방법과 특징을 그대로 유지하였음.
출토유물은 대다수가 고구려시기 유물임. 보고자가 Ⅱ식의 호로 칭하는 토기는 집안 마선구940호묘 출토의 Ⅱ식 관과 유사함. 두 토기는 비록 보고자가 칭하는 바가 다르지만 그 기형, 제작, 어깨부에 선무늬(弦紋)과 함께 점각문이 있는 장식방법은 모두 매우 유사함. 이외에 소시 고분에서 출토된 Ⅰ식 관은 집안 칠성산 고분군96호묘 안에서 출토된 관(罐)과 유사함. 그 외 소시고분에서 출토된 부장품을 보면 대다수가 명확한 고구려 시기 특징을 갖추고 있음. 금동제의 4엽 띠연결금구는 집안 칠성산96호묘에서 출토된 금동제 띠연결금구와 유사한데 모두 4엽이고, 중간은 반구상으로 융기하였음. 궁형의 장막걸이는 고구려 특유의 기물로 고구려인 무덤에서 벽장(壁帳)을 거는데 사용되며, 다른 족속의 무덤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음. 이는 칠성산96호묘, 집안 전산자 고구려묘, 집안 통구 고구려묘 등에서 아주 많이 발견된 바 있음. 재갈과 재갈멈추개 역시 고구려 무덤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함. 금동제 장식은 집안 장천2호묘에서 출토된 장식과 유사하며, 환인 미창구 장군묘 등에서 출토된 바 있음. 머리가 편평한 철촉과 방추형 철제 관못, 철제 장막걸이 등은 고구려묘에서 발견된 바 있음. 이상 살펴 본 바에 의하면 소시고분에서 출토된 부장품은 기본적으로 고구려 시기의 기물 위주임. 소시고분이 고구려적 특성인 묘벽이 점차 안으로 들여쌓아져 아치형을 이루고 있고 할석을 층층히 쌓는 축조법을 사용하는 동시에 요양의 위진시기 무덤의 특성인 묘실이 지하에 위치하고 평면이 ‘丁’자형인 구조를 보여줌. 고구려 무덤에서 묘벽을 안으로 점차 들여쌓는 방식은 4세기 중후기에 출현함. 따라서 소시고분은 이 지역에 진출한 고구려인의 고분으로 위진시기 무덤양식을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위진 이후에 축조되었을 것임. 소시고분 출토의 Ⅰ식 관(罐)은 칠성산1096호묘 출토의 Ⅰ식 관(罐)과 만보정172호묘의 Ⅰ식 관(罐)과 유사함. 전자는 4세기 초기~5세기 말기까지 2백년간 연속되었다고 하고 후자는 6세기 이후에 상당하다고 하는데(耿鐵華·林至德), 개괄해보면 출토된 토기는 4세기 말기~5세기 중기에 비정되는 것이 합당함. 출토된 금동제 장식, 매화형 마구장식, 동령 장식, 궁형 장막걸이, 철제 재갈 및 재갈멈추개 등이 고구려 고분에서 다수 발견되는데 칠성산1096호묘, 장천2호묘, 환인 미창구 장군묘 둥에서도 발견되는바 장천2호묘는 5세기, 환인 장군묘는 4세기말에서 5세기에 비정됨. 따라서 위의 토기연대와 부합하며, 문헌상 4세기말에서 고구려의 요동진출이 시도되어 5세기초에 정복하는 내용과도 부합함. 따라서 본계 소시묘의 시대는 4세기 말기~5세기 중기에 비정됨.
그 밖에 田立坤곤(1991년)은 소시(小市)가 선비족의 일파인 비려의 활동지역으로 전제하고 이에 근거하여 삼연(三燕)의 유적으로 파악했음. 范犁
(1997년)는 고구려 고분으로 파악함.
선비와의 관련성에 관한 연구가 있음. 요령성박물관(1984년)은, 묘실 안에서 출토된 장경호는 기형이 비교적 특이하며, 칼로 잘라서 토기 바닥을 다듬는 작법 역시 과거에 보기 드물었으며, 어떤 호는 접시식 입(口)모양이 특이하다고 함. 각기 호 복부(腹部)의 그물모양 무늬 및 금동 장식은 모두 요령 서부 산간지대 선비묘(鮮卑墓)에서 종종 출토된 ‘암문(暗紋)’토기와 보요장식과 유사한 점이 있는데 이는 선비와 고구려가 경제, 문화, 수공예 등에서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임.
武家昌(2005년)은 소시지역은 바로 문헌에 보이는 ‘비려(碑麗)’(『광개토왕릉비』), 일명 ‘비려(裨麗)’(『晉書』)가 활동하던 곳임. 고구려 서부에는 고구려의 일족인 ‘양맥(梁貊)’이 활동하였는데 오늘날 태자하 일대임. 비려는 양맥의 서부에 위치한 족속으로 본래 고구려에 속하지 않았고 선비족(거란족)의 일원으로 추정되며, 그 활동지역은 오늘날 무순 남쪽의 청하성(淸河城), sh성(老城), 함광보(喊廣堡) 일대로 태자하 상류지역인데 소시가 바로 이 일대에 위치하고 있음.
자연환경
고분의 위치는 본계시 동쪽 약 50㎞ 거리에 위치한 소시진의 중심, 지금의 지질학교 내임. 소시진은 본계현 정부소재지임.
유물정보
토기(土器) 14점(그중 罐 5점, 壺4점), 금은기(金銀器) 14점(그중 金鐲 2점, 金耳環 4점, 銀鐲 1점, 銀釵 2점, 銀髮卡 1점), 금동기(金銅器) 33점(그중 泡形飾 1점, 杏葉形串飾 1점, 三枝銅飾 4점, 鉚釘飾 3점, 活環銅飾1점, 圓形銅泡 1점, 銅飾殘片 1점, 帶卡 1점, 鞍飾片 7점), 철기(鐵器) 33점(그중 馬銜鑲 1점, 鐵鏃 2점, 鐵環 1점, 鐵掛鉤 1점, 鐵卡殘段 1점, 鐵釘 2점)
참고문헌
· 沈白文, 「遼寧本溪晉墓」『考古』 1984-8, 1984
· 田立坤, 「三燕文化遺存的初步硏究」『遼海文物學刊』 1991-1, 1991
· 田立坤, 「三燕文化遺存的初步硏究」『東部鮮卑與高句麗考古遺存的比較硏究』, 1991
· 范犁, 「高句麗古墓的幾個問題」『高句麗歷史與文化硏究』, 吉林文史出版社, 1997
· 齊俊·丁曉强, 「本溪小市地區高句麗遺迹遺物考」『高句麗渤海硏究集成』 高句麗 卷(二), 哈爾濱出版社, 1997
· 齊俊·梁志龍, 「遼寧本溪縣小市中心街高句麗墓」『北方文物』 2001-2, 2001
· 武家昌, 「本溪小市墓及相關問題」『博物館研究』 2005-2, 2005
· 國家文物局,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上·下), 西安地圖出版社,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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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고분; 본계진묘(小市古墳; 本溪晉墓) 자료번호 : ku.d_0001_0080_0030_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