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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소시 중심가고분; 2호묘(小市中心街古墳; 2號墓)

  • 구분
    유적
  • 시대
    고구려
  • 위치
  • 유물번호
    S000741
  • 위치(출토지)
    遼寧省 本溪縣 小市鎭 中心飯店
  • 지역
    본계(本溪市)
  • 유형
    고분>봉토석실분
  • 형태사항
    석실 
출토지
요녕성 본계현 소시진 중심반점(遼寧省 本溪縣 小市鎭 中心飯店)
조사내용
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
1960 요령성 본계현 소시진 중심반점 지하 및 그 부근에서 두 개의 고분을 발견하였으나 당시 발굴하지 못함.
1986본계시박물관, 본계현문물관리소연합조대
(本溪市博物館, 本溪縣文物管理所聯合隊)
1986년 4월 해당 호텔이 개축을 진행할 때 발굴 조사를 실시함. 제준(齊俊), 송진만(宋珍嫚), 퉁철산(佟鐵山), 등충원(鄧忠遠) 등이 조사에 참가하였으며, 발굴 조사한 두 개의 고분을 각기 M1과 M2로 편호함.
구조특징
1호묘의 동남 20여m 지점에 위치한 봉토석실묘로, 평면은 장방형에 방향은 270°임.
묘문과 묘도가 없고, 묘광은 지표에서 70m 지하에 있음. 묘실의 보존상태는 양호함. 묘실 바닥에는 평평하고 가지런한 대석판 2매를 깔았으며, 묘실 네 벽은 괴석으로 층층히 틈을 눌러 평평하게 쌓았는데 묘벽은 수직을 이루며, 서벽은 위를 향해 1.06m 지점에 이르러 서쪽으로 꺾여 축조되어 평대(平臺)를 이룸. 묘천정은 두텁고 무거운 장대석과 판석을 편평하게 덮었음. 그 가운데 서측의 판석 하나가 묘의 1/2을 덮고 있음. 묘내에는 인골 잔편만이 몇 개 보이고, 목관장구와 부장품은 없음.
내부규모 및 특징
묘실 길이 3.4m, 너비 1.52m, 높이 1.5m
대(臺)의 길이 1.52m, 너비 38㎝, 높이 44㎝
역사적 의미
소시 중심가에서 발견한 두 고분은 출토유물이 비록 적지만 고분형식은 특색이 있음. 두 고분의 네 벽은 모두 괴석을 층층이 쌓았으며, 천정은 모두 판석으로 평평히 깔았으며, 묘구(墓口)는 지표와 대체로 서로 동일함. 두 고분은 매우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형식은 비록 다르지만 동일시기 고분으로 추정됨. 1960년 소시지구에서 일찍이 고분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당시 ‘진묘(晉墓)’라고 칭하였으며 출토유물이 많았으며, 형식과 축조법은 이번 발굴한 M1과 비슷함. 소시 진묘에 대해 원보고자는 진묘 또는 고구려 고분일 가능성을 제기하였는데 전립곤(田立坤)은 삼연(三燕)의 유물·유적 중에 끼워 넣고자 하고, 범리(范犁)는 고구려 고분이라 칭하고자 하는 등 여러 의견이 제시됨. 그런데 이번 발굴한 두 고분과 함께 소시 진묘는 고구려 묘장으로 추정되는데 그 이유는 아래와 같음.
첫째, M1과 소시 진묘의 묘도는 모두 묘실 남면의 중앙부에 위치하여 평면의 형상이 고구려 봉토석실묘 가운데 산형(鏟形)고분과 매우 유사함. 그 외 묘벽을 안으로 들여쌓는 축조법이 확인되는데 고구려 봉토석실묘에서 다수 보임. 집안 마선구1437·1440·1445·1479호묘 등과 서로 유사함. 그리고 삼연의 석곽묘는 평면이 일반적으로 사다리꼴(梯形)을 띠고 있어 앞은 넓고 뒤는 좁으며, 앞은 높고 뒤는 낮으며, 벽면은 수직으로 들여쌓는 것은 보이지 않는 등 두 형식은 완전히 다름.
둘째, M1묘실의 동·서 두 벽의 감실은 환인과 집안지구의 고구려 고분에서는 보이지 않으나 한반도의 고구려 고분 가운데서 많이 발견되고 있음. 태성리 2호묘, 태성리 벽화묘, 간성리 연화총 등이 대표적인데 이것들은 고구려의 다른 구역의 문화특징을 반영하는 것으로 추정됨. 삼연 고분 또한 감실이 있으나 형식은 이것과 차이가 있는데 대다수 토광의 앞부분에 설치되며, 북표(北票) 풍소불묘와 안양 효민둔 진묘(安陽 孝民屯 晉墓)가 대표적임. 혹은 좌, 우, 후 등의 세 벽에 설치되는데 이런 감실은 비교적 높으며, 점차 높이가 낮아져 마치 이실처럼 변화됨. 원태자(袁台子) 벽화묘와 원태자 북연묘(北燕墓) 등이 대표적임.
셋째, M2의 형식이 특이한데 지금 이것과 유사한 고분 사례가 보이지 않음. 다만 이 고분의 전체구조는 무순의 전둔(前屯) 고구려 평개정묘(平蓋頂墓)와 비교적 유사하나 후자의 묘실 끝(墓端)에는 평대(平臺) 시설이 없음. M2 서단(西端)의 평대는 일종의 특수형식의 감실임. 그밖에 전둔 고구려 고분군에는 묘정을 들여쌓은 고임식 천정묘와 평천정묘가 공존하며, 이런 현상은 이번 발굴 조사한 M1과 M2가 공존하는 지역과 아주 흡사함.
넷째, 고구려 봉토묘 가운데 묘실 바닥부는 일반적으로 모두 지표보다 높거나 평행을 이루며, 일부만 지하에 들어감. 그러나 이번 발굴 조사한 M1, M2 및 소시 진묘는 모두 지하에 들어가 있음. 이런 현상은 무순 전둔 및 와혼목(洼渾木)에서도 역시 보임.
요동지구에 고구려 고분이 기존의 형식에 비해 약간의 변형이 나타나는 것은 고구려의 요동점령 후 한나라 문화의 영향이 반영된 결과임. 즉, 고구려가 요동지구를 점령한 후에 대량의 한(漢)나라 사람들이 유입되면서 한나라 문화가 침투되고 그에 따라 장속(葬俗)이 변이되었던 것으로 생각됨. 과거 고구려가 이삼백년 점령하던 무순(新城), 요양(遼東城) 등의 지역에서는 지표에서 대규모의 고구려 고분군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는데 어쩌면 이런 원인 때문으로 짐작됨.
고분의 연대에 관하여 보면, 우선 고구려는 광개토왕 때에 여러 차례 요동 진출을 시도하여 결국 404년에 요동을 점령하게 됨. 소시 지구는 고구려 수도인 국내성(현 集安)과 요동(현 遼陽) 사이에 위치하는데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하기에 앞서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땅이었음. 이와 같은 소시의 지리적 위치와 함께 소시 진묘의 출토품의 특징을 참조해 보면, 소시 지구의 석실묘 고분의 연대는 마땅히 4세기 후반~5세기 초반에 해당함.
자연환경
본계현 소시진 중심가(현, 장강로(長江路)) 중간 지점의 중심반점 지하에 위치. 현재는 본계현 연영공사(聯營公司) 소재지임. 고분은 태자하와 탕하(湯河)의 충적대지 위에 자리하고 있음.
고분은 북으로는 1㎞ 거리에 소시 기차역과 1.5㎞ 거리에 태자하가 있으며, 서로는 500m 거리에 현(縣)정부 청사건물이 있으며, 동으로는 500m 거리에 탕하가 있음. 탕하는 북류하다 1.3㎞를 지나 태자하로 유입됨. 소시진은 요령성 본계시 동쪽 약 50㎞ 거리에 위치하며, 본계현 정부소재지임.
유물정보
인골편(骨片) 1점
참고문헌
· 沈白文, 「遼寧本溪晉墓」『考古』 1984-8, 1984
· 田立坤, 「三燕文化遺存的初步硏究」『遼海文物學刊』 1991-1, 1991
· 田立坤, 「三燕文化遺存的初步硏究」『東部鮮卑與高句麗考古遺存的比較硏究』, 1991
· 范犁, 「高句麗古墓的幾個問題」『高句麗歷史與文化硏究』, 吉林文史出版社, 1997
· 齊俊·丁曉强, 「本溪小市地區高句麗遺迹遺物考」『高句麗渤海硏究集成』 高句麗 卷(二), 哈爾濱出版社, 1997
· 齊俊·梁志龍, 「遼寧本溪縣小市中心街高句麗墓」『北方文物』 2001-2, 2001
· 武家昌, 「本溪小市墓及相關問題」『博物館研究』 2005-2, 2005
· 國家文物局,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上·下), 西安地圖出版社, 2009
· 梁志龍·李新全, 「本溪地區高句麗考古三十年」『高句麗與東北民族硏究』, 吉林大學出版社,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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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 중심가고분; 2호묘(小市中心街古墳; 2號墓) 자료번호 : ku.d_0001_0080_003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