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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스트여닫기 계호구(溪湖區)

    • 리스트여닫기 상석교자산성(上石橋子山城) 출토지 요녕성 본계시 석교자향 상석교자촌(遼寧省 本溪市 石橋子鄕 上石橋子村)구조특징 성곽의 평면은 방형원각(方形圓角)에 성벽, 봉화대, 우물 등이 남아 있음. 유물로는 기와가 출토됨. 성벽과 성곽시설은 대부분 산의 험준한 지세를 이용하고 서남쪽에만 돌로 성벽을 축조함.자연환경 본계시 교외 서북쪽의 석교자향 상석교자촌에서 서남쪽으로 4里 떨어진 산 위에 위치함.유물정보 포문 기와(包文瓦) 1점참고문헌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高句麗渤海硏究集成』 高句麗 卷(三), 哈爾濱出版社, 1997

    • 리스트여닫기 변우산성; 동산산성(邊牛山城; 東山山城) 출토지 요녕성 본계시 석교자향 변우촌(遼寧省 本溪市 石橋子鄕 邊牛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 요녕성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됨.구조특징 포곡식(簸箕形) 산성에 평면은 불규칙형이고 성벽, 성문, 수구문(水口門), 각대(角臺), 장대, 치, 저수지, 샘, 건물지 등이 남아 있음. 유물로는 토기, 기와편 등이 출토됨. 성벽은 산세를 따라 축조하였음. 산성 성벽은 토석혼축으로, 王綿厚(1994)는 돌로 축조하였다고 기록함. 반면 陈大为(1995)는 토축이라고 기록함. 다져진 층은 두께가 0.1m임. 성벽의 규모에 대해, 기단부 너비 6m·남은 최고 높이 11m라는 기록(馮永謙, 1997), 남은 높이 12m·기단부 너비 20m·정상부 너비 6m라는 기록(國家文物局, 2009)이 있음. 서벽 밖으로 60m 떨어진 지점에 또 다른 토축벽이 축조되어 있음. 길이는 545m임. 개울 남쪽 성벽아래나 서문터 부근에 돌이 많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돌로 기초를 다진 다음 토벽을 축조하였다고 추정됨(여호규, 1999). 동벽은 흙으로 축조함. 동북 각대 아래쪽 성벽단면을 통해 황갈색 사질토와 진흙이 함유된 연한 회갈색 사질토를 번갈아 가면서 층층이 흙을 다진 모습을 볼 수 있음(여호규, 1999). 북벽과 남벽은 토석혼축법으로 축조함. 성돌과 흙을 섞어서 쌓은 순수한 의미의 토석혼축이라기보다는, 성돌을 쌓은 다음 그 위에 흙을 덮는 토석혼축으로 추정됨(여호규, 1999). 남은 높이는 50㎝임. 북벽 안쪽 참호와 비슷한 도랑이 성벽을 따라 계속 이어짐. 동남 모서리에서 이어지는 동남쪽 산줄기에 토석혼축한 성벽과 안쪽의 도랑이 확인됨. 동벽 바깥쪽의 경사가 완만하기 때문에 방어상의 취약점을 보안하기 위해 축조한 것으로 추정됨(여호규, 1999).역사적 의미 변우산성(邊牛山城)은 요동평원과 동부산간지대의 경계지대에 위치함. 특히 이곳은 심양(沈陽)에서 본계(本溪)를 거쳐 천산산맥(千山山脈)을 넘어 압록강 일대로 향하는 길목에 해당함. 지금도 심양(沈陽)에서 본계(本溪)를 거쳐 압록강 하구의 단동(丹東)에 이르는 고속도로, 철도, 일반도로 등이 모두 변우산성(邊牛山城) 서쪽을 지나가고 있음. 요동평원에서 천산산맥을 넘어 압록강 일대로 향하는 교통로는 크게 본계~봉성로(本溪~鳳城路; 세하(細河)~초하로(草河路)), 해성~수암로(海城~岫巖路; 사철하(沙鐵河)~대양하로(大洋何路)), 개주~장하로(蓋州~庄河路; 대청하(大淸河)~벽류하로(碧流河路)) 등 세 루트로 대별할 수 있음. 이 가운데 변우산성은 등탑 백암성(燈塔 白巖城)과 함께 가장 위쪽 루트인 본계~봉성로(本溪~鳳城路)의 입구롤 봉쇄하고 있음. 즉, 백암성이 요양(遼陽; 遼東城)방면에서 본계(本溪)로 향하는 진입로의 입구에 위치하였다면, 변우산성은 심양(沈陽; 蓋牟城)에서 본계로 나아가는 교통로의 입구를 막고 있는 것임. 따라서 변우산성은 전략적으로 개모성(蓋牟城)으로 비정되는 번양 탑산산성(潘陽 塔山山城)뿐 아니라 백암성(白巖城)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됨. 고구려는 요동평원~압록강의 교통로 입구와 교통로상의 요충지에 성올 구축하여 입체적 군사방어체계를 구성하였던 만큼 변우산성도 전방의 심양 탑산산성(沈陽 塔山山城)이나 서남쪽의 등탑 백암성(燈塔 白巖城)과 유기적인 방어체계를 구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됨(여호규, 1999). 변우산성은 중형산성으로 분류할 수 있지만, 성 내부에는 주거용 공간이 비교적 넓은 편임. 건물터 등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남북 골짜기의 평탄한 대지와 산등성이 안쪽의 산비탈도 경사가 완만하여 주거용 공간을 많이 확보할 수 있었음. 즉, 변우산성은 군사방어뿐 아니라 지방지배를 위한 거점성으로 기능하였다고 추정됨. 변우산성은 요동평원에서 본계를 거쳐 압록강으로 진입하는 전략적 요충지를 방어하는 군사중진이자, 주변 사하 연안일대를 지배하기 위한 거점성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것임(여호규, 1999). 지명비정을 보면 우선 王綿厚(1994)에 의해 마미성(磨米城)으로 비정됨. 한편, 2002년의 연구에 따르면, 『三國史記』卷37에 “鴨綠江以北逃城” 가운데 려산성(黎山城)이 보임. 또한 『新唐書』地理志에 려산주(黎山州)를 두었다는 기사가 보임. 한편 『新唐書』에는 가시성(加尸城)이라고도 부르고 있음. 당이 고구려를 침략하였을 때, 려산성은 오골성(烏骨城)과 개모성(蓋牟城)에서 원조를 받았음. 이로 볼 때, 려산성(黎山城)은 압록강 우안(서안)의 오골성(烏骨城)으로 추정되는 봉성 봉황산성(鳳城 鳳凰山城)과 개모성으로 추정되는 심양 탑산산성 부근에 있는 산성으로 추정됨. 변우산성은 오골도(烏骨道) 상에 위치하고 있음. 그리고 동남쪽으로 수십㎞ 떨어진 지점에 봉황산성(鳳凰山城이 있고, 서남쪽으로 15㎞ 떨어진 지점에 심양 탑산산성(沈陽 塔山山城)이 있다는 점에서, 두 성으로부터 원조를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음. 이로 볼 때, 변우산성(邊牛山城)이 려산성(黎山城)으로 추정됨.자연환경 본계시 근교 (서)북쪽으로 20여㎞ 떨어진 석교자향(石橋子鄕)의 북쪽에 있는 변우촌 동산(邊牛村 東山)에 위치함(『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上)에서는 ‘본계시 변우촌 고구려산성(本溪市 邊牛村 高句麗山城)’과 ‘본계시 석교자향 변우촌 고구려 동산산성本溪市 石橋子鄕 邊牛村 高句麗 東山山城’이 나오는데(王禹浪·王宏北, 2007), 두 성은 같은 산성으로 추정됨. 여기에서는 ‘변우산성(邊牛山城)’으로 부르고자 함). 산성 서측은 변우촌(邊牛村)과 인접해 있는데, 심양~본계(沈陽~本溪)간 철도와 고속도로가 변우촌(邊牛村)을 통과함. 그리고 요양, 봉성, 관전, 신빈, 심양(遼陽, 鳳城, 寬甸, 新賓, 沈陽)을 경유하는 도로와 이곳에서 만남. 즉 변우촌은 이 일대의 교통중추임. 산성 동측은 화령촌(花嶺村), 북쪽 바로 아래에는 호토대촌(胡土臺村)이 있음. 산성에서 동남쪽으로 수십㎞ 떨어진 지점에 봉황산성(鳳凰山城)이 있고, 산성에서 서북쪽으로 15㎞ 떨어진 지점에 심양 탑산산성(沈陽 塔山山城)이 있음. 산성 북측 산 아래에는 혼하 지류가 있음. 산성에서 서쪽으로 2리 떨어진 지점에 태자하의 지류인 사하(沙河)가 흐르고 있는데, 그 주변에는 하천 양안을 따라 충적평야가 펼쳐져 있음. 산성의 동, 남 양측은 산봉우리를 등지고 있고, 서․북 양측면은 요하평원이 펼쳐져 있음. 이 곳은 바로 산구(山區)와 평원이 서로 교차하는 산구(山口)임. 산성은 산줄기로 이어지는 동남쪽을 제외하면, 사면이 충적평지나 골짜기에 의해 단절된 돌출지형임. 북쪽과 서쪽은 사하와 그 지류연안의 충적평지이며, 동쪽도 사하 지류연안의 골짜기임. 남쪽 산등성이 맞은 편에는 또다른 산줄기가 있지만, 양자는 깊고 기다란 골짜기에 의해 분리되어 있음. 해발 100~200m 전후인 동쪽 주봉에서 좌우로 기다랗게 내리뻗은 산줄기가 약간 둥그스럼한 장방형을 이루며 산성 내부를 감싸고 있음. 두 산줄기가 만나는 서쪽에 입구(서문)가 있고, 우측인 북쪽 산줄기 서쪽부분의 능선에 진입로(북문)가 있음. 산성을 감싼 산줄기는 높지 않고 경사가 완만하며, 내부에는 골짜기를 따라 평탄한 대지가 펼쳐져 있음. 산성 내부의 골짜기는 북쪽 산등성이에서 안쪽으로 비스듬하게 내리뻗은 산줄기에 의해 다시 남북으로 나누어짐. 산성은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음.참고문헌 · 孫進己·馮永謙, 『東北歷史地理』, 黑龍江人民出版社, 1989 · 王綿厚, 「鴨綠江右岸高句麗山城硏究」『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東潮·田中俊明, 『高句麗の歷史と遺跡』, 中央公論社, 1995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再探」『北方文物』 1995-3, 1995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高句麗渤海硏究集成』 高句麗 卷(三), 哈爾濱出版社, 1997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魏存成, 『高句麗遺跡』, 文物出版社, 2002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2007 · 國家文物局,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 西安地圖出版社, 2009

  • 리스트여닫기 명산구(明山區)

    • 구해령 고분군(舊孩嶺 古墳群)

    • 리스트여닫기 평정산산성(平頂山山城) 출토지 요녕성 본계시 평정산산성(遼寧省 本溪市 平頂山山城)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2002본계시박물관(本溪市博物館)5월 본계시 평정산삼림공원(本溪市 平頂山森林公園)이 평정산 위에 정원(園林)을 건설할 때, 애벽활구(崖壁豁口)와 완만한 비탈지대에서 성벽을 발견함. 본계시박물관은 이 소식을 듣고, 성벽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였고, 고대산성으로 확정함.2008본계시박물관(本溪市博物館)6월에 양지룡(梁志龍), 근군(靳軍), 위해파(魏海波), 마위(馬毅), 이용(李勇), 왕빈(王斌) 등에 의해 조사됨. 산성에서 시공건설을 진행하다가, 고구려, 금, 명대 유물을 발견함. 본계시박물관에서 산성에 대해 실측 등 상세한 조사를 진행함.梁志龍·馬毅가 2009년에 「辽宁本溪市平顶山高句丽山城调查」『东北史地』 2009-5에 발표함.구조특징 산성은 평정식산성이고 평면은 불규칙한 장방형임. 성벽, 성문, 각대(角臺), 요망대(瞭望臺), 건물지, 저수지, 우물, 계단식 밭 등이 남아 있음. 유물로는 창, 화살촉, 손칼, 도끼 등 철기와, 호, 단지, 동이(盆) 등의 구연부, 기와 등이 출토됨. 성벽은 산 정상부 가장자리에 축조함. 성벽은 돌로 축조하였는데, 성돌은 대부분 자연석괴이고, 일부 성돌에만 가공한 흔적이 있음. 산성의 성벽은 대부분 인공적으로 쌓았는데, 산세가 험한 곳, 즉 우뚝 솟은 암벽이 있으면 그 암벽을 천연성벽으로 이용하면서 성벽을 축조하지 않음. 체성(體城)은 약하고 조잡하게 쌓았으며 체성 일부분은 내·외벽면이 있음. 일반적으로 성벽은 기단부 약 4m, 정상부 너비 약 3m, 가장 높은 성벽의 높이 2m임. 산암활구에 축조된 성벽은 대부분 외벽만 있고, 외벽 안쪽으로는 경사진 산비탈이 접해 있음. 외벽과 산비탈 사이에 흙과 돌을 채워 넣어서 높이를 맞추었는데, 보존이 비교적 양호한 구간은 높이가 2m에 가까움. 남벽은 길이 1,217m에 절벽을 따라 뻗어 있고 비교적 구불구불함. 인공벽은 모두 15구간인데, 각 성벽의 길이를 모두 합치면 200m임. 남벽 절벽 외단(外端) 정상부의 일부구간에 돌로 축조된 성벽이 있는데, 높이는 비교적 낮음. 북벽은 길이 842m이고 절벽을 따라 뻗어 있으며 비교적 구불구불함. 인공벽은 모두 10구간인데, 각 성벽의 길이를 모두 합치면 300m임. 서벽은 길이 654m이며 주로 절벽을 천연성벽으로 이용하였음. 전체적으로 절각형(折角形)이고, 바깥으로 튀어 나옴. 인공벽은 남측 애활(崖豁)에서 2구간이 발견되었는데, 길이는 약 10m임. 동벽은 길이 470m임. 주로 절벽을 천연성벽으로 이용하였음. 전체적으로 약간 밖으로 휘었음. 인공벽은 모두 3구간인데, 각 성벽의 길이를 모두 합치면 95m임.역사적 의미 평정산산성의 성벽축조방법은 고구려산성의 특징을 갖추고 있음. 그 특징으로는 첫 번째, 성벽은 산비탈을 따라 경사지게 쌓아 올리는 일반적인 축조방식이 아니라 낮은 곳에 기초를 높이 쌓아 높은 곳의 성벽기초와 수평을 이루게 한 후 일치된 수평에서 동시에 위로 쌓아올림. 이것은 고구려 석축산성에서 보이는 보편적인 축조방식임. 두 번째, 산성은 주로 험준한 절벽을 천연성벽으로 이용하였고 애벽(崖壁)의 활구(豁口)에는 벽을 쌓아 막았는데, 이 또한 고구려성의 특징 가운데 하나임. 세 번째, 일부 성벽구간에서는 단지 외벽만이 보이고 내측에는 돌과 흙을 채워 넣어 산비탈과 접해져 있는데, 이러한 성벽의 모습은 환인 오녀산성 동벽 제 5·6·9구간의 축조방식과 유사함. 한편 평정산산성의 인공성벽은 투박하고, 성돌은 조잡하게 가공한 산돌이 대부분이며, 체성의 성벽이 비교적 좁고 낮음. 이러한 특징은 쐐기형 돌로 축조한 고구려산성의 성벽과 차이가 있음. 하지만 조잡하게 가공한 산돌로 축조한 고구려산성은 매우 많이 발견되고 있음. 신빈 오령산성의 성벽을 축조한 돌은 대부분 조석(條石)이고, 석재 대부분이 조잡하게 제작되었음(佟達, 1994). 대련 비사성(卑沙城)의 성벽은 청회색 석회암으로 축조함(許明綱, 1996). 수암(岫巖)에서 발견된 5좌(座)의 고구려산성 가운데, 3좌가 자연석으로 축조하였는데, 노성구산성(老城溝山城)은 성벽 전부를 자연석으로 쌓았고, 청량산(淸凉山)산성과 마권자(馬圈子)은 대부분 불규칙한 자연석으로 성벽을 축조하였음(楊永芳·楊光, 1994). 이로 볼 때, 평정산산성은 고구려시기에 축조하였다고 볼 수 있음. 평정산의 산세는 고구려 초기 왕도로 산 위에 위치한 오녀산성의 산세와 매우 비슷함. 양자 모두 비교적 평탄한 산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고, 정상부 주변 가장자리 아래는 대부분 높이 솟고 가파른 절벽인데, 성을 그 위에 축조함으로써 수비는 쉽고 적군이 공격하기는 어려운 군사적 우세를 갖추게 됨. 고구려가 현재의 본계지구를 장악한 다음 평정산이 자연적으로 주의를 끌면서 이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됨. 역사적으로 평정산산성은 시간이 흘러 많은 왕조를 거치면서도 계속 이용됨. 일부 성벽은 정상부와 기단부의 축조풍격이 같지 않은데, 평정산산성이 처음 축조된 후 후대에 계속해서 보축 및 중수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음. 평정산 정상부는 평탄하여 사람이 살기에 적합함. 또한 산 절벽이 험준해서 수비는 쉽고 적이 공격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군사적인 가치가 매우 높아, 병가필쟁(兵家必爭)의 지역이 됨. 산 위에는 주로 고구려, 금, 명대의 유적과 유물이 있고, 원(元)대 만기의 유물도 출토되고 있음. 원조(元朝) 말기 홍건군(紅巾軍)의 봉기가 폭발하면서 요양행성지방정권이 사붕오열(四崩五裂)되었음. 이때 각 세력들은 각자 용병을 모집하면서 할거했는데, 평장(平章) 고가노(高家奴)가 평정산에서 병사를 모아 개인세력을 확대해갔음. 이에 명조(明朝)는 洪武 4년(1371) 대장 마운(馬雲)과 엽왕(葉旺)을 보냈는데, 이들은 군사를 이끌고 산동반도에서 바다를 건너와 평정산을 공파하였음. 고가노(高家奴)가 평정산을 점거했을 때, 산성 성벽에 대해 보축을 진행하였는지에 대해서는 고증이 필요함. 이 외에도 평정산에는 근현대시기 유적도 많음. 러일전쟁시기에 러시아군이 산 위에 축조한 참호, 민국(民國)시기 산 위에 축조한 옥황묘(玉皇廟), 일통치시기에 축조한 토치카들(碉堡群), 해방 후 산 위에 축조한 텔레비전 송신탑과 방신(防汛)통신탑 등이 남아 있음. 축조연대에 관해 梁志龍·馬毅의 연구(2009)는 평정산산성에서 출토된 고구려유물은 고구려인 이 산위에서 활동하였다는 물증이라고 함. 철제 창(矛)은 가운데부분 양측 칼날(刃)이 약간 들어가 있는데, 길림성 집안 판차령(板岔岭)에서 출토된 철제 창와 유사함. 철촉1은 오녀산성에서 출토된 사두(蛇頭)형 철촉들과 일치하고, 철촉2는 오녀산성 F37에서 출토된 보엽형 철촉과 유사함. 철제 손칼은 오녀산성철기교장(窖藏)JC:16 철제 손칼과 유사함. 고구려시기 토기편은 대부분 니질의 홍갈색과 니질의 회색이고, 일부는 니질의 홍갈색임. 일부 토기표면에는 홍색 유약이 한층 발라져 있음. 표면이 탈락되어 외부로 노출된 태(胎)는 회색이고, 모두 녹로제로 제작됨. 단지 구연부는 대부분 구순이 각이 졌고, 전연(展沿)이며, 목(頸)은 잘록한데, 오녀산성에서 출토된 단지와 유사함. 오녀산성에서 출토된 설두(舌頭)형 철촉과 전연단지는 모두 4기 문화층에서 발견되었는데, 4기 문화층의 연대는 5세기 전후로 추정됨. 그러므로 평정산산성의 연대도 대체로 이와 비슷할 것으로 추정됨. 고구려가 요동군(지금의 遼陽市)을 점령한 시기는 광개토대왕대임(金毓黻, 1941). 평정산에서 요동군소재지(지금의 요양시)까지의 거리는 동쪽으로 약 60㎞이고, 양자 모두 태자하 연안에 위치하고 있음. 이로 볼 때, 산성의 축조시간은 고구려가 요동군을 점령한 시기보다 이르지 않음. 문헌과 출토된 고구려유물의 연대를 종합하여 분석해 볼 때, 평정산산성 축조연대는 5세기 초반으로 추정됨. 지명비정에 관한 연구로, 梁志龍·馬毅(2009)는 횡산성(橫山城)으로 비정함. 횡산(橫山)은 한어(漢語)명칭인데, 이러한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산의 형태와 관련이 있음. 즉 횡산(橫山)이란 이름은 산이 횡방향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현임. 평정산 꼭대기가 평탄하다는 점에서 “橫”자와 상당히 부합된다고 볼 수 있음. 『資治通鑑』唐紀, 太宗中 정관 19년(645) 겨울 10월 기사에 “凡征高麗, 拔玄菟·橫山·蓋牟·磨米·遼東·白巖卑沙·麥谷·銀山·後黃十城”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횡산이 보임. 당군이 패배한 후, 횡산은 고구려의 수중에 떨어짐. 14년 후, 당군은 소규모의 동벌(東伐)을 시도하였는데, 이때 다시 횡산을 공격함. 『舊唐書』薛仁貴傳에는 ‘顯慶 4년(659) 설인귀 “又與梁建方, 契苾何力于遼東, 共高麗大將溫沙門戰于橫山, 仁貴匹馬先入, 莫不應弦而倒。高麗有善射者, 於石城下射殺十餘人, 仁貴單騎直往沖之, 其賊弓矢俱失, 手不能舉, 便生擒之”’라는 기록이 있음. 『資治通鑑』唐紀, 高宗上에는 ‘顯慶 4年 11月, 右领軍中郞將薛仁貴等與高麗將溫沙門戰于橫山, 破之’라는 기록이 있음.자연환경 평정산산성은 본계시구 동남부에 위치한 평정산에 위치함. 평정산은 명산구(明山區) 동흥가도판사처(東興街道辦事處)에 속하는데, 현재 본계시 평정산배성삼림공원관리국(本溪市 平頂山环城森林公園管理局)에서 관리함. 평정산은 해발 661.2m로, 본계시구에서 가장 높음. 평정산 아래 동쪽은 팔도구(八道溝)인데, 심양~단동(沈陽~丹東) 고속도로가 구(溝) 동쪽을 지나고 있음. 평정산 서쪽은 전산구(轉山溝)임. 평정산에서 남쪽으로 약 700m 떨어진 지점에 남천문촌(南天門村)이 있음. 시구(市區)에서 평정산으로 통하는 도로는 남천문 북쪽으로 올라가 산 정상부에서 서북쪽으로 꺾이고, 다시 동쪽으로 꺾임. 평정산 북쪽 아래에서 약 5㎞ 떨어진 지점에 태자하가 있음. 태자하와 평정산 사이의 평원과 비탈은 본계시 주요 가구(街區)임. 평정산은 산 정상부가 비교적 평탄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실제로는 서북쪽이 높고 동남쪽이 낮은 지세임. 정상부 네 주변은 대부분 가파른 절벽인데, 특히 동서 양측은 매우 가파르고, 남쪽은 약간 완만한 지세임. 평정산 남쪽에는 기복이 심한 많은 산들이 있음. 산 위에 나무, 식생이 무성한데, 현재 공원이 조성되어 시민들의 휴식공간이 되고 있음.유물정보 철모(鐵矛) 1점, 철촉(鐵鏃) 2점, 철제 손칼(鐵削) 1점, 철제 도끼(鐵铲) 1점, 토기편(土器片) 12점, 기와편(瓦片) 1점참고문헌 · 金毓黻, 『東北通史』, 年代出版社, 1941 · 佟達, 「新賓五龍高句麗山城」『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楊永芳·楊光, 「岫岩境內五座高句麗山城調査簡報」『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許明綱, 「大連地區高句麗四座山城略考」『博物館研究』 1996-1, 1996 · 梁志龍·馬毅·王斌, 「遼寧本溪市平頂山高句麗山城調查」『東北史地』 2009-5, 2009 · 魏存成, 「中國境內發現的高句麗山城」『社會科學戰線』 2011-1, 2011

    • 리스트여닫기 유관산성(有官山城) 출토지 본계시 우심대향 상우촌 노관립자산(本溪市 牛心臺鄕 上牛村 老官砬子山)구조특징 산성 평면은 불규칙형이고, 성벽, 성문, 우물 등이 남아 있음. 산성 성벽은 산세를 따라 축조하였음. 성벽은 쐐기형 돌로 축조함.역사적 의미 산성은 본계(本溪)에서 태자하(太子河) 상류로 진입하는 길목에 위치함. 지리적으로 보아 요동평원에서 태자하를 거슬러 고구려 초기 중심지인 압록강 중류일대로 진입하는 교통로와 관련 있는 것으로 추정됨. 다만 태자하 양안이 험준한 절벽으로, 교통로가 발달할 만한 지형조건이 아니기 때문에, 주요루트로 사용되었는지는 의문임(여호규, 1999). 산성은 태자하 상류를 통제하기에 탁월한 위치에 있음. 태자하를 따라 동쪽으로 30㎞ 가면, 본계현 소시진 북쪽 하보촌 동산(下堡村 東山)에 위치한 하보산성(下堡山城; 城溝山城)이 있음. 다시 동북쪽으로 30㎞ 가면, 본계현 청하성진 고구려산성(本溪縣 淸河城鎭 高句麗山城)이 있음. 또 다시 동쪽으로 본계현(本溪縣과 신빈현(新賓縣)을 관통하는 태자하를 따라 25㎞ 정도 가면, 하래하진 태자성(下夾河鎭 太子城)이 있음. 본계현 경내의 태자하 지류 양안(兩岸)의 요충지에는 거의 대부분 고구려산성이 축조되어 있는데, 본계현에서 남쪽으로 10㎞ 떨어진 지점에는 산성자현 고구려산성, 란하곡향(蘭河峪鄕) 신성자(新城子)고구려산성, 고구려 토성문(土城門)산성이 있음. 이 외에, 본계현(本溪縣) 서남과 봉성시(鳳城市) 접경지대인 계하(溪河) 상류지류의 초하진(草河鎭)에 고구려 초하성산성(草河城山城)이 있음. 즉, 이 일대의 고구려산성들은 대부분 산곡하천(山谷河川)의 요충지에 축조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음(王禹浪·王宏北, 2007). 지명비정에 관항 연구에서, 孫進己·馮永謙(1989)은 역성(力城)으로 추정함. 광개토대왕릉비에는 “永樂五年歲在乙未, 王以稗麗不歸不息躬率往討, 過富山負山至鹽水上破其三部落六七百營, 牛馬群羊不可稱數, 于是旋駕因過襄平道東來#城力城北豊王備獵游觀土境田獵而還”이라는 기록이 있음. 역성(力城)은 고구려 속현임. 광개토대왕릉비에 보이는 비리(陴離)는 위치상 『晉書』에 보이는 비리(陴離)와 같지 않은 것으로 추정됨. 일부 학자는 『遼史』에 보이는 비리(陴離)와 동일하다는 견해를 보이기도 함. 『遼史』地理志의 “集州, 懷衆軍, 下, 刺史, 古陴離郡地 …… 統縣一, 奉集縣”이라는 기록, 『渤海國志』의 “集州, 古陴離國, 有渾河”라는 기록, 『盛京通志』의 “奉集遺址, 在撫順城南八十里”라는 기록 등을 볼 때, 당시 광개토대왕 출병은 서북쪽으로 무순(撫順) 남쪽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음. 다만 염수(鹽水)는 漢의 염난수(鹽難水)로, 지금의 혼강(渾江)이라고 추정된다는 점에서 지리 위치가 일치하지 않음. 그러므로 그곳이 지금 혼하(渾江)를 가리키는 건지는 좀 더 고찰해보아야 함. 광개토대왕은 비리(陴離; 지금의 무순 남쪽)에 도착하고 난 후 양평도(襄平道)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여 고구려 왕도로 돌아왔음. 양평도(襄平道)가 양평(襄平; 지금의 遼陽)에서 고구려왕성(지금의 集安)으로 가는 교통로이므로, 태자하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해 갔다고 할 수 있음. 역성(力城)과 북풍(北豊)은 이 교통로 상에 있으므로, 지금의 태자하(太子河) 근처에서 찾아야 함. 역성(力城)을 먼저 지났으므로 서쪽에 있어야 하고, 북풍(北豊)은 나중에 지나왔으므로 당연히 동쪽에 있어야 함. 현재 유관산성 근처에 태자하(太子河)가 흐르고 있음. 이로 볼 때 유관산성이 역성(力城)으로 추정됨. 그리고 하보산성(下堡山城)은 북풍성(北豊城)으로 추정됨.자연환경 본계시 우심대향(本溪市 牛心臺鄕) 북쪽 3.5㎞ 떨어진 상우촌의 노관자립자산(上牛村 老官砬子山) 정상부에 위치함. 산성은 천산산맥(千山山脈)과 태자하 곡지(太子河 谷地)가 서로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음. 태자하(太子河)의 남안(南岸)에 위치하여 강을 바라보고 있음. 태자하에서 거슬러 올라가면 소자하(蘇子河)나 혼강 연안으로 나아 갈 수 있음. 태자하를 따라 동쪽으로 30㎞ 가면, 본계현 소시진(小市鎭) 북쪽 하보촌(下堡村) 동산(東山)에 위치한 하보산성(성구(城溝)산성)이 있음. 다시 동북쪽으로 30㎞ 가면, 본계현 청하성진(淸河城鎭) 고구려산성이 있음. 또 다시 동쪽으로 본계현과 신빈현(新賓縣)을 관통하는 태자하를 따라 25㎞ 정도 가면, 하래하진(下夾河鎭) 태자성(太子城)이 있음.참고문헌 · 孫進己·馮永謙, 『東北歷史地理』, 黑龍江人民出版社, 1989 · 東潮·田中俊明, 『高句麗の歷史と遺跡』, 中央公論社, 1995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2007

    • 굴륭산성(窟窿山城)

  • 리스트여닫기 본계현(本溪縣)

    • 소시 중심가고분 (小市中心街古墳)

    • 소시 중심가고분; 1호묘(小市中心街古墳; 1號墓)

    • 소시 중심가고분; 2호묘(小市中心街古墳; 2號墓)

    • 근변서북 고분군(近邊西北 古墳群)

    • 나권구 고분군(羅圈溝 古墳群)

    • 단산 고분군(團山 古墳群)

    • 달관채 고분군(達官寨 古墳群)

    • 동강욕 고분군(同江峪 古墳群)

    • 동외자 고분군(東崴子 古墳群)

    • 망우초 고분군(牤牛哨 古墳群)

    • 부가루 고분군(富家樓 古墳群)

    • 사과수 고분군(四棵樹 古墳群)

    • 조전 고분군(趙甸 古墳群)

    • 투욕고분(套峪古墳)

    • 황구 고분군(荒溝 古墳群)

    • 리스트여닫기 구룡산성(九龍山城) 출토지 요녕성 본계현 성창진 황가보촌(遼寧省 本溪縣 堿廠鎭 黃家堡村)연대 청동기, 한대(漢代), 고구려, 명대(明代)구조특징 평면은 약간 삼각형에 가까움. 성벽, 성문이 남아 있는데, 성벽은 토축이고, 남은 높이 3~5m, 기단부 너비 7m, 정상부 너비 6m임. 청동기시대, 한대, 명대 등의 유물이 출토됨. 청동기시대의 유물로는 타제 석편, 석검편, 모래 혼입의 홍, 회색토기의 손잡이, 바닥, 단지 구연부, 굽접시 잔편 등이 출토됨. 한대 유물로는 승문 회색 토기편, 승문 회색 기와편 등이 출토됨. 명대 유물로는 청색 벽돌이 출토됨.역사적 의미 구룡산성(九龍山城)은 청동기시대에 축조되어, 한대·고구려·명대에도 계속해서 사용됨.자연환경 본계현 성창진 황가보촌에서 동북쪽으로 약 1㎞ 떨어진 대지(臺地) 위에 위치함.유물정보 석기(石器) 2점, 청동기시대 토기편(靑銅器時代 土器片) 4점, 한대 토기편(漢代 土器片) 1점, 한대 기와편(漢代 瓦片) 1점, 명대 벽돌(明代 塼) 1점참고문헌 · 國家文物局,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上·下), 西安地圖出版社, 2009

    • 리스트여닫기 하보산성; 성구산성(下堡山城; 城溝山城) 출토지 요녕성 본계현 소시진 하보촌(遼寧省 本溪縣 小市鎭 下堡村)구조특징 하보산성(下堡山城)은 성구산성(城溝山城)으로도 불림. 포곡식(簸箕型) 산성이고, 평면은 거의 의권형(椅圈形)임. 성벽, 성문, 각대 등이 남아 있고, 유물로는 토기편이 출토됨. 성벽을 산세를 따라 돌로 축조하였다는 기록(王禹浪·王宏北, 2007)과 서벽만 돌로 쌓았고 나머지는 토축이라는 기록(孫進己·馮永謙, 1989; 陈大为, 1995)이 있음. 산성 안에는 샘이 있는데, 샘이 모여서 이루어진 시내가 산골짜기로 흘러 나가서, 태자하로 유입됨. 유물로는 모래혼입 홍색토기편이 출토됨(馮永謙, 1997).역사적 의미 지리적인 면에서 볼 때, 요동평원에서 태자하를 거슬러 고구려 초기 중심지인 압록강 중류일대로 진입하는 교통로와 관련 있는 것으로 추정됨. 다만 태자하 양안이 험준한 절벽으로, 교통로가 발달할 만한 지형조건이 아니기 때문에, 주요루트로 사용되었는지는 의문임(여호규, 1999). 지명비정에 관해서는, 王綿厚(1994)는 려산성(黎山城)으로 비정함. 孫進己·馮永謙(1989)은, 〈광개토대왕릉비〉에는 “永樂五年歲在乙未, 王以稗麗不歸不息躬率往討, 過富山負山至鹽水上破其三部落六七百營, 牛馬群羊不可稱數于是旋駕, 因過襄平道東來#城力城北豊王備獵游觀土境田獵而還”이라는 기록이 있음. 북풍(北豊)은 삼국시대 위 요동군(魏 遼東郡)의 속현이었음. 晉에 이르러서 요동군은 없어졌고, 북풍(北豊)은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음. 광개토대왕릉비에 보이는 비리(陴離)는, 위치상 『晉書』에 보이는 비리와 다른 것으로 추정됨. 일부 학자는 『遼史』에 보이는 비리(陴離)와 동일하다는 견해를 보이기도 함. 『遼史』지리지의 “集州懷衆軍下刺史古陴離郡地 …… 統縣一奉集縣”이라는 기록, 『渤海國志』의 “集州古陴離國有渾河”라는 기록, 『盛京通志』의 “奉集遺址在撫順城南八十里”라는 기록 등을 볼 때, 당시 광개토대왕 출병은 서북쪽으로 무순(撫順) 남쪽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음. 다만 염수(鹽水)는 漢의 염난수(鹽難水)로, 지금의 혼강(渾江)이라고 추정된다는 점에서 지리위치가 일치하지 않음. 그러므로 그곳이 지금 혼강(渾江)를 가리키는 건지는 좀 더 고찰해보아야 함. 광개토대왕은 비리(陴離; 지금의 무순 남쪽)에 도착하고 난 후, 양평도(襄平道)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여 고구려 왕도로 돌아왔음. 양평도(襄平道)가 양평(襄平; 지금의 遼陽)에서 고구려왕성(지금의 集安)으로 가는 교통로이므로, 태자하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해 갔다고 할 수 있음. 역성(力城)과 북풍(北豊)은 이 교통로 상에 있으므로, 지금의 태자하 근처에서 찾아야 함. 역성(力城)을 먼저 지났으므로 서쪽에 있어야 하고, 북풍(北豊)은 나중에 지나왔으므로, 당연히 동쪽에 있어야 함. 현재 유관산성(有官山城) 근처에 태자하가 흐르고 있음. 이로 볼 때 유관산성(有官山城)이 역성(力城)으로 추정. 그리고 하보산성(下堡山城)은 북풍성(北豊城)으로 추정됨. 王綿厚(2002)에 의해서는 마미성(磨米城)으로 비정됨. 『舊唐書』와 『新唐書』地理志에는 당에 항복한 고구려의 성 가운데 하나로 마미성(磨米城)이 보임. 『資治通鑑』卷198 唐紀에도 貞觀 19년(645) 당이 요동원정에 나섰을 때, 당이 정벌한 10여성 가운데 하나로 그 이름이 보임. 당이 정벌한 10여성은 요동성과 개모성 사이에 있다고 할 수 있음. 성의 교통로상의 위치, 고고학적 발굴성과, 『舊唐書』와 『新唐書』의 기록을 볼 때, 하보산성(下堡山城)이 마미성(磨米城)에 부합한다고 추정됨.자연환경 본계현 소시진(本溪縣 小市鎭) 북쪽 태자하(太子河) 북안의 하보촌 동산(下堡村 東山) 위에 산성이 위치함. 본계(本溪)에서 태자하(太子河) 북안을 따라 상류로 나아가는 도로가 산성 남쪽을 지나고 있음. 이 도로를 따라 태자하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 소자하(蘇子河)나 혼강(渾江) 연안으로 진입할 수 있고, 반대로 태자하 하류를 따라 내려가면 본계를 거쳐 요동평원으로 나아갈 수 있음. 산성 북쪽으로 3㎞ 떨어진 지점에 요양두산(要洋頭山)이 있는데, 요양두산(要洋頭山)은 해발 934m로, 이 일대의 여러 산들 가운데 주봉(主峰)임.참고문헌 · 孫進己·馮永謙, 『東北歷史地理』, 黑龍江人民出版社, 1989 · 王綿厚, 「鴨綠江右岸高句麗山城硏究」『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東潮·田中俊明, 『高句麗の歷史と遺跡』, 中央公論社, 1995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再探」『北方文物』 1995-3, 1995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高句麗渤海硏究集成』 高句麗 卷(三), 哈爾濱出版社, 1997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魏存成, 『高句麗遺跡』, 文物出版社, 2002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2007

    • 리스트여닫기 마평구산성(馬平溝山城) 출토지 요녕성 본계현 소시진 관음각촌 마평구둔(遼寧省 本溪縣 小市鎭 觀音閣村 馬平溝屯)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 현문물보호단위(縣文物保護單位)로 지정됨.구조특징 평면은 장방형으로, 외부규모로 보아 보루라고 할 수 있음. 성벽과 성문이 남아 있고, 소토가 출토됨. 성벽은 판석으로 평평하게 쌓았고, 너비 1.3m, 높이 1.2m임. 성문은 남쪽에 한 개가 있음. 출토유물로는 홍색 소토가 발견됨.자연환경 본계현 소시진 관음각촌 마평구둔에서 북쪽으로 500m 떨어진 산 위에 위치함. 성의 안쪽은 정리가 되어 매우 평탄함.유물정보 소토(烧土) 1점참고문헌 · 國家文物局,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上·下), 西安地圖出版社, 2009

    • 리스트여닫기 서구산성(西溝山城) 출토지 요녕성 본계현 초하구진 서구촌(遼寧省 本溪縣 草河口鎭 西溝村)구조특징 산성 평면은 약간 사다리꼴이고, 성벽과 성문이 남아 있음. 성벽은 산세를 따라 축조했는데, 산성의 동·서부는 절벽을 천연성벽으로 삼았고, 산성의 남·북부는 돌로 성벽을 쌓았음. 너비 5m, 높이 4m임.자연환경 본계현 초하구진 서구촌에서 서북쪽으로 400m 떨어진 산 위에 위치함.참고문헌 · 國家文物局,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上·下), 西安地圖出版社, 2009

    • 운반산성(雲盤山城)

    • 리스트여닫기 이가보산성; 초하구산성(李家堡山城; 草河口山城) 출토지 요녕성 본계현 초하구진 이가보촌(遼寧省 本溪縣 草河口鎭 李家堡村)구조특징 이가보산성(李家堡山城)은 초하구산성(草河口山城)이라고도 부름. 평면은 대략 장방형이고, 성벽, 성문, 수구문, 요망대(瞭望臺), 차단벽(拦馬墻), 회곽도, 건물지, 고대유지(古臺遺址), 우물, 저수지 등이 남아 있음. 유물로는 기와편이 출토됨. 산성의 성벽은 산세를 따라 산등성이 위에 축조되었음. 성벽은 돌로 축조하였는데, 외벽은 모두 가공한 쐐기형 돌로 쌓았고, 그 안에는 자잘한 돌을 끼워 넣었음. 남은 높이(殘高)가 2~5m, 기단부 너비 5m, 정상부 너비 1m임. 성의 북면 동, 서 각각에는 산봉우리가 있고, 성벽이 밖으로 뻗어 있는데, 동쪽 변은 길이가 165m이고, 서쪽 변은 길이가 23m임. 너비는 모두 15m, 높이는 모두 5m임.역사적 의미 이가보산성(李家堡山城)은 고구려가 요동평원과 압록강하류로 진출하는 중요한 길목(隘口)에 위치함. 지명 비정에 관해 후황성(後黃城)설이 있음. 孫進己·馮永謙(1989)은 『資治通鑑』198 貞觀 19년(645)에 “六月丁未車駕發遼東丙辰至安市城, 丁巳高句丽北部耨萨延寿惠真帅高丽, 靺鞨兵十五万救安市. (破之)高麗擧國大駭). 後黃城银城皆自拔遁去数百里无复人烟.”이라는 기록이 있음. 이로 볼 때, 후황성(後黃城)과 은성(银城)은 안시(安市; 海城 英城子山城) 부근 수백리 내, 안시(安市) 동남~오골성(烏骨城) 사이에 있다고 할 수 있음. 그런데 이가보산성(李家堡山城)과 수암현(岫巖顯) 황화전향(黃花甸鄕) 곽가령촌(郭家嶺村) 하서둔(河西屯) 송수구고구려성(松樹溝高句麗城)이 해성 영성자산성(海城 英城子山城)과 봉황산성(鳳凰山城) 사이에 있어서, 후황성(後黃城)과 은성(银城)의 위치에 부합함. 이로 볼 때 이가보산성(李家堡山城)이 후황성(後黃城)으로 추정됨. 반면 王綿厚(2002)는 사성(沙城)으로 추정함. 사성(沙城)은 『資治通鑑』에서만 보이는데, 貞觀 19년(645년) 고연수(高延壽) 등이 “乌骨城耨萨老耄不能坚守移兵临之朝至夕克”이라고 하였고, 군신들은 “張亮兵在沙城 召之信宿可至, 乘高丽凶惧, 并力拔乌骨城渡鸭绿水直取平壤在此举矣”라고 하였다는 기록에서 등장함. 이 기사를 볼 때, 사성(沙城)은 오골성(烏骨城)으로 추정되는 봉성 봉황산성(鳳城 鳳凰山城)에 이틀 안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 즉, 100여리 안에 있는 성으로 추정됨. 이가보산성(李家堡山城)은 봉황산성(鳳凰山城)의 서쪽에 있는데, 이틀 안으로 봉황산성(鳳凰山城)에 올 수 있는 곳에 위치하였다는 점에서 사성(沙城)으로 볼 수 있음.자연환경 본계현(本溪縣) 남부 초하구진(草河口鎭)의 남쪽에 이가보촌(李家堡村) 북측의 산 정상부에 위치함. 산성이 위치한 곳은 애하(靉河)지류(草河)의 상류임. 심양(沈陽)에서 단동(丹東)의 압록강 유역으로 진출하는 중요 교통로상의 요충지에 위치함. 현재도 심양~단동(沈陽-丹東) 간 도로와 철도가 이 곳을 지나고 있음.유물정보 기와편(瓦片) 1점참고문헌 · 孫進己·馮永謙, 『東北歷史地理』, 黑龍江人民出版社, 1989 · 王綿厚, 「鴨綠江右岸高句麗山城硏究」『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東潮·田中俊明, 『高句麗の歷史と遺跡』, 中央公論社, 1995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再探」『北方文物』 1995-3, 1995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高句麗渤海硏究集成』 高句麗 卷(三), 哈爾濱出版社, 1997 ·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魏存成, 『高句麗遺跡』, 文物出版社, 2002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2007 · 國家文物局,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 西安地圖出版社, 2009

    • 소시고분; 본계진묘(小市古墳; 本溪晉墓)

    • 리스트여닫기 본계현 구룡산성(本溪縣 九龍山城) 출토지본계만족자치현 감창진 구룡촌 구룡구 구룡구서산연대청동기, 한, 고구려, 명, 요금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1년요녕성(遼寧省), 본계시(本溪市)와 본계현(本溪縣)의 고고공작자연합(考古工作者聯合)· 1981년 5월, 제 2차 全國 文物 전면 조사 기간에, 遼寧省, 本溪市와 本溪縣의 考古工作者聯合은 전면 조사팀을 구성하여 구룡산성에 대한 첫 번째 조사를 진행하였음.2006년과 2008년본계시(本溪市)와 본계현(本溪縣)의 고고공작자(考古工作者)· 2006년 3월과 2008년 10월, 本溪市와 本溪縣의 考古工作者는 선후 두 차례 구룡산성에 대한 실지 측량 등 상세한 조사를 진행하였다. 이상의 세 차례 조사 상황을 『考古』2009-4에 게재함.구조특징구룡산성은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다. 성벽은 흙을 다져서 축조하였는데, 산세에 의지하여 계단상 대지 가장자리를 따라 축성되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며, 성곽의 모서리에 각대 4개가 있다. 서벽 남부에는 성문이 하나 있고, 성문 바깥쪽에 옹성을 설치하였다. 또 서벽과 남벽 바깥쪽에 성을 보호하는 참호 흔적이 조사되었다.역사적 의미구룡산성은 대체로 청동기 시대 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여지며, 청실록에 등장하는 후금의 감창성(碱廠(場)城)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자세한 고고조사 보고가 부재하여 명확히 단정할 수는 없으나, 구룡산성은 청동기 시대부터 한, 고구려를 거쳐 명대와 후금에 이르기까지 장구한 시기동안 사용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자연환경본계현 구룡산성은 본계만족자치현 현중심에서 동쪽으로 약 30km 지점에 위치한 감창진 구룡촌에 속한다. 환인만족자치현 현중심까지는 남동쪽으로 약 65km 진행하여야 하며, 통화시 중심까지는 동북으로 약 132km 가량을 가야한다. 주변은 큰 도시들 사이에는 모두 준험한 산악지대로, 산성이 위치한 곳은 산악지형속의 평지라 할 수 있다. 구룡촌 구룡구는 남쪽으로 구룡구서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구룡구서산의 동쪽 끝 계단상 대지에 구룡산성이 존재한다. 산성의 동쪽면으로는 태자하가 흐르고 있다.유물정보유물 정보 없음.참고문헌· 魏海波, 2009, 「辽宁本溪县后金时期九龙山城的调查」『考古』2009-4

  • 리스트여닫기 평산구(平山區)

  • 리스트여닫기 환인현(桓仁縣)

    • 리스트여닫기 대리수구 고분군(大梨樹溝 古墳群) 출토지 환인현 괴마자진 와니전자촌 대리수구둔 서북 150m (桓仁縣 拐磨子鎮 洼泥甸子村 大梨樹溝屯 西北 150m)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7본계시박물관, 환인현문관소(本溪市博物館, 桓仁縣文管所)지표에 유적이 노출되지 않았으며, 남북방향으로 3×1m의 시굴 구덩이를 넣었으나, 고분은 발견하지 못하고 어망추(陶網墜) 1건만 수습.1987본계시박물관, 환인현문물관리소(本溪市博物館, 桓仁縣文物管理所)7월 발견 : 환인진에서 도로 수리를 위해 흙을 채취하는 과정에서 석제 칼, 호 등 대수의 유물과 사람의 잔편발견.10월 조사 : 지표에 유적이 노출되지 않았으며, 남북방향으로 3×1의 시굴 구덩이를 넣었으나, 고분은 발견하지 못하고 어망추 1건만 수습1988본계시박물관, 환인현문관소(本溪市博物館, 桓仁縣文管所)수차례 조사한 결과 석제 칼(石刀), 호(陶罐), 발(陶鉢) 등의 유물 출토.1988본계시박물관, 환인현문물관리소(本溪市博物館, 桓仁縣文物管理所)수차례 조사한 결과 석제 칼, 호, 발 등의 유물출토구조특징 현지인들의 증언과 발견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고분군의 고분 형식은 판석을 세워 쌓는 석관묘이거나 돌덩어리를 쌓는 형식 등 두 종류일 가능성이 있음.역사적 의미 대리수구 고분군은 혼강 중하류에서 최초 발견된 청동기 시대 고분군. 환인지구가 고구려 민족의 조기 활동지역이므로 대리수구 고분군은 혼강유역 청동기 문화와 前고구려, 고구려와의 연계를 연구하는데 있어 중요한 가치를 지님.자연환경 산기슭 비탈진 곳에 위치하고 동고서저지형이며 북부는 비교적 가파르고 남부는 완만하고 평평하며, 동부는 작은 산맥이 가로로 놓여 있고, 서부는 산비탈 아래 鄕路가 있고 그 아래 ‘干巴江’이 있지만 현재는 양어장으로 바뀌었음. 그 서쪽 약 700m에는 혼강 지류 부이강이 흐름.유물정보 석기, 토기 등참고문헌 · 桓仁滿族自治縣文物志編纂委員會, 『桓仁滿族自治縣文物志』, 1990 · 梁志龍, 「桓仁大梨樹溝靑銅時代墓葬調査」『遼海文物學刊』 1991-2, 1991

    • 리스트여닫기 대전자청동단검묘(大甸子靑銅短劍墓) 출토지 대전자촌 만구자둔의 후산 언덕에 위치 (大甸子村 灣溝子屯 後山 原 位置)연대 전국시대 말기 청동단검은 刃部가 좁고 鋒이 細長한 특징을 가지며 銅質이 차이가 있음. 이는 요동지구 청동단검문화 제4기 유물과 비슷함. 청동단검 형식은 무순 윤가촌 12호 석관묘에서 출토된 것과 매우 유사하며, 두 고분에서 출토된 環狀石器나 고분 구조도 대체로 유사함. 윤가촌 12호묘의 연대는 전국 晩期에서 진한 시기에 해당하므로, 대전자 유적도 비슷한 시기일 것으로 비정되며 문화상과도 일정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74시문물부(市文物部)四道河子鄕 大甸子村民이 농지를 개발하면서 산비탈 경지에서 “石格子”(즉, 고분)를 쪼개고 계단식 밭을 만드는 과정 중 1개의 대판석을 발견. 들어 올리지 못해 폭약으로 판석을 조각내고 돌덩어리를 들어내고 파다가 의외로 청동단검 등의 유물을 발견. 이후 시문물부문에서 발굴하여 청동단검묘 임을 확인. 1994년 당시까지 발굴되지 못하고 점차 파괴되어 감.구조특징 묘실 네 벽은 4개의 대판석을 세워 축조, 석판 두께 30㎝이며, 위에 대판석으로 덮음. 墓底는 鵝卵石(자갈)과 황색 진흙을 평평하기 깔음. 자갈 위에는 화장한 뼈 조각이 두꺼운 1층을 형성. 부장품과 묘벽은 모두 화장 흔적이 보임. 묘벽은 흑색의 연기 그을린 흔적이 보이고, 부장품은 대다수 파손되어 변형. 墓頂은 두껍고 무거운 완전한 대판석으로 덮어져 있음.내부규모 및 특징 묘실 규모는 길이 2.34m, 너비 1.80m.역사적 의미 本溪 지구에서 처음 발견된 청동단검묘로, 무덤 구조는 불명확하지만, 부장품인 청동단검과 鐵刀, 명도전 등의 유물이 주목됨. 청동단검은 중국 동북지구 고대청동문화의 독특한 유물로 주로 요녕지구에서 발견되나, 문화적 족원 문제나, 연대 문제 등에 대해 일치된 결론이 없음. 따라서 환인 대전자 청동단검묘의 판석조 묘실, 불태워진 부장품, 대량 출토된 명동전과 철도 등은 이러한 문제의 연구에 대해 새로운 소재를 제공할 것임.자연환경 고분군 서남으로 약 1㎞ 떨어진 곳에 대전자촌이 위치하고 대전자촌 서남에는 牛毛大山이 자리함. 본계-환인 도로가 고분군 북단을 통과하며, 도로 북쪽에는 六道河가 흐름. 고분군 동북으로 약 4㎞ 떨어진 곳에 사도하자향이 위치함. 고분군 동남 약 35華里(약 17.5㎞)에 환인현이 위치함.유물정보 청동기, 철기, 석기, 골기, 명도전 등참고문헌 · 曾昭藏·齊俊, 「桓仁大甸子發現靑銅短劍墓」『遼寧文物』 1981-2, 1981 · 桓仁滿族自治縣文物志編纂委員會, 『桓仁滿族自治縣文物志』, 1990 · 梁志龍·王俊輝, 「遼寧桓仁出土靑銅遺物墓葬及相關問題」『博物館研究』 1994-2, 1994

    • 리스트여닫기 봉명석실소토묘(鳳鳴石室燒土墓) 출토지 환인진 봉명촌 혼강변에 위치(桓仁鎮 鳳鳴村 渾江邊 位値).구조특징 네 벽면은 扁圓形 자갈로 축조 후 벽면에 두께 3-7㎝의 草拌泥를 바름. 묘실 바닥은 草拌泥를 평평하게 깔은 후 불로 태워서 바닥과 벽은 매우 단단하며, 천정은 남아 있지 않음. 유물은 무덤 밖 서단에 석제 비녀(石釵) 1건, 동제 비녀(銅釵) 2건, 동제 장식(銅牌飾) 3건이 발견. 발견 위치상 고분의 부장품으로 추정됨.역사적 의미 봉명석실소토묘 부근에서 출토된 유물은 비교적 드물게 보이며, 다른 곳에서 아직 발견되거나 보고되지 않음. 보고자는 銅釵의 측면에 새겨진 卷雲文은 한대 와당에서 유행하던 문양과 흡사하며, 내몽고 遼城 黑城 古城址에서 출토된 한대 와당에도 이런류의 권운문이 새겨져 있음. 따라서 유물 연대는 한대로 비정함. 다만 동제 비녀 중 일부는 발해. 요-금대의 고분이나 유적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한 형태이므로, 동제 비녀만으로 그 시기를 고구려로 단정 지을 수 없음.유물정보 석제비녀, 동제비녀, 동제장식 등참고문헌 · 梁志龍·王俊輝, 「遼寧桓仁出土靑銅遺物墓葬及相關問題」『博物館研究』 1994-2, 1994

    • 리스트여닫기 오도하자고분(五道河子古墳) 출토지 환인진 사도하자향 오도하자촌에 위치(桓仁鎮 四道河子鄉 五道河子村 位置)구조특징 고분은 적석묘형식.역사적 의미 오수전과 화천이 출토되었으며, 오수전은 東漢의 특징을 갖고 있으므로, 동한 시기의 고구려 초기 고분에 해당됨. 銅釧은 오녀산성에서 일찍이 출토된 바 있는 환인지역 고구려 초기에 보편적으로 유행하던 장식구임. 따라서 유적은 고구려 초기로 비정됨.유물정보 석기, 철기, 동기, 오수전, 화천참고문헌 · 梁志龍·王俊輝, 「遼寧桓仁出土靑銅遺物墓葬及相關問題」『博物館研究』 1994-2, 1994

    • 리스트여닫기 채아보고분(蔡我堡古墳) 출토지 환인현 목우자진 채아보촌 서양 북구에 위치. (桓仁縣 木盂子鎮 菜我堡村 西洋 北溝에 위치.)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0문물부문(文物部門)무덤은 채아보촌 주민이 집을 지을 때 훼손되고, 그 후 文物部門이 조사하면 고분 내에서 출토된 유물을 회수.구조특징 적석묘 형식역사적 의미 채아보 고분에서 출토된 오수전에 표시된 “卄”표기는 東漢 中晩期 오수전에서 흔히 출현하는 현상임. 銅釧은 오녀산산성에서 일찍이 출토되어 환인지역 고구려 초기에 보편적으로 유행하던 장식구임. 따라서 채아보 고분은 동한 시기의 고구려 초기 고분으로 비정됨.유물정보 동제팔찌, 오수전참고문헌 · 梁志龍·王俊輝, 「遼寧桓仁出土靑銅遺物墓葬及相關問題」『博物館研究』 1994-2, 1994

    • 리스트여닫기 망강루 고분군(望江樓 古墳群) 출토지 아하향 남변석합달촌 북쪽 약 100m의 산마루에 위치(雅河鄕 南邊石哈達村 北側 100m 㟶 位置)연대 고구려 건국전후 유적 출토 珠飾은 漢代 및 漢代에 해당하는 遼陽 三道壕 漢代 촌락유적, 遼寧 西豊 西岔溝 墓地, 吉林 楡樹 老河深 2期文化 墓葬, 黑龍 江平洋 墓葬 등 동북 지역의 변강 민족들의 문화 유적에서 일찍이 발견된 바 있고 또 유리 귀걸이 장식은 요양 삼도호 한대 촌락유지, 노하심 2기 문화(기원전 2C전반~기원후) 고분에서 발견 되었음 그리고 銅鈴은 서차구 묘지에서 출토된 것과 일치함. 망강루 유물과 비교되는 자료의 연대는 西漢 中晩期~東漢 初期로 추정되며, 망강루 고분 연대도 이에 해당하는 시기로 보임. 이 시기는 고구려가 환인에서 건국한 전후 단계에 해당됨.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71본계시 환인현문물관리부문(本溪市桓仁縣文物管理部門)4기의 고분이 도굴 당함. 출토 유물은 거의 파괴, 도굴해낸 목걸이 등 일부 문물 회수.2004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 본계시박물관, 환인현발굴대(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本溪市博物館, 桓仁縣發掘隊)6기의 적석묘 발굴구조특징 강돌과 산돌을 쌓아 만들었고, 평면 형태는 불규칙 타원형이며, 외형은 돌무지 모양 즉, 적석구조임. 6기의 적석묘가 대체로 산의 방향에 따라 배열되었는데 지세가 높은 서쪽에서부터 낮은 동쪽으로 가면서 고분 번호를 배열함.(M1~M6) 그중 4기는 능선의 돌출부를 이용하여 축조, 2기는 능선 아래의 완만한 비탈에 축조함. 고분이 자리한 곳의 산세에 따라 높은 곳은 돌을 좀 낮게, 낮은 곳은 비교적 높게 축조. M1, M4, M6 등 3기의 고분 형태는 비교적 크고, M2, M3의 고분 규모는 비교적 작음. M5는 지표 위에 한 층의 조약돌만 깔려져 있어서 완성되지 못한 무덤의 기초 부분으로 추정됨.역사적 의미 매장 습속 - 훼기 : 고분 출토 토기는 夾粗砂灰褐陶, 夾細砂紅褐陶, 黃褐陶, 泥質黃褐陶, 灰陶 등이며, 器型은 壺, 罐 등 있음. 陶器殘片은 대부분 무덤의 積石 틈새와 서북부 적석분구 밖 원지표상 및 石圈(돌우리) 안에서 발견됨. 다만 M1의 경우 묘실 내에서 도편이 출토되었고, 완형은 하나도 없음. 이는 도기는 대부분 무덤 밖에 매장한 毁器의 습속을 시사함. 고분 배열의 규칙성 : 1950년대 환인댐 수몰구역 내의 고구려 무덤 발굴과 1990년대 초기에 댐 주변의 고구려 초기의 무덤들 발굴. 그러나 환인댐 수몰지구 내에서 망강루와 비슷한 규모의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음. 망강루 무덤은 개개의 단독분으로 일직선상으로 분포하며, 높은 곳으로부터 낮은 곳으로 점차 발전함. 따라서 무덤 배열은 시간적인 순서와 관련을 가지며, 가족의 묘역일 가능성이 있음. 토착문화 요소 : 夾粗砂灰褐陶器는 이 지역 초기 철기시대 유적에서 나온 도기의 질과 대체로 일치함. 이는 망강루 고분의 도기의 질에서 이 지역의 토착문화와 일맥 상통한다는 것을 설명함. 중원 문화 요소 : 니질회도 부여 문화 요소 : 유리 구슬장식, 귀걸이 장식은 중원 영향으로 설명하기도 함. 그러나 귀걸이 장식이 출토된 노하심 2기 고분, 서차구 고분은 부여의 문화 유적이라고 추론됨. 망강루 고분군이 서차구와 노하심에 가까우며, 고분의 지리환경 역시 유사하여 구릉성의 언덕에 위치함. 또한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망강루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과 서로 비슷하며, 이는 고구려 왕족이 부여에서 나왔다는 기록과 부합됨. 다만, 양자의 무덤 형식이 각기 적석묘와 토광묘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은 두 문화의 상이한 문화적 기원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함. 결국 망강루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에서 표현된 복잡한 문화 요소는 고구려문화 기원의 다원성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음.자연환경 산마루 북쪽은 급격한 낭떠러지로 그 아래 혼강이 흐름.유물정보 토기, 동기, 금제품, 구슬장식참고문헌 · 桓仁滿族自治縣文物志編纂委員會, 『桓仁滿族自治縣文物志』, 1990 · 梁志龍·王俊輝, 「遼寧桓仁出土靑銅遺物墓葬及相關問題」『博物館研究』 1994-2, 1994 · 李新全, 「五女山山城及其周圍的高句麗早期遺跡」『고구려 문화의 역사적 의의』, 고구려연구재단, 2005

    • 망강루 4호분(望江樓 4號墳)

    • 망강루 6호분(望江樓 6號墳)

    • 리스트여닫기 대협판구고분(大夾板溝古墳) 출토지 사첨자진 추피구촌 대협판구 골짜기 입구에 위치(沙尖子鎮 秋皮溝村 大夾板溝 峽入口 位置).구조특징 고분은 이미 훼손된 상태로 발견되어 형식은 불분명.역사적 의미 대협판구 고분에서 출토된 銅鈴은 형식과 문양은 모두 내몽고 寧城縣 黑城古城址 출토의 한대 동령과 일치하고, 河北省 陽原 西漢 고분 출토의 동령과 유사함. 동촉은 내몽고 朝魯庫倫 石城 출토의 한대 동촉 형식은 유사함. 따라서 유적의 연대는 한 대로 비정됨.유물정보 동제 화살촉1점, 동제 방울2점, 동제거울 4점참고문헌 · 梁志龍·王俊輝, 「遼寧桓仁出土靑銅遺物墓葬及相關問題」『博物館研究』 1994-2, 1994

    • 상고성자 고분군(上古城子 古墳群)

    • 상고성자 고분군 적석총(上古城子 古墳群 積石塚)

    • 상고성자 고분군 기단적석총 1(上古城子 古墳群 基段積石塚1)

    • 상고성자 고분군 기단적석총 2(上古城子 古墳群 基段積石塚2)

    • 상고성자 고분군 대형기단적석총(上古城子 古墳群 大型基段積石塚)

    • 양가가 고분군(楊家街 古墳群)

    • 양가가 고분군 7호분(楊家街 古墳群 7號墳)

    • 동선영 고분군(董船營 古墳群)

    • 연합 고분군(聯合 古墳群)

    • 만만천 고분군(灣灣川 古墳群)

    • 리스트여닫기 고력묘자 고분군(高力墓子 古墳群) 출토지 원래 연강향 고력묘자촌 남쪽의 낮고 완만한 산마루에 위치했으나 현재 수몰(原來 連江鄉 高力墓子村 南側 低㟶 位置, 現在 水沒).연대 1950년대 발굴 -상한 연대 : 기원 전후 시기, 고력묘자 고분군에서 출토된 토기의 태토와 제작 기술은 서한 말- 동한 초기 토기 특징을 지님: 대부분 모래가 섞인 홍갈색 혹은 황갈색, 소성도는 높지 않고 기형도 불규칙적. 기형의 특징은 方脣, 折沿, 束頸, 平底임. 이는 서한 말기로부터 동한 초기의 토기 특징임. -하한 연대 : 고구려 만기, 고구려 고분 형식이 편년에 의하면 봉토분은 비교적 늦은 시기임. 따라서 고력묘자고분군은 고구려 전 기간에 걸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음. 1994년 발굴 -환인 경내는 고구려 초기 활동의 중심지구로 현성 서북의 오녀산산성은 이미 많은 학자들이 고구려 제1도성인 흘승골성으로 보고 있음. 고려묘자 적석총은 오녀산 산성과 비교적 가까운 거리로 양자는 일정한 관계가 있을 것이며, 적석묘의 내외 구조를 보면 고구려 조기 고분의 특징을 갖추고 있음. 토기가 모두 물레를 사용하지 않은 手製이며, 태토가 거칠고, 火候가 높지 않으므로 고구려 전기 토기보다 조금 이른 단계임. 또한 출토된 陶壺와 陶罐의 형식 특징은 각각 동일한 집안 동대파 M356에서 출토된 單耳陶杯, 고력묘자 고분군 19호 및 201호의 陶罐과 서로 유사함. 이 세 고분의 연대는 기원 1~3세기 또는 3세기로 추정됨. 고려묘자 적석총이 자리한 지리적 위치, 무덤 구조상의 원시성, 도편 중 일부는 漢式 鐵钁가 출토된 바 있는 환인 龍家溝와 小荒溝 유적지 도편과 유사하므로, 고려묘자 적석총의 연대는 고구려 건국 초기, 즉 약 기원 1세기 또는 조금 이를 것으로 판단됨.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56동북박물관문물공작대(東北博物館文物工作隊)고려묘자촌에서 총 240여기 확인. 고분군 남단의 언덕에 대형 적석묘 70~80여기 집중 분포하는데 그 중 7기 고분 발굴1958동북박물관문물공작대(東北博物館文物工作隊)고분 총 37기 발굴(連江村 6기 포함)1964조중연합고고대(朝中聯合考古隊)박시형(김일성대) 등 북한측 9인과 이전복(길림성고고연구소) 등 중국측 합동 조사1994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 본계시박물관, 환인현문물관리소(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本溪市博物館, 桓仁縣文物管理所)혼강댐의 동남부 주위, 수몰된 고분군 주위에 수몰되지 않고 남아 있었던 곳으로 고분은 댐의 수면보다 5m 높은 곳에 위치한 것을 조사함고분은 산돌로 축조한 연접묘 4기, 무덤 평면은 근방형 또는 장방형의 커다란 돌로 축조.연접묘된 무덤을 ‘方壇’이라 칭하고, 발굴 순서에 따라 壇1~壇4로 편호.구조특징 고분군 묘역의 지세는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음. 고분군 묘역은 남북 길이 1,000m. 고분 분포는 규율성이 명확히 보임. -고분이 남쪽 언덕의 꼭대기에서부터 산비탈을 따라 북쪽으로 이어지면서 마을 가운데까지 배열. -고분의 개체수는 남쪽 언덕이 적다가 북쪽 마을로 내려오며 점차 많아지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음. -남단 지역은 큰 규모의 고분이 분포하는 대형 積石塚區, 약 70기 확인. -남단의 높은 자리에 1기, 그 북쪽에 이웃한 곳에 2기, 다시 북쪽으로 차례대로 4줄로 배열되는데, 연접된 길이는 70m에 달함. -봉토분은 소수이며, 대부분 고분군 최북단에 위치 고분 형식이 매우 다양하여 다수 적석총과 소수 봉토분으로 구분가능함. -적석총 : 무기단적석총-대다수 대형, 적석분구는 圓丘狀, 고분 대다수가 두 개 고분을 연접하여 축조했으나 일부는 단독분임, 묘실은 기초를 만든 후 그 위를 평탄하게 한 후 그 위에 강돌을 깔고 부장품을 놓은 후에 큰 돌로 뚜껑돌을 덮음, 뚜겅돌이 함몰된 흔적이 있는 것도 있음, 고분이 산비탈에 위치하여 아래 부분에 둘레담(階墻)과 護墳石을 덧 돌리도 함. 기단적석총-고분은 무기단 적석총의 아래에 분포, 대다수가 남북으로 연접된 연접분으로 적석분구는 方丘狀, 분구 기단은 방형이나 방형에 가까움, 매장부는 네 벽을 판석으로 수적하거나 평적했고 벽을 조금씩 안으로 들여쌓아 판석으로 뚜껑을 덮은 후 그 위에 다시 산돌이나 자갈을 덮음, 묘실 내부 바닥에는 자갈을 깔음, 묘도는 좁고 길으며, 문 가까이에서 커다란 돌로 폐쇄, 고분은 2개 형식으로 분류되는데 1형식은 3단 축조 기단적석총이고 2형식은 기단적석석실묘로 구조가 간단하고 할석으로 묘실의 벽을 쌓은 후 뚜껑돌을 덮었고, 묘실 입구에 간단한 묘도가 마련됨 계단적석총-대부분 대형 장대석으로 여러 층의 단을 축조했고 3층이 다수를 차지하며 계단은 층층이 들여쌓기함, 2개 형식으로 구분가능한데 1형식은 단독분이고 2형식은 연접분(십 수기 연접)으로 묘실 간에 묘벽을 공유하고 있어서 고분 간 밀접한 관계와 형성과정의 정황을 추측 할 수 있음 -봉토묘 : 封土洞室墓-규모가 비교적 작고 구조도 비교적 단순하고 2개의 형식으로 구분가능한데 판석으로 묘벽을 축조하고 판석으로 덮어 棺모양을 띤 형식과 돌을 평평히 쌓아 올려 벽을 축조하고, 판석을 덮고 묘실 바닥에는 자갈을 깔은 형식임, 고분의 천정 위의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적석으로 봉한 것과 적석을 하지 않은 것이 있음. 봉토묘-방형의 기단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음, 묘실은 단실, 쌍실, 삼실 등 여러 종류로 나누어지고 네 벽은 모두 할석으로 평평하게 쌓았음, 내부는 평평하고 가지런하게 되어 있고 벽은 올라가면서 조금씩 들여쌓은 후 커다란 판석을 천정 막음돌로 이용, 말각조정 방식으로 천정을 가구함, 묘실 바닥은 잔 자갈을 1-2겹 깔았으며, 자갈 위에 석판을 올려 1~3개의 尸床을 만들기도 함. 극히 일부 고분의 내부는 석회로 벽 틈새를 메웠고 묘실 방향은 규칙성이 없음, 墓門 밖에 좁고 긴 墓道가 있고 묘도 중간을 돌로 막음, 봉석묘와 묘실 구조는 유사하지만, 천정부에 1층을 봉토한 점이 차이이고 묘실 밖 네 둘레를 돌로 쌓고, 틈새를 작은 석괴 또는 자갈로 메워 묘실을 견고하게 하였으며, 마지막에 흙을 완전히 덮음. -기타 : 소형석관묘-외부를 돌로 봉하지 않았음. 1994년 발굴 구역의 분포상황은 산마루에 연접해 높은 곳에서 점차 낮은 곳으로 종렬 배열함, 연접묘(串墓) 4기, 연접묘 각각을 단 1-4로 정리했는데 단1~단3은 서로 연접, 전체 길이 34m, 너비 9~13m이고, 단4는 고립된 方壇이며, 단1의 동남단으로부터 40m 지점에 위치함, 단4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서, 가장 낮은 단3과 6m 정도 높이 차이가 남, 단4의 주변에는 석괴가 많이 훼손되어 무질서하며, 일부에서는 階墻이 보임. 계장 구축방법에 의한 분류로 살펴보면 壇의 側壁에 의지해 담을 그다지 규칙적이지 않게 축조했는데, 상부의 모양은 계장이나, 울타리의 기초부가 확인되지 않는 유형임. 기단 위에 석광 축조한 것은 각 기단마다 주 매장부는 1-4기로 규칙적이지 않고 매장부는 총 9개 발견됨, 석광의 네 벽은 고르지 않으며, 내부에서 모두 화장흔적.역사적 의미 매장방식 44기의 고분 가운데 24기 고분-봉토분 10기, 기단적석총 8기, 봉토석실묘 1기, 대형의 무기단 적석총과 계단적석총 5기-에서 유골 발견, 무기단적석총과 계단적석총에서 발견된 頭骨과 四肢骨이 보존 상태가 양호, 두개골은 모두 묘실 後壁을 향하고, 다리는 묘문을 향함. 대다수 仰身直肢葬, 4기의 봉토분에서 屈肢葬과 俯身葬 등도 발견됨. 單人葬, 雙人葬, 三人葬 화장 : 제15호, 제20호, 23호 등의 3기 고분에서는 불탄 인골 잔편들이 발견됨 구조 특징 - 연접묘 열상 배치 : 고분군 남단의 積石塚 區域에서는 약 70기 고분이 정연하게 배열. 배열은 남단의 높은 자리에 1기, 바로 아래 북쪽에 2기, 다시 북쪽으로 4줄로 정연함. 북묘는 모두 남벽이 없이 남묘의 북쪽 벽에 이어 묘실 축조 이는 남묘가 먼저 축조되고 북묘가 이후에 축조되었음을 보여줌 분지 분포 : 4줄로 정연하게 배열되며, 북쪽으로 갈수록 동·서 두 방향으로 확장되어 나감. 이는 적석묘 구역 고분이 공동 조상을 갖고, 각 줄의 연접묘는 가까운 혈연 관계의 한 가족을 대표하며, 여러 줄의 연접묘는 공동 혈연 관계에 따라 동일한 묘지에 묻히는 씨족사회 생활 습속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됨. 이런 매장방식은 일명 연접묘(串墓)라 하며, 集安 七星山墓域의 木耳場 일대 및 禹山墓域의 남쪽 기슭에서도 발견됨. 주변 고구려 유적과의 관계 고력묘자 고분군은 환인지구 최대의 고분군으로 원래 혼강 서안에 위치, 서쪽으로 5㎞ 떨어진 혼강 맞은 편에는 고구려 조기 도성인 오녀산산성이 있고, 서북 약 2.5㎞ 원래 連江村 역시 비교적 커다란 고구려 고분군이 있음. 고력묘자 고분군은 오녀산산성 및 그 부근의 고구려유적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 1994년 발굴고분 구조 성격 연접묘 : 고려묘자 고분군 가운데 단1~단4 고분과 유사한 고분은 고력묘자 고분군 제15호 및 19호를 비롯하여 집안 東大坡 M356, 집안 轉山子 M191 및 162 등임. 계장식 축조: 고력묘자 고분군 제15호 및 19호의 계장은 동대파 356과 유사함. 모두 비교적 규칙적이며, 전체가 할석을 덮어 丘狀을 만들었음, 고려묘자 적석총은 계장 축조가 거칠고, 계단의 윤곽이 불명확하여, 전체를 봉하지 못하여 외관형태가 원시적으로 표현되어 있음. 지탱석 : 단3 및 단4의 계장 바깥의 분구 지탱석으로 커다란 돌을 1열 배치하는 방법은 다른 고분 중에서 일찍이 보였음. 다만 단1의 서북계장 바깥에 장대석을 비스듬히 기대는 법은 드문 예로, 후세의 고구려 태왕릉, 장군총 등 독립적 장대석을 호석으로 사용한 건축법과 무관하지 않을 것임. 석광과 장구 장구 : 석광 광벽에서 불태워진 흔적이 있으며, 석광 안에서 목곽에 사용된 꺽쇠나 관못은 보이지 않음. 고구려 조기 고분군 가운데 목곽이 간단히 끼워 맞추는 구조였거나, 곽이 없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함. 석광 : 곽이 없었다면, 석단을 쌓는 과정 중에 시신을 설치하는 곳에 미리 빈 구덩이를 남기거나, 석단을 모두 축조한 후에 묘의 위치에 따라 다시 적석을 헤치고 구덩이를 만드는 두 방법이 사용되었을 것. 전자가 비교적 시간과 노력을 절약한 방법임. 장례풍속에 관한 특이점 가족장 : 연접묘는 일종의 가족 고분으로, 가족을 모아 장례한 결과로 추정. 동일 단 위에의 여러 묘광은 아마도 일가족 중의 동년배일지도 모름. 고구려 후기 봉토분 가운데 “同墓異穴”이 바로 이런 “同壇異穴” 장속의 계승을 시사함. 화장 : 고려묘자 적석총은 보편적으로 화장을 채용, 다만, 불태워진 정도는 다름. 단3 위의 M5 및 M6는 심하게 불탔는데, 돌을 불에 타서 벌어졌고, 유리질화된 용석이 많으며 그 위에 커다란 땔나무 흔적이 명확히 보이므로, 불의 온도는 1000도보다 높았을 것임. 가장 위쪽의 단4에서 순차적으로 그 뒤의 단1~단3으로 더욱 불태워지는 추세를 확인할 수 있다. 묘광 바닥 : 다수의 묘실 바닥 위에 깬돌이 많이 보이며, 자갈은 극히 드물게 산재함. 이것은 후에 주로 자갈을 고분 바닥에 깔았던 방법과는 차별이 있음. 장속과 관련한 기록 : 北史기록에 의하면, 고구려 습속은 죽은 자를 매장한 후 “사자가 생시에 服玩하던 車馬를 취해 고분 옆에 두면 장례에 참석한 사람들이 다투어 취해서 간다”고 하였음. 이번 발굴 중 석광 바깥쪽 돌 틈 사이에서 토기편 등이 발견된 것은 이런 장속의 조기 반영인지 주목할 가치가 있음.자연환경 산마루 양쪽 아래 계곡으로 작은 내가 서쪽으로 흘러 혼강으로 들어감. 산마루의 서북 1㎞ 거리에 고려묘자촌이 있고, 혼강 동안은 마을의 서쪽으로 1.2㎞ 떨어짐. 동쪽 산등성이를 건너 2.5㎞ 떨어진 곳인 연강촌에서도 남쪽 강안 부근에 고구려 시기 대형분이 있음. 서북쪽 5㎞ 떨어진 강 건너편에 오녀산성이 위치. 서쪽으로 약 15㎞ 떨어진 곳에 환인현성이 위치. 혼강댐 건설로 고분군은 수몰(연강촌과 고력묘자촌 수몰) 현재 환인현 혼강댐 동남부 가장자리에 일부 고분이 확인. 國有庫區 林場高句麗墓子工區에 속함. 현재 고분군은 댐의 수면보다 5m 높음.유물정보 (1) 1950년대 발굴 고분 부장품은 토기(陶罐), 철제 칼(鐵刀), 철제 띠고리(鐵帶卡), 철제 재갈(鐵馬銜), 철제 화살촉(鐵鏃), 철제 창(鐵矛), 철제 패옥형 노리개(璜形鐵佩), 은제 팔찌(銀鐲), 동제 팔지(銅鐲), 반지(錫指環), 금동(鎏金), 금은·금동제 장식편(鎏銀銅飾件殘片) 등의 총 47건. 이들 유물은 봉토묘 가운데 제4호묘에서 출토된 2건의 반지(錫脂環)을 제외하고 모두 대형의 적석총 제15호, 제19호, 201호에서 출토. (2) 1994년 발굴 고분 부장품이 매우 소략하며, 토기와 철기 2종류만 확인. 토기는 壺 1건, 罐 2건, 저부(器底) 1건, 이외 대상파수(板耳) 잔편 등이 보이며, 철기는 고리(環) 1건, 낚시바늘(魚鉤) 1건 등의 출토.참고문헌 · 陳大爲, 「桓仁縣考古調査發掘簡報」『考古』 1960-1, 1960 · 정찬영, 「기원4세기까지의 고구려 묘제에 관한 연구」『고고민속론문집』 5, 1973 · 李殿福, 「集安高句麗墓硏究」『考古學報』 1980-2, 1980 · 陳大爲, 「試論桓仁高句麗積石墓的類型, 年代及其演變」『遼寧省考古·博物館學會成立大會會刊』, 1981 · 陳大爲, 「桓仁高句麗積石墓的外形和內部結構」『遼寧文物』 1981-2, 1981 · 方起東, 「高句麗石墓的演進」『博物館研究』 1985-2, 1985 · 魏存成, 「高句麗積石墓的類型和演變」『考古學報』 1987-3, 中國社會科學院考古研究所, 1987 · 桓仁滿族自治縣文物志編纂委員會, 『桓仁滿族自治縣文物志』, 1990 · 萬欣·梁志龍, 「遼寧桓仁縣高麗墓子高句麗積石墓」『考古』 1998-3, 1998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李新全, 「五女山山城及其周圍的高句麗早期遺跡」『고구려 문화의 역사적 의의』, 고구려연구재단, 2005

    • 고력묘자 고분군 1호분(高力墓子 古墳群 1號墳)

    • 리스트여닫기 고력묘자 고분군 8호분(高力墓子 古墳群 8號墳) 출토지 연강향 고력묘자촌 남쪽의 낮고 완만한 산마루에 위치, 현재는 수몰(連江鄉 高力墓子村 南側 低㟶 位置, 現在 水沒).연대 1950년대 발굴 -상한 연대 : 기원 전후 시기, 고력묘자 고분군에서 출토된 토기의 태토와 제작 기술은 서한 말- 동한 초기 토기 특징을 지님: 대부분 모래가 섞인 홍갈색 혹은 황갈색, 소성도는 높지 않고 기형도 불규칙적. 기형의 특징은 方脣, 折沿, 束頸, 平底임. 이는 서한 말기로부터 동한 초기의 토기 특징임. -하한 연대 : 고구려 만기, 고구려 고분 형식이 편년에 의하면 봉토분은 비교적 늦은 시기임. 따라서 고력묘자고분군은 고구려 전 기간에 걸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음. 1994년 발굴 -환인 경내는 고구려 초기 활동의 중심지구로 현성 서북의 오녀산산성은 이미 많은 학자들이 고구려 제1도성인 흘승골성으로 보고 있음. 고려묘자 적석총은 오녀산 산성과 비교적 가까운 거리로 양자는 일정한 관계가 있을 것이며, 적석묘의 내외 구조를 보면 고구려 조기 고분의 특징을 갖추고 있음. 토기가 모두 물레를 사용하지 않은 手製이며, 태토가 거칠고, 火候가 높지 않으므로 고구려 전기 토기보다 조금 이른 단계임. 또한 출토된 陶壺와 陶罐의 형식 특징은 각각 동일한 집안 동대파 M356에서 출토된 單耳陶杯, 고력묘자 고분군 19호 및 201호의 陶罐과 서로 유사함. 이 세 고분의 연대는 기원 1~3세기 또는 3세기로 추정됨. 고려묘자 적석총이 자리한 지리적 위치, 무덤 구조상의 원시성, 도편 중 일부는 漢式 鐵钁가 출토된 바 있는 환인 龍家溝와 小荒溝 유적지 도편과 유사하므로, 고려묘자 적석총의 연대는 고구려 건국 초기, 즉 약 기원 1세기 또는 조금 이를 것으로 판단됨.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56동북박물관문물공작대(東北博物館文物工作隊)고려묘자촌에서 총 240여기 확인. 고분군 남단의 언덕에 대형 적석묘 70~80여기 집중 분포하는데 그 중 7기 고분 발굴1958동북박물관문물공작대(東北博物館文物工作隊)고분 총 37기 발굴(連江村 6기 포함)1964조중연합고고대(朝中聯合考古隊)박시형(김일성대) 등 북한측 9인과 이전복(길림성고고연구소) 등 중국측 합동 조사1994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 본계시박물관, 환인현문물관리소(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本溪市博物館, 桓仁縣文物管理所)혼강댐의 동남부 주위, 수몰된 고분군 주위에 수몰되지 않고 남아 있었던 곳으로 고분은 댐의 수면보다 5m 높은 곳에 위치한 것을 조사함고분은 산돌로 축조한 연접묘 4기, 무덤 평면은 근방형 또는 장방형의 커다란 돌로 축조.연접묘된 무덤을 ‘方壇’이라 칭하고, 발굴 순서에 따라 壇1~壇4로 편호.구조특징 부장품은 없으며 우측 尸牀 북단에서 두개골편 발견되어 시신을 頭北足南으로 배치했고, 묘실 외부의 네 둘레는 돌로 쌓고 틈새는 쇄석과 자갈로 메운 후에 흙으로 무덤을 봉함내부규모 및 특징 장방형의 단실묘로 석괴를 이용하여 네 벽을 평평하게 쌓았음. 壁은 위로 올라가면서 점차 들여쌓은 후에 3~4개의 커다란 판상석으로 천장을 막음. 묘실 바닥에는 한 겹 자갈을 깔고, 좌우 양쪽에 작은 판상석을 깔아 尸牀을 만듦. 시상의 너비 25~35㎝, 높이 6㎝. 묘문 南偏東 10°, 묘도 : 길이 1.7m, 너비 0.6m 묘도는 돌로 막음 부장품은 없으며 우측 尸牀 북단에서 두개골편 발견되어 시신을 頭北足南으로 배치.역사적 의미 매장방식 44기의 고분 가운데 24기 고분-봉토분 10기, 기단적석총 8기, 봉토석실묘 1기, 대형의 무기단 적석총과 계단적석총 5기-에서 유골 발견, 무기단적석총과 계단적석총에서 발견된 頭骨과 四肢骨이 보존 상태가 양호, 두개골은 모두 묘실 後壁을 향하고, 다리는 묘문을 향함. 대다수 仰身直肢葬, 4기의 봉토분에서 屈肢葬과 俯身葬 등도 발견됨. 單人葬, 雙人葬, 三人葬 화장 : 제15호, 제20호, 23호 등의 3기 고분에서는 불탄 인골 잔편들이 발견됨 구조 특징 - 연접묘 열상 배치 : 고분군 남단의 積石塚 區域에서는 약 70기 고분이 정연하게 배열. 배열은 남단의 높은 자리에 1기, 바로 아래 북쪽에 2기, 다시 북쪽으로 4줄로 정연함. 북묘는 모두 남벽이 없이 남묘의 북쪽 벽에 이어 묘실 축조 이는 남묘가 먼저 축조되고 북묘가 이후에 축조되었음을 보여줌 분지 분포 : 4줄로 정연하게 배열되며, 북쪽으로 갈수록 동·서 두 방향으로 확장되어 나감. 이는 적석묘 구역 고분이 공동 조상을 갖고, 각 줄의 연접묘는 가까운 혈연 관계의 한 가족을 대표하며, 여러 줄의 연접묘는 공동 혈연 관계에 따라 동일한 묘지에 묻히는 씨족사회 생활 습속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됨. 이런 매장방식은 일명 연접묘(串墓)라 하며, 集安 七星山墓域의 木耳場 일대 및 禹山墓域의 남쪽 기슭에서도 발견됨. 주변 고구려 유적과의 관계 고력묘자 고분군은 환인지구 최대의 고분군으로 원래 혼강 서안에 위치, 서쪽으로 5㎞ 떨어진 혼강 맞은 편에는 고구려 조기 도성인 오녀산산성이 있고, 서북 약 2.5㎞ 원래 連江村 역시 비교적 커다란 고구려 고분군이 있음. 고력묘자 고분군은 오녀산산성 및 그 부근의 고구려유적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 1994년 발굴고분 구조 성격 연접묘 : 고려묘자 고분군 가운데 단1~단4 고분과 유사한 고분은 고력묘자 고분군 제15호 및 19호를 비롯하여 집안 東大坡 M356, 집안 轉山子 M191 및 162 등임. 계장식 축조: 고력묘자 고분군 제15호 및 19호의 계장은 동대파 356과 유사함. 모두 비교적 규칙적이며, 전체가 할석을 덮어 丘狀을 만들었음, 고려묘자 적석총은 계장 축조가 거칠고, 계단의 윤곽이 불명확하여, 전체를 봉하지 못하여 외관형태가 원시적으로 표현되어 있음. 지탱석 : 단3 및 단4의 계장 바깥의 분구 지탱석으로 커다란 돌을 1열 배치하는 방법은 다른 고분 중에서 일찍이 보였음. 다만 단1의 서북계장 바깥에 장대석을 비스듬히 기대는 법은 드문 예로, 후세의 고구려 태왕릉, 장군총 등 독립적 장대석을 호석으로 사용한 건축법과 무관하지 않을 것임. 석광과 장구 장구 : 석광 광벽에서 불태워진 흔적이 있으며, 석광 안에서 목곽에 사용된 꺽쇠나 관못은 보이지 않음. 고구려 조기 고분군 가운데 목곽이 간단히 끼워 맞추는 구조였거나, 곽이 없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함. 석광 : 곽이 없었다면, 석단을 쌓는 과정 중에 시신을 설치하는 곳에 미리 빈 구덩이를 남기거나, 석단을 모두 축조한 후에 묘의 위치에 따라 다시 적석을 헤치고 구덩이를 만드는 두 방법이 사용되었을 것. 전자가 비교적 시간과 노력을 절약한 방법임. 장례풍속에 관한 특이점 가족장 : 연접묘는 일종의 가족 고분으로, 가족을 모아 장례한 결과로 추정. 동일 단 위에의 여러 묘광은 아마도 일가족 중의 동년배일지도 모름. 고구려 후기 봉토분 가운데 “同墓異穴”이 바로 이런 “同壇異穴” 장속의 계승을 시사함. 화장 : 고려묘자 적석총은 보편적으로 화장을 채용, 다만, 불태워진 정도는 다름. 단3 위의 M5 및 M6는 심하게 불탔는데, 돌을 불에 타서 벌어졌고, 유리질화된 용석이 많으며 그 위에 커다란 땔나무 흔적이 명확히 보이므로, 불의 온도는 1000도보다 높았을 것임. 가장 위쪽의 단4에서 순차적으로 그 뒤의 단1~단3으로 더욱 불태워지는 추세를 확인할 수 있다. 묘광 바닥 : 다수의 묘실 바닥 위에 깬돌이 많이 보이며, 자갈은 극히 드물게 산재함. 이것은 후에 주로 자갈을 고분 바닥에 깔았던 방법과는 차별이 있음. 장속과 관련한 기록 : 北史기록에 의하면, 고구려 습속은 죽은 자를 매장한 후 “사자가 생시에 服玩하던 車馬를 취해 고분 옆에 두면 장례에 참석한 사람들이 다투어 취해서 간다”고 하였음. 이번 발굴 중 석광 바깥쪽 돌 틈 사이에서 토기편 등이 발견된 것은 이런 장속의 조기 반영인지 주목할 가치가 있음.자연환경 산마루 양쪽 아래 계곡으로 작은 내가 서쪽으로 흘러 혼강으로 들어감. 산마루의 서북 1㎞ 거리에 고려묘자촌이 있고, 혼강 동안은 마을의 서쪽으로 1.2㎞ 떨어짐. 동쪽 산등성이를 건너 2.5㎞ 떨어진 곳인 연강촌에서도 남쪽 강안 부근에 고구려 시기 대형분이 있음. 서북쪽 5㎞ 떨어진 강 건너편에 오녀산성이 위치. 서쪽으로 약 15㎞ 떨어진 곳에 환인현성이 위치. 혼강댐 건설로 고분군은 수몰(연강촌과 고력묘자촌 수몰) 현재 환인현 혼강댐 동남부 가장자리에 일부 고분이 확인. 國有庫區 林場高句麗墓子工區에 속함. 현재 고분군은 댐의 수면보다 5m 높음.참고문헌 · 陳大爲, 「桓仁縣考古調査發掘簡報」『考古』 1960-1, 1960 · 정찬영, 「기원4세기까지의 고구려 묘제에 관한 연구」『고고민속론문집』 5, 1973 · 李殿福, 「集安高句麗墓硏究」『考古學報』 1980-2, 1980 · 陳大爲, 「試論桓仁高句麗積石墓的類型, 年代及其演變」『遼寧省考古·博物館學會成立大會會刊』, 1981 · 陳大爲, 「桓仁高句麗積石墓的外形和內部結構」『遼寧文物』 1981-2, 1981 · 方起東, 「高句麗石墓的演進」『博物館研究』 1985-2, 1985 · 魏存成, 「高句麗積石墓的類型和演變」『考古學報』 1987-3, 中國社會科學院考古研究所, 1987 · 桓仁滿族自治縣文物志編纂委員會, 『桓仁滿族自治縣文物志』, 1990 · 萬欣·梁志龍, 「遼寧桓仁縣高麗墓子高句麗積石墓」『考古』 1998-3, 1998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李新全, 「五女山山城及其周圍的高句麗早期遺跡」『고구려 문화의 역사적 의의』, 고구려연구재단, 2005

    • 고력묘자 고분군 11호분(高力墓子 古墳群 11號墳)

    • 고력묘자 고분군 12호분(高力墓子 古墳群 12號墳)

    • 리스트여닫기 고력묘자 고분군 15호분(高力墓子 古墳群 15號墳) 출토지 원래 연강향 고력묘자촌 남쪽의 낮고 완만한 산마루에 위치. 현재는 수몰. 15호분은 고분군 가운데 가장 남면 산 언덕위에 단독으로 위치(原來 連江鄉 高力墓子村 南側 低㟶 位置, 現在 水沒. 15號墳, 古墳群中 最南面 山原 單獨 位置).연대 1950년대 발굴 -상한 연대 : 기원 전후 시기, 고력묘자 고분군에서 출토된 토기의 태토와 제작 기술은 서한 말- 동한 초기 토기 특징을 지님: 대부분 모래가 섞인 홍갈색 혹은 황갈색, 소성도는 높지 않고 기형도 불규칙적. 기형의 특징은 方脣, 折沿, 束頸, 平底임. 이는 서한 말기로부터 동한 초기의 토기 특징임. -하한 연대 : 고구려 만기, 고구려 고분 형식이 편년에 의하면 봉토분은 비교적 늦은 시기임. 따라서 고력묘자고분군은 고구려 전 기간에 걸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음. 1994년 발굴 -환인 경내는 고구려 초기 활동의 중심지구로 현성 서북의 오녀산산성은 이미 많은 학자들이 고구려 제1도성인 흘승골성으로 보고 있음. 고려묘자 적석총은 오녀산 산성과 비교적 가까운 거리로 양자는 일정한 관계가 있을 것이며, 적석묘의 내외 구조를 보면 고구려 조기 고분의 특징을 갖추고 있음. 토기가 모두 물레를 사용하지 않은 手製이며, 태토가 거칠고, 火候가 높지 않으므로 고구려 전기 토기보다 조금 이른 단계임. 또한 출토된 陶壺와 陶罐의 형식 특징은 각각 동일한 집안 동대파 M356에서 출토된 單耳陶杯, 고력묘자 고분군 19호 및 201호의 陶罐과 서로 유사함. 이 세 고분의 연대는 기원 1~3세기 또는 3세기로 추정됨. 고려묘자 적석총이 자리한 지리적 위치, 무덤 구조상의 원시성, 도편 중 일부는 漢式 鐵钁가 출토된 바 있는 환인 龍家溝와 小荒溝 유적지 도편과 유사하므로, 고려묘자 적석총의 연대는 고구려 건국 초기, 즉 약 기원 1세기 또는 조금 이를 것으로 판단됨.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56동북박물관문물공작대(東北博物館文物工作隊)고려묘자촌에서 총 240여기 확인. 고분군 남단의 언덕에 대형 적석묘 70~80여기 집중 분포하는데 그 중 7기 고분 발굴1958동북박물관문물공작대(東北博物館文物工作隊)고분 총 37기 발굴(連江村 6기 포함)1964조중연합고고대(朝中聯合考古隊)박시형(김일성대) 등 북한측 9인과 이전복(길림성고고연구소) 등 중국측 합동 조사1994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 본계시박물관, 환인현문물관리소(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本溪市博物館, 桓仁縣文物管理所)혼강댐의 동남부 주위, 수몰된 고분군 주위에 수몰되지 않고 남아 있었던 곳으로 고분은 댐의 수면보다 5m 높은 곳에 위치한 것을 조사함고분은 산돌로 축조한 연접묘 4기, 무덤 평면은 근방형 또는 장방형의 커다란 돌로 축조.연접묘된 무덤을 ‘方壇’이라 칭하고, 발굴 순서에 따라 壇1~壇4로 편호.구조특징 외부는 모두 괴석으로, 석구모양. 단인장으로 추정. 묘향은 北偏西 15°내부규모 및 특징 묘실은 괴석으로 석축된 2실이며 남북으로 배치됨. 축조 절차 : 남측 묘실의 기초 축조→남측 묘실 기초의 북쪽에 의지해 북측 묘실 기초 축조→기초면을 평평하게 쌓음→각 기초면 위에 제2층 울타리 돌 축조→남북 2실의 둘레에 울타리 돌을 1줄 돌림 →둘레 돌 북면으로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 돌을 1줄 더 축조→무덤 전체를 돌로 덮음. 둘레 울타리돌 바깥 쪽에 네면 모서리에 무덤 기초를 보호하기 위해 호석과 지탱석을 두어었고, 서북모서리가 가장 명확하게 드러남. 북실의 묘실 바닥은 제1층의 기초면이고 북실에서 발굴 전 원형의 함몰 흔적 발견. 많은 熔石과 燒石 속에서 소량의 燒骨 잔편이 발견되었는데, 인골은 모두 불태워져 熔石 속에서 있었고, 頭骨과 肢骨는 매우 명확히 확인되며 모두 희게 변하였음.역사적 의미 매장방식 44기의 고분 가운데 24기 고분-봉토분 10기, 기단적석총 8기, 봉토석실묘 1기, 대형의 무기단 적석총과 계단적석총 5기-에서 유골 발견, 무기단적석총과 계단적석총에서 발견된 頭骨과 四肢骨이 보존 상태가 양호, 두개골은 모두 묘실 後壁을 향하고, 다리는 묘문을 향함. 대다수 仰身直肢葬, 4기의 봉토분에서 屈肢葬과 俯身葬 등도 발견됨. 單人葬, 雙人葬, 三人葬 화장 : 제15호, 제20호, 23호 등의 3기 고분에서는 불탄 인골 잔편들이 발견됨 구조 특징 - 연접묘 열상 배치 : 고분군 남단의 積石塚 區域에서는 약 70기 고분이 정연하게 배열. 배열은 남단의 높은 자리에 1기, 바로 아래 북쪽에 2기, 다시 북쪽으로 4줄로 정연함. 북묘는 모두 남벽이 없이 남묘의 북쪽 벽에 이어 묘실 축조 이는 남묘가 먼저 축조되고 북묘가 이후에 축조되었음을 보여줌 분지 분포 : 4줄로 정연하게 배열되며, 북쪽으로 갈수록 동·서 두 방향으로 확장되어 나감. 이는 적석묘 구역 고분이 공동 조상을 갖고, 각 줄의 연접묘는 가까운 혈연 관계의 한 가족을 대표하며, 여러 줄의 연접묘는 공동 혈연 관계에 따라 동일한 묘지에 묻히는 씨족사회 생활 습속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됨. 이런 매장방식은 일명 연접묘(串墓)라 하며, 集安 七星山墓域의 木耳場 일대 및 禹山墓域의 남쪽 기슭에서도 발견됨. 주변 고구려 유적과의 관계 고력묘자 고분군은 환인지구 최대의 고분군으로 원래 혼강 서안에 위치, 서쪽으로 5㎞ 떨어진 혼강 맞은 편에는 고구려 조기 도성인 오녀산산성이 있고, 서북 약 2.5㎞ 원래 連江村 역시 비교적 커다란 고구려 고분군이 있음. 고력묘자 고분군은 오녀산산성 및 그 부근의 고구려유적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 1994년 발굴고분 구조 성격 연접묘 : 고려묘자 고분군 가운데 단1~단4 고분과 유사한 고분은 고력묘자 고분군 제15호 및 19호를 비롯하여 집안 東大坡 M356, 집안 轉山子 M191 및 162 등임. 계장식 축조: 고력묘자 고분군 제15호 및 19호의 계장은 동대파 356과 유사함. 모두 비교적 규칙적이며, 전체가 할석을 덮어 丘狀을 만들었음, 고려묘자 적석총은 계장 축조가 거칠고, 계단의 윤곽이 불명확하여, 전체를 봉하지 못하여 외관형태가 원시적으로 표현되어 있음. 지탱석 : 단3 및 단4의 계장 바깥의 분구 지탱석으로 커다란 돌을 1열 배치하는 방법은 다른 고분 중에서 일찍이 보였음. 다만 단1의 서북계장 바깥에 장대석을 비스듬히 기대는 법은 드문 예로, 후세의 고구려 태왕릉, 장군총 등 독립적 장대석을 호석으로 사용한 건축법과 무관하지 않을 것임. 석광과 장구 장구 : 석광 광벽에서 불태워진 흔적이 있으며, 석광 안에서 목곽에 사용된 꺽쇠나 관못은 보이지 않음. 고구려 조기 고분군 가운데 목곽이 간단히 끼워 맞추는 구조였거나, 곽이 없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함. 석광 : 곽이 없었다면, 석단을 쌓는 과정 중에 시신을 설치하는 곳에 미리 빈 구덩이를 남기거나, 석단을 모두 축조한 후에 묘의 위치에 따라 다시 적석을 헤치고 구덩이를 만드는 두 방법이 사용되었을 것. 전자가 비교적 시간과 노력을 절약한 방법임. 장례풍속에 관한 특이점 가족장 : 연접묘는 일종의 가족 고분으로, 가족을 모아 장례한 결과로 추정. 동일 단 위에의 여러 묘광은 아마도 일가족 중의 동년배일지도 모름. 고구려 후기 봉토분 가운데 “同墓異穴”이 바로 이런 “同壇異穴” 장속의 계승을 시사함. 화장 : 고려묘자 적석총은 보편적으로 화장을 채용, 다만, 불태워진 정도는 다름. 단3 위의 M5 및 M6는 심하게 불탔는데, 돌을 불에 타서 벌어졌고, 유리질화된 용석이 많으며 그 위에 커다란 땔나무 흔적이 명확히 보이므로, 불의 온도는 1000도보다 높았을 것임. 가장 위쪽의 단4에서 순차적으로 그 뒤의 단1~단3으로 더욱 불태워지는 추세를 확인할 수 있다. 묘광 바닥 : 다수의 묘실 바닥 위에 깬돌이 많이 보이며, 자갈은 극히 드물게 산재함. 이것은 후에 주로 자갈을 고분 바닥에 깔았던 방법과는 차별이 있음. 장속과 관련한 기록 : 北史기록에 의하면, 고구려 습속은 죽은 자를 매장한 후 “사자가 생시에 服玩하던 車馬를 취해 고분 옆에 두면 장례에 참석한 사람들이 다투어 취해서 간다”고 하였음. 이번 발굴 중 석광 바깥쪽 돌 틈 사이에서 토기편 등이 발견된 것은 이런 장속의 조기 반영인지 주목할 가치가 있음.자연환경 산마루 양쪽 아래 계곡으로 작은 내가 서쪽으로 흘러 혼강으로 들어감. 산마루의 서북 1㎞ 거리에 고려묘자촌이 있고, 혼강 동안은 마을의 서쪽으로 1.2㎞ 떨어짐. 동쪽 산등성이를 건너 2.5㎞ 떨어진 곳인 연강촌에서도 남쪽 강안 부근에 고구려 시기 대형분이 있음. 서북쪽 5㎞ 떨어진 강 건너편에 오녀산성이 위치. 서쪽으로 약 15㎞ 떨어진 곳에 환인현성이 위치. 혼강댐 건설로 고분군은 수몰(연강촌과 고력묘자촌 수몰) 현재 환인현 혼강댐 동남부 가장자리에 일부 고분이 확인. 國有庫區 林場高句麗墓子工區에 속함. 현재 고분군은 댐의 수면보다 5m 높음.유물정보 부장유물은 熔石과 燒石 부근에서 출토. 철제 고리자루칼(環首鐵刀) 1건, 철제 띠고리(鐵帶卡) 2건, 철제 재갈(鐵馬銜) 1건, 철제 화살촉(鐵鏃) 2매 등 많은 토기편과 호(壺, 罐) 등의 용기류 등 여러 점.참고문헌 · 陳大爲, 「桓仁縣考古調査發掘簡報」『考古』 1960-1, 1960 · 정찬영, 「기원4세기까지의 고구려 묘제에 관한 연구」『고고민속론문집』 5, 1973 · 李殿福, 「集安高句麗墓硏究」『考古學報』 1980-2, 1980 · 陳大爲, 「試論桓仁高句麗積石墓的類型, 年代及其演變」『遼寧省考古·博物館學會成立大會會刊』, 1981 · 陳大爲, 「桓仁高句麗積石墓的外形和內部結構」『遼寧文物』 1981-2, 1981 · 方起東, 「高句麗石墓的演進」『博物館研究』 1985-2, 1985 · 魏存成, 「高句麗積石墓的類型和演變」『考古學報』 1987-3, 中國社會科學院考古研究所, 1987 · 桓仁滿族自治縣文物志編纂委員會, 『桓仁滿族自治縣文物志』, 1990 · 萬欣·梁志龍, 「遼寧桓仁縣高麗墓子高句麗積石墓」『考古』 1998-3, 1998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李新全, 「五女山山城及其周圍的高句麗早期遺跡」『고구려 문화의 역사적 의의』, 고구려연구재단, 2005

    • 고력묘자 고분군 21호분(高力墓子 古墳群 21號墳)

    • 고력묘자 고분군 단1(高力墓子 古墳群 壇1)

    • 고력묘자 고분군 단2(高力墓子 古墳群 壇2)

    • 고력묘자 고분군 단3(高力墓子 古墳群 壇3)

    • 고력묘자 고분군 단4(高力墓子 古墳群 壇4)

    • 대청구 고분군(大靑溝 古墳群)

    • 대청구 고분군 1호분(大靑溝 古墳群 1號墳)

    • 대청구 고분군 2호분(大靑溝 古墳群 2號墳)

    • 사도령자 고분군(四道領子 古墳群)

    • 사도령자 고분군 1호분(四道領子 古墳群 1號墳)

    • 사도령자 고분군 2호분(四道領子 古墳群 2號墳)

    • 천리 고분군(川里 古墳群)

    • 대황구 고분군(大荒溝 古墳群)

    • 대파 고분군(大把 古墳群)

    • 대전자 고분군(大甸子 古墳群)

    • 미창구 고분군(米倉溝 古墳群)

    • 리스트여닫기 미창구 1호분(米倉溝 1號墳) 출토지 미창구촌 북쪽 약 500m의 산등성이 가장 높은 곳(米倉溝村 北側 500m 岡 最高位置).연대 장천 2호분과 동일시기인 약 5세기로 비정됨구조특징 봉토부-외부 형태는 截尖方錐形. 覆斗狀 -방형의 네 모서리가 불분명하나 방형으로 판단 가능. -봉토는 북고남저, 남부와 서부는 파괴가 심하고, 나머지는 비교적 양호. -황토색 모래흙을 다져 쌓았으며, 묘실 가까이에서 목탄과 백회 발견. -분구의 정상부 동쪽에 너비 3.5m, 길이 19m의 단이 있으며, 단 위는 길이 9m, 너비 8m의 평평함. -분구 바깥으로 남쪽과 북쪽에 각각 반원형의 대가 있음. 길이는 남쪽 토대 21m, 북쪽 토대 36m. -분구 남단에서 묘실 중심을 향해 10m, 깊이 4.7m되는 지점에서 판석 발견, 판석은 비교적 평평하고 방형에 가까움. 크기는 길이 1.6m, 너비 1.5m, 두께 0.28m. 판석 가운데 길이 0.42m, 너비 0.27m, 깊이 0.12m의 장방형 홈이 있음. 방형 판석 주위는 자갈과 목탄으로 꽉 채워 쌓았으며, 그 북쪽으로 판석에 잇대어 장대석이 놓여있음. 장대석 길이 1.4m, 너비 0.2m, 장대석 주위에도 목탄이 있음. -판석 위로 동쪽으로 치우쳐 부정형한 삼각형 판석이 있음. 가장 긴 길이 0.9m, 너비 0.8m, 두께 0.3m. -분구 끝에서 안으로 약 18m들어가서 묘실 외벽에 장대석 1매가 기대어 있음. 장대석은 길이 3.6m, 바닥쪽 너비 0.76m, 위쪽 너비 0.5m. 장대석을 잘 가공하였고, 백회를 바른 흔적이 있음. 장대석 아래 부분에는 자갈, 塊石, 백회로 쌓아 돌렸으며, 그 아래에는 돌 3매가 있는데, 그 중간에 장화형(靴形) 돌이 있음, 장화형 돌의 밑바닥과 목의 뒷면은 반듯한 평면으로 되어 있는데 밑바닥 길이 90㎝, 목 부위 높이 70㎝, 장화형 돌은 이전 무덤에서 보이지 않는 첫 발견. -분구의 북부는 원상태를 유지하고 있음. -묘실은 분구 정상부 아래 8m 되는 곳을 평평하게 다진 후 그 위에 축조. -묘실 외부의 보강적석에서 북으로 6m 되는 곳은 경사짐. -경사면 전체는 1m 폭으로 자갈과 목탄을 깔음, 그 북쪽 가장자리에 지름 5㎝ 미만의 작은 돌을 ‘丁’자형으로 깔음, 길이 1m·동쪽으로 펼쳐진 길이 약 5.2m·너비 0.6m, 작은 돌을 깔아 만든 면의 북측에 다시 두 줄의 돌을 깔음. 첫째와 둘째 자갈돌 면 간격은 0.4m~0.5m, 둘째와 셋째 자갈돌면 간격은 0.4m. 둘째 자갈돌 면은 동서 길이 6.8m이며, 양끝은 비교적 좁으며, 가장 폭이 넓은 곳이 0.6m. 셋째 자갈돌 면은 길이 4m, 너비 0.5m, 셋째 자갈돌 면은 비교적 짧고 규칙적이지 못하며, 봉토 가장자리에 자리하고 있음. -묘실 보강은 미가공의 커다란 돌로 계단식으로 차례로 쌓아 묘실 정상부까지 구축. -봉토 가장자리에서 2m 떨어진 분구 동쪽에서도 깬돌로 만든 너비 약 1m정도의 면이 있고, 그 서쪽 1.5m 되는 곳에서 남북향으로 약 4m 너비로 분구 경사를 따라 돌을 깔았음. 돌을 깔은 면은 봉토 경사를 따라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면서 점차 높아져 가장 높은 곳은 0.8m가 됨. 돌을 깔아 만든 면의 대개 비교적 큰 할석으로 만들었고, 자갈은 극히 드묾.내부규모 및 특징 -묘실은 잘 가공된 거석으로 축조되었고, 甬道(연도), 左·右 耳室, 主室로 구성, 墓道는 용도와 서로 연결되어 있고, 묘도 입구는 돌을 쌓아 폐쇄. 폐쇄석은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자갈. 1m 정도 남아있음, 묘도 길이는 5.5m, 너비 3~4m, 가장 좁은 곳은 2.5m, 묘도 입구는 장방형이며, 양 벽은 장대석으로 쌓았고, 커다란 돌을 올려 천장을 만듬. 천장돌은 길이 3m, 두께 0.8~1m, 묘도 중간은 큰 돌로 폐쇄, 이미 훼손되어 아래쪽에 봉한 돌이 남아 있음. 봉한 돌의 너비는 묘도의 너비와 거의 같은 두께 0.48m. 중간 폐쇄는 묘도 입구로부터 2.5m, 주실 문에서 3.05m, 좌우 이실과 0.4m 떨어져 있음, 중간 폐쇄석 밖으로도 자갈과 백회를 부어 쌓음. -좌우 이실은 연도 양쪽에 자리하고 있고, 규모는 서로 같음. 너비 1.17m, 길이 1.6m, 높이 1.65m, 이실 바닥은 연도 바닥보다 0.15m 높음. -묘도와 연도의 길이 3.05m, 너비 1.4m, 묘도와 연도의 천정부는 3개의 비교적 커다란 장대석으로 쌓음. 주실쪽 천정석이 낮고, 이실이 있는 연도, 연도 입구 순으로 높아져서 계단을 이룸. -묘도 가장 바깥의 천정석(제1단 천정석)은 길이 2.5m, 중간으로부터 계산한 높이 0.9m, 너비 3m, 제2단 천정석 길이 1.65m이며, 드러난 계단부분이 0.2m, 제3단 천정석은 길이 1.05m. -연도와 주실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주실 중앙에 묘문이 있음, 묘문의 너비 1.27m, 높이 1.5m, 방향은 북쪽으로 15° 치우친 서향, 문턱(門楣)의 너비 0.2m, 높이 0.11m. 문틀(門框)은 直立條石으로 두께 0.2m, 문 밖 네 모서리에는 각 1개의 둥근 구멍이 있는데, 구멍은 직경 0.1m, 깊이 0.07m로 문확(門臼)으로 보여짐, 연도 중간에 2개의 돌문(扇石門)이 바닥에 눕혀져 있으며, 형식은 서로 같아 너비 0.68m, 길이 1.5m, 두께 0.05m. -주실 평면은 정방형으로 한 변의 길이 3.56m, 묘실 바닥에서 천정부까지의 높이 3.5m, 벽 높이 2.2m, 바닥에는 커다란 판석이 깔려 있고 묘실 좌우 양측에는 각 1개의 관대가 있음. 관대는 장방형이며 크기는 서로 같음. 길이 2.54m, 너비 1.22m, 두께 0.4m. 관대 사이의 거리는 0.6m. -관대는 가공한 장대석으로 만들었음, 두 관대의 동부 내측에는 각기 한 모서리가 없음, -벽은 매끄럽고 평평하며 표면에 백회를 한 겹 바르고, 그 위에 유채색 연화를 그림, 벽 높이 1.5m 지점에는 1열로 약 20군데에 걸쳐 못구멍이 뚫려 있음, 못구멍 간의 거리는 0.5m이고 일부 구멍 안에는 절단된 철제 못이 있음, 못구멍은 만장을 걸기 위한 못자리로 추정 -벽 상부에는 주홍색으로 들보를 그리고, 들보 가운데에는 둘씩 서로 만나는 용모양의 도안을 그림. -천장가구는 벽 위에는 3단의 평행고임을 한 후 1매의 돌을 덮어 총 4단의 평행고임 천장이 됨, 천장 고임부는 아래로부터 제1단은 길이 3.38m·높이 0.48m, 제2단은 길이 2.8m·높이 0.4m, 제3단은 길이 2.06m·높이 0.34m, 천정부 길이 1.36m·높이 0.26m. -고임 각 단에는 측면연화(側視蓮花)를 그림, 천장 막음돌에는 9송이의 평면연화(正視蓮花)를 그림. 현재는 이미 탈락되었음, 고임돌 밑면에는 流雲王字의 연속 기하문 도안을 그림, 하부 제1단의 고임돌 정면에는 연화 꽃봉오리의 줄기와 가지의 기하문 연속 도안.역사적 의미 고분 연대 장천 2호묘와의 비교 : 미창구 장군묘의 형상·구조·벽화내용·출토유물 등은 모두 길림 집안 장천 2호벽화묘와 유사함. 고분 구조는 모두 방형 평면의 4단 고임천정의 묘실과 墓道·左右 耳室·甬道로 이루어진 봉토석실묘이며, 황록색의 시유 화덕, 황색 시유 사이전연호, 장식문을 위주로 측면연화와 流雲王字 도안등으로 미루어 미창구 장군묘는 장천 2호분과 동일시기의 고분임. 『長川二號墓發掘紀要』에 의하면 장천2호분을 약 5세기로 비정하였음. 출토품 : 장군묘 출토품인 鎏金銅八瓣花形飾件, 銅帶扣 등은 비교적 늦은 고분에서 보이지 않으며, 3~4세기로 비정되는 羅通山城에서 이런 종류의 유물이 출토되었음. 고구려 벽화내용 : 이전복의 고구려 고분벽화의 시기구분 안에 따르면, 초기 벽화의 내용은 도안이 간단하고 묘주인이 생전의 각종 생활장면이 주요 제재가 되고 그 외 日月星辰, 奇獸飛禽·飛仙 등이 도안으로 사용되며 연대는 대체로 3세기중엽에서 4세기중엽에 해당. 중기 벽화의 내용은 묘주인의 생활과 더불어 불교내용과 사신도상이 출현하며 연대는 대체로 4세기중엽에서 5세기중엽에 해당. 말기 벽화는 벽면에 직접 그림을 그리며, 사신도가 주요 제재. 장군묘는 벽화내용 장식문 위주로 인물·산수의 화법이 보이지 않고 연화만 그려져 있지 않음. 연화문은 불교와 관련되나 아직 불교와 유관한 도안이 직접 그려져 있지 않아 불교가 처음 보급되는 단계로 보임. 문헌에는 소수림왕 2년(372)에 불교가 고구려에 전파되었다고 하므로, 장군묘는 중기에 조금 앞서는 시기로 비정하는 것이 합당할 것임. 고분형식 : 장군묘와 같은 봉토석실묘는 고구려시대 만기의 고분형식으로 대체로 4세기에 출현하여 5세기에 성행함. 특히 장군묘와 같은 구조는 무용총, 각저총, 집안 통구 산성하 332호묘 등이 대표적임. 무용총의 벽화에는 장천 2호묘와 미창구 장군묘의 측면연화와 유사한 도안이 있음. 이들 고분의 연대는 모두 4세기임. 이상과 같이 보고문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환인 미창구 장군묘의 시대는 4세기말에서 5세기초에 해당되지만, 장천 2호분은 구조와 벽화내용, 부장유물과 출토 기와들을 종합해 볼 때 4세기말이나 5세기초로 보기 어려운 점이 있음. 벽화의 의의 장식무늬 화법 : 장군묘는 耳室을 제외하고 주실 전체를 연화로 장식함. 연화는 측면연화로 이런 장식무늬 위주의 화법은 비교적 단조로우며 파악이 쉽지 않고, 일정 회화 수준에서 그리기 어렵지 않음. 그러나 전체 화면에서 본다면 배치가 합리적이고 구조가 정연하며 천장 고임부의 측면연화는 가로·세로, 좌·우 모두 열을 이룬 장식무늬위주의 화법은 지금까지 드물어서, 고구려민족의 회화예술사를 연구하는데 새로운 자료임. 불교적 세계관-연화문 : 장군묘 벽화의 주제인 연화문는 당시 고구려인의 불교 숭배와 관련됨. 불교가 고구려에 전파된 후 왕족 및 귀족를 거쳐 민간에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 특히 장군묘 묘실 안 전체를 연화로 장식한 것은 묘주인의 불교 신앙과 숭배를 반영한 것이며, 연화정토의 경계에 대한 갈구를 표현한 것임. 이는 불교가 당시 사회에서 성행했던 사실을 보여주며, 중국내 고구려 벽화고분 20여기 가운데에 연화가 표현된 것은 16기인데, 장군묘 이외에 집안 舞踊墓, 장천 1호묘, 오회분 4호묘 등이 있음. 묘실의 고임돌의 변형연화는 火焰狀과 같고 물결이 움직이는 듯한 형상이며, 바닥부 형상은 개구리 발과 같으며 둘씩 서로 붙어 있음. 이 도안은 묘주인 부부가 받침과 연꽃같이 떨어지지 않고 연화정토속에서 화생하여 극락세계에 함께 이르는 것을 상징함. 이런 연화 도안 역시 벽화에서 최초로 발견되어 벽화예술에 신자료를 제공함. 묘주의 신분과 중원문화의 영향-용무늬·流雲王字 도안 : 용무늬는 묘실 네 벽에는 들보가 그려져 있는데, 그 위의 용무늬를 장식은 이전의 벽화에서 볼 없는 최초의 예로, 고구려에서도 용의 형상과 그 의미에 대해 이미 이해하고 있던 것을 보여줌. 중원지구에서 용의 형상은 비교적 일찍 출현하는데 용은 富貴·吉祥·神權 등을 대표하며, 용의 형상은 더욱 복잡해지고, 제왕에게 독점되어 권력의 상징이 됨. 이 고분벽화의 용무늬는 고구려민족이 끊임없이 중원문화의 영향을 받았던 사실과 용을 부귀의 길상물로 여겼던 사실을 보여주며, 동시에 묘주인이 고구려왕과 일정한 관계를 가졌다고 짐작케 함, 流雲王字는 고임돌의 하부와 이실 안의 流雲王字 도안은 장천2호묘 벽화에 이미 발견되었음. 이 유운왕자 도안은 權貴를 상징하므로, 王字 역시 묘주인의 특수한 신분과 지위를 보여주는 사례로, 장군묘 봉토는 高大하여 묘주인의 권세와 특수한 신분을 보여줌. 죽음에 대한 인식-장고무늬 : 용무늬의 사이에 장고형 도안은 최초의 예로 가장 이른 시기의 장고 형상으로 오늘날 한국의 악기인 장고와 유사함. 장고 도안은 묘주가 연화가 가득한 정토속에서 화생하여 歌舞太平의 극락세계에 도달하는 것을 표현함. 또한 『北史』 고려전에 고구려인이 사후 장사지낼때 “鼓舞以作樂 以送之”하는 습속이 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장고는 고구려인이 죽음은 일종의 초탈이며 인간세상의 고해에서 벗어나 극락세계에 오르는 기쁜 일임을 상징함. 고분의 주인공 장군묘의 축조규모는 웅장하며, 구조는 빈틈없고, 제작은 정밀하고, 묘실벽은 모두 가공을 거친 대석으로 축조함. 두 관대 역시 온전한 대석을 가공하여 만들었음. 부장품은 적으나 대다수가 鎏金임. 이로 미루어 묘주는 적어도 왕족·귀족의 일원일 것임. 보고자는 『삼국지』 고구려전에 의하면, 206년 이이모와 발기의 왕위쟁탈과정에서 이이모가 왕위에 오르자 발기는 公孫康에 내투하였다가 돌아가 비류수 가에 머물었다는 기록과 결부시켜 묘주를 국내(집안)에서 졸본(환인)으로 옮겨간 발기세력과 유관하다고 추정함. 任傳興은 장군묘를 2차 遷葬한 주몽과 왕후의 합장묘로 보는 견해를 제시함, 寧會學은 주몽이 죽은 해와 고분이 축조된 시기 차이가 크고, 묘제가 맞지 않으며, 연화문 벽화는 불교수용이후 축조되었을 것이며, 고구려 매장습속에 ‘遷葬’이 없다는 점 등을 들어 비판하고, 장군묘의 주인공을 고국양왕 부부로 비정하고 함. 장군묘는 연화문벽화로 고분벽화의 내용에 따른 시기구분상 대략 기원 370~380년에 해당되며 이 시기는 소수림왕과 고국양왕대로, 고구려왕의 시호는 장지명을 따르고 있는데, 여러 왕들에게서 보이는 ‘故國’이란 시호 역시 ‘고국’이란 장지에 의해 붙여진 것임. 즉 ‘고국’은 고구려의 첫번째 수도를 지칭한 표현으로 오늘날 환인지역으로, 장군묘 건축시기 ‘고국’이란 장지명 시호를 가진 ‘고국양왕’이 장군묘의 묘주라고 주장. 수공제작술과 고분제작술의 발달 수공업제작술 : 장군묘에 부장된 鎏金銅飾件, 細如蠶絲의 金線, 대량의 철제공구 등은 고구려의 수공제작·冶鐵鍛造 기술이 일정 발전했던 것을 보여주며, 고구려시기의 경제상황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실물자료 제공함. 분구 축조술 : 봉토분구가 지금까지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고구려인이 건축방면에서 상당한 수준의 기술에 이르렀던 사실을 보여줌. 묘실 외부를 거석으로 보강하고 목탄·백회·진흙 등으로 깔은 방수시설, 황토 모래로 다져 지표면의 수분과 토사가 유실되지 않도록 하였으며, 봉토 동쪽과 북쪽의 부석시설은 묘실을 보강과 함께 종교와 예속 방면의 의미를 내포함. 매장습속 장군묘에서는 黃釉四耳展沿罐 3건이 출토된 것이 3이라는 홀수조합을 보여주는 사례가 고구려 장속의 하나인지는 좀 더 많은 발견을 기다려 볼 필요가 있음. 장군묘 남부의 봉토 중에 묘실 벽에 바짝 붙어서 大條石이 발견되었고, 하부에는 뒤집어진 靴形石 및 帶方孔의 판석이 확인됨. 이는 묘주인의 후손이 묘주인에게 비를 세워 공덕을 노래하기 위해 준비했으나 어떤 이유로 글자를 새기지 못하고 흙속에 묻었던 것으로 보임. 봉토 속에서 출토된 화형석는 고구려 장속의 일종으로, 장군묘 부근 5호묘의 墓道口 위에도 역시 화형석이 있으나 가공이 비교적 거칠음. 장군묘 주위의 소형묘들이 장군묘의 주위를 둘러싸고 분포한다는 점에서 장군묘의 배장묘로 보임. 배장묘는 장군묘와 동일시기 또는 장군묘보다 늦은 시기임. 배장묘는 刀形墓(6·7호)와 鏟形墓로 나뉨. 도형묘와 산형묘는 시기의 선후관계를 가진다고 봄. 소형묘는 두기씩 짝을 이루고 있으며(6·7호묘, 11·12호묘, 2·3호묘), 이것은 고구려 장속연구를 위한 새로운 자료를 제공함.자연환경 정북 방향 약 10㎞ 거리에 환인현성이, 미창구 장군묘에서 동북 16㎞ 거리에 오녀산 산성이 있고, 서북 13㎞ 거리의 육도하자향에는 하고성자성터, 그 북쪽에는 상고성자 고분군이 자리함, 서북방향으로 동선영촌과 강을 마주보고 있으며, 동선영에는 고구려 시기 적석총이 있음.유물정보 시유도기(釉陶器) 4건, 금동기류(銅器)類 15건(금동제 띠고리(鎏金銅帶扣) 1건, 금동제 운주(鎏金銅鈴形飾件) 2건, 금동제 관장식(鎏金銅八瓣花形飾件) 2건, 금동제 띠고리(鎏金銅扣飾件) 1건, 금동제 단추장식(鎏金銅泡飾件) 1건, 금동제 장식(鎏金銅錢形飾件) 1건, 금동제 장조형장식(鎏金銅長條形飾件) 1건, 금동제 장식(鎏金銅䤩尾 1건, 금동제 비녀(鎏金銅簪) 1건, 동제장식(桃形銅飾片) 1건, 동제 단추장식(銅泡飾件) 1건, 동제 못(銅釘) 2건), 금기류(金器類) 2건(금제 요엽(桃形金搖葉) 1건, 금제 단추장식(金泡形飾件) 1건), 철기류(鐵器類) 7건(철제 날(鐵鍘刀) 1건, 철제 삽(鐵鏟) 1건, 철제 송곳(鐵穿頭) 1건, 철제 등잔(鐵燈碗) 1건, 철제 못(方帽鐵釘) 1건, 철제 못(鐵扒釘) 1건), 화형석(靴形石) 1건, 목제안장편(木馬鞍橋殘塊) 1건, 회색토기 대상파수(灰陶橋狀耳) 1건 등.참고문헌 · 桓仁滿族自治縣文物志編纂委員會, 『桓仁滿族自治縣文物志』, 1990 · 武家昌·魏運亨, 「桓仁發現高句麗壁畵大墓」『中國文物報』 9, 1992 · 武家昌, 「遼寧桓仁高句麗壁畵墓」『中國文物報』 18, 1993 · 辛占山, 「桓仁米倉溝高句麗“將軍墓”」『東北亞文明的源流的考古學硏究』, 1993 · 劉伊丹, 「淺談桓仁米倉溝高句麗將軍墓壁畵」『遼海文物學刊』 副刊, 1994 · 武家昌, 「桓仁米倉溝將軍墓壁畵初探」『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李春琴·孫雪蓮, 「桓仁高句麗壁畵」『高句麗歷史與文化』, 吉林文史出版社, 2000 · 전호태,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 사계절출판사, 2000 · 武家昌·梁志龍·王俊輝, 「桓仁米倉溝高句麗壁畵墓」『遼寧考古文集』, 遼寧民族出版社, 2003 · 寧會學, 「桓仁米倉溝將軍墓墓主考」『博物館研究』 2004-3, 2004 · 寧會學, 「桓仁米倉溝將軍墓所葬何人」『東北史地』 2004-4, 2004

    • 미창구 2호분(米倉溝 2號墳)

    • 미창구 3호분(米倉溝 3號墳)

    • 미창구 5호분(米倉溝 5號墳)

    • 미창구 6호분(米倉溝 6號墳)

    • 미창구 7호분(米倉溝 7號墳)

    • 미창구 11호분(米倉溝 11號墳)

    • 미창구 12호분(米倉溝 12號墳)

    • 미창구 13호분(米倉溝 13號墳)

    • 마안산성(馬鞍山城)

    • 고검지산성(高儉地山城)

    • 성장립자산성(城墻砬子山城)

    • 와방구산성(瓦房溝山城)

    • 수허산성(愁虛山城)

    • 리스트여닫기 하고성자성(下古城子城) 출토지 요령성 환인현 육도하자향 하고성자촌에 위치, 마을 내부가 성터임(遼寧省 桓仁縣 六道河子鄉 下古城子村 位置, 村內部 城址)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78길림대학 역사과, 환인현문화국(吉林大學歷史科, 桓仁縣文化局)吉林大學 歷史科 魏存成·李春圃교수와 학생 100여명, 桓仁縣 文化局의 蘇長淸씨 등이 성곽실측1982요령성박물관 고고팀(遼寧省博物館考古隊)부분적인 발굴을 통해 유적규모 확인, 유물 출토.1983요령성박물관, 본계시박물관(遼寧省博物館, 本溪市博物館)遼寧省博物館 陳大爲, 本溪市博物館 직원 등이 성 내부에 2개의 트렌치 시굴을 통해 고구려시기 및 遼·金代의 토기편 확인1986왕면후, 이건재(王綿厚, 李建才)王綿厚가 李建才와 개인적으로 현황조사1987요령성박물관(遼寧省博物館)실측 및 발굴조사1998요령성문물고고연구소, 본계시박물관, 환인현문물관리소(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本溪市博物館, 桓仁縣文物管理所)遼寧省 文物考古硏究所 辛占山의 발굴주도와 부책임자 遼寧省 文物考古硏究所 李新全 등에 의해 실측, 서벽 북단의 성벽 발굴, 유물 채집.1950년대요령성박물관, 길림대학 역사과 등(遼寧省博物館, 吉林大學歷史科 等)여러 차례 유적 현황 조사구조특징 성벽은 黃土, 泥砂土 등을 사용하여 축조했고, 성벽 기초부는 토질을 매우 조밀하고 견고하게 다져졌으며, 단면이 노출된 곳에서 판축한 층위를 확인할 수 있는데, 십 수 층에 달하는 곳도 있음. 1998년 조사내용에 따르면 성은 전체적으로 토축, 장방형, 잔고 1-2m의 흙두둑 모양이고, 북벽은 길이 240m, 방향 110도의 직선 모양으로 동단의 바깥쪽 높이 1m 전후, 안쪽은 지면과 거의 수평하며 서쪽으로 갈수록 높아져 서북 모서리는 바깥쪽 높이 2m, 안쪽 높이 1m의 규모임. 서벽은 길이 170m, 직선 모양, 방향 26도, 북단의 外高는 1-2m, 남쪽으로 갈수록 낮아져 남단은 두둑 모양을 겨우 볼 수 있고, 외부는 해자로 너비 10m인데 현재 양어장으로 사용. 성벽을 축조할 때 채토를 했던 지역으로 추정됨, 남벽은 길이 205m, 직선 모양, 방향 297도, 삭토되어 거의 평평해졌고 일부만 두둑 형태가 남아 있음, 동벽은 북벽과 남벽을 연결하여 추론하면 길이 200m 전후로 추정됨. 성곽시설로 성문과 성내의 도로와 구덩이 등이 있는데 성문의 경우본래 동문과 남문 2개가 있었는데, 정문이었던 동문은 홍수로 인해 유실되었고 남문터도 현재 그다지 명확하지 않음. 마을 안에는 현재 비교적 넓은 길이 2개 있는데 서로 교차하며 원래 성의 내부의 도로였을 가능성이 있고, 서북쪽 모서리와 서남쪽 모서리에서 마을 주민들이 양어장으로 사용하는 곳으로 성벽축조용 흙을 채취하였던 구덩이로 추정되고 지표하 2尺지점에서 붉게 구워진 흙과 인면와당 등이 출되되었음.역사적 의미 하고성자성을 漢 玄菟郡의 郡縣 治所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아직 성 내부에서 漢代 유물이 출토된 적이 없다는 점에서 면밀한 검토가 요구되는 한편, 성 내부에서 출토된 석제 도끼 등 청동기시대 유물은 이곳에서 일찍부터 사람이 거주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음. 고구려 시기 유물이 다량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성 북쪽 1.8㎞에 위치한 上古城子村 고분군의 피장자를 이 성에 거주하던 주민으로 추정되기도 하며, 평지성에 별다른 방어시설이 없는 것으로 보아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은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임. 하고성자성에서 출토된 토기편과 철제 화살촉이 오녀산성 출토품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하고성자성을 평상시에 거주하던 평지성, 오녀산성을 비상시의 방어용산성으로 비정하는 설도 있음. 그렇지만 「광개토왕비」의 주몽은 ‘沸流谷 忽本 서쪽 산상에 성을 쌓고 建都하였다.’ 기사를 볼 때 즉 평상시의 거주성인 忽本은 산성의 동쪽에 위치했을 것인데, 하고성자성은 오녀산성의 동쪽이 아니라 서남쪽에 위치했음. 따라서 하고성자성을 오녀산성의 평지성으로 비정하기 위해서는 「광개토왕비」기록과 상충되는 측면을 해결할 필요가 있음.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근 하고성자고성을 紇升骨城에 비정하거나 유리왕 3년에 축조했다는 鶻川 離宮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제기되었지만 문헌자료에 따르면 흘승골성은 산성이 명확한 만큼 평지성인 하고성자성으로 비정하기는 어렵고, 또한 沸流水를 渾江으로 상정한다면 과연 하고성자고성 옆을 지나가는 渾江 본류를 비류수와 다른 鶻川으로 비정할 수 있을 지도 의문임. 아무튼 하고성자고성을 문헌자료에 나오는 성곽으로 비정하기는 어렵지만 환인분지에서 가장 중요한 평지성의 하나라는 사실은 명확하고 고구려 시기 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國內城 천도 이후에도 환인분지에서 가장 중요한 평지성의 하나로 기능했으며, 특히 渾江 연안에 위치했다는 점에서 渾江 水路 교통의 거점 역할을 수행했을 것으로 파악됨.자연환경 渾江 西岸의 넓은 충적평원에 자리잡고 있는데, 혼강이 북쪽에서 흘러와 성터 동쪽을 지나 남쪽으로 흘러가며, 고성 서쪽에는 작은 하천이 있는데 부근 臺西溝에서 흘러나와 고성 남쪽 1.2㎞ 지점에서 혼강으로 유입되고 있음. 이곳은 물이 풍부하고 교통이 편리하여 예로부터 이상적인 거주지였으며 오늘날에도 농업생산물이 풍부한 상태임.유물정보 토기, 철기, 석기 등참고문헌 · 蘇長淸, 「高句麗早期平原城-下古城子」『遼寧省本溪丹東地區考古學術討論論文集』, 1985 · 魏存成, 「高句麗初中期的都城」『北方文物』 1985-2, 1985 · 孫進己·馮永謙, 『東北歷史地理』 (二), 黑龍江人民出版社, 1988 · 桓仁滿族自治縣文物志編纂委員會, 『桓仁滿族自治縣文物志』, 1990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李殿福·孫玉良, 『高句麗都城考』 1990-1, 1990 · 李殿福·孫玉良(강인구·김영수 역), 『高句麗簡史』, 삼성출판사, 1990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北方史地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4 · 梁志龍, 「桓仁地區高句麗城址槪述」『博物館研究』 1992-1, 1992 · 王綿厚, 『秦漢東北史』, 遼寧人民出版社, 1994 · 田中俊明, 「高句麗の興起と玄菟郡」『朝鮮文化硏究』 1, 東京大學文學部朝鮮文化硏究室, 1994 · 魏存成, 「城址·建築址」『高句麗考古』, 吉林大學出版社, 1994 · 尹龍九, 「한국 고대의 ‘中國式 土城’에 대하여」『韓國古代史論叢』 8, 韓國古代社會硏究所, 1996 · 閔德植, 「三國時代 이전의 中國系 土城」『아시아문화』 13,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1997 · 車勇杰, 「高句麗 前期의 都城」『國史館論叢』 48, 국사편찬위원회, 1993 · 余昊奎, 「桓仁 下古城子城」『高句麗 城』 Ⅰ(鴨綠江 中上流篇), 國防軍史硏究所, 1998 · 宋福娟, 「桓仁 下古城子城」『高句麗歷史與文化』, 吉林文史出版社, 2000 ·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李新全, 「高句麗初期都城考」『遼寧考古文集』, 遼寧民族出版社, 2003 · 耿鐵華, 「高句麗紇升骨城新考」『高句麗考古硏究』, 吉林文史出版社, 2004 · 李新全, 『五女山城: 1996~1999, 2003年 桓仁五女山城調査發掘報告』, 文物出版社, 2004 · 조법종, 「고구려 초기도읍과 비류국성 연구」『백산학보』 77, 백산학회, 2007

    • 나합성 유적(喇哈城址)

    • 리스트여닫기 동고성(東古城) 출토지 요령성 환인현 괴마자진 동고성자촌 남쪽 1㎞ 거리의 밭에 위치(遼寧省 桓仁縣 拐麻子鎮 東古城子村 南側 1㎞ 距離 田位置).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0본계시, 환인현고고공작자(本溪市, 桓仁縣考古工作者)유적발견, 현황조사, 유적명칭(東古城子遺址) 부여함1987본계시, 환인현고고공작자(本溪市, 桓仁縣考古工作者)재조사구조특징 1944년 현지를 방문한 三上次男의 기술에 따르면, 마을 서쪽 구릉에 옛날 토성이 있다는 주민의 말을 듣고 조사했지만 토성의 흔적을 찾지 못하였다고 함. 현지 주민에 따르면 본래 ‘동고성자’와 ‘서고성자’로 불린 두 개 성이 있었다고 하는데, 두 성의 거리는 약 1.3㎞이며 그 사이로 작은 개울이 흐르고 최근 중국에서 여러 차례 발굴·조사하였지만 성벽의 흔적이나 유물을 발견하지는 못하였음. 1980년 동고성자촌 남쪽 1㎞ 거리의 河谷平地 한복판에 위치한 밭에서 건물지로 추정되는 유적 발견되었지만 성벽은 발견하지 못했고, 유적이 위치한 주변 지역의 지세는 비교적 평탄함, 1980년 조사 당시 조금 낮은 동·남·북 삼면은 논으로 경작되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일부는 灌漑 문제로 인해 다시 밭으로 전환했다고 함. 유적이 위치한 곳은 주변에 비해 0.5m 정도 높은 편인데, 1980년 당시 밭으로 경작되고 있었으며, 유적의 면적은 길이 50m, 너비 20m로 비교적 작은 편으로 지표상에서 마제석부, 암키와, 토기편 등을 채집하였는데, 암키와가 가장 많았음.역사적 의미 동고성은 소자하 유역에서 부이강-신개하를 거쳐 집안에 이르는 교통로상와 환인에서 통화로 나아가는 교통로가 만나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당시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추정되며, 부근에는 大荒溝古墳群 등 고구려 고분군도 분포되어 있고, 명나라 초기에는 建州衛 首領 李滿의 윤만부 소재지였음. 다만 평지성이고 별다른 방어시설이 없는 것으로 보아 군사적인 성격은 그렇게 강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임. 최근에는 고성자촌 일대를 고구려 건국 이전의 비류국 소재지로 보는 견해도 제기되었음자연환경 동고성자촌은 桓仁縣에서 동북쪽으로 30㎞ 떨어져 있는데, 桓仁-通化 도로상의 정류장이 있음. 拐麻子鎭에서 남쪽으로 3㎞ 떨어진 동고성자촌은 혼강 지류인 富爾江의 東岸 평지상에 위치. 동고성자촌 주변에는 부이강을 따라 남북방향으로 하곡평지가 비교적 넓게 펼쳐져 있고 동고성의 남쪽 약 500m 거리에는 부이강이 南流하고 있음.유물정보 기와 2점, 토기편 2점참고문헌 · 三上次男, 「東滿風土雜記」『高句麗と渤海』, 吉川弘文館, 1990 · 桓仁滿族自治縣文物志編纂委員會, 『桓仁滿族自治縣文物志』, 1990 · 王綿厚·李健才, 『東北古代交通』, 瀋陽出版社, 1990 · 梁志龍, 「桓仁地區高句麗城址槪述」『博物館研究』 1992-1, 1992 · 田中俊明, 「高句麗の興起と玄菟郡」『朝鮮文化硏究』 1, 東京大學文學部朝鮮文化硏究室, 1994 · 余昊奎, 「桓仁 東古城과 西古城」『高句麗 城』 Ⅰ(鴨綠江 中上流篇), 國防軍史硏究所, 1998 · 王從安·王俊輝·趙金付, 「沸流王故地在桓仁」『東北史地』 2006-2, 2006

    • 북구관애(北溝關隘)

    • 리스트여닫기 오녀산성(五女山城) 출토지 요령성 환인만족자치현 환인현성 동북 8.5㎞의 오녀산에 위치. 산성의 중심 지리좌표는 동경 125°23'44", 북위 41°14'36"임. (遼寧省 桓仁滿族自治縣 桓仁縣城 東北 8.5㎞ 五女山 位置. 山城中心座標 東京 125°23'44", 北緯 41°14'36".)연대 고구려 초기에 축조되어 遼, 金 때 까지 사용됨.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05조거룡장(鳥居龍藏)日人 鳥居龍藏이 환인 일대 답사 및 1910년대 일본인이 촬영한 사진 원판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다수 소장.1944삼상차남(三上次男)日人 三上次男이 五女山城 답사.1961환인현인민위원회(桓仁縣人民委員會)縣級 문물보호단위로 지정.1961본계시인민위원회(本溪市人民委員會)市級 문물보호단위로 지정1963요령성인민위원회(遼寧省人民委員會)省級 문물보호단위로 지정.1964중조연합고고대(中朝聯合考古隊)4일간 오녀산성 등 조사했고, 북한 김일성대학의 박시형 교수 등 9명, 중국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의 이전복 등 참여.1974요령성문화국문물조사조(遼寧省文化局文物調査組)오녀산성의 보호 상황 조사.1978길림대학 역사계(吉林大學歷史科)학생 100여 명이 위존성 교수의 인솔 아래 오녀산성과 하고성자고성 등을 3일간 조사.1986환인현문화국(桓仁縣文化局) ‘환인현 문물관리소 오녀산성 보호 책임제’ 발표.1986요령성문물고고연구소, 본계시, 환인현연합발굴대(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本溪市, 桓仁縣聯合發掘隊)1,000㎡ 발굴. 정상부 서부에서 건물지 발견1987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요령성박물관(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遼寧省博物館)吉林省 문물고고연구소 이건재, 遼寧省博物館 부관장 왕명후 등 개인적으로 고고조사 진행.1996요령성문물고고연구소, 본계시박물관, 환인현문물관리소(遼寧省文物古考硏究所, 本溪市博物館, 桓仁縣文物管理所)산성에 대한 전면조사 실시해서 Ⅰ·Ⅱ구역과 산 정상에 있는 2개의 초소 발굴했고 산 정상의 돌계단, 동북 골짜기의 1호-2호벽, 서문에 대한 부분 조사도 실시함발굴 총면적은 1700여㎡로 발굴 결과 주거지 15, 대형 건물지 1곳(1호), 재구덩이 11곳 발굴함.1997요령성문물고고연구소, 본계시박물관, 환인현문물관리소(遼寧省文物古考硏究所, 本溪市博物館, 桓仁縣文物管理所)點將臺 서쪽의 Ⅲ구역 중점 발굴의 일환으로 5×5m 트렌치 67개(일련번호 97 HWT 70-T136)설치 및 Ⅱ구역에서 5×5m 트렌치 10개 발굴(일련번호 97HW T56-T65) 또 2호 대형건물지 기초조사, 동문-남문 발굴, 산성 측량함, 발굴 면적은 총 1,638㎡로 발굴 결과 주거지 22곳, 대형 건물지 1곳(2호) 발굴함.1998요령성문물고고연구소, 본계시박물관, 환인현문물관리소(遼寧省文物古考硏究所, 本溪市博物館, 桓仁縣文物管理所)서문 동쪽의 Ⅳ구역 중점 발굴의 일환으로 트렌치 15개(일련번호 98HWT401-T415)설치해서 사방 45㎡ 발굴했고, 옥황관(옥황묘, 옥황각) 부근에서 14×1m, 24×1m, 6×1m 등 3개의 도랑[溝] 발굴(일련번호 98HWG1-G3)한 한편 동벽, 남벽의 기단부와 성벽 윗면에 대한 발굴도 진행, 발굴 면적은 1,015㎡로 발굴결과 주거지 12곳 추가로 확인함.2002왕면후, 신점산, 이신전(王綿厚, 辛占山, 李新全)王綿厚가 辛占山, 李新全 등과 함께 개인적으로 조사하여 산성 중부에서 7개 초석 건물지와 다량의 유물 발견.1999 및 2003요령성문물고고연구소, 본계시박물관, 심양시문물고고연구소, 금주시문물고고연구소, 환인현문물관리소(遼寧省文物古考硏究所, 本溪市博物館, 沈陽市文物古考硏究所, 錦州市文物古考硏究所, 桓仁縣文物管理所)-1999년 : 동벽에 대한 추가 측량, 무너진 성벽에 대한 발굴과 해부작업-2003년 : 총면적 1,300㎡, Ⅱ구역 트렌치 5×5㎡ 3개(일련번호2003HWT66-T68), Ⅳ구역 트렌치 12개(일련번호 2003HWT416-T427), Ⅴ구역 트렌치 9개(일련번호 2003HWT501-509), 사방 3㎡, Ⅲ구역 추가 조사해서 3호 대형건물지 발굴, 2호 대형건물지 추가 발굴, 산 아래 초소 유적 발굴, 저수지 발굴, 서문과 바깥 도로 발굴구조특징 성벽은 산 정상부 및 그 동부 산기슭에 자리하고, 산 정상부의 사방은 높이 100m가 넘는 수직 절벽이 둘러싸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낭떠러지와 산봉우리가 연이어져 있음. 북부 산등성이의 바깥쪽도 수직절벽으로 이런 험준한 자연 山勢를 이용하여 성벽을 쌓았음. 깎아지른 절벽을 천연성벽으로 삼은 서·남·북면에는 인공성벽을 축조하지 않았고 특히 서면과 남면은 높이 100-200m의 깎아지른 수직 절벽임. 인공성벽 길이 565m로 전체 성벽의 12%에 불과하며 지세가 험준하지 않은 동쪽과 동남쪽 산비탈과 골짜기 입구에 축조. 인공성벽은 모두 돌로 축조한 석축성벽인데 벽체의 외벽은 보통 장대석[大石條]을 기단으로 하고 그 위에 쐐기형 돌(契形石)을 맞물리도록 층을 교차해 쌓아 마무리하였는데 위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들여쌓았음. 안채움부는 북꼴돌로 교차해 첩첩이 눌러 쌓고 이와 병행해 외벽의 쐐기형 돌(契形石)을 서로 어긋나게 교차해 서로 맞물린 모양을 띠고 빈틈은 잔돌을 채워 넣어 평평하고 견고하게 했으며 내벽의 벽면은 불규칙한 돌덩이(石條) 혹은 판석[石板]을 눌러 맞물리도록 첩첩이 쌓았음 동벽 제5구간, 산 위 동북 골짜기 1호 성벽의 외벽은 보통 산기슭 아래부터 쌓기 시작하였고, 내벽은 산기슭 위에서부터 쌓기 시작했음. 외벽은 일정한 높이까지 쌓고 내벽의 기단부와 높이가 비슷해지면 내외벽을 동시에 쌓기 시작했는데 기단부는 산세에 따라 축성했고 이로 인해 밖이 높고 안이 낮은 體城[벽체]이 만들어짐. 경사가 가파른 산기슭의 경우에는 內托式으로 외벽을 쌓고, 외벽과 산기슭 사이에 북꼴돌을 쌓아 채워 넣었음. 이로 인해 외벽만 있고 내벽은 없는 외면쌓기가 되고, 상부에는 일반적으로 키가 낮은 성가퀴를 쌓았음. 동벽 제2, 3구간의 외벽과 서문 북측의 석벽은 외벽의 경우 일반적으로 장대석을 1-5단 쌓아 올린 다음, 쐐기형 돌을 꽉 맞물리도록 평평하게 쌓았음. 이러한 축성법은 서문 북측 석벽에서도 발견되는데, 다만 기단석 크기는 약간 작음. 내벽의 경우 대부분 판석과 괴석으로 쌓아 올렸고 벽면은 가지런하지만 횡으로 가지런하지는 않음. 성벽 하단에는 보통 흙을 북돋아 보호하였고, 동벽 제5-6구간, 남단 제4구간과 같이 내벽을 흙으로 반쯤 덮은 경우도 있음. 또한 서문 북단 석벽과, 남단 제4구간과 같이 내벽과 성벽 윗부분까지 흙이나 돌을 덮은 경우도 있음. 안채움부[墻芯]는 북꼴돌을 정교한 규칙에 따라 서로 맞물리도록 쌓았는데, 외벽의 벽면을 쐐기형 돌로 1단 쌓은 다음, 그 안쪽 안채움부에 쐐기형돌과 맞물리도록 북꼴돌을 쌓아 올렸음. 쐐기형 돌의 머리가 바깥을 향하고 뾰족한 꼬리는 안을 향하도록 쌓았기 때문에 내부는 자연히 삼각형의 빈틈이 생기게 됨. 북꼴돌을 그 사이에 끼워서 맞물리도록 하여 빈틈이 없이 꽉 들어맞도록 쌓았음. 쐐기형 돌을 따라 꽉 맞물리게 평평하게 쌓아 상층 꼬리 부분은 다시 아래층 북꼴돌의 뾰족한 가장자리 위를 누르게 되고 북꼴돌의 뾰족한 부분은 아래층 쐐기형 돌의 꼬리부분을 누르게 됨. 이렇게 쌓아올리기를 반복하여 층층이 교대로 눌러 쌓으면 벽체의 견고성이 증가하고, 바깥으로 향하려는 장력(張力)은 감소하게 됨. 이런 종류의 성벽 축조방식은, 일정한 역학 원리를 갖고 있음. 이런 축조방식에 부합되도록 하기 위해 성돌 모양을 쐐기형 돌과 북꼴돌로 가공한 것임. 성벽 윗부분의 바깥쪽에는 대부분 성가퀴[女墻}를 설치하였고, 성가퀴 기단을 따라서 안쪽에 네모난 돌 구멍[石洞]을 쌓았음. 성벽은 주지했듯 인공성벽과 천연성벽 두 종류로 구분가능한데 천연성벽은 가파른 절벽 혹은 돌출한 산등성이를 성벽으로 삼는 것으로 인공작업이 가해지지 않았음. 형태에 따라 가파른 절벽 성벽(峭壁墻) 및 산등성이 벽(山背墻) 등 2종류로 구분됨. 인공 성벽은 인공으로 수축한 성벽으로 오녀산성의 성벽은 모두 석축이며 일부 무너진 성벽과 꼭대기는 흙으로 되어 있고 산세가 완만한 남쪽의 동단과 동쪽에만 축조했음. 성벽 규모 : 천연성벽 4,189m, 인공성벽 565m로 총 길이 4,754m. 남벽은 정상부 동남 모서리에서 산 아래의 남문 동쪽 구간까지로 천연성벽 2구간과 인공성벽 2구간으로 구성되며 평면은 대체로 굽은 자 모양(折尺形)으로 길이는 424m임. 동벽은 남문 동쪽에서 북부 절벽까지 구간으로 천연성벽 6구간, 인공성벽 6구간으로 구성되며 인공성벽은 주로 가파른 산기슭과 골짜기 입구에 축조됐고, 천연성벽은 모두 수직 낭떠러지임, 전체 길이 1,847m. 북벽은 전체 길이 475m, 모두 천연성벽으로 안으로 휜 활모양이며 동벽 북단에서 시작해 절벽을 따라 서북방향으로 꺾어짐. 산등성이 바깥은 가파르고 안은 완만하며. 바깥쪽 50-100m 지점에 서북과 동남 방향으로 향하는 절벽이 하나 있음. 서벽은 정상부 북단에서 서남 모서리 구간까지로 서문 부근의 인공성벽을 제외하면 모두 천연성벽이며 불규칙한 鈍角形임, 전체길이 2,008m.역사적 의미 오녀산은 桓仁盆地 일대에서 가장 험준하며 웅장한 산으로 산 정상부에 올라서면 혼강 연안의 환인분지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오며, 멀리 서쪽으로 환인 마안산성, 동쪽으로 집안 패왕조산성까지 한 눈에 조망할 수 있고, 수륙 교통을 제어하는 요충지일 뿐 아니라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진 난공불락의 천혜의 요새지에 위치하고 있음, 더욱이 오녀산은 환인분지 어디에서 보더라도 웅장하고 신비스러운 느낌을 주는데, 이로 인해 성스러운 이미지도 생성되었을 것으로 보임. 오녀산성은 일찍이 國內城으로 비정되기도 했지만(『東史綱目』, 鳥居龍藏), 1980년대 이래 고구려 초기 도성이었던 紇升骨城(王承禮)이나 卒本城(魏存成, 李殿福 등)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음. 특히 중국학자들은 1996년 이래 五女山城을 집중 발굴한 다음, 고구려 초기 도성인 紇升骨城으로 비정하고 있음. 이들에 따르면 오녀산성의 제3기 문화층은 고구려 건국 초기에 해당하는데, 이 문화층에서 발견된 1호 대형건물지는 궁전 유적일 가능성이 높으며, 고구려 초기에 오녀산에 도성을 세운 것과 직접 관련된다고 하고, 더욱이 제3기 문화층은 기존에 발굴된 고구려 초기 산성 가운데 오직 오녀산성에서만 보이는데, 이것도 오녀산성이 고구려 초기 도성인 증거라고 함. 또한 현존하는 고구려 초기 산성 가운데 오녀산성의 성벽 구조는 상대적으로 시원적인 모습을 갖고 있는데, 성가퀴 안쪽의 돌구멍은 초기 산성에서 일반적으로 확인되는 것이며, 기단부를 장대석으로 쌓은 축성법이나 내벽의 벽면을 괴석과 판석으로 쌓은 축성법 등은 쐐기형 성돌만으로 내외벽을 쌓은 중후기의 축성법보다 앞선 초기적 형태라고 추정됨. 고구려 초기에 해당하는 제3기층 아래의 제2기 문화층은 청동기시대 말기로서 전국시대 후기에 해당하는데, 고구려 건국 이전부터 오녀산에 인간이 활동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제4기 문화층은 국내성 천도 이후의 중기 유적인데, 다른 산성에 비해 성곽시설이 매우 많은 것으로 보아 이는 국내성 천도 이후에도 오녀산성의 역할이 여전히 컸음을 말해주는 것임. 오녀산 주위에도 고구려 초기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데, 하고성자성은 서남쪽 10여㎞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평지토성으로 고구려 건국 초기 평지도성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되고 그밖에 혼강 연안에는 고분군이 많이 분포해 있는데, 특히 高麗墓子 고분군은 오녀산성과 渾江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음, 현재 대다수는 환인댐에 수몰되었지만, 최근 발굴 자료에 따르면 M201의 잔(雙耳陶杯)은 초기 철기시대의 특징을 가지고 있고, M201과 M19의 호(陶罐)는 漢代의 좁은목 항아리와 거의 일치하며, M8에서 출토된 호(陶壺)도 오녀산성 제3기층 토기와 비슷한 양식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력묘자 고분군은 고구려 초기 오녀산 일대에 모여 살던 사람들과 깊이 연관된 것으로 보임. 더욱이 『광개토왕릉비』에 따르면 시조 주몽이 북부여에서 남하한 다음, “沸流谷 忽本 서쪽 城山上에 도성을 세웠다”고 하며, 이규보의 『東明王篇』에 인용된 『舊三國史』에도 고구려 초기 왕도가 산 위에 세워졌음을 기록하고 있고, 『三國史記』고구려본기에도 이와 유사한 기록이 있음으로 봐서 상기와 같은 제반 사실로 보아 오녀산성은 고구려 초기 도성인 흘승골성으로 비정할 수 있다고 파악됨. 다만 오녀산성을 발굴한 이후에도 일부 중국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근거로 오녀산성을 흘승골성으로 비정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는데, 먼저 오녀산성은 지세가 험준해 교통이 불편하므로 도성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보고 있음, 오녀산 정상은 해발 806m 이상으로 차를 타고 오르기도 힘든데, 2000년 전 초목이 무성한 산을 오르는 것은 더욱 힘들었을 것이고, 『三國史記』 고구려본기에 고구려가 紇升骨城을 수도로 한 것은 주몽왕과 유리명왕으로 이때는 부근의 소국, 부락을 정복하던 시기인데, 오녀산 정상에 도읍했다면, 오부의 수장과 국가의 전반적인 계획이나 책략을 상의하기 힘들었음 것임. 또 오녀산성은 물자보급이 힘든 고립무원 지역으로 전략상으로도 수도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은 곳이고 정상부는 공간이 협소하여 도성으로 적합하지 않음, 정상부 평탄지는 남북길이 약 500m, 동서 너비 100m이지만, 저수지, 절벽 등을 활동 공간은 매우 좁고, 발견된 건물지와 기타 설치물에서 볼 때 산위에서 생활하는 사람은 100여명을 넘길 수 없어 오녀산성을 紇升骨城으로 비정하기는 힘들다는 것임[耿鐵華]. 그렇지만 『광개토왕릉비』나 『東明王篇』에 따르면 고구려 초기 도성으로 알려진 紇升骨城이 산 위에 위치한 것은 명확한데, 초기 도성인 졸본지역을 지금의 환인일대로 상정한다면, 紇升骨城은 이 지역에서 가장 웅장하면서 신비로운 느낌까지 주는 오녀산성으로 비정하는 것이 가장 타당함. 초기도성으로서의 오녀산성의 성격과 관련하여 주몽의 정착·건도지역이 『三國史記』에는 ‘수상’ 곧 沸流水 연안의 충적평원으로 기재되어있고, 광개토왕비에는 ‘산상’ 곧 忽本(卒本) 서쪽 산 위로 각각 다르게 서술된 사실이 주목됨, 「東明王篇」에 따르면, 주몽은 沸流水유역에 정착하여 松讓國의 항복을 받는 등 일정한 시간이 흐른 다음, 鶻嶺에 성곽을 축조했다고 하는데 이로 본다면, ‘水上’은 최초의 정착지역, ‘산상’은 맹주로 등장한 이후의 건도지역으로 구분할 수도 있음. 그렇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해발 820m인 오녀산은 군사방어거점으로는 천혜의 요새지이지만, 일상적으로 거주하기 위한 도성으로는 주변 배후지와 지나치게 격리되어 있어서 『三國史記』의 ‘수상’을 최초의 정착지역, 광개토왕비의 ‘산상’을 맹주로 등장한 이후의 도성으로 구분하기는 적합하지 않음. 환인일대는 수도의 입지조건인 생산활동과 군사방어에 적합한 자연지형을 동시에 갖추고 있는데 ‘수상’과 ‘산상’은 이러한 입지조건을 기능에 따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水上’은 생산활동에 적합한 지형, ‘山上’은 군사요충지 나아가 聖所로서의 면모를 각기 반영한다고 생각됨, 즉 도성이 기능에 따라 분리되어 평상시에는 충적평원 곧 ‘水上’에 거주하다가, 비상시에는 ‘山上’으로 대피하여 방어거점으로 삼았고 의례를 거행할 때에도 山上을 聖所로 활용했던 것으로 추정됨. 광개토왕비 서두에서 ‘忽本’은 건도하였다는 ‘산상’이나 주몽이 승천하였다는 ‘東罡’의 위치를 나타내는 기준점으로 특히 ‘忽’이라는 고구려어는 ‘성’을 뜻하므로 忽本은 ‘성곽이 축조된 지역’을 지칭함, 주몽의 정착지역인 忽本 곧 卒本에 성곽이 축조되었다면, 이는 ‘산상’의 성곽에 대비되는 평상시의 중심지였을 것이기에 卒本지역에는 ‘수상’과 ‘산상’으로 상징되는 평지성과 산성의 도성방어체계가 구축되어 있었음, 따라서 五女山城은 고구려 초기 도성의 군사방어 및 의례용 성곽으로 활용되었다고 생각되고, 평상시에 거주하는 도성은 아니었지만, 초기 도성의 일부를 구성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음. 한편 산상 성곽의 동쪽에 위치했다는 평상시 도성인 卒本은 오녀산 동쪽의 환인댐 수몰지구 일대로 추정하며, 오녀산성의 평지성 곧 卒本城을 환인 下古城으로 비정하기도 하지만, 하고성은 오녀산성의 동쪽이 아닌 서남쪽에 위치하였으므로 광개토왕비의 서술과 상충됨, 현재까지 알려진 환인댐 수몰지구의 평지성으로는 환인 喇哈城址가 유일하지만, 卒本城으로 비정할 만한 명확한 근거는 없기에 卒本城의 위치는 보다 면밀한 고고조사를 바탕으로 신중하게 비정할 필요가 있음.[余昊奎]. 최근에는 卒本城을 富爾江이 渾江과 합류하는 나합성 일대나 나합성으로 비정한 다음, 오녀산성을 유리왕 3년에 천도했다는 國內 尉那巖城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제기되어 주목되며(盧泰敦, 王從安·紀飛, Mark E. Byington) 또 고구려 후기 哥勿城으로 비정하기도 함(梁志龍., 張正岩·王平魯).자연환경 환인은 산이 많은 지역이며 산봉우리가 밀집해 있고,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으며 오녀산은 老嶺山脈의 지류에 속함. 五女山 아래를 지나는 渾江은 吉林省 江源縣 老嶺山脈에서 발원하여 通化와 桓仁을 거쳐 寬甸에서 압록강에 유입되며, 전체 길이 445㎞로서 환인 지역의 流路는 150㎞로 환인현 관내의 富爾江, 雅河, 六道河는 渾江에서 규모가 가장 큰 3대 지류이며 혼강 본류와 지류 연안에는 너비 500m 전후의 하곡평지가 기다랗게 펼쳐져 있음, 하곡평지 주변에는 고구려인들이 거주했던 흔적인 초기의 적석묘 고분군이 많이 분포해 있음. 오녀산은 해발 806.32(王綿厚 820, 耿鐵華 806, 梁志龍 804)m로서 가파르게 수직으로 솟아있는 험준한 형세로 정상부에는 평평한 평탄지가 넓게 펼쳐져 있는데, 이곳에 서면 桓仁縣城 시가지와 환인댐의 푸른 물결이 한눈에 들어오고 북쪽으로 산들이 연이어져 있으며, 서남쪽으로 환인분지가 넓게 펼쳐져 있음. 원래 渾江은 오녀산 동쪽에서 南流하다가 오녀산 남쪽에서 서쪽으로 流路를 꺾어 桓仁縣城을 감싸고 돌다가 다시 방향을 바꾸어 南流했는데, 현재 산 아래의 渾江은 댐공사로 수몰되어 유유히 굽이쳐 흐르던 모습을 잃어버렸음. 지역내의 渾江 양안과 산간 골짜기에는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띠 모양의 평원이 분포해 있으며 桓仁縣城 및 그 주위 지역에는 渾江, 六道河, 哈達河를 따라 충적평지가 많이 발달해 있고 이러한 충적평지는 여러 산으로 둘러싸여 분지를 형성하고 있음.유물정보 토기, 철기, 석기, 청동기류 등참고문헌 · 鳥居龍藏, 「丸都城及び國內城の位置について」『史學雜誌』 25-7, 1914 · 주영헌, 『중국 동북지방의 고구려 및 발해유적답사 보고』, 사회과학원, 1966 · 劉永智, 「訪高句麗早期遺址五女山城」『朝鮮史通訊』 1981-3, 1981 · 魏存成, 「高句麗初中期的都城」『北方文物』 1985-3, 1985 · 郭俊武, 「紇升骨城初探」『遼寧省本溪丹東地區考古學術討論會文集』, 1985 · 孫進己·馮永謙, 『東北歷史地理』 (二), 黑龍江人民出版社, 1988 · 桓仁滿族自治縣文物志編纂委員會, 『桓仁滿族自治縣文物志』, 1990 · 李殿福·孫玉良, 『高句麗都城考』 1990-1, 1990 · 三上次男, 「東滿風土雜記」『高句麗と渤海』, 吉川弘文館, 1990 · 李殿福·孫玉良(강인구·김영수 역), 『高句麗簡史』, 삼성출판사, 1990 · 李健才, 「高句麗的都城和疆域」『中國邊疆史地研究報告』 1991-1·2, 1991 · 梁志龍, 「桓仁地區高句麗城址槪述」『博物館研究』 1992-1, 1992 · 西川宏, 「中國における高句麗考古學の成果と課題」『靑丘學術論集』 2, 1992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王禹浪·王宏北, 「中國遼寧省桓仁縣五女山高句麗山城址」『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1994 · 魏存成, 「城址·建築址」『高句麗考古』, 吉林大學出版社, 1994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北方史地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4 · 辛占山, 「遼寧境內高句麗城址的考察」『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王綿厚, 「鴨綠江右岸高句麗山城硏究」『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梁志龍, 「可勿考辨」『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王承禮, 「吉林遼寧的高句麗遺跡」『考古與文物』 1984-6, 1984 · 張正岩·王平魯, 「新城道及新城道上的諸城考」『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再探」『北方文物』 1995-3, 1995 · 余昊奎, 「桓仁 五女山城」『高句麗 城』 Ⅰ, 國防軍史硏究所, 1998 · 周向永, 「“紇升骨”詞義發徵」『博物館研究』 1998-1, 1998 · 노태돈, 「고구려의 기원과 국내성 천도」『한반도와 중국 동북 3성의 역사문화』, 서울대 출판부, 1999 ·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李新全, 「高句麗初期都城考」『遼寧考古文集』, 遼寧民族出版社, 2003 · Mark E·Byington, 「Problems Concerning the First Relocation of the Koguryo Capital」『고구려의 역사와 문화유산』, 2004 · 耿鐵華, 「高句麗紇升骨城新考」『高句麗考古硏究』, 吉林文史出版社, 2004 · 李新全, 『五女山城: 1996~1999, 2003年 桓仁五女山城調査發掘報告』, 文物出版社, 2004 · 黃柏棟 主编, 『五女山志』, 2004 · 余昊奎, 「高句麗 國內 遷都의 시기와 배경」『한국고대사연구』 38, 2005 · 임효재, 「중국 환인현 오녀산 유적의 신석기 유물에 대하여-주변 지역과 한반도와의 관련성」『북방사논총』 3, 동북아역사재단, 2005 · 양시은, 「환인 오녀산성 출토 고구려 토기의 양상과 성격」『북방사논총』 3, 동북아역사재단, 2005

    • 환인 망강루 고분군(桓仁 望江樓 古墳群)

    • 리스트여닫기 환인 상고성자 고분군(桓仁 上古城子 古墳群) 출토지환인현 환인진 상고성자촌 북쪽 2단 대지 위연대무덤형식으로 볼 때 3~4세기로 추정됨.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2006년 9월 ~ 11월요령성문물고고연구소· 고구려 후속 연구프로젝트를 위해 환인현 상고성자촌의 상고성자 고분군에 대해 부분적인 발굴을 진행함. 보호구역 안에는 22기의 고분(HSM1-HSM22)이 있는데 HSM1-HSM4를 발굴 조사함.구조특징22기 고분을 확인.자연환경서쪽은 凉水泉子 골짜기이고, 서·서북·서남쪽은 큰 산이 둘러싸고 있으며, 동·북쪽은 작은 하천이 둘러싸고 있음.유물정보토기참고문헌· 梁振晶, 2008, 「桓仁縣上古城子魏晉時期墓群」『中國考古學年鑒』2007· 梁志龍·李新全, 2009, 「本溪地區高句麗考古三十年」『高句麗與東北民族硏究』

    • 리스트여닫기 환인 대전자서 고분군(桓仁 大甸子西 古墳群) 출토지환인진 대전자촌 劉家大院屯 서북쪽.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2003년 5월 ~ 7월요령성문물고고연구소· “東水西調”프로젝트를 위해 발굴을 실시하여 고분 6기를 발견하고 HDM1~HDM6으로 편호함.구조특징6기가 출토. M1~5는 봉토석실묘, M6는 적석묘임.자연환경고분군 북·서쪽으로 육도하의 지류인 牛毛河가 흐르고, 우모하 건너편은 대전자 北山이며, 남쪽은 前山임. 해당지역은 산골짜기 지형으로 북·서·남쪽은 산이고, 동쪽에는 개활한 산 입구가 있음.참고문헌· 梁振晶, 2005, 「桓仁縣大甸子靑銅時代及高句麗時期墓地」『中國考古學年鑒』2004· 國家文物局 主編, 2009, 『中國文物地圖集』遼寧分冊(上·下), 西安地圖

    • 리스트여닫기 환인 풍가보자 고분군(桓仁 馮家堡子 古墳群) 출토지환인현 華萊鎭 馮家堡子村 第5村民組 서면의 河岸 제1단 대지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2006년 9월 ~ 11월요령성문물고고연구소· 李新全이 발굴을 이끌었는데 자료는 미발표함. 총 10기의 고분을 발굴함. 李新全, 2008, 「高句麗早期遺存及其起源硏究」吉林大學 博士學位論文 참조. 華玉冰(2008 「中國東北地區石棚硏究」, 吉林大學 博士學位論文)이 이신전의 글을 재인용하면서 9기로 했으나 오류로 보임. 석개묘 2기(2區 M7, M8), 적석석개묘 4기(1區에 위치, 비교적 M5가 전형임), 적석석광묘 1기(M4), 방단석실적석묘 1기, 방단석광적석묘 1기 등임.2007년 10월 ~ 11월요령성문물고고연구소· 총 6기의 고분이 정리되었으며, 그 가운데 2기가 積石石室墓이고 그 나머지 4기는 大石蓋積石壙室墓임. 출토유물은 비교적 적은데 복원 가능한 토기가 5건, 석기 1건 등임.구조특징3개 구역으로 나눌 수 있음.Ⅰ구역은 마을 동쪽 밭에 위치하며 10기가 현존(M2, M7, M8). Ⅱ구역은 마을 서쪽 논에 위치하며 15기가 현존(M1, M3, M4, M5, M6, M9, M10, M11, M12, M13). Ⅲ구역은 마을 서북 약 1.5km의 산언덕에 위치(M14). 세 구역 이외에도 10여기의 고분이 분포. M3, M4, M5, M6, M7, M8, M10, M11, M12, M13 등은 무단적석석개석광묘임. 구순이 둥그스럼하고 중첩된 호(圓疊脣陶罐), 돌곤봉머리(石棍棒頭) 등이 출토되었는데, 토기로 볼 때 고구려 건국 전의 주요 고분 유형으로 볼 수 있음. M2는 방단적석석광묘, M14는 무단적석석실묘, M1과 M9는 방단적석석실묘로 고구려 건국 이후의 고분 유형임.역사적 의미M3은 적석석개석광묘, M4는 적석석광묘로 고분형식은 다르지만, 동일한 묘구에 분포하고 긴밀하게 배열되어 있는데, 두 고분형식 모두 고구려 초기 고분의 기원과 유관함을 보여줌.M1과 M2의 석실 구조는 석붕(지석묘)과 유사한데, 적석석실묘와 요동지역의 석붕묘의 계승성, 고구려 중기 대형적석묘 왕릉과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줌.자연환경남쪽 약 100m 지점에 작은 하천이 있음.참고문헌· 李新全, 2008, 「高句麗早期遺存及其起源硏究」, 吉林大學 博士學位論文· 華玉冰, 2008, 「中國東北地區石棚硏究」, 吉林大學 博士學位論文· 樊聖英, 2009, 「桓仁縣馮家堡子高句麗墓群」『中國考古學年鑒』2008· 李新全, 2009, 「遼東地區積石墓的演變」『東北史地』2009-1· 梁志龍·李新全, 2009, 「本溪地區高句麗考古三十年」『高句麗與東北民族硏究』·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編著, 2014, 「馮家堡子墓地」『遼海記憶-遼寧考古六十年重要發現(1954-2014)』, 遼寧人民出版社

    • 환인 용두산 고분(桓仁 龍頭山 古墳)

    • 환인 사도하 고분군(桓仁 四道河 古墳群)

    • 환인 아하 고분군(桓仁 雅河 古墳群)

    • 리스트여닫기 환인 왕의구 고분군(桓仁 王義溝 古墳群) 출토지환인현 北甸子鄕 北甸子村 盛家街村民組 서남 1km 지점의 작은 산 위.연대산두자 1호묘와 인근의 왕의구 1·2호묘에서 출토된 유물을 볼때 고구려 초기(기원전 1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2007년 발굴조사· 王義溝 유적을 발굴하면서 부근의 山頭子 1호묘를 비롯해 王義溝 1·2호묘를 동시에 발굴조사를 진행함.자연환경고분군이 위치한 지점은 속칭 南大臺子로 큰 산에서 흘러내린 산줄기 아래임. 서남-동북 방향으로 점차 완만하게 내려옴. 고분군 동북부에 충적골짜기(沖積溝)가 인접해 있고, 서쪽과 북쪽은 절벽인데, 절벽 아래로 부이강이 흐름.참고문헌· 梁志龍·李新全, 2009, 「本溪地區高句麗考古三十年」『高句麗與東北民族硏究』· 樊聖英, 2009, 「桓仁縣王義溝鐵器時代遺址」『中國考古學年鑒』2008

    • 환인 산두자 1호묘(桓仁 山頭子 1號墓)

    • 리스트여닫기 환인 고검지산성(桓仁 高儉地山城) 출토지환인만족자치현 화래진 고검지촌연대고구려 초기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50년대 말· 1950년대 말 문화재 조사(文物普査)때 고검지산성을 발견하였으며, 이후 여러 차례에 걸친 간단한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초보적인 측량을 진행했을 뿐 발굴은 아직 진행되지 못하였음.1980년· 1980년 시급문물보호단위로 공포됨.1990년 4월· 1990년 4월 환인현 문물지를 편찬했을 때 고검지산성에 대하여 초보적인 측량을 진행하였음.1994년 5월· 1994년 5월 본계시 박물관과 환인현 문관소에서 관련 인원을 조직하여 산성에 대한 측량을 진행하였으며 아울러 성내에서 비교적 정밀한 조사 작업이 이루어졌음.2002년· 2002년 성급문물보호단위로 공포됨. 누차에 걸친 조사에서 얻은 결과를 종합적으로 간단히 보고함.2008년 9 ~ 10월2009년 7 ~ 8월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본계시박물관(本溪市博物館), 환인현문물국(桓仁縣文物局)· ‘山城保護北城墻維修加固工程’에 맞춰 위의 세 기관이 연합하여 산성 북벽의 일부 구간에 대하여 최초로 발굴을 진행하였는데, 산성 북벽 서쪽 구간의 북문지, 성벽 내측의 성벽 오르는 길(坡道) 두 곳, 치(馬面) 유적 등을 발견하였음.구조특징산성은 평면으로는 타원형이며, 동서가 넓고 남북면은 좁으며, 성 내부의 지세는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다. 성이 위치한 주봉은 해발 831m이며,계곡을 감싸고 3개의 봉우리에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석축의 성벽이 축조된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보존 상황은 양호한 편에 속한다.고검자산성의 성벽은 둘레가 길이 1,373m에 이르며, 자연지형을 이용해 축조하였다. 특이한 것은, 자연암반이 성벽의 구실을 할 수 있는 구역에서도 암석 바깥에 인공성벽을 덧대어 쌓았다는 점이다. 즉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성벽을 인공적으로 축조한 것이다.성벽은 북벽과 동벽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성가퀴[女墻]와 기둥구멍[柱洞]의 흔적도 비교적 잘 남아 있다. 다만, 개활지로 이어지는 남쪽 산비탈의 성벽은 많이 무너진 상태이다.문지(門址)는 모두 4곳으로, 남벽에 한 곳, 북벽에 두 곳, 동벽에 한 곳이 있다. 특히 남문은 성의 서쪽 모서리에 위치한 계곡에 자리 잡고 있는데, 성의 가장 낮은 부분에 위치하면서 주요 관문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역사적 의미산성은 요녕성 본계시 환인현 화래진 고검지촌에 있다. 본래 고검지촌은 목우자진(木盂子鎭)에 속하였으나, 다른 두 진과 합병하여 화래진에 속하게 되었다. 산성이 위치한 고검지산은 주봉이 해발 831m가 되는 높은 산이다. 산성이 위치한 지역은 본계현과 신빈현, 환인현이 접하는 지역이다.지리적인 위치를 고려할 때, 고검지 산성은 요동에서 고구려의 첫 수도인 환인(桓仁)으로 들어가는 교통로의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방어의 거점으로 이용된 시설이라는 것이 명확하다. 학자에 따라서는 고구려의 창암성으로 추정하는 연구도 있으나, 출토유물과 전형적인 고구려 산성의 축조 방법등을 종합해 볼 때, 고구려 초기 산성임에는 명확하다. 또 성내에서 발견된 대량의 주거지는 성내에 많은 사람들이 거주와 활동을 했다는 증거가 되며, 고검지 산성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는 단서이다.성벽의 축조방법에 있어서는, 인공적으로 가공한 쐐기형돌, 그 연결 부분에 사용한 긴 북꼴돌 등을 일반적으로 사용하여서 고구려 축성의 기본을 파악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 받고 있다.자연환경산성이 위치한 지역은 환인현 현중심에서 서북쪽 약 42km 지점이며, 약 7km 거리에 목우자촌(원 木盂子鎭), 남쪽으로 2.2km거리에 고검지촌이 있고, 서쪽으로 1.5km 거리에 두도구문둔(頭道溝門屯)이 있다. 산성은 해발 831m에 달하는 높은 산에 위치한다. 성 바깥으로는 동서 양측으로 2갈래의 협곡이 펼쳐지는데, 서쪽은 이도구이며, 동쪽은 언덕을 지나 삼도구가 속한다. 북쪽으로는 높은 산들이 펼쳐져 있고, 남쪽에는 완만한 개활지가 있다. 서쪽으로 2.5km 거리에는 속칭 홍석립자, 또는 태고립자라고 불리는 산봉우리가 솟아 있는데, 환인현과 신빈현의 분계점지점이다. 이 봉우리의 서쪽으로는 태자하가 흐르는데, 태자하의 발원지 중에 하나이다.유물정보성내에서 토기, 각종 철기 등이 출토되었다. 대부분 손으로 빚어 제작하였으며, 소성온도는 비교적 낮다. 토기 바탕흙은 주로 모래가 혼입된 토기이며, 토기 색깔은 회갈색이 다수를 차지하며 일부는 홍갈색이다.참고문헌· 梁志龍·王俊輝, 2011, 「遼宁省桓仁县高俭地高句丽山城调査」『東北史地』2011-1· 遼寧省 文物考古硏究所, 2012, 「2008-2009年遼寧桓仁縣高儉地高句麗山城發掘簡報」『東北史地』2012-3· 정원철, 2012, 「2008-2009年 遼寧 桓仁縣 高儉地高句麗山城 發掘簡報」(번역문) 『백산학보』9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