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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나가보자성(羅家堡子城)

  • 구분
    유적
  • 시대
    고구려
  • 위치
  • 유물번호
    S000925
  • 위치(출토지)
    遼寧省 新賓縣 永陵镇 羅家堡子村
  • 지역
    무순(撫順市)
  • 유형
    성곽>산성
  • 형태사항
    동벽길이 37m, 남벽길이 42m, 서벽길이 35m, 북벽길이 40m라는 기록(傳波, 1994; 張德玉·張正巖·李榮發·單鈴, 1996; 여호규, 1999)과 둘레가 160m라는 기록(王禹浪·王宏北, 2007)이 있음.  , 1점 
출토지
요녕성 신빈현 영릉진 나가보자촌(遼寧省 新賓縣 永陵镇 羅家堡子村)
연대
후금
조사내용
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
1990년대 초반무순시사회과학원(전파 등)
(撫順市社會科學院(傳波 等))
혁도아랍성을 중심으로 그 주위의 이전창평지성(二砖廠平地城), 온가요서산성(温家窑西山城), 아화락성(阿伙洛城), 영릉후보동산성(永陵後堡东山城), 두도립자성(头道砬子城), 위가보성(魏家堡城), 역마도반성(驛马道班城), 주자산성(珠子山城), 달자영성(达子营城), 두도보성(头道堡城), 삼도보동산성(三道堡東山城), 점장대성(点将臺城), 그리고 나가보성(罗家堡城) 등 10여개의 후금시기의 성(漢, 고구려시기에 축조되어 후금시기에 계속 사용된 성 포함)을 조사함. 이들 성들은 혁도아랍성(赫圖阿拉城)에서 가까우면 2.5㎞, 멀어도 10㎞ 안에 위치하고 있음. 당시 나가보자성이 위치한 대지 남쪽 구릉 아래에 장동유(張同有)라는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그 노인과 대화를 나눈 후에 발견함. 장동유의 말에 의하면, 그가 나가보자로 이주했을 때 동네를 ‘동고성자(東古城子)’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함. 그는 여러 그루의 느릅나무가 있던 남쪽 구릉 아래에 집을 지었는데, 그의 집 뒤에는 아직도 오래된 느릅나무 1그루가 있었음. 그의 말에 의하면, 당시 큰 느릅나무 뒤(북면)의 성벽은 현재보다 1척 정도 높았다고 함. 성 동북모서리에는 봉분이 비교적 높은 여러 개의 무덤이 있었는데, 밭으로 일구기 위해 봉분을 평평하게 하면서 평지가 되었다고 함. 조사 당시에는 성 북쪽 정 가운데에 1기의 무덤만이 남아 있었음.
구조특징
지역주민들은 성을 ‘동고성자(東古城子)’라고도 부르고 있음. 성의 동·북·서 모두 경작지이고, 과수원도 있음. 성의 평면은 정방형이고, 보존상태는 비교적 양호함. 성벽에 대해 토석으로 쌓았다는 기록(傳波, 1994)과 하부는 돌을 쌓았고 상부는 흙을 다져서 쌓았다는 기록(여호규, 1999; 王禹浪·王宏北, 2007)이 있음. 성 동남모서리에서는 지역주민들이 흙을 취하기 위해 파내면서 2m 정도 돌로 쌓은 성벽이 명확하게 드러남.
성벽은 내측 높이가 0.2m임. 외측 높이는 1m라는 기록(傳波, 1994; 張德玉·張正巖·李榮發·單鈴, 1996; 여호규, 1999)과 1.5m라는 기록(王禹浪·王宏北, 2007)이 있음. 동남모서리에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1.7m임.
성벽 일부 구간은 평평해졌음.
역사적 의미
산성은 고구려시기에 축조되어 후금 여진들이 계속해서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됨(여호규, 1999; 王禹浪·王宏北, 2007). 한편 고구려유물이 발견되지 않았고, 성의 입지선택과 성벽구조 모두 고구려와 다르기 때문에 고구려산성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도 있음(肖景全·鄭辰, 2007).
영릉진 분지에 위치한 영릉진고성·비아랍성, 이들의 북쪽에 위치한 나가보산성·두도립자산성·삼도보동산성, 서쪽에 위치한 온가요산성·아화락촌산성 등의 위치관계와 규모를 고려하면 나가보산성은 대체로 영릉진고성·비아랍성의 소형 위성으로 추정됨. 특히 초창북구 연안이 오래전부터 신빈~청원 분수령을 넘나드는 통로로 사용되었고, 현재 영릉진~청원현 지방도로가 개설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청원현 방면에서 영릉진 분지로 진공하는 적군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 추정됨. 그리고 북쪽의 두도립자산성과는 상호보완관계로 추정됨(여호규, 1999).
위치비정에 관한 견해는 다음과 같음. 傳波(1994)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나가보자성은 육조성(六祖城) 가운데 복만(福滿)의 3자 색장아(三子 索長阿)가 살았던 하락갈선성(河洛噶善城)으로 추정됨. 육조(六祖)는 청태조 노이합적(努尔哈赤)의 증조 복만에게서 태어난 여섯 아들인데, “여섯 아들이 여섯 곳에 각각 성지(城址)를 세워 육왕(六王)을 칭하였고, 곧 육조(六祖)이다(『청태조무황제실록(靑太祖武皇帝實錄)』권1, 2項)”라고 함. 육조가 살았던 여섯 개의 성채 모두 소자하 상류의 영릉일대에 위치하고 있음. 하락갈선성에 대해서 일부 학자들은 영릉후보동산성(永陵後堡东山城; 永陵에서 북쪽으로 0.5㎞)으로 추정하기도 함. 다만 영릉후보동산성은 산성형태가 명확하지 않고, 지세도 우월하지 않으며, 청말(淸末) 사당에 남아 있는 벽돌과 기와를 제외한 어떠한 유물도 발견되지 않았음. 또한 락갈선(洛噶善)은 만주어인데, 한어(漢語)로 “산골짜기에 있는 마을요새(山溝里村塞)”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영릉후보동산성과 부합되지 않음. 골짜기(溝)를 따라 가면 두 개의 성을 찾을 수가 있는데, 두도립자성과 나가보자성임. 이 가운데 나가보자성이 하락갈선성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됨.
張德玉·張正巖·李榮發·單鈴(1996)은 하락갈선성을 나가보자성으로 추정함. 3조 색장아(三祖 索长阿)가 살았던 하락갈선성채(河洛噶善城寨)는 『武皇帝实錄』에서는 하락강선(河洛刚善)으로 기록되어 있음. 하락(河洛) 즉 화락(伙洛)은 한어(汉語)로 ‘산골짜기(山沟)’를 의미하고, 갈선(噶善)은 한어(汉語)로 ‘촌(村)’ 혹은 ‘촌장(村庄)’을 의미함. 즉 만주어인 하락갈선(河洛噶善)은 한어(漢語)로 ‘산골짜기 안의 촌장(村庄)’을 의미함. 그러므로 이 성은 두 산 사이의 좁은 골짜기에서 찾을 수 있는 평지성이고, 산언덕(山岗)에서는 찾을 수 없음. 高桥匡四郎이 영릉 계운산(永陵 启运山) 지맥의 산 언덕(山岗; 현재 县 농업기계수리제조공장 뒷산 열사능원(烈士陵园))에서 찾았는데, 그 곳은 하락갈선에 담긴 의미와 부합되지 않고, 고성도 남아 있지 않음. 『满洲实錄』에 있는 육조성시의도(六祖城示意图)를 보면 하락갈선성은 영릉진 북쪽의 초창북구 안에서 찾을 수 있음. 高桥匡四郎은 “영릉가 서쪽 1㎞, 소자하의 북안에 청태조 선조의 무덤(永陵)이 있는데, 능침은 계운산(启运山)의 동남기슭에 있다. 산기슭을 따라 북쪽으로 0.5㎞ 가면, 계운산 지맥의 작은 산 언덕(小山岗)이 있는데, 여기가 산채지(山寨址)이다”라고 하고, 그 산채지가 “하락갈선성채(河洛噶善城寒)”라고 기록하고 있음(高橋匡四郞, 1941). 이 작은 산 언덕은 영릉후보촌, 초창북구에 위치하고 있음. 그 곳은 아직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아 관목과 긴 풀들로 가득하고, 지면에는 벽돌과 기와만이 남아 있음. 오래된 이야기에 의하면 이곳에 청대에 축조된 사당이 있었고, 성채가 없다고 함.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이곳은 청대 영릉 퇴발방(堆拨房)유적지로 볼 수 있음. 유선민(刘选民)은 가합하(嘉哈河) 인근 지합실마하곡지(地哈实玛河谷地)로 추정하였는데, 이 또한 정확하지 않음. 稻叶巖吉이 추정한 흥경(兴京) 서남 연통산(烟筒山) 서쪽 나지(罗地)도 근거가 없음. 이들은 만주어를 이해하지 못했고 실지조사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확하게 찾지 못했음. 여러 차례에 걸친 실지조사와 『만주실록』에 있는 대조성도(六祖城图)를 종합해보면, 하락갈선성은 영릉 북쪽 초창북구의 나가보자고성지라고 볼 수 있음. 나가보자고성지의 위치는 『만주실록』의 륙조성도에 보이는 하락갈선성의 위치와 부합하고, 후금의 성 축조기술의 특징을 갖추고 있으며, 명대 청화도자편이 출토되고 있음. 또한 나가보자성은 영릉과는 3㎞, 혁도아랍성과는 8㎞ 떨어져 있으며, 영릉에서 두도립자촌에 이르는 골짜기에 위치한다는 점에서도 하락갈선성으로 볼 수 있음.
張德玉·張正巖·李榮發·單鈴(1996)은 후금대 육조성 가운데 하나라고 함. 육조성은 혁도아랍성을 중심으로 그 성을 지키기 위해 축조한 건주좌위(建州左衛)의 위성성임. 5개의 성은 혁도아랍성으로 통하는 골짜기의 요충지를 통제하고 있는데, 험준함을 이용하여 쌓았고 수렵 및 농경생활을 영위하는데도 유리함. 또한 각 지역을 차지하면서 성들끼리 서로 호응하면서 지원함으로써 방어력을 더욱 강화하였음. 주위의 그 나머지 10여개의 후금 성은 ‘六城十二处’의 ‘十二处’가 됨.
자연환경
나가보자성은 신빈현 영릉진 북쪽 초창북구(草苍北溝) 나가보자촌 북쪽(뒤쪽)에 인접한 동쪽 산(東山) 구릉의 대지에 위치함. 초창북구는 전체 길이가 약 14㎞로, 영릉진에서 비교적 큰 남북방향의 산골짜기(山溝)임. 그 북쪽에는 신빈과 청원 두 현의 경계산인 용강산(龍崗山)이 있음. 나가보자는 이 골짜기천(溝川)의 중간부분 구저 평지(溝底 平地)에 위치함. 영릉진이 기점인 초창북구 연안의 도로를 통해 신성~청원 분수령을 넘어 청원현(淸原縣)으로 들어갈 수 있음.
북쪽으로 1㎞ 떨어진 지점에 박가보자(朴家堡子)가 있음. 남쪽으로 1.5㎞ 떨어진 지점에 두도립자촌(頭道砬子村)이 있는데, 이곳에는 두도립자산성(頭道砬子山城)이 있음(傳波와 王禹浪·王宏北은 남쪽이라 기록함(傳波, 1994; 王禹浪·王宏北, 2007)).
남쪽으로 3㎞ 떨어진 지점에 영릉진과 소자하가 있음. 소자하 남안에는 영릉진고성, 동남쪽으로는 비아랍성이 있음. 영릉진 일대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분지지만, 북쪽의 초창하(草蒼河)·협하구(夾河溝)와 남쪽의 이도하(二道河)가 소자하(蘇子河)와 합류하면서 비교적 넓은 충적평지를 형성하고 있음. 동남쪽으로 8㎞ 떨어진 지점에 혁도아랍성(赫圖阿拉城)이 있음.
초창하가 북남으로 흘러 소자하로 유입됨. 성 동쪽으로는 산구릉이 연결되어 있음. 구릉지에는 산이 있고 남북방향임.
유물정보
청화도자편(青花瓷片) 1점
참고문헌
· 高橋匡四郞, 「蘇子河流域に於ける高句麗と後女眞の遺跡」『建國大學硏究院硏究期報』 2, 建國大學硏究院, 1941
· 傳波, 「六祖城」『撫順地區清前遺跡考察紀實』, 遼寧人民出版社, 1994
· 張德玉·張张巖·李榮發·單鈴, 「“寧古塔”與六祖城考辨」『遼海文物學刊』 1996-1, 1996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2007
· 肖景全·鄭辰, 「撫順地區高句麗考古的回顧」『東北史地』 2007-2,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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