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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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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스트여닫기 고이산성; 북관산성(高爾山城; 北關山城) 출토지 요녕성 무순시(遼寧省 撫順市)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33도변삼삼(무순일본도서관장)(渡邊三三(撫順日本圖書館長))1933년 5월 21일. 1933년 5월 5일 학생들과 함께 무순성 북부 고이산의 탑까지 올랐을 때, 근처에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군이 팠다는 참호가 있다는 말을 듣고 참호를 둘러보던 중, 보통의 참호와 구조가 다르다는 느끼고, 5월 21일 조사를 시행하면서 발견함.1938지내굉(동경제국대학 교수), 도변삼삼(무순일본도서관장)(池內宏(東京帝國大學教授), 渡邊三三(撫順日本圖書館長))산성을 돌아보고, 고구려의 신성(新城)이라는 견해를 제시함.1940산상차남, 전촌황일 등(山上次男, 田村晃一 等)동성 동문지 양측에서 돌로 쌓은 성벽을 발견하는 등 두 차례 조사와 발굴을 진행함.발표된 내용. 三上次男·田村晃一, 1990 『北關山城』, 日本中央公論美術出版社1940지내굉(동경제국대학 교수), 소산부사부(동양도연구소장), 재등국태랑(좌우보간행회), 판본만칠(판본사진연구소), 삼상차남(동경제국대학문학부강사), 삼택종설(만주국립박물관주사), 재등무일, 이문신(이상 만주국립박물관원), 도변삼삼(무순박물관장)(池內宏(東京帝國大學教授), 小山冨士夫(東洋陶磁研究所員), 齋藤菊太郎(座右寶刊行会), 坂本万七(坂本寫眞研究所), 三上次男(東京帝國大學文學部講師), 三宅宗悅(満洲國立博物館主事), 齋藤武一, 李文信(以上 満洲國立博物館員), 渡邊三三(撫順博物館長))일만문화협회(日満文化協会)를 중심으로 유적조사를 진행함. 지내굉을 중심으로 산성 내부의 총괄적인 조사를 비롯해, 중앙대지거주지, 동문지, 남문지, 동쪽 돌출대지에 위치한 탑지, 서문지 일부분에 대해 발굴을 진행함.1944지내굉(동경제국대학 교수), 삼상차남(동경제국대학문학부 강사), 이등우신, 삼지조사랑(이상 일만문화협회), 도변삼삼(무순박물관장)(池內宏(東京帝國大學教授), 三上次男(東京帝國大學文學部講師), 伊藤祐信, 三枝朝四郎(以上 日満文化協会), 渡辺三三(撫順博物館長))1944년 5월 19일~27일에 걸쳐 조사를 진행함. 1940년 조사때 미진했던 부분을 중심으로 조사를 진행함. 서문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하였고, 산성에 대한 전면적인 실측을 실시함.1984왕우랑 등(王禹浪)1984년 4월에 조사함.1984진대위(요녕성박물관)(陳大爲(遼寧省博物館))1984년 9월 조사를 진행함. 시굴작업을 진행함.1985이전복 등(李殿福 等)1985년 6월. 시굴작업을 진행함.1994왕우랑 등(王禹浪 等)1984년 8월에 조사함. 1984년 답사 때와 비교하여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고이산성에는 공원이 세워졌음.1956, 1963무순시문화국문물공작대(撫順市文化局文物工作隊)1956년과 1963년 두 차례 조사를 진행하고, 조사기록을 발표함. 발굴과정에서 철기로는 보습 2점, 리경(犁鏡) 2점, 괭이 2점, 호미 1점, 도끼 1점, 수레바퀴굴대축(車轄) 7점, 등자 1점, 모(矛) 2점, 화살촉 1점, 솥 2점, 못 2점이 출토되었고, 건축자재로는 벽돌 1점, 와당 3점, 수키와 2점, 암키와 3점이 출토됨.발표된 내용. 撫順市文物工作隊, 1964 「遼寧撫順高爾山古城祉調査簡報」『考古』1964-121983~1985요녕성박물관, 무순시박물관(遙寧省博物館, 撫順市博物館)서가국(徐家國), 손력(孫力), 정진(鄭辰), 장파(張波), 왕유신(王維臣), 원공문(袁功文), 장덕생(張德生), 퉁달(佟達), 장정신(張正言), 진도(陳弢), 진대위(陳大爲), 초경전(肖景全), 하근화(何謹華) 등이 조사에 참여함.시성건부문(市城建部門)은 무순 고이산공원을 건설하기 위해, 문물주관부문(文物主管部門)의 비준 하에, 요녕성박물관과 무순시박물관과 함께 3년 동안 고이산성에 대해 대규모 발굴을 진행함. 1983년 6월 24일~10일간 진행된 조사에서는 산성 바깥 남면 산등성이에 트렌치를 파서 지표 아래의 분포 정황을 살펴보고자 하였고, 산성 동문지 북벽을 발굴하여 성벽단면구조를 살펴보고자 하였으며, 남문 서북과 구릉지 평대(平臺) 등 800㎡를 발굴하면서 건축지를 발견함. 아울러 돌길 및 배수구 등도 발견함. 1984년에는 동성 서쪽 가장자리 근처 1,250㎡를 발굴함. 동, 서 두 성의 경계지점 동쪽의 구릉지에서 고구려시기 건축지를 발견함. 1985년에는 동성의 동·서·북 세 면의 구릉에 트렌치를 파서 조사하면서 온돌을 갖춘 방형건물지 등을 발견함. 남문 서쪽근처에 트렌치를 파서 요대(遼代) 문화층을 발견함. 성벽의 방향과 그 구조에 대해 측량과 해부를 진행하면서 모두 6개의 발굴구역(發掘區)을 설정함. 3,000㎡를 발굴하면서, 많은 건축유적지를 발견하였음. 출토된 유물은 매우 풍부한데, 많은 생활용구·생산공구·철병기·건축자재·화폐 등을 수습함. 그리고 100여점에 가까운 토기, 500점에 가까운 철기도 수습함. 토기로는 옹(瓮), 발(钵), 분(盆), 반(盤), 호(壺), 호(罐), 완(碗), 가락바퀴(纺輪), 기와, 토기뚜껑 등이 출토됨. 철기로는 화살촉, 帶銙, 鼻, 도자(削), 수레바퀴굴대축(車輨), 찰갑편, 刀格, 마름쇠(蒺藜), 모(矛), 腰刀, 刀, 창고달이(鐏) 등이 출토됨.발표된 내용. 徐家國·孫力, 1987 「遼寧撫順高爾山城發掘簡報」『遼海文物學刊』1987-2구조특징 고이산성(高爾山城)은 과거에는 무순현성(撫順縣城) 북방에 있는 북관촌(北關村)에서 이름을 따서 북관산성(北関山城)이라고 명명되었음(三上次男, 1990). 그러다가 전쟁 이후 고이산성이라고 부르고 있음. 고이산성이 위치한 고이산은 지면보다 70~140m 솟아 있음. 동·서·북 세면은 산등성이이고, 가운데는 북쪽의 장군봉(將軍峰)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등성이로 인해 동·서 두 개의 깊은 산골짜기가 형성됨. 이러한 산등성이를 따라 성벽을 축조함. 고이산성의 평면은 불규칙형임. 고이산성은 동성·서성·남위성(南衛城)·북위성(北衛城)과 동남 모서리에 있는 3개의 작은 환형 소성(環形 小城)으로 구성됨(王禹浪·王宏北은 동남쪽에 있는 2개의 작은 환성(環城)은 동성의 위성(衛城), 동성 서북에 돌출되어 있는 작은 성은 후위성(後衛城)이라고 기록함(王禹浪·王宏北, 2007)). 원칙적으로 자연산맥의 방향을 따르면서 전쟁의 방어적 수요를 따라 구축함. 이렇게 고이산성은 유기적 연합체로, 한 번에 축조되어 완성된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증축하였음. 이 가운데 동성이 가장 먼저 축조되고, 이후에 서성과 다른 위성이 축조된 것으로 보임(徐家國·孫力, 1987). 고이산성 안팎으로 크고 높은 나무들을 볼 수 없음. 또한 바깥을 두른 성벽(外周墻)은 바깥은 험하고 안으로는 완만한 특징을 갖추고 있음. 당시 성의 방어를 유리하게 하고, 넓은 시야를 확보하게 위해 성 밖의 구릉에 풀과 나무를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됨(徐家國·孫力, 1987). 무순에서 철령으로 통하는 도로가 남북으로 동성과 남위성을 통과함. 즉 남위성의 남문, 동성의 남문, 동성 북문의 동측을 통과함. 고이산성 서쪽 봉우리에는 요·금시기의 탑이 있는데, 팔각형의 실심밀첨식(實心密檐式)임. 탑신(塔身)에는 불감(佛龕)과 조식(雕飾)이 있음. 1933년에는 탑 부근에서 요 대안(遼 大安) 4년(1088)의 타나니석경당(陀羅尼石經幢)이 발견되었음. 동쪽 산 위에도 허물어진 요대 탑지가 남아 있음. 탑 아래의 관음각(觀音閣)은 명대 건축물인데, 청대에 여러 차례 중수되었음. 정전(正殿), 선당(禪堂), 종루(鐘樓) 등이 남아 있음. 동성(東城)은 무순~철령도로가 관통하고 있는 골짜기를 감싼 산등성이를 따라 축조함. 고이산성의 주성(主城)임. 성의 지세는 동·서·북 세 면이 높고 남면이 낮은 포곡식산성임. 평면은 타원형임. 1983년 조사 때 동성 동벽 서쪽 구릉에서 약간 남쪽으로 치우친 지점(Ⅱ區)을 발굴함. 이 지점은 위·아래 두 개의 대지(臺地)가 동서로 배열되어 있음. 윗면의 큰 대지는 동성 내에 유일하게 평탄하고 개활한 큰 평대(平臺)로, 길이는 60m, 너비는 40m임. 큰 대지의 서부에는 동·서성의 경계 성벽이 있음. 이 대지에는 6개의 트렌치를 팠는데, 각 트렌치는 너비 2㎝, 길이 25㎝~30㎝임. 이곳의 토층은 매우 얕은데, 20~30㎝ 정도로 파토(破土)하면 기암(基巖)임. 시간이 지나 흙이 유실되고 경작지가 되면서, 대지 위에 조성되었던 유적들은 거의 다 파괴되었음. 일부 트렌치 안에서는 요대의 기와편이 많이 발견되었음. 이 대지에서는 고구려의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당시 이 구역은 연병장(演兵場)으로 추정됨. 요대에 이르러서는 비교적 큰 건축지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됨. 아래쪽 대지는 동쪽을 향해 약간 돌출되면서 마주하고 있는 동성의 동문을 제어할 수 있고, 북쪽으로 북문을 바라볼 수 있는 등 동성 내 주요 전략요지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음. 이 구역에 5×5m의 피트 60개를 시굴하면서 드러난 면적은 총 1,500㎡에 달함. 그 가운데 일부 피트에서는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음. Ⅱ구역 FG83T30피트에 드러난 층위는 기본적으로 4층으로 나눌 수 있음. 제1층은 두께가 약 30㎝인 경토층(耕土層)임. 제2층은 황갈사질토(黄褐砂質土)로, 작은 사석(砂石)이 혼입됨. 주요유적과 유물이 포함된 층임. 두께는 약 40~48㎝임. 제3층은 함잡물(含雜物)이 비교적 적고, 성질이 순수함. 대부분 직경 약 1~3㎝의 작은 깬돌임. 제4층은 짙은 갈색 토층임. 토질은 견실함. 약간 층차감(層次感)을 형성함. 두께는 약 15~25㎝임. 아주 적은 유물이 출토됨. 그 아래로는 생토층(生土層)임. 1983년~1985년 조사 때, 동·서 두 성의 경계지점 동쪽의 3층 구릉지(Ⅳ區)를 시굴함. 남북방향으로 5×5m의 피트를 1줄에 10개씩 3줄을 팠음. 이곳은 지세가 비교적 높아 토층이 매우 얕은데, 일부 유적은 현 지표에 노출되기도 하였음. 그 아래는 생토층 혹은 기반암(基巖)임. 가장 위쪽에 위치한 대지의 동·서 경계 성벽 퇴적토를 걷어냈을 때, 자연석 퇴적지를 발견함. 중간 대지는 후대의 파괴로 인해 유적과 유물이 많지 않음. 북쪽 근처에 홍색 승문기와편이 퇴적되어 있지만, 그 하부에는 유적이 보이지 않고 생활용품도 출토되지 않았음. 건물지가 있음. 가장 아랫면에 있는 대지는 경사도가 다른 두 개의 대지보다 약간 큼. 기반암을 뚫고 기둥구멍을 만든 건축지가 확인되었음. 1983년~1985년 조사 때, 동성 동문 안 북부 대지(Ⅵ區)에 시굴이 이루어졌는데, 출토된 유적과 유물은 동·서성 경계지점 동쪽대지의 상황과 같음. 비교적 밀집된 주요생활구역으로 추정됨. 동성 서쪽 구릉(Ⅱ區)은 동성 안의 세 문을 통제할 수 있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임. 이로 볼 때, 이 곳에 조성된 건물지들은 당시 성 전체의 방어와 관련된 시설물로 볼 수 있음. 출토 유물을 봐도 생활용품은 적은 반면에, 군사활동과 관계가 있는 철제 무기 등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음. 이 또한 이 구역의 성격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음. 고구려시기의 유적이 주로 동성 내에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주요 활동장소라고 할 수 있음(徐家國·孫力, 1987). 서성은 서쪽 골짜기를 감싼 산등성이를 따라 축조함. 성의 지세는 동·서·북 세 면이 높고 남면이 낮은 포곡식임. 서성 안에서 금·원시기의 석관묘와 명·청시기의 고분이 발견됨. 서성에서는 한대 유물은 발견되었지만, 고구려유물은 발견되지 않았음. 서성의 성벽은 동성과 비교해볼 때, 규모 및 구축의 정교함에서 모두 뒤떨어짐. 이로 보아 서성은 동성을 호위하는 기능을 하였고, 전쟁시를 제외하고는 서성 내에서는 사람의 활동이 많이 없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음(徐家國·孫力, 1987). 남위성(南衛城)은 서성 서남벽의 동남단과 동성 동벽의 남단 사이에 위치함. 이 부분은 산성 안쪽 골짜기 전체 입구로서 서성 동남단에서 동쪽으로 뻗은 산등성이와 동성 동남단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등성이가 골짜기 남쪽으로 가로막고 있고, 두 산등성이 사이에는 폭 200m의 골짜기 입구가 있음. 남위성 남벽의 절벽 근처에 팔각밀첨식(八角密檐式) 9층 전탑이 있음. 1983~1985년 조사 때, 고이산 고탑(古塔) 동부에서 북쪽으로 치우친 반면, 남위성 남벽(자연 초벽(峭壁)을 벽으로 삼았음)의 내측(Ⅰ區)에 트렌치 2개를 팠는데 4개의 퇴적층이 있었음. 제1층은 산피토층(山皮土層)으로 두께는 약 20㎝ 정도임. 제2층은 사석토층(砂石土層)인데 돌은 일반적으로 3~5㎝의 거칠게 다듬은 풍화산석(風化山石)이고, 재생퇴적(再生堆積)으로 보이며 두께는 40여㎝임. 제3층에는 흑회색 흙이 퇴적되어 있었는데, 토질은 소송(疏松)임. 간혹 1㎝ 정도의 작은 돌이 있음.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음. 제4층은 흑색 토층(黑色土层)으로 점착성(粘性)이 비교적 큼. 두께는 10~35㎝임. 트렌치 한 곳은 요·금시기의 재생퇴적에 속함. 탑이 있던 사묘(寺廟)건축지로 추정되는데, 건축지가 붕괴된 후 퇴적된 것으로 보임. 현재 관음각(觀音閣)의 상원·하원(上院·下院)의 건축지는 명확하게 명청시대에 축조된 것임(徐家國·孫力, 1987). 1983~1985년 조사 때, 남위성 북부의 작은 대지(Ⅴ區)에 5×5m의 트렌치를 2줄로 10개를 팠음. 트렌치 위쪽에 쌓여 있던 돌과 흙은 여러 해 동안 서측 산암(山巖)을 파내면서 떨어져 내린 돌임. 그 아래는 문화층임. 일부 트렌치에서는 깊이 1m 근처 지점에 불에 탄 견고한 홍소토면(紅燒土面)이 있고, 간혹 평평한 면이 위로 향하고 있는 돌이 있는데, 주초석(柱礎石)으로 추정됨. Ⅴ구역 대지의 동면에는 건물을 축조할 때 흙을 취하면서 인위적인 수직절벽이 형성되었음. 단면을 볼 때, 5m의 퇴적 가운데 최소 5개의 활동면이 있음. 폭우로 인해 흙더미들이 흘러 내려가면서 많은 토기편과 와당이 뒤섞임. 다수의 요대 유물들도 출토되었음. 남위성(南衛城)의 성벽은 낮고 간단하게 축조되었으며, 둘러싼 성벽(圍墻) 안의 산골짜기에서 고구려의 유물이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동성과 동시기에 축조된 것은 아니라고 추정됨(撫順市文物工作隊, 1964). 북위성(北衛城)은 산성의 서북모서리, 즉 동성 북벽 바깥 장군봉 동북면의 산머리에서 서북뱡향으로 펼쳐진 산등성이에 있는 설형(舌形)의 성임(북위성에 대해, 동성이 주성이고 이외의 시설은 임시방어시설이기 때문에 성과 구별해야 한다고 보고 성외대(城外臺)라고 부르기도 함(陳大爲, 1992)). 북위성의 남면은 동성의 북벽에 잇닿아 있음. 북면과 서면 아래로 골짜기가 접해 있고, 북면 골짜기에서 멀지 않은 곳은 평지임. 북위성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음. 북위성의 지세는 평탄하고 동성의 북벽보다 수미터 낮음. 이에 대해 동성의 북벽을 축조하면서 그 주변을 취토하였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음(徐家國·孫力, 1987; 郝武華, 2000). 북위성에 서면 서·북 양면, 평지·산줄기가 한 눈에 들어옴. 북위성은 산성 서북면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지형과 산세에 따라 성벽을 수축한 것이고, 산성 서북쪽 먼 곳까지 볼 수 있음. 즉 산성은 감시 및 방어의 기능을 가진 시설로, 산성의 제 1선 방어선임. 동남쪽의 소성(小城)은 타원형 성벽임. 동성 바깥 동남면에는 동벽 남단의 산머리에서 동남쪽으로 뻗은 산등성이가 있는데, 동서가 길고 남북이 좁으며 동남쪽으로 갈수록 점차 낮아지다가 험준한 낭떠러지로 변모함. 이러한 산세를 이용하여 산등성이 가장자리를 따라서 타원형 성벽을 축조함. 위성(圍城) 동측으로 궁형의 둘러싼 성벽(弓形 圍墻) 두 줄기를 연이어 구축함. 1963년 조사 때에는 남쪽의 틈(豁口)을 제외하면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었다고 함. 소성(小城)이 위치한 지점은 동쪽으로 무서하(撫西河), 남쪽으로 혼하 북안의 동서교통 요충지와 매우 가까움. 동성의 동면을 방어하던 주요성으로 추정됨(撫順市文物工作隊, 1964; 陳大爲, 1992)(소성에 대해, 동성이 주성이고 이외의 시설은 임시방어시설이기 때문에 성과 구별하여 한다고 보고 성외성(城外城)라고 부르기도 함(陳大爲, 1992)). 고이산성은 성벽의 바깥이 험준하고 안쪽은 완만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동성에서 더욱 두드러짐. 성벽의 축조에 대해 토축이라는 기록(撫順市文物工作隊, 1964; 孫進己·馮永謙, 1989; 陳大爲, 1995; 馮永謙, 1997), 산등성이를 이용해서 토석혼축으로 축조하였다는 기록(溫秀榮·張波, 1996; 李殿福, 1998; 王禹浪·王宏北, 2007; 國家文物局, 2009)이 있음. 또한 토축+토석혼축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하부에는 자연석으로 성벽 기단을 쌓고 그 윗부분에는 흙을 다져 쌓았는데, 일부 구간에서는 10~15㎝의 다져진 층을 볼 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음(王綿厚, 2002). 또한 高爾山城 성벽이 비교적 큰 깬돌로 쌓은 단열석벽(單列石墙)이고 윗면은 다시 흙을 쌓고 견고함을 더했다는 기록(魏存城, 2002·2011)이 있음. 1963년 조사 때에는 성벽의 윤곽이 명확하게 남아 있었는데, 당시 성벽의 높이는 일반적으로 2~5m이고, 성벽 안쪽은 완만하고 바깥쪽은 가파르며, 아래가 넓고 윗면이 좁은 쐐기형이었음. 여러 구간에서 다져진 층을 볼 수 있는데, 각 층의 두께는 10~15㎝였음. 외벽은 일반적으로 45~60° 정도 경사져 있었음. 1983년~1985년 성벽의 축조상태를 정밀조사한 결과, 겉으로 보기에는 토축이지만, 세 가지 방식이 나타나고 있었음. 첫 번째 방식을 살펴보면, 조금 융기한 산등성이에는 흙을 계속 쌓아서 높이와 두께를 더하였고, 일부 구간에는 흙의 유실을 방지하기 위해 깬돌을 채워 넣거나 흙을 다지기도 하였는데, 다져진 층의 두께는 일반적으로 8~10㎝임. 동성의 동문에서 북쪽으로 뻗어 있는 일부 구간에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남아 있는 높이는 8m에 달하고, 바닥 너비는 약 24m임. 두 번째 방식을 살펴보면, 토축 성벽 안쪽에 비교적 큰 깬돌로 단열 석벽을 구축하고, 윗면에 다시 흙을 쌓아 견고함을 더하였음(包骨墻). 동·서성 경계지점 남단에 이러한 방식으로 성벽을 축조함. 세 번째 방식을 살펴보면, 평지에 성벽을 축조할 때는 먼저 깬 모석(毛石)을 30~50㎝ 쌓은 다음, 그 위에 흙으로 쌓거나 혹은 다져서 축조하였음. 동성 남문지 서벽은 바로 이러한 축조방식으로 구축하였음. 이러한 방식의 축조한 성벽 가운데 일부 구간은 높이가 5m를 넘기도 함(徐家國·孫力, 1987). 동문 남벽 근처에서 성돌이 발견되었는데, 한 개는 크고 다른 한 개는 작은 쐐기형 돌임. 성 기단층에서 정상부까지 층층히 쌓았는데, 내벽에는 6층의 성벽돌이 남아 있음. 성벽의 벽심(墻芯)은 깬돌로 채워 넣었음(王綿厚, 2002). 동성의 북벽은 장군봉에서 동북모서리에 이르는 구간임. 바깥쪽으로 만곡되어 ‘⌒’형을 이루고 있음. 1940년 조사 당시, 북문 근처의 인공성벽은 최고 높이 4척, 폭 약 54척에 달했음. 성벽의 외부는 돌로 쌓았음. 성벽의 윗부분은 좁고, 하부는 넓어서 삼각형의 단면을 이루고 있음. 돌은 벽돌을 쌓는 것처럼 쌓았는데, 축조 당시에는 가지런하였다고 생각되나 당시에는 교란되었다고 함. 돌은 크기는 1×5×?척, 1.2×6×?척이고, 화강암과 편마암이 주를 이루고 있음. 성벽 외면에는 회반죽을 발랐음. 내측은 일반적으로 토축임. 상부, 중부, 하부로 나눌 수 있음. 하부의 토축벽은 작은 돌을 포함하고 있는 적갈색의 점토이고, 판축한 흔적이 있음. 판축한 두께는 2촌 5분~3촌임. 토기 등의 유물을 발견되지 않음. 중부 약 5척은 혼석층(混石層)임. 이 부분은 암갈색이 나타남. 성벽에 사용되었던 것과 같은 돌이 상부와 하부에 1줄로 나란히 있고, 그 사이는 2촌각(寸角)의 돌을 포함한 흙으로 채워져 있음. 상부의 토색은 하부와 같은 갈색임. 큰 돌이 포함되어 있음. 최상부는 유기질을 포함하면서 토색이 검정색임. 지하 2~8촌 되는 곳에는 고구려의 적색 기와편이 출토됨. 1963년 조사 때에는 성벽이 비교적 양호하게 남아 있었는데, 잔존 높이가 5m에 달했다고 함(撫順市文物工作隊, 1964). 동성의 동벽은 동북·동남모서리의 산봉우리 사이 구간에 축조되었으며, 안쪽이 완만하고, 바깥쪽이 가파름. 남·북 양단은 모두 산머리이고, 중간 부분은 조금 낮으면서 평평함. 남·북 양단에서 망을 보았을 것으로 추정됨(撫順市文物工作隊, 1964). 1940년 조사 때, 동문 양측으로 성벽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남측 성벽이 완전하게 남아 있었음. 남측 성벽은 동단에서 남쪽으로 꺾어 성벽의 동면 외벽이 되고, 다시 남쪽으로 이어짐. 남쪽 성벽은 커다란 절석(切石)을 견고하게 쌓았음. 다듬은 돌의 하부는 상부보다 넓고, 절석의 정면은 약간 경사가 있음. 남측 성벽의 북면은 동부에는 5단, 서부에는 6단을 쌓았음. 돌의 크기는 2X1X1척, 2X1.3X?척, 2.4X6X?척임. 성벽 내부에는 1촌각(寸角) 정도의 작은 돌을 채워 넣었음. 당시 성벽의 남측과 동면 바깥에 성벽이 붕괴되어 많은 작은 돌들이 흘러 내리면서, 약 1.5~2m 정도 동부 외면을 덮고 있었다고 함. 1963년 조사 때에는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었는데, 가장 높은 지점은 높이가 6m, 기단부 너비는 10m에 달하였다고 함(撫順市文物工作隊, 1964). 1983년~1985년 조사 때 동문 북측의 성벽을 시굴하였는데(Ⅲ區), 먼저 약간 융기된 산등성이 안팎으로 동시에 흙을 쌓았고(다진 흔적은 명확하지 않음), 다시 성벽 안측에 자연석을 쌓아서 견고함을 더하였으며, 마지막으로 흙으로 덮었음. 쌓여진 흙 속에서 고구려 시기의 홍색 승문기와편들이 출토되었는데, 여러 차례 증수하였을 가능성이 있음(徐家國·孫力, 1987). 동성의 서벽은 장군봉에서 동남쪽으로 산성 중앙을 향해 뻗은 산등성이에 자리 잡고 있음. 서성과의 경계를 이루는 성벽으로 서성의 동벽에 해당하기도 함.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음. 1963년 조사 때에는 가장 높은 구간이 4m에 이르렀다고 함(撫順市文物工作隊, 1964). 동성의 남벽은 남쪽 골짜기 입구를 동서 방향으로 횡단하여 축조하였음. 1963년 조사 때에는 남문 동측 구간이 비교적 잘 남아 있었는데, 남은 높이는 3m였다고 함. 서단은 대부분 붕괴되면서 몇 곳에 흙더미만 남아 있었다고 함. 남벽 동측의 일부 구간에는 외벽과 내벽을 겹으로 쌓은 겹성구조가 남아 있음. 서성의 성벽의 특징은 다음과 같음. 장군봉에서 서남방향으로 뻗은 산등성이는 ‘V’자형을 그리며 동남쪽으로 방향을 꺾어 골짜기 전체를 감싸면서 동성의 남문 맞은편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이 산등성이를 따라 1,500m에 이르는 서북벽과 서남벽올 축조하였음. 1963년 조사 때에는 ‘V’자형의 서북벽과 서남벽은 토벽으로, 북쪽 300m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성벽이 남아 있었는데, 너비는 0.8m, 높이는 0.5m로서 동성에 비해 규모가 작음. 장군봉에서 동남쪽으로 뻗은 산등성이에 위치한 동성의 서벽은 서성의 동북벽을 이루고 있음. 서남벽 동남단과 동북벽 동남단 사이는 서쪽 골짜기 입구로서 산기슭과 평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곳을 횡단하여 동남벽을 구축하였음. 서성의 외곽 성벽은 중앙의 높은 토벽 안쪽에 약간 낮은 토벽을 나란히 쌓은 겹성구조라고 함(三上次男·田村晃一, 1993). 남위성의 성벽의 특징은 다음과 같음. 1963년 조사때 서성 서남단에서 동성의 남문 맞은편 서남단에 이르는 산등성이에 500m 정도의 성벽이 남아 있었다고 함. 동성 동남단 산봉우리에서 서남 방향의 산등성이를 따라 500m 정도의 호형(弧形) 성벽을 축조함. 너비 200m인 골짜기에도 본래 성벽이 있어 두 산등성이의 성벽을 연결하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1963년 조사 때에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함. 북위성의 성벽의 특징은 다음과 같음. 장군봉 동북측에 위치한 동성 북벽 위의 작은 산봉우리에서 서북방향으로 돌출한 산등성이 가장자리에 흙으로 성벽을 축조하였음. 성문은 동·서·남·북문 등 4개가 있다는 기록(三上次男·田村晃一, 1993)과 동성에 남·북·동문 3개가 있다는 기록(徐家國·孫力, 1987)이 있음. 무순~철령간 도로 양측에는 크기가 다른 계단식 대지가 많이 있는데, 고구려시기의 유적과 유물이 풍부하게 남아 있음. 이곳에 건물지들이 자리잡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됨(徐家國·孫力, 1987). 고이산성에서는 고구려, 요, 금시기의 유물이 발견됨. 1933년 출토유물은 다음과 같음. 성안 성벽 부근에서 적색·흑회색 기와가 흩어져 있어져 있었는데, 특히 정문 서측 산 위의 밭에서 많이 출토되었음. 출토된 기와편들과 조선총독부에서 출판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1 및 집안현 환도산성에서 출토된 기와편을 비교해 보았을 때, 동일한 형식으로 볼 수 있음(渡邊三三, 1933). 암키와는 적색으로, 내면에는 포문이 펼쳐져 있음. 와당도 출토됨. 정문에서 약 200m의 북쪽 좌측의 길 옆에서 거대한 귀석(龜石)이 머리가 반쯤 땅에 묻힌 채 발견됨. 배면에는 한 변이 80㎝가 넘는 구멍이 있었는데, 깊이는 30㎝ 정도임. 귀부(龜趺)로 볼 수 있음. 제작된 지는 꽤 오래된 것으로 보임. 1940·1944년에는 토기, 토제품, 도자기, 와전(瓦塼), 철기, 철제품, 청동제품, 화폐 등이 발견됨. 요·금시기의 유물로 자기, 백색 시유도기, 벽돌 등이 출토됨. 자기는 59점이 출토되었는데, 접합할 수 있는 자기편을 감안하면 53점임. 1940년에 중앙거주지, E지점, 동문, 서문 등 네 지점에서 철기가 출토됨. 중앙거주지에서는 촉신(鏃身)을 판별할 수 있는 화살촉 17점이 출토됨. 그 외에 촉신을 추측하기 어려운 화살촉과 촉병(鏃柄)를 합쳐 9점이 출토됨. 촉신(鏃身)에는 사각추형(四角錐形), 장신형(長身形), 착형(鑿形), 평근형(平根形) 등이 있음. 장신형(長身形) 화살촉의 경우, 촉신(鏃身)이 14.3㎝에 이르는 것도 있음. 신(身)의 앞부분은 뾰족함. 그 단면은 일반적으로 편평하지만, 일부는 원형 또는 사각형임. E지점에서는 촉신(鏃身)을 판별할 수 있는 화살촉 16점이 출토됨. 촉병(鏃柄)으로 추정되는 유물도 많이 출토됨. 형식은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삼각추형(三角錐形), 사각추형(四角錐形), 유엽형(柳葉形), 장신형(長身形), 세신형(細身形), 평근형(平根形), 삼익형(三翼形) 등이 있음. 사각추형(四角錐形)의 화살 가운데, 두 점는 동체부(胴部)가 넓고, 다른 한 점은 평면이 삼각형임. 동문지에는 17점의 화살촉이 출토됨. 이 가운데 형식의 분명한 화살촉은 9점임. 동문에서 출토된 화살촉은 첨근(尖根), 특히 삼각추형(三角錐形)이 많이 출토되는 것이 특징임. 그 외에 W지점, 서문내 거주지, 서문 등에서 출토됨. 철제 못은 비교적 많이 출토됨. 출토된 못들은 대부분 구부려져 있고, 곧은 못은 적음. 또한 녹이 슬어서 원래 상태를 알기 어려운 못도 많음. 신(身)의 단면은 방형에 가까운 장방형이 대부분이고, 일부는 편평함에 가까운 장방형임. 끝부분의 제작방법에 있어 침상(針狀)에 뾰족한 형태는 적고, 비상(箆狀)에서 점차 얇아지게 만든 형태가 많음. 두부(頭部)는 제작방법에 따라 네 형태로 나눌 수 있음. 첫번째 형태는 두부(頭部) 전체를 못의 본체보다 약간 굵게 만들고 정부(頂部)를 T자형으로 만들었음. 두 번째는 두부(頭部)를 굽혀서 평평한 면을 만들었음. 이 유형은 크기가 다양한데, 큰 못은 길이가 20㎝에 가깝고, 작은 못은 3㎝ 정도임. 서문 내 주거지에서는 작은 못이 많이 출토되었음. 이러한 유형의 못은 대부분이 단면이 장방형을 이루고 있음. 세 번째 형태는 큰 원판 모양의 두부(頭部)를 갖추고 있는데, 두부(頭部)의 제작방식은 구부리는 방식은 아니라고 추정됨. 신(身)의 단면은 장방형이고, 길이는 10㎝ 전후임. 네 번째는 두부(頭部)를 엔두형(円頭形)으로 만듦. 갑편은 중앙주거지에서 25점 이상, E지점에서 3점이 출토됨. 그 외에도 서문내 거주지 등에서도 출토됨. 성벽 부근을 포함하여 성내 이르는 곳마다 기와가 흩어져 있었음. 특히 남·북 양문을 관통하는 도로를 기준으로 서북부 경사면에 기와가 많이 분포되어 있었음. 1963년 출토유물은 다음과 같음. 성내 지면에 매우 많은 유물들이 흩어져 있었는데, 회색·홍색 암키와, 연화문와당, 승문 장방형 벽돌, 철기, 동전, 화살촉 등이 출토되었음. 서면 산골짜기 안에서는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서면 산골짜기 북단 성벽이 동성과 동시기에 축조되지 않은 것과 관련이 있다고 추정됨(撫順市文物工作隊, 1964). 철기는 모두 동성 내 서쪽 구릉 소나무 아래에서 출토되었는데, 가래(鏵), 쟁기, 도끼(斧), 모(矛), 화살촉, 등자, 수레바퀴굴대축(車輨), 곡괭이 등이 있음. 동성 남문 앞 외곽 성벽(圍墻) 내에서는 벽돌과 기와편이 흩어져 있었음. 산성 안에서 출토된 와당, 기와편 등 건축자재들은 집안 산성자산성에서 출토된 것과 일치하므로 고구려시기에 제작한 것으로 볼 수 있음. 1983년~1985년 출토유물은 다음과 같음. Ⅰ구역 제4문화층에서는 1.4㎝ 두께의 깨진 기와편이 가장 많이 출토되었는데, 태토는 비교적 순수하고, 니질의 옅은 회색임. 내면에는 모두 포문이 있음. 소성온도는 균등함. 기와를 제외하고 도자기편과 송대의 동제 화폐가 출토됨. 토기 구연부는 대부분 말아 올라갔고 짙은 회색임. 비교적 요구(窯口)가 많고, 일부 자기편에는 개편(開片)이 있음. 흰색·흑색 시유완(碗) 각각 1점이 복원되었는데, ‘계퇴담(鷄腿罈)’의 하부가 있음. Ⅱ구역에서 출토된 철제 무기 가운데 화살촉이 가장 많음. 그 외에 도자(削), 쇠뇌, 요도(腰刀), 모(矛), 수레바퀴굴대축(车轄), 창고달이(鐏), 마름쇠(蒺藜), 찰갑편, 도탄환(陶彈丸) 등이 있음. 일상생활용기로는 泥質의 회색토기가 가장 많이 출토되었는데, 손잡이가 두 개인 분(盆), 반(盤), 호(壺), 시루(甑), 옹(瓮) 등이 있음. Ⅱ구역의 제2층에서는 삼채발(三彩钵)의 잔편이 발견되었는데, 정교하고 세밀하게 제작되었음. 중원에서 온 것으로 볼 수 있음. 그 외에 개원통보(開元通寶가) 출토됨. Ⅳ구역에서 출토된 유물은 비교적 풍부함. 출토된 유물의 종류, 토기의 기형과 재질 등은 Ⅱ구역에서 발견된 것과 같음. 당의 개원통보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고구려 말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음. 토기로는 옹(瓮), 분(盆), 완(碗), 반(盘), 호(罐), 시루(甑) 등이 출토됨. 철기로는 군사무기가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음. 그 외에 토기, 철제의 건축자재 등이 발견됨. Ⅴ구역에서는 자기(瓷器), 도기(陶器), 철기, 전와(砖瓦) 그리고 북송시대의 화폐가 발견되었음. Ⅴ구역 상부퇴적은 요대의 유구에 속하고, 여기에 있던 건축물은 상당한 규모를 갖추고 있다고 추정됨. 그 아랫면 문화층의 경우, 출토유물로 보아 고구려시기의 문화층은 아닌 것으로 추정됨. Ⅵ구역 남북 방향의 트렌치 북반부에 깨진 기와와 여러 개의 자연석들이 한층 노출되어 있었음. 이 곳에서 철제 찰갑편, 철제 쟁기, 철제 삽, 수키와 등이 출토됨. 요대의 유구인 Ⅴ구역를 제외한 다른 발굴지점에서는 고구려의 유물이 발견됨. 또한 유구 안에서 개원통보가 출토되면서 유적의 하한을 유추해 볼 수 있는데, 고구려말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음. 철기는 500여점이 출토됨. 철기 가운데 화살촉이 가장 많이 출토됨. 그 외에 요도(腰刀), 도자(削), 모(矛), 창고달이(鐏), 마름쇠(蒺藜), 수레바퀴굴대축(车輨), 찰갑편, 대과(带挎), 투구 등이 출토되었는데, 한 세트의 군사무기장비를 보여줌. 고구려는 본래 병철(镔鐵)로 유명했는데, 종류가 많고, 단주(锻铸)도 우수했음. 고이산성에서 출토된 철기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확인해 볼 수 있음(徐家國·孫力, 1987). 토기는 100여점이 출토되었는데, 주요 기형으로는 옹(瓮), 분(盆), 호(罐), 반(盘), 완(碗), 시루(甑), 탄환(彈丸) 등이 있음. 생활용 토기는 대부분 니질의 회색임. 비교적 큰 토기 가운데 일부는 서로 대칭하는 교상횡대 파수(桥状横耳)가 있고, 파수 위에는 음현문(陰弦文)이 한 바퀴 둘러져 있는 등 명확한 시대적인 특징이 형성되어 있음(徐家國·孫力, 1987). Ⅳ구역 FG84T208 아궁이(灰坑)에서 출토된 기와편은 모두 고구려시기의 홍색 승문기와편임. Ⅱ구역에서 출토된 요대의 기와편은 니질의 회갈색인데, 크기와 두께가 정연하고 획일적임. 기와편의 내면에는 포문이 펼쳐져 있음. 일부 기와편의 배면에서 모인양문(模印陽文) 한자가 발견되었는데 “……匠賈德用”이라고 쓰여져 있음. 글자는 기와를 제작한 사람의 이름으로 추정됨. 글자는 세로로 쓰여졌고, 해서체(楷书)인데 요대의 일부 묘지(墓志)에 보이는 글자체의 풍격과 일치하고 있음.역사적 의미 고이산성에서는 동남 돌출부에 위치한 전탑, 산성 남쪽 입구부근에서 ‘大安四年八月□日建’이라고 판독할 수 있는 요대의 불정존승타나니경당(仏頂尊勝陀羅尼経幢)이 발견된 것을 비롯해 성내 곳곳에서 요금시대의 토기편이 발견되는 등 요금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고 있음. 게다가 토기편은 당시 무순 부근의 가마에서 소성한 일상용품일 뿐만 아니라 중국 관요(官窯)의 정요 단편(定窯 断片)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상당히 유력한 건축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됨.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여 渡邊三三은 요(遼)의 귀덕주치(貴徳州治)의 귀덕현(貴德県)이었고, 금대에도 귀덕주(貴徳州)였다고 주장하고 있음. 즉 고이산성은 고구려 뿐만 아니라 요금대까지도 계속 사용되었던 것임. 따라서 고이산성의 구조, 특히 고구려시기의 고이산성의 구조가 어떠하였는지를 명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현존하는 고이산성 유구 가운데 요금시대의 유구를 명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음. 이 점에서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소위 서성의 시간적 위치임. 三上次男은 중앙주거지에서 요금시대의 무덤이 발견되기는 하나, 2차례에 걸친 조사에서 동성 내부의 요금시대의 유적이 상기의 무덤 이외에는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동성은 고구려시대에 축조하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보았음. 그러나 서성 외곽 토축성벽의 경우, 중앙이 높은 토축 내측에 더 낮은 토축벽이 병행하여 만들어지고, 그 중간이 한층 패인 도랑처럼 만들어진 구조를 보여주는데, 이러한 구조는 고구려 성벽에서는 보이지 않는다고 함. 그러면서 요금시대의 토성인 ‘고로디시체’에서는 이중삼중으로 토축벽과 도랑을 두르는 모습이 보인다는 점을 주목함. 그리고 장군봉 동쪽의 북벽 혹은 동문 북쪽의 동벽 등은 구릉 능선 위에 높게 쌓은 토축으로, 그 아래쪽 가장자리 바깥쪽에 일정 너비의 평탄면을 만들고 있음을 확인하면서 동성과 서성과의 토축벽 구조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보았음. 서성 내부에서 요금시대의 유물이 대량으로 발견된 점들도 고려하면서 서성은 요금시대에 축조되었다는 견해를 제시함. 즉 서성에서 고구려시대 유구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고구려시대의 산성은 동서만으로도 구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고 있음. 남위성(南衛城) 또한 성벽의 구조나 내부에서 발견된 유물을 볼 때, 고구려 시대의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함. 또한 동남부에 돌출한 삼중의 곽(郭) 중심부에 요금시대의 전탑이 지어졌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고구려 시기부터 존재하였는지에 대한 자세한 추가조사가 필요하다고 하였음. 그러면서 다만 북쪽의 돌출한 곽(郭)의 경우, 성벽의 축조방식이 동성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고구려의 것으로 볼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둠. 한편 池內宏은 『구당서』 고려전의 ‘신성 서남쪽 산에 의지해 목책을 세웠다’라는 기록에서 서남쪽에 있다는 산은 고이산성과 와지(窪地)를 사이에 두고 요금시대의 전탑이 솟아 있는 고이산의 고지로 보았음. 즉 탑이 우뚝 솟아 있는 고이산의 고지는 서성 남쪽 능선에 해당하기 때문에, 서성을 고구려시기의 신성(新城)과 다르게 본 것임. 위의 견해들은 고이산성이 평원에서 요동산구(遼東山區)로 진입하는 문호(門戶)에 위치하고 있고 혼하 북안까지 2㎞ 떨어져 있어 중요한 전략적 의의를 지니고 있으므로, 후대의 역대왕조들이 고이산성을 이용 혹은 증축하면서 지금과 같은 복잡한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고 보고 있는 것임(三上次男·田村晃一, 1993). 위와 같이 고구려시기에는 동성만으로 이루어졌다는 견해와 달리 田村晃一은 나통산성(羅通山城)과 휴류산성(鵂鶹山城)과 함께 고이산성을 예로 들면서, 고구려에는 병립적인 복곽식 산성을 구축하였음을 지적한 바 있음. 한편 1983~1985년 조사 때 서성 서벽 요망대(瞭望臺)의 성벽 단면에서 전한시기(前漢時期) 토기편이 출토된 만큼 축성시기에 대해서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기된 바 있음. 특히 고이산성의 동쪽과 북쪽은 무서하(撫西河), 남쪽은 혼하(渾河)에 의해 주변 산들과 단절된 반면, 서쪽으로는 혼하 북안을 따라 산봉우리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 다른 세 면에 비해 서쪽은 방어상 많은 취약점을 안고 있기 때문에 산성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서성을 반드시 구축할 필요가 있었으므로(陳大爲, 1992), 서성도 고구려시기에 구축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음(田村晃一, 1988; 林直樹, 1994). 산성 동쪽에서 1.5㎞ 떨어진 지점에 시가가 고구려고분군(施家街高句麗墓群)이 있음. 요녕성 기타지역의 고구려산성 부근에서 고구려고분군이 분포하는 사례가 매우 적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함. 심양 석대자산성(石臺子山城) 부근에서도 고구려고분이 발견된 바 있는데, 많은 묘장의 형태가 시가가 고구려고분군과 같음(肖景全·鄭辰, 2007). 고이산성은 환인지역에 위치한 산성을 비교해 보았을 때, 방어체계가 더욱 강화되었고, 성벽구조가 토축과 토석혼축으로 변화하였으며, 고구려시기의 유적과 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되고 있음. 이러한 변화들은 명확한 시대적 특징을 보여주는 것임(辛占山, 1994). 고이산성은 대형 고구려성으로 볼 수 있음. 고이산성 외에 요녕성에 위치한 서풍 성자산산성(西豊 城子山山城), 철령 최진보산성(鐵嶺 催陳堡山城), 심양 진상둔 탑산산성(沈阳 陳相屯 塔山山城), 요양 요동성(遼陽 遼東城), 해성 영성자산성(海城 英城子山城), 개주 고려성산성(盖州 高麗城山城), 금현 대흑산산성(金縣 大黑山山城) 등은 요하 좌안에서 서남~동북방향으로 위치하여 요하 일선의 전방 요충지 역할을 하면서 고구려 중심지에 대해 중요한 호위작용을 하고 있음(徐家國·孫力, 1987; 陳大爲, 1995). 고이산성(신성)은 군사중진일 뿐만 아니라 지방지배를 위한 거점성의 역할도 수행하였던 것으로 추정됨. 3세기 말경 신성태수 고노자(新城太守 高奴子)는 소자하~혼하 연안로의 최전방 요충지를 관장하는 지방관으로서 민정과 군정을 아울렀음. 〈광개토왕릉비〉 수묘인 연호조에 양곡·양성·(안부련)·(개곡)·신성·남소성(梁谷·梁城·(安夫連)·(改谷)·新城·南蘇城 등 국내성~요동 교통로상의 성이 하나의 권역으로 묶여진 것으로 보아, 최전방 요충지인 신성(新城)의 지방관이 이 일대 전체를 통괄한 것으로 추정됨. 실제 고이산성은 혼하~소자하 일대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인 요동평원과 동부 산간지대의 접경지대에 위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규모도 이 일대 고구려성 가운데 가장 큼. 그리고 각 방면의 군사방어를 고려하여 주성인 동성을 중심으로 서성, 남위성, 북위성 등을 축조하여 적의 공격에 대한 방어태세를 구축함. 한편, 고이산성 내부의 계단상 대지에서는 군사시설뿐 아니라 일반 주거지도 많이 발굴되고 농기구 등 생활도구들도 많이 발견됨. 이러한 유적들은 계단상 대지에 주거지가 상당히 밀집되어 있던 상황을 시사함. 667년 이권(李勸)은 신성을 함락시킨 다음 주변 16개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고 하는데, 이는 신성 주위에 상당수의 위성(衛城)이 자리 잡고 있었고, 신성이 혼하 연안에서 가장 중심적인 거점성이었음을 반영함. 이러한 점에서 고이산성에 최고 지방관인 욕살(褥薩)이 파견되었다는 견해가 주목되는데(노태돈, 1996), 최소한 처려근지(處閭近支) 이상은 파견되었을 것임(여호규, 1999). 한편 三上次男도 계단식 대지의 건물지에 주목하면서 ‘단순한 전쟁시의 일시적인 거점이 아니라, 여기에 상당한 저택을 지은 상주가 있었다’고 보았는데, 『구당서』 고려전 기사를 언급하면서, 각지의 산성에 고구려 귀족이 가족들과 함께 거주하고, 관아 등도 산성 내부에 배치되어 있었다고 주장함. 아울러 황해북도 신모 대현산성(新慕 大峴山城)에서 남문 앞의 평지에 고구려시대의 기와지붕건물이 발견되었고 그 주변에 고구려 적석묘들이 분포한다는 점, 황해북도 신원 장수산성에서 남쪽 기슭에 고구려 기와건물이 발견되었고 그 주변에 고구려의 고분군들이 분포한다는 점 등을 통해 고구려의 지방지배와 산성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고, 산성 밖에도 중요한 건물이 있었다고 주장함(三上次男·田村晃一, 1993). 고이산성 Ⅳ구역와 Ⅱ구역의 건물지에서는 전형적인 고구려 승문기와 이외에 회갈색 기와가 사용됨. 암키와의 양측에는 칼로 잘려진 흔적이 있는데, 고구려 암키와의 제작연대를 구분하는데 있어 중요한 증거임. 연화문 대방전(莲花紋大方磚), 직승문방전(直繩文方磚)의 출토는 고구려 건축자재에 대한 연구에 도움을 주고 있음. 연화문 와당은 고연(高缘)에서 평연(平缘)으로 변화하고, 연판(蓮瓣)에서 추상화가 진행되면서 유정(乳釘)이 생기며, 마지막에는 연주문(连珠纹)이 한 바퀴 돌아가는 등 시간의 차이가 드러남. 다만 발굴 중에 출토된 와당은 폐기된 후에 어딘가에 메워진 것이고, 정식으로 와당이 사용된 건축지는 발견되지 않았음. 크기와 색깔이 다른 기와들이 섞여 있는 모습은 많은 건축자재들이 다른 곳에서 이 곳으로 왔음을 보여줌. 정연하고 획일적인 작은 자갈길과 과학적인 배수시설은 고구려의 생활면모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함. 철제 투구와 철제 삽, 철제 괭이의 공반은 당시 고구려의 군사와 경제생활을 이해하는데 있어 새로운 연구의 실마리를 보여줌(徐家國·孫力, 1987). 고이산성에서 출토된 호(壶), 호(罐), 분(盆), 옹(瓮) 등은 모두 후기의 특징을 보여줌. 연화문 방전(莲花文 方塼)과 직승문 방전(直繩文方塼)은 기존 요길지구(遼吉地區) 고구려유적에서는 발견되지 않은 것임. 산성에서 출토된 유폭선·무보선 단판 연화문 와당(有輻线·无輔綫 單辦 莲花紋 瓦當)과 연주문와당(蓮珠紋瓦當)의 제작연대는 4세기 혹은 그보다 더 늦을 것으로 추정됨(肖景全·鄭辰, 2007). 고이산성 내측 서쪽 구릉(Ⅱ區) 건축지 남면의 돌을 깐 길에서 발견된 회색 연주문와당에 대해 서안 당대 화청궁(西安 唐代 華清宮)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하므로 당대(唐代) 기와에 속한다고 하면서 『구당서』와 『자치통감』에 보이는 ‘의봉2년(儀鳳二年)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으로 옮겼다’라는 기사와 연관시키는 견해가 있음(陳大爲, 1995). 또한 Ⅱ구역 건축지는 당대에 속하고, Ⅱ구역와 IV구역에서 발견된 토기 용기(陶容器), 방전(方塼), 연주문와당 등도 당대(唐代) 유물로 파악하면서 668년 신성주도독부(新城州都督府)를 두었다는 기사와 677년 당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겼다는 문헌기록과 연관시켰고, 아울러 신성주도독부와 안동도호부는 고이산성 밖이 아닌 성내에서 있었다고 보기도 함(佟逹·張波, 2001). 위치비정에 관한 견해는 다음과 같음. 1940년대 발견된 이후, 많은 학자들이 고이산성을 신성으로 보았음(渡邊三三, 1933; 李文信, 1962; 李甸甫, 1988; 孫進己·馮永謙, 1989; 王綿厚·李建才, 1990; 張正巖·王平魯, 1994; 陳大爲, 1995; 馮永謙, 1997; 郝武華, 2000; 王綿厚, 2002). 그런데 1990년 심양시 석대자산성(石臺子山城)이 발견된 후, 일부 학자들은 석대자산성을 신성으로 추정하기도 함(李曉鐘·劉焕民, 2000). 하지만 더 자세한 논거가 제시되지 않은 한 이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은 곤란함(肖景全·鄭辰, 2007). 渡邊三三(1933)은 고이산성을 최초로 신성으로 추정함. 徐家國·孫力(1987)은 고이산성을 고구려시기의 신성으로 추정함. 신성은 동진(東晋) 이후 고구려 서북변경에 위치한 성이었음. 『삼국사기』고구려본기 권80에는 ‘고국원왕 5년(335년) 춘정월에 국변(國邊)에 신성을 축조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음. 『구당서』고려전에 의하면 ‘이적(李勣)이 요하를 건너 신성에 이르렀을 때 제장들에게 “신성은 고구려 서쪽 변경의 진성(鎮城)이고, 가장 요해처이므로 먼저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나머지 성들도 쉽게 차지할 수 없다”라고 말했고, 당군(唐軍)이 신성 서남으로 군대를 이끌고 와서 산에 의지하고 책(柵)을 세우면서 공격과 수비를 하였는데, 결국은 사부구(師夫仇)가 성주를 묶은 다음 문을 열고 항복하였다’고 함. 문헌에 보이는 당군의 신성 함락과정은 신성의 견고함과 방어시설의 완비를 반영하는 것임. 두 문헌기록을 통해, 신성이 고구려 “고국(故國)” 약간 북쪽에 있고, 서쪽 변경에서 비중이 상당히 높은 진성(鎭城)임을 알 수 있음. 신성의 규모와 소재한 위치를 분석해볼 때, 고이산성이 신성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음. 한편 『구당서』고종본기에는 ‘영휘(永徽) 6년(655) 3월에 영주도독(营州都督) 정원진(程元振)이 귀단수(贵端水)에서 고구려를 격파하였다’라는 기록, 『신당서』고려전에는 ‘영휘(永徽) 6년 영주도독부(营州都督都) 정명진(程名振)과 좌위중랑장(左卫中郎將) 소정방(蘇定方)이 신성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외곽허락(外郭墟落)을 불태우고 돌아왔다’라는 기록이 있음. 위의 『구당서』와 『신당서』의 기사는 동일한 전투를 기록하고 있는데, 전자는 귀단수(貴端水), 후자는 신성에서 전투를 벌였다고 기록하고 있음. 고이산성 남위성 수문(南衛城 水門)에서 불에 탄 목책말뚝이 출토되었는데, 신성 외곽(外郭)이 불에 탔다는 기록과 부합한다고 볼 수 있음. 또한 기록을 종합해보면 귀단수는 신성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지금의 혼하로 추정됨. 요대에 설치된 귀덕주(貴德州)란 이름은 바로 강 이름에서 비롯된 것임. 고이산성이 바로 혼하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성의 지리적 위치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음. 당대(唐代)의 교통지리와 관련하여 『구당서』와 『신당서』에 의하면 신성은 개모성(蓋牟城) 동북의 신성도(新城道) 상에 있다고 함. 『구당서』권77과 『신당서』권98 위정(韋挺)전에 의하면 ‘당태종이 개모성을 깨뜨리고, 위정(韋挺)을 불러 지키게 하였는데, 개모성과 신성이 접해 있어, 밤낮으로 싸우고 쉬는 날이 없었다’라고 함. 개모성은 심양 남쪽 진상둔(陳相屯) 탑산산성으로 추정되는데, 탑산산성에서 동북방향으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성은 무순 고이산성이며 그 사이에 다른 고구려성은 없음. 그러므로 개모성에서 동북으로 접해 있는 신성은 고이산성으로 볼 수 있음. 댕대(唐代)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에는 ‘都護府(도독부, 현재 요양)에서 동북으로 고개모(故蓋牟)·신성을 지나고, 다시 발해장령부(渤海長岭府)를 지나 1,500리에 발해왕성(渤海王城)에 이른다’는 기록이 있음.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개모(盖牟), 신성은 동일 교통선상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음. 즉 『당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장령영주도(長岭营州道)”의 중간 부분이고, 상대적인 지리적 위치도 동북방향으로 차례대로 전개됨. 신성에서 혼하 하곡(渾河河谷)을 따라 동북쪽으로 휘발하곡(辉发河谷)으로 들어가서, 발해장령부(渤海長岭府, 지금의 吉林省 桦甸苏密城)로 이르렀고, 마지막으로 ‘발해왕성(渤海王城)’에 이른 것임. 이러한 점들을 볼 때 고이산성은 고구려의 신성임이 분명함. 당(唐)이 고구려를 평정한 후에는 도독부가 설치되었음.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는 ‘안동도호부를 평양성에 세워 통솔하도록 하며 그 거사(渠師)는 도독, 자사, 현령으로 삼는다. 설인귀(薛仁貴)가 병사 2만을 이끌고 안동부(安東府)에 주둔하였다. 상원(上元) 3년 2월에 안동부를 요동군고성(遼東郡故城)으로 옮겼다. 의봉(儀鳳) 2年(677)에 다시 신성으로 옮겼다’라는 기록이 있음. 고이산성이 안동도호부의 이천지(二遷址)가 되는 것으로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진(重镇)임을 반영한 것임. 馮永謙(1997)은 고이산성을 신성으로 추정함. 고이산성 서남에 있는 여러 줄의 참호는 『구당서』고려전의 ‘당군이 신성 서남으로 군대를 이끌고 와서 산에 의지하고 책(柵)을 세웠다’라는 기록과 부합함. 『신당서』지리지에는 ‘도호부에서 동북으로 고개모(故蓋牟)·신성을 지나고, 다시 발해장령부를 지나 1,500리의 발해왕성에 이른다’는 기록이 있음. 도호부는 요양시로 추정되는데, 요양시에서 동북쪽에 있는 심양시 탑산산성이 개모성으로 추정되고, 동북쪽에 고이산성이 있다는 점에서도 신성을 고이산성에 비정할 수 있음. 고이산성의 축조연대에 대한 견해는 다음과 같음. 徐家國·孫力(1987)는 『삼국사기』본기 18에 의해 고이산성으로 비정되는 신성의 시축연대를 335년으로 추정함. 李甸甫(1988)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신성(고이산성)의 축조와 관련하여 『삼국사기』고구려본기 고국원왕 5년(335) 정월 기사에 ‘축국북신성(築國北新城)’이라는 기록이 있음. 그런데 서천왕 7년(276)조에는 ‘4월에 왕이 신성으로 갔고, 8월에 신성에서 돌아왔다’는 기록, 서천왕 19년(288)조에는 ‘4월에 왕이 신성으로 갔고, 11월에 신성에서 돌아왔다’는 기록, 봉상왕 5년(296)조에는 ‘왕이 고노자(高老子)를 신성 태수(新城太守)로 삼았다’라는 기록이 있음. 위의 기록을 볼 때, 335년 이전 서천왕과 봉상왕대에 이미 신성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음. 또한 출토유물을 보면, 철제 낫(鎌)·철제 삽(揷)·철제 살포(鏟) 등 철제 생산 농기구들이 출토되었는데, 적어도 후한(後漢)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임. 그러므로 고국원왕 5년조 정월의 ‘築國北新城’이라는 기록에서 ‘축(築)’은 ‘시축(始築)’이 아니라 ‘다시 축조하다(又築)’ 또는 ‘수축하다(修築)’의 의미로 보아야 함. 구체적인 신성의 축조연대를 유추하는데 있어, 태조왕대 3년조(55년)의 “봄 2월에 요서(遼西) 10성을 축조하여 한(漢)의 병사에 대비하였다”라는 기사가 주목됨. 기사를 통해 태조왕 3년대에는 고구려가 신성(고이산성)이 위치한 무순일대까지 세력을 미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음. 아마도 이때 신성이 축조된 것으로 추정됨. 三上次男·田村晃一(1993)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삼국사기』고구려본기 고국원왕 5년(335)년조의 ‘나라 북쪽에 신성을 세웠다’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 기사에 보이는 ‘신성’을 고이산성이라고 추정하는 견해가 있음. 그런데 ‘신성’이라는 지명이 그 이전의 역사서에서도 보이고 있음. 고국원왕 5년 이전의 기사에 보이는 ‘신성’이 고이산성인지 아니면 다른 성을 의미하는지는 더 검토해 보아야 할 문제임. 신성과 관련하여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서천왕 7년(276)조에는 ‘4월에 왕이 신성으로 가서 사냥하여 흰 사슴을 잡았다. 가을 8월에 왕이 신성으로부터 돌아왔다’는 기록,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서천왕 19년(288)조에는 ‘4월에 왕은 신성으로 행차하였다. (중략) 8월에 왕이 동쪽으로 사냥을 나가서 흰 사슴을 잡았다. (중략) 11월에 왕은 신성으로부터 돌아왔다’는 기록,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봉상왕 2년(293)조에는 ‘8월에 모용외(慕容廆)가 침입하여 오자 왕은 신성으로 가서 적을 피하려고 하였다. 행차가 곡림(鵠林)에 이르렀을 때, 모용외가 왕이 도망간 것을 알고 군사를 이끌고 추격하여 거의 따라잡게 되었으므로 왕은 두려워하였다. 그때 신성재(新城宰)인 북부(北部) 소형(小兄) 고노자(高奴子)가 50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왕을 맞이하러 나왔다가 적을 만나 그들을 힘껏 치니 모용외의 군대가 패하고 물러갔다’라는 기록,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봉상왕 5년(296)조에는 ‘왕은 고노자를 신성 태수(太守)로 삼았다. 그는 선정을 베풀어 위세와 명성이 있었으므로 모용외가 다시 쳐들어 오지 못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음. 4개의 기사 가운데 앞의 두 기사는 내용이 거의 동일하고, 내용은 빈약하며, 사실 여부도 의심스러움. 사실이라 할지라도 서천왕 7년 기사의 원주(原注)를 보면 ‘혹은 신성은 나라 동북쪽의 대진(大鎭)이라고도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고국원왕 5년조의 ‘나라 북쪽에 신성을 축조하였다’라는 기사와 비교해 볼 때 방향이 약간 다름. 봉상왕대 기사들은 모두 고노자와 관련되었는데, 고노자의 공훈을 자랑하는 내용임. 그러므로 고노자의 후예가 조상의 공업(功業)을 기리는 이야기를 『삼국사기』에 삽입한 것으로 보아야 함. 즉 고국원왕 5년 이전의 ‘신성’과 관련된 기사는 그 사실여부가 의심스럽고, 사실이라 할지라도 고국원왕 5년에 세워진 ‘신성’과는 다른 것으로 추정됨. 광개토대왕 9년(399) 모용희(慕容熙)에 의해 남소성(南蘇城)과 함께 함락된 신성과 양원왕 7년(551) 돌궐에 의해 백암성(白巖城)과 함께 공격당한 신성은 수·당대 고구려원정에 보이는 ‘신성’과 동일하며 모두 고이산성을 가리킨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음. 즉 고국원왕 5년 이후 ‘신성’이 연(燕)과 당(唐) 등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등장하는 것은 신성이 고구려의 방어체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시사하는 것임. 王绵厚(1993)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서진(西晋)은 성립초기에는 동북지역에 대한 통치가 비교적 약했는데, 고구려가 이같은 정세를 이용해서 서진(西進)하여 혼하 및 요하지역에까지 이르렀다고 추정함. 그러므로 고이산성의 수축연대는 서진(西晋)이 건국된 266년에서 신성이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276년 사이로 추정할 수 있음. 溫秀榮·張波(1996)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고구려 초기산성은 대부분 가파른 절벽을 천연성벽으로 삼았음. 인공벽이 가파른 절벽에 축조된 경우는 드물게 보이고, 주로 틈(缺口)을 막거나 높이가 낮은 산등성이에 축조함. 인공벽의 높이는 3~6m로 높음. 성벽건축재는 주로 쐐기형 돌로 외벽을 구축하였고, 안에는 잡석을 채웠음. 성문 옹성의 평면은 대부분 장방형이고, 각요대(角瞭臺)는 명확히 구분됨. 유물은 극히 적게 보이는데, 모래혼입 홍갈색 토기편이 출토되기는 하나 기와류는 보이지 않음. 그리고 생활용기 등이 출토되기도 함. 이로 볼 때, 태자성 내성(太子城 內城), 흑구산성(黑溝山城), 전수호산성(轉水湖山城), 삼송산성(杉松山城) 등이 초기 산성에 속함. 고구려 중기 산성의 특징은 산등성이와 초벽장 위에 일률적으로 돌로 성벽을 축조하였음. 일반적으로 저지대는 성벽을 높게 쌓았음. 반면 초벽과 절벽에는 높이 약 1~1.5m의 낮은 벽을 축조하였는데, 그 기능은 성가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음. 성문은 대부분 안으로 오므라드는 U형 옹문임. 성벽 건축재는 쐐기형 돌과 잡석이 대부분을 차지함. 외벽은 초기 산성의 외벽과 달리 정연함. 또한 건축재 가운데 쐐기형 돌이 발전한 단조석(短條石)이 출현함. 다만 더욱 정교하게 가공된 한쪽은 넓고 한쪽은 좁은(頭大尾細) 쐐기형 돌은 여전히 남아 있음. 성에서 출토된 유물은 초기 산성보다 풍부함. 수키와, 암키와, 녹색유약이 발라진 자기편, 철촉, 분(盆), 반(盤), 옹(瓮), 단지 등 회색토기편 등이 출토됨. 이 시기의 연대는 위진(魏晋) 이후임. 오룡산성(五龍山城)과 태자성 외성(太子城 外城)이 중기 산성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음. 고구려 후기 산성은 산등성이를 따라 토벽 혹은 토석혼축벽을 쌓았음. 문호(門戶) 혹은 방어가 취약한 부분에는 흙을 다진 성벽을 크고 높게 쌓았고, 석축벽은 볼 수 없음. 각망대(角望臺)는 일률적으로 흙을 다져서 축조한 봉화대로 변화함. 출토유물은 초기~중기보다 매우 다양함. 고이산성과 쌍립산성(雙砬山城)이 이 시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진(晋)~당(唐)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됨. 여호규(1999)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신성(고이산성)이 위치한 혼하 연안의 무순일대는 요동평원과 요동 동부 산간지대의 접경지대로서 압록강 중류일대 요동평원으로 나아갈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전략적 요충지임. 이에 고구려는 일찍부터 소자하와 혼하를 거쳐 요동지역과 왕래하였음. 특히 1세기 말~2세기 초 영릉진(永陵鎭) 일대의 제2현토군을 혼하 방면으로 쫓아내고 소자하 연안을 장악한 다음, 혼하를 통해 제3현토군 등을 끊임없이 공격하거나 이들과 왕래함. 이에 중국측 군현세력도 제3현토군을 거점으로 삼아 혼하·소자하 연안로를 통해 고구려와 그 주변 족속을 침공하였음. 3세기 중반 관구검이 혼하와 소자하를 거슬러 혼강으로 진입한 다음 신개하(新開河)와 판차령(板岔嶺)을 거쳐 환도산성에 입성한 것으로 보아, 2~3세기경 고구려는 혼하 연안로를 통해 중국세력과 공방전을 벌였고, 아직 혼하 연안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추정됨.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고구려는 296년 신성을 전초기지로 삼아 모용선비(慕容鮮卑)의 침입을 방어하고, 335년 신성을 축조함. 모용부(慕容部)는 309년경부터 요동지역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319년 요동지역을 장악하여 고구려와 국경을 접한 만큼 296년에 고구려 수도까지 진격하였다고 보기는 힘듦. 그렇지만 고구려가 제3현토군을 대대적으로 공략한 302년~315년에는 동부 산간지대 곧 고이산성 위쪽의 혼하 연안일대를 장악하였올 가능성이 높음. 고구려는 대체로 4세기 초에 혼하 연안으로 진출하여 신성을 축조한 것으로 추정됨. 王綿厚(2002)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동문 남벽에 있던 성돌을 보면, 크거나 쐐기형 돌임. 성벽은 성 기단층에서 정상부까지 층층히 쌓았고 벽심(墻芯)은 깬돌로 채워 넣었음. 이러한 성벽 축조방식은 고구려 중기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음. 佟達(2003)은 276년 이전으로 추정함. 张福有(2004)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고구려의 신성은 세 곳이 있었음. 첫 번째 신성은 집안 양민촌(集安 良民村)에 있고 247년에 축조함. 두 번째 신성은 유하현 나통산성(柳河縣 羅通山城)이고 335년에 축조함. 세 번째 신성은 무순 고이산성이고, 고국양왕시기 즉 384년~391년 사이에 축조함. 曹德全(2004)는 385~400년 사이로 추정함. 肖景全·鄭辰(2007)은 고이산성이 고구려 후기 산성에 속한다고 봄. 성은 고구려가 통제했던 범위의 서쪽에 위치함. 고구려가 끊임없이 서쪽으로 진출하면서 축조하였기 때문에 축조연대는 그리 이르지 않음. 아마도 4세기 말에 축조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고, 3세기에 축조되었던 신성은 고이산성이 아님. 梁志龍·魏海波(2008)은 신성(고이산성)의 축조연대를 396년, 고구려 광개토대왕 6년으로 볼 수 있고, 이전의 문헌에 보이는 신성은 고이산성이 아니라고 봄. 국가문물국(2009)은 296년보다 늦지 않다고 추정함.자연환경 무순시구 북교(撫順市區 北郊) 혼하(渾河) 북안 2㎞에 위치한 해발 154m의 고이산(高爾山) 위에 위치함. 제고점(制高点)은 장군봉(將軍峰)인데, 무순시구의 최고봉이기도 함. 고이산 정상에 올라가보면, 주변이 탁 트여 있어 산성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옴. 고이산성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지형에 위치하면서 혼하 연안의 교통요충지를 통제할 수 있음. 고이산성에서 혼하 하류를 따라 서남쪽으로 나아가면 광활한 요동평원이 전개되는 반면, 혼하 상류를 거슬러 동북쪽으로 나아가면 요동 동부 산간지대로 진입할 수 있음. 즉 고이산성은 요하평원과 요동산지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음. 혼하에서 소자하(蘇子河)를 거쳐 고구려 초기중심지인 혼가유역으로 나아갈 수 있고, 송화강 상류를 거쳐 동북쪽으로 계속 나아가면 부여 중심지였던 길림지역에 도달할 수 있음. 또한 북쪽으로 철령(鐵嶺)방면으로 나아가면 요하 중상류로 통할 수 있음. 고이산성은 요동평원에서 초기 중심지인 압록강 중류일대로 진입하는 길목일 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전략적인 요충지인 것임. 고이산에서 남쪽으로 0.5㎞ 떨어진 지점에 무순성(撫順城)이 있음. 산성 동쪽으로 1.5㎞ 떨어진 지점에 시가가 고구려고분군(施家街高句麗墓群)이 있음. 고이산 서남쪽으로 2㎞ 떨어진 지점에는 장군보(將軍堡)가 있음. 남쪽으로 2㎞ 떨어진 지점에 혼하(渾河)가 있음. 무서하(撫西河)가 산성 북쪽과 동쪽을 지나 남쪽으로 혼하로 유입됨. 산성 주위는 험준한 산과 구릉에 의해 둘러싸여 있음.유물정보 청동제 장식구(靑銅飾金具) 1점, 청동제 대금구(靑銅帶金具) 1점, 철제 화살촉(鐵鏃) 67점, 철제 못(鐵釘) 20점, 철제 찰갑편(鐵札甲片) 6점, 철제 모(鐵矛) 5점, 철제 칼(鐵刀子) 1점, 철제 축수금구(鐵軸受金具) 1점, 철제 작살(鐵銛先) 1점, 철기(鐵器) 2점, 호(壺) 3점, 호(罐) 7점, 발(鉢) 1점, 옹(瓮) 16점, 완(碗) 9점, 반(盤) 6점, 동이(盆) 5점, 접시(碟) 1점, 뚜껑(器蓋) 1점, 시루(甑) 3점, 토기 구연부(土器口沿部) 1점, 토기 동체부(土器胴體部) 1점, 토기(土器) 2점, 와당(瓦當) 15점, 연화문와당(蓮花紋瓦當) 1점, 수키와(筒瓦) 7점, 암키와(板瓦) 7점, 시유장식와(釉裝飾瓦) 2점, 벽돌(塼) 2점, 개원통보(開元通寶) 2점, 태평통보(太平通寶) 1점, 천희통보(天禧通寶) 1점, 천성원보(天聖元寶) 1점, 원풍통보(元豊通寶) 1점, 명기(明器) 1점, 가락바퀴(紡輪) 4점, 토제품(土製品) 11점, 회반죽 조각(灰浆片) 3점, 철제 가래(鐵鏵) 2점, 철제 보습(쟁기; 鐵犁) 2점, 철제 괭이(鐵鎬) 2점, 철제 호미(鐵鋤) 1점, 철제 도끼(鐵斧) 2점, 철제 수레바퀴굴레축(鐵車輨) 3점, 철제 등자(鐵登子) 1점, 철제 솥(鐵鍋) 2점, 동제 대과(銅帶銙) 1점, 철제 투구(鐵冑) 1점, 철제 요도(鐵腰刀) 2점, 철제 도격(鐵刀格) 1점, 철제 도(鐵刀) 1점, 철제 도자(鐵削) 4점, 철제 창고달이(鐵鐏) 2점, 철제 마름쇠(鐵蒺藜) 1점, 철제 다리(鐵足) 1점, 철제 삽(鐵揷) 1점, 철제 낫(鐵鎌) 1점, 철제 살포(鐵鏟) 1점, 철제 투환(套環) 1점, 철제 비(鐵鼻) 1점, 철제 과대(鐵銙帶) 1점, 철제 부속품(鐵附屬品) 1점, 철제 추(鐵錐) 1점, 거북이 다리조각(龜趺) 1점, 돌구슬(礫石球) 1점, 와제품(彈丸) 1점, 도제장식편(龍爪文殘飾件輪) 1점, 토제품(獸面形陶構件) 2점, 토제품(陶飾件) 1점, 토제품(鳳首形陶飾件) 1점참고문헌 · 渡邊三三, 「高句麗の新城發現」『滿蒙』 14-9, 不二出版, 1933 · 李文信, 『遼寧史迹資料』, 遼寧省博物館, 1962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再探」『北方文物』 1995-3, 1964 · 鄭辰, 「撫順市高爾山山城在調査發掘中」『遼寧文物』 1984-3, 1984 · 陳大爲, 「撫順市高爾山山城遺址」『中國考古學年鑒』, 文物出版社, 1984 · 孫力, 「撫順高爾山高句麗山城址」『中國考古學年鑑』, 文物出版社, 1985 · 孫力, 「撫順市高爾山城」『中國考古學年鑒』, 文物出版社, 1986 · 徐家國·孫力, 「遼寧撫順高爾山城發掘簡報」『遼海文物學刊』 1987-2, 1987 · 王绵厚, 「“玄菟”與“新城”新解」『遼海文物學刊』 1988-2, 1988 · 李甸甫, 「高句麗新城的始築年代」『遼海文物學刊』 1988-2, 1988 · 田村晃一, 「高句麗のについて」『百濟文化』 18, 1988 · 孫進己·馮永謙, 『東北歷史地理』 (二), 黑龍江人民出版社, 1989 · 三上次男, 「東滿風土雜記」『高句麗と渤海』, 吉川弘文館, 1990 · 王綿厚·李建才, 『東北古代交通』, 沈陽出版社, 1990 · 陳大爲, 「撫順高爾山城結構布局辨析」『遼海文物學刊』 1992-2, 1992 · 佟達, 「關于高句麗南北交通道」『博物館研究』 1993-3, 1993 · 王綿厚, 「玄菟與新城新解」『瀋陽文物』 1993-1, 1993 · 三上次男·田村晃一, 『北關山城』, 中央公論美術出版, 1993 · 辛占山, 「遼寧境內高句麗城址的考察」『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魏存成, 『高句麗考古』, 吉林大學出版社, 1994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林直樹, 「中國東北部の高句麗山城」『靑丘學術論集』 5, 1994 · 張正巖·王平魯, 「新城道及新城道上諸城考」『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東潮·田中俊明, 『高句麗の歷史と遺跡』, 中央公論社, 1995 · 王禹浪, 「中國東北地區古城文化遺跡概述」『黑龍江民族叢刊』 1995-4, 1995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再探」『北方文物』 1995-3, 1995 · 盧泰敦, 「5~7세기 고구려의 지방제도」『韓國古代史論叢』 8, 韓國古代社會硏究所, 1996 · 溫秀榮·張波, 「關于撫順地區的高句麗山城」『博物館研究』 1996-1, 1996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高句麗渤海硏究集成』 高句麗 卷(三), 哈爾濱出版社, 1997 · 李殿福, 「高句麗山城硏究」『北方文物』 1998-4, 1998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李曉鐘, 「石台子山城發現與研究」『東北地區三至十世紀古代文化學術討論會論文』, 2000 · 郝武华, 「高尔山城考」『中國地名』 2002-2, 2000 · 佟達·張波, 『撫順高爾山城2區遣蹟的再認識』 『高句麗研究』 12, 고구려발해학회, 2001 · 魏存成, 「近年來我國高句麗考古的主要發現與硏究」『東北亞論壇』 2001-1, 2001 ·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魏存成, 『高句麗遺跡』, 文物出版社, 2002 · 曹德全, 『高句麗史探微』, 中華國际出版社, 2002 · 傳達, 『高爾山』, 遼寧民族出版社, 2003 · 張福有, 「高句麗第一個平壤城在集安良民卽國之東北大鎭-新城」『東北史地』 2004-4, 2004 · 曹德全, 「高尔山上的新城建于何時」『撫順歷史之謎』, 大連出版社, 2004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2007 · 肖景全·鄭辰, 「撫順地區高句麗考古的回顧」『東北史地』 2007-2, 2007 · 梁志龍·魏海波, 「高尔山城始筑年代考辨」『東北史地』 2008-3, 2008 · 國家文物局,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 西安地圖出版社, 2009 · 魏存成, 「中國境內發現的高句麗山城」『社會科學戰線』 2011-1, 2011

  • 리스트여닫기 노동공원고성(勞動公園古城) 출토지 요녕성 무순시(遼寧省 撫順市)연대 한(漢)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35도변삼삼, 호전관, 재등무일(渡辺三三, 戸田寛, 齋藤武一)성지를 발견하고, 제3현토군 군치(第3玄菟郡 郡治)로 비정하였음.1937 1935년에 誉ヶ丘에 온천장인 호박천(琥珀泉)이 신축될 때, 흙 중에서 다량의 기와편과 토기편과 더불어 전축(塼築)유적이 발견되었는데, 공사가 계속 진척되면서 매몰되었기 때문에 호박천 옆에서 간단한 발굴을 시행하였음.1938지내굉(池內宏)성이 위치한 구릉이 공원 건축공사 때문에 원형을 잃어버려서 위치를 확인하기 어려웠음. 규모가 큰 한대(漢代) 토성지라고 보고 제3현토군 군치(郡治)로 비정함.1960 핸대(漢代) 성의 기초가 발견됨.1977 6개 지구를 발굴하면서 유물들을 출토함.1978무순시박물관(撫順市博物館)봄, 고성 내에 5×5m의 트렌치 6개를 팠음.1981무순시박물관 고고대(抚顺市博物馆考古队)봄, 무순시 노동공원 안 서북모서리에 스케이트장을 만들 때 고대유물이 발견됨. 무순시박물관이 조사할 때, 배면은 승문·정격자문·사정격자문이고 내면은 포문이 펼쳐진 홍색 암키와, 수키와 등이 발견되었는데, 고구려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함.1985왕면후, 손력(王綿厚, 孫力)기초공사현장에서 흙을 다진 한대(漢代) 성 기단을 발견하였는데 규모가 비교적 작았음. 성지는 현대건물 아래에 있었음.구조특징 현재 중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노동공원고성(勞動公園古城)이라고 부르고 있음. 하지만 노동공원은 과거 ‘霊ケ丘’에 한정되어 있었고, 토성이 어디까지 뻗어 있었는지는 불명확하지만 ‘誉ヶ丘’에서도 확인되므로 영안대고성(永安台古城)이라고 부르자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함(田中俊明,1994). 성지는 중심 시가지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성벽은 대부분 파괴되었음. 성내 가운데 부분은 도로가 동서로 통과하면서 성벽이 파괴되고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음. 높은 곳에 올라가면 전체적인 윤곽을 희미하게 확인할 수 있음. 성은 높은 언덕에 위치하며, 성의 세 면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가장자리는 평탄하고 개활함. 남북은 높고 중간은 평평하고 완만함. 평면은 장방형이고, 방향은 남북향임. 한대(漢代) 문화층의 두께는 약 40㎝ 정도임. 성벽은 토축으로, 흙을 쌓아 올린 다음 판축을 조금 가하는 형태로 구축함. 성벽의 기단부는 적지 않은 구간이 절단되었는데, 암반 위에 기단부를 축조하였음. 성벽 기단부의 너비는 7m 정도로 일정하지 않음. 1950년대 이래 발굴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한위(漢魏)대 유물들이 대거 출토됨. 출토된 한대(漢代) 유물은 황화유역의 후한(後漢)대 성지에서 나온 유물과 같음. 산성이 위치한 구릉지대는 예부터 적색마연토기, 채문토기 등 토기편과 기와편의 산포지로 알려져 있음(戶田寬, 1937). 1935년에는 구릉에 온천장인 호박천(琥珀泉)이 신축될 때, 흙 중에서 다량의 와편과 토기편이 출토됨. 후한대의 토기는 대부분 니질의 회색으로, 소성온도가 높고 물레로 제작함. 기형으로는 호, 단지, 바리, 굽접시 동이, 병, 솥, 시루(甑) 등이 있음. 한대의 ‘千秋萬歲’명 와당과 운문와당, 회색 승문 암키와·수키와 등이 출토됨(王綿厚, 2002). 정면이 승문·정격자문·능격문이고, 내면은 포문이 펼쳐진 홍색 암키와, 수키와 등이 발견되었는데 고구려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함(肖景全·鄭辰, 2007). 호박천(琥珀泉) 근처에서 후한대 오수전(五銖錢)이 출토됨. 무순시 노동공원고성 공원사무소와 호박천 사이의 숲에서 적색의 소토덩어리(燒土塊), 목탄편 등이 발견되었음.역사적 의미 공원 내에서 고구려 시기의 붉은색 승문·격자문 기와가 대량으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가 한대(漢代)의 성지를 중축하거나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보여짐. 고구려의 남협도(南陜道) 상에 있는 고성으로 보기도 함(徐家國, 1996). 池內宏, 八木奘三郞, 李文信, 徐家國(1996) 등은 한대 제3현토군 군치(郡治)로 비정함. 여호규(1999)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2~3세기경 제3현토군은 고구려·부여 등을 견제하기 위한 전초기지였음. 제3현토군 치소는 혼하 연안 가운데 고구려나 부여를 적극적으로 견제하고 방어할 수 있는 지역에 구축하였을 것으로 추정됨.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제3현토군의 치소로 혼하 연안 평원의 동북단으로서 동부 산간지대와 접경지대인 노동공원고성이 가장 유력함. 그런데 고구려는 4세기 초 혼하 일대를 장악한 다음 노동공원고성 맞은편에 신성(고이산성)을 구축하고 요동 진출의 전초기지로 삼았음. 이와 동시에 302년, 315년에 제3현토군을 공격하는 등 요동지역 패권을 놓고 선비 모용부와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음. 그런데 전연(前燕)에서 현토태수를 역임한 인물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4세기 전반 전연은 현토군을 계속 설치하였다고 추정됨. 그러므로 고구려가 혼하 중류 일대를 장악한 이후에도 노동공원고성에 계속 제3현토군 치소를 두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음. 제3현토군 치소가 본래 노동공원고성이었다면, 신성 축조 이후에는 서쪽으로 옮겨졌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음. 제3현토군 치소를 옮긴 시기를 2세기 말경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기원전 107년 현토군이 설치된 이래 고구려의 성장에 따라 그 치소가 끊임없이 서쪽으로 쫓겨난 만큼 제3현토군 치소도 고구려와의 관계에 따라 다시 한번 옮겨졌다고 추정되는 것임. 이 경우, 고구려가 혼하 북안에 신성(고이산성)을 구축하여 요동진출의 전초기지로 삼았던 시기에 제3현토군 치소를 다시 한 번 옮겼을 가능성이 높음. 즉 노동공원고성에 설치하였던 제3현토군은 신성이 구축되던 4세기 초를 전후한 시기에 다시 한번 서쪽 곧 상백관둔고성(上伯官屯古城) 일대로 옮겨졌을 것으로 추정됨. 이 경우에도 문제는 있음. 『주서』고려전에서 6세기 중반 현토성(玄菟城)은 고구려의 대표적인 지방성으로 거명되었고, 645년에도 현토군은 신성과 함께 당군의 집중공격대상이었음. 이러한 사실은 고구려가 요동평원으로 진출한 다음 제3현토군(또는 제4현토군)의 치소를 요동군의 치소였던 요동성처럼 재사용하였음을 보여줌. 그런데 위의 혼하 연안 평지성 가운데 고구려 시기 유물이 출토된 곳은 노동공원고성과 동주소갑방고성(東州小甲邦古城)임. 따라서 제3현토군 치소가 다시 한번 변경되었다 하더라도 현재까지의 고고학 발굴성과만 놓고 본다면, 고구려 현토성은 노동공원고성일 가능성이 가장 높음. 王綿厚(2002)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출토유물로 볼 때, 고구려가 신성을 축조하기 전의 한대 현토군의 수비성(守備城)으로 보임. 이후 고구려가 신성을 축조한 이후에는 평지성으로 이용한 것으로 추정됨.자연환경 무순 노동공원고성은 무순 시가 중심부(撫順 市街 中心部)에서 약간 동쪽에 있는 노동공원 산언덕에 위치함. 노동공원고성은 요동평원과 동부 산간지대의 접경지역에 위치함. 혼하 연안 대평원지대의 동북단으로서 혼하를 따라 동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천산산맥(千山山脈)·용강산맥(龍崗山脈)과 길림합달령(吉林哈達嶺) 일대의 산간지대로 접어들게 됨. 특히 혼하(渾河)에서 소자하(蘇子河)를 거쳐 고구려 초기 중심지인 혼강유역으로 나아갈 수 있고, 송화강 상류를 거쳐 동북쪽으로 계속 나아가면 부여 중심지였던 길림지역에 도달할 수 있음. 또한 북쪽으로 철령(鐵嶺)방면으로 나아가면 요하 중상류로 통할 수도 있음. 노동공원고성은 요동평원에서 고구려 초기 중심지인 압록강 중류일대로 진입하는 길목일 뿐 아니라 여러 방면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임(여호규, 1999). 동남으로는 요동산구(遼東山區)에서 오는 적들을 방어할 수 있고, 서쪽으로는 개활한 혼하평원(渾河平原)을 통제할 수 있으며, 북쪽으로는 혼하와 접해 있는 등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음. 성에서 혼하 건너편 고이산성(신성)까지의 거리는 2㎞임. 성에서 2㎞ 떨어진 지점에 한대(漢代) 고분군이 있음. 노동공원고성은 혼하에 걸려 있는 영안교(永安橋) 동남의 낮게 이어지는 세 개의 구릉에 위치함. 현재 가장 북쪽의 무순 우의빈관(撫順友誼賓館)이 건설되어 있는 구릉은 이전 만주국시대(満洲國時代)에는 ‘誉ヶ丘’라고 불리었음(그 위에 충혼비(忠魂碑)가 서 있던 관계로 지금의 해방기념비(解放記念碑)가 건설됨). 도로를 사이에 두고 남측에는 있었던 구릉은 과거에 ‘霊ヶ丘’라고 불리었는데(여기에 무순탄산순직비(撫順炭鏟殉職碑)가 건설되었던 관계로 지금도 순직비(殉職碑)가 서 있음), 현재는 노동공원으로 변모하였음. 남쪽은 과거에 ‘泉ヶ丘’라고 불렸던 구릉(정수장(浄水場)이 있었음)으로 이어짐. 이 세 구릉을 아울러서 영안대(永安台)라고도 불렀음(田中俊明, 1994). 고성이 위치하고 있는 산언덕은 노호대산(老虎臺山)에서 이어졌고, 혼하 남안까지 이르러 높이 4m 가량의 초벽(峭壁)이 형성되어 있음. 그 초벽은 조어대(釣魚臺)라고 부르고 있는데, 만주국시대에는 영안공원(永安公園)이라고 불렀음(王禹浪·王宏北, 2007). 성지가 위치한 곳은 장백산 여맥(長白山 餘脈)과 혼하 충적평원의 접경지대이고, 남북쪽은 기복 있는 산들이 이어져서 이상적인 천연장벽을 이루고 있음. 고성의 북쪽 171m 지점에 혼하가 서쪽으로 흘러가고 있음.유물정보 운뇌문동경(雲雷文銅鏡) 1점, 동제 화살촉(銅鏃) 1점, 낫(鎌) 1점, 도끼(鐵斧) 1점, 刀(칼) 1점, 철제 화살촉(鐵鏃) 1점, 시루 저부(甑底部) 2점, 시루(甑) 2점, 활석혼입토기(滑石混入土器) 1점, 적색마연토기(赤色磨硏土器) 1점, 채문토기(彩文土器) 1점, 사질토기(沙質土器) 1점, 대부토기(臺付土器) 1점, 유문토기(有文土器) 1점, 와당(瓦當) 4점, 벽돌(磚) 1점, 석제토기(石斧) 1점, 오수전(五銖錢) 1점, 녹각기(鹿角器) 2점, 토추(土錘) 1점, 가락바퀴(紡輪) 1점참고문헌 · 戶田寬, 「撫順永安公園附近に於ける石器及土器類の分布狀況」『滿洲史學』 1-2, 1937 · 齋藤武一, 「撫順永安公園譽ヶ丘遺蹟」『滿洲史學』 2-3, 1938 · 渡邊三三, 『增訂 撫順史話』, 撫順新報社, 1940 · 田中俊明, 「高句麗の興起と玄菟郡」『朝鮮文化硏究』 1, 東京大學文學部朝鮮文化硏究室, 1994 · 徐家國, 「漢玄菟郡三遷址辦石」『中國考古集成』 東北卷 秦漢至三國(二), 北京出版社, 1997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肖景全·鄭辰, 「撫順地區高句麗考古的回顧」『東北史地』 2007-2, 2007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2007 · 國家文物局,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 西安地圖出版社,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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