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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전둔 고분군(前屯 古墳群)

  • 구분
    유적
  • 시대
    고구려
  • 위치
  • 유물번호
    S000856
  • 위치(출토지)
    撫順縣 章党鎭 前屯村
  • 지역
    무순(撫順市)
  • 유형
    고분>봉토석실분
  • 형태사항
    석실 
출토지
무순현 장당진 전둔촌(撫順縣 章党鎭 前屯村)
연대
고구려 중기~말기, 남북조~수당(王增新 1964). 당대로 내려갈 가능성 있음(강현숙 2009)
조사내용
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
1956年 9月~10月, 1957年 10月요령성박물관문물공작대
(遼寧省博物館文物工作隊)
陳大爲, 張彦儒, 王寶善, 董彦明, 李慶發, 馮永謙, 金殿士, 潘景宜, 王增新 등이 조사에 참여함.
1956년 전둔 및 와혼목의 고구려 무덤을 발굴. 전둔에서 13기를 발굴, 와혼목에서 2기를 발굴
1957년 10월에 계속해서 전둔에서 4기를 발굴.
총 19기를 발굴. 출토유물은 70여점.
일찍 파괴당하여 매장방식(葬式) 및 장구(葬具)는 명확하지 않으며, 출토유물은 비교적 적으며 어떤 것은 잔편만이 남아 있음.
구조특징
고분군은 마을 뒤에 위치한 구릉의 앞면에 분포하고 있음. 두 차례에 걸쳐 발굴된 고분은 총 17기임. 이들 고분은 모두 전둔촌 서쪽면의 북쪽 산기슭 앞의 길쭉한 지대 안에 분포하고 있는데 묘지 범위는 동서 길이 165m, 남북 너비 40m에 달함. 무덤과 무덤 사이의 거리는 가장 먼 것이 37.5m, 가장 가까운 것이 1.5m임.
이들 묘장은 방형이 기본적으로 일치하는 것을 제외하고 대다수가 분산되어 매장되어 일정한 배열과 순서가 보이지 않음. 대다수 파괴되어 손상되지 않은 온전한 고분은 거의 드묾.
모두 석축단실묘로 묘정(墓頂)은 대다수 봉토하였음. 대다수 묘실은 지면 위에 축조하였으나 묘실 기저부(基底部)가 지하에 축조되기도 하였으며, 현재 묘정(墓頂) 위의 봉토는 다수가 이미 원형을 상실함. 소수 묘장은 전체 묘실이 지하에 축조되었는데 지표가 쟁기질로 밭으로 개간되면서 이미 봉토흔적은 남아 있지 않음.
묘실의 건축 재료는 모두 가공되지 않은 사암(砂巖)과 혈암(頁巖)의 석판(石板)·석괴(石塊) 및 자갈(河卵石)임. 묘실 구조상 묘실 크기에 따라 선택된 조영방식 역시 다른데 두가지 유형으로 나뉨. 하나는 평천정묘(平蓋頂墓)로 6기가 있으며, 다른 하나는 고임식천정(疊澀頂墓)으로 9기가 있음. 그 나머지 2기는 묘실이 심각하게 파괴당해 그 원형을 알 수 없음.
고분 유형은 평천정묘와 고임식천정묘가 있음. 먼저, 평천정묘(平蓋頂墓)는 보통 묘실의 규모가 약간 작으며 구조는 비교적 간단함. 묘실 평면은 모두 장방형보다 좁음. 묘문(墓門) 및 묘도(墓道)가 없음. 방향은 모두 145-208°임. 묘실은 일반적으로 길이 1.95m~2.37m, 너비 0.49m~0.9m, 높이 0.37m~0.7m임. 네 벽은 대다수 돌(石塊)로 층층히 쌓거나 부분적으로 석판을 받쳐 쌓음. 일부 무덤은 큰 돌로 고르게 배열하여 벽을 쌓음. 묘벽의 안벽은 모두 자못 평평하고 일직선을 이루며, 외벽은 들쭉날쭉 가지런하지 못함. 묘실 정부(頂部)는 비교적 큰 석판을 횡으로 평평하게 덮음. 묘벽과 묘정의 틈새는 작은 돌로 메움. 묘실 바닥은 모두 포석(鋪石)이 없음. 일부 묘실 바닥 위에서는 소량의 목탄이 발견되고 있음. 총 6기의 평천정묘 가운데 16호묘 및 18호묘만이 일찍이 인골이 남아 있는데 모두 단인장(單身葬)임. 각 무덤의 부장품은 모두 매우 적음. 18호묘에서는 작은 도관(陶罐)·철촉(鐵鏃) 각 1점 및 철기 4토막 등이 출토됨. 16호묘에서는 도관(陶罐) 1점, 철제 관못(棺釘) 31점이 출토됨. 12호묘에서는 승문 암키와 잔편 1점이 출토됨. 그 외 3기에서 각기 토기 잔편 1~3편이 출토됨. 도관(陶罐)은 모두 묘실 앞부분에서 출토됨.
고임식천정묘(疊澀頂墓)의 묘실은 규모가 비교적 크며, 구조는 비교적 복잡함. 묘실 평면은 기본적으로 장방형보다 좁으며, 어떤 것은 근방형임. 석판으로 고임식천정(疊澁式頂)을 쌓았으며, 묘문(墓門)이 있으며, 문 밖에는 간단한 묘도(墓道)가 있음. 방향은 모두 178-220°이며, 일반적인 묘실은 길이 2.05m~2.55m, 너비 1m~1.95m이며, 묘도는 길이 0.85m~1.75m, 너비 0.6m~1.0m임. 묘실 네 벽은 대다수 돌(石塊)로 층층히 쌓았으며, 일부 묘벽은 석판을 세워 쌓았음. 돌은 대다수 비교적 가지런한 한 면을 선택해 내벽면으로 사용했으며, 묘기(墓基)로부터 위쪽으로 점차 안으로 들여쌓았음. 외벽면은 가지런하지 않아 매우 정연하지 못함. 묘정(墓頂)은 큰 석판으로 들여 쌓았는데 위로 갈수록 점차 줄어들어 묘정에 이름. 묘벽과 묘정의 틈새부분은 모두 작은 돌 또는 자갈(卵石)로 메움. 다수의 묘실 바닥은 석판 또는 돌(石塊)로 평평하게 깔았으며, 어떤 것은 석판과 자갈을 혼용하였음. 어떤 고분은 묘실 바닥을 두 층으로 깔았는데 하층은 자갈(卵石), 상층은 석판을 깔았음. 또한 어떤 고분은 자갈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한 층의 백회를 발랐음. 소수의 묘실은 포석(鋪石)하지 않음. 묘문은 전벽 중앙부 또는 좌측에 열려 있음. 묘문 양측에는 대다수 장방형 석조(石條)를 세워 문기둥(門柱)을 만들었으며, 그 위에 석판을 횡으로 괴어 문미(門楣)를 이루며, 그 아래에는 작은 석조(石條)나 자갈(卵石)을 횡으로 놓아 문턱(門檻)을 이룸. 문 밖의 묘도 양벽은 대다수 돌(石塊)로 층층히 쌓거나 큰 돌(大石塊)을 세웠으며, 위에는 석판 또는 돌(石塊)을 괴어 천정을 이룸. 대다수 묘도의 바닥은 포석(鋪石)하지 않으며, 일부만이 석판 또는 자갈로 깔음.
총 9기 가운데 일찍이 인골이 남아 있는 것은 3기임. 그 가운데 단인장인 1기(10호묘)에는 묘실 앞부분에 치아 2매, 뒷부분에는 대퇴골(股骨) 1토막이 남아있음. 이 고분은 교란되지 않았고 머리는 남쪽, 다리는 북쪽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앙신직지장(仰臥平伸葬)이며, 성별은 명확치 않음. 2인장인 1기(15호묘)는 유골의 보존상태가 양호하나 대다수 교란되어 두개골 2개와 남성 하지골은 이미 후벽 아래로 이동되었음. 그러나 묘실 우측의 여성의 팔다리뼈(肢骨)가 원래 위치에 보존되어있는데 머리는 남쪽, 다리는 북쪽에 두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어 앙신직지장(仰臥平伸葬)인 부부합장묘로 추정됨. 3인장인 1기(17호묘)는 유골 3구의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며, 원래 위치에 보존된 일부 팔다리뼈(肢骨)와 그다지 변동되지 않은 3개 두개골을 관찰해보면 중간자가 남성이고 양측이 여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음. 모두 머리는 남쪽에 두고 다리는 북쪽에 두는 앙신직지장(仰臥平伸葬)임.
각 무덤의 부장품은 수량이 매우 적으며 토기가 주를 이룸. 9호묘에서 사이도관(四耳陶罐) 1점, 13호묘에서 녹색시유도기(茶綠釉陶罐) 1점 및 심발형토기(大口深腹陶罐) 2점, 15호묘에서는 손상된 호(陶罐) 1점, 7호묘에서 허리띠꾸미개(銅帶飾) 2점, 17호묘에서 청동 팔찌(銅鐲) 1점이 출토됨. 그 나머지 4기에서는 각기 토기 잔편 1~4 조각이 남아 있음. 토기는 모두 묘실 앞부분에서 출토됨.
역사적 의미
전둔 고분군은 함께 발굴한 와혼목 고분군과 거리는 있지만 구조 및 건축재 등이 서로 동일함. 부장품 역시 니질 토기, 시유 도기, 장식품의 재료, 제작기법, 양식과 무늬모양 등이 모두 동일함. 이런 정황은 비록 두 지역으로 나뉘어 분포하나 동일계통의 유적임을 알 수 있음.
묘장 구조상 고임식천정묘(疊澀頂墓)는 환인 및 관전 등의 동일 유형 고구려 고분과 동일한 특징을 갖추고 있음. 부장 유물상, 토기 형식는 비교적 위·진 작풍에 가까우며 환인 혼강 고구려 무덤에서 출토된 것과 대동소이함. 철촉의 형식은 집안 고구려 무덤 및 무순 고이산성(撫順 高爾山城) 출토의 것과 기본적으로 동일함. 다만 봉인(鋒刃)은 집안에 비해 약간 좁고, 고이산성의 것에 비해 대체로 넓음.
장식(葬式)에서 고임식천정묘에서 인골은 대다수가 3인 합장이며, 1인 단인장은 소수임. 평천정묘의 묘실은 모두 매우 좁고 작아 모두 단인장임. 인골은 모두 앙신직지장(仰臥平伸葬)이며, 부부합장묘는 남자가 우측, 여자가 좌측에 자리하고 있음. 인골의 머리 방향은 절대다수가 남향임. 그 가운데 머리가 묘문을 향하는 장법은 확연히 기타 지구에서 머리가 후벽을 향하는 장법과 다른 점임. 이는 당시 해당지역에서 유행하던 일종의 매장습속으로 추정됨. 묘장이 간단하고 협소하여 부장품은 매우 적거나 거의 없으며, 기물(器物) 유형도 간단하며, 소수 무덤에서 1·2점의 장식품이 부장되는 것을 제외하면 모두 토기임. 이들 묘장의 대다수는 일반인의 무덤으로 추정됨.
이들 묘장의 연대에 대해 추측하면 자료가 비교적 적어 각 무덤의 명확한 연대를 확정할 수 없음. 총괄해 보면 그것들은 고구려 중기에서 말기, 즉 남북조에서 수당 때로 추정함(王增新 1964). 그리고 강현숙(2009)은 전둔 7호묘에서 출토된 대금구는 당식(唐式) 대금구로 고구려로 보기 어려다고 함. 전둔과 와혼목의 고분이 비슷한 양상임을 감안해 볼 때 와혼목고분은 고구려 보다는 당대(唐代)로 내려갈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봄.
자연환경
무순현 장단진 전둔촌 서북에 위치.
무순시 동쪽 혼하(渾河) 북안의 강변 평지 위에 위치함. 전둔(前屯) 서북으로는 장당(章党)역과 7㎞ 떨어져 있으며, 동북 7㎞ 거리에는 와혼목(洼渾木)이 있음. 전둔과 와혼목 사이에는 산등성이 하나와 서사와촌(西沙窩村)이 있으며, 이 일대는 혼하 중·상류의 구릉지대임. 와혼목과 전둔은 모두 혼하를 향해 있으며 뒤로는 구릉을 등지고 있음.
유물정보
인골(人骨) 2점, 심발형토기(陶罐) 3점, 호 저부편(陶罐) 1점, 녹색시유도(茶綠釉陶罐) 1점, 사이도관(四耳陶罐) 1점, 화살촉(鐵鏃) 1점, 철편(不明鐵器) 4점, 사미(鉈尾) 1점, 허리띠고리(帶銙) 1점, 팔찌(銅鐲) 1점, 관정(棺釘) 31점 等
참고문헌
· 王增新, 「遼寧撫順市前屯·窪渾木高句麗墓發掘簡報」『考古』 1964-10, 1964
· 肖景全·鄭辰, 「撫順地區高句麗考古的回顧」『東北史地』 2007-2, 2007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上·下), 西安地圖出版社, 2009
· 肖景全·鄭辰, 「三十年來撫順地區的高句麗考古發現與相關問題硏究」『高句麗與東北民族硏究』, 吉林大學出版社, 2009
· 강현숙, 「高句麗 故地의 渤海 古墳 - 中國 遼寧地方 石室墳을 中心으로」『韓國考古學報』 72, 한국고고학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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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둔 고분군(前屯 古墳群) 자료번호 : ku.d_0001_0070_003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