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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스트여닫기 동주구(東洲區)

    • 동주고성(東州古城)

    • 리스트여닫기 마화사산성(馬和寺山城) 출토지 요녕성 무순현 동주구 애반향 정장자촌(遼寧省 撫順縣 東洲區 礙盘鄕 丁庄子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1 발견됨.2004 봄, 순성구 연반향 정장자촌(順城區 碾盘鄕 丁庄子村) 촌민 정모(丁某)가 마을 서쪽에 있는 용두산(龍頭山) 위에 양조장을 건설할 때, 오래된 우물 한 개를 발견함.구조특징 산성은 하곡평지와 골짜기 입구 사이에 산세를 따라 축조함.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으며 중간은 들어가 있은 포곡식산성임. 산성의 평면에 대하여 불규칙형(여호규, 1999; 王禹浪·王宏北, 2007), 동서가 긴 마안형[馬鞍形(肖景全·鄭辰, 2007)]이라는 기록이 있음. 성벽에 대하여 토축이라는 기록(孫進己·馮永謙, 1989; 陳大爲, 1995; 馮永謙, 1997; 여호규, 1999; 王禹浪·王宏北, 2007), 토축이지만 일부 구간에서는 돌을 볼 수 있다는 기록(肖景全·鄭辰, 2007), 대부분 토축이라는 기록(王綿厚, 2002; 魏存成, 2002)이 있음. 시공공사가 진행되면서 성내 지표면에서 니질의 흑회색·회색 토기편이 발견됨. 토기편에는 호(壶), 호(罐) 등이 있음. 출토된 토기편의 양은 매우 적음. 기와는 발견되지 않았음. 성안에서 판(板) 형태의 토기 손잡이와 기물 다리(器足)가 출토되었음.역사적 의미 고이산성에서 동쪽으로 혼하와 소자하를 따라 국내성에 이르는 길인 신성도(新城道) 상에 있는 성으로 추정됨(王綿厚, 2002). 위치나 규모로 볼 때, 신성(撫順市 高爾山城)의 외곽위성으로 추정되는데, 무순에서 혼하 지류 연안로를 통해 태자하 상류 일대로 나아가는 교통로를 방어하는 군사적 기능을 담당한 것으로 추정됨(여호규, 1999). 성의 규모가 상당히 큰 것으로 보아 혼하 남쪽 지류 연안일대를 지배하던 거점성으로 추정됨. 667년 이세훈(李世적)의 당군이 함락시켰다는 신성 주변의 16성 가운데 하나일 가능성이 있음(여호규, 1999). 성벽의 구조와 유물을 살펴볼 때, 고구려 후기의 산성임(肖景全·鄭辰, 2007).자연환경 산성의 소재지는 원래 무순시에서 남쪽으로 10㎞ 떨어진 무순현 남부 소동향 마화사촌[小東鄕(小東州) 馬和寺村]에 속하였으나, 동주구 애반향 정장자촌에 편입되어 관할됨. 산성은 동산(東山) 위에 위치함 산성은 혼하 지류의 중류지구에 위치함. 성의 서쪽 동주하(東洲河) 맞은편은 무순현 소동향 마화사촌임. 성의 서쪽에는 하천연안을 따라 무순-본계의 분수령을 넘어 태자하(太子河) 상류일대로 나아가는 지방도로가 지나가고 있음. 성 동남쪽에는 일찍이 축조된 쌍천사(雙泉寺)가 있는데, 최근에 지역주민들이 중건하였음. 서북쪽으로 15㎞ 떨어진 지점에 무순시 고이산성이 있음. 산성이 위치한 곳은 천산산맥에서 혼하방면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의 북쪽 끝자락으로서 혼하 연안평지와 천산산맥 산간지역의 경계지대임. 성의 서쪽에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동주하가 접해 있음.유물정보 호(壶) 1점, 호(罐) 1점, 파수(把手) 1점, 기물 다리(器足) 1점참고문헌 · 孫進己·馮永謙, 『東北歷史地理』 (二), 黑龍江人民出版社, 1989 · 東潮·田中俊明, 『高句麗の歷史と遺跡』, 中央公論社, 1995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再探」『北方文物』 1995-3, 1995 · 馮永謙, 「丹東虎山高句麗遺址」『中國考古學年鑒』, 文物出版社, 1995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高句麗渤海硏究集成』 高句麗 卷(三), 哈爾濱出版社, 1997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魏存成, 『高句麗遺跡』, 文物出版社, 2002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2007 · 肖景全·鄭辰, 「撫順地區高句麗考古的回顧」『東北史地』 2007-2, 2007 · 魏存成, 「中國境內發現的高句麗山城」『社會科學戰線』 2011-1, 2011

  • 리스트여닫기 망화구(望花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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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와혼목 고분군(洼渾木 古墳群)

    • 와혼목 1호묘(洼渾木 1號墓)

    • 와혼목 2호묘(洼渾木 2號墓)

    • 전둔 고분군(前屯 古墳群)

    • 전둔 7호묘(前屯 7號墓)

    • 전둔 9호묘(前屯 9號墓)

    • 전둔 13호묘(前屯 13號墓)

    • 전둔 16호묘(前屯 16號墓)

    • 전둔 17호묘(前屯 17號墓)

    • 전둔 18호묘(前屯 18號墓)

    • 후안 고분군(後安 古墳群)

    • 후안 1호묘(後安 1號墓)

    • 후안 3호묘(後安 3號墓)

    • 리스트여닫기 성자구산성; 북성자구산성; 성자정산성(城子溝山城; 北城子溝山城; 城子頂山城) 출토지 요녕성 무순현 대류향 태평구촌(遼寧省 撫順縣 大柳鄕 太平溝村)구조특징 산성이 위치한 산세는 매우 험준함. 성벽은 산세를 따라 산등성이 위에 돌로 축조함.역사적 의미 산성은 고구려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는 견해(王禹浪·王宏北, 2007)와 고구려유물이 발견되지 않았고 성의 입지선택과 성벽구조가 고구려와 다르기 때문에 고구려산성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가 있음(肖景全·鄭辰, 2007). 고이산성에서 동쪽으로 혼하와 소자하를 따라 국내성에 이르는 길인 신성도(新城道) 상에 있는 성이고, 신성(高爾山城)을 호위하는 위성성(衛星城)으로 추정됨(王綿厚, 2002). 지형 조건으로 보아, 범하(汎河) 연안의 철령 방면에서 무순으로 향하는 교통로를 통제하는 군사적 기능을 담당하였다고 추정됨. 667년 이세적(李世勣)의 당군이 함락시켰다는 신성 주변의 16성 가운데 하나일 가능성이 있음(여호규, 1999).자연환경 무순시에서 북쪽으로 약 10㎞ 떨어진 무순현 북부 대류향 태평구촌 2㎞의 북성자구산(北城子構山)에 위치함. 서남쪽으로 15㎞ 떨어진 지점에 무순시 고이산성이 있음. 산성 북쪽은 길림 합달산(吉林 哈達山)의 여맥(餘脈)이 이어지는데(王禹浪·王宏北, 2007), 동북~서남방향으로 길게 내려뻗은 김림 합달령(哈達嶺) 서남단으로서 요동평원과 만나는 접경지대임. 길림 합달령 서남단 끝자락의 구릉성 산지를 가로질러 범하(汎河)와 혼하(渾河) 연안을 왕래하는 지역인데, 실제 산성 아래로 양 지역을 오가는 지방도로가 개설되어 있음. 산성 아래에는 혼하 지류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무순현성(撫順縣城)에서 혼하로 유입됨.참고문헌 · 孫進己·馮永謙, 『東北歷史地理』 (二), 黑龍江人民出版社, 1989 · 東潮·田中俊明, 『高句麗の歷史と遺跡』, 中央公論社, 1995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再探」『北方文物』 1995-3, 1995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高句麗渤海硏究集成』 高句麗 卷(三), 哈爾濱出版社, 1997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魏存成, 『高句麗遺跡』, 文物出版社, 2002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2007 · 肖景全·鄭辰, 「撫順地區高句麗考古的回顧」『東北史地』 2007-2, 2007 · 魏存成, 「中國境內發現的高句麗山城」『社會科學戰線』 2011-1, 2011

    • 리스트여닫기 서산산성(西山山城) 출토지 요녕성 무순현 합달향 상년촌(遼寧省 撫順縣 哈達鄕 上年村)구조특징 산성은 매우 작음. 성벽을 산등성이를 따라 돌로 축조함역사적 의미 신성(撫順市 高爾山城)의 외곽산성으로 소형의 군사성보(軍事城堡)로 추정됨. 특히 범하 연안의 철령 방면에서 혼하 연안으로 향하는 교통로를 공제하는 군사기능을 담당한 것으로 추정됨. 667년 이세적(李世勣)의 당군이 함락시켰다는 신성 주변의 16성 가운데 하나일 가능성이 있음(여호규, 1999).자연환경 무순시에서 동북쪽으로 약 30㎞ 떨어진 무순현 합달향 상년촌에서 북쪽으로 100m 떨어진 서산(西山) 위에 위치함. 혼하의 지류가 산성 아래에서 서남쪽으로 흘러 혼하로 유입됨. 산성이 위치한 일대는 동북~서남방향으로 길게 내리뻗은 길림 합달령(吉林 哈達嶺) 서남단으로서 요동평원과 만나는 접경지대임. 또한 길림 합달령(哈達嶺) 서남단 끝자락의 구릉성 산지를 가로질러 범하(汎河) 연안과 혼하(渾河) 연안을 왕래하는 지역인데, 실제 산성의 서남쪽으로는 양 지역을 오가는 지방도로가 개설되어 있음.참고문헌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再探」『北方文物』 1995-3, 1995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魏存成, 『高句麗遺跡』, 文物出版社, 2002 · 魏存成, 「中國境內發現的高句麗山城」『社會科學戰線』 2011-1, 2011

    • 리스트여닫기 남장당산성(南章黨山城) 출토지 요녕성 무순현 오룡향 남장당촌(遼寧省 撫順縣 五龍鄕 南章黨村)구조특징 산성이 위치한 동·북·서 세 면 산등성이는 남쪽 골짜기 입구로 모이고 있음. 산성은 산등성이를 따라 축조되었으며, 평면은 의권형(椅圈形)임. 산성의 규모는 매우 작음. 성벽은 토축이라는 기록(陳大爲, 1995; 魏存成, 2002)과 석축이라는 기록(馮永謙, 1997)이 있음.역사적 의미 무순시 고이산성에서 동쪽으로 혼하와 소자하를 따라 국내성에 이르는 길인 신성도(新城道) 상에 있는 산성으로 추정됨(王綿厚, 2002). 산성의 위치와 규모로 볼 때, 신성(高爾山城)의 외곽위성일 가능성이 높음. 특히 무순에서 혼하 지류의 연안로를 통해 태자하 상류를 거쳐 신빈이나 환인방면으로 향하는 교통로를 통제하는 신성 주변의 16성 가운데 하나로 추정됨(여호규, 1999). 산성에 대하여 고구려유물이 발견되지 않았고, 성의 입지선택과 성벽구조 모두 고구려와 다르기 때문에 고구려산성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도 있음(肖景全·鄭辰, 2007).자연환경 무순시에서 동남쪽으로 약 30㎞ 떨어진 무순현 오룡향 남장당촌 동북쪽 300m의 작은 산 위에 위치함. 무순·본계·신빈의 분수령에서 발원한 하천을 따라 무순에서 태자하 상류일대를 거쳐 신빈이나 환인으로 가는 지방도로가 지나감. 산성이 위치한 지역은 혼하 남쪽의 지류 연안으로, 주변에 해발 500m 전후의 산으로 둘러싸여 있음. 무순·본계·신빈의 분수령에서 발원한 하천은 산성 서쪽을 지나 북쪽으로 혼하를 가로막아 만든 대화방(大伙房)댐으로 유입됨.참고문헌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再探」『北方文物』 1995-3, 1995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高句麗渤海硏究集成』 高句麗 卷(三), 哈爾濱出版社, 1997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魏存成, 『高句麗遺跡』, 文物出版社, 2002 · 肖景全·鄭辰, 「撫順地區高句麗考古的回顧」『東北史地』 2007-2, 2007 · 魏存成, 「中國境內發現的高句麗山城」『社會科學戰線』 2011-1, 2011

    • 리스트여닫기 열사산산성(烈士山山城) 출토지 요녕성 무순현 오룡향 후안촌(遼寧省 撫順縣 五龍鄕 後安村)구조특징 산성은 산등성이 위에 축조됨. 평면은 동서가 약간 긴 편임. 성벽은 토축임. 성 서쪽에 작은 위성(衛城)이 있음.자연환경 무순현 동남부 오룡향 후안촌 북쪽 100m의 열사산(烈士山) 위에 위치함.참고문헌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高句麗渤海硏究集成』 高句麗 卷(三), 哈爾濱出版社, 1997

    • 산룡 고분군(山龍 古墳群)

    • 산룡 4호묘(山龍 4號墓)

    • 산룡 5호묘(山龍 5號墓)

    • 산룡 6호묘(山龍 6號墓)

    • 산룡 7호묘(山龍 7號墓)

    • 대서구문 고분군(大西溝門 古墳群)

    • 리스트여닫기 철배산성(鐵背山城) 출토지 요녕성 무순현 장당향 고력영자촌(遼寧省 撫順縣 章黨鄕 高力營子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30도변삼삼, 고교광사랑(渡邊三三, 高橋匡四郞)高橋匡四郞, 1941 「蘇子河流域に於ける高句麗と後女眞の遺跡」『建國大學硏究院硏究其報』2, 建國大學硏究院 으로 발표함.1958 무순시의 역사학자들이 산성과 그 주위를 여러 차례 조사하면서 후금(後金)의 계번성(界藩城)으로 확정함.1979이봉민 등(李鳳民 等) 1984무순시박물관(撫順市博物館)3월에 張正巖, 李繼群, 鄭晨, 張波, 佟達, 王平魯, 朱成, 本楊威(장정암, 이계군, 정신, 장파, 동달, 왕평노, 주성, 본양위) 등이 살이호성(薩爾滸城)과 더불어 조사를 진행함.1984무순시박물관(撫順市博物館)10월에 산성 안에서 건물지 2곳을 정리함.1986 8월 16일에 細谷良夫(세곡량부) 등이 조사함.1987 10월 15일에 세곡량부(細谷良夫) 등이 조사함.1988 9월 3일에 세곡량부(細谷良夫) 등이 조사함.. 성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됨.구조특징 전체적으로 산성 북면은 가파른 절벽이고, 남면은 가파른 구릉임. 산에 올라 내려다보면 살이호성(薩爾滸城)보다 더 험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음. 혼하를 거슬러 후미의 수풀 속에 선착장이 있는데, 산성으로 올라가는 입구임. 폭 1m의 콘크리트 계단이 산 위를 향해 있음. 그 선착장의 계단은 관광용으로 산 정상을 돌기 위한 산책로로 건설되었다가 산 정상부의 사적보존을 위한 개발중단으로 사용되지 않음. 성은 산세를 따라 축조하였음. 내성, 동위성(東衛城), 서위성(西衛城)으로 이루어진 복곽식 산성임(撫順市社會科學院, 1994; 여호규, 1999; 國家文物局, 2009). 평면은 불규칙형임. 철배산성의 내성·동위성·서위성은 동일한 산등성이에 가로방향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각 성은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연계할 수 구조를 갖추고 있음. 내성은 남북이 험준한 지형을 갖추고 있음에 따라 동서 양단(兩端)의 방어에 중점을 두었는데, 동위성과 서위성이 양익(兩翼)에서 내성을 보호하는 기능을 하였음. 비교적 넓은 동위성은 둔병성(屯兵城)이 되었고, 출병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네 개의 문을 설치하였음. 서위성은 소자하와 혼하 합류지점을 통제하면서 직접 적을 맞이하여야 했음. 내성은 아래를 내려다 볼 수 있고 적의 공격은 어렵고 수비는 용이한 지형에 위치함으로서 전체 성의 중추가 되었는데, 바로 이 내성에서 전투계획을 세웠고 응전할 수 있었음(佟達, 1988; 撫順市社會科學院, 1994). 산성이 위치한 산등성이의 지형이 다양하여 초벽장(峭壁墻)·토축(土築)·석파장(石坡墻)·토석혼축벽(土石混築墻) 등 성벽축조방식도 다양하게 나타남. 내성은 철배산 중단 주봉우리에 위치함. 내성은 험준한 산등성이에 축조함. 산등성이는 기복이 심한데, 감제고지(高点) 10여개와 암석이 갈라진 틈이 적지 않게 있음. 암석이 갈라진 틈과 지세가 낮은 곳에는 깬돌과 흙으로 메워 1m 너비의 통로를 만들었음. 내성의 둘레는 2,575m이고, 성의 동서 직선 길이는 1,210m임. 그 가운데 서쪽에서 1,120m의 구간은 대부분 산등성이임. 그 가운데 서쪽에서 1,120m의 구간은 대부분 산등성이임. 동쪽 끝 90m의 구간은 너비 18~20m의 평탄한 산등성이임. 남북 너비는 좁은 곳은 1m, 넓은 곳은 85m임. 동위성(東衛城)은 내성의 동쪽과 연접되어 있고, 주봉우리의 동쪽에서 남쪽으로 뻗은 주봉우리보다 낮은 산등성이의 움푹 들어간 대지에 축조함. 서위성(西衛城)은 철배산 서단 산봉우리에 위치함. 서위성 동쪽의 갑작스럽게 아래로 움푹 들어간 말 안장형(馬鞍形)의 지대는 내성과 서로 마주하고 있음. 남쪽으로 소자하구를 직접 통제할 수 있고, 서쪽으로는 혼하 하곡을 내려다 볼 수 있음. 성내 지세는 서쪽이 낮고 동쪽이 높아서 2단의 대(臺)형태로 나타남. 성 바깥 서쪽 구릉은 약간 완만하고, 성 남측은 절벽임. 성지의 평면은 약간 정방형임. 살이호전투에서 적을 맞이했던 “길림애(吉林崖)”로 추정됨(佟達, 1988). 성벽은 산등성이를 둥글게 휘감고 있음. 성벽은 지표면 40m 이상에 위치해 있는데, 최고 높이는 100m에 달함. 성벽은 청대에 중수된 것임. 내성의 북벽은 인위적으로 성벽을 축조하지 않고 절벽 낭떠러지를 자연성벽으로 삼았기 때문에 초벽장(峭壁墻)이라고 부를 수 있음(佟達, 1988; 撫順市社會科學院, 1994; 여호규, 1999). 남벽은 산험장(山險墻)과 석호파장(石護坡墻)이 결합되어 있는데, 대부분 산험장임. 석호파장은 산비탈에 흙을 깎아서 인공적인 험준한 낭떠러지를 만든 후 다시 돌을 쌓아놓고 경사가 매운 가파른 절벽을 만들었음. 동벽은 호형(弧形)임. 석호파장임. 서벽은 호형(弧形)임. “행궁(行宮)”에서 남쪽으로 “치”로 통하는 돌로 된 성벽을 쌓았는데, 길이는 42.5m, 너비는 1.5m, 남은 높이는 1m임. 동위성의 북부와 동부는 내성의 남벽과 같은 석파장임. 북부와 동부는 내성의 남벽과 같은 석파장임. 남부는 대지 가장자리를 따라 축조하였는데, 흙을 쌓아 심(芯)을 만들고 성돌을 벽체로 한 토석혼축벽임. 동위성의 동벽기단 아래에 쐐기형 돌로 쌓은 고구려 성벽이 있음(孫進己·馮永謙, 1989; 陳大爲, 1995; 王禹浪·王宏北, 2007). 서위성 성벽은 토축으로 땅을 파서 도랑(참호)를 만든 다음 외벽 바깥 구릉에 성돌을 박아서 쌓았음.역사적 의미 철배산성은 청대에 중건되었지만 동위성의 동벽기단 아래에 쐐기형 돌로 축조한 고구려 성벽이 있는 등(孫進己·馮永謙, 1989; 東潮·田中俊明, 1995; 陳大爲, 1995), 고구려성의 특징을 갖추고 있으므로 고구려시대에 시축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음(여호규, 1999; 王禹浪·王宏北, 2007). 반면 고구려의 성벽과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고, 입지 또한 고구려성의 특징을 갖추지 않았으므로 고구려성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도 있음(肖景全·鄭辰, 2007). 철배산성은 명(明)의 변경과 15여㎞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등 명(明)과 후금(後金) 방어상의 천혜의 요지임(李鳳民, 1985) 산성은 산맥 돌출부를 선택하여 산성과 주변 산봉우리가 최대한 잇닿지 않게 하였고, 동시에 지표면과 산 사이의 고도차를 이용하여 산성의 세 면에 병풍작용을 할 수 있는 천연성벽을 형성시켰음. 또한 비교적 좁은 봉요부(蜂腰部) 혹은 지세가 낮고 평평한 곳에 인공적으로 높은 벽을 쌓거나 깊은 호를 파서 성과 외부를 완벽히 격리시킴으로서 산맥과 산성의 연결을 차단하였는데, 이를 통해 산성의 네 방위가 모두 격리되고 밀폐적인 방어시스템을 형성함. 계번성 동위성(界藩城 东卫城) 바깥에 부설된 2단 방수대(防守臺)와 인공호(人工壕)는 바로 차단하기 위한 조치로 주위의 산령(山岭)인 철배산의 연접을 차단하기 위함임. 이것은 산성이 독립적이고 완벽한 방어시스템을 갖추는데 있어서 중요한 조치였음(佟達, 1988). 철배산성은 거주용이라기보다는 전투용 산성으로 추정됨(細谷良夫, 1991). 위치비정에 관한 견해는 다음과 같음. 今西春秋(1935), 高橋匡四郞(1941), 孫進己·馮永謙(1989), 陳大爲(1995), 여호규(1999) 등은 고구려 남소성(南苏城)으로 추정하고 있음. 今西春秋(1935)은 남소성은 소자하와 혼하 합류지점에서 찾을 수 있는데, 살이호산성(薩爾滸山城)과 더불어 철배산성이 유력한 후보지가 될 수 있다고 봄. 孫進己·馮永謙(1989)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남소(南蘇)’는 『한서』지리지 현도군 고구려현조에 처음 나오는데, ‘요산(遼山)에서 요수(遼水)가 나오고 서남으로 요대(遼隊)에 이르러 대요수(大遼水)로 들어간다. 또한 남소수(南蘇水)가 서북으로 새외(塞外)를 경유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음. 요수가 대요수로 들어간다고 한 것으로 보아 소요수(小遼水)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의 혼하로 추정됨. 즉 남소수는 혼하와 가까운 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임. 또한 서북으로 경유한다는 새외는 신빈 고구려현[영릉진고성; 新賓 高句麗縣(永陵鎭古城)]임.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 볼 때, 남소수는 소자하(蘇子河)로 추정됨. 남소성은 진대(晉代)에 처음 보이는데, 『진서』재기(載記) 권9와 『자치통감』권 97에 ‘모용각(慕容恪)이 고구려 남소성을 차지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음. 원 호삼성(元 胡三省)의 주(注)에는 ‘남소성은 남협(南陜)의 동쪽에 있다. 당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남소주(南蘇州)를 설치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음. 한편 『한원』번이부(蕃夷部) 고려조에는 ‘남소성은 국(國) 서북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고려기』에는 ‘신성(新城) 북쪽 70여 리의 산위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음. 요해총서본(遼海叢書本) 『한원』에는 내등호차랑(内藤虎次郎)의 발문(跋文)이 있는데, 『구당서』· 『신당서』의 고려전과 『요동행부지』를 근거로 해서 잡성(雜城)을 신성(新城)으로 정정하였다고 언급하고 있음. 이를 통해 『한원』원문에는 신성이 아닌 잡성으로 기록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음. 즉 남소성 남쪽에 잡성이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는 것임. 또한 남소성이 ‘신성 북쪽 70여 리의 산 위에 있다’는 기록은 방위상으로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함. 『자치통감』권96 성제 함강오년(咸康五年 339) 11월 호삼성(胡三省)이 주(注)에는 ‘신성은 고구려의 서비(西鄙)에 있는데, 서남으로는 산을 곁에 두고 있고, 동북으로는 남소·목저(南蘇·木底) 등과 접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음. 즉 남소성은 신성의 정북쪽에 있지 않고, 동북쪽에 있는 것임. 위의 분석을 종합해보면, 남소성은 남소수(소자하)에 있고, 신성(무순 북부) 부근에서 찾아야 하는데, 철배산성이 가장 유력하다고 볼 수 있음. 여호규(1999)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고구려시기의 대중국 전쟁로를 살펴보면, 요동지역과 고구려 국내성 사이에는 신성(新城) - 남소성(南蘇城) - 목저성(木底城) - 창암성(蒼巖城) 등의 고구려 성이 위치한 것으로 나타남. 신성은 무순 고이산성으로 비정됨. 남소성의 명칭은 남소수라는 강명에서 유래하였는데, 남소수는 혼하의 지류인 소자하이므로 남소성은 소자하 연안으로 비정됨. 『한원』에 따르면 남소성이 ‘잡성(雜城) 북쪽 70리 산 위에 위치하였다’고 하는데(『한원』권30 번이부 고려조), 소자하가 신성 동북 또는 동남인 만큼 위의 기사는 ‘신성동북(新城東北)’의 오기와 누락으로 여겨지는 바, 남소성은 신성 동북쪽 70리(31~37㎞) 산 위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됨. 신성 동북쪽 31~37㎞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는 무순에서 32㎞ 떨어진 혼하·소자하 합류지점으로, 그 합류지점 동쪽에 바로 철배산성이 자리 잡고 있음. 철배산성이 좁고 긴 산마루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에서 ‘산 위’에 위치하였다는 문헌기록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음. 그러므로 철배산성이 남소성일 가능성이 높음. 이러한 가능성은 342년 전연(前燕)과의 전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음. 『위서』고려조에 의하면 전연은 ‘남협(南陕)으로부터 들어가서 목저(木底)에서 싸워 검(剑; 고국원왕)의 군대를 대파하였다’라고 함. 목저성은 요동방면에서 신성 - 남소성 다음에 위치한 고구려 성인데, 남협(南陕)에서 시작되는 교통로상에 존재한다고 파악됨. 『자치통감』을 주석한 원대 호삼성(元代 胡三省)에 따르면, ‘남도(南道)는 남협(南陕)을 따라 목저성으로 들어간다(『자치통감』권97 진기19 함강 8년 10월조)’, ‘남소성은 남협 동쪽에 있다(『자치통감』권97 진기19 영화 원년 10월조)’, ‘목저성은 남소의 동쪽에 있다(『자치통감』권114 진기19 의희 2년 2월조)’라는 기록이 있음. 즉 남협은 남도(南道)의 출발점이고, 남소성은 ‘남협’의 동쪽, 목저성은 남소성의 동쪽에 각각 위치하였으며, 남도는 남협에서 목저성으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것임. 이는 혼하·소자하 합류지점 동쪽에 철배산성이 있고, 동남쪽으로 소자하 연안이 펼쳐지는 지형과 일치함. 소자하 연안은 해발 500~1,000m의 산악지대를 통과하는 협곡이고, 혼하 상류로(上流路)가 종전의 혼하 연안로를 계속 직진하는 북동향인데 비하여 소자하 연안로는 방향을 꺾은 남동향임. 아마도 소자하 연안로가 이전 경로와 방향이 다르고 협곡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남(동)향 협곡로의 입구’라는 의미에서 ‘남협’이라 하였던 것으로 추정됨. 남소성은 345년에 처음 등장하고, 고구려가 혼하 방면으로 진출한 4세기 전반에 축조되었다고 추정됨. 그 뒤 신성, 목저성 등과 함꼐 요동에서 국내성 방면으로 침공하는 적군을 방어하고, 요동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한 군사중진(軍事重鎭)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추정됨. 고구려는 혼하·태자하 일대의 신성·양성·양곡(新城·梁城·梁谷) 등과 함께 남소성에서 왕릉 수묘를 위한 연호를 차정하는 등 지방지배 및 군사적인 방어역량을 강화함. 따라서 남소성 곧 철배산성은 요하유역의 다른 고구려성처럼 군사기능 뿐 아니라 지방지배를 위한 거점성의 기능도 수행하였다고 추정됨. 다만 철배산성은 동서 방향의 좁다란 산마루에 위치하여 지방지배를 위한 거점성으로서 많은 취약점을 안고 있음. 이러한 점에서 철배산성의 동남쪽 15㎞에 위치한 신빈 오룡산성(新賓 五龍山城)이 매우 주목됨. 오룡산성은 둘레 약 2㎞의 포곡식 산성으로서 군사방어적 기능과 함께 거점성의 면모도 함께 갖추고 있음. 두 산성의 거리가 비교적 가깝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상호보완적인 관계도 설정할 수 있다고 여겨짐. 佟達(1993)의 견해는 남협(南陜)설로 내용은 다음과 같음. 고구려의 남도와 관련하여 『위서』와 『진서』에 ‘남협으로 들어가 목저에서 전투를 벌였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남협이 철배산성으로 추정됨. 철배산성은 영액하(英額河)와 소자하의 분수령이고, 남북교통로의 분야(分野)임. 소자하는 영액문(英額門) 남쪽에 있고 하곡 개활지대는 비교적 적다는 점에서 ‘협(陜)’의 의미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음. 佟達(1988)·撫順市社會科學院(1994)의 견해는 계번성(界藩城)설로 내용은 다음과 같음. 1619년 후금과 명의 설이호(薩爾滸)전투가 이루어졌던 계번성으로 추정됨. 계번성은 계번채(界藩寨)라고 부르는데, 건주여진 철진부(建州女眞 哲陳部)의 작은 산채(山寨)임. 계번(界藩)은 만주어인데, ‘하류가 합류하는 곳’이라는 의미임. 계번성 이전의 계번채는 건주여진 통일 전의 초기 산채이기 때문에 누르하치가 축조한 계번성보다는 규모나 축조 수준이 떨어졌을 것임. 서위성은 한 봉우리를 홀로 차지하고 있고, 성벽의 축조방법은 흙을 파서 해자를 만드는 방식을 채용하면서 돌은 일부구간에만 쌓아 보축하는 등 내성 및 동위성과 다름. 이러한 차이는 곧 시대적 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서위성에 보이는 간단한 성벽축조방식은 여진의 각 부가 통일되기 전의 수준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임. 이로 볼 때 계번성의 서위성을 계번채로 볼 수 있음. 계번채는 늦어도 1584년에는 축조된 것으로 추정됨.자연환경 무순시에서 동쪽으로 32㎞ 떨어진 무순현 장당향 고력영자촌 대화방댐(大伙房水庫) 동쪽 철배산 위에 위치함. 신빈현 남잡목진 전만자촌(南雜木鎭 轉灣子村) 서쪽 5㎞ 지점에 위치함. 철배촌 정도(丁圖) 맞은편의 산 위에 위치함. 철배산성과 살이호산성(薩爾滸山城)이 소자하(蘇子河)를 사이에 두고(댐으로 인해 수몰된 것임) 나란히 위치하고 있는데, 사이 간의 거리는 2㎞임. 서쪽으로 32㎞ 떨어진 지점에 무순시가 있음. 동남쪽으로 75㎞(이봉민은 60㎞라고 기록함(李鳳民, 1985)) 떨어진 지점에는 후금(後金)의 도성인 협도아랍서(赫圖阿拉城)이 있음. 1958년 대화방댐이 건설되면서 주변일대가 수몰되어 산성 소재지는 3면이 물로 둘러싸인 반도로 변모함. 대화방댐 건설 이전에는 철배산 남쪽으로는 소자하, 북쪽으로는 혼하가 흘렀고, 철배산의 서단에서 두 강이 합류하였음. 즉 철배산성은 혼하·소자하 합류지점 동쪽에 위치하고 있던 것임. 이와 같은 입지에 위치함으로서 혼하와 소자하 연안을 따라 여러 방면으로 나아갈 수 있었음. 철배산성에서 혼하를 따라 내려가면 무순을 거쳐 요동평원으로 나아갈 수 있고, 혼하 상류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휘발하 일대를 거쳐 부여 중심지였던 송화강 중류지역이나 고구려 초기 중심지인 혼강일대로 진입할 수 있음. 또한 동남쪽으로 소자하를 따라 나아가면 곧바로 혼강일대로 진입할 수 있고, 소자하~태자하의 산간로를 통해서 태자하 상류일대로 나아갈 수 있음. 산성이 위치한 철배산은 해발이 283.1m임. 산성은 동서방향으로 뻗어 있는 산봉우리에 위치하면서, 동서방향으로 길고 좁음. 철배산은 동․중․서 세 개의 산봉우리가 있음. 서쪽 봉우리는 뾰족하고 남면은 험함. 중간 산봉우리는 좁고 길며, 양측은 가파름. 동쪽 산은 비교적 완만한데 동쪽으로 끊이지 않고 이어져 있음.유물정보 청색 전돌(靑磚) 1점, 암키와(板瓦) 1점, 못(釘) 1점, 철제 찰갑편(鐵札甲片) 1점, 철제 고리(鐵環) 1점, 철제 탄환(鐵彈丸) 1점, 암막새(瓦當) 1점, 기와(瓦) 1점, 청화자기편(靑華磁器片) 1점, 석환(擂石)9점참고문헌 · 今西春秋, 「高句麗の南北道と南蘇·木底」『靑丘學叢』 22, 靑丘學會, 1935 · 高橋匡四郞, 「蘇子河流域に於ける高句麗と後女眞の遺跡」『建國大學硏究院硏究期報』 2, 建國大學硏究院, 1941 · 李鳳民, 「淸入關前都城述略」『潘陽古宮博物館文集』, 1985 · 佟達, 「撫順後金界藩城和薩爾滸城調査」『遼海文物學刊』 1988-1, 1988 · 孫進己·馮永謙, 『東北歷史地理』 (二), 黑龍江人民出版社, 1989 · 細谷良夫, 『中國東北部における淸朝の史跡』, 東北大學, 1991 · 佟達, 「關于高句麗南北交通道」『博物館研究』 1993-3, 1993 · 撫順市社會科學院, 「界藩城」『撫順地區清前遺跡考察紀實』, 遼寧人民出版社, 1994 · 東潮·田中俊明, 『高句麗の歷史と遺跡』, 中央公論社, 1995 · 王禹浪, 「中國東北地區古城文化遺跡概述」『黑龍江民族叢刊』 1995-4, 1995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再探」『北方文物』 1995-3, 1995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2007 · 肖景全·鄭辰, 「撫順地區高句麗考古的回顧」『東北史地』 2007-2, 2007 · 國家文物局,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 西安地圖出版社, 2009

    • 대서구유지(大西溝遺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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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스트여닫기 고이산성; 북관산성(高爾山城; 北關山城) 출토지 요녕성 무순시(遼寧省 撫順市)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33도변삼삼(무순일본도서관장)(渡邊三三(撫順日本圖書館長))1933년 5월 21일. 1933년 5월 5일 학생들과 함께 무순성 북부 고이산의 탑까지 올랐을 때, 근처에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군이 팠다는 참호가 있다는 말을 듣고 참호를 둘러보던 중, 보통의 참호와 구조가 다르다는 느끼고, 5월 21일 조사를 시행하면서 발견함.1938지내굉(동경제국대학 교수), 도변삼삼(무순일본도서관장)(池內宏(東京帝國大學教授), 渡邊三三(撫順日本圖書館長))산성을 돌아보고, 고구려의 신성(新城)이라는 견해를 제시함.1940산상차남, 전촌황일 등(山上次男, 田村晃一 等)동성 동문지 양측에서 돌로 쌓은 성벽을 발견하는 등 두 차례 조사와 발굴을 진행함.발표된 내용. 三上次男·田村晃一, 1990 『北關山城』, 日本中央公論美術出版社1940지내굉(동경제국대학 교수), 소산부사부(동양도연구소장), 재등국태랑(좌우보간행회), 판본만칠(판본사진연구소), 삼상차남(동경제국대학문학부강사), 삼택종설(만주국립박물관주사), 재등무일, 이문신(이상 만주국립박물관원), 도변삼삼(무순박물관장)(池內宏(東京帝國大學教授), 小山冨士夫(東洋陶磁研究所員), 齋藤菊太郎(座右寶刊行会), 坂本万七(坂本寫眞研究所), 三上次男(東京帝國大學文學部講師), 三宅宗悅(満洲國立博物館主事), 齋藤武一, 李文信(以上 満洲國立博物館員), 渡邊三三(撫順博物館長))일만문화협회(日満文化協会)를 중심으로 유적조사를 진행함. 지내굉을 중심으로 산성 내부의 총괄적인 조사를 비롯해, 중앙대지거주지, 동문지, 남문지, 동쪽 돌출대지에 위치한 탑지, 서문지 일부분에 대해 발굴을 진행함.1944지내굉(동경제국대학 교수), 삼상차남(동경제국대학문학부 강사), 이등우신, 삼지조사랑(이상 일만문화협회), 도변삼삼(무순박물관장)(池內宏(東京帝國大學教授), 三上次男(東京帝國大學文學部講師), 伊藤祐信, 三枝朝四郎(以上 日満文化協会), 渡辺三三(撫順博物館長))1944년 5월 19일~27일에 걸쳐 조사를 진행함. 1940년 조사때 미진했던 부분을 중심으로 조사를 진행함. 서문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하였고, 산성에 대한 전면적인 실측을 실시함.1984왕우랑 등(王禹浪)1984년 4월에 조사함.1984진대위(요녕성박물관)(陳大爲(遼寧省博物館))1984년 9월 조사를 진행함. 시굴작업을 진행함.1985이전복 등(李殿福 等)1985년 6월. 시굴작업을 진행함.1994왕우랑 등(王禹浪 等)1984년 8월에 조사함. 1984년 답사 때와 비교하여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고이산성에는 공원이 세워졌음.1956, 1963무순시문화국문물공작대(撫順市文化局文物工作隊)1956년과 1963년 두 차례 조사를 진행하고, 조사기록을 발표함. 발굴과정에서 철기로는 보습 2점, 리경(犁鏡) 2점, 괭이 2점, 호미 1점, 도끼 1점, 수레바퀴굴대축(車轄) 7점, 등자 1점, 모(矛) 2점, 화살촉 1점, 솥 2점, 못 2점이 출토되었고, 건축자재로는 벽돌 1점, 와당 3점, 수키와 2점, 암키와 3점이 출토됨.발표된 내용. 撫順市文物工作隊, 1964 「遼寧撫順高爾山古城祉調査簡報」『考古』1964-121983~1985요녕성박물관, 무순시박물관(遙寧省博物館, 撫順市博物館)서가국(徐家國), 손력(孫力), 정진(鄭辰), 장파(張波), 왕유신(王維臣), 원공문(袁功文), 장덕생(張德生), 퉁달(佟達), 장정신(張正言), 진도(陳弢), 진대위(陳大爲), 초경전(肖景全), 하근화(何謹華) 등이 조사에 참여함.시성건부문(市城建部門)은 무순 고이산공원을 건설하기 위해, 문물주관부문(文物主管部門)의 비준 하에, 요녕성박물관과 무순시박물관과 함께 3년 동안 고이산성에 대해 대규모 발굴을 진행함. 1983년 6월 24일~10일간 진행된 조사에서는 산성 바깥 남면 산등성이에 트렌치를 파서 지표 아래의 분포 정황을 살펴보고자 하였고, 산성 동문지 북벽을 발굴하여 성벽단면구조를 살펴보고자 하였으며, 남문 서북과 구릉지 평대(平臺) 등 800㎡를 발굴하면서 건축지를 발견함. 아울러 돌길 및 배수구 등도 발견함. 1984년에는 동성 서쪽 가장자리 근처 1,250㎡를 발굴함. 동, 서 두 성의 경계지점 동쪽의 구릉지에서 고구려시기 건축지를 발견함. 1985년에는 동성의 동·서·북 세 면의 구릉에 트렌치를 파서 조사하면서 온돌을 갖춘 방형건물지 등을 발견함. 남문 서쪽근처에 트렌치를 파서 요대(遼代) 문화층을 발견함. 성벽의 방향과 그 구조에 대해 측량과 해부를 진행하면서 모두 6개의 발굴구역(發掘區)을 설정함. 3,000㎡를 발굴하면서, 많은 건축유적지를 발견하였음. 출토된 유물은 매우 풍부한데, 많은 생활용구·생산공구·철병기·건축자재·화폐 등을 수습함. 그리고 100여점에 가까운 토기, 500점에 가까운 철기도 수습함. 토기로는 옹(瓮), 발(钵), 분(盆), 반(盤), 호(壺), 호(罐), 완(碗), 가락바퀴(纺輪), 기와, 토기뚜껑 등이 출토됨. 철기로는 화살촉, 帶銙, 鼻, 도자(削), 수레바퀴굴대축(車輨), 찰갑편, 刀格, 마름쇠(蒺藜), 모(矛), 腰刀, 刀, 창고달이(鐏) 등이 출토됨.발표된 내용. 徐家國·孫力, 1987 「遼寧撫順高爾山城發掘簡報」『遼海文物學刊』1987-2구조특징 고이산성(高爾山城)은 과거에는 무순현성(撫順縣城) 북방에 있는 북관촌(北關村)에서 이름을 따서 북관산성(北関山城)이라고 명명되었음(三上次男, 1990). 그러다가 전쟁 이후 고이산성이라고 부르고 있음. 고이산성이 위치한 고이산은 지면보다 70~140m 솟아 있음. 동·서·북 세면은 산등성이이고, 가운데는 북쪽의 장군봉(將軍峰)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등성이로 인해 동·서 두 개의 깊은 산골짜기가 형성됨. 이러한 산등성이를 따라 성벽을 축조함. 고이산성의 평면은 불규칙형임. 고이산성은 동성·서성·남위성(南衛城)·북위성(北衛城)과 동남 모서리에 있는 3개의 작은 환형 소성(環形 小城)으로 구성됨(王禹浪·王宏北은 동남쪽에 있는 2개의 작은 환성(環城)은 동성의 위성(衛城), 동성 서북에 돌출되어 있는 작은 성은 후위성(後衛城)이라고 기록함(王禹浪·王宏北, 2007)). 원칙적으로 자연산맥의 방향을 따르면서 전쟁의 방어적 수요를 따라 구축함. 이렇게 고이산성은 유기적 연합체로, 한 번에 축조되어 완성된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증축하였음. 이 가운데 동성이 가장 먼저 축조되고, 이후에 서성과 다른 위성이 축조된 것으로 보임(徐家國·孫力, 1987). 고이산성 안팎으로 크고 높은 나무들을 볼 수 없음. 또한 바깥을 두른 성벽(外周墻)은 바깥은 험하고 안으로는 완만한 특징을 갖추고 있음. 당시 성의 방어를 유리하게 하고, 넓은 시야를 확보하게 위해 성 밖의 구릉에 풀과 나무를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됨(徐家國·孫力, 1987). 무순에서 철령으로 통하는 도로가 남북으로 동성과 남위성을 통과함. 즉 남위성의 남문, 동성의 남문, 동성 북문의 동측을 통과함. 고이산성 서쪽 봉우리에는 요·금시기의 탑이 있는데, 팔각형의 실심밀첨식(實心密檐式)임. 탑신(塔身)에는 불감(佛龕)과 조식(雕飾)이 있음. 1933년에는 탑 부근에서 요 대안(遼 大安) 4년(1088)의 타나니석경당(陀羅尼石經幢)이 발견되었음. 동쪽 산 위에도 허물어진 요대 탑지가 남아 있음. 탑 아래의 관음각(觀音閣)은 명대 건축물인데, 청대에 여러 차례 중수되었음. 정전(正殿), 선당(禪堂), 종루(鐘樓) 등이 남아 있음. 동성(東城)은 무순~철령도로가 관통하고 있는 골짜기를 감싼 산등성이를 따라 축조함. 고이산성의 주성(主城)임. 성의 지세는 동·서·북 세 면이 높고 남면이 낮은 포곡식산성임. 평면은 타원형임. 1983년 조사 때 동성 동벽 서쪽 구릉에서 약간 남쪽으로 치우친 지점(Ⅱ區)을 발굴함. 이 지점은 위·아래 두 개의 대지(臺地)가 동서로 배열되어 있음. 윗면의 큰 대지는 동성 내에 유일하게 평탄하고 개활한 큰 평대(平臺)로, 길이는 60m, 너비는 40m임. 큰 대지의 서부에는 동·서성의 경계 성벽이 있음. 이 대지에는 6개의 트렌치를 팠는데, 각 트렌치는 너비 2㎝, 길이 25㎝~30㎝임. 이곳의 토층은 매우 얕은데, 20~30㎝ 정도로 파토(破土)하면 기암(基巖)임. 시간이 지나 흙이 유실되고 경작지가 되면서, 대지 위에 조성되었던 유적들은 거의 다 파괴되었음. 일부 트렌치 안에서는 요대의 기와편이 많이 발견되었음. 이 대지에서는 고구려의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당시 이 구역은 연병장(演兵場)으로 추정됨. 요대에 이르러서는 비교적 큰 건축지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됨. 아래쪽 대지는 동쪽을 향해 약간 돌출되면서 마주하고 있는 동성의 동문을 제어할 수 있고, 북쪽으로 북문을 바라볼 수 있는 등 동성 내 주요 전략요지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음. 이 구역에 5×5m의 피트 60개를 시굴하면서 드러난 면적은 총 1,500㎡에 달함. 그 가운데 일부 피트에서는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음. Ⅱ구역 FG83T30피트에 드러난 층위는 기본적으로 4층으로 나눌 수 있음. 제1층은 두께가 약 30㎝인 경토층(耕土層)임. 제2층은 황갈사질토(黄褐砂質土)로, 작은 사석(砂石)이 혼입됨. 주요유적과 유물이 포함된 층임. 두께는 약 40~48㎝임. 제3층은 함잡물(含雜物)이 비교적 적고, 성질이 순수함. 대부분 직경 약 1~3㎝의 작은 깬돌임. 제4층은 짙은 갈색 토층임. 토질은 견실함. 약간 층차감(層次感)을 형성함. 두께는 약 15~25㎝임. 아주 적은 유물이 출토됨. 그 아래로는 생토층(生土層)임. 1983년~1985년 조사 때, 동·서 두 성의 경계지점 동쪽의 3층 구릉지(Ⅳ區)를 시굴함. 남북방향으로 5×5m의 피트를 1줄에 10개씩 3줄을 팠음. 이곳은 지세가 비교적 높아 토층이 매우 얕은데, 일부 유적은 현 지표에 노출되기도 하였음. 그 아래는 생토층 혹은 기반암(基巖)임. 가장 위쪽에 위치한 대지의 동·서 경계 성벽 퇴적토를 걷어냈을 때, 자연석 퇴적지를 발견함. 중간 대지는 후대의 파괴로 인해 유적과 유물이 많지 않음. 북쪽 근처에 홍색 승문기와편이 퇴적되어 있지만, 그 하부에는 유적이 보이지 않고 생활용품도 출토되지 않았음. 건물지가 있음. 가장 아랫면에 있는 대지는 경사도가 다른 두 개의 대지보다 약간 큼. 기반암을 뚫고 기둥구멍을 만든 건축지가 확인되었음. 1983년~1985년 조사 때, 동성 동문 안 북부 대지(Ⅵ區)에 시굴이 이루어졌는데, 출토된 유적과 유물은 동·서성 경계지점 동쪽대지의 상황과 같음. 비교적 밀집된 주요생활구역으로 추정됨. 동성 서쪽 구릉(Ⅱ區)은 동성 안의 세 문을 통제할 수 있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임. 이로 볼 때, 이 곳에 조성된 건물지들은 당시 성 전체의 방어와 관련된 시설물로 볼 수 있음. 출토 유물을 봐도 생활용품은 적은 반면에, 군사활동과 관계가 있는 철제 무기 등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음. 이 또한 이 구역의 성격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음. 고구려시기의 유적이 주로 동성 내에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주요 활동장소라고 할 수 있음(徐家國·孫力, 1987). 서성은 서쪽 골짜기를 감싼 산등성이를 따라 축조함. 성의 지세는 동·서·북 세 면이 높고 남면이 낮은 포곡식임. 서성 안에서 금·원시기의 석관묘와 명·청시기의 고분이 발견됨. 서성에서는 한대 유물은 발견되었지만, 고구려유물은 발견되지 않았음. 서성의 성벽은 동성과 비교해볼 때, 규모 및 구축의 정교함에서 모두 뒤떨어짐. 이로 보아 서성은 동성을 호위하는 기능을 하였고, 전쟁시를 제외하고는 서성 내에서는 사람의 활동이 많이 없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음(徐家國·孫力, 1987). 남위성(南衛城)은 서성 서남벽의 동남단과 동성 동벽의 남단 사이에 위치함. 이 부분은 산성 안쪽 골짜기 전체 입구로서 서성 동남단에서 동쪽으로 뻗은 산등성이와 동성 동남단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등성이가 골짜기 남쪽으로 가로막고 있고, 두 산등성이 사이에는 폭 200m의 골짜기 입구가 있음. 남위성 남벽의 절벽 근처에 팔각밀첨식(八角密檐式) 9층 전탑이 있음. 1983~1985년 조사 때, 고이산 고탑(古塔) 동부에서 북쪽으로 치우친 반면, 남위성 남벽(자연 초벽(峭壁)을 벽으로 삼았음)의 내측(Ⅰ區)에 트렌치 2개를 팠는데 4개의 퇴적층이 있었음. 제1층은 산피토층(山皮土層)으로 두께는 약 20㎝ 정도임. 제2층은 사석토층(砂石土層)인데 돌은 일반적으로 3~5㎝의 거칠게 다듬은 풍화산석(風化山石)이고, 재생퇴적(再生堆積)으로 보이며 두께는 40여㎝임. 제3층에는 흑회색 흙이 퇴적되어 있었는데, 토질은 소송(疏松)임. 간혹 1㎝ 정도의 작은 돌이 있음.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음. 제4층은 흑색 토층(黑色土层)으로 점착성(粘性)이 비교적 큼. 두께는 10~35㎝임. 트렌치 한 곳은 요·금시기의 재생퇴적에 속함. 탑이 있던 사묘(寺廟)건축지로 추정되는데, 건축지가 붕괴된 후 퇴적된 것으로 보임. 현재 관음각(觀音閣)의 상원·하원(上院·下院)의 건축지는 명확하게 명청시대에 축조된 것임(徐家國·孫力, 1987). 1983~1985년 조사 때, 남위성 북부의 작은 대지(Ⅴ區)에 5×5m의 트렌치를 2줄로 10개를 팠음. 트렌치 위쪽에 쌓여 있던 돌과 흙은 여러 해 동안 서측 산암(山巖)을 파내면서 떨어져 내린 돌임. 그 아래는 문화층임. 일부 트렌치에서는 깊이 1m 근처 지점에 불에 탄 견고한 홍소토면(紅燒土面)이 있고, 간혹 평평한 면이 위로 향하고 있는 돌이 있는데, 주초석(柱礎石)으로 추정됨. Ⅴ구역 대지의 동면에는 건물을 축조할 때 흙을 취하면서 인위적인 수직절벽이 형성되었음. 단면을 볼 때, 5m의 퇴적 가운데 최소 5개의 활동면이 있음. 폭우로 인해 흙더미들이 흘러 내려가면서 많은 토기편과 와당이 뒤섞임. 다수의 요대 유물들도 출토되었음. 남위성(南衛城)의 성벽은 낮고 간단하게 축조되었으며, 둘러싼 성벽(圍墻) 안의 산골짜기에서 고구려의 유물이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동성과 동시기에 축조된 것은 아니라고 추정됨(撫順市文物工作隊, 1964). 북위성(北衛城)은 산성의 서북모서리, 즉 동성 북벽 바깥 장군봉 동북면의 산머리에서 서북뱡향으로 펼쳐진 산등성이에 있는 설형(舌形)의 성임(북위성에 대해, 동성이 주성이고 이외의 시설은 임시방어시설이기 때문에 성과 구별해야 한다고 보고 성외대(城外臺)라고 부르기도 함(陳大爲, 1992)). 북위성의 남면은 동성의 북벽에 잇닿아 있음. 북면과 서면 아래로 골짜기가 접해 있고, 북면 골짜기에서 멀지 않은 곳은 평지임. 북위성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음. 북위성의 지세는 평탄하고 동성의 북벽보다 수미터 낮음. 이에 대해 동성의 북벽을 축조하면서 그 주변을 취토하였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음(徐家國·孫力, 1987; 郝武華, 2000). 북위성에 서면 서·북 양면, 평지·산줄기가 한 눈에 들어옴. 북위성은 산성 서북면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지형과 산세에 따라 성벽을 수축한 것이고, 산성 서북쪽 먼 곳까지 볼 수 있음. 즉 산성은 감시 및 방어의 기능을 가진 시설로, 산성의 제 1선 방어선임. 동남쪽의 소성(小城)은 타원형 성벽임. 동성 바깥 동남면에는 동벽 남단의 산머리에서 동남쪽으로 뻗은 산등성이가 있는데, 동서가 길고 남북이 좁으며 동남쪽으로 갈수록 점차 낮아지다가 험준한 낭떠러지로 변모함. 이러한 산세를 이용하여 산등성이 가장자리를 따라서 타원형 성벽을 축조함. 위성(圍城) 동측으로 궁형의 둘러싼 성벽(弓形 圍墻) 두 줄기를 연이어 구축함. 1963년 조사 때에는 남쪽의 틈(豁口)을 제외하면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었다고 함. 소성(小城)이 위치한 지점은 동쪽으로 무서하(撫西河), 남쪽으로 혼하 북안의 동서교통 요충지와 매우 가까움. 동성의 동면을 방어하던 주요성으로 추정됨(撫順市文物工作隊, 1964; 陳大爲, 1992)(소성에 대해, 동성이 주성이고 이외의 시설은 임시방어시설이기 때문에 성과 구별하여 한다고 보고 성외성(城外城)라고 부르기도 함(陳大爲, 1992)). 고이산성은 성벽의 바깥이 험준하고 안쪽은 완만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동성에서 더욱 두드러짐. 성벽의 축조에 대해 토축이라는 기록(撫順市文物工作隊, 1964; 孫進己·馮永謙, 1989; 陳大爲, 1995; 馮永謙, 1997), 산등성이를 이용해서 토석혼축으로 축조하였다는 기록(溫秀榮·張波, 1996; 李殿福, 1998; 王禹浪·王宏北, 2007; 國家文物局, 2009)이 있음. 또한 토축+토석혼축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하부에는 자연석으로 성벽 기단을 쌓고 그 윗부분에는 흙을 다져 쌓았는데, 일부 구간에서는 10~15㎝의 다져진 층을 볼 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음(王綿厚, 2002). 또한 高爾山城 성벽이 비교적 큰 깬돌로 쌓은 단열석벽(單列石墙)이고 윗면은 다시 흙을 쌓고 견고함을 더했다는 기록(魏存城, 2002·2011)이 있음. 1963년 조사 때에는 성벽의 윤곽이 명확하게 남아 있었는데, 당시 성벽의 높이는 일반적으로 2~5m이고, 성벽 안쪽은 완만하고 바깥쪽은 가파르며, 아래가 넓고 윗면이 좁은 쐐기형이었음. 여러 구간에서 다져진 층을 볼 수 있는데, 각 층의 두께는 10~15㎝였음. 외벽은 일반적으로 45~60° 정도 경사져 있었음. 1983년~1985년 성벽의 축조상태를 정밀조사한 결과, 겉으로 보기에는 토축이지만, 세 가지 방식이 나타나고 있었음. 첫 번째 방식을 살펴보면, 조금 융기한 산등성이에는 흙을 계속 쌓아서 높이와 두께를 더하였고, 일부 구간에는 흙의 유실을 방지하기 위해 깬돌을 채워 넣거나 흙을 다지기도 하였는데, 다져진 층의 두께는 일반적으로 8~10㎝임. 동성의 동문에서 북쪽으로 뻗어 있는 일부 구간에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남아 있는 높이는 8m에 달하고, 바닥 너비는 약 24m임. 두 번째 방식을 살펴보면, 토축 성벽 안쪽에 비교적 큰 깬돌로 단열 석벽을 구축하고, 윗면에 다시 흙을 쌓아 견고함을 더하였음(包骨墻). 동·서성 경계지점 남단에 이러한 방식으로 성벽을 축조함. 세 번째 방식을 살펴보면, 평지에 성벽을 축조할 때는 먼저 깬 모석(毛石)을 30~50㎝ 쌓은 다음, 그 위에 흙으로 쌓거나 혹은 다져서 축조하였음. 동성 남문지 서벽은 바로 이러한 축조방식으로 구축하였음. 이러한 방식의 축조한 성벽 가운데 일부 구간은 높이가 5m를 넘기도 함(徐家國·孫力, 1987). 동문 남벽 근처에서 성돌이 발견되었는데, 한 개는 크고 다른 한 개는 작은 쐐기형 돌임. 성 기단층에서 정상부까지 층층히 쌓았는데, 내벽에는 6층의 성벽돌이 남아 있음. 성벽의 벽심(墻芯)은 깬돌로 채워 넣었음(王綿厚, 2002). 동성의 북벽은 장군봉에서 동북모서리에 이르는 구간임. 바깥쪽으로 만곡되어 ‘⌒’형을 이루고 있음. 1940년 조사 당시, 북문 근처의 인공성벽은 최고 높이 4척, 폭 약 54척에 달했음. 성벽의 외부는 돌로 쌓았음. 성벽의 윗부분은 좁고, 하부는 넓어서 삼각형의 단면을 이루고 있음. 돌은 벽돌을 쌓는 것처럼 쌓았는데, 축조 당시에는 가지런하였다고 생각되나 당시에는 교란되었다고 함. 돌은 크기는 1×5×?척, 1.2×6×?척이고, 화강암과 편마암이 주를 이루고 있음. 성벽 외면에는 회반죽을 발랐음. 내측은 일반적으로 토축임. 상부, 중부, 하부로 나눌 수 있음. 하부의 토축벽은 작은 돌을 포함하고 있는 적갈색의 점토이고, 판축한 흔적이 있음. 판축한 두께는 2촌 5분~3촌임. 토기 등의 유물을 발견되지 않음. 중부 약 5척은 혼석층(混石層)임. 이 부분은 암갈색이 나타남. 성벽에 사용되었던 것과 같은 돌이 상부와 하부에 1줄로 나란히 있고, 그 사이는 2촌각(寸角)의 돌을 포함한 흙으로 채워져 있음. 상부의 토색은 하부와 같은 갈색임. 큰 돌이 포함되어 있음. 최상부는 유기질을 포함하면서 토색이 검정색임. 지하 2~8촌 되는 곳에는 고구려의 적색 기와편이 출토됨. 1963년 조사 때에는 성벽이 비교적 양호하게 남아 있었는데, 잔존 높이가 5m에 달했다고 함(撫順市文物工作隊, 1964). 동성의 동벽은 동북·동남모서리의 산봉우리 사이 구간에 축조되었으며, 안쪽이 완만하고, 바깥쪽이 가파름. 남·북 양단은 모두 산머리이고, 중간 부분은 조금 낮으면서 평평함. 남·북 양단에서 망을 보았을 것으로 추정됨(撫順市文物工作隊, 1964). 1940년 조사 때, 동문 양측으로 성벽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남측 성벽이 완전하게 남아 있었음. 남측 성벽은 동단에서 남쪽으로 꺾어 성벽의 동면 외벽이 되고, 다시 남쪽으로 이어짐. 남쪽 성벽은 커다란 절석(切石)을 견고하게 쌓았음. 다듬은 돌의 하부는 상부보다 넓고, 절석의 정면은 약간 경사가 있음. 남측 성벽의 북면은 동부에는 5단, 서부에는 6단을 쌓았음. 돌의 크기는 2X1X1척, 2X1.3X?척, 2.4X6X?척임. 성벽 내부에는 1촌각(寸角) 정도의 작은 돌을 채워 넣었음. 당시 성벽의 남측과 동면 바깥에 성벽이 붕괴되어 많은 작은 돌들이 흘러 내리면서, 약 1.5~2m 정도 동부 외면을 덮고 있었다고 함. 1963년 조사 때에는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었는데, 가장 높은 지점은 높이가 6m, 기단부 너비는 10m에 달하였다고 함(撫順市文物工作隊, 1964). 1983년~1985년 조사 때 동문 북측의 성벽을 시굴하였는데(Ⅲ區), 먼저 약간 융기된 산등성이 안팎으로 동시에 흙을 쌓았고(다진 흔적은 명확하지 않음), 다시 성벽 안측에 자연석을 쌓아서 견고함을 더하였으며, 마지막으로 흙으로 덮었음. 쌓여진 흙 속에서 고구려 시기의 홍색 승문기와편들이 출토되었는데, 여러 차례 증수하였을 가능성이 있음(徐家國·孫力, 1987). 동성의 서벽은 장군봉에서 동남쪽으로 산성 중앙을 향해 뻗은 산등성이에 자리 잡고 있음. 서성과의 경계를 이루는 성벽으로 서성의 동벽에 해당하기도 함.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음. 1963년 조사 때에는 가장 높은 구간이 4m에 이르렀다고 함(撫順市文物工作隊, 1964). 동성의 남벽은 남쪽 골짜기 입구를 동서 방향으로 횡단하여 축조하였음. 1963년 조사 때에는 남문 동측 구간이 비교적 잘 남아 있었는데, 남은 높이는 3m였다고 함. 서단은 대부분 붕괴되면서 몇 곳에 흙더미만 남아 있었다고 함. 남벽 동측의 일부 구간에는 외벽과 내벽을 겹으로 쌓은 겹성구조가 남아 있음. 서성의 성벽의 특징은 다음과 같음. 장군봉에서 서남방향으로 뻗은 산등성이는 ‘V’자형을 그리며 동남쪽으로 방향을 꺾어 골짜기 전체를 감싸면서 동성의 남문 맞은편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이 산등성이를 따라 1,500m에 이르는 서북벽과 서남벽올 축조하였음. 1963년 조사 때에는 ‘V’자형의 서북벽과 서남벽은 토벽으로, 북쪽 300m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성벽이 남아 있었는데, 너비는 0.8m, 높이는 0.5m로서 동성에 비해 규모가 작음. 장군봉에서 동남쪽으로 뻗은 산등성이에 위치한 동성의 서벽은 서성의 동북벽을 이루고 있음. 서남벽 동남단과 동북벽 동남단 사이는 서쪽 골짜기 입구로서 산기슭과 평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곳을 횡단하여 동남벽을 구축하였음. 서성의 외곽 성벽은 중앙의 높은 토벽 안쪽에 약간 낮은 토벽을 나란히 쌓은 겹성구조라고 함(三上次男·田村晃一, 1993). 남위성의 성벽의 특징은 다음과 같음. 1963년 조사때 서성 서남단에서 동성의 남문 맞은편 서남단에 이르는 산등성이에 500m 정도의 성벽이 남아 있었다고 함. 동성 동남단 산봉우리에서 서남 방향의 산등성이를 따라 500m 정도의 호형(弧形) 성벽을 축조함. 너비 200m인 골짜기에도 본래 성벽이 있어 두 산등성이의 성벽을 연결하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1963년 조사 때에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함. 북위성의 성벽의 특징은 다음과 같음. 장군봉 동북측에 위치한 동성 북벽 위의 작은 산봉우리에서 서북방향으로 돌출한 산등성이 가장자리에 흙으로 성벽을 축조하였음. 성문은 동·서·남·북문 등 4개가 있다는 기록(三上次男·田村晃一, 1993)과 동성에 남·북·동문 3개가 있다는 기록(徐家國·孫力, 1987)이 있음. 무순~철령간 도로 양측에는 크기가 다른 계단식 대지가 많이 있는데, 고구려시기의 유적과 유물이 풍부하게 남아 있음. 이곳에 건물지들이 자리잡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됨(徐家國·孫力, 1987). 고이산성에서는 고구려, 요, 금시기의 유물이 발견됨. 1933년 출토유물은 다음과 같음. 성안 성벽 부근에서 적색·흑회색 기와가 흩어져 있어져 있었는데, 특히 정문 서측 산 위의 밭에서 많이 출토되었음. 출토된 기와편들과 조선총독부에서 출판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1 및 집안현 환도산성에서 출토된 기와편을 비교해 보았을 때, 동일한 형식으로 볼 수 있음(渡邊三三, 1933). 암키와는 적색으로, 내면에는 포문이 펼쳐져 있음. 와당도 출토됨. 정문에서 약 200m의 북쪽 좌측의 길 옆에서 거대한 귀석(龜石)이 머리가 반쯤 땅에 묻힌 채 발견됨. 배면에는 한 변이 80㎝가 넘는 구멍이 있었는데, 깊이는 30㎝ 정도임. 귀부(龜趺)로 볼 수 있음. 제작된 지는 꽤 오래된 것으로 보임. 1940·1944년에는 토기, 토제품, 도자기, 와전(瓦塼), 철기, 철제품, 청동제품, 화폐 등이 발견됨. 요·금시기의 유물로 자기, 백색 시유도기, 벽돌 등이 출토됨. 자기는 59점이 출토되었는데, 접합할 수 있는 자기편을 감안하면 53점임. 1940년에 중앙거주지, E지점, 동문, 서문 등 네 지점에서 철기가 출토됨. 중앙거주지에서는 촉신(鏃身)을 판별할 수 있는 화살촉 17점이 출토됨. 그 외에 촉신을 추측하기 어려운 화살촉과 촉병(鏃柄)를 합쳐 9점이 출토됨. 촉신(鏃身)에는 사각추형(四角錐形), 장신형(長身形), 착형(鑿形), 평근형(平根形) 등이 있음. 장신형(長身形) 화살촉의 경우, 촉신(鏃身)이 14.3㎝에 이르는 것도 있음. 신(身)의 앞부분은 뾰족함. 그 단면은 일반적으로 편평하지만, 일부는 원형 또는 사각형임. E지점에서는 촉신(鏃身)을 판별할 수 있는 화살촉 16점이 출토됨. 촉병(鏃柄)으로 추정되는 유물도 많이 출토됨. 형식은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삼각추형(三角錐形), 사각추형(四角錐形), 유엽형(柳葉形), 장신형(長身形), 세신형(細身形), 평근형(平根形), 삼익형(三翼形) 등이 있음. 사각추형(四角錐形)의 화살 가운데, 두 점는 동체부(胴部)가 넓고, 다른 한 점은 평면이 삼각형임. 동문지에는 17점의 화살촉이 출토됨. 이 가운데 형식의 분명한 화살촉은 9점임. 동문에서 출토된 화살촉은 첨근(尖根), 특히 삼각추형(三角錐形)이 많이 출토되는 것이 특징임. 그 외에 W지점, 서문내 거주지, 서문 등에서 출토됨. 철제 못은 비교적 많이 출토됨. 출토된 못들은 대부분 구부려져 있고, 곧은 못은 적음. 또한 녹이 슬어서 원래 상태를 알기 어려운 못도 많음. 신(身)의 단면은 방형에 가까운 장방형이 대부분이고, 일부는 편평함에 가까운 장방형임. 끝부분의 제작방법에 있어 침상(針狀)에 뾰족한 형태는 적고, 비상(箆狀)에서 점차 얇아지게 만든 형태가 많음. 두부(頭部)는 제작방법에 따라 네 형태로 나눌 수 있음. 첫번째 형태는 두부(頭部) 전체를 못의 본체보다 약간 굵게 만들고 정부(頂部)를 T자형으로 만들었음. 두 번째는 두부(頭部)를 굽혀서 평평한 면을 만들었음. 이 유형은 크기가 다양한데, 큰 못은 길이가 20㎝에 가깝고, 작은 못은 3㎝ 정도임. 서문 내 주거지에서는 작은 못이 많이 출토되었음. 이러한 유형의 못은 대부분이 단면이 장방형을 이루고 있음. 세 번째 형태는 큰 원판 모양의 두부(頭部)를 갖추고 있는데, 두부(頭部)의 제작방식은 구부리는 방식은 아니라고 추정됨. 신(身)의 단면은 장방형이고, 길이는 10㎝ 전후임. 네 번째는 두부(頭部)를 엔두형(円頭形)으로 만듦. 갑편은 중앙주거지에서 25점 이상, E지점에서 3점이 출토됨. 그 외에도 서문내 거주지 등에서도 출토됨. 성벽 부근을 포함하여 성내 이르는 곳마다 기와가 흩어져 있었음. 특히 남·북 양문을 관통하는 도로를 기준으로 서북부 경사면에 기와가 많이 분포되어 있었음. 1963년 출토유물은 다음과 같음. 성내 지면에 매우 많은 유물들이 흩어져 있었는데, 회색·홍색 암키와, 연화문와당, 승문 장방형 벽돌, 철기, 동전, 화살촉 등이 출토되었음. 서면 산골짜기 안에서는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서면 산골짜기 북단 성벽이 동성과 동시기에 축조되지 않은 것과 관련이 있다고 추정됨(撫順市文物工作隊, 1964). 철기는 모두 동성 내 서쪽 구릉 소나무 아래에서 출토되었는데, 가래(鏵), 쟁기, 도끼(斧), 모(矛), 화살촉, 등자, 수레바퀴굴대축(車輨), 곡괭이 등이 있음. 동성 남문 앞 외곽 성벽(圍墻) 내에서는 벽돌과 기와편이 흩어져 있었음. 산성 안에서 출토된 와당, 기와편 등 건축자재들은 집안 산성자산성에서 출토된 것과 일치하므로 고구려시기에 제작한 것으로 볼 수 있음. 1983년~1985년 출토유물은 다음과 같음. Ⅰ구역 제4문화층에서는 1.4㎝ 두께의 깨진 기와편이 가장 많이 출토되었는데, 태토는 비교적 순수하고, 니질의 옅은 회색임. 내면에는 모두 포문이 있음. 소성온도는 균등함. 기와를 제외하고 도자기편과 송대의 동제 화폐가 출토됨. 토기 구연부는 대부분 말아 올라갔고 짙은 회색임. 비교적 요구(窯口)가 많고, 일부 자기편에는 개편(開片)이 있음. 흰색·흑색 시유완(碗) 각각 1점이 복원되었는데, ‘계퇴담(鷄腿罈)’의 하부가 있음. Ⅱ구역에서 출토된 철제 무기 가운데 화살촉이 가장 많음. 그 외에 도자(削), 쇠뇌, 요도(腰刀), 모(矛), 수레바퀴굴대축(车轄), 창고달이(鐏), 마름쇠(蒺藜), 찰갑편, 도탄환(陶彈丸) 등이 있음. 일상생활용기로는 泥質의 회색토기가 가장 많이 출토되었는데, 손잡이가 두 개인 분(盆), 반(盤), 호(壺), 시루(甑), 옹(瓮) 등이 있음. Ⅱ구역의 제2층에서는 삼채발(三彩钵)의 잔편이 발견되었는데, 정교하고 세밀하게 제작되었음. 중원에서 온 것으로 볼 수 있음. 그 외에 개원통보(開元通寶가) 출토됨. Ⅳ구역에서 출토된 유물은 비교적 풍부함. 출토된 유물의 종류, 토기의 기형과 재질 등은 Ⅱ구역에서 발견된 것과 같음. 당의 개원통보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고구려 말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음. 토기로는 옹(瓮), 분(盆), 완(碗), 반(盘), 호(罐), 시루(甑) 등이 출토됨. 철기로는 군사무기가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음. 그 외에 토기, 철제의 건축자재 등이 발견됨. Ⅴ구역에서는 자기(瓷器), 도기(陶器), 철기, 전와(砖瓦) 그리고 북송시대의 화폐가 발견되었음. Ⅴ구역 상부퇴적은 요대의 유구에 속하고, 여기에 있던 건축물은 상당한 규모를 갖추고 있다고 추정됨. 그 아랫면 문화층의 경우, 출토유물로 보아 고구려시기의 문화층은 아닌 것으로 추정됨. Ⅵ구역 남북 방향의 트렌치 북반부에 깨진 기와와 여러 개의 자연석들이 한층 노출되어 있었음. 이 곳에서 철제 찰갑편, 철제 쟁기, 철제 삽, 수키와 등이 출토됨. 요대의 유구인 Ⅴ구역를 제외한 다른 발굴지점에서는 고구려의 유물이 발견됨. 또한 유구 안에서 개원통보가 출토되면서 유적의 하한을 유추해 볼 수 있는데, 고구려말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음. 철기는 500여점이 출토됨. 철기 가운데 화살촉이 가장 많이 출토됨. 그 외에 요도(腰刀), 도자(削), 모(矛), 창고달이(鐏), 마름쇠(蒺藜), 수레바퀴굴대축(车輨), 찰갑편, 대과(带挎), 투구 등이 출토되었는데, 한 세트의 군사무기장비를 보여줌. 고구려는 본래 병철(镔鐵)로 유명했는데, 종류가 많고, 단주(锻铸)도 우수했음. 고이산성에서 출토된 철기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확인해 볼 수 있음(徐家國·孫力, 1987). 토기는 100여점이 출토되었는데, 주요 기형으로는 옹(瓮), 분(盆), 호(罐), 반(盘), 완(碗), 시루(甑), 탄환(彈丸) 등이 있음. 생활용 토기는 대부분 니질의 회색임. 비교적 큰 토기 가운데 일부는 서로 대칭하는 교상횡대 파수(桥状横耳)가 있고, 파수 위에는 음현문(陰弦文)이 한 바퀴 둘러져 있는 등 명확한 시대적인 특징이 형성되어 있음(徐家國·孫力, 1987). Ⅳ구역 FG84T208 아궁이(灰坑)에서 출토된 기와편은 모두 고구려시기의 홍색 승문기와편임. Ⅱ구역에서 출토된 요대의 기와편은 니질의 회갈색인데, 크기와 두께가 정연하고 획일적임. 기와편의 내면에는 포문이 펼쳐져 있음. 일부 기와편의 배면에서 모인양문(模印陽文) 한자가 발견되었는데 “……匠賈德用”이라고 쓰여져 있음. 글자는 기와를 제작한 사람의 이름으로 추정됨. 글자는 세로로 쓰여졌고, 해서체(楷书)인데 요대의 일부 묘지(墓志)에 보이는 글자체의 풍격과 일치하고 있음.역사적 의미 고이산성에서는 동남 돌출부에 위치한 전탑, 산성 남쪽 입구부근에서 ‘大安四年八月□日建’이라고 판독할 수 있는 요대의 불정존승타나니경당(仏頂尊勝陀羅尼経幢)이 발견된 것을 비롯해 성내 곳곳에서 요금시대의 토기편이 발견되는 등 요금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고 있음. 게다가 토기편은 당시 무순 부근의 가마에서 소성한 일상용품일 뿐만 아니라 중국 관요(官窯)의 정요 단편(定窯 断片)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상당히 유력한 건축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됨.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여 渡邊三三은 요(遼)의 귀덕주치(貴徳州治)의 귀덕현(貴德県)이었고, 금대에도 귀덕주(貴徳州)였다고 주장하고 있음. 즉 고이산성은 고구려 뿐만 아니라 요금대까지도 계속 사용되었던 것임. 따라서 고이산성의 구조, 특히 고구려시기의 고이산성의 구조가 어떠하였는지를 명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현존하는 고이산성 유구 가운데 요금시대의 유구를 명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음. 이 점에서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소위 서성의 시간적 위치임. 三上次男은 중앙주거지에서 요금시대의 무덤이 발견되기는 하나, 2차례에 걸친 조사에서 동성 내부의 요금시대의 유적이 상기의 무덤 이외에는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동성은 고구려시대에 축조하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보았음. 그러나 서성 외곽 토축성벽의 경우, 중앙이 높은 토축 내측에 더 낮은 토축벽이 병행하여 만들어지고, 그 중간이 한층 패인 도랑처럼 만들어진 구조를 보여주는데, 이러한 구조는 고구려 성벽에서는 보이지 않는다고 함. 그러면서 요금시대의 토성인 ‘고로디시체’에서는 이중삼중으로 토축벽과 도랑을 두르는 모습이 보인다는 점을 주목함. 그리고 장군봉 동쪽의 북벽 혹은 동문 북쪽의 동벽 등은 구릉 능선 위에 높게 쌓은 토축으로, 그 아래쪽 가장자리 바깥쪽에 일정 너비의 평탄면을 만들고 있음을 확인하면서 동성과 서성과의 토축벽 구조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보았음. 서성 내부에서 요금시대의 유물이 대량으로 발견된 점들도 고려하면서 서성은 요금시대에 축조되었다는 견해를 제시함. 즉 서성에서 고구려시대 유구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고구려시대의 산성은 동서만으로도 구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고 있음. 남위성(南衛城) 또한 성벽의 구조나 내부에서 발견된 유물을 볼 때, 고구려 시대의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함. 또한 동남부에 돌출한 삼중의 곽(郭) 중심부에 요금시대의 전탑이 지어졌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고구려 시기부터 존재하였는지에 대한 자세한 추가조사가 필요하다고 하였음. 그러면서 다만 북쪽의 돌출한 곽(郭)의 경우, 성벽의 축조방식이 동성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고구려의 것으로 볼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둠. 한편 池內宏은 『구당서』 고려전의 ‘신성 서남쪽 산에 의지해 목책을 세웠다’라는 기록에서 서남쪽에 있다는 산은 고이산성과 와지(窪地)를 사이에 두고 요금시대의 전탑이 솟아 있는 고이산의 고지로 보았음. 즉 탑이 우뚝 솟아 있는 고이산의 고지는 서성 남쪽 능선에 해당하기 때문에, 서성을 고구려시기의 신성(新城)과 다르게 본 것임. 위의 견해들은 고이산성이 평원에서 요동산구(遼東山區)로 진입하는 문호(門戶)에 위치하고 있고 혼하 북안까지 2㎞ 떨어져 있어 중요한 전략적 의의를 지니고 있으므로, 후대의 역대왕조들이 고이산성을 이용 혹은 증축하면서 지금과 같은 복잡한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고 보고 있는 것임(三上次男·田村晃一, 1993). 위와 같이 고구려시기에는 동성만으로 이루어졌다는 견해와 달리 田村晃一은 나통산성(羅通山城)과 휴류산성(鵂鶹山城)과 함께 고이산성을 예로 들면서, 고구려에는 병립적인 복곽식 산성을 구축하였음을 지적한 바 있음. 한편 1983~1985년 조사 때 서성 서벽 요망대(瞭望臺)의 성벽 단면에서 전한시기(前漢時期) 토기편이 출토된 만큼 축성시기에 대해서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기된 바 있음. 특히 고이산성의 동쪽과 북쪽은 무서하(撫西河), 남쪽은 혼하(渾河)에 의해 주변 산들과 단절된 반면, 서쪽으로는 혼하 북안을 따라 산봉우리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 다른 세 면에 비해 서쪽은 방어상 많은 취약점을 안고 있기 때문에 산성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서성을 반드시 구축할 필요가 있었으므로(陳大爲, 1992), 서성도 고구려시기에 구축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음(田村晃一, 1988; 林直樹, 1994). 산성 동쪽에서 1.5㎞ 떨어진 지점에 시가가 고구려고분군(施家街高句麗墓群)이 있음. 요녕성 기타지역의 고구려산성 부근에서 고구려고분군이 분포하는 사례가 매우 적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함. 심양 석대자산성(石臺子山城) 부근에서도 고구려고분이 발견된 바 있는데, 많은 묘장의 형태가 시가가 고구려고분군과 같음(肖景全·鄭辰, 2007). 고이산성은 환인지역에 위치한 산성을 비교해 보았을 때, 방어체계가 더욱 강화되었고, 성벽구조가 토축과 토석혼축으로 변화하였으며, 고구려시기의 유적과 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되고 있음. 이러한 변화들은 명확한 시대적 특징을 보여주는 것임(辛占山, 1994). 고이산성은 대형 고구려성으로 볼 수 있음. 고이산성 외에 요녕성에 위치한 서풍 성자산산성(西豊 城子山山城), 철령 최진보산성(鐵嶺 催陳堡山城), 심양 진상둔 탑산산성(沈阳 陳相屯 塔山山城), 요양 요동성(遼陽 遼東城), 해성 영성자산성(海城 英城子山城), 개주 고려성산성(盖州 高麗城山城), 금현 대흑산산성(金縣 大黑山山城) 등은 요하 좌안에서 서남~동북방향으로 위치하여 요하 일선의 전방 요충지 역할을 하면서 고구려 중심지에 대해 중요한 호위작용을 하고 있음(徐家國·孫力, 1987; 陳大爲, 1995). 고이산성(신성)은 군사중진일 뿐만 아니라 지방지배를 위한 거점성의 역할도 수행하였던 것으로 추정됨. 3세기 말경 신성태수 고노자(新城太守 高奴子)는 소자하~혼하 연안로의 최전방 요충지를 관장하는 지방관으로서 민정과 군정을 아울렀음. 〈광개토왕릉비〉 수묘인 연호조에 양곡·양성·(안부련)·(개곡)·신성·남소성(梁谷·梁城·(安夫連)·(改谷)·新城·南蘇城 등 국내성~요동 교통로상의 성이 하나의 권역으로 묶여진 것으로 보아, 최전방 요충지인 신성(新城)의 지방관이 이 일대 전체를 통괄한 것으로 추정됨. 실제 고이산성은 혼하~소자하 일대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인 요동평원과 동부 산간지대의 접경지대에 위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규모도 이 일대 고구려성 가운데 가장 큼. 그리고 각 방면의 군사방어를 고려하여 주성인 동성을 중심으로 서성, 남위성, 북위성 등을 축조하여 적의 공격에 대한 방어태세를 구축함. 한편, 고이산성 내부의 계단상 대지에서는 군사시설뿐 아니라 일반 주거지도 많이 발굴되고 농기구 등 생활도구들도 많이 발견됨. 이러한 유적들은 계단상 대지에 주거지가 상당히 밀집되어 있던 상황을 시사함. 667년 이권(李勸)은 신성을 함락시킨 다음 주변 16개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고 하는데, 이는 신성 주위에 상당수의 위성(衛城)이 자리 잡고 있었고, 신성이 혼하 연안에서 가장 중심적인 거점성이었음을 반영함. 이러한 점에서 고이산성에 최고 지방관인 욕살(褥薩)이 파견되었다는 견해가 주목되는데(노태돈, 1996), 최소한 처려근지(處閭近支) 이상은 파견되었을 것임(여호규, 1999). 한편 三上次男도 계단식 대지의 건물지에 주목하면서 ‘단순한 전쟁시의 일시적인 거점이 아니라, 여기에 상당한 저택을 지은 상주가 있었다’고 보았는데, 『구당서』 고려전 기사를 언급하면서, 각지의 산성에 고구려 귀족이 가족들과 함께 거주하고, 관아 등도 산성 내부에 배치되어 있었다고 주장함. 아울러 황해북도 신모 대현산성(新慕 大峴山城)에서 남문 앞의 평지에 고구려시대의 기와지붕건물이 발견되었고 그 주변에 고구려 적석묘들이 분포한다는 점, 황해북도 신원 장수산성에서 남쪽 기슭에 고구려 기와건물이 발견되었고 그 주변에 고구려의 고분군들이 분포한다는 점 등을 통해 고구려의 지방지배와 산성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고, 산성 밖에도 중요한 건물이 있었다고 주장함(三上次男·田村晃一, 1993). 고이산성 Ⅳ구역와 Ⅱ구역의 건물지에서는 전형적인 고구려 승문기와 이외에 회갈색 기와가 사용됨. 암키와의 양측에는 칼로 잘려진 흔적이 있는데, 고구려 암키와의 제작연대를 구분하는데 있어 중요한 증거임. 연화문 대방전(莲花紋大方磚), 직승문방전(直繩文方磚)의 출토는 고구려 건축자재에 대한 연구에 도움을 주고 있음. 연화문 와당은 고연(高缘)에서 평연(平缘)으로 변화하고, 연판(蓮瓣)에서 추상화가 진행되면서 유정(乳釘)이 생기며, 마지막에는 연주문(连珠纹)이 한 바퀴 돌아가는 등 시간의 차이가 드러남. 다만 발굴 중에 출토된 와당은 폐기된 후에 어딘가에 메워진 것이고, 정식으로 와당이 사용된 건축지는 발견되지 않았음. 크기와 색깔이 다른 기와들이 섞여 있는 모습은 많은 건축자재들이 다른 곳에서 이 곳으로 왔음을 보여줌. 정연하고 획일적인 작은 자갈길과 과학적인 배수시설은 고구려의 생활면모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함. 철제 투구와 철제 삽, 철제 괭이의 공반은 당시 고구려의 군사와 경제생활을 이해하는데 있어 새로운 연구의 실마리를 보여줌(徐家國·孫力, 1987). 고이산성에서 출토된 호(壶), 호(罐), 분(盆), 옹(瓮) 등은 모두 후기의 특징을 보여줌. 연화문 방전(莲花文 方塼)과 직승문 방전(直繩文方塼)은 기존 요길지구(遼吉地區) 고구려유적에서는 발견되지 않은 것임. 산성에서 출토된 유폭선·무보선 단판 연화문 와당(有輻线·无輔綫 單辦 莲花紋 瓦當)과 연주문와당(蓮珠紋瓦當)의 제작연대는 4세기 혹은 그보다 더 늦을 것으로 추정됨(肖景全·鄭辰, 2007). 고이산성 내측 서쪽 구릉(Ⅱ區) 건축지 남면의 돌을 깐 길에서 발견된 회색 연주문와당에 대해 서안 당대 화청궁(西安 唐代 華清宮)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하므로 당대(唐代) 기와에 속한다고 하면서 『구당서』와 『자치통감』에 보이는 ‘의봉2년(儀鳳二年)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으로 옮겼다’라는 기사와 연관시키는 견해가 있음(陳大爲, 1995). 또한 Ⅱ구역 건축지는 당대에 속하고, Ⅱ구역와 IV구역에서 발견된 토기 용기(陶容器), 방전(方塼), 연주문와당 등도 당대(唐代) 유물로 파악하면서 668년 신성주도독부(新城州都督府)를 두었다는 기사와 677년 당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겼다는 문헌기록과 연관시켰고, 아울러 신성주도독부와 안동도호부는 고이산성 밖이 아닌 성내에서 있었다고 보기도 함(佟逹·張波, 2001). 위치비정에 관한 견해는 다음과 같음. 1940년대 발견된 이후, 많은 학자들이 고이산성을 신성으로 보았음(渡邊三三, 1933; 李文信, 1962; 李甸甫, 1988; 孫進己·馮永謙, 1989; 王綿厚·李建才, 1990; 張正巖·王平魯, 1994; 陳大爲, 1995; 馮永謙, 1997; 郝武華, 2000; 王綿厚, 2002). 그런데 1990년 심양시 석대자산성(石臺子山城)이 발견된 후, 일부 학자들은 석대자산성을 신성으로 추정하기도 함(李曉鐘·劉焕民, 2000). 하지만 더 자세한 논거가 제시되지 않은 한 이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은 곤란함(肖景全·鄭辰, 2007). 渡邊三三(1933)은 고이산성을 최초로 신성으로 추정함. 徐家國·孫力(1987)은 고이산성을 고구려시기의 신성으로 추정함. 신성은 동진(東晋) 이후 고구려 서북변경에 위치한 성이었음. 『삼국사기』고구려본기 권80에는 ‘고국원왕 5년(335년) 춘정월에 국변(國邊)에 신성을 축조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음. 『구당서』고려전에 의하면 ‘이적(李勣)이 요하를 건너 신성에 이르렀을 때 제장들에게 “신성은 고구려 서쪽 변경의 진성(鎮城)이고, 가장 요해처이므로 먼저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나머지 성들도 쉽게 차지할 수 없다”라고 말했고, 당군(唐軍)이 신성 서남으로 군대를 이끌고 와서 산에 의지하고 책(柵)을 세우면서 공격과 수비를 하였는데, 결국은 사부구(師夫仇)가 성주를 묶은 다음 문을 열고 항복하였다’고 함. 문헌에 보이는 당군의 신성 함락과정은 신성의 견고함과 방어시설의 완비를 반영하는 것임. 두 문헌기록을 통해, 신성이 고구려 “고국(故國)” 약간 북쪽에 있고, 서쪽 변경에서 비중이 상당히 높은 진성(鎭城)임을 알 수 있음. 신성의 규모와 소재한 위치를 분석해볼 때, 고이산성이 신성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음. 한편 『구당서』고종본기에는 ‘영휘(永徽) 6년(655) 3월에 영주도독(营州都督) 정원진(程元振)이 귀단수(贵端水)에서 고구려를 격파하였다’라는 기록, 『신당서』고려전에는 ‘영휘(永徽) 6년 영주도독부(营州都督都) 정명진(程名振)과 좌위중랑장(左卫中郎將) 소정방(蘇定方)이 신성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외곽허락(外郭墟落)을 불태우고 돌아왔다’라는 기록이 있음. 위의 『구당서』와 『신당서』의 기사는 동일한 전투를 기록하고 있는데, 전자는 귀단수(貴端水), 후자는 신성에서 전투를 벌였다고 기록하고 있음. 고이산성 남위성 수문(南衛城 水門)에서 불에 탄 목책말뚝이 출토되었는데, 신성 외곽(外郭)이 불에 탔다는 기록과 부합한다고 볼 수 있음. 또한 기록을 종합해보면 귀단수는 신성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지금의 혼하로 추정됨. 요대에 설치된 귀덕주(貴德州)란 이름은 바로 강 이름에서 비롯된 것임. 고이산성이 바로 혼하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성의 지리적 위치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음. 당대(唐代)의 교통지리와 관련하여 『구당서』와 『신당서』에 의하면 신성은 개모성(蓋牟城) 동북의 신성도(新城道) 상에 있다고 함. 『구당서』권77과 『신당서』권98 위정(韋挺)전에 의하면 ‘당태종이 개모성을 깨뜨리고, 위정(韋挺)을 불러 지키게 하였는데, 개모성과 신성이 접해 있어, 밤낮으로 싸우고 쉬는 날이 없었다’라고 함. 개모성은 심양 남쪽 진상둔(陳相屯) 탑산산성으로 추정되는데, 탑산산성에서 동북방향으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성은 무순 고이산성이며 그 사이에 다른 고구려성은 없음. 그러므로 개모성에서 동북으로 접해 있는 신성은 고이산성으로 볼 수 있음. 댕대(唐代)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에는 ‘都護府(도독부, 현재 요양)에서 동북으로 고개모(故蓋牟)·신성을 지나고, 다시 발해장령부(渤海長岭府)를 지나 1,500리에 발해왕성(渤海王城)에 이른다’는 기록이 있음.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개모(盖牟), 신성은 동일 교통선상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음. 즉 『당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장령영주도(長岭营州道)”의 중간 부분이고, 상대적인 지리적 위치도 동북방향으로 차례대로 전개됨. 신성에서 혼하 하곡(渾河河谷)을 따라 동북쪽으로 휘발하곡(辉发河谷)으로 들어가서, 발해장령부(渤海長岭府, 지금의 吉林省 桦甸苏密城)로 이르렀고, 마지막으로 ‘발해왕성(渤海王城)’에 이른 것임. 이러한 점들을 볼 때 고이산성은 고구려의 신성임이 분명함. 당(唐)이 고구려를 평정한 후에는 도독부가 설치되었음.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는 ‘안동도호부를 평양성에 세워 통솔하도록 하며 그 거사(渠師)는 도독, 자사, 현령으로 삼는다. 설인귀(薛仁貴)가 병사 2만을 이끌고 안동부(安東府)에 주둔하였다. 상원(上元) 3년 2월에 안동부를 요동군고성(遼東郡故城)으로 옮겼다. 의봉(儀鳳) 2年(677)에 다시 신성으로 옮겼다’라는 기록이 있음. 고이산성이 안동도호부의 이천지(二遷址)가 되는 것으로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진(重镇)임을 반영한 것임. 馮永謙(1997)은 고이산성을 신성으로 추정함. 고이산성 서남에 있는 여러 줄의 참호는 『구당서』고려전의 ‘당군이 신성 서남으로 군대를 이끌고 와서 산에 의지하고 책(柵)을 세웠다’라는 기록과 부합함. 『신당서』지리지에는 ‘도호부에서 동북으로 고개모(故蓋牟)·신성을 지나고, 다시 발해장령부를 지나 1,500리의 발해왕성에 이른다’는 기록이 있음. 도호부는 요양시로 추정되는데, 요양시에서 동북쪽에 있는 심양시 탑산산성이 개모성으로 추정되고, 동북쪽에 고이산성이 있다는 점에서도 신성을 고이산성에 비정할 수 있음. 고이산성의 축조연대에 대한 견해는 다음과 같음. 徐家國·孫力(1987)는 『삼국사기』본기 18에 의해 고이산성으로 비정되는 신성의 시축연대를 335년으로 추정함. 李甸甫(1988)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신성(고이산성)의 축조와 관련하여 『삼국사기』고구려본기 고국원왕 5년(335) 정월 기사에 ‘축국북신성(築國北新城)’이라는 기록이 있음. 그런데 서천왕 7년(276)조에는 ‘4월에 왕이 신성으로 갔고, 8월에 신성에서 돌아왔다’는 기록, 서천왕 19년(288)조에는 ‘4월에 왕이 신성으로 갔고, 11월에 신성에서 돌아왔다’는 기록, 봉상왕 5년(296)조에는 ‘왕이 고노자(高老子)를 신성 태수(新城太守)로 삼았다’라는 기록이 있음. 위의 기록을 볼 때, 335년 이전 서천왕과 봉상왕대에 이미 신성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음. 또한 출토유물을 보면, 철제 낫(鎌)·철제 삽(揷)·철제 살포(鏟) 등 철제 생산 농기구들이 출토되었는데, 적어도 후한(後漢)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임. 그러므로 고국원왕 5년조 정월의 ‘築國北新城’이라는 기록에서 ‘축(築)’은 ‘시축(始築)’이 아니라 ‘다시 축조하다(又築)’ 또는 ‘수축하다(修築)’의 의미로 보아야 함. 구체적인 신성의 축조연대를 유추하는데 있어, 태조왕대 3년조(55년)의 “봄 2월에 요서(遼西) 10성을 축조하여 한(漢)의 병사에 대비하였다”라는 기사가 주목됨. 기사를 통해 태조왕 3년대에는 고구려가 신성(고이산성)이 위치한 무순일대까지 세력을 미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음. 아마도 이때 신성이 축조된 것으로 추정됨. 三上次男·田村晃一(1993)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삼국사기』고구려본기 고국원왕 5년(335)년조의 ‘나라 북쪽에 신성을 세웠다’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 기사에 보이는 ‘신성’을 고이산성이라고 추정하는 견해가 있음. 그런데 ‘신성’이라는 지명이 그 이전의 역사서에서도 보이고 있음. 고국원왕 5년 이전의 기사에 보이는 ‘신성’이 고이산성인지 아니면 다른 성을 의미하는지는 더 검토해 보아야 할 문제임. 신성과 관련하여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서천왕 7년(276)조에는 ‘4월에 왕이 신성으로 가서 사냥하여 흰 사슴을 잡았다. 가을 8월에 왕이 신성으로부터 돌아왔다’는 기록,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서천왕 19년(288)조에는 ‘4월에 왕은 신성으로 행차하였다. (중략) 8월에 왕이 동쪽으로 사냥을 나가서 흰 사슴을 잡았다. (중략) 11월에 왕은 신성으로부터 돌아왔다’는 기록,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봉상왕 2년(293)조에는 ‘8월에 모용외(慕容廆)가 침입하여 오자 왕은 신성으로 가서 적을 피하려고 하였다. 행차가 곡림(鵠林)에 이르렀을 때, 모용외가 왕이 도망간 것을 알고 군사를 이끌고 추격하여 거의 따라잡게 되었으므로 왕은 두려워하였다. 그때 신성재(新城宰)인 북부(北部) 소형(小兄) 고노자(高奴子)가 50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왕을 맞이하러 나왔다가 적을 만나 그들을 힘껏 치니 모용외의 군대가 패하고 물러갔다’라는 기록,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봉상왕 5년(296)조에는 ‘왕은 고노자를 신성 태수(太守)로 삼았다. 그는 선정을 베풀어 위세와 명성이 있었으므로 모용외가 다시 쳐들어 오지 못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음. 4개의 기사 가운데 앞의 두 기사는 내용이 거의 동일하고, 내용은 빈약하며, 사실 여부도 의심스러움. 사실이라 할지라도 서천왕 7년 기사의 원주(原注)를 보면 ‘혹은 신성은 나라 동북쪽의 대진(大鎭)이라고도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고국원왕 5년조의 ‘나라 북쪽에 신성을 축조하였다’라는 기사와 비교해 볼 때 방향이 약간 다름. 봉상왕대 기사들은 모두 고노자와 관련되었는데, 고노자의 공훈을 자랑하는 내용임. 그러므로 고노자의 후예가 조상의 공업(功業)을 기리는 이야기를 『삼국사기』에 삽입한 것으로 보아야 함. 즉 고국원왕 5년 이전의 ‘신성’과 관련된 기사는 그 사실여부가 의심스럽고, 사실이라 할지라도 고국원왕 5년에 세워진 ‘신성’과는 다른 것으로 추정됨. 광개토대왕 9년(399) 모용희(慕容熙)에 의해 남소성(南蘇城)과 함께 함락된 신성과 양원왕 7년(551) 돌궐에 의해 백암성(白巖城)과 함께 공격당한 신성은 수·당대 고구려원정에 보이는 ‘신성’과 동일하며 모두 고이산성을 가리킨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음. 즉 고국원왕 5년 이후 ‘신성’이 연(燕)과 당(唐) 등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등장하는 것은 신성이 고구려의 방어체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시사하는 것임. 王绵厚(1993)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서진(西晋)은 성립초기에는 동북지역에 대한 통치가 비교적 약했는데, 고구려가 이같은 정세를 이용해서 서진(西進)하여 혼하 및 요하지역에까지 이르렀다고 추정함. 그러므로 고이산성의 수축연대는 서진(西晋)이 건국된 266년에서 신성이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276년 사이로 추정할 수 있음. 溫秀榮·張波(1996)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고구려 초기산성은 대부분 가파른 절벽을 천연성벽으로 삼았음. 인공벽이 가파른 절벽에 축조된 경우는 드물게 보이고, 주로 틈(缺口)을 막거나 높이가 낮은 산등성이에 축조함. 인공벽의 높이는 3~6m로 높음. 성벽건축재는 주로 쐐기형 돌로 외벽을 구축하였고, 안에는 잡석을 채웠음. 성문 옹성의 평면은 대부분 장방형이고, 각요대(角瞭臺)는 명확히 구분됨. 유물은 극히 적게 보이는데, 모래혼입 홍갈색 토기편이 출토되기는 하나 기와류는 보이지 않음. 그리고 생활용기 등이 출토되기도 함. 이로 볼 때, 태자성 내성(太子城 內城), 흑구산성(黑溝山城), 전수호산성(轉水湖山城), 삼송산성(杉松山城) 등이 초기 산성에 속함. 고구려 중기 산성의 특징은 산등성이와 초벽장 위에 일률적으로 돌로 성벽을 축조하였음. 일반적으로 저지대는 성벽을 높게 쌓았음. 반면 초벽과 절벽에는 높이 약 1~1.5m의 낮은 벽을 축조하였는데, 그 기능은 성가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음. 성문은 대부분 안으로 오므라드는 U형 옹문임. 성벽 건축재는 쐐기형 돌과 잡석이 대부분을 차지함. 외벽은 초기 산성의 외벽과 달리 정연함. 또한 건축재 가운데 쐐기형 돌이 발전한 단조석(短條石)이 출현함. 다만 더욱 정교하게 가공된 한쪽은 넓고 한쪽은 좁은(頭大尾細) 쐐기형 돌은 여전히 남아 있음. 성에서 출토된 유물은 초기 산성보다 풍부함. 수키와, 암키와, 녹색유약이 발라진 자기편, 철촉, 분(盆), 반(盤), 옹(瓮), 단지 등 회색토기편 등이 출토됨. 이 시기의 연대는 위진(魏晋) 이후임. 오룡산성(五龍山城)과 태자성 외성(太子城 外城)이 중기 산성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음. 고구려 후기 산성은 산등성이를 따라 토벽 혹은 토석혼축벽을 쌓았음. 문호(門戶) 혹은 방어가 취약한 부분에는 흙을 다진 성벽을 크고 높게 쌓았고, 석축벽은 볼 수 없음. 각망대(角望臺)는 일률적으로 흙을 다져서 축조한 봉화대로 변화함. 출토유물은 초기~중기보다 매우 다양함. 고이산성과 쌍립산성(雙砬山城)이 이 시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진(晋)~당(唐)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됨. 여호규(1999)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신성(고이산성)이 위치한 혼하 연안의 무순일대는 요동평원과 요동 동부 산간지대의 접경지대로서 압록강 중류일대 요동평원으로 나아갈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전략적 요충지임. 이에 고구려는 일찍부터 소자하와 혼하를 거쳐 요동지역과 왕래하였음. 특히 1세기 말~2세기 초 영릉진(永陵鎭) 일대의 제2현토군을 혼하 방면으로 쫓아내고 소자하 연안을 장악한 다음, 혼하를 통해 제3현토군 등을 끊임없이 공격하거나 이들과 왕래함. 이에 중국측 군현세력도 제3현토군을 거점으로 삼아 혼하·소자하 연안로를 통해 고구려와 그 주변 족속을 침공하였음. 3세기 중반 관구검이 혼하와 소자하를 거슬러 혼강으로 진입한 다음 신개하(新開河)와 판차령(板岔嶺)을 거쳐 환도산성에 입성한 것으로 보아, 2~3세기경 고구려는 혼하 연안로를 통해 중국세력과 공방전을 벌였고, 아직 혼하 연안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추정됨.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고구려는 296년 신성을 전초기지로 삼아 모용선비(慕容鮮卑)의 침입을 방어하고, 335년 신성을 축조함. 모용부(慕容部)는 309년경부터 요동지역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319년 요동지역을 장악하여 고구려와 국경을 접한 만큼 296년에 고구려 수도까지 진격하였다고 보기는 힘듦. 그렇지만 고구려가 제3현토군을 대대적으로 공략한 302년~315년에는 동부 산간지대 곧 고이산성 위쪽의 혼하 연안일대를 장악하였올 가능성이 높음. 고구려는 대체로 4세기 초에 혼하 연안으로 진출하여 신성을 축조한 것으로 추정됨. 王綿厚(2002)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동문 남벽에 있던 성돌을 보면, 크거나 쐐기형 돌임. 성벽은 성 기단층에서 정상부까지 층층히 쌓았고 벽심(墻芯)은 깬돌로 채워 넣었음. 이러한 성벽 축조방식은 고구려 중기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음. 佟達(2003)은 276년 이전으로 추정함. 张福有(2004)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고구려의 신성은 세 곳이 있었음. 첫 번째 신성은 집안 양민촌(集安 良民村)에 있고 247년에 축조함. 두 번째 신성은 유하현 나통산성(柳河縣 羅通山城)이고 335년에 축조함. 세 번째 신성은 무순 고이산성이고, 고국양왕시기 즉 384년~391년 사이에 축조함. 曹德全(2004)는 385~400년 사이로 추정함. 肖景全·鄭辰(2007)은 고이산성이 고구려 후기 산성에 속한다고 봄. 성은 고구려가 통제했던 범위의 서쪽에 위치함. 고구려가 끊임없이 서쪽으로 진출하면서 축조하였기 때문에 축조연대는 그리 이르지 않음. 아마도 4세기 말에 축조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고, 3세기에 축조되었던 신성은 고이산성이 아님. 梁志龍·魏海波(2008)은 신성(고이산성)의 축조연대를 396년, 고구려 광개토대왕 6년으로 볼 수 있고, 이전의 문헌에 보이는 신성은 고이산성이 아니라고 봄. 국가문물국(2009)은 296년보다 늦지 않다고 추정함.자연환경 무순시구 북교(撫順市區 北郊) 혼하(渾河) 북안 2㎞에 위치한 해발 154m의 고이산(高爾山) 위에 위치함. 제고점(制高点)은 장군봉(將軍峰)인데, 무순시구의 최고봉이기도 함. 고이산 정상에 올라가보면, 주변이 탁 트여 있어 산성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옴. 고이산성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지형에 위치하면서 혼하 연안의 교통요충지를 통제할 수 있음. 고이산성에서 혼하 하류를 따라 서남쪽으로 나아가면 광활한 요동평원이 전개되는 반면, 혼하 상류를 거슬러 동북쪽으로 나아가면 요동 동부 산간지대로 진입할 수 있음. 즉 고이산성은 요하평원과 요동산지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음. 혼하에서 소자하(蘇子河)를 거쳐 고구려 초기중심지인 혼가유역으로 나아갈 수 있고, 송화강 상류를 거쳐 동북쪽으로 계속 나아가면 부여 중심지였던 길림지역에 도달할 수 있음. 또한 북쪽으로 철령(鐵嶺)방면으로 나아가면 요하 중상류로 통할 수 있음. 고이산성은 요동평원에서 초기 중심지인 압록강 중류일대로 진입하는 길목일 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전략적인 요충지인 것임. 고이산에서 남쪽으로 0.5㎞ 떨어진 지점에 무순성(撫順城)이 있음. 산성 동쪽으로 1.5㎞ 떨어진 지점에 시가가 고구려고분군(施家街高句麗墓群)이 있음. 고이산 서남쪽으로 2㎞ 떨어진 지점에는 장군보(將軍堡)가 있음. 남쪽으로 2㎞ 떨어진 지점에 혼하(渾河)가 있음. 무서하(撫西河)가 산성 북쪽과 동쪽을 지나 남쪽으로 혼하로 유입됨. 산성 주위는 험준한 산과 구릉에 의해 둘러싸여 있음.유물정보 청동제 장식구(靑銅飾金具) 1점, 청동제 대금구(靑銅帶金具) 1점, 철제 화살촉(鐵鏃) 67점, 철제 못(鐵釘) 20점, 철제 찰갑편(鐵札甲片) 6점, 철제 모(鐵矛) 5점, 철제 칼(鐵刀子) 1점, 철제 축수금구(鐵軸受金具) 1점, 철제 작살(鐵銛先) 1점, 철기(鐵器) 2점, 호(壺) 3점, 호(罐) 7점, 발(鉢) 1점, 옹(瓮) 16점, 완(碗) 9점, 반(盤) 6점, 동이(盆) 5점, 접시(碟) 1점, 뚜껑(器蓋) 1점, 시루(甑) 3점, 토기 구연부(土器口沿部) 1점, 토기 동체부(土器胴體部) 1점, 토기(土器) 2점, 와당(瓦當) 15점, 연화문와당(蓮花紋瓦當) 1점, 수키와(筒瓦) 7점, 암키와(板瓦) 7점, 시유장식와(釉裝飾瓦) 2점, 벽돌(塼) 2점, 개원통보(開元通寶) 2점, 태평통보(太平通寶) 1점, 천희통보(天禧通寶) 1점, 천성원보(天聖元寶) 1점, 원풍통보(元豊通寶) 1점, 명기(明器) 1점, 가락바퀴(紡輪) 4점, 토제품(土製品) 11점, 회반죽 조각(灰浆片) 3점, 철제 가래(鐵鏵) 2점, 철제 보습(쟁기; 鐵犁) 2점, 철제 괭이(鐵鎬) 2점, 철제 호미(鐵鋤) 1점, 철제 도끼(鐵斧) 2점, 철제 수레바퀴굴레축(鐵車輨) 3점, 철제 등자(鐵登子) 1점, 철제 솥(鐵鍋) 2점, 동제 대과(銅帶銙) 1점, 철제 투구(鐵冑) 1점, 철제 요도(鐵腰刀) 2점, 철제 도격(鐵刀格) 1점, 철제 도(鐵刀) 1점, 철제 도자(鐵削) 4점, 철제 창고달이(鐵鐏) 2점, 철제 마름쇠(鐵蒺藜) 1점, 철제 다리(鐵足) 1점, 철제 삽(鐵揷) 1점, 철제 낫(鐵鎌) 1점, 철제 살포(鐵鏟) 1점, 철제 투환(套環) 1점, 철제 비(鐵鼻) 1점, 철제 과대(鐵銙帶) 1점, 철제 부속품(鐵附屬品) 1점, 철제 추(鐵錐) 1점, 거북이 다리조각(龜趺) 1점, 돌구슬(礫石球) 1점, 와제품(彈丸) 1점, 도제장식편(龍爪文殘飾件輪) 1점, 토제품(獸面形陶構件) 2점, 토제품(陶飾件) 1점, 토제품(鳳首形陶飾件) 1점참고문헌 · 渡邊三三, 「高句麗の新城發現」『滿蒙』 14-9, 不二出版, 1933 · 李文信, 『遼寧史迹資料』, 遼寧省博物館, 1962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再探」『北方文物』 1995-3, 1964 · 鄭辰, 「撫順市高爾山山城在調査發掘中」『遼寧文物』 1984-3, 1984 · 陳大爲, 「撫順市高爾山山城遺址」『中國考古學年鑒』, 文物出版社, 1984 · 孫力, 「撫順高爾山高句麗山城址」『中國考古學年鑑』, 文物出版社, 1985 · 孫力, 「撫順市高爾山城」『中國考古學年鑒』, 文物出版社, 1986 · 徐家國·孫力, 「遼寧撫順高爾山城發掘簡報」『遼海文物學刊』 1987-2, 1987 · 王绵厚, 「“玄菟”與“新城”新解」『遼海文物學刊』 1988-2, 1988 · 李甸甫, 「高句麗新城的始築年代」『遼海文物學刊』 1988-2, 1988 · 田村晃一, 「高句麗のについて」『百濟文化』 18, 1988 · 孫進己·馮永謙, 『東北歷史地理』 (二), 黑龍江人民出版社, 1989 · 三上次男, 「東滿風土雜記」『高句麗と渤海』, 吉川弘文館, 1990 · 王綿厚·李建才, 『東北古代交通』, 沈陽出版社, 1990 · 陳大爲, 「撫順高爾山城結構布局辨析」『遼海文物學刊』 1992-2, 1992 · 佟達, 「關于高句麗南北交通道」『博物館研究』 1993-3, 1993 · 王綿厚, 「玄菟與新城新解」『瀋陽文物』 1993-1, 1993 · 三上次男·田村晃一, 『北關山城』, 中央公論美術出版, 1993 · 辛占山, 「遼寧境內高句麗城址的考察」『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魏存成, 『高句麗考古』, 吉林大學出版社, 1994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林直樹, 「中國東北部の高句麗山城」『靑丘學術論集』 5, 1994 · 張正巖·王平魯, 「新城道及新城道上諸城考」『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東潮·田中俊明, 『高句麗の歷史と遺跡』, 中央公論社, 1995 · 王禹浪, 「中國東北地區古城文化遺跡概述」『黑龍江民族叢刊』 1995-4, 1995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再探」『北方文物』 1995-3, 1995 · 盧泰敦, 「5~7세기 고구려의 지방제도」『韓國古代史論叢』 8, 韓國古代社會硏究所, 1996 · 溫秀榮·張波, 「關于撫順地區的高句麗山城」『博物館研究』 1996-1, 1996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高句麗渤海硏究集成』 高句麗 卷(三), 哈爾濱出版社, 1997 · 李殿福, 「高句麗山城硏究」『北方文物』 1998-4, 1998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李曉鐘, 「石台子山城發現與研究」『東北地區三至十世紀古代文化學術討論會論文』, 2000 · 郝武华, 「高尔山城考」『中國地名』 2002-2, 2000 · 佟達·張波, 『撫順高爾山城2區遣蹟的再認識』 『高句麗研究』 12, 고구려발해학회, 2001 · 魏存成, 「近年來我國高句麗考古的主要發現與硏究」『東北亞論壇』 2001-1, 2001 ·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魏存成, 『高句麗遺跡』, 文物出版社, 2002 · 曹德全, 『高句麗史探微』, 中華國际出版社, 2002 · 傳達, 『高爾山』, 遼寧民族出版社, 2003 · 張福有, 「高句麗第一個平壤城在集安良民卽國之東北大鎭-新城」『東北史地』 2004-4, 2004 · 曹德全, 「高尔山上的新城建于何時」『撫順歷史之謎』, 大連出版社, 2004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2007 · 肖景全·鄭辰, 「撫順地區高句麗考古的回顧」『東北史地』 2007-2, 2007 · 梁志龍·魏海波, 「高尔山城始筑年代考辨」『東北史地』 2008-3, 2008 · 國家文物局,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 西安地圖出版社, 2009 · 魏存成, 「中國境內發現的高句麗山城」『社會科學戰線』 2011-1, 2011

    • 리스트여닫기 노동공원고성(勞動公園古城) 출토지 요녕성 무순시(遼寧省 撫順市)연대 한(漢)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35도변삼삼, 호전관, 재등무일(渡辺三三, 戸田寛, 齋藤武一)성지를 발견하고, 제3현토군 군치(第3玄菟郡 郡治)로 비정하였음.1937 1935년에 誉ヶ丘에 온천장인 호박천(琥珀泉)이 신축될 때, 흙 중에서 다량의 기와편과 토기편과 더불어 전축(塼築)유적이 발견되었는데, 공사가 계속 진척되면서 매몰되었기 때문에 호박천 옆에서 간단한 발굴을 시행하였음.1938지내굉(池內宏)성이 위치한 구릉이 공원 건축공사 때문에 원형을 잃어버려서 위치를 확인하기 어려웠음. 규모가 큰 한대(漢代) 토성지라고 보고 제3현토군 군치(郡治)로 비정함.1960 핸대(漢代) 성의 기초가 발견됨.1977 6개 지구를 발굴하면서 유물들을 출토함.1978무순시박물관(撫順市博物館)봄, 고성 내에 5×5m의 트렌치 6개를 팠음.1981무순시박물관 고고대(抚顺市博物馆考古队)봄, 무순시 노동공원 안 서북모서리에 스케이트장을 만들 때 고대유물이 발견됨. 무순시박물관이 조사할 때, 배면은 승문·정격자문·사정격자문이고 내면은 포문이 펼쳐진 홍색 암키와, 수키와 등이 발견되었는데, 고구려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함.1985왕면후, 손력(王綿厚, 孫力)기초공사현장에서 흙을 다진 한대(漢代) 성 기단을 발견하였는데 규모가 비교적 작았음. 성지는 현대건물 아래에 있었음.구조특징 현재 중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노동공원고성(勞動公園古城)이라고 부르고 있음. 하지만 노동공원은 과거 ‘霊ケ丘’에 한정되어 있었고, 토성이 어디까지 뻗어 있었는지는 불명확하지만 ‘誉ヶ丘’에서도 확인되므로 영안대고성(永安台古城)이라고 부르자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함(田中俊明,1994). 성지는 중심 시가지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성벽은 대부분 파괴되었음. 성내 가운데 부분은 도로가 동서로 통과하면서 성벽이 파괴되고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음. 높은 곳에 올라가면 전체적인 윤곽을 희미하게 확인할 수 있음. 성은 높은 언덕에 위치하며, 성의 세 면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가장자리는 평탄하고 개활함. 남북은 높고 중간은 평평하고 완만함. 평면은 장방형이고, 방향은 남북향임. 한대(漢代) 문화층의 두께는 약 40㎝ 정도임. 성벽은 토축으로, 흙을 쌓아 올린 다음 판축을 조금 가하는 형태로 구축함. 성벽의 기단부는 적지 않은 구간이 절단되었는데, 암반 위에 기단부를 축조하였음. 성벽 기단부의 너비는 7m 정도로 일정하지 않음. 1950년대 이래 발굴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한위(漢魏)대 유물들이 대거 출토됨. 출토된 한대(漢代) 유물은 황화유역의 후한(後漢)대 성지에서 나온 유물과 같음. 산성이 위치한 구릉지대는 예부터 적색마연토기, 채문토기 등 토기편과 기와편의 산포지로 알려져 있음(戶田寬, 1937). 1935년에는 구릉에 온천장인 호박천(琥珀泉)이 신축될 때, 흙 중에서 다량의 와편과 토기편이 출토됨. 후한대의 토기는 대부분 니질의 회색으로, 소성온도가 높고 물레로 제작함. 기형으로는 호, 단지, 바리, 굽접시 동이, 병, 솥, 시루(甑) 등이 있음. 한대의 ‘千秋萬歲’명 와당과 운문와당, 회색 승문 암키와·수키와 등이 출토됨(王綿厚, 2002). 정면이 승문·정격자문·능격문이고, 내면은 포문이 펼쳐진 홍색 암키와, 수키와 등이 발견되었는데 고구려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함(肖景全·鄭辰, 2007). 호박천(琥珀泉) 근처에서 후한대 오수전(五銖錢)이 출토됨. 무순시 노동공원고성 공원사무소와 호박천 사이의 숲에서 적색의 소토덩어리(燒土塊), 목탄편 등이 발견되었음.역사적 의미 공원 내에서 고구려 시기의 붉은색 승문·격자문 기와가 대량으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가 한대(漢代)의 성지를 중축하거나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보여짐. 고구려의 남협도(南陜道) 상에 있는 고성으로 보기도 함(徐家國, 1996). 池內宏, 八木奘三郞, 李文信, 徐家國(1996) 등은 한대 제3현토군 군치(郡治)로 비정함. 여호규(1999)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2~3세기경 제3현토군은 고구려·부여 등을 견제하기 위한 전초기지였음. 제3현토군 치소는 혼하 연안 가운데 고구려나 부여를 적극적으로 견제하고 방어할 수 있는 지역에 구축하였을 것으로 추정됨.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제3현토군의 치소로 혼하 연안 평원의 동북단으로서 동부 산간지대와 접경지대인 노동공원고성이 가장 유력함. 그런데 고구려는 4세기 초 혼하 일대를 장악한 다음 노동공원고성 맞은편에 신성(고이산성)을 구축하고 요동 진출의 전초기지로 삼았음. 이와 동시에 302년, 315년에 제3현토군을 공격하는 등 요동지역 패권을 놓고 선비 모용부와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음. 그런데 전연(前燕)에서 현토태수를 역임한 인물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4세기 전반 전연은 현토군을 계속 설치하였다고 추정됨. 그러므로 고구려가 혼하 중류 일대를 장악한 이후에도 노동공원고성에 계속 제3현토군 치소를 두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음. 제3현토군 치소가 본래 노동공원고성이었다면, 신성 축조 이후에는 서쪽으로 옮겨졌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음. 제3현토군 치소를 옮긴 시기를 2세기 말경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기원전 107년 현토군이 설치된 이래 고구려의 성장에 따라 그 치소가 끊임없이 서쪽으로 쫓겨난 만큼 제3현토군 치소도 고구려와의 관계에 따라 다시 한번 옮겨졌다고 추정되는 것임. 이 경우, 고구려가 혼하 북안에 신성(고이산성)을 구축하여 요동진출의 전초기지로 삼았던 시기에 제3현토군 치소를 다시 한 번 옮겼을 가능성이 높음. 즉 노동공원고성에 설치하였던 제3현토군은 신성이 구축되던 4세기 초를 전후한 시기에 다시 한번 서쪽 곧 상백관둔고성(上伯官屯古城) 일대로 옮겨졌을 것으로 추정됨. 이 경우에도 문제는 있음. 『주서』고려전에서 6세기 중반 현토성(玄菟城)은 고구려의 대표적인 지방성으로 거명되었고, 645년에도 현토군은 신성과 함께 당군의 집중공격대상이었음. 이러한 사실은 고구려가 요동평원으로 진출한 다음 제3현토군(또는 제4현토군)의 치소를 요동군의 치소였던 요동성처럼 재사용하였음을 보여줌. 그런데 위의 혼하 연안 평지성 가운데 고구려 시기 유물이 출토된 곳은 노동공원고성과 동주소갑방고성(東州小甲邦古城)임. 따라서 제3현토군 치소가 다시 한번 변경되었다 하더라도 현재까지의 고고학 발굴성과만 놓고 본다면, 고구려 현토성은 노동공원고성일 가능성이 가장 높음. 王綿厚(2002)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출토유물로 볼 때, 고구려가 신성을 축조하기 전의 한대 현토군의 수비성(守備城)으로 보임. 이후 고구려가 신성을 축조한 이후에는 평지성으로 이용한 것으로 추정됨.자연환경 무순 노동공원고성은 무순 시가 중심부(撫順 市街 中心部)에서 약간 동쪽에 있는 노동공원 산언덕에 위치함. 노동공원고성은 요동평원과 동부 산간지대의 접경지역에 위치함. 혼하 연안 대평원지대의 동북단으로서 혼하를 따라 동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천산산맥(千山山脈)·용강산맥(龍崗山脈)과 길림합달령(吉林哈達嶺) 일대의 산간지대로 접어들게 됨. 특히 혼하(渾河)에서 소자하(蘇子河)를 거쳐 고구려 초기 중심지인 혼강유역으로 나아갈 수 있고, 송화강 상류를 거쳐 동북쪽으로 계속 나아가면 부여 중심지였던 길림지역에 도달할 수 있음. 또한 북쪽으로 철령(鐵嶺)방면으로 나아가면 요하 중상류로 통할 수도 있음. 노동공원고성은 요동평원에서 고구려 초기 중심지인 압록강 중류일대로 진입하는 길목일 뿐 아니라 여러 방면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임(여호규, 1999). 동남으로는 요동산구(遼東山區)에서 오는 적들을 방어할 수 있고, 서쪽으로는 개활한 혼하평원(渾河平原)을 통제할 수 있으며, 북쪽으로는 혼하와 접해 있는 등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음. 성에서 혼하 건너편 고이산성(신성)까지의 거리는 2㎞임. 성에서 2㎞ 떨어진 지점에 한대(漢代) 고분군이 있음. 노동공원고성은 혼하에 걸려 있는 영안교(永安橋) 동남의 낮게 이어지는 세 개의 구릉에 위치함. 현재 가장 북쪽의 무순 우의빈관(撫順友誼賓館)이 건설되어 있는 구릉은 이전 만주국시대(満洲國時代)에는 ‘誉ヶ丘’라고 불리었음(그 위에 충혼비(忠魂碑)가 서 있던 관계로 지금의 해방기념비(解放記念碑)가 건설됨). 도로를 사이에 두고 남측에는 있었던 구릉은 과거에 ‘霊ヶ丘’라고 불리었는데(여기에 무순탄산순직비(撫順炭鏟殉職碑)가 건설되었던 관계로 지금도 순직비(殉職碑)가 서 있음), 현재는 노동공원으로 변모하였음. 남쪽은 과거에 ‘泉ヶ丘’라고 불렸던 구릉(정수장(浄水場)이 있었음)으로 이어짐. 이 세 구릉을 아울러서 영안대(永安台)라고도 불렀음(田中俊明, 1994). 고성이 위치하고 있는 산언덕은 노호대산(老虎臺山)에서 이어졌고, 혼하 남안까지 이르러 높이 4m 가량의 초벽(峭壁)이 형성되어 있음. 그 초벽은 조어대(釣魚臺)라고 부르고 있는데, 만주국시대에는 영안공원(永安公園)이라고 불렀음(王禹浪·王宏北, 2007). 성지가 위치한 곳은 장백산 여맥(長白山 餘脈)과 혼하 충적평원의 접경지대이고, 남북쪽은 기복 있는 산들이 이어져서 이상적인 천연장벽을 이루고 있음. 고성의 북쪽 171m 지점에 혼하가 서쪽으로 흘러가고 있음.유물정보 운뇌문동경(雲雷文銅鏡) 1점, 동제 화살촉(銅鏃) 1점, 낫(鎌) 1점, 도끼(鐵斧) 1점, 刀(칼) 1점, 철제 화살촉(鐵鏃) 1점, 시루 저부(甑底部) 2점, 시루(甑) 2점, 활석혼입토기(滑石混入土器) 1점, 적색마연토기(赤色磨硏土器) 1점, 채문토기(彩文土器) 1점, 사질토기(沙質土器) 1점, 대부토기(臺付土器) 1점, 유문토기(有文土器) 1점, 와당(瓦當) 4점, 벽돌(磚) 1점, 석제토기(石斧) 1점, 오수전(五銖錢) 1점, 녹각기(鹿角器) 2점, 토추(土錘) 1점, 가락바퀴(紡輪) 1점참고문헌 · 戶田寬, 「撫順永安公園附近に於ける石器及土器類の分布狀況」『滿洲史學』 1-2, 1937 · 齋藤武一, 「撫順永安公園譽ヶ丘遺蹟」『滿洲史學』 2-3, 1938 · 渡邊三三, 『增訂 撫順史話』, 撫順新報社, 1940 · 田中俊明, 「高句麗の興起と玄菟郡」『朝鮮文化硏究』 1, 東京大學文學部朝鮮文化硏究室, 1994 · 徐家國, 「漢玄菟郡三遷址辦石」『中國考古集成』 東北卷 秦漢至三國(二), 北京出版社, 1997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肖景全·鄭辰, 「撫順地區高句麗考古的回顧」『東北史地』 2007-2, 2007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2007 · 國家文物局,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 西安地圖出版社, 2009

    • 시가 고분군(施家 古墳群)

    • 시가 1호묘(施家 1號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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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스트여닫기 신빈현(新賓縣)

    • 리스트여닫기 흑구산성(黑溝山城) 출토지 신빈 흑구산성 강묘자향 사도구촌 (遼寧省 新賓縣 江廟子鄉 四道溝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2003년 3월 20일요녕성인민정부(遼寧省人民政府)요녕성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함.1976년무순시박물관고고조사단, 신빈현문화국(無順市博物館考古調査團, 新賓縣文化局)산성발견함.1980년과 1983년무순시박물관고고조사단, 신빈현문화국(無順市博物館考古調査團, 新賓縣文化局)현황 조사 및 실측. 산성명칭을 흑구산성으로 명명하고 『文物』1985-2 에 발표함.1987년 4월무순시인민정부(無順市人民政府)무순시 시급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함.구조특징 험준한 자연 산세를 이용하여 쌓았음. 산 정상부의 평탄지를 둘러싼 높이 40-80m에 이르는 절벽을 천연성벽(중국학자들이 ‘초벽장’이라고 명명)으로 삼은 것이 흑구산성의 가장 중요한 특징임. 자연절벽 사이의 트인 곳, 골짜기 입구, 지세가 낮은 산등성이 등에는 잘 다듬은 돌러 성벽을 쌓아 트인 곳을 막거나 산등성이의 높이를 높혔음(중국학자들이 ‘인공장’이라고 명명). 산성의 전체 평면은 장방형으로 남북으로 길게 놓여 있음. 산성 내부의 지세는 평평한데 남쪽이 비교적 높고 북쪽이 대체로 낮으며, 중앙의 북쪽 부분이 약간 움푹 들어가 있음. 또한 산 정상부 가장자리의 절벽과 인공석벽 바깥에는 길이 2㎞ 정도의 산비탈이 펼쳐져 있음. 기초부는 돌을 깔아 기초를 평평하게 고른 다음 기단부의 성벽을 축조했음. 기단부의 성벽은 대체로 4단을 쌓았는데, 위로 올라갈수록 안쪽으로 5㎝씩 들여쌓았음. 기단부 위쪽의 성벽은 약간 안쪽으로 기울었을 뿐 대체로 평평하고 곧바름.역사적 의미 고구려 초기 수도인 흘승골성으로 비정되는 오녀산성이나 패왕조산성보다 상류에 위치하였고, 부근에 지석묘와 소형 적석묘 등이 다수 분포되어 있다는 점을 근거로 흑구산성을 비류수 상류의 비류국 소재지로 추정하기도 함. 흑구산성은 해발 700m의 산 정상부에 위치했다는 점에서 군사방어성으로 추정됨. 특히 쐐기형 돌을 이용한 물림쌓기 축성법과 성가퀴 안쪽의 기둥구멍은 패왕조산성·오녀산성·산성자산성 등에도 보이며, 동문의 장방형 옹성은 형식상 반원형 옹성보다 이른 시기로 편년됨. 또한 토기편은 고구려 초기의 특징이 강하다고 함. 이로 보아 흑구산성은 상당히 일찍 축조되었을 것으로 여겨짐. 부이강 일대에는 흑구산성 이외에 전수호산성, 사도구산성, 건설산성 등이 분포되어 있는데, 이들은 모두 해발 600-700m의 높은 산 위에 있고, 각각 부이강 서안과 동안에 위치해 있으면서 모두 부이강 연안을 잘 관찰할 수 있도록 망대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소자하 유역에서 부이강 연안을 경유하여 혼강 본류로 나아가던 교통로를 공제하던 군사방어시설로 추정됨. 흑구산성은 전수호산성, 사도구산성, 건설산성 등과 함께 부이강 연안 일대에서 혼강 우안의 호형·축선방어체계를 구성하였다고 파악됨.자연환경 동쪽 3㎞ 거리에 부이강이 흐르고, 남쪽 2㎞ 거리에 부이강 지류인 취류하가 흐르고 있는데, 하천 주변에는 비옥한 하곡평지가 펼쳐져 있음. 이 지역은 많은 산들이 연이어 뻗어 있고, 산림이 울창하고, 땅이 비옥하여 자연물산이 풍부할 뿐 아니라 지세가 험준한 천혜의 요충지임. 흑구산성과 주변의 여러 산성, 강묘자향에서 발견된 지석묘와 적석묘 등은 부이강 유역 일대가 일찍부터 거주지역으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줌.유물정보 평저토기 저부 등 토기편 중심으로 출토됨. 태토는 고운 모래나 거친 모래가 혼입된 것으로 나뉘며, 색깔은 홍갈색 또는 회갈색이다. 무문이며 손으로 제작됨.참고문헌 · 佟達·張正岩, 「遼寧省新賓縣黑溝高句麗早期山城」『文物』 1985-2, 1985 · 王綿厚·李健才, 『東北古代交通』, 瀋陽出版社, 1990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王禹浪·王宏北, 「中國吉林省新賓滿族自治縣紅廟子鄕高句麗黑溝山城址」『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1994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北方史地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4 · 魏存成, 「城址·建築址」『高句麗考古』, 吉林大學出版社, 1994 · 王綿厚, 「鴨綠江右岸高句麗山城硏究」『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再探」『北方文物』 1995-3, 1995 · 余昊奎, 「新賓 黑溝山城」『高句麗 城』 Ⅰ(鴨綠江 中上流篇), 國防軍史硏究所, 1998 · 魏存成, 「山城」『高句麗遺跡』, 文物出版社, 2002 · 王綿厚, 「高句麗南北二道上諸城」『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李樂營·李淑英, 『中國高句麗學者與硏究綜述』, 吉林文史出版社, 2006

    • 리스트여닫기 전수호산성(轉水湖山城) 출토지 요녕성 신빈현(신빈만족자치현) 동남 35㎞의 향수하자향 전수호촌 북쪽 500m 거리의 “고려성자” 산 위에 위치 (遼寧省 新賓縣(新賓滿族自治縣) 響水河子鄉 轉水湖村 “高麗城子” 山)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0년무순시박물관고고조사단, 신빈현문화국(無順市博物館考古調査團, 新賓縣文化局)산성발견 및 현황조사 함. 명칭을 전수호산성으로 명명하고 『북방문물』1991-1에 발표함.구조특징 산성은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평행하게 뻗은 좁고 기다란 자연절벽(초벽) 2개를 이용하여 축조하였음. 자연절벽[초벽장]과 가파른 산비탈을 연결하여 인공성벽 5구간을 쌓아 완전히 봉쇄된 성을 구축하였음. 축조법이 흑구산성과 유사하며 편편하고 네모난 모양의 쐐기형 돌(계형석)을 평평하게 깔았는데 너비가 넓은 쪽은 바깥으로, 좁은 쪽은 안쪽으로 향하도록 놓았으며 틈 사이는 잔돌로 채웠음.역사적 의미 중국학자들은 1980년대 이래 부이강을 고구려 초기의 비류수로 비정하고 부이강 상류 일대를 비류국의 고지로, 전수호산성과 흑구산성을 그 중심지로 설정하고 있음. 전수호산성은 고구려 건국시 또는 그 이전에 축조되었다고 파악함[무순시박물관, 신빈현문화국]. 군사 방어시설물로 보는 견해도 있음. 전수호산성의 동서 양면은 부이강과 고려구이고, 남쪽은 부이강 연안의 전수호평원으로서 삼면이 주위의 산천과 분리된 천혜의 지형조건임. 북쪽으로는 좁고 기다란 절벽이 산성과 연결되어 있어 방어에 불리하지만, 이 절벽을 산성의 방어계통에 편입시켜 동문으로 진격하는 공격로를 차단할 수 있음. 또한 절벽이 북쪽 산봉우리와 산성의 연결을 차단하고 있음. 산성의 서북 각대에서 부이강 상류방면, 서남 각대에서 부이강 하류방면을 각각 공제할 수 있고, 서벽 망대에서 부이강 연안 일대 전체를 조망할 수 있음. 이로 보아 전수호산성은 부이강 연안 일대를 공제하던 군사방어시설로 추정됨. 부이강 일대에는 전수호산성 이외에도 흑구산성, 사도구산성, 건설산성 등이 분포되어 있음. 이들은 모두 해발 600-700m의 높은 산 위에 있고, 각각 부이강 서안과 동안에 위치해 있으면서 모두 부이강 연안을 잘 관찰할 수 있도록 망대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소자하 유역에서 부이강 연안을 경유하여 혼강 본류로 나아가던 교통로를 공제하던 군사방어시설로 추정됨. 전수호산성은 흑구산성, 사도구산성, 건설산성 등과 함께 부이강 연안 일대에서 혼강 우안의 호형·축선방어체계를 구성하였다고 파악됨(여호규). 고구려 후기의 가물성에 비정하는 견해도 제기되었음[손진기, 풍영겸, 왕면후].자연환경 산성이 위치한 산은 해발 609m로 북쪽에는 낮고 협소한 골짜기가 있고, 동쪽으로는 ‘고려구’라는 넓은 골짜기와 잇닿아 있으며, 서쪽에는 혼강 지류인 부이강이 남류하고 있고, 남쪽으로 전수호촌이 내려다 보임. 산성 서쪽에서 남류하던 富爾江은 산성 서남쪽 모서리에서 방향을 꺾어 동류하면서 전수호촌을 지난 다음, 마을 남쪽 서산을 ‘S’자형으로 돌아나가면서 다시 남류함. 여러 굽이로 굽이쳐 흐르는 부이강이 산성을 은폐하는 지형을 만들고 있을 뿐 아니라, 주위 산봉우리에 잇닿아 있지 않고 독립되어 있는 산성의 네 모서리도 산성 축조에 좋은 지형조건을 제공하고 있음.유물정보 격자문과 승문이 시문된 홍갈색 토기편.참고문헌 · 孫進己·馮永謙, 『東北歷史地理』 (二), 黑龍江人民出版社, 1989 · 佟達, 「遼寧新賓縣轉水湖山城」『北方文物』 1991-1, 1991 · 王禹浪·王宏北, 「中國吉林省新賓滿族自治縣响水河子鄕高句麗轉水湖山城址」『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1994 · 魏存成, 「城址·建築址」『高句麗考古』, 吉林大學出版社, 1994 · 王綿厚, 「鴨綠江右岸高句麗山城硏究」『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再探」『北方文物』 1995-3, 1995 · 余昊奎, 「新賓 轉水湖山城」『高句麗 城』 Ⅰ(鴨綠江 中上流篇), 國防軍史硏究所, 1998 · 魏存成, 「山城」『高句麗遺跡』, 文物出版社, 2002 · 王綿厚, 「高句麗南北二道上諸城」『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李樂營·李淑英, 『中國高句麗學者與硏究綜述』, 吉林文史出版社, 2006

    • 고각산산성(孤脚山山城)

    • 사도구산성(四道溝山城)

    • 리스트여닫기 삼송산성(杉松山城) 출토지 요녕성 신빈현 위자곡진 삼송촌(遼寧省 新賓縣 苇子谷鎭 杉松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6왕면후, 손력(王綿厚, 孫力) 1980~1982무순지구 무순보사대(撫順地區無順普査隊)신빈현(新賓縣) 관내의 소자하(蘇子河)와 부이강(富爾江)유역의 유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발견됨(溫秀榮·張波, 1996).구조특징 평면은 불규칙한 타원형임. 좌성, 우성이 서로 연결되어 이루어진 성이라는 견해도 있음. 처음 발견된 성은 규모가 작은 서성(西城)이고, 나중에 발견된 성은 동성(東城)이라고 봄(魏存成, 2011). 성벽, 성문, 수구문, 우물, 샘 등이 남아 있고, 유물로는 기와편이 출토됨. 성벽은 불규칙한 반원형의 산등성이를 따라 축조하였는데, 대부분 험준한 암벽을 자연성벽으로 삼았음. 인공성벽은 대부분 납작한 돌로 축조함. 가장 큰 돌은 길이 1.27m, 너비 0.57m임. 인공성벽은 자연성벽 암벽 사이 구간에 축조되었고, 모두 네 구간이 있음. 그 가운데 가장 긴 인공성벽은 길이가 약 70m이고, 남은 높이가 약 3m임. 동북쪽의 한 구간은 길이가 25m이고, 남은 높이가 약 6m임. 서벽과 남벽은 대부분 높이 30~40m의 가파른 절벽 위에 축조하였는데, 성벽의 높이는 비교적 낮음. 동벽의 한 구간은 바깥쪽이 가파르고 안쪽이 완만한 산등성이에 축조되어 있는데, 안팎의 높이 차이를 고려하면서, 산비탈을 깎고 외벽만 쌓는 방법으로 성벽을 축조함(단면석벽(單面石壁); 외벽쌓기). 다른 한 구간은 비교적 낮은 산골짜기에 있는데, 석벽이 비교적 높고, 장방형의 돌을 내외로 쌓은 협축식(雙壁墻)으로 축조함. 단벽은 기단부 너비 3~4m, 정상부 너비 1~2m, 높이 5~6m임. 협축성벽은 기단부 너비 5m·정상부 너비 3m, 높이 3m임. 산성 동북모서리 성벽의 가운데 부분에 깊이 3m 정도의 네모난 구멍이 있는데, 구멍은 3단 층계로 이루어져 있음.역사적 의미 태자하 상류일대에는 고구려초기 요동평원방면의 주요 교통로인 혼강~소자하~혼하(渾江~蘇子河~渾河) 루트로 통하는 산간로가 많이 발달되어 있으며, 삼송산성(杉松山城)은 여러 산간로를 이어주는 요지임. 더욱이 1-3세기경 고구려와 중국세력은 량소지곡(梁紹之谷)이나 량구(梁口) 등 소자하(蘇子河)에서 태자하(太子河)로 나아가는 산간로 입구나 그 주변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음. 위의 사실과 함께 규모가 비교적 작고 산 정상에 위치하였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삼송산성(杉松山城)은 대체로 태자하(太子河) 상류일대와 소자하, 혼강(蘇子河, 渾河) 등을 연결하는 산간로를 공제(控制)하기 위한 군사방어성으로 추정됨(여호규, 1999). 溫秀榮·張波(1996)의 삼송산성(杉松山城)의 축조시기에 관한 연구가 있음. 고구려초기 산성의 특징을 보면, 대부분 가파른 절벽을 천연성벽으로 삼았음. 인공벽을 가파른 절벽에 축조한 경우는 드물게 보이고, 주로 결구(缺口)를 막거나 높이가 낮은 산등성이에 축조함. 인공벽의 높이는 3~6m로 높다고 할 수 있음. 성벽 건축재는 주로 쐐기형 돌로 외벽을 구축하였고, 안에는 잡석으로 채웠음. 성문 옹성의 평면은 대부분 장방형이고, 각료대(角瞭臺)는 명확히 구분됨. 유물은 극히 드물게 보이는데, 모래혼입 홍갈색 토기편이 출토되기는 하나 기와는 보이지 않음. 그리고 생활용기 등이 출토되기도 함. 이로 볼 때, 삼송산성(杉松山城)은 흑구산성(黑溝山城), 전수호산성(轉水湖山城), 태자성 내성(太子城 內城) 등과 더불어 초기산성이라고 할 수 있음. 한편 산성이 위치한 지역이 비류국(沸流國)과 양맥고지(梁貊故地)라는 점에서 구체적인 축조연대는 고구려 건국전후로 생각해 볼 수 있음. 여호규(1999)는 삼송산성(杉松山城)은 절벽을 천연성벽으로 이용하였다는 점에서 오녀산성, 산성자산성, 패왕조산성, 흑구산성, 전수호산성(五女山城, 山城子山城, 覇王朝山城, 黑溝山城, 轉水湖山城) 등 고구려 초기 산성과 유사하다고 보았음. 또한 삼송산성이나 태자성이 위치한 태자하 상류일대는 고구려와 같은 계열인 량소(梁紹)의 거주지역임. 입지조건과 축성법 등이 압록강 중류 일대의 초기 산성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태자성보다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다고 여겨짐. 태자성은 늦어도 4세기 중반에는 축조되었다고 추정되는 만큼, 삼송산성은 4세기 이전에 축조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여겨짐. 王綿(2002)는 삼송산성의 성벽축조방법은 고구려 초기산성의 축조방법, 즉 내탁식(內托式) 축성방식(단벽석장), 협축식(夾築式) 축성방식(쌍벽석장), 가파른 절벽에 낮은 벽을 축조하는 방식(애벽단장(峭壁短墻)), 활구봉도산장(豁口封堵山墻), 자연절벽을 이용한 각종 산성구축방법 등을 포함하고 있다고 봄. 또한 산성은 태자하(옛 양수) 상류, 즉 고구려의 선조 가운데 하나인 요동 ‘양맥(梁貊)’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에 위치한 전형적인 초기산성 건축양식을 갖추고 있음. 산성은 고구려시대까지 계속 사용됨. 위치 비정에 관해 王綿厚(2002)는 고구려 창암성(蒼巖城)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음. 『舊唐書』와 『新唐書』의 기록을 보면, 창암성(蒼巖城)은 항상 신성(新城) 및 목저(木底)와 연관되어 있음. 창암성(蒼巖城)은 요하를 건너고, 신성(新城)과 목저성(木底城)을 지나서 위치한 고구려 남도(南道)의 중요산성 가운데 하나임. 『舊唐書』卷 111 薛仁貴傳에는 “(高麗)男生弟南建率國人遂擊同善等, 詔仁貴統兵爲後援 …… 同善等至新城夜為賊所襲. 仁貴領驍勇赴救斬首數百級. …… 拔其南蘇木底蒼巖三城始與男生相會”라는 기사가 있음. 이 전쟁기사를 볼 때, 설인귀 등은 먼저 신성에 이르렀고, 연이어 남소, 목저, 창암(南蘇, 木底, 蒼巖)을 정벌하였으므로, 창암은 신성 동쪽에서 찾아야 함. 신성은 무순의 고이산성, 목저성(高爾山城, 木底城)은 신빈의 오룡산성(五龍山城)으로 추정됨. 삼송산성은 이들 성과 동일한 교통로상에 있다는 점에서 창암성일 가능성이 있음. 이 외에도 영릉(永陵) 북쪽 두도립자산성(頭道砬子山城), 이도하자구로성(二道河子舊老城)도 창암성일 가능성이 있음.자연환경 신빈현 서남쪽 태자하 상류 위자곡진 삼송촌에서 동북쪽으로 약 1.5㎞ 떨어진 해발 약 660m의 성자산(城子山) 정상에 위치함. 삼송산성(杉松山城)은 태자성(太子城)에서 북태자하(北太子河)를 거슬러 혼강(渾江)이나 소자하(蘇子河)유역으로 나아가는 산간로(山間路)의 분기점에 위치함. 삼송산성에서 동쪽으로 북태자하를 거슬러 나아가면 평정산(平頂山)을 거쳐 혼강 육도하(六道河) 연안의 환인 목우자진(桓仁 木盂子鎭)이나 구도하자관애(橫道河子關隘)로 진입할 수 있음. 또한 삼송산성에서 북쪽으로 나아가면 소자하 연안의 유수진(楡樹鎭)이나 목기진(木奇鎭) 일대로 연결됨. 따라서 삼송산성은 북태자하 유역과 혼강, 소자하(渾江, 蘇子河) 연안을 잇는 여러 산간로의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할 수 있음. 산성 서남쪽으로 15㎞ 떨어진 지점에 태자성산성이 있음. 태자하가 산성 서, 남, 동 세 면을 감싸면서 서남쪽으로 흘러 나감. 산성이 있는 산 아래는 태자하가 범람하여 이루어진 넓은 하곡평지로, 지세는 평탄하고, 토질은 비옥하여, 경작과 목축에 유리함. 성 지세는 동, 남, 북 세 면이 비교적 높고, 서면이 낮음(馮永謙(1997)은 남면도 지세가 낮다고 기록함).유물정보 기와편(瓦片) 2점, 토기편(土器片) 1점참고문헌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初探」『中國考古學會第五次年會論文集』, 文物出版社, 1988 · 孫進己·馮永謙, 『東北歷史地理』, 黑龍江人民出版社, 1989 · 東潮·田中俊明, 『高句麗の歷史と遺跡』, 中央公論社, 1995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再探」『北方文物』 1995-3, 1995 · 溫秀榮·張波, 「關于撫順地區的高句麗山城」『博物館研究』 1996-1, 1996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高句麗渤海硏究集成』 高句麗 卷(三), 哈爾濱出版社, 1997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魏存成, 『高句麗遺跡』, 文物出版社, 2002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2007 · 國家文物局,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上·下), 西安地圖出版社, 2009 · 魏存成, 「中國境內發現的高句麗山城」『社會科學戰線』 2011-1, 2011

    • 리스트여닫기 태자성(太子城) 출토지 요녕성 신빈현 하래하향 태자성촌(遼寧省 新賓縣 下夾河鄕 太子城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0무순시박물관문물보사대(撫順市博物館文物普査隊)1980년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실측조사가 이루어짐. 발표는, 撫順市博物館, 1992, 「遼寧新賓顯高句麗太子城」, 『考古』1992-4를 통해 이뤄졌음.1986 王綿厚, 孫力에 의해 양맥(梁貊)유적을 조사하면서 현지답사가 이루어짐. 성 규모는 일반적이었으나, 지리위치는 매우 중요했고, 매우 특색있게 구축되었다고 보고했으나, 자세히 살펴보지는 못했다고 함.. 시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됨.1980~1982무순지구 무순보사대(撫順地區撫順普査隊)무순지구 무순보사대(撫順地區 撫順普査隊)가 신빈현(新賓縣) 관내의 소자하(蘇子河)와 부이강(富爾江) 유역의 유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발견됨(溫秀榮·張波, 1996).구조특징 태자성(太子城)이란 이름은 성 근처에 있는 태자하(太子河)에서 유래함. 강 이름이 ‘태자하(太子河)’라고 불리게 된 유래는 전국(戰國) 연(燕) 자 단(丹)이 형가(荊軻)를 보내 진시황을 죽이려는 계획이 실패하고 화를 피해 요동 연수(衍水)로 왔다는 이야기와 관련이 있다고 함. 『读史方輿紀要』에서는 ‘태자하는 연수(衍水) 연태자 단(燕太子 丹)이 연수(衍水)로 와 몸을 숨겼다고 해서 후세 사람들이 태자하(太子河)라고 이름을 붙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음. 만약 태자하(太子河)가 이 유래로 이름이 붙여졌다면, 태자성(太子城)은 태자 단이 머물렀던 성은 아님. 태자성은 고구려성으로, 태자 단과 어떠한 관계성도 연결할 수 없음. 다만 태자성이란 이름은 그 지역에서는 오랜 기간 사용되었음. 산성 평면은 타원형에 가까운데, 동서 방향으로 길게 놓여 있음. 성안 동단 완만한 대지(臺地)에는 내성이 축조되어 있음. 즉 태자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구성된 복곽식 산성임(東潮·田中俊明(1995)은 동쪽을 외성, 서쪽을 내성으로 구분함). 산정식산성으로 분류하기도 함(魏存成, 2011). 성벽, 성문, 치, 요망대, 성가퀴, 봉화대, 거주지, 우물 등이 남아 있음. 유물로는 기와, 토기, 돌절구 등이 출토됨. 성벽은 산세를 따라 축조함. 내, 외벽은 편(偏)방추체의 쐐기형 돌이나, 장방형 혹은 장방형에 가까운 돌을 사용하였고, 장심(墻芯)에는 불규칙한 돌을 사용하였음. 그 가운데 두대모세(頭大尾細)한 편방추체의 쐐기형 돌은 주로 내벽에서 볼 수 있는데, 세밀하게 가공함. 일반적으로 길이 78㎝, 너비 75㎝, 두께 15㎝임. 가장 큰 돌은 길이 76㎝, 너비 90㎝, 두께 43㎝임. 반면 비교적 작은 돌은 길이 35㎝, 너비 30㎝, 두께 10㎝임. 외벽 석재는 대부분 장방형 혹은 장방형에 가까운 돌을 사용하였는데, 장방형에 가까운 돌의 경우, 편방추체의 쐐기형 돌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음. 하지만 보편적으로 장단의 비율이 축소되고, 두께는 두꺼워지며, 뾰족한 부분이 명확하지 않게 되어, 장방형이거나 장방형에 가까워짐. 돌의 크기는 대체적으로 비슷한데, 일반적으로 길이 30㎝, 너비 24㎝, 두께 24㎝임. 크기가 비교적 큰 기단부에 구축된 돌은 길이 42㎝, 너비 44㎝, 두께 20㎝임. 산성 성벽의 축조는 각 구간의 구체적인 실정에 맞게 적절하게 이루어졌음. 동벽 아래는 가파른 절벽이기 때문에 인공 성벽을 축조할 필요가 없었음. 다만 바깥은 수십미터 높이의 절벽이고 안은 내성의 평탄한 높은 언덕이기 때문에, 사람이 떨어지기 쉬웠음. 이에 낮은 벽을 축조해서, 전쟁 때에는 병사들이 기댈 수 있게 하여 보호하고, 평상시에도 안전을 제공하였음. 이 낮은 벽은 성가퀴라고도 할 수 있음. 남벽은 절벽이 있지만 그리 높지 않아 높은 성벽의 축조가 필요했음. 그런데 안측은 경사진 지대였기 때문에, 성벽을 축조하기 위한 넓은 지면이 없었음.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다지 높지 않은 암벽 상부에 바깥을 향하도록 홈을 파내고, 암벽바닥과 성벽기단부가 일체가 되게 하면서 성벽을 쌓았음. 이로써 성벽 높이를 해결하고, 무너지는 염려도 없게 되었음. 서벽의 남단과 서단도 성벽을 건립할 기초조건이 없었음. 이에 밖에만 석벽을 쌓았고 안쪽은 산비탈에 의지하면서 그 위에 성가퀴를 쌓아 성벽과 산비탈을 결합시킴으로써 성벽의 이심력(離心力)과 밖으로 붕괴되는 것을 방지함. 북벽은 구불구불 뻗어 있는 산등성이 위에 있는데, 바깥은 험준한 비탈이고, 안쪽은 약간 경사진 비탈임. 축성자는 산등성이에 일렬로 늘어선 산등성이돌을 골간으로 삼아, 내외 양면에 석벽을 둘러싸서, 성벽이 내외로 쓰러지지 못하도록 함(撫順市博物館, 1992). 성벽을 부분별로 나눠서 살펴볼 수 있음. 우선 외성 성벽은 험준한 절벽 가장자리에 축조함. 외성 길이는 1,425m임. 북벽의 경우, 북문~내성벽 북단 교차지점까지로 길이는 280m임. 성벽은 동쪽으로 갈수록 점차 융기하는 산등성이를 따라 점차 높아짐. 좁고 길다랗게 솟은 산등성이의 암벽을 골간으로 삼아, 양면에 돌을 쌓아 내외벽을 축조하였는데, 성벽은 정상부까지 들여쌓기를 함. 내벽은 높이 6m, 외벽은 높이 8~10m, 기본 너비 4~6m, 정상부 너비는 1m 임. 동벽은 내성벽 북단~내성벽 남단 구간으로, 길이는 395m이고, 평면은 궁형에 가까움. 동벽은 모두 가파른 절벽 가장자리에 축조된 낮은 성벽으로, 기본 너비·정상부 너비 1m, 높이 0.5~1m임. 성벽은 수직으로 쌓았고, 들여쌓기의 모습은 보이지 않음. 남벽은 동벽과 내성벽의 남부 교차지점~남문 구간으로, 길이는 260m임. 성벽 축조방법에 따라 동·서 양 구간으로 나눌 수 있음. 동단(東段)의 성벽축조방법은 동벽과 같음. 대부분 낮은 성벽인데, 다만 지세가 점점 낮아지면, 성벽은 점차 높아짐. 서단(西段)은 가파른 비탈 혹은 낮은 초벽(峭壁) 상부를 2m 깊이로 파내고, 밖으로 개방된 높이 5m의 성벽(城墻)기조를 만들었음. 그리고 기조 바깥에 벽석을 쌓고, 안은 깬돌로 채웠음. 성벽과 기조 꼭대기의 높이가 같아지면, 그 결합부에 높이 0.5m, 정상부 너비·기본너비 1m인 낮은 석벽을 다시 축조함. 마지막으로 서벽은 남문~북문 구간으로, 길이는 490m이고 성벽 평면은 반원형임. 남문~산성 서단은 서벽의 남단과 서단임. 이 양단 성벽은 토석혼축이며, 축조방법은 그리 험하지 않은 산비탈의 허리에 성벽 기단부를 축조할 지면을 다듬은 다음, 돌로 외벽을 쌓고(이러한 축조방법은 심양 석대자산성에서도 사용됨), 중간과 흙과 깬돌을 채웠음. 벽석, 흙 및 돌로 채워진 장삼이 산비탈 허리의 흙둔덕과 높이가 같아지면, 그 결합부 위에 높이 1~1.5m, 너비 1m의 낮은 성벽을 다시 축조하였음. 이 단의 성벽아래에는 돌을 깔아서 축대를 쌓았음. 서벽 서단에서 동쪽으로 꺾어져 북문에 이르는 구간은 서벽 북단이라고 할 수 있는데, 경사도가 비교적 완만하여, 외벽 높이 3~4m, 내벽 높이 3m, 기단부와 정상부 너비 3m의 크고 높은 석벽을 구축하였음. 이 구간의 성벽 일부분에 드러난 성벽 기단부를 보면, 성벽 기단부는 성벽보다 밖으로 0.5m 정도 뻗어 나와 있고, 높이는 0.5~1m임. 성벽이 높고 크기 때문에 내외벽을 조금씩 안으로 들여쌓았음. 일부 부분은 바깥으로 기울어져 붕괴될 우려가 있는데, 성벽 바깥에 산비탈 아래~성벽정상부까지 돌을 쌓은, 높이 30~40m, 경사도 60°인 대규모의 축대가 형성되어 있음. 서벽 위에는 돌 기둥(石洞)이 있음. 노모저강(老母猪崗) 산줄기로 이어지는 서벽에는 인공방어시설이 집중적으로 구축됨. 이는 절벽으로 이루어진 다른 성벽과 달리 산줄기로 연이어져 방어가 취약하기 때문임. 이에 움푹 들어간 산등성이를 천연해자로 삼은 다음, 산비탈에 축대를 쌓아 적의 접근을 차단하고 아군을 은폐할 수 있게 하였음. 그 위에 성벽을 축조하고, 최고지점에 봉화대를 구축하여 입체적 방어시설을 완비함(여호규, 1999). 내성벽은 따로 분리하여 볼 수 있음. 내성은 산성 동쪽 비탈에 남북방향으로 길게 구축된 한 줄기의 석벽 사이에 있음. 내성의 평면은 대략 반원형으로 북, 동, 남 세 면은 모두 수직 절벽임. 성벽의 길이는 280m(魏存成(2002)은 내성이 675m라고 기록함), 기단부 너비는 2.5m, 정상부 너비는 2m, 남은 너비는 3m임. 성벽 기단부는 거대한 돌로 3~4층 쌓았고, 그 위의 성벽은 안으로 들여쌓았음.역사적 의미 태자성의 축조방식은 흑구(黑溝)산성, 패왕조(覇王朝)산성, 환도산성, 전수호(轉水湖)산성 등 다른 고구려산성과 비교해 볼 때, 차이점이 있음. 상술한 산성들은 가파른 절벽을 천연성벽으로 삼았는데(초벽장(峭壁墻)), 태자성은 단순한 초벽장은 보이지 않고, 가파른 절벽 위에 인공성벽을 축조함. 가파른 절벽 위에 성벽 기조(城墻基槽)를 파내고 산등성이돌을 에워싸서 벽의 장심(墻芯) 골간을 만드는 방법은 고구려산성 가운데에서는 많이 보이지 않음(撫順市博物館, 1992). 산성은 노모저강(老母猪崗)에서 동남쪽으로 뻗은 산등성이에 축조되어 있는데, 이 곳은 북면의 험한 비탈과 동, 남 양면의 험준한 절벽을 갖추고 있는 말안장모양의 산등성이임. 즉 산성은 세 방면이 가파르고 주위의 평지가 연접된 조건을 갖추고 있음. 그리고 산성 북, 동, 남 세 면에는 북태자하와 소래하가 흐르면서 바깥 주위의 방어 장벽을 형성되어 있음. 산성 서쪽 모서리에 있는 낮은 산등성이가 산성과 연접되면서 산성의 외부로 연결되는 유일한 매개가 되었고, 산성방어면에서 유일하게 불리한 방면이 됨. 그래서 여기에 인공방어수단과 자연조건을 결합시켜, 낮은 산등성이에 넓고 큰 구호(溝壕)를 조성하며, 돌로 축대를 쌓아 산을 기어오르거나 은폐할 수 있는 조건을 없애버렸고, 성벽을 주요방어시설로 삼았으며, 마지막에는 서쪽 봉화대로서 주변을 공제(控制)하는 4단계의 입체적 방어체계를 구축함. 이로써 인위적으로 산성 서남모서리와 같은 산맥주맥의 연결을 완전히 차단하고, 최종적으로 산성의 네 모서리를 완전히 봉쇄시켜 완벽한 방어계통을 구축함. 북문 또한 문 바깥의 북태자하가 천연장벽을 이루는데, 치와 성 밖의 방수장대(防守墻臺)가 중앙에 있고, 말안장 형태의 옹성벽이 양측에서 성문옹성을 통제하는 종심(縱深)방어계통을 이룸(撫順市博物館, 1992). 태자성이 위치한 태자하는 한대(漢代)에는 대양수(大梁水)로 불렸는데, 『三國史記』와 『三國志』 등에 따르면 고구려 초기에 태자하 상류 일대에는 ‘양맥(梁貊)’이 거주하였다고 함. 당시 고구려를 ‘맥’으로 칭한 것으로 보아 양맥은 ‘대양수(大梁水) 유역의 맥족(貊族)’이라는 의미로서 고구려와 동일한 계열의 족속으로 추정됨. 이 지역은 고구려 초기 중심지인 압록강 중류일대와 한군현이 자리 잡은 요동평원 사이의 중간지대로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음. 당시 고구려에서 요동평원으로 나아가는 가장 중요한 교통로는 혼강~소자하~혼하(渾江~蘇子河~渾河)루트였는데, 태자하 상류일대에는 이들 하천연안으로 통하는 산간로가 많이 발달되어 있었음. 북태자하(北太子河)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구려 발흥지인 혼강(渾江) 연안으로 진입할 수 있으며, 특히 제 2현도군의 치소로 추정되는 신빈 영릉진고성(永陵鎮古城), 목저성(木底城)이 위치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신빈 목기진(木奇鎭) 일대 등 소자하 유역으로 나아가는 산간로가 많이 있음. 따라서 양맥 곧 태자하 상류일대의 전략적 위상은 고구려에서 요동평원으로 나아가는 혼강~소자하~혼하(渾江~蘇子河~渾河)루트와 관련하여 검토할 필요가 있음. 1~3세기 문헌자료에 보이는 양맥기사는 위와 같은 지리조건을 전제로 할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음. 가령, 고구려가 유리왕대에 소자하 방면의 제2현토군 공격하기에 앞서 양맥을 공략하였는데, 이는 양맥이 태자하~혼강 또는 태자하~소자하 산간로를 통해 고구려군을 습격할지 모르는 위험요소를 제거한 것임. 그 뒤에도 고구려와 중국세력은 양맥지곡(梁貊之谷)이나 양구(梁口) 등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는데, 이들 전투지역은 소자하에서 태자하로 나아가는 산간로 입구나 그 주변일대로 비정됨. 이에 고구려는 양맥을 집단적으로 예속시켜 통제하는 한편, 중국과의 전쟁에 양맥의 군사력을 대대적으로 동원함. 후한이 고구려 침공에 앞서 양맥의 유력자로 추정되는 ‘예맥거수(濊貊渠帥)’ 등을 살해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임. 다만, 당시까지 고구려는 지방관을 파견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토착사회의 유력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군사력을 동원함. 그런데 〈광개토대왕릉비〉에 따르면 고구려는 4세기 후반~5세기 초에 ‘양곡(梁谷)’과 ‘양성(梁城)’ 등에서 왕릉을 돌보는 수묘인연호(烟戶)를 징발하였다고 함. 4세가 후반경 양맥 곧 태자하 상류일대는 ‘양곡(梁谷)’과 ‘양성(梁城)’이라는 두 개의 지방행정구역으로 나누어 졌고, 특히 ‘양성(梁城)’이라는 지방지배를 위한 거점성이 축조됨. 왕제(王弟)가 중앙에서 토착사회의 유력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지배하던 3세기 후반까지와는 달리 이제 지방관이 파견되어 직접 지배하였던 것임(여호규, 1999). 태자성은 북태자하 연안의 중심지역에 위치하였을 뿐 아니라 성 내부에 거주용 공간이 넓다는 점에서 군사방어성과 함께 지방 지배를 위한 거점성의 기능도 동시에 수행하였다고 추정됨(여호규, 1999). 축조시기에 관해서, 무순시박물관(1992)의 연구 결과가 있음. 우선, 북문 옹성 평면은 말안장형인데, 그 형태가 나통산성 서남문과 약간 비슷함. 흑수산성 동문, 오녀산성 동문, 국내성 서문 등의 옹성은 모두 장방형으로, 고구려 산성 가운데 초기의 옹성형태임. 반원형 즉 말안장형의 옹성은 시간상 장방형의 옹성보다 늦음. 태자성 북문의 옹성형태는 흑구산성 등 고구려초기산성보다 늦다고 할 수 있음. 건축재를 살펴보면, 태자성 외성은 모두 꼭대기가 방형 혹은 방형에 가까운 돌로 석벽을 구축하였는데, 흑구산성·패왕조산성·오녀산성 등 고구려 초기 산성이 꼭대기가 장방형의 편방추체(偏方錐體) 쐐기형 돌로 석벽을 구축한 것과 차이가 있음. 그 재료의 가공술은 확연히 늦은 단계에 있음. 나통산성(羅通山城)의 서벽은 돌로 내외벽을 쌓았고 장심(墻芯)에는 흙과 깬돌로 채워 넣은 토석혼축벽임. 이와 같은 토석혼축벽은 태자성의 서벽 남단과 서단에서 볼 수 있음. 다만 태자성은 성벽 안쪽이 산비탈이여서, 내벽이 축조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음. 나통산성과 태자성은 주로 돌로 축조하기 시작하여, 중간에 흙과 돌을 섞은 벽인데, 모두 가지런한 석벽임. 이러한 점은 고이산성이 돌로 쌓지 않고, 다져진 흙과 깬돌로 쌓은 토석혼축으로 성벽을 쌓은 것과 같지 않음. 이로 보아 고이산성의 성벽축조방법은 나통산성과 태자성의 성벽축조방법과 비교해 볼 때, 늦은 시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음. 한편 태자성 내성은 편방추체 쐐기형 돌로 축조했는데, 외성에 사용한 돌이 장방형 혹은 장방형에 가까운 돌로 축조하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나는 등 전체적으로 건축풍격이 같지 않음. 내성문은 장방형의 옹성으로, 오녀산성의 동문과 같음. 오녀산성 동문은 한쪽의 성벽이 다른 한 쪽의 성벽을 감싼 형태이며, 태자성은 양쪽의 내성 성벽이 서로 교차하는 형식임. 건축방식이 매우 비슷한데, 모두 고구려초기산성의 옹성형태에 속하고, 산성 북문과는 명확한 차이가 있음. 내·외성은 건축자재와 축조방식, 옹성문 등에서 서로 차이가 나는데, 내·외성의 축조시기가 다르다는 점이 반영된 것임. 내성은 전체 방어계통에서 독립된 單元을 이룰 수 있고, 외성을 떠나서도 하나의 성을 이룰 수 있음. 이로 볼 때 내성이 외성보다 축조시기가 이른 것으로 추정됨. 외성은 내성보다 늦은 시기에 축조되었고, 외성 축조 후에도 내성은 계속 사용되면서, 내·외성이 배치되는 구성이 조성됨. 성이 위치한 태자하 상류는 고대 양맥이 활동한 지역이라는 견해가 있음. 양맥은 양수에 거주하는 맥인데, 양수는 지금의 태자하임. 『삼국사기』에는 “유리왕 33년 가을 8월(瑠璃王三十三年(서기 15년)秋八月) 왕명 오이, 마리, 령병 2만 서대양맥 멸기국(王命烏伊摩離領兵二萬西伐梁貊滅其國)”이라는 기사가 있음. 태자성이 위치한 곳은 옛 양맥이 거주하는 태자하 상류인데, 내성은 고구려 초기산성의 건축 풍격을 갖추고 있음. 이로 볼 때, 내성은 고구려 건국시기에 이미 여기에서 활동하던 양맥의 유적 가운데 하나로 추정되고, 그 축조연대는 서기 15년 이전으로 추정됨. 고구려가 양맥거주지 즉 태자하 상류를 영역으로 삼은 이후에도, 이 곳을 고수하는데 힘을 기울였음. 태자하 상류를 통제하는 지점에 위치한 태자성은 필연적으로 계속해서 사용할 수 밖에 없었음. 그러므로 내성은 기원 15년 이후에도 계속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음. 그리고 외성의 축조연대는 흑구산성 등 고구려 초기산성보다 늦고 고이산성보다는 이르다고 추정됨. 외성의 축조는 고구려의 끊이지 않은 요동공략의 역사와 관계가 있음. 고구려 영역이 확대됨에 따라, 그 방어권 또한 점차적으로 밖으로 확장됨. 위진남북조시기에 고구려영역이 요하(遼河) 일선까지 확장되면서, 서쪽변경에 고이산성 등 중성(重城)을 축조하여, 새로운 방어권을 구성하였는데, 소위 고구려장성이라고 일컫어짐. 고구려 초기 방어권 상에 있었던 태자성은 위진남북조시기에 이르러 고구려의 중심구역이 되었음. 즉 초기방어권 상의 요충지에서 새로운 방어권 배후의 종심(縱深)방어시설로 변모한 것임. 외성은 당연히 이러한 군사상 필요에 의해 축조된 것임. 성에서는 수키와와 암키와가 출토되었음. 고구려가 기와를 사용한 시기는 3세기 중·만기로 추정되는데(林至德·耿鐵華, 1985), 태자성과 고구려의 수도인 집안과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으므로 건물에 기와를 사용한 시간은 수도에서 기와를 사용한 연대보다 그리 많이 늦지 않을 것임. 고구려토기 분석연구에 의하면, 고구려 중기 토기는 대부분 물레제작의 니질 토기이고, 색깔은 회색·흑색·황토색 등이며, 소량의 모래가 들어가 있고, 저온의 시유도기가 출현한다고 함(耿鐵華·林至德, 1984). 비록 태자성에서 출토된 토기는 많지 않지만, 고구려 중기 토기의 특징과 대체로 비슷함. 고구려 중기의 토기연대는 4세기 초~5세기 말로 추정됨. 그러므로 외성의 축조시기는 늦어도 4세기 이전으로 추정됨. 『三國史記』에서는 신성(新城), 즉 고이산성이 276년 서천왕대에 처음 등장하는데, 서천왕이 신성에 이르렀다는 기사가 있음. 이는 3세기 중~만기에 고이산성이 이미 존재하였고, 또한 고구려의 새로운 방어권이 형성되었거나 혹은 초보단계에 있었다고 설명할 수 있음. 그렇다면, 고구려의 통일된 방어권의 縱深으로 계속 세워진 산성 가운데 하나인 태자성에서, 그 외성은 이 시기에 이미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음. 이로 추측해 볼 때, 태자성 외성의 축조연대는 고이산성 건립이전으로, 즉 276년보다 이르다고 추정됨. 성에서 출토된 토기편이 비록 4세기 초~5세기 속하지만, 일반적으로 고구려산성에서 출토된 유물의 연대는 산성의 축조연대보다 늦음. 그러므로 외성 축조연대의 추측과 토기편이 4~5세기에 제작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서로 모순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음. 상술한 내용을 종합해보면 태자성은 서기 15년 이전에 태자하 상류에 거주한 양맥의 유적이고, 서기 15년 이후에도 계속 사용함. 즉 태자성은 고구려 초기방어권의 요충지라고 할 수 있음. 3세기 중만기 이전에는 외성이 축조됨. 즉 고구려가 요동으로 확장한 이후에 확립된 신방어권에서 종심방어요충지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음. 다음으로 동봉(蕫峰)(1995)의 연구가 있음. 태자성(외성)의 축조방법은 이른 시기에 축조된 고구려시대의 성과 비교해 볼 때, 견고성에서 뛰어남. 고구려 성의 축조시기를 세 시기로 나누어 볼 때, 태자성의 축조시기는 1시기보다는 늦고, 2시기보다는 이르다고 할 수 있음. 대체로 무순시박물관(1992)에서 추정한 축조시기에 동의함. 온수영, 장파(1996)의 연구에 따르면, 고구려 초기산성은 대부분 가파른 절벽을 천연성벽으로 삼았음. 인공벽이 가파른 절벽에 축조된 경우는 드물게 보이고, 주로 결구를 막거나 높이가 낮은 산등성이에 축조함. 인공벽의 높이는 3~6m로 높음. 성벽건축재는 주로 쐐기형 돌로 외벽을 구축하였고, 안에는 잡석을 채웠음. 성문옹성의 평면은 대부분 장방형이고, 각료대는 명확히 구분됨. 유물은 극히 적게 보이는데, 모래혼입 홍갈색 토기편이 출토되기는 하나, 기와류는 보이지 않음. 그리고 생활용기 등이 출토되기도 함. 이로 볼 때, 태자성 내성은 흑구산성, 전수호산성, 삼송산성 등과 더불어 초기산성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음. 보다 구체적인 축조연대를 추측해 볼 때, 산성이 위치한 지역이 비류국과 양맥고지(故地)라는 점에서 고구려 건국전후 즈음으로 추정됨. 고구려 중기산성의 특징을 살펴보면, 산등성이와 초벽장 위에 일률적으로 돌로 성벽을 축조하였음. 일반적으로 저지대는 성벽을 높게 쌓았음. 반면 초벽과 절벽에는 높이 약 1~1.5m의 낮은 벽을 축조하였는데, 그 기능은 성가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음. 성문은 대부분 안으로 오므라드는 U형 옹문임. 성벽건축재는 쐐기형 돌과 잡석이 대부분을 차지함. 외벽은 초기산성의 외벽과 달리 정연함. 또한 건축재 가운데 쐐기형 돌이 발전한 단조석(短條石)이 출현함. 다만 더욱 정교하게 가공된 두대미세頭大尾細)의 쐐기형 돌은 여전히 남아 있는데, 태자성 외성이 대표적임. 성에서 출토된 유물은 초기산성보다 풍부함. 수키와, 암키와, 녹색유약이 발라진 자기편, 철촉, 동이(盆), 반(盤), 옹(瓮), 단지 등 회색토기편 등이 출토됨. 이 시기 연대는 위진 아래임. 여호규(1999)의 연구에 따르면, 장방형 옹성구조를 갖춘 내성벽을 양맥인들이 축조하였을지는 의문임. 오히려 내성의 옹성구조와 성돌이 고구려 초기 산성과 유사하다면, 고구려에 의해 축조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임. 따라서 태자성의 내성과 외성이 실제로 다른 시기에 축조된 것이라면, 이는 축성목적과 기능이 달랐을 가능성을 시사함. 이러한 점에서 산 정상부에 군사방어시설로서 내성을 먼저 쌓았다기보다는 지방제도의 정비와 함께 계곡과 완만한 경사지를 포괄하여 평상시의 거주성(居住性) 곧 지역지배를 위한 거점의 기능이 강화된 외성을 축조하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주목됨(임기환, 1998). 고구려는 1~3세기까지 양맥 곧 태자성이 위치한 태자하 상류일대를 간접적으로 지배하다가, 4세기 이후 지방관을 파견하여 직접적인 영역지배를 도모함. 1~3세기경 태자하 상류일대는 지방지배라는 측면이 아니라 혼강에서 소자하, 혼하를 거쳐 요동평원으로 나아가는 교통로와 관련하여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 그러므로 1~3세기경 고구려는 태자하상류일대에 군사방어성을 구축하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태자성 내성은 이러한 측면에서 주목됨. 그리고 4세기 이후 양맥지역에 지방관을 파견하면서 지방지배를 위한 거점성으로서 ‘양성(梁城)’을 구축한 것으로 보이는데, 태자성 외성이 이와 관련될 가능성이 높음. 〈광개토대왕롱비〉의 ‘양성’관련기사와 4세기 초부터 소자하 혼하 일대에 전략적 요충지에 성을 축조하여 축선방번체계(軸線防繁體系)를 구축하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태자성도 늦어도 4세기 중반경에는 축조되었다고 여겨짐. 王綿厚(2002)의 연구로 볼 때, 요동에 위치하고 있는 비교적 이른 시기의 산성 가운데, 태자성에는 ‘맥인(貊人)’과 고구려산성 축조기술에 대한 것들이 집중되어 있음. 산세의 험함을 이용한 동장직벽(東墻直壁), 산등성이 돌을 골간으로 삼고 양면에 돌을 쌓아 내외벽을 축조하고 정상부까지 들여쌓기를 한 북벽, 기조(基槽)를 먼저 파고 기조 바깥에 벽석을 쌓은 다음 안은 깬돌로 채워 넣고 다시 낮은 벽을 축조한 남벽, 전통적인 쌍면석벽으로 축조된 높이 3~4m의 서벽북단, 외성 안의 내성축조 등은 고구려 산성 가운데 드물게 보이는 것임. 하지만 고구려산성의 축성기술 거의 전부를 갖추고 있음. “내성”에 보이는 장방형으로 교차되는 옹성문과 축조방법을 볼 때, 산성의 축조 시기는 비교적 이르다고 할 수 있음. 현재 지면에서 발굴된 늦은 시기의 유물들은 산성이 발굴되기 전에 찾은 것일 뿐임. 건축구성, 내성유구, 여러 방식이 남아 있는 산성축조방법과 위치, 문헌 등을 종합적으로 볼 때, 태자성은 고구려 초기에 병존했고, 태자하 상류에서 활동한 ‘양맥(梁貊)’의 고성(古城)임. 위치 비정에 관한 王綿厚(2002)의 연구가 있음. 이에 따르면 태자성은 맥성으로 추정됨. 맥성(貊城)은 ‘양맥(梁貊)’의 고성으로, 광개토대왕릉비에서는 ‘양성(梁城)’이라 불렸는데, 성의 이름은 옛 양수(梁水)와 맥부(貊部)에서 유래함. 맥성은 고구려가 혼강유역에서 건국되고 가장 먼저 병탄된 맥부 왕성 가운데 하나임. ‘양맥(梁貊)’의 고성(古城)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진다고 할 수 있음. 첫 번째는 지리위치를 볼 때, 지금의 요동 태자하(梁水) 중·상류에 위치하고 있음. 두 번째는 고구려(梁貊)의 초기 산성임. 이 두 가지 조건을 부합하는 성이 태자성이라고 할 수 있음. 태자성은 “양맥(梁貊)”의 고지(故地)인 태자하 상류 남안에 위치하고 있음. 그리고 태자성의 배치, 규모, 축조시설, 유물 등은 고구려 초, 중기의 요소들을 대부분 포함하고 있음. 성이 위치한 곳은 ‘대양수(大梁水)’ 상류이고, 북쪽으로 한의 고구려현과 접해 있는데, 고구려 유리왕대에 ‘양맥(梁貊)’ 고성을 먼저 멸망시키고, 북쪽으로 고구려현을 침략하였다는 기록과 부합함. 이로 볼 때, 태자성이 초기 ‘양맥(梁貊)’의 고성이고, 고구려가 ‘양맥(梁貊)’을 병합한 이후에도 계속 사용한 요동의 명망있는 성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음.자연환경 신빈현 서남 태자하 상류 우안에 위치한 하래하향(下夾河鄕)의 태자성촌(太子城村) 북쪽에 위치함. 태자성촌은 태자하(太子河)라는 강이름에서 유래함. 산성에서 남쪽으로 약 20m 떨어진 지점에 태자성촌(太子城村)이 있고, 서북쪽으로 약 500m 지점에 하래하향(下夾河鄕) 소재지인 강동촌(崗東村)이 있음. 산성이 위치한 지역은 신빈현, 본계현, 환인현(新賓縣, 本溪縣, 桓仁縣) 세 현이 접경하는 지역으로 신빈(新賓)에서 본계, 관전, 봉성, 환인(本溪, 寬甸, 鳳城, 桓仁)으로 가는 도로가 산 아래를 통과하고 있음. 자연환경을 보면, 산성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천산산맥(千山山脈)의 동북 지맥과 용강(龍崗)산맥의 서남 지맥이 서로 접하고 있는 지대임. 산성은 남북방향의 노모저봉강(老母猪峰崗)에서 동북쪽으로 뻗어 있는 산줄기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음. 산성과 산맥이 연접된 지점은 낮고 움푹 들어간 산등성이임. 산성의 북쪽에는 태자하의 지류인 북태자하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고, 동, 남 양면에는 소래하(小夾河)가 산성을 휘감아 흐르고 있는데, 산성 동북모서리에서 북태자하로 유입되고 있으며, 하천 양안에는 상당히 넓은 하곡평지가 발달함. 산성 남부와 북부는 지세가 개활하고, 동부는 태자하의 하곡지대임. 산성은 산이 연결되고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지세가 험함. 성 안의 지세는 동·서 양단이 높고, 측면에서 보면 중간이 움푹 들어간 말안장형태와 유사함. 성 가운데 움푹 들어간 지대에서 자세히 보면,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지세임. 산성 북면은 높이 30~40m의 가파른 비탈이고, 동․남 양면은 높이가 40~80m인 가파르고 험준한 절벽이며, 서면은 도로가 내려다 보이는 높이 20m의 산비탈임.유물정보 기와편(瓦片) 34점, 토기편(土器片) 5점, 돌절구(石臼) 1점참고문헌 · 耿鐵華·林至德, 「集安高句麗陶器的初步硏究」『文物』 1984-1, 1984 · 林至德·耿鐵華, 「集安出土的高句麗瓦當及其年代」『考古』 1985-7, 1985 · 孫進己·馮永謙, 『東北歷史地理』, 黑龍江人民出版社, 1989 · 佟達, 「遼寧新賓縣高句麗太子城」『考古』 1992-4, 1992 · 蕫峰, 「東北地區高句麗山城的分類及年代」『博物館研究』 1995-3, 1995 · 東潮·田中俊明, 『高句麗の歷史と遺跡』, 中央公論社, 1995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再探」『北方文物』 1995-3, 1995 · 溫秀榮·張波, 「關于撫順地區的高句麗山城」『博物館研究』 1996-1, 1996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高句麗渤海硏究集成』 高句麗 卷(三), 哈爾濱出版社, 1997 · 林起煥, 「高句麗前期 山城 硏究」『國史館論叢』 82, 국사편찬위원회, 1998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魏存成, 『高句麗遺跡』, 文物出版社, 2002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2007 · 國家文物局,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 西安地圖出版社, 2009 · 魏存成, 「中國境內發現的高句麗山城」『社會科學戰線』 2011-1, 2011

    • 도독 고분군(都督 古墳群)

    • 마가보자 고분군(馬家堡子 古墳群)

    • 이도하자 고분군(二道河子 古墳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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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만자 고분군(下灣子 古墳群)

    • 하서촌고성(河西村古城)

    • 리스트여닫기 오룡산성; 하외보산성(五龍山城; 下崴堡山城) 출토지 신빈현 오룡촌 하외자둔 고려성산. 지리좌표 북위 41°52', 동경 124°35'(新賓縣 五龍村 下巍子屯 高麗城山. 地理座標 北緯 41°52', 東經 124°35')연대 4세기 중엽~당대(佟達 1994) 3세기 후반 이후(여호규 1999)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0무순시문물조사대(撫順市文物調査隊)무순시가 시 전체 유적에 대한 조사를 진행할 때 발견함.1986 왕면후(王綿厚), 손력(孫力) 등이 조사함.1988 산성 내 시내를 가로지르는 돌무지 7곳을 발견함.1993 2월에 조사함. 산성내 시내를 가로지르는 돌무지 가운데 일부가 1988년 조사 때와 비교해서 약간 바뀐 모습을 확인함.구조특징 시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됨. 산성은 세 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북면에는 장백산(長白山) 여맥(餘脈)의 산령(山岭)이 서남에서 동북으로 뻗어 있음. 한 면에는 하천이 있는데, 소자하(蘇子河) 지류인 오룡하(五龍河)임. 오룡촌(五龍村)이란 이름은 바로 이 강에서 유래한 것임. 또한 산성이 위치한 고려성산(高麗城山)도 오룡산(五龍山)이라고도 불리고 있음. 산성의 북쪽과 동쪽은 높이가 수십 미터에 달하는 수직절벽임. 서쪽은 높고 가파른 감제고지(制古点)임. 남쪽 산비탈도 높고 험준하여 오르기 어려움. 성 바깥은 험준하고, 성 안은 대부분 산등성이에서 경사가 완만하게 펼쳐져 있는 구릉과 대지임. 산성은 해발 438.3m의 동남쪽 산봉우리에서 남북 양측으로 뻗은 산등성이를 따라 둥글게 감싸 안은 형태로 축조된 포곡식 산성임. 산성은 산세를 따라 축성되면서, 평면이 이등변삼각형에 가까움. 성은 산세를 따라 산꼭대기에 축조되어 있는데, 지면보다 100m 정도 솟아 있음. 산성의 규모와 관련하여 동서길이 500m, 남북너비 1m라는 기록(東潮·田中俊明, 1995), 동서길이 700m, 남북너비 300m, 둘레 약 2,000m라는 기록(王綿厚, 2002), 동서길이 1㎞, 남북너비 0.5㎞이라는 기록(여호규, 1999; 王禹浪·王宏北, 2007), 둘레 1㎞라는 기록(孫進己·馮永謙, 1989; 陈大为, 1995; 馮永謙, 1997)라는 기록, 둘레 2㎞라는 기록(王禹浪·王宏北, 2007; 國家文物局, 2009)이 있음. 성벽은 4개의 감제고지(制古点)인 각대(角臺), 망대(望臺)를 기준으로 동·남·서·북벽으로 나눌 수 있음. 성벽의 길이는 동벽 292m, 남벽 854m, 서벽 354m, 북벽 607m 등으로 전체 둘레는 2,107m임. 성벽은 대부분 단애(斷崖)의 벽을 이용하였음. 성벽에 대하여 석축이라는 기록이 있는데(孫進己·馮永謙, 1989; 張志立, 1994; 東潮·田中俊明, 1995; 馮永謙, 1997; 王綿厚, 2002), 축조방식이 철령(鐵嶺) 최진보산성(催陳堡山城)과 심양 석대자산성(沈陽 石大子山城)과 유사하다고 보기도 함(王綿厚, 2002). 반면 토석혼축이라는 기록이 있는데(陈大为, 1995; 魏存成, 2002), 성 바깥 산등성이와 협곡에 석축 혹은 토석혼축의 성벽이 있다고 함(魏存成, 2002). 산성 축조에 사용된 성돌은 정연하지 않고, 대부분 잡석임. 납작한 방추형의 쐐기형 돌이 일부 사용되었으나, 크기가 다르고 모서리가 분명하지 않으며 조잡하게 가공되었음. 이러한 모습은 흑구산성(黑溝山城), 전수호산성(轉水湖山城), 삼송산성(杉松山城) 등 비교적 이른 시기에 축조된 산성과 차이가 있음(佟達, 1994). 성벽은 바깥이 가파르고 안쪽이 완만한 구릉인 산등성이에 축조함. 산등성이에는 자연성벽으로 이용할 수 있는 좁고 기다랗게 우뚝 솟은 수직절벽이 거의 없음. 다만 4개의 봉화대가 있는 산등성이는 독립적으로 따로따로 분포함. 이 때문에 산등성이 위에 긴 구간의 석벽을 구축하는 공사는 필수적이었는데, 감제고지(制古点) 4곳에 위치했던 각대, 망대에 연접한 가파른 산등성이 구간을 제외한 모든 구간에 성벽을 축조함. 이러한 모습은 기다랗게 우뚝 솟은 수직절벽을 자연성벽으로 긴 구간 이용했던 흑구산성, 전수호산성, 삼송산성, 패왕조산성, 오녀산성, 환도산성 등 비교적 이른 시기에 축조된 산성들과 차이가 있음. 오룡산성의 축조방식은 산등성이 위에 예외 없이 석벽이 구축된 태자성(太子城)과 대부분의 산등성이 위에 성벽을 축조한 나통산성(羅通山城)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음. 이로 볼 때, 축조시기가 약간 늦은 산성은 대부분 수직절벽을 성벽으로 이용한 구간이 적고, 보편적으로 인공성벽을 축조하였다고 추정됨. 높이가 몇십 미터가 되어 등반할 수 없는 초벽(峭壁)에 평탄하고 돌출된 석애(石崖)가 없으며, 여장(女墻)을 축조하여 몸을 기댈 수 있게 하거나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하는 것을 방지함. 인공성벽은 낮은 산등성이 위 혹은 골짜기 입구(溝口)나 트인 곳에 축조하였기 때문에, 높고 넓게 축조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는데, 지세가 낮아질수록 성벽은 더 높게 쌓았음. 일반적으로는 너비가 넓은 성벽기단을 축조한 후, 성벽기단 위에 각 층마다 안으로 들여서 성체(城體)를 축조하였음. 동벽은 길이가 292m로, 동쪽 망대(해발 387.3m)에서 동남쪽 각대(해발 438.3m)까지 이르는 구간임. 북면은 아래쪽으로 뻗어나가는 가파른 산등성이와 인공 성벽으로 구성됨. 인공성벽은 외벽 높이 3~4m, 내벽 높이 1m, 정상부 너비 1m임. 남벽은 길이가 854m로, 동남쪽 각대에서 산세를 따라 아래로 서쪽 각대(해발 353m)에 이르는 구간임. 모두 인공성벽임. 남벽 아래에 평탄한 내리막길이 있는데, 지역주민들은 “마도(馬道)”라고 부르고 있음. 성벽 아래 내리막길이 끝나는 지점에 트인 곳이 있음. 성문의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후대에 산 위에 오르기 위해 팠던 통로로 파악됨(佟達, 1994). 트인 곳 부근에는 길이 약 10m, 너비 약 9m의 경작지가 있음. 성벽은 외벽 높이 3~4m, 내벽 높이 1~3m임. 트인 곳에서 산등성이를 따라 아래를 향해 축조된 성벽은 외벽 높이 2~3m, 내벽 높이 1~1.5m, 정상부 너비 1m임. 남문 양측의 돌로 쌓은 성벽은 수목(樹木)으로 가려져 있는데, 성벽의 남은 높이는 약 1m임. 서벽은 길이 354m로, 서쪽 각대에서 북쪽 각대(해발 381.1m)에 이르는 구간임. 서벽은 서문[이 문에 대하여 북문(佟達, 1994; 溫秀榮·張波, 1996; 魏存成, 2002) 혹은 서문(陳大爲, 1995; 馮永謙, 1997; 여호규, 1999; 王綿厚, 2002; 王禹浪·王宏北, 2007; 國家文物局, 2009)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성문 명칭은 일반적으로 소재한 성벽 방향에 따르므로 서문이라고 명명하고자 함(여호규, 1999)] 문길을 기준으로 동·서 두 구간으로 나눌 수 있음. 서쪽 구간은 문길에서 서쪽 각대에 이르는 구간임. 서쪽 각대는 둥근 형태의 감제고지(制古点)인데, 지표면의 토양 유실과 적이 타고 오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부 구간에 보호석벽(护坡石墻)을 수축함. 성벽은 각대 정상부에만 축조되어 있는데, 직경이 5m인 반배형(半环形)의 석벽임. 동쪽 구간은 문길에서 북쪽 각대에 이른 구간임. 이 구간은 오르기 힘들 정도로 가파르며 위쪽으로 비스듬히 올라가는 형태로, 자연 상태의 산등성이를 이용하여 만듦. 서벽 동·서 양 구간의 산등성이는 산세가 가파르고 험준하기 때문에 인공성벽이 없음. 북벽은 길이가 607m로, 북쪽 각대에서 동쪽 망대에 이르는 구간임(佟達, 1994). 북쪽 각대에서 동쪽으로 465m 정도 가면, 성벽은 직각으로 꺾여 동쪽 망대에 이르게 됨. 성벽은 외벽 높이 2~3m, 내벽 높이 1~1.5m, 정상부 너비 1m임. 산성 서쪽 대서산(大西山)과 관문립자산(關門砬子山) 사이의 협곡로에 차단벽이 있음. 협곡의 낮은 지대에는 도로 개설과 농지 개간으로 10m 정도만 남아 있는데, 기단부 너비는 3m, 위쪽 너비는 1.5m임. 대서산과 관문립자산 두 산기슭에는 각각 25m 정도의 성벽이 남아 있음. 대서산 서남쪽 변장산(邊墙山)에 남북향의 산등성이를 따라 수백 미터 길이의 석축성벽을 축조함. 성벽 중간 도로로 파괴된 지점의 남단(南段)에는 봉화대로 추정되는 구조물이 있음. 변장산 성벽은 아래쪽인 득승보(得勝堡)댐 일대의 통제 및 적이 변장산 언덕을 넘어 하강자촌(下岗子村)으로 곧바로 나아가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구축한 것으로 추정됨(여호규, 1999).역사적 의미 오룡산성이 위치한 상협하진(上夾河鎭) 일대는 혼하(渾河)에서 소자하(蘇子河) 연안으로 진입하는 두 갈래의 도로가 만나는 교통로상의 요충지임. 특히 청대(淸代) 구가도(舊街道)로서 주요 교통로로 사용되었을 영반(營盤) → 하협하진(河夾河鎭) → 오룡하(五龍河) → 상협하진(上夾河鎭) 루트는 오룡하 연안을 따라오다가 상협하진 일대에서 방향을 바꾸어 구릉성 산지로 접어들게 됨. 이러한 지형조건으로 보아 오룡산성은 혼하에서 소자하 연안으로 진입하는 적군을 방어하기 위해 구축되었다고 추정됨. 오룡산성의 지형이나 성곽시설도 이를 반영함. 오룡산성은 북쪽에 오룡구(五龍溝), 동쪽에 소산구(小山溝), 서남쪽에 황수배자구(荒樹排子溝) 등의 골짜기가 자리 잡고 있어 주위 산맥과 완전히 끊겨 있음. 그리고 다른 산줄기와 이어지는 동남 각대(角臺)방면도 지세가 높아 오르기 힘듦. 전체적으로 보아 오룡산성은 주변의 산줄기와 차단되어 있는데, 이는 산성의 방어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고구려산성에서 보이는 일반적인 특징임. 그런데 동남 각대 아래쪽의 산등성이에 특별한 방어시설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방면은 적의 침공로가 아니었다고 추정됨. 즉 오룡산성은 주로 서북쪽에서 침공하는 적군올 방어하기 위해 축조되었던 것임(여호규, 1999). 오룡산성 서쪽의 현재 도로는 변장산(邊墙山)을 비롯하여 동북~서남 방향의 산등성이를 여러 개 가로질러 지나가고 있음. 그런데 1930년대의 지형도를 보면 당시에는 아직 개설되지 않았고, 하협하진에서 오룡하를 거슬러 올라올 경우, 오룡하 상류를 따라 득승보(得勝堡)댐 협곡을 거쳐 관문립자(關門砬子) 골짜기 입구를 지나 대서산(大西山)~관문립자산(關門粒子山) 사이의 협곡로를 통해 하강자촌(下岗子村)으로 향했던 것으로 그려져 있음. 즉 적군은 오룡산성의 서변을 지나쳐서 소자하 방면으로 진공하였고, 이때 오룡산성 자체만으로는 충분한 방어벽을 형성할 수 없었음. 대서산~관문립자산 협곡로의 차단벽과 변장산의 성벽은 이러한 점에서 주목됨. 득승보촌(得勝堡村)올 지난 적군이 오룡하 상류와 대서산~관문립자산 협곡로를 통해 소자하 방면으로 진입할 경우, 득승보 협곡 입구가 제1방어선, 관문립자 골짜기 입구와 대서산~관문립자산의 차단벽이 제2·3 방어선을 형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됨. 그리고 변장산의 성벽은 변장산 산줄기를 가로질러 곧바로 하강자촌으로 향하는 적군을 막는 방어선으로 기능하였을 것임. 오룡산성은 지형조건상 산성 자체만으로는 방어체계에 결함이 있었기 때문에 변장산의 성벽을 비롯하여 득승보협곡(得勝堡峽谷) 입구, 관문립자 골짜기 입구, 대서산~관문립자산 협곡로 등에 차단벽을 축조하여 총체적인 방어체계를 구축한 것임(여호규, 1999). 오룡산성 서쪽 소자하·혼하 합류지점 동쪽에 위치한 철배산성(鐵背山城)은 좁고 높다란 산마루에 위치하여 지역 거점성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기에 취약점이 많고, 오룡산성과의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다고 볼 때, 두 성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음(여호규, 1999). 후금(後金)시기의 찰객관(札喀關) 혹은 찰객성(札喀城)이 이곳에 축조되었는데, 시설물과 산성은 후금시기에도 계속 사용되었음. 찰객관은 정확히 오룡산성과 협곡조단성(峽谷阻断城)에 위치하였음. 군사적인 지리적 조건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에 역대 왕조들이 계속 사용하였는데, 특히 산천은 군사적으로 이용가치가 예나 지금이나 크기 때문에 더욱 중요시됨(佟達, 1994). 축조연대에 대해서 여러가지 견해가 있음. 佟達(1994)의 견해. 산성 축조에 사용된 성돌은 정연하지 않고, 대부분 잡석임. 납작한 방추형의 쐐기형 돌도 일부 사용되었으나, 크기가 다르고 모서리가 분명하지 않으며 조잡하게 가공되었음. 이러한 모습은 흑구산성, 전수호산성, 삼송산성 등 비교적 이른 시기에 축조된 산성과 차이가 있음. 또한 수직절벽을 성벽으로 이용한 구간이 적고 보편적으로 인공성벽을 축조하였다는 점에서 기다랗게 우뚝 솟은 수직절벽을 자연성벽으로 긴 구간 이용했던 흑구산성, 전수호산성, 삼송산성, 패왕조산성, 오녀산성, 환도산성 등 비교적 이른 시기에 축조된 산성과 차이가 있음. 오룡산성에서는 고구려초기산성의 축조방법이 보이지 않고, 시대가 약간 늦은 산성에서 보이는 석벽과 성가퀴를 구축하는 방식을 채용하였으며, 석재와 성벽가공기술은 태자성(太子城)과 나통산성(羅通山城)과 다르다는 점에서, 축조시기는 고구려 중기 혹은 약간 늦은 시기라고 볼 수 있음. 한편 성 안에서 출토된 철제 화살촉은 일찍이 고이산성(高爾山城)에서 발견되었는데, 고이산성의 축조연대는 266~267년으로 추정됨. 토기와 관련하여 고구려 중기에서는 호(罐), 분(盆), 옹(瓮), 호(壶) 등이 나오는데, 그 시대는 4세기 초~5세기 말임. 고구려 후기에 들어서면 반(盘)이 나오는데, 그 시대는 약 6세기 이후임. 이로 볼 때, 오룡산성에서 출토된 토기편은 고구려 중, 후기에 속함. 산성에서 출토된 연화문와당은 집안에서 출토된 IX式 와당과 기본적으로 같음(林至德·耿鐵華, 1985). 고구려가 요동을 5세기 초~당(唐)대까지 차지하였다는 점과 일반적으로 유물연대가 산성 축조연대보다 늦은 정황을 고려할 때, 산성의 축조연대는 4세기 중엽~당대로 추정할 수 있음. 한편, 오룡산성은 고구려 남소성(南蘇城)으로 추정됨. 345년 “모용각(慕容恪)이 고구려 남소(南蘇)를 공격하여 승리하고, 수(戍)를 설치하고 돌아왔다”는 기록이 남소성과 관련된 최초의 문헌기록임. 이로 볼 때 남소성의 상한축조연대는 늦어도 345년임. 목저성(木底城)이 위치한 요동지역은 고구려의 전성기인 광개토대왕대에 점령되었음. 667년에 이르러 당군이 여러 차례 신성, 남소, 목저, 창암 등 여러 성을 공격하고, 결국엔 고구려가 멸망하게 되었는데, 이때가 남소성의 축조하한시기임. 溫秀榮·張波(1996)의 견해. 고구려 초기산성은 대부분 가파른 절벽을 천연성벽으로 삼았음. 인공벽이 가파른 절벽에 축조된 경우는 드물게 보이고, 주로 결구(缺口)를 막거나 높이가 낮은 산등성이에 축조함. 인공벽의 높이는 3~6m로 높음. 성벽 건축재는 주로 쐐기형 돌로 외벽을 구축하였고, 안에는 잡석을 채웠음. 성문옹성의 평면은 대부분 장방형이고, 각요대(角瞭臺)는 명확히 구분됨. 유물은 극히 적게 보이는데, 모래혼입 홍갈색 토기편이 출토되기는 하나, 기와류는 보이지 않음. 그리고 생활용기 등이 출토되기도 함. 이로 볼 때, 태자성 내성, 흑구산성, 전수호산성, 삼송산성 등이 초기산성에 속함. 고구려 중기 산성의 특징을 살펴보면, 산등성이와 초벽장 위에 일률적으로 돌로 성벽을 축조하였음. 일반적으로 저지대는 성벽을 높게 쌓았음. 반면 초벽과 절벽에는 높이 약 1~1.5m의 낮은 벽을 축조하였는데, 그 기능은 성가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음. 성문은 대부분 안으로 오므라드는 U형 옹문임. 성벽건축재는 쐐기형 돌과 잡석이 대부분을 차지함. 외벽은 초기산성의 외벽과 달리 정연함. 또한 건축재 가운데 쐐기형 돌이 발전한 단조석(短條石)이 출현함. 다만 더욱 정교하게 가공된 두대미세(頭大尾細)의 쐐기형 돌은 여전히 남아 있음. 성에서 출토된 유물은 초기 산성보다 풍부함. 수키와, 암키와, 녹색유약이 발라진 자기편, 철촉, 분(盆), 반(盤), 옹(瓮), 단지 등 회색토기편 등이 출토됨. 이 시기 연대는 위진 아래임. 오룡산성과 태자성 외성이 중기 산성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음. 여호규(1999)의 견해. 고구려는 1세기 말~2세기 초경 영릉진(永陵鎭) 일대의 제2현도군을 혼하방면으로 구축하고 소자하 연안으로 진출하였으나, 후한대에 소자하를 넘어 혼하방면으로는 진출하지 못하였음. 후한이 미약해진 뒤에도 3세기 중반까지 공손씨나 조위(曹魏)의 침공을 받아 이 지역으로 진출하지 못하다가, 서진(西晋)의 세력이 약해진 3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혼하방면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음. 그런데 소자하 연안 교통로를 보면 영릉진에서 목기진까지는 소자하 연안을 따라 도로가 이어지지만, 목기진~하협하진 구간의 소자하는 험준하고 만곡이 심하기 때문에 목기진~상협하진 산간로와 오룡하를 우회하여 소자하 하류로 나아가게 됨. 고구려가 혼하방면까지 진출하지 못하였을 시기에는 목기진 일대가 전방 요충지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임. 따라서 오룡산성은 3세기 후반 이후에야 비로소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특히 문헌기록상 4세기 전반부터 혼하 연안의 신성을 비롯하여 소자하 연안에 남소성, 목저성 등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대체로 4세기 전반 이후에 축조되었다고 추정됨. 王綿厚(2002)의 견해. 오룡산성은 위치한 입지가 험하고 성 안에는 유물이 풍부하며 연철(煉鐵)유적지를 갖추고 있는 등, 고구려 중기의 전형적인 수비산성으로 볼 수 있음. 위치비정에 대해서는 3 가지 설이 있음. 먼저 목저성(木底城)설임. 張德玉(1989)의 견해. 고구려시기의 목저성으로 비정함. 王綿厚·李健才(1990)의 견해. 목저성의 위치를 신빈현 목기진으로 보는 견해가 많으나, 목기진지역에서는 진, 당 시대의 고성이 없고, 명, 청 역참(驛站)이 있을 뿐임. 고구려산성은 목기진 서북 12.5㎞의 신빈현 상협하향 오룡촌에 위치한 오룡산성 뿐이므로 오룡산성을 목저성으로 볼 수 있음. 王綿厚(1990, 2002)의 견해. 목저성은 고구려의 신성~목저도 상에 있음. 그 성이 위치한 교통지리를 볼 때, 신성 동쪽의 교통요지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음. 『魏書』卷100 高句麗傳에는 ‘건국4년(341)에 모용황(慕容皩)이 고구려를 칠 때, 남협(南陜)에 들어가서, 목저에서 싸웠다’라는 기록이 있음. 모용황은 요서의 용성(龍城 현재 조양)에서 출발하여 동쪽으로 이동하여 심양과 무순(신성)을 거쳤음. 목저성은 신성에서 남협(南陜)으로 진입하는 교통로 상에서 가장 가깝고 중요한 곳에 위치하였다고 추정됨. 즉 목저성은 신성도에서 남협으로 진입한 이후의 수진(首鎭)으로 볼 수 있음. 『魏書』에 보이는 남협은 남도(南道)의 앞부분이고, 목저성은 혼하의 지류인 소자하 하류에 있다고 볼 수 있음. 이상의 지리조건을 고려해볼 때, 목저성으로 오룡산성이 가장 유력함. 다음으로 남소성(南蘇城)설임. 佟達(1993, 1994)의 견해. 남소성은 남소수(南苏水)에서 이름을 얻었는데, 남소수는 소요수(小遼水)와 더불어 한대 현도군(玄菟郡) 고구려 경내의 강임. 『漢書』地理志 高句麗縣의 注에 ‘요산(遼山)에서 요수(遼水)가 나오고, 서남으로 요대(遼隊)에 이르러 대요수(大遼水)로 들어간다. 또한 남소수(南蘇水)가 서북으로 새외(塞外)를 경유한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소요수는 혼하, 남소수는 소요수의 지류인 소자하로 추정됨. 혼하의 원류가 일영액하곡(一英額河谷)이기 때문에 ‘요산은 요수에서 나온다’라고 서술한 것이고, 소자하는 혼하의 가장 큰 지류이기 때문에, ‘또한 남소수가 있다’고 서술한 것임. 소자하는 동남에서 서북으로 흘러 혼하로 유입되는데, ‘장성(長城) 새외(塞外)의 땅을 경유한다’ 및 ‘서북으로 새외(塞外)를 경유한다’라는 기록과 부합됨. 이로 볼 때, 남소성은 소자하에서 찾을 수 있음. 그리고 하류의 기점은 영릉진 현도군 치소임. 『資治通鑑』卷182 『隋紀』卷6 胡三省 注의 “신성(新城)은 남소성의 서쪽에 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남소성은 신성의 동쪽에 있음을 알 수 있음. 신성은 현재 무순성임. 『資治通鑑』卷97과 『晋紀』卷19 胡三省 注에 “남소성은 남협의 동쪽에 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남협은 소자하구와 혼하가 합류하는 살이허지구(萨尔浒地区)임. 즉 남소성은 신성 동쪽의 소자하구 동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서 찾아야 함. 『資治通鑑』卷114와 『晋紀』卷36 호삼성(胡三省)의 注의 “목저성은 남소의 동쪽에 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남소성은 목저성의 서쪽에 있음을 알 수 있음. 1991년에 신빈현 목기진 동남쪽에서 비교적 큰 평지성이 발견되었는데, 목저성으로 추정됨. 즉 남소성은 소자하구와 목기진 사이에서 찾을 수 있음. 그 사이에 있는 오룡산성은 소자하구(남협)까지 약 10㎞이고, 다시 서쪽으로 신성과의 거리는 50㎞에 가까움. 동쪽으로 목저성까지의 거리는 약 15㎞임. 신성과 목저성 사이에는 오룡산성을 제외하고, 남협지구의 계번성(界藩城)과 살이허성(萨尔浒城)이 있는데, 두 성 모두 후금(後金)의 산성임. 이로 볼 때, 신성과 목저 사이에 고구려성은 오룡산성만 있으므로, 남소성이라고 비정할 수 있음. 남소성이 오룡산성이라면 문헌에 보이는 전쟁기사와 부합된다고 할 수 있음. 고구려의 전쟁기사를 보면, 남소성을 공취하기 전에 신성을 공취하고, 남소성을 공취한 후에는 목저성을 공취함. 339년에 모용황이 신성에서 승리하면서(『資治通鑑』卷96과 『晋紀』卷18), 목저성이 전연의 병봉지하(兵锋之下)에 노출되었고, 342년에 목저에서 전투가 벌어짐. 그 이후 남소성이 황급하게 중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345년 모용각이 남소성에서 전투를 벌였음. 이후 고구려는 신성과 남소성을 회복하였으나, 400년에 모용성(慕容盛)이 신성과 남소성을 다시 빼앗음(『資治通鑑』卷111 『晋紀』卷33). 두 성에서 승리를 하고, 저항 없이 서쪽으로 나아가 406년에 직접 목저성을 공격하였는데, 결국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음. 647년 당군은 신성도로 나아가 남소와 목저로 진격한 바 있고(『新唐書』卷220 『列傳』卷145 東夷高麗), 667년에는 신성에서 승리한 후, 남소, 목저, 창암 세 성을 차지하였음(『資治通鑑』卷201 唐紀17). 張志立(1994)의 견해. 남소와 남협은 한 역사서에 함께 등장한 적이 없음. 『資治通鑑』호삼성(胡三省)의 注, 『韓國沿革史』와 吳士鑑의 『晋書注』에는 ‘남소는 남협으로, 협과 소는 음이 변화한 것’이라고 함. 위치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남소수를 확정해야 함. 청 건륭(乾隆) 『一統志』卷36 흥경산천(興京山川) 소자하(蘇子河)조에는 ‘소자하는 (흥경)성 북쪽 반리(半里)에 있다. 변외(邊外) 호륜령(呼倫岭)에서 나온다. 또한 북쪽으로 계번(界藩) 서남을 거쳐, 혼하로 들어간다. 『漢志』에 고구려현에는 남소수가 있다고 하는데, 소자하로 의심된다’라는 기록이 있음. 『舊唐書』계심하력전(契芯何力传)에는 ‘건봉(乾封) 원년에 고구려군 15만명이 요수에 머물렀고, 말갈 수만을 이끌고 남소성에 웅거하였는데, 계필하력(契苾何力)이 모두 격파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음. 이로 볼 때, 남소성과 요수가 매우 가깝다고 할 수 있음. 만약 가깝지 않다면 계필하력이 고구려군 15만명과 말갈병을 한 번에 격파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임. 요수는 지금의 혼하이므로, 남소성이 있는 남소수는 혼하와 그리 멀지 않다고 볼 수 있음. 이로 볼 때 소자하를 남소수로 볼 수 있음. 남소성과 관련하여 『資治通鑑』卷111 晋紀 卷33에는 “2월 전연이 표기대장군 희(熙)를 선봉으로 삼아, 신성과 남소 두 성을 차지하였다”라는 기록, 『新唐書』설인귀전(薛仁貴傳)에는 ‘남소, 목저, 창암 세 성을 차지하였다’라는 기록, 『新唐书』고구려전 정관 21년조의 당군이 ‘신성도로 진입해서, 차례로 남소, 목저에서 고구려군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그 곽(郭)만 불태웠다’라는 기록이 있음. 위의 기록에서는 남소가 신성, 목저와 함께 나오는데, 성들 간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고, 신성, 남소, 목저 순으로 위치하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음. 그 외에 『資治通鑑』권114 『晋紀』에는 “연군(燕军)이 3000여 리를 와서 병사와 말들이 피로하고 얼어 죽은 자가 길에 즐비했는데, 그 상황에서 고구려 목저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라는 기록, 『資治通鑑』卷96 진기(晋记) 함강(咸康) 5년조에는 “모용황이 고구려를 공격하였는데, 군대가 신성에 이르자, 고구려왕 쇠(釗)가 맹약을 청하면서 돌아갔고, 남소에 술(戌)을 두었다”라는 기록, 『十六国春秋』전연록(前燕錄)에는 “모용황 12년에 도요장군(度辽将军) 모용각이 고구려 남소를 공격하여 승리하고, 술(戌)을 두고 돌아갔다”라는 기록 등이 있음. 한편 『東北古史資料匯編』하책 651항 한원(翰苑) 卷30條 『高麗記』에는 ‘남소성이 신성 북쪽 칠십리 산 위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음. 옹주(雍注)와 호주(胡注)를 비교해 보았을 때, 옹주(雍注)의 북(北)자는 ‘동(东)’자의 오탈(誤脫)임. 신성은 무순시의 고이산성임. 남소성은 그 동북쪽에 있고, 남소성 동쪽에는 목저성이 있음. 즉 남소성은 신성과 목저성 사이에 있다고 할 수 있음. 오룡산성에서 남쪽으로 2.5㎞ 떨어진 지점에 소자하가 있고, 북쪽으로 약 15㎞ 떨어진 지점에는 혼하가 있음. 즉 오룡산성은 신성과 목저성 사이에 있다고 할 수 있으므로 고구려 남소성으로 볼 수 있음. 남합성(南陜城)설임. 孫進己·馮永謙(1989)의 견해. 남합(南陜)은 진(晉)대에 처음 보이는데, 『晉書』載記 卷9 咸康 7년(341)조에 ‘모용황은 병사 4만명을 이끌고, 남합(南陜)으로 들어가서 고구려를 치고자 하였고, 모용한(慕容翰)과 아들 수(垂)를 선봉으로 삼아 장사왕(長史王) 우(㝢) 등 군사 만오천명은 북치(北置)로 나아가도록 하였음. 고구려왕 쇠(釗)는 전연의 병사가 북로로 들어간 것을 알고, 그 동생 무(武)와 정예 만오천명을 북치(北置)로 보내고, 자신은 약졸을 이끌고 남합(南陜)을 지켰음. 모용한과 쇠(釗)가 목저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쇠(釗)가 대패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음. 『魏書』高句麗傳에는 ‘建國 4년(341) 모용원(慕容元)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남합(南陜)으로 들어가 목저에서 쇠군(釗軍)과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는 기록이 있음. 『資治通鑑』卷97 成帝 咸康 8년(342) 10월조에는 ‘고구려에는 두 길(道)이 있는데, 북도는 넓고 평탄하고, 남도는 험하고 좁았다’라는 기록이 있고, 12월조에는 ‘모용황이 병사 4만을 이끌고 남도로 들어갔다’라는 기록이 있음. 호삼성(胡三省)의 주(注)에는 ‘북도는 북치(北置)에서 들어가고, 남도는 남합(南陜)으로 진입하여 목저성으로 들어간다’라는 기록이 있음. 『三國史記』卷18에는 ‘고국원왕 12년(342) 11월에 모용황이 정예 병사 4만을 이끌고 남도로 나왔다’는 기록이 있음. 위의 기록들을 살펴볼 때, 남합(南陜)은 고구려 남도 상에 있고, 목저와 가깝다고 할 수 있음. 남도는 소자하, 부이강을 따라 지금의 집안에 이르는 길이고, 북도는 혼하를 거쳐 동진하다가 남쪽으로 꺾이는 길임. 바로 오룡산성(孫進己·馮永謙은 오룡산성과 득승보산성을 동일하게 보고 있음 1989)이 남도 상에 있고, 목저(신빈현 목기진)의 서북에 있으므로 남소성으로 추정됨. 다만 호삼성(胡三省)의 주(注)가 있는 『資治通鑑』卷97 穆帝 永和 원년조에는 ‘남소성이 남합(南陜)의 동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만약 남소성이 무순현 철배산성이라면 오룡산성의 서북에 있으므로, 기사와 맞지 않음. 혹 남합(南陜)이 철배산의 서쪽에 있는지 의심할 수 있음. 1956년 동북문물공작대는 무순 대화방수고(大伙房水庫)로 수몰된 혼하 북안 전둔(前屯), 할자화락(轄子伙洛), 와자화락(洼子伙洛) 등지에서 위진(魏晉)시기의 고구려 묘장들을 발견하였음. 근처에서 성지는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 곳은 남도 상일 뿐만 아니라, 북도도 필수적으로 지나야 했음. 그러므로 호삼성(胡三省) 주(注)에 보이는 ‘남소성은 남합(南陜)의 동쪽에 있다’는 기사는 틀린 것으로 보임.자연환경 신빈현 서북쪽 상협하진(上夾河鎭) 북쪽 오룡촌 동남 하외[(崴)馮永謙, 1997]자둔 남쪽의 고려성산(高麗城山) 위에 위치함. 산성은 남잡목(南雜木)~신빈현성 도로 동쪽의 험준한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음. 남잡목~신빈현성 도로는 득승보촌(得勝堡村)을 지나 남쪽으로 변장산(邊墻山)에 이르는데, 도로가 변장산을 파괴하였음. 도로는 변장산의 산능선을 따라 동남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산능선으로 오르기 직전 지점에서 동북쪽으로 작은 산간도로가 갈라짐. 산간도로를 따라 0.45㎞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북쪽의 오룡하(五龍河) 연안 관문립자(關門砬子) 골짜기를 따라가면 산성과 오룡촌(五龍村)이 나오고 남쪽으로 0.8㎞ 정도 나아가면 하강자촌(下岗子村)에서 남잡목~신빈현성 도로와 합류하게 됨. 갈림길 남쪽의 산간로 좌우에는 대서산(大西山)과 관문립자산(關門砬子山)이 우뚝 솟아 있는데, 두 산 사이의 협곡로에 차단벽이 있음. 차단벽을 지나 북쪽으로 0.5㎞ 가면 관문립자산 골짜기 입구에 이르게 됨. 여기에는 세 갈래 길이 있는데, 서쪽으로는 승보수고(勝堡水库), 남쪽으로는 도로를 통해 하강자(下岗子)에서 목기진(木奇鎭)에 이를 수 있으며, 동쪽으로는 관문립자산(关门砬子山)을 거쳐 산성과 오룡촌에 이르게 됨. 관문립자에서 동쪽으로 나아가면, 양측에는 수직절벽이 우뚝 솟아 있고 산골짜기는 길고 좁으며 구불구불 돌아가는 등 지세가 험해서, 수비하기는 쉽고 적군이 공격하기는 어려운 입지를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음. 골짜기에는 승보수(勝堡水)댐으로 흘러가는 오룡하가 있으며, 산성은 관문립자 내측 오룡촌에서 2.8㎞ 떨어진 곳에 있음. 산성 남쪽 5㎞ 지점에서 동남~서북쪽으로 흐르는 소자하(蘇子河)는 본래 영반(營盤)에서 혼하에 유입되어 서남쪽으로 유향(流向)을 바꾸었는데, 1950년대 대화방(大伙房)댐의 건설로 소자하․혼하 합류처는 수몰되었음. 대화방댐 건설 이전 혼하에서 신빈현으로 들어가는 도로는 두 갈래가 있었음. 하나는 영반에서 출발하여 소자하 연안 – 하협하진(河夾河鎭) - 소자하 지류인 오룡하 - 상협하진을 거친 다음 구릉성 산지를 따라 목기진으로 진입하는 루트이고, 다른 하나는 남잡목에서 혼하를 건너 구릉성 산지를 따라 상협하진을 거쳐 목기진으로 나아가는 길임. 즉 두 갈래의 진입로는 소자하 연안이 아닌 오룡하 상류인 상협하진에서 합류하여 목기진으로 진입하였음. 두 갈래의 진입로가 상협하진에서 합류한 이유는 소자하 연안의 지형조건으로 인해 하천변을 따라 더 이상 진입할 수 없기 때문임. 즉 하류 쪽인 영반~하협하진 구간은 하천연안을 따라 도로를 개설할 수 있지만, 하협하진~목기진 구간은 만곡이 심하고 험준한 협곡이어서 더 이상 진입하기가 곤란함. 그리하여 하협하진에서 오룡하 연안과 구릉성 산지를 따라 목기진으로 진입하였던 것임. 이상과 같이 소자하 하류방면의 지형조건으로 인해 혼하에서 소자하 연안의 신빈지역으로 진입할 때 상협하진 일대를 반드시 거쳐야 했음. 상협하진 일대는 혼하에서 소자하 연안으로 진입하는 두 갈래 도로가 만나는 교통로상의 요충지인 것임. 산성에서 서쪽으로 1.3㎞ 떨어져 있는 남잡목진(南雜木鎭)~신빈현성 간 도로가 서북~동남 방향으로 지나가고 있음[王禹浪·王宏北은 남잡목진~신빈현성 간 도로가 산성 남측 2㎞ 지점에 있다고 기록함(王禹浪·王宏北, 2007)]. 이 도로를 따라 서북쪽으로 2.5㎞ 정도 가면 득승보촌이 있고, 다시 서북쪽으로 3.3㎞ 정도 가면 상협하진이 있음. 도로를 통해 동남쪽으로 12㎞[王綿厚와 王禹浪·王宏北은 동남쪽으로 10㎞ 떨어진 지점에 목기진이 있다고 기록함(王綿厚, 2002; 王禹浪·王宏北, 2007)] 가면 목기진에 이를 수 있음. 산성 북쪽에는 오룡촌으로 향하는 도로가 있음. 서쪽으로 3㎞ 떨어진 지점에 득승수고가 있음. 서북쪽으로 15㎞ 떨어진 지점에 남잡목진이 있음. 산성에서 남쪽으로 5㎞ 떨어진 지점에 소자하가 있음. 산성 북쪽은 오룡하 연안의 경작지임. 동면 절벽 아래 산골짜기에는 과수원이 있음. 남쪽은 개활한 황수배자구(荒樹排子溝)임. 서쪽으로는 황수배자구 입구를 사이에 두고 관문립자산과 마주 보고 있음.유물정보 수레바퀴굴대축(車輨) 1점, 철제화살촉(鐵鏃) 1점, 찰갑편(札甲片) 1점, 철찌꺼기(鐵滓) 1점, 연화문와당(蓮花紋瓦當) 1점, 암키와편(板瓦) 1점, 수키와편(筒瓦) 1점, 옹(瓮) 1점, 호(罐) 3점, 분(盆) 1점, 반(盤) 1점, 연자방아(硏子) 1점, 절구(臼) 1점참고문헌 · 今西春秋, 「高句麗の南北道と南蘇·木底」『靑丘學叢』 22, 靑丘學會, 1935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3 · 林至德·耿鐵華, 「集安出土的高句麗瓦當及其年代」『考古』 1985-7, 1985 · 孫進己·馮永謙, 『東北歷史地理』 (二), 黑龍江人民出版社, 1989 · 張德玉, 「軍事重鎭木底城考」『東北地方史硏究』 1989-4, 1989 · 王綿厚·李健才, 『東北古代交通』, 瀋陽出版社, 1990 · 佟達, 「關于高句麗南北交通道」『博物館研究』 1993-3, 1993 · 佟達, 「新賓五龍高句麗山城」『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徐家國·徐琰, 「唐代木底州治今地考」『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辛占山, 「遼寧境內高句麗城址的考察」『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張志立, 「高句麗南北道和有關城址的考證」『高句麗渤海硏究集成』 高句麗 卷(二), 哈爾濱出版社, 1994 · 東潮·田中俊明, 『高句麗の歷史と遺跡』, 中央公論社, 1995 · 王禹浪, 「中國東北地區古城文化遺跡概述」『黑龍江民族叢刊』 1995-4, 1995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再探」『北方文物』 1995-3, 1995 · 溫秀榮·張波, 「關于撫順地區的高句麗山城」『博物館研究』 1996-1, 1996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高句麗渤海硏究集成』 高句麗 卷(三), 哈爾濱出版社, 1997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魏存成, 『高句麗遺跡』, 文物出版社, 2002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2007 · 肖景全·鄭辰, 「撫順地區高句麗考古的回顧」『東北史地』 2007-2, 2007 · 國家文物局,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 西安地圖出版社, 2009 · 魏存成, 「中國境內發現的高句麗山城」『社會科學戰線』 2011-1, 2011

    • 득승보산성(得勝堡山城)

    • 하하북유지(下河北遺址)

    • 백기보고성(白旗堡古城)

    • 리스트여닫기 영릉진고성(永陵鎭古城) 출토지 요녕성 신빈현 영릉진(遼寧省 新賓縣 永陵鎭)연대 한대(漢代)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39도엽암길(稻葉巖吉)가을에 성이 발견됨.1941고교광사랑, 도변삼삼(高橋匡四郞, 渡邊三三)성의 전체 윤곽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북쪽 일부만 조사함. 남북 길이 150m, 동서 길이 110m이라고 실측함. 동측 붕괴면의 높이는 약 3m임. 한대 와전(漢式 瓦塼)을 발견함.高橋匡四郞, 1941, 「蘇子河流域に於ける高句麗と後女眞の遺跡」『建國大學硏究院硏究其報』2, 建國大學硏究院 으로 발표함.1944삼상차남(三上次男)6월 2일에 성의 북쪽뿐만 아니라 남쪽까지 확대 조사하여 성의 전체적인 면모를 파악함. 남성(南城)·북성(·北城) 두 개의 성이 있다고 파악함.三上次男, 1990, 「東滿風土雜記」『高句麗と渤海』, 吉川弘文館 으로 발표함.1979무순시박물관(撫順市博物館)9월 27일~10월 7일까지 안양고고(安阳考古) 시굴공과 함께 전면적인 시굴을 진행함. 남·북 2개의 성이 있다고 기록함.徐家國, 1984, 「漢玄菟郡二遷址考略」『社會科學輯刊』1984-3 으로 발표함.1983무순시박물관(서가국, 장정암, 동달 등)(撫順市博物館(徐家國, 張正巖, 佟達 等))4월에 문지와 성벽 일부를 시굴조사하여 성의 범위와 형태를 밝혀냄. 1979년 시굴과 동일한 결과를 얻었음.2004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 신빈현혁도아랍성문물관리소(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新賓縣赫圖阿拉城文物管理所)10월~11월에 성에 대한 실측과 탐사 외에, 동벽 남북 양단에 대한 절개를 실시함.2005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9월~11월에 1,500㎡ 정도 발굴을 진행함. 주요 성벽에 대한 조사와 절개를 진행함. 동벽 북쪽 끝에 동서방향의 트렌치를 파고 동벽에 대해 절개를 진행함. 동북부 발굴을 통해 성내 지층퇴적, 유적, 유물의 정황을 이해할 수 있었음.2006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 무순시박물관, 신빈현혁도아랍성문물관리소(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撫順市博物館, 新賓縣赫圖阿拉城文物管理所)5월~11월에 영릉진고성의 범위, 분포, 성내 문화내용, 연대와 성질, 고구려현과 한(漢)정권과의 관계, 한문화와 고구려문화와의 관계 등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대규모 발굴을 진행함. 성내부에 5×5m의 피트 98개를 설치하였고, 발굴면적은 2,450㎡임.2007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5월~11월에 영릉진고성 동북부에 있는 대형 건축지의 범위를 명확하게 하기 위한 발굴을 진행함. 발굴면적은 400㎡임. 발굴을 통해 건축기단부, 주거지, 회갱(灰坑) 등의 중요건물과 대량의 암키와, 수키와, 와당, 생활유물들을 발견함.2008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 신빈현혁도아랍성문물관리소(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新賓縣赫圖阿拉城文物管理所)4월9일~4월12일 간의 발굴을 통해 성의 배치, 구조, 시축연대, 폐기연대의 문제를 해결함. 동문과 서문을 발견함.. 성급문물보호단위(省級文物保護單位)로 지정됨1975년 이후무순시박물관(撫順市博物館)1975년 이래로 여러 차례 조사를 실시함. 발굴을 통해 유물을 발견하고 성벽에 대한 자료를 획득함.구조특징 고성 내부가 경작지로 개간되면서 중앙 부분이 210m 정도 절단되었음. 이 같은 모습 때문에 1944년 조사 때에는 북쪽의 작은 토성과 남쪽의 큰 토성 2개의 성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았음. 당시 조사결과를 보면, ‘북쪽 작은 토성은 한 변의 길이가 120m인 방형으로 방위는 거의 남북향이다. 북벽 대부분은 이도하(二道河)로 인해 유실되었는데, 보존이 양호한 성벽의 높이는 약 3m 정도이다. 서벽 중앙에만 성문터가 남아 있다. 내부는 콩밭으로 경작되고 있었는데, 한대(漢代) 기와, 고구려시기 기와와 토기편이 흩어져 있었고 북벽의 무너진 단면에도 다수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북쪽 작은 토성에서 논을 사이에 두고 남쪽 300~400m 지점에 규모가 훨씬 큰 한대 토성이 있다. 남쪽 큰 토성은 낮은 대지에 있는데, 평면은 조금 불규칙한 방형이고 방향은 동남쪽으로 약간 기울어졌다. 북벽은 길이 약 350m, 높이 1.5m이다. 바깥에 작은 개울이 있는데, 해자로 볼 수 있다. 동벽은 지형을 따라 동남이 약간 확대되면서 불규칙하고, 길이는 북벽과 마찬가지로 약 350m이다. 북벽 동쪽 모서리에서 약 130m 변지점에 낮은 지대가 있고, 동벽에서 남쪽 100m 변지점에 돌출한 네모난 평대가 있는데 양자 모두 성문터로 추정된다. 성 내에는 한식(漢式) 기와 및 토기 등의 파편이 고구려의 적색 기와편과 섞여서 흩어져 있는데, 북부에서 압도적으로 많이 출토되었고 일부는 밭 한 쪽에 높게 쌓여져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음(三上次男, 1990). 1979년 발굴결과를 기록한 보고서에서도 남·북 두 개의 토성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음. 당시 조사결과를 보면, ‘북쪽 작은 토성은 밭으로 개간되고 흙을 파내면서 파괴되었지만 성지의 윤곽은 명확히 볼 수 있다. 평면은 방형이고 성의 방향은 남동 20°이다. 길이는 남벽 104m, 동벽 200m, 서벽 147m이다. 성벽은 기단부 너비 10m, 윗너비 3m, 높이 1~2m이다. 남벽 중앙의 트인 곳은 성문터로 추정되고, 너비는 8m이다. 성에서는 배면 승문·내면 격자문인 한식(漢式) 암키와와 수키와, 고구려 특유의 옅은 홍색 승문 암키와편, 한대 토기, 한대 오수전 등이 출토되었다. 성지 서쪽은 불도저에 의해 흙무더기가 쌓였던 적이 있다. 성지에서 밭을 갈 때 많은 토기편들이 있었는데, 파종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북쪽 성벽 바깥쪽 있는 강에 버려졌기 때문에 현재 지표면에 남아있는 토기편은 많지 않다. 수해를 입어 드러난 북벽의 한대 문화층(漢代 文化層)은 두께가 30㎝이다. 남쪽 큰 토성은 북쪽 작은 토성과 210m 떨어져 있다. 벽돌공장이 흙을 채취해 가면서 파괴가 심하다. 동벽 남은 길이는 345m, 서벽 남은 길이는 75m, 북벽 남은 길이는 315m이다. 남벽은 파괴되어 측정할 수 없다. 평면은 대략 장방형이고 방향은 남북향이다. 성에서는 한식(漢式) 승문 수키와, 암키와, 권운문 와당, 한식(漢式) 토기편, 한대 오수전, 철기편, 건축 강돌(建筑卵石), 소토(紅燒土) 등이 발견되었다. 성의 출토유물·형태·규모 등을 분석해 볼 때, 두성 모두 한대성(漢代城)임은 명확한데, 북쪽 작은 토성은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고 견고하게 축조하였으며 질서정연하게 분포된 것으로 보아 현치(縣治)소재지로 추정된다. 반면 남쪽 큰 토성은 규모가 크고 유물은 기종이 다양하고 모두 다수 출토되었으며, 특히 와당과 비교적 보존이 양호한 수키와가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제2현토군 군치(郡治)로 추정된다’라고 기록하였음. 그런데 1979년과 1983년의 고고조사 결과를 종합하면서 영릉진고성은 2개의 성이 아닌 하나의 성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었음. 즉 성터가 경작지로 개간되는 과정에서 중앙 부분이 210m 정도 절단되었기 때문에 남북 2개의 성으로 보였다는 것임(徐家國, 1989). 이 견해에 대해서 북쪽부분과 남쪽부분의 동서 너비가 너무 달라서 양자를 연결하기 어렵고 남벽의 개구부(開口部)가 북벽에 보이는 낮은 지대를 가리킨다고 하면, 성벽의 위치 전체에 대한 이해가 어긋나게 된다는 의문을 갖고, 소성(小城)과 대성(大城)이 별도로 존재했을 가능성, 소성(小城)이 확장되어 대성(大城)이 되었을 가능성도 남겨 두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음(田中俊明, 1994). 성은 지면보다 1~2m 높은 대지 위에 위치함. 고성의 방향에 대해 동쪽에서 약간 치우친 남향으로 140〫 라는 기록(徐家國, 1989), 남쪽에서 서쪽으로 치우친 방향으로 2°라는 기록(呂學明, 2005), 북쪽에서 동쪽으로 치우친 방향으로 5°라는 기록(李新全·李龍彬, 2006)이 있음. 남벽, 동벽, 서벽 모두 곧은 직선 형태임. 북벽은 이도하자의 수환(水患)으로 훼손되었음. 만약 북벽도 곧은 직선형태라면 성의 평면은 남북이 동서보다 약간 넓은 장방형일 것임(徐家國, 1989). 성 남반부는 벽돌공장에서 흙을 채취해 가면서 파괴되었고, 남·동·서벽의 기단부도 절단되어 있었음. 1979년과 1983년 조사 때 고성의 지층은 모두 3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기록함. 제1층은 갈황색의 경토층(耕土層)임. 토질은 비교적 부드러움. 두께는 25~30㎝임. 현대 기와편이 출토되었음. 제2층은 갈색토임. 토질은 단단함. 두께는 30~35㎝임. 고구려시기의 붉은색 승문 수키와와 암키와가 출토되었음. 제3층은 회갈색임. 토질은 단단함. 두께는 30~37㎝임. 회색승문의 암키와와 수키와, 무늬가 없는 회색토기편, 운문(雲文)와당, 강돌(卵石) 등이 출토됨. 한대(漢代)문화층은 30㎝ 정도임. 2004년 성 내부 북쪽 200㎡에 대해 발굴을 진행하였는데 퇴적두께는 1~1.6m이고 4층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함. 1층은 황갈색 경토층(耕土層)이고, 두께는 0.3㎝이며, 가는 모래(細沙)를 많이 포함하고 있고, 근현대 유물이 포함되어 있음. 2층은 흑회색 토층이고, 두께는 0.2~0.4m이며, 토양이 푸석푸석하고, 요금시기 벽돌 및 기와와 한대 기와편이 출토됨. 3층은 회황색 토질이고 두께는 0.2~0.5m이며 비교적 단단하고 많은 한대 기와편(漢代 瓦礫)을 포함하고 있음. 제4층은 회갈색 토층이고 두께는 0.4m이며 토질은 단단하고 출토유물은 비교적 적음. 그 아래는 생토층임. 2005년 조사 때 문화퇴적은 모두 3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1시기는 한대(漢代), 2시기는 고구려시기, 3시기는 요금(遼金)시기라고 함. 성벽은 갈색토를 판축하여 쌓았음(여호규, 1999; 徐家國, 1989). 1941년 조사 당시 동측 붕괴면의 성벽 높이는 약 3m였다고 함(高橋匡四郞, 1941). 1944년 조사 당시 북벽의 높이는 1.5m였다고 함(三上次男, 1990). 1979년 조사 때 성벽은 기단부 너비 10m, 윗너비 3m, 높이 1~2m였다고 함(徐家國, 1984). 1979년과 1983년 조사 때에는 성 북반부의 동·서 양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음. 성원(城垣)은 지면보다 약간 높음. 비록 적지 않은 구간이 결실되었지만 지하에 성 기단부가 남아 있음. 성 북부 동벽의 남은 길이는 100m, 서벽의 남은 길이는 147m임. 동·서벽은 지면에서 1.7~2.3m 정도 융기되어 있음. 기단은 남은 너비 6m, 윗너비는 3m임. 2004년 동벽 양단에 대한 절개를 실시하였는데 성벽의 기단부 너비는 15m, 정상부 너비는 11m, 높이는 4.4m임. 단면을 분석해 볼 때 성벽은 두 차례에 걸쳐 축조됨(呂學明,2005). 2005년 조사 때, 동벽 북쪽 끝에 동서방향의 트렌치를 파고 동벽에 대해 절개를 진행함. 성벽은 하단 너비 18m, 상단 너비 9.7m, 남은 높이 4.3m임. 단면은 전제적으로 제형(梯形)임.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세 종류의 다른 토질·토색의 다져진 흙이 있었음. 흙이 다져진 방식, 토질, 토색, 다져진 흙 안에 포함된 유물을 볼 때, 3차례에 걸쳐 보축된 것으로 보임. 첫 번째 다져진 성벽은 가장 내측에 있음. 바닥의 남은 너비는 6.5m, 정상부 남은 너비는 1.8m, 남은 높이는 3.3m임. 순수한 황사토(黃沙土)와 황색 점토를 번갈아가며 쌓았고 간혹 깬돌이 혼입되어 있음. 상부 다져진 층은 명확하고 고름. 두께는 일반적으로 5~10㎝이며, 부분적으로 다져진 흔적이 보임. 때려서 다져진 토질은 밀도가 높고 견고함. 하부의 토질은 상부와 같음. 다져진 두께는 비교적 두꺼운데 일반적으로 10~20㎝ 정도임. 성벽 기단부는 직접 하사석(河沙石) 위에 축조되었음. 홈를 파서 기초를 한 흔적은 보이지 않음. 다져진 흙 내에서는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음. 두 번째 다져진 성벽은 첫 번째 성벽 외측에 있음. 기단부 너비는 3.5m, 상단부 너비는 2.8m, 남은 높이는 4m임. 외측은 경사진 구릉모양으로 보축한 것으로 추정됨. 첫 번째 성벽과 긴밀하게 결합됨. 토질에는 비교적 큰 황사토(黃沙土)가 포함되어 있음. 다져진 층은 명확한데, 두께는 10~20㎝이고, 간혹 다져진 흔적이 보임. 첫 번째 성벽의 다져진 흙에 비해 약간 굵음. 다져진 층은 비교적 순수한데 다만 소량의 니질 승문기와편과 목탄이 포함되어 있음. 세 번째 다져진 성벽은 두 번째 성벽 외측에 있음. 기단부 너비는 8m, 윗 너비는 5m, 남은 높이는 4m임. 외측 상부는 2단 계단형이고, 하부는 완만한 구릉모양임. 다져진 흙은 황갈색 사토(沙土)이고, 흑갈색 진흙이 포함되어 있음. 다져진 흙층은 두 번째 성벽보다 굵고 단단하지 않음. 그 안에는 비교적 많은 유물이 포함되어 있는데 주로 기와편과 철기편임. 성 내부에서 한대 및 고구려 기와가 대량으로 출토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건물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됨. 특히 1944년 조사 때, 남쪽 큰 토성의 북쪽에 기와편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그 일대에 중요한 건물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기도 함(여호규, 1999). 2006년 조사에서 제3층 아래에서 대형건물지와 그 주위에 용로(勇路)로 조성된 고대(高臺)건축지를 발견하였는데, 모두 제4층을 파괴함. 용로는 모두 6구간이 발견됨. 5구간은 강자갈을 깔아서 만들었고, 나머지 한 곳은 깬 기와를 세워서 제작함. 너비는 최대 60~70㎝임. 모두 황토에 박혀 있고 양 가장자리는 편평하고 잘 다듬은 돌 혹은 깨진 기와로 둘렀음. 노면은 평평하고 정연하게 깔아져 있음. 성내 동남부 제2층 아래 유적에는 건물지와 회갱(灰坑)이 있음. 건물지는 온돌 설치방법에 따라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음. 첫 번째는 석판을 세워 연도(烟道)를 만들었고, 연도는 2줄 혹은 3줄로 설치함. 이러한 종류의 온돌은 6개가 발견되었는데 주로 성 내부 동남쪽에 분포함. 두번째는 토갱연도(土炕烟道)로, 지면에 구(溝槽)를 파서 설치하였고 연도는 2줄이 설치됨. 건물지 평면은 장방형이고, 반지하식건축물임. 북갱(北炕) 혹은 동갱(東炕)이 설치되어 있음. 이러한 형태의 건물지는 주로 성내 동남부에 분포하고 있음. 그 외 북부에도 약간 분포함. 판석을 세워서 만든 연도를 갖춘 건물지가 토갱식 연도(土炕式 烟道)를 가진 건물지보다 이른 것으로 추정됨(熊增瓏, 2007). 회갱(灰坑)은 12기가 발견됨. 평면은 원각방형(圓角方形), 원형, 타원형 등이 있음. 2007년의 성내 건축지 발굴양상은 위진(魏晉)시기의 건축배치를 이해하는데 중요함. 즉 관서(官署)건물은 성내의 서북부에 분포되어 있고, 생활건축은 성내의 동남부에 분포함. 1941년 이래 한대 토기편, 와당, 기와편을 비롯하여 고구려시기의 붉은색 기와편이 많이 발견되었음. 1944년 조사 때에는 기와편이나 토기편을 쌓아 놓은 더미가 성 내부에서 확인되었는데, 남쪽 큰 토성 북쪽에 조밀하게 분포되어 있었고 일부는 밭 귀퉁이에 높이 퇴적되어 있었음. 1979년 4월, 벽돌공장에서 성 남부 양측의 흙을 파서 가져갈 때 많은 암·수키와 잔편, 운문와당, 무늬가 없는 회색의 호(罐)·발(钵)·분(盆)·시루(甑)·솥(鼎)·두형토기(豆)편, 소토(紅烧土), 목탄(木炭), 건축강자갈(建築卵石), 오수전(五銖錢) 잔편, 부식이 심한 철기편 등이 출토됨. 성 안에서 출토된 토기는 물레로 제작함. 대부분 회색이고 니질로 제작함. 소성온도는 높음. 동체부(腹部)가 둥그스럼하고 바닥이 평평한 형태의 토기가 가장 많이 출토됨. 한식(漢式)-고구려계의 기와가 출토됨. 북벽 바깥에서 이도하자(二道河子)의 수해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옅은 홍색 승문 암·수키와편이 출토되었음. 와당은 복선(複線)을 육출(六出)했던 집안과 평양에서 출토된 고구려의 연화문와당과 차이가 있는 등 한식(漢式)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음(高橋匡四郞, 1941). 2004년 조사 때 건축자재와 생활용구가 주로 출토됨. 건축자재로는 암키와, 수키와, 와당이 출토됨. 수키와는 정면에 대부분 압인운뇌문(壓印雲雷文), 능형문이 있고 배면에는 대부분 승문이 있음. 수키와는 정면이 승문이고 배면에는 포문이 펼쳐져 있음. 와당은 비교적 적게 출토되었는데 연화문과 수면문이 있음. 토기로는 호(壺), 분(盆), 시루(甑), 호(罐), 구(球) 등이 출토됨. 출토된 장경호는 부여문화의 호(壺)와 일치하고 있음(呂學明, 2005). 2006년 조사 때 제3층에서 출토된 유물이 비교적 풍부한데 기와·토기·철기·동기 등이 출토됨. 동기로는 동전범(銅錢范)이 출토됨. 출토된 와당은 주로 채색된 사계격연화문와당(四界格連花纹瓦當)이고, 그 외에 권운문 와당, ‘千秋萬歲’명 와당이 발견됨. 암키와는 주로 니질의 홍색·회색임. 수키와는 대부분 니질의 회색임. 2008년 조사 때에는 연화문 와당, ‘千秋萬歲’명 와당, 토기, 철기 이외에 한대와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됨. 청동기시대의 유물로는 주로 모래혼입 홍갈색토기가 출토됨. 기형에는 구연이 삼각형이고 횡교이(横橋耳)가 있는 격(鬲), 횡교이사직복가권족(横橋耳斜直腹假圈足)의 호(罐), 가권족(假圈足)의 절복관(折腹罐) 등이 있음. 이러한 토기들은 무순지구에 청동기문화의 특징들을 갖추고 있음. 철기로는 주로 생산도구가 출토되었는데, 보습(犁铧)·철제 자귀(锛), 철제 가래(鍤), 철제 낫 등이 있음. 아울러 철분교장(鐵锛窖藏)을 발견함. 동기로는 철연동촉(鐵鋋銅镞)이 주로 출토되었고, 일부 동경(銅鏡) 잔편이 출토됨. 한대(漢代)토기는 분(盆), 시루(甑)가 주를 이루고 있음. 토기 구연부에는 승문, 동체부 상부에는 와능문(瓦楞文), 동체부 하부와 저부에는 승문이 있음. 와당은 주로 운문이 있는 반와당(半瓦當)임. 전한(前漢)시기의 오수전(五銖錢)과 왕망(王莽)시기의 화폐도 출토됨. ‘高句驪丞’이라고 적힌 것이라고 추정되는 봉니(封泥)가 발견됨.역사적 의미 고구려의 발상지인 환인과 소자하 사이의 교통로는 육도하(六道河) - 횡도하자 애구(橫道河子 隘口) - 차로구(岔路溝)의 환인 서북로와 부이강(富爾江) - 소자하(蘇子河) 상류의 환인 동북로 등을 설정할 수 있는데, 두 갈래의 교통로는 영릉진(永陵鎭) 일대에서 합쳐져서 소자하 하류를 거쳐 요동평원으로 나아가게 됨. 즉 영릉진 일대는 고구려의 발상지인 압록강 중류일대의 서북방면에 위치해 있으면서 소자하 연안 전체에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인 것임. 전략적 요충지인 영릉진 일대에 위치한 영릉진고성의 문화층을 분석해 볼 때, 영릉진고성은 한(漢)이 축조하였고 고구려가 장기간 재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됨(여호규, 1999) 영릉진고성은 한대의 평지성으로서 방어상 상당한 취약점을 안고 있었음. 특히 제2현토군이 혼하방면으로 쫓겨난 다음 중국의 군현세력은 혼하 남안의 제3현토군을 출발하여 혼하·소자하 연안로를 따라 고구려를 침공하였는데, 이 때 고구려 중심부로 들어가는 진입로에 해당하는 소자河 연안이 주요 격전지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3세기 중반 위 관구검(魏 毋丘儉) 침공시나 4세기 중반 전연 모용황(前燕 慕容皩) 침공시의 전황은 이를 잘 보여줌. 고구려 말기의 당군도 혼하 북안의 신성(撫順市 高爾山城)을 출발하여 남소성(南蘇城), 목저성(木底城), 창암성(蒼巖城) 등 소자하 연안의 고구려 성을 공격하였던 것으로 파악됨. 따라서 고구려는 1세기 말~2세기 초경 제2현토군을 혼하방면으로 구축한 뒤 군치(郡治)였던 영릉진고성을 소자하 연안의 거점성으로 계속 사용하는 한편 방어상의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수립하였을 것으로 추정됨. 당시 고구려와 대적하던 중국측 세력은 주로 서북방면에서 소자하를 거슬러 고구려를 공격하였음. 그런데 영릉진고성은 소자하 남안에 위치하여 소자하를 서북방면에서 침공하던 적군을 저지하는 천연해자로 이용할 수 있었지만, 이도하자의 경우에는 동쪽에 위치하여 천연해자로 활용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방어상 불리한 측면을 제공하였음. 이러한 점에서 영릉진고성 동남쪽 이도하자 동안에 위치한 비아랍성(費阿拉城)이 주목됨. 즉 고구려는 제2현토군의 군치였던 영릉진고성을 점령한 다음 방어상의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왕도였던 졸본지역이나 국내지역에서처럼 평지성·산성의 방어체계를 구축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됨. 또한 영릉진고성 북쪽인 초창하구(草蒼河溝)의 나가보산성(羅家堡山城)과 두도립자산성(頭道砬子山城), 협하구(夾河溝)의 삼도보동산성(三道堡東山城), 서쪽인 연통산(煙筒山) 북사면에 위치한 온가요산성(溫家窯山城)과 아화락촌산성(阿伙洛村山城) 등은 영릉진고성에서 불과 5~10㎞ 정도 거리일 뿐 아니라 둘레가 200m 안팎인 소형산성이라는 점에서 영릉진고성 또는 비아랍성의 위성산성으로 추정됨(여호규, 1999). 축조연대에 대한 견해는 다음과 같음. 徐家國(1989)는 성에서 출토된 유물로 한성지(漢城址)로 추정함. 한편 북벽에서 발견된 화판문 와당과 옅은 홍색 승문 암·수키와를 볼 때, 위진남북조시기까지 계속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됨. 여호규(1999)는 영릉진고성을 제2현토군 치소로 추정하였는데, 현토군의 변천과정을 고려하면, 영릉진고성은 제1현토군이 구려(句驪)의 서북방면 곧 영릉진 일대로 쫓겨난 시점인 기원전 75년경에 제2현토군의 치소로 축조되어, 1세기 말~2세기 초경 제2현토군이 혼하방면으로 쫓겨날 때까지 사용되다가 2세기 이후에는 고구려가 재사용한 것으로 추정함. 呂學明(2005)은 전한시기에 축조되어 고구려 혹은 그 이후에 보축되었다고 봄. 성내에서 전한, 고구려, 요대 유물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성이 장기간 사용된 것으로 추정함. 위치비정에 관한 견해는 다음과 같음. 高橋匡四郞(1941)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문헌을 살펴볼 때 현토군 고구려현 치소는 흥경노성(興京老城) 부근으로 비정할 수 있음. 한편 무순현의 한 언덕에서 한대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제3현토군의 치소로 추정하고 있음. 이로 볼 때, 무순현 오른쪽에 있는 어느 평지성을 제2현토군 치소로 상정해 볼 수 있음. 영릉진고성에서 나온 유물을 살펴보면, 한식(漢式)과 고구려계의 벽돌과 기와가 나옴. 출토된 와당은 한식 와당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고, 집안과 평양에서 출토된 복선(複線)을 육출(六出)했던 고구려의 연화문 와당과 명확한 차이가 있음. 벽돌은 한식(漢式)과 같은 계열로 볼 수 있음. 평기와는 표면이 매끈하고 내면에는 석문(席文)이 펼쳐져 있는 등 집안과 무순 등지의 산성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고구려 계열로 볼 수 있음. 위와 같이 영릉진고성은 한대 토성임이 확연히 드러나지만 한대 뿐만 아니라 고구려도 이용하였던 것으로 봉 수 있음. 그러므로 한의 제2현토군, 즉 고구려현치로 비정할 수 있음. 한편 무순(고구려 신성과 제3현토성이 있음)방면에서 고구려의 본거지인 환인·집안방면으로 나가려면 자연 지세를 이용해서, 즉 하천에서 하천으로 이동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합리적임. 그렇다고 하면 혼하유역을 소행(遡行)하여 소자하로 나가서 소자하 유역을 소행(遡行)하는 흥경로성 방면으로 나오는 길, 즉 구흥경가도(舊興京街道)를 먼저 상정할 수 있음. 그런데 노성(老城)에서 어느 루트를 이용하였는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루트을 생각할 수 있음. 첫 번째는 흥경노성에서 이도하를 소행하여 합산대(哈山臺)를 넘어 대이하(大二河) 유역으로 나와 환인에 이르는 길임. 이 길은 지금도 환인방면으로 나가는 길임. 다른 하나는 청태조(淸太祖)대에 조선의 사신 신충일(申忠一)이 지나간 길, 즉 부이강 상류로 따라 내려가서 영이강구(甯爾江口)에서 혼강을 넘은 후, 신개하(新開河)를 소행하여, 대판차령(大板忿嶺) 바로 옆인 모구검 단비(断碑)가 나온 소판차령(小板忿嶺)을 넘어 집안으로 이르는 길임. 이상의 두 길은 지리자연에 적합함. 모구검은 바로 길을 선택한 것으로 추정됨. 모구검 열전(列傳)에 ‘구려왕 궁(句驪王 宮)이 보기(步騎) 2만명을 이끌고 비류수로 진군하여 양구(梁口)에 싸웠는데, 궁은 패하여 도망을 갔고, 검(儉)은 말을 묶고 수레를 매달아 환도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음. 이 기록에서 양구는 지금의 부이강구로 추정되므로 모구검비문이 나왔던 소판차령을 통하였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임. 이상의 두 길은 지리자연에 적합함. 두 길은 아마도 함께 이용된 것으로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서 어느 한쪽을 선택된 것이 분명함. 제2현토군에 있었던 고구려현과 관련된 문헌기사 가운데 지리지 고구려현조(地理志 고구려현조)에는 ‘요산(遼山)에서 요수(遼水)가 나오고, 서남으로 요대(遼隊)에 이르러 대요수(大遼水)로 들어간다. 또한 남소수(南蘇水)가 서북으로 새외(塞外)를 경유한다’라는 기록이 있고, 『수경주(水經注)』권14 대요수조(大遼水條)에는 ‘현토고구려현에 요산(遼山)이 있고, 소요수(小遼水)가 나온다’라는 기록이 있음. 대요수(大遼水)는 지금의 요하이고, 요수·소요수는 지금의 혼하이므로 고구려현은 지금의 흥경현 경내(興京縣 境内)에서 찾을 수 있음. 노성(老城) 부근은 교통의 요충지점이고, 동현내(同縣內)에서 가장 탁트인 곳임. 그러므로 여기를 고구려현치에 비정하는 것이 합리적임. 현토군이 이곳으로 이동해 왔음은 『후한서』동이열전 예조(濊條)의 ‘소제시원(昭帝始元) 5년에 임둔과 진번을 폐지하여 낙랑과 현토에 합방하였다. 현토는 다시 구려로 옮겼고, 단단대령(單單大領) 동쪽의 옥저와 예맥은 모두 낙랑에 속하였다’라는 기록과 『한서』소제 기원원봉(昭帝 紀元元鳳) 6년 춘정월조의 ‘군국(郡國)의 죄수를 모아 요동현토성을 쌓았다’라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음. 전자의 ‘현토는 다시 구려로 옮겼다’라는 기록과 후자의 ‘요동현토성을 쌓았다’라는 기록은 서로 연관이 있음. 그렇다고 하면 현토군은 적어도 원봉(元鳳) 6년(기원전 75년) 전후에 옮긴 것이라고 할 수 있음. 한편 『삼국지』위서 동이전 동옥저조에 ‘한무 원봉이년(漢武 元鳳二年) 조선을 정벌하고, 만(滿)의 손자 우거(右渠)를 죽였다. 그 지역을 분할하여 4군을 설치하였는데, 옥저성(沃沮城)으로 현토군을 삼았다. 후에 이맥(夷貊)의 침략을 받아 군을 서북쪽으로 옮겼는데, 지금은 소위 현토고부(玄菟故府)라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라는 기록이 있음. 제1현토군은 옥저성, 즉 지금의 함경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음. 위대(魏代)의 제2현토군을 ‘현토고부’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거기에서도 이미 이동하였음을 알 수 있음. 그 이동했던 시기는 후한 중기로 추정되고 있음. 여하튼 영릉진고성 제2현토군 치소, 즉 고구려현치지라고 단정할 수 있음. 徐家國(1989)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후한서』동이전 동옥저조에는 ‘무제(武帝)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옥저지(沃沮地)를 현토군으로 삼았다. 이후 이맥이 침략해오자 군(郡)을 고구려 서북으로 옮겼다’라는 기록이 있음. 현재 영릉진고성이 바로 고구려 서북에 위치하고 있음. 영릉진고성은 규모가 크고, 온전한 와당과 수키와 등 출토된 유물의 종류·수량이 많음. 이로 볼 때 영릉진고성은 대형 성지라고 할 수 있는데 당시 군치소재지로 추정됨. 이로 볼 때. 영릉진고성이 고구려 서북으로 옮겨진 한 현토군의 군치로 추정됨. 三上次男(1990)은 영릉진고성을 남·북 2개의 성으로 파악하면서 남쪽 큰 토성을 제2현토군 치소, 북쪽 작은 토성을 제2현토군 설치 이전이나 제3현토군으로 옮긴 뒤의 현치로 추정함. 田中俊明(1994)은 제2현토군치의 고구려현성으로 추정함. 여호규(1999)은 제2현토군 치소로 추정함.자연환경 요녕성 신빈현에서 서쪽으로 23㎞ 떨어진 영릉진 동남쪽 1㎞(田中俊明은 500m(田中俊明, 1994), 國家文物局은 1.5㎞라고 기록함(國家文物局, 2009))의 하곡평지에 위치함. 소자하 남안에서 500~600m 떨어진 평탄한 대지에 자리 잡고 있음. 고성이 위치한 영릉진 일대는 소자하 연안 교통로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 이곳에서 소자하 하류를 따라 내려가면 혼하를 거쳐 요동평원에 도달할 수 있고, 소자하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부이강(富爾江)·나고하(喇咕河)를 거쳐 환인이나 통화 일대로 나아갈 수 있음. 또한 남쪽으로는 이도하(二道河)를 거슬러 횡도하자 관애(橫道河子 關隘)를 통과하여 환인으로 진입할 수 있고, 이도하의 유수(楡樹)에서는 태자하 상류로 나아가는 산간로가 갈라짐. 영릉진 일대는 고구려 초기 중심지인 압록강 중류일대에서 소자하~혼하를 통해 요동평원으로 나아갈 때 또는 요동지역에서 압록강 중류일대로 진입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전략적 요충지였음. 고성 북쪽으로는 소자하 북안을 따라 신빈~심양 도로가 동서로 길게 뻗어 있고 영릉진 시가지가 도로를 따라 길게 펼쳐져 있음. 고성 서쪽에는 환인~영릉진 도로가 지나가고 있음. 고성 남쪽에는 이도하자 골짜기를 따라 환인~영릉진 도로가 지나가고 있음. 고성 동쪽 이도하자 건너편에 청대(淸代) 초기 도성이었던 혁도아랍성(赫圖阿拉城(노성;老城))이 있음. 성 남쪽으로 3.5㎞ 떨어진 지점에 후금(後金)의 비아랍성(費阿拉城)이 있음. 성 서쪽으로 2㎞ 떨어진 지점에 후금의 영릉(永陵)이 있음. 영릉진고성이 위치한 영릉진 일대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소자하 량안에는 좁고 기다란 충적평지가 펼쳐져 있음. 고성 동쪽에는 이도하자가 북류하다가 동벽 북단 부근에서 서쪽으로 흘러 서북단을 지난 다음 소자하로 유입되고 있음. 고성 북쪽으로 이도하자 건너편에 소자하가 서쪽으로 흐르고 있고, 소자하 건너편 북쪽에는 신빈현과 청원현의 분수령에서 발원한 초창북구(草蒼北溝)와 협하구(夾河溝)가 남류하여 소자하로 흘러들고 있음. 이처럼 고성이 위치한 영릉진일대는 소자하와 그 지류들이 만나면서 비교적 넓은 충적평지를 이루고 있음. 고성 서쪽 환인~영릉진 도로 서쪽으로 연돌산(煙突山) 산줄기가 동서로 길게 가로놓여 있음. 성 북쪽은 소자하와 이도하의 합류지점임. 주변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산은 기복이 있음. 북변과 동변은 이도하에 접해 있음.유물정보 호(罐) 2점, 옹(瓮) 2점, 반(盤) 1점, 운문반와당(雲文半瓦當) 12점, 운문와당(雲文瓦當) 5점, 화판문와당(花瓣文瓦當) 6점, 문자와당(文字瓦當) 1점, 수키와(筒瓦) 1점, 암키와(板瓦) 10점, 벽돌(磚) 3점,참고문헌 · 稲葉岩吉, 「興京二道河子舊老城」『滿洲史學』 3-2, 1939 · 高橋匡四郞, 「蘇子河流域に於ける高句麗と後女眞の遺跡」『建國大學硏究院硏究期報』 2, 建國大學硏究院, 1941 · 徐家國, 「漢玄菟郡二遷址考略」『社會科學輯刊』 1984-3, 1984 · 徐家國, 「遼寧新賓縣永陵鎭漢城址調査」『考古』 1989-11, 1989 · 三上次男, 「東滿風土雜記」『高句麗と渤海』, 吉川弘文館, 1990 · 田中俊明, 「高句麗の興起と玄菟郡」『朝鮮文化硏究』 1, 東京大學文學部朝鮮文化硏究室, 1994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呂學明, 「新賓縣永陵漢代城址」『中國考古學年鑒』, 文物出版社, 2005 · 李新全·李龍彬, 「新賓縣永陵漢城址」『中國考古學年鑒』, 文物出版社, 2006 · 熊增瓏, 「新賓永陵南城址」『中國考古學年鑒』, 文物出版社, 2007 · 李新全·蘇鵬力, 「新賓縣永陵南城址」『中國考古學年鑒』, 文物出版社, 2008 · 李新全·蘇鵬力, 「撫順市新賓永陵南城址」『中國考古學年鑒』, 文物出版社, 2009 · 國家文物局,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 西安地圖出版社, 2009

    • 리스트여닫기 비아랍성; 불아랍성; 이도하자구노성(費阿拉城; 佛阿拉城; 二道河子舊老城) 출토지 요녕성 신빈현 영릉진 이도하자촌(遼寧省 新宾縣 永陵镇 二道河子村)연대 후금(後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39도엽암길, 고교광사랑 등(稻葉巖吉, 高橋匡四郞 等)청 태조 노이합제(奴爾哈齊)가 혁도아랍성(赫圖阿拉城)으로 도성을 옮기기 전인 비아랍성에 거주했던 때, 조선의 신충일(申忠一)이 비아랍성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비아랍성에 대한 기록을 남겼음. 그 원문·원도(原文原圖)를 기본으로 비아랍성에 대해 탐사·발굴하고, 그 개략적 보고서를 작성함. 원문원도의 해설은 도엽암길, 실제 발굴보고는 고교광사랑이 담당함.稻葉巖吉, 1939 「興京二道河子舊老城」『滿洲史學』3-2 으로 발표함.1941고교광사랑, 도변삼삼 등(高橋匡四郞, 渡邊三三 等) 1979심양고궁박물관(철옥흠, 심장길)(瀋陽故宫博物院(鐵玉欽, 瀋長吉))시굴 등 여러 차례 조사를 진행함.1986세곡양부 등(細谷良夫 等)8월 15일에 현지를 답사하고 간략한 보고서를 작성함.1987세곡양부 등(細谷良夫 等)10월 13일에 현지를 답사하고 간략한 보고서를 작성함.. 성문물보호단위(省文物保護單位)로 지정됨.2000년대초경전, 정진(肖景全, 鄭辰)성을 여러 차례 조사하였으나, 성 안에서 고구려시기의 유적과 유물을 찾지 못함.구조특징 비아랍성(費阿拉城)은 이도하자구노성(二道河子舊老城) 외에 불아랍성(佛阿拉城)이라고도 부름. ‘불아랍(佛阿拉)’은 만주어, ‘불(佛)’은 한어(漢語)로 ‘진구(陳舊)’라는 뜻이고, ‘아랍(阿拉)’은 낮은 혹은 평평한 산언덕을 의미함. 즉 비아랍성은 ‘구성(舊城)’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음. 1621년 4월 후금은 요양으로 천도하였고, 8월에는 동경성을 축조하였는데, 그 이후부터는 혁도아랍성(赫圖阿拉城)은 구성(舊城), 불아랍성(佛阿拉城)은 노성(老城)이라고 불렀음. 성벽 위에는 나무가 자라고 있고 주변은 밭으로 개간되어 있음. 비아랍성은 외서와 내성으로 이루어져 있음(撫順市社會科學院, 1944; 國家文物局, 2009). 외성은 서문에서 남위벽(南衛壁)에 이르고, 내성은 외성의 동벽 중단에서 시작하여 외성 북벽과 합이살산(哈爾薩山) 서북쪽 산등성이를 따라 외성 남벽 중단에 이르는 구간에 축조되었음. 한편 일본측 보고서에서는 외성과 내성 외에 외성 서북벽 안쪽에 외성 북벽 중단과 서벽 중단을 잇는 동북~서남방향의 차단벽을 중성으로 설정하고 있음(建國大學硏究員, 1939; 東潮·田中俊明, 1995). 조선 사신 신충일(申忠一)이 1595년에 비아랍성을 방문한 후 기록한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에는 내성, 외성, 목책성이 있고, 목책 안에는 노추(奴酋)가 거주하고 있었다고 함. 외성에는 추첩(雉堞)·사대(射臺)·격대(隔臺)·호자(壕子), 내성에는 추첩(雉堞)·격대(隔臺)가 있었고, 성 위에는 망을 보는 판옥(板屋)이 설치되어 있는데, 개(盖)가 없고 사다리가 있었다고 함(撫順市社會科學院, 1994). 내·외성 두 줄기 성벽의 기초는 모두 산세 방향을 따라 축조하였기 때문에 평면은 불규칙형이 드러남. 외성벽에는 순성(巡城)할 수 있는 길이 있음. 그 가운데 자연적인 산등성이를 이용한 구간은 단지 보행순시(歩行巡视)할 수 있을 뿐임. 해발 375m인 합이살산에서 동북과 서북방향으로 뻗어 내린 산등성이의 자연지세에 따라 성벽을 축조함. 성벽의 구조는 내부에 자연석을 쌓고, 그 위에 흙을 쌓은 석축임(建國大學硏究員, 1939; 國家文物局, 2009). 남벽은 남쪽 산등성이를 따라 축조되어 있는데, 자연적인 험준함을 이용한 산험장(山險墻) 외에 토석벽(土石墻)이 축조되어 있음. 이후 북쪽으로 뻗어 나가는데 순산척(纯山脊)에 축조된 성벽의 구간 길이는 1,370m임. 그 아래에 접해 있는 토석축 북벽은 길이가 1,100m이고, 남쪽으로 꺾여서 서벽과 연결됨. 불아랍성 내성벽의 기초는 기본적으로 계곡의 자연형세를 따라 축조되었는데, 모두 토석으로 축조함. 전체 길이는 960m임. 1939년 조사 때에는 성의 서북쪽, 즉 이도하자 부락에 인접했던 외벽이 잘 남아 있다고 함(建國大學硏究員, 1939). 1939년 내성, 중성,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 보고서에서는 외성벽은 견고하고, 높이는 35m이며, 기저의 폭은 7~11m라고 기록함. 중성벽은 외성벽에 비하여 견고하지 않고, 높이와 폭 모두 외성벽의 반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함. 내성벽은 중성벽에 비하여 견고하고, 파괴된 부분도 적어 양호한 상태를 보여준다고 함.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에 의하면 외성은 먼저 돌로 3척 높이 정도 쌓은 후 그 위로 연목(椽木)을 까는 방식을 반복하여 10여척 높이의 성벽을 구축하였고, 외벽에는 진흙을 발랐다고 함. 내성 또한 외성과 같은 방식으로 성벽을 축조하였다고 함. 외성 아래너비는 최대 4~5척, 외성 윗너비는 1~2척, 내성 아래너비는 최대 7~8척, 내성 윗너비는 1~2척이었다고 함. 위와 같은 성벽축조방법을 비아랍성에서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흥경(興京)부근의 민가에 있는 성벽에서 볼 수 있었다고 함(建國大學硏究員, 1939). 비아랍성에 보이는 토석으로 기초를 다지고 나무를 교대로 쌓아 올리는 축성방식은 ‘항축포연식축법(夯筑布椽式築法)’이라고 부름. 목연(木椽)을 다진 흙 사이에 쌓으면 연접을 더욱 견고하게 하는 작용을 하면서 벽체의 품질을 향상시켜 성벽의 견고함을 증강시킴. 해당지역의 자연자원조건을 이용하여 그 지역의 실정에 맞는 알맞은 재료로써 성을 쌓는 방법은 건주여진(建州女真) 축성방법 가운데 하나임(撫順市社會科學院, 1994). 성내에는 후망옥(候望屋), 한왕전(罕王殿), 서이합제(舒爾哈齊) 거주지 등이 있음(國家文物局, 2009).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에 의하면 내성에는 100여가, 외성에는 300여가, 외성 바깥 네 면에는 400여가가 있었고, 내성에는 친근족(親近族)이 살았음. 외성에는 장수들과 족당(族黨), 외성 바깥에는 군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함. 1939년 조사 때, 8기의 건물지를 발견함. 이 가운데 5기의 건물지는 내성 서북모서리에 위치하는데, 경관상 가장 좋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부락민 사이에 ‘한왕전(汗王殿)’라고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 보아, 노이하제(奴爾哈齊) 일가의 거처지로 추정됨. 이 같은 가정이 맞다면 그 동남쪽에 동생일가의 거처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땅이 평평하고 초석·벽돌·기와가 흩어져 있다는 점에서 이 같은 추정을 뒷받침할 수 있음. 건물지들은 모두 흙 속에서 발굴되었고, 초석부는 항부(炕部)에 도달함. 각 건물지들은 넓이는 다르지만 구조에는 큰 차이가 없음. 초석부는 4~5㎝ 전후의 돌을 쌓았는데 대부분 높이는 30~35㎝, 폭은 약 1m임. 기초부에는 벽돌로 만든 벽이 계속되고 있음. 항부(炕部)는 벽돌로 제작되었는데 가로방향으로 쌓아 사용한 벽돌은 32×15×8.5㎤의 흑색벽돌임. 연도는 건물지마다 그 수를 달리하지만 연도 1줄의 폭은 모두 약 25㎝임. 항벽(坑壁)의 두께는 벽돌 한 개인 것(15㎝), 벽돌 두 개인 것(32㎝), 양자를 혼용한 것으로 세 종류가 있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기저부의 2열~3열 뿐임. 벽돌과 벽돌 사이에는 모두 진흙이 붙어 있는데 회반죽을 사용한 것임. 출토된 벽돌과 기와는 무문무유(無文無釉)가 대부분을 차지함. 일부 채와(彩瓦)가 있음. 토기편은 대부분 명대 청와(明代 靑瓦)임. 성 안이 개간되면서 초석, 벽돌과 기와, 토기편 등이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었음(建國大學硏究院, 1939). 비아랍성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비교적 많은데 명대 벽돌, 와당, 청화자기편, 자기편, 백색 절구 등이 출토됨. 그 가운데 서이합제 거주지에서 출토된 명대 접시에는 아름다운 도안이 그려져 있는데 얇은 철국자국(铁鋦子锔)으로 갈라진 부분을 붙였음. 국함(锔含)공예는 매우 정교함. 수공업 기술수준은 전반적으로 매우 높음. 바닥에 ‘대명선덕팔년(大明宣德八年)’이라고 적힌 자기가 있는데, 명대 관요산품(官窑産品)임을 알 수 있음. 벽돌 가운데 연화문벽돌이 출토됨. 고구려시기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함(撫順市社會科學院, 1994).역사적 의미 비아랍성은 후금의 누르하치가 1587년부터 1603년 혁도아랍성으로 옮길 때까지 16년 동안 거주하였던 성임. 1424년 건주위 수령 이만주(建州衛 首领 李满柱)는 자신의 부(部)를 이끌고 파저강(婆猪江; 현재 환인현 혼강유역 중류)으로 옮겨와서 옹촌(瓮村) 등처의 올랍산성(兀拉山城) 남쪽기슭(지금의 환인현 혼강댐 수몰지구의 原長崗村)에 거주하였음. 1433년 4월 조선이 건주 여진인이 국경에 들어온다는 구실로 전쟁을 일으키고, 명도 건주위에 대하여 세 차례 전쟁을 벌이면서 건주위는 큰 타격을 입었음. 전쟁 후 이만주는 옹촌에서 북쪽으로 올미부(兀弥部; 桓仁縣 東古城子)로 옮겼음. 1437년 9월 조선은 건주위 이만주에 대하여 두 차례 대규모 전쟁을 일으켰는데 이만주는 조선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신빈현 소자하 상류의 호난합달(呼蘭哈達; 지금의 煙筒山) 산 아래로 진입하였음. 이때 누르하치의 조상인 동산(董山)이 비아랍성을 축조함. 비아랍성은 명 성화(明 成化) 연간(1465~1487) 두 차례 훼손되었음. 1466년 동산은 요동지역을 공격하다가 살해되었고, 1467년 2월과 9월에는 건주삼위(建州三卫)와 명과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면서 전투가 벌여짐. 이후 1473년과 1479년에도 잇달아 침입을 받았음. 이러한 전쟁 등을 통해 비아랍성은 폐허가 되었고,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게 되었음. 후에 누르하치가 군사를 일으켜 건주여진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1587년 정월, 성지와 궁실이 축조됨. 『興京縣志』에 의하면 ‘구노성(舊老城)은 이도하 남산(南山)에 있는데, 누르하치가 혁도아랍성을 도성으로 삼기 전까지의 도성이었다. 흙으로 축조하였는데, 고지(故址)는 구부러져 있었다’라고 기록됨. 『만주실록』권2 7항에는 ‘태조가 석리구 호난합달(碩里口 呼兰哈达) 아래 동남쪽의 가합하(嘉哈河)와 석리가하(碩里加河) 중간의 평대(平臺)에 3층으로 성을 쌓고 누대(楼台)를 축조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음. 여기에 기록된 성이 바로 비아랍성임. 비아랍성에서 누르하치는 법제를 정립하고 사회질서를 정리하였으며 군대를 부설하고 경제를 발전시켰으며, 명·조선과 통상무역(互市贸易)을 함. 이를 바탕으로 스스로 왕을 칭하면서 후금의 기초를 다지게 됨. 즉 비아랍성은 건주여진 초기의 큰 본영(本營)과 수부(首府)로 건주여진인들의 정치, 군사,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음(撫順市社會科學院, 1994; 여호규, 1999). 비아랍성은 포곡식산성임. 성벽 축조방식에 있어서는 자연석을 쌓은 다음 그 위에 성토함. 그리고 성벽라인보다 안쪽에 성문을 설치하여 ‘U’자형 옹성구조를 갖추고 있음. 이러한 점들은 고구려산성의 주요 특징임. 또한 지리적으로도 소자하 연안의 영릉진에서 고구려 초기 중심지인 환인지역으로 진입하는 교통로의 길목에 자리잡고 있음. 위와 같은 여러 면에서 비아랍성은 고구려 산성으로 추정됨. 실제 거대한 산성을 축조한 경험이 거의 없던 건주여진족이 조선군에게 쫓겨 소자하 방면으로 피신한 급박한 상황에서 거대한 산성을 축조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움(여호규, 1999). 또한 성내에서 고구려 유물이 발견된 적이 있다고 함(撫順市社會科學院, 1994). 그리고 서남쪽으로 2.5㎞ 떨어진 지점에서 고구려 적석묘가 대량으로 발견되었음.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볼 때 비아랍성은 본래 고구려산성이었고, 15세기 중반 조선군에 쫓겨 소자하으로 피신한 건주여진족이 고구려산성을 개축하여 자신들의 근거지로 삼았던 것으로 추정됨(高橋匡四郞, 1941; 渡邊三三, 1940; 張正巖·王平魯, 1994; 東潮·田中俊明, 1995; 여호규, 1999). 반면 성 안에서 고구려시기의 유적과 유물이 보이지 않으므로 고구려성이 아니라는 견해가 있음(肖景全·鄭辰, 2007). 비아랍성 서북쪽으로 4㎞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영릉진고성에서 한대의 문화층과 뚜렷이 구별되는 고구려 시기문화층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고구려가 제2현토군올 혼하 방면으로 구축한 다음 군치였던 영릉진고성을 상당기간 사용하였음을 보여줌. 그런데 영릉진고성은 평지성일 뿐 아니라 이도하자의 서안에 위치하여 서북방면에서 침공하던 중국측 세력을 방어하는데 상당한 취약점을 안고 있었음. 영릉진고성의 취약점과 거리나 위치관계로 볼 때 비아랍성은 영릉진고성의 방어용 산성이었을 가능성이 높음. 규모가 큰 대형 산성이라는 점에서 단순한 방어용 산성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추정됨. 즉 모용선비들과 각축전을 벌이던 4세기 내지 당이 혼하 안의 신성을 거쳐 소자하 연안의 남소성·목저성·창암성 등을 침공하던 660년대에는 소자하 연안에서 주요한 거점성으로 기능하였다고 추정됨(여호규, 1999). 위치비정에 관한 견해는 다음과 같음. 渡邊三三(1940)은 고구려의 창암성(苍岩城)으로 추정함. 高橋匡四郞(1941)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흥경가도(興京街道; 혼하 상류 소자하유역)에서 발견된 고구려식 산성 가운데 살이호성(薩爾滸城)·목기성(木奇城)·비아랍성(費阿拉城) 등은 각각 고구려시대의 남소성·목저성·창암성으로 비정됨. 먼저 이 견해에 대한 전제는 고구려 서북변에 위치했던 신성의 정확한 위치임. 신성에 위치와 관련하여 송정(松井) 등이 봉천(奉天; 심양) 동쪽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渡邊三三이 고이산성을 발견하면서 학계에서는 고이산성을 신성으로 비정되고 있음. 한편 남소성과 관련하여 『진서』모용성조(慕容盛條)에서는 ‘慕容盛率衆三萬 伐高麗 襲其新城南蘇 皆剋之 散其積衆徒其五午餘戶遼西’라는 기록이 있고, 4년(400)조에는 ‘高句麗王安事燕禮慢 二月丙申燕王盛將兵三萬襲之 以驃騎大將軍熙爲前鋒 拔新城南蘇’라는 기록이 있음. 또한 『당서』고려전 당태종 정관 21년(647)에는 ‘李勣爲遼東道行軍大總管右武衛將軍 孫貳朗 右屯衛大將軍 鄭仁泰副之 率營州都督兵 繇新城道以進 次南蘇木底 虜兵戰不勝焚其郛’라는 기록이 있음. 『구당서』설인귀전의 당고종 건봉(乾封) 2년(667) 고구려 연개소문의 장자 남생이 동생 남건·남산과의 내홍으로 666년에 국내성을 탈출하여 당에 내부한 내용이 서술된 조에 ‘高麗大將泉男生率衆內附 高宗遣将军庞同善高等迎接之 男生弟男建率国人逆击同善等 诏仁贵统兵为后援 同善等至新城 夜为贼所袭 仁贵领骁勇救 斩首数百级 同善等又进至金山 为贼所败 高丽乘勝而进。仁贵横击之 贼众大败 斩首五萬余级 遂拔其南苏木底苍岩等三城 始與男生相會’라는 기록이 있음. 위의 사료를 종합해 보이는 남소는 신성에서 멀지 않고, 신성에서 목저에 이르는 길에 있음이 확연히 드러남. 한편 국내성(집안)에서 나왔던 남생이 당에 내부하기 위해 신성방면으로 나아갔을 때, 설인귀(薛仁貴)와 동선(同善) 등이 그를 영접하기 위해 나아갔던 길에 차례대로 남소, 목저, 창암이 있기 때문에 그 세 성은 반드시 혼하~소자하 일선에 있어야 함. 무순에서 동북 약 35㎞에 있는 살이호성(薩爾滸城)은 고구려식 산성이고, 그 동쪽 35㎞의 목기(木奇)에도 고구려산성이 있으므로 살이호성을 남소성, 목기에 있는 성은 목저성이라고 할 수 있음. 그러므로 창암성 또한 소자하유역의 목저성 동쪽에 있는 성이라고 추정되므로 목기에서 동쪽으로 25여㎞ 떨어져 있는 고구려식 산성인 비아랍성으로 비정하는 바임. 현재 비아랍성 부근은 무순에서 집안방면으로 이르는 분기점으로 요충지라고 할 수 있음. 이것은 자연적 지리에 따른 것인데, 아마 옛날에도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추정됨. 고구려의 압박으로 현토군이 함경방면에서 여기로 이동했던 것도 요충지라는 방증일 것임. 집안에서 당으로 내부하기 위해 서북방 무순을 향하여 간 남생 등을 영접했던 설인귀의 군사 등은 무순에서 소자하를 따라 나아갔고 살이호성(남소성), 목기(목저성), 비아랍성(창암성)를 격파하고 그 근처에서 남건의 군대를 만났다고 이해하면, 『구당서』설인귀전의 기록은 매우 원활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됨. 한편 『진서』재기(載記) 모용황 함강(咸康) 7년 조의 ‘皩遷都龍城 率勁卒四萬 鹹康七年 入自南陝, 以伐宇文高句麗(중략) 勒衆萬五千從北置而進 高句麗王釗 謂皝軍之從北路也 乃遣其弟武 統精銳五萬距北置 躬率弱卒以防南陝 翰與釗戰于木底 大敗之 乘勝遂入丸都’라는 기록, 『위서』고구려전의 ‘建國四年 慕容元眞率衆伐之(高句麗) 入自南陜 戰於木底 大敗釗軍 乘勝長驅 遂入丸都’라는 기록, 『자치통감』 晋紀 顯宗下 咸康 8년 10월조의 ‘皩曰善(장군 翰의 진언에 대하여) 將擊高句麗 高句麗有三道 其北道平闊 南道險狹(北道從北置 南道從南陜入木底城), 衆欲從北道 翰曰虜以常情料之 必謂大軍從北道當重北而輕南 王宜帥銳兵 從南道擊之 出其不意 北都不足取也’라는 기록은 모두 진 함강(晋 咸康) 8년(342) 전연의 모용황의 고구려 정벌을 서술하였는데, 그 사료들은 동일계통의 기록에 기초한 것임이 명확함. 그러므로 『진서』재기(載記)와 『위서(僞書)』고구려전에서 보이는 남합(南陜)과 『자치통감』진기(晋紀)에 보이는 ‘남도험협(南道險狹)’은 동일한 길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편으로는 길의 상태를 알려 주고 있음. 마찬가지로 ‘북치(北置)’, ‘북로(北路)’, ‘북도평활(北道平濶)’도 동일한 길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음. 여기에서 ‘북치’는 소자하 유역의 길, 즉 지금의 구흥경가도(舊興京街道)이고, 남소성과 목저성도 이 길을 따라 존재하다고 추정됨. ‘남합’은 평상시의 길이 아니고, 혼하·소자하 남방 일대에 연결된 산악지대의 사잇길(間道)를 가르킨다고 추정됨. 『자치통감』 진기(晋紀)에 보이는 ‘高句麗有二道 其北道平闊 南道險狹’은 비유적 표현으로 정상적인 길은 북도이고, 남도는 험준하고 좁은 사잇길(間道)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추정됨. 한편 『진서』載記 慕容熙 燕昭文帝 光始 8년(406년)조에 ‘熙興苻氏襲契丹 憚其衆盛將還 苻氏弗聽遂弃辎重, 轻袭高句骊 周行三千余里 士马疲冻死者属路 攻木底城 不克而还’이라는 기록이 있음. 이 기록에서 신성과 남소성을 볼 수 없는데 6년전 즉, 진 안제 륭안(晋 安帝 隆安) 4년에 이미 『진서』모용성조(慕容盛條)에 보이는 것처럼 신성과 남소성 두 성을 빼앗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음. 張正巖·王平魯(1994)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647년 당의 이적(李勣)이 고구려 정벌에 나섰을 때, ‘영주도독병(營州都督兵)을 이끌고 신성도(新城道)로 진입하여 차례대로 남소·목저에서 고구려군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했다’고 함(『신당서』권220). 이로 볼 때, 신성도의 기점에는 신성·남소성·목저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음. 당대의 신성도는 동진시기 고구려의 남·북도 가운데 남도, 수대의 ‘남소도(南蘇道)’에 해당함. 그 길은 신성에서 시작하여 남소·목저를 거쳐 환인·집안으로 들어감. 이 가운데 남소성은 동진대에도 보임. 395년에 ‘모용각(慕容恪)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남소를 점령했다(『자치통감』 권97)’는 기록이 있음. 즉 고구려를 공격할 때 먼저 남소성을 점령하였음을 언급하고 있음. 그리고 339년 ‘모용황이 고구려를 공격하였을 때 병사가 신성에 이르렀다’는 기사와 관련하여 원대 호삼성(胡三省)의 주(注)에는 ‘신성은 고구려의 서비(西鄙)로, 서남쪽으로는 산을 곁에 두고, 동북쪽으로는 남소·목저 등의 성과 접해있다(『자치통감』권 96)’라고 기록되어 있음. 이로 볼 때 남소성은 신성과 목저 사이에 있다고 볼 수 있음. 한편 남소성의 위치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점은 남소수(南蘇水)임. 남소수는 『한서』지리지, 남소성은 『진서』에 처음으로 문헌에 등장함. 고대의 성 이름은 강의 이름을 따서 정하는 경우가 많음. 그러므로 남소수는 남소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강으로 추정됨. 『한서』지리지 고구려현조에 주(注)로 ‘요산(遼山)에서 요수(遼水)가 나오고, 서남으로 요대(遼隊)에 이르러 대요수(大遼水)로 들어간다. 또한 남소수가 서북으로 새외를 경유한다’라는 기록이 있음. 이 기사에서 보이는 요수는 혼하이고, 고구려현의 위치는 신빈현 영릉진 남쪽의 한대 고성부근으로 추정할 수 있음. 이로 볼 때, 남소수는 혼하 지류와 한의 고구려현 할경(轄境) 내에서 찾을 수 있음. 그리고 신성·남소·목저를 거쳐 국내성으로 진격하는 기사를 참고해 볼 때, 남소수와 남소성은 무순의 동남지구에서 찾을 수 있음. 즉 남소수는 혼하(요수)의 지류이고 고구려현과 그리 멀지 않으며 무순 동남방향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조건에 부합하는 강은 소자하임. 그렇다면 남소성은 득승보산성(得勝堡山城)으로 볼 수 있음. 목저성의 위치와 관련하여 각 종 역사서를 살펴보면, 신성·남소·목저 순으로 기재되어 있음. 이로 볼 때 목저성은 남소성 동쪽에 있다고 볼 수 있음. 『자치통감』함강(咸康) 8년조에는 ‘고구려에는 남도·북도 2도가 있는데, 북도는 평탄하고, 남도는 험준하다’는 기록이 있고, 호삼성의 주(注)에는 ‘북도는 북치(北置)에서 나아가고, 남도는 남합(南陜)에서 목저성으로 들어간다’라는 기록이 있음. 이로 볼 때 목저 역시 고구려 남도상의 중요한 성이라고 볼 수 있음. 하서촌고성(河西村古城)은 남소성으로 추정되는 득승보산성에서 동남쪽으로 약 15㎞ 떨어져 있다는 점에서 목저성으로 볼 수 있음. 또한 성의 사용연대가 비교적 길다고 볼 수 있는데, 당이 설치한 목저주(木底州)와 발해가 계속해서 사용했다고 하는 문헌기사와도 부합함. 당 건봉(唐 乾封) 원년에 ‘고구려의 연남생이 당에 귀부하려 할 때, 동생인 남건·남산의 공격을 받게 되자 당에 구원을 요청한 바 있는데(『구당서』권119), 이때 당은 설인귀의 군대를 보내어 신성에서 승리한 후, 남소·목저·창암을 점령하고, 남생군(男生軍)을 만났다’고 함. 이 기사들을 볼 때, 창암성 또한 신성도 상에 있고 남소와 목저의 동쪽에 있다고 볼 수 있음. 목기 동쪽 약 25㎞의 영릉진 남쪽에는 후금시기의 비아랍성이 있는데, 성의 내성이 산을 따라 축조하였다는 점에서 고구려산성과 유사함. 성의 서남쪽으로 약 2.5㎞ 떨어진 유수향(楡樹鄕)에서는 많은 고구려적석묘들이 발견됨. 대형묘장이 있는 곳 부근에서는 반드시 대형유적지가 있는 사례를 볼 때, 비아랍성이 고구려 창암성일 가능성이 높음.자연환경 신빈현 영릉진 이도하촌 동남 1㎞ 지점에 위치함(國家文物局, 2009). 영릉진 일대는 요녕 동부산구(東部山區)의 협곡 작은 평지 안에 위치하고 있는데,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소자하 양안에는 좁고 기다란 충적평지가 펼쳐져 있는 등 소자하 일대에서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임. 비아랍성은 바로 작은 평원의 남단에 위치함. 산성 서북쪽에 이도하자촌이 있음. 산성 서쪽 아래로 환인~영릉진 도로가 지나가고 있음. 영릉가의 동남 1㎞, 환인가도(桓仁街道)를 따라가면 온가요성(溫家窯城)이 있음. 성의 서남쪽으로 약 2.5㎞ 떨어진 지점에 유수향(楡樹鄕)이 있는데, 이곳에는 많은 고구려 적석묘들이 분포함. 북쪽으로 4㎞ 떨어진 지점에 혁도아랍성(赫圖阿拉城)이 있고, 다시 북쪽 소자하 건너편에는 신빈~심양 도로가 지나가고 있음. 서북쪽으로 4㎞ 떨어진 이도하자 서안(西岸)에 영릉진고성이 있음. 성 남쪽은 합이살산(哈爾薩山)이 접해 있고, 동쪽으로는 계명산(鷄鳴山)이 접해 있으며, 서쪽으로는 호난합달(呼蘭哈達; 지금의 煙筒山)을 볼 수 있는 등 세 면은 천연병장(天然屏障)으로 둘러싸여 있음(撫順市社會科學院, 199). 동북기슭에는 황토강자하(黃土崗子河; 옛 명칭은 首里口河)가 북쪽으로 흐름. 서쪽에는 이도하(옛 명칭은 夾哈河)가 동북쪽으로 흐름. 이도하는 산성 북쪽 약 2㎞의 지점에서 황토강자하과 합류하고 소자하로 유입됨. 산성의 남쪽~동남쪽 기슭에는 하가하(夏家河; 옛 명칭은 里加河)가 동북쪽으로 흘러 황토강자하로 유입됨(建國大學硏究員, 1939). 비아랍성은 동·남·서 세 면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서북 방면은 시내와 강으로 가로막힌 천혜의 요새지임. 성의 동남쪽은 3개의 높은 봉우리가 있는 산등성이임. 여기에서부터 서북·서·북·동북쪽에 네 줄기의 지맥이 뻗어 있음. 외측의 지맥 두 줄기는 급하고 가파른 반면 내측의 지맥 두 줄기는 완만하고 넓어서 궁전 혹은 주택지가 자리 잡기에 적합함. 각 지맥의 골짜기는 넓어서 부락민의 통로로 이용되고 있음.유물정보 초석(礎石) 1점, 명대 벽돌(明代 磚) 1점, 기와(瓦) 1점, 토기편(土器片) 1점, 와당(瓦當) 1점, 청화자기편(靑花瓷器片) 1점, 자기편(瓷器片) 1점, 백색 절구(白色 臼) 1점, 명대 접시(明代 盘子) 1점참고문헌 · 稲葉岩吉·建國大學, 『興京二道河子舊老城』, 建國大學, 1939 · 稲葉岩吉, 「興京二道河子舊老城」『滿洲史學』 3-2, 1939 · 渡邊三三, 『增訂 撫順史話』, 撫順新報社, 1940 · 高橋匡四郞, 「蘇子河流域に於ける高句麗と後女眞の遺跡」『建國大學硏究院硏究期報』 2, 建國大學硏究院, 1941 · 李鳳民, 「淸入關前都城述略」『潘陽古宮博物館文集』, 1985 · 細谷良夫, 『中國東北部における淸朝の史跡』, 東北大學, 1991 · 撫順市社會科學院, 「佛阿拉城」『撫順地區淸前遺迹考察紀實』, 遼寧仁民出版社, 1994 · 張正巖·王平魯, 「新城道及新城道上諸城考」『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東潮·田中俊明, 『高句麗の歷史と遺跡』, 中央公論社, 1995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肖景全·鄭辰, 「撫順地區高句麗考古的回顧」『東北史地』 2007-2, 2007 · 國家文物局,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 西安地圖出版社, 2009

    • 삼도보동산성(三道堡東山城)

    • 리스트여닫기 온가요서산성; 각이찰아랍성; 하남산성(温家窑西山城; 覺爾察阿拉城; 河南山城) 출토지 요녕성 신빈현 영릉진 온가요둔(遼寧省 新賓縣 永陵鎭 温家窑屯)연대 명, 후금, 청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98무순시박물관(抚顺市博物馆)여행개발과 맞물려 무순시박물관이 발굴조사를 실시함. 발굴을 통해 니질의 홍색 호(壺), 단지, 철제 찰갑편, 철제 화살촉 등이 출토됨.1930년대도변삼삼, 고교광사랑(渡邊三三, 高橋匡四郞)발견함.高橋匡四郞, 1941, 「蘇子河流域に於ける高句麗と後女眞の遺跡」『建國大學硏究院硏究其報』2, 建國大學硏究院 으로 발표함.1990년 초반무순시사회과학원(전파 등)(撫順市社會科學院(傳波 等))혁도아랍성을 중심으로 그 주위의 이전창평지성(二砖廠平地城), 아화락성(阿伙洛城), 영릉후보동산성(永陵後堡东山城), 두도립자성(头道砬子城), 나가보자성(罗家堡子城), 위가보성(魏家堡城), 역마도반성(驛马道班城), 주자산성(珠子山城), 달자영성(达子营城), 두도보성(头道堡城), 삼도보동산성(三道堡東山城), 점장대성(点将臺城), 그리고 온가요서산성(温家窑西山城) 등 10여개의 후금시기의 성(漢, 고구려시기에 축조되어 후금시기에 계속 사용된 성 포함)을 조사함. 이들 성들은 혁도아랍성에서 가까우면 2.5㎞, 멀어도 10㎞ 안에 위치하고 있음.구조특징 산성 내부는 동·남·서 세면이 높은 반면 개활지로 이어지는 북쪽은 비교적 낮음. 산성 북측에서 산성을 바라보면 포곡식 산성임을 확인할 수 있음. 평면은 표주박형이고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음. 성벽은 기복이 있는 산등성이 위에 축조함. 성벽축조와 관련해서 토석벽이라는 기록(張德玉·張正巖·李榮發·單鈴, 1996), 북벽 인공축조구간은 토축이고 그 나머지는 토석혼축이라는 기록(傳波, 1994), 대부분 토석혼축이고 일부는 돌로 쌓았다는 기록(王禹浪·王宏北, 2007), 토축이라는 기록(高橋匡四郞, 1941)이 있음. 또한 흙을 쌓고 그 위에 돌을 쌓는 축조방법이 고이산성 성벽과 유사하다는 기록도 있음(肖景全·鄭辰, 2007). 외성성벽은 자연 산세를 이용하면서 ‘凹’형이 드러남. 내성을 감싸면서 축조되었고, 성벽 길이는 113m임. 외성 북문 서단은 성벽이 없는 평대(平臺)임. 평대는 길이 21m, 바깥높이 2m임. 문 동쪽에는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벽이 있는데 남은 높이는 1.5m임. 북문 동쪽에 남북방향의 벽이 있이 있는데, 북벽 동단의 27m 지점에서 북벽과 만남. 성문 안쪽의 성벽은 반호형(半弧形)인데 벽의 길이는 88m이고, 높이는 2m임. 외측 높이는 7m임. 서벽과 관련하여 북단에서 남단으로 150m 이르는 구간은 외호형(外弧形)이 드러나는데 성벽 안측 높이는 2m, 외벽 높이는 3m, 정상부 너비는 1~1.5m임. 서벽은 전체적으로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음. 서벽 북단에서 남단으로 80m 지점 성벽 바깥에서는 흙을 파서 성벽을 축조한 흔적을 명확하게 볼 수 있음. 남벽은 산등성이 위에 축조되어 있음. 동벽은 산등성이 위에 축조되어 있음. 남아 있는 높이는 1~1.5m임. 내성은 산성 남부의 높은 대지 위에 축조함. 서벽은 반호형(半弧形)임. 성안 동부에는 초재니(草梓泥)의 소토(紅燒土)가 많이 쌓여 있음. 성 바깥 북쪽 구릉 동부에도 소토가 많이 쌓여 있음. 성 안의 ‘U’자형 골짜기는 북문과 연결됨.역사적 의미 산성이 위치한 지세와 성벽 축조방법은 고구려의 특징을 갖추고 있으므로 고구려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됨. 산성은 명·청대에도 계속 사용되었음(王禹浪·王宏北, 2007). 특히 환인지역에 거주하던 건주여진(建州女眞)이 1433년과 1437년 조선의 침략을 받고, 1438년 소자하 방면으로 피신하여 아화락촌 동쪽의 호란합달(呼蘭哈達; 지금의 烟突山) 아래에 거주하였다고 하는데, 이 무렵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음(傳波, 1994). 성곽 규모로 볼 때, 영릉진 일대 전체를 관장하는 핵심성으로 보기는 어렵고, 거점성 주변의 위성산성으로 추정됨. 영릉진 분지에 위치한 영릉진고성·비아랍성, 이들의 북쪽에 위치한 나가보산성(羅家堡山城)·두도립자산성(頭道砬子山城)·삼도보동산성(三道堡東山城), 서쪽에 위치한 온가요산성(溫家窯山城)·아화락성(阿伙洛城) 등의 위치관계와 규모를 고려하면, 온가요산성은 대체로 영릉진고성·비아랍성의 소형위성으로 추정됨(여호규, 1999). 무순시 사회과학원이 불아랍성을 고찰할 때, 지표하 0.3m 지점에서 도자 접시(瓷碟)를 발견하였는데 온가요서산성에서 출토된 청화도자완(靑花瓷碗)과 마찬가지로 바닥에 ‘大明宣德八年’이라는 명문이 있었음. 또한 도자접시(瓷碟锔)에는 철제 못 4개가 있었는데, 아마도 당시에는 진귀하고 희귀한 기물이었기 때문에 깨지면 고쳐서 사용한 흔적으로 볼 수 있음. 그러므로 이 기물을 사용하는 사람은 대호현귀(大户显贵)임(傳波, 1994). 산성은 후금대 육조성(六祖城) 가운데 하나임. 육조성은 혁도아랍성을 중심으로 그 성을 지키기 위해 축조한 건주좌위(建州左衛)의 위성성(衛星城)임. 5개의 성은 혁도아랍성으로 통하는 골짜기(溝谷)의 요충지를 통제하고 있는데, 험준함을 이용하여 쌓았고 수렵 및 농경생활을 영위하는데도 유리함. 또한 각 지역을 차지하면서 성들끼리 서로 호응하면서 지원함으로써 방어력을 더욱 강화하였음. 주위의 그 나머지 10여개의 후금의 성은 ‘六城十二处’의 ‘十二处’가 됨(張德玉·張正巖·李榮發·單鈴, 1996). 위치비정에 대한 견해는 다음과 같음. 佟達(1993)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온가요서산성은 무순·신빈·본계로 통하는 삼거리에 위치하고 있음. 사서를 보면 당군이 ‘남소(南蘇), 목저(木底), 창암(倉巖) 순으로 점령하였다’는 기사가 보임. 남소는 신빈현 상협하향 오룡산성(上夾河鄕 五龍山城), 목저는 목기진(木奇鎭) 동남의 평지성으로 추정됨. 이를 고려하면 온가요서산성이 창암성으로 가장 유력함. 대부분의 학자들은 온가요서산성에 대해서 육조성 가운데 하나로, 청 태조의 증조부 흥조 복만(興祖 福滿)의 장자인 덕세고(德世庫)가 살았다는 각이찰(覺爾察)로 추정함(肖景全·鄭辰, 2007). 高橋匡四郞(1941)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성이 위치한 지점은 『정도만주실록(丁度滿洲實錄)』도기(圖記)에 보이는 각이찰성에 부합되므로 각이찰성으로 추정됨. 한편 실록의 도기(圖記)에는 목성채(木城寨) 뿐만 아니라 다른 성채들을 모두 평지에 그렸고, 그 곁에 산을 그리고 있음. 이것은 성채를 산 위에 그리는 것이 곤란하여 편의적으로 그린 것이거나 성지가 평지와 가까운 작은 대강(臺崗)을 이용하였으므로 평지로 간주해서 그렸을 가능성이 있음. 傳波(1994)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일부 학자들은 온가요서산성에 대해서 각이찰로 추정하고 있음. 성의 규모·구조·특징·방위·거리 등을 고려하면 일리가 있음. 『覺尔察氏谱書』에는 선인(先人)과 태조황제의 원자(院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위치하였다고 기록됨. 온가요서산성은 혁도아랍성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함. 또한 온가요성에서 출토된 명대 관요자완(官窑瓷碗)은 성안 거주자에 대한 신분을 보여주는 것으로, 일반 백성은 아님을 알 수 있음. 복만(福滿)의 여섯 자손은 소자하 유역의 6대 수령으로, 명관요세자(明官窑細瓷)를 사용할 수 있는 신분임. 다만 설명이 되어야 하는 점은 『만주실록』의 시의도(示意圖)를 보면 각이찰성과 그 서부의 산 사이는 가깝지 않고 중간에 비어있는 곳(空地)이 있는데, 산비탈에 축조된 것이 아닌 평지성으로 이해할 수 있음. 만약 이 점이 성립될 수 있다면 각이찰성은 이전창평지성지(二砖廠平地城址)일 가능성도 있음. 축조연대에 대한 견해는 다음과 같음. 佟達(1993)의 견해는 다음과 같음. 온가요서산성은 고구려 창암성으로 추정되는데, 창암성은 당대 이전 문헌에는 보이지 않음. 남소성과 목저성보다는 늦을 것으로 보이는데, 당대 혹은 그 이전으로 추정됨. 肖景全·鄭辰(2007)은 출토된 토기로 보아 성의 축조연대를 고구려 후기로 추정함.자연환경 신빈현 소재지에서 약 23㎞ 떨어진 영릉진 남쪽 온가요둔의 서쪽 산(西山; 각이찰아랍산) 위에 위치함. 산성이 위치한 영릉진 일대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분지이지만, 북쪽의 초창하(草蒼河)·협하구(夾河口), 남쪽의 이도하가 소자하와 합류하면서 비교적 넓은 충적평지를 형성하고 있음. 산성 동북쪽 구릉아래는 온가요둔보(温家窑屯堡)임. 산성 동쪽 구릉아래에는 환인~영릉진 도로가 지나가는데, 신빈 만주족자치현 제2전창(新宾满族自治縣第二轉廠)임. 도로 동쪽의 평지 한복판에는 영릉진고성이 있음. 산성 북쪽 약 500m 떨어진 지점에 소자하가 있고, 소자하 건너편에는 신빈~심양 도로가 동서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음. 영릉대교(永陵大橋)를 통해 소자하를 넘어가면 영릉진임. 동쪽으로 3㎞ 떨어진 지점에 혁도아랍성(赫图阿拉城)이 있음. 산성 동남쪽으로 비아랍성(費阿拉城)이 있음. 산 정상에 서면 서북쪽으로 하원(夏园)과 청영릉(清永陵), 북쪽으로 영릉진시가(永陵镇市街), 동북쪽으로 가화(嘉禾), 동쪽으로 혁도아랍성(老城), 동남쪽으로 비아랍성을 볼 수 있음. 산성은 험한 곳에 위치하며 사방의 교통을 통제할 수 있음. 산성은 동서로 길게 뻗은 연돌산(烟突山) 산줄기의 동북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데, 서북 끝자락에 위치한 아화락촌산성(阿伙洛村山城)과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음. 산성에서 북쪽으로 약 500m 떨어진 지점에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소자하가 있는데, 그 양안에는 좁고 기다란 충적대지가 펼쳐져 있음. 산 동쪽은 비교적 가파른 낭떠러지임. 성 남면은 연돌산 산줄기가 펼쳐져 있어 험준하고 가파름. 서쪽에는 산언덕이 연이어 있는데, 이 산언덕과 연돌산이 서로 접해 있음. 북쪽은 완만한 구릉으로 점차 개활해짐. 전체적으로 동북과 서북방면은 개활지로 이어지는 반면, 서남 방면은 연돌산 산줄기가 천연장벽을 이루고 있음.유물정보 청화도자완(靑花瓷碗) 3점, 호(壺) 1점, 단지(罐) 1점, 철제 찰갑편(鐵札甲片) 1점, 철제 화살촉(鐵鏃) 1점참고문헌 · 渡邊三三, 『增訂 撫順史話』, 撫順新報社, 1938 · 高橋匡四郞, 「蘇子河流域に於ける高句麗と後女眞の遺跡」『建國大學硏究院硏究期報』 2, 建國大學硏究院, 1941 · 佟達, 「關于高句麗南北交通道」『博物館研究』 1993-3, 1993 · 傳波, 「六祖城」『撫順地區清前遺跡考察紀實』, 遼寧人民出版社, 1994 · 張德玉·張张巖·李榮發·單鈴, 「“寧古塔”與六祖城考辨」『遼海文物學刊』 1996-1, 1996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2007 · 肖景全·鄭辰, 「撫順地區高句麗考古的回顧」『東北史地』 2007-2, 2007

    • 나가보자성(羅家堡子城)

    • 리스트여닫기 두도립자산성(頭道砬子山城) 출토지 요녕성 신빈현 영릉진 두도립자촌(遼寧省 新賓縣 永陵镇 頭道砬子村)연대 명, 후금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90년대 초반무순시사회과학원(전파 등)(撫順市社會科學院(傳波 等))혁도아랍성(赫圖阿拉城)을 중심으로 그 주위의 이전창평지성(二砖廠平地城), 온가요서산성(温家窑西山城), 아화락성(阿伙洛城), 영릉후보동산성(永陵後堡东山城), 나가보자성(罗家堡子城), 위가보성(魏家堡城), 역마도반성(驛马道班城), 주자산성(珠子山城), 달자영성(达子营城), 두도보성(头道堡城), 삼도보동산성(三道堡東山城), 점장대성(点将臺城), 그리고 두도립자성(头道砬子城) 등 10여개의 후금시기의 성(漢, 고구려시기에 축조되어 후금시기에 계속 사용된 성 포함)을 조사함. 이들 성들은 혁도아랍성에서 가까우면 2.5㎞, 멀어도 10㎞ 안에 위치하고 있음.구조특징 국가문물국(國家文物局)은 성이 평지에 위치한다고 기록함(國家文物局, 2009). 성에 대해 현지주민들 사이에는 ‘성자지(城子地)’로 전해 내려오고 있음. 성은 정방형에 가깝고, 성벽은 토석을 다져서 축조함. 성 안에는 조씨(趙氏) 무덤 2기가 있음. 성은 현재 채소밭으로 개간되어 있음.역사적 의미 산성은 고구려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목저(木底)에서 환도(丸都)로 가는 길에 위치한 중요한 산성으로 추정됨(王綿厚·李建才, 1990). 후금대에도 건주여진(建州女眞)이 계속 사용한 것으로 추정됨(傳波, 1994). 한편 산성에서 고구려유물이 발견되지 않았고, 성의 입지선택과 성벽구조 모두 고구려와 다르기 때문에 고구려산성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도 있음(肖景全·鄭辰, 2007). 영릉진 분지에 위치한 영릉진고성(永陵鎭古城)·비아랍성(費阿拉城), 이들의 북쪽에 위치한 나가보산성(羅家堡山城)·두도립자산성(頭道砬子山城)·삼도보동산성(三道堡東山城), 서쪽에 위치한 온가요산성(溫家窯山城)·아화락산성(阿伙洛村山城) 등의 위치관계와 규모를 고려하면, 두도립자산성(頭道砬子山城)은 대체로 영릉진고성·비아랍성의 소형 위성으로 추정됨. 특히 초창북구 연안이 오래전부터 신빈~청원 분수령을 넘나드는 통로였고, 현재 영릉진~청원현 지방도로가 개설된 것으로 보아 대체로 청원현 방면에서 영릉진 분지로 진공하는 적군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 보이고, 남쪽의 나가보산성과는 상호 보완관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됨(여호규, 1999). 王綿厚(2002)은 두도립자산성이 고구려 창암성(蒼巖城)일 가능성이 있다고 봄. 『구당서』와 『신당서』의 기록을 보면 창암성은 항상 신성(新城) 및 목저(木底)와 연관되어 있음. 『구당서』권 111 설인귀전의 “(高麗)男生弟南建率國人遂擊同善等, 詔仁貴統兵爲後援 …… 同善等至新城 夜為賊所襲。仁貴領驍勇赴救, 斬首數百級. …… 拔其南蘇·木底·蒼巖三城, 始與男生相會”라는 기록을 보면, 설인귀(薛仁貴) 등은 먼저 신성에 이른 다음 연이어 남소(南蘇)·목저(木底)·창암(蒼巖)을 정벌하고 있음. 이로 볼 때, 창암성은 요하를 건너 신성과 목저성을 지나서 위치한 고구려 남도(南道)의 중요 산성으로 볼 수 있음. 기사를 볼 때, 창암은 신성과 목저성 동쪽에서 찾아야 하는데, 신성은 무순의 고이산성(高爾山城), 목저성은 신빈의 오룡산성(五龍山城)으로 추정됨. 두도립자산성은 이들 성들과 동일교통로 상에 있고, 목저성(오룡산성)에서 동쪽 30㎞ 소자하 북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토군인 이도자한성(二道子漢城)에 가까운 중진(重鎭)이며, 또한 고구려 남도상의 기점임.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보면 두도립자산성이 창암성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음.자연환경 신빈현에서 서쪽으로 23㎞ 떨어진 영릉진 북쪽 초창북구(草苍北沟)의 두도립자촌 안에 위치함. 영릉진 일대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분지이지만, 북쪽의 초창하(草蒼河)·협하구(夾河口), 남쪽의 이도하(二道河)가 소자하(蘇子河)와 합류하면서 비교적 넓은 충적평지를 형성하고 있음. 산성의 동남쪽으로 펼쳐지는 초창북구는 영릉진 북쪽의 큰 골짜기(大溝)로, 초창하를 따라 남북으로 좁고 길게 자리 잡고 있는데 초창하가 충적되어 형성되었음. 초창하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소자하로 유입됨. 초창북구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 박가보자촌(朴家堡子村)과 나가보촌(羅家堡村)이 차례로 나오고, 나가보촌 뒷산에는 나가보산성(羅家堡山城)이 있음. 두도립자촌에서 남쪽으로 5㎞ 떨어진 지점에 영릉이 있음. 산성에서 초창북구를 따라 남쪽으로 6㎞ 정도(王綿厚는 5㎞라고 기록함(王綿厚·李建才, 1990; 王綿厚, 2002)) 가면 소자하가 나오는데 소자하 남안에는 영릉진고성(永陵鎭古城), 동남쪽에는 비아랍성(費阿拉城)이 있음. 두도립자촌에서 동남쪽으로 10㎞ 떨어진 지점에 혁도아랍성(赫图阿拉城)이 있음. 서북쪽으로 40㎞ 떨어진 지점에 오룡산성(五龍山城)이 있음. 영릉진을 기점으로 하는 초창북구 연안의 지방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가면 신빈~청원 분수령을 넘어 청원현(淸原縣)으로 들어갈 수 있음. 산성에서 초창북구를 따라 남쪽으로 6㎞ 정도 가면 소자하가 있는데 소자하 중류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음. 동남쪽으로 30㎞ 떨어진 지점에 환인 경내 고구려시대 횡도하자애구(橫道河子隘口)가 있음. 횡도하자애구는 신빈현 동남 소자하 지류 차로구(岔路溝)와 환인현 혼강 지류 횡도하자(橫道河子) 사이의 교통 협구(陜口)에 위치함. 그 방위는 대체로 동경 125° 북위 41°30′임. 이 협곡의 입구(隘口)와 그 서쪽에 위치한 해발 1,041m의 나권구 주봉우리)羅圈溝主峰)과의 거리는 불과 5㎞임. 예전부터 소자하 상류 차로구(岔路溝)의 산 사이의 길은 소자하 하곡(하곡)에서 혼강 하곡으로 진입하는 중요교통선이었음(王綿厚·李建才, 1990). 두도립자촌 북쪽에는 용강산(龍崗山)이 있고, 동쪽과 서쪽 모두 룡강산의 지맥이 뻗어 있음.유물정보 청화자기편(靑花瓷器片) 1점참고문헌 · 王綿厚·李建才, 『東北古代交通』, 瀋陽出版社, 1990 · 傳波, 「六祖城」『撫順地區清前遺跡考察紀實』, 遼寧人民出版社, 1994 ·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2007 · 肖景全·鄭辰, 「撫順地區高句麗考古的回顧」『東北史地』 2007-2, 2007

    • 리스트여닫기 아화락성(阿伙洛城) 출토지 요녕성 신빈현 영릉진 하방촌 아화락촌(遼寧省 新賓縣 永陵鎭 下房村 阿伙洛村)연대 명대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30년대도변삼삼, 고교광사랑(渡邊三三, 高橋匡四郞)高橋匡四郞, 1941, 「蘇子河流域に於ける高句麗と後女眞の遺跡」『建國大學硏究院硏究其報』2, 建國大學硏究院 으로 발표함.1990년 초반무순시사회과학원(전파 등)(撫順市社會科學院(傳波 等))혁도아랍성(赫圖阿拉城)을 중심으로 그 주위의 이전창평지성(二磚廠平地城), 온가요서산성(温家窑西山城), 영릉후보동산성(永陵後堡東山城), 두도립자성(頭道砬子城), 나가보자성(羅家堡子城), 위가보성(魏家堡城), 역마도반성(驛馬道班城), 주자산성(珠子山城), 달자영성(達子营城), 두도보성(頭道堡城), 삼도보동산성(三道堡東山城), 점장대성(点將臺城), 그리고 아화락성(阿伙洛城) 등 10여개의 후금시기의 성(漢, 고구려시기에 축조되어 후금시기에 계속 사용된 성 포함)을 조사함. 이들 성들은 혁도아랍성에서 가까우면 2.5㎞, 멀어도 10㎞ 안에 위치하고 있음.구조특징 아화락성(阿伙洛城)은 사람들에 의한 훼손이 적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함. 성은 동부가 높고 서부가 낮음. 성의 평면은 동서가 길고 남북이 좁은 타원형임. 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나눌 수 있음(傳波, 1994; 여호규, 1999; 王禹浪·王宏北, 2007). 아화락성은 소자하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북부는 비교적 개활한데, 개활한 땅의 돌출부에 위치함. 동쪽과 서쪽은 모두 이어진 산들로 막혀 있음. 한편 네 주위에는 봉화(烽火)·돈대(墩臺)가 없음. 성은 단지 북쪽으로 소자하도(蘇子河道)를 볼 수 있을 뿐임. 외성의 성벽은 상태가 비교적 양호함. 토석을 섞어서 축조함(土石杂筑). 현재 높이는 1~3m임. 내성의 평대(平臺)는 상하 2층으로 이루어져 있음. 상대(上臺)는 길이 20m, 너비 15m임. 상대와 하대의 구릉 길이는 11m임. 정상 중심부에는 지역주민들이 보물을 찾는다고 파내면서 구덩이가 형성됨.역사적 의미 성은 고구려시기에 축조되어 명~청 사이의 후금여진(後金女眞)이 중수한 후 계속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됨(王禹浪·王宏北, 2007). 특히 환인지역에 거주하던 건주여진(建州女眞)이 1433년과 1437년 조선의 침략을 받고 1438년 소자하 방면으로 피신하여 아화락촌 동쪽의 호란합달(呼蘭哈達; 지금의 烟突山) 아래에 거주하였다고 하는데, 이 무렵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음(高橋匡四郞, 1941). 한편 아화락성에 대하여 고구려유물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성의 입지선택과 성벽구조 모두 전형적이지 않기 때문에 고구려산성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도 있음(肖景全·鄭辰, 2007). 영릉진 분지에 위치한 영릉진고성·비아랍성, 이들의 북쪽에 위치한 나가보산성(羅家堡山城)·두도립자산성(頭道砬子山城)·삼도보동산성(三道堡東山城), 서쪽에 위치한 온가요서산성(溫家窯西山城)·아화락성(阿伙洛城) 등의 위치관계와 규모를 고려하면, 아화락성은 대체로 영릉진고성·비아랍성의 소형 위성으로 추정됨. 특히 소자하 하류방면에서 영릉진 분지로 진입하던 적군의 동향을 관찰하던 초소의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추정됨(여호규, 1999). 위치비정에 관한 견해는 다음과 같음. 張德玉·張正巖·李榮發·單鈴(1996)는 아화락성을 후금대 육조성(六祖城) 가운데 하나로 추정함. 육조성은 혁도아랍성(赫图阿拉城)을 중심으로 그 성을 지키기 위해 축조한 건주좌위(建州左衛)의 위성성(衛星城)임. 5개의 성은 혁도아랍성으로 통하는 골짜기(溝谷)의 요충지를 통제하고 있는데, 험준함을 이용하여 쌓았고 수렵 및 농경생활을 영위하는데도 유리함. 또한 각 지역을 차지하면서 성들끼리 서로 호응 및 지원함으로써 방어력을 더욱 강화하였음. 주위의 나머지 10여개의 후금 성들은 ‘六城十二处’의 ‘十二处’가 됨. 高橋匡四郞(1941)은 성의 위치로 보아 실록 도기(圖記)에 보이는 아합화락성채(阿合伙洛城寨)에 부합된다는 점에서 육조의 한 사람, 즉 흥조(興祖)의 차자(次子) 유천(劉闡)의 성채(城寨)인 아합화락성채(阿合伙洛城寨)로 추정함. 지금 명칭인 아화락(阿伙洛)이란 말도 아합화락(阿哈伙洛)에서 바뀐 것으로 볼 수 있음. 傳波(1994)는 육조성 가운데 복만(福滿)의 차자 유천(劉闡)이 살았던 아합화락성으로 추정함. 육조는 청태조 노이합적(努尔哈赤)의 증조 복만에게서 태어난 여섯 아들인데, “여섯 아들이 여섯 곳에 각각 성지(城池)를 세워 육왕을 칭하였고, 곧 육조이다(『靑太祖武皇帝實錄』권1, 2項)”라고 함. 육조가 살았던 여섯 개의 성채 모두 소자하 상류의 영릉일대에 위치하고 있음. 유천이 살았던 곳이 아합화락성이라는 점에서 성의 명칭(城名)과 지명(地名)이 서로 부합하고 있음. 혁도아랍성까지의 거리가 10㎞ 정도라는 점에서도 부합됨.자연환경 신빈현 영릉진 하방촌 아화락촌 남측 봉황산(鳳惶山) 서단(西端)의 산허리 대지 위에 위치함. 산성이 위치한 영릉진 일대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분지이지만 북쪽의 초창하(草蒼河)·협하구(夾河溝)와 남쪽의 이도하(二道河)가 소자하(蘇子河)와 합류하면서 넓은 충적평지를 형성하고 있음. 북쪽에서 0.5㎞ 떨어진 지점에 아화락촌(阿伙洛村)이 있음. 아화락촌의 원래 이름은 아합화락(阿哈伙洛)임. 아합화락은 만주어인데, 한어(漢語)로 ‘노예산구(奴隶山溝)’ 혹은 ‘궁산구(窮山溝)’를 의미함. 아화락촌 남쪽은 대보구(臺寶沟)이고, 골짜기 바깥 서쪽 산 아래는 하방자촌(下房子村)인데, 하방자촌에서 아화락촌까지 거리는 1㎞임. 대보구의 작은 시내는 두 촌 사이에서 북쪽으로 흘러 소자하로 유입됨. 아화락촌에서 북쪽으로 1.5㎞ 떨어진 소자하 건너편에는 신빈~심梁 간 도로가 동서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고, 이 도로를 따라 10㎞ 정도 가면 영릉진 시가지가 나옴. 동쪽으로 10㎞ 떨어진 지점에 혁도아랍성(赫图阿拉城)이 있음. 성에서 1.5㎞ 떨어진 지점에 소자하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고, 그 양안에는 좁고 기다란 충적대지가 펼쳐져 있음. 사방에 골짜기를 끼고 있음. 산성 동쪽으로는 연돌산(烟突山) 북사면의 구릉지와 소자하 남안의 충적평야가 펼쳐지며, 동남쪽 산등성이를 따라가면 연돌산 정상이 나옴. 산성은 동서로 길께 뻗은 연돌산 산줄기의 서북단에 자리 잡고 있는데, 동북단의 온가요산성(溫家窯山城)과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음. 그 동쪽으로 환인~영릉진고성, 소자하 지류인 이도하(二道河)가 있음. 서쪽 대보구 골짜기 건너편에는 험준한 산줄기가 계속 이어지고 있음. 성의 동·서·남 세 방면은 연돌산 산줄기가 천연장벽을 이루고 있음. 오직 북문을 통해 소자하 유역으로 진입한 후 하곡(河谷)을 따라 소자하통도(蘇子河通道)로 진입할 수 있음.유물정보 청화자기편(青花瓷片) 1점참고문헌 · 高橋匡四郞, 「蘇子河流域に於ける高句麗と後女眞の遺跡」『建國大學硏究院硏究期報』 2, 建國大學硏究院, 1941 · 傳波, 「六祖城」『撫順地區清前遺跡考察紀實』, 遼寧人民出版社, 1994 · 張德玉·張张巖·李榮發·單鈴, 「“寧古塔”與六祖城考辨」『遼海文物學刊』 1996-1, 1996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2007 · 肖景全·鄭辰, 「撫順地區高句麗考古的回顧」『東北史地』 2007-2, 2007 · 國家文物局,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 西安地圖出版社, 2009

    • 리스트여닫기 신빈 왕청문진 용두산 석개묘(新賓 旺淸門鎭 龍頭山 石蓋墓) 출토지왕청문촌 용두산 산등성이연대서한 중 후기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98년 발견· 旺淸門鎭龍頭山에서 석개묘 1기(XWLM1)을 발견2002년 5월· 조사 기관 : 무순시박물관고고대· 조사 참가자 : 초경전(肖景全), 장파(張波), 이영발(李榮發), 오곤(吳坤), 동해(童海)· 5월 5일 무순시박물관고고대가 新賓縣紅廟子鄕흑구산성에서 고고조사를 실시할 때 왕청문 용두산 석개묘(XWLM1)를 고찰하면서 무덤이 도굴당한 것을 발견함.· 이후 부근에서 2기의 석개묘(XWLM2, XWLM3)를 발견함. M2는 교란되어 묘혈 한쪽이 파여졌고, 개석은 열려 세워져 있었음.· 석개묘가 계속해서 파괴당하지 않도록 고고대는 3기의 묘장에 대해 구제성 정리를 실시함. 정리공작은 반(半) 개월이 지속되었음.역사적 의미용두산 석개묘는 명확한 표지유물이 발굴되지 않았으나, 대체로 서한(전한) 중후기의 일반무덤으로 파악된다. 유적이 위치한 왕청문진 지역은 동쪽으로 길림성 통화현과 인접해있으며, 남쪽으로는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인 환인이 약 40km거리에 있다. 지리적으로만 보자면 해당 지역은 고구려 건국초, 비교적 빠른 시점에 고구려의 세력하에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도 왕청문진의 서쪽 4km 지점에는 동강연 조선족 촌이 있고, 부이강을 따라서 조선족 자치촌들이 존재한다. 또 10km 지점에는 고려가(高麗街)등, 고구려의 명칭을 사용하는 지명들이 다수 존재하고 있다. 다만 해당유적은 이보다 이른 시기에 조영된 것으로 파악되지만, 고구려인 구성의 지역적 기반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파악된다.자연환경왕청문진은 부이강이 'ㄷ'자 형태로 굽어 흐르는 만곡지점 자연 퇴적평지이다. 일대의 부이강 주변은 모두 산으로 둘러쌓여 있어서, 강을 따라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유적은 왕청문진 서쪽의 왕청하와 부이강이 합류하는 지점 동쪽 강변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유물정보1998년 석개묘(덮개 돌 무덤) 1기를 발견하였고, 무순시 박물관 고고대가 2002년 5월 고고조사를 시행하여 같은 유형의 무덤 2기를 추가 조사하였다. 3기의 무덤은 순서대로 1-3호묘라 명명하였다. 1호묘는 이미 도굴당한 상태였으며, 2호묘의 덮개돌은 부근에 세워져 있고 무덤은 상당부분 파괴되어 있었다. 부장품의 수습과 정리작업이 진행되었으며 2010년 요녕고고문집에 보고서를 수록하였다.참고문헌· 李新全, 2008, 「高句麗早期遺存及其起源硏究」, 吉林大博士論文· 華玉冰, 2008, 「中國東北地區石棚硏究」, 吉林大博士論文· 肖景全, 2010, 「新賓王淸門鎭龍頭山石蓋墓」『遼寧考古文集(二)』, 科學出版社

    • 신빈 산성구문 고분군(新賓 山城溝門 古墳群)

    • 신빈 후대자 고분군(新賓 後臺子 古墳群)

    • 신빈 후산 고분군(新賓 後山 古墳群)

    • 신빈 소황구 고분군(新賓 小荒溝 古墳群)

    • 신빈 우가촌 고분군(新賓 于家村 古墳群)

    • 신빈 석묘자구 고분군(新賓 石廟子溝 古墳群)

    • 신빈 도독 고분군(新賓 都督 古墳群)

    • 신빈 석인구 고분군(新賓 石人溝[馬家堡子] 古墳群)

    • 신빈 장경 고분(新賓 章京 古墳)

    • 신빈 하만자 고분군(新賓 河灣子 古墳群)

    • 신빈 요가산 고분(新賓 姚家山 古墳)

    • 신빈 남대지 고분(新賓 南大地 古墳)

    • 신빈 황강산성(新賓 黃崗山城)

  • 리스트여닫기 청원현(清原縣)

    • 리스트여닫기 쌍립산성; 영액문산성; 장춘둔산성; 산성자산성; 성자산산성(雙砬山城 ; 英額門山城; 長春屯山城; ... 출토지 청원현 영액문진(향) 동쪽 장춘둔촌(淸原縣 英額門鎭(鄕) 東側 長春屯村)연대 晋 이후(陳大爲 1982). 고구려 말기(李殿福 1994). 晋~唐 대(溫秀榮⋅張波 1996)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63청원현 영액문공사(淸原縣英額門公社)청원현 영액문공사가 변문(邊門)유적을 조사할 때, 장춘둔대대(長春屯大隊)를 방문하였는데, 현지주민이 산성의 존재를 알려 주면서 발견함.1963요녕성박물관(遼寧省博物館)요녕성 박물관의 진대위(陳大爲)가 조사함. 산성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면서 유물들을 발견하고, 나중에 조사내용을 발표함(陳大爲,1982, 「淸原縣英額門山城子調査記」『遼寧文物』1982-3).구조특징 산성 정상부는 비교적 평탄함. 성의 동, 남, 북 세면은 가파른 절벽이라 오르기가 힘듦. 서면의 남북 두 구릉은 비교적 완만한데, 서문으로 내려 갈 수 있는 작은 길이 있음. 성 북쪽은 높은 곳에서 아래로 내려다 볼 수 있는 지형인데, 지세가 매우 험준함. 평면은 서쪽이 넓고 동쪽이 좁은 표주박형태에 가까움(陳大爲, 1982; 馮永謙, 1997). 왕면후(王綿厚)는 불규칙형이라고 기록함(王綿厚, 2002). 성의 둘레에 대하여 동서길이 220m, 남북너비 약 100m라는 기록(陳大爲, 1982; 李殿福, 1994; 여호규, 1999; 王綿厚, 2002; 王禹浪·王宏北, 2007; 國家文物局, 2009), 500m라는 기록(魏存成, 2002), 600여m라는 기록(孫進己·馮永謙, 1989; 東潮·田中俊明, 1995; 馮永謙, 1997)이 있음. 성벽은 기복이 있는 산세를 따라, 산등성이 위(낭떠러지 가장자리)에 축조하였음. 성벽에 대해 흙으로 축조하였다는 기록(陳大爲, 1982·1995; 孫進己·馮永謙, 1989; 李殿福, 1994; 東潮·田中俊明, 1995; 馮永謙, 1997; 王綿厚, 2002; 魏存成, 2002)과 土石으로 축조하였다는 기록(溫秀榮·張波, 1996; 國家文物局, 2009)이 있음. 가장 높은 성벽은 2.5m에 달함. 성벽 기단너비는 4~6m임. 남문, 서문 등 2개의 문이 있음. 산성 서문 근처 은폐된 곳에 비교적 작은 문이 있음. 일반적인 통로이기보다는 기습공격이나 퇴각시에 사용된 문으로 추정됨(여호규, 1999). 성 남면 구릉의 과수원에서 땅을 팠을 때, 유물들이 일괄적으로 출토되었음. 벽돌과 기와는 매우 적게 보임.역사적 의미 성 바깥 남쪽 구릉 아래에서 많은 철기가 출토되었는데, 그 형태가 무순 고이산성에서 출토된 유물과 유사함(王綿厚, 2002). 또한 성의 입지와 형태를 볼 때, 고구려의 산성으로 볼 수 있음(陳大爲, 1982). 산성은 요하 지류인 시하(柴河)나 청하(淸河)의 상류를 거슬러 혼하방면으로 넘어오는 적군을 방어하는 기능을 수행한 것으로 추정됨(여호규, 1999). 산성에 대해 『資治通鑑』卷97에 기록된 남, 북도, 즉 요동에서 고구려 국내성으로 들어가는 두 갈래의 길 가운데, 북도에 위치한 산성으로 보기도 함(佟達, 1993). 성의 면적은 그리 크지 않고, 내부면적도 한계가 있으며, 수원도 부족하다는 점에서 보조적인 성격의 소형 산성으로 볼 수 있음. 그렇다면 대형 산성의 위성(衛星)으로 추정되고 있는데(陳大爲, 1982), 무순 고이산성과 유하(柳河) 나통산성(羅通山城)의 위성으로 보기도 함(王綿厚, 2002). 축조시기에 대해선 다양한 견해가 있음. 陳大爲(1982)의 견해. 출토된 철제 보습은 고이산성에서 출토된 유물과 거의 비슷함. 이로 볼 때 축조시기는 늦어도 진(晋) 이후로 추정됨. 李殿福(1994)의 견해. 성 안에서 출토된 금동장식, 철제 낫, 보습, 화살촉 등은 고이산성에서 출토된 유물과 매우 유사함. 성의 구조 및 구축방법을 볼 때, 고구려 말기로 추정됨. 溫秀榮·張波(1996)의 견해. 고구려 초기산성은 대부분 가파른 절벽을 천연성벽으로 삼았음. 인공벽이 가파른 절벽에 축조된 경우는 드물게 보이고, 주로 결구(缺口)를 막거나 높이가 낮은 산등성이에 축조함. 인공벽의 높이는 3~6m로 높음. 성벽건축재는 주로 쐐기형 돌로 외벽을 구축하였고, 안에는 잡석을 채웠음. 성문옹성의 평면은 대부분 장방형이고, 각요대(角瞭臺)는 명확히 구분됨. 유물은 극히 적게 보이는데, 모래혼입 홍갈색 토기편이 출토되기는 하나, 기와류는 보이지 않음. 그리고 생활용기 등이 출토되기도 함. 이로 볼 때, 태자성 내성(太子城 內城), 흑구산성(黑溝山城), 전수호산성(轉水湖山城), 삼송산성(杉松山城) 등이 초기산성에 속함. 고구려 중기산성의 특징을 살펴보면, 산등성이와 초벽장 위에 일률적으로 돌로 성벽을 축조하였음. 일반적으로 저지대는 성벽을 높게 쌓았음. 반면 초벽과 절벽에는 높이 약 1~1.5m의 낮은 벽을 축조하였는데, 그 기능은 성가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음. 성문은 대부분 안으로 오므라드는 U형 옹문임. 성벽건축재는 쐐기형 돌과 잡석이 대부분을 차지함. 외벽은 초기산성의 외벽과 달리 정연함. 또한 건축재 가운데 쐐기형 돌이 발전한 단조석(短條石)이 출현함. 다만 더욱 정교하게 가공된 두대미세(頭大尾細)의 쐐기형 돌은 여전히 남아 있음. 성에서 출토된 유물은 초기산성보다 풍부함. 수키와, 암키와, 녹색유약이 발라진 자기편, 철촉, 분(盆), 반(盤), 옹, 단지 등 회색토기편 등이 출토됨. 이 시기 연대는 위진(魏晋) 아래임. 오룡산성(五龍山城)과 태자성 외성이 중기산성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음. 고구려 후기산성은 산등성이를 따라 토벽 혹은 토석혼축벽을 쌓았음. 문호(門戶) 혹은 방어취약 부분에는 흙을 다진 성벽을 크고 높게 쌓았고, 석축벽은 볼 수 없음. 각망대(角望臺)는 일률적으로 흙을 다져서 축조한 봉화대로 변화함. 출토유물은 초기와 중기보다 매우 풍부함. 고이산성과 쌍립산성(雙立山城)이 이 시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진(晋)~당(唐)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됨. 孫進己·馮永謙(1989)의 위치 비정. 『晉書』載記 9卷에는 ‘皝 …… 率勁兵四萬人, 入自南陜, 伐高句麗, 又使翰及子垂爲前鋒. 遣长史王寓等勒众萬五千, 从北置而进。高句丽王钊谓燕军之从北路也, 乃遣其弟武统精锐五萬距以北, 躬率弱卒以防南陜’이라는 기록, 『資治通鑑』卷 97에는 ‘將擊高句麗 高句麗有二道 其北道平阔, 南道险狭’이라는 기록, 호삼성(胡三省)의 주(注)에는 ‘北道從北置而進, 南道从南陕入木底城’이라는 기록이 있음. 이상의 기록을 볼 때 북치(北置)는 모용부(慕容部)가 고구려를 공격했던 북도 상에 있으므로 무순 동쪽 혼하유역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바로 쌍립산성(雙砬山城)이 북치성(北置城)으로 추정됨.자연환경 청원현 영액문진(향) 동쪽 장춘둔촌 서쪽 1.5㎞ 지점의 성자산(산성자산) 위에 위치함. 산성 서북쪽에 심양~길림시 간 철도가 지나가고 있음. 산의 남쪽 구릉 아래는 청원~해룡(海龍)간 도로가 지나가고 있음. 동쪽으로 약 4㎞ 떨어진 지점에 영액문진(향)이 있음. 산성 정상부에 올라가면 동, 남, 북 세 면은 먼 곳까지 선명하게 보임. 동쪽으로는 장춘둔(長春屯)과 멀리 영액문공사(英額門公社)를 볼 수 있음. 북쪽으로는 혼하 하곡(河谷)과 그 맞은 편의 소오성구둔(小五城溝屯)을 볼 수 있음. 동북쪽으로는 구릉지대에 위치한 북보촌(北堡村)이 보이는데, 산성과의 거리는 약 1.5~2㎞임. 산성은 혼하 상류의 좌안(남안)에 위치함. 혼하 상류 남부 양안(兩岸)에는 용강산맥(龍崗山脈)의 서북 지맥과 길림 합달령산맥(哈達嶺山脈)의 동남 지맥이 가파른 산줄기를 이루는데, 서로 마주하면서 동서 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음. 혼하가 두 산줄기의 골짜기를 따라 서쪽으로 흘러가면서 좁고 기다란 하곡평지를 형성하고 있음.유물정보 金銅製 梅花形 板(금동제 매화형 판) 1점, 철제장식판(鐵製裝飾板) 7점, 철제화살촉(鐵鏃) 2점, 철제 쌍방울(雙鈴佩) 1점, 철제 낫(鐵鎌) 1점, 철제 보습(鐵耜) 1점참고문헌 · 陳大爲, 「淸原縣英額門山城子調査記」『遼寧文物』 1982-3, 1982 · 孫進己·馮永謙, 『東北歷史地理』 (二), 黑龍江人民出版社, 1989 · 佟達, 「關于高句麗南北交通道」『博物館研究』 1993-3, 1993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東潮·田中俊明, 『高句麗の歷史と遺跡』, 中央公論社, 1995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再探」『北方文物』 1995-3, 1995 · 溫秀榮·張波, 「關于撫順地區的高句麗山城」『博物館研究』 1996-1, 1996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高句麗渤海硏究集成』 高句麗 卷(三), 哈爾濱出版社, 1997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魏存成, 『高句麗遺跡』, 文物出版社, 2002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2007 · 肖景全·鄭辰, 「撫順地區高句麗考古的回顧」『東北史地』 2007-2, 2007 · 國家文物局,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上·下), 西安地圖出版社, 2009

    • 장가구산산성(張家溝山山城)

    • 서대산산성(西大山山城)

    • 리스트여닫기 청원 남산자산성(淸原 南山子山城) 출토지성내연대戰國~漢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4년· 南山子山城이 발견됨.2000년대초경전(肖景全), 정진(鄭辰)· 南山子山城의 성격을 알기 위해 여러 차례 조사를 진행하여, 토기 등 유물을 발견함.구조특징남산성산성, 남산성이라고도 부르며 평지에서 홀로 솟은 산 위에 위치함. 산 정상은 비교적 평탄하고 성곽의 가장자리는 현무암 절벽. 동쪽 구릉이 비교적 완만하여 산 아래로 내려 갈 수 있고 성 북쪽은 산세가 험함.역사적 의미남산자산성은 전국~서한시기에 처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됨. 산성은 요동지역 철기시대 토착문화 유형의 초기 형태로, 당시 요동지역의 정치, 군사, 문화와 고구려 산성의 기원 및 특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함. 산성에서 고구려계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고, 고구려의 강변 포곡식 산성과 달리 남북방향의 산꼭대기 평탄지에 쌓은 것으로 보아 고구려 성의 특징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 이를 통해 고구려 산성이 아닌 지역토착민족이 축조한 산성으로 추정하거나, 고구려 말기에 등장하는 고구려 蒼巖城으로 추정되고 있음.자연환경청원현에서 동쪽으로 30km 떨어진 南山城子鄕 山城子村 東山 위에 있고, 산성은 柳河 상류에 위치함.유물정보전형적인 戰國~漢代의 철제 농기구와 모래혼입 토기가 출토.참고문헌· 孫進己·馮永謙, 1989, 『東北歷史地理』2, 黑龍江人民出版社· 淸原縣志办, 1991, 『淸原縣志』· 佟達, 1993, 「關于高句麗南北交通道」『博物館硏究』1993-3· 張志立, 1994, 「高句麗南北道和有關城址的考證」『高句麗渤海硏究集成』高句麗 卷三· 東潮·田中俊明, 1995, 『高句麗の歷史と遺跡』, 中央公論社· 陈大为, 1995, 「遼寧高句麗山城再探」『北方文物』1995-3· 馮永謙, 1997, 「高句麗城址輯要」『高句麗渤海硏究集成』高句麗 卷3, 哈爾濱出版社· 王綿厚, 2002,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魏存成, 2002, 『高句麗遺迹』, 文物出版社· 肖景全·鄭辰, 2007, 「抚顺地区高句丽考古的回顾」『東北史地』2007-2· 撫順日報 2008년 9월 2일자 기사· 魏存成, 2011, 「中國境內發現的高句麗山城」『社會科學戰線』2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