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성(牧羊城)
출토지
요녕성 대련시 여순구 철산진 조가촌, 유가촌(遼寧省 大連市 旅順口 鐵山鎭 勺家村, 劉家村)
연대
전국시대~고구려(~요-금대)
조사내용
연도 | 조사기관 | 조사현황 |
1928 | 9월에 日本東亞考古學會와 關東廳博物館(현재 여순박물관의 전신)이 공동으로 고고발굴을 진행함. 이 유적지에서 漢, 고구려, 요, 금 시대의 유물을 약간 발견하였음. 濱田耕作(京都大學), 水野淸一(京都大學), 島田貞彦(京都大學), 原田淑人(東京大學), 八番一郞(東京大學), 內藤寬(關東廳博物館), 森修(關東廳博物館), 庄嚴(北京大學)이 참가하였고, 『牧羊』(1931년)을 출판함. | |
1979 | 대련시 인민정부는 목양성지를 市級 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함. | |
1988 | 요녕성 인민정부는 이 유적지의 역사적 가치에 근거해 省級 문물보호단위로 승격시킴. | |
2006 | 2월 13일에 조사함. 성의 형태는 장방형, 동서 너비 98m, 남북 길이 133m, 면적 1,842m²임. 성벽은 이미 무너져 있었는데 담장(城墻) 내의 토층 속에서 층층히 다진 흔적이 확인됨. 판축토성(夯土築城)으로 바닥부 기초는 돌로 축성함. 성벽의 현존 높이는 지면에서 약 2-3m이며, 잔존 길이는 10여m임. 북면에 너비 12m의 缺口가 있는데 성문으로 추정됨. 목양성에 대해 일부 학자는 한대 답씨현성(漢代 沓氏縣城)으로 추정하기도 함. 劉美晶, 2007, 「遼東半島第一城-旅順牧羊城城址」『東北史地』2007-3에 발표됨. 성문물보호단위(省文物保護單位)로 지정됨. |
구조특징
성의 형태는 장방형임(2006년 조사내용).
성벽은 이미 무너졌으나 서벽 내의 토층 속에서 층층이 다진 흔적이 확인됨. 판축토성(夯土築城)임. 바닥부 기초는 돌로 조성하였고, 상부는 흙을 다져 판축하였음.
1928년 9월 조사에서 청동기시대 돌도끼(石斧), 돌칼(石刀), 돌화살촉(石鏃), 방추차(石紡織), 뼈화살촉(骨鏃), 뼈바늘(骨針) 등이 출토됨. 전국~한대 유물로는 청동제 화살촉(銅鏃), 청동제 물미(銅镦), 청동제 허리띠고리(銅帶鉤), 청동제 도끼거푸집(銅斧石范), 철제 단지(鐵䦆), 철제 칼(鐵刀), 철제 가래(鐵鍤), 니질회도관(泥質灰陶罐), 두(豆), 단지(盆), 화문전, 암키와, 수키와, ‘長樂’· ‘未央’ 등의 명문 반와당(半瓦當), 권운문와당. 명도전, 명자원전(明字圓錢), 일도전(一刀錢), 반량전(半兩錢), 오수전(五銖錢), 대천오십(大泉五十)이 출토됨.
1960년 이래 조사에서는 전국~한대의 토갱묘, 패묘, 전실묘, 옹관묘, 석묘 등 많은 고분이 발견됨. 大鳥崖 한대 유적지에서 陶圈水晶 1개, 鐵䦆, 토기, 와당 등이 발견됨. 부근에서 ‘河陽令印’· ‘武庫中丞’ 등의 도장을 찍은 봉니 등이 수집됨.
성벽은 이미 무너졌으나 서벽 내의 토층 속에서 층층이 다진 흔적이 확인됨. 판축토성(夯土築城)임. 바닥부 기초는 돌로 조성하였고, 상부는 흙을 다져 판축하였음.
1928년 9월 조사에서 청동기시대 돌도끼(石斧), 돌칼(石刀), 돌화살촉(石鏃), 방추차(石紡織), 뼈화살촉(骨鏃), 뼈바늘(骨針) 등이 출토됨. 전국~한대 유물로는 청동제 화살촉(銅鏃), 청동제 물미(銅镦), 청동제 허리띠고리(銅帶鉤), 청동제 도끼거푸집(銅斧石范), 철제 단지(鐵䦆), 철제 칼(鐵刀), 철제 가래(鐵鍤), 니질회도관(泥質灰陶罐), 두(豆), 단지(盆), 화문전, 암키와, 수키와, ‘長樂’· ‘未央’ 등의 명문 반와당(半瓦當), 권운문와당. 명도전, 명자원전(明字圓錢), 일도전(一刀錢), 반량전(半兩錢), 오수전(五銖錢), 대천오십(大泉五十)이 출토됨.
1960년 이래 조사에서는 전국~한대의 토갱묘, 패묘, 전실묘, 옹관묘, 석묘 등 많은 고분이 발견됨. 大鳥崖 한대 유적지에서 陶圈水晶 1개, 鐵䦆, 토기, 와당 등이 발견됨. 부근에서 ‘河陽令印’· ‘武庫中丞’ 등의 도장을 찍은 봉니 등이 수집됨.
역사적 의미
목양성 내부의 서면에는 멀지 않은 곳에 ‘양두와(羊頭洼)’가 있는데 전국-서한시기 양두와는 요동반도와 산동반도를 연결하는 중요 항구였음. 목양성은 지리적 요충지임. 산을 끼고 축성하였는데 지키기 쉽고 공격하기 어려운 지세이며, 수륙교통이 편리하여 중원대륙과 만주 및 한반도를 연결하는 교두보 역할을 수행함.
목양성에 대해 일부 학자는 한대 답씨현성(漢代 沓氏縣城)으로 추정하기도 함.
목양성에 대해 일부 학자는 한대 답씨현성(漢代 沓氏縣城)으로 추정하기도 함.
자연환경
대련시 여순구 철산진 조가촌(大連市 旅順口 鐵山鎭 刁家村) 서남쪽 및 유가촌 동남쪽 구릉지에 위치. 서남으로 발해 동안과 500m 거리임.
목양성 내부의 서면에는 멀지 않은 곳에 ‘양두와(羊頭洼)’가 있는데, 전국·서한시기 양두와는 요동반도와 산동반도를 연결하는 중요 항구였음. 목양성은 지리적 요충지임. 산을 끼고 축성하였는데. 지키기 쉽고 공격하기 어려운 지세이며, 수륙교통이 편리하여 중원과 동북대륙을 연결하는 교두보역할을 수행함. 『盛京通志』에 “牧羊城, 城(指距金州城)西南一百五十里, 周圍二百五十步, 門一”이라고 기록되어 있음.
목양성은 정관(貞觀) 연간에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 정벌 당시 이곳에 도착하였는데 ‘양치는 노인(牧羊老人)’이 앉았던 자리에 성을 쌓았다는 전설에 의해 ‘목양성(牧羊城)’이라 불림. 일명 ‘목양성(木羊城)’이라고도 함.
목양성 내부의 서면에는 멀지 않은 곳에 ‘양두와(羊頭洼)’가 있는데, 전국·서한시기 양두와는 요동반도와 산동반도를 연결하는 중요 항구였음. 목양성은 지리적 요충지임. 산을 끼고 축성하였는데. 지키기 쉽고 공격하기 어려운 지세이며, 수륙교통이 편리하여 중원과 동북대륙을 연결하는 교두보역할을 수행함. 『盛京通志』에 “牧羊城, 城(指距金州城)西南一百五十里, 周圍二百五十步, 門一”이라고 기록되어 있음.
목양성은 정관(貞觀) 연간에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 정벌 당시 이곳에 도착하였는데 ‘양치는 노인(牧羊老人)’이 앉았던 자리에 성을 쌓았다는 전설에 의해 ‘목양성(牧羊城)’이라 불림. 일명 ‘목양성(木羊城)’이라고도 함.
참고문헌
· 許明綱, 「牧羊城城址」『遼東大學學報』 1992-2, 1992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會編』 (上), 哈爾濱出版社, 1994
· 劉美晶, 「遼東半島第一城-旅順牧羊城城址」『東北史地』 2007-3, 2007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下), 西安地圖出版社, 2009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會編』 (上), 哈爾濱出版社, 1994
· 劉美晶, 「遼東半島第一城-旅順牧羊城城址」『東北史地』 2007-3, 2007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下), 西安地圖出版社,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