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고구려문화유산자료

우산하통구 12호묘(禹山下 通溝12號墓)

  • 구분
    유적
  • 시대
    고구려
  • 위치
  • 유물번호
    S000496
  • 위치(출토지)
    集安市 禹山下
  • 지역
    집안(集安市)
  • 유형
    고분>벽화고분
  • 형태사항
    가로: 16m, 세로: 16m, 높이: 8m  , 석실 
출토지
집안시 우산하(集安市 禹山下)
조사내용
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
1937 1937년 6월 黑田源次에 의해 벽화를 조사하면서, 마굿간 그림을 보고 ‘馬槽墓’라 불렀음. 자질구레한 내용만 보도하고, 자료를 공개하지 않음. 묘문이 열리면서 벽화가 파괴됨.
1950 재조사
1956집안현문화과
(集安縣文化科)
봄에 흙을 볻돋아주고, 무덤문 봉쇄.
1957길림성박물관
(吉林省博物館)
1957년 4월 王承禮, 周健鵬, 曲紹伯, 蘇才에 의해 전체적인 벽화묘 조사 가운데 이루어짐.
1962길림성박물관, 집안현문관소
(吉林省博物館, 集安縣文管所)
1962년 4월 무덤의 재조사와 실측, 벽화모사가 이루어졌음.
1962길림성박물관집안고고대, 집안현문물관리소
(吉林省博物館集安考古隊, 集安縣文物管理所)
1962년 5월 무덤에 대한 유지보수 작업이 진행.
1962길림성박물관집안고고대, 집안현문물관리소
(吉林省博物館集安考古隊, 集安縣文物管理所)
1962년 6월~8월 王承禮, 方起東, 韓淑華, 劉萱堂에 의해 무덤의 재조사와 실측, 벽화모사가 이루어졌음.
1962길림성박물관 집안고고대
(吉林省博物館集安考古隊)
1962년 8월 王大維, 李超雄, 劉萱堂에 의해 벽화조사 및 모사.
1964 1964년 봄 흙을 볻돋아줌.
1966 통구고분군에 대한 실측 때, JYM1894로 편호.
1977 보수 및 화학적 벽화보존처리가 이루어짐.
1997집안시문물보관소
(集安市文物保管所)
묘문 등 새롭게 보수. 실측작업 실시.
해방 전 통화~집안 간 철로를 공사할 때, 일본인들이 주변 무덤에 대해 실측을 하고 편호하는데, 당시 통구 12호묘에 대해 ‘112호’라고 편호하였고, 후에 통구 12호묘라고 부름.
구조특징
대형유단봉토석실벽화묘
신중국 수립전 일본인들이 철로공사를 할 때 ‘112호’라고 편호하고, 간단하게 ‘통구 12호묘’라고 불렀음. 1937년 黑田源次가 벽화를 조사하면서, 마굿간 그림을 보고 ‘마조묘’라 불렀음. 1966년 통구고분군에 대한 실측 때, 우산하 1894호묘(JYM 1894)로 편호. 이 외에 집안西岡12호쌍실분, 西崗122호분, 통구20호분, 통구연실고분 등으로 불림.
원래는 절두방추형임. 봉토는 황색 점토임. 봉토주위 아랫면에 약간 가공을 거친 돌 9개가 둘러져 있는데, 돌의 크기는 1m×1m×2m 정도임. 장군묘와 태왕릉 주위에 있는 호분석과 동일함. 묘문은 서향이고, 방향은 262°임(각 무덤칸의 방향은 남으로 8˚기운 서향). 구조는 지면, 벽, 고임 천정, 작은 말각석, 천정석으로 구축. 묘는 남·북 두 개의 실로 이루어져 있음. 각각 묘문과 연도가 있는데, 연도는 서로 평행함.
남실은 평면이 정방형임. 남벽 서쪽 끝에는 파괴된 구멍이 있음. 네 벽은 높이가 1.72m 인데, 안으로 기울어져 있음. 고임받침석(梁枋)이 설치. 고임받침석 위에는 13층 평행고임을 구축하였고, 다시 그 위에는 돌로 덮어, 정연한 궁륭식 천정을 이루었는데, 높이는 3.48m 임. 천정 고임 3, 7, 11층의 네 모서리에는 작은 말각석이 놓여져 있음. 천정에 발라진 석회가 거의 전부 박락되어 돌들을 볼 수 있음. 묘 바닥은 좌우에 두 거대한 돌이 합쳐져 이루어진 것인데, 비교적 빈틈이 없음. 표면과 빈틈 모두 석회를 발랐는데, 두께는 1~2㎝ 임. 관대는 보이지 않음. 남실은 크기가 같지 않은 돌로 축조했고, 안에는 석회를 발랐는데, 석회표면에 아교(胶)와 유사한 물질을 발라서, 광택을 내고 내구성을 오래하고자 함.
연도 바닥은 묘실보다 낮음. 꼭대기부분은 석회가 대부분 떨어져 나갔고, 앞뒤의 커다란 돌 세 개가 합쳐져 이루어졌는데, 그 틈은 좁지 않음. 연도 가운데부분에 남북으로 각각 한 개의 이실이 서로 마주보고 있음. 이실 세 벽은 안으로 기울어져 있음. 바닥부는 파괴되면서 묘바닥과 평평해짐. 여기는 원래 부장품이 있던 곳으로 추정. 연도 안쪽입구와 묘실이 연결된 부분에는 석조로 만들어진 문지방(门槛)이 가로놓여 있는데, 가로 길이 1m, 두께 0.14m, 높이 0.07m 임. 그 가까운 곳 연도 양벽에는 문틀이 설치되었던 오목한 흔적이 있음.
북실의 구조는 대체적으로 남실과 같으나, 남실보다 규모가 작음. 북실은 평면이 정방형임. 서벽 전체길이는 2.66m이고 연도가 중간에 나 있으며, 북단의 길이는 0.98m, 남단의 길이는 0.94m 임. 네 벽은 높이가 1.72m이고, 약간 안으로 기울어져 있음. 네 벽 위에는 석회벽면이 쌓여졌고, 그 후에 약간 경사를 이루면서 안으로 들여 쌓고, 마지막에는 돌로 천정을 막음으로써, 四阿式 천정을 이루었는데, 높이는 3.04m 임. 四阿式 천정의 네 모서리는 아래위로 각각 두 개의 말각석이 있으며, 남면 서쪽 끝은 파괴된 구멍으로 인해 서남모서리에 있는 말각은 보이지 않음. 하층 말각은 묘바닥에서 2.18~2.24m 떨어져 있고, 상층 말각은 묘바닥에서 2.7m 떨어져 있음. 묘 바닥 석회면은 보존이 비교적 양호. 관대는 보이지 않음. 원래 바닥은 연도보다 높았을 것임. 바닥에 돌들이 깔아져 있고, 상면에는 회가 발라져 있는데, 남실과 마찬가지로 일찍이 파괴됨. 북실은 크기가 같지 않은 돌로 축조했고, 안에는 석회를 발랐는데, 석회표면에 아교(胶)와 유사한 물질을 발라서, 광택을 내고 내구성을 오래하고자 함.
연도 또한 남실의 연도처럼 묘문이 별도로 만들어지면서, 원래 길이를 측정하기 힘듬. 바닥과 꼭대기 모두 커다란 석판으로 평평하게 깔았음. 표면에는 석회가 발라짐. 연도 북벽에 이실 1개가 있는데, 너비 0.98m, 깊이 1.3m, 높이 1.1m 임. 세 벽은 안으로 기울어져 있음.
벽화는 묘실, 이실, 연도에 그려져 있음. 주색, 자색, 황색, 백색, 흑색, 녹색 등의 색깔로 그리고, 白堊土 벽에 직접 그렸음. 벽화는 대부분 박락되거나 혹은 희미해져서 모호하지만, 부부對坐, 전투, 射獵, 무악, 마굿간, 禮輦, 작화, 밥짓는 기구(炊爨器物) 등을 확인할 수 있음. 선들은 힘이 있고, 색채는 풍부하며, 형상은 사실적임.
묘실 네벽 모서리에는 꼬인 구름무늬로 장식된 붉은색 나무기둥을 그렸는데, 기둥머리가 천정석에까지 이름. 묘실 벽과 천장고임은 붉은색 창방으로 구분. 벽 위쪽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붉고, 누르고, 검은 연꽃 일곱 송이를 그렸는데, 꽃심에 둥근 구멍이 있고 그 안에는 쇠녹의 흔적이 있음. 유장을 거는 못을 박았던 자리로 추정. 벽 위쪽의 연꽃그림은 남벽에서도 확인.
남실 동벽 전체에는 가옥 한 채가 그려져 있음. 용마루에 치미가 있고 청색기와가 덮어져 있음. 처마아래에는 회색바탕에 검은 선을 한 무늬와 하얀 바탕에 빨간 선을 한 무늬를 한 휘장이 있고, 홍색 垂帶가 이어져 있음. 가옥 양측 바깥에는 좌우측면이 그려져 있고, 측면의 하층에는 각각 문루가 있음. 좌측 하층의 좌변은 하나의 문으로, 대문 고리가 있고, 위는 치미가 있는 四坡水瓦 지붕임. 그 상층에는 주색의 기둥머리 두공 위로 황색 梁架를 설치하였고, 梁架 위로 驼峰을 만들어 荷葉墩을 올려, 瓴脊을 직접적으로 받침. 우측 하층 문루는 세 문으로 나누어지는데, 좌우는 두 측문으로, 각각 대문 고리가 있음. 중간의 두 주색기둥에서, 왼쪽기둥에는 皿板과 櫨頭가 있고, 위에는 황색의 斜方格紋의 挑梁枋을 올렸으며, 兩坡水의 청색기와로 꼭대기를 덮었음. 윗층 가운데부분에는 너비가 벽면의 1/2보다 큰 넓이에 주색 柱頭를 그림. 아울러 皿板 상방에는 좌우로 뻗어나가는 2근의 매우 가는 華栱이 있고, 그 위에는 雀替式의 散頭를 설치하여 梁架를 받침.
가옥 내에는 부부대좌가 그려져 있음. 남자는 왼쪽에 위치하여 남쪽을 바라보고 있고, 平床에 정좌하였음. 왼손은 平床을 어루만지고 있고, 오른손은 무릎 위에 얹었음. 입술은 주색이고, 콧수염이 있음. 백색의 방형 幘을 머리에 썼고, 상의에는 폭이 넓은 소매를 한 하얀 合衽衣를 입었으며, 요대를 갖추었고, 아래에는 회색바탕에 검은 점의 肥花 바지를 입었음. 오른쪽 다리는 굽혔고, 왼쪽다리는 곧게 핌. 여자는 오른쪽에 위치하면서 남자를 바라보고 있음. 얼굴 뺨에는 둥근 점의 연지를 하고 있고, 두 손을 모으고 꿇어 앉아 있음. 머리에는 백색 巾帼을 썼음. 몸에는 寬領綠大袖合衽的白色褉裙을 입었음. 領袖와 袵 가장자리에는 빨간색과 흑색을 서로 사이를 두고 칠한 장식이 있음. 치맛자락은 비교적 넓게 주름잡았음. 남자 주인의 뒤에는 노복 1명이 그려져 있음. 코밑에 수염이 있음. 오른손은 허리를 잡고 있고, 왼손은 백색 수건을 들고 있음. 시중을 하고 있는 모습임. 벽화 왼쪽 끝 가옥 밖에는 사람 세 명이 손을 모으고 오른쪽을 향해 서 있음. 모두 통이 넓은 바지를 입었고, 옷소매는 걷어 올려 팔뚝이 노출됨. 좌우 두 사람은 녹색바탕에 검은 점이 있는 저고리와 황색바지를 입었고, 중간에 있는 사람은 황색 저고리와 녹색바탕에 검은 점이 있는 바지를 입었음. 좌측에 있는 사람은 얼굴 형태를 볼 수 있는데, 두꺼운 눈썹에 큰 눈을 하고 있음. 가옥 오른쪽 두 측문 사이에 시녀가 그려져 있는데, 왼쪽을 향하고 있음. 오른손에는 안이 홍색인 검정 큰 사발을 들고 있음. 머리는 묶었고, 얼굴뺨에는 둥근 빨간색 점의 연지를 하고 있음. 백색바탕에 홍색 점이 있고, 통이 큰 소매를 갖춘 合衽를 입었으며, 치맛자락에는 주름이 져 있음. 벽면 오른쪽 끝 가옥 바깥에도 시녀 한명이 있는데, 왼쪽으로 향하고 있음. 어떤 물건을 앞에 있는 사람에게 주고자 하는 자세임. 머리에 흰색 巾帼을 썼음. 얼굴뺨에 연지가 있음. 綠色黑點의 寬袖合衽花褉裙을 입었음. 가옥 상방에는 정면에서 바라 본 연화문 7송이가 홍색과 검정색이 번갈어가는 형태로 그려져 있음. 꽃술 중간에는 둥근 구멍이 있고, 안에는 녹이 슨 흔적이 있음.
남실 북벽에는 禮輦圖가 그려져 있는데, 대부분 박락됨. 우벽 가운데 부분에서는 아직 車輦를 볼 수 있는데, 빨간 색의 굽은 덮개를 갖추고 있고, 바퀴는 높고 검정색이며, 황색 상의에 녹색바지를 입은 시동이 車辕을 손으로 끌고 동쪽을 향해 가고 있음. 車辕측면에는 녹색상의와 황색바지를 입은 사람 한명이 있는데, 명확하지는 않음. 수레 앞에는 세 사람이 있음. 가장 앞에 있는 사람은 남자로, 녹색 상의에 황색바지를 입었음. 나머지 사람은 희미하여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없음. 수레 뒤편에는 시위하는 사람의 상반신만 볼 수 있음. 우벽 왼쪽 끝에는 안장을 갖춘 청회색 말이 그려져 있음. 말 앞에는 한 사람이 있음. 나머지 벽화는 명확하게 볼 수 없음.
남실 남벽에도 禮輦圖가 그려져 있음. 남벽 왼쪽 끝에는 황색저고리와 청색바지를 입은 남자시종이 동쪽을 향하고 있음. 두 손으로 車辕를 끌고 있음. 車辕 우측에 다시 녹색상의와 황색바지를 입은 남자시종이 있음. 수레의 바퀴는 검은색이고, 오렌지색의 둥글게 굽은 덮개를 갖추고 있는데, 덮개의 홍색은 車厢와 서로 연결됨. 시녀 두 명이 수레 뒤를 따르고 있는데, 墨領緣對衽黃花褉裙을 입었음. 그 뒤편에 네 명의 시녀를 확인할 수 있음. 앞의 세 명은 褉裙을 입었음. 맨 앞에 있는 시녀는 曲柄傘을 잡고 있고, 두 번째 시녀는 검정색 方盒을 들고 있음. 나머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음. 남벽과 북벽은 동일한 내용으로 남자시종과 시녀가 수레를 이끌고, 묘주인을 향해 예품을 운송하는 벽화라고 할 수 있음.
남실 서벽 묘실 문 양측에는 무악도와 문을 지키는 개가 그려져 있음. 묘문 우측벽 윗부분에는 황색 저고리와 청색 바지를 입은 사람이 춤추고 있는데, 두 팔은 앞을 향해 수평으로 뻗었고, 긴 소매는 아래로 늘여져있으며, 몸은 약간 앞으로 기울였음. 왼쪽 다리는 땅을 밟고, 오른쪽 다리는 뒤로 들어 올렸음. 춤을 추는 모습은 너무 아름다움. 다른 한 사람은 춤추는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고 거문고를 반주하고 있는데, 많이 희미해진 상태임. 아랫부분에는 문을 지키는 검정색 개가 엎드려 앉아 있는데, 연도를 향해 있고, 머리를 쳐들고 있으며, 귀를 세우고 있음. 묘문 좌측벽 윗부분에도 춤추고 있는 사람이 그려져 있음. 홍색저고리와 청색바지를 입었음. 왼팔은 앞을 향해 수평으로 뻗었고, 오른손은 들어서 오른쪽 팔꿈치가 가슴 앞에서 굽어져 있음. 긴 소매는 아래로 늘여져 있고, 두 다리는 땅을 딛고 있는데, 오른쪽 다리를 약간 앞으로 뻗었음. 엉덩이는 치켜들고 있음. 몸 오른쪽에는 긴 치마를 입은 사람이 있는데, 자세히 알 수 없음. 아래에 문을 지키는 개가 있는데, 황색이고, 연도를 향해 있음. 검은색 개와 마주보고 있음.
남실 천정 제1중 頂石에는 梁枋 위에 꼬인구름무늬(菱形云紋) 도안이 그려져 있음. 주홍색 바탕에 검정색과 황색으로 윤곽을 그렸는데, 대부분 희미해서 명확하지 않음. 천정 각 층에는 모두 잎과 줄기가 달린 연꽃 및 연꽃봉오리가 그려져 있는데, 9瓣이고, 홍색과 검정색이 번갈아 그려짐. 묘실 네 벽 상부에는 각각 6~7송이가 그려졌는데, 주색과 흑색이 번갈아 그려짐. 꽃 가운데는 황색임.
연도 북측 이실의 북벽과 동벽에 마굿간이 그려져 있음. 용마루에 치미를 놓았고, 청색기와로 이루어진 지붕을 이루었으며, 주색 기둥, 홍색 枋을 갖추고 있음. 마굿간 안에는 노란색 말구유와 붉고, 푸르고, 누런 말 세 마리가 있음. 마굿간의 처마·주색 기둥·홍색 枋은 일직선상으로 북벽을 지나 동벽까지 뻗어져 있음. 북벽 상단에 푸른색 말안장이 보이며 마구간 곁에 한 인물의 상체 일부가 남아 있음. 연도 북측 남벽의 벽화는 파손되어, 홍색 옷을 입고 머리를 묶은 사람의 상부만을 볼 수 있는데, 아마도 마굿간 그림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
연도 남측 이실 동벽에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는데, 머리에는 황색 方幘을 썼음. 얼굴은 수척하고, 콧수염이 있으며, 몸은 호리호리함. 녹색 저고리와 황색 바지를 입었고, 소매를 걷었으며, 허리를 묶었음. 오른손은 붓을 잡고 앞으로 펴서 그림을 그리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음. 그림을 그리는 사람 앞에 시녀 1명이 있는데, 황색花褉裙을 입었고, 머리를 높이 올렸음. 시녀 앞에는 상 위에 어떤 물건이 있는데, 이배인 것 같으나, 모호해서 명확하지 않음. 동벽에는 가옥이 그려져 있는데, 청색기와·홍색 欄·주색 기둥을 갖추고 있음. 대부분이 박락됨. 서벽 남쪽 벽에는 취사도구로 보이는 그릇 두 개가 놓여 있음.
연도 양벽에는 짐승사냥그림을 그렸으나, 극히 일부분만 남아있음. 북벽에는 높은 산봉우리들을 배경으로 밤색 말을 타고 달리면서 동물들을 사냥하는 기마인물이 보이는데, 몸에는 화살통을 지녔고, 張弓을 들고 활시위를 당기고 있음. 달리는 모습이 매우 생동적임. 남벽 윗부분에는 몸통이 매우 큰 나무가 그려져 있는데, 자색 몸통에 녹색 잎을 갖추고 있음. 나무 앞에 두 사람이 있는데, 황색바지를 입었음. 앞에 있는 사람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고 활시위를 당기고 있음. 한 다리는 앞으로 내딛었고, 한 다리는 앞으로 약간 굽혔음. 뒤에 있는 사람은 앞사람을 뒤따르고 있음. 수렵도 대부분은 박락되었음. 저 장면들은 묘주인 생전의 말 타고 수렵하던 생활을 그렸던 것임.
북실 동벽 후벽에는 부부대좌도가 그려져 있으나, 대부분 박락됨. 벽면 남쪽 끝에 부인이 그려져 있는데, 무릎을 꿇고 북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花襈裙을 입었음. 부인 뒤로 시녀 한명이 그려져 있는데, 황색치마를 입은 것만 확인할 수 있음. 남자는 대부분이 박락됨. 북단 아래에는 시종 3명이 그려져 있는데, 남쪽을 바라보고 고개를 숙이고 있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각각 회색상의에 황색바지, 황색 상의에 회색바지, 회색 상의에 황색바지를 입고 있음.
북실 북벽에는 사냥그림의 일부가 남아 있음. 벽 한가운데에 붉은 말을 탄 무사가 산을 향해 달아나는 적갈색 사슴 세 마리를 향해 활을 당기는 모습과 그 뒤의 흰 말을 탄 또 한 사람의 기마무사가 활을 당겨 멧돼지를 겨누는 모습이 남아 있음. 사슴은 모두 세 마리로 동쪽으로 도망을 가고 있음. 앞의 두 마리는 암컷과 수컷으로, 수컷은 목에 화살을 맞았음. 뒤의 한 마리는 네 발과 꼬리만 보임. 이 사람 뒤로 하얀 갑옷을 입고 하얀 말을 탄 사람이 활시위를 당기면서 사냥을 하고 있음. 이 외에 홍색과 검은색으로 그린 나무가 있는데, 나뭇가지에 작은 새가 머물고 있음. 우벽 좌측 아래 모서리에는 婦女가 그려져 있는데, 褉裙을 입었고, 오른쪽 아래 모서리에는 시종이 그려져 있는데, 말을 끌고 있음.
북실 남벽에는 전투장면의 일부가 남았는데, 박락이 심하여 명확하지 않음. 동벽 가까운 면에 투구를 쓰고 비늘갑옷을 입은 무사가 둥근고리큰칼을 잡은 오른손을 치켜들어 포로가 된 비슷한 복장의 다른 무사의 목을 내리치려 하는 장면이 있음. 중간부분에 기마무사 한 명이 그려져 있음. 얼굴은 박락되어 보이지 않음. 손에는 棨戟을 들고 있고, 머리에는 투구를 썼으며, 몸에는 魚鱗甲을 입었음. 오른쪽을 보면서 말을 타고 질주하고 있음. 말안장 뒤로 커다란 깃발이 휘날리고 있음. 전투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임. 기마무사 앞에는 사람 세 명이 있는데, 형상을 판단할 수는 없음.
묘실 입구로 좌우가 나뉜 북실 서벽의 남쪽벽 아래에는 문지기 개가 문을 향하여 엎드린 모습이 일부 보임.
북실 천정 벽의 각 모서리는 붉은색 기둥으로, 벽과 천장부는 붉은색 창방으로 구분. 천장고임은 연꽃과 구름무늬로 장식. 천장 위에는 三重 연화연접 도안이 그려짐. 제1중 네 모서리에는 두 청묵색 荷葉이 아래로 내려져 있음. 그 중앙에는 홍색의 연화가 있는데, 잎은 뾰족하고 야위었으며, 중간에는 각각 홍색 꽃봉오리에 청색과 묵색의 하엽이 있음. 제2중 네 모서리에는 중간에 하엽의 하엽이 있고, 그 중간에 각각 활짝 펴서 연화 아래에 늘어진 청·묵색의 하엽이 있음. 제3중 연화연접 도안은 박락되어 명확하지 않음.
연도남측 이실의 서벽과 북벽에는 여러 가지 취사도구(炊爨器物圖)가 그려짐. 그 기물은 자세히 판단하기 어려운데, 아래가 斗狀인 것이 2점이 있고, 위에는 斗狀물건을 덮었으며, 물고기꼬리모양의 손잡이가 있는데, 회색임. 그 하나의 하부에 불을 뗄 수 있는 기물이 음식을 삶았던 것으로 보임.
내부규모 및 특징
1963년 보고서에서 둘레 90여m, 높이 4.6m.
1997년 (2002년 보고서)에 한 변 길이 16m, 높이 8m.
동벽 길이 3.38m, 남벽 길이 3.52m, 북벽 3.54m, 서벽 전체길이3.47m.
서벽 중간에 연도가 나 있는데, 북쪽 길이 1.22m, 남쪽 길이 1.24㎝.
만주국 당시 서쪽 끝에 별도로 문을 만들어서 원래의 길이를 측정할 수 없는데, 남은 길이 3.18m, 너비 1.3m, 높이 1.58m.
남쪽 이실 깊이 1m, 너비 0.7m, 높이 1.32m.
북쪽 이실 깊이 0.93m, 너비 0.9m, 높이 1.35m.
북쪽 묘실 동벽길이 2.97m, 남․북 양 벽 길이 2.94m.
연도의 남은 길이 2.4m, 너비 1.08m, 높이 1.54m.
역사적 의미
2004년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통구 12호묘는 치밀한 구조를 갖추고 있는데, 축조가 정연하고, 웅장하고 아름다운 묘실을 갖추고 있으며, 색채가 풍부하고 형상이 생동적임.
통구 12호묘는 쌍실구조이고, 각각 묘문이 있음. 남북 두 묘실에는 각각 부부대좌도가 그려져 있는데, 두 묘주인일 것임. 두 묘주인은 한 봉토분 안에 동시에 매장된 것으로, 일종의 가족제도가 반영된 듯함.
통구12호묘 벽화내용은 대부분 현실생활을 주제로 삼았음. 기법은 검은 선으로 윤곽을 그린 후 평평하게 채색. 검은 선에는 힘이 있고, 시원스럽고 매끄러운데, 바로 고구려벽화가 나날이 성숙해지는 모습을 보여줌.
벽화에는 묘주인이 생전에 거주했던 호화로운 건축물, 마굿간에 가득 들어찬 살찐 말들, 노비들이 그려져 있음. 이를 볼 때, 무덤의 피장자는 고구려의 대귀족임.
李殿福(1962년)은 통구 12호묘의 구조, 벽화내용과 형상을 볼 때, 무용묘·각저묘·삼실묘와 기본적으로 같은 것으로 보아, 시간적으로 서로 멀지 않음. 다만 통구 12호묘는 무용묘와 각저묘보다는 늦고, 삼실묘보다는 이른 것으로 추정되는데, 축조연대는 대략 5세기로 추정됨.
魏存成(1994년)은 불교와 관련된 연화문 등이 등장하는데, 불교는 4세기 후엽에 고구려에 전파. 불교소재의 광범위한 전파는 이보다 늦을 것이므로, 5세기대로 추정.
方起東·劉萱堂(2002년)은 집안에서 발견된 벽화묘의 연대 및 분기와 관련하여, 4기로 나누어 살펴보면서 1기로 파악. 제1기의 특징을 살펴보면, 먼저 단실묘이고 연도 양측에 이실이 축조되어 있다는 구조를 들 수 있음. 묘실은 궁륭식과 사아식, 혹은 여러 층의 고임 및 네 모서리에 간혹 작은 말각석이 더해진 천정을 갖추고 있음. 그리고 묘방향은 서쪽을 향하고 있음. 벽화의 내용으로는 묘주인의 생전생활이나, 연화 혹은 王자 문양으로 조성된 문양 등을 그렸음. 묘실 네 모서리에는 나무구조물을 그려 넣었고, 菱形문양 혹은 螭문양을 그리기도 하였으며, 천정부분에는 주로 연화와 云紋을 그렸음. 이 시기의 전형적인 벽화묘로는 마선구 1호묘, 통구 12호묘, 산성하 332호묘, 장천 1호묘 등으로 파악. 축조시기는 4세기 중엽~말엽으로 추정.
자연환경
우산하묘구 중부에 통구평야 중부 禹山 남쪽 기슭의 평평하고 완만한 지대에 위치.
남쪽에 집통공로와 철로가 있는데, 철로를 넘어 약 460m 떨어진 지점에 오회분 4호묘와 5호묘가 있음. 북쪽으로는 약 300m 떨어진 지점에 우산이 있음. 북면에는 4기의 봉토묘가 연달아 위치하고 있는데, 이 묘에서 일직선상으로 2번째 묘가 산연화묘임. 그 동쪽 횡방향으로 소형 묘 3기가 위치하는데, 마치 통구 12호묘를 둘러싼 모양임. 서방과 남방에 각각 1기의 방단적석묘가 있음. 서남에 다시 1기의 봉토묘가 있음. 부근에 봉토묘와 방단 적석묘가 적지 않게 있는데, 그 규모는 작음.
참고문헌
· 李殿福, 「1962年春季吉林輯安考古調査簡報」『考古』 1962-11, 1962
· 王承禮·韓淑華, 「吉林輯安通溝第十二號高句麗壁畫墓」『考古』 1964-2, 1964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4
· 朝鮮畵報社出版部, 『高句麗古墳壁畵』, 朝鮮畵報社, 1985
· 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편, 『조선유적유물도감』 5, 1990
· 魏存成, 『高句麗考古』, 吉林大學出版社, 1994
· 전호태,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 사계절출판사, 2000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通溝古墓群1997年調査測繪報告』, 科學出版社, 2002
· 方起東·劉萱堂, 「集安下解放第31號高句麗壁畵墓」『北方文物』 2002-3, 2002
· 尹國有, 『高句麗壁畵硏究』, 吉林文學出版社, 2003
· 吳廣孝, 『集安高句麗壁畵』, 山東畵報出版社, 2006
· 孫仁杰·遲勇, 『集安高句麗墓葬』, 香港亞洲出版社, 2007
· 耿鐵華, 『高句麗古墓壁畵硏究』, 吉林大學出版社, 2008
· 전호태, 「고구려 집안권 벽화고분의 현황과 과제」『蔚山史學』 14, 蔚山大學校史學會, 2009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우산하통구 12호묘(禹山下 通溝12號墓) 자료번호 : ku.d_0001_0040_0030_1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