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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릉(太王陵)

 
  • 구분유적
  • 시대고구려
  • 문서번호S000417
  • 위치(출토지)吉林省 集安市 太王鄕
  • 지역집안(集安市)
  • 유형고분>계단식적석총
  • 형태사항292점 석실 
 

출토지

 

길림성 집안시 태왕향 (吉林省 集安市 太王鄉)

 

조사내용

 

 
:1
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
1912 집안의 산성자산성(환도산성) 등의 고구려 유적들을 조사 시 태왕릉도 함께 조사
鳥居龍藏가 참여함.
1913 關野貞, 今西龍이 참여함. 1915년 『朝鮮古蹟圖譜』에 태왕릉 사진이 수록되었고, 1939년 『通溝』(上卷)에 태왕릉 실측도가 수록됨.
1935 池內宏, 梅原末治, 黑田源次, 三上次男가 참여함.
1938년 『通溝』 보고서 출간하였는데, 국내성과 환도산성, 광개토왕비, 장군총, 태왕릉, 천추총 및 오회분, 무용총, 각저총, 삼실총, 사신총, 모두루총과 환문총 등 집안의 도성 및 중요한 고분들의 조사 내용이 기록함.
1935 關野貞, 三宅俊成, 伊藤伊八이 참여하여 집안 일대의 고구려 유적에 대한 조사를 실시함.
三宅俊成는 『東北亞考古硏究』에 당시 조사 성과를 보고하고, 關野貞은 그동안의 고구려 벽화고분의 조사 내용을 종합하여 1941년에 『朝鮮の建築と藝術』을 발간함.
1940 1940년 일제 고적조사 때 藤田亮策이 참여하여 장군총과 태왕릉 등의 대형 적석총 주변을 조사함.
1966길림성박물관, 집안현문물보관소
(吉林省博物館, 集安縣文物保管所)
통구고분군 조사를 진행하면서 우산묘구 제541호묘(JYM0541)로 편호함.
1990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집안현문물보관소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縣文物保管所)
方起東(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邢頤(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馬建華(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林至德(집안시문물보관소), 孫仁杰(집안시문물보관소), 遲龍(집안시문물보관소)이 참여함.
고분 위의 이른 시기 도굴 구덩이와 묘실 조사 및 묘실과 석곽의 보수 작업을 진행함.
2003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집안시문물보관소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市文物保管所)
4월 28일 ~ 7월 31일에 걸쳐 王洪峰(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邵春華(길림성박물관), 王志剛(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遲勇(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谷芃(백산시문물관리위원회판공실), 夏宏宇(백성시박물관), 邢春光(농안현문물보호연구소), 蔣剛(길림대학문학원 박사연구생), 趙明星(길림대학문학원 석사연구생)이 참여하여 고분 아래로 떨어진 돌과 계단과 도굴 구덩이, 묘역에 대해 부분적으로 발굴 조사함. 고분 주변의 광범위 陵園 유적 확인을 위한 탐사였음.
태왕릉 계단 구조는 고분 아래로 떨어진 돌과 분구 위의 쌓인 흙을 발굴하는 동시에 계단상의 封石을 절개하여 단면 조사함.
발굴조사가 진행되던 당시 태왕릉의 떨어진 돌과 떨어져 내린 돌과 계단을 배수 시설과 능원유적의 탐사가 진행됨.
폭 1m의 탐색갱을 고분 주위에 넣어 수직과 수평으로 각각의 긴 탐색갱을 파고 폭넓게 탐사를 시작한 후에 목표한 유적을 찾아내어 광범위한 발굴을 재차 진행하는 방식을 취함.
19세기 淸의 봉금조치 해제 이후 光緖 初年에 광개토왕릉비의 탁본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인근에 자리한 태왕릉이 주목됨.
1880년(光緖 6년)에 奉天軍 糧署의 王知修가 集安에서 가서 고찰한 후에 1895년(光緖 21년) 『高句麗永樂太王古碑歌考』 저술하였는데, 벽돌(磚)에 예서로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가 쓰여 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음. 이후 연구자들은 碑와 명문 전돌로 인해 태왕릉으로 칭함.

 

구조특징

 

1913년(일제시대) 발굴조사에 나선 關野貞이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란 명문전돌에 근거해 ‘태왕릉’이라는 명칭을 부여함. 1966년에 우산묘구 제541호묘(JYM0541)로 편호되었으나, 여전히 태왕릉이라 칭해짐.
일제시기 현황을 보면,

(1) 1913년 조사 : 關野貞(그림 3)
동강 서쪽 土口子山에서 서남쪽으로 길게 펼쳐진 고지대 끝에 위치.
장군총을 능가하는 커다란 적석총으로 조사 당시에 붕괴되어 大石堆가 없는 석곽의 일부 및 그 둘레 모서리에 해당하는 곳에 나란히 커다란 버팀돌이 남아 있으며, 그 둘레의 전면 길이 약 200尺(≒60.6m), 좌측면 길이 약 202尺(≒61.2m)임.
석곽 천정석 정상까지의 높이는 당시 지반에서 약 55척(≒16.6m)임. 원래는 아마도 장군총과 같이 바깥쪽 계단이 만들어졌는데 처음에 만들어진 계단은 7층으로 추정됨[당시 3단 계단정도만 확인가능. 이런 현상은 1930년대까지 확인가능]. 버팀돌(분구지탱석, 호분석)은 각 면에 5개가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거대한 석재를 사용함. 남면 서쪽 모서리의 석재는 너비 5.8尺(≒1.7m), 길이 19.5尺(≒5.9m). 묘실의 남면에 있는 연도는 모두 파괴되어 있는데 묘실 너비는 동서 9.3尺(≒2.8m)이고 남북 10.44尺(≒3.1m)이며, 천정으로부터 45尺(≒13.6m) 지점까지 매몰에 의해 묘실의 높이는 명확치 않지만 천정은 1매의 대석으로 덮여 있음. 천정석의 크기는 동서 지름 15척(≒4.5m), 두께 2.65척(≒0.8m)임.[1935년 梅原末治의 조사에 의해 연도는 서면에 있는 것으로 정정됨]
묘실의 사면에는 내벽면에서 약 16척(≒4.8m) 떨어져 방형으로 석회암을 높이 쌓아 축조된 흔적이 있는데 묘실의 外護를 목적으로 한 것임.
석퇴 사이에서 다수의 벽돌과 기와편을 수습했는데, 벽돌에서는 모두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란 명문이 양각되어 있음. 이 때문에 이 고분은 태왕릉이란 명칭을 얻게 됨.
(2) 1935년 조사 : 梅原末治
태왕릉의 평면은 방형을 이루고 있음.(그림 4) 기단 바닥의 네 둘레는 대략 방위선과 일치함. 각 변의 길이 212尺(≒64.2m), 장군총의 기단 바닥이 대략 100尺(≒30m)이므로 면적은 장군총의 4배 이상을 차지하고 있음. 기단에 거대한 자연석을 기대어 놓았는데, 가장 큰 것이 높이 19尺(≒5.7m)임. 남쪽에는 5개, 동·서 양면에는 각기 4개, 북쪽에는 1개만이 남아 있는데 본래는 각 변에 5개씩 있었던 것으로 추정됨. 방단은 기단 위의 1壇만이 半 파괴된 상태로 남아 있음. 기단석은 6층으로 쌓았는데 높이 10尺(≒3.0m)에 이르고 있음. 위로 올라감에 따라 석재의 높이는 점차 감소하며, 아랫돌은 모두 홈을 파내어 윗돌과 서로 맞물리게 하여 쌓아 올렸으며, 각 돌의 바깥 면은 둥그런 맛이 나도록 함.(그림 4) 방단은 붕괴된 정도가 특히 심해 비교적 작은 강돌과 할석이 겹겹이 퇴적되어 있음. 각 모서리에는 다듬은 돌이 남아 있는 것도 극히 적어 겨우 제2단 및 제3단의 흔적이 남아 있을 뿐임.
고분의 상부에는 석실 천정석이 주위를 둘러쌓는 壇 모양의 돌이 보이지만 이것은 제3단과의 사이에 몇 개의 방형 단이 있었다는 점이 아직 명확하지 않음. 기단 바닥에서 석실의 천정석에 이르는 높이는 44.5尺(≒13.4m)을 넘지 않으므로 이것이 장군총과 커다란 차이가 없다는 것을 주목해볼만함. 제2단 이상의 각 단의 높이는 낮은데 그 정상부로 향하면서 감소율도 커지기 때문임. 묘실 천정석은 1매의 화강암으로 동서 길이 14尺(≒4.2m), 남북 길이 18尺(≒5.4m)임. 겹겹이 쌓인 할석과 강돌의 퇴적 속에서 수평적 위치를 유지하며 그 표면이 노출되어 있음. 묘실 천정석의 주위에서는 천정석 상면의 높이가 동일한 방단 모양의 석축이 보이는데 한 변의 길이 36.5尺(≒11.0m)임. 북면에서는 벽의 높이가 5尺(≒1.5m). 돌의 축조 방식은 산성자산성 등의 성벽에서 보이는데 마치 벽돌 쌓는 방식으로 이것은 본래 태왕릉의 일부를 만드는 구축이었는지는 의문임. 천정석은 본래 위치를 지키고 있으며 어떤 이동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음. 그 아래에는 반은 퇴적석이 매몰된 석실이 있는데 안에는 상부의 동서 너비 9.5尺(≒2.8m), 남북 너비 10尺(≒3.0m) 정도임.
남벽의 상부는 훼손되어 현재 출입이 가능하지만 본래의 입구는 서측에 있었음. 그러나 대부분 매몰되어 있음.(그림 4) 연도는 하반부만이 남아 있으며, 상반부의 廢材로 생각되는 대석은 묘실 외부의 서측에 흩어져 있음. 묘실의 평면은 방형이며, 서측의 중앙에는 연도가 열려 있음. 네 벽은 1척 내외의 가공된 화강암 석재가 정연히 쌓여 있으며, 그 상부는 고임식으로 되어있음. 연도의 천정과 묘실의 천정과의 높이 차이는 4척을 넘지 않음. 태왕릉의 석실 규모는 장군총에 비해 작고 구조도 간단함.
고분 주변을 보면 상당히 넓은 범위에서 강돌이 깔려 있음. 고분 북측에는 작은 높이의 언덕에 접해 있는데 고분과의 거리가 半町(≒54.5m) 정도 떨어진 곳의 아래쪽에는 고분의 기단 바닥에 병행하여 축조된 돌을 쌓은 흔적이 있음. 이것이 서·남 양면에서도 확인되는 흔적은 大正 2년(1913년) 鳥居龍藏의 조사 때 동행한 택준일이 촬영한 설경사진에서 드러나고 있음. 이 돌을 쌓은 것이 능역의 경계를 확정한 것으로 추정됨.[鳥居龍藏이 土疊를 최초로 주목함.]
(3) 1935년 조사 : 三宅俊成
광개토왕릉비의 서남 약 400m 지점에 위치.
장군총과 동일한 7단 계단의 적석석실묘로 추정되지만 원형이 남아 있지 않고 붕괴된 상태임. 규모가 장대하여 장군총의 4배 정도. 평면은 방형. 기단의 바닥변의 길이 약 64.2m, 지상에서 묘실 천정석의 정상부까지의 높이 약 13m임. 거의 붕괴되어 연도는 파괴됨. 묘실 내에는 석괴로 매몰되어 높이가 불분명하지만 그 넓이는 내부 상부에서 동서 약 2.27m, 남북 3.03m임. 묘실의 천정석은 동서 약 4.24m, 남북 5.45m, 두께 0.8m임.
태왕릉의 뒷면에는 배총으로 생각되는 적석총이 몇 기 존재하고 있으며, 이 능의 주위에는 토석혼합으로 축조된 土疊가 에워싸고 있음. 이의 위치와 구조에서 왕릉이었던 것을 명확히 알 수 있음. 능 및 부근에서 와당 및 벽돌 조각 등이 출토되고 있음.
(4) 1940년 조사 : 藤田亮策(그림 7)
일찍 파괴되어 기초부가 명확치 않음. 당시 사면의 모서리돌로 생각되는 것은 없으며 왜곡으로 방형을 이루지 못하나 동북 모서리에는 압력으로 튀어나와 2·3m 이동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 있음. 규모는 남면 63.6m, 동면 62.5m. 기단 주위에는 기대어져 있는 분구지탱석이 각면에 5개가 있음. 계단 수는 관야정 박사의 추정 복원도와 같이 7단이 타당한 것으로 보이나 당시에는 3단만이 겨우 확인되는 정도임. 정상의 12m에 있는 방계단은 그 북단만이 남아 있음.
고분 주위에는 자갈돌이 많아 경작하기 불편할 정도인데 이는 분구의 돌이 떨어져 내린 것도 있지만, 고분의 주변에 깔려 있던 敷石으로 생각되며, 그 범위는 명확치 않음.
고분 북쪽에서 약 90m 떨어져서 높이 1m, 너비 3-5m의 토석혼축의 土堤가 동서로 약 250m가 온전히 남아 있는데 동단은 굽어져 남으로 향하다가 약 220m 지점에서 서쪽으로 꺾어짐. 이 동변은 너비 5m, 높이 약 1-1.5m까지 붉은 점토로 축조하였으며, 대지의 가장자리에 만든 土堤는 지세에 따르기 위해 동쪽을 연 것으로 생각됨. 남변은 지금 거의 남아 있고 畑田과는 다른 적색 점토로 인해 충분히 확인 가능함. 게다가 동쪽 모서리에서 서쪽 모서리의 연결되는 남쪽부분은 지세에 따랐으며, 土堤 밖으로 남쪽으로 2m 정도 떨어진 곳은 경사면임. 서변은 대부분 사라지고 겨우 밭에서 조금 튀어 올라와 보일 뿐임. 다만 북서 모서리는 약 50m 정도가 북변의 土堤에 연결되다가 남쪽에서 약간 서쪽으로 꺾어졌는데 길이가 약 350m로 추산됨.
土疊 내에는 지금 동쪽에 福壽宮이라 불리는 사당이 있으며, 서쪽에는 원래 마을의 지방관청 건물이 무덤에 근접해 있었으며, 동북과 남동에는 조선 민가 10여 채가 있음. 고분 전면에는 새로이 만포간의 철도가 동서로 지나가고, 남면의 土疊은 철도 부지내에 편입되어 있음.
고분 후면은 자리한 북측 土疊의 안쪽 20m 지점에는 동서 98m, 남북 15-18의 橫長한 돌무지(石塊群)가 있음.[소화 10년 조사에서 池內宏과 濱田耕作은 장방형으로 높이 1m의 보고함] 조사 당시 그 남쪽이 접하는 대토갱과 함께 부근 주민의 건축용으로 가져가면서 훼손된 것으로 추정. 이 석괴의 일부는 당시에도 가공한 커다란 돌도 있어 장군총과 천추총 등의 후면에 보이는 것과 동일한 배총군으로 추정됨. 대략 5·6기의 배총군이 붕괴된 것으로 추정됨.[3년 뒤에는 배총의 존재에 대해 부정함]
고분 남방의 180m에 있던 민가 안에 건축지가 있으며, 마름모꼴 무늬의 벽돌과 함께 주연이 높은 고구려 와당이 발견되었음.
태왕릉의 석실 연도가 서쪽으로 향해 있고, 남면 중앙부 앞에는 3m 떨어져 평행한 長石은 拜道 흔적이고, 후면에 석축 배총군 등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남면에는 무엇인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됨. 앞서 土疊 내의 건축지는 고분의 남정면에 있어 태왕릉 제사에 관한 것으로 추정됨. 능의 제사 또는 守陵과 관계되는 건축으로 해석될 수 있음.
광개토왕비의 서쪽과 200m 떨어져 있음. 능비는 태왕릉의 동북 450m의 평탄부에 위치하며, 태왕릉 능역 내에 위치하였다고 추정함.
고분 주위는 해발 198m이고, 고분의 사면은 완만히 경사진 언덕으로 시야가 탁 트인 개활지임.
태왕릉 능역은 광활하고 주위에는 陪葬墓, 陵墻, 祭臺 등으로 둘러싸여 있음.
고분의 남은 높이는 14m이고, 화강암, 석탄암, 산자갈, 장돌 등으로 여러 석재로 축조함. 고분은 크게 계단과 묘실 등 2 부분으로 조성되었고, 고분 밖에는 散水시설과 배수관이 있음.
고분의 계단은 높이 솟아 있는데 석재의 가공이 정밀하고, 축조법은 완벽하며, 사면에는 거석의 보호석이 둘러싸여 있음.
고분은 산언덕 정상부의 황토층 위에 축조되었는데 그 토질은 가는 모래를 함유하고 있어 토질이 치밀하지는 못함. 특별히 기초를 강화하는 처리는 진행되지 않았으나 토층에 1겹의 커다란 장대석을 깔아 기초석을 삼음. 고분 위에는 근 30,000㎥에 달하는 석재의 거대압력과 천 여 연간 침수와 凍融으로 조성된 토질변화로 인해 계단이 밖으로 확장되는 변형이 일어나 보호석 다수가 이미 엎어져 있음. 현재 동북과 서북 두 모서리는 밖으로 크게 돌출되어 있으며, 북반부 고분의 표면은 함몰되어 몇 개의 구덩이가 만들어짐. 이른 시기 고분의 도굴 때 묘실 남벽(南墻)과 남측의 계단이 파괴되면서 더욱 태왕릉 외형은 크게 변화된 상태임.
대형 석실계단적석총으로 고분의 동면 둘레 길이는 62.5m이고 동북 모서리돌이 남아 있지 않음. 북면 둘레 길이는 68m이고 중부에서부터 서쪽으로 가면서 둥글게 밖으로 크게 돌출된 상태임. 서면 둘레 길이는 66m이고 서북모서리돌이 결실된 상태이고 중앙부에서 북쪽으로는 밖으로 확장되어 있음. 남면 둘레 길이는 63m이고 보호석 다수가 온전하고 계단 밖으로의 확장이 비교적 작은 편이나 서남 모서리돌은 점차 밖으로 빠지고 있는 상황임. 남측 두 모서리돌은 모두 수리되어 직각을 보여주는데, 태왕릉은 원래 축조는 여러 단의 계단적석총으로, 남측 길이 62m 정도의 방형 고분으로 추정됨.
현재 남측 계단방향은 255°이며, 묘실 연도의 256° 방향과 기본적으로 일치함.(그림 174)
고분 구조를 보면,

① 계단
A. 계단석
태왕릉의 계단은 산자갈과 화강암 혼축으로 축조됨. 산자갈은 계단 내부를 메우는데 사용되어 가공하지 않고 자연의 깨진 면이 그대로 있음. 일반적으로 큰 덩어리를 아래에 사용하고, 틈 사이는 작은 덩어리로 메움. 틈 사이를 메우는데 잔자갈이 포함되어 있음. 화강암은 대부분 완전 규칙적인 장대석으로 가공되었으며, 장대석이 계단의 면석으로 사용됨. 제2단 이상부터 계단석재는 전면 가공하지 않은 장대석을 사용하였고, 표면의 가공 흔적은 적게 보임. 장대석은 모두 윗면은 작게 다듬고 바닥면은 크게 다듬어 측면에서 바라보면 대략 부채꼴 사다리 모양이 되며, 윗면은 큰 면적의 홈을 만들어서 가장자리가 돌출되게 하였음.
보호가 비교적 잘된 동측과 남측을 보면 1단 계단은 지상에 노출된 축조석이 모두 7층이며, 두께는 1~0.35m로 차츰 줄어들지만 같은 층 석재의 두께는 기본적으로 일치하고 오차는 3㎝를 넘지 않음. 석재의 규모는 길이 1.4~3.2m로 고르지 않으며, 대다수 2m이상이며, 결손된 부분을 갖고 있는데 모두 결손크기는 방형 또는 장방형의 홈이 있고. 그 홈에 비슷하게 만들어진 석재로 가지런히 메움.
고분 동남 모서리 1단 계단 제2층 모서리의 윗면에서 모서리 가까운 곳에 직경 7m, 깊이 5m의 둥근 구멍이 뚫려 있는데 아마 暗榫을 박은 暗卯로 추정됨.

B. 계단 축조법
태왕릉은 계단 4면 모두에서 현재 8단이 현존하는데 아래에서 위로 점차 들여 쌓여 있음. 먼저 둘레를 돌려 계단을 만든 후 그 내부를 자갈로 메우고 상면을 고르게 한 후 다시 그 위에 계단을 쌓음. 남측 1단 계단 중앙부의 동쪽에는 3·4개의 보호석 사이가 일어났으며, 바닥층 석재에는 “工”자형 中線記號가 새겨 있으며, 계단 사면의 中心線과 고분 모서리에는 축조 당시 엄격히 대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음. “工”자형 기호를 묘실 중앙부와 똑바로 마주해 실측하면 동남 모서리돌은 31.8m, 서남 모서리돌은 32.4m 떨어져 있는데 0.6m의 편차는 서남모서리돌이 밖으로 밀려났기 때문임. 태왕릉은 기초가 공고하지 못해 이 같은 계단의 外張과 붕괴 등의 변형이 기타 3면에서도 보편적으로 보임. 이와 같이 동서 양측의 계단 북반부는 이미 심각하게 밖으로 밀려났으며, 북측 제1단 계단은 보호석이 없어져 더욱 붕괴가 심각하고 2단 이상 계단의 대부분 계단석은 붕괴되었으며, 이로 인해 고분 내 積石의 전체적 정황은 밖은 높고 내부는 낮은 경사모양으로 함몰되어 있음.

C. 제1단 계단
계단이 비교적 잘 보호된 것은 동·서 양측의 中段으로 제1단 계단은 높이 약 4m이며 모두 8층으로 축조됨.(그림 10) 지표 위의 제1층 석재는 두께 1m이며, 제2층에서 제7층은 0.7m, 0.6m, 0.5m, 0.45m, 0.42m, 0.36m의 두께로 순차적으로 감소하며, 계단 둘레 모서리 너비는 0.18m, 0.16m에서 0.14까지 감소함.
축조시 상층 석재는 하층 석재의 가장자리 홈에 맞추어있고, 층층히 들여쌓아 가지런한 외관을 보이고 있으며, 상층석이 내부 장력으로 인해 밖으로 밀려날 가능성이 감소할 수 있음.
바닥돌은 모서리돌이 가장 큰데, 현재의 서남 모서리 돌은 길이 2.9m, 너비 1.4m, 두께 1.7m이며, 동남 모서리돌은 길이 2.8m, 너비 2.6m, 두께 1.8m임. 두 돌의 하부에는 모두 높이 0.3~0.5m의 표면이 거친 평면을 수리한 모습인데, 무덤 기초부분은 원래 지면에 노출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음.
제1층 계단 축조석 아래에는 주춧돌이 매장되어 있는데, 이번에 동서 양측의 해부조사에서 모두 발견되었음. 고분 동쪽의 EG3 중 주춧돌의 두께는 1.2m, 서측 WG1중 주춧돌 두께는 1.1m이며, 두 돌은 모두 양끝까지 발굴되지 못하여 길이는 밝히지 못하였음. 그 표면은 반듯하며 계단 면석처럼 중간부분은 부채꼴의 경사면으로 다듬지 않았음.

D. 제2단 계단~제7단 계단
제2단 계단은 1단 계단 내부를 평평하게 메운 후에 안으로 1.8m 위치에 들여쌓음. 단면의 남측 중앙부는 6층으로 축조되었는데, 아래 두 층의 석재는 두께가 0.3m, 중간의 두 층은 두께가 0.25m임. 위의 두 층은 두께가 0.2m 두께로, 2단계단의 총 높이는 1.5m임. 동측 중앙부 석재는 5층인데 두께가 모두 0.3m 정도이며, 그 아래 두 층의 석재는 고분 내 훼손으로 인해 이미 제1단 계단 안으로 매몰되었으며, 2단 계단 맨 위층 석재와 높이 차이는 약 1m 정도가 남.
제3단~제5단 계단은 석재는 2~3층만 남았으며 높이는 0.5~0.6m이고, 석재 크기가 고르지 않고, 아래층 계단보다 석재 가공이 세밀하지 못함. 계단은 점차 들여쌓기 하였는데, 폭은 1.5~1.8m이며, 인접한 계단 간의 높이 차이는 0.5~1m로 고르지 않음.
제6단 이상의 계단은 모두 비교적 낮으며, 상부의 제8단 계단의 일부에 의지해 석재 한 층을 쌓았을 뿐이며 대체로 내부를 메우기 위한 산돌이 쓰임.

E. 제8단 계단 이상
제8단 계단은 지표에서 높이가 약 7m 떨어져 있는데, 그 위에는 길이 10m 정도의 경사를 거쳐 묘실 천정석이 있어 平臺를 이루며, 8층 계단과 묘실 천정석의 평대와의 높이 차이는 3~3.5m, 사면 모두 계단이 보이지 않으나 서북모서리 밖에는 자리가 옮겨진 여러 개의 커다란 계단 돌이 보임. 돌 사이에는 혼합된 깨진 돌을 보면 적어도 3단 계단의 계단석일 가능성이 있음. 따라서 태왕릉 상부 계단의 높이와 들여쌓기 폭을 보자면, 제11단 계단은 평대 높이에 이르기에는 부족한 듯 하여 결실이 있었다고 추정됨. 묘실 천정석 平臺의 길이와 너비는 각각 약 24m이며 정중앙에는 돌기된 묘실이 있음.

F. 계단의 봉석층
현존하는 계단 정성부의 사면은 보편적으로 작은 강돌 및 깨진 산돌이 덮여져 있고, 남측 중앙부의 단면을 보자면, 상부 계단의 봉석층은 0.3~0.5m로 고르지 않으며, 하부 제2단 계단의 봉석은 최고 두께가 0.8m에 달함. 봉석은 내부는 두껍고 외부는 얇은 경사형(斜坡形)으로 하부는 대다수 계단 가장자리에까지 봉해졌고, 상부는 상층 계단석 약 0.15m의 단이 노출되어 있으나 제1단 계단에는 원래 봉석이 없었던 것임.

G. 계단의 입석판
이미 해부해본 남측 1단 계단 중앙부에는 계단석에 달라붙어 있는 다층의 청록색 응회암판이 세워져 있는데, 그 가운데 동단 입석은 3층으로 보이며 서단에는 일찍부터 1~2층이 있었음. 중단에는 서쪽으로 입석 밖에는 또한 1·2층이 1단 계단 윗면(頂面)의 석판에 똑바로 붙어 있는 것이 보편적이며, 그 끝부분에는 대다수 입석판을 받치고 있으며, 앞부분에는 계단 가장자리가 내밀어져 있어 형상의 크기와 인접한 입석은 모두 같지 않았으며 경도된 입석일 가능성이 있음.
제2단 계단에 달라붙어 있는 판석은 모두 6개로 延長은 9m이며 그 형상의 크기는 다르며 대다수 계단에서 일제히 가장자리가 떨어져 있으며 개별적으로 서쪽을 따라 세 번째 판석은 하나의 뿔로 세워져 있음. 이 돌은 길이와 너비가 각각 0.8m 정도이며, 평면은 사다리꼴이며, 그 안쪽에는 계단과의 사이에 1겹의 비교적 작은 판석이 있음. 무너진 돌과 계단과의 사이에서 깨진 돌로 간격을 두었던 것이 아니라고 추측해본다면 원래 봉석하지 않았으며 적어도 입석이 무너진 곳의 앞에는 봉석이 없었기에 2층 이상의 계단에서는 확연히 달랐을 것임.(그림 11)

② 부속시설
A. 보호석
계단 둘레를 현재 15개가 둘러싸고 있는데, 남측 5개, 동측 4개, 북측 2개, 서측 4개임. 석재는 모두 자연형상의 커다란 화강암이며 형태는 편평하고 거대하고 두껍고, 다수가 불규칙하며 가공했다고 할 수 없는 상태임. 보호석은 일반적으로 비교적 넓은 지역에 놓아두는데, 바닥부는 제1단 계단과 1~1.5m 떨어져 있으며, 상단은 계단 위를 비스듬히 누르고 있으며, 기울기는 약 30°임. 보호석 설치 목적은 웅장함과 미관을 추구할 뿐 아니라 특히 주요한 목적은 그 중량으로 계단석의 張力을 상쇄하고 계단의 붕괴를 막아 고분을 더욱 견고하는데 있으므로 사면에 기본적으로 대칭으로 배치함.
남측에 현존하는 5개의 보호석 가운데 하나는 동남모서리에 가까우며 고분 모서리와 4.5m, 제2 보호석과는 5m 정도 떨어져 있으며, 그 밖의 3개 보호석은 모두 7~8m 간격으로 서쪽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다만 모서리부분의 두 돌은 대체로 가까움. 그 제3보호석과 제4보호석은 계단 중심의 “工”자 刻記와 5.4m와 4.8m 떨어져 있어져 있으며, 제5보호석은 고분의 서남모서리와 13m 떨어져 있음. 등거리 배열이라는 점에서 남측 보호석은 원래 6개로 서남 모서리와 5~6m 떨어진 거리에 1개 보호석이 결실되었다고 추정됨.
북측 보호석은 2개가 현존하는데, 1개는 동북 모서리부에 위치하며 지금은 이미 동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며 남측 동남모서리 부근의 보호석과 서로 대칭하는 곳에 위치함. 다른 1개 1보호석은 중앙부에 위치하는데 이미 부서져서 부분적으로 지표가 노출되어 있으며, 그 위치는 남측의 동측방향 시작점의 제3보호석과 대칭하는데 자리하고 있음. 이와 같이 태왕릉 남측과 북측 모두 남북 종축선상의 호석은 두지 않았음. 때문에 양면은 원래 모두 대체로 대칭하는 6개 보호석이 있었을 것임.
동측에 현존하는 4개의 보호석은 동북 모서리로부터 남쪽으로 10.5~11m 간격으로 배열하고 있으며, 동북 모서리에 한 개 보호석이 이미 내측으로 기울어진 것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3개 보호석은 모두 여전히 우뚝 솟아 있음. 제3보호석은 바로 고분 동서 중심축선상에 위치하고 있음. 대칭각도에서 보자면, 고분 동측은 원래 보호석이 5개였으나 지금 동남 모서리부분에는 북쪽 시작점의 제1보호석과 서로 대응되는 1개 보호석이 이미 결실 되었음.
서측에는 4개의 보호석이 현존하는데 그중 3개 보호석은 이미 부서지거나 경도되었으며, 정중앙의 1개 보호석만이 이미 계단에 기대어 서 있음. 중심축선상 입석에 의해 추측하면, 서면 보호석은 5개여야 함. 현재 양 모서리의 깨진 돌은 정중앙의 보호석과 모두 24m 떨어져 있으나 남단 24m 중간에는 1개의 기울어져 서 있는 잔석이 있으며 북단은 상응하는 위치의 보호석이 결실되어 있음.
이상의 내용상 배치를 복원해보면, 태왕릉 남·북 보호석은 종축 중심선상의 간격은 각기 약 12m이며, 동·서측 보호석의 종축 중심선 간격은 각 15m임. 4개의 고분 모서리 양변의 5m 범위 내에는 반드시 좌우 두 개의 거석이 둘러싸고 있어 설계자가 고분 모서리 부분의 보호를 중시했던 것이 드러나고 있음. 보호석의 규격을 보자면, 남측에 사용한 돌은 비교적 커서 보호석은 보편적으로 높이 5m, 너비 3m, 두께 1.5m 내외이고, 가장 큰 보호석은 높이 6m, 바닥 너비 5m, 두께 약 2m, 중량 약 60여 톤임. 이것은 아마 남측 지세가 비교적 낮아 대장력의 원인을 방어할 필요 때문이었을 것임.

B. 散水 및 배수 시설
散水 시설은 고분 아래 해부 구덩이에서 발견되었는데, 전체 길이 0.5~0.6m, 너비 0.25~0.3m, 두께 0.1~0.2m의 석판이 깔려 있으며 그 구축된 사면은 모두 동일함. 퇴적 상황을 보면, 散水 석판은 황토층 표면에 깔았으며 그 위에는 보편적으로 1층의 작은 강자갈을 깔았고 자갈층 위에는 고분에서 미끄러져 떨어진 크고 작은 돌이 있으며 강자갈 역시 散水 조성 부분임을 알 수 있음.(그림 12)
散水 석판은 모두 1단 계단의 제1층 장대석 아래부터 깔았는데 빗물이 무덤 기초를 침식하고 침수를 방지하는 것이 목적임. 散水 석판 위에는 작은 강자갈을 깔아서 큰 비가 연이어 돌 틈 사이의 진흙을 휩쓸어버려 散水 석층이 훼손되는 것을 방지함.
散水시설 바닥층 석판은 동·남측 중앙부 탐색 구덩이에서 평평하게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으며, 강자갈층의 두께는 모두 균일하며 계단에 접근한 곳은 대략 융기한 변형이 있음. 다만 고분 서쪽의 WG1 탐색 구덩이의 안에서 고분 가장자리와 3m 떨어진 곳에서 너비 3.2m, 깊이 0.8m의 구덩이가 있고, 그 위에는 散水 석판이 모두 고분 한쪽을 향해 역방향으로 기울어져 있음. 능묘 적석의 압력 때문인지 혹은 고분 가장자리는 원래 물의 흐름을 따르는 明溝 또는 暗溝가 일찍이 수리되었기 때문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고분 동·서측에 고분과 3~6m되는 곳에 너비 약 1.5m, 길이가 다른 EG2 및 EG3, WG2 및 WG3 등 4개의 소형 탐색 구덩이를 뚫었음. 각 구덩이 안에는 부분적인 황토층 표면이 비록 움푹 파이거나 융기한 것을 볼 수 있으나 부위와 높이는 각기 다른데, 이 같은 고분 주위의 지표 기복은 계단의 함몰 때문이며, 함몰의 부위와 높이는 완전 해당 지역의 침수와 凍融 정도에 달려 있음. 동서측 모두 계단방향을 따르지 않고 남쪽에서 북쪽으로 또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경사진 順水溝를 수축하였으며, WG3를 거쳐 鋪石하지 않은 곳의 아래로 해부해보면 고분 가장자리 황토층의 0.8m 깊이에는 暗溝가 없으며 배수관이 설치되어 있음.
散水 석판의 외연은 남측 SG1 중의 길이 약 18m에 있으며 서남 모서리 WG7 중에 있음. 석판은 가장 멀리 고분 모서리와 28m 떨어진 곳까지 깔려 있고 석판 위에는 모두 크기가 고른 강자갈층이 깔려 있는데 이것은 일전에 알려진 散水 외연의 가장 먼 지점임. SG1 이남의 고분 가장자리와 22m 떨어진 곳, 散水 석판 외측에서는 고분 밖 횡방향(가로방향)으로 배수구가 하나 있는데 散水의 종단일 것임. 구덩이는 석회암으로 구축했는데 殘段 길이 14m, 동북에서 서남으로 이어져 있으며, 동단 방위각은 60°이며, 기본적으로 남측 계단과 서로 평행임.(그림 13) 구덩이 너비 0.6m, 바닥에는 1겹의 석회암이 깔려 있으며, 지세를 따라 대략 東高西低를 띠고 있으며, 석괴가 마주하는 이음새는 맞지 않아 그 틈은 작은 돌로 메우고 있음. 구덩이 가장자리는 단층의 석괴로 열려 쌓았는데 깊이 0.2m이며, 석재의 가지런한 면은 안으로 향하고 밖에는 황토로 평평하게 메웠음.
배수시설은 현재 북벽 축조석 8개가 남아 있는데 남은 길이 3.4m이며, 남벽 축조석은 7개인데 길이는 약 북벽과 대등함. 남벽 밖에는 약간의 강자갈이 드물게 보임. 북벽 외측에는 1층의 축조석이 있는데 석재는 모두 6개로 북벽과 평행하게 놓여 있으나 높이는 북벽이 비교적 꽤 높으며, 이 층의 축조석 북쪽은 강자갈층으로 돌 아래에는 散水 석판이 이어져 있는 것이 보이지 않음. 이 水溝 유적은 뒤이어 동서 양변으로 연이어 열린 SG3와 SG4 중에서는 모두 다시 볼 수 없으나 그 방향·거리·위치경사도를 보면 태왕릉 墓表 배수와 유관한 유적임이 확실함.

C. 배수관(排水涵管)
1989~1990년 태왕릉 보호 담장을 수리할 때 집안시문물보관소에서 6m의 한줄로 된 단을 발견하고 발굴하였음. 배수관은 수키와(筒瓦)를 덮어 서로 접하여 만들었는데 황토층에 만들었으며, 방향은 北偏東 40°이며, 고분 동북 모서리로부터 담장 밖으로 통함. 배수관 위에는 散水 석판과 한층의 두께가 약 60㎝인 부식토가 섞인 강자갈층(河卵石層)이 덮여 있음.
이번 조사 중 고분 밖의 동북 모서리에서 2.5m 간격으로 배수관방향과 수직인 탐색 구덩이 NG1과 NG2를 파내었음. 두 구덩이에서 모두 수키와(筒瓦)가 서로 이어져 덮여진 管道 유적과 묘역 散水 석판이 발견됨. 배수관 방향은 1989년과 동일함. 그 가운데 NG2 안의 배수관 길이는 1.1m이며 남측은 이미 훼손되어 결여되어 있음. 현존하는 암키와(仰瓦)은 모두 3개인데 가장 북쪽의 하나는 위치가 엇갈려 있었으며, 제2 암키와와는 서로 160도 정도의 둔각을 이루고 있으며, 그 위를 덮은 기와는 2개가 있었는데 모두 동측으로 미끄러져 떨어졌음. NG1에서 배수관 위치는 엇갈려 있지 않으며, 覆瓦는 약간 동쪽으로 미끄러져 있으며, 중앙부에는 50㎝ 정도의 결손부분이 있는데 바로 1개 수키와(筒瓦)의 길이임. 배수관 상면에는 1층의 묘역 부석이 가지런하고 질서 있게 깔려 있음. 탐색 구덩이 동측의 석판은 동서향으로 펼쳐 있고 서측은 남북향으로 펼쳐 있어 양자는 서로 人자형으로 접하고 있음.(그림 12, 中) 단면상으로 보면, 양 구덩이의 퇴적은 대체로 일치하며 표토 아래에는 모두 1층의 강자갈을 깔은 고분 둘레의 散水石인데, NG1에서 자갈로 이룬 층의 두께는 0.2~0.9m로 불균등하며 상층의 충적토와는 명확히 구분되며 판석 아래에는 가는 모래를 함유한 황색 점토가 있음. 다만 배수관 부근 구조는 비교적 느슨하며 단면상 기와 옆에는 구덩이를 파낸 흔적은 상대적으로 명확함.
이상 3곳의 유적을 살펴보면, 태왕릉 동북 모서리부분에서는 散水 板石이 깔린 아래에 수키와(筒瓦)를 재료로 삼은 배수관이 설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덧붙여 NG2와 1989년 발굴 조사 때의 배수관은 길이는 적어도 20m이며 묘 아래에서 동북으로 통함. 수키와(筒瓦)가 움직인 상황으로 보아서 防漏의 편차가 심해서 배수관 부근에 조성된 황토층은 끊임없이 침식당하고, 나중에는 배수관이 막혀 사용할 수 없게 되었을 것.
고분 아래 탐색 구덩이의 발굴 과정에서 매우 진중하고 정교한 문물이 출토되었음. 남측 SG1 中部偏西, 墓邊에서 2.9m 떨어진 곳에서 銅鈴 1건을 출토하였는데 그 위에 ‘辛卯年 好太王’ 등의 글자가 새겨져 있음. 지금 서쪽에서 제2번째 보호석 아래에서는 산산 조각난 동제 부뚜막(銅竈) 1건, 주름잡힌 鎏金幔架 1건이 발견됨. 동제 부뚜막과 0.8m 떨어진 계단석 틈 안에서는 案足, 帳鉤, 馬鐙, 節約 등의 銅器와 鎏金器 30여건 출토되었는데 도굴범에 의해 임시 숨겨졌던 부장품으로 추측됨.

③ 묘실
묘실은 계단 상부의 평평한 곳에 축조되었음. 상부의 일부는 상반부는 평대 밖으로 돌출되어 윗너비 12m, 아래너비 15m, 높이 4m 정도의 방대가 노출. 석회암으로 축조한 고분 상부의 독립 건축물. 둘레에는 큰 강돌로 봉하고, 정상부에는 1m 정도 두께로 흙으로 봉함. 봉토 외형은 覆斗形으로 보임.
묘실의 벽체는 내외 두 층으로 나뉨. 외층은 두께 0.1~0.25m의 片狀 석회암판을 채용해 축조했는데 크고 작은 석재를 함께 사용하였고, 그 사이에는 흙을 섞은 작은 강자갈로 메우고 외표면의 석재는 고르고 들여쌓기가 가지런함. 안쪽 벽체는 가공한 커다란 장대석으로 축조, 틈 새 없이 고르게 축조함. 그 서측과 북측은 고분 계단이 심하게 外張하여 벽체 밖으로 봉한 강돌들이 대부분 아래로 미끄러져 내렸고, 지금 묘실 바깥쪽 벽채의 서측면과 동북 모서리가 노출되어있음. 그 가운데 서측의 노출 면적은 너비 9~12m, 높이 약 2m이며 동북모서리의 노출면적은 너비 1~5m, 높이 1.5m임.(그림 14) 남측의 외측 벽체 상부에는 고분 도굴 당시에 훼손되어 蓋石이 밖으로 드러나 있음. 개석 아래로 도굴 구멍이 묘실 안으로 통하고 있음. 도굴 구멍이 줄곧 열려 있다가 1990년 묘실을 수리할 때 비로소 메웠음. 2003년 조사 당시 남부의 도굴 구덩이에 대해 발굴하여 묘실 외벽의 석회암 판석들이 다수 구덩이 안에 흩어져서 발견되었음. 도굴 구덩이의 깊이는 5m, 上口 너비 6m, 下口 너비 2m임. 도굴 구멍 입구는 천정석에서 아래로 높이 4.5m, 너비 1.7~2.3m이며, 상부의 도굴 구덩이와는 서로 통하게 이어져 있지 않음.(그림 15) 고분 계단의 심각한 外張으로 적석은 이미 여러 곳에 함몰갱이 생겼으나 묘실 외벽은 처음과 같은 상태이며 남측은 비록 도굴 구멍이 벽체 바닥까지 내려갔으나 전부 무너지지 않아서 묘실은 별도의 기초를 하였음을 알 수 있음.
1990년 태왕릉 묘실의 발굴 작업은 도굴 구멍에서 시작되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도굴 구멍은 두께 약 5m의 묘실 외벽을 훼손한 후, 묘실 동남 모서리부에서 묘실 안쪽의 벽석을 파괴하였고 남벽 상부에서 묘실로 진입하였음. 남벽은 파괴를 당한 면적이 2/3에 달하며, 동벽의 안쪽 벽석이 훼손되었음. 內 벽석을 제거한 후에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石槨인데 도굴범은 석곽을 파괴한 후에 비로소 묘실내로 진입함.
묘실 평면은 장방형으로 길이 3. 24m, 너비 2. 96m, 높이 3m임.(그림 16) 동벽의 축조석은 9층이며, 그 외 세 벽은 각 10층이며, 석재는 모두 다듬은 장대석으로 길이 0.8~2.8m, 두께 0.16~1.2m로, 틈을 메웠고 표면은 다듬는 처리를 거쳤음. 제6층 석재부터는 남·북 양측에서 점차 들여쌓기를 하였으며 묘실 천정 묘頂部)에서는 3단 평행고임을 함. 묘실정상에는 대형 화강암 하나가 덮여 있는데 석괴의 평면은 타원형으로 남북 길이 6m, 동서 너비 4.7m, 두께 0.6~0.9m이며, 그 상부에는 황토를 덮었음.
묘실 내에는 석곽을 두었는데 석곽 상반부는 이미 파괴되었고, 바닥부는 온전하나 중앙부에 길이 1.4m, 너비 1m 이상 범위가 파괴된 상태이며 파괴된 흔적의 깊이는 묘실 바닥석에 이름. 석곽의 바닥은 묘실에 비해 작으며, 사면은 묘실과의 사이에 평면은 0~12㎝의 틈이 있으며, 틈은 가늘고 작은 강자갈로 가득 메워져 있음. 곽 바닥과 묘실 바닥의 사이에는 중앙단층에서 보자면 두께 6㎝의 작은 강자갈이 한 겹 깔려 있음. 발굴 당시 묘실 북벽 중앙부에는 묘실 바닥에서 높이 1.2~2m 되는 곳에 길이와 너비 각 0.8m, 석벽이 파고들어간 약 0.5m 깊이의 구덩이가 발견되었고, 묘실 내에서는 頭圓尾方의 길이 0.5m, 너비와 높이 각 0.15m인 소형 석재가 하나 발견되었는데 아마도 석곽 측벽을 받치기 위해 구멍에 끼워 넣는 돌장부(石榫)였을 것임.
묘실의 서벽 정 중앙에는 서쪽을 향한 연도가 있는데, 연도 길이 5.4m, 너비 1.84m, 방향은 서남, 방위각 256°임. 그 바닥부에는 묘실 바닥과 서로 평행하며 많은 대석판들이 깔려 있으며, 묘문 가까이에는 2단 층계를 깔았음. 연도의 양측 벽은 다듬은 석회암 석재로 축조했는데 안에서 밖으로 축조석은 6~8층으로 고르지 않음. 제6층 석재에서 연도 측벽은 들여쌓아졌으며 1층 평행고임을 형성함.
천정 위에는 4개의 대석판이 덮여 있으며, 석판은 3단으로 나뉘어 안에서 밖으로 복잡하게 점차 올라가는데 내측의 높이 1.78m, 중단 높이 1.98m, 外口處 높이 2.36m임. 모든 밖으로 노출된 석재의 모서리는 사면을 모두 경사지게 다듬어 태왕릉 묘실이 정성들여 설계시공을 거쳤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음. 고임 석재는 동단은 묘실 서벽 0.13m에서 놓이고, 북벽의 돌장부(石榫)과 같이 석재의 상부 테두리를 모두 호형으로 만들어졌는데 후일 석곽 복원의 정황상 이 두 개 석재의 뾰족함은 마치 석곽 坡水石의 下緣 및 앞의 벽을 떠받치는 듯하며 그 안정성이 증가함.
연도는 두 곳에서 폐쇄함. 먼저 안쪽 폐쇄는 안에서 밖으로 화강암 석재를 사용하여 막음. 막음 석재는 모두 길이 0.8~0.9m, 너비와 높이 모두 0.4~0.5m의 장방형으로 가공하였으며 대다수 頭大尾小狀으로 만듦. 막을 때 넓은 것으로 안쪽으로 향해 연도를 따라 장축방향으로 차례로 쌓음. 네 개를 횡으로 1열을 두었으며, 위로 4층이 쌓아졌으며, 이와 같은 것이 모두 6개임. 연도 밖에서는 둥근 작은 강자갈로 메움. 연도 밖에서 폐쇄는 화강암과 석회암으로 혼합해 막았는데 내외 양 층으로 나뉘었으며, 하부 두께는 약 1m임. 화강암은 내층에 다수 놓여 있는데 내층 석재는 정연하지 않고 가로·세로 방향으로 모두 놓여 있으며, 연도 내의 봉한 돌도 정연하지 않았음. 외층은 기본적으로 석회암판으로 만들었는데 축조는 확실히 서투르지만 묘실 외벽과 서로 평행함.
이외 언급해야 할 것은 2003년도 도굴 구덩이 발굴 조사 당시 길이 1~1.5m, 너비 0.4~0.5m의 불규칙형 석회암이 여러 개 발견되었는데 모두 圓弧形의 안쪽에 홈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석재와 틈새를 맞추도록 특수 가공한 것으로, 천정석 주변에서 사용됨. 태왕릉 묘실 頂部에는 완만하고 둥글게 경사진 평대가 있어 고분 위의 건물을 세웠던 것으로 추정됨.
묘실 벽체의 사면 둘레는 모두 완만하며, 서·남·동면은 평편하면, 서·남측에는 비교적 많은 석곽 조각이 있고, 동·북 양측에는 대량의 수키와와 암키와 잔편들이 널려 있음. 이외 이번 조사 중에 평대 남측에서 서쪽으로 치우친 곳에서 불에 타서 녹은 용석 1건을 채집함. 다른 서측에서는 용도와 2m 떨어진 곳에서는 몇 개의 장대석 아래 빈 곳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石箱 등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번에 발굴하지 못함.

④ 석곽
1990년 묘실 내 2m 두께의 깨진 돌과 충적토에서 발굴조사하면서 발견하였음. 태왕릉의 석곽은 서로 끼워 맞추는 구조의 조립식 맞배지붕식 가옥형상임. 맞배지붕석과 네 벽, 문틀과 바닥 등 17개 석재로 이루어졌으며, 석곽 안에는 棺床 2개가 설치되어 있음.(그림 17) 고분 도굴 때 석곽과 그 안에 설치된 2개 관상은 모두 이미 훼손되었으며, 바닥과 벽석의 일부는 원래 위치에 있으나 그 나머지는 교란되어 묘실 내외에 방치됨. 발굴 중에 모두 잔편 300여 건을 수집했는데 근 2/3의 잔편이 각 부위 부재의 복원에 도움이 되며 짜 맞추는 과정을 거쳐 17개 부재의 형상 및 구조와 장부(榫卯) 정황 모두 이미 분명해짐. 석곽은 회록색 泥灰巖質이었으며 그 재질은 세밀하고 경도는 높지 않아 자르거나 장부(榫卯) 제작하기 쉬움. 잔편은 모두 가장자리가 가지런하고 표면이 다듬어져 매끄러우며, 장부(榫卯)는 方·圓이 되며 전체의 제작은 정밀함.

A. 正脊石(용마루석) : 1개
중요한 부위의 脊頭·脊身 모두 3단이 남아 있음. 가운데에 脊이 올라와 양측이 대칭으로 뿔이 나옴. 이전부터 너비와 두께는 이미 알았으며 길이는 양측 경사면석과 길이가 같아야 하는데 양단 길이는 전후 측벽에서 나옴. 복원후의 正脊石 길이 2.91m, 너비 0.5m, 두께 0.4m이며, 용마루 상부 중간이 올라오고 나머지는 경사각을 이룸. 바닥면은 평평하며 걸쇠(卡)가 전후 벽석을 고정시켜 전후 이동이 불가능하도록 양단은 모두 높이 3㎝의 凹棱이 생기었음. 바닥면의 양측에는 100°의 通長斜槽가 파여 있으며 지붕돌의 상부와 각도가 서로 들어맞음.(그림 17-A)

B. 坡水石(지붕돌) : 2개
좌우 대칭의 同形으로 남측 지붕돌은 일찍이 전후 양단에 존재하였고 뒤쪽 것의 단면은 온전함. 앞쪽 것은 외측 모서리만이 짝이 맞음. 지붕석의 바닥면에는 양측 벽과 만나는 부위에 홈이 있음. 측면 벽석과 마주 접하는 곳에 깊이 1㎝이고, 길이는 측벽석보다 길고, 너비는 측선 두께와 서로 비슷한 얕은 홈이 있어 끼워서 맞춤. 지붕석 앞쪽에는 너비가 앞쪽 벽체의 위부분과 접하도록 얕은 홈이 새겨서 있음. 홈의 길이는 확인할 수 없지만 전벽을 근거로 복원할 수 있음. 홈의 하측에는 너비 8㎝, 길이 60㎝, 깊이 3㎝의 긴 구멍이 있어서 전벽의 측변과 지붕석이 서로 접하고, 지붕석의 뒷면에는 너비 8㎝, 깊이 3~4㎝의 긴 구멍(長卯)이 2개 파여 있는데 그 중 중간에 가까운 구멍은 비교적 짧고 길이는 27㎝에 불과함. 가장자리에 가까운 구멍은 길이 50㎝인데 그 주위에는 길이 90㎝, 너비 15㎝, 깊이 약 1㎝의 넓은 홈이 뚫려 있어 서로 끼워 맞추어 뒷벽과도 맞물릴 수 있음. 지붕석의 길이는 석곽의 원래 위치가 움직이지 않도록 전후 양 벽 위에 돌을 끼워 맞춤. 복원 후의 지붕석은 길이 2.91m, 너비 1.58m, 두께 0.09~0.14m이며, 위의 표면 양단과 용마루에 근거한 한 면이 모두 다듬어져 경사면을 이룸. (그림 17-B)

C. 側壁石 : 2개
좌우 동형으로 대칭. 북측 입석은 이미 도굴범에 의해 중간이 파괴되어 殘石이 2개로 나뉘어져 원래 위치에 움직이지 않고 세워져 있는데, 파괴된 곳에는 석곽 받침 위의 하나의 긴 구멍(長卯)이 노출되어 있음. 남측 壁石은 일찍부터 원래 위치에 있었으나 상부는 파괴된 상태임. 잔편 중에서 그것과 맞아떨어지는 상반부를 발견했는데, 그 길이·너비·두께 및 장부구멍(榫卯)의 정황 등을 모두 알 수 있음. 복원 후의 측벽석의 길이 2.38m, 外高 1.28, 內高 1.36m, 두께 0.16m이며 윗면은 경사면을 이룸. 경사면은 올려본 각이 28°로 지붕석의 경사각도 맞음. 측벽석 3면에는 장부(榫)가 있는데 양 단면 위에는 각각 너비 8㎝, 높이 4㎝의 긴 장부(長榫)가 있어 석곽 전후 양 벽과 연접하고 있음. 장부(榫)의 길이와 위치는 양단이 좀 다른데, 위치는 상대적으로 위에 치우쳐 있음. 측벽석의 바닥면에는 전후 2개의 긴 장부(長卯)가 있어 석곽 받침 구멍으로 끼워 넣을 수 있는데 장부의 길이(榫長) 70㎝, 너비 7㎝, 높이 4㎝이며 위치는 조금 석곽 내측으로 치우쳐 위치함.(그림 17-C)

D. 後壁石
길이 2.84m, 높이 2.06m, 두께 0.16m의 온전한 석판으로 제작되었고, 평면은 양 빗변의 육각형으로 만들어짐. 1990년 발굴당시 하반부는 일찍이 원래 위치에 있었으나 상반부는 이미 파괴되었고 잔편은 비교적 무거웠으며 뒤에 맞춰졌는데 이미 양측 빗변상의 두 장부(榫)와 지붕석 바닥면의 홈(卯槽)은 어떻게 들어맞게 하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었음. 후벽석 아래에는 좌우대칭의 두 개 장부(長榫)로 석곽 받침과 연접하였는데 장부(榫)의 길이 90㎝, 너비 7㎝, 높이 5m임. 측벽과 연접한 곳에는 긴 홈이 있는데 홈의 길이 92㎝, 너비 8㎝, 깊이 4㎝임. 경사면 상에는 지붕석과 연접하는 2개의 긴 장부(長榫)가 있는데 아래에 놓이는 장부(榫)의 길이 48㎝, 너비 8㎝, 높이 3㎝이며, 위에 놓이는 장부(榫)의 길이 26㎝, 너비 8㎝, 높이 4㎝임. 正脊과 연접하는 곳은 평면으로 상단은 마침 용마루석 끝의 凸棱 안으로 끼워 넣음.(그림 17-D)
前壁 구조는 비교적 복잡하여 6개의 석재로 조성되는데 중간 하부는 鑲門石, 그 위에는 托脊石, 옆에는 각기 1개의 삼각형과 1개의 사다리형 承頂石으로 구성되어 있음.

E. 鑲門石
양문석 길이 214㎝, 높이 169㎝, 두께 18~22㎝이며, 하부 정중앙에는 “冂”形 홈을 파내어 문을 끼웠으며, 상문에는 凸台가 있음. 冂形 홈의 폭으로 문의 폭을 알 수 있다. 너비 8㎝, 깊이 6㎝의 “L”形으로 홈을 내었고, 상부의 홈 양단에는 문을 고정시키는 문확을 대칭되게 뚫었다. 문틀의 홈은 門楣에 가깝고 길이 1.67m, 너비 0.2m의 장방향으로 만들고, 경사지게 다듬고, 장축방향을 따라 등거리로 너비와 깊이 모두 2㎝의 긴 홈 2개를 내었다. 양문석과 석곽 받침은 2개의 대칭하는 긴 장부(長榫)를 통과하여 연결시켰다. 장부(榫)의 길이 20㎝, 너비 8㎝, 높이 4㎝이다. 양측의 이마 받침석과 연접되는 곳에 장부 구멍 없이 평면상으로 서로 맞추어져 있음. 양문석 상부의 凸台 양측의 평면에는 긴 구멍이 있는데, 구멍의 너비 8㎝, 길이 45㎝, 깊이 3㎝이며, 삼각형의 이마받침돌로 서로 접하고 있음. 중앙부에는 3조로 불균등하게 나뉘어 서로 짜 맞추도록 되어있으며, 그 위로 지붕받침석과 서로 접하고 있음. 서로 짜 맞추는데 있어 돌출부는 양측에 두었는데 각각 길이 12㎝, 높이 5㎝임. 중간에는 구멍(卯)이 있는데, 구멍의 길이 55㎝임. 안에서 보면 돌출부(陽榫)는 중간에 놓여 있으며 지붕받침석 아래 방향의 들어간 곳(陰卯)의 안에 맞추어져 있음. 따라서 매우 견고하게 맞추어져서 변형이 잘 안됨.(그림 17-E)

F. 托脊石(지붕받침석)
원래 길이 80㎝, 높이 36㎝, 두께 17㎝의 육각형 석재임. 지금 좌우 양 측변은 모두 잔편이며 우측 아래 모서리는 결실되어 맞출 수 없음. 다만 인접한 돌 장부구멍(石榫卯)과 후벽석의 형상에 근거하여 복원할 수 있음. 그 위의 지붕받침석은 윗면이 비교적 평평하며, 상단은 脊端의 凹棱에서 맞춤. 하단과 양문석이 서로 인접한 바닥면은 좌우 각각 길이가 다른 半陰陽榫을 만듦. 중부 외측은 陰榫, 내측은 卯로 삼고 양변 외측은 卯, 내측은 榫으로 삼음. 중간의 陽榫의 길이 54m, 너비 9m, 높이 5m이며 양변 半卯는 각각 길이 12㎝임. 좌우 양 측변은 모두 承頂 三角石과 서로 연접해 있으며 삼각석 측면의 榫에 근거하여 그 측면이 길이 16㎝, 너비 7㎝, 깊이 4㎝의 直卯이며 석곽 내 한 면에 치우쳐야함을 알 수 있음. 承頂石 정상부 측변 사이의 경사면은 양측 지붕돌과 서로 접하나 두 돌은 모두 榫卯와 卡槽가 없음.(그림 17-F)

G. 三角石
좌우 각 1개이며, 위치로 보면 마치 단순히 공백을 메우기 위해 설치한 듯한데, 이 돌은 양문석 혹은 托脊石과 한 개를 이루지 않음. 아마도 가공제작이 쉽지 않았기 때문으로 추정됨. 두 돌 가운데 북측의 것은 온전한 형태로 길이 43㎝, 높이 28㎝, 두께 17㎝이며 평면은 截尖 직각의 삼각형이며 양 직각변은 각각 너비 6~7㎝, 길이 16~45㎝의 불균등한 長榫를 갖고 있음. 별도로 托脊石 및 양문석과 맞춤. 빗변은 榫卯가 없으며 직접 坡水石 상부의 넓은 홈(寬槽) 안으로 끼워 맞춤.(그림 17-G)

H. 承頂石(이마 받침돌)
좌우 대칭으로 각 1개씩 양문석의 양측에 세워져 있음. 1990년 발굴 당시 남측 돌은 기본적으로 완전하였으나 다만 좌측 상부 모서리가 손실되었으며, 북측 돌 상부는 전체가 파괴되어 후에 대부분 맞추지 못했으나 지금 남측 돌과 지붕석 아랫면에 근거하여 대칭원리로 복원함. 이마받침돌을 지붕석을 지탱하며, 윗면의 중앙부의 위쪽으로 치우친 곳에는 長榫이 있는데 榫의 길이 28㎝, 너비 8㎝, 높이 3㎝이며 대체 지붕면석 아랫면 하부의 卯보다 작음. 아랫면은 길이 33㎝, 너비 6㎝, 높이 4㎝의 長榫을 가지고 있으며, 석곽 받침 외측의 卯와 연결되어 있음. 그것은 양문석과 평면으로 연결되어 榫卯를 사용하지 않았으나 다만 내측면과 측벽석의 연결이 길쭉한 槽卯를 통과해 연결됨. 槽卯의 길이 90㎝, 너비 7㎝, 깊이 5㎝임.(그림 17-H)

I. 底座石(바닥석)
가로로 놓여진 3개의 판상석으로 구성됨. 판상석은 길이가 같고 두께가 같으나 중간의 돌이 비교적 좁은데 槽卯를 두 개 대석 사이에 박아 넣음. 석재가 가공제작하기 어렵기 때문인지 채취의 변통방법을 사용함. 받침은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나 중부는 1개의 깊게 패여 깨졌으며 중간의 박히는 부분이 둘로 절단되었는데 동측, 즉 후부의 돌은 훼손됨. 바닥석은 길이 3.1m, 두께 0.3m, 총 너비 2.83m이며 그 가운데 앞의 돌은 너비 1.1m, 뒷돌은 너비 1.34m임. 두 돌 사이는 33㎝ 떨어져 있고 각기 너비 50㎝ 凹槽가 파여 있는데 중간의 돌을 박은 후 네면 둘레는 경사면을 없애고 표면을 평평하게 다듬고 갈음. 석곽 바닥에는 한 겹의 작은 강돌을 깔았고, 중앙부에는 길이 2.5m, 너비 2.24m의 관상을 놓은 곳이 있음. 이곳은 낮은 홈이 파여 있어 주변보다 낮으며 4개의 구멍이 뚫려 있음. 4개구멍은 모두 원형으로 직경 16㎝이며 곽내의 배수의 고려와 관련되는 것으로 추정됨. 바닥의 사면 둘레의 가장자리에는 홈을 파고 모서리를 다듬어 돌기한 평평한 면을 형성하였다. 면은 너비 23~24㎝, 높이 5㎝로 그 위에는 곽실 네 벽을 고정하는데 사용된 기다란 槽卯 8개가 있다. 卯의 너비 6~8㎝, 길이 20~90㎝, 깊이 4~5㎝로 고르지 않다. 받침석)의 앞 가장자리(서쪽) 중앙부에는 아래로 너비 8㎝, 깊이 6㎝의 鑲門槽가 파여 있고 둘레 가장자리는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문턱 모양(門檻狀)을 띄고 있음. 그 홈(槽) 안에는 양단의 문지도리(門樞)가 둥글게 파여 있는데 그 둥근 모양의 앞에는 호형의 얕은 홈(槽)이 뚫려 있어 문(門扉)의 上軸을 설치한 후에 호형의 홈(槽)을 따라 下軸을 문지도리로 밀 수 있도록 설계함.

J. 門扉石
좌우 2개로 구성됨. 석재는 비교적 얇음. 도굴 당시 심하게 훼손되어 대다수 조각편으로 깨어졌고 큰 것은 10여 편에 불과함. 잔편 중에 한쪽 문은 上緣이 맞출 수 있고 下緣은 문지도리(門樞)가 온전한 형태임. 鑲門의 홈(槽)의 길이와 너비, 또한 이미 맞춘 좌측 문 상연에 근거하여 복원한 문의 좌우 양측의 너비는 동일함. 한쪽 문비석의 높이 1.2m, 너비 0.59m, 두께 0.06m이며, 만나는 곳은 半卯로 맞물리며, 외측 가장자리는 모두 둥글게 다듬었음. 상하에는 각각 높이 2㎝, 직경 3㎝의 원형 문지도리(門樞)가 1개씩 있음.(그림 17-J)

K. 棺床
2개가 석곽 내에 남북으로 병렬하여 놓여 있음. 이른 시기 도굴될 때 모두 부수어 깨뜨렸으며 잔편은 현장에서 외진 곳에 쌓아 두었음. 1990년 발굴조사 후에는 비교적 커다란 잔편은 즉시 모아서 맞추었는데 두 棺床은 모두 결손이 많지 않았음. 모아서 맞춘 정황을 보면, 2개 관상은 모두 1개의 돌로 제작되었으며 석재 크기는 서로 다르고 세부 역시 차이가 있음.
남측의 관상 석재는 비교적 얇아서 길이 2.2m, 너비 1.2m, 두께 0.1m이며 외측 가장자리 모서리는 모두 각을 없애지 않았음. 중앙부에는 목곽 두는 곳에 얕은 홈이 파여 있는데 홈의 깊이는 2㎝이며 주위 둘레는 모서리를 없앴고 경사졌음. 표면은 다듬어서 매끄러움. 관상 받침은 5개의 頭形 方足이며, 方足은 중간의 비교적 커다란 것이 윗너비(上寬) 30㎝, 아랫너비(下寬) 19㎝, 높이 8㎝이며 네 모서리의 것은 점차 작아져 윗너비 27㎝, 아래너비 17㎝, 총 높이 18㎝임.
북측의 관상 석재는 비교적 두터우며 제작은 기본적으로 동일하나 5개 방족은 모두 윗너비 27㎝, 아랫너비 20㎝의 방형이며 다리 높이는 7㎝인데 바닥 모서리의 전후 둘레에는 모두 1개의 가는 棱이 파여 있음. 관상 석판 두께는 12㎝, 중간의 凹槽 깊이는 2.5㎝임.(그림 17-K)

L. 곽실의 축조과정
각 부위의 석재를 복원한 후에 조립한 곽실은 아래와 같음.(그림 197) 석곽 각 부위의 결구 특징에 의거하여 그 조립과정을 추측하면, 1) 석곽받침 모으기. 2) 후벽 안치. 후벽석(後壁石) 체적이 비교적 크기 때문에 榫卯를 맞출 때 측벽석과 달리 이동시키는 것이 쉽지 않음. 3) 뚫린 홈(槽)은 榫에 맞추어 양 측벽을 안치. 4) 관상 안치와 함께 목곽을 조립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거대한 관상은 석곽의 작은 문을 통과할 수 없음. 5) 前壁을 세우는 순서는 아래에서 위로함. 6) 卯에 맞추어 지붕면석을 덮음. 7) 正脊石으로 누름. 8) 門扉 안치. 조립후의 석곽 각로함. 엄밀하게 덮어씌우는데 전후좌우에 모두 각기 다른 방향의 榫卯, 卡槽와 연결되어 있고, 외육 덮묘실의 榫벽 사이와의 틈에 작은 돌들로 가득 채웠고, 흔들리거나 榫이 이탈할 가능성은 거의 없음. (그림 18) 석곽 각 부위는 그 양측 및 후벽을 조립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덮묘실에서 협소한 공간 내부에서 완성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석곽의 안치는 묘실의 축조와 동시에 진행되어 卄槽로 추정됨. 묘실의 기초가 완성된 후에 먼저 석곽을 안치하는 것이 공간과 조명을 충분히 얻을 수 있을 것이며, (묘실) 세 측벽석이 다 세워진 후에야 묘실축조가 완성되었음. 묘실 담벽이 높아 지붕면석과 용마루석을 안치하는데 매우 유리하였을 것임. 지금 묘실 내벽의 몇 군데는 밖으로 돌출하여 석곽벽과 덮여진 石榫을 떠받치고 있는데 역시 이때 축조되어졌을 것임. 묘 내 마무리 후, 천정돌을 덮기 시작하고, 연도만을 남기고 최후의 안치를 기다림. 구축과정상, 묘상의 건축은 안장 또는 광개토왕비 중의 갑인년 ‘遷就山陵’ 이전에 완성했을 것임.
복원후의 石槨 面寬 3m, 內寬 2.68m이며 두 처마의 최대 너비 3.19m임. 縱長 2.74m, 內長 2.4m, 용마루 最長 2.92m, 전체 높이 2.48m, 內高 13.5~20.2m임. 석곽문의 너비 1.6m, 높이 1.9m임. 두 棺床은 잔석 더미가 놓인 자리에 근거하여 복원해 두었는데, 좌측(북쪽)은 大棺床을 두고 우측(남쪽)에는 小棺床을 두었음. 이것은 남녀 묘주를 부장한 것으로 추정.
출토유물과 관련하여 1990년도 구덩이 속의 유물은 앞에 “G”자, 2003년 고분 아래 돌 틈과 보호석 아래의 구덩이 속의 유물은 앞에 “D”자, 고분 아래 배장묘 속의 유물은 앞에 “P”자를 붙임. 유물번호 맨 앞의 숫자는 출토연도임.

 

역사적 의미

 

태왕릉은 대형의 석실계단적석총에 속함. 형식상, 태왕릉은 지표로부터 10-11m 높이의 평대를 조성한 뒤에 복두형의 묘실을 중앙에 축조하고 봉석한 뒤에 조성된 이중의 복두형의 외관은 이미 알려진 왕릉 형식에서는 많이 보이지 않는 완전 새로운 형식임. 구조상, 태왕릉의 묘실과 계단은 동시에 축조되었는데 계단은 묘실의 높이를 증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묘실 기초의 보호에 더욱 중점을 두는 것임. 이와 동일한 비교적 이른 계단식 묘에서는 동일하지 않은 점이 있는 듯함. 전체적인 구조를 보면, 태왕릉은 넓은 묘역, 배장묘, 제대, 묘지 등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왕릉의 대표로 의심할 여지가 없음. 이외에도 넓은 범위에 화강암을 사용하였고, 석재는 가공하여 가장자리에 몰딩을 주었음. 산수·배수·보호석을 설치하는 합리성 등이 고구려 적석총 가운데 독보적 지위를 보여줌.
과거 알려진 바에 의하면 집안 일대에서 석실이 있는 왕릉은 태왕릉, 천추총, 장군총뿐이었음. 세 왕릉을 비교하면 장군총이 위에서 아래까지 석재 가공이 정연하고 묘실 바닥에는 기초시설이 건축되어 있어서 축조 형태가 가장 아름다움. 천추총은 태왕릉의 규모와 그 차가 크지 않지만 석재가 비교적 조잡하고 장대석 표면의 가공이 태왕릉이나 장군총에 미치지 못함. 따라서 고분 형식에 따른 축조 시기는 태왕릉이 천추총과 장군총 사이에 위치함.
묘상 와당을 보면, 천추총은 단판의 6등분 연화도안을 흔히 볼 수 있으며 일정량의 권운문 와당도 있음. 장군총에는 8등분 연화와당만이 있으며, 태왕릉은 6등분의 연판이 주를 이루고 소량의 작은 6등분 연판과 8등분 연판이 있음. 즉 태왕릉의 연화와당은 천추총과 장군총의 연화와당이 변화하는 중간단계에 위치하고 있음. 따라서 태왕릉은 평양천도 이전의 세 왕의 중간에 위치함.
2003년 조사 당시에 태왕릉 주위에서 “辛卯年, 好太王…”이란 명문이 새겨진 청동방울을 발견되었는데 태왕릉의 묘주가 광개토대왕임을 확인할 수 있음. 광개토왕릉비문에 의하면, 호태왕은 “28세에 왕위에 올라 39세에 사망”하였는데 그 재위 연도는 신묘년과 부합함. 즉 광개토왕이 왕이 된 후에 방울을 제조한 것이 타당함. 이전에 방울을 만들면 방울 위에는 호태왕이랑 號가 있을 수 없고, 차후에 만든 방울이라면 신묘년이란 글자가 있을 수 없음. 지금 방울에는 동시에 “辛卯年好太王”이란 6자가 새겨져 있는데 우연히 맞은 것이 아니라 漢代에 많이 보이던 전문 설비와 같이 매장한 東園 秘器임. 호태왕 “宴駕”의 해는 412년이며, 이 때 집안에 왕릉을 건축할 자격이 있는 이는 장수왕임. 한편 집안에는 태왕릉보다 왕릉 구조로 더욱 완비된 장군총이 있기 때문에, 장군총은 장수왕릉임을 확인할 수 있으며, 태왕릉은 곧 광개토왕릉임. 광개토왕릉이 처음 축조되기 시작한 연대는 비록 단정할 수 없으나 391년이며, 사용기간은 확실히 東晋 安帝 義熙 10년 곧 414년으로 광개토왕이 “遷就山陵”하여 안장한 때임.
중국학계에서는 광개토왕릉비와 태왕릉을 결부시켜 태왕릉의 묘주를 광개토왕으로 보고 있으며, 한국학계에서도 이에 동의하는 견해도 있지만(공석구, 조법종), 부장된 등자의 연대나 고분의 입지조건, 연화문 와당의 편년 등을 근거로 고국양왕릉으로 보는 입장도 있다(이희준, 여호규, 임기환). 이외에도 고국원왕의 무덤으로 보기도 하지만, 4세기중엽 이전으로 연대가 올라갈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태왕릉 묘상 건축을 보면 묘상 기와편은 비교적 많으며, 묘비의 1/2 면적에서 암키와 10.6㎡와 수키와 0.9㎡를 채집했음. 암키와 잔편은 弧度가 작기 때문에 그에 상당한 면적에 대한 추산은 오차가 크지 않음. 단층 암키와는 평균 두께가 8㎝임을 고려한다면(틈과 弧度 포함) 그 면적은 약 130㎡가 펼쳐졌으며, 아직 채집되지 않은 다른 절반이 더해져 대략 250㎡ 정도에 이름. 태왕릉 묘실의 정상부 면적은 북측변의 길이가 14m로 추산되어 196㎡ 정도이며, 묘실 밖의 평대 면적은 400㎡를 초과하지 않음. 만일 수키와가 덮고 있을 때의 중복 면적을 살펴 다시 암키와 사이에서 상호의 연결을 제외한다면 이 기와들이 묘실 밖의 평대를 모두 덮는 것은 전혀 가능성이 없음. 때문에 태왕릉의 묘상 건축이 덮고 보호하는 것은 오직 묘실 부분이라고 추정됨.
묘 위와 묘 아래의 적토를 발굴하는 중에 釘, 鋦 및 기타 목조 구조상의 금속 부품의 선택에 주의하여 결과적으로 꺽쇠못(鋦釘) 1점, 鐵釘·鐵泡釘 8점이 발견되었음. 이에 의하면 기본적으로 태왕릉의 묘상에 목조 구조의 건축이 없었다고 인정할 수 있음. 또한 묘상 적토와 노출된 돌 중에서 백회와 거칠게 섞인 흙덩어리를 매우 보기 드물기 때문에 대량의 암키와는 황토와 백회를 충분히 이용하여 직접 묘정 위에 발랐다고 추정됨.
일제시대부터 광개토왕릉비와 태왕릉 및 장군총의 관계에 대해 묘주 문제와 연관되어 여러 설이 제기됨. 지내굉은 태왕릉에서 출토된 명문 전돌의 ‘태왕릉’이란 표기에 주목하여 광개토왕비와 결합해 태왕릉을 광개토왕에 비정하였고, 등전량책 등도 이 견해에 동조함. 관야정은 장군총을 호태왕릉에 비정하는데 광개토왕릉비의 위치를 주요 근거로 삼고 있음.
2003년에 발굴 조사한 중국은 광개토왕비를 율령비로 삼고 있음. 태왕릉은 완전한 능역에 가까우나 광개토왕비는 그 안에 존재하지 않음. 광개토왕비와 태왕릉 사이는 EG26-EG28 탐색구덩이를 파고 조사하였으나 “神道”· “參道” 등이 일정한 규격의 통로를 갖추고 있지 않으며 이것은 광개토왕비가 묘비라는 설을 부정하게 함. 과거의 연구에서 일찍이 많은 학자들은 광개토왕비와 장군총의 마주보는 방향이 일치한다는 점에 주목하였으나 결론은 다양하였음. 광개토왕비 비문에 기재된 4항의 내용을 보면, 첫째 항은 건국설화가 서설을 이루고 있으며, 둘째 항은 광개토왕의 죽음이 서술되었으며, 셋째 항은 광개토왕의 공훈에 대한 찬송이며, 넷째 항은 수묘 연호에 대한 율령이 새겨져 있음. 4항의 내용은 마지막의 3·4항의 기재가 가장 상세함. 비 건립의 동기는 광개토왕이 살아 있을 때의 敎言을 새기는데 있었는데 교언의 내용은 수묘 제도의 운용방안이었음. 따라서 광개토왕비는 율령비에 해당하며, 능역에 포함되지 않는 것 역시 당연함.

 

자연환경

 

고분군 서쪽이 집안 시내에서 약 4㎞ 떨어져 있는 우산 남쪽 기슭의 작은언덕 위에 위치함. 고분 중심지 지리좌표는 동경 126˚ 12’ 35.5”, 북위 41˚ 8’ 30.7”임.
고분 남측 100m에는 집안-청석간 도로와 집안과 조선 만포시를 연결하는 철로가 각각 있으며, 고분 북쪽으로 鄕路가 있음. 고분 서쪽에는 고랑이 있는데 속칭 馬蓮河라는 시냇물이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들러 들어감. 고분 동북 360m의 도로변에는 태왕릉과 밀접한 상관을 지닌 광개토대왕릉비가 위치함. 태왕릉 500m 범위 내의 고분들을 보면, 우산 540호모료 편호된 대형 계단광실묘는 연대가 조금 이르며, 그 외 소형 봉토동실묘들은 연대가 매우 늦음. 태왕릉 주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고구려 왕릉이 다수 있는데, 떨어져 있는 거리가 가까운 것은 동측의 임강총과 서북측의 우산 992호분은 직선거리로 약 700~900m이며, 조금 먼 것은 장군총과 우산 2119호분이 있음.

 

유물정보

 

청동 부뚜막 1점, 청동 방울 3점, 청동 동전 1점, 철제 끌 2점, 철제 도끼 1점, 철제 穿 1점, 철제 고리 1점, 철제 꺾쇠못(鋦釘) 1점, 철제 泡釘 3점, 철제 말굽바닥(蹄掌) 5점, 철제 바닥못(掌釘) 2점, 철제 칼 6점, 철촉 8점, 철제 긴못(長釘) 2점, 철제 찰갑편 28점, 금제 鉈尾 1점, 금제 연결못(柳釘), 금사(金絲) 2점, 금제 보요식(步搖飾) 30점, 금동 보요관(步搖冠) 2점, 금동 띠형보요(帶形步搖) 4점, 금동 봉황날개 보요(鳳翅步搖) 1점, 금동 보요잔편 4점, 금동 우산모양 보요(傘座步搖) 5점, 금동 꽃모양 보요(花座步搖) 1점, 금동 泡座步搖 8점, 금동 띠형장식(帶形飾) 3점, 금동 조형장식(條形飾) 5점, 금동 고리형장식(環形飾) 3점, 금동 편형장식(片形飾) 4점, 금동 이형장식(異形飾) 1점, 금동 화형장식(花形飾) 2점, 금동 구슬형장식(珠形飾) 2점, 금동 투각장식(鏤空飾) 1점, 금동 관식(冠飾) 5점, 금동 편식(片飾) 8점, 금동 대식(帶飾) 1점, 금동 장막걸개(幔架) 1점, 금동 말띠꾸미개(節約) 3점, 금동 말띠드리개(鞧飾) 1점, 금동 등자(馬鐙) 1점, 금동 거울꼭지(鉈尾) 3점, 금동 자물단추(帶銙) 1점, 금동 허리띠고리(帶卡) 2점, 금동 띠고리(帶環) 1점, 금동 잡편(卡片) 3점, 금동 장구(帳鉤) 3점, 금동 꺽쇠못(鋦釘) 2점, 금동 포정(泡釘) 5점, 금동 신발못(鞋釘) 1점, 금동 책상다리(案足) 9점, 와당 21점, 명문전돌 8점, 화문전돌 5점, 회색전돌 2점, 무문전돌 1점, 무문 수키와 4점, 처마기와(檐頭板瓦) 33점, 승문암키와 5점, 문자부호 기와 6점, 압축화문기와 1점, 계수부호 기와 8점, 수키와 1점, 料珠 2점, 옥구슬(瑪瑙珠) 2점, 건축구조물 1점, 파수 1점, 완(瓷碗)1점, 망추 1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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