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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하 장군총(禹山下 將軍塚)

 
  • 구분유적
  • 시대고구려
  • 문서번호S000362
  • 위치(출토지)吉林省 集安市 太王鎭 果樹村 3組(畢家堡子)
  • 지역집안(集安市)
  • 유형고분>계단식적석총
  • 형태사항높이: 13.07m 10점 석실 
 

출토지

 

길림성 집안시 태왕진 과수촌 3조(필가보자) (吉林省 集安市 太王鎮 果樹村 3組(畢家堡子))

 

조사내용

 

 
:1
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
1907 프랑스 학자 沙畹이 참여하여 집안을 조사할 때, 장군총의 묘실에서 향민들이 모시던 목패를 발견하였는데 윗면에 호태왕의 자리라고 쓰여 있다고 하여 호태왕의 능묘라고 기록함.
1935 池內宏, 黑田源次, 梅原末治, 三上次男이 참여하여 집안의 도성 및 충요한 고분들을 조사함.
1936 삼상차남이 참여하여 강계, 만포진, 환문총, 모두루총, 태왕릉, 산성자산성, 사진총, 삼실총과 함께 조사됨.
1963집안시문물보관소
(集安市文物保管所)
분구의 충적도를 정리함. 무덤의 남쪽 護基石 위의 흙더미에서 철제 쇠사슬(鐵鍊), 금동머리장식, 대량의 기와·와당 등 건축구조물들이 발견됨.
1966길림성박물관, 집안시문관소
(吉林省博物館, 集安市文管所)
통구고분군에 대한 실측조사 때, 우산묘구 1호(JYM0001)로 편호함.
1979 시멘트 판 울타리공사
1985 장군총 환경정리 및 주위보호담장 건설
1994 무덤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위한 공사 중, 서북모서리부분의 기단 외측 탐사 중에 기초를 발견함.
1997집안시문물보관소
(集安市文物保管所)
장군총과 배장묘에 대한 상세한 실측과 2호 배장묘 주변을 정리함
2000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서측 배장묘(JYM0002B) 정리 등 비교적 중요한 작업이 여러 차례 이루어짐.
2003북경특종공정설계원,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北京特種工程設計院,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통구고분군 중요 유적의 조사와 환경 정비와 맞물려, 북경특종공정설계원이 장군총에 대해 전면적인 실측과 지질조사를 진행함.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는 장군총 서측의 건축유지에 대한 전면적 시굴조사와 일부분에 대한 발굴을 진행함.
1909-1010 關野貞, 谷井濟一, 栗山俊一이 참여함.
건국 후 장군총에 대한 보호가 더욱 강화되어, 여러 차례 장군총과 주변 환경에 대한 정비와 조사를 진행함.

 

구조특징

 

將軍墳은 초기 향민들이 부르던 속칭으로 1966년 조사에서 禹山墓區 1號墓, JYM0001로 명칭함.
오래된 기록에 의하면 明代 이전에 도굴을 당했지만, 형태는 상당히 양호하게 보존되었다고 함. 『통구』의 사진에는 정상부에 수목이 무성하나 1963년 이후 계속 벌목을 진행함.
고분은 계단석실총으로 계단 한변의 길이는 30.15~31.25m임.
현재 분구 위의 장대석 일부분이 파손되었고, 북측 중간의 護墳石이 결실되었으며, 동북과 서북모서리일대의 기초석이 약간 함몰됨. 계단, 묘실, 기초 3부분으로 구성됨. 계단은 7단으로 정교하게 다듬은 화강암 장대석으로 순서대로 안쪼긍로 들여쌓아서 계단상의 금자탑 형태로 축조함. 형재 계단과 護墳石의 석재 수는 1146매이고, 21매는 결실됨. 무덤의 각 면에 각각 3개의 護墳石을 경사지게 세움. 계단 아래에는 커다란 돌을 깔아서 만든 기단이 있음. 기단은 대체적으로 방형이고, 평균 한변의 길이는 32.3m임. 기단 아래에는 큰 강자갈로 기초를 만들었는데, 기초는 무덤 전체를 돌아가며 있고, 무덤 밖을 향한 지하배수구를 만듬. 묘실은 제3단 계단에 축조되어 있고, 천장에 큰 천정석이 있음. 羨道의 입구는 제5단 계단에 있고 방향은 서남쪽임.
기초는 1994년 보수할 때 서북모서리부분의 기단 외측 탐사 중에 발견되었는데, 향토층 위에 구덩이를 파고 강자갈을 메우는 방법으로 만듬. 황토층 위는 깬 산돌을 이용하여 표면을 다지고 그 위에 강자갈을 채워 넣었음. 강자갈은 모두 편평한 상태로 뉘어 쌓았고, 돌은 직경 0.8~1.2m, 두께 0.1m의 크기이며, 빽빽하게 쌓았음. 채워진 돌의 높이는 1~1.2m이고, 기초의 둘레는 기단보다 3m 밖으로 나아감.
기단과 護基石은 1963년에 이미 발견이 되었으며, 기단은 기초석 위에 축조됨. 기단은 가지런하고 정연한 화강암 석재로 축성하였고, 기단의 상면은 지표면과 같으며, 평면은 방형에 가까움. 그 중 동북측변의 길이는 33.1m, 서남측변의 길이는 31.8m, 서북측변의 길이는 32.6m, 동남측변의 길이는 31.7m임. 기단의 안쪽으로 0.5~0.6m 들어가서 계단을 쌓았음. 기단 외측 둘레에는 너비 약 3~4m, 두께 10~16m의 큰 강자갈을 빽빽하게 깔았으며, 4면 모두 무덤 기초의 자갈층보다 넓음. 이는 기단석이 자리를 벗어나서 변형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넓게 한 것이므로 護基石이라고 부름. 1963년 정리과정 중에 무덤의 남쪽 護基石위의 흙더미에서 철제 쇠사슬(鐵鍊), 금동머리장식, 대량의 기와·와당 등 건축구조물들이 발견됨.
기단 위로 7단의 계단을 축조하였는데 아래에서 분구 위까지 매층마다 1.05~1.2m 폭으로 들여쌓았고, 위로 갈수록 안으로 들여쌓은 폭이 줄어듬. 계단은 화강암을 다듬어서 만든 면석으로, 밖으로 약간 경사져서 자른 단면은 사다리꼴이 되는 장대석으로 축조함. 바닥부분의 장대석은 길이 2.4.m, 너비 0.9m 정도이고, 동일층에는 같은 두께의 돌을 사용함. 바닥에 놓인 가장 큰 돌은 길이 5.7m, 너비 1.12m, 두께 1.1m임. 위로 갈수록 돌은 조금씩 작아져서 길이 1m, 너비 0.4~0.7m가 되고, 꼭대기층 가장 작은 돌은 길이 0.5, 너비 0.6m임. 모서리 돌은 일반적으로 아래는 작고 위는 큰 방형대처럼 다듬음. 동남모서리 돌은 작은 것은 길이 0.7~1.2m, 두께 0.5m이고, 큰 것은 3.2~3.7m, 두께 1.1m임. 축조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 가장 꼭대기층의 돌을 제외하고, 계단석의 바깥쪽 가장자리에 높이 5~7㎝ 볼록하게 솟은 돌기를 만들어 위에 놓인 돌과 아래에 놓인 돌이 서로 맞물리게 함. 제1단 계단의 돌기 너비는 18~20㎝이고, 그 나머지 여섯층의 계단 둘레를 돌아가며 볼록하게 솟은 돌기의 너비는 7~10㎝임. 계단내부는 강자갈과 산자갈로 채웠고, 위에 놓인 장대석의 폭과 맞지 않는 경우에는 큰 강자갈을 이용하여 평평하고 가지런하게 쌓았음. 냇돌에도 화강암 석재처럼 돌기를 만들어서 위에 놓인 계단석이 팅겨나가는 것을 방지한 것도 있음.
제1단 계단은 장대석을 4층 쌓았고, 그 위의 나머지 6개의 계단은 모두 장대석을 3층으로 쌓아 만들었으며, 계단의 높이는 위로 갈수록 점차 낮아짐. 일반적으로 분구 정상부의 한, 두 층은 비교적 얇고 넓은 돌을 사용하였고, 아래층에는 큰 돌을 이용함. 계단은 조금씩 안으로 들어가며 쌓아서 외혀은 매우 반듯하고 아름다움. 제1단 계단의 높이는 3m인데, 서북모서리가 밖으로 벌어져서 4면의 각 길이는 같지 않음. 그 중 동측 계단의 바닥 길이는 30.15m, 계단상면의 길이는 28.65m, 남측의 바닥 길이는 30.75m, 상면 길이는 29.15m, 서측 바닥 길이는 31.1m, 상면 길이는 29.5m, 북측 바닥 길이는 31.25m, 상면의 길이는 29.65m임. 현재 계단 각 모서리부분은 밖으로 벌어지고, 서·북 양측 석재에 비교적 큰 틈이 여러 곳에 있지만, 동과 남 양측의 길이는 원형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음. 만약 원상태로 복구한다면 장군총 네면은 서로 대칭되며, 세로길이는 가로길이에 비해 0.6m 작지만 정방형에 가까움. 1단 계단 동과 서 양측의 4층 장대석은 각각 0.8m 안으로 들어가는데 반해, 남북 양측의 4층 조석은 각각 0.75m 안으로 들어가며, 들어간 폭 또한 가로방향이 세로방향보다 큼. 이는 분구 정상부까지 이어져서 전체 평면은 방형이 됨. 2단 계단의 높이는 1.6~1.7m로, 1단 계단의 평평한 면 위에 1~1.2m 안으로 들어가서 축조되었으며, 들어간 폭 또한 가로방향이 더 넓음. 상면의 길이는 26.2~27.2m이고, 3층 장대석의 4면은 각각 20㎝ 안으로 들어갔는데 1단 계단과 비교해서 안으로 들어간 폭이 좁아짐. 제3단 이상의 각 계단 모두 아랫단 계단보다 1~1.1m 정도 안으로 들어가서 축조됨. 들어간 폭의 차이는 상대적으로 크지 않고 세로방향이 가로방향보다 약간 넓으며, 높이는 점차 10~5㎝ 정도 줄어듬. 제3단 계단 높이는 1.5~1.6m, 상면 길이는 23.7~24.7m임. 제4단 계단 높이는 1.4~1.5m, 상면 길이는 21.35~22m, 제5단 계단 높이는 1.35~1.4m, 상면 길이는 18.85~19.4m임. 제6단 계단 높이는 1.25~1.3m, 상면 길이는 16.2~16.5m이고, 제7단 계단 높이는 1.1~1.2m, 상면 길이는 13.5~13.8m임. 가장 높은 7단 계단의 남측 상부 2층 장대석은 결실됨. 제3·4단 계단 서북모서리가 점차 변형되고, 연도 바깥쪽 장대석이 약간 자리에서 벗어난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계단 모두 보존이 비교적 양호함. 계단 위에 회록색 석판을 세웠는데 현재도 서변의 제1·2단 계단의 조석 틈에 그 일부 돌덩이를 볼 수 있음.
묘실은 제3단 계단 위에 축조함. 연도 입구는 제5단 계단의 중앙에 위치하고, 연도는 대체적으로 정방형임. 묘실의 네 벽은 장대석을 6층 쌓아 축조하였고, 바닥에서 위로 갈수록 약간 아능로 기울어짐. 네 벽 위쪽 끝부분 가까이에 하나의 커다란 장대석을 뉘어 고이고, 그 위에 1층 평행고임의 천정을 형성하였고, 그 위는 깍아 다듬은 평평한 돌을 덮음. 묘실 바닥에는 석판을 깔았는데, 석판은 부분적으로 파손됨. 그 위에는 棺床 2좌가 설치되어 있으며, 관상 위 주변 가장자리에 볼록하게 튀어나온 돌기(稜)가 남아 있음. 두 관상은 동서로 배열되어 있고 관상 간의 거리는 0.5m임. 서측 관상은 길이 3.25m, 너비 1.45m, 높이 0.45m이고, 동측은 서측에 비해 약간 작아 길이 3.2m, 너비 1.3m, 높이 0.38m임. 연도는 묘실의 남벽 정중앙에 있고, 길이는 8.3m, 방향은 235˚임. 연도의 양 벽은 장대석을 3층으로 쌓아 만들었음. 연도는 묘실에서 바까틍로 향해 점차 넓어지고, 중간 부분은 묘실 바닥보다 0.75m 높음. 연도 천장은 3개의 큰 돌로 덮었고, 바깥 돌 가장자리에는 홈이 파여있어서 석재로 만든 연도의 문이 있었음을 알 수 있음.
묘정상부는 묘정상까지의 높이가 13.7m이고, 평면은 방형임. 4면은 제7단 계단의 맨 꼭대기층 계단석의 변이 되는데, 한변의 길이는 13.5~13.8m임. 묘정상부 중심은 묘실 전정석 주변보다 약간 높고, 정상부는 황토로 봉하였는데 봉토에 사용된 황토에 백회가 섞여 있음. 중앙 부분의 봉토 두께는 0.7m이고, 주변 가장자리는 비교적 얕음. 천정석은 거대하고, 불규칙적인 타원형으로 길이 9.5m, 너비 7.45m, 두께 0.8m임. 천정석과 계단 장대석 사이에는 가공된 석판을 깔았고, 돌 사이 틈은 강자갈과 백회가 섞여 있는 황토로 메워 묘실 내부로 빗물이 스며들어가는 것을 방지함. 묘 정상 서·남면 제7단 계단의 맨꼭대기층 계단석에서 장대석 몇 개가 결실되었고, 나머지 돌들에는 10~20㎝ 거리 간격으로 직경 10㎝, 길이 5㎝의 작은 원형의 구멍이 나열됨. 그 중 서측면은 장대석 2개가 결실되었고, 17개의 구멍이 남아 있는데, 구멍 간의 거리는 0.4~0.6m로 같지 않음. 북측면은 장대석 3개가 약간 부서졌고, 현재 원형 구멍 18개가 남아있는데, 구멍 간의 거리는 0.5~0.8㎝이고, 가장 가까운 2개의 구멍은 서북에 있는 것으로 그 거리는 0.3m임. 동측은 1개의 모서리 돌만이 파손되었고 원형 구멍 21개가 남아 있음. 중간의 일부분을 제외하고, 구멍 간의 거리는 대체로 같음. 남측에는 다듬은 돌 1개만 남아있는데, 구멍 2개가 있고, 구멍 간 거리는 0.9m임. 무덤 아래에서 철사슬이 발견된 정황을 볼 때, 분구 정상부에 난간이나 건축물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음.
護墳石은 무덤이 밖으로 벌어지거나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설치된 것으로 묘의 계단을 보다 견고하게 함. 무덤의 각 면에 3개씩 있는데, 중간과 양 모서리에 각 1개씩 기본적으로 고르게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함. 현재 북측 중간의 호묘석은 없어졌고 나머지 부분은 온전하게 남아 있으며, 모두 평평한 면이 안쪼긍로 향하게 설치됨. 호묘석의 두껍고 무거운 부분은 기단 바깥 호기석 위에 세웠고, 나머지 한 끝부분은 1단 계단의 맨꼭대기 장대석에 비스듬히 기울임. 각 호묘석은 크고 두꺼우며 무겁고, 형태는 규칙적이지 않음. 가장 큰 것은 서측 중간의 호묘석으로 돌의 높이 4.5m, 너비 1.9m, 두께 1.5~1m임. 가장 작은 호묘석은 북측의 서쪽 끝에 위치한 것으로 높이 2.6m, 너비 1.3m, 두께 0.75m임.
장군총은 축조할 때 빗물과 지표의 물이 묘에 침식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묘 바깥쪽을 향한 지하배수시설(배수구)을 축조함. 1994년 묘의 동남 모서리에서 34.8m 떨어진 지점에 1개의 판석으로 쌓은 배수로가 발견됨. 당시에는 1.2m의 일부분만 정리하였는데, 장군총 동남쪽 모퉁이와 마주하고 있음. 장군총 1호 배장묘 동남쪽과 태왕릉 동북면에서 배수로가 있는 점으로 미루어 장군총 전면 양쪽에 모두 유사한 지하배수로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됨.
장군총 주위에는 자갈이 깔려 있는데, 너비는 4면이 각각 약 30m 정도로 묘 가까이에 있는 강자갈은 비교적 크고, 묘에서 먼 곳은 부서지고 작은데 장군총의 묘역표식임. 『통구』 중 실측도에도 보이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매몰됨. 2003년 8월 장군총 관개수로공사 때, 장군총 서남 정중앙에서 장대석으로 한층 쌓은 석렬 일부분이 발견되어 담장으로 추정함. 담장의 높이는 약 0.5m임. 북쪼긍로 무덤과의 거리는 30m 정도로 장군총 남쪽의 보호축대였을 것으로 추정됨.
장군총 주위에서 배장묘, 제대, 건축지 등 묘의 상관유적들이 여러 곳에서 발견됨. 배장묘는 비교적 초기에 발견되었는데 1930년대 『통구』에서 ‘陪塚群’으로 기록하고, 4~5기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였음. 이후 여러 글에서도 4~5기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였음. 장군총의 북측에 동서 방향으로 일렬로 잇으며, 2000년 정리 시 배장묘는 2기였음을 확인함. 제2호 배장묘 서측에 인접한 조형의 돌무지들에 대해서 2003년 조사 때 제대라고 단정하고 JYM0002B라고 편호함.

 

내부규모 및 특징

 

연도 길이 8.3m, 폭, 2~2.75m, 높이 1.4~2.2m
연도 바닥 한변 길이 5.43~5.5m, 전체 높이 5.1m

 

역사적 의미

 

무덤은 웅장, 정교, 우수하고, 현재 남아있는 가장 상태가 좋은 대형계단석실묘로 ‘동방의 피라미드(금자탑)’이라고 칭송함.
장군총은 계단석실묘의 전형으로, 묘에는 기초가 있고, 그 위로 기단을 쌓음. 기단 바깥으로는 다시 호기석을 쌓았고, 기단 위에 계단과 묘실을 축조함. 계단석은 층층마다 평행하게 쌓았고, 그 안으로는 자갈로 채움. 묘실 위는 거대한 돌로 덮었고, 주위에는 거대한 돌로 기대어 묘를 보호함. 묘의 구조는 빈틈이 없고, 정밀하게 축조되어, 계단적석총 중 가장 늦은 시기로 그 연대는 약 5세기임.
장군총의 구조형태는 대체로 태왕릉과 같음. 다만 태왕릉은 기초가 없고 면적이 큼으로써 견고의 정도에 차이가 나 거의 무너진 상태임. 장군총은 왕릉 중에서 가장 작은 규모여서 도리어 보존이 가장 좋음. 고구려의 석조장인은 끊임없는 경험이 總結되고, 석조공예가 나날이 완성되어 상당히 성숙한 경지에 달했다고 볼 수 있음. 이후 계단적석석실묘와 적석총은 왕릉으로 사용하지 않고, 대신 봉토묘와 벽화묘가 왕릉으로 채용됨.
장군총의 묘주인과 관련하여 여러 견해가 있음. 첫번째는 시조 동명왕설로, 『집안현지』에 “예전에 동명성왕묘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將軍墳이라고 불렀다. 고구려왕 주몽이 죽자, 태자 유리가 올랐는데, 시조를 용산에 장사지내고 동명성왕이라고 불렀다”라고 했다는 기록에서 나옴. 이 설은 받아들일 수 없어 일찍이 배제됨. 두번째는 산상왕설로 『통구』에는 장군분이 산상왕릉이라고 적고 있음. 산상왕은 고구려 10대왕으로 196년에 왕에 올라 227년에 죽었음. 그러나 고고학적으로 그 추측을 지지할 증거가 없음. 세번째는 태왕릉설임. 1907년 프랑스 학자 沙畹이 집안을 조사할 때, 장군총의 묘실에서 향민들이 모시던 목패를 발견하였는데, 윗면에 호태왕의 자리라고 쓰여 있다고 하여 호태왕의 능묘라고 기록함. 1980년 초 일부 일본학자들은 장군총과 태왕릉에서 출토된 와당의 연구와 장군총과 태왕릉비의 朝向이 서로 일치한다는 것을 조합하여 역시 장군총이 태왕릉이라는 설을 제시함. 태왕릉에 보이는 다량의 문자벽돌 중에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의 명문 또한 다르게 해석함.
네번째는 장수왕설임. 2003년 태왕릉 정리 중 출토된 동령에 “辛卯年 好太王 □ 造鈴 九十六”이라고 새겨진 글자는 태왕릉이 호태왕의 묘라는 정론을 성립하게 해줌. 이 설은 일본에 의해 최초로 제기되었는데, 그 주요 증거는 묘장의 형태였음. 장군총은 적석구조의 왕릉 중 가장 늦은 형식으로 연대는 약 5세기로 추정되는데, 이 시기는 바로 장수왕 재위시기임. 장수왕은 412년에 왕위에 올랐고, 왕이 된 지 15년 후인 427년 집안에서 평양으로 천도함. 살아 있는 동안에 자신의 묘를 만들었는데, 고구려왕이 영위했던 풍속과 부합함. 이러한 거대한 공정과 태왕릉과 태왕비의 친밀한 관계를 볼 때, 오직 장수왕에만 비정할 수 있음. 그러므로 장군총의 묘주인은 고구려 제20대왕 장수왕일 가능성이 더 큼.
장군총 북측의 배장묘는 고구려왕릉매장제도의 구현임. 또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가족, 종족, 왕족의 장례제도에서 항상 보이는 현상임. 1호 배장묘의 규모는 비교적 작으나 지금까지 장군총과 같은데, 혈연으로 매우 가깝고 직위가 매우 높은 사람으로 추정됨. 2호 배장묘는 1호 배장묘에 비해 작지만 주변에 상징성의 호묘석이 있는데, 이런 시설은 신분과 지전적인 의미로 구축된다고 설명함. 장군총의 서로 같지 않은 두 종류의 배장묘는 모두 고구려 초기의 묘제로 중시됨.
제대는 장군총의 기타무덤보다 이름. 제대가 묘장과 같은 배열에 있는 것은 장군총의 특징 중의 하나임. 고구려 초기왕릉에서는 배장묘가 있고 제대는 없었다고 추정함. 발전과정 중의 제대는 배장묘의 구분과 숩지 ㅇ낳음. 우산하 992호묘 축조시기에 이르러서 제대는 진정하게 성숙함. 태왕릉의 제대는 규모가 매우 크고, 오직 제대만이 나온다는 점에서 명확한 특징을 가지고 있음. 그런데 장군총은 다시 배장묘와 제대가 같이 나옴. 이러한 복고현상음 연구할 가치가 있음. 최근 제대를 연접된 적석무덤으로 파악하고, 일제하 통구 보고서에 4-5기의 배총이 있었다는 보고와 관련하여 해석함.
건축유지에서 보이는 담장, 散水, 배수구, 초석, 문 등은 하나의 대형 건축군으로 건축은 장군총 방향과 일치함. 이 건축유지는 장군총에 부속된 제사 성격의 건축물이고 그 연대는 장군총과 동시기 혹은 약간 늦는 것으로 추정됨.
문자명 기와는 장군총 외에도 천추묘, 서대묘, 태왕릉, 환도산성에서 모두 볼 수 있음. 기와의 “申, 犬, 小” 등과 같은 문자는 대부분 기와가 사용된 부위 혹은 기년과 工匠의 이름들을 기록한 것임. 『조선고적도보』에는 “漢”, “第” 등의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기록됨. 발견된 연문와당은 왕릉에서 보이는 형태가 가장 크고 연판이 가장 많은 형식임. 건축유지에서 출토된 기와와 와당은 모두 홍색이고, 조잡하게 만들었으며 火侯가 비교적 낮음. 그 원인은 완성되지 않았거나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음.

 

자연환경

 

태왕진 과수촌 3조(필가보자)의 경작지에 있음. 우산묘구 동쪽 가장자리 용산 남쪽 기슭에 위치하며, 작은 산 남쪽 기슭에 홀로 자리잡음.
서남방향으로 약 5.7㎞ 떨어진 지점에 고구려 국내성이 있고, 북쪽으로는 용산에 기대고 있음. 묘의 남쪽은 광활하게 경사져 내려감. 동북측에는 2기의 배장묘와 제대가 있고, 서북측에는 연대가 많이 늦은 봉토묘가 있으며, 서남측에는 대형건축유적지가 있음. 남쪽으로 1.5㎞ 떨어진 지점에 임강묘가 있고, 서남쪽으로 2㎞여 떨어진 지점에 태왕릉과 태왕비가 있음.

 

유물정보

 

금동제 머리장식, 금동제 못박힌 신발, 금제 솥(鐺), 금동제 고리, 금동제 철사슬(鐵鍊), 수막새 3점, 암키와, 수키와

 

참고문헌

 

· 關野貞 外, 『朝鮮古蹟圖譜』, 1915
· 池內宏·梅原未治, 『通溝』 下: 満洲国通化省輯安県高句麗壁畫墳, 日滿文化協會, 1940
· 藤田亮策, 「通溝附近の古墳と高句麗の墓制」『朝鮮考古學硏究』 (再收錄), 高桐書院, 1948
· 蘇才, 「集安高句麗遺跡調査簡記」『吉林省文物工作通訊』, 1957
· 傅佳欣, 『集安高句麗王陵』, 文物出版社, 2004
· 孫仁杰·遲勇, 『集安高句麗墓葬』, 香港亞洲出版社,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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