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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파령관애, 왕팔발자령관애(望波嶺關隘, 王八脖子嶺關隘)

 
  • 구분유적
  • 시대고구려 초기
  • 문서번호S000269
  • 위치(출토지)集安市 雙岔鄕 荒崴子村
  • 지역집안(集安市)
  • 유형성곽>관애
 

출토지

 

집안시 쌍차향 황외자촌 (集安市 雙岔鄉 荒崴子村)

 

연대

 

3세기 중엽

 

조사내용

 

 
:1
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
1962길림성박물관 집안고고대
(吉林省博物館集安考古隊)
4월 15일에 길림성박물고나의 진상위, 방기동 및 집안현문물관리소의 장사은, 조벽인 등이 집안 전역의 유적과 함께 조사함.
1963길림성박물관, 집안현문물관리소
(吉林省博物館, 集安縣文物管理所)
5월에 길림성박물관의 진상위, 방기동 및 집안현문물관리소의 장사은, 조벽인 등이 망파령관애와 함께 관마산성을 집중 조사함. 다만 이때는 관애의 서북쪽 부분만 확인하고, 동남쪽 부분은 확인하지 못함(도면을 통한 추정임). 집안현문물관리소, 1964 「吉林集安高句麗南道和北道上的關隘和域堡」『考古』1964-2 에 발표함.
1983집안현문물조사대
(集安縣文物調査隊)
5월 22일에 관애에 대한 실측, 기록, 사진촬영을 하고 1963년에 확인하지 못한 관애의 동남쪽 부분까지 확인함. 다만 동남단까지 완전히 확인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음(현지답사를 통한 추정). 『集安縣文物志』의 ‘망파령관애’로 발표했고, 이때의 조사결과를 토대로 1983년 10월 19일에 망파령관애를 집안현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함.
1983길림성문물고고연구실, 집안현박물관
(吉林省文物考古硏究室, 集安縣博物館)
7월에 길림성문물고고연구실의 방기동 및 집안현박물관의 임지덕, 경철화, 손인걸이 집안현 경내의 남북 교통로의 계통을 조사하였고, 『文物』1984-1의 「集安高句麗考古的新收穫」을 발표함.
1930년대 『集安縣志』(1931년 간행)에서는 〈疆域〉 조항에 “집안현성에서 120리 떨어진 망파령 산 위에 고성이 있다”고 나오며, 〈古蹟〉 조항에는 “망파령 위에 망파성이 있는데 당시에도 石垣이 잘 남아 있었다”고 함. 이로 보아 1930년대에 이미 망파령관애의 존재가 알려진 것으로 추정됨.

 

구조특징

 

1963년 관애의 서북쪽 부분만 확인해 전체 길이를 260m로 파악함(도면을 통한 추정). 1983녀에는 동남쪽 부분까지 추가적으로 확인해 전체 길이를 750m로 파악함(도면을 통한 추정). 망파령 산줄기를 따라 관애의 성벽이 동남쪼긍로 계속 이어지고 있어 전체 규모를 완전히 파악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음(현지 답사를 통한 추정). 성벽 남단 90m 정도는 일찍이 보수한 흔적이 남아 있는데, 자갈로 쌓은 다음 진흙을 10-20㎝ 두께로 덧쌓았음. 성벽 남단은 크고 작은 7개의 산봉우리로 이어지는데, 산봉우리 사이의 구릉지에도 돌로 성벽을 축조한 흔적을 볼 수 있음.
1963년 조사 당시 용두령 남단과 망파령이 만나는 구릉 저지대의 관애 성벽이 도로에 의해 절단되면서 파괴되어 있었음. 1976년 삼가자댐 건설로 쌍차하(신개하) 계곡 동쪽에 위치한 용두령 서북쪽 성벽이 수몰되었고, 종래 도로가 지나가던 용두령-망파령 사이 구릉 저지대의 관애 일부도 수몰됨. 또 댐 건설 이후 도로를 신설하고 민가(휴게소?)를 지으면서 망파령 서북단의 관애가 상당 부분이 절단되고 파괴됨. 댐 건설과 도로 신설에 따라 수몰되거나 절단된 부분에 성벽의 단면이 잘 나타나 있음. 가령 본래 지방도로가 지나갔던 용두령-망파령 사이 구릉 저지대의 성벽은 일부가 수몰되어 있는데 댐 수위가 변동하면서 양측 성벽을 허물어뜨려 석축으로 축조한 성벽 단면이 완전히 드러나 있으며, 용두령 서북쪽의 수몰된 관애도 물가 가장자리에서 석축 상태의 성벽 윗면을 확인할 수 있음. 또한 망파령 서북단의 성벽도 도로 신설에 따라 완전히 절단되어 그 단면이 드러나 있으면 성돌의 일부가 도로 동남측에 쌓여 있음.
1963년 조사시 철제 화살촉(鐵鏃)이 출토했는데, 현지주민에 따르면 성벽 부근에서 철제 화살촉이 종종 발견되다고 함. 석제 절구(石臼)는 성벽 남쪽 0.5㎞의 경작지에서 출토되었는데, 거친 화강암의 평평한 면에 구멍을 뚫어 만든 것으로, 구경 20㎝, 깊이 20㎝임. 1983년 조사시에는 철제 등자(鐵馬蹬), 철제 자물쇠(鐵鎖), 토기편과 炭屑(숯가루) 등이 채집되었고, 현지주민에 따르면 종종 성벽 부근에서 등자와 함께 철제 화살촉 더미가 발견된다고 함.

 

역사적 의미

 

주변 유적으로 망파령 남쪽 기슭에 적석묘 10여기가 있었으나 수몰되었고, 신개하 하구에 패왕조산성이 위치하며, 남쪽으로 쌍차하를 거슬러 올라가면 모구검 紀功碑가 발견된 소판차령이 나옴.
지정학적으로 집안현성(길림성 집안시) 서북쪽 50㎞ 거리의 三家子댐 부근에 위치하며, 혼강 유역에서 노령산맥을 넘어 고구려 두번째 수도가 있었던 국내성으로 향하는 교통로 가운데 가장 평탄한 신개하 연안에 위치하며, 관애는 신개하 연안로 가운데 지세가 가장 험하고 좁은 협곡과 산등성이를 가로질러 축조되어 있음.
산성의 기능과 성격에 대한 견해를 보면 첫째, 군사방어시설로 망파령관애는 험준한 산세를 따라 성벽을 구축하여 혼강에서 신개하를 거슬러 집안으로 통하는 교통로상의 요충지에 위치한 군사방어시설임. 이에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망파령관애가 신개하 하구에 위치한 패왕조산성과 함께 신개하 일대에서 고구려 도성(환도성과 국내성)의 외곽방어선을 구축했다고 추정함. 둘째, 남도상의 요충지로 모구검기공비가 망파령관애에서 신개하를 거슬러 집안으로 향하는 노령산맥상의 분수령인 小板岔嶺에서 발견되었는데 이에 3세기 중엽 제3현도군을 출발하여 소자하·혼강 유역을 거쳐 小板岔嶺을 넘어 환도성으로 진입한 魏 모구검을 비롯해 고구려 국내성을 침공하였던 중국측 침공군 가운데 상당수가 이 일대를 지나갔을 것으로 추정됨. 특히 342년 전연의 모용황 이 남도와 북도를 통해 동시에 고구려를 침공했는데, 망파령관애는 모용황이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침공했던 남도상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 추정됨(『고고』1964-2 외 다수). 셋째, 북도상의 요충지로 342년 전연 모용황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등장하는 남도와 북도가 신빈 永陵鎭에서 갈라진다고 설정한 다음, 남도를 소자하 지류인 二道河-渾江 지류인 六道河-渾江 하류-渾江口-압록강 본류로 설정한 다음, 蘇子河 본류-富爾江-新開河를 북도로 설정해, 망파령관애를 북도상의 중욯나 방어시설로 파악하기도 함(王線厚).

 

자연환경

 

집안현성(길림성 집안시) 서북쪽 50㎞ 거리의 三家子댐 위쪽에 위치하고, 쌍차향 황외자촌에서 서북쪽으로 5㎞ 정도 떨어져 있는데(『집안현문물지』/ 쌍차향 소재지 서북 10㎞; 『고고』1964-2), 쌍차향과 台上鄕의 경계지점임.
관애가 지나가는 산줄기가 미치 자라처럼 생겼다하여 현지주민들은 望波嶺을 ‘王八脖子嶺’이라고도 부름. 노령 산줄기에서 발원한 쌍차하(신개하)가 구불구불하게 흐르다가 대상향과 쌍차향의 경계지점을 지날 무렵, 협곡의 폭이 좁아지고 양 옆의 산도 깍아지른 듯이 험준해짐. 북쪽 산비탈은 높고 가파른데, 아라로는 좁고 험준한 협곡이 내려다 보이며, 높이는 약 60m임. 망파령 산줄기는 대체로 동남-서북 방햐응로 뻗어 있고, 서북쪽 산줄기의 끝 지점에 龍頭嶺이라는 남북 방향의 작은 산줄기가 다시 솟아나 계곡 쪽으로 돌출하여 마치 병풍처럼 협곡을 가로막고 있음. 망파령관애는 바로 망파령과 용두령의 산마루를 따라 구축했음. 용두령 남단과 망파령이 만나는 지점에는 약간 낮은 구릉이 있는데, 현재 신개하 연안을 따라 개설된 지방 도로가 이곳을 뚫고 지나가고 있음. 또한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던 쌍차하(신개하)는 관애의 서북단을 지난 다음 방향을 동쪼긍로 꺾어서 흐르고 있는데, 그 양 옆으로는 깍아지른듯한 산이 계속 연이어짐. 1976년 바로 이 협곡을 막아 三家甸子댐을 건설했으며, 이로 인해 용두령 서북단의 관애와 용두령-망파령 사이 구릉 저지대의 관애 일부가 수몰됨.

 

참고문헌

 

· 張拱垣 編, 「疆域志」「古蹟」『輯安縣志』, 1931
· 方起東, 陳相偉, 「吉林集安高句麗南道和北道上的關隘和城堡」『考古』 1964-2, 1964
· 方起東·林至德, 「集安高句麗考古的新收穫」『文物』 1984-1, 1984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4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 編, 「望波嶺關隘」『吉林省志』 43(文物志), 吉林人民出版社, 1991
· 國家文物局 主編, 「集安市-望波嶺關隘遺址」『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李殿福, 「高句麗考古的回顧與展望」『遼海文物學刊』 1992-2, 1992
· 遲勇, 「高句麗都城的戰略防禦系統」『高句麗硏究文集』, 延邊大學出版社, 1993
· 魏存成, 「城址·建築址」『高句麗考古』, 吉林大學出版社, 1994
· 余昊奎, 「集安 望波嶺關隘」『高句麗 城』 Ⅰ(鴨綠江 中上流篇), 國防軍史硏究所, 1998
· 楊春吉·王曉南, 「高句麗疆域調査與硏究現狀」『高句麗歸屬問題硏究』, 吉林文史出版社, 2000
· 秦升陽, 「南北道上的關隘與城堡」『高句麗歷史與文化』, 吉林文史出版社, 2000
· 王綿厚, 「高句麗南北二道上諸城」『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魏存成, 「中期都城通往遼河流域的兩條道路與毌丘儉紀功碑」『高句麗遺跡』, 文物出版社, 2002
· 杜宇 編著, 「老嶺山區古道」『集安風景名勝史話』, 通化師範學院照排印刷中心,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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