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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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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마산성; 관마장산성(關馬山城; 關馬墻山城)

 
  • 구분유적
  • 시대고구려
  • 문서번호S000266
  • 위치(출토지)集安市 熱鬧鄕
  • 지역집안(集安市)
  • 유형성곽>산성
 

출토지

 

집안시 열료향 (集安市 熱鬧鄉)

 

연대

 

고구려 초·중기에 초축한 것으로 추정됨.

 

조사내용

 

 
:1
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
1962길림성박물관 집안고고대
(吉林省博物館集安考古隊)
4월 15일에 길림성박물관의 진상위, 방기동 및 집안현문물관리소의 장사은, 조벽인 등이 참가하여 집안 전역의 유적과 함께 조사하였고, 『집안현지』(1932년) 및 현지 주민의 설명에 의거 각 방면의 성벽을 독립된 관애로 파악함. 1930년대까지는 북벽과 남벽만 알려져 있었는데, 이 때 동벽이 발견됨. 이 조사를 토대로 1962년 6월 15일에 집안현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됨.
1963길림성박물관, 집안현문물관리소
(吉林省博物館, 集安縣文物管理所)
5월에 길림성박물관의 진상위, 방기동 및 집안현문물관리소의 장사은, 조벽인 등이 참가하여, 望波領關隘와 함께 관마산성을 집중 조사하였고, 각 방면 성벽의 연관관계를 정확하게 조사함. 집안현문물관리소, 1964 「吉林集安高句麗南道和北道上的關隘和城堡」『考古』1964-2에 발표함.
1983집안현박물관문물조사대
(集安縣博物館文物調査隊)
4-5월에 성곽을 제원하고 성벽 축조상태 및 사진촬영을 하였으며, 『集安縣文物志』의 ‘관마산성’을 발표함.
1983길림성문물고고연구실, 집안현박물관
(吉林省文物考古硏究室, 集安縣博物館)
7월에 길림성문물고고연구실의 방기동 및 집안현박물관의 임지덕, 경철화, 손인걸이 참가하여 집안현 경내 남북 교통로의 계통을 조사하였는데 이때 관마산성 북쪽 10㎞ 지점에서 대천초소를 새롭게 발견함. 『文物』1984-1의 「集安高句麗考古的新收穫」에 발표함.
20세기 전반 『집안현향토지』(1915년)에서는 집안현성 서북 150리에 위치한 東橫路에 關馬牆이 있는데, “石牆 두 갈래가 있으며 서로 1리 정도 떨어져 있다”고 기재되어 있으며, 민간에는 342년 전연 모용황이 침공했을 때의 北置(北道)가 바로 이곳이라고 전한다고 함. 『집안현지』(1931년)에서는 古蹟 조항 〈古關隘〉 항목에 집안현성 북쪽 130리 거리의 蚊子溝門에 頭道關(속칭 頭道關馬牆子)으로 불리는 관애 2개가 있으며, 양자의 거리는 1리이고 모두 석장으로 축조되었다고 함. 또한 342년 전연 모용황이 침공했을 때의 北置(北道)가 바로 이곳이라고 파악함. 상기 지방지의 기록으로 보아 관마산성은 20세기 전반에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됨. 다만 당시에는 북벽과 동벽만 알려져 있었고, 아직 동벽의 존재는 파악하지 못함.

 

구조특징

 

산성 또는 관애로 주위의 높은 산을 천연성벽으로 삼는 한편, 남북 협곡의 가장 좁은 곳과 동쪽의 목흔두자구 안쪽 115㎞ 지점에 각각 성벽을 축조하였음. 성벽 하나 하나는 마치 각기 독립된 관애처럼 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세 개의 성벽이 주변의 깎아지는 높은 산과 연결되어 하나의 성곽을 형성함. 평면은 인공성벽과 자연성벽이 결합하여 전체적으로 삼각형을 이루며, 규모를 보면 성곽 내부의 협곡은 남북 960m(『집안현문물지』/600m; 『고고』1964-2), 동서 120-340m(『집안현문물지』/70-250m; 『고고』1964-2)로서 비교적 평탄하여 대규모 군대가 주둔할 수 있음.
성벽은 대부분 무너졌으며, 특히 계곡물에 의해 성벽이 심하게 파괴되었고, 도로가 관통하는 곳도 많이 파괴되었음. 다만 북벽 서쪽 산록의 성벽은 원래 모습에 가깝게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함. 통화-집안 도로가 성곽 한복판을 지나가고 있기 때문에 비교적 접근하기 쉽지만, 여러 가지 제약으로 인해 현재의 성벽 보존 상태를 정확히 확인하기는 어려운 상태임.

 

역사적 의미

 

주변의 유적으로 고분군과 군사시설이 있는데 고분군은 熱鬧鄕 동쪽 약 2㎞의 楊木橋子溝門 산기슭 아래에 대량의 고구려 고분이 분포해 있고, 서북 약 7.5㎞에 大川哨所 부근에 대량의 고구려 고분이 있음. 군사시설로는 서북 약 7.5㎞에 大川哨所가 위치하는데, 『집안현향토지』(1915년)와 『집안현지』(1931년)에 따르면 관마산성이 위치한 蚊子溝門 동쪽 산위에 ‘石頭城’이라고 불린 古城이 있었으며, 관마산성에서 淸河를 따라 북쪼긍로 20여리(10㎞ 전후) 내려간 楊木橋 부근에 土城이 있었는데 縣志 편찬 당시에는 이미 사라졌다고 함.
지정학적으로 집안시 소재지에서 53-54㎞ 떨어진 청하(葦沙河) 유역의 협곡에 위치하며, 혼강 본류에서 청하(葦沙河) 연안로를 거슬러 노령산맥을 넘어 집안분지로 향하는 교통로상에 위치함.
산성의 기능과 성격에 대한 견해로는 첫째, 군사방어성설로, 고나마산성은 혼강 본류에서 청하(葦沙河) 연안로를 거슬러 노령산맥을 넘어 집안분지로 향하는 교통로상의 험준한 협곡에 위치함. 형세가 험요하고 지키기는 쉬우나 공격하기 어려운 전략적 요충지로, 특히 성 내부의 지세가 평탄하고, 수원이 풍부하여 대규코 군대가 주둔할 수 있으나, 아직 건축 유적은 발견되지 않음. 세 성벽 가운데 남벽의 구조가 가장 간단한 반면, 북벽은 튼튼하게 구축했을 뿐 아니라 바깥쪽에 참호와 참호벽도 있음. 이는 관마산성이 청하를 거슬러 집안분지(통구분지)로 나아가는 적군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시설임을 반영하는데, 즉 남벽은 고구려 도성에서 오는 援軍과 輜重兵의 통로였기 때문에 성벽을 견고하게 쌓았을 뿐 아니라 바깥쪽에는 참호와 참호벽까지 구축했음. 동벽은 목흔두자구문에 축조했는데, 골짜기의 길이는 약 5㎞ 정도로, 골짜기의 양 옆은 매우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북쪽의 기다랗게 뻗은 산을 따라 1㎞ 정도 가면 양목교자구 골짜기로 통하는 높이 50m 정도의 완만한 산비탈이 있음. 동벽은 북벽을 공격하던 적군이 양목교자구를 따라 동쪽으로 향하다가 완만한 산비탈을 넘어 목흔두자구 방햐응로 진공하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한 것임. 관마산성은 북쪽 7.5㎞에 위치한 대천초소와 더불어 청하 연안로를 거슬러 고구려 두 번째 도성이 위치했던 집안분지(통구분지)로 향하는 적군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한 군사방어성으로 추정됨(『고고』1964-2). 둘째, 342년 전연과의 전쟁시 고국원왕이 피신했던 북도상의 요충지로 추정하기도 함. 당시 전연은 남도와 북도 두 길로 고구려를 침공했는데, 북도로 침공할 것이라는 고구려의 예상과 달리 모용황이 대군을 이끌고 남도로 공격했으며 북도로는 長史 王寓로 하여금 병사 15,000을 진군하게 함. 고국원왕은 王弟 武로 하여금 5만 대군을 이끌고 북도를 집중적으로 방허하는 한편, 자신은 적은 병력만을 데리고 남도를 수비함. 결국 고국원왕은 모용황의 4만 대군에게 대패했으며 도성인 환도성마저 함락당함. 반면 북도에서는 王弟 武가 전연군을 대파함. 이에 환도성이 함락당한 다음 고국원왕이 북도로 피신했을 것으로 파안한 다음 바로 관마산성으로 들어가 웅거했을 것으로 추정함(『집안현문물지』). 셋째, 환도성설으로, 동천왕대에 曹魏의 모구검이 고구려 환도성을 함락시킨 다음 환도산에 올라 자신의 기공비를 세웠다고 하는데, 관마산성은 관구검기공비가 발견된 石嶺(小板岔嶺)에서 가장 가까이 위치한 고구려 성곽이므로 환도성으로 비정할 수 있다고 파악함. 또한 고구려가 흘승골성(환인 오녀산성)에서 천도한 위나암성을 집안 패왕조산서응로 설정한 다음, 고구려는 초기에 대체로 동쪽 방향으로 천도를 했다고 파악하여 위나암성(집안 패왕조산성)에서 천도한 환도성도 패왕조산성의 동쪽에 위치했을 것으로 파악하고, 관마산성은 위나암성으로 비정되는 패왕조산성의 동쪽에서 약간 북쪽으로 치우쳐 있으므로 환도성으로 비정될 수 있다고 파악함. 그 뒤 동천왕대에 曹魏 모구검의 침공을 받아 환도성이 함락된 다음 남쪽에 위치한 평양성 곧 지금의 집안현성으로 다시 천도했으며, 그 뒤 환도성으로 재차 복귀했다가 342년 모용황의 침공을 받아 함락된 다음 집안현성보다 더 남쪽에 위치한 平壤東皇城 즉 현재의 평양으로 천도했다고 파악함(손진기, 왕선후, 풍영겸).

 

자연환경

 

집안시 소재지에서 서북으로 약 53-43㎞(『集安縣文物志』/약 65㎞;『考古』1964-2) 거리에 위치하고, 노령산맥 북사면 끝나락의 淸河 유역으로 북쪽 1.5㎞ 熱鬧鄕 소재지에 위치하며, 집안-통화 도로가 북벽과 남벽을 통해 성의 한복판을 통과함. 서쪽, 동남쪽, 동북쪽 3면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협곡에 위치하며, 협곡 서쪽에는 높은 산이 우뚝 솟아 있고, 동쪽에는 가파른 낭떠러지와 절벽으로 된 木銑頭山과 撩荒頂子山(『集安縣文物志』/撂荒頂子山;『考古』1964-2)에 위치함. 이 사이에 木掀頭子溝(『集安縣文物志』/木銑頭溝;『考古』1964-2)라고 불리는 좁은 골짜기가 있는데, 폭은 80m 전후이고, 목흔두자구의 계곡물은 남변의 撂荒頂子山을 따라 서쪽으로 흘러가 淸河(葦沙河)에 유입됨. 청하 유역의 협곡을 나와 서북쪽으로 가면 熱鬧鄕 소재지가 위치한 河谷平原이 나오고, 熱鬧鄕 동쪽 약 2㎞의 楊木橋子溝門 산비탈 아래에 대량의 고구려고분이 분포해 있음. 1960년대 조사 당시 산성 북쪽 0.5㎞ 지점의 평지상에서 적석묘 3기가 확인되었으며, 서북 약 7.5㎞에 大川哨所가 설치되어 있는데, 부근에는 고구려 고분이 많이 있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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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張拱垣 編, 「古蹟」『輯安縣志』, 1931
· 李殿福, 「1962年春季吉林輯安考古調査簡報」『考古』 1962-11, 1962
· 方起東, 陳相偉, 「吉林集安高句麗南道和北道上的關隘和城堡」『考古』 1964-2, 1964
· 方起東·林至德, 「集安高句麗考古的新收穫」『文物』 1984-1, 1984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4
· 孫進己·馮永謙, 『東北歷史地理』 (二), 黑龍江人民出版社, 1988
·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 編, 「關馬山城」『吉林省志』 43(文物志), 吉林人民出版社, 1991
· 國家文物局 主編, 「集安市-關馬山城」『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李殿福, 「高句麗考古的回顧與展望」『遼海文物學刊』 1992-2, 1992
· 遲勇, 「高句麗都城的戰略防禦系統」『高句麗硏究文集』, 延邊大學出版社, 1993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王禹浪·王宏北, 「中國吉林省集安市關馬山城」『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1994
· 魏存成, 「城址·建築址」『高句麗考古』, 吉林大學出版社, 1994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北方史地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4
· 王綿厚, 「鴨綠江右岸高句麗山城硏究」『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余昊奎, 「集安 關馬墻山城」『高句麗 城』 Ⅰ(鴨綠江 中上流篇), 國防軍史硏究所, 1998
· 楊春吉·王曉南, 「高句麗疆域調査與硏究現狀」『高句麗歸屬問題硏究』, 吉林文史出版社, 2000
· 秦升陽, 「南北道上的關隘與城堡」『高句麗歷史與文化』, 吉林文史出版社, 2000
·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魏存成, 「中期都城通往遼河流域的兩條道路與毌丘儉紀功碑」, 「山城的分布」『高句麗遺跡』, 文物出版社, 2002
· 杜宇 編著, 「老嶺山區古道」『集安風景名勝史話』, 通化師範學院照排印刷中心,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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