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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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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민고성, 양민전자고성(良民古城, 良民甸子古城)

 
  • 구분유적
  • 시대고구려 중기
  • 문서번호S000268
  • 위치(출토지)集安市 靑石鎭 良民甸子
  • 지역집안(集安市)
  • 유형성곽>평지성
 

출토지

 

집안시 청석진 양민전자 (集安市 靑石鎮 良民甸子)

 

연대

 

고구려 중기 전후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동천왕 21(247년)에 축조했다는 평양성으로 비정하기도 함(張福有).

 

조사내용

 

 
:1
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
2004길림성장백문화연구회, 집안시박물관
(吉林省長白文化硏究會, 集安市博物館)
6월 3일, 7일, 19일에 장복유, 정원, 손인걸, 지용이 고성지 1곳과 고분 14기를 발견함.
2004 6월 20일 오후 2시, 集安市 翠園호텔 2층 소회의실에서 좌담회에서 張福有, 길림성 장백산문화연구회 회장(양민출생, 중학교 때 이사)이 사회를 보고, 程遠, 집안시 文聯 주석, 賈蕾, 集安市委 宣傳部 干部가 소집되었으며, 孫志强 외 7인이 참석했음. 참석자 약력 사항으로 孫志强은 1927년 양민 출생으로 현재 78세로 원래 집안시 병원장이었으나 현재 퇴직했고, 16세 이후 외지로 나가 공부하고 일했으며, 지금은 집안시에 거주하며, 고향인 양민에 자주 감. 呂茂德은 1931년 양민 출생으로 현재 74세이며, 일찍이 양민 초등학교(小學校) 지도 주임, 교장을 역임했고, 이후 집안시 정부 비서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퇴직하여 집안시에 거주함. 馮振遠은 현재 78세로 일찍이 양민 초등하교(小學校) 교장을 6년간 역임하고 이후 집안시 인민 대회 상무위원회(集安市人大常委會) 財經 주임을 역임했으며, 지금은 퇴직하여 집안시에 거주함. 王金純은 1931년 양민에서 출생해서 현재 74세로 수몰 후 양민을 떠나, 일찍이 집안시 위원회 기율 검사 위원회(集安市委紀檢委) 監督員을 역임했으며, 지금은 퇴직해 집안시에 거주함. 周新博은 집안시 문서국(檔案局) 간부이고 遲勇과 孫仁杰은 집안시박물관 관원임.
2006길림성장백산문화연구회
(吉林省長白山文化硏究會)
운봉댐 수리를 위해 방류를 하면서 수위를 41.13m나 낮추자 그동안 수몰되었던 고성이 드러나자 5월 2일에 장백산문화연구회 장복유, 집안시박물관 손인걸과 지용이 성곽의 전체 현황과 성벽 축조 양상 등을 조사함.
1960년대 1962년에 길림성박물관의 王承禮 등이 운봉댐 수몰지구를 조사하면서 양민 일대도 조사했으나 고분만 확인함.
1964년 5월에 方起東, 李健才, 陳相偉 등이 운봉댐 수몰지구를 조사하며 양민전자 일대의 고분군 30여기를 발굴하였지만 이때도 고성은 조사하지 않음.
1966년 9월 9일에 운봉댐 완공으로 양민 일대가 수몰됨.

 

구조특징

 

2004년 좌담회 참석자들의 회상에 따르면 양민고성은 양민전자 1·2단 충적대지 사이에 위치했다고 함. 성곽은 주성곽과 보조성벽 두 부부느올 이루어져 있는데 주성곽은 전체적으로 방형이고, 보조 석벽은 주성곽 북쪽에 압록강과 나란히 남북 방향으로 축조했다고 함. 특히 현지인 王恒英 노인은 보조 성벽은 秋皮-良民 도로 모퉁이의 낭떠러지에서 축조하기 시작해 학교 서측으로 이어지며 그 남측으로 주성곽의 토벽을 축조했다고 함. 주성곽의 규모는 2004년 좌담회에서 전체적으로 장방형으로 남북 길이 350-400m, 동서 너비 300m였던 것으로 회고했고, 2006년 5월 2일 조사에서 운봉댐 방류로 성곽이 노출되었는데, 전체적으로 방형이고 모서리는 圓角이었고, 서벽은 180m, 북벽은 220m 정도 수면 위로 노출됨. 보조 성벽은 2004년 좌담회에서 약 550-600m였다고 회고함. 1965년 운봉댐이 건설되면서 이 일대 고분과 기타 중요 유적이 수몰되었는데, 2006년 5월 운봉댐 수리를 위해 방류를 하며 댐의 수위를 41.3m나 낮춤에 따라 주성곽이 드러났는데 성벽의 보존 상태가 상당히 양호했음.
2004년 좌담회 참석자의 회상을 보면 장복유는 이곳에서 태어나 중학교 때 이곳을 떠났는데 초등학교 때 학교 운동장의 서측이 성벽에 가까이 있었고, 성벽 높이 2m 정도 였으며, 놀이를 할 때 먼저 성에 올라가는 사람이 이겼음. 현지 농민 姜崇國은 1947년 양민에서 태어났고, 수몰 당시 17살이었을 때였음. 이곳에 확실히 성이 있었고, 북면은 양민학교에서 시작해 남면은 양민 圍子角까지 이르렀음. 남북 길이는 약 500m, 동서는 도로 세 곳에 걸쳐 있으며 300여m임. 강변에 붙어 있는 면의 벽(즉, 동벽)은 납작한 사각형 성돌로 쌓았고, 또 계단이 있어서 올라갈 수 있었고, 2m 정도 높이였으며, 다른 면은 흙으로 되어 있었고 흙이 딱딱해 농사를 지어도 자라지 않고, 3m여 너비로, 이런 벽 중간에는 갈라진 틈이 있었음. 현지인 75세 王恒英 노인은 秋皮溝에서 태어나 9살 때 양민에 이사옴. 석벽은 양민 北砬子 앞에서 시작해 곧게 학교의 흙 두둑 아래까지 직선이고, 중간에 세 개의 트인 입구가 있는데 학교 이쪽의 트인 입구는 南門外라고 부르고, 우리는 학교 우물에 가서 물을 길러 이 트인 입구로 길을 건넜음. 北砬子 머리 가까이에 트인 입구가 있었고 내가 秋皮 부모님 집에 돌아올 때 항상 이 길로 갔으며 일찍이 동문으로 불렀음. 이른 시기에 劉天順(지금은 이미 작고했음)이 집을 지을 때 성벽의 돌을 날라다 지었는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집을 지을 때 모두 성벽 위에 지었음. 吳承緖 집 앞에 또 트인 입구가 있었고 砬子머리에서 학교의 이 석벽까지의 거리는 약 2리(약 700-800m)였음. 일본 군대가 왔을 때 남문과 동문을 모두 부수었는데, 학교에서 남쪽으로는 토벽이고 직선으로는 圍子角까지이고, 土墻角(토벽 모퉁이)는 타원이었음. 남쪽 圍子角 밖에는 辛起祥 집, 王風祥 집, 王發祥 집, 王金純 집 등 몇 집이 있었고, 그곳에는 大石碾盤(큰 돌로 된 연자방아)가 있어 거기에 가서 옥수수나 조 같은 곡물을 빻았음.) 孫志强의 회상을 보면 이 성 가운데 강 가까이 있는 것(즉, 성의 동벽)은 돌로 축조했는데 당시 높이 2m 정도였고, 北砬子머리에서 시작해 姜씨네 가게까지 곧장 이어졌음. 길이는 500m 이상으로 우리 집 문 앞에서부터 학교의 이 제 1단 석벽까지는 약간 낮았고, 이 벽의 중간에 溝(고랑)가 두 곳 있었는데, 水冲溝 두 개 중 하나는 약 20m에 가깝고, 모두 40m 정도이며, 벽이 없어 양민에는 많은 집들이 모두 이 석벽 위에 건축되어 있었음. 서, 남, 북면 모두 흙으로 쌓은 벽이며 높지 않고 너비 3m 정도로 모두 땅이 단단히 다져져 있었음. 呂茂德의 회상을 보면 당시 우리는 이 벽을 城墻(성벽)이라 불렀지만, 또한 圍子墻이라고 불렀음. 北砬子머리의 石頭墻에서 들어온 후에 남쪽으로 가면 먼저 도랑 하나가 있는데, 이 도랑은 동서로 나있고, 도랑의 남면은 바로 圍子墻으로, 토벽이고 이 토벽은 동에서 서면으로 이어져 300여m 길이(바로 성의 북벽)이고, 다시 남면으로 돌아 (바로 성의 서벽) 양민 2隊 飼養所에 이르러 또 동으로 돌아가는데(바로 성의 서남 모퉁이), 거의 장방형임. 吳喜貴의 회상을 보면 당시 많은 집들이 토벽 위에 지어졌고, 남쪽 圍子角의 바깥면(남측)에 水泡子(물구덩이)가 있었음. 서남의 油坊溝와 老厲家小溝에서 흘러나온 물이 웅덩이로 들어가고, 남쪽 圍子角 북면을 통과해 압록가으로 유입함. 서벽의 중간에 트인 입구가 있고 성 밖에 우물이 있어 이 트인 입구를 지나 우물에 물을 길으러 갔음. 서벽에도 문이 있었고, 남벽 밖에는 大坎子(큰 두둑)이 있었음. 王金純의 회상을 보면 양민의 석벽과 토벽을 당시에 古墻(고벽)이라 불렀는데 일본인이 주둔하기 전부터 있었음. 일본인이 왔을 때 성벽에 나무 말뚝을 묻었고, 말뚝에 철로 된 가시를 둘렀음. 이후에 孫洪壽 집, 朱元慶 집, 宋單華 집, 老郭 집 등 많은 집들이 벽 위에 지어졌고 연이어 남쪽에 楊家店, 金家店과 德興堂이, 벽의 바깥에는 鐵匠爐(대장간)가 있었음. 서쪽 면의 大坎子(큰 두둑) 가까이 있는 산기슭에는 黃泥坑(진흙 구덩이)가 있었고, 서벽 바깥쪽은 비교적 지세가 낮은 논이 있었음.

 

역사적 의미

 

주변 유적 현황을 보면 첫째, 양민고분군이 있는데 양민고성 남쪽의 충적대지 중간지점에 약 200여 기의 고구려 고분군이 분포해 있었고, 고구려 초기의 적석묘와 함께 중후기의 봉토석실분이 병존했으며, 운봉댐 수몰선인 해발 299-310m 부근에서 수몰되지 않은 적석묘 13기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함. 둘째, 운봉댐 수몰지구의 고분군으로 운봉댐 수몰지구에는 양민고분군뿐 아니라 大荒溝, 大靑溝, 雙安, 秋皮, 石湖, 樺皮, 河套 등에 고구려 고분이 널리 분포해 있으며, 맞은편의 북한지역에도 압록강 좌안과 압록강 지류인 자성강 연안에 고구려 고분군이 아주 조밀하게 분포되어 있음. 2006년 5월 댐을 방류했을 때 운봉댐 수몰지구 일대를 조사하여 2000여기 이상의 고구려 고분을 조사했다고 하고, 양민고성 주성곽 내부와 그 북측에서도 10여기의 적석묘를 확인했다고 함. 그 가운데 성곽 내부에 분포한 1호분은 정방혀으이 계단적석묘로서 한 변의 길이 8m, 높이 2m이며, 당시 2층으로 축조한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함.
지정학적으로 양민고성은 고구려 두번째 도성인 국내성이 위치했더 집안시 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약 45㎞ 떨어진 압록강 중류 우안의 충적대지에 위치하며, 양민고성이 위치한 양민전자 일대의 충적대지는 남북 길이 4㎞, 동서 너비 3㎞로서 집안시 동북쪽에서는 가장 넓은 평원이라고 함. 국내성이 위치했던 집안시 소재지와 압록강 상류 일대를 연결하는 압록강 수로망의 전략적 요충지임.
양민고성의 기능과 성격을 보면, 첫째, 3세기 중후반의 平壤城 및 東北 新城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는데 고구려는 曹魏 모구검의 침공으로 환도성이 파괴되어 도읍으로 삼을 수 없게 되자, 247년에 평양성을 축조하여 백성과 廟社를 옯겼다고 함(『삼국사기』고구려본기5 동천왕 21년조). 고구려는 3세기 중후반에 동북 新城을 축조했으며, 서천왕이 이곳을 순행했고(『삼국사기』고구려본기5 서천왕 7년조 및 19년조), 봉상왕도 모용황의 침공을 받고 동북 新城으로 피신했다고 함(『삼국사기』고구려본기5 봉상왕 2년조). 고구려는 4세기 전반에는 334년에 평양성을 증축한 다음(『삼국사기』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4년조) 342년 전연 모용황에게 다시 환도성이 함락당하자 그 이듬해에 平壤 東黃城으로 이거함(『삼국사기』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13년조). 국내성이 있었던 집안시 소재지에서 동북방에 위치했고, 압록강 중상류 일대에서는 가장 넓은 충적대지에 펼쳐져 있고, 역사적으로 계속 大鎭이 설치되었으며, 초기 이래의 거의 모든 유형의 고구려 고분이 성곽 주변에 밀집해 있다는 사실 등의 근거로 3세기 중후반의 평양성 및 동북 신성으로 비정함. 이와 더불어 주성곽 북측에 위치한 보조 성곽은 334년에 증축했다는 평양성으로 파악함. 양민 일대는 247년 이래 약 1세기간 고구려 제2수도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양민고성이 바로 그 성곽이라는 견해임. 특히 환도성에서 양민고성에 이르는 교통로를 통해 양민고성이 3-4세기의 평야성이자 서천왕이 순행하고 봉상왕이 피신했던 동북 신성이라는 견해를 강하게 주장함. 즉 환도산성 아래의 大川에서 陽岔, 羅家營, 大靑溝를 지나 雙安에 이르는 길이 고구려 북도의 첫 부분인데, 쌍안에서 북쪼긍로 약 20㎞ 쯤 가면 통화 石湖關隘에 이르며, “쌍안”에서 동쪽으로 秋皮를 지나 10여㎞ 가면 바로 양민고성에 도착한다고 함. 양민고성과 국내성 지역을 통행하는 루트를 따라가면 고구려 고분이 매우 많고 관애시설이 구비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음. 특히 대천-쌍안 부근은 모용외 침입시 新城宰 高奴子가 신성으로 피신하던 봉상왕을 영접했다는 鵠林으로 추정됨. 즉 이일대의 통구하 남쪽 연안에는 자연 지형을 이용해 세운 관애와 거주지가 결합된 고구려 유적지가 있는데, 관애는 길이 560m, 너비 7m, 높이 1.2-1.8m의 토석혼축성벽이며, 남북 방향으로 뻗어 있다고 함. 이곳은 通集 철로의 黃栢역에서 남으로 50m 거리로서 동서 양측은 高山이며 성벽 서쪽에는 통구하를 따라 약 1500㎡의 高臺를 축조해 놓았음. 평대 주위에는 한변의 길이 5m 전후, 높이 1m 정도으 고구려 적석석광묘가 7기가 있음. 이에 이 일대를 高奴子가 烽上王을 영접했던 ‘鵠林’으로 비정함(장복유). 둘째, 한대 평지성설로, 2006년 운봉댐의 방류로 성곽이 드러났을 때 성곽 내외를 조사한 다음 성곽 내부에 위치한 계단적석묘의 연대를 4세기 전후로 비정한 다음, 성곽은 그보다 앞선 시기에 축조했을 것으로 파악하고, 그런 다음 성곽의 구조와 축조 방식이 고구려뿐 아니라 발해, 요, 금대의 성곽과 다르다면서 한대에 축조한 평지성으로 파악함(新華通信). 셋째, 압록강 수로상의 역참으로 3세기 중후반의 사료에 등장하는 고구려의 동북 신성은 동해안에 위치했던 것으로 파악됨. 또한 漢 서기전 75년경에 압록강 중상류 일대에서 지금의 소자하 방면으로 퇴축당했을 뿐 아니라 당시 漢이 축조했던 성곽은 모두 토성이었음. 따라서 양민고성은 압록강 중류연안에 위치했고, 토석혼축 및 석축 성벽이라는 점에서 동북 신성이나 한대 평지성으로 파악하기는 힘듦. 다만 427년 평양 천도 이전에 존재했다는 3-4세기의 평양성일 가능성은 전혀 없지 않은데 이에 대해서는 추후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음. 한편 양민 지역은 압록강 중상류 연안에서 집안분지 다음으로 넓은 충적대지가 펼쳐져 있을 뿐 아니라, 주변에는 고구려 시기의 고분이 집중적으로 펼쳐져 있음. 또한 압록강 중상류 연안에는 장천고성을 비롯하여 樺皮甸子古城, 夾皮溝古城, 東馬鹿村古城 등이 압록강 수로상의 요충지에 분포되어 있는데, 양민고성과 마찬가지로 모두 상하 2단으로 이루어진 강변 충적대지 중 1-2단 사이의 2단 충적대지 가장자리에 자리잡고 있음. 이로 보아 양민고성도 압록강 수로상의 교통요지를 공제하던 역참 기능을 수행했을 거승로 추정됨 다만 압록강 중상류 연안의 고구려 고성이 대체로 둘레 300-400m로 소형인데 비해, 양민고성은 1㎞ 전후의 중형 성곽이라는 점에서 수로 교통로상의 역참 기능뿐 아니라 지방지배, 나아가 왕족이나 귀족세력의 근거지 역할도 수행했을 가능성이 높음. 양민고성 주변에 고구려 고분이 밀집한 상황은 이러한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생각됨.

 

자연환경

 

양민은 집안시 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약 45㎞ 떨어진 압록강 중류 우안에 위치하는데 이 일대는 남북 길이 4㎞, 동서 너비 3㎞의 비교적 넓은 충적 평원으로 동쪽은 압록강에 임해 있고 서쪽은 高山에 의지해 있음. 양민고성은 상기 충적대지가 막 시작되는 북쪽 끝에 위치하며 고성의 경도와 위도는 동경 126˚30'044", 북위 41˚25'108"로서 고구려 두번째 도성이었던 국내성(동경 126˚11'774", 북위 41˚07'21")의 동북방에 위치함.
양민고성은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였고, 한 면은 강에 임해 있으며, 지역이 開闊하고 토질이 비옥한데, 좌담회 참석자들은 양민전자의 지형적 특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함. 양민전자는 남북 길이 8리, 동서 너비 약 6리로서 상하 2단 대지로 구성되어 있음. 압록강은 북한쪽 가까이에 있고, 북에서 남으로 흘러감. 압록강 우안에 엽접해 있는 1단 대지는 강 수면에서 약 20여m 높고, 드넓은 평지에 토질이 비옥함. 1단 대지의 서측에 2단 대지가 위치해 있는데, 1단 대지보다 약 5m 정도 높음. 성곽은 1, 2단 대지 사이에 위치해 있음.

 

참고문헌

 

· 李殿福, 「集安高句麗墓硏究」『考古學報』 1980-2, 1980
· 方起東, 「高句麗石墓的演進」『博物館研究』 1985-2, 1985
· 孫仁傑·遲勇, 「集安良民高句麗遺址調査」『東北史地』 2004-4, 2004
· 長福有, 「高句麗第一個平壤城在集安良民卽國之東北大鎭-新城」『東北史地』 2004-4, 2004
· 杜宇 編著, 「老四區及良民甸子」『集安風景名勝史話』, 通化師範學院照排印刷中心, 1999
· 新華通信, 2006년 5월 9일자 보도 ‘吉林省一座漢代古城浮出水面’[http://www.jl.xinhuanet.com],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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