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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스트여닫기 오도령구문고분(五道嶺溝門古墳) 출토지 집안현 마선향 오도령 (集安縣 麻線鄉 五道嶺)연대 전국 말기(B.C 3C)~서한 초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78집안현박물관(集安縣博物館)4월 24일 集安縣 太平公社 太平大隊 五道嶺溝門 도로 보수 중, 五道嶺 狍圈子溝門 맞은 편 지표에서 3m 높이의 남쪽 산비탈에서 돌을 옮기던 중에 1m 정도의 깊이의 대석 사이에서 청동기를 발견했으나 발견 당시 교란된 돌무지로 고분 및 청동기 외에 어떤 유물이나 흔적은 발견하지 못하고, 당시 인부들이 출토된 유물 11건을(실제 나열된 사례는 13건) 집안현 박물관에 보고하였음.4월 24일 집안현 박물관에서 제1차로 현장조사 및 유물 회수를 하고 발견 경위의 내용을 기록하였지만 고분은 발견하지 못함.1978집안현박물관(集安縣博物館)5월 31일부터 6월3일까지 제2차 조사가 이루어졌고, 劉景文, 閻毅之, 林至德, 趙素勤, 張雪岩이 참여하였으며, 청동단검의 출토지점에서 적석총(방단계제적석총)을 조사하였음.1979장설암(張雪岩)10월 길림성 고고학대회에서 고분을 소개하였는데 유물 출토 관련 내용은 제1차 조사 기록 참조하였고, 고분 형식은 제2차 조사의 기록과 도면을 참조하였으며, 발표내용은 1981년 『考古』에 수록함.1983장설암(張雪岩)공개적으로 원시적 계장적석묘로 수정하였고, 고분 방향은 南偏西 32°로, 평면이 정방형, 한변 길이 14m, 각 계단은 1.3-1.85m 들여쌓기를 했고, 殘高 약 80㎝라고 보고했음.구조특징 평면은 정방형이고, 방향은 南偏西 32°이며, 조사 당시 각 계단은 1.3-1.85m 들여쌓기를 함. 표면은 이미 고분의 흔적이 보이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서 산비탈 아래로 흐르는 자갈이 그 위를 덮은 것으로 보아 일명 창류석이라고 함. 산의 경사도는 25°로 동북이 높고, 서남이 낮은데, 북면(윗면)은 산을 따라 돌을 축조했으며 무계단이고, 남면(아래면)은 파괴가 심각한데 묘의 정상부 자갈이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3층 계단이 일정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으며, 각 층의 계단은 몇 개의 돌만 잔존하며, 계단은 명확치 않음. 고분의 북변 5m, 동변 21m 되는 지점에서 유물 출토되었으며, 현재 고분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음.역사적 의미 고분의 형식에 대한 여러 견해가 있는데, 첫째가 창류석으로 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산비탈 아래로 흐르는 자갈이 그 위를 덮은 것인데, 고분 흔적이 보이지 않은 것에 기인했고, 둘째가 계장적석총으로 산비탈의 각도가 25°이고, 동북이 높고 서남이 낮으며, 북면은 무계단이나, 남면은 명확치 않지만 묘의 정상부 자갈이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3층의 계단 흔적이 남아있는 것에 기인했으며, 셋째가 장설암의 견해로 발굴조사 참여시에는 이 고분의 형식을 방단계제적석묘로 보았으나, 이후 “창류석”로 변경하였다가 다시 계장식 적석총으로 분류하면서 계장이 발전하며 계단을 형성하게 된다고 보았음. 중국 동북 요동반도의 길림·장춘일대에서 출토된 청동검은 대부분 曲刃短劍으로 하한연대는 戰國 中晩期로 보고 있는데 오도령구문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단검의 根部와 刃部는 구부러짐이 없고, 劍身이 세밀하고 길며, 刃部는 비교적 平直한 형태로, 곡인단검보다 늦은 형태로 상한 연대는 대략 전국 晩期(B.C. 3C) 혹은 그 이후로 보며, 오도령구문 무덤의 상한 연대는 전국시대 말기로 볼 수 있고, 고분의 하한 연대는 고분에서 출토된 銅矛를 통해 추정할 수 있는데 오도령구문 청동모는 근래 단동지역, 통화, 혼강, 임강 등지에서 출토되는 청동기와 유사하며, 특히 통화 적백송고송은 漢代 현토군의 속현인 上殷台縣의 치소로 비정되므로 오도령구문 고분의 하한 연대는 漢 武帝가 4군을 설치한 이후로 추정됨.자연환경 집안현 마선향 오도령 산비탈 아래 위치하고 고분이 위치한 산비탈 아래로 집안과 환인을 연결하는 도로가 지나감. 이 고분은 집안시 태평향 소속이었으나 태평향이 없어지며 현재 마선향 소속으로 변경됨.유물정보 청동단검(靑銅短劍) 1점, 동제 도끼(銅斧) 1점, 동제 거울(銅鏡) 1점, 칼집끝장식(劍鏢) 1점, 동제 창(銅矛) 3점, 부채모양도끼(鉞形銅斧) 4점, 도끼날 철제화살촉 2점참고문헌 · 張雪巖, 「集安發現靑銅短劍墓」『考古』 1981-5, 1981 · 吉林省文物志編纂委會, 『集安縣文物志』, 1983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張雪岩, 「集安靑銅短劍墓及相關問題」『高句麗硏究論集』 上, 延邊大 出版部, 1993 · 張雪岩, 「集安靑銅短劍墓及相關問題」『박물관연구』 1995-1(再收錄), 1995 · 耿鐵華, 「高句麗紇升骨城新考」『高句麗考古硏究』, 吉林文史出版社, 2004

  • 고마령고려묘구 고분군(古馬嶺高麗墓溝 古墳群)

  • 고마령고려묘구 5호분(古馬嶺高麗墓溝 5號墳)

  • 고마령고려묘구 12호분(古馬嶺高麗墓溝 12號墳)

  • 고마령고려묘구 17호분(古馬嶺高麗墓溝 17號墳)

  • 고마령강구 고분군(古馬嶺江口 古墳群)

  • 고마령 고분군(古馬嶺 古墳群)

  • 대동구 고분군(大東溝 古墳群)

  • 노방구 고분군(老房溝 古墳群)

  • 대양차 고분군(大陽岔 古墳群)

  • 소양차 고분군(小陽岔 古墳群)

  • 대로촌 고분군(大路村 古墳群)

  • 파보촌 고분군(爬寶村 古墳群)

  • 고지 고분군(高地 古墳群)

  • 정의촌 고분군(正義村 古墳群)

  • 칠개정자구 고분군(七個頂子溝 古墳群)

  • 만구문 고분군(彎溝門 古墳群)

  • 석청구 고분군(石靑溝 古墳群)

  • 동구 고분군(東溝 古墳群)

  • 하동구문 고분군(下東溝門 古墳群)

  • 지구문 고분군(地溝門 古墳群)

  • 리스트여닫기 노호초 고분군(老虎哨 古墳群) 출토지 집안시 유림진 노호초촌 (集安市 榆林鎮 老虎哨村)연대 고구려 전반(3세기)~고구려 후기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62길림성박물관, 집안현문물보관소(吉林省博物館, 集安縣文物保管所)4월 조사1981집안현문물보관소(集安縣文物保管所)10월 조사에 林至德, 閻毅之, 趙書勤이 참가하였고, 노호초 수력발전소 건설로 인해 발굴 조사를 실시함.구조특징 고분은 총 17기 중 5기는 훼손이 심각하여, 봉토분 12기만을 발굴함. 고분의 매장부의 수에 따라 동분이혈(同墳異穴)의 이실 무덤과 단실무덤으로 구분하고, 석실 평면은 치우친 연도(刀形)과 중앙연도(鏟形)로 구분하며, 천정은 조정한 것과 평천정으로 구분함. 고분(석실분)의 유형에 따른 분포상황을 보면 횡구식 봉토석실분은 2기(M1, M4)로 석실 4벽에는 모두 불규칙한 석괴를 축조하였고, 벽 높이는 1-1.5m이며, 상부에는 간단한 抹角 조정 후 천정은 1-2개의 板狀大石으로 덮음. 묘도 입구에는 대부분 입구 표시석(迎門石)이 있고 頂部에는 大石板으로 덮었고, 분구의 형태는 丘狀임. 횡혈식 봉토석실분은 10기가 있는데, 단실무덤은 鏟形 1기(M8), 刀形 6기(M2, M3, M5, M6, M9, M11)로 총 7기가 있고, 동분이혈 이실무덤은 총 3기(M7, M10, M12)로 편재연도의 刀形 평면이고 동쪽 석실이 서쪽 석실보다 약간 큼. 수축 방법은 석실묘와 유사하나 석실 상부에 抹角이 없고 커다란 판석으로 頂部을 덮음. 석실과 연도의 바닥은 낮은 편으로 높은 것은 70-90㎝이고, 다수가 迎門石을 가지고 있음.역사적 의미 고구려 고분의 변천과정 상 석실봉토분은 3세기대 이미 출현하여, 4세기 중엽-5세기 중엽에 크게 발전하고, 6세기 중엽에는 고구려 고분양식의 주류를 형성하므로 봉토분이 중심이 되는 노호초고분군의 연대는 고구려 전반인 3세기부터 고구려 후기까지로 추정됨. 소형 봉토분은 피장자의 신분과 빈부의 차이와 빈부의 차이에 따라 재료 및 규모의 크기에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줌. 입구 표시석(迎門石)은 고구려 후기(6세기)로 비정되는 5회분 4호묘 및 5호묘, 통구 12호분(마조총) 등의 대형 고분에서 전실 앞의 묘도 중앙에 설치되어 “擋門石”이라 칭하는데, 이러한 시설은 고구려 소형 봉토분 중에서 발견된 예는 없으나, 노호초는 소형 고분임에도 발견되는 첫 사례로 고분 구조에서 반드시 필요한 시설은 아니며, 고구려 후기 葬俗에 의해 출현한 일종의 관념을 표명한 것으로 추정됨.자연환경 유림진 노호초촌 서쪽 200m에 위치하고 노호초 북면의 黑駝山 아래에 남북으로 펼쳐진 길고 좁다란 언덕의 중앙에 분포하며 분포 범위는 대략 3천㎡임. 노호초촌은 집안현에서 서남 50㎞ 거리에 위치하나 현재 수력발전소로 인해 완전 수몰되었고, 노호초의 동·남·서쪽 등 3면을 압록강이 둘러싸고 있으며,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渭源郡이 위치함.유물정보 석제 칼(石刀片) 1점, 석제 화살촉(石鏃) 3점, 토기편(陶片) 12점, 철제 화살촉(鐵鏃) 1점, 철제 손칼(鐵削) 1점, 은제 반지(銀指環)1점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纂委會, 『集安縣文物志』, 1983 · 趙書勤, 「集安縣老虎哨古墓」『文物』 1984-1, 1984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리스트여닫기 노호초 1호분(老虎哨 1號墳) 출토지 집안시 유림진 노호초촌 (集安市 榆林鎮 老虎哨村)연대 고구려 전반(3세기)~고구려 후기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62길림성박물관, 집안현문물보관소(吉林省博物館, 集安縣文物保管所) 1981집안현문물보관소(集安縣文物保管所)10월 조사에 林至德, 閻毅之, 趙書勤이 참가하였고, 노호초 수력발전소 건설로 인해 발굴 조사를 실시함.구조특징 주변 길이 35.5m의 同墳異穴 2실 무덤으로 방향은 南偏東 30°임. 동·서 2개 석실로 구성되어 있는데, 동일한 규모이고, 동실의 천정은 함몰되어 천정석이 보이지 않으며, 석실 천정은 각 2개의 커다란 長大石으로 덮여 있음. 석실의 4벽과 묘도는 모두 다듬지 않은 돌로 축조되었고, 평면은 중앙연도의 鏟形이며, 4벽은 약간 들여쌓기가 된 상태이고, 상부에는 板狀石으로 2층 말각 축조를 하였음. 석실 바닥에는 직경 5-10㎝ 되는 작은 냇돌을 깔았는데, 현재 지표보다 10㎝ 낮고, 동실문은 5개의 대석으로 봉했으며, 서실문 밖에서 묘도 입구에 이르기까지 2.25m 지점에 높이 0.5m 되는 입구 표시석(迎門石)을 세움.내부규모 및 특징 석실 길이 2.5m, 너비 1.9m, 높이 1.25m, 문벽의 두께 0.85m 동실 묘도 길이 2.7m, 너비 0.75m, 높이 0.35-1m 서실 묘도 길이 2.6m, 너비 0.7m, 높이 0.2-0.85m역사적 의미 고구려 고분의 변천과정 상 석실봉토분은 3세기대 이미 출현하여, 4세기 중엽-5세기 중엽에 크게 발전하고, 6세기 중엽에는 고구려 고분양식의 주류를 형성하므로 봉토분이 중심이 되는 노호초고분군의 연대는 고구려 전반인 3세기부터 고구려 후기까지로 추정됨. 소형 봉토분은 피장자의 신분과 빈부의 차이와 빈부의 차이에 따라 재료 및 규모의 크기에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줌. 입구 표시석(迎門石)은 고구려 후기(6세기)로 비정되는 5회분 4호묘 및 5호묘, 통구 12호분(마조총) 등의 대형 고분에서 전실 앞의 묘도 중앙에 설치되어 “擋門石”이라 칭하는데, 이러한 시설은 고구려 소형 봉토분 중에서 발견된 예는 없으나, 노호초는 소형 고분임에도 발견되는 첫 사례로 고분 구조에서 반드시 필요한 시설은 아니며, 고구려 후기 葬俗에 의해 출현한 일종의 관념을 표명한 것으로 추정됨.자연환경 유림진 노호초촌 서쪽 200m에 위치하고 노호초 북면의 黑駝山 아래에 남북으로 펼쳐진 길고 좁다란 언덕의 중앙에 분포하며 분포 범위는 대략 3천㎡임. 노호초촌은 집안현에서 서남 50㎞ 거리에 위치하나 현재 수력발전소로 인해 완전 수몰되었고, 노호초의 동·남·서쪽 등 3면을 압록강이 둘러싸고 있으며,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渭源郡이 위치함.유물정보 동실에서 석제 칼편(石刀片) 1점, 석제 화살촉(石鏃) 3점 출토 서실에서 이빨장식(牙飾) 1점 출토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纂委會, 『集安縣文物志』, 1983 · 趙書勤, 「集安縣老虎哨古墓」『文物』 1984-1, 1984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리스트여닫기 노호초 4호분(老虎哨 4號墳) 출토지 집안시 유림진 노호초촌 (集安市 榆林鎮 老虎哨村)연대 고구려 전반(3세기)~고구려 후기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62길림성박물관, 집안현문물보관소(吉林省博物館, 集安縣文物保管所) 1981집안현문물보관소(集安縣文物保管所)10월 조사에 林至德, 閻毅之, 趙書勤이 참가하였고, 노호초 수력발전소 건설로 인해 발굴 조사를 실시함.구조특징 외형은 丘狀으로 주변 길이 31.6m이고 방향은 南偏東 20°임. 석실은 단실로 평면이 刀形으로 壁石 위에 1단만 말각조정을 하고, 천정은 큰 돌 1매로 봉했으며, 천장 막음돌 크기는 길이 1.23m, 너비 0.85m, 두께 0.17m임. 석실 바닥은 현 지표보다 10㎝ 낮으며, 바닥에는 직경 10-15㎝의 넓적한 모양의 조약돌을 깔고, 소량의 숯이 발견되었으며, 석실 입구는 다듬지 않은 장대석을 쌓아 봉함. 연도는 서쪽으로 치우쳐져 있고, 석실 서벽이 연도 서벽으로 연결함. 천정은 장대형 대석으로 봉했고 길이 2.15m, 너비 0.8m, 두께 0.17m이며, 연도 입구 바닥은 넓고 위는 뾰족한 삼각형 모양의 迎門石이 하나 세워져 있음.내부규모 및 특징 석실 길이 2.6m, 너비 1.65m, 높이 1.3m. 연도 길이 1.9m, 너비 0.9m, 높이 1.9m역사적 의미 고구려 고분의 변천과정 상 석실봉토분은 3세기대 이미 출현하여, 4세기 중엽-5세기 중엽에 크게 발전하고, 6세기 중엽에는 고구려 고분양식의 주류를 형성하므로 봉토분이 중심이 되는 노호초고분군의 연대는 고구려 전반인 3세기부터 고구려 후기까지로 추정됨. 소형 봉토분은 피장자의 신분과 빈부의 차이와 빈부의 차이에 따라 재료 및 규모의 크기에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줌. 입구 표시석(迎門石)은 고구려 후기(6세기)로 비정되는 5회분 4호묘 및 5호묘, 통구 12호분(마조총) 등의 대형 고분에서 전실 앞의 묘도 중앙에 설치되어 “擋門石”이라 칭하는데, 이러한 시설은 고구려 소형 봉토분 중에서 발견된 예는 없으나, 노호초는 소형 고분임에도 발견되는 첫 사례로 고분 구조에서 반드시 필요한 시설은 아니며, 고구려 후기 葬俗에 의해 출현한 일종의 관념을 표명한 것으로 추정됨.자연환경 유림진 노호초촌 서쪽 200m에 위치하고 노호초 북면의 黑駝山 아래에 남북으로 펼쳐진 길고 좁다란 언덕의 중앙에 분포하며 분포 범위는 대략 3천㎡임. 노호초촌은 집안현에서 서남 50㎞ 거리에 위치하나 현재 수력발전소로 인해 완전 수몰되었고, 노호초의 동·남·서쪽 등 3면을 압록강이 둘러싸고 있으며,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渭源郡이 위치함.유물정보 석실 서북모서리의 토기편 1점, 석식 동남쪽의 은반지 1점, 연도 서북쪽의 철제 화살촉 1점, 석제 칼편 1점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纂委會, 『集安縣文物志』, 1983 · 趙書勤, 「集安縣老虎哨古墓」『文物』 1984-1, 1984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노호초 5호분(老虎哨 5號墳)

  • 노호초 7호분(老虎哨 7號墳)

  • 노호초 10호분(老虎哨 10號墳)

  • 관문립 고분군(關門砬 古墳群)

  • 영수 고분군(迎水 古墳群)

  • 대고려묘구 고분군(大高麗墓溝 古墳群)

  • 대고려묘구 21호분(大高麗墓溝 21號墳)

  • 대고려묘구 31호분(大高麗墓溝 31號墳)

  • 대고려묘구 43호분(大高麗墓溝 43號墳)

  • 대고려묘구 41호분(大高麗墓溝 41號墳)

  • 대고려묘구 43호분(大高麗墓溝 43號墳)

  • 대고려묘구 45호분(大高麗墓溝 45號墳)

  • 대고려묘구 46호분(大高麗墓溝 46號墳)

  • 대고려묘구 47호분(大高麗墓溝 47號墳)

  • 이실총(二室塚)

  • 무개총(無蓋塚)

  • 고총(高塚)

  • 석곽노출총(石槨露出塚)

  • 대총(大塚)

  • 삼실총(三室塚)

  • 소고려묘구 고분군(小高麗墓溝 古墳群)

  • 대주선구 고분군(大朱仙溝 古墳群)

  • 향양 고분군(向陽 古墳群)

  • 양자구 고분군(樣子溝 古墳群)

  • 복흥 고분군(復興 古墳群)

  • 하조구 고분군(下弔溝 古墳群)

  • 치안 고분군(治安 古墳群)

  • 사도구문 고분군(四道溝門 古墳群)

  • 판차구 고분군(板岔溝 古墳群)

  • 대양구고분(大陽溝古墳)

  • 소청구 고분군(小靑溝 古墳群)

  • 유가포자 고분군(劉家鋪子 古墳群)

  • 료지구문 고분군(鬧枝溝門 古墳群)

  • 삼도양차 고분군(三道陽岔 古墳群)

  • 황차구문 고분군(荒岔溝門 古墳群)

  • 화전자 고분군(化甸子 古墳群)

  • 횡로구대 고분군(橫路九隊 古墳群)

  • 횡로구대 5호분(橫路九隊 5號墳)

  • 황로구대 13호분(橫路九隊 13號墳)

  • 횡로구대 32호분(橫路九隊 32號墳)

  • 횡로구대 51호분(橫路九隊 51號墳)

  • 동차구문 고분군(東岔溝門 古墳群)

  • 합당촌 고분군(哈塘村 古墳群)

  • 재원 고분군(財源 古墳群)

  • 신건 고분군(新建 古墳群)

  • 마제구 고분군(馬蹄溝 古墳群)

  • 쌍흥 고분군(雙興 古墳群)

  • 보마 고분군(報馬 古墳群)

  • 모배령 고분군(母背嶺 古墳群)

  • 소방자구 고분군(燒房子溝 古墳群)

  • 금가 고분군(金家 古墳群)

  • 묘서 고분군(廟西 古墳群)

  • 요영자 고분군(腰營子 古墳群)

  • 반가가 고분군(潘家街 古墳群)

  • 홍석립자 고분군(紅石砬子 古墳群)

  • 종가 고분군(鍾家 古墳群)

  • 대천 고분군(大川 古墳群)

  • 청구자 고분군(靑溝子 古墳群)

  • 양목교자 고분군(楊木橋子 古墳群)

  • 대양목간자 고분군(大楊木杆子 古墳群)

  • 피덕기둔 고분군(皮德記屯 古墳群)

  • 대유수 고분군(大楡樹 古墳群)

  • 리스트여닫기 상활룡 고분군(上活龍 古墳群) 출토지 집안시 마선향 상활촌 (集安市 麻線鄉 上活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77집안현문물보관소(集安縣文物保管所)겨울에 상·하활룡 고분군을 조사함.1982집안현문물보관소(集安縣文物保管所)林至德, 閻毅之, 趙書勤, 付佳欣이 참가하여 5월-10월에 노호초 수력발전소 건설을 위해 상·하활룡 고분군 발굴 조사를 실시함.구조특징 적석총 3기, 계단적석총 5기, 봉토석실분 6기 등 총 14기가 분포하고 있음. 적석총 3기는 M1, M2, M7로 M1과 M2는 동서로 나란히 고분군의 최동단에 위치하고 M7은 고분군의 서뿍 모서리에 위치함. 계단적석총 5기는 M3, M5, M10, M11, M12로 이미 원형이 상실되었고 M5의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함. 봉토석실분 6기는 M4, M6, M8, M9, M13,M14로 모두 파괴되었고, 천청적 대부분이 결실되었으며, 천정 막음석을 덮은 후 황토로 봉했음. 분구는 원구상이며, 연도 위치에 따라 Ⅰ, Ⅱ식으로 나누는데 Ⅰ식은 편재 연도의 刀형 평면 석실로 총 2기(M13, M14)이고, Ⅱ식은 중앙 연도의 鏟형 평면 석실로 총 4기(M4, M5, M8, M9)임. M3은 현재 집이 들어서면서 훼손되었고, M4는 현재 절반이 잘려나간 상태임. 봉토석실분 Ⅱ식의 분구에는 土石混封도 포함되며, M9는 연도의 훼손이 삼각하고, M8·M9는 무기단석실적석총일 가능성이 큼. 봉토석실분 Ⅰ식의 M13, M14는 상부가 모두 훼손되었고, M12는 석실이 완전히 노출된 상태로 석실 밖 좌우에 대석이 각 1개씩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계단적석총이었을 것으로 추정됨.역사적 의미 상활룡 고분군의 적석총과 계단적석총에서 출토된 토기의 태토, 제작기법과 형식이 하활룡 고분군 출토 토기와 유사하므로, 상활룡 고분군의 연대는 하활룡 고분군으로 미루어 상한은 후한 시기이고 하한은 漢·魏의 교체기보다 늦지 않을 것으로 추정되나, 다만 상활용 고분군의 토기는 물레로 성형하고, 높은 온도에서 소성하여 하활용 고분군보다 하한이 내려올 가능성도 있음.자연환경 집안시 마선향 상활촌 북쪽에 있으며, 집안현성에서 서남쪽으로 8㎞ 지점에 위치하고, 모두 마을 북쪽의 충적 대지에 분포함. 고분군의 주변으로는 충적 대지 동쪽 320m 거리에 압록강이 흐르고, 서쪽으로 一漫崗과 접하며 배후에 산들이 충접함.(일명, 後山)유물정보 심발형토기 2점, 시루 1점, 호 2점, 동제 거울 1점, 회색토기편 1점, 연화문와당 1점, 명문토기 1점, 토기편 여러 점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纂委會, 『集安縣文物志』, 1983 · 孫仁傑, 「集安縣上·下活龍村高句麗古墓淸理簡報」『文物』 1984-1, 1984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리스트여닫기 상활룡 2호분(上活龍 2號墳) 출토지 집안시 마선향 상활촌 (集安市 麻線鄉 上活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77집안현문물보관소(集安縣文物保管所)겨울에 상·하활룡 고분군을 조사함.1982집안현문물보관소(集安縣文物保管所)林至德, 閻毅之, 趙書勤, 付佳欣이 참가하여 5월-10월에 노호초 수력발전소 건설을 위해 상·하활룡 고분군 발굴 조사를 실시함.구조특징 방형 평면이고, 방향은 180˚직경이며, 10-20㎝ 되는 강자갈을 지표 위에 쌓았고, 발굴 전에 분구 천정부의 북쪽에서 함몰갱(길이 및 너비가 각 3m)이 확인됨. 묘광은 지표와 바닥의 높이와 같으며, 무덤의 중앙에 위치하고, 네벽은 대부분 파괴되었으며, 남면에서 동서방향의 墓壙 벽선이 확인되는데 직경 30×50㎝의 강자갈로 축조했으며, 묘광 내부에서 심발형토기(陶罐)과 시루(陶甑) 등이 상당수 발견됨.내부규모 및 특징 묘광 현 길이 4.8m, 잔고 0.30m역사적 의미 상활룡 고분군의 적석총과 계단적석총에서 출토된 토기의 태토, 제작기법과 형식이 하활룡 고분군 출토 토기와 유사하므로, 상활룡 고분군의 연대는 하활룡 고분군으로 미루어 상한은 후한 시기이고 하한은 漢·魏의 교체기보다 늦지 않을 것으로 추정되나, 다만 상활용 고분군의 토기는 물레로 성형하고, 높은 온도에서 소성하여 하활용 고분군보다 하한이 내려올 가능성도 있음.자연환경 집안시 마선향 상활촌 북쪽에 있으며, 집안현성에서 서남쪽으로 8㎞ 지점에 위치하고, 모두 마을 북쪽의 충적 대지에 분포함. 고분군의 주변으로는 충적 대지 동쪽 320m 거리에 압록강이 흐르고, 서쪽으로 一漫崗과 접하며 배후에 산들이 충접함.(일명, 後山)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纂委會, 『集安縣文物志』, 1983 · 孫仁傑, 「集安縣上·下活龍村高句麗古墓淸理簡報」『文物』 1984-1, 1984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리스트여닫기 상활룡 4호분(上活龍 4號墳) 출토지 집안시 마선향 상활촌 (集安市 麻線鄉 上活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77집안현문물보관소(集安縣文物保管所)겨울에 상·하활룡 고분군을 조사함.1982집안현문물보관소(集安縣文物保管所)林至德, 閻毅之, 趙書勤, 付佳欣이 참가하여 5월-10월에 노호초 수력발전소 건설을 위해 상·하활룡 고분군 발굴 조사를 실시함.구조특징 석실 평면은 鏟형으로 지표 하 10㎝ 되는 곳에 자리하며, 석실 네 벽은 괴석을 사용해 들여쌓기로 3-4층을 쌓았고, 석실 중앙에서 서벽으로 40㎝ 되는 곳에서 동제 거울(銅鏡片) 1점, 토기(夾沙灰陶, 夾沙褐陶, 泥質灰陶) 잔편 등이 출토되었으며, 천정의 북쪽 부분에는 천정 막음돌 2매가 남아 있음. 연도는 남벽 중앙에 위치하며, 연도 중앙에는 돌을 쌓아 폐쇄시킴.내부규모 및 특징 석실 길이 2.5m, 너비 1.35m, 높이 1.1m 연도 길이 1m, 너비 0.64m, 높이 0.8m역사적 의미 상활룡 고분군의 적석총과 계단적석총에서 출토된 토기의 태토, 제작기법과 형식이 하활룡 고분군 출토 토기와 유사하므로, 상활룡 고분군의 연대는 하활룡 고분군으로 미루어 상한은 후한 시기이고 하한은 漢·魏의 교체기보다 늦지 않을 것으로 추정되나, 다만 상활용 고분군의 토기는 물레로 성형하고, 높은 온도에서 소성하여 하활용 고분군보다 하한이 내려올 가능성도 있음.자연환경 집안시 마선향 상활촌 북쪽에 있으며, 집안현성에서 서남쪽으로 8㎞ 지점에 위치하고, 모두 마을 북쪽의 충적 대지에 분포함. 고분군의 주변으로는 충적 대지 동쪽 320m 거리에 압록강이 흐르고, 서쪽으로 一漫崗과 접하며 배후에 산들이 충접함.(일명, 後山)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纂委會, 『集安縣文物志』, 1983 · 孫仁傑, 「集安縣上·下活龍村高句麗古墓淸理簡報」『文物』 1984-1, 1984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리스트여닫기 상활룡 5호분(上活龍 5號墳) 출토지 집안시 마선향 상활촌 (集安市 麻線鄉 上活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77집안현문물보관소(集安縣文物保管所)겨울에 상·하활룡 고분군을 조사함.1982집안현문물보관소(集安縣文物保管所)林至德, 閻毅之, 趙書勤, 付佳欣이 참가하여 5월-10월에 노호초 수력발전소 건설을 위해 상·하활룡 고분군 발굴 조사를 실시함.구조특징 방구상 평면으로 180˚방향임. 기단은 지표에 강자갈을 깔아 기초를 만들고, 그 위에 기단을 축조했는데 가공된 석회석을 3단으로 쌓았고, 각 층은 12-13개의 돌을 사용하였으며, 총 높이는 0.70m로, 기단 위의 4면을 1-2m 안으로 들여쌓아 계단을 축조했으며, 기단 동남 모서리에서 2m 떨어진 곳의 지표하 30㎝에서 파손된 연화문와당이 출토됨. 2층 계단은 직경 40×20m 되는 강자갈로 축조했고 높이 0.70m로 계단 내부는 돌을 채운 후에 들여쌓으면서 묘광실을 축조함. 묘광은 지표에서 1.40m 높이에 위치하며 4벽은 파괴되었고 동남북 3면에 여러 개의 잘 다듬어진 돌이 잔존하는데, 돌의 크기는 50×20×10㎝임. 남북 방향의 장방형이고, 길이가 약 3m이나 너비는 확인이 불가하며, 묘광 내에서 고운 점토의 회색토기(灰陶) 구연부편이 출토되었음. 묘광 상부에는 크기가 제각기인 강자갈로 분구를 만듦.내부규모 및 특징 묘광 길이 약 3m역사적 의미 상활룡 고분군의 적석총과 계단적석총에서 출토된 토기의 태토, 제작기법과 형식이 하활룡 고분군 출토 토기와 유사하므로, 상활룡 고분군의 연대는 하활룡 고분군으로 미루어 상한은 후한 시기이고 하한은 漢·魏의 교체기보다 늦지 않을 것으로 추정되나, 다만 상활용 고분군의 토기는 물레로 성형하고, 높은 온도에서 소성하여 하활용 고분군보다 하한이 내려올 가능성도 있음.자연환경 집안시 마선향 상활촌 북쪽에 있으며, 집안현성에서 서남쪽으로 8㎞ 지점에 위치하고, 모두 마을 북쪽의 충적 대지에 분포함. 고분군의 주변으로는 충적 대지 동쪽 320m 거리에 압록강이 흐르고, 서쪽으로 一漫崗과 접하며 배후에 산들이 충접함.(일명, 後山)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纂委會, 『集安縣文物志』, 1983 · 孫仁傑, 「集安縣上·下活龍村高句麗古墓淸理簡報」『文物』 1984-1, 1984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리스트여닫기 상활룡 13호분(上活龍 13號墳) 출토지 집안시 마선향 상활촌 (集安市 麻線鄉 上活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77집안현문물보관소(集安縣文物保管所)겨울에 상·하활룡 고분군을 조사함.1982집안현문물보관소(集安縣文物保管所)林至德, 閻毅之, 趙書勤, 付佳欣이 참가하여 5월-10월에 노호초 수력발전소 건설을 위해 상·하활룡 고분군 발굴 조사를 실시함.구조특징 석실의 바닥은 지표보다 20㎝ 낮고, 한겹 작은 냇돌을 깔았으며, 석실 평면은 편재연도의 刀형으로 4벽은 화강암으로 축조했으며, 방향은 180˚임. 연도는 남벽 좌측에 위치하고 연도 중앙에 돌로 폐쇄하였음. 북쪽에서 두개골을 발견한 상황으로 볼 때 葬制는 頭北南足이며, 부장 유물은 고운 점토의 회색토기(灰陶)와 갈색토기(褐陶) 등의 토기편이 출토됨.내부규모 및 특징 석실 길이 1.75m, 너비 1.10m, 높이 0.75m 연도 길이 1.20m, 너비 0.60m, 높이 0.65m역사적 의미 상활룡 고분군의 적석총과 계단적석총에서 출토된 토기의 태토, 제작기법과 형식이 하활룡 고분군 출토 토기와 유사하므로, 상활룡 고분군의 연대는 하활룡 고분군으로 미루어 상한은 후한 시기이고 하한은 漢·魏의 교체기보다 늦지 않을 것으로 추정되나, 다만 상활용 고분군의 토기는 물레로 성형하고, 높은 온도에서 소성하여 하활용 고분군보다 하한이 내려올 가능성도 있음.자연환경 집안시 마선향 상활촌 북쪽에 있으며, 집안현성에서 서남쪽으로 8㎞ 지점에 위치하고, 모두 마을 북쪽의 충적 대지에 분포함. 고분군의 주변으로는 충적 대지 동쪽 320m 거리에 압록강이 흐르고, 서쪽으로 一漫崗과 접하며 배후에 산들이 충접함.(일명, 後山)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纂委會, 『集安縣文物志』, 1983 · 孫仁傑, 「集安縣上·下活龍村高句麗古墓淸理簡報」『文物』 1984-1, 1984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리스트여닫기 하활룡 고분군(下活龍 古墳群) 출토지 집안시 마선향 하활촌 (集安市 麻線鄉 下活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77집안현문물보관소(集安縣文物保管所)겨울에 상·하활룡 고분군을 조사함.1982집안현문물보관소(集安縣文物保管所)5월-10월에 걸쳐 임지덕, 염의지, 조서근, 부가흔이 참가하여 노호초 수력발전소 건설을 위해 상·하활룡 고분군을 조사함.구조특징 고분군의 범위는 동서 너비 1㎞, 남북 길이 1.5m로 총 34기의 적석총이 분포함. 적석총은 묘광의 크기에 따라 2式으로 구분되는데 Ⅰ식 고분은 총 29기로 남쪽의 경사진 언덕 위에 위치하는 M8이 대표적 사례이며, 고분 둘레는 대부분 8-15m임. Ⅱ식 고분은 총 5기(M24, M3, M4, M13, M14)로 고분 둘레가 3-6m이며, 고분 축조가 Ⅰ식 고분과 동일한 광실로 규모는 Ⅰ식 고분에 비해 매우 작고, 매장 공간은 길이 0.8-1.1m, 너비 0.25-0.6m의 소형임.역사적 의미 고분군의 연대는 고분 구조와 부장품으로 미루어 상한은 후한, 하한은 漢·魏의 교체기로 비정되며, 고분 구조를 보면 적석총은 원형, 방형 평면 등 정형성을 갖추지 못하였고, 매장부의 위치가 분구 중 혹은 지표에 있기도 함. 장속의 일부는 묘광이 시체를 안치하기에 너무 작은 것도 있는데, 이것은 『北史』고려전의 기록 “死者殯在屋內 經三年 擇日而葬”에서 말하는 2차장의 습속과 연관지어 볼 수 있으나 뼈만 추려 매장했을 가능성 또는 어린아이를 매장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음.자연환경 집안현성에서 서남 방향 16㎞ 거리의 집안시 마선향 하활촌 남쪽에 고분군이 위치하는데 동남 양쪽으로 압록강이 흐르고, 서북 양쪽으로는 가파른 大黑砬子山이 둘러싸고 있으며, 북쪽 8㎞ 거리에 상활룡촌이 자리잡고 있음. 고분군은 반원형 충적 분지 동쪽의 언덕으로, 압록강 수면보다 약 5m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노호초 수력발전소의 건설로 인해 완전히 수몰됨.유물정보 고리자루칼 2점, 철제 도끼 1점, 철제 낫 1점, 철제 띠고리 1점, 화살촉 집 1점, 동제 단추장식 1점, 동제 장식 1점, 양이호 1점, 사이호 1점, 방추차 1점, 어망추 1점, 유리구슬장식 6점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纂委會, 『集安縣文物志』, 1983 · 孫仁傑, 「集安縣上·下活龍村高句麗古墓淸理簡報」『文物』 1984-1, 1984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리스트여닫기 하활룡 8호분(下活龍 8號墳) 출토지 집안시 마선향 하활촌 (集安市 麻線鄉 下活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77집안현문물보관소(集安縣文物保管所)겨울에 상·하활룡 고분군을 조사함.1982집안현문물보관소(集安縣文物保管所)5월-10월에 걸쳐 임지덕, 염의지, 조서근, 부가흔이 참가하여 노호초 수력발전소 건설을 위해 상·하활룡 고분군을 조사함.구조특징 원형 평면으로 직경 50×50㎝ 되는 강자갈을 묘 주위에 깔음. 묘광은 南偏西 35˚방향으로 모래와 강자갈을 섞어 지표에 직접 축조하였으며, 직경 30×40㎝ 정도의 강자갈로 쌓았고, 묘광 상부는 작은 강자갈로 봉함.내부규모 및 특징 묘광 동벽 길이 1.7m, 높이 0.8m 묘광 서벽 길이 1.8m, 높이 0.9m 묘광 남벽 너비 1.1m, 높이 0.9m 묘광 북벽 너비 1.0m, 높이 0.8m역사적 의미 고분군의 연대는 고분 구조와 부장품으로 미루어 상한은 후한, 하한은 漢·魏의 교체기로 비정되며, 고분 구조를 보면 적석총은 원형, 방형 평면 등 정형성을 갖추지 못하였고, 매장부의 위치가 분구 중 혹은 지표에 있기도 함. 장속의 일부는 묘광이 시체를 안치하기에 너무 작은 것도 있는데, 이것은 『北史』고려전의 기록 “死者殯在屋內 經三年 擇日而葬”에서 말하는 2차장의 습속과 연관지어 볼 수 있으나 뼈만 추려 매장했을 가능성 또는 어린아이를 매장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음.자연환경 집안현성에서 서남 방향 16㎞ 거리의 집안시 마선향 하활촌 남쪽에 고분군이 위치하는데 동남 양쪽으로 압록강이 흐르고, 서북 양쪽으로는 가파른 大黑砬子山이 둘러싸고 있으며, 북쪽 8㎞ 거리에 상활룡촌이 자리잡고 있음. 고분군은 반원형 충적 분지 동쪽의 언덕으로, 압록강 수면보다 약 5m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노호초 수력발전소의 건설로 인해 완전히 수몰됨.유물정보 Ⅱ식 고리자루칼(環首鐵刀) 1점, 철제 도끼(鐵錛) 1점, 철제 낫(鐵鎌刀) 1점, 철제 장식(鐵附件) 1점, 철제 띠고리(鐵帶卡) 1점, Ⅰ식 및 Ⅱ식의 양이호, 사이호(陶罐) 각 1점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纂委會, 『集安縣文物志』, 1983 · 孫仁傑, 「集安縣上·下活龍村高句麗古墓淸理簡報」『文物』 1984-1, 1984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하활룡 24호분(下活龍 24號墳)

  • 하활용 묘군 M8(下活龍 墓群 M8)

  • 태평구 고분군(太平溝 古墳群)

  • 태평구 59호분(太平溝 59號墳)

  • 사구령 고분군(斜溝嶺 古墳群)

  • 흥농 고분군(興農 古墳群)

  • 흥농교 고분군(興農橋 古墳群)

  • 자흥 고분군(自興 古墳群)

  • 두도양차 고분군(頭道陽岔 古墳群)

  • 산성촌 고분군(山城村 古墳群)

  • 양차 고분군(陽岔 古墳群)

  • 장천 고분군(長川 古墳群)

  • 장천 1호분(長川 1號墳)

  • 리스트여닫기 장천 2호분(長川 2號墳) 출토지 집안시 황백향 장천촌 (集安市 黃柏鄉 長川村)연대 5세기 중반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62 집안시 전역 문물답사시 발견함.1972길림성박물관, 집안현문물보관소(吉林省博物館, 集安縣文物保管所)4-5월에 걸쳐 陳相偉, 劉萱堂, 王澤慶이 참가하여 장천 2호분을 발굴함.구조특징 장천2호분(JCM002)은 봉토석실 벽화분으로 방대형의 분구이며, 둘레는 143m임. 매장부의 연도는 방향이 254˚이고, 연도 입구는 장방형 또는 방형의 돌로 막았으며, 바닥은 석판을 깔음. 이실은 연도의 남과 북에 각 1개가 있고, 장방형 평면, 평천정이며, 바닥은 통로 바닥보다 12㎝ 높음. 통로의 양벽은 잘 다듬어진 장대석으로 4단을 축조하였고, 통로의 끝에 현실 문을 축조하였는데 0.70m 너비의 門楣와 門框이 설치되어 있고, 문미 위쪽에 직경 0.12m, 깊이 0.07m의 기둥구멍(門軸을 놓았던 자리)이 있으며, 2개의 석문을 설치하였는데 남문은 훼손되고 북문은 너비 0.70m, 높이 1.50m로 상태가 양호함. 묘실은 방형 평면으로 통로가 서벽 중앙에 연결되어 있고, 천정은 4중 평행고임에 거대 頂石을 덮은 평행고임 천정이며, 벽장을 걸기 위한 못자리 구멍이 있는데 4벽 상단에 일정간격을 유지하여 남·북벽에 각 5개, 동벽 8개, 서벽 4개가 있고, 동벽 남단과 서벽 북단에는 도금 고리가 남아 있는 상태로 발견됨. 관대는 화강암으로 제작된 2개의 관대가 남북으로 배치되어 있음. 철기 총 15점, 모두 銅質에 도금한 도금류 총 27점, 황유토기 중 북쪽 이실에서 釉陶의 부뚜막(陶灶), 남쪽 이실에서 사이호(四耳釉陶壺)가 출토되었고, 남쪽 관대 서북 모서리에서 비단 조각편이 출토되었으며, 관대 위에서 표면에 옻칠이 된 목관 잔편이 출토되었고, 남쪽 관대 중앙부에서 목령패편이 출토되었는데 말각장방형으로 표면에 옻칠이 되어 있으며, 묘도 앞의 교란된 구덩이에서 원주형의 목기편이 출토되었고 남쪽 관대의 서단에서 기와편이 출토되었음. 벽화내용을 보면 남·북 이실은 벽에 ‘王’자로 권운문이 연속되는 도안으로 가로 25줄, 세로 23줄이고, ‘王’자 바깥에 墨線의 운문이 둘러쌈. 현문의 앞면에는 머리에 방책을 착용하고 몸에 短襦肥袴를 입고 허리는 띠로 묶고 발에 釘履를 신은 문지기가 있고, 뒷면에는 合袵長服襈裙을 입고 두 손을 가슴 앞쪽에 모으고 오른쪽으로 몸을 돌린 모습의 시녀가 있음. 묘실에는 전·후벽 및 좌·우벽의 천정에 연꽃이 있고 천정석 아래의 影作樑枋에 인동문이 있으며 천정 막음돌은 흑선으로 9개의 네모칸으로 나누었는데 정중앙 및 4모서리의 5개 네모칸 안에는 정면에서 바라본 연화도안을 배치하였고, 나머지 4개 네모칸에는 마름모형의 기하문양을 배치하였으며, 묘실문 안쪽 부분에는 위쪽 부분과 좌우 양측에 墨線으로 螭雲圖案, 門楣, 門框 등을 배치함.역사적 의미 고구려 귀족 또는 왕족의 무덤임. 연대는 5세기 중반인데 고분 벽화 2기의 전형인 우산 1894호분(『考古與文物』1983-1인용, 통구 12호분(일명, 마조묘)가 현재 우산 1894호;or 우산 332호분)의 구조가 묘실과 남·북 이실로 구성되어 있고 묘실의 천장은 평행고임이며 벽화 내용상 석문에 그려진 시녀의 형태와 복식 및 연꽃잎이 뾰족하고 쇠약한 점에서 유사한 구조이고, 우산하 1894호분의 벽화가 풍속화인데 비해 장천 2호분은 도안 위주의 벽화이라는 점에서 벽화소재의 차이가 나는데 이는 유형상의 차이임.자연환경 집안현성 동북 25㎞쯤의 황백향 장천촌 북쪽 제1단과 제2단 대지에 위치하는데, 장천은 동서로 좁고 길게 뻗은 하곡분지로, 계절하인 乾溝河(干溝河)가 북쪽 산골짜기에서 분지 중앙을 지나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유입되는데, 건구하 양안을 따라 100여기의 고구려 고분이 밀집함. 고분군은 북쪽은 높은 산에 기대어 있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자리하며, 고분군이 자리한 장천촌을 집안-청석 간 도로가 동서로 관통함. 장천 분지에는 2개의 계절하가 북에서 남으로 흘러가는데, 서쪽이 건구하이고 동쪽이 後林子溝河임.유물정보 철제 망치 1점, 철제 칼 1점, 철제 화살촉 5점, 철제 못(釘) 4점, 문고리(門鐐) 2점, 철기 띠고리(帶卡) 2점, 행엽 1점, 도금 띠고리 2점, 걸이쇄(掛鉤) 2점, 못(釘) 6점, 고리(環) 1점, 장방형 장식품 2점, 입식부 운주 2점, 화판형 관장식 Ⅰ식 6점, Ⅱ식 5점, 釉陶 부뚜막(陶灶) 1점, 사이호(四耳釉陶壺) 1점, 비단 조각편 1점, 목관 잔편 1점, 목령패편 1점, 원주형의 목기편 1점, 기와편 1점참고문헌 · 陳相偉·方起東, 「集安長川一號壁畵墓」『東北考古與歷史』 1982-1, 1982 · 陳相偉, 「集安長川二號封土墓發掘簡記」『文物考古彙編』 1982-1, 1982 · 陳相偉, 「集安長川二號封土墓發掘紀要」『考古與文物』 1983-1, 1983 · 張雪岩, 「集安兩座高句麗封土墓」『博物館研究』 1988-1, 1988 · 孫進己·孫海, 『高句麗渤海硏究集成』 高句麗 卷(二), 哈爾濱出版社, 1997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전호태,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 사계절출판사, 2000

  • 장천 3호분(長川 3號墳)

  • 장천 4호분(長川 4號墳)

  • 장천 5호분(長川 5號墳)

  • 리스트여닫기 장천고성; 장천촌읍지(長川古城; 長川村邑址) 출토지 길림성 집안시 황백향 장천촌 (吉林省 集安市 黃柏鄉 長川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62길림성박물관 집안고고대(吉林省博物館集安考古隊)4월에 상기 고고대의 방기동 및 길림사범대학 조정용, 길림성 철학사회과학연구소 주함강, 집안현 문물관리소 직원이 참가하여 성벽을 실측하고 유물을 채집함. 정식보고서는 간행하지 않았고, 길림성문물지위원회, 1984 『集安縣文物志』 및 집안현문물보관소, 1986 「集安嶺前鴨綠江流域原始社會遺址」『博物館硏究』1986-2에 일부 내용을 기재함.1972 유적 내에서 동제 검(銅劍)을 모방한 석제 검(石劍)이 출토함.1980 가을에 현지 주민이 採土 작업을 하다가 토기편을 대량으로 발견했고, 집안현 박물관의 周雲台가 장천벽화고분 유지보수 작업을 하면서 현지 주민을 데리고 채토 지점에 대한 조사를 진행함.1983집안현박물관문물조사대(集安縣博物館文物調査隊)5월 30일에 서운강, 경철호, 동장부, 장설암이 참가하여 성벽 보존상태를 재확인함. 길림성문물지편위회, 1984 『집안현문물지』에 발표하였고, 조사결과를 토대로 1983년 10월 19일 집안현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됨.구조특징 고성은 압록강 강변에 펼쳐진 충적대지보다 10m 정도 높은 2단 충적대지의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동서 길이 110m, 남북 너비 100m 전후로 이 고성과 유사한 혼강-장백 지역의 사례로 보아 전체 평면이 정방형 내지 방형인 평지성으로 추정됨. 1962년 조사 당시에는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여 성벽의 둘레를 확인할 수 있었으며, 1983년 재조사할 때도 남벽과 북벽은 土築, 동벽과 서벽은 石築으로 성벽의 축조상태를 비교적 정확히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성벽이 거의 매몰되어 있어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 힘든 상태이며, 고성의 표지판을 세워놓은 서북벽 동북단의 일부를 겨우 확인할 수 있는 정도로 더욱이 성곽이 위치한 2단 충적대지 일대가 포도밭으로 경작되고 있어 유적이 훼손될 가능성도 상당히 높은 상태임. 출토유물로 성곽 내부에서 일찍이 철제 화살촉과 황색니질토기(黃色泥質陶) 및 사질혼입토기(夾砂陶)편이 출토되었는데, 그 가운데 고구려 시기의 전형적인 대상파수(橫橋耳)도 있음. 성곽 서쪽에서 토기편이 대량으로 출토된 청동기시대 유적이 확인된 바 있고, 1972년에는 성곽 내부에서 동제 검(銅劍)을 모방한 석제 검(石劍)이 출토된 바 있음.역사적 의미 주변에 적석묘·봉토석실묘 등 고구려 시기 고분이 다수 있고, 장천 1호분과 2호분을 비롯한 대형 벽화고분도 있으며, 고성의 서쪽 일대에는 청동기시대 토기편 산포지가 자리잡고 있음. 지정학적으로 고구려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이 위치했던 집안현성(길림성 집안시)에서 압록강을 거슬러 동북 23㎞ 정도 떨어져 있고, 국내성에서 비교적 가까우며 고구려시기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대형 계단식 석실적석총과 벽화고분이 주변에 분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구려 귀족세력과 밀접히 연관된 지역으로 추정됨. 주변에 밀집하게 분포한 고구려 시기의 고분과 성곽 내부에서 출토된 고구려 시기의 토기편을 근거로 대체로 고구려시기의 마을 유적으로 파악하고 있음(『집안현문물지』). 다만 성곽이 비교적 소규모이고, 압록강변 충적대지의 가장자리에 위치했다는 점에서 단순한 마을유적으로 보기는 힘들고, 최근 양민고성을 비롯하여 압록강 중상류 연안에서 장천고성과 입지조건이나 규모 등이 유사한 성곽이 다수 확인되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압록강변 2단 충적대지의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으며 방형 내지 장방형의 소규모 평지성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음. 이로 보아 장천고성도 이들과 동일한 성격의 평지서응로 압록강 수로를 이용·통제하기 위해 축조한 수로상의 성곽으로 추정됨.자연환경 집안현성(길림성 집안시)에서 동북으로 23㎞ 떨어진 황백향 장천촌 서측 압록강변의 대지상에 위치하고, 남쪽으로 약 150m 거리에 압록강이 있고, 북쪽으로 집안-청석 도로에 잇닿아 있으며, 동쪽 50m 거리에 장천촌의 주택가가 위치해 있음. 압록강이 동북에서 서남으로 완만한 유속으로 유유히 흘러가고 있으며, 압록강 남쪽과 북쪽에는 강과 거의 평행으로 산줄기가 계속 연이어짐. 장천촌 일대는 압록강 연안에서 비교적 넓은 충적대지를 이루고 있으며, 특히 장천촌 동쪽에는 서북쪽의 산줄기에서 발원한 두 줄기의 계절 하천이 서북에서 동남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합류하고 있음. 고성이 위치한 압록강 연안의 충적대지는 2단으로 되어 있는데, 강 연안에 바로 인접하여 좁고 기다란 1단의 대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그 안쪽에 1단 대지보다 10m 정도 높은 2단 대지가 펼쳐져 있음. 고성은 2단 충적대지의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는데, 고성의 서쪽에서 청동기시대로 추정되는 유적이 확인된 바 있음. 장천촌 동쪽 계절 하천 주변의 충적대지에는 고구려 적석묘가 백여기 이상 분포해 있으며 장천촌 서북쪽 산기슭에는 장천2호분을 비롯한 벽화고분과 대형 계단식석실적석묘가 위치해 있고, 고성 서남쪽 충적대지상에도 대형적석묘 2기가 위치해 있음.참고문헌 · 李殿福, 「1962年春季吉林輯安考古調査簡報」『考古』 1962-11, 1962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4 · 張雪岩·周云台, 「集安嶺前鴨綠江流域原始社會遺址」『博物館研究』 1986-2, 1986 · 國家文物局 主編, 「集安市-長川古村邑址」『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王禹浪·王宏北, 「中國吉林省集安市黃柏鄕長川村高句麗古城址」『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1994 · 余昊奎, 「集安 長川古城」『高句麗 城』 Ⅰ(鴨綠江 中上流篇), 國防軍史硏究所, 1998

  • 장천 유적지(長川 遺跡地)

  • 장천 2호 고분(長川 2號 古墳)

  • 호자구 고분군(蒿子溝 古墳群)

  • 리스트여닫기 호자구 1호분(蒿子溝 1號墳) 출토지 집안시 황백향 호자구촌 (集安市 黃柏鄉 蒿子溝村)연대 3세기경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3집안시박물관(集安市博物館)5월에 실시하여 고분 7기(JHM1-JHM7호)가 확인했는데, JHM1호분만 기록하였고 그 외 6개 고분은 기록하지 않음.2004, 2005집안시박물관(集安市博物館)2004년 11월 및 2005년 4월에 장복유, 손인걸, 지용이 참가하여 고분 6기를 확인하였고, JHM1·3·4·5·6·7호로 편호함. 1983년 JHM2호로 편호된 고분은 JHM1호분의 부속시설로 확인됨.구조특징 호자구1호분(JHM1)은 기단석광적석총으로 1983년 조사시에는 방단계제적석묘로, 2005년 조사시에는 6기 모두 유단적석석광묘로 표기했었음. 장방형 평면, 南偏西 20˚방향이고, 기단은 4면 모두 확인되는데 미가공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일반적으로 4-7층으로 축조하였고, 기단석은 대략 길이 0.5m, 너비 0.3m, 높이 0.2m 정도의 크기이며, 돌 울타리의 잔고는 서쪽 중앙은 1.2m, 북쪽은 0.8m, 동·남쪽은 1.5m임. 기단 밖에는 대형 護墳石(立石)을 세웠는데 다수가 홍갈색 화강암이고, 회색화강암, 현무암 등의 미가공된 상태의 석질을 사용하였으며, 크기는 남쪽의 지표에 드러난 부분의 높이는 1.5m, 너비 1.2m, 두께 1m이고, 북쪽의 지표에 드러난 부분의 높이는 1.2m, 너비 2m, 두께 0.6m이며, 동·서쪽의 높이는 1-0.8m, 너비 0.8-0.6m, 두께 0.6-0.3m임. 고분 서쪽면 남단과 고분의 남쪽면 사이에서 2줄의 돌 울타리(계장)가 확인되었는데, 서쪽면 남단의 계장은 서남모서리에서 6m 지점에서 시작하고, 서쪽면 남단의 계장은 아랫단에서 1.5m 정도 들어간 위에 단을 축조함. 분구는 다량의 산자갈과 소량의 강돌로 쌓았으며, 분구 중앙 함몰 상태로 미루어 석광은 훼손이 심각한데 분구 적석 사이에 다수의 암키와, 수키와 잔편, 용석, 불타서 변형된 기와 등이 발견되었고, 1983년 조사 때 겹겹이 눌린 방추차 4건, 용석 등을 발견함. 고분의 북쪽은 농경지로 개간되어 훼손됨.역사적 의미 고분군의 연대를 보면 호자구 1호분은 3세기경으로, 고분 축조방식에서 대형적석총인 집안 마선구 2378호 및 칠성산 871호의 기단 바깥으로 立石을 설치하고 계장을 구축하는 방식과 유사하기 때문에 이것은 고구려 초기의 적석총 축조기법이지만, 고분 남쪽면에서 비교적 낮은 곳에 있고, 모서리가 점차 네모져지는 점, 봉석 가운데 강돌이 보이고, 筒瓦의 어깨부분이 점차 높아지는 점에서 차이를 보여 호자구 고분은 마선구 2378호, 칠성산 871호분보다 연대가 조금 늦음. 호자구 3·4·5·6·7호분은 3세기경으로 1호분과 고분 유형은 일치하나 규모가 작고 고분 연대는 1호분과 비슷함. 호자구 1호분은 왕릉으로 3세기 대형적석묘이며 호자구 1호분의 동·북 양쪽의 유적으로 장방형 돌무지로 陵墻類의 시설로 추정되는 왕릉 시설물이 있고, 고분 남면은 벼랑이고, 서면은 고랑 경사로 능묘시설이 보이지 않음. 호구자 3-7호분은 JHM1호분과 동일 연대로 규모가 작다는 점에서 배총으로 추정됨. 최근 중국에서는 JHM1호분의 주인공을 동천왕으로 비정하고 있는데, 그 근거로 고분의 연대와 규모면에서 연대가 3세기경이고, 고분 규모와 부속시설이 왕릉의 구비조건과 부합하며, 魏 관구검의 환도성 침공 후, 동천왕 21년(247) ‘築平壤城, 移民及廟社’한 기록하고 있으며, 고분이 위치한 호자구는 지리적으로 국내성의 동쪽(東川)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고, 호자구 지명과 동천왕 장지명의 관계에서 장천의 동쪽은 ‘黃柏’에서 ‘호자구’라고 칭했으며, 호자구는 금일 ‘柴子溝’로도 불리는데, 이것은 동천왕의 장지 ‘柴原’과 일치하고, 동천왕대 기록에 동천왕 21년(247)에 축조한 평양성은 ‘양민고성’으로 상정했고, 호자구 지역은 국내성과 평양성의 중간지대이며, 동천왕은 평양성 축조 이듬해인 249년 훙거함. 중국학계의 고분군 해석에 대한 문제로는 현재 잔존된 상태로 미루어 보고자의 견해대로 왕릉으로 볼 근거는 확실하지 않고, 여러 기가 열상 배치되어 독립된 묘역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규모는 마선구 2378호분과 칠성산 871호분에 비해 소형에 해당됨. 연대 판단의 근거도 없는데 마선구 2378호분은 보고서에 의하면 1세기 전후로 비정되고, 칠성산 871호분은 2세기경으로 비정하고 있기 때문에 같은 축조기법이 200년 이상 지속되므로, 축조기법은 연대 판단의 적극적인 근거가 될 수 없음. 적석분구에서 용석이 발견되는 것은 집안 일대 이른 시기 석광적석총에서 흔히 보이는 현상이며, 중·소형분에서도 기와의 출토 예가 있음. 따라서 무덤 축조 형식이나 분구에서 기와가 출토된 점으로 왕릉으로 비정하는 것은 불합리한 해석이며, 더구나 동천왕으로 볼 객관적 근거도 없음.자연환경 고분군은 집안현성 동쪽 약 31㎞ 떨어진 황백향 호자구촌 동북에 위치하며, 호자구 충적대지 중앙의 동서 1.5㎞, 남북 1㎞ 가량의 작은 언덕 최남단에 위치함. (이 고분의 행정 소재지는 예전에는 황백향이었으나, 최근 靑石鎭 관할로 변경됨.) 호자구는 동서 2.5㎞, 남북 1.5㎞의 충적대지로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고 있고, 남쪽에 압록강이 흐르고, 고분군이 위치하는 언덕에서 남쪽으로 약 50m 떨어져 호자구소학교가 위치하며, 청석진과 집안을 연결하는 도로(集靑公路)가 소학교 앞을 동서로 관통함.참고문헌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李殿福, 「國內城始人建于戰國晩期燕國遼東郡塞外的一介據點之上」『東北史地』 2006-3, 2006

  • 호자구 3호분(蒿子溝 3號墳)

  • 호자구 4호분(蒿子溝 4號墳)

  • 호자구 5호분(蒿子溝 5號墳)

  • 호자구 6호분(蒿子溝 6號墳)

  • 호자구 7호분(蒿子溝 7號墳)

  • 하투 고분군(下套 古墳群)

  • 추피 고분군(秋皮 古墳群)

  • 석호 고분군(石湖 古墳群)

  • 양민 고분군(良民 古墳群)

  • 양민 1호분(良民 1號墳)

  • 양민 2호분(良民 2號墳)

  • 양민 3호분(良民 3號墳)

  • 양민 4호분(良民 4號墳)

  • 양민 5호분(良民 5號墳)

  • 양민 6호분(良民 6號墳)

  • 양민 7호분(良民 7號墳)

  • 양민 8호분(良民 8號墳)

  • 양민 9호분(良民 9號墳)

  • 양민 10호분(良民 10號墳)

  • 양민 11호분(良民 11號墳)

  • 양민 12호분(良民 12號墳)

  • 양민 13호분(良民 13路墳)

  • 양민 30호분(良民 30號墳)

  • 양민 31호분(良民 31號墳)

  • 양민 72호분(良民 72號墳)

  • 양민 73호분(良民 73號墳)

  • 양민 74호분(良民 74號墳)

  • 양민 76호분(良民 76號墳)

  • 양민 92호분(良民 92號墳)

  • 양민 97호분(良民 97號墳)

  • 양민 168호분(良民 168號墳)

  • 리스트여닫기 양민고성, 양민전자고성(良民古城, 良民甸子古城) 출토지 집안시 청석진 양민전자 (集安市 靑石鎮 良民甸子)연대 고구려 중기 전후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동천왕 21(247년)에 축조했다는 평양성으로 비정하기도 함(張福有).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2004길림성장백문화연구회, 집안시박물관(吉林省長白文化硏究會, 集安市博物館)6월 3일, 7일, 19일에 장복유, 정원, 손인걸, 지용이 고성지 1곳과 고분 14기를 발견함.2004 6월 20일 오후 2시, 集安市 翠園호텔 2층 소회의실에서 좌담회에서 張福有, 길림성 장백산문화연구회 회장(양민출생, 중학교 때 이사)이 사회를 보고, 程遠, 집안시 文聯 주석, 賈蕾, 集安市委 宣傳部 干部가 소집되었으며, 孫志强 외 7인이 참석했음. 참석자 약력 사항으로 孫志强은 1927년 양민 출생으로 현재 78세로 원래 집안시 병원장이었으나 현재 퇴직했고, 16세 이후 외지로 나가 공부하고 일했으며, 지금은 집안시에 거주하며, 고향인 양민에 자주 감. 呂茂德은 1931년 양민 출생으로 현재 74세이며, 일찍이 양민 초등학교(小學校) 지도 주임, 교장을 역임했고, 이후 집안시 정부 비서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퇴직하여 집안시에 거주함. 馮振遠은 현재 78세로 일찍이 양민 초등하교(小學校) 교장을 6년간 역임하고 이후 집안시 인민 대회 상무위원회(集安市人大常委會) 財經 주임을 역임했으며, 지금은 퇴직하여 집안시에 거주함. 王金純은 1931년 양민에서 출생해서 현재 74세로 수몰 후 양민을 떠나, 일찍이 집안시 위원회 기율 검사 위원회(集安市委紀檢委) 監督員을 역임했으며, 지금은 퇴직해 집안시에 거주함. 周新博은 집안시 문서국(檔案局) 간부이고 遲勇과 孫仁杰은 집안시박물관 관원임.2006길림성장백산문화연구회(吉林省長白山文化硏究會)운봉댐 수리를 위해 방류를 하면서 수위를 41.13m나 낮추자 그동안 수몰되었던 고성이 드러나자 5월 2일에 장백산문화연구회 장복유, 집안시박물관 손인걸과 지용이 성곽의 전체 현황과 성벽 축조 양상 등을 조사함.1960년대 1962년에 길림성박물관의 王承禮 등이 운봉댐 수몰지구를 조사하면서 양민 일대도 조사했으나 고분만 확인함.1964년 5월에 方起東, 李健才, 陳相偉 등이 운봉댐 수몰지구를 조사하며 양민전자 일대의 고분군 30여기를 발굴하였지만 이때도 고성은 조사하지 않음.1966년 9월 9일에 운봉댐 완공으로 양민 일대가 수몰됨.구조특징 2004년 좌담회 참석자들의 회상에 따르면 양민고성은 양민전자 1·2단 충적대지 사이에 위치했다고 함. 성곽은 주성곽과 보조성벽 두 부부느올 이루어져 있는데 주성곽은 전체적으로 방형이고, 보조 석벽은 주성곽 북쪽에 압록강과 나란히 남북 방향으로 축조했다고 함. 특히 현지인 王恒英 노인은 보조 성벽은 秋皮-良民 도로 모퉁이의 낭떠러지에서 축조하기 시작해 학교 서측으로 이어지며 그 남측으로 주성곽의 토벽을 축조했다고 함. 주성곽의 규모는 2004년 좌담회에서 전체적으로 장방형으로 남북 길이 350-400m, 동서 너비 300m였던 것으로 회고했고, 2006년 5월 2일 조사에서 운봉댐 방류로 성곽이 노출되었는데, 전체적으로 방형이고 모서리는 圓角이었고, 서벽은 180m, 북벽은 220m 정도 수면 위로 노출됨. 보조 성벽은 2004년 좌담회에서 약 550-600m였다고 회고함. 1965년 운봉댐이 건설되면서 이 일대 고분과 기타 중요 유적이 수몰되었는데, 2006년 5월 운봉댐 수리를 위해 방류를 하며 댐의 수위를 41.3m나 낮춤에 따라 주성곽이 드러났는데 성벽의 보존 상태가 상당히 양호했음. 2004년 좌담회 참석자의 회상을 보면 장복유는 이곳에서 태어나 중학교 때 이곳을 떠났는데 초등학교 때 학교 운동장의 서측이 성벽에 가까이 있었고, 성벽 높이 2m 정도 였으며, 놀이를 할 때 먼저 성에 올라가는 사람이 이겼음. 현지 농민 姜崇國은 1947년 양민에서 태어났고, 수몰 당시 17살이었을 때였음. 이곳에 확실히 성이 있었고, 북면은 양민학교에서 시작해 남면은 양민 圍子角까지 이르렀음. 남북 길이는 약 500m, 동서는 도로 세 곳에 걸쳐 있으며 300여m임. 강변에 붙어 있는 면의 벽(즉, 동벽)은 납작한 사각형 성돌로 쌓았고, 또 계단이 있어서 올라갈 수 있었고, 2m 정도 높이였으며, 다른 면은 흙으로 되어 있었고 흙이 딱딱해 농사를 지어도 자라지 않고, 3m여 너비로, 이런 벽 중간에는 갈라진 틈이 있었음. 현지인 75세 王恒英 노인은 秋皮溝에서 태어나 9살 때 양민에 이사옴. 석벽은 양민 北砬子 앞에서 시작해 곧게 학교의 흙 두둑 아래까지 직선이고, 중간에 세 개의 트인 입구가 있는데 학교 이쪽의 트인 입구는 南門外라고 부르고, 우리는 학교 우물에 가서 물을 길러 이 트인 입구로 길을 건넜음. 北砬子 머리 가까이에 트인 입구가 있었고 내가 秋皮 부모님 집에 돌아올 때 항상 이 길로 갔으며 일찍이 동문으로 불렀음. 이른 시기에 劉天順(지금은 이미 작고했음)이 집을 지을 때 성벽의 돌을 날라다 지었는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집을 지을 때 모두 성벽 위에 지었음. 吳承緖 집 앞에 또 트인 입구가 있었고 砬子머리에서 학교의 이 석벽까지의 거리는 약 2리(약 700-800m)였음. 일본 군대가 왔을 때 남문과 동문을 모두 부수었는데, 학교에서 남쪽으로는 토벽이고 직선으로는 圍子角까지이고, 土墻角(토벽 모퉁이)는 타원이었음. 남쪽 圍子角 밖에는 辛起祥 집, 王風祥 집, 王發祥 집, 王金純 집 등 몇 집이 있었고, 그곳에는 大石碾盤(큰 돌로 된 연자방아)가 있어 거기에 가서 옥수수나 조 같은 곡물을 빻았음.) 孫志强의 회상을 보면 이 성 가운데 강 가까이 있는 것(즉, 성의 동벽)은 돌로 축조했는데 당시 높이 2m 정도였고, 北砬子머리에서 시작해 姜씨네 가게까지 곧장 이어졌음. 길이는 500m 이상으로 우리 집 문 앞에서부터 학교의 이 제 1단 석벽까지는 약간 낮았고, 이 벽의 중간에 溝(고랑)가 두 곳 있었는데, 水冲溝 두 개 중 하나는 약 20m에 가깝고, 모두 40m 정도이며, 벽이 없어 양민에는 많은 집들이 모두 이 석벽 위에 건축되어 있었음. 서, 남, 북면 모두 흙으로 쌓은 벽이며 높지 않고 너비 3m 정도로 모두 땅이 단단히 다져져 있었음. 呂茂德의 회상을 보면 당시 우리는 이 벽을 城墻(성벽)이라 불렀지만, 또한 圍子墻이라고 불렀음. 北砬子머리의 石頭墻에서 들어온 후에 남쪽으로 가면 먼저 도랑 하나가 있는데, 이 도랑은 동서로 나있고, 도랑의 남면은 바로 圍子墻으로, 토벽이고 이 토벽은 동에서 서면으로 이어져 300여m 길이(바로 성의 북벽)이고, 다시 남면으로 돌아 (바로 성의 서벽) 양민 2隊 飼養所에 이르러 또 동으로 돌아가는데(바로 성의 서남 모퉁이), 거의 장방형임. 吳喜貴의 회상을 보면 당시 많은 집들이 토벽 위에 지어졌고, 남쪽 圍子角의 바깥면(남측)에 水泡子(물구덩이)가 있었음. 서남의 油坊溝와 老厲家小溝에서 흘러나온 물이 웅덩이로 들어가고, 남쪽 圍子角 북면을 통과해 압록가으로 유입함. 서벽의 중간에 트인 입구가 있고 성 밖에 우물이 있어 이 트인 입구를 지나 우물에 물을 길으러 갔음. 서벽에도 문이 있었고, 남벽 밖에는 大坎子(큰 두둑)이 있었음. 王金純의 회상을 보면 양민의 석벽과 토벽을 당시에 古墻(고벽)이라 불렀는데 일본인이 주둔하기 전부터 있었음. 일본인이 왔을 때 성벽에 나무 말뚝을 묻었고, 말뚝에 철로 된 가시를 둘렀음. 이후에 孫洪壽 집, 朱元慶 집, 宋單華 집, 老郭 집 등 많은 집들이 벽 위에 지어졌고 연이어 남쪽에 楊家店, 金家店과 德興堂이, 벽의 바깥에는 鐵匠爐(대장간)가 있었음. 서쪽 면의 大坎子(큰 두둑) 가까이 있는 산기슭에는 黃泥坑(진흙 구덩이)가 있었고, 서벽 바깥쪽은 비교적 지세가 낮은 논이 있었음.역사적 의미 주변 유적 현황을 보면 첫째, 양민고분군이 있는데 양민고성 남쪽의 충적대지 중간지점에 약 200여 기의 고구려 고분군이 분포해 있었고, 고구려 초기의 적석묘와 함께 중후기의 봉토석실분이 병존했으며, 운봉댐 수몰선인 해발 299-310m 부근에서 수몰되지 않은 적석묘 13기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함. 둘째, 운봉댐 수몰지구의 고분군으로 운봉댐 수몰지구에는 양민고분군뿐 아니라 大荒溝, 大靑溝, 雙安, 秋皮, 石湖, 樺皮, 河套 등에 고구려 고분이 널리 분포해 있으며, 맞은편의 북한지역에도 압록강 좌안과 압록강 지류인 자성강 연안에 고구려 고분군이 아주 조밀하게 분포되어 있음. 2006년 5월 댐을 방류했을 때 운봉댐 수몰지구 일대를 조사하여 2000여기 이상의 고구려 고분을 조사했다고 하고, 양민고성 주성곽 내부와 그 북측에서도 10여기의 적석묘를 확인했다고 함. 그 가운데 성곽 내부에 분포한 1호분은 정방혀으이 계단적석묘로서 한 변의 길이 8m, 높이 2m이며, 당시 2층으로 축조한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함. 지정학적으로 양민고성은 고구려 두번째 도성인 국내성이 위치했더 집안시 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약 45㎞ 떨어진 압록강 중류 우안의 충적대지에 위치하며, 양민고성이 위치한 양민전자 일대의 충적대지는 남북 길이 4㎞, 동서 너비 3㎞로서 집안시 동북쪽에서는 가장 넓은 평원이라고 함. 국내성이 위치했던 집안시 소재지와 압록강 상류 일대를 연결하는 압록강 수로망의 전략적 요충지임. 양민고성의 기능과 성격을 보면, 첫째, 3세기 중후반의 平壤城 및 東北 新城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는데 고구려는 曹魏 모구검의 침공으로 환도성이 파괴되어 도읍으로 삼을 수 없게 되자, 247년에 평양성을 축조하여 백성과 廟社를 옯겼다고 함(『삼국사기』고구려본기5 동천왕 21년조). 고구려는 3세기 중후반에 동북 新城을 축조했으며, 서천왕이 이곳을 순행했고(『삼국사기』고구려본기5 서천왕 7년조 및 19년조), 봉상왕도 모용황의 침공을 받고 동북 新城으로 피신했다고 함(『삼국사기』고구려본기5 봉상왕 2년조). 고구려는 4세기 전반에는 334년에 평양성을 증축한 다음(『삼국사기』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4년조) 342년 전연 모용황에게 다시 환도성이 함락당하자 그 이듬해에 平壤 東黃城으로 이거함(『삼국사기』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13년조). 국내성이 있었던 집안시 소재지에서 동북방에 위치했고, 압록강 중상류 일대에서는 가장 넓은 충적대지에 펼쳐져 있고, 역사적으로 계속 大鎭이 설치되었으며, 초기 이래의 거의 모든 유형의 고구려 고분이 성곽 주변에 밀집해 있다는 사실 등의 근거로 3세기 중후반의 평양성 및 동북 신성으로 비정함. 이와 더불어 주성곽 북측에 위치한 보조 성곽은 334년에 증축했다는 평양성으로 파악함. 양민 일대는 247년 이래 약 1세기간 고구려 제2수도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양민고성이 바로 그 성곽이라는 견해임. 특히 환도성에서 양민고성에 이르는 교통로를 통해 양민고성이 3-4세기의 평야성이자 서천왕이 순행하고 봉상왕이 피신했던 동북 신성이라는 견해를 강하게 주장함. 즉 환도산성 아래의 大川에서 陽岔, 羅家營, 大靑溝를 지나 雙安에 이르는 길이 고구려 북도의 첫 부분인데, 쌍안에서 북쪼긍로 약 20㎞ 쯤 가면 통화 石湖關隘에 이르며, “쌍안”에서 동쪽으로 秋皮를 지나 10여㎞ 가면 바로 양민고성에 도착한다고 함. 양민고성과 국내성 지역을 통행하는 루트를 따라가면 고구려 고분이 매우 많고 관애시설이 구비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음. 특히 대천-쌍안 부근은 모용외 침입시 新城宰 高奴子가 신성으로 피신하던 봉상왕을 영접했다는 鵠林으로 추정됨. 즉 이일대의 통구하 남쪽 연안에는 자연 지형을 이용해 세운 관애와 거주지가 결합된 고구려 유적지가 있는데, 관애는 길이 560m, 너비 7m, 높이 1.2-1.8m의 토석혼축성벽이며, 남북 방향으로 뻗어 있다고 함. 이곳은 通集 철로의 黃栢역에서 남으로 50m 거리로서 동서 양측은 高山이며 성벽 서쪽에는 통구하를 따라 약 1500㎡의 高臺를 축조해 놓았음. 평대 주위에는 한변의 길이 5m 전후, 높이 1m 정도으 고구려 적석석광묘가 7기가 있음. 이에 이 일대를 高奴子가 烽上王을 영접했던 ‘鵠林’으로 비정함(장복유). 둘째, 한대 평지성설로, 2006년 운봉댐의 방류로 성곽이 드러났을 때 성곽 내외를 조사한 다음 성곽 내부에 위치한 계단적석묘의 연대를 4세기 전후로 비정한 다음, 성곽은 그보다 앞선 시기에 축조했을 것으로 파악하고, 그런 다음 성곽의 구조와 축조 방식이 고구려뿐 아니라 발해, 요, 금대의 성곽과 다르다면서 한대에 축조한 평지성으로 파악함(新華通信). 셋째, 압록강 수로상의 역참으로 3세기 중후반의 사료에 등장하는 고구려의 동북 신성은 동해안에 위치했던 것으로 파악됨. 또한 漢 서기전 75년경에 압록강 중상류 일대에서 지금의 소자하 방면으로 퇴축당했을 뿐 아니라 당시 漢이 축조했던 성곽은 모두 토성이었음. 따라서 양민고성은 압록강 중류연안에 위치했고, 토석혼축 및 석축 성벽이라는 점에서 동북 신성이나 한대 평지성으로 파악하기는 힘듦. 다만 427년 평양 천도 이전에 존재했다는 3-4세기의 평양성일 가능성은 전혀 없지 않은데 이에 대해서는 추후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음. 한편 양민 지역은 압록강 중상류 연안에서 집안분지 다음으로 넓은 충적대지가 펼쳐져 있을 뿐 아니라, 주변에는 고구려 시기의 고분이 집중적으로 펼쳐져 있음. 또한 압록강 중상류 연안에는 장천고성을 비롯하여 樺皮甸子古城, 夾皮溝古城, 東馬鹿村古城 등이 압록강 수로상의 요충지에 분포되어 있는데, 양민고성과 마찬가지로 모두 상하 2단으로 이루어진 강변 충적대지 중 1-2단 사이의 2단 충적대지 가장자리에 자리잡고 있음. 이로 보아 양민고성도 압록강 수로상의 교통요지를 공제하던 역참 기능을 수행했을 거승로 추정됨 다만 압록강 중상류 연안의 고구려 고성이 대체로 둘레 300-400m로 소형인데 비해, 양민고성은 1㎞ 전후의 중형 성곽이라는 점에서 수로 교통로상의 역참 기능뿐 아니라 지방지배, 나아가 왕족이나 귀족세력의 근거지 역할도 수행했을 가능성이 높음. 양민고성 주변에 고구려 고분이 밀집한 상황은 이러한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생각됨.자연환경 양민은 집안시 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약 45㎞ 떨어진 압록강 중류 우안에 위치하는데 이 일대는 남북 길이 4㎞, 동서 너비 3㎞의 비교적 넓은 충적 평원으로 동쪽은 압록강에 임해 있고 서쪽은 高山에 의지해 있음. 양민고성은 상기 충적대지가 막 시작되는 북쪽 끝에 위치하며 고성의 경도와 위도는 동경 126˚30'044", 북위 41˚25'108"로서 고구려 두번째 도성이었던 국내성(동경 126˚11'774", 북위 41˚07'21")의 동북방에 위치함. 양민고성은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였고, 한 면은 강에 임해 있으며, 지역이 開闊하고 토질이 비옥한데, 좌담회 참석자들은 양민전자의 지형적 특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함. 양민전자는 남북 길이 8리, 동서 너비 약 6리로서 상하 2단 대지로 구성되어 있음. 압록강은 북한쪽 가까이에 있고, 북에서 남으로 흘러감. 압록강 우안에 엽접해 있는 1단 대지는 강 수면에서 약 20여m 높고, 드넓은 평지에 토질이 비옥함. 1단 대지의 서측에 2단 대지가 위치해 있는데, 1단 대지보다 약 5m 정도 높음. 성곽은 1, 2단 대지 사이에 위치해 있음.참고문헌 · 李殿福, 「集安高句麗墓硏究」『考古學報』 1980-2, 1980 · 方起東, 「高句麗石墓的演進」『博物館研究』 1985-2, 1985 · 孫仁傑·遲勇, 「集安良民高句麗遺址調査」『東北史地』 2004-4, 2004 · 長福有, 「高句麗第一個平壤城在集安良民卽國之東北大鎭-新城」『東北史地』 2004-4, 2004 · 杜宇 編著, 「老四區及良民甸子」『集安風景名勝史話』, 通化師範學院照排印刷中心, 1999 · 新華通信, 2006년 5월 9일자 보도 ‘吉林省一座漢代古城浮出水面’[http://www.jl.xinhuanet.com], 2006

  • 리스트여닫기 패왕조산성(覇王朝山城) 출토지 길림성 집안시 재원향 패왕조촌 (吉林省 集安市 財源鄉 覇王朝村)연대 대체로 2-3세기경에 초축하여 후기까지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며, 경철화는 2001년 탐방 결과를 바탕으로 서기 1세기 초·중기에 축조했다고 파악함.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56길림성문물국문물조사조(吉林省文化局文物調査組)4월에 조사를 실시하였고, 환인댐 건설 때문에 동북박물관(요녕성박물관의 전신)이 환인 경내의 혼강 유역 수몰지구를 조사할 때 길림성문화국 문물조사조가 長崗유적, 南台유적과 함께 패왕조산성을 조사함. 그 결과, 이때의 조사를 토대로 1961년 4월 20일에 길림성인민위원회가 패왕조산성을 길림성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함.1962길림성박물관 집안고고대(吉林省博物館集安考古隊)4월 15일-16일에 걸쳐 상기 고고대의 왕승례, 이전복, 방기동, 진상위, 길림사범대학 조정용, 길림성 철학사회과학연구소 주함강, 집안현 문물관리소의 임지덕과 조벽인이 참가하여 성곽의 전반적인 제원 및 간략한 지표조사를 하였고 『고고』 1962-11호의 「吉林集安高句麗覇王朝山城」을 발표함.1983집안현박물관문물조사대(集安縣博物館文物調査隊)5월 30일에 성곽을 제원하고, 성벽 축조상태 확인 및 사진촬영을 하였으며, 『집안현문물지』의 ‘패왕조산성’을 발표함.1983길림성문물고고연구실, 집안현박물관(吉林省文物考古硏究室, 集安縣博物館)7월에 길림성문물고고연구실의 방기동 및 집안현박물관의 임지덕, 경철화, 손인걸이 참가하여 집안현 경내 남북 교통로의 계통을 조사하고, 『文物』1984-1의 「集安高句麗考古的新收穫」을 발표함.2001학자들의 비공식적인 조사10월 3일에 통화사범대학 교수 경철하, 길림성 문학예술계연합 당 조직 서기 장복유, 사진가 협회 부서기장 상옥주, 통화시 사학회 고문 손정진, 부회장 고어무 장해무가 참가하여 성곽 내부의 건물유적 조사 및 토기편을 수습하고 사진 촬영을 함. 경철화, 2002 「訪高句麗覇王朝山城」『學問』2002-2 및 경철화, 2004 「訪高句麗覇王朝山城」『高句麗考古硏究』를 발표함.20세기 전반 『집안현향토지』(1915년)에서는 집안현성 서쪽 220리에 위치한 패왕조의 산 위에 ‘石城古壘’가 있는데, 현지 주민들은 ‘山城子’라고 부른다고 함. 『집안현지』(1931년)에서는 “집안현에서 북쪽으로 180리 거리의 산성구 안의 산령에 석단이 남아 있으며 남쪽과 북쪽에 성문이 하나씩 있다”고 기재되어 있는데, 당시 “현지주민들은 산성자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축조 시기는 잘 모르겠다”고 기재되어 있음. 패왕조산성이 20세기 전반에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됨.구조특징 성곽은 산등성이의 자연 지세를 따라 험준하고 가파른 절벽을 이용하여 축조하였고,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아 箕(키) 모양을 이룸, 서북 모서리는 바깥쪽으로 뻗어나갔고, 남벽은 안으로 조금 휘어 전체 평면은 사다리꼴을 이룸. 산세가 낮은 곳과 남쪽 골짜기 입구의 평평하고 완만한 고셍는 화강암 성돌로 성벽을 높이 축조하였고, 지세가 낮은 곳일수록 성벽을 높이 축조하였으며, 전체적으로 서벽이 잘 보존되어 있음. 서벽 남단과 북벽 동단의 성벽을 높이 축조하였고, 이곳의 성벽은 매우 잘 보존되어 있으며, 특히, 성가퀴(女墻)와 기둥구멍(柱洞)의 흔적이 비교적 잘 남아 있음. 성문은 북문과 남문 등 2개가 있음. 성곽 내부에서 건물지가 발견되었다고 하지만 나무가 꽉 들어차 있기 때문에 유적을 확인하기는 쉽지 않은 상태로 1961년 4월 20일에 길림성인민위원회가 길림성 중점문문보호단위로 지정함. 1962년 조사 당시 건물지를 확인하지 못했고, 1983년 5월 조사 당시 산성 중앙 샘 북쪽의 평탄한 산비탈에서 비교적 큰 돌을 확인했는데 병사 둔지로 추정했으나 구체적인 조사는 하지 않음. 2001년 조사에서 세 개의 건물군이 확인되었으나 측량 장비가 없어 나뭇가지로 측량한 다음 나중에 실측함.역사적 의미 石城 유적으로 『集安縣鄕土志』(1931년)에는 “산성 부근 강 연안에도 석성이 있는데, 홍수로 모래 사장에 매몰되어 큰 돌만 몇 개 보인다”라고 기재되어 있으며, 『集安縣志』(1931년)에는 “성곽이 모래 사장에 매몰되어 그 전에는 큰 돌이 몇 개 노출되어 있었으나 그 위 (1915년 이후) 현지 주민들이 가옥을 지으면서 채석을 하여 (당시에는) 남아 있지 안았다”고 함. 1962년 조사 당시 현지 주민이 옛날에는 석성 유적이 북둔촌 서쪽의 혼강 강변에 있었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이미 볼 수 없었다고 함. 고분군은 산성에서 4㎞ 정도 떨어진 천안구촌 일대에 고구려 시기 고분군이 3곳 있으며 모두 70여기 정도됨. 관애는 패왕조산성에서 신개하를 따라 40㎞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望波嶺關隘가 나오는데 이곳은 입지조건상 신개하를 거슬러 올라오던 적군을 방어하던 군사시설로 추정됨. 지정학적으로는 고구려 첫번째 도성이 있었던 환인 오녀산성과 30㎞ 거리하며, 패왕조산성이 위치한 신개하 하구 일대는 환인분지나 부이강 방면에서 혼강 유역을 지나 국내성이 위치했던 집안으로 나가는 교통로의 길목임. 산성의 기능과 성격에 대한 견해를 보면 첫째, 군사방어성설으로 1962년 조사 결과, 거주나 경작에 적합하지 않은 산 위에 위치하였고, 둘레도 1㎞ 남짓 밖에 안된다는 점에서 일상적인 거주지로서의 기능은 없었을 것으로 추정한 다음, 군사적 성격이 강한 성이었다고 강조함. 국내성이 수도일 때 신개하 하구 일대를 공제하면서 수도원 외곽을 지키는 중요한 방어 산성의 하나로 망파령관애와 함께 신개하 일대에서 도성 외곽의 弧形방어선을 구성하였던 거승로 추정됨. 특히 집안 상성자산성, 환인 고검지산성, 신빈 흑구산성 등에 있는 성가퀴 안쪽의 기둥구멍이 이 산성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에서 패왕조산성은 이들과 함께 압록강 중류 일대의 입체적 군사방어 체계를 구성한 것으로 파악됨. 3세기 중엽 제3현토군을 출발하여 소자하·혼강을 거쳐 판차령을 넘어 환도성으로 진입한 魏 모구검을 비롯하여 고구려 국내성을 침공하였던 중국 왕조측 침공군 가운데 상당수는 이 일대를 지나쳤을 것으로 추정됨(방기동, 왕선후, 여호규). 둘째, 위나암성설으로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고구려 유리왕은 郊豕가 도망가기에 너무 먼 거리라는 점을 근거로 환인 오녀산성에서 30㎞ 떨어진 패왕조산성을 위나암성으로 비정하였고, 더욱이 패왕조산성 일대는 혼강·신개하·부이강의 합류지점으로서 ‘山水深險’하다는 기록과 합치하며, 패왕조산성은 산봉우리 위에 위치하였고 내부에는 샘(泉水)도 있어 ‘巖石之地’로서 ‘泉水’가 있다는 기록과도 일치한다고 파악함(이전복, 손진기, 왕선후, 풍영겸). 셋째, 거주성설으로 2001년 패왕조산성을 탐방했을 때 많은 건물지와 토기편이 발견되었는데 이에 거주나 경작지에 적합하지 않다는 종전의 인식을 바꾸어, 산비탈을 거주지로 활용하고, 성 바깥의 계곡을 논밭으로 경작했으며, 주변의 혼강과 신개하 일대에는 고기잡이와 사냥이 발달했다고 추정하며, 고구려 시기의 중요한 거주 성곽인 동시에 전략적 요충지로 추정함(경철화).자연환경 길림성 집안시 소재지 서북 97㎞, 재원향 패왕조촌 동북쪽 4㎞에 위치하며, 패왕조촌 동쪽 골짜기를 거슬러 동북으로약 2.5㎞ 지점에 이르면 험준한 산봉우리로 둘러싸인 협곡이 나타나는데 산성은 이 협곡의 해발 764m(방기동, 경철화/ 862.8m, 『吉林省志』, 王線厚/ 기타 765m와 862m 등)인 높은 산에 위치함. 노령산맥의 주맥인 ‘亮紅頂子’의 서단에 해당하고, 서쪽 30㎞에 환인 오녀산성이 위치함. 산성은 험준한 산봉우리로 둘러싸여 있고, 동벽과 서벽, 그리고 북벽의 서단은 모두 험준한 절벽임. 산성 내부는 경사가 가파른 산비탈이며, 중앙에 평평한 대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산성 북사면 아래에는 혼강 지류인 신개하가 북류하여 패왕조촌 앞에서 혼강에 합류함. 북쪽 골짜기를 따라 약 3.5㎞ 내려가면 혼강 연안의 泉眼溝村에 이르고, 또 골짜기 입구를 나와 혼강을 따라 약 4.5㎞ 내려가면 北屯村에 이르는데 북둔촌 앞에서 남류하던 富爾江이 혼강에 합류함. 산성 서쪽의 패왕조촌 앞으로는 혼강 유역에서 신개하 상류를 거슬러 노령산맥을 넘어 집안으로 향하는 도로가 지나가고, 산성은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여 혼강 연안을 한 눈에 관찰할 수 있으며, 혼강과 신개하 연안의 교통로를 공제할 수 있는 요충지임.유물정보 철제 차관(鐵車輨) 1점, 행엽(杏葉) 1점, 철경동촉(鐵鋌銅鏃) 4점, 철제 띠고리(鐵帶扣) 2점, 토기편 30여 점, 토기 호편 2점, 사이호편 1점, 석제 절구(石臼) 1점참고문헌 · 吳光國 編, 「地理」『輯安縣鄕土志』, 1915 · 張拱垣 編, 「古蹟」『輯安縣志』, 1931 · 方起東, 「吉林輯安高句麗覇王朝山城」『考古』 1962-11, 1962 · 李殿福, 「1962年春季吉林輯安考古調査簡報」『考古』 1962-11, 1962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4 · 孫進己·馮永謙, 『東北歷史地理』 (二), 黑龍江人民出版社, 1988 ·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 編, 「覇王朝山城」『吉林省志』 43(文物志), 吉林人民出版社, 1991 · 國家文物局 主編, 「集安市-覇王朝山城」『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李殿福, 「高句麗考古的回顧與展望」『遼海文物學刊』 1992-2, 1992 · 遲勇, 「高句麗都城的戰略防禦系統」『高句麗硏究文集』, 延邊大學出版社, 1993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王禹浪·王宏北, 「中國吉林省集安市高句麗覇王朝山城」『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1994 · 魏存成, 「城址·建築址」『高句麗考古』, 吉林大學出版社, 1994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北方史地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4 · 王綿厚, 「鴨綠江右岸高句麗山城硏究」『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余昊奎, 「集安 覇王朝山城」『高句麗 城』 Ⅰ(鴨綠江 中上流篇), 國防軍史硏究所, 1998 · 秦升陽, 「南北道上的關隘與城堡」『高句麗歷史與文化』, 吉林文史出版社, 2000 · 楊春吉·王曉南, 「高句麗疆域調査與硏究現狀」『高句麗歸屬問題硏究』, 吉林文史出版社, 2000 · 王綿厚, 「覇王朝山城」및「高句麗南北二道上諸城」『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耿鐵華, 「訪高句麗覇王朝山城」『學問』 2002-2, 2002 · 耿鐵華, 「高句麗紇升骨城新考」『高句麗考古硏究』, 吉林文史出版社, 2004 · 魏存成, 「中期都城通往遼河流域的兩條道路與毌丘儉紀功碑」, 「山城的分布」『高句麗遺跡』, 文物出版社, 2002 · 李樂營·李淑英, 『中國高句麗學者與硏究綜述』, 吉林文史出版社, 2006 · 杜宇 編著, 「老嶺山區古道」『集安風景名勝史話』, 通化師範學院照排印刷中心, 1999

  • 리스트여닫기 관마산성; 관마장산성(關馬山城; 關馬墻山城) 출토지 집안시 열료향 (集安市 熱鬧鄉)연대 고구려 초·중기에 초축한 것으로 추정됨.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62길림성박물관 집안고고대(吉林省博物館集安考古隊)4월 15일에 길림성박물관의 진상위, 방기동 및 집안현문물관리소의 장사은, 조벽인 등이 참가하여 집안 전역의 유적과 함께 조사하였고, 『집안현지』(1932년) 및 현지 주민의 설명에 의거 각 방면의 성벽을 독립된 관애로 파악함. 1930년대까지는 북벽과 남벽만 알려져 있었는데, 이 때 동벽이 발견됨. 이 조사를 토대로 1962년 6월 15일에 집안현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됨.1963길림성박물관, 집안현문물관리소(吉林省博物館, 集安縣文物管理所)5월에 길림성박물관의 진상위, 방기동 및 집안현문물관리소의 장사은, 조벽인 등이 참가하여, 望波領關隘와 함께 관마산성을 집중 조사하였고, 각 방면 성벽의 연관관계를 정확하게 조사함. 집안현문물관리소, 1964 「吉林集安高句麗南道和北道上的關隘和城堡」『考古』1964-2에 발표함.1983집안현박물관문물조사대(集安縣博物館文物調査隊)4-5월에 성곽을 제원하고 성벽 축조상태 및 사진촬영을 하였으며, 『集安縣文物志』의 ‘관마산성’을 발표함.1983길림성문물고고연구실, 집안현박물관(吉林省文物考古硏究室, 集安縣博物館)7월에 길림성문물고고연구실의 방기동 및 집안현박물관의 임지덕, 경철화, 손인걸이 참가하여 집안현 경내 남북 교통로의 계통을 조사하였는데 이때 관마산성 북쪽 10㎞ 지점에서 대천초소를 새롭게 발견함. 『文物』1984-1의 「集安高句麗考古的新收穫」에 발표함.20세기 전반 『집안현향토지』(1915년)에서는 집안현성 서북 150리에 위치한 東橫路에 關馬牆이 있는데, “石牆 두 갈래가 있으며 서로 1리 정도 떨어져 있다”고 기재되어 있으며, 민간에는 342년 전연 모용황이 침공했을 때의 北置(北道)가 바로 이곳이라고 전한다고 함. 『집안현지』(1931년)에서는 古蹟 조항 〈古關隘〉 항목에 집안현성 북쪽 130리 거리의 蚊子溝門에 頭道關(속칭 頭道關馬牆子)으로 불리는 관애 2개가 있으며, 양자의 거리는 1리이고 모두 석장으로 축조되었다고 함. 또한 342년 전연 모용황이 침공했을 때의 北置(北道)가 바로 이곳이라고 파악함. 상기 지방지의 기록으로 보아 관마산성은 20세기 전반에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됨. 다만 당시에는 북벽과 동벽만 알려져 있었고, 아직 동벽의 존재는 파악하지 못함.구조특징 산성 또는 관애로 주위의 높은 산을 천연성벽으로 삼는 한편, 남북 협곡의 가장 좁은 곳과 동쪽의 목흔두자구 안쪽 115㎞ 지점에 각각 성벽을 축조하였음. 성벽 하나 하나는 마치 각기 독립된 관애처럼 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세 개의 성벽이 주변의 깎아지는 높은 산과 연결되어 하나의 성곽을 형성함. 평면은 인공성벽과 자연성벽이 결합하여 전체적으로 삼각형을 이루며, 규모를 보면 성곽 내부의 협곡은 남북 960m(『집안현문물지』/600m; 『고고』1964-2), 동서 120-340m(『집안현문물지』/70-250m; 『고고』1964-2)로서 비교적 평탄하여 대규모 군대가 주둔할 수 있음. 성벽은 대부분 무너졌으며, 특히 계곡물에 의해 성벽이 심하게 파괴되었고, 도로가 관통하는 곳도 많이 파괴되었음. 다만 북벽 서쪽 산록의 성벽은 원래 모습에 가깝게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함. 통화-집안 도로가 성곽 한복판을 지나가고 있기 때문에 비교적 접근하기 쉽지만, 여러 가지 제약으로 인해 현재의 성벽 보존 상태를 정확히 확인하기는 어려운 상태임.역사적 의미 주변의 유적으로 고분군과 군사시설이 있는데 고분군은 熱鬧鄕 동쪽 약 2㎞의 楊木橋子溝門 산기슭 아래에 대량의 고구려 고분이 분포해 있고, 서북 약 7.5㎞에 大川哨所 부근에 대량의 고구려 고분이 있음. 군사시설로는 서북 약 7.5㎞에 大川哨所가 위치하는데, 『집안현향토지』(1915년)와 『집안현지』(1931년)에 따르면 관마산성이 위치한 蚊子溝門 동쪽 산위에 ‘石頭城’이라고 불린 古城이 있었으며, 관마산성에서 淸河를 따라 북쪼긍로 20여리(10㎞ 전후) 내려간 楊木橋 부근에 土城이 있었는데 縣志 편찬 당시에는 이미 사라졌다고 함. 지정학적으로 집안시 소재지에서 53-54㎞ 떨어진 청하(葦沙河) 유역의 협곡에 위치하며, 혼강 본류에서 청하(葦沙河) 연안로를 거슬러 노령산맥을 넘어 집안분지로 향하는 교통로상에 위치함. 산성의 기능과 성격에 대한 견해로는 첫째, 군사방어성설로, 고나마산성은 혼강 본류에서 청하(葦沙河) 연안로를 거슬러 노령산맥을 넘어 집안분지로 향하는 교통로상의 험준한 협곡에 위치함. 형세가 험요하고 지키기는 쉬우나 공격하기 어려운 전략적 요충지로, 특히 성 내부의 지세가 평탄하고, 수원이 풍부하여 대규코 군대가 주둔할 수 있으나, 아직 건축 유적은 발견되지 않음. 세 성벽 가운데 남벽의 구조가 가장 간단한 반면, 북벽은 튼튼하게 구축했을 뿐 아니라 바깥쪽에 참호와 참호벽도 있음. 이는 관마산성이 청하를 거슬러 집안분지(통구분지)로 나아가는 적군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시설임을 반영하는데, 즉 남벽은 고구려 도성에서 오는 援軍과 輜重兵의 통로였기 때문에 성벽을 견고하게 쌓았을 뿐 아니라 바깥쪽에는 참호와 참호벽까지 구축했음. 동벽은 목흔두자구문에 축조했는데, 골짜기의 길이는 약 5㎞ 정도로, 골짜기의 양 옆은 매우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북쪽의 기다랗게 뻗은 산을 따라 1㎞ 정도 가면 양목교자구 골짜기로 통하는 높이 50m 정도의 완만한 산비탈이 있음. 동벽은 북벽을 공격하던 적군이 양목교자구를 따라 동쪽으로 향하다가 완만한 산비탈을 넘어 목흔두자구 방햐응로 진공하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한 것임. 관마산성은 북쪽 7.5㎞에 위치한 대천초소와 더불어 청하 연안로를 거슬러 고구려 두 번째 도성이 위치했던 집안분지(통구분지)로 향하는 적군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한 군사방어성으로 추정됨(『고고』1964-2). 둘째, 342년 전연과의 전쟁시 고국원왕이 피신했던 북도상의 요충지로 추정하기도 함. 당시 전연은 남도와 북도 두 길로 고구려를 침공했는데, 북도로 침공할 것이라는 고구려의 예상과 달리 모용황이 대군을 이끌고 남도로 공격했으며 북도로는 長史 王寓로 하여금 병사 15,000을 진군하게 함. 고국원왕은 王弟 武로 하여금 5만 대군을 이끌고 북도를 집중적으로 방허하는 한편, 자신은 적은 병력만을 데리고 남도를 수비함. 결국 고국원왕은 모용황의 4만 대군에게 대패했으며 도성인 환도성마저 함락당함. 반면 북도에서는 王弟 武가 전연군을 대파함. 이에 환도성이 함락당한 다음 고국원왕이 북도로 피신했을 것으로 파안한 다음 바로 관마산성으로 들어가 웅거했을 것으로 추정함(『집안현문물지』). 셋째, 환도성설으로, 동천왕대에 曹魏의 모구검이 고구려 환도성을 함락시킨 다음 환도산에 올라 자신의 기공비를 세웠다고 하는데, 관마산성은 관구검기공비가 발견된 石嶺(小板岔嶺)에서 가장 가까이 위치한 고구려 성곽이므로 환도성으로 비정할 수 있다고 파악함. 또한 고구려가 흘승골성(환인 오녀산성)에서 천도한 위나암성을 집안 패왕조산서응로 설정한 다음, 고구려는 초기에 대체로 동쪽 방향으로 천도를 했다고 파악하여 위나암성(집안 패왕조산성)에서 천도한 환도성도 패왕조산성의 동쪽에 위치했을 것으로 파악하고, 관마산성은 위나암성으로 비정되는 패왕조산성의 동쪽에서 약간 북쪽으로 치우쳐 있으므로 환도성으로 비정될 수 있다고 파악함. 그 뒤 동천왕대에 曹魏 모구검의 침공을 받아 환도성이 함락된 다음 남쪽에 위치한 평양성 곧 지금의 집안현성으로 다시 천도했으며, 그 뒤 환도성으로 재차 복귀했다가 342년 모용황의 침공을 받아 함락된 다음 집안현성보다 더 남쪽에 위치한 平壤東皇城 즉 현재의 평양으로 천도했다고 파악함(손진기, 왕선후, 풍영겸).자연환경 집안시 소재지에서 서북으로 약 53-43㎞(『集安縣文物志』/약 65㎞;『考古』1964-2) 거리에 위치하고, 노령산맥 북사면 끝나락의 淸河 유역으로 북쪽 1.5㎞ 熱鬧鄕 소재지에 위치하며, 집안-통화 도로가 북벽과 남벽을 통해 성의 한복판을 통과함. 서쪽, 동남쪽, 동북쪽 3면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협곡에 위치하며, 협곡 서쪽에는 높은 산이 우뚝 솟아 있고, 동쪽에는 가파른 낭떠러지와 절벽으로 된 木銑頭山과 撩荒頂子山(『集安縣文物志』/撂荒頂子山;『考古』1964-2)에 위치함. 이 사이에 木掀頭子溝(『集安縣文物志』/木銑頭溝;『考古』1964-2)라고 불리는 좁은 골짜기가 있는데, 폭은 80m 전후이고, 목흔두자구의 계곡물은 남변의 撂荒頂子山을 따라 서쪽으로 흘러가 淸河(葦沙河)에 유입됨. 청하 유역의 협곡을 나와 서북쪽으로 가면 熱鬧鄕 소재지가 위치한 河谷平原이 나오고, 熱鬧鄕 동쪽 약 2㎞의 楊木橋子溝門 산비탈 아래에 대량의 고구려고분이 분포해 있음. 1960년대 조사 당시 산성 북쪽 0.5㎞ 지점의 평지상에서 적석묘 3기가 확인되었으며, 서북 약 7.5㎞에 大川哨所가 설치되어 있는데, 부근에는 고구려 고분이 많이 있음.참고문헌 · 吳光國 編, 「地理」『輯安縣鄕土』, 1915 · 張拱垣 編, 「古蹟」『輯安縣志』, 1931 · 李殿福, 「1962年春季吉林輯安考古調査簡報」『考古』 1962-11, 1962 · 方起東, 陳相偉, 「吉林集安高句麗南道和北道上的關隘和城堡」『考古』 1964-2, 1964 · 方起東·林至德, 「集安高句麗考古的新收穫」『文物』 1984-1, 1984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4 · 孫進己·馮永謙, 『東北歷史地理』 (二), 黑龍江人民出版社, 1988 ·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 編, 「關馬山城」『吉林省志』 43(文物志), 吉林人民出版社, 1991 · 國家文物局 主編, 「集安市-關馬山城」『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李殿福, 「高句麗考古的回顧與展望」『遼海文物學刊』 1992-2, 1992 · 遲勇, 「高句麗都城的戰略防禦系統」『高句麗硏究文集』, 延邊大學出版社, 1993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王禹浪·王宏北, 「中國吉林省集安市關馬山城」『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1994 · 魏存成, 「城址·建築址」『高句麗考古』, 吉林大學出版社, 1994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北方史地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4 · 王綿厚, 「鴨綠江右岸高句麗山城硏究」『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余昊奎, 「集安 關馬墻山城」『高句麗 城』 Ⅰ(鴨綠江 中上流篇), 國防軍史硏究所, 1998 · 楊春吉·王曉南, 「高句麗疆域調査與硏究現狀」『高句麗歸屬問題硏究』, 吉林文史出版社, 2000 · 秦升陽, 「南北道上的關隘與城堡」『高句麗歷史與文化』, 吉林文史出版社, 2000 ·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魏存成, 「中期都城通往遼河流域的兩條道路與毌丘儉紀功碑」, 「山城的分布」『高句麗遺跡』, 文物出版社, 2002 · 杜宇 編著, 「老嶺山區古道」『集安風景名勝史話』, 通化師範學院照排印刷中心, 1999

  • 리스트여닫기 망파령관애, 왕팔발자령관애(望波嶺關隘, 王八脖子嶺關隘) 출토지 집안시 쌍차향 황외자촌 (集安市 雙岔鄉 荒崴子村)연대 3세기 중엽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62길림성박물관 집안고고대(吉林省博物館集安考古隊)4월 15일에 길림성박물고나의 진상위, 방기동 및 집안현문물관리소의 장사은, 조벽인 등이 집안 전역의 유적과 함께 조사함.1963길림성박물관, 집안현문물관리소(吉林省博物館, 集安縣文物管理所)5월에 길림성박물관의 진상위, 방기동 및 집안현문물관리소의 장사은, 조벽인 등이 망파령관애와 함께 관마산성을 집중 조사함. 다만 이때는 관애의 서북쪽 부분만 확인하고, 동남쪽 부분은 확인하지 못함(도면을 통한 추정임). 집안현문물관리소, 1964 「吉林集安高句麗南道和北道上的關隘和域堡」『考古』1964-2 에 발표함.1983집안현문물조사대(集安縣文物調査隊)5월 22일에 관애에 대한 실측, 기록, 사진촬영을 하고 1963년에 확인하지 못한 관애의 동남쪽 부분까지 확인함. 다만 동남단까지 완전히 확인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음(현지답사를 통한 추정). 『集安縣文物志』의 ‘망파령관애’로 발표했고, 이때의 조사결과를 토대로 1983년 10월 19일에 망파령관애를 집안현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함.1983길림성문물고고연구실, 집안현박물관(吉林省文物考古硏究室, 集安縣博物館)7월에 길림성문물고고연구실의 방기동 및 집안현박물관의 임지덕, 경철화, 손인걸이 집안현 경내의 남북 교통로의 계통을 조사하였고, 『文物』1984-1의 「集安高句麗考古的新收穫」을 발표함.1930년대 『集安縣志』(1931년 간행)에서는 〈疆域〉 조항에 “집안현성에서 120리 떨어진 망파령 산 위에 고성이 있다”고 나오며, 〈古蹟〉 조항에는 “망파령 위에 망파성이 있는데 당시에도 石垣이 잘 남아 있었다”고 함. 이로 보아 1930년대에 이미 망파령관애의 존재가 알려진 것으로 추정됨.구조특징 1963년 관애의 서북쪽 부분만 확인해 전체 길이를 260m로 파악함(도면을 통한 추정). 1983녀에는 동남쪽 부분까지 추가적으로 확인해 전체 길이를 750m로 파악함(도면을 통한 추정). 망파령 산줄기를 따라 관애의 성벽이 동남쪼긍로 계속 이어지고 있어 전체 규모를 완전히 파악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음(현지 답사를 통한 추정). 성벽 남단 90m 정도는 일찍이 보수한 흔적이 남아 있는데, 자갈로 쌓은 다음 진흙을 10-20㎝ 두께로 덧쌓았음. 성벽 남단은 크고 작은 7개의 산봉우리로 이어지는데, 산봉우리 사이의 구릉지에도 돌로 성벽을 축조한 흔적을 볼 수 있음. 1963년 조사 당시 용두령 남단과 망파령이 만나는 구릉 저지대의 관애 성벽이 도로에 의해 절단되면서 파괴되어 있었음. 1976년 삼가자댐 건설로 쌍차하(신개하) 계곡 동쪽에 위치한 용두령 서북쪽 성벽이 수몰되었고, 종래 도로가 지나가던 용두령-망파령 사이 구릉 저지대의 관애 일부도 수몰됨. 또 댐 건설 이후 도로를 신설하고 민가(휴게소?)를 지으면서 망파령 서북단의 관애가 상당 부분이 절단되고 파괴됨. 댐 건설과 도로 신설에 따라 수몰되거나 절단된 부분에 성벽의 단면이 잘 나타나 있음. 가령 본래 지방도로가 지나갔던 용두령-망파령 사이 구릉 저지대의 성벽은 일부가 수몰되어 있는데 댐 수위가 변동하면서 양측 성벽을 허물어뜨려 석축으로 축조한 성벽 단면이 완전히 드러나 있으며, 용두령 서북쪽의 수몰된 관애도 물가 가장자리에서 석축 상태의 성벽 윗면을 확인할 수 있음. 또한 망파령 서북단의 성벽도 도로 신설에 따라 완전히 절단되어 그 단면이 드러나 있으면 성돌의 일부가 도로 동남측에 쌓여 있음. 1963년 조사시 철제 화살촉(鐵鏃)이 출토했는데, 현지주민에 따르면 성벽 부근에서 철제 화살촉이 종종 발견되다고 함. 석제 절구(石臼)는 성벽 남쪽 0.5㎞의 경작지에서 출토되었는데, 거친 화강암의 평평한 면에 구멍을 뚫어 만든 것으로, 구경 20㎝, 깊이 20㎝임. 1983년 조사시에는 철제 등자(鐵馬蹬), 철제 자물쇠(鐵鎖), 토기편과 炭屑(숯가루) 등이 채집되었고, 현지주민에 따르면 종종 성벽 부근에서 등자와 함께 철제 화살촉 더미가 발견된다고 함.역사적 의미 주변 유적으로 망파령 남쪽 기슭에 적석묘 10여기가 있었으나 수몰되었고, 신개하 하구에 패왕조산성이 위치하며, 남쪽으로 쌍차하를 거슬러 올라가면 모구검 紀功碑가 발견된 소판차령이 나옴. 지정학적으로 집안현성(길림성 집안시) 서북쪽 50㎞ 거리의 三家子댐 부근에 위치하며, 혼강 유역에서 노령산맥을 넘어 고구려 두번째 수도가 있었던 국내성으로 향하는 교통로 가운데 가장 평탄한 신개하 연안에 위치하며, 관애는 신개하 연안로 가운데 지세가 가장 험하고 좁은 협곡과 산등성이를 가로질러 축조되어 있음. 산성의 기능과 성격에 대한 견해를 보면 첫째, 군사방어시설로 망파령관애는 험준한 산세를 따라 성벽을 구축하여 혼강에서 신개하를 거슬러 집안으로 통하는 교통로상의 요충지에 위치한 군사방어시설임. 이에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망파령관애가 신개하 하구에 위치한 패왕조산성과 함께 신개하 일대에서 고구려 도성(환도성과 국내성)의 외곽방어선을 구축했다고 추정함. 둘째, 남도상의 요충지로 모구검기공비가 망파령관애에서 신개하를 거슬러 집안으로 향하는 노령산맥상의 분수령인 小板岔嶺에서 발견되었는데 이에 3세기 중엽 제3현도군을 출발하여 소자하·혼강 유역을 거쳐 小板岔嶺을 넘어 환도성으로 진입한 魏 모구검을 비롯해 고구려 국내성을 침공하였던 중국측 침공군 가운데 상당수가 이 일대를 지나갔을 것으로 추정됨. 특히 342년 전연의 모용황 이 남도와 북도를 통해 동시에 고구려를 침공했는데, 망파령관애는 모용황이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침공했던 남도상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 추정됨(『고고』1964-2 외 다수). 셋째, 북도상의 요충지로 342년 전연 모용황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등장하는 남도와 북도가 신빈 永陵鎭에서 갈라진다고 설정한 다음, 남도를 소자하 지류인 二道河-渾江 지류인 六道河-渾江 하류-渾江口-압록강 본류로 설정한 다음, 蘇子河 본류-富爾江-新開河를 북도로 설정해, 망파령관애를 북도상의 중욯나 방어시설로 파악하기도 함(王線厚).자연환경 집안현성(길림성 집안시) 서북쪽 50㎞ 거리의 三家子댐 위쪽에 위치하고, 쌍차향 황외자촌에서 서북쪽으로 5㎞ 정도 떨어져 있는데(『집안현문물지』/ 쌍차향 소재지 서북 10㎞; 『고고』1964-2), 쌍차향과 台上鄕의 경계지점임. 관애가 지나가는 산줄기가 미치 자라처럼 생겼다하여 현지주민들은 望波嶺을 ‘王八脖子嶺’이라고도 부름. 노령 산줄기에서 발원한 쌍차하(신개하)가 구불구불하게 흐르다가 대상향과 쌍차향의 경계지점을 지날 무렵, 협곡의 폭이 좁아지고 양 옆의 산도 깍아지른 듯이 험준해짐. 북쪽 산비탈은 높고 가파른데, 아라로는 좁고 험준한 협곡이 내려다 보이며, 높이는 약 60m임. 망파령 산줄기는 대체로 동남-서북 방햐응로 뻗어 있고, 서북쪽 산줄기의 끝 지점에 龍頭嶺이라는 남북 방향의 작은 산줄기가 다시 솟아나 계곡 쪽으로 돌출하여 마치 병풍처럼 협곡을 가로막고 있음. 망파령관애는 바로 망파령과 용두령의 산마루를 따라 구축했음. 용두령 남단과 망파령이 만나는 지점에는 약간 낮은 구릉이 있는데, 현재 신개하 연안을 따라 개설된 지방 도로가 이곳을 뚫고 지나가고 있음. 또한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던 쌍차하(신개하)는 관애의 서북단을 지난 다음 방향을 동쪼긍로 꺾어서 흐르고 있는데, 그 양 옆으로는 깍아지른듯한 산이 계속 연이어짐. 1976년 바로 이 협곡을 막아 三家甸子댐을 건설했으며, 이로 인해 용두령 서북단의 관애와 용두령-망파령 사이 구릉 저지대의 관애 일부가 수몰됨.참고문헌 · 張拱垣 編, 「疆域志」「古蹟」『輯安縣志』, 1931 · 方起東, 陳相偉, 「吉林集安高句麗南道和北道上的關隘和城堡」『考古』 1964-2, 1964 · 方起東·林至德, 「集安高句麗考古的新收穫」『文物』 1984-1, 1984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4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 編, 「望波嶺關隘」『吉林省志』 43(文物志), 吉林人民出版社, 1991 · 國家文物局 主編, 「集安市-望波嶺關隘遺址」『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李殿福, 「高句麗考古的回顧與展望」『遼海文物學刊』 1992-2, 1992 · 遲勇, 「高句麗都城的戰略防禦系統」『高句麗硏究文集』, 延邊大學出版社, 1993 · 魏存成, 「城址·建築址」『高句麗考古』, 吉林大學出版社, 1994 · 余昊奎, 「集安 望波嶺關隘」『高句麗 城』 Ⅰ(鴨綠江 中上流篇), 國防軍史硏究所, 1998 · 楊春吉·王曉南, 「高句麗疆域調査與硏究現狀」『高句麗歸屬問題硏究』, 吉林文史出版社, 2000 · 秦升陽, 「南北道上的關隘與城堡」『高句麗歷史與文化』, 吉林文史出版社, 2000 · 王綿厚, 「高句麗南北二道上諸城」『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魏存成, 「中期都城通往遼河流域的兩條道路與毌丘儉紀功碑」『高句麗遺跡』, 文物出版社, 2002 · 杜宇 編著, 「老嶺山區古道」『集安風景名勝史話』, 通化師範學院照排印刷中心, 1999

  • 리스트여닫기 만구 ‘노변장’관애(灣溝 ‘老邊墻’關隘) 출토지 집안시 양수향 해관촌 (集安市 凉水鄉 海關村)연대 고구려 초중기(3세기 중엽-4세기 중엽)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3집안현문물관리소(集安縣文物管理所)전체 현황을 조사함.1983집안현문물조사대(集安縣文物調査隊)4월에 성곽의 전반적인 제원 및 간략한 지표조사를 함.구조특징 230˚방향으로 계곡 동안에서 시작하여 충적대지상에 수평으로 40여m를 쌓은 뒤 다시 산기슭을 따라 산중턱 가파른 수직 암벽까지 130여m를 축조했고, 河床의 붕괴로 인해 서단 20여m가 유실되었으므로 본래 성벽의 전체 길이는 200m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됨. 계곡 건너편 서안에도 성벽의 일부로 추정되는 돌무지가 남아 있고, 관애 남쪽 70여m 지점에도 보조 관애로 추정되는 석축 흔적이 남아 있음. 河床에 인접한 상벽은 거의 대부분 유실되었지만, 河床 동측과 산기슭 상의 성벽은 많이 허물어지기는 했지만 석벽 자체는 잘 남아 있는 상태이고, 관애 남쪽 70여m 지점의 석축 흔적도 허물어지기는 했지만 비교적 잘 남아 있는 상태임.역사적 의미 주변 유적으로 서쪽 13㎞ 거리에 칠개정자관애가 있고, 본래 남쪽 300m 거리에 고구려 고분군(적석묘)이 있었지만, 1983년 조사시에는 적석묘와 방단적석묘 등 3기만 남아 있었으며, 지금은 하류쪽의 댐으로 인해 압록강에 수몰되거나 경작에 위해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함. 지정학적으로 老邊墻關隘는 집안시 소재지에서 서남으로 55㎞ 떨어진 양수향 해관촌 북쪽 만구 골짜기에 위치해 있으며, 남쪽 4㎞에 압록강이 있음. 1931년에 간행된 『集安縣志』에 따르면, 상류 쪽에서 순조롭게 흐르던 압록강은 太平鄕 江口村에서부터 楡林河와 凉水泉子河 河口까지는 양안에 험준한 봉우리가 우뚝 솟아있고, 물살이 거세지며, 물결도 크게 일기 시작하고, 강물이 협곡 사이를 좌충우돌하면서 굽이쳐 흐르기 때문에 심한 소용돌이, 급한 물굽이, 암초 등을 만들며, 要孩子哨, 媽媽哨, 方車子哨, 老虎哨, 關門砬子 등으로 불리는 험준한 요해처가 생겨났음. 그리고 강물을 따라 수십리를 빙돌더라도 실제로는 1리 정도밖에 나아가지 못하게 됨. 그리하여 압록강 수운을 이용할 경우 운항 도중에 많은 위험이 따르게 됨. 그러다가 유림하와 양수천자하 하구부터 하류 쪽으로 강의 수면이 점차 넓어지고 강물의 흐름도 완만해지게 됨. 그리하여 예로부터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들은 대부분 外岔溝河나 凉水泉子河 일대에 정박한 다음, 육로를 이용하여 집안현성(집안시) 조재지로 나아갔다고 함. 그리하여 20세기 전반 外岔溝村 일대는 압록강 수로 교통과 집안지역 육로 교통의 結節點으로서 지금의 집안시 소재지보다 더 번성했다고 함. 특히 1888년 봄 外岔溝河에 주둔하던 청나라 군대가 지역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노령산맥에 老斧嶺 고갯길을 새로이 개설하여 외차구하 일대와 노령산맥 남쪽 사이뿐 아니라 노령산맥 북쪽 지역 일대와의 교통도 원활하도록 했음. 다만 1940년대 수풍댐이 건설된 다음 압록강 수로교통이 쇠퇴하면서 외차구촌 일대도 점차 쇠퇴하게 됨. 노변장관애의 기능과 성격은 바로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하면서 파악할 필요가 있음. 관애의 기능과 성격을 보면, 첫째, 압록강 수상 교통로를 통제하던 도성 외곽의 군사시설로, 만구노변장관애의 축성법은 망파령관애, 관마산성 등과 비슷하며, 특히 성벽 위에 진흙을 덮어 통로로 활용한 것은 망파령관애와 유사한데, 남쪽에 적석묘군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 시기의 군사시설로 추정됨. 21세기 전반 外岔溝 일대가 압록강 수상 교통과 육상 교통의 결절점이었던 것으로 보아 고구려 시기에도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됨. 이에 일반적으로 만구노변장관애가 서남쪽 13㎞ 거리에 위치한 칠개정자관애와 더불어 압록강 수상 교통로와 상륙로를 봉쇄하던 방어시설이었을 것으로 추정됨. 다만 관애가 위치한 만구 골짜기 자체가 주요 교통로로 활용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외형은 골짜기를 가로지른 관애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실제로는 성벽 안쪽의 골짜기를 군사시설로 활용하던 군사방어성의 성격을 띠었을 가능성도 상당히 높음. 둘째, 342년 남도상의 방어시설로, 342년 전연 모용황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등장하는 남도와 북도가 신빈 영릉진에서 갈라진다고 설정한 다음, 남도를 이도하를 거쳐 혼강 지류인 육도하와 혼강 본류를 따라 내려와 혼강구를 지나 압록강 본류를 거슬러 집안으로 향하는 노선으로 설정한 다음, 노변장관애를 이 남도상의 중요한 방어시설을 구성했다고 파악하기도 함(王線厚).자연환경 집안현성(길림성 집안시)에서 서남쪽 55㎞ 떨어진 양수향 해관촌 북쪽 通天嶺 동쪽 산기슭에 위치하고, 남쪽 4㎞ 거리에 압록강이 있으며, 동쪽 2㎞ 거리에 집안-환인 도로가 양수향 소재지를 통과하며, 남쪽 300m 거리에 海關 8隊가 있음. 만구 골짜기는 길이 3㎞ 정도로 남북으로 길게 펼쳐져 있는데, 양안은 가파른 절벽이다. 서쪽 산기슭에서 발원한 시냇물이 골짜기를 관통하여 해관촌 부근에서 凉水泉子河에 유입되어 남류하다가 압록강으로 유입됨. 관애는 만구촌 북쪽 200m 되는 지점에서 만구 골짜기를 가로질러 동서 방향으로 뻗어 축조했음. 관애 안쪽에는 서쪽과 북쪽이 깎아지른 단애로 이루어진 평탄한 대지가 있는데 성벽은 바로 이 대지의 동남쪽 가장자리를 따라 동북쪽 산중턱에서 서남쪽 계곡에 이르는 구간에 축조했음. 안쪽 대지는 병사 주둔지 등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음.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4 · 方起東·林至德, 「集安高句麗考古的新收穫」『文物』 1984-1, 1984 · 方起東·劉景文, 「吉林省近十年考古工作的主要收穫」『博物館研究』 1990-1, 1990 · 國家文物局 主編, 「集安市-“老邊墻”關隘遺址」『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辛勇旻, 「中國內 高句麗遺蹟의 현황과 과제(Ⅱ)」『湖巖美術館硏究論文集』 2, 湖巖美術館, 1997 · 余昊奎, 「集安 灣溝老邊墻關隘」『高句麗 城』 Ⅰ(鴨綠江 中上流篇), 國防軍史硏究所, 1998 · 王綿厚, 「高句麗南北二道上諸城」『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杜宇 編著, 「老斧嶺山路變遷」『集安風景名勝史話』, 通化師範學院照排印刷中心, 1999

  • 리스트여닫기 칠개정자관애(七個頂子關隘) 출토지 집안시 양수향 외차구촌 (集安市 凉水鄉 外岔溝村)연대 고구려 초중기(3세기 중엽-4세기 중엽)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3집안현문물조사대(集亞縣文物調査隊)4월에 집안현문물관리소가 집안현 경내의 유적과 유물을 일제히 조사할 때 칠개정자관애를 발견하였고, 기초적인 조사를 실시함.구조특징 칠개정자산을 旗竿頂子山이라고도 부르며, 관애 역시 ‘旗竿頂子關隘’라고 부름. 계곡을 횡단하여 자연 산돌로 관애를 축조하였고, 성벽 방향은 235˚이며, 계곡물보다 약 3m 높음. 관애 중앙으로 계곡이 관통하기 때문에 동벽과 서벽으로 나뉨. 1983년 조사 당시 성벽이 심하게 허물어져 성벽 단면을 정확히 알 수 없고, 돌들이 양쪽으로 많이 흩어져 외관상 둥그스럼한 돌무더기처럼 보였다고 함. 이 당시 동벽의 경우, 도로에 위해 잘려나간 서단을 제외하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다고 함. 그 뒤 동벽 동단의 산기슭 아래로 도로를 신설함에 따라 동단 부분도 많이 파괴되었고, 계곡 서안의 서벽 부분은 성벽 자체를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거의 사라진 상태이며, 특히 서벽 중앙으로 도로가 지나가고 있음.역사적 의미 주변 유적으로 동쪽 13㎞ 거리에 만구노변장관애가 있고, 관애 남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평지상에 고구려 적석묘가 여러 기 남아 있음. 지정학적으로 칠개정자산 계곡의 남단에 위치하며, 계곡 입구 바로 앞에는 압록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음. 외차구는 혼강 하구의 왼쪽 부근으로 북쪽으로 외차구하를 거슬러 大路鄕을 지나 掛牌嶺을 넘어서 욘여성 환인현으로 나아가며, 동쪽으로는 양수향, 유림향, 태평향을 지나 집안현성(길림성 집안시 소재지)에 도달함. 1932년에 간행된 『集安縣志』에 따르면, 상류 쪽에서 순조롭게 흐르던 압록강은 太平鄕 江口村에서부터 유림하와 양수천자하 하구까지는 양안에 험준한 봉우리가 우뚝 솟아있고, 물살이 거세지며, 물결도 크게 일기 시작하고, 강물이 협곡 사이를 좌충우돌하면서 굽이쳐 흐르기 때문에 심한 소용돌이, 급한 물굽이, 암초 등을 만들며, 要孩子哨, 媽媽哨, 方車子哨, 老虎哨, 關門砬子 등으로 불리는 험준한 요해처가 생겨났음. 그리고 강물을 따라 수십리를 빙 돌더라도 실제로는 1리 정도밖에 나아가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압록강 수운을 이용할 경우 항해 도중에 많은 위험이 따르게 됨. 그러다가 유림하와 양수천자하 하구부터 하류 쪽으로 강의 수면이 점차 넓어지고 강물의 흐름도 완만해지게 됨. 그리하여 예로부터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들은 대부분 외차구하나 양수천자하 일대에 정박한 다음, 육로를 이용하여 집안현성(집안시) 소재지로 나아갔다고 함. 20세기 전반 외차구촌 일대는 압록강 수로 교통과 집안지역 육로 교통의 결절점으로서 지금의 집안시 소재지보다 더 번성했다고 함. 특히 1888년 봄 외차구하에 주둔하던 청나라 군대가 지역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노령산맥에 老斧嶺 고갯길을 새로이 개설하여 외차구하 일대와 노령산맥 남쪽 사이뿐 아니라 노령산맥 북쪽 지역 일대와의 교통도 원활하도록 했음. 다만 1940년대 수풍댐이 건설된 다음 압록강 수로 교통이 쇠퇴하면서 외차구촌 일대도 점차 쇠퇴하게 됨. 칠개정자관애의 기능과 성격은 바로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하면서 파악할 필요가 있음. 관애의 기능과 성격을 보면, 첫째, 압록강 수상 교통로를 통제하던 도성 외곽의 군사시설로 관애 남쪽 계곡 입구에 적석묘군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 시기의 군사시설로 추정되고, 20세기 전반 외차구 일대가 압록강 수상 교통과 육상 교통의 결절점이었던 것으로 보아 고구려 시기에도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됨. 이에 일반적으로 칠개정자관애가 동남쪽 13㎞ 거리에 위치한 만구노변장관애와 함께 압록강 수상 교통로와 상륙로를 봉쇄하던 방어시설이었을 것으로 추정함. 다만 관애가 위치한 칠개정자산 골짜기 자체가 주요 교통로로 활용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외형은 골짜기를 가로지른 관애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실제로는 성벽 안쪽의 골짜기를 군사시설로 활용하던 군사방어성의 성격을 띠었을 간으성이 상당히 높음. 둘째, 342년 남도상의 방어시설로, 342년 전연 모용황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등장하는 남도와 북도가 신빈 永陵鎭에서 갈라진다고 설정한 다음, 남도를 이도하를 거쳐 혼강 지류인 육도하와 혼강 본류를 따라 내려와 혼강구를 지나 압록강 본류를 거슬러 집안으로 향하는 노선으로 설정한 다음 노변장관애와 더불어 칠개정자관애를 남도상의 중요한 방어시설을 구성했다고 파악하기도 함(王線厚).자연환경 집안현성(집안시)에서 서남쪽으로 65㎞ 떨어진 양수향 외차구촌 서쪽에 위치하고, 북쪽 200m 거리에 외차구촌(칠개정자) 6隊가 있으며, 관애는 칠개정자산 계곡의 남단에 위치함. 칠개정자산은 노령산맥의 주요 산줄기로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뻗어 있는데, 이 산줄기는 남쪽으로 압록강 北岸으로부터 시작하여 북쪽으로는 古馬嶺, 掛牌嶺 등과 연면히 이어지며 60여㎞ 뻗어나가 노령의 주맥과 연결됨. 칠개정자산에는 좁고 긴 계곡이 하나 있는데, 길이가 약 15㎞ 되며, 양사면의 계곡 물이 압록강으로 흘러들고 있음. 바로 이 계곡 입구에서 북쪽으로 300여m 들어온 지점에 위치함. 관애 남쪽 300여m 거리의 계곡 입구 바깥쪽에는 남북 너비 300-600m, 동서 길이 1,500m인 충적대지가 기다랗게 펼쳐져 있는데, 본래 강의 수면보다 4m 정도 높았지만 지금은 수풍댐이 만수위에 가까워지면서 충적대지가 물에 잠김. 계곡 입구에서 골짜기를 따라 북쪽으로 나아가면 관애가 위치한 지점에서 계곡의 폭이 좁아지고 산비탈이 가팔라지며 천연 방어물을 형성함.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4 · 方起東·林至德, 「集安高句麗考古的新收穫」『文物』 1984-1, 1984 · 方起東·劉景文, 「吉林省近十年考古工作的主要收穫」『博物館研究』 1990-1, 1990 · 國家文物局 主編, 「集安市-七個頂子關隘」『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余昊奎, 「集安 七個頂子關隘」『高句麗 城』 Ⅰ(鴨綠江 中上流篇), 國防軍史硏究所, 1998 ·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杜宇 編著, 「老斧嶺山路變遷」『集安風景名勝史話』, 通化師範學院照排印刷中心, 1999

  • 리스트여닫기 대천초소, 대천초잡(大川哨所, 大川哨卡) 출토지 집안시 청하향 대천촌 (集安市 淸河鄉 大川村)연대 고구려 초중기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3길림성문물고고연구실, 집안현박물관(吉林省文物考古硏究室, 集安縣博物館)7월에 길림성문물고고연구실의 방기동 및 집안현박물관의 임지덕, 경철화, 손인걸 및 길림사범대학 조정용, 길림성 철학사회과학연구소 주함강, 집안현 문물관리소 직원이 집안현 경내의 남북 교통로를 조사하다가 대천초소를 새롭게 발견하였고, 성곽의 전반적인 현황을 조사함. 『文物』1984-1의 「集安高句麗考古的新收穫」 및 『集安縣文物志』의 ‘大處哨卡’에 발표함.구조특징 성벽은 자연지세를 활용해 둥글게 석축 성벽을 축조하였고, 220˚방향이며 대략 원형 평면임.역사적 의미 주변 유적으로 大川村 동북 및 楊木橋子溝 일대에 고구려 고분이 다량 분포하고 동남 약 7.5㎞에 군사시설인 관마산성이 위치함. 지정학적으로 집안시 소재지에서 서부긍로 60여㎞ 떨어진 淸河(葦沙河)유역으로 혼강 본류에서 淸河(葦沙河) 연안로를 거슬러 노령산맥을 넘어 집안분지로 향하는 교통로상에 위치함. 대천초소의 기능과 성격에 대한 견해를 보면 첫째, 관마산성의 방어초소로 대천초소는 혼강 본류에서 淸河(葦沙河) 연안로를 거슬러 노령산맥을 넘어 집안분지로 향하는 교통로상의 험준한 협곡에 위치하고, 절벽 위에 위치해 있으며, 규모도 전체 둘레가 153m 밖에 안되기 때문에 독립된 성곽이라기 보다는 다른 성곽의 보조 방어시설로 추정됨. 바로 동남쪽 7.5㎞에 위치한 관마산성의 전방 초소로서 淸河(葦沙河) 일대에서 도성 외곽의 방어선을 구성했던 것으로 추정됨. 소규모 적군이 침공해오면 대천초서에서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저지할 수 있고, 대규모 적군이 침공해 오더라도 그곳에서 알단 한 차례 저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속하게 관마산성에 연락하여 적의 침공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음(이전복, 위존성). 둘째, 342년 對前燕戰時 북도상의 요충지로 추정됨. 342년 전연의 모용황은 남도와 북도 두 길로 고구려를 침공했는데, 북도로 침공할 것이라는 고구려의 예상과 달리 모용황이 대군을 이끌고 남도로 공격했으며 북도로는 長史 王寓로 하여금 병사 15,000을 진군하게 함. 고국원왕은 王弟 武로 하여금 5만 대군을 이끌고 북도를 집중적으로 방어하는 한편, 자신은 적은 병력만을 데리고 남도를 수비함. 결국 고국원왕은 모용황의 4만 대군에게 대패했으며 도성인 환도성마저 함락 당한 반면 북도에서는 王弟 武가 전연군을 대파함. 현재 남도와 북도의 경로에 대해서는 견해가 분분한데, 집안시 경내의 경우 대체로 혼강 유역에서 신개하를 거슬러 小板岔嶺을 통해 노령산맥을 넘는 루트를 남도, 혼강 유역에서 청하 연안로를 거쳐 노령산맥을 넘는 루트를 북도로 설정함. 이로 본다면 대천초소는 342년 북도상의 전략적 요충지였을 가능성이 높음(『集安縣文物志』, 遲勇, 魏存成).자연환경 집안현(집안시) 소재지에서 서북으로 60여㎞ 거리에 위치하고, 청하향에서 동쪽으로 2㎞ 떨어진 대천촌의 북쪽 절벽 위에 위치함. 남쪽으로 청하 본류와 400m, 통화-집안 도로와 550m 떨어져 있고, 동남쪽으로 약 7.5㎞ 거리에 관마산성(관마장산성)이 있음. 대천초소는 比高 약 20m 정도되는 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는데, 절벽은 동남 방향으로 돌촐하여 청하 河谷으로 뻗쳐 있어 주변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음. 통화-집안 도로가 본래 총하 북안에 개설되어 있었는데, 동북쪽으로 향하다가 초소가 있는 벼랑 아래를 지난 다음 동남으로 방향을 꺾어 관마산성을 관통하여 지나갔었음.참고문헌 · 方起東·林至德, 「集安高句麗考古的新收穫」『文物』 1984-1, 1984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4 · 方起東·劉景文, 「吉林省近十年考古工作的主要收穫」『博物館研究』 1990-1, 1990 ·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 編, 「大川哨卡」『吉林省志』 43(文物志), 吉林人民出版社, 1991 · 國家文物局 主編, 「集安市-大川城址」『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遲勇, 「高句麗都城的戰略防禦系統」『高句麗硏究文集』, 延邊大學出版社, 1993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王禹浪·王宏北, 「中國吉林省集安市淸河鎭大川村高句麗古城址」『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1994 · 魏存成, 「城址·建築址」『高句麗考古』, 吉林大學出版社, 1994 · 余昊奎, 「集安 大川哨所」『高句麗 城』 Ⅰ(鴨綠江 中上流篇), 國防軍史硏究所, 1998 · 楊春吉·王曉南, 「高句麗疆域調査與硏究現狀」『高句麗歸屬問題硏究』, 吉林文史出版社, 2000 · 秦升陽, 「南北道上的關隘與城堡」『高句麗歷史與文化』, 吉林文史出版社, 2000 · 魏存成, 「中期都城通往遼河流域的兩條道路與毌丘儉紀功碑」, 「山城的分布」『高句麗遺跡』, 文物出版社, 2002 · 杜宇 編著, 「老嶺山區古道」『集安風景名勝史話』, 通化師範學院照排印刷中心, 1999

  • 리스트여닫기 지구유적(地溝遺蹟) 출토지 집안시 유림향 지구촌 (集安市 榆林鄉 地溝村)연대 고구려 초기설과 고구려 중기 전후설이 있음. 고구려 초기설은 지구유적에서 출토된 ‘V’자형 보습날은 洛陽 燒溝 漢墓에서 출토된 후한대의 보습날과 형태가 비슷하다고 하는데, 이 견해에 따를 경우 지구유적 유물 가운데 일부는 고구려 초기의 것일 가능성이 높음(경철화). 고구려 중기 전후설은 지구 대지에 분포해 있는 고구려 고분군의 묘장 形制는 대부분 방단적석묘와 봉토통실묘로 시대는 약간 늦는데 이것으로 추론하면, 지구유적의 시기는 대략 고구려 중기 전후로 주정됨(『집안현문물지 』).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76 9월 30일에 쇠보습날 등 다수의 유물이 출토됨(『中國文物地圖集-吉林分冊』).1983집안현문물조사대(集安縣文物調査隊)봄에 地溝 대지 북부의 자연단면에서 고구려 시기 유물이 다수 분포된 유적층을 조사함. 『集安縣文物志』의 ‘지구유적’을 발표함.구조특징 두께 20㎝ 정도의 황갈색 경작층 아래에 두께 50㎝ 정도의 회갈색 유물 포함층이 있으며, 그 아래는 풍화된 모래가 섞인 황토로 이루어진 생토층임. 회갈색 문화층에서 고구려 시기 토기편, 숯덩이, 불에 탄 나무토막을 비롯하여 銅釜 2, 쇠보습날 1건, 쇠낫 5건, 唐·宋代의 동전 등이 출토됨.역사적 의미 주변의 충적대지에 고구려 고분군이 대량으로 분포하는데, 1962년 조사 때 약 100여기, 1983년 재조사 때 30여 기가 남아있었고, 대부분 방단적석묘와 봉토통실묘임. 유적에서 채집된 漢代의 유물은 대부분 중국대륙에서 고구려로 수입된 것으로 중국대륙에서 조금 늦게 수입되었거나 사용시간이 비교적 길었다고 추정하고 있음. 또한 지구촌 충적대지에 분포해 있는 고구려 고분은 대부분 방단적석묘와 봉토통실묘로 시대가 약간 늦다고 추정됨. 이에 지구유적의 연대를 고구려 중기를 전후한 시기로 파악함. 특히 주변 지역이 상당히 평탄하며 토질이 비옥하고 수원이 넉넉한 점으로 보아 사람이 거주하기에 매우 적합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보습날과 쇠낫 등 한대의 선진적인 농기구가 다수 출토되는 것은 이러한 자연지형과 밀접히 연관될 것으로 추정됨. 다만 보습날과 쇠낫 등이 後漢代에 중국대륙에서 직수입된 농기구라면 늦어도 3세기대에는 이 일대에서 이러한 농기구를 사용하여 농사를 지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러한 점에서 유적 형성의 상한은 고구려 초기로 소급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판단됨.자연환경 집안현성(길림성 집안시)에서 압록강을 따라 약 50㎞ 내려가면 유림향 지구촌 일대에 이르는데 지구촌의 충적대지 곳곳에서 유물이 출토된 바 있으며, 1983년에는 충적대지 북부의 자연단면에서 유적층이 확인됨. 지구촌 일대는 압록강 우안의 넓은 충적 대지로, 대지 범위는 동서 길이가 약 4㎞에 이를 정도로 광대한데, 남북 너비는 0.3-1.5㎞로 일정하지 않음. 충적대지의 북쪽은 유림령에 가까이 있고, 남쪽은 압록강에 잇닿아 있으며, 강 수면보다 5-15m 정도 높음. 지구촌은 각기 자연 촌락으로 이 대지 위에 산포해 있음.유물정보 토기편 1점, 보습날 1점, 철제 낫 5점, 동제 솥(銅釜) 2점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4 · 耿鐵華, 「集安高句麗農業考古槪述」『農業考古』 1989-1, 1989 · 國家文物局 主編, 「集安市-地溝遺址」『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리스트여닫기 채석장유적(採石場遺蹟) 출토지 집안시 (集安市)연대 고구려 초중기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0집안현문물관리소(集安縣文物管理所)집안의 채석공들이 綠水橋 일대에서 산돌을 채석하다가 거석상에서 일정하게 배열된 착흔을 발견하고, 고대인의 채석 흔적임을 확인했다고 함. 5-6월에 장설암, 손인걸 등이 여러 차례 조사하고, 표본을 채집하였으며, 『박물관연구』1992-1에 발표함.1983집안현문물조사대(集安縣文物調査隊)4월에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의 이전복 등이 유적의 전체 현황을 조사함. 『集安縣文物志』의 ‘採石場遺址’를 발표하고, 1983년 10월 19일에 집안현 문물중점보호단위로 지정됨.구조특징 채석장은 산기슭을 따라 동서로 길게 뻗어있는데, 길이 100m, 너비 100m로 면적은 10만여㎡에 이름(『博物館硏究』1992-1에는 남북 길이 1250여m, 도로에서 암벽까지의 너비 1000여m로 기술함). 채석장의 암질은 晶洞花崗巖, 中一細粒花崗巖 등으로 암질이 단단하며 성형이 좋아 대형 건축석재를 조성하는데 적합하다고 함. 채석장 내에는 거대한 돌들이 가득 널려 있는데, 대부분 고대 시기에 채석한 다음 아직 가공하지 않았거나 운반하지 않은 석재들임.역사적 의미 채석장의 석질은 “晶洞花崗巖”으로서 견고하여 가공했을 때의 모양이 좋기 때문에 대형 석조 건축물을 짓는데 사용하기에 적합하다고 하며, 이 석재는 고구려 왕릉으로 추정되는 장군총의 석재의 질과 동일하다고 함. 통구고분군에 본포한 벽화고분 석실에 사용된 석재 역시 재질상 동일하다고 함. 고구려 시기의 채석장 유적으로 파악되며, 특히 고구려 시기의 왕족이나 귀족들이 사용하던 석재 채석장이었음. 고구려 두 번째 수도였던 국내성 일대의 宮室, 무덤 및 기타 건축물을 조영하는데 필요한 석재를 이곳에서 채석했다고 추정됨. 다만 이런 류의 암석은 집안지역 곳곳에 분포되어 있기 때문에 고대 채석장이 다른 곳에서도 있었을 가능성을 계속 조사할 필요가 있음. 채석장은 통화-집안 도로의 동측에 위치하며, 이곳은 교통이 비교적 편리하기 때문에, 이런 石林은 봄, 여름, 가을에 채석해 겨울에 물이 얼면 빙판길에 굴림대를 이용하여 산계곡을 따라 도성과 그 근교까지 운반했을 것으로 추정됨. 석재 운송 노선은 두 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채석장에서 통구하를 따라 하류로 내려와 통구하 하구의 압록강에 이르러 두 길로 갈라짐. 한 길은 압록강 하류를 따라 내려가 마선구의 천추묘 등으로 운송하고, 다른 한 길은 압록강 상류를 거슬러 동으로 올라가 태왕릉과 장군총 등으로 운송함. 당시 압록강의 수면은 현재보다 넓고, 태왕릉과 장군총 남측에는 원래 압록강 지류가 있었으며 매년 여름에 비가 ㅁ낳이 올 때는 압록강 물이 하나로 변하고(지금 강 가까이 있는 묘 동남측과 태왕릉 서남에서 정류장까지 각각 큰 물웅덩이가 있다) 강물은 강 가까이에 있는 묘 비탈 아래까지 이름. 강면에서 태왕릉과 장군총 일대까지의 지세가 완만하여 운송에는 좋은 조건임.자연환경 집안현성(길림성 집안시) 북쪽 23㎞ 거리의 綠水橋 일대에 있고, 녹수교에서 북쪽 150m 거리의 집안-통화 도로의 동북측 산기슭에 위치하며, 채석장 앞의 小淸溝河와 통구하를 통해 고구려 두번째 수도인 국내성이 위치했던 통구분지 일대와 연결됨. 녹수교 일대는 산이 높고 숲이 울창하며, 거대한 바위가 우뚝 솟아 있고, 샘물이 졸졸 흐르는 곳으로서 경치가 매우 아름다우며, 우뚝 솟은 高山은 해발 고도가 무려 1,400여m에 이름. 채석장은 산세를 따라 동서로 길게 뻗어있는데 집안-통화간 도로가 채석장 앞을 지나가고, 도로 옆의 산기슭에 수많은 거석과 돌판이 널려 있음. 집안-통화 도로 아래로는 소청구하라는 작은 하천이 흘러가는데 동남으로 흐르다가 통구하와 합류하여 압록가응로 유입됨.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4 · 方起東·林至德, 「集安高句麗考古的新收穫」『文物』 1984-1, 1984 · 方起東·劉景文, 「吉林省近十年考古工作的主要收穫」『博物館研究』 1990-1, 1990 · 張雪岩, 「集安高句麗時期的採石場」『博物館研究』 1992-1, 1992 · 國家文物局 主編, 「集安市-綠水橋古代採石場遺址」『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李殿福, 「高句麗考古的回顧與展望」『遼海文物學刊』 1992-2, 1992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국동대혈(國東大穴)

  • 우산하 고분군(禹山下 古墳群)

  • 리스트여닫기 우산하 0000호묘(禹山下 0000號墓) 출토지 길림성 집안시 태왕진 (吉林省 集安市 太王鎮)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9집안시문관소(集安市文官所)1989년 여름에 집안시 관계부서가 산정상에 열사탑을 축조할 때 시공과정 중에 발견됨. 市文管所가 소식을 듣고 현장에 도착했을 때, 무덤은 이미 대부분 훼손되어 겨우 북측과 동측 가장자리의 흔적만을 찾을 수 있었음.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이 무덤은 구릉 정상부의 남쪽 끝에 위치하고, 북면 약 30m 바깥에 구릉의 능선을 따라 무덤 3기가 배열되어 있었다고 함. 또한 무덤은 지표와 평행하고, 석재가 있었다고 함. 석재는 깨진 산돌과 강자갈이었고, 돌무지의 평면은 불규칙한 원형으로 직경은 10m 정도였다고 함.2003-2005 장복유, 손인걸, 지용이 참여하여 퇴적된 깨진 산돌, 대량의 회색 瓦礫, 용석, 그리고 북측의 陪墳을 확인함.구조특징 1966년 통구고분군 실측조사 때, 이 작은 산 정상의 고분은 누락되었음. 그 주요 이유는 무덤이 낮고 작았으며, 그나마 무너져서 그 외형이 불규칙하였고, 오래되어서 부식토가 두껍게 덥혀 있어서 이 유형의 묘장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임. 고분은 유단적석석광묘로 평면은 대략 타원형이며, 북변은 비교적 일직선이고 남변은 바깥으로 굽었음. 묘장은 지표와 평행함. 무덤 둘레돌은 비교적 큰데, 직경은 0.8m 정도이고, 묘 내에 채워진 돌은 대부분 깨진 산돌과 강자갈로 크기는 0.3m 정도됨. 묘 위에 용석이 있음. 묘 북측에서 陪墳이 확인됨.역사적 의미 현장 조사 및 이 묘에 대한 새로운 발견 등을 토대로 분석할 때, 이 묘는 왕릉조건을 갖추고 있으므로, 응당 고구려의 초기왕릉으로 볼 수 있음. 장복유, 손인걸, 지용 등은 『삼국사기』에서 고구려 2대 왕인 유리왕이 묻힌 ‘豆谷東原’의 위치를 통구하 동쪽으로 국내성 북쪽의 고지대, 그리고 ‘豆谷離宮’을 梨樹園南유적지로 비정하면서, 우산하0000호묘가 『삼국사기』에 나타난 유리왕의 무덤에 부합한다고 보아 유리왕의 무덤으로 추정함.자연환경 집안 賓館 북면의 높은 언덕에 위치하며, 우산 서쪽 끝 높은 언덕에 위치함. 중심지리좌표는 동경 125˚ 10’ 600”, 북위 41˚ 07’ 828”, 해발 283m임. 서북 약 200m의 산비탈아래에는 산성하 전창 1호묘(JS磚M0001)이 있고, 동쪽으로 하천을 건너 150m 떨어진 지점에 우산하3319호묘가 있음. 묘의 동남부 산비탈 아래에는 梨樹園南유적지가 있음. 동쪽은 우산묘구로 이어지고, 서쪽으로 洞溝河谷이 내려다보이며 남쪽으로 국내성이 보이며, 북쪽으로 우산을 기대고 있음. 위치는 매우 훌륭하고 좋으며, 환경은 뛰어남. 지세는 높고 앞이 탁 튀어 시원함. 능묘는 산과 같은 지세를 갖추고 있음.유물정보 호 경부, 기와편 다수참고문헌 · 孫仁杰·遲勇, 『集安高句麗墓葬』, 香港亞洲出版社, 2007 · 張福有·孫仁杰·遲勇, 「高句麗王陵通考要報」『東北史地』 2007-4, 2007

  • 리스트여닫기 우산하 장군총(禹山下 將軍塚) 출토지 길림성 집안시 태왕진 과수촌 3조(필가보자) (吉林省 集安市 太王鎮 果樹村 3組(畢家堡子))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07 프랑스 학자 沙畹이 참여하여 집안을 조사할 때, 장군총의 묘실에서 향민들이 모시던 목패를 발견하였는데 윗면에 호태왕의 자리라고 쓰여 있다고 하여 호태왕의 능묘라고 기록함.1935 池內宏, 黑田源次, 梅原末治, 三上次男이 참여하여 집안의 도성 및 충요한 고분들을 조사함.1936 삼상차남이 참여하여 강계, 만포진, 환문총, 모두루총, 태왕릉, 산성자산성, 사진총, 삼실총과 함께 조사됨.1963집안시문물보관소(集安市文物保管所)분구의 충적도를 정리함. 무덤의 남쪽 護基石 위의 흙더미에서 철제 쇠사슬(鐵鍊), 금동머리장식, 대량의 기와·와당 등 건축구조물들이 발견됨.1966길림성박물관, 집안시문관소(吉林省博物館, 集安市文管所)통구고분군에 대한 실측조사 때, 우산묘구 1호(JYM0001)로 편호함.1979 시멘트 판 울타리공사1985 장군총 환경정리 및 주위보호담장 건설1994 무덤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위한 공사 중, 서북모서리부분의 기단 외측 탐사 중에 기초를 발견함.1997집안시문물보관소(集安市文物保管所)장군총과 배장묘에 대한 상세한 실측과 2호 배장묘 주변을 정리함2000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서측 배장묘(JYM0002B) 정리 등 비교적 중요한 작업이 여러 차례 이루어짐.2003북경특종공정설계원,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北京特種工程設計院,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통구고분군 중요 유적의 조사와 환경 정비와 맞물려, 북경특종공정설계원이 장군총에 대해 전면적인 실측과 지질조사를 진행함.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는 장군총 서측의 건축유지에 대한 전면적 시굴조사와 일부분에 대한 발굴을 진행함.1909-1010 關野貞, 谷井濟一, 栗山俊一이 참여함.건국 후 장군총에 대한 보호가 더욱 강화되어, 여러 차례 장군총과 주변 환경에 대한 정비와 조사를 진행함.구조특징 將軍墳은 초기 향민들이 부르던 속칭으로 1966년 조사에서 禹山墓區 1號墓, JYM0001로 명칭함. 오래된 기록에 의하면 明代 이전에 도굴을 당했지만, 형태는 상당히 양호하게 보존되었다고 함. 『통구』의 사진에는 정상부에 수목이 무성하나 1963년 이후 계속 벌목을 진행함. 고분은 계단석실총으로 계단 한변의 길이는 30.15~31.25m임. 현재 분구 위의 장대석 일부분이 파손되었고, 북측 중간의 護墳石이 결실되었으며, 동북과 서북모서리일대의 기초석이 약간 함몰됨. 계단, 묘실, 기초 3부분으로 구성됨. 계단은 7단으로 정교하게 다듬은 화강암 장대석으로 순서대로 안쪼긍로 들여쌓아서 계단상의 금자탑 형태로 축조함. 형재 계단과 護墳石의 석재 수는 1146매이고, 21매는 결실됨. 무덤의 각 면에 각각 3개의 護墳石을 경사지게 세움. 계단 아래에는 커다란 돌을 깔아서 만든 기단이 있음. 기단은 대체적으로 방형이고, 평균 한변의 길이는 32.3m임. 기단 아래에는 큰 강자갈로 기초를 만들었는데, 기초는 무덤 전체를 돌아가며 있고, 무덤 밖을 향한 지하배수구를 만듬. 묘실은 제3단 계단에 축조되어 있고, 천장에 큰 천정석이 있음. 羨道의 입구는 제5단 계단에 있고 방향은 서남쪽임. 기초는 1994년 보수할 때 서북모서리부분의 기단 외측 탐사 중에 발견되었는데, 향토층 위에 구덩이를 파고 강자갈을 메우는 방법으로 만듬. 황토층 위는 깬 산돌을 이용하여 표면을 다지고 그 위에 강자갈을 채워 넣었음. 강자갈은 모두 편평한 상태로 뉘어 쌓았고, 돌은 직경 0.8~1.2m, 두께 0.1m의 크기이며, 빽빽하게 쌓았음. 채워진 돌의 높이는 1~1.2m이고, 기초의 둘레는 기단보다 3m 밖으로 나아감. 기단과 護基石은 1963년에 이미 발견이 되었으며, 기단은 기초석 위에 축조됨. 기단은 가지런하고 정연한 화강암 석재로 축성하였고, 기단의 상면은 지표면과 같으며, 평면은 방형에 가까움. 그 중 동북측변의 길이는 33.1m, 서남측변의 길이는 31.8m, 서북측변의 길이는 32.6m, 동남측변의 길이는 31.7m임. 기단의 안쪽으로 0.5~0.6m 들어가서 계단을 쌓았음. 기단 외측 둘레에는 너비 약 3~4m, 두께 10~16m의 큰 강자갈을 빽빽하게 깔았으며, 4면 모두 무덤 기초의 자갈층보다 넓음. 이는 기단석이 자리를 벗어나서 변형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넓게 한 것이므로 護基石이라고 부름. 1963년 정리과정 중에 무덤의 남쪽 護基石위의 흙더미에서 철제 쇠사슬(鐵鍊), 금동머리장식, 대량의 기와·와당 등 건축구조물들이 발견됨. 기단 위로 7단의 계단을 축조하였는데 아래에서 분구 위까지 매층마다 1.05~1.2m 폭으로 들여쌓았고, 위로 갈수록 안으로 들여쌓은 폭이 줄어듬. 계단은 화강암을 다듬어서 만든 면석으로, 밖으로 약간 경사져서 자른 단면은 사다리꼴이 되는 장대석으로 축조함. 바닥부분의 장대석은 길이 2.4.m, 너비 0.9m 정도이고, 동일층에는 같은 두께의 돌을 사용함. 바닥에 놓인 가장 큰 돌은 길이 5.7m, 너비 1.12m, 두께 1.1m임. 위로 갈수록 돌은 조금씩 작아져서 길이 1m, 너비 0.4~0.7m가 되고, 꼭대기층 가장 작은 돌은 길이 0.5, 너비 0.6m임. 모서리 돌은 일반적으로 아래는 작고 위는 큰 방형대처럼 다듬음. 동남모서리 돌은 작은 것은 길이 0.7~1.2m, 두께 0.5m이고, 큰 것은 3.2~3.7m, 두께 1.1m임. 축조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 가장 꼭대기층의 돌을 제외하고, 계단석의 바깥쪽 가장자리에 높이 5~7㎝ 볼록하게 솟은 돌기를 만들어 위에 놓인 돌과 아래에 놓인 돌이 서로 맞물리게 함. 제1단 계단의 돌기 너비는 18~20㎝이고, 그 나머지 여섯층의 계단 둘레를 돌아가며 볼록하게 솟은 돌기의 너비는 7~10㎝임. 계단내부는 강자갈과 산자갈로 채웠고, 위에 놓인 장대석의 폭과 맞지 않는 경우에는 큰 강자갈을 이용하여 평평하고 가지런하게 쌓았음. 냇돌에도 화강암 석재처럼 돌기를 만들어서 위에 놓인 계단석이 팅겨나가는 것을 방지한 것도 있음. 제1단 계단은 장대석을 4층 쌓았고, 그 위의 나머지 6개의 계단은 모두 장대석을 3층으로 쌓아 만들었으며, 계단의 높이는 위로 갈수록 점차 낮아짐. 일반적으로 분구 정상부의 한, 두 층은 비교적 얇고 넓은 돌을 사용하였고, 아래층에는 큰 돌을 이용함. 계단은 조금씩 안으로 들어가며 쌓아서 외혀은 매우 반듯하고 아름다움. 제1단 계단의 높이는 3m인데, 서북모서리가 밖으로 벌어져서 4면의 각 길이는 같지 않음. 그 중 동측 계단의 바닥 길이는 30.15m, 계단상면의 길이는 28.65m, 남측의 바닥 길이는 30.75m, 상면 길이는 29.15m, 서측 바닥 길이는 31.1m, 상면 길이는 29.5m, 북측 바닥 길이는 31.25m, 상면의 길이는 29.65m임. 현재 계단 각 모서리부분은 밖으로 벌어지고, 서·북 양측 석재에 비교적 큰 틈이 여러 곳에 있지만, 동과 남 양측의 길이는 원형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음. 만약 원상태로 복구한다면 장군총 네면은 서로 대칭되며, 세로길이는 가로길이에 비해 0.6m 작지만 정방형에 가까움. 1단 계단 동과 서 양측의 4층 장대석은 각각 0.8m 안으로 들어가는데 반해, 남북 양측의 4층 조석은 각각 0.75m 안으로 들어가며, 들어간 폭 또한 가로방향이 세로방향보다 큼. 이는 분구 정상부까지 이어져서 전체 평면은 방형이 됨. 2단 계단의 높이는 1.6~1.7m로, 1단 계단의 평평한 면 위에 1~1.2m 안으로 들어가서 축조되었으며, 들어간 폭 또한 가로방향이 더 넓음. 상면의 길이는 26.2~27.2m이고, 3층 장대석의 4면은 각각 20㎝ 안으로 들어갔는데 1단 계단과 비교해서 안으로 들어간 폭이 좁아짐. 제3단 이상의 각 계단 모두 아랫단 계단보다 1~1.1m 정도 안으로 들어가서 축조됨. 들어간 폭의 차이는 상대적으로 크지 않고 세로방향이 가로방향보다 약간 넓으며, 높이는 점차 10~5㎝ 정도 줄어듬. 제3단 계단 높이는 1.5~1.6m, 상면 길이는 23.7~24.7m임. 제4단 계단 높이는 1.4~1.5m, 상면 길이는 21.35~22m, 제5단 계단 높이는 1.35~1.4m, 상면 길이는 18.85~19.4m임. 제6단 계단 높이는 1.25~1.3m, 상면 길이는 16.2~16.5m이고, 제7단 계단 높이는 1.1~1.2m, 상면 길이는 13.5~13.8m임. 가장 높은 7단 계단의 남측 상부 2층 장대석은 결실됨. 제3·4단 계단 서북모서리가 점차 변형되고, 연도 바깥쪽 장대석이 약간 자리에서 벗어난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계단 모두 보존이 비교적 양호함. 계단 위에 회록색 석판을 세웠는데 현재도 서변의 제1·2단 계단의 조석 틈에 그 일부 돌덩이를 볼 수 있음. 묘실은 제3단 계단 위에 축조함. 연도 입구는 제5단 계단의 중앙에 위치하고, 연도는 대체적으로 정방형임. 묘실의 네 벽은 장대석을 6층 쌓아 축조하였고, 바닥에서 위로 갈수록 약간 아능로 기울어짐. 네 벽 위쪽 끝부분 가까이에 하나의 커다란 장대석을 뉘어 고이고, 그 위에 1층 평행고임의 천정을 형성하였고, 그 위는 깍아 다듬은 평평한 돌을 덮음. 묘실 바닥에는 석판을 깔았는데, 석판은 부분적으로 파손됨. 그 위에는 棺床 2좌가 설치되어 있으며, 관상 위 주변 가장자리에 볼록하게 튀어나온 돌기(稜)가 남아 있음. 두 관상은 동서로 배열되어 있고 관상 간의 거리는 0.5m임. 서측 관상은 길이 3.25m, 너비 1.45m, 높이 0.45m이고, 동측은 서측에 비해 약간 작아 길이 3.2m, 너비 1.3m, 높이 0.38m임. 연도는 묘실의 남벽 정중앙에 있고, 길이는 8.3m, 방향은 235˚임. 연도의 양 벽은 장대석을 3층으로 쌓아 만들었음. 연도는 묘실에서 바까틍로 향해 점차 넓어지고, 중간 부분은 묘실 바닥보다 0.75m 높음. 연도 천장은 3개의 큰 돌로 덮었고, 바깥 돌 가장자리에는 홈이 파여있어서 석재로 만든 연도의 문이 있었음을 알 수 있음. 묘정상부는 묘정상까지의 높이가 13.7m이고, 평면은 방형임. 4면은 제7단 계단의 맨 꼭대기층 계단석의 변이 되는데, 한변의 길이는 13.5~13.8m임. 묘정상부 중심은 묘실 전정석 주변보다 약간 높고, 정상부는 황토로 봉하였는데 봉토에 사용된 황토에 백회가 섞여 있음. 중앙 부분의 봉토 두께는 0.7m이고, 주변 가장자리는 비교적 얕음. 천정석은 거대하고, 불규칙적인 타원형으로 길이 9.5m, 너비 7.45m, 두께 0.8m임. 천정석과 계단 장대석 사이에는 가공된 석판을 깔았고, 돌 사이 틈은 강자갈과 백회가 섞여 있는 황토로 메워 묘실 내부로 빗물이 스며들어가는 것을 방지함. 묘 정상 서·남면 제7단 계단의 맨꼭대기층 계단석에서 장대석 몇 개가 결실되었고, 나머지 돌들에는 10~20㎝ 거리 간격으로 직경 10㎝, 길이 5㎝의 작은 원형의 구멍이 나열됨. 그 중 서측면은 장대석 2개가 결실되었고, 17개의 구멍이 남아 있는데, 구멍 간의 거리는 0.4~0.6m로 같지 않음. 북측면은 장대석 3개가 약간 부서졌고, 현재 원형 구멍 18개가 남아있는데, 구멍 간의 거리는 0.5~0.8㎝이고, 가장 가까운 2개의 구멍은 서북에 있는 것으로 그 거리는 0.3m임. 동측은 1개의 모서리 돌만이 파손되었고 원형 구멍 21개가 남아 있음. 중간의 일부분을 제외하고, 구멍 간의 거리는 대체로 같음. 남측에는 다듬은 돌 1개만 남아있는데, 구멍 2개가 있고, 구멍 간 거리는 0.9m임. 무덤 아래에서 철사슬이 발견된 정황을 볼 때, 분구 정상부에 난간이나 건축물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음. 護墳石은 무덤이 밖으로 벌어지거나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설치된 것으로 묘의 계단을 보다 견고하게 함. 무덤의 각 면에 3개씩 있는데, 중간과 양 모서리에 각 1개씩 기본적으로 고르게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함. 현재 북측 중간의 호묘석은 없어졌고 나머지 부분은 온전하게 남아 있으며, 모두 평평한 면이 안쪼긍로 향하게 설치됨. 호묘석의 두껍고 무거운 부분은 기단 바깥 호기석 위에 세웠고, 나머지 한 끝부분은 1단 계단의 맨꼭대기 장대석에 비스듬히 기울임. 각 호묘석은 크고 두꺼우며 무겁고, 형태는 규칙적이지 않음. 가장 큰 것은 서측 중간의 호묘석으로 돌의 높이 4.5m, 너비 1.9m, 두께 1.5~1m임. 가장 작은 호묘석은 북측의 서쪽 끝에 위치한 것으로 높이 2.6m, 너비 1.3m, 두께 0.75m임. 장군총은 축조할 때 빗물과 지표의 물이 묘에 침식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묘 바깥쪽을 향한 지하배수시설(배수구)을 축조함. 1994년 묘의 동남 모서리에서 34.8m 떨어진 지점에 1개의 판석으로 쌓은 배수로가 발견됨. 당시에는 1.2m의 일부분만 정리하였는데, 장군총 동남쪽 모퉁이와 마주하고 있음. 장군총 1호 배장묘 동남쪽과 태왕릉 동북면에서 배수로가 있는 점으로 미루어 장군총 전면 양쪽에 모두 유사한 지하배수로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됨. 장군총 주위에는 자갈이 깔려 있는데, 너비는 4면이 각각 약 30m 정도로 묘 가까이에 있는 강자갈은 비교적 크고, 묘에서 먼 곳은 부서지고 작은데 장군총의 묘역표식임. 『통구』 중 실측도에도 보이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매몰됨. 2003년 8월 장군총 관개수로공사 때, 장군총 서남 정중앙에서 장대석으로 한층 쌓은 석렬 일부분이 발견되어 담장으로 추정함. 담장의 높이는 약 0.5m임. 북쪼긍로 무덤과의 거리는 30m 정도로 장군총 남쪽의 보호축대였을 것으로 추정됨. 장군총 주위에서 배장묘, 제대, 건축지 등 묘의 상관유적들이 여러 곳에서 발견됨. 배장묘는 비교적 초기에 발견되었는데 1930년대 『통구』에서 ‘陪塚群’으로 기록하고, 4~5기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였음. 이후 여러 글에서도 4~5기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였음. 장군총의 북측에 동서 방향으로 일렬로 잇으며, 2000년 정리 시 배장묘는 2기였음을 확인함. 제2호 배장묘 서측에 인접한 조형의 돌무지들에 대해서 2003년 조사 때 제대라고 단정하고 JYM0002B라고 편호함.내부규모 및 특징 연도 길이 8.3m, 폭, 2~2.75m, 높이 1.4~2.2m 연도 바닥 한변 길이 5.43~5.5m, 전체 높이 5.1m역사적 의미 무덤은 웅장, 정교, 우수하고, 현재 남아있는 가장 상태가 좋은 대형계단석실묘로 ‘동방의 피라미드(금자탑)’이라고 칭송함. 장군총은 계단석실묘의 전형으로, 묘에는 기초가 있고, 그 위로 기단을 쌓음. 기단 바깥으로는 다시 호기석을 쌓았고, 기단 위에 계단과 묘실을 축조함. 계단석은 층층마다 평행하게 쌓았고, 그 안으로는 자갈로 채움. 묘실 위는 거대한 돌로 덮었고, 주위에는 거대한 돌로 기대어 묘를 보호함. 묘의 구조는 빈틈이 없고, 정밀하게 축조되어, 계단적석총 중 가장 늦은 시기로 그 연대는 약 5세기임. 장군총의 구조형태는 대체로 태왕릉과 같음. 다만 태왕릉은 기초가 없고 면적이 큼으로써 견고의 정도에 차이가 나 거의 무너진 상태임. 장군총은 왕릉 중에서 가장 작은 규모여서 도리어 보존이 가장 좋음. 고구려의 석조장인은 끊임없는 경험이 總結되고, 석조공예가 나날이 완성되어 상당히 성숙한 경지에 달했다고 볼 수 있음. 이후 계단적석석실묘와 적석총은 왕릉으로 사용하지 않고, 대신 봉토묘와 벽화묘가 왕릉으로 채용됨. 장군총의 묘주인과 관련하여 여러 견해가 있음. 첫번째는 시조 동명왕설로, 『집안현지』에 “예전에 동명성왕묘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將軍墳이라고 불렀다. 고구려왕 주몽이 죽자, 태자 유리가 올랐는데, 시조를 용산에 장사지내고 동명성왕이라고 불렀다”라고 했다는 기록에서 나옴. 이 설은 받아들일 수 없어 일찍이 배제됨. 두번째는 산상왕설로 『통구』에는 장군분이 산상왕릉이라고 적고 있음. 산상왕은 고구려 10대왕으로 196년에 왕에 올라 227년에 죽었음. 그러나 고고학적으로 그 추측을 지지할 증거가 없음. 세번째는 태왕릉설임. 1907년 프랑스 학자 沙畹이 집안을 조사할 때, 장군총의 묘실에서 향민들이 모시던 목패를 발견하였는데, 윗면에 호태왕의 자리라고 쓰여 있다고 하여 호태왕의 능묘라고 기록함. 1980년 초 일부 일본학자들은 장군총과 태왕릉에서 출토된 와당의 연구와 장군총과 태왕릉비의 朝向이 서로 일치한다는 것을 조합하여 역시 장군총이 태왕릉이라는 설을 제시함. 태왕릉에 보이는 다량의 문자벽돌 중에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의 명문 또한 다르게 해석함. 네번째는 장수왕설임. 2003년 태왕릉 정리 중 출토된 동령에 “辛卯年 好太王 □ 造鈴 九十六”이라고 새겨진 글자는 태왕릉이 호태왕의 묘라는 정론을 성립하게 해줌. 이 설은 일본에 의해 최초로 제기되었는데, 그 주요 증거는 묘장의 형태였음. 장군총은 적석구조의 왕릉 중 가장 늦은 형식으로 연대는 약 5세기로 추정되는데, 이 시기는 바로 장수왕 재위시기임. 장수왕은 412년에 왕위에 올랐고, 왕이 된 지 15년 후인 427년 집안에서 평양으로 천도함. 살아 있는 동안에 자신의 묘를 만들었는데, 고구려왕이 영위했던 풍속과 부합함. 이러한 거대한 공정과 태왕릉과 태왕비의 친밀한 관계를 볼 때, 오직 장수왕에만 비정할 수 있음. 그러므로 장군총의 묘주인은 고구려 제20대왕 장수왕일 가능성이 더 큼. 장군총 북측의 배장묘는 고구려왕릉매장제도의 구현임. 또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가족, 종족, 왕족의 장례제도에서 항상 보이는 현상임. 1호 배장묘의 규모는 비교적 작으나 지금까지 장군총과 같은데, 혈연으로 매우 가깝고 직위가 매우 높은 사람으로 추정됨. 2호 배장묘는 1호 배장묘에 비해 작지만 주변에 상징성의 호묘석이 있는데, 이런 시설은 신분과 지전적인 의미로 구축된다고 설명함. 장군총의 서로 같지 않은 두 종류의 배장묘는 모두 고구려 초기의 묘제로 중시됨. 제대는 장군총의 기타무덤보다 이름. 제대가 묘장과 같은 배열에 있는 것은 장군총의 특징 중의 하나임. 고구려 초기왕릉에서는 배장묘가 있고 제대는 없었다고 추정함. 발전과정 중의 제대는 배장묘의 구분과 숩지 ㅇ낳음. 우산하 992호묘 축조시기에 이르러서 제대는 진정하게 성숙함. 태왕릉의 제대는 규모가 매우 크고, 오직 제대만이 나온다는 점에서 명확한 특징을 가지고 있음. 그런데 장군총은 다시 배장묘와 제대가 같이 나옴. 이러한 복고현상음 연구할 가치가 있음. 최근 제대를 연접된 적석무덤으로 파악하고, 일제하 통구 보고서에 4-5기의 배총이 있었다는 보고와 관련하여 해석함. 건축유지에서 보이는 담장, 散水, 배수구, 초석, 문 등은 하나의 대형 건축군으로 건축은 장군총 방향과 일치함. 이 건축유지는 장군총에 부속된 제사 성격의 건축물이고 그 연대는 장군총과 동시기 혹은 약간 늦는 것으로 추정됨. 문자명 기와는 장군총 외에도 천추묘, 서대묘, 태왕릉, 환도산성에서 모두 볼 수 있음. 기와의 “申, 犬, 小” 등과 같은 문자는 대부분 기와가 사용된 부위 혹은 기년과 工匠의 이름들을 기록한 것임. 『조선고적도보』에는 “漢”, “第” 등의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기록됨. 발견된 연문와당은 왕릉에서 보이는 형태가 가장 크고 연판이 가장 많은 형식임. 건축유지에서 출토된 기와와 와당은 모두 홍색이고, 조잡하게 만들었으며 火侯가 비교적 낮음. 그 원인은 완성되지 않았거나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음.자연환경 태왕진 과수촌 3조(필가보자)의 경작지에 있음. 우산묘구 동쪽 가장자리 용산 남쪽 기슭에 위치하며, 작은 산 남쪽 기슭에 홀로 자리잡음. 서남방향으로 약 5.7㎞ 떨어진 지점에 고구려 국내성이 있고, 북쪽으로는 용산에 기대고 있음. 묘의 남쪽은 광활하게 경사져 내려감. 동북측에는 2기의 배장묘와 제대가 있고, 서북측에는 연대가 많이 늦은 봉토묘가 있으며, 서남측에는 대형건축유적지가 있음. 남쪽으로 1.5㎞ 떨어진 지점에 임강묘가 있고, 서남쪽으로 2㎞여 떨어진 지점에 태왕릉과 태왕비가 있음.유물정보 금동제 머리장식, 금동제 못박힌 신발, 금제 솥(鐺), 금동제 고리, 금동제 철사슬(鐵鍊), 수막새 3점, 암키와, 수키와참고문헌 · 關野貞 外, 『朝鮮古蹟圖譜』, 1915 · 池內宏·梅原未治, 『通溝』 下: 満洲国通化省輯安県高句麗壁畫墳, 日滿文化協會, 1940 · 藤田亮策, 「通溝附近の古墳と高句麗の墓制」『朝鮮考古學硏究』 (再收錄), 高桐書院, 1948 · 蘇才, 「集安高句麗遺跡調査簡記」『吉林省文物工作通訊』, 1957 · 傅佳欣, 『集安高句麗王陵』, 文物出版社, 2004 · 孫仁杰·遲勇, 『集安高句麗墓葬』, 香港亞洲出版社, 2007

  • 리스트여닫기 집안 1호 배장묘(集安 1號 陪葬墓) 출토지 길림성 집안시 태왕진 (吉林省 集安市 太王鎮)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66길림성박물관, 집안현문관소(吉林省博物館, 集安縣文管所)통구고분군에 대한 실측조사 때, 1호배장묘로 편재되었고, 간단히 JYM0002로 기록함.1977집안시문물보관소(集安市文物保管所)장군총과 배장묘에 대한 상세한 실측과 2호 배장묘 주변을 정리함.구조특징 장군총과 비교해 볼 때, 석실계단적석총이라는 점은 같으나, 규모는 비교적 작고, 큰 호묘석이 없으며, 상부는 石硼墓와 비슷함.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됨. 장군총과 마찬가지로 1호 배장묘 하부에도 기단을 쌓았는데 가공된 화강암 장대석을 이용해서 쌓았음. 기단 아래는 두께 약 0.8m의 강자갈로 기초를 쌓음. 기초 평면은 정방형에 가깝고 한변의 길이는 약 10m 정도임. 1997년 실측시 무덤의 북쪽이 남쪽에 비해 46m 높다고 판단함. 기단 바깥에는 직경 0.8~1.5m의 큰 강돌로 그 주위를 평평하게 깔았는데, 너비는 2m 정도로 무덤의 기초를 보호하는 작용을 함. 무덤의 남측 정중앙 기초 자갈돌 위에 회록색 판석 2개가 있음. 판석에는 세로방향의 얕은 홈을 여러 줄 새겼는데, 이는 장군총 및 서대묘·천추묘·태왕릉 계단 상에 발견되는 입석판과 같은 의미를 가진 것임. 계단에서 안으로 0.8m 쯤 되며 그 위에 두 개의 계단이 있으며, 계단은 장대석으로 만듬. 제1단 계단은 변의 길이가 9.22m, 높이 2.2~2.4m이고, 장대석을 6층으로 쌓음. 현재는 동북측이 비교적 양호하게 남아있고, 나머지 3면은 1~4층만이 남아 있음. 상층의 장대석은 이미 많이 결실됨. 제2단 계단은 제1단 계단에서 4면 모두 0.4m 안으로 들어가서 축조됨. 동북측은 현재 3층이 남았고, 돌의 높이는 1m임. 1단의 가장 높은 지점과 천정석의 가장 낮은 면 사이에는 장대석 1층이나 2층 정도의 차이가 있음. 지금은 이미 파손됨. 계단석 안은 자갈로 채웠고, 아울러 백회가 섞여 있음. 장대석의 가장자리를 볼록하게 돌출시켜 층층마다 서로 맞추어 쌓음. 묘실은 바깥으로 이미 드러나 있음. 묘실은 1단 계단의 5층 장대석 위에 축조했고 평면은 장방형임. 묘실 바닥과 묘실 하부의 동·서·북 삼면은 석회암과 頁巖으로 축조했고, 상부는 높이 1.2m의 가지런한 화강암으로 축조함. 그 내측은 평평하며, 외측은 자연형태를 유지함. 묘문은 방향이 235˚로, 장군총과 같은 방향이고, 너비는 1.24m, 높이는 1.6m임. 묘문석은 묘문 좌측에서 일부 남아있는 돌로 확인 가능함. 천정석은 길이 5.5m, 너비 4.6m, 두께 0.4~1m가 되는 큰 돌로 형태는 규칙적이지 않으나, 안쪽 면은 약간 평평하고, 4면은 묘벽보다 밖으로 나옴. 천정석 아래의 가장자리에는 방수를 위해서 안으로 0.4m 들어가고 너비 0.6m의 오목한 홈이 한바퀴 둘러져 있음. 묘실 내에서 어떠한 葬具와 유물이 발견되지 않음. 무덤의 동남모서리에서 약 35m 떨어진 지점에서 한 개의 돌로 축조한 지하배수로(涵洞)가 발견됨. 방향을 볼 때, 묘 아래에서 동남방향으로 흐르는 배수시설임. 1997년 묘 주위의 충적토 정리 중에 와당, 철제 끌, 철제 칼(刀), 鐵鉗, 鞍形器, 편자 및 시유도기, 암키와, 수키와의 잔편 등이 발견됨. 철기는 모두 묘의 동남측 충적토 주에서 출토되었으며, 연대는 비교적 늦음. 기와는 모두 模制로, 무늬가 없는 것이 대부분이며, 승문이 박힌 것이 일부 있고, 안에는 가는 포문이 찍혀 있음. 火候는 높고, 회색이 대부분이며, 일부 홍갈색이 있음. 수막새은 모두 팔판연화문와당으로 3점이고, 장군총과 같으며, 크기에 따라 2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큰 것은 직경이 21㎝이고, 작은 것은 직경이 16m임. 수키와의 일부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매우 두꺼운 백회가 발라져 있는 기와도 있음. 끝암키와는 14건이 출토됨.내부규모 및 특징 묘실 길이 2.5m, 너비 1.22m, 높이 1.6m역사적 의미 장군총 북측의 배장묘는 고구려왕릉매장제도의 구현이며, 옛날부터 지금까지 가족, 종족, 왕족의 장례제도에서 항상 보이는 현상임. 1호 배장묘의 규모는 비교적 작으나 장군총과 같은데, 혈연으로 매우 가깝고 직위가 매우 높은 사람으로 추정됨. 2호 배장묘는 1호 배장묘에 비해 작지만 주변에 상징성의 호묘석이 있는데, 이런 종류의 시설은 신분과 지전적인 의미로 구축된다고 설명됨. 장군총의 서로 다른 두 종류의 배장묘는 모두 고구려 초기의 묘제로 중시함. 제대는 장군총의 기타무덤보다 이름. 제대가 묘장과 같은 배열에 있는 것은 장군총의 특징 중의 하나임. 고구려 초기 왕릉에서는 배장묘가 있고, 제대는 없었다고 추정함. 발전 과정 중의 제대는 배장묘의 구분과 쉽지 않음. 우산하 992호묘 축조시기에 이르러서 제대는 진정하게 성숙했으며, 태왕릉에서 제대는 규모가 매우 크고, 오직 제대만이 나온다는 점에서 명확한 특징을 가지고 있음. 그런데 장군총에서 다시 배장묘와 제대가 같이 나오는데, 이러한 복고 현상은 연구할 가치가 있음. 최근 제대를 연접된 적석무덤으로 파악하고, 일제하 통구 보고서에 4-5기의 배총이 있었다는 보고와 관련하여 해석함.자연환경 장군총 서북모서리에서 43m 연장선상에 위치함.유물정보 철제 끌(鑿) 3점, 철제 못 1점, 철제 도자(刀子) 1점, 철제 鞍形器 1점, 철제 편자 2점, 철제 鉗 1점, 철제 조각 1점, 황유시유도기 1점, 수막새 3점, 끝암키와 14점, 명문기와 5점, 부호기와 4점, 평기와 1점참고문헌 · 關野貞 外, 『朝鮮古蹟圖譜』, 1915 · 池內宏·梅原未治, 『通溝』 下: 満洲国通化省輯安県高句麗壁畫墳, 日滿文化協會, 1940 · 藤田亮策, 「通溝附近の古墳と高句麗の墓制」『朝鮮考古學硏究』 (再收錄), 高桐書院, 1948 · 蘇才, 「集安高句麗遺跡調査簡記」『吉林省文物工作通訊』, 1957 · 傅佳欣, 『集安高句麗王陵』, 文物出版社, 2004 · 孫仁杰·遲勇, 『集安高句麗墓葬』, 香港亞洲出版社, 2007

  • 리스트여닫기 집안 2호 배장묘(集安 2號 陪葬墓) 출토지 길림성 집안시 태왕진 (吉林省 集安市 太王鎮)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97집안시문물보관소(集安市文物保管所)장군총과 배장묘에 대한 상세한 실측과 2호 배장묘 주변을 정리한 후 2호 배장묘로 편재되었고, 간단히 JYM0002A로 기재함.구조특징 정리 전에는 두께 약 15~30㎝의 충적토에 덮여 있었고 파손이 심함. 방단의 계단을 가지고 있는데, 4변의 방향은 장군총과 같고, 현재 1단만 보임. 계단의 한 변은 9.57m임. 현재 남측은 1층이 남아 있고, 서측은 1~3층, 북측은 2~3층, 동측은 1~4층이 남아 있으며, 가장 높은 곳은 1.35m이다. 서남 모서리 돌은 결실되었음. 모두 석회암제 장대석이며 대개 크기는 길이 1.4~1.8m, 너비 0.4~0.9m, 높이 0.4m정도이고, 돌 둘레에는 돌기를 만들었음. 계단 아래에 기단이 축조되어 있는데, 기단은 비교적 큰 돌을 사용함. 서남측은 아직도 보존이 양호한데, 한변은 10.8~11m, 너비는 계단보다 0.8m정도 넓음. 묘장 외측에는 호묘석이 있음. 『통구』에는 각 면에 3개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북측에 3개, 동·남측에 각각 1개가 남아 있음. 어떤 석재는 장군총에서 버려진 장대석과 거의 유사함. 가장 완전한 돌은 높이 1.95m, 두께 0.6m, 너비 0.56m임. 묘의 윗부분 중간은 돌이 평평하게 쌓여 있는데 묘실 바닥일 가능성이 있음. 다만 역사사진에서도 백년 전에 이미 묘실의 흔적은 볼 수 없었음. 2호 배장묘의 유물은 매우 적은데, 남측 묘 바깥 충적토에서 황유시유도기호잔편과 꺽쇠, 편자 등 일부 철기만이 발견됨.역사적 의미 장군총 북측의 배장묘는 고구려왕릉매장제도의 구현이며, 옛날부터 지금까지 가족, 종족, 왕족의 장례제도에서 항상 보이는 현상임. 1호 배장묘의 규모는 비교적 작으나 장군총과 같은데, 혈연으로 매우 가깝고 직위가 매우 높은 사람으로 추정됨. 2호 배장묘는 1호 배장묘에 비해 작지만 주변에 상징성의 호묘석이 있는데, 이런 종류의 시설은 신분과 지전적인 의미로 구축된다고 설명됨. 장군총의 서로 다른 두 종류의 배장묘는 모두 고구려 초기의 묘제로 중시함. 제대는 장군총의 기타무덤보다 이름. 제대가 묘장과 같은 배열에 있는 것은 장군총의 특징 중의 하나임. 고구려 초기 왕릉에서는 배장묘가 있고, 제대는 없었다고 추정함. 발전 과정 중의 제대는 배장묘의 구분과 쉽지 않음. 우산하 992호묘 축조시기에 이르러서 제대는 진정하게 성숙했으며, 태왕릉에서 제대는 규모가 매우 크고, 오직 제대만이 나온다는 점에서 명확한 특징을 가지고 있음. 그런데 장군총에서 다시 배장묘와 제대가 같이 나오는데, 이러한 복고 현상은 연구할 가치가 있음. 최근 제대를 연접된 적석무덤으로 파악하고, 일제하 통구 보고서에 4-5기의 배총이 있었다는 보고와 관련하여 해석함.자연환경 2호배장묘(JYM0002A)는 1호 배장묘 서북측에 35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서남쪽으로 32m 떨어진 지점에 장군총이 있음.유물정보 철제 꺽쇠 1점, 철제 못 1점, 철제 편자 1점, 철제 허리띠고리(卡) 1점, 황유시유도기호잔편참고문헌 · 關野貞 外, 『朝鮮古蹟圖譜』, 1915 · 池內宏·梅原未治, 『通溝』 下: 満洲国通化省輯安県高句麗壁畫墳, 日滿文化協會, 1940 · 藤田亮策, 「通溝附近の古墳と高句麗の墓制」『朝鮮考古學硏究』 (再收錄), 高桐書院, 1948 · 蘇才, 「集安高句麗遺跡調査簡記」『吉林省文物工作通訊』, 1957 · 傅佳欣, 『集安高句麗王陵』, 文物出版社, 2004 · 孫仁杰·遲勇, 『集安高句麗墓葬』, 香港亞洲出版社, 2007

  • 리스트여닫기 우산하 황니강대묘(禹山下 黃泥崗大墓) 출토지 길림성 집안시 태왕진 과수촌 9조 (吉林省 集安市 太王鎮 果樹村 9組)연대 5세기 중엽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66길림성박물관, 집안현문관소(吉林省博物館, 集安縣文管所)통구고묘군 실측조사 당시에 JYM0030호묘로 편호함.1980길림성문물고고학연구소, 집안시문물보관소(吉林省文物考古學硏究所, 集安市文物保管所)1966년 조사 이후에 해당 고분 북측의 작은 길에서 기와를 발견한 것을 계기로 1980년대 고구려 왕릉 중점조사 대상에 포함됨. ‘黃泥崗大墓’로 명명됨.2003길림성문물고고학연구소, 집안시문물보관소(吉林省文物考古學硏究所, 集安市文物保管所)해당 고분의 상세한 조사와 함께 주변에 대해 간단히 밑바닥을 훑는 시굴조사(淸淤試掘)를 실시함.2005집안시박물관(集安市博物館)재조사 및 측량을 실시하고 고분 주변의 지대를 넓힘.구조특징 고분 편호의 변천을 보면, 『集安高句麗墓葬』(2007)에서는 1966년 조사 당시 JYM0030호묘로 편호하였으나 2005년 재조사 때에 JYM0036호묘로 다시 편호한 것으로 소개됨. 『洞溝古墓群-1997年調査測繪報告』(2002)에서는 JYM0030호묘는 대형계단석실묘, JYM0036호묘는 동실묘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1997년 조사 때에 황니강대묘는 JYM0030호묘로 편호되어 있었다고 판단됨. 『吉林集安高句麗墓葬報告集』(2009)에서는 1966년 조사 때에는 심하게 훼손되어 기록되지 않았으며, 2005년 재조사 때에 우산하고분군에 편입되어JYM0030으로 편호되었다가 정리된 것으로 소개됨. 고분은 대부분의 석재가 없어져서 남·동·서 3면은 제1단 계단의 바닥층 부분의 석재(石條)만, 북변은 한 개의 석재(石條)만이 남아있음. 다량의 석재 전체에 금속 쐐기 흔적이 남아 있음. 계단 내부에는 서·북 대부분은 이미 경작지로 간척되어 고분 안을 메운 돌은 동쪽부분에만 너비 2-4m의 한 줄이 남아 있는데 잔존높이 1.4m임. 일찍 파괴된 주요 원인은 고분에 바로 인접한 土口-靑錫 간의 도로 때문임. 이 도로는 이전 세기 초에 개설되어 1984년에 이르기까지 줄곧 집안과 외부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였음. 고분은 특대형계단적석석광묘(1997-JYM0030)에서 방형계단석실묘(2007년)로, 다시 계단적석묘(2009년)로 유형이 재보고되었음. 평면형태는 방형임. 고분의 규모는 1997년(JYM0030)에 길이 32m, 너비 26m, 높이 2m로 보고되었다가 2007년에 남쪽 잔존길이 30m, 동쪽 잔존길이는 27m, 서쪽 잔존길이 25m, 잔존높이 1.4m, 남변 방향 300°로 재보고됨. 계단 내부에는 황토가 낀 큰 산돌 및 소량의 강돌(河卵石)이 섞여 메워졌으며, 계단석 아래에는 기초가 만들어지지 않았음. 현존하는 계단석재 및 그 잔편은 남변의 간격이 가장 길고 석재가 가장 크며, 동변은 수량이 가장 많으며, 서변은 오직 4매만 남아 있으며, 북변은 모두 잔편이고 큰돌이 없음. 2003년 조사에 앞서 서·남 양측의 석재는 부분적으로 노출되었고 동측은 거의 모두 흙 속에 매립된 상태였음. 기초는 보이지 않고 계단 한 층만 보임. 석재의 표면은 정연하고, 정면은 호형으로 가공하였음. 남측에는 9매가 있는데 서에서 동으로 배열되었으며, 축선의 방위각은 130°이며, 정면은 서남이나 남쪽으로 약간 더 치우침. 남변의 석재는 비교적 크고, 재질은 담회색과 담분홍색이 대다수를 차지하며, 오직 서단의 1매만 황색의 英灰巖임. 석재의 규격은 균일하지 않으며, 길이와 너비의 차이도 비교적 크며, 두께 또한 고르지 않고 형태는 일반적으로 장방형로 제작되었고 대다수 6면이 가공을 거쳤으나 각각 부분적인 자연면이 남아 있음. 위치상 보면 양쪽 끝의 큰 돌은 원래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으나 기타 대다수는 이미 옮겨져 밖으로 튀어나옴. 인위적으로 돌을 쪼개고 자재를 구하여 이미 계단을 조성한 축조석이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으며 심하게 결실되었으며, 다행히 남은 것 역시 대다수 파손되어 있으며, 온전한 것은 거의 없음. 서측으로부터 첫 번째 돌은 담회색의 화강암으로 길이와 너비가 각기 2m이며, 방형을 띠고 있으며, 북측은 이미 절단되었는데 절단부분은 북면으로 기울어짐. 이 돌의 상반부는 한 층을 거두어가서 현재는 여러 곳에 쐐기 흔적이 남아 있으며 잔존 두께가 0.7m이며, 바깥 측면의 남면이 비교적 심하게 침식당하였으며, 서측면에는 수직평행의 가공 흔적이 남아 있음. 돌 아래에는 생토로 원래 자리는 움직이지 않았을 수 있으며 형태 및 크기를 보면 고분 서남 모서리돌로 추정됨. 서측으로부터 두 번째 돌은 담분홍색의 화강암임. 앞의 돌과의 거리는 3m이며, 크기는 길이 1.3m, 너비 1.2m, 두께 0.6m이며, 기본적으로 온전한 형태임. 해당 돌은 이미 밖으로 뒤집어져 바깥 측면은 아래로 향하며, 윗면과 바닥면은 모두 자연면이며, 윗면의 가장자리 부분에만 가공 흔적이 있으며, 바닥면에는 한부분이 없어지고, 자연면만이 남아 있음. 서쪽으로부터 세 번째 돌은 분홍색으로 길이 2.1m, 너비 0.6-1m, 두께 0.7m이며 앞의 돌과 3.5m의 간격임. 이 돌은 일찍부터 온전한 형태로 양끝은 손상되지 않았으며, 바깥 측면은 자연면으로 자연곡선이 남아 있으며, 頂面은 비교적 평평하게 가공되었으며 바깥 측면에는 너비 9㎝ 정도의 돌출된 능선이 남아 있음. 서쪽으로부터 네 번째 돌은 앞의 돌과 약 1m 떨어져 있으며, 담분홍색의 화강암이며 보존 상태는 양호함. 돌은 길이 3.6m, 너비 1.6m, 두께 0.76m이며 안측에는 큰 면적의 자연면이 남아 있으며, 양끝과 바깥 측면은 끌로 가공을 거쳤으나 끌로 파낸 흔적은 보이지 않음. 상면은 밖에 기댄 한쪽에 너비 10㎝의 돌출된 능선이 하나 있음. 서쪽으로부터 다섯 번째 돌은 네 번째 돌의 동쪽 1m 되는 곳에 있으며, 크기는 길이 1.8m, 너비 0.6m, 두께 0.45m임. 상면은 위로 향하며 바깥 측면은 이미 손상됨. 이 돌의 상면과 제4번째 돌의 바닥면은 고도가 서로 같으며, 하부는 흙속에 묻혀 있어 계단의 바닥층 받침석(墊石)일 가능성이 있음. 서쪽으로부터 여섯 번째 돌은 석질은 앞의 돌과 동일하며 모두 담분홍색의 화강암으로 앞의 돌과 0.6m 떨어져 있으며 위치가 옮겨져 삐뚤어진 방향을 향해 있음. 돌은 길이 1.5m, 너비 0.75m, 두께 0.6m이며 바깥 측면은 아래를 향하며 양끝은 훼손되지 않았으며, 頂面과 바닥면은 모두 이미 쪼개어 가져가서 훼손됨. 서쪽으로부터 일곱 번째 돌은 담회색 화강암으로 삐뚤어진 방향을 향해 있으며, 위치는 여섯 번째 돌에 비해 밖으로 튀어 나옴. 석재는 길이 2m, 너비 0.6m, 두께 0.7m이며 頂面은 밖을 향하며 가장자리 부분에는 너비 10㎝의 돌출된 능선이 있음. 놓인 위치로 볼 때 이 돌은 바닥층 축조석이 밖으로 드러난 것일 가능성이 있음. 서쪽으로부터 여덟 번째 돌은 유일한 영회암석으로 길이 3.7m, 너비 1.2m, 두께 0.8m이며, 석재는 가공되어 비교적 양호하며, 긴 변은 모두 비교적 둥글고 부드러운 능선을 가지고 있음. 해당 돌은 가지런히 놓여 있지 않아 밖이 높고 안이 낮은 형상을 띠고 있고 동단은 대체로 서단보다 높으며, 돌 아래에는 강자갈이 섞인 황토가 있음. 이 돌의 동단과 서남 모서리석 간의 거리는 26.7m이나 이 돌은 방형이 아니므로 각석이 아니라고 추정됨. 이 돌 아래의 자갈 섞인 황토는 높이를 맞추기 위해 일부러 메운 받침토(墊土層)일 가능성이 있음. 그 외 서쪽에서 두 번째 돌의 남쪽으로 1.3m 지점에는 좌우 양측에 각기 장방형돌이 있는데 1단 계단 석재와 서로 유사함. 두 돌은 대체로 남측의 축선과 평행하게 놓여 있어 옮겨진 계단 축조석으로 추정됨. 두 돌 가운데 서쪽의 돌은 외측면이 안을 향해 있으며, 석재는 길이 1.95m, 너비 및 두께는 각기 0.6m이며, 내측 한모서리에는 비교적 커다란 결실이 있으며, 평면은 사다리형(梯形)을 띠고 있음. 동측의 돌은 길이 1.6m, 너비 0.8m, 두께 0.7m이며, 외측면은 아래로 향하며, 가장자리에 너비 약 10㎝의 융기선이 있음. 이 돌은 회백색으로 풍화기층이며, 석질은 확연히 다른 것들과 다름. 네 번째 돌 외측에는 0.8m 지점에 네 번째 돌과 평행하게 장방형 석재가 놓여 있는데 길이 1.2m, 너비 0.45m, 두께 0.3m의 분홍색 화강암질이며, 그 상면의 가장자리에는 10㎝ 너비의 융기선이 있음. 또한 서쪽에서 세 번 째 돌에서 다섯 번째 돌 사이에는 묘 변과의 3-5m 범위 내에서 7개의 흩어진 석재를 발견하였는데 재질은 화강암과 회암 2종이며, 다수 온전하지 않으며, 조사 중에 전부 정리되지 않아 기술하지 않음. 서측에는 앞서 기술한 대석의 각석 외에 3개 돌 잔편이 있음. 남쪽에서 첫 번째 돌은 담회색 화강암으로 각석과 약 1m 떨어져 있으며 그 외측면은 각석의 서면과 직선을 이루는데 원래 위치인 듯함. 이 돌의 남반 부분은 쪼개져 버렸고 상면 역시 훼손되어 있으며, 북단면과 외측에는 정연하게 가공되어 있으나 가공흔적은 남아 있지 않음. 남은 길이 1.2m, 너비 1.15m, 두께 0.35-0.54m임. 이 돌의 서변과 각석의 외변을 따라 선이 연결되며 방위각은 220°로 측정되며, 남측 변과 90°를 딱 이룸. 남쪽에서 두 번째 돌은 오렌지색 화강암으로 묘 내에 치우쳐 위치하며, 세워져 있으며, 원래 겉 표면은 지금 정북쪽을 향해 돌아 있으며, 상면은 서쪽을 향해 있음. 석재는 길이 및 너비가 각기 약 1.2m, 두께 0.9m이며 가공은 비교적 가늘게 되었고 정연하나 가공흔적은 보이지 않으며, 외연에는 너비 7-10㎝의 융기선이 하나 있음. 남쪽에서 세 번째 돌은 두 번째 석재의 북쪽 약 6m 지점에 위치하며, 이미 파손됨. 옅은 분홍색 화강암으로 길이 0.8m, 너비 1.1.m, 두께 0.7m임. 이 돌은 이미 밀어 넘어뜨려져 옆으로 90° 돌아 외측면이 아래로 향하고 상면과 바닥이 남북 양측에 노출되었고, 북단에는 쐐기 흔적을 볼 수 있음. 동면에는 대략 20개의 장방형돌이 있으나 다수가 원래 위치가 아님. 형체는 비교적 큰 것 8개가 일렬을 이루고 있는데 대체로 남북으로 직선을 이루나 간격은 균일하지 않음. 그 가운데 남쪽에서 제4·5·6의 장방형돌은 두께가 모두 0.7m 정도이며, 제6·4의 석재에는 상면 외측에 융기선이 남아 있어 모두 1단 계단의 바닥석으로 추정됨. 제4·5·8(6의 오류인 듯) 석재의 외측 가장자리를 잘 맞추어 비교적 가지런하며 그 아래는 모두 생토이므로 위치 이동이 크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됨. 이 연결선의 방향과 서측 가장자리 방향이 서로 일치하고 이 선을 따라 남쪽을 향해 남측면과의 연장선이 서로 만나는데 대체로 현재 남측면의 길이는 약 2m를 넘고 바로 각석이 위치하고 있어야함. 이런 추측에 의하면 이 묘는 원래 한 변 길이가 28.5-29m일 가능성이 있음. 동면의 장방형돌은 모두 화강암으로 색은 옅은 분홍색이 다수이며, 회색인 것은 2개이며, 오렌지색은 3개임. 축선상에 형체가 비교적 큰 8개 중에 위치함. 남쪽에서 첫 번째 돌은 길이 1.8m, 너비 0.5m, 두께 0.8m이며 비교적 온전한 형태임. 그 위치는 비틀어져 있으며 외측면은 밖을 향하고, 겉에는 평행하게 파낸 흔적이 20여개가 있는데 석재 표면을 정연하게 할 때 남겨진 것으로 추정됨. 남쪽에서 두 번째 돌은 방향이 첫 번째 돌과 동일하게 놓여 있음. 길이 2.4m, 너비 0.6m, 두께 0.56m. 석재는 기본적으로 온전한 형태이며, 양단과 외측면 역시 가공할 때 평행하게 파낸 흔적이 남아 있음. 남쪽에서 세 번째 돌은 길이 2m, 너비 0.7m, 두께 0.8-1m. 안이 낮고 밖이 높게 놓여 있으며, 상부는 심하게 쪼개졌으나 양단은 아직 훼손되지 않음. 남쪽에서 네 번째 돌은 양단은 모두 손상되어 남은 길이 1.1m, 너비 0.6m, 두께 0.56m임. 밖으로 약간 기울어졌고, 외측 가장자리에는 너비 10㎝의 융기선이 있음. 남쪽에서 다섯 번째 돌은 길이 1.6m, 너비 1.2m, 두께 0.74m이며 보존이 기본적으로 온전히 보존된 상태임. 상면 외측에는 10㎝의 융기선이 있으며, 안정되게 놓여 있으며, 돌 아래는 황색의 생토로 원래 위치일 가능성이 있으며, 그 내측의 한 모서리는 원래 결여되어 있었으며, 자연 평면을 지니고 있었음. 남쪽에서 여섯 번째 돌은 다섯 번째 돌과 3.5m 거리이며, 석재는 길이 1.2m, 너비 0.6m, 두께 0.7m이며, 기울어진 채 놓여 있는데 북고남저로 인위적으로 비틀어져 옮겨진 것이 확실함. 두께를 보면 이 돌은 1단 계단의 바닥석으로 추정되며, 그 외측의 가장자리에는 너비 10㎝의 융기선이 있는데 다른 바닥석들과 서로 일치함. 남쪽에서 일곱 번째 돌은 장방형 돌로 길이 2.3m, 너비 0.9m이며, 그 북단은 약간 동으로 기울어져 있어 원래 위치에서 이동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남단은 이동이 크지 않음. 이 돌의 상면은 이미 쪼개져 두께가 0.6m 남아 있음. 남쪽에서 여덟 번째 돌은 길이 1.15m, 너비 0.8m, 두께 0.68m이며, 양단은 아직 훼손되지 않았으며, 외측면은 위로 비틀어졌으며 상면은 약간 묘 내를 향해 돌아 있음. 지금은 위를 향한 외측면은 정연하며, 가공 흔적이 평행하게 남아있음. 상면과 서로 만나는 측변은 이미 쪼개졌기 때문에 상면 가장자리에 돌출된 능선이 없었다고 단정하기 어려움. 석재의 두께를 추측해보면 이 돌은 제1단 계단의 바닥부 석재가 확실함. 그 외 동측면 네 번째 돌과 다섯 번째 돌 사이의 동변에는 흩어져 있는 계단 잔돌 6개가 남아 있음. 편북의 3개는 비교적 큰데 그 가운데 두 개는 상면 외연의 융기선이 보이며 두께가 하나는 0.3m, 다른 하나는 0.4m로 두 개의 규격은 분명함. 여섯 번째 돌 외측의 오렌지색 장방형돌은 길이 0.6m, 너비 0.3m, 두께 0.3m이며, 상면에는 7㎝ 너비의 융기선이 있으며, 다섯 번째 돌과의 사이에 편동에 위치한 두 돌 가운데 하나는 파내어 만든 융기선이 있는데 그 융기선은 너비 10㎝, 두께 0.38m로 두 개의 두께는 비슷하나 융기선 너비는 차이가 있음. 일곱 번째 장방형 돌의 북단 외측에는 길이 1.2m, 너비 0.5m, 두께 0.46m의 정연한 석재가 하나 붙어 있는데 분홍색 화강암으로 상층 또는 2단 계단의 축조석으로 추정됨. 동측 여덟 번째 돌의 북면의 외측에는 두 개의 분홍색 석재가 나란히 비스듬한 방향으로 놓여 있음. 내측에 치우친 것은 길이 2.8m, 너비 0.7m, 두께 0.3m이며, 외측에 치우친 것은 길이 0.5m, 두께 0.6m임. 외측면이 묘 내를 향해 뒤집혀져 상면은 아래를 향하고 있으며, 양단에는 너비 약 8㎝의 융기선이 보임. 황니강대묘 안팎에 남아있는 석재를 종합해보면, 석재의 가공방면에서는 가장자리 융기선의 유무로 나눌 수 있음. 상면 외측변에 융기선이 있는 것은 장군총과 태왕릉의 축조법에 비춰보면 계단 바닥층으로 추정됨. 그 작용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 상층석의 외장력을 방지하는데 유효하며 둘째, 들여쌓아 정연하고 외곽이 더욱 장관을 이룸. 상면에 융기선이 없는 보통의 석재는 모두 계단의 상부에 축조되었는데 이는 계단 상면을 정연하게 유지하는 것 이외에도 불필요한 작업이 감소될 수 있음. 이미 심각하게 파괴된 것을 제외하면 황니강대묘에는 융기선이 있는 석재의 이미 알려진 두께가 약 0.3-0.9m이며, 융기선이 없는 것은 역시 0.3-0.8m의 각종 차이가 있음. 전자는 대략 0.3, 0.4, 0.6, 0.7, 0.7 이상 등의 5종 규격, 후자는 0.3, 0.5, 0.6, 0.7, 0.7 이상 등의 5종 규격으로 나눌 수 있음. 만일 이것과 장군총 1단 계단 축조석이 4층이고 위로 점차 감소하여 3층인 방법과 동일하다면, 이 묘는 적어도 4단 계단, 또는 5단 계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됨. 한변 길이는 대체로 29m 이상으로 생각됨. 묘실구조는 증명되지 않았음. 고분 주위의 잔돌(碎石)과 진흙 속에서 니질의 기와편들이 발견되었으며, 북측의 작은 길에서는 회도 기와편이 채집됨. 기와는 수키와와 암키와 두 종류이고 색은 회색과 홍갈색 두 가지 색이며, 모두 잔편이고 大片은 드물게 보임. 그중 회색인 것은 대다수 수키와 잔편이고 안에 布文이 있으며, 표면은 문질러 광을 냈음. 홍갈색 기와는 가는 모래질로 전부 암키와이며 표면에는 가는 승문이 새겨져 있으며 두께는 1.5㎝ 정도임.역사적 의미 황니강대묘는 독자적으로 산 하나를 차지하고 있어 시야가 탁 트였고, 규모는 비교적 크며, 묘상에 기와가 사용되는 등 여러 방면에서 고구려 왕릉의 매장방식과 유사함. 황니강대묘는 장군총과 태왕릉 사이의 직선상에 위치하고, 두 능과의 거리가 멀지 않음. 따라서 묘주의 신분 지위가 특수하여 보통의 관리로 볼 수 없으며, 해당 고분이 대부분 왕릉의 규격을 사용하므로 적어도 왕족 고분으로 추정됨. 황니강 대묘는 한 변 길이가 30m에 가깝고, 계단은 적어도 4단에 이르고, 하층 계단석은 보편적으로 일정한 폭을 지닌 융기선이 만들어져 형식, 축조방식, 규모 등 모두 장군총의 축조방식과 유사한 점들이 있음. 그러나 사용된 석재가 비교적 조잡하고, 전부 같은 색의 화강암이 아니고 간혹 회암도 사용됨. 석재 규격은 획일적으로 정연하지 않으며, 가공 상태도 정교하고 짜임새가 있지는 않음. 그 밖에 이 고분의 주변에는 묘역의 鋪石이 보이지 않고, 호분석이 사용되지 않았으며 부속의 배총과 제대, 기타 유적현상이 없어 왕릉규격으로 보기에 충분하지 않음. 주목되는 점은 고분의 계단석 위의 표면 외연에 융기선이 제작되었는데 동일한 가공형식이 왕릉 중 천추묘, 태왕릉, 장군총 등 연대가 가장 늦은 소수의 몇 기에서만 보임. 즉 적석묘의 최고발전단계에 위치함. 각 계단석의 바닥층 장방형돌 전부는 융기 기법을 채용하였으며, 장군총에서 드물게 보임. 이런 추측에 따르면 황니강대묘 연대는 장군총과 유사하거나 전후 약간 차이가 있어 대략 5세기 중엽으로 추정됨.자연환경 황니강은 장군총과 광개토왕릉비 사이에 남북으로 비교적 길게 펼쳐진 작은 언덕으로, 그 남변의 가장 높은 곳에 고구려 대형 고분인 황니강대묘가 자리하고 있음. 고분의 주위는 탁 트였고 지형이 높고 시원함. 중심지리좌표는 동경 126˚11’18”, 북위 41˚8’38”, 해발 214m임. 黄泥岗은 集安市城 동쪽 果樹村 남쪽의 낮은 언덕으로 太王鎭 果樹村 9組에 속함. 黄泥岗은 북으로는 龍山과 접하며, 남으로는 압록강을 바라보며, 장군총이 자리한 용산 기슭과 개울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으며, 서면은 평활한 통구평지임. 고분 동북으로는 장군총과 약 1.2㎞ 떨어져 있으며, 서남으로는 광개토왕릉비와 500m가 채 안되는 거리이며, 동남으로 600m에는 임강묘가 있으며, 이 밖에 부근에는 다른 고분과 유적이 없음.유물정보 板瓦片 2점 등참고문헌 · 孫仁杰·遲勇, 『集安高句麗墓葬』, 香港亞洲出版社, 2007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黃泥崗大墓調査報告」『吉林集安高句麗墓葬報告集』, 科學出版社, 2009

  • 리스트여닫기 우산하 임강묘(禹山下 臨江墓) 출토지 길림성 집안시 태왕진 (吉林省 集安市 太王鎮)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37 池內宏, 黑田源次, 梅原末治, 三上次男이 참여하여 집안의 도성 및 중요한 고분들을 조사함.1966 통구고분군의 실측조사 때 우산묘구 43호묘로 편호되었고, 간단히 JYM0043으로 기재됨.1983 1983년 『吉林省志·文物志』를 편찬할 때 조사가 진행되었고, 그 결과는 『集安縣文物志』에 기록함.2003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4~6월에 걸쳐 柳嵐(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吳鐵軍(農安懸文物管理所), 邵春華(吉林省博物館), 聶勇, 王志剛(이상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이 참여하여, 9개의 탐색갱을 넣어 무덤 주위를 조사함. 분구의 부분 단면 조사를 진행하였고, 무덤 동쪽의 제대 유적을 정리하였으며, 무덤 조사 과정 중에 50여기의 金器, 銅器, 鐵器, 陶器, 瓦片 등을 출토함.1909-1910 關野貞, 谷井濟一, 栗山俊一이 조사함.2004-2005 장복유, 손인걸, 지용이 조사함.구조특징 20세기 초에는 묘가 압록강에 인접해 있기 때문에 임강묘로 불리었으나 1966년 조사에서 우산묘구 43호묘(JYM0043)으로 편호됨. 대형계단적석광실묘로 주변에 깨진 돌이 흩어져 내림. 외형은 圓角方丘형태로 표면에는 두께 약 10㎝의 腐植土가 덮혀 있음. 일찍이 도굴을 당해 방치된 돌이 무덤의 서중부 바깥으로 6여m 쌓여 있음. 기본적으로 가공된 큰 장대석은 없고, 규칙적인 무덤 기초석도 발견되지 않음. 무덤 정상부는 비교적 평평하고, 형태는 대체적으로 길이 20m, 너비 18m의 장방형임. 중간에 있는 큰 구덩이는 길이 17m, 너비 10m, 깊이 2m이고, 기본적으로 묘 정상부 전체에 해당됨. 동남부에는 근대에 건설된 전쟁설비인 엄폐호가 아직 있고, 묘실은 이미 파괴됨. 무덤의 각 변과 계단은 모두 비교적 큰 산자갈로 축조하였고, 석재는 대부분 가공하지 않아 깨진 면을 보유하고 있고, 불규칙적으로 쌓음. 무덤의 범위를 정한 후, 비교적 큰 산돌을 이용하여 단을 축조하고, 단 내부를 약간 작은 깨진 돌로 채워 평평하게 함. 그 위에 안쪽으로 0.4~0.66m 들어가서 2번째 계단을 축조함. 계단의 가장자리의 석재는 일반적으로 길이가 0.5~0.9m, 너비 0.2~0.4m 사이이며, 두께는 0.30.35m이고, 내부를 채운 돌은 길이·너비·두께는 약 0.2m임. 제2단 계단은 2~4층으로 되어 있고, 그 높이는 0.3~0.4m임. 평평한 큰 산돌을 이용해서 둘레를 쌓고 작은 산돌로 안을 채우는 방법으로 축조하였으며, 축조 시 산돌의 자연면을 이용하여 밖으로 드러나는 면이 가지런하도록 함. 계단 외측에 깨진 산돌과 작은 강자갈을 평평하게 깔았고, 그 후에 다시 안쪽으로 일정한 거리만큼 들어가 제 3단 계단을 축조함. 이러한 형태로 차례대로 위쪽으로 분구 위까지 쌓았고, 마지막으로 분구 위에 광실을 축조함. 산의 지세가 같지 않아서 무덤의 4면에 축조된 계단 수는 같지 않음. 동남모서리와 서남모서리는 21~23층으로 판단되고, 지세가 상대적으로 낮은 북면은 30~33층으로 추정됨. 즉 4면의 계단 높이와 너비가 같지 않고, 방향 또한 서로 같지 않으며, 어떤 것은 굽은 정도가 비교적 커서 계단이 갈라지는 현상이 보편적으로 보임. 서북모서리부분의 계단 폭 차가 비교적 크고, 가운데 부분은 비교적 폭이 좁아서 계단 사이의 거리는 0.25~0.3m인데, 상부의 어떤 것은 간격이 0.6m에 달하기도 함. 33층 계단 중, 상부 8층 계단 축조는 상대적으로 정연하고, 계단은 기본적으로 평행하며, 사이 거리는 0.4~0.6m임. 이웃한 계단의 높이는 약 0.35m이고, 모퉁이는 둥그렇게 굽어져 있음. 가운데 10층 계단은 대부분 만곡이 크고, 그 사이의 거리와 너비는 같지 않으며, 높이 차는 0.5m이고, 안으로 들어간 폭은 균등함. 표면의 축조 또한 평평하고 정연함. 서쪽 면은 갈라짐이 비교적 많고, 계단의 높이는 비교적 크며, 모퉁이는 둔각이 나타남. 구덩이 내외 모두 정연한 장대석 혹은 가공된 큰 판석이 발견되지 않았으며, 묘실은 구조가 간단하고 천정석이 없는 광실로 추측됨. 묘 정상에는 대량의 수키와, 암키와, 소량의 등성마루기와(脊瓦) 잔편이 흩어져 있고, 봉석 위에도 비교적 많은 기와 잔편 등이 발견되는 등 정상부에 상대적으로 집중되어 있음. 전체 수키와잔편은 2000여편이고, 암키와잔편은 3000여편이며, 등성마루기와는 26편임. 모두 니질. 색깔에는 갈색과 회색이 있음. 갈색기와는 수량이 비교적 적고, 火候(불의 세기와 시간)가 비교적 낮음. 형태는 두껍고 무거움. 암키와는 형체가 대부분 두껍고 무거움. 대부분 수직방향으로 승문이 펼쳐져 있음. 승문은 비교적 굵음. 최대잔편의 너비는 36㎝, 두께는 2.5~4㎝이다. 수키와는 6건이 출토됨. 목(頸)과 어깨(肩)가 없음. 내려다보면 梯形으로 만들어졌음. 瓦身은 비교적 높게 융기. 수키와와 등성마루기와에는 문양이 없음. 회색기와는 수량이 가장 많고, 火候가 비교적 높음. 형태는 비교적 가볍고 얇으나 단단함. 기와의 두께는 일반적으로 1.5~2㎝사이임. 암키와와 수키와가 발견되고 등성마루기와는 아직 발견되지 않음. 암키와에는 모두 굵은 승문이 있음. 대부분 곧은(똑바로 향해 있는) 4~5줄의 凹溝文이 있는데, 배면에 균등하게 분포, 溝의 너비는 1㎝, 깊이 0.3㎝, 溝文 간의 거리는 10~15㎝임. 두 건의 단부(瓦頭)에서는 방격문이 찍혀 있음. 수키와에는 무늬가 없음. 瓦胎의 두께는 같지 않음. 단부(瓦頭)에는 대부분 어깨(肩)가 起하고 舌이 있음(瓦斗多起肩有舌). 瓦尾 중 일부에서는 기울어진 淺槽가 새겨져 있고, 肩과 舌에 따라 A, B, C형으로 나눌 수 있음. A형기와는 瓦肩이 비교적 평평하고 瓦舌의 길이가 같지 않으며 표면에 壓抹된 凹槽가 있음. B형은 와견이 돌기되어 있고, 와설의 길이가 같지 않으며, 단부(瓦頭) 沿面 일부에서는 抹出된 1道의 凹槽가 있음. C형은 와신의 돌기가 높지 않고, 舌面은 비교적 평평하며, 沿面은 둥글고 미끄러움. 상관유적으로 제대가 있음. 探溝와 제대에서 출토된 유물은 단지, 陶餠, 철촉, 철정, 鐵鋦釘 등 생활용품이 주됨.역사적 의미 임강묘의 규모는 길이와 너비가 모두 70여m의 비교적 큰 고분으로 강과 인접한 산 정상에 홀로 자리 잡고 있고, 탁월한 풍모가 드러남. 묘위에는 기와를 사용하였고, 제대가 있음. 제사에는 금기와 車具가 있는데, 그 신분 지위에 대한 존경이 보이므로, 임강묘는 고구려 왕릉임. 임강묘의 축조연대 문제를 보면, 임강묘의 계단은 낮고, 구조는 단출하며, 석재는 모두 산돌로 기본적으로 가공된 장대석이나 괴석은 보이지 않고, 비교적 원시적인 계단의 특징을 보여줌. 고구려 초기의 階墻積石墓에서 이러한 축조방법이 비교적 많이 채용됨. 계장의 축조로 무덤을 더욱 높게 쌓을 수 있는데 임강묘도 이와 같은 것으로 생각됨. 계단을 축조한 주요 목적은 자갈을 충분한 높이로 쌓기 위한 것임. 자갈은 신축성, 임의성이 매우 크기 때문에 弧曲, 分支, 合幷 모두 가능하므로, 높이 쌓고,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내부의 돌도 될 수 있으면 평평하게 배열해야 함. 때문에 외관은 한층 한층 위로 향한 계단 모양이 됨. 임강묘는 계장에서 계단으로 발전하는 과도기의 모습을 보여줌. 따라서 고구려 계단적석무덤 중 연대가 비교적 이름. 기와와 등성마루기와는 모두 묘 정상에서 보이는데, 무덤의 경사를 따라 쌓아 놓은 수키와와 암키와들은 원래 자리를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므로 기와는 봉석 뒷면에 깔려졌던 것으로 추정됨. 등성마루기와는 맨 꼭대기에 쌓여 있는데, 상징성 묘상건물에 속함. 황갈색기와와 등성마루기와는 임강묘의 최초 건축에 사용된 와당이라고 할 수 있음. 회색와당의 소성온도는 높고, 수량은 많은데, 보통 전자의 제조시점보다 늦고, 사용부분 또한 다름. 묘에서 출토된 승문기와는 고구려기와의 초기 형태로 후대에 일반적으로 유행했던 高肩·花沿기와와 같지 않음. 묘의 승문암키와와 수키와는 대부분 세로로 향한 溝文이 펼쳐져 있는데, 이것은 기타 왕릉에서 보이는 것과 다름. 회백색의 단지와 가는 모래 혼입된 회색 陶甁은 모두 초기 유물에 속하는 것임. 묘 동쪽에 있는 제단은 사각형이며 묘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으며 거의 같은 크기임. 그것은 고구려 왕릉에서 확인되는 주 특징 중 하나임. 제단에서 출토된 청동제 수레바퀴 비녀장식(車轄), 金圈, 가락바퀴, 도기 뚜껑, 短頸단지, 두 귀 달린 단지(雙耳罐), 마노구슬, 石管, 동제 팔찌, 금동제 장식편, 마구 등은 응당 제사에 쓰이는 물품임. 이상의 분석 결과 임강묘는 고구려 초기 왕릉이고, 연대의 하한은 3세기 말을 넘지 않음. 장복유, 손인걸, 지용 등은 龍山을 고구려 10대왕인 산상왕이 묻힌 ‘山上’으로 추정하면서 임강묘의 피장자를 산상왕으로 추정함.자연환경 집안시 동쪽 끝에 위치함. 중심지리좌표는 126˚ 13’ 4.65”, 북위 41˚ 8’ 39.4”임. 용산 서남쪽 기슭의 작은 산 위에 위치하는데, 거의 산정상부 전체를 독차지하고 있음. 무덤이 위치한 곳은 청동기시대 유적지로, 일찍이 砂陶片과 磨製石器가 발견되었고, 2003년에 묘 동쪽에서 주거지를 조사했음. 묘 서측 산비탈 중부에 고구려시기의 소형적석묘가 여러 기 있음. 서쪽으로 약 4㎞ 떨어진 지점에 市가 있고, 광개토왕비와 460m 떨어져 있고, 태왕릉은 900m 떨어져 있음. 남쪽으로 약 800m 거리에 압록강이 흐르고, 북측의 산 아래는 太王鎭 果樹村 九組임. 동쪽으로는 구릉이 계속되고, 남쪽은 斷崖이며, 산기슭 아래로는 집안에서 靑石에 이르는 도로와 조선 만포시와 통하는 中朝철로가 있음.유물정보 金圈 1점, 금동제 鏤花片장식 1점, 청동제 수레바퀴 비녀장 1점, 청동제 대롱모양 장식(管) 1점, 청동제 팔찌(鐲) 1점, 철촉 1점, 철제 꺾쇠 1점, 철제 못 1점, 철제 칼 1점, 철제 錐 1점, 철제 허리띠고리 7점, 철제 재갈 1점, 철제 편자 1점, 철제 꺽쇠 1점, 瑪瑙구슬 38매, 호 1점, 단지 1점, 병 1점, 배부른 단지(陶罐) 2점, 토기 뚜껑 1점, 가락바퀴 1점, 수키와 2000여편, 암키와 3000여편, 등성마루기와 26편,참고문헌 · 傅佳欣, 『集安高句麗王陵』, 文物出版社, 2004 · 孫仁杰·遲勇, 『集安高句麗墓葬』, 香港亞洲出版社, 2007 · 張福有·孫仁杰·遲勇, 「高句麗王陵通考要報」『東北史地』 2007-4, 2007

  • 우산하 0044호묘(禹山下 0044號墓)

  • 리스트여닫기 우산하 0068호묘(禹山下 0068號墓) 출토지 길림성 집안시 태왕진 (吉林省 集安市 太王鎮)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75~1976집안현문물보관소(集安縣文物保管所)1975년 8월 상순부터 1976년까지 조사함.구조특징 중형의 방단적석묘로 묘 방향은 336˚이고, 계단이 있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려움. 묘 바닥은 황토층으로 다졌으며, 다져진 흙 위에 큰 돌로 방단을 축조함. 파괴가 심하여 계단의 유무는 확인할 수 없으며, 묘실 역시 파괴됨.역사적 의미 출토된 동기는 동한~위진남북조시기에 보편적으로 사용했던 것과 같음. 동제 대야는 서진대의 湖北蔡甸1號墓에서 출토된 동제 대야와 유사함. 이로 볼 때 이 동기는 고구려의 산품이 아님. 동기의 품격은 칠성산 96호묘와 완전히 같음. 칠성산 96호묘가 4세기초~5세기 중엽으로 파악되므로, 축조연대는 이와 비슷할 것으로 추정됨.자연환경 우산묘구에 위치함.유물정보 동제 시루 1점, 동제 솥(釜) 1점, 동제 세발 달린 솥(鼎) 1점, 동제 대야 1점참고문헌 · 張雪巖, 「集安縣兩座高句麗積石墓的清理」『考古』 1979-1, 1979

  • 우산하 0234호묘(禹山下 0234號墓)

  • 우산하 0249호묘(禹山下 0249號墓)

  • 리스트여닫기 우산하 0324호묘(禹山下 0324號墓) 출토지 길림성 집안시 태왕진 (吉林省 集安市 太王鎮)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4, 1985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집안시문물보관소(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市文物保管所)林至德, 耿鐵華, 王洪峰, 柳嵐, 張雪巖, 遲龍, 孫仁杰이 참여한 集錫도로 건설로 인한 구제 발굴임. 제1차 조사는 1984년 6월 20일~1984년 11월 20일에 걸쳐 이루어졌고, 제2차 조사는 1985년 5월 15일~ 1985년 8월 15일에 걸쳐 이루어짐.집석 도로는 집안에서 통화에 이르는 철로선의 북측 약 50m에 위치하며, 서에서 동쪽으로 우산고분군을 관통하여 우산 고분군의 중간지대에 위치함. 발굴 범위는 동서 길이 2,500m, 남북 너비 40m임(우산하 고분군 757호묘의 그림 1 참조). 발굴한 적석총은 북에서 남쪽으로 연접하여 배열된 적석총의 가장 말단에 위치하며, 봉토분은 배열이 불분명하고 적석총 부근에 있음. 발굴은 우산 고분군을 서에서 동으로 하는 가로방향으로 진행되었고, 신중국 성립 이후 통구 고분군 최초의 비교적 대규모 발굴 작업이었음. 발굴 작업은 날씨로 인하여 두 시기로 나누어 진행함.제1차 조사에서는 89기의 고분을 발굴조사하여 적석총 28기, 봉토분 61기를 발견하였고, 출토유물은 700여건임. 제2차 조사에서는 24기의 고분을 발굴하였는데, 적석총10기, 토석혼축묘 1기, 석관묘 1기, 봉토분 12기이고, 출토 유물은 200여건임. 두 차례 조사에서 총 113기의 고분을 발굴하였는데 석관묘 1기, 적석총 38기, 봉토분 73기, 토석혼축묘 1기, 출토 유물은 931건임. 발굴된 113기 고분은 대다수 이른 시기부터 파괴와 도굴을 당하여 형식이 확실치 않은 것도 있음. 발굴한 고분중 111기는 고구려 고분임.구조특징 단실묘로 묘도가 한쪽으로 치우친 刀形 평면임. 묘실 평면은 장방형이며, 장축 방향은 213˚임. 묘실 축조는 비교적 가지런하며, 네 벽은 장대석 3층으로 되어 있음. 묘도는 묘실 남벽의 서측에 위치하는데, 규모는 길이 2.5m, 너비 1.9m, 높이 1m임. 천정은 모줄임(抹角式) 구조로, 천정에는 두 개의 모줄임돌(抹角石)이 있으며, 그 위에는 다시 석판을 덮음. 묘실 바닥은 자연석으로 깔았으며 지표보다 0.3m 낮음. 묘실 내에 인골은 잔존하고있으나 심각하게 썩어 이미 葬式과 개체가 분명치 않으며, 묘실 중앙에서 서쪽으로 치우쳐 회색토기(灰陶鉢) 하나가 출토됨.내부규모 및 특징 묘실 길이 2m, 너비 1.9m, 높이 1.4m역사적 의미 봉토분 다수는 산비탈을 따라 수직 배열되어 있는 적석총의 말단이나 적석총 사이에 위치함. 분포상 적석총으로 무덤의 배열 순서는 불명확함. 따라서 적석총보다 늦게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우산하 324호분의 연대를 판단할 근거는 확실하지 않음.자연환경 우산하 고분은 집안시구 북측에 위치하는데 大禹山 남쪽 기슭의동서 길이3.5㎞, 남북 너비 1㎞의 좁고 긴 남향의 경사지에 자리하고 있음. 우산하 고분군의 분포 범위는 우산 남쪽 비탈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상하 방향의 배열을 하고있음. 북면 산허리에 기대어 적석총이 절대 다수를 점하고 있으며, 남면 완만한 비탈 지대에 기대어 주로 봉토분이 들어서 있으며, 중간에는 적석총과 봉토분이 서로 뒤섞여 혼잡함.유물정보 발형토기(陶鉢) 1점참고문헌 · 吉林省博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3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文物保管所, 「集安洞溝古墳群禹山墓區集錫公路墓葬發掘」『高句麗硏究文集』, 延邊大學出版社, 1993 · 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 『洞溝古墓群: 1997年調查測繪報告』, 科學出版社, 2002 · 孫仁杰·遲勇, 『集安高句麗墓葬』, 香港亞洲出版社, 2007

  • 리스트여닫기 우산하 0326호묘(禹山下 0326號墓) 출토지 길림성 집안시 태왕진 (吉林省 集安市 太王鎮)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4, 1985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집안시문물보관소(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市文物保管所)林至德, 耿鐵華, 王洪峰, 柳嵐, 張雪巖, 遲龍, 孫仁杰이 참여한 集錫도로 건설로 인한 구제 발굴임. 제1차 조사는 1984년 6월 20일~1984년 11월 20일에 걸쳐 이루어졌고, 제2차 조사는 1985년 5월 15일~1985년 8월 15일에 걸쳐 이루어짐.집석 도로는 집안에서 통화에 이르는 철로선의 북측 약 50m에 위치하며, 서에서 동쪽으로 우산고분군을 관통하여 우산 고분군의 중간지대에 위치함. 발굴 범위는 동서 길이 2,500m, 남북 너비 40m임(우산하 고분군 757호묘의 그림 1 참조). 발굴한 적석총은 북에서 남쪽으로 연접하여 배열된 적석총의 가장 말단에 위치하며, 봉토분은 배열이 불분명하고 적석총 부근에 있음. 발굴은 우산 고분군을 서에서 동으로 하는 가로방향으로 진행되었고, 신중국 성립 이후 통구 고분군 최초의 비교적 대규모 발굴 작업이었음. 발굴 작업은 날씨로 인하여 두 시기로 나누어 진행함.제1차 조사에서는 89기의 고분을 발굴조사하여 적석총 28기, 봉토분 61기를 발견하였고, 출토유물은 700여건임. 제2차 조사에서는 24기의 고분을 발굴하였는데, 적석총10기, 토석혼축묘 1기, 석관묘 1기, 봉토분 12기이고, 출토 유물은 200여건임. 두 차례 조사에서 총 113기의 고분을 발굴하였는데 석관묘 1기, 적석총 38기, 봉토분 73기, 토석혼축묘 1기, 출토 유물은 931건임. 발굴된 113기 고분은 대다수 이른 시기부터 파괴와 도굴을 당하여 형식이 확실치 않은 것도 있음. 발굴한 고분중 111기는 고구려 고분임.구조특징 고분은 이미 파괴되었고, 천정돌은 소실됨. 단실묘로 중앙 연도는 鏟形평면임. 묘실 평면은 長方鏟形이며, 장축 방향은 160˚임. 묘실 네 벽은 대형 석재로 축조하였고, 위로 갈수록 줄여 쌓기함. 묘도는 묘실 남벽 중앙에 위치함. 천정은 평행고임식 구조로 천정돌은 소실되었고, 벽 상부에는 1층의 평행고임만 잔존함. 묘실 바닥은 자연석으로 평평하게 깔았으며, 대략 지표보다 낮음. 묘실 남부에서 서쪽으로 치우쳐 니질의 황갈색 단지 1건과 회색 단지 1건이 출토됨.내부규모 및 특징 묘실 길이 2.5m, 너비 1.8m, 높이 1.2m 묘도 길이 1m, 너비 0.5m, 높이 0.5m역사적 의미 봉토분 다수는 산비탈을 따라 수직 배열되어 있는 적석총의 말단이나 적석총 사이에 위치함. 분포상 적석총으로 무덤의 배열 순서는 불명확함. 따라서적석총보다 늦게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우산하 326호분의 연대를 판단할 수 있는근거는 확실하지 않으나, 5세기 이후로 비정됨.자연환경 우산하 고분은 집안시구 북측에 위치하는데 大禹山 남쪽 기슭의 동서 길이 3.5㎞, 남북 너비 1㎞의 좁고 긴 남향의 경사지에 자리하고 있음. 우산하 고분군의 분포 범위는 우산 남쪽 비탈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상하 방향의 배열을 하고 있음. 북면 산허리에 기대어 적석총이 절대 다수를 점하고 있으며, 남면 완만한 비탈 지대에 기대어 주로 봉토분이 들어서 있으며, 중간에는 적석총과 봉토분이 서로 뒤섞여 혼잡함.유물정보 전연호(展沿壺) 1점, 통형관(筒形罐) 1점참고문헌 · 吉林省博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3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文物保管所, 「集安洞溝古墳群禹山墓區集錫公路墓葬發掘」『高句麗硏究文集』, 延邊大學出版社, 1993 · 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 『洞溝古墓群: 1997年調查測繪報告』, 科學出版社, 2002 · 孫仁杰·遲勇, 『集安高句麗墓葬』, 香港亞洲出版社, 2007

  • 우산하 0328호묘(禹山下 0328號墓)

  • 우산하 0385호묘(禹山下 0385號墓)

  • 우산하 각저묘(禹山下 角觝墓)

  • 우산하 무용묘(禹山下 舞踊墓)

  • 우산하 0537호묘(禹山下 0537號墓)

  • 리스트여닫기 태왕릉(太王陵) 출토지 길림성 집안시 태왕향 (吉林省 集安市 太王鄉)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12 집안의 산성자산성(환도산성) 등의 고구려 유적들을 조사 시 태왕릉도 함께 조사鳥居龍藏가 참여함.1913 關野貞, 今西龍이 참여함. 1915년 『朝鮮古蹟圖譜』에 태왕릉 사진이 수록되었고, 1939년 『通溝』(上卷)에 태왕릉 실측도가 수록됨.1935 池內宏, 梅原末治, 黑田源次, 三上次男가 참여함.1938년 『通溝』 보고서 출간하였는데, 국내성과 환도산성, 광개토왕비, 장군총, 태왕릉, 천추총 및 오회분, 무용총, 각저총, 삼실총, 사신총, 모두루총과 환문총 등 집안의 도성 및 중요한 고분들의 조사 내용이 기록함.1935 關野貞, 三宅俊成, 伊藤伊八이 참여하여 집안 일대의 고구려 유적에 대한 조사를 실시함.三宅俊成는 『東北亞考古硏究』에 당시 조사 성과를 보고하고, 關野貞은 그동안의 고구려 벽화고분의 조사 내용을 종합하여 1941년에 『朝鮮の建築と藝術』을 발간함.1940 1940년 일제 고적조사 때 藤田亮策이 참여하여 장군총과 태왕릉 등의 대형 적석총 주변을 조사함.1966길림성박물관, 집안현문물보관소(吉林省博物館, 集安縣文物保管所)통구고분군 조사를 진행하면서 우산묘구 제541호묘(JYM0541)로 편호함.1990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집안현문물보관소(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縣文物保管所)方起東(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邢頤(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馬建華(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林至德(집안시문물보관소), 孫仁杰(집안시문물보관소), 遲龍(집안시문물보관소)이 참여함.고분 위의 이른 시기 도굴 구덩이와 묘실 조사 및 묘실과 석곽의 보수 작업을 진행함.2003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집안시문물보관소(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市文物保管所)4월 28일 ~ 7월 31일에 걸쳐 王洪峰(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邵春華(길림성박물관), 王志剛(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遲勇(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谷芃(백산시문물관리위원회판공실), 夏宏宇(백성시박물관), 邢春光(농안현문물보호연구소), 蔣剛(길림대학문학원 박사연구생), 趙明星(길림대학문학원 석사연구생)이 참여하여 고분 아래로 떨어진 돌과 계단과 도굴 구덩이, 묘역에 대해 부분적으로 발굴 조사함. 고분 주변의 광범위 陵園 유적 확인을 위한 탐사였음.태왕릉 계단 구조는 고분 아래로 떨어진 돌과 분구 위의 쌓인 흙을 발굴하는 동시에 계단상의 封石을 절개하여 단면 조사함.발굴조사가 진행되던 당시 태왕릉의 떨어진 돌과 떨어져 내린 돌과 계단을 배수 시설과 능원유적의 탐사가 진행됨.폭 1m의 탐색갱을 고분 주위에 넣어 수직과 수평으로 각각의 긴 탐색갱을 파고 폭넓게 탐사를 시작한 후에 목표한 유적을 찾아내어 광범위한 발굴을 재차 진행하는 방식을 취함.19세기 淸의 봉금조치 해제 이후 光緖 初年에 광개토왕릉비의 탁본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인근에 자리한 태왕릉이 주목됨.1880년(光緖 6년)에 奉天軍 糧署의 王知修가 集安에서 가서 고찰한 후에 1895년(光緖 21년) 『高句麗永樂太王古碑歌考』 저술하였는데, 벽돌(磚)에 예서로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가 쓰여 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음. 이후 연구자들은 碑와 명문 전돌로 인해 태왕릉으로 칭함.구조특징 1913년(일제시대) 발굴조사에 나선 關野貞이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란 명문전돌에 근거해 ‘태왕릉’이라는 명칭을 부여함. 1966년에 우산묘구 제541호묘(JYM0541)로 편호되었으나, 여전히 태왕릉이라 칭해짐. 일제시기 현황을 보면, (1) 1913년 조사 : 關野貞(그림 3) 동강 서쪽 土口子山에서 서남쪽으로 길게 펼쳐진 고지대 끝에 위치. 장군총을 능가하는 커다란 적석총으로 조사 당시에 붕괴되어 大石堆가 없는 석곽의 일부 및 그 둘레 모서리에 해당하는 곳에 나란히 커다란 버팀돌이 남아 있으며, 그 둘레의 전면 길이 약 200尺(≒60.6m), 좌측면 길이 약 202尺(≒61.2m)임. 석곽 천정석 정상까지의 높이는 당시 지반에서 약 55척(≒16.6m)임. 원래는 아마도 장군총과 같이 바깥쪽 계단이 만들어졌는데 처음에 만들어진 계단은 7층으로 추정됨[당시 3단 계단정도만 확인가능. 이런 현상은 1930년대까지 확인가능]. 버팀돌(분구지탱석, 호분석)은 각 면에 5개가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거대한 석재를 사용함. 남면 서쪽 모서리의 석재는 너비 5.8尺(≒1.7m), 길이 19.5尺(≒5.9m). 묘실의 남면에 있는 연도는 모두 파괴되어 있는데 묘실 너비는 동서 9.3尺(≒2.8m)이고 남북 10.44尺(≒3.1m)이며, 천정으로부터 45尺(≒13.6m) 지점까지 매몰에 의해 묘실의 높이는 명확치 않지만 천정은 1매의 대석으로 덮여 있음. 천정석의 크기는 동서 지름 15척(≒4.5m), 두께 2.65척(≒0.8m)임.[1935년 梅原末治의 조사에 의해 연도는 서면에 있는 것으로 정정됨] 묘실의 사면에는 내벽면에서 약 16척(≒4.8m) 떨어져 방형으로 석회암을 높이 쌓아 축조된 흔적이 있는데 묘실의 外護를 목적으로 한 것임. 석퇴 사이에서 다수의 벽돌과 기와편을 수습했는데, 벽돌에서는 모두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란 명문이 양각되어 있음. 이 때문에 이 고분은 태왕릉이란 명칭을 얻게 됨.(2) 1935년 조사 : 梅原末治 태왕릉의 평면은 방형을 이루고 있음.(그림 4) 기단 바닥의 네 둘레는 대략 방위선과 일치함. 각 변의 길이 212尺(≒64.2m), 장군총의 기단 바닥이 대략 100尺(≒30m)이므로 면적은 장군총의 4배 이상을 차지하고 있음. 기단에 거대한 자연석을 기대어 놓았는데, 가장 큰 것이 높이 19尺(≒5.7m)임. 남쪽에는 5개, 동·서 양면에는 각기 4개, 북쪽에는 1개만이 남아 있는데 본래는 각 변에 5개씩 있었던 것으로 추정됨. 방단은 기단 위의 1壇만이 半 파괴된 상태로 남아 있음. 기단석은 6층으로 쌓았는데 높이 10尺(≒3.0m)에 이르고 있음. 위로 올라감에 따라 석재의 높이는 점차 감소하며, 아랫돌은 모두 홈을 파내어 윗돌과 서로 맞물리게 하여 쌓아 올렸으며, 각 돌의 바깥 면은 둥그런 맛이 나도록 함.(그림 4) 방단은 붕괴된 정도가 특히 심해 비교적 작은 강돌과 할석이 겹겹이 퇴적되어 있음. 각 모서리에는 다듬은 돌이 남아 있는 것도 극히 적어 겨우 제2단 및 제3단의 흔적이 남아 있을 뿐임. 고분의 상부에는 석실 천정석이 주위를 둘러쌓는 壇 모양의 돌이 보이지만 이것은 제3단과의 사이에 몇 개의 방형 단이 있었다는 점이 아직 명확하지 않음. 기단 바닥에서 석실의 천정석에 이르는 높이는 44.5尺(≒13.4m)을 넘지 않으므로 이것이 장군총과 커다란 차이가 없다는 것을 주목해볼만함. 제2단 이상의 각 단의 높이는 낮은데 그 정상부로 향하면서 감소율도 커지기 때문임. 묘실 천정석은 1매의 화강암으로 동서 길이 14尺(≒4.2m), 남북 길이 18尺(≒5.4m)임. 겹겹이 쌓인 할석과 강돌의 퇴적 속에서 수평적 위치를 유지하며 그 표면이 노출되어 있음. 묘실 천정석의 주위에서는 천정석 상면의 높이가 동일한 방단 모양의 석축이 보이는데 한 변의 길이 36.5尺(≒11.0m)임. 북면에서는 벽의 높이가 5尺(≒1.5m). 돌의 축조 방식은 산성자산성 등의 성벽에서 보이는데 마치 벽돌 쌓는 방식으로 이것은 본래 태왕릉의 일부를 만드는 구축이었는지는 의문임. 천정석은 본래 위치를 지키고 있으며 어떤 이동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음. 그 아래에는 반은 퇴적석이 매몰된 석실이 있는데 안에는 상부의 동서 너비 9.5尺(≒2.8m), 남북 너비 10尺(≒3.0m) 정도임. 남벽의 상부는 훼손되어 현재 출입이 가능하지만 본래의 입구는 서측에 있었음. 그러나 대부분 매몰되어 있음.(그림 4) 연도는 하반부만이 남아 있으며, 상반부의 廢材로 생각되는 대석은 묘실 외부의 서측에 흩어져 있음. 묘실의 평면은 방형이며, 서측의 중앙에는 연도가 열려 있음. 네 벽은 1척 내외의 가공된 화강암 석재가 정연히 쌓여 있으며, 그 상부는 고임식으로 되어있음. 연도의 천정과 묘실의 천정과의 높이 차이는 4척을 넘지 않음. 태왕릉의 석실 규모는 장군총에 비해 작고 구조도 간단함. 고분 주변을 보면 상당히 넓은 범위에서 강돌이 깔려 있음. 고분 북측에는 작은 높이의 언덕에 접해 있는데 고분과의 거리가 半町(≒54.5m) 정도 떨어진 곳의 아래쪽에는 고분의 기단 바닥에 병행하여 축조된 돌을 쌓은 흔적이 있음. 이것이 서·남 양면에서도 확인되는 흔적은 大正 2년(1913년) 鳥居龍藏의 조사 때 동행한 택준일이 촬영한 설경사진에서 드러나고 있음. 이 돌을 쌓은 것이 능역의 경계를 확정한 것으로 추정됨.[鳥居龍藏이 土疊를 최초로 주목함.](3) 1935년 조사 : 三宅俊成 광개토왕릉비의 서남 약 400m 지점에 위치. 장군총과 동일한 7단 계단의 적석석실묘로 추정되지만 원형이 남아 있지 않고 붕괴된 상태임. 규모가 장대하여 장군총의 4배 정도. 평면은 방형. 기단의 바닥변의 길이 약 64.2m, 지상에서 묘실 천정석의 정상부까지의 높이 약 13m임. 거의 붕괴되어 연도는 파괴됨. 묘실 내에는 석괴로 매몰되어 높이가 불분명하지만 그 넓이는 내부 상부에서 동서 약 2.27m, 남북 3.03m임. 묘실의 천정석은 동서 약 4.24m, 남북 5.45m, 두께 0.8m임. 태왕릉의 뒷면에는 배총으로 생각되는 적석총이 몇 기 존재하고 있으며, 이 능의 주위에는 토석혼합으로 축조된 土疊가 에워싸고 있음. 이의 위치와 구조에서 왕릉이었던 것을 명확히 알 수 있음. 능 및 부근에서 와당 및 벽돌 조각 등이 출토되고 있음.(4) 1940년 조사 : 藤田亮策(그림 7) 일찍 파괴되어 기초부가 명확치 않음. 당시 사면의 모서리돌로 생각되는 것은 없으며 왜곡으로 방형을 이루지 못하나 동북 모서리에는 압력으로 튀어나와 2·3m 이동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 있음. 규모는 남면 63.6m, 동면 62.5m. 기단 주위에는 기대어져 있는 분구지탱석이 각면에 5개가 있음. 계단 수는 관야정 박사의 추정 복원도와 같이 7단이 타당한 것으로 보이나 당시에는 3단만이 겨우 확인되는 정도임. 정상의 12m에 있는 방계단은 그 북단만이 남아 있음. 고분 주위에는 자갈돌이 많아 경작하기 불편할 정도인데 이는 분구의 돌이 떨어져 내린 것도 있지만, 고분의 주변에 깔려 있던 敷石으로 생각되며, 그 범위는 명확치 않음. 고분 북쪽에서 약 90m 떨어져서 높이 1m, 너비 3-5m의 토석혼축의 土堤가 동서로 약 250m가 온전히 남아 있는데 동단은 굽어져 남으로 향하다가 약 220m 지점에서 서쪽으로 꺾어짐. 이 동변은 너비 5m, 높이 약 1-1.5m까지 붉은 점토로 축조하였으며, 대지의 가장자리에 만든 土堤는 지세에 따르기 위해 동쪽을 연 것으로 생각됨. 남변은 지금 거의 남아 있고 畑田과는 다른 적색 점토로 인해 충분히 확인 가능함. 게다가 동쪽 모서리에서 서쪽 모서리의 연결되는 남쪽부분은 지세에 따랐으며, 土堤 밖으로 남쪽으로 2m 정도 떨어진 곳은 경사면임. 서변은 대부분 사라지고 겨우 밭에서 조금 튀어 올라와 보일 뿐임. 다만 북서 모서리는 약 50m 정도가 북변의 土堤에 연결되다가 남쪽에서 약간 서쪽으로 꺾어졌는데 길이가 약 350m로 추산됨. 土疊 내에는 지금 동쪽에 福壽宮이라 불리는 사당이 있으며, 서쪽에는 원래 마을의 지방관청 건물이 무덤에 근접해 있었으며, 동북과 남동에는 조선 민가 10여 채가 있음. 고분 전면에는 새로이 만포간의 철도가 동서로 지나가고, 남면의 土疊은 철도 부지내에 편입되어 있음. 고분 후면은 자리한 북측 土疊의 안쪽 20m 지점에는 동서 98m, 남북 15-18의 橫長한 돌무지(石塊群)가 있음.[소화 10년 조사에서 池內宏과 濱田耕作은 장방형으로 높이 1m의 보고함] 조사 당시 그 남쪽이 접하는 대토갱과 함께 부근 주민의 건축용으로 가져가면서 훼손된 것으로 추정. 이 석괴의 일부는 당시에도 가공한 커다란 돌도 있어 장군총과 천추총 등의 후면에 보이는 것과 동일한 배총군으로 추정됨. 대략 5·6기의 배총군이 붕괴된 것으로 추정됨.[3년 뒤에는 배총의 존재에 대해 부정함] 고분 남방의 180m에 있던 민가 안에 건축지가 있으며, 마름모꼴 무늬의 벽돌과 함께 주연이 높은 고구려 와당이 발견되었음. 태왕릉의 석실 연도가 서쪽으로 향해 있고, 남면 중앙부 앞에는 3m 떨어져 평행한 長石은 拜道 흔적이고, 후면에 석축 배총군 등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남면에는 무엇인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됨. 앞서 土疊 내의 건축지는 고분의 남정면에 있어 태왕릉 제사에 관한 것으로 추정됨. 능의 제사 또는 守陵과 관계되는 건축으로 해석될 수 있음. 광개토왕비의 서쪽과 200m 떨어져 있음. 능비는 태왕릉의 동북 450m의 평탄부에 위치하며, 태왕릉 능역 내에 위치하였다고 추정함. 고분 주위는 해발 198m이고, 고분의 사면은 완만히 경사진 언덕으로 시야가 탁 트인 개활지임. 태왕릉 능역은 광활하고 주위에는 陪葬墓, 陵墻, 祭臺 등으로 둘러싸여 있음. 고분의 남은 높이는 14m이고, 화강암, 석탄암, 산자갈, 장돌 등으로 여러 석재로 축조함. 고분은 크게 계단과 묘실 등 2 부분으로 조성되었고, 고분 밖에는 散水시설과 배수관이 있음. 고분의 계단은 높이 솟아 있는데 석재의 가공이 정밀하고, 축조법은 완벽하며, 사면에는 거석의 보호석이 둘러싸여 있음. 고분은 산언덕 정상부의 황토층 위에 축조되었는데 그 토질은 가는 모래를 함유하고 있어 토질이 치밀하지는 못함. 특별히 기초를 강화하는 처리는 진행되지 않았으나 토층에 1겹의 커다란 장대석을 깔아 기초석을 삼음. 고분 위에는 근 30,000㎥에 달하는 석재의 거대압력과 천 여 연간 침수와 凍融으로 조성된 토질변화로 인해 계단이 밖으로 확장되는 변형이 일어나 보호석 다수가 이미 엎어져 있음. 현재 동북과 서북 두 모서리는 밖으로 크게 돌출되어 있으며, 북반부 고분의 표면은 함몰되어 몇 개의 구덩이가 만들어짐. 이른 시기 고분의 도굴 때 묘실 남벽(南墻)과 남측의 계단이 파괴되면서 더욱 태왕릉 외형은 크게 변화된 상태임. 대형 석실계단적석총으로 고분의 동면 둘레 길이는 62.5m이고 동북 모서리돌이 남아 있지 않음. 북면 둘레 길이는 68m이고 중부에서부터 서쪽으로 가면서 둥글게 밖으로 크게 돌출된 상태임. 서면 둘레 길이는 66m이고 서북모서리돌이 결실된 상태이고 중앙부에서 북쪽으로는 밖으로 확장되어 있음. 남면 둘레 길이는 63m이고 보호석 다수가 온전하고 계단 밖으로의 확장이 비교적 작은 편이나 서남 모서리돌은 점차 밖으로 빠지고 있는 상황임. 남측 두 모서리돌은 모두 수리되어 직각을 보여주는데, 태왕릉은 원래 축조는 여러 단의 계단적석총으로, 남측 길이 62m 정도의 방형 고분으로 추정됨. 현재 남측 계단방향은 255°이며, 묘실 연도의 256° 방향과 기본적으로 일치함.(그림 174) 고분 구조를 보면, ① 계단 A. 계단석 태왕릉의 계단은 산자갈과 화강암 혼축으로 축조됨. 산자갈은 계단 내부를 메우는데 사용되어 가공하지 않고 자연의 깨진 면이 그대로 있음. 일반적으로 큰 덩어리를 아래에 사용하고, 틈 사이는 작은 덩어리로 메움. 틈 사이를 메우는데 잔자갈이 포함되어 있음. 화강암은 대부분 완전 규칙적인 장대석으로 가공되었으며, 장대석이 계단의 면석으로 사용됨. 제2단 이상부터 계단석재는 전면 가공하지 않은 장대석을 사용하였고, 표면의 가공 흔적은 적게 보임. 장대석은 모두 윗면은 작게 다듬고 바닥면은 크게 다듬어 측면에서 바라보면 대략 부채꼴 사다리 모양이 되며, 윗면은 큰 면적의 홈을 만들어서 가장자리가 돌출되게 하였음. 보호가 비교적 잘된 동측과 남측을 보면 1단 계단은 지상에 노출된 축조석이 모두 7층이며, 두께는 1~0.35m로 차츰 줄어들지만 같은 층 석재의 두께는 기본적으로 일치하고 오차는 3㎝를 넘지 않음. 석재의 규모는 길이 1.4~3.2m로 고르지 않으며, 대다수 2m이상이며, 결손된 부분을 갖고 있는데 모두 결손크기는 방형 또는 장방형의 홈이 있고. 그 홈에 비슷하게 만들어진 석재로 가지런히 메움. 고분 동남 모서리 1단 계단 제2층 모서리의 윗면에서 모서리 가까운 곳에 직경 7m, 깊이 5m의 둥근 구멍이 뚫려 있는데 아마 暗榫을 박은 暗卯로 추정됨. B. 계단 축조법 태왕릉은 계단 4면 모두에서 현재 8단이 현존하는데 아래에서 위로 점차 들여 쌓여 있음. 먼저 둘레를 돌려 계단을 만든 후 그 내부를 자갈로 메우고 상면을 고르게 한 후 다시 그 위에 계단을 쌓음. 남측 1단 계단 중앙부의 동쪽에는 3·4개의 보호석 사이가 일어났으며, 바닥층 석재에는 “工”자형 中線記號가 새겨 있으며, 계단 사면의 中心線과 고분 모서리에는 축조 당시 엄격히 대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음. “工”자형 기호를 묘실 중앙부와 똑바로 마주해 실측하면 동남 모서리돌은 31.8m, 서남 모서리돌은 32.4m 떨어져 있는데 0.6m의 편차는 서남모서리돌이 밖으로 밀려났기 때문임. 태왕릉은 기초가 공고하지 못해 이 같은 계단의 外張과 붕괴 등의 변형이 기타 3면에서도 보편적으로 보임. 이와 같이 동서 양측의 계단 북반부는 이미 심각하게 밖으로 밀려났으며, 북측 제1단 계단은 보호석이 없어져 더욱 붕괴가 심각하고 2단 이상 계단의 대부분 계단석은 붕괴되었으며, 이로 인해 고분 내 積石의 전체적 정황은 밖은 높고 내부는 낮은 경사모양으로 함몰되어 있음. C. 제1단 계단 계단이 비교적 잘 보호된 것은 동·서 양측의 中段으로 제1단 계단은 높이 약 4m이며 모두 8층으로 축조됨.(그림 10) 지표 위의 제1층 석재는 두께 1m이며, 제2층에서 제7층은 0.7m, 0.6m, 0.5m, 0.45m, 0.42m, 0.36m의 두께로 순차적으로 감소하며, 계단 둘레 모서리 너비는 0.18m, 0.16m에서 0.14까지 감소함. 축조시 상층 석재는 하층 석재의 가장자리 홈에 맞추어있고, 층층히 들여쌓아 가지런한 외관을 보이고 있으며, 상층석이 내부 장력으로 인해 밖으로 밀려날 가능성이 감소할 수 있음. 바닥돌은 모서리돌이 가장 큰데, 현재의 서남 모서리 돌은 길이 2.9m, 너비 1.4m, 두께 1.7m이며, 동남 모서리돌은 길이 2.8m, 너비 2.6m, 두께 1.8m임. 두 돌의 하부에는 모두 높이 0.3~0.5m의 표면이 거친 평면을 수리한 모습인데, 무덤 기초부분은 원래 지면에 노출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음. 제1층 계단 축조석 아래에는 주춧돌이 매장되어 있는데, 이번에 동서 양측의 해부조사에서 모두 발견되었음. 고분 동쪽의 EG3 중 주춧돌의 두께는 1.2m, 서측 WG1중 주춧돌 두께는 1.1m이며, 두 돌은 모두 양끝까지 발굴되지 못하여 길이는 밝히지 못하였음. 그 표면은 반듯하며 계단 면석처럼 중간부분은 부채꼴의 경사면으로 다듬지 않았음. D. 제2단 계단~제7단 계단 제2단 계단은 1단 계단 내부를 평평하게 메운 후에 안으로 1.8m 위치에 들여쌓음. 단면의 남측 중앙부는 6층으로 축조되었는데, 아래 두 층의 석재는 두께가 0.3m, 중간의 두 층은 두께가 0.25m임. 위의 두 층은 두께가 0.2m 두께로, 2단계단의 총 높이는 1.5m임. 동측 중앙부 석재는 5층인데 두께가 모두 0.3m 정도이며, 그 아래 두 층의 석재는 고분 내 훼손으로 인해 이미 제1단 계단 안으로 매몰되었으며, 2단 계단 맨 위층 석재와 높이 차이는 약 1m 정도가 남. 제3단~제5단 계단은 석재는 2~3층만 남았으며 높이는 0.5~0.6m이고, 석재 크기가 고르지 않고, 아래층 계단보다 석재 가공이 세밀하지 못함. 계단은 점차 들여쌓기 하였는데, 폭은 1.5~1.8m이며, 인접한 계단 간의 높이 차이는 0.5~1m로 고르지 않음. 제6단 이상의 계단은 모두 비교적 낮으며, 상부의 제8단 계단의 일부에 의지해 석재 한 층을 쌓았을 뿐이며 대체로 내부를 메우기 위한 산돌이 쓰임. E. 제8단 계단 이상 제8단 계단은 지표에서 높이가 약 7m 떨어져 있는데, 그 위에는 길이 10m 정도의 경사를 거쳐 묘실 천정석이 있어 平臺를 이루며, 8층 계단과 묘실 천정석의 평대와의 높이 차이는 3~3.5m, 사면 모두 계단이 보이지 않으나 서북모서리 밖에는 자리가 옮겨진 여러 개의 커다란 계단 돌이 보임. 돌 사이에는 혼합된 깨진 돌을 보면 적어도 3단 계단의 계단석일 가능성이 있음. 따라서 태왕릉 상부 계단의 높이와 들여쌓기 폭을 보자면, 제11단 계단은 평대 높이에 이르기에는 부족한 듯 하여 결실이 있었다고 추정됨. 묘실 천정석 平臺의 길이와 너비는 각각 약 24m이며 정중앙에는 돌기된 묘실이 있음. F. 계단의 봉석층 현존하는 계단 정성부의 사면은 보편적으로 작은 강돌 및 깨진 산돌이 덮여져 있고, 남측 중앙부의 단면을 보자면, 상부 계단의 봉석층은 0.3~0.5m로 고르지 않으며, 하부 제2단 계단의 봉석은 최고 두께가 0.8m에 달함. 봉석은 내부는 두껍고 외부는 얇은 경사형(斜坡形)으로 하부는 대다수 계단 가장자리에까지 봉해졌고, 상부는 상층 계단석 약 0.15m의 단이 노출되어 있으나 제1단 계단에는 원래 봉석이 없었던 것임. G. 계단의 입석판 이미 해부해본 남측 1단 계단 중앙부에는 계단석에 달라붙어 있는 다층의 청록색 응회암판이 세워져 있는데, 그 가운데 동단 입석은 3층으로 보이며 서단에는 일찍부터 1~2층이 있었음. 중단에는 서쪽으로 입석 밖에는 또한 1·2층이 1단 계단 윗면(頂面)의 석판에 똑바로 붙어 있는 것이 보편적이며, 그 끝부분에는 대다수 입석판을 받치고 있으며, 앞부분에는 계단 가장자리가 내밀어져 있어 형상의 크기와 인접한 입석은 모두 같지 않았으며 경도된 입석일 가능성이 있음. 제2단 계단에 달라붙어 있는 판석은 모두 6개로 延長은 9m이며 그 형상의 크기는 다르며 대다수 계단에서 일제히 가장자리가 떨어져 있으며 개별적으로 서쪽을 따라 세 번째 판석은 하나의 뿔로 세워져 있음. 이 돌은 길이와 너비가 각각 0.8m 정도이며, 평면은 사다리꼴이며, 그 안쪽에는 계단과의 사이에 1겹의 비교적 작은 판석이 있음. 무너진 돌과 계단과의 사이에서 깨진 돌로 간격을 두었던 것이 아니라고 추측해본다면 원래 봉석하지 않았으며 적어도 입석이 무너진 곳의 앞에는 봉석이 없었기에 2층 이상의 계단에서는 확연히 달랐을 것임.(그림 11) ② 부속시설 A. 보호석 계단 둘레를 현재 15개가 둘러싸고 있는데, 남측 5개, 동측 4개, 북측 2개, 서측 4개임. 석재는 모두 자연형상의 커다란 화강암이며 형태는 편평하고 거대하고 두껍고, 다수가 불규칙하며 가공했다고 할 수 없는 상태임. 보호석은 일반적으로 비교적 넓은 지역에 놓아두는데, 바닥부는 제1단 계단과 1~1.5m 떨어져 있으며, 상단은 계단 위를 비스듬히 누르고 있으며, 기울기는 약 30°임. 보호석 설치 목적은 웅장함과 미관을 추구할 뿐 아니라 특히 주요한 목적은 그 중량으로 계단석의 張力을 상쇄하고 계단의 붕괴를 막아 고분을 더욱 견고하는데 있으므로 사면에 기본적으로 대칭으로 배치함. 남측에 현존하는 5개의 보호석 가운데 하나는 동남모서리에 가까우며 고분 모서리와 4.5m, 제2 보호석과는 5m 정도 떨어져 있으며, 그 밖의 3개 보호석은 모두 7~8m 간격으로 서쪽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다만 모서리부분의 두 돌은 대체로 가까움. 그 제3보호석과 제4보호석은 계단 중심의 “工”자 刻記와 5.4m와 4.8m 떨어져 있어져 있으며, 제5보호석은 고분의 서남모서리와 13m 떨어져 있음. 등거리 배열이라는 점에서 남측 보호석은 원래 6개로 서남 모서리와 5~6m 떨어진 거리에 1개 보호석이 결실되었다고 추정됨. 북측 보호석은 2개가 현존하는데, 1개는 동북 모서리부에 위치하며 지금은 이미 동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며 남측 동남모서리 부근의 보호석과 서로 대칭하는 곳에 위치함. 다른 1개 1보호석은 중앙부에 위치하는데 이미 부서져서 부분적으로 지표가 노출되어 있으며, 그 위치는 남측의 동측방향 시작점의 제3보호석과 대칭하는데 자리하고 있음. 이와 같이 태왕릉 남측과 북측 모두 남북 종축선상의 호석은 두지 않았음. 때문에 양면은 원래 모두 대체로 대칭하는 6개 보호석이 있었을 것임. 동측에 현존하는 4개의 보호석은 동북 모서리로부터 남쪽으로 10.5~11m 간격으로 배열하고 있으며, 동북 모서리에 한 개 보호석이 이미 내측으로 기울어진 것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3개 보호석은 모두 여전히 우뚝 솟아 있음. 제3보호석은 바로 고분 동서 중심축선상에 위치하고 있음. 대칭각도에서 보자면, 고분 동측은 원래 보호석이 5개였으나 지금 동남 모서리부분에는 북쪽 시작점의 제1보호석과 서로 대응되는 1개 보호석이 이미 결실 되었음. 서측에는 4개의 보호석이 현존하는데 그중 3개 보호석은 이미 부서지거나 경도되었으며, 정중앙의 1개 보호석만이 이미 계단에 기대어 서 있음. 중심축선상 입석에 의해 추측하면, 서면 보호석은 5개여야 함. 현재 양 모서리의 깨진 돌은 정중앙의 보호석과 모두 24m 떨어져 있으나 남단 24m 중간에는 1개의 기울어져 서 있는 잔석이 있으며 북단은 상응하는 위치의 보호석이 결실되어 있음. 이상의 내용상 배치를 복원해보면, 태왕릉 남·북 보호석은 종축 중심선상의 간격은 각기 약 12m이며, 동·서측 보호석의 종축 중심선 간격은 각 15m임. 4개의 고분 모서리 양변의 5m 범위 내에는 반드시 좌우 두 개의 거석이 둘러싸고 있어 설계자가 고분 모서리 부분의 보호를 중시했던 것이 드러나고 있음. 보호석의 규격을 보자면, 남측에 사용한 돌은 비교적 커서 보호석은 보편적으로 높이 5m, 너비 3m, 두께 1.5m 내외이고, 가장 큰 보호석은 높이 6m, 바닥 너비 5m, 두께 약 2m, 중량 약 60여 톤임. 이것은 아마 남측 지세가 비교적 낮아 대장력의 원인을 방어할 필요 때문이었을 것임. B. 散水 및 배수 시설 散水 시설은 고분 아래 해부 구덩이에서 발견되었는데, 전체 길이 0.5~0.6m, 너비 0.25~0.3m, 두께 0.1~0.2m의 석판이 깔려 있으며 그 구축된 사면은 모두 동일함. 퇴적 상황을 보면, 散水 석판은 황토층 표면에 깔았으며 그 위에는 보편적으로 1층의 작은 강자갈을 깔았고 자갈층 위에는 고분에서 미끄러져 떨어진 크고 작은 돌이 있으며 강자갈 역시 散水 조성 부분임을 알 수 있음.(그림 12) 散水 석판은 모두 1단 계단의 제1층 장대석 아래부터 깔았는데 빗물이 무덤 기초를 침식하고 침수를 방지하는 것이 목적임. 散水 석판 위에는 작은 강자갈을 깔아서 큰 비가 연이어 돌 틈 사이의 진흙을 휩쓸어버려 散水 석층이 훼손되는 것을 방지함. 散水시설 바닥층 석판은 동·남측 중앙부 탐색 구덩이에서 평평하게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으며, 강자갈층의 두께는 모두 균일하며 계단에 접근한 곳은 대략 융기한 변형이 있음. 다만 고분 서쪽의 WG1 탐색 구덩이의 안에서 고분 가장자리와 3m 떨어진 곳에서 너비 3.2m, 깊이 0.8m의 구덩이가 있고, 그 위에는 散水 석판이 모두 고분 한쪽을 향해 역방향으로 기울어져 있음. 능묘 적석의 압력 때문인지 혹은 고분 가장자리는 원래 물의 흐름을 따르는 明溝 또는 暗溝가 일찍이 수리되었기 때문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고분 동·서측에 고분과 3~6m되는 곳에 너비 약 1.5m, 길이가 다른 EG2 및 EG3, WG2 및 WG3 등 4개의 소형 탐색 구덩이를 뚫었음. 각 구덩이 안에는 부분적인 황토층 표면이 비록 움푹 파이거나 융기한 것을 볼 수 있으나 부위와 높이는 각기 다른데, 이 같은 고분 주위의 지표 기복은 계단의 함몰 때문이며, 함몰의 부위와 높이는 완전 해당 지역의 침수와 凍融 정도에 달려 있음. 동서측 모두 계단방향을 따르지 않고 남쪽에서 북쪽으로 또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경사진 順水溝를 수축하였으며, WG3를 거쳐 鋪石하지 않은 곳의 아래로 해부해보면 고분 가장자리 황토층의 0.8m 깊이에는 暗溝가 없으며 배수관이 설치되어 있음. 散水 석판의 외연은 남측 SG1 중의 길이 약 18m에 있으며 서남 모서리 WG7 중에 있음. 석판은 가장 멀리 고분 모서리와 28m 떨어진 곳까지 깔려 있고 석판 위에는 모두 크기가 고른 강자갈층이 깔려 있는데 이것은 일전에 알려진 散水 외연의 가장 먼 지점임. SG1 이남의 고분 가장자리와 22m 떨어진 곳, 散水 석판 외측에서는 고분 밖 횡방향(가로방향)으로 배수구가 하나 있는데 散水의 종단일 것임. 구덩이는 석회암으로 구축했는데 殘段 길이 14m, 동북에서 서남으로 이어져 있으며, 동단 방위각은 60°이며, 기본적으로 남측 계단과 서로 평행임.(그림 13) 구덩이 너비 0.6m, 바닥에는 1겹의 석회암이 깔려 있으며, 지세를 따라 대략 東高西低를 띠고 있으며, 석괴가 마주하는 이음새는 맞지 않아 그 틈은 작은 돌로 메우고 있음. 구덩이 가장자리는 단층의 석괴로 열려 쌓았는데 깊이 0.2m이며, 석재의 가지런한 면은 안으로 향하고 밖에는 황토로 평평하게 메웠음. 배수시설은 현재 북벽 축조석 8개가 남아 있는데 남은 길이 3.4m이며, 남벽 축조석은 7개인데 길이는 약 북벽과 대등함. 남벽 밖에는 약간의 강자갈이 드물게 보임. 북벽 외측에는 1층의 축조석이 있는데 석재는 모두 6개로 북벽과 평행하게 놓여 있으나 높이는 북벽이 비교적 꽤 높으며, 이 층의 축조석 북쪽은 강자갈층으로 돌 아래에는 散水 석판이 이어져 있는 것이 보이지 않음. 이 水溝 유적은 뒤이어 동서 양변으로 연이어 열린 SG3와 SG4 중에서는 모두 다시 볼 수 없으나 그 방향·거리·위치경사도를 보면 태왕릉 墓表 배수와 유관한 유적임이 확실함. C. 배수관(排水涵管) 1989~1990년 태왕릉 보호 담장을 수리할 때 집안시문물보관소에서 6m의 한줄로 된 단을 발견하고 발굴하였음. 배수관은 수키와(筒瓦)를 덮어 서로 접하여 만들었는데 황토층에 만들었으며, 방향은 北偏東 40°이며, 고분 동북 모서리로부터 담장 밖으로 통함. 배수관 위에는 散水 석판과 한층의 두께가 약 60㎝인 부식토가 섞인 강자갈층(河卵石層)이 덮여 있음. 이번 조사 중 고분 밖의 동북 모서리에서 2.5m 간격으로 배수관방향과 수직인 탐색 구덩이 NG1과 NG2를 파내었음. 두 구덩이에서 모두 수키와(筒瓦)가 서로 이어져 덮여진 管道 유적과 묘역 散水 석판이 발견됨. 배수관 방향은 1989년과 동일함. 그 가운데 NG2 안의 배수관 길이는 1.1m이며 남측은 이미 훼손되어 결여되어 있음. 현존하는 암키와(仰瓦)은 모두 3개인데 가장 북쪽의 하나는 위치가 엇갈려 있었으며, 제2 암키와와는 서로 160도 정도의 둔각을 이루고 있으며, 그 위를 덮은 기와는 2개가 있었는데 모두 동측으로 미끄러져 떨어졌음. NG1에서 배수관 위치는 엇갈려 있지 않으며, 覆瓦는 약간 동쪽으로 미끄러져 있으며, 중앙부에는 50㎝ 정도의 결손부분이 있는데 바로 1개 수키와(筒瓦)의 길이임. 배수관 상면에는 1층의 묘역 부석이 가지런하고 질서 있게 깔려 있음. 탐색 구덩이 동측의 석판은 동서향으로 펼쳐 있고 서측은 남북향으로 펼쳐 있어 양자는 서로 人자형으로 접하고 있음.(그림 12, 中) 단면상으로 보면, 양 구덩이의 퇴적은 대체로 일치하며 표토 아래에는 모두 1층의 강자갈을 깔은 고분 둘레의 散水石인데, NG1에서 자갈로 이룬 층의 두께는 0.2~0.9m로 불균등하며 상층의 충적토와는 명확히 구분되며 판석 아래에는 가는 모래를 함유한 황색 점토가 있음. 다만 배수관 부근 구조는 비교적 느슨하며 단면상 기와 옆에는 구덩이를 파낸 흔적은 상대적으로 명확함. 이상 3곳의 유적을 살펴보면, 태왕릉 동북 모서리부분에서는 散水 板石이 깔린 아래에 수키와(筒瓦)를 재료로 삼은 배수관이 설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덧붙여 NG2와 1989년 발굴 조사 때의 배수관은 길이는 적어도 20m이며 묘 아래에서 동북으로 통함. 수키와(筒瓦)가 움직인 상황으로 보아서 防漏의 편차가 심해서 배수관 부근에 조성된 황토층은 끊임없이 침식당하고, 나중에는 배수관이 막혀 사용할 수 없게 되었을 것. 고분 아래 탐색 구덩이의 발굴 과정에서 매우 진중하고 정교한 문물이 출토되었음. 남측 SG1 中部偏西, 墓邊에서 2.9m 떨어진 곳에서 銅鈴 1건을 출토하였는데 그 위에 ‘辛卯年 好太王’ 등의 글자가 새겨져 있음. 지금 서쪽에서 제2번째 보호석 아래에서는 산산 조각난 동제 부뚜막(銅竈) 1건, 주름잡힌 鎏金幔架 1건이 발견됨. 동제 부뚜막과 0.8m 떨어진 계단석 틈 안에서는 案足, 帳鉤, 馬鐙, 節約 등의 銅器와 鎏金器 30여건 출토되었는데 도굴범에 의해 임시 숨겨졌던 부장품으로 추측됨. ③ 묘실 묘실은 계단 상부의 평평한 곳에 축조되었음. 상부의 일부는 상반부는 평대 밖으로 돌출되어 윗너비 12m, 아래너비 15m, 높이 4m 정도의 방대가 노출. 석회암으로 축조한 고분 상부의 독립 건축물. 둘레에는 큰 강돌로 봉하고, 정상부에는 1m 정도 두께로 흙으로 봉함. 봉토 외형은 覆斗形으로 보임. 묘실의 벽체는 내외 두 층으로 나뉨. 외층은 두께 0.1~0.25m의 片狀 석회암판을 채용해 축조했는데 크고 작은 석재를 함께 사용하였고, 그 사이에는 흙을 섞은 작은 강자갈로 메우고 외표면의 석재는 고르고 들여쌓기가 가지런함. 안쪽 벽체는 가공한 커다란 장대석으로 축조, 틈 새 없이 고르게 축조함. 그 서측과 북측은 고분 계단이 심하게 外張하여 벽체 밖으로 봉한 강돌들이 대부분 아래로 미끄러져 내렸고, 지금 묘실 바깥쪽 벽채의 서측면과 동북 모서리가 노출되어있음. 그 가운데 서측의 노출 면적은 너비 9~12m, 높이 약 2m이며 동북모서리의 노출면적은 너비 1~5m, 높이 1.5m임.(그림 14) 남측의 외측 벽체 상부에는 고분 도굴 당시에 훼손되어 蓋石이 밖으로 드러나 있음. 개석 아래로 도굴 구멍이 묘실 안으로 통하고 있음. 도굴 구멍이 줄곧 열려 있다가 1990년 묘실을 수리할 때 비로소 메웠음. 2003년 조사 당시 남부의 도굴 구덩이에 대해 발굴하여 묘실 외벽의 석회암 판석들이 다수 구덩이 안에 흩어져서 발견되었음. 도굴 구덩이의 깊이는 5m, 上口 너비 6m, 下口 너비 2m임. 도굴 구멍 입구는 천정석에서 아래로 높이 4.5m, 너비 1.7~2.3m이며, 상부의 도굴 구덩이와는 서로 통하게 이어져 있지 않음.(그림 15) 고분 계단의 심각한 外張으로 적석은 이미 여러 곳에 함몰갱이 생겼으나 묘실 외벽은 처음과 같은 상태이며 남측은 비록 도굴 구멍이 벽체 바닥까지 내려갔으나 전부 무너지지 않아서 묘실은 별도의 기초를 하였음을 알 수 있음. 1990년 태왕릉 묘실의 발굴 작업은 도굴 구멍에서 시작되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도굴 구멍은 두께 약 5m의 묘실 외벽을 훼손한 후, 묘실 동남 모서리부에서 묘실 안쪽의 벽석을 파괴하였고 남벽 상부에서 묘실로 진입하였음. 남벽은 파괴를 당한 면적이 2/3에 달하며, 동벽의 안쪽 벽석이 훼손되었음. 內 벽석을 제거한 후에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石槨인데 도굴범은 석곽을 파괴한 후에 비로소 묘실내로 진입함. 묘실 평면은 장방형으로 길이 3. 24m, 너비 2. 96m, 높이 3m임.(그림 16) 동벽의 축조석은 9층이며, 그 외 세 벽은 각 10층이며, 석재는 모두 다듬은 장대석으로 길이 0.8~2.8m, 두께 0.16~1.2m로, 틈을 메웠고 표면은 다듬는 처리를 거쳤음. 제6층 석재부터는 남·북 양측에서 점차 들여쌓기를 하였으며 묘실 천정 묘頂部)에서는 3단 평행고임을 함. 묘실정상에는 대형 화강암 하나가 덮여 있는데 석괴의 평면은 타원형으로 남북 길이 6m, 동서 너비 4.7m, 두께 0.6~0.9m이며, 그 상부에는 황토를 덮었음. 묘실 내에는 석곽을 두었는데 석곽 상반부는 이미 파괴되었고, 바닥부는 온전하나 중앙부에 길이 1.4m, 너비 1m 이상 범위가 파괴된 상태이며 파괴된 흔적의 깊이는 묘실 바닥석에 이름. 석곽의 바닥은 묘실에 비해 작으며, 사면은 묘실과의 사이에 평면은 0~12㎝의 틈이 있으며, 틈은 가늘고 작은 강자갈로 가득 메워져 있음. 곽 바닥과 묘실 바닥의 사이에는 중앙단층에서 보자면 두께 6㎝의 작은 강자갈이 한 겹 깔려 있음. 발굴 당시 묘실 북벽 중앙부에는 묘실 바닥에서 높이 1.2~2m 되는 곳에 길이와 너비 각 0.8m, 석벽이 파고들어간 약 0.5m 깊이의 구덩이가 발견되었고, 묘실 내에서는 頭圓尾方의 길이 0.5m, 너비와 높이 각 0.15m인 소형 석재가 하나 발견되었는데 아마도 석곽 측벽을 받치기 위해 구멍에 끼워 넣는 돌장부(石榫)였을 것임. 묘실의 서벽 정 중앙에는 서쪽을 향한 연도가 있는데, 연도 길이 5.4m, 너비 1.84m, 방향은 서남, 방위각 256°임. 그 바닥부에는 묘실 바닥과 서로 평행하며 많은 대석판들이 깔려 있으며, 묘문 가까이에는 2단 층계를 깔았음. 연도의 양측 벽은 다듬은 석회암 석재로 축조했는데 안에서 밖으로 축조석은 6~8층으로 고르지 않음. 제6층 석재에서 연도 측벽은 들여쌓아졌으며 1층 평행고임을 형성함. 천정 위에는 4개의 대석판이 덮여 있으며, 석판은 3단으로 나뉘어 안에서 밖으로 복잡하게 점차 올라가는데 내측의 높이 1.78m, 중단 높이 1.98m, 外口處 높이 2.36m임. 모든 밖으로 노출된 석재의 모서리는 사면을 모두 경사지게 다듬어 태왕릉 묘실이 정성들여 설계시공을 거쳤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음. 고임 석재는 동단은 묘실 서벽 0.13m에서 놓이고, 북벽의 돌장부(石榫)과 같이 석재의 상부 테두리를 모두 호형으로 만들어졌는데 후일 석곽 복원의 정황상 이 두 개 석재의 뾰족함은 마치 석곽 坡水石의 下緣 및 앞의 벽을 떠받치는 듯하며 그 안정성이 증가함. 연도는 두 곳에서 폐쇄함. 먼저 안쪽 폐쇄는 안에서 밖으로 화강암 석재를 사용하여 막음. 막음 석재는 모두 길이 0.8~0.9m, 너비와 높이 모두 0.4~0.5m의 장방형으로 가공하였으며 대다수 頭大尾小狀으로 만듦. 막을 때 넓은 것으로 안쪽으로 향해 연도를 따라 장축방향으로 차례로 쌓음. 네 개를 횡으로 1열을 두었으며, 위로 4층이 쌓아졌으며, 이와 같은 것이 모두 6개임. 연도 밖에서는 둥근 작은 강자갈로 메움. 연도 밖에서 폐쇄는 화강암과 석회암으로 혼합해 막았는데 내외 양 층으로 나뉘었으며, 하부 두께는 약 1m임. 화강암은 내층에 다수 놓여 있는데 내층 석재는 정연하지 않고 가로·세로 방향으로 모두 놓여 있으며, 연도 내의 봉한 돌도 정연하지 않았음. 외층은 기본적으로 석회암판으로 만들었는데 축조는 확실히 서투르지만 묘실 외벽과 서로 평행함. 이외 언급해야 할 것은 2003년도 도굴 구덩이 발굴 조사 당시 길이 1~1.5m, 너비 0.4~0.5m의 불규칙형 석회암이 여러 개 발견되었는데 모두 圓弧形의 안쪽에 홈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석재와 틈새를 맞추도록 특수 가공한 것으로, 천정석 주변에서 사용됨. 태왕릉 묘실 頂部에는 완만하고 둥글게 경사진 평대가 있어 고분 위의 건물을 세웠던 것으로 추정됨. 묘실 벽체의 사면 둘레는 모두 완만하며, 서·남·동면은 평편하면, 서·남측에는 비교적 많은 석곽 조각이 있고, 동·북 양측에는 대량의 수키와와 암키와 잔편들이 널려 있음. 이외 이번 조사 중에 평대 남측에서 서쪽으로 치우친 곳에서 불에 타서 녹은 용석 1건을 채집함. 다른 서측에서는 용도와 2m 떨어진 곳에서는 몇 개의 장대석 아래 빈 곳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石箱 등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번에 발굴하지 못함. ④ 석곽 1990년 묘실 내 2m 두께의 깨진 돌과 충적토에서 발굴조사하면서 발견하였음. 태왕릉의 석곽은 서로 끼워 맞추는 구조의 조립식 맞배지붕식 가옥형상임. 맞배지붕석과 네 벽, 문틀과 바닥 등 17개 석재로 이루어졌으며, 석곽 안에는 棺床 2개가 설치되어 있음.(그림 17) 고분 도굴 때 석곽과 그 안에 설치된 2개 관상은 모두 이미 훼손되었으며, 바닥과 벽석의 일부는 원래 위치에 있으나 그 나머지는 교란되어 묘실 내외에 방치됨. 발굴 중에 모두 잔편 300여 건을 수집했는데 근 2/3의 잔편이 각 부위 부재의 복원에 도움이 되며 짜 맞추는 과정을 거쳐 17개 부재의 형상 및 구조와 장부(榫卯) 정황 모두 이미 분명해짐. 석곽은 회록색 泥灰巖質이었으며 그 재질은 세밀하고 경도는 높지 않아 자르거나 장부(榫卯) 제작하기 쉬움. 잔편은 모두 가장자리가 가지런하고 표면이 다듬어져 매끄러우며, 장부(榫卯)는 方·圓이 되며 전체의 제작은 정밀함. A. 正脊石(용마루석) : 1개 중요한 부위의 脊頭·脊身 모두 3단이 남아 있음. 가운데에 脊이 올라와 양측이 대칭으로 뿔이 나옴. 이전부터 너비와 두께는 이미 알았으며 길이는 양측 경사면석과 길이가 같아야 하는데 양단 길이는 전후 측벽에서 나옴. 복원후의 正脊石 길이 2.91m, 너비 0.5m, 두께 0.4m이며, 용마루 상부 중간이 올라오고 나머지는 경사각을 이룸. 바닥면은 평평하며 걸쇠(卡)가 전후 벽석을 고정시켜 전후 이동이 불가능하도록 양단은 모두 높이 3㎝의 凹棱이 생기었음. 바닥면의 양측에는 100°의 通長斜槽가 파여 있으며 지붕돌의 상부와 각도가 서로 들어맞음.(그림 17-A) B. 坡水石(지붕돌) : 2개 좌우 대칭의 同形으로 남측 지붕돌은 일찍이 전후 양단에 존재하였고 뒤쪽 것의 단면은 온전함. 앞쪽 것은 외측 모서리만이 짝이 맞음. 지붕석의 바닥면에는 양측 벽과 만나는 부위에 홈이 있음. 측면 벽석과 마주 접하는 곳에 깊이 1㎝이고, 길이는 측벽석보다 길고, 너비는 측선 두께와 서로 비슷한 얕은 홈이 있어 끼워서 맞춤. 지붕석 앞쪽에는 너비가 앞쪽 벽체의 위부분과 접하도록 얕은 홈이 새겨서 있음. 홈의 길이는 확인할 수 없지만 전벽을 근거로 복원할 수 있음. 홈의 하측에는 너비 8㎝, 길이 60㎝, 깊이 3㎝의 긴 구멍이 있어서 전벽의 측변과 지붕석이 서로 접하고, 지붕석의 뒷면에는 너비 8㎝, 깊이 3~4㎝의 긴 구멍(長卯)이 2개 파여 있는데 그 중 중간에 가까운 구멍은 비교적 짧고 길이는 27㎝에 불과함. 가장자리에 가까운 구멍은 길이 50㎝인데 그 주위에는 길이 90㎝, 너비 15㎝, 깊이 약 1㎝의 넓은 홈이 뚫려 있어 서로 끼워 맞추어 뒷벽과도 맞물릴 수 있음. 지붕석의 길이는 석곽의 원래 위치가 움직이지 않도록 전후 양 벽 위에 돌을 끼워 맞춤. 복원 후의 지붕석은 길이 2.91m, 너비 1.58m, 두께 0.09~0.14m이며, 위의 표면 양단과 용마루에 근거한 한 면이 모두 다듬어져 경사면을 이룸. (그림 17-B) C. 側壁石 : 2개 좌우 동형으로 대칭. 북측 입석은 이미 도굴범에 의해 중간이 파괴되어 殘石이 2개로 나뉘어져 원래 위치에 움직이지 않고 세워져 있는데, 파괴된 곳에는 석곽 받침 위의 하나의 긴 구멍(長卯)이 노출되어 있음. 남측 壁石은 일찍부터 원래 위치에 있었으나 상부는 파괴된 상태임. 잔편 중에서 그것과 맞아떨어지는 상반부를 발견했는데, 그 길이·너비·두께 및 장부구멍(榫卯)의 정황 등을 모두 알 수 있음. 복원 후의 측벽석의 길이 2.38m, 外高 1.28, 內高 1.36m, 두께 0.16m이며 윗면은 경사면을 이룸. 경사면은 올려본 각이 28°로 지붕석의 경사각도 맞음. 측벽석 3면에는 장부(榫)가 있는데 양 단면 위에는 각각 너비 8㎝, 높이 4㎝의 긴 장부(長榫)가 있어 석곽 전후 양 벽과 연접하고 있음. 장부(榫)의 길이와 위치는 양단이 좀 다른데, 위치는 상대적으로 위에 치우쳐 있음. 측벽석의 바닥면에는 전후 2개의 긴 장부(長卯)가 있어 석곽 받침 구멍으로 끼워 넣을 수 있는데 장부의 길이(榫長) 70㎝, 너비 7㎝, 높이 4㎝이며 위치는 조금 석곽 내측으로 치우쳐 위치함.(그림 17-C) D. 後壁石 길이 2.84m, 높이 2.06m, 두께 0.16m의 온전한 석판으로 제작되었고, 평면은 양 빗변의 육각형으로 만들어짐. 1990년 발굴당시 하반부는 일찍이 원래 위치에 있었으나 상반부는 이미 파괴되었고 잔편은 비교적 무거웠으며 뒤에 맞춰졌는데 이미 양측 빗변상의 두 장부(榫)와 지붕석 바닥면의 홈(卯槽)은 어떻게 들어맞게 하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었음. 후벽석 아래에는 좌우대칭의 두 개 장부(長榫)로 석곽 받침과 연접하였는데 장부(榫)의 길이 90㎝, 너비 7㎝, 높이 5m임. 측벽과 연접한 곳에는 긴 홈이 있는데 홈의 길이 92㎝, 너비 8㎝, 깊이 4㎝임. 경사면 상에는 지붕석과 연접하는 2개의 긴 장부(長榫)가 있는데 아래에 놓이는 장부(榫)의 길이 48㎝, 너비 8㎝, 높이 3㎝이며, 위에 놓이는 장부(榫)의 길이 26㎝, 너비 8㎝, 높이 4㎝임. 正脊과 연접하는 곳은 평면으로 상단은 마침 용마루석 끝의 凸棱 안으로 끼워 넣음.(그림 17-D) 前壁 구조는 비교적 복잡하여 6개의 석재로 조성되는데 중간 하부는 鑲門石, 그 위에는 托脊石, 옆에는 각기 1개의 삼각형과 1개의 사다리형 承頂石으로 구성되어 있음. E. 鑲門石 양문석 길이 214㎝, 높이 169㎝, 두께 18~22㎝이며, 하부 정중앙에는 “冂”形 홈을 파내어 문을 끼웠으며, 상문에는 凸台가 있음. 冂形 홈의 폭으로 문의 폭을 알 수 있다. 너비 8㎝, 깊이 6㎝의 “L”形으로 홈을 내었고, 상부의 홈 양단에는 문을 고정시키는 문확을 대칭되게 뚫었다. 문틀의 홈은 門楣에 가깝고 길이 1.67m, 너비 0.2m의 장방향으로 만들고, 경사지게 다듬고, 장축방향을 따라 등거리로 너비와 깊이 모두 2㎝의 긴 홈 2개를 내었다. 양문석과 석곽 받침은 2개의 대칭하는 긴 장부(長榫)를 통과하여 연결시켰다. 장부(榫)의 길이 20㎝, 너비 8㎝, 높이 4㎝이다. 양측의 이마 받침석과 연접되는 곳에 장부 구멍 없이 평면상으로 서로 맞추어져 있음. 양문석 상부의 凸台 양측의 평면에는 긴 구멍이 있는데, 구멍의 너비 8㎝, 길이 45㎝, 깊이 3㎝이며, 삼각형의 이마받침돌로 서로 접하고 있음. 중앙부에는 3조로 불균등하게 나뉘어 서로 짜 맞추도록 되어있으며, 그 위로 지붕받침석과 서로 접하고 있음. 서로 짜 맞추는데 있어 돌출부는 양측에 두었는데 각각 길이 12㎝, 높이 5㎝임. 중간에는 구멍(卯)이 있는데, 구멍의 길이 55㎝임. 안에서 보면 돌출부(陽榫)는 중간에 놓여 있으며 지붕받침석 아래 방향의 들어간 곳(陰卯)의 안에 맞추어져 있음. 따라서 매우 견고하게 맞추어져서 변형이 잘 안됨.(그림 17-E) F. 托脊石(지붕받침석) 원래 길이 80㎝, 높이 36㎝, 두께 17㎝의 육각형 석재임. 지금 좌우 양 측변은 모두 잔편이며 우측 아래 모서리는 결실되어 맞출 수 없음. 다만 인접한 돌 장부구멍(石榫卯)과 후벽석의 형상에 근거하여 복원할 수 있음. 그 위의 지붕받침석은 윗면이 비교적 평평하며, 상단은 脊端의 凹棱에서 맞춤. 하단과 양문석이 서로 인접한 바닥면은 좌우 각각 길이가 다른 半陰陽榫을 만듦. 중부 외측은 陰榫, 내측은 卯로 삼고 양변 외측은 卯, 내측은 榫으로 삼음. 중간의 陽榫의 길이 54m, 너비 9m, 높이 5m이며 양변 半卯는 각각 길이 12㎝임. 좌우 양 측변은 모두 承頂 三角石과 서로 연접해 있으며 삼각석 측면의 榫에 근거하여 그 측면이 길이 16㎝, 너비 7㎝, 깊이 4㎝의 直卯이며 석곽 내 한 면에 치우쳐야함을 알 수 있음. 承頂石 정상부 측변 사이의 경사면은 양측 지붕돌과 서로 접하나 두 돌은 모두 榫卯와 卡槽가 없음.(그림 17-F) G. 三角石 좌우 각 1개이며, 위치로 보면 마치 단순히 공백을 메우기 위해 설치한 듯한데, 이 돌은 양문석 혹은 托脊石과 한 개를 이루지 않음. 아마도 가공제작이 쉽지 않았기 때문으로 추정됨. 두 돌 가운데 북측의 것은 온전한 형태로 길이 43㎝, 높이 28㎝, 두께 17㎝이며 평면은 截尖 직각의 삼각형이며 양 직각변은 각각 너비 6~7㎝, 길이 16~45㎝의 불균등한 長榫를 갖고 있음. 별도로 托脊石 및 양문석과 맞춤. 빗변은 榫卯가 없으며 직접 坡水石 상부의 넓은 홈(寬槽) 안으로 끼워 맞춤.(그림 17-G) H. 承頂石(이마 받침돌) 좌우 대칭으로 각 1개씩 양문석의 양측에 세워져 있음. 1990년 발굴 당시 남측 돌은 기본적으로 완전하였으나 다만 좌측 상부 모서리가 손실되었으며, 북측 돌 상부는 전체가 파괴되어 후에 대부분 맞추지 못했으나 지금 남측 돌과 지붕석 아랫면에 근거하여 대칭원리로 복원함. 이마받침돌을 지붕석을 지탱하며, 윗면의 중앙부의 위쪽으로 치우친 곳에는 長榫이 있는데 榫의 길이 28㎝, 너비 8㎝, 높이 3㎝이며 대체 지붕면석 아랫면 하부의 卯보다 작음. 아랫면은 길이 33㎝, 너비 6㎝, 높이 4㎝의 長榫을 가지고 있으며, 석곽 받침 외측의 卯와 연결되어 있음. 그것은 양문석과 평면으로 연결되어 榫卯를 사용하지 않았으나 다만 내측면과 측벽석의 연결이 길쭉한 槽卯를 통과해 연결됨. 槽卯의 길이 90㎝, 너비 7㎝, 깊이 5㎝임.(그림 17-H) I. 底座石(바닥석) 가로로 놓여진 3개의 판상석으로 구성됨. 판상석은 길이가 같고 두께가 같으나 중간의 돌이 비교적 좁은데 槽卯를 두 개 대석 사이에 박아 넣음. 석재가 가공제작하기 어렵기 때문인지 채취의 변통방법을 사용함. 받침은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나 중부는 1개의 깊게 패여 깨졌으며 중간의 박히는 부분이 둘로 절단되었는데 동측, 즉 후부의 돌은 훼손됨. 바닥석은 길이 3.1m, 두께 0.3m, 총 너비 2.83m이며 그 가운데 앞의 돌은 너비 1.1m, 뒷돌은 너비 1.34m임. 두 돌 사이는 33㎝ 떨어져 있고 각기 너비 50㎝ 凹槽가 파여 있는데 중간의 돌을 박은 후 네면 둘레는 경사면을 없애고 표면을 평평하게 다듬고 갈음. 석곽 바닥에는 한 겹의 작은 강돌을 깔았고, 중앙부에는 길이 2.5m, 너비 2.24m의 관상을 놓은 곳이 있음. 이곳은 낮은 홈이 파여 있어 주변보다 낮으며 4개의 구멍이 뚫려 있음. 4개구멍은 모두 원형으로 직경 16㎝이며 곽내의 배수의 고려와 관련되는 것으로 추정됨. 바닥의 사면 둘레의 가장자리에는 홈을 파고 모서리를 다듬어 돌기한 평평한 면을 형성하였다. 면은 너비 23~24㎝, 높이 5㎝로 그 위에는 곽실 네 벽을 고정하는데 사용된 기다란 槽卯 8개가 있다. 卯의 너비 6~8㎝, 길이 20~90㎝, 깊이 4~5㎝로 고르지 않다. 받침석)의 앞 가장자리(서쪽) 중앙부에는 아래로 너비 8㎝, 깊이 6㎝의 鑲門槽가 파여 있고 둘레 가장자리는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문턱 모양(門檻狀)을 띄고 있음. 그 홈(槽) 안에는 양단의 문지도리(門樞)가 둥글게 파여 있는데 그 둥근 모양의 앞에는 호형의 얕은 홈(槽)이 뚫려 있어 문(門扉)의 上軸을 설치한 후에 호형의 홈(槽)을 따라 下軸을 문지도리로 밀 수 있도록 설계함. J. 門扉石 좌우 2개로 구성됨. 석재는 비교적 얇음. 도굴 당시 심하게 훼손되어 대다수 조각편으로 깨어졌고 큰 것은 10여 편에 불과함. 잔편 중에 한쪽 문은 上緣이 맞출 수 있고 下緣은 문지도리(門樞)가 온전한 형태임. 鑲門의 홈(槽)의 길이와 너비, 또한 이미 맞춘 좌측 문 상연에 근거하여 복원한 문의 좌우 양측의 너비는 동일함. 한쪽 문비석의 높이 1.2m, 너비 0.59m, 두께 0.06m이며, 만나는 곳은 半卯로 맞물리며, 외측 가장자리는 모두 둥글게 다듬었음. 상하에는 각각 높이 2㎝, 직경 3㎝의 원형 문지도리(門樞)가 1개씩 있음.(그림 17-J) K. 棺床 2개가 석곽 내에 남북으로 병렬하여 놓여 있음. 이른 시기 도굴될 때 모두 부수어 깨뜨렸으며 잔편은 현장에서 외진 곳에 쌓아 두었음. 1990년 발굴조사 후에는 비교적 커다란 잔편은 즉시 모아서 맞추었는데 두 棺床은 모두 결손이 많지 않았음. 모아서 맞춘 정황을 보면, 2개 관상은 모두 1개의 돌로 제작되었으며 석재 크기는 서로 다르고 세부 역시 차이가 있음. 남측의 관상 석재는 비교적 얇아서 길이 2.2m, 너비 1.2m, 두께 0.1m이며 외측 가장자리 모서리는 모두 각을 없애지 않았음. 중앙부에는 목곽 두는 곳에 얕은 홈이 파여 있는데 홈의 깊이는 2㎝이며 주위 둘레는 모서리를 없앴고 경사졌음. 표면은 다듬어서 매끄러움. 관상 받침은 5개의 頭形 方足이며, 方足은 중간의 비교적 커다란 것이 윗너비(上寬) 30㎝, 아랫너비(下寬) 19㎝, 높이 8㎝이며 네 모서리의 것은 점차 작아져 윗너비 27㎝, 아래너비 17㎝, 총 높이 18㎝임. 북측의 관상 석재는 비교적 두터우며 제작은 기본적으로 동일하나 5개 방족은 모두 윗너비 27㎝, 아랫너비 20㎝의 방형이며 다리 높이는 7㎝인데 바닥 모서리의 전후 둘레에는 모두 1개의 가는 棱이 파여 있음. 관상 석판 두께는 12㎝, 중간의 凹槽 깊이는 2.5㎝임.(그림 17-K) L. 곽실의 축조과정 각 부위의 석재를 복원한 후에 조립한 곽실은 아래와 같음.(그림 197) 석곽 각 부위의 결구 특징에 의거하여 그 조립과정을 추측하면, 1) 석곽받침 모으기. 2) 후벽 안치. 후벽석(後壁石) 체적이 비교적 크기 때문에 榫卯를 맞출 때 측벽석과 달리 이동시키는 것이 쉽지 않음. 3) 뚫린 홈(槽)은 榫에 맞추어 양 측벽을 안치. 4) 관상 안치와 함께 목곽을 조립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거대한 관상은 석곽의 작은 문을 통과할 수 없음. 5) 前壁을 세우는 순서는 아래에서 위로함. 6) 卯에 맞추어 지붕면석을 덮음. 7) 正脊石으로 누름. 8) 門扉 안치. 조립후의 석곽 각로함. 엄밀하게 덮어씌우는데 전후좌우에 모두 각기 다른 방향의 榫卯, 卡槽와 연결되어 있고, 외육 덮묘실의 榫벽 사이와의 틈에 작은 돌들로 가득 채웠고, 흔들리거나 榫이 이탈할 가능성은 거의 없음. (그림 18) 석곽 각 부위는 그 양측 및 후벽을 조립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덮묘실에서 협소한 공간 내부에서 완성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석곽의 안치는 묘실의 축조와 동시에 진행되어 卄槽로 추정됨. 묘실의 기초가 완성된 후에 먼저 석곽을 안치하는 것이 공간과 조명을 충분히 얻을 수 있을 것이며, (묘실) 세 측벽석이 다 세워진 후에야 묘실축조가 완성되었음. 묘실 담벽이 높아 지붕면석과 용마루석을 안치하는데 매우 유리하였을 것임. 지금 묘실 내벽의 몇 군데는 밖으로 돌출하여 석곽벽과 덮여진 石榫을 떠받치고 있는데 역시 이때 축조되어졌을 것임. 묘 내 마무리 후, 천정돌을 덮기 시작하고, 연도만을 남기고 최후의 안치를 기다림. 구축과정상, 묘상의 건축은 안장 또는 광개토왕비 중의 갑인년 ‘遷就山陵’ 이전에 완성했을 것임. 복원후의 石槨 面寬 3m, 內寬 2.68m이며 두 처마의 최대 너비 3.19m임. 縱長 2.74m, 內長 2.4m, 용마루 最長 2.92m, 전체 높이 2.48m, 內高 13.5~20.2m임. 석곽문의 너비 1.6m, 높이 1.9m임. 두 棺床은 잔석 더미가 놓인 자리에 근거하여 복원해 두었는데, 좌측(북쪽)은 大棺床을 두고 우측(남쪽)에는 小棺床을 두었음. 이것은 남녀 묘주를 부장한 것으로 추정. 출토유물과 관련하여 1990년도 구덩이 속의 유물은 앞에 “G”자, 2003년 고분 아래 돌 틈과 보호석 아래의 구덩이 속의 유물은 앞에 “D”자, 고분 아래 배장묘 속의 유물은 앞에 “P”자를 붙임. 유물번호 맨 앞의 숫자는 출토연도임.역사적 의미 태왕릉은 대형의 석실계단적석총에 속함. 형식상, 태왕릉은 지표로부터 10-11m 높이의 평대를 조성한 뒤에 복두형의 묘실을 중앙에 축조하고 봉석한 뒤에 조성된 이중의 복두형의 외관은 이미 알려진 왕릉 형식에서는 많이 보이지 않는 완전 새로운 형식임. 구조상, 태왕릉의 묘실과 계단은 동시에 축조되었는데 계단은 묘실의 높이를 증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묘실 기초의 보호에 더욱 중점을 두는 것임. 이와 동일한 비교적 이른 계단식 묘에서는 동일하지 않은 점이 있는 듯함. 전체적인 구조를 보면, 태왕릉은 넓은 묘역, 배장묘, 제대, 묘지 등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왕릉의 대표로 의심할 여지가 없음. 이외에도 넓은 범위에 화강암을 사용하였고, 석재는 가공하여 가장자리에 몰딩을 주었음. 산수·배수·보호석을 설치하는 합리성 등이 고구려 적석총 가운데 독보적 지위를 보여줌. 과거 알려진 바에 의하면 집안 일대에서 석실이 있는 왕릉은 태왕릉, 천추총, 장군총뿐이었음. 세 왕릉을 비교하면 장군총이 위에서 아래까지 석재 가공이 정연하고 묘실 바닥에는 기초시설이 건축되어 있어서 축조 형태가 가장 아름다움. 천추총은 태왕릉의 규모와 그 차가 크지 않지만 석재가 비교적 조잡하고 장대석 표면의 가공이 태왕릉이나 장군총에 미치지 못함. 따라서 고분 형식에 따른 축조 시기는 태왕릉이 천추총과 장군총 사이에 위치함. 묘상 와당을 보면, 천추총은 단판의 6등분 연화도안을 흔히 볼 수 있으며 일정량의 권운문 와당도 있음. 장군총에는 8등분 연화와당만이 있으며, 태왕릉은 6등분의 연판이 주를 이루고 소량의 작은 6등분 연판과 8등분 연판이 있음. 즉 태왕릉의 연화와당은 천추총과 장군총의 연화와당이 변화하는 중간단계에 위치하고 있음. 따라서 태왕릉은 평양천도 이전의 세 왕의 중간에 위치함. 2003년 조사 당시에 태왕릉 주위에서 “辛卯年, 好太王…”이란 명문이 새겨진 청동방울을 발견되었는데 태왕릉의 묘주가 광개토대왕임을 확인할 수 있음. 광개토왕릉비문에 의하면, 호태왕은 “28세에 왕위에 올라 39세에 사망”하였는데 그 재위 연도는 신묘년과 부합함. 즉 광개토왕이 왕이 된 후에 방울을 제조한 것이 타당함. 이전에 방울을 만들면 방울 위에는 호태왕이랑 號가 있을 수 없고, 차후에 만든 방울이라면 신묘년이란 글자가 있을 수 없음. 지금 방울에는 동시에 “辛卯年好太王”이란 6자가 새겨져 있는데 우연히 맞은 것이 아니라 漢代에 많이 보이던 전문 설비와 같이 매장한 東園 秘器임. 호태왕 “宴駕”의 해는 412년이며, 이 때 집안에 왕릉을 건축할 자격이 있는 이는 장수왕임. 한편 집안에는 태왕릉보다 왕릉 구조로 더욱 완비된 장군총이 있기 때문에, 장군총은 장수왕릉임을 확인할 수 있으며, 태왕릉은 곧 광개토왕릉임. 광개토왕릉이 처음 축조되기 시작한 연대는 비록 단정할 수 없으나 391년이며, 사용기간은 확실히 東晋 安帝 義熙 10년 곧 414년으로 광개토왕이 “遷就山陵”하여 안장한 때임. 중국학계에서는 광개토왕릉비와 태왕릉을 결부시켜 태왕릉의 묘주를 광개토왕으로 보고 있으며, 한국학계에서도 이에 동의하는 견해도 있지만(공석구, 조법종), 부장된 등자의 연대나 고분의 입지조건, 연화문 와당의 편년 등을 근거로 고국양왕릉으로 보는 입장도 있다(이희준, 여호규, 임기환). 이외에도 고국원왕의 무덤으로 보기도 하지만, 4세기중엽 이전으로 연대가 올라갈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태왕릉 묘상 건축을 보면 묘상 기와편은 비교적 많으며, 묘비의 1/2 면적에서 암키와 10.6㎡와 수키와 0.9㎡를 채집했음. 암키와 잔편은 弧度가 작기 때문에 그에 상당한 면적에 대한 추산은 오차가 크지 않음. 단층 암키와는 평균 두께가 8㎝임을 고려한다면(틈과 弧度 포함) 그 면적은 약 130㎡가 펼쳐졌으며, 아직 채집되지 않은 다른 절반이 더해져 대략 250㎡ 정도에 이름. 태왕릉 묘실의 정상부 면적은 북측변의 길이가 14m로 추산되어 196㎡ 정도이며, 묘실 밖의 평대 면적은 400㎡를 초과하지 않음. 만일 수키와가 덮고 있을 때의 중복 면적을 살펴 다시 암키와 사이에서 상호의 연결을 제외한다면 이 기와들이 묘실 밖의 평대를 모두 덮는 것은 전혀 가능성이 없음. 때문에 태왕릉의 묘상 건축이 덮고 보호하는 것은 오직 묘실 부분이라고 추정됨. 묘 위와 묘 아래의 적토를 발굴하는 중에 釘, 鋦 및 기타 목조 구조상의 금속 부품의 선택에 주의하여 결과적으로 꺽쇠못(鋦釘) 1점, 鐵釘·鐵泡釘 8점이 발견되었음. 이에 의하면 기본적으로 태왕릉의 묘상에 목조 구조의 건축이 없었다고 인정할 수 있음. 또한 묘상 적토와 노출된 돌 중에서 백회와 거칠게 섞인 흙덩어리를 매우 보기 드물기 때문에 대량의 암키와는 황토와 백회를 충분히 이용하여 직접 묘정 위에 발랐다고 추정됨. 일제시대부터 광개토왕릉비와 태왕릉 및 장군총의 관계에 대해 묘주 문제와 연관되어 여러 설이 제기됨. 지내굉은 태왕릉에서 출토된 명문 전돌의 ‘태왕릉’이란 표기에 주목하여 광개토왕비와 결합해 태왕릉을 광개토왕에 비정하였고, 등전량책 등도 이 견해에 동조함. 관야정은 장군총을 호태왕릉에 비정하는데 광개토왕릉비의 위치를 주요 근거로 삼고 있음. 2003년에 발굴 조사한 중국은 광개토왕비를 율령비로 삼고 있음. 태왕릉은 완전한 능역에 가까우나 광개토왕비는 그 안에 존재하지 않음. 광개토왕비와 태왕릉 사이는 EG26-EG28 탐색구덩이를 파고 조사하였으나 “神道”· “參道” 등이 일정한 규격의 통로를 갖추고 있지 않으며 이것은 광개토왕비가 묘비라는 설을 부정하게 함. 과거의 연구에서 일찍이 많은 학자들은 광개토왕비와 장군총의 마주보는 방향이 일치한다는 점에 주목하였으나 결론은 다양하였음. 광개토왕비 비문에 기재된 4항의 내용을 보면, 첫째 항은 건국설화가 서설을 이루고 있으며, 둘째 항은 광개토왕의 죽음이 서술되었으며, 셋째 항은 광개토왕의 공훈에 대한 찬송이며, 넷째 항은 수묘 연호에 대한 율령이 새겨져 있음. 4항의 내용은 마지막의 3·4항의 기재가 가장 상세함. 비 건립의 동기는 광개토왕이 살아 있을 때의 敎言을 새기는데 있었는데 교언의 내용은 수묘 제도의 운용방안이었음. 따라서 광개토왕비는 율령비에 해당하며, 능역에 포함되지 않는 것 역시 당연함.자연환경 고분군 서쪽이 집안 시내에서 약 4㎞ 떨어져 있는 우산 남쪽 기슭의 작은언덕 위에 위치함. 고분 중심지 지리좌표는 동경 126˚ 12’ 35.5”, 북위 41˚ 8’ 30.7”임. 고분 남측 100m에는 집안-청석간 도로와 집안과 조선 만포시를 연결하는 철로가 각각 있으며, 고분 북쪽으로 鄕路가 있음. 고분 서쪽에는 고랑이 있는데 속칭 馬蓮河라는 시냇물이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들러 들어감. 고분 동북 360m의 도로변에는 태왕릉과 밀접한 상관을 지닌 광개토대왕릉비가 위치함. 태왕릉 500m 범위 내의 고분들을 보면, 우산 540호모료 편호된 대형 계단광실묘는 연대가 조금 이르며, 그 외 소형 봉토동실묘들은 연대가 매우 늦음. 태왕릉 주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고구려 왕릉이 다수 있는데, 떨어져 있는 거리가 가까운 것은 동측의 임강총과 서북측의 우산 992호분은 직선거리로 약 700~900m이며, 조금 먼 것은 장군총과 우산 2119호분이 있음.유물정보 청동 부뚜막 1점, 청동 방울 3점, 청동 동전 1점, 철제 끌 2점, 철제 도끼 1점, 철제 穿 1점, 철제 고리 1점, 철제 꺾쇠못(鋦釘) 1점, 철제 泡釘 3점, 철제 말굽바닥(蹄掌) 5점, 철제 바닥못(掌釘) 2점, 철제 칼 6점, 철촉 8점, 철제 긴못(長釘) 2점, 철제 찰갑편 28점, 금제 鉈尾 1점, 금제 연결못(柳釘), 금사(金絲) 2점, 금제 보요식(步搖飾) 30점, 금동 보요관(步搖冠) 2점, 금동 띠형보요(帶形步搖) 4점, 금동 봉황날개 보요(鳳翅步搖) 1점, 금동 보요잔편 4점, 금동 우산모양 보요(傘座步搖) 5점, 금동 꽃모양 보요(花座步搖) 1점, 금동 泡座步搖 8점, 금동 띠형장식(帶形飾) 3점, 금동 조형장식(條形飾) 5점, 금동 고리형장식(環形飾) 3점, 금동 편형장식(片形飾) 4점, 금동 이형장식(異形飾) 1점, 금동 화형장식(花形飾) 2점, 금동 구슬형장식(珠形飾) 2점, 금동 투각장식(鏤空飾) 1점, 금동 관식(冠飾) 5점, 금동 편식(片飾) 8점, 금동 대식(帶飾) 1점, 금동 장막걸개(幔架) 1점, 금동 말띠꾸미개(節約) 3점, 금동 말띠드리개(鞧飾) 1점, 금동 등자(馬鐙) 1점, 금동 거울꼭지(鉈尾) 3점, 금동 자물단추(帶銙) 1점, 금동 허리띠고리(帶卡) 2점, 금동 띠고리(帶環) 1점, 금동 잡편(卡片) 3점, 금동 장구(帳鉤) 3점, 금동 꺽쇠못(鋦釘) 2점, 금동 포정(泡釘) 5점, 금동 신발못(鞋釘) 1점, 금동 책상다리(案足) 9점, 와당 21점, 명문전돌 8점, 화문전돌 5점, 회색전돌 2점, 무문전돌 1점, 무문 수키와 4점, 처마기와(檐頭板瓦) 33점, 승문암키와 5점, 문자부호 기와 6점, 압축화문기와 1점, 계수부호 기와 8점, 수키와 1점, 料珠 2점, 옥구슬(瑪瑙珠) 2점, 건축구조물 1점, 파수 1점, 완(瓷碗)1점, 망추 1점참고문헌 · 朝鮮總督府, 『朝鮮古蹟圖譜』 1, 1915 · 鳥居龍藏, 「南満州調査報告」『鳥居龍藏全集』 10, 朝日新聞社, 1976 · 池內宏, 『通溝』 上: 滿洲國通化省輯安縣高句麗遺蹟, 日滿文化協會, 1938 · 關野貞, 「滿洲輯安縣及び平壤附近に於ける高句麗時代の遺跡(一·二)」『考古學雜誌』 5-3·4, 日本考古學會, 1914 · 關野貞, 「滿洲國輯安縣に於ける高句麗時代の遺跡」『朝鮮の建築と藝術』, 岩波書店, 1941 · 三宅俊成, 『東北アシア考古學の硏究』, 國書刋行會, 1975 · 三上次男, 「輯安行 - 高句麗時代の遺跡調査」『歷史地理』 71-1, 日本歷史地理硏究會, 1938 · 三上次男, 「東滿風土雜記」『高句麗と渤海』, 吉川弘文館, 1990 · 藤田亮策, 「通溝附近の古墳と高句麗の墓制」『池內博士還曆記念東洋史論叢』 164, 座右寶刊行會, 1940 · 藤田亮策, 「通溝附近の古墳と高句麗の墓制」『朝鮮考古學硏究』 (再收錄), 高桐書院, 1948 · 浜田耕策, 「高句麗広開土王陵墓比定論の再検討」『朝鮮学報』 119·120, 朝鮮学会, 1986 · 永島暉臣慎, 「集安の高句麗遺跡」『好太王碑と集安の壁畵古墳』, 木耳社, 1988 · 西谷正, 「高句麗王陵コンプレックス」『史淵』 134, 九大史學會, 1997 · 門田誠一, 「高句麗王陵域における広開土王碑の相対的位置-「墓上立碑」の再吟味を通して」『鷹陵史学』 24, 鷹陵史学会, 1998 · 蘇才, 「集安高句麗遺跡調査簡記」『吉林省文物工作通訊』, 1957 · 吉林省博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3 · 國家文物局 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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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스트여닫기 우산하 0540호묘(禹山下 0540號墓) 출토지 길림성 집안시 태왕향 대비촌(吉林省 集安市 太王鄉 大碑村)연대 5세기 전후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66길림성문물관리위원회, 길림성박물관, 집안현물관소(吉林省文物管理委員會, 吉林省博物館, 集安縣文管所)통구고분군에 대한 조사 및 실측 시 발견되어 禹山下540號墓라고 편호하고, 간단히 JYM540으로 기록함.1997길림성문물관리위원회, 길림성박물관, 집안현문관소(吉林省文物管理委員會, 吉林省博物館, 集安縣文管所)변 길이 39m, 높이 9m임을 실측함. 특대형 계단적석석실묘임을 확정함.2003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9월 15일에서 11월 16일까지 진행됨.王志剛, 王昭 (이상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郜炳坤(長白縣文物管理所)이 참여함.집안시 고구려유적에 대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신고하는 과정 중, 왕릉으로 추정함. 가장 먼저 묘의 표면과 가장자리를 중점으로 발굴함. 이후 묘도, 이실, 광실을 정리함. 묘의 축조방법, 이실과 광실구조, 葬具葬法 등을 이해함. 동시에 금동기, 동기, 철기, 도기 등 439점의 유물이 출토됨.구조특징 우산하 540호묘는 촌락 가운데 있어서 보존정황에 매우 차이가 있음. 묘장 남부와 동북 모서리는 이미 민가가 점거함. 서북모서리는 도로가 통과하고 있음. 동·서·북측에는 생활쓰레기가 쌓여 있음. 묘장은 파괴가 심함. 발굴 전 묘 표면에는 석재가 선명하게 보였음. 묘 위에는 함몰갱 여러 개가 있었음. 묘 꼭대기 네 주변에 광실 네 벽석이 일정수량 있었음. 당시 촌민의 말에 의하면, 묘 표면에는 원래 형체가 거대한 석재가 있었다고 함. 1970년대 전후에 석재를 쪼개서, 다른 용도로 쓰고자 옮겼다고 함. 남아 있는 화강암은 장방형인데, 묘장 서측면에 2개가 남아 있고, 남측면 묘도 입구에 1개가 남아 있는데, 쪼개진 후에 옮겨진 계단석 잔편임. 대형계단적석묘임. 고분 규모는 1997년(2002년 보고서) 조사에서 변 길이 39m, 높이 9m로 보고되었다가 2009년 보고서에서 남북 너비 34.5m, 동서 길이 약 31.5m, 남아 있는 중심 높이 약 5.2m로 재보고됨. 묘장 네변 모두 파손되었고 평면은 불규칙형임. 동남·서남 轉角은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음. 동북·서북 轉角 모두 圓角임. 묘장 주변의 지층을 살펴보면, 表土層 아래는 황갈색 生土인데, 생토의 질은 단단하고, 비교적 많은 깬돌을 포함하고 있음. 묘장은 생토층 위에 직접 축조함. 지하 기초는 아직 발견되지 않음. 묘장 계단석은 이미 결실됨. 묘 위의 표토층 아래에 내부의 묘장주체가 직접 노출됨. 해부한 정황을 보면, 우산하 540호묘 안에서 주체를 다져 메운 것은 황점토를 작은 강돌과 혼합하여 다져 쌓은 것으로, 비교적 견고함. 쌓여진 흙의 중상부에 비교적 커다란 돌이 일부 있음. 일부 석재는 꼭대기면이 그림. 우산하 540호묘 평·단면도(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2009 「集安禹山540號墓淸理報告」 『北方文物』2009-1) 지표 밖으로 노출되어 있음. 석재 대부분은 표면이 비교적 圓緩한 강돌이고, 일부 가공을 거치지 않은 자연산돌이 있음. 이러한 유형의 석재는 큰 것은 1m, 작은 것은 0.4m보다 작지 않은데, 대부분 직경은 0.6~0.8m 임. 현재 남아 있는 석재배열은 비교적 규칙적인데, 대부분 원래 위치에 있고, 일부만이 약간 밖으로 무너졌거나 자리를 벗어남. 평면상을 보면, 이들 대형 석재는 대다수 배열분포하며, 동열의 상호 인접한 석재는 거리가 가깝고, 상호 인접한 각 열의 석재 간에는 비교적 고정된 거리와 비고가 있어 계단석 바닥부 또는 내부의 계단 기초석일 가능성이 있음. 인접한 열의 큰 돌 사이에는 부분적으로 작은 강돌로 층층이 쌓아 메웠는데 묘장의 안정성을 증강하기 위함임. 묘 표면에 계단석은 3개가 남아 있음. 장 네 측면 계단기석 정황은 차이가 있는데, 높이는 거의 같고, 계단기석은 모두 5층으로 나눌 수 있음. 밑에서 위로 1~3층의 층 사이의 거리는 약 2.5m이고, 3~5층의 층 사이의 거리는 2m이며, 층 사이의 높이 차이는 0.5m 정도임. 그 가운데 3·4·5층 계단기석은 묘장 네 측면 모두 남아 있어 신뢰도가 비교적 높음. 1·2층 계단기석은 묘장 서측과 북측에서 발견되는데, 계단기석의 수량은 비교적 적게 남아 있어 추측되는 계단 위치는 확실하게 보이지 않음. 3·4·5층 계단기석의 사이간 거리·높이차이 수치·규율적인 배열을 토대로 추측해 볼 때, 묘장은 현재 남아 있는 규모이고, 최소한 5층 계단이었을 것으로 보임. 그 밖에 서남모서리에서 앞서 추정한 1층 계단 밖에는 생토 위에 무덤 내부를 메운 흙과 동일한 황점토가 섞인 강돌층이 여전히 보이는데, 밀도는 무덤 내부의 분토층에는 미치지 못함. 이 층에는 대부분이 지표에 노출된 석재 하나가 남아 있어 바닥부는 이 층 내부의 대석에 위치함. 이 대석은 기타 계단기석의 규격과 재질이 같은데, 이로 볼 때, 원래 6층 계단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음. 다만 이 층의 위치가 지나치게 고립되고, 그 아래의 황토가 섞인 강돌층 면적이 지나치게 적기 때문에 그 돌이 위치 이동이 있었는지에 대해 확정할 수 없음. 계단 기석의 수량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지만, 묘장 내부 塡土의 보존 범위와 묘장 서측에 인접한 북측면의 1층 계단기석의 밖에는 이미 묘장 塡土가 없음. 이로써 묘장의 1층 계단이라 할 수 없음. 광실은 4단 계단 위에 축조함. 전체적으로 묘 꼭대기로 돌출됨. 평면은 정방형에 가까운데, 상부는 이미 파괴됨. 정리 전 광실 안에는 대량의 黑土와 깬돌이 쌓여 있었음. 광실 바깥벽 동·서·북측의 남아 있는 높이는 1.5~1.7m이고, 남측의 남아 있는 높이는 1.3m 임. 광실 안팎으로 10여 개의 붕괴된 광실측벽에서 砌石이 나왔는데, 원래 높이는 1.7m보다 낮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됨. 광실 평면은 장방형임. 사용된 돌은 대부분 가공하지 않은 천연화강암으로, 규격은 같지 않은데, 큰 것은 길이 2.6m, 너비 1.5m, 두께 1m이고, 작은 것은 길이 약 0.4m, 높이 0.2m 임. 동·서·북 세 벽은 2층석재로 쌓아 축조하였으며, 남벽은 단층으로 축조하였고, 일부는 비교적 큰 강돌 혹은 작은 돌을 사용하여 평평하지 않을 곳을 보충하였으며, 돌의 틈 사이에는 강돌이 들어간 백회로 채웠는데, 광실 내벽에는 두께 5~10㎝의 백회면을 깔았음. 광실외벽은 자연석면이 노출되어 있음. 현재 보존은 비교적 차이가 있는데, 북벽의 外側 墻石은 밖으로 넘어 쏟아졌고, 안팎 墻石 사이의 틈은 0.5~0.8m에 달하는데, 안팎 墻石 사이는 黑褐土로 채웠음. 측벽이 붕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임. 동벽 外側 墻石 보존은 약간 양호한데, 外側 墻石은 비교적 크고, 남부 두 개의 외벽석의 두께는 1.5m이며, 내벽에 사용된 돌은 약간 작고, 광실측벽 두께는 약 2.5m임. 내외벽 砌石은 자연형태로 서로 맞물리고, 견고를 위해서 가지런하게 쌓았으며, 안팎의 장석 사이는 강돌이 들어간 백회로 채웠음. 동벽 내측 장석은 변 길이가 5.2m, 남은 높이는 1.1m 임. 1층의 장석이 남아 있음. 형태가 비교적 큰 3개의 돌로 축조하였는데, 가공을 하지 않아, 매우 정연하지 않고, 가장 작은 돌은 길이가 약 1m, 가장 큰 돌은 길이 2.6m, 너비 1.5m, 두께 1m 정도임. 장석은 간단하게 쌓아올렸는데, 돌 사이의 틈은 비교적 크고, 모두 백회가 들어간 강돌로 채워 평평하게 하였음. 서벽 내측 장석은 변 길이가 5.25m, 남은 높이는 1m 임. 남아 있는 돌은 2층임. 바닥층 墻石은 형태가 비교적 큰 3개의 화강암으로 축조하였고, 북쪽 끝에 남아 있는 한 개의 비교적 작은 틈은 작은 형태의 돌로 채웠음. 위층에는 돌 4개가 남아 있는데, 형태는 모두 정연하지 않고, 돌의 틈 사이는 작을 돌로 채웠음. 북벽 내측 墻石은 길이 5.4m 임. 사용된 석재는 비교적 작고, 남아 있는 최고 높이는 약 1.05m 임. 석재의 높이는 각각 다르고, 쌓음에 있어 규칙성이 없음. 현재 墻石 3층이 남아 있음. 바닥층의 채석형태는 비교적 큰데, 길이는 0.95m~1.3m이고, 높이와 두께는 같지 않음. 위층의 형태는 장방형에 가까운 작은 돌임. 작은 돌은 길이 0.4~0.7m 임. 광실 남벽의 길이는 약 5.4m임. 묘도로 인해 동서 두 부분으로 나눠짐. 묘도 동측의 남벽은 길이 약 1.9m, 두께 1.5m임. 현재 2층이 남아 있는데, 남은 높이는 1~1.3m임. 아랫돌은 길이 2.4m, 두께 1.5m, 높이 1m이고, 내외측과 묘도 한측 모두 정연하게 다듬었음. 위층은 서쪽 끝에서 돌 2개가 남아 있고, 돌 사이의 틈은 강돌이 들어간 백회로 메움. 묘도 서측의 남벽길이는 약 1.7m이고, 안측의 남아 있는 높이는 0.9m, 외측의 남아 있는 높이는 0.9~1.5m 임. 외측변은 정연한 큰 돌을 사용하였는데, 돌의 길이는 약 2.6m 임. 돌 아래는 백회와 작은 강돌을 평평하게 깔았음. 내측은 크기가 다른 돌과 비교적 큰 강돌로 쌓았는데, 사용한 돌의 길이는 0.25~1.05m임. 내측 最上의 1층에 석재가 3개 남아 있는데 장방형 강돌을 평평하게 잘라 내측 단변을 쌓았으며, 쌓은 측변의 돌 사이는 작은 강자갈이 들어간 백회로 메웠고, 아울러 백회로 내벽을 평평하게 발랐는데, 현재 표면의 백회는 대부분 박락되었고, 다만 석벽 바닥부에 남아있는 백회에서 백회벽 두께가 0.05~0.1m임을 볼 수 있음. 광실 바닥은 비교적 큰 돌을 깔았고, 그 위로 백회를 발랐음. 광실 네 주변이 있는 木槨유적에 대해 정리를 아직 하지 않아서, 바닥면의 깔아진 돌의 수는 알 수 없음. 이미 정리된 광실 중심에서는 깔린 바닥석 4개를 볼 수 있는데, 규격은 모두 2m 정도이고, 형태는 정연하지 않지만, 꼭대기 면은 약간 가공한 것으로 보이고, 대체로 평평함. 서로 만나는 곳은 석재 그 자체 표면이 경사가 있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 십자형에 가까운 공간이 생기므로, 빈틈은 백회를 섞어 강돌로 메웠고, 그 위에 다시 백회를 평평하게 발랐음. 광실 안에 채우진 흙은 2층으로 나눌 수 있음. 위층에 채워진 흙은 흑갈색이고, 두께는 0.3m이며, 그 성질은 푸석푸석함. 식물뿌리줄기, 자기편, 철제 못, 동물 뼈 등이 포함되어 있음. 아래층에 채워진 흙은 홍갈색이고, 두께는 0.4m이며, 그 성질은 푸석푸석함. 흙 안에는 많은 홍색 木屑, 木炭碎屑, 백회조각이 포함되어 있었음. 묘도는 4단 계단 위에 축조되었는데, 광실남벽 정중앙에서 약간 서쪽으로 치우쳐 있음. 너비는 1.6m, 길이는 5.1m 임. 방향은 남쪽에서 서쪽으로 약간 치우친 18°임. 묘도 북쪽 끝과 광실바닥면은 같은 높이이고, 약간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비탈이 드러나는데, 경사도는 약 2°임. 묘도 바닥면에 깔린 큰 돌은 꼭대기면이 비교적 평평하고 정연하며, 깔려진 돌 사이의 빈틈은 백회가 들어간 강돌로 메웠고, 돌 꼭대기면은 백회를 평평하게 발랐음. 묘도측벽에 쌓아진 돌은 광실남벽에 일부 남아 있을 뿐, 나머지는 결실되었고, 축조방식은 명확하지 않음. 묘도는 형태가 납작하고 얇은 돌로 막혀 있고, 사이의 틈은 강돌과 백회로 채웠음. 광실 남벽 내측에서 묘도 封石 4층을 볼 수 있는데, 남아 있는 높이는 0.75m 임. 이실은 묘도 양측에 위치함. 평면은 장방형이고, 크기는 서로 같은데, 동서 길이는 1.8m, 남북 너비는 1.1m 임. 북벽을 제외하고, 기타 양측벽 모두 이미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음. 북벽은 광실남벽의 외벽을 이용하였고, 표면에는 비교적 두꺼운 백회층을 발랐는데, 현재는 대부분 박락됨. 이실 地面은 비교적 평평하고 정연한 돌을 깔았고, 강돌이 들어간 백회로 메웠으며, 꼭대기면은 백회를 평평하게 발랐음. 이실 바닥면은 묘도 바닥면과 같은 높이임. 파괴가 심한 서쪽 이실 바닥면에서 이실 바닥에 깔려진 돌과 묘도 바닥면에 깔려진 돌이 함께 共用된 동일한 돌이었음을 볼 수 있음. 이실 지면 위에는 白灰帶가 둘러져 있는데, 白灰帶의 두께는 5~10㎝ 임. 동쪽이실 동북모서리에 가장 잘 남아 있는데, 남아 있는 높이는 약 5㎝로, 이에 근거하여 이실이 북벽과 묘도 한쪽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 양면은 본래 석벽으로 쌓은 것을 알 수 있음. 서쪽 이실 동측묘도 封石 바닥부에 높이 2㎝가 남아 있는데 이실 측벽 백회층의 백회 흔적과 유사함. 이 밖에 묘도 바닥면 위에서 묘도 봉석과 동쪽이실 북벽 아래층 축조석의 서측 면 사이에 목판 한토막이 끼여 있음. 목판은 양자의 사이에 옆으로 세워져 놓여 있는데 높이는 약 20㎝, 두께는 약 3.5㎝ 임. 동쪽 이실은 묘도 봉석의 한쪽과 마주하는데, 묘도 봉석에 바싹 붙어서 묘도와 동일 너비의 나무흔적이 발견됨. 많이 썩어서 홍색 흔적만이 남아 있는데, 남은 너비는 약 5㎝임. 묘도 봉석과 동쪽 이실 북벽 아래층 축조석 서측면 사이에 끼여 있는 목판과 동일한 목판일 것으로 추정. 이상의 현상을 추측해 볼 때, 묘실은 묘도의 한쪽에 목질의 폐쇄 문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음. 이실 안에는 주로 백회가 표면에 가득 붙어 있는 강돌·돌·백회잔편들이 퇴적되어 있고, 淤積土는 거의 보이지 않음. 또한 썩은 나무와 목탄은 발견되지 않음. 동쪽 이실에서 출토된 부장품은 비교적 많은데, 부장품은 주로 금동제 車馬具이고, 원래 위치를 잃어버렸음. 대다수 유물은 표면에 백회가 붙어 있고, 일부는 심지어 백회에 완전히 싸여 있음. 광실 아래층에는 棕紅色의 썩은 나무와 검정색 炭屑이 쌓여 있음. 묘실바닥에 점차 가까워질 때마다 썩은 나무와 炭屑은 점차 많아지며, 塡土가 광실 바닥에서 약 0.4m에 이르는 지점까지 정리하면 광실 네 벽 아래에서 너비 약 0.5m 정도의 木炭흔적이 발견됨. 그 안에는 소량의 백회잔편이 들어가 있음. 목탄과 광실 네 벽 사이에 한 줄 너비가 5~10㎝의 순수한 백회가 들어가 있는데, 백회의 성질은 푸석푸석하고, 대부분 조각 상태임. 위층의 두께는 0.05~0.2m로 재질은 푸석푸석하고, 목탄 정리 후 바닥부 목탄의 재질은 비교적 단단하고 순정함. 광실서벽 남부를 해부하여 순정한 목탄아래 백회가 섞인 목탄을 발견함. 다만 가장 낮은 층에는 두께 3~5㎝의 순정한 목탄이 있음. 광실 네 벽 가운데부분을 해부해 보았을 때, 두께 0.3~0.35m의 순수한 목탄층이 발견되었는데, 순수한 목탄층의 너비는 0.5m 정도임. 광실바닥부에서 목탄유적을 제외하고, 광실남부 묘도 양측 여러 지점에서 썩은 나무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썩은 나무의 성질은 매우 부드럽고, 원래 형태는 판별하기 어려움. 광실 동남모서리에 비교적 큰 썩은 나무흔적이 있는데, 두 개의 썩은 나무가 모서리에서 서로 교차하여 직각을 형성하고, 이 두 개의 썩은 나무의 결 역시 직각이 서로 교차하는 형상으로 광실내벽 사이와의 거리는 0.2~0.3m이고, 너비는 모두 약 0.5m 정도임. 동측벽의 썩은 나무는 서부가 직접 광실 바닥면 위에 겹겹이 누르며 쌓았는데 길이는 약 0.8m 이며, 동측벽 동부는 광실동벽 아래 목탄층 위에 겹겹이 누르며 쌓았는데 두께는 약 0.05m 임. 남벽의 썩은 나무는 두께는 비교적 두꺼운 0.1m이고, 길이는 약 1m에 가까움. 서쪽 끝에 대한 해부 결과, 썩은 나무가 목탄의 백회층 위를 누르고 있음이 발견됨. 남벽 중앙에 열려진 묘도와 묘도입구 서측에는 각각 한 개의 썩은 나무가 있는데, 광실 바닥면 위에 달라붙어 있으며, 형태는 모두 불규칙함. 서측벽 가운데에서 약간 북쪽으로 치우진 지점의 木炭帶 바깥에 작은 썩은 나무가 남아 있는데, 길이는 약 30㎝이고, 목문방향은 남북으로 향함. 광실에 쌓여진 흙 안에서 출토된 비교적 많은 꺽쇠는 木槨을 연결하고 고정하기 위한 것이고, 규칙적으로 광실 네 벽 아래에 분포하는 대량의 목탄은 목곽이 불에 태워진 후에 남은 자취임. 광실내벽에는 백회를 발랐고, 그 안에 직접 木槨을 설치하였는데 목곽의 규격은 약 5㎡임. 광실 중, 남부의 바닥면 위에 달라붙은 썩은 나무가 목관의 잔흔일 가능성이 높음. 묘는 일찍이 도굴을 당하였기 때문에, 관못의 원래 위치는 알 수 없고, 나무흔적이 남아 있는데, 광실 안의 관의 수량을 확정하기 어려움. 광실, 이실, 묘장 표면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439점의 유물이 출토됨. 그 가운데 광실에서 가장 많은 386점이 출토됨. 동쪽 이실에서는 50점, 묘 위 쌓여진 흙 중에서 3점의 유물이 출토됨. 묘도와 서쪽 이실에서는 단지 소량의 니질회색 도편만이 출토됨. 동쪽 이실에서 출토된 50점 가운데, 철제 鏨子 1점과 동제 방울 2점을 제외하고. 모두 금동제 車馬具임.역사적 의미 우산하 540호묘에서 출토된 부장품은 상당히 어지럽게 놓여져 있었고, 동물뼈는 심하게 부서져 있어, 명확하게 도굴을 당하였음을 알 수 있음. 광실 안에서 출토된 鐵鑿은 투박하고 두꺼운데, 그 형태가 고구려묘장과 유적지에서 출토된 것과 완전하게 다름. 이로 보아 부장품이 아니고, 후기에 혼입된 유물로 추정되는데, 혹 도굴자들이 사용한 도굴공구로, 묘도 봉석 혹은 목곽을 열고자 하였을 때 사용하였을 가능성도 있음. 광실 바닥면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아, 묘가 도굴된 연대가 비교적 이른 것으로 추정됨. 광실 내의 사이호 잔편은 광실바닥에서 40㎝ 떨어진 쌓여진 흙에서 출토되었고, 동물뼈 또한 대부분 광실 상층의 쌓여진 흙에서 출토되었는데, 묘 꼭대기가 붕괴된 후, 2차 도굴이 있었던 것으로 보임. 광실 내에서 출토된 동물뼈들은 야생동물이 절대 다수로, 물고기·조개·새·포유동물 등 그 종류가 다양한데, 부장품임. 이 외에 광실 안에는 철촉, 망추 등 漁獵공구가 출토되었음. 이로 미루어 볼 때, 묘주인은 생전에 漁獵을 좋아하였던 것으로 추정. 이전에 정리된 고구려 적석묘 가운데, 묘장 내부에 土石이 섞어진 적석묘는 매우 적게 보임. 우산하 540호묘 내부에 黃黏土와 강돌이 혼합되어 쌓여 있고, 특히 黃黏土가 주를 이루는데, 이러한 묘 구조는 아직까지 없음. 이러한 구축방식은 묘장의 견고성을 더하기 위한 것임. 비록 묘장의 地下에 기초를 구축하지 않았고, 계단석 또한 결실 혹은 원래 자리를 이탈하였으나, 묘장은 지금까지 매우 견고성을 유지함. 우산하 540호묘의 정리는 고구려묘장 축조방식과 축조에 대한 진일보한 탐구 및 고구려 적석묘에서 봉토묘의 변화에 있어 중요한 연구 가치를 지님. 우산하 540호묘에 남아 있는 2개의 계단석표면에 가공한 흔적이 없고, 바깥가장자리에 위층 계단석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방지하는 돌기 또한 보이지 않는데, 그 계단석 형태는 태왕릉과 장군총보다 원시적이고, 천추묘에 보다 가까움. 우산하 540호묘의 묘실은 壙室임. 태왕릉과 장군총의 묘실은 석실이고, 천추묘는 비록 묘실은 존재하지는 않지만, 묘 꼭대기에 蓋石 혹은 門楣로 추정되는 거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석실로 추정됨. 이로 볼 때, 우산하 540호묘의 연대는 천추묘보다 이르다고 추정됨. 광실 안에서 출토된 2점의 사이호의 경우, 기체가 작고 둥글며, 최대직경이 기체 중상부임. 전체적으로 나팔형 주둥이가 비교적 낮은 것을 제외하고 형태는 마선구 1호묘에서 출토된 사이시유도기호와 비슷함. 다만 니질의 회색도기인데, 그 연대는 마선구 1호묘에서 출토된 사이시유도기호보다 늦지 않는다고 추정됨. 마선구 1호묘의 연대가 5세기 전후로 추정되는 바, 우산하 540호묘의 연대도 대체로 이와 비슷할 것으로 추정됨. 우산하 540호묘는 남아 있는 변길이가 34.5m로, 규모가 비교적 큰데, 통구고분군에서 우산하 540호묘보다 큰 묘장은 불과 10여기에 불과함. 우산하 540호묘의 광실은 변 길이가 5m 정도인데, 그 광실규모는 고구려 적석묘 중에서 많이 볼 수 없음. 이로 볼 때, 우산하 540호묘의 묘주 신분은 비교적 높다고 여겨짐. 출토된 부장품을 보면, 비록 도굴을 당했어도, 아직도 적지 않은 부장품이 출토되고 있음. 그 가운데 동쪽 이실에서 많은 금동 車馬具가 출토되었고, 광실 안에서도 비교적 많은 금동편들이 출토되었으며, 시유도기와 자기들도 출토되었는데, 이를 보아도 묘주의 신분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음. 우산하 540호묘 주변지세를 보면 비교적 개활하고, 태왕릉을 제외하고 대형 묘장을 볼 수 없음. 묘 위에 사용된 기와는 등급과 규격이 왕릉에서 출토된 기와와 부합함. 위의 분석을 토대로 유추해 볼 때, 묘주는 고구려 18대왕인 고국양왕으로 추정됨. 다만 광실형태를 보았을 때, 그 연대를 천추묘보다 약간 이르다고 할 수 있으므로, 만약 묘가 왕릉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다면, 묘주인은 제17대왕인 소수림왕으로 볼 가능성도 일부 있음. 이 외에 묘장 동북 양측면에 쌓여진 흙에서 매우 작은 포문 기와편이 2개가 발견되면서, 묘 위에서 기와를 사용했다는 것을 증명하기는 어려운데, 이러한 점은 기타 고구려 왕릉과 같지 않은 것임. 고구려 적석석광묘 혹은 광실묘에서는 모두 火葬이 있었는데, 이러한 묘장을 정리하는 과정에서는 熔石과 燒骨이 출토됨. 우산하 540호묘 정리과정에서 비록 목탄과 燒骨이 출토되었지만, 火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 그 이유는 첫 번째, 묘장 광실과 쌓여진 흙 중에서 대량의 목탄이 발견되었지만, 같은 모양으로 비교적 많은 썩은 나무가 발견되었음. 이로 볼 때, 광실 내에 木槨燃燒에 대한 설명은 불충분하므로, 광실 안의 많은 목탄을 근거로 묘장에 화장이 있었다고 설명할 수 없음. 목곽을 건조하는데 대량의 목재가 사용되었는데, 후천적인 자연현상으로 연소하였을 가능성과 도굴자가 불을 내었을 가능성이 있음. 두 번째는 광실 중에서 출토된 많은 동물뼈 가운데, 불에 탄 흔적은 1/4만 보이고 있음. 세 번째, 광실과 이실에서 출토된 사이도기호 편 가운데 적은 부분의 외표면에만 불에 탄 흔적이 있는데, 복원을 해보니, 호 외표면에 불에 탄 흔적이 연접되지 않음. 이로 볼 때 도기표면에 불에 탄 흔적은 기물이 파괴된 후에 형성된 것임. 더욱이 동일기물의 도편이 이실·광실·묘도에서 발견되었는데, 명확하게 도굴자의 도굴과 흐트러트림에 의한 것임. 그러므로 목곽이 불태워진 것은 묘의 도굴 후에 일어났던 일일 가능성이 높음. 목곽연소는 불충분하고, 불에 탄 뼈의 비율도 낮으며, 호 외표면에 불에 탄 흔적이 연접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우산하 540호묘에서는 火葬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음. 즉 5세기 전후한 시기, 고구려적석묘의 葬俗葬法에 중대변화가 있었음. 장속의 이러한 변화는 고구려 적석묘 가운데 광실에서 묘실로 변화하는 모습과 일정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됨.자연환경 우산하 고분군 동남부에 위치. 집안시 동쪽 4㎞ 太王鄕 大碑村에 위치하여, 태왕릉과 동일한 언덕 위에 위치. 자연지세는 태왕릉보다 낮음. 중심지리좌표는 동경 126˚ 12’ 709”, 북위 41˚ 08’ 686”, 해발 253m임. 촌락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음. 묘 동쪽으로 通集도로를 넘어서 임강묘가 있음. 북쪽으로 장군총이 보임. 서남쪽으로 약 200m 떨어진 지점에 태왕릉이 있음. 동쪽으로 150m 떨어진 지점에 광개토태왕릉비가 있음. 서북쪽으로 약 500m 떨어진 지점에 각저묘와 무용묘가 있음.유물정보 철제 鏨 1점, 목흔 1점, 금동기 110점, 철기 37점, 동기 1점, 자기1점, 도기 285점, 시유도기 1점, 수키와 잔편 2점참고문헌 · 孫仁杰·遲勇, 『集安高句麗墓葬』, 香港亞洲出版社, 2007 · 張福有·孫仁杰·遲勇, 「高句麗王陵通考要報」『東北史地』 2007-4, 2007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通溝古墓群1997年調査測繪報告』, 科學出版社, 2002 · 王志剛·宋明雷·郝海波·馬洪·王昭·趙欣·林世香·蘇作威, 「集安禹山540號墓清理報告」『北方文物』 2009-1, 2009

  • 우산하 0678호묘(禹山下 0678號墓)

  • 우산하 0711호묘(禹山下 0711號墓)

  • 우산하 0733호묘(禹山下 0733號墓)

  • 우산하 0742호묘(禹山下 0742號墓)

  • 우산하 0757호묘(禹山下 0757號墓)

  • 우산하 0840호분(禹山下 0840號墓)

  • 우산하 0901호분(禹山下 0901號墓)

  • 리스트여닫기 우산하 0992호묘(禹山下 0992號墓) 출토지 집안시 태왕현 우산촌 (集安市 太王鎮 禹山村)연대 4세기 전후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09 關野貞, 谷井濟一, 栗山俊一 등이 조사함.1966길림성박물관, 집안현문관소(吉林省博物館, 集安縣文官所)통구고분군에 대한 실측조사 때, 禹山墓區 992號墳으로 편성하고, 간단히 JYM992라고 기록.2003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安文榮(長春市 文物保護硏究所), 張雪岩, 孫仁杰(이상 集安市 文物保管所), 孫東文(德惠市 文物管理所), 姚啓龍(九臺市 門物管理所), 邢春光(農安縣 文物管理所) 등이 참여함.덤의 기초(墓基), 계단, 분구 위의 도굴구덩이(盜坑) 등을 조사·정리. 고분 일부분에 대해 절개하여 단면조사하고 동·서·북측에 대한 탐색갱 조사.2004 張福有, 孫仁傑, 遲勇등이 조사함.구조특징 동변 37.5m, 남변38.5m, 서변 36.5m, 북변36.1m, 고분방향 195°.역사적 의미 구 정상에 상당량의 기와가 깔려 있어서 묘상건축물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음. 대가 두 개인 예는 다른 고분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음. 동제 칼집(削鞘)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고구려 왕릉으로 추정. 구려 적석묘의 발전과정 중에 광실묘는 석실묘보다 이른 것으로 대략 3세기에 출현하여 4세기 대에 유행하고, 석실묘는 4세기 말에 출현한 것으로 추정. 또한 우산하 992호묘 계단축조방식은 천추묘와 태왕릉 등 보다 이름. 이로 볼 때 우산하 992호묘의 연대는 4세기 전후로 비정됨. 상에서 출토된 “戊戌”명 와당에서 “무술”년은 고분축조연대 4세기경이라고 할 때, 278년, 338년, 398년이 후보가 될 수 있음. 278년은 서천왕 9년인데, 서천왕묘는 모용씨군대에게 도굴을 당한 기사로 미루어 칠성산211호묘로 추정. 398년은 광개토대왕 7년인데 우산 992호묘에서 출토된 와당을 비교해 볼 때 태왕릉시기와 관련이 없음. 338년은 고국원왕 8년으로 묘장형태, 와당풍격 등이 시대와 상당수 부합하므로 우산하992호묘는 고국원왕의 릉으로 추정. 2003년 국내성 발굴 중에 현 체육장 灰坑에서 A형와당이 발견되었는데, 출토당시 상층에 동진시대 靑瓷器가 있었음. 이것을 참고할 때 상술한 연대범위와 서로 부합.자연환경 고분 북쪽 50m 밖에 (通)化 集(安)鐵路와 集(安)錫(林浩特)公路가 있음. 고분 남쪽 250m에 禹山村 자연촌락이 위치. 고분 동남으로 약 1㎞에는 태왕릉이 위치. 고분 서남으로 약 900m에는 우산2110호묘가 위치. 북으로 禹山이 있고, 남쪽으로 압록강, 동쪽으로 龍山, 서쪽으로 國內城이 보임.유물정보 금제 보요장식 2점, 금제 요엽 1점, 금제 편형(片形)장식 1점, 금동제 칼집(削鞘)1점, 금동제 보요장식 4점, 금동제 요엽 19점, 금동편 장식 1점, 동제 꺽쇠(鋦釘)4점, 동제 휘장고리(帳鈎)1점, 동제 못 2점, 철제 손칼(削) 1점, 철제 허리띠고리(帶卞)1점, 철제 찰갑 2점, 철제 갈고리창 1점, 숫돌(砥石) 1점, 토기구연부 2점, 평저호 1점, 수막새 25점, 평기와 9점참고문헌 · 藤田亮策, 「通溝附近の古墳と高句麗の墓制」『朝鮮考古學硏究』 (再收錄), 高桐書院, 1948 · 傅佳欣, 『集安高句麗王陵』, 文物出版社, 2004 · 張福有·孫仁傑·遲勇, 「高句麗王陵通考要報」『東北史地』 2007-4, 2007

  • 리스트여닫기 우산하 1041호묘(禹山下 1041號墓) 출토지 통구중부 태왕진 우산촌(通溝中部 太王鎭 禹山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66길림성박물관, 집안현문관소(吉林省博物館, 集安縣文管所)통구묘군에 대한 실측조사때, 우산하 1041호묘로 편호.1974길림성박물관, 집안현문물보관소(吉林省博物館, 集安縣文物保管所)方起東, 林至德, 高至武에 의해 문화대혁명 기간 중, 太王公社 사원이 붕괴된 고구려 적석묘에서 벽화를 발견. 길림성박물관과 집안현문물보관소가 사람을 파견해 조사하고, 붕괴된 묘문 보호조치. 1974년 9월에는 정리 진행.구조특징 方壇階梯石室壁畵墓 방단계제석실벽화묘 외형의 파괴가 너무 심하여, 봉분의 원래형태를 판별하기는 쉽지 않음. 묘 기단은 서변과 남변에서 서쪽으로 치우친 지점에 기단을 쌓았던 1층 석조만 겨우 남아 있음. 동변에서 북쪽으로 치우친 지점에서는 아직 기단을 쌓았던 석재들이 남아 있음. 남아 있는 기단과 분구를 덮은 자갈의 정황을 볼 때, 원래는 방형 기단을 갖추고 있었다고 추정. 기단의 석조는 정밀한 가공을 거쳐, 형태는 정연하고, 바깥측면에는 수직으로 끌질한 흔적이 있으며, 윗면의 바깥가장자리를 돌아가며 돌기가 돌출되어 있음. 기단 중간에 자갈이 쌓여 있음. 분구 상부의 자갈은 비교적 큰데, 50×50×30㎝ 이상임. 원래는 묘 꼭대기를 덮었던 것으로 추정. 현재 중앙부분에 묘실의 개정석이 노출되어 있지만, 주위의 자갈이 쌓인 높이를 참고해 볼 때, 분구의 자갈은 원래 묘실의 꼭대기부분도 덮고 있었다고 추정됨. 네 변의 기단 위로는 계단이 축조되어 있었다고 추정. 정리할 때, 묘실은 잔 숯으로 가득 쌓여 있었는데, 두께는 약 60㎝ 정도임. 그 위에 석판을 세워 벽을 만듦. 벽면의 회가 벗겨진 곳에서 벽면에 수직으로 내려가면서 가공한 흔적이 평행을 이루고 있음. 묘실 남벽은 수직이고, 동벽과 북벽은 안으로 기울어져 있음. 동북모서리 아랫부분 석재에 생긴 틈에는 돌로 메웠음. 각 벽의 상방 내측에는 모두 홈을 파서, 천정석 아랫부분의 볼록 튀어 나온 부분과 맞추어 끼워 넣었음. 천정석은 판면 면적이 약 10㎡이고, 두께는 50㎝ 정도임. 묘실을 올려다보면, 개정석의 네 변은 평탄하게 다듬었고, 가운데부분은 약간 안으로 굽어 융기되어 있음. 천정석 앞쪽(서변)에는 상면을 따라 간단한 물길을 만들었고, 하면에는 홈을 파내면서, 직각의 처마를 형성. 처마바깥하부 남북양측에는 횡렬의 가는 홈을 파냈는데, 그 간격너비는 5㎝를 넘지 않음. 이렇게 천정석 아래에 좁은 홈을 새기는 방법은 장군묘의 배장묘에서 보이는 방법인데, 윗면에서 흐르는 물이 개정석 처마를 따라 묘실 안으로 스며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 묘실바닥에는 세 개의 석판이 횡방향으로 깔려 있음. 묘실바닥에 깔린 세 개의 석판 위로 장방형의 관대가 놓여 있음. 관대는 석판 통째를 다듬어서 가지런하나, 아랫면은 가공을 하지 않았고, 틈새를 작은 자갈로 채워 넣어 관대를 받침. 길이는 2.8m, 너비는 1.24m, 두께는 0.1~0.18m, 전체 높이는 0.2~0.3m 임. 묘실 서쪽방면에는 벽이 없고, 바로 묘도가 묘실 밖으로 나 있음. 묘도 바닥은 묘실바닥보다 75㎝ 높은데, 평평한 커다란 석재를 가지런하게 겹쳐 깔았음. 너비는 묘실과 비슷함. 안쪽 끝은 약간 뻗쳐져서 묘도로 들어감. 묘도의 좌우 양벽은 파괴가 매우 심한데, 약간 다듬은 석재를 이용해서 쌓았고, 그 사이간의 거리(즉 묘도의 너비)는 묘실보다 약간 좁음. 묘도 바닥 윗면에 쌓여있는 석재는 묘실의 안쪽 끝 가장자리로 뻗어 들어가고, 각각 한 줄의 홈이 있으며, 천정석의 바깥 처마의 가늘게 파인 홈과 서로 마주하며 약간 밖으로 기울어져 있음. 용도는 알 수 없으나, 혹 묘도바닥에 고인 물이 직접 묘실로 흘러들어 가는 것을 막는 일종의 시설물일 수도 있음. 묘실 서부 입구 근처에는 적지 않은 대강 가공한 석재와 많은 란석·황사·석회가 뒤섞인 三合土가 쌓여 있었음. 당초에 석벽을 쌓아 묘실의 흔적을 덮으려 했던 것으로 추정. 벽화에 관해서는 우선 묘실 내의 벽·꼭대기부분·관대, 묘도 바닥의 큰 돌 내측에 이르기까지, 0.5㎝ 두께의 백회가 발라져 있는데, 현재는 묘실꼭대기부분은 아예 없는 등, 대부분 박락. 벽면에 일부 남아 있는 백회표면과 바닥에 떨어진 백회껍질에서 벽화를 볼 수 있음. 바로 백회 위에 벽화를 그림. 묘실 내의 벽화는 대부분 박락됨. 다만 일부 朱砂로 起稿한 듯한 흔적이 남아 있음. 묘실 서쪽방면에는 벽이 없고, 바로 묘도가 묘실 밖으로 나 있음. 묘도 바닥은 묘실바닥보다 75㎝ 높은데, 평평한 커다란 석재를 가지런하게 겹쳐 깔았음. 너비는 묘실과 비슷함. 안쪽 끝은 약간 뻗쳐져서 묘도로 들어가고, 길이는 1.6m 임. 묘도의 좌우 양벽은 파괴가 매우 심한데, 약간 다듬은 석재를 이용해서 쌓았고, 그 사이간의 거리(즉 묘도의 너비)는 묘실보다 약간 좁음. 묘도 바닥 윗면에 쌓여있는 석재는 묘실의 안쪽 끝 가장자리로 뻗어 들어가고, 각각 한 줄의 홈이 있으며, 천정석의 바깥 처마의 가늘게 파인 홈과 서로 마주하며 약간 밖으로 기울어져 있음. 용도는 알 수 없으나, 혹 묘도바닥에 고인 물이 직접 묘실로 흘러들어 가는 것을 막는 일종의 시설물일 수도 있음. 묘실 서부 입구 근처에는 적지 않은 대강 가공한 석재와 많은 란석·황사·석회가 뒤섞인 三合土가 쌓여 있었음. 당초에 석벽을 쌓아 묘실의 흔적을 덮으려 했던 것으로 추정. 동벽(묘도에서 보았을 때 바로 정면에 보이는 벽)에 있는 대들보 아래에는 청회색 가옥이 있고, 우변에는 아직 빨간선으로 윤곽을 그린 斜脊이 있음. 四坡頂으로 추정됨. 처마 아래에는 황색 장막이 늘어져 있음. 장막 아래 가운데부분에서 남쪽으로 치우진 곳에 한 남자가 있음. 황색에 붉은 점이 합해진 衽花衣를 입었고, 홍색으로 테두리를 둘렀으며, 남측을 향해 약간 돌아서 있음. 두 눈은 가늘며 길고, 코는 직절하며, 콧수염은 약간 휘었고, 입술은 선홍색을 띠며, 얼굴은 두텁한데, 당연히 묘주인으로 추정됨. 형상을 윤곽한 묵선은 꼼꼼하면서도 힘차고, 眉目부분의 운필은 가늘며, 면부에는 색을 덧칠해서 갈무리를 함. 동벽전체는 묘주인이 집에서 연회를 베푸는 모습을 그린 것임. 북벽에 있는 대들보 아래에는 정면에서 바라본 연화문이 그려져 있음. 8송이가 배열되어 있는데, 안에서 밖으로 홍색과 녹색을 번갈아가며 그림. 안쪽 변 6송이의 중심에는 구멍이 파여 있음. 그 아래 가운데 부분 안쪽으로 치우친 곳에 사슴의 후반신이 있음. 사슴의 뒷부분 아래쪽으로는 사람이 한명 있는데, 몸은 약간 앞으로 기울어져 있고, 고깔과 같은 절풍을 쓰고 있는 듯하며, 오렌지색 바지를 입고 있고, 자홍색의 장화를 신고 있음. 다시 안쪽으로 가서 기둥에 바짝 다가선 지점에 사람 한 명이 있는데, 네모난 幘을 쓰고 있고, 合衽衣를 입었으며, 허리띠를 매었음. 전체적으로 수렵도 계통으로 파악할 수 있음. 이 외에 북벽에는 ‘팔을 펴고 손가락을 펴는 듯한’ 나뭇가지가 엇갈려 있고, 벽면에 披針形의 녹색낙엽들이 자질구레하게 있음. 남벽은 박락이 심하여 거의 남아 있지 않음. 다만 중앙에서 바깥 아래에 어렴풋하게 사람 1명을 볼 수 있는데, 황색 合衽衣를 입었음. 벽면 상방, 북벽에 보이는 연화문과 대응하는 부분에는 6개의 작은 구멍이 있는데, 원래는 연화문이 그려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 관대에도 백회가 발라져 있고, 얼룩덜룩한 자홍색도 남아 있는데, 어떠한 문양인지는 알 수 없음. 개정석부분은 벽화의 유무를 알 수가 없음. 묘실의 안쪽을 향하고 있는 묘도에 세워진 2개의 석재에는 백회가 발라져 있고, 얼룩덜룩한 자홍색도 남아 있는데, 어떠한 문양인지는 알 수 없음. 묘장은 일찍이 도굴을 당함. 남아 있던 인골과 유물은 대부분 묘실 앞부분에 쌓여 있던 삼합토 중에서 출토됨. 묘도 가운데와 묘실 내에 쌓인 숯의 상층에서도 발견되었으나, 하부에서는 발견되지 않음. 출토유물은 대부분 기구의 부속품에 속함. 전체적으로 개갑 및 마구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함. 이 외에 황색시유도기편과 관곽의 부속품 등도 적지 않게 출토.내부규모 및 특징 1977년 보고서에서 한변 길이 약 20m, 높이 약 2.15m 1984년 보고서에서 한변 길이 약 20m. 997년(2002년 보고서)에 한변 길이 24m, 너비 21m, 높이 3m. 묘실은 거대한 화강암 판석을 이용해서 축조하여 기단의 중앙에 위치함. 평면은 장방형으로, 동서 길이 3.15m, 남북 너비 2.0m, 높이 2.32m. 방향은 245°(2008년 보고서에는 남서쪽 65°)로, 기단과 평행. 묘실 바닥은 지표보다 약간 낮고, 기단의 바닥부와 수평한 높이에 위치하는데, 당초 묘실의 바닥은 지면과 가지런하였다고 추정됨. 묘실의 동․남․북 세벽 아래에는 각각 석조 1개가 깔아져서 묘바닥이 20~25㎝ 높아짐. 묘도 길이 1.6m.역사적 의미 길림성박물관문물공작대(1977)에서 연구한 바, 우산하 1041호묘 묘실의 평면구조, 장벽 아래에 있는 기초석, 물이 스며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꼭대기 돌 바깥처마에 파여 있는 가느다란 홈 등은 장군총의 배장묘와 유사. 다만 구조에 있어서 정교함이 더욱 더해졌고 묘실 바닥부는 지표보다 높지 않음(고구려 전·중기묘의 석실 혹은 묘광의 대부분은 지표보다 높고, 중기 이후의 석실 대부분은 지표와 같음). 일반적으로 장군총의 배장묘 축조연대를 대체로 장군묘와 동시기 혹은 약간 늦은 시기로 추정하므로, 축조연대를 5세기 초엽으로 추정. 구조형태를 볼 때, 우산하 1041호묘의 축조연대는 대략 배장묘보다 이르지 않음. 묘장의 벽화배치, 도안과 풍격 등을 고찰해 볼 때, 통구 12호묘와 마선구 1호묘와 거의 같음. 묘장에서 출토된 유물을 보면, 마선구 1호묘에서 출토된 유물과 대부분 서로 비슷함. 그러므로 우산하 1041호묘의 축조연대는 5세기 중엽으로 파악됨. 우산하 1041호묘가 축조된 5세기 중엽의 고구려묘장에서는 아직 돌을 쌓아 봉분을 조성하는 전통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어(내부구조에는 변화가 있었음), 상당히 농후한 보수성이 반영되어 있는 반면에, 고분벽화는 오히려 유행을 따르고 있음. 이러한 모순 같은 현상은, 신구의 사물교체과정 중의 필연적인 산물임. 역사상 사회경제기초의 변화에 따라 나온 새로운 의식형태이고, 결국 전쟁에서 이김과 아울러 일체의 지난 의식 형태를 대체한 것으로, 새로운 매장관습이 생겨남과 아울러 나날이 광범위하게 유행되어 질 때 잔존하던 옛 매장제도는 그 영향으로 깨끗이 씻겨지는 것임. 결국 점차적으로 양적·질적변화의 근본적인 개조가 이루어짐. 우산하 1041호묘에는 이러한 과정의 자취가 선명하게 반영되어 있음. 과거 일부 학자들은 통구지역의 고구려묘에 대해 “土(벽화묘 모두 여기에 있음)石異時”라고 인식하고, 고구려를 적석묘시기와 봉토묘시기 두 단계로 나누었음. 하지만 우산하 1041호묘의 정리를 통해, 위의 설명이 실제로는 완전히 부합하지 않은 정황을 명확하게 설명해줌. 만약 객관적 사물의 변증발전과정을 존중하지 않고, 간단하고 기계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방법을 채택한다면, 억지로 번잡하게 서로 얽혀있는 변증발전 긴 흐름에 어떤 절대적 한계선을 긋는 것이며, 또한 억지로 고구려매장제도의 전체적인 변화를 이른바 “석분시대”와 “토분시대”라는 단순히 시간상으로 잘라 구분하는 것이 됨. 그렇게 되면 모두 단지 잘못된 길에만 들어서게 되어 과학적인 연구에 혼란을 주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음. 魏存成(1994년)은 사이전연호와 마구의 특징으로 볼 때, 5세기대로 추정. 方起東·劉萱堂(2002년)은 벽화내용의 배치가 통구12호묘와 거의 유사하고, 출토된 철제목심등자가 朝陽 袁臺子墓에서 출토된 등자와 유사하므로, 축조시기는 4세기 중엽~말엽으로 추정.자연환경 통구분지 중부 태왕진 우산촌 1조 촌락 중에 위치. 우산묘구 중부에 위치. 우산 남쪽기슭 전방의 완만한 가장자리에 위치. 지면의 경사도는 약 6°임. 남쪽으로는 큰 도로(우산 남쪽기슭에서 果樹廠村에 이르는 길)가 있고, 도로 건너서는 평탄한 농경지임. 동남쪽으로 약 500m 떨어진 지점에 태왕릉이 있음. 동변 바로 옆에는 작은 시내가 있음. 북쪽으로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이른 시기에 파괴된 3~4기의 적석묘와 작은 봉토석실묘를 제외하고, 다른 묘장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음.유물정보 金銅製 帶具 1개 외 金銅製 10점 銅製 葉 8편 銀製 八棱柱 장식 1개 외 銀製 1점 鐵製 鞍裝 1개, 鐵製 鐙子 1쌍, 철제 鞍板 장식 1점 외 鐵器類 202점 부뚜막 1개 외 사이전연호 3점 麻布 잔편, 漆皮 잔편, 人骨참고문헌 · 吉林省博物館文物工作隊, 「吉林集安的兩座高句麗墓」『考古』 1977-2, 1977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4 · 魏存成, 『高句麗考古』, 吉林大學出版社, 1994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通溝古墓群1997年調査測繪報告』, 科學出版社, 2002 · 方起東·劉萱堂, 「集安下解放第31號高句麗壁畵墓」『北方文物』 2002-3, 2002 · 孫仁杰·違勇, 『集安高句麗墓葬』, 香港亞洲出版社, 2007 · 耿鐵華, 『高句麗古墓壁畵硏究』, 吉林大學出版社, 2008 · 전호태, 「고구려 집안권 벽화고분의 현황과 과제」『蔚山史學』 14, 蔚山大學校史學會, 2009

  • 리스트여닫기 우산하 1080호묘(禹山下 1080號墳) 출토지 집안현성 우산대대 제1생산 마을 (集安縣省 禹山大隊 第1生産 村)연대 고구려 6세기 중․후기.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66길림성박물관, 집안현문관소(吉林省博物館, 集安縣文官所)통구고분군에 대한 실측조사 때, 禹山墓區 1080號墳으로 편호하고, 간단히 JYM1080라고 기록.구조특징 둘레 약 100m, 높이 약 10m. 절두방추형. 고분 동남쪽 모퉁이에는 거대하고 가지런한 기단석이 보존. 봉토의 모퉁이에 돌로 기초를 잡았음을 알 수 있으며 그 규모가 현재 보존되어 있는 것보다 더 클 것으로 추정. 오래 전에 도굴을 당함. 도굴갱의 입구는 옛 분구 남측 가운데 허리이상의 상당히 높은 부위에 위치. 도굴갱은 수직으로 아래로 향했고, 연도 입구의 폐쇄석에 구멍을 내 직접 연도와 현실로 통하게 함. 현실, 호형시설, 연도로 구성되어 있고 일반적인 고구려 대형 봉토석실분과 비교했을 때, 우산하 1080호묘의 제일 뚜렷한 특징은 현실과 연도가 서로 연결되지 않았다는 점. 현실 좌, 우 양측으로 밖을 향하여 둥글게 나가는 시설이 현실의 앞부분을 둘러싸고 있음. 이 시설을 현실을 향하여 궁륭상으로 쌓았음.내부규모 및 특징 현실 동서 폭 3.1m, 남북 깊이 3.15m, 높이 2.95m. 연도부 길이 2.7m, 너비 1.20~1.65m, 높이 1.88m.역사적 의미 우산하 1080호묘 규모는 매우 거대하고 구조도 빈틈이 없음. 통구 고분의 거대한 고분들과 비교하면 차이가 있음. 왕릉은 아니고, 귀족의 묘로 추정.자연환경 서쪽으로 약 100m 지점에 生産隊의 飼養所가 있음. 고분 서쪽에서 약간북쪽으로 인접하여 한 줄로 배열된 세개의 봉토분이 있음. 북쪽에서 약간 동쪽에 봉토분이 한개 있음. 고분 북측의 언덕에는 소형의 파괴된 적석총으로 보이는 조약돌(堆礫石) 몇 무더기가 잔존하고 있음. 고분에서 동쪽으로 약 50m 떨어진 지점에 JYM1041호묘가 있음. 고분의 서쪽 평야에 두 줄의 커다란 구릉이 자리잡고 있는데, 봉토분인 오회분과 사회분임. 동쪽에는 태왕릉이 있음.유물정보 금동제 포정(泡釘) 2점, 금동제 장식못(飾釘) 1점, 금동제 장식편 5점, 철제 추완(樞碗) 2점.참고문헌 · 方起東·林至德, 「集安洞溝兩座樹立石碑的高句麗古墓」『考古與文物』 1983-2, 1983 · 孫仁杰·遲勇, 『集安高句麗墓葬』, 香港亞洲出版社, 2007

  • 우산하 1081호묘(禹山下 1081號墓)

  • 리스트여닫기 우산하 1282호묘(禹山下 1282號墓) 출토지 집안시 북측 우산 (集安市 北側 禹山)연대 고구려 현실 규모가 작고 축조 방법이 거친 것으로 미루어 고구려 말기로 추정되며, 발해로 내려갈 가능성도 있다.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4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집안시문물보관소(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市文物保管所)89기의 고분을 발굴조사, 적석총 28기, 봉토분 61기, 출토 유물은 700여건.1985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집안시문물보관소(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市文物保管所)24기의 고분 발굴, 적석총 10기, 토석혼축묘 1기, 석관묘 1기, 봉토분 12기. 출토 유물 200여건임. 두 차례 조사에서 총 113기의 고분 발굴, 석관묘 1기, 적석총 38기, 봉토분 73기, 토석혼축묘 1기, 출토 유물은 931건임. 발굴된 113기 고분은 대다수 이른 시기부터 파괴와 도굴을 당함. 형식이 확실치 않은 것도 있음. 발굴한 고분 중 111기는 고구려 고분임.구조특징 단칸구조로, 연도가 현실 한쪽에 치우쳐있는 刀形 평면. 묘실 네 벽은 보존상태가 아직 양호하나, 천정석은 멸실 바닥은 황토로 이루어졌음. 묘실 평면은 長方刀形이며, 장축방향은 245°임.내부규모 및 특징 묘실 길이 2.0m, 너비 1.3m, 높이 1.0m. 묘도 길이 1.9m, 너비 0.6m, 높이 0.3m.자연환경 우산하 고분군의 분포 범위는 우산 남쪽 비탈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상하 방향의 배열을 하고 있음. 북면 산허리에 기대어 적석총이 절대다수를 점하고 있으며, 남면 완만한 비탈 지대에 기대어 주로 봉토분이 들어서 있으며, 중간에는 적석총과 봉토분이 서로 뒤섞여 혼잡함.참고문헌 · 吉林省博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3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文物保管所, 「集安洞溝古墳群禹山墓區集錫公路墓葬發掘」『高句麗硏究文集』, 延邊大學出版社, 1993 · 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 『洞溝古墓群: 1997年調查測繪報告』, 科學出版社, 2002 · 孫仁杰·遲勇, 『集安高句麗墓葬』, 香港亞洲出版社, 2007

  • 리스트여닫기 우산하 1339호묘(禹山下 1339號墓) 출토지 집안시 북측 우산 (集安市 北側 禹山)연대 고구려 5세기대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4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집안시문물보관소(吉林省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市文物保管所)89기의 고분을 발굴조사, 적석총 28기, 봉토분 61기, 출토 유물은 700여건.林至德, 耿鐵華, 王洪峰, 柳嵐, 張雪巖, 遲龍, 孫仁杰등이 참가함.1985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집안시문물보관소(吉林省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市文物保管所)24기의 고분 발굴, 적석총 10기, 토석혼축묘 1기, 석관묘 1기, 봉토분 12기. 출토 유물 200여건임. 두 차례 조사에서 총 113기의 고분 발굴, 석관묘 1기, 적석총 38기, 봉토분 73기, 토석혼축묘 1기, 출토 유물은 931건임. 발굴된 113기 고분은 대다수 이른 시기부터 파괴와 도굴을 당함. 형식이 확실치 않은 것도 있음. 발굴한 고분 중 111기는 고구려 고분임.林至德, 耿鐵華, 王洪峰, 柳嵐, 張雪巖, 遲龍, 孫仁杰 등이 참가함.구조특징 단실묘로 墓道가 묘실 중앙부에 설치되어 평면은 鏟形을 이룸. 묘실은 方形 평면의 중앙연도인 鏟形이며, 장축방향은 162°임.내부규모 및 특징 묘실 길이 2.9m, 너비 2.35m, 전체 높이 2.5m. 묘도 길이 3.6m, 너비 1.0m, 높이 1.3m.역사적 의미 JYM1339묘는 형식상 고구려 봉토석실묘에서 비교적 이른 구조형식에 속하며, 출토된 니질홍갈도 展沿罐은 고구려 중기 토기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자연환경 우산하 고분군의 분포 범위는 우산 남쪽 비탈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상하 방향의 배열을 하고 있음. 북면 산허리에 기대어 적석총이 절대다수를 점하고 있으며, 남면 완만한 비탈 지대에 기대어 주로 봉토분이 들어서 있으며, 중간에는 적석총과 봉토분이 서로 뒤섞여 혼잡함. 고분은 果樹村에 위치하는데 남쪽으로 철로와 70m 떨어져 있음.유물정보 토기 구연부 1점.참고문헌 · 吉林省博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3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文物保管所, 「集安洞溝古墳群禹山墓區集錫公路墓葬發掘」『高句麗硏究文集』, 延邊大學出版社, 1993 · 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 『洞溝古墓群: 1997年調查測繪報告』, 科學出版社, 2002 · 孫仁杰·遲勇, 『集安高句麗墓葬』, 香港亞洲出版社, 2007

  • 리스트여닫기 우산하 1340호묘(禹山下 1340號墓) 출토지 집안시 북측 우산 (集安市 北側 禹山)연대 고구려 5세기대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4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집안시문물보관소(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市文物保管所)林至德, 耿鐵華, 王洪峰, 柳嵐, 張雪巖, 遲龍, 孫仁杰등이 참가함.89기의 고분을 발굴조사, 적석총 28기, 봉토분 61기, 출토 유물은 700여건.1985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집안시문물보관소(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市文物保管所)林至德, 耿鐵華, 王洪峰, 柳嵐, 張雪巖, 遲龍, 孫仁杰등이 참가함.24기의 고분 발굴, 적석총 10기, 토석혼축묘 1기, 석관묘 1기, 봉토분 12기. 출토 유물 200여건임.두 차례 조사에서 총 113기의 고분 발굴, 석관묘 1기, 적석총 38기, 봉토분 73기, 토석혼축묘 1기, 출토 유물은 931건임.발굴된 113기 고분은 대다수 이른 시기부터 파괴와 도굴을 당함. 형식이 확실치 않은 것도 있음. 발굴한 고분 중 111기는 고구려 고분임.구조특징 2단의 계단이 보이는데, 계단 중간에 남북 방향으로 장방형 광실 2개가 배치되어 있음. 광실 사이의 거리는 2m, 장축 방향은 240°임.내부규모 및 특징 북광실 동서 길이 3.6m, 남북 너비 1.9m, 깊이 0.6m. 남광실 길이 3.8m, 너비 1.8m, 깊이 0.6m.자연환경 우산하 고분군의 분포 범위는 우산 남쪽 비탈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상하 방향의 배열을 하고 있음. 북면 산허리에 기대어 적석총이 절대다수를 점하고 있으며, 남면 완만한 비탈 지대에 기대어 주로 봉토분이 들어서 있으며, 중간에는 적석총과 봉토분이 서로 뒤섞여 혼잡함.유물정보 시유호(釉陶罐) 1점, 시유시루(釉陶甑) 1점, 시유동이(釉陶盆) 1점, 철제 손잡이(鐵把手) 1점.참고문헌 · 吉林省博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3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文物保管所, 「集安洞溝古墳群禹山墓區集錫公路墓葬發掘」『高句麗硏究文集』, 延邊大學出版社, 1993 · 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 『洞溝古墓群: 1997年調查測繪報告』, 科學出版社, 2002 · 孫仁杰·遲勇, 『集安高句麗墓葬』, 香港亞洲出版社, 2007

  • 우산하 1416호묘(禹山下 1416號墓)

  • 우산하 1758호묘(禹山下 1758號墓)

  • 우산하 1810호묘(禹山下 1810號墓)

  • 우산하통구 12호묘(禹山下 通溝12號墓)

  • 우산하 산연화묘(禹山下 散蓮花墓)

  • 리스트여닫기 우산하 오회분 1호묘(禹山下 五盔墳 1號墓) 출토지 집안시 통구고분군 우산묘구 (集安市 洞溝古墳群 禹山墓區)연대 고구려 6세기 경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09 關野貞, 谷井濟一, 栗山俊一등이 참여함.1935 池內宏, 黑田源次, 梅原末治, 三上次男등이 참여함.집안의 도성 및 중요한 고분들을 조사.1962길림성박물관, 집안현문물보관소(吉林省博物館, 集安縣文物保管所)봉토 보존 진행.1966 통구고분군 조사실측 때, JYM2101호로 편호.이후 수년간 여러 차례 대규모 조사와 동시에 보존 진행.2004 여러 차례 발굴조사 및 실측.조사 중 무덤 주위에서 회색 암키와와 수키와편들을 발굴.역사적 의미 2004년 세계문화유산 등록. 4회분과 오회분 1호묘와 2호묘의 분포를 볼 때, 이들 묘의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음. 오회분 1호묘는 오회분 중 가장 서쪽에 있음. 우산묘구 集錫公路에서 발견된 묘의 정황을 볼 때, 우산묘구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발전하고 북에서 남쪽으로 배열됨. 그러므로 오회분 1호묘는 오회분 2·3·4·5호묘보다 이르다고 볼 수 있음. 북측에 있는 사회분은 오회분1호묘와 같은 묘역에 속하고 관계가 밀접하므로 培塚일 수도 있음. 張福有·孫仁傑· 遲勇은 피장자를 고구려 제 22대왕인 安藏王으로 추정.자연환경 동쪽으로 약 120m 떨어진 지점에 오회분 2호묘(JYM2102)가 있음. 북쪽으로 약 30m 떨어진 지점에 동서로 배열된 四盔墳이 있음. 서쪽으로 경작지를 지나 약 500m 지점에 동대자유적지가 있음. 남쪽으로 약 80m 떨어진 지점에 集安~果樹場 간 公路가 있음.유물정보 기와편 2점.참고문헌 · 池內宏·梅原未治, 『通溝』 下: 満洲国通化省輯安県高句麗壁畫墳, 日滿文化協會, 1940 · 孫仁杰·遲勇, 『集安高句麗墓葬』, 香港亞洲出版社, 2007 · 張福有·孫仁傑·遲勇, 「高句麗王陵通考要報」『東北史地』 2007-4, 2007

  • 리스트여닫기 우산하 오회분 2호묘(禹山下 五盔墳 2號墓) 출토지 집안시 통구고분군 우산묘구 (集安市 洞溝古墳群 禹山墓區)연대 고구려 6세기 중반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09 關野貞, 谷井濟一, 栗山俊一등이 참여함.1935 池內宏, 黑田源次, 梅原末治, 三上次男등이 참여함.집안의 도성 및 중요한 고분들을 조사.1962길림성박물관, 집안현문물보관소(吉林省博物館, 集安縣文物保管所)五盔墳 2號墓로 편호.봉토 보존 진행.1966 통구고분군 조사실측 때, 통구고분군 禹山墓區 2102號墓, 즉 JYM2102호묘로 편호.이후 수년간 여러 차례 대규모조사를 실시하였고, 동시에 보존을 진행.2004 張福有, 孫仁傑, 遲勇등이 참여함.여러 차례 발굴조사 및 실측. 조사중 묘 표면에 흩어져 있던 대량의 암키와 및 수키와 잔편들을 발굴.구조특징 오회분 중 규모가 가장 큼 봉토는 황토이고, 분구는 절두방추형임. 무덤의 4변은 돌로 墓壇을 만듬. 현재 동·남 양측 지표면의 墓壇石만 확인할 수 있음. 남측 墓壇의 길이는 약 70m이고 墓壇石은 모두 가공된 화강암으로 축조. 석괴의 길이는 약 1m, 너비는 0.6m, 높이 0.4m 정도임. 서측 墓壇石은 부분적으로 물로 씻겨내려져 유실. 오회분 2호묘에서 서측 3m 떨어진 지점에 水溝 1조가 있는데, 북쪽에서 남쪽으로 사회분 4호묘와 오회분 2호묘의 중간을 관통. 이 수구는 우산남쪽 기슭의 陳家溝에서 흘러나옴. 본래 이 수구는 사회분의 북측 약 100m 지점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다시 오회분 1호묘 서쪽 100m 지점에서 남쪽으로 꺽여서 흘렀는데, 침식을 겪은 후 노선이 바뀌어 현재의 방향으로 형성.역사적 의미 2004년 세계문화유산 등록. 오회분 2호묘는 오회분은 물론 고구려의 봉토석실묘 중에 가장 큼. 이 묘장은 규모가 웅장하고 도도하며 시설이 완비. 이런 기세는 왕릉만이 가지고 있음. 張福有·孫仁傑·遲勇은 오회분1호묘를 안장왕의 무덤으로 추정하면서, 오회분 1호묘과 오회분 2호묘가 배열된 상황이 합치된다고 보고 안장왕과 형제관계였던 고구려 제23대왕인 安原王으로 추정.자연환경 중심지리좌표는 동경 126° 11′675″, 북위 41° 08′113″, 묘정상해발 223m. 동쪽으로 약 230m 떨어진 지점에 오회분 3호묘(JYM2103)가 있음. 서쪽으로 약 120m 떨어진 지점에 오회분 1호묘(JYM2101)가 있음. 서북쪽으로 약 40 m 떨어진 지점에 오회분 4호묘(JYM2104)가 있음. 남쪽으로 약 30m 떨어진 지점에 集安~果樹場 간 公路가 있음.유물정보 기와편 2점.참고문헌 · 池內宏·梅原未治, 『通溝』 下: 満洲国通化省輯安県高句麗壁畫墳, 日滿文化協會, 1940 · 孫仁杰·遲勇, 『集安高句麗墓葬』, 香港亞洲出版社, 2007 · 張福有·孫仁傑·遲勇, 「高句麗王陵通考要報」『東北史地』 2007-4, 2007

  • 리스트여닫기 우산하 오회분 3호묘(禹山下 五盔墳 3號墓) 출토지 집안시 통구고분군 우산묘구 (集安市 洞溝古墳群 禹山墓區)연대 고구려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09 關野貞, 谷井濟一, 栗山俊一등이 참여함.1935 池內宏, 黑田源次, 梅原末治, 三上次男등이 참여함.집안의 도성 및 중요한 고분들을 조사.1962길림성박물관, 집안현문물보관소(吉林省博物館, 集安縣文物保管所)五盔墳 3號墓라고 편호함.봉토 보존 진행.1966 통구고분군 조사실측 때, 통구고분군 禹山墓區 2103號墓, 즉 JYM2103호로 편호.보존 진행.2004 張福有, 孫仁傑, 遲勇등이 참여함.묘 주위에서 암키와와 수키와편을 수습.구조특징 분구는 절두방추형. 묘의 서·남·북 3면에는 墓壇이 구축되어 있음. 그러나 동면은 오회분4호묘과 墓壇이 함께 연접. 墓壇은 가공된 화강암으로 축조. 석괴의 일반적인 길이는 0.8m, 너비 0.5m 높이 0.4m 정도임. 현재 보존이 양호.역사적 의미 2004년 세계문화유산 등록. 오회분 3호묘와 4호묘는 묘단이 전체 하나로 연접하고 있는데, 이것은 양 묘주인의 친족(혈연)관계로 같은 항렬(서열)에 속해 있었음을 설명함. 우산하 2113호묘(사신총) 또한 마찬가지임. 이러한 묘의 조합은 고구려왕릉의 묘장 연구에 있어 특별히 중요한 의의를 보여주는 것임. 이미 발굴된 오회분4호묘(JYM2104) 묘실 내에서 정교하고 아름다운 벽화가 그려져 있으므로, 오회분 3호묘에서도 벽화가 그려졌을 가능성이 있음. 張福有·孫仁傑·遲勇 등은 오회분 3호묘의 피장자를 고구려 제 26대 왕인 嬰陽王으로 추정.자연환경 중심지리좌표는 동경 126° 11′826″, 북위 41° 08′207″, 묘정상해발 226m. 서쪽으로 약 130m 떨어진 지점에 오회분 2호묘(JYM2102)가 있음. 동쪽으로 약 5m 떨어진 지점에 오회분 4호묘(JYM2104)가 있음. 북쪽으로 약 30m 떨어진 지점에 우산하 2112호묘(JYM2112)가 있음. 남쪽으로 약 50m 떨어진 지점에 集安~果樹場 간 公路가 있음.유물정보 기와편 1점.참고문헌 · 孫仁杰·遲勇, 『集安高句麗墓葬』, 香港亞洲出版社, 2007 · 張福有·孫仁傑·遲勇, 「高句麗王陵通考要報」『東北史地』 2007-4, 2007

  • 리스트여닫기 우산하 오회분 4호묘(禹山下 五盔墳 4號墓) 출토지 집안시(集安市)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09 1909~1910년 谷井濟一, 栗山俊一에 의해 『조선고적도보』(1915)에 기록.1950 1950년 8월 李浴에 의해 주변을 봉쇄하고 보호작업.1950 1950년 겨울 겨울 인민해방군 부대장에 의해 무덤문이 무단으로 열려 임의로 사용되다가 국가 문화부의 개입으로 무덤문 폐쇄.1962길림성박물관 집안고고공작대, 집안현문물보관소(吉林省博物館集安考古工作隊, 集安縣文物保管所)1962년 6월 6일~8월 말 王承禮, 李殿福, 方起東, 韓淑華, 劉萱堂, 林至德(이상 조사) 莫東作, 鄭捷, 王紀棟(이상 촬영), 王大維, 李超雄, 曲紹伯, 劉萱堂(이상 모사)에 의해 정리·발굴을 진행하면서 봉토 보호 작업 실시. 여러 점의 금동기, 철제 못, 관목 잔편 등이 출토.1962길림성박물관집안고고대(吉林省博物館集安考古隊)1962년 8월~1963년 8월 王大維, 李超雄, 劉萱堂에 의해 벽화조사 및 모사.1965길림성박물관(吉林省博物館)실측과 무덤 안 벽화의 모사작업.1966 통구고분군에 대한 조사·실측 때, 우산묘구 2104호묘(JYM2104)라고 편호.1974길림성박물관, 집안현문관부문(吉林省博物館, 集安縣文管部門)1974년 3월 길림성박물관과 집안현문관부문에 의해 벽화 수리가 검토. 1974년 9월 집안현문관소에 의해 벽화 수리, 화학적 보존처리 작업 시행.1997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집안시박물관(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市博物館)재실측.2004 2004~2005년 孫仁杰, 遲勇에 의해 묘 주위에서 많은 암키와와 수키와를 수습.구조특징 봉토석실벽화묘 오회분 4호묘는 오회분 가운데 한기로, 5기의 무덤 모양이 투구와 닮아서 五盔墳이라고 부름. 1966년 우산하 2104호묘(JYM2104)로 편호. 통구미편호묘라고도 부름. 일찍이 도굴을 당한 상태였음. 동·서·북 세 면의 봉토는 보존이 비교적 양호했고, 봉토 남면은 약간 유실되어 돌로 쌓은 보호석(擋土墻)이 일부 드러남. 묘실 내에는 진흙이 적지 않게 있었고, 관대사이의 틈에는 황색 사토가득 차 있었음. 절두방추형이고, 봉토는 황색 점토임. 무덤칸의 방향은 동으로 30˚기운 남향. 묘도, 연도, 묘실로 구성됨. 묘도 양측에는 擋土墻이 설치됨. 墻의 높이는 3m 임. 큰 석조로 쌓았고, 외벽에는 4~5㎝ 두께의 백회를 발랐으나, 현재는 대부분 박락됨. 擋土墻은 연도의 바깥입구에서부터 양측면으로 0.25~0.3m 평평히 뻗었고, 다시 각각 남쪽으로 꺾여 0.8~1m 정도 뻗쳤음. 묘도 뒤쪽 끝부분(북쪽) 중앙에는 가공하지 않은 직경 2.6m, 높이 1.8m의 커다란 돌이 있는데, 이 돌을 놓아 묘문을 막았음. 묘도 바닥은 평평한 原生土이고, 그 위는 자연석이 쌓여 있음. 연도는 묘도 뒤에 접해 있고, 묘실 남벽에서 동쪽에 치우진 지점에 나 있음. 연도 뒤에 묘문이 있음. 연도 양벽의 돌과 묘실 남벽 양측의 돌은 동일한 돌임. 연도 頂石과 묘실 남벽 상면에 설치된 양방의 돌도 역시 동일한 돌로, 바깥쪽으로 계속 뻗쳐 연도 꼭대기를 덮었음. 연도 頂石 상면에는 가로로 3층의 거대한 돌을 쌓았고, 높이는 1m 정도임. 楣石과 유사하게 묘 꼭대기의 봉토를 차단함. 연도 입구 안쪽 가장자리에는 너비 0.2m의 문틀이 파여 있는데, 문틀은 연도 벽보다 2㎝ 높음. 연도 바닥에는 묘실보다 14㎝ 높게 석판을 깔았고, 바깥쪽으로 묘도와 평행함. 연도 안쪽에는 원래 거대한 돌 4개로 막았음. 가장 아래층 돌 한 개는 아직 연도 안쪽에 놓여 있음. 그 안쪽 끝은 문틀과 서로 접해 있고, 좌우 양측은 연도 양벽과 접해 있는데, 틈에는 작은 礫石과 백회로 채웠음. 돌은 길이 1.55m, 너비 0.94m, 높이 0.72m 임. 이 돌의 바깥 끝 측면의 가운데 부분에는 0.63m 간격으로 대칭이 되도록 뚫은 두 개의 원형 구멍이 있는데, 구멍은 직경 12m, 깊이 0.2~22m 임. 그 외 커다란 돌 세 개는 묘문 외측에 옮겨 놓았는데, 같은 모습으로 가지런하게 다듬었음. 그 가운데 돌 한 개는 깊이 1.57m, 너비 1.5m, 두께 0.49m로 비교적 크고, 한측면에 두 개의 원형구멍이 서로 대칭하고 있는데, 구멍은 직경 0.12~0.14m, 깊이 0.18~0.2m 임. 연도를 봉하기 위한 돌 가운데 2층 돌임. 나머지 두 개의 돌은 비교적 작은데, 길이 0.83m, 너비 0.77m, 두께 0.41~0.44m임. 이 돌들의 한 측면에도 원형 구멍이 있음. 이 돌들은 제2층석 윗면에 나란히 놓은 제3층 봉석이라고 할 수 있고, 모두 한면 외측은 동그랗게 파여 있는데, 밀폐할 때 윗부분을 미는데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정. 묘실은 정교하게 다듬은 커다란 화강암으로 쌓았고, 백회로 틈을 메웠는데, 공법이 정교하고 구조가 엄밀함. 네 벽은 약간 안으로 기울어졌고, 두 층의 거대한 돌로 쌓음. 고임받침석(梁枋)은 네 벽 위에 설치하였는데, 네 벽에서 안쪽으로 12㎝ 들어왔고, 높이는 0.55m 임. 정은 양방 윗면에 있는데, 천정은 2층 말각고임임. 제1중 말각고임은 梁枋의 네 모서리 위에 설치했음. 올려다보면 릉형이고, 높이는 0.56㎝ 임. 제2중 말각고임은 제1중 頂石 네 모서리에 있고, 양방과 평행함. 올려다보면 방형이고, 높이는 0.6m임. 제2중 頂石 윗면에는 정연한 큰 석판 1개를 깔아, 묘꼭대기를 덮었음. 묘실의 높이는 3.64m 임. 묘문의 양측, 남벽의 위쪽 끝에는 좌우 대칭하는 작은 구멍 두 개가 있음. 제1층 말각석의 측면 정가운데와 남벽 양방의 오른쪽 끝(서쪽 끝) 정가운데 역시 각각 작은 구멍 한 개가 뚫려 있음. 구멍은 직경 4~6㎝, 깊이 12㎝ 임. 어떠한 작용을 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음. 묘실에는 남북으로 평행한 관대 3개가 설치됨. 그 북쪽 끝은 모두 북벽과 접해 있고, 좌우의 두 관대는 각각 동서 양벽에 닿아 있음. 오직 서쪽 관대와 서벽이 접해진 곳에, 백회를 발라 붙이고, 관대의 일부분을 충당함. 세 관대는 높이 0.16m, 길이 2.45~2.71m, 너비 1.05~1.25m 임. 남벽의 서쪽 끝에는 동서방향으로 돌받침(石座) 한 개가 있는데, 남·서 두벽과 접해 있음. 길이는 1.78m, 너비는 0.87m, 높이 0.2m 임. 부장품을 놓은 臺座로 추정됨. 석실의 바닥에는 평평한 석판을 깔았음. 묘실 네벽, 천정, 관대, 연도 벽에 벽화가 그려짐. 네 벽에는 사신, 梁枋 위에는 蛟龍, 천정에는 伎樂·天人·日月星宿·草木·流雲 등이 그려짐. 연도 좌우의 동벽과 서벽에는 실물크기의 문지기 역사를 묘사. 다만 희미하여 자세히 볼 수 없음. 묘실의 네 모서리에는 각각 怪獸托龍을 頂梁까지 그림. 괴수는 오른쪽 다리는 뒤로 빼고 왼쪽 다리는 약간 구부린 자세로 두 팔로 위에서 내려진 교룡의 머리를 받치고 있음. 괴수는 용뿔에 도깨비 얼굴을 하고 있고, 입을 벌려 이빨을 드러내 흉악한 용모를 하고 있음. 겨드랑이 아래에는 날개가 있고, 몸과 가슴을 드러냈으며, 근육이 나왔음. 하반신에는 짧은 羽桍를 입었음. 왼쪽 다리는 굽혔고, 오른쪽 다리를 뒤로 들어 올렸는데, 맨발임. 두 팔에는 서로 마주하는 두 마리 용이 휘감고 있음. 용의 머리는 위로 향하여 있고, 용의 입은 마주하는 용의 몸을 물고 있으며, 두 꼬리는 아래로 늘어뜨렸고, 복부는 들보에 걸쳤으며, 뒷발은 들보에 올렸음. 한 마리 용의 발은 괴수의 머리 위에 올려 놓았음. 괴수들은 형상은 서로 같으나, 색깔은 청색·자주색·赭色·녹색으로 서로 다름. 묘실 네벽에는 사신도가 그려져 있음. 동쪽에 청룡, 서쪽에는 백호, 남쪽에는 주작, 북쪽에는 현무가 그려짐. 네 벽에는 網狀蓮花火焰錦連續도안이 삽입됨. 網紋은 홍색·황색·검정색의 평행한 선으로 그렸고, 통일된 網紋 안에 세 종류의 도안을 섞어 그림. 첫 번째 종류는 측면에서 바라본 황색·자색·녹색의 활짝 핀 연화 11송이를 그렸고, 그 아래에는 花托이 있음. 양측에는 타오르는 작은 화염 기둥을 그렸고, 화염의 윗부분에는 작은 연꽃을 그렸음. 두 번째 종류는 網紋 아랫부분에서 두 송이의 蓮瓣이 좌우로 비스듬히 뻗어 나오고 있는데, 녹색·홍색·다색 3색으로 나뉘어짐. 연판 중간에 각종 인물도상이 그려져 있는데, 백색의 복련좌를 밟고 있음. 세 번째 종류는 網紋 아랫부분에서 좌우로 卷草葉이 뻗어 나오고, 두 잎의 중간에 三瓣 혹은 五瓣의 홍색 연꽃이 피어나고 있음. 묘실 네 벽의 網紋 속바탕에는 인물도상을 그림. 모두 10명인데, 각각 蓮臺 위에 앉아 있거나 혹은 서 있음. 동벽에는 청룡이 그려져 있음. 머리를 들고 입을 벌려 혀를 내밀고 있으며, 남쪽으로 내달리고 있음. 뿔은 황색, 머리는 녹색, 등은 황색, 배는 赭色, 나머지 몸통은 녹색·홍색·茶色 임. 검은 선으로 비스듬히 기울은 方格의 비늘무늬가 그려져 있음. 용의 목은 비교적 가늘고, 홍색·황색·분색 등 세 가지 색으로 그렸음. 목덜미에는 홍색과 녹색 두 색의 結環이 있음. 앞발은 펴고 뒷다리는 박차고 있음. 발가락은 모두 붉은 색임. 용꼬리는 끝부분이 올라가 있고, 앞다리 아래쪽에는 화염이 있음. 동벽에는 한명의 인물도상이 있는데, 오른쪽 위 網紋 속바탕에 그려짐. 머리에 鳥紗籠冠을 썼음. 몸에는 백색내의·綠領緣·花色長袍를 입었고, 흰 띠로 허리를 묶었으며, 검은 신을 신었음. 왼팔은 앞쪽으로 펴서 팔꿈치를 굽히면서, 손에 團扇을 들었고, 오른팔은 뒤로 구부려 오른손을 소매 속에 감추었음. 서벽에는 백호가 그려짐. 백호는 청룡과 마주하고 있음. 머리를 들고 남쪽을 향해 있음. 전체 몸은 흰색이고 묵선으로 단순하게 윤곽을 그림. 백호의 발가락은 청룡과 마찬가지로 세 개임. 앞발 아래쪽에는 화염이 있음. 꼬리는 위로 올라가 있음. 서벽에는 인물도상 세명이 있음. 제1층 網狀紋 속바탕 좌측의 제2조 내에 그려진 인물은 조사농관을 쓰고, 백색 내의와 홍색合袵綠色袍服을 입었으며, 허리에는 홍색 띠를 매었음. 오른손은 앞으로 團扇을 들었고, 왼팔은 약간 굽혔음. 검정색 신발을 신고 蓮臺를 밟고 있음. 제1층 網紋 속바탕 오른쪽 제1조 내에 그려진 인물은 머리를 묶었고, 白領緣赭色袍를 입었으며, 허리에 흰띠를 매었음. 蓮臺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음. 오른손에는 책을 들었고, 왼손은 무릎 위에 가볍게 얹으면서, 책을 읽고 있음. 제2층 網紋 속바탕 왼쪽 제2組 內에 그려진 인물은 머리에 조사농관을 쓰고, 황색圓領緣赭色袍를 입었으며, 횐띠를 허리에 묶었음. 왼손에 團扇을 들고, 오른손을 등뒤로 하였음. 검은 신을 신고, 蓮臺에 서 있음. 이 인물의 흉부는 박락됨. 남벽에는 주작이 그려짐. 노란 부리와 붉은 벼슬의 주작은 勝을 쓰고 꼬리를 늘어뜨렸음. 동쪽을 향해 길게 울면서 날개를 펼쳐 날고자 함. 붉은 머리장식을 하고, 몸은 주로 홍색이며, 꼬리에는 녹색 점이 있는 긴 털이 위로 휘날리고 있음. 남벽에는 두 명의 인물도상이 있음. 남벽 윗부분 網紋 속바탕에 있는 인물은 머리를 높이 묶고, 동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용모는 명확하지 않음. 황색圓領緣과 다색袍服을 입었고, 허리에 흰색 띠를 매었음. 오른팔은 앞으로 폈고, 손은 바깥쪽으로 드러나지 않았음. 통이 큰 소매는 아래로 늘어뜨려졌고, 왼팔은 뒤로 늘어뜨렸음. 다리부분은 명확하지 않은데, 蓮臺에 서 있음. 주작 右翼 網紋 속바탕에 있는 인물은 머리를 묶었고, 두상은 길며, 귀는 뽀족함. 백색우의를 입고 있음. 蓮臺 위에 앉아 있는데, 오른쪽 다리는 책상다리를 하고, 왼쪽다리는 쪼그렸음. 왼팔은 앞으로 뻗었는데, 그릇에 물건을 안에 던져 넣는 모습을 하고 있음. 오른쪽 어깨는 구부려서 무릎 위에 놓았음. 북벽에는 현무가 그려짐. 현무는 거북이와 뱀이 뒤엉켜 싸우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짐. 거북이는 몸이 서쪽을 향하고 있는데, 머리를 들고, 입을 벌려 혀를 내밀고 있음. 등은 자색이고 껍질은 없음. 뱀은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려, 거북이 머리와 마주하고 있음. 몸은 오색을 띠고, 등은 황색, 배는 다색임. 거북이 몸을 휘감고 꼬리는 위쪽으로 올라감. 북벽에는 네 명의 인물도상이 있음. 그 가운데 網紋 윗줄 정중앙에 있는 인물은 머리에 鳥紗籠冠을 썼고, 용모가 뛰어남. 몸에 綠領合袵紅色袍를 입었고, 허리에 띠를 묶었음. 왼손에는 團扇을 들었고, 오른팔은 소매 안에 넣었음. 팔은 약간 구부려서, 가슴 앞에 두었음. 옷의 통이 넓고 띠가 넓음. 발에는 검은 신을 신고 蓮臺를 밟고 있음. 북벽 오른쪽 위쪽 모서리 網紋 속바탕에 있는 사람은 머리에 鳥紗籠冠을 썼음. 紅領綠合袵錄袍를 입었고, 허리에는 홍색 띠를 매었음. 검정색 신발을 신고 蓮臺를 밟고 있음. 왼손에는 團扇을 들고, 오른팔은 약간 굽히고 다섯 손가락을 폈으며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게 함. 통이 큰 소매가 나부낌. 얼굴에 분칠을 하고 입술은 빨갛고 고개를 숙여 아래를 보고 있음. 북벽 왼쪽 아래 모서리 網狀紋 속바탕에 있는 인물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머리카락을 풀어 헤쳤음. 紅領緣과 綠色羽衣를 입었고, 맨발로 홍색 蓮臺에 앉아 있으면서, 고개를 숙이고 옆을 보고 있음. 왼손은 팔괘도를 가리키고, 오른손은 무릎 위에 가볍게 올려 놓았음. 복사뼈 부위에 홍색 고리를 차고 있음. 북벽의 오른쪽 아래 모서리 網狀紋 속바탕에 있는 인물은 鳥紗籠冠을 썼음. 黃領緣合袵赭色袍를 입었고, 허리에는 녹색 띠를 묶었음. 검은 신은 신고 蓮臺을 밟고 있음. 왼손에 鹿尾를 들고, 오른팔을 아래로 늘어 뜨리고, 손을 소매 속에 넣고, 앞을 보고 있음. 묘실 벽과 천장고임이 닿는 벽 상단부에는 위아래 연속마름모꼴무늬 사이로 용들이 서로 얽혀 이룬 얽힌용무늬를 그렸음. 매 벽에는 두 마리의 용이 끝부분근처에서 휘감고 있는데, 위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고, 입에는 앞의 한 마리 용의 몸을 물면서 서로 이어지고, 앞으로 달리고 있음. 8마리의 용은 휘감아 돌면서 이어지는데, 두 마리의 용이 서로 휘감겨 형성한 연속도안으로 조성됨. 梁枋의 상하 양측 가장자리에는 赭色·남색·백색·황색·녹색 등으로 장식한 릉형의 붉은 珊瑚紋의 연속도안이 있음. 梁枋이 앞으로 나온 네벽의 아랫부분에는 황색·백색·자색으로 이루어진 長格紋 두 줄이 그려짐. 천장고임 제1단에는 서로 마주 보며 머리 위로는 해와 달을 떠받든 복희여와형 해신·달신과 수레바퀴를 다루는 제륜인, 쇠마치질을 하는 야철인, 불씨를 지닌 비선, 숫돌을 가는 숫돌의 신, 곡식 이삭을 손에 쥔 牛首人 등 여러 문명신을 묘사. 북쪽 모서리의 두 말각석 위에는 일월신, 人首龍身을 그림. 日神은 남자형상으로 오른쪽에 있는데, 짧은 콧수염에 머리를 풀어 뜨렸고, 두 손은 머리 위로 들어 황색의 둥근 해를 받들고 있음. 해 가운데에는 삼족오가 있음. 黃領緣合袵藍羽黃色衣를 입었고, 남색 깃이 날개처럼 펄럭이며, 허리에 황색 띠를 매었음. 용의 몸은 오색으로, 발은 앞뒤로 힘차게 박차고 있고, 꼬리는 흔들고 있음. 월신은 여자형상으로 왼쪽에 있는데, 횐 얼굴에 붉은 입술을 하고 있고, 긴 머리카락은 휘날리고 있음. 머리 위로 둥근 달을 받들고 있는데, 달 한가운데에는 두꺼비가 있음. 綠領緣合袵紅羽綠衣를 입었고, 허리에 흰 띠를 매었음. 용은 몸이 오색으로, 발은 앞뒤로 힘차게 박차고 있고, 꼬리는 흔들고 있음. 두 신은 서로를 향하여 비상하려 함. 일·월신 중간과 몸 뒤 모두 2~4 그루의 나무가 있는데, 자색 나무줄기에 홍·황·녹 3색의 둥근 나뭇잎을 그렸음. 동쪽 모서리 말각석이 이어진 곳에는 牛首人과 비선이 그려져있음. 牛首人은 왼쪽에 있고, 소머리에 사람 몸을 하고 있음. 黃領緣合袵粉色寬袖衣를 입었고, 허리에 흰 띠를 묶었으며, 아래에는 粉色羽狀의 짧은 바지를 입었음. 두 팔은 나란히 폈으며, 검은 신을 신고 두 다리를 굽혔다가 펴면서 도약하려 함. 비선은 남자형상으로, 오른쪽에 있음. 짧은 콧수염이 있고,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머리카락을 풀어헤쳤음. 黃領緣合袵長裙을 입었음. 오른손은 가슴 뒤로 두었는데, 긴 소매는 나부끼고, 왼손은 비스듬히 뒷쪽으로 뻗었으며, 손에는 횃불을 들었음. 머리는 고개를 돌리고 내려다보고 있음.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발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음. 牛首人과 비선의 중간 및 몸 뒤에는 두~세 그루의 나무가 있음. 남쪽 모서리 말각석 위에는 冶鐵人과 製輪人이 그려짐. 冶鐵人은 왼쪽에 있는데, 머리를 묶었고, 짧은 콧수염이 약간 있음. 黃領緣褐色袍와 圓領白色內衣를 입었고, 허리에 흰색 短裙을 묶었음. 方石 위에 책상다리로 앉았음. 검은 신발을 신었음. 오른손에는 鐵鉗을 들었으며, 붉은 색을 머금은 쇳덩어리를 다듬잇돌 위에 놓고, 왼손으로 쇠망치를 높이 들어 야철하려고 함. 제륜인은 오른쪽에 있음. 머리를 묶었고, 짧은 콧수염을 갖고 있음. 黃領緣合袵褐色羽狀袍服을 입었고, 허리에 흰 띠를 매었음. 검은 신발을 신고, 두 다리는 바퀴 전면에 서서, 왼손으로 수레바퀴를 잡고, 오른손으로 망치를 들어 내리치고 있음. 두 사람의 중간과 몸 뒤에도 큰 나무를 그림. 서쪽 모서리 말각석 그 왼쪽에는 한 사람이 남쪽을 향하고 있음. 黃領緣合袵羽狀褐色袍를 입었고, 허리에 녹색 短裙을 묵었음. 검은 신발을 신고, 왼쪽 다리는 앞쪽 오른쪽 다리 뒤쪽으로 하여 신발 끝으로 땅을 딛고 있음. 나무 그루터기 위에 있는 검은색 숫돌 앞에 멈추어 서서, 두 손으로 물건 하나를 들고 힘차게 가고 있음. 이 사람의 앞과 뒤에도 나무가 그려짐. 그 오른쪽부분에는 용을 타고 있는 선인이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머리를 묶었고, 긴 頭相에 두 귀는 뾰족하며, 콧수염이 조금 나 있음. 횐색 내의와 黃領緣對合袵羽狀茶色袍를 입었고, 허리에 횐 띠를 매었음. 오색 용을 타고 머리를 들어 날아오르고 있음. 왼손에는 깃발을 들었음. 네 개의 말각석 가운데부분에는 각각 한 마리의 용을 그렸는데, 모두 네 마리임. 자태가 서로 같음. 용은 머리를 뒤로 돌리고 몸을 일으켜 굽은 등과 배를 두 번째 고임돌에 걸치고 있음. 용의 몸은 오색이고, 네 발의 윗부분에는 횐색 지느러미가 있음. 2중 頂石 북면에는 기악인 세 명이 있음. 우측에는 거문고를 타는 기악인이 그려졌는데, 머리에 蓮花冠을 쓰고, 용모는 빼어나며, 짧은 콧수염이 조금 있음. 백색내의와 黃領緣合袵赭色長袍를 입었음. 오른쪽 다리는 책상다리를 하고, 왼쪽 다리는 앞으로 뻗었으며, 그 무릎 위에 거문고를 놓았음. 왼손은 거문고를 잡고 오른손은 줄을 타고 있음. 가운데에는 요고를 치는 기악인이 남쪽으로 향하고 있음. 짧은 콧수염이 있고, 머리를 묶었는데, 머리를 묶은 끈은 홍황색임. 紅領緣對合袵黃色袍를 입었는데, 얇은 옷은 몸에 붙었고, 어깨에 걸친 비단 휘자락이 휘날리고 있음. 가슴은 내밀고 배는 들이 밀었음. 무릎을 굽혀 공중으로 도약하려고 함. 요고는 허리에 묶었음. 오른손은 높이 들었고, 왼손은 요고를 치려고 함. 좌측에 있는 사람은 머리를 묶었고, 흰색 對袵內衣와 黃領緣合袵赭色袍를 입었음. 오른팔은 굽혀서 몸에 가까이 대었고, 손에 卷軸을 들고 있음. 두 다리는 뒤쪽으로 굽혔다 펴고 있고, 머리를 돌려 뒤를 보고 있음. 세 사람 틈에는 북두성좌와 流雲이 있음. 2중 頂石 동면에는 태양, 용을 탄 기악인, 봉황을 탄 기악인이 있음. 해는 정가운데에 그렸는데, 주색과 검정색으로 원의 윤곽을 그리고, 그 안에 삼족오를 그렸음. 삼족오는 날개를 펼치고 길게 울고 있음. 용을 탄 기악인은 왼쪽에 있는데, 머리를 높이 묶었고, 黃領緣茶色袍를 입었음. 오른손에는 펄럭이는 붉은색 깃발을 들었고, 고개와 몸을 돌려 왼손에 들고 있는 퉁소를 막 불려고 함. 타고 있는 용은 몸이 오색으로, 날아오르려고 하면서, 머리를 높이 들었고, 입을 벌려 혀를 내밀고 있음. 봉황을 탄 기악인은 오른쪽에 있는데, 긴 머리를 묶었고, 두 개의 귀는 뾰족하며, 콧수염이 조금 있음. 圓領緣對袵白色內衣와 黃領緣合袵茶色袍를 입었고, 허리에는 횐 띠를 매었음. 두 손은 피리를 잡고 불고 있음. 기악인의 손목과 발목에는 홍·황 두색의 镯을 차고 있음. 타고 있는 봉황은 주홍색의 높은 볏이 있음. 목은 색깔이 다채롭고, 등은 황색이며, 어깨는 홍색임. 날개는 녹색이고, 묵선으로 깃의 윤곽을 그림. 봉황의 꼬리는 황색바탕에 빨간 깃털로, 뒤로 펼쳐져 있음. 머리는 들고 날개를 펴 비약하려 함. 2중 頂石 남면에는 남두육좌, 공작을 탄 기악인, 피리를 부는 기악인이 그려져 있음. 공작을 탄 기악인은 왼쪽 끝에 그려짐. 머리를 묶었고, 두개의 귀는 뾰족하며, 콧수염이 약간 있음. 백색 내의와 對袵茶色羽服을 입었음. 두 손은 가슴 쪽으로 하면서 물건을 들고 있음. 검은 신발을 신었고, 팔목과 발목에 모두 镯을 차고 있음. 타고 있는 공작은 짙은 녹색으로, 머리에는 勝을 썼고, 꼬리는 늘어뜨리면서, 날개를 펴 비약하려고 함. 머리는 들어 뒤돌아보고 있고, 화려한 깃털이 있는 꼬리는 위로 펼쳐져 있음. 피리를 부는 기악인은 오른쪽 끝에 그려졌는데, 머리를 묶었고, 黃領緣茶色袍를 입었음. 두 다리는 굽혔고, 검은 신발을 신었음. 몸에 두른 비단 자락이 나부끼고 있음. 2중 頂石 서면에는 달·용을 탄 기악인·학을 탄 기악인이 그려짐. 달은 중간에 있는데, 주색으로 윤곽을 그렸고, 횐 바탕에 두꺼비가 그려짐. 달의 위아래로 流雲이 있음. 용을 탄 기악인은 왼쪽에 있는데, 날아오르려고 하는 오색 용의 등에 앉아 있음. 머리를 묶었고, 두 귀는 뾰족함. 횐색 내의와 黃圓領緣茶羽服을 입었고, 허리에 흰 띠를 매었음. 몸을 돌려 뒤를 바라보고 있고, 胡角을 불고 있음. 오른쪽 다리는 구부리고 왼쪽 다리는 오른쪽 다리 위에 얹어 앞쪽으로 펴고 있음. 검은 신을 신었고, 팔목과 발목에 황색 镯을 차고 있음. 학을 탄 선인은 오른쪽에 있고, 남쪽을 향하고 있음. 머리에는 백관을 썼고, 횐색 내의와 黃領緣赭色長袍를 입었으며, 허리에는 횐 띠를 묶었음. 오른손은 학의 목을 가볍게 잡았고, 왼손은 학의 등에 두었음. 검은 신을 신었음. 팔목과 발목에 홍·황 두 색의 镯을 차고 있음. 하얀 학은 날개를 펴 비약하고 있음. 제 2重 頂石 네면에는 기악과 星宿 외에 流雲紋이 그려짐. 제 1·2重 頂石 말각석의 아랫부분에는 모두 한 마리의 용이 그려졌는데, 모두 여덟 마리가 있음. 용은 모두 입을 벌려 혀를 내밀고 있음. 몸을 오색이고, 네 발을 뻗었으며, 머리는 들어 돌아보는 동일한 자태를 취하고 있음. 천정 頂石에는 청룡 한 마리가 그려졌는데, 오색으로, 등은 황색이고, 배는 赭色임. 입은 벌려 혀를 내밀고, 머리를 들어 돌리고 있음. 앞발 겨드랑이 아래에는 불꽃이 솟아오르며, 뒷발에는 횐색 지느러미가 달렸고, 발을 구부리며 뒷발 하나를 바깥쪽으로 힘차게 박차고 있음. 바탕에는 流雲과 星宿을 그렸음.내부규모 및 특징 1964․1984년 보고서 주변길이 160m, 높이 8m, 묘방향 150°. 1997년 보고서 변길이 30m, 높이 10m. 묘도는 남쪽에 있고, 길이 6m, 너비 8m. 연도는 길이 1.88m, 너비 1.75m, 높이 1.75m. 묘실은 횡장방형으로, 동서 길이 4.2m, 남북 너비 3.68m, 네 벽 높이 1.92m.역사적 의미 오회분 4호묘는 구조가 웅장하고, 사용한 석재들은 매우 크고 정교하게 다듬었으며, 말각을 쌓은 것도 성숙한 경지에 이르렀음. 이는 고구려석조기술수준이 매우 높았다는 것을 보여줌. 오회분 4호묘의 형태, 벽화내용과 기법은 기본적으로 오회분 5호묘와 같음. 다만 오회분 5호묘에 그려진 벽화기교는 오회분 4호묘보다 높음. 벽화기교방면의 이러한 차이는 화가의 기교의 차이라고 볼 수 있고, 오회묘 4호묘가 5호묘보다 축조연대가 이르다고 볼 수 있음. 예술적인 측면에서 볼 때, 오회분 4호묘는 고구려벽화예술의 전형으로, 매우 높은 수준을 보여줌. 오회분 4호묘의 벽화는 구도가 엄밀하고, 형상은 생동감이 있으며, 선은 힘이 솟구쳐 있는 등, 각저묘·무용묘·통구 12호묘·삼실묘 등 집안의 이른 시기의 벽화묘보다 발달된 모습을 보임. 이른 시기의 벽화묘는 벽화가 비교적 서투르고, 주제가 중점적으로 드러나며, 배경에 밥 먹는 家具, 생활용기, 가옥, 城池 등을 표현하지 않고, 유치한 표현이 남아 있음. 오회분 4호묘 네 벽에 그려진 주제는 사신도이나, 사신도 아래에 網狀火焰錦蓮花가 연속된 도안이 펼쳐져 있어, 벽면을 매우 풍성하게 해주고, 풍격은 비록 통일되었으나, 변화가 있음.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모두 매우 생동적임. 더불어, 덧대어 주는 도안은 벽면에 웅장하고 화려한 생동력을 더해 줌. 인물형상은 비례관계가 확실하고, 선의 움직임은 유창하며, 굵기에 변화를 주고 있는데, 인물의 얼굴·팔·가슴의 살을 묘사할 때, 부드럽고 가는 선으로 살의 느낌과 옷 주름의 奔放하면서 遁絶하는 느낌을 사람들에게 느끼게 하려면, 선을 쓸 때 극히 강구하여야 함. 색채의 운용과 관련하여 設色은 생동적이고, 짙고 엄숙한 빛깔과 광택으로, 사람들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줌. 사용된 색깔은 홍색, 황색, 백색, 검정색, 녹색, 자색 등임. 비록 돌 위에 직접 그렸으나,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그 색채는 새것과 같고, 매우 견고하며, 박락이 쉽게 되지 않았음. 오회분 4호묘는 고구려벽화예술의 높은 발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무덤임. 오회분 4호묘에 나오는 인물도상과 기악천인은 고구려의 사회문화사 연구에 있어 많은 자료를 제공함. 복식 중에 보이는 袍服·笼冠·墨履·黑靴·巾幘, 악기 중에 보이는 腰鼓·胡角·竽萧·長笛, 用具 중에 보이는 团扇·書卷·旌幡·麈尾·금동장식 모두 매우 소중한 자료임. 고구려 후기는 대부분 봉토묘임. 하지만 봉토묘 가운데 오회분 4호묘와 5호묘 같은 거대한 봉토묘는 그 수가 많지 않음. 묘실 건축규모와 벽화 등은 웅장하고 화려함. 축조에 사용된 석재의 거대함과 정밀하게 가공한 점, 봉토가 언덕과 같이 크고 높은 점 등을 볼 때, 왕족의 묘로 추정됨. 한편 오회분 4호묘와 오회분 3호묘 묘단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 두 무덤의 피장자 간의 관계를 설정할 수 있음. 오회분은 동서로 일직선으로 배열되었고, 크기는 서로 비슷한데, 국가왕족의 묘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음. 길림성문물공작대(1984년)에서, 통구지역 고구려고분의 분포는 매장시기의 선후관계와 연관시킬수 있는데, 대체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매장한 것으로 추정됨. 고구려의 무덤은 초기에는 적석묘가 대부분이고, 후기에는 봉토묘로 변화함. 적석묘는 우산 북면 산기슭에 많이 있고, 봉토묘는 통구분지 중부에 많이 있음. 오회분은 묘군의 최남단에 위치하는데, 북쪽으로 약 30m 떨어진 지점에 사신묘가 있고, 다시 북쪽으로 약 350m 떨어진 지점에 통구12호묘가 있으며, 삼실묘가 400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음. 오회분 4호묘는 사신묘, 통구12호묘, 삼실묘보다 늦게 축조되었다고 할 수 있음. 오회분 4호묘의 구조는 엄밀하고 형태는 정연하며, 축조에 사용된 돌은 크고 정교함. 이 같은 특징은 고구려석조건축예술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고구려 후기의 묘장형태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음. 오회분 4호묘의 말각고임 천정구조는 사신묘와 오회분 5호묘의 천정구조와 같음. 이러한 천정구조는 중원 북위시대의 石窟에서도 보이는 등 매우 보편적이었음. 벽화의 내용과 기법을 보면, 사신도 위주이고, 다듬은 돌 위에 직접 그렸으며, 색은 아름답고, 구도는 엄밀하며, 필법은 세련됨. 오회분 4호묘는 白堊土 벽에 그린 통구 12호묘와 사신묘 등 이른 시기의 벽화보다 진보한 점이 많음. 벽화에 보여지는 풍격은 남북조시기의 하남 鄧縣 彩色畵像磚墓에 그려진 풍격과 매우 유사한데, 오회분 4호묘의 천정 북면 제2중 정석 측면에 그려진 요고를 치는 기악천인의 자세·몸매·옷은 같은 모양이고, 심지어는 流雲도 같음. 거문고를 타는 기악천인이 쓴 연화관은 晋대이후에 시작됨. 통구고분군의 매장규율과 오회분 4호묘의 구조, 벽화의 내용·풍격·기법을 볼 때, 축조시기는 오회분 5호묘와 동일시기이고, 사신묘보다는 늦다고 추정됨. 북조시기에 해당하는 5세기 말~6세기초로 추정. 魏存成(1994년)은 고분구조가 방형의 단실로, 중원북조후기와 구조와 같음. 사신이 주체가 되는 등 벽화주제의 변화가 등장. 직접 돌에 벽화를 그림. 네벽 사신 아래 그려진 忍冬網紋은 寧夏 高原 북위 漆棺과 연원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 신의 몸단장은 남조와 유사. 고구려말기 불교, 유교, 도교가 혼합된 상황을 반영. 6세기~7세기 초로 추정. 方起東·劉萱堂(2002년)은 집안에서 발견된 벽화묘의 연대 및 분기와 관련하여, 4기로 나누어 살펴보면서, 4기로 파악. 제4기는 구조가 방형단실인데, 중원북조후기의 묘제와 같음. 묘실은 가지런하게 다듬은 대형 석조로 축조함. 묘실 꼭대기부분은 매우 簡潔한 큰 跨度의 말각고임식임. 묘방향은 서향임. 벽화는 백회 위에 그리는 것이 아니라, 가지런하게 다듬은 석벽 위에 직접 그렸음. 내용은 사신이 주체가 되어 네벽을 차지하고, 네 모서리와 천정에는 괴수, 盤龍, 일월신, 기악신선, 일월성진 등으로 가득 채웠음. 그 가운데 그려진 인물은 대부분 높은 관을 쓰고, 큰 신발을 신었으며, 소매가 큰 옷과 넓은 띠를 갖추고 있는데, 남조대 인물의 풍조가 나타남. 이 기에 해당하는 묘장에는 사신묘, 오회분 4호묘와 5호묘가 있음. 그 축조연대는 6세기~7세기 초로 추정됨. 孫仁杰·違勇 (2007년)은 오회분 4호묘는 묘실이 지하로 들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아, 늦어도 7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자연환경 통구평원 우산묘구 중부 남단에 위치. 집안 車站 북측에 위치한 오회분 가운데 1기 임. 중심지리좌표는 동경 126° 11′855″, 북위 41° 08′224″, 묘정상해발고도는 225m. 동쪽으로 약 44m 떨어진 지점에 오회분 5호묘가 있음. 서쪽으로 약 3m 떨어진 지점에 오회분 3호묘가 있음. 북쪽에는 약 30m 떨어진 지점에 사신묘가 있고, 다시 북쪽으로 약 350m 떨어진 지점에 통구12호묘가 있음. 서북쪽에는 약 47m 떨어진 지점에 방단적석묘가 있음.유물정보 金銅製 圓銅具 1점 외 金銅製 5점 鐵製 釘 3매 起臥 片 2점 棺木 잔편참고문헌 · 池內宏, 『通溝』 上: 滿洲國通化省輯安縣高句麗遺蹟, 日滿文化協會, 1938 · 吉林省博物館, 「吉林集安五盔墳四號和五號墓清理略記」『考古』 1964-2, 1964 · 조선일보사, 『아! 고구려: 우리의 옛땅 그 현장 이야기』, 조선일보사출판국, 1994 · 李殿福, 「吉林集安五盔墳四號墓」『考古學報』 1984-1, 1984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4 · 한국방송공사, 『고구려 특별대전』, 한국방송공사, 1994 · 魏存成, 『高句麗考古』, 吉林大學出版社, 1994 · 전호태,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 사계절출판사, 2000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通溝古墓群1997年調査測繪報告』, 科學出版社, 2002 · 方起東·劉萱堂, 「集安下解放第31號高句麗壁畵墓」『北方文物』 2002-3, 2002 · 전호태, 『고구려 고분벽화의 세계』,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 吳廣孝, 『集安高句麗壁畵』, 山東畵報出版社, 2006 · 孫仁杰·違勇, 『集安高句麗墓葬』, 香港亞洲出版社, 2007 · 張福有·孫仁傑·遲勇, 『高句麗王陵通考』, 香港亞洲出版社, 2007 · 耿鐵華, 『高句麗古墓壁畵硏究』, 吉林大學出版社, 2008 · 전호태, 「고구려 집안권 벽화고분의 현황과 과제」『蔚山史學』 14, 蔚山大學校史學會, 2009

  • 우산하 오회분 5호묘(禹山下 五盔墳 5號墓)

  • 우산하 사회분(禹山下 四盔墳)

  • 리스트여닫기 우산하 2110호묘(禹山下 2110號墓) 출토지 집안시 통구고분군 우산묘구 (集安市 洞溝古墳群 禹山墓區)연대 고구려 3세기대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35 關野貞, 三宅俊成, 伊藤伊八 등이 참여하여 집안 일대의 고구려 유적에 대한 조사를 실시.三宅俊成는 『東北亞考古硏究』에 당시 조사 성과를 보고.1940 藤田亮策이 조사에 참여함. 1940년 장군총 태왕릉 등 대형 적석총과 함께 조사1966길림성박물관, 집안현문물보관소(吉林省博物館, 集安縣文物保管所)대대적인 통구고분군 실측 조사를 실시하고 편호함.1997길림성박물관,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집안시박물관(吉林省博物館,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市博物館)통구고분군(우산, 산성하, 만보정, 칠성산, 마선, 하해방 6개 묘구)의 총 고분 10782기 확인2003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집안시문물보관소(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縣文物保管所)張雪巖(집안시문물관리소), 송명뢰(백성시박물관), 왕춘권(통유현문물관리소), 박윤무(연변조선족자치주박물관)등이 참여함.묘위의 잡물과 묘 아래의 낙석을 발굴하고 주위 조성된 묘역시설 탐색.구조특징 해당 고분은 장방형의 계단적석총으로 광실(雙壙室)이 두개 있는 다곽식 구조. 동측에 남아 있는 제3단의 계단과 서남 모서리 제3단의 계단 상부에 남아 있는 석재를 보면, 원래 1단의 석축 돌은 비교적 크고 가공을 거쳤음. 기타 계단석은 가공여부가 구축의 필요에 따라 정해짐. 계단석은 노출되지 않고 자갈로 봉하여, 외관은 마치 장방형 돌무지와 같음. 먼저 제1단의 계단을 축조한 후에 계단 내 사방에 산돌과 강돌을 깔아 메우고 메운 돌과 계단이 평평하게 같아지면 다시 제2단의 계단을 축조해 나감. 각 단은 모두 0.5~1m씩 들여 쌓기함. 제8단은 서변과 9.2m, 동변과 약 10m 정도 떨어져 축조되었음. 고분 중앙부에는 동서 방향의 격장이 2개 축조되어 남북으로 2기의 고분을 이루고 있는데 2개 고분은 병렬하고 있으며 각각 광실이 있음.역사적 의미 우산 2110호묘 북쪽은 禹山에 기대고 평야에 인접해 있음. 주위 벽화묘와 봉토분이 해당 고분의 좌우를 둘러싸고 있어 우산 2110호묘가 중심이 되는 陵區를 형성하였음. 해당 고분의 형태가 거대하고 독자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 문물중에서 鏤空三翼銀箍鐵鏃(03JYM2110-1)과 靑銅人形車轄(집안박물관장품2285-1) 등의 진귀한 유물을 발견했으며, 묘상에는 기와가 있음. 이것들은 모두 고구려 왕릉의 중요 지표이므로, 우산 2110호묘는 고구려 왕릉임이 확실.자연환경 지리좌표는 동경 126° 11′38.72″, 북위 41° 8′ 10.44″. 고분 최고 지점의 높이는 해발 203.74m. 북쪽으로는 通(化)集(安) 철로와 280m의 거리가 떨어져 있음. 서쪽으로는 집안시구와 약 2㎞ 정도 떨어져 있음. 고분 주위에는 유명한 고분들이 다수 분포하는데, 동쪽 80m 거리에는 우산 2112호묘, 동남에서 서남 일대에는 사신묘, 오회분, 사회분 등의 벽화묘가 있고, 멀리 동남쪽으로는 태왕릉과 임강묘가 보이고, 동북면에는 직선거리로 불과 100m 지점에 992호묘가 있음.유물정보 수레바퀴 비녀장(車轄) 2점, 수키와 2점, 기와 21점, 철기 7점, 토기 2점, 방추 1점.참고문헌 · 朝鮮總督府, 『朝鮮古蹟圖譜』 1, 1915 · 池內宏, 『通溝』 上: 滿洲國通化省輯安縣高句麗遺蹟, 日滿文化協會, 1938 · 三宅俊成, 『東北アシア考古學の硏究』, 國書刋行會, 1975 · 池內宏, 『通溝』 上: 滿洲國通化省輯安縣高句麗遺蹟, 日滿文化協會, 1938 · 藤田亮策, 「通溝附近の古墳と高句麗の墓制」『池內博士還曆記念東洋史論叢』 164, 座右寶刊行會, 1940 · 藤田亮策, 「通溝附近の古墳と高句麗の墓制」『朝鮮考古學硏究』 (再收錄), 高桐書院, 1948 · 永島暉臣慎, 「集安の高句麗遺跡」『好太王碑と集安の壁畵古墳』, 木耳社, 1988 · 吉林省博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3 · 國家文物局 篇,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3 · 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 『洞溝古墓群: 1997年調查測繪報告』, 科學出版社, 2002 · 傅佳欣, 『集安高句麗王陵』, 文物出版社, 2004 · 孫仁杰·遲勇, 『集安高句麗墓葬』, 香港亞洲出版社, 2007

  • 우산하 2111호묘(禹山下 2111號墓)

  • 리스트여닫기 우산하 2112호묘(禹山下 2112號墓) 출토지 집안시 통구고분군 우산묘구 (集安市 洞溝古墳群 禹山墓區)연대 고구려 4~5세기대내부규모 및 특징 석광 남북길이 6m, 동서너비 5m. 묘도 길이 4.60m, 너비 2.38m.역사적 의미 묘의 위치, 규모, 건축구조, 출토유물을 볼 때, 이 묘의 피장자는 신분이 비교적 높다고 여겨지는데, 고구려 시기의 귀족으로 추정. 통구고분군의 분포정황을 살펴보면, 고구려 무덤은 대부분은 산비탈을 따라 위에서 아래로 배열되었는데, 비탈 위의 무덤 연대가 비교적 이르고, 일반적으로 적석곶묘임. 산 아래의 무덤은 대부분 독립된 봉토석실묘이고 그 연대는 비교적 늦음. 우산하 2112호묘가 위치한 지대는 우산 남쪽 비탈의 끝부분으로, 그 주위에 오회분, 사회분, 사신묘 등 대형봉토석실분이 많이 분포함. 축조연대는 그 고분들과 서로 비슷할 것임. 초기 적석총에 부장된 유물은 대부분 실용품이나, 4세기말 전후에서는 장식성 기물이 대량 증가하고, 5세기말 이후에는 장식성 기물이 매우 보편적이 됨. 우산하 2112호묘에서 금·은·금동 장식품이 대량 출토. 출토와당을 살펴보면 연문장식에 “V”자형의 돌기가 있고 연판 꼭대기부분 양측에 각각 한 개씩 乳釘이 있음. 태왕릉에서 출토된 와당에서는 乳釘이 연판 꼭대기 양측 외에도 蓮蕾(연꽃 꽃봉오리) 가운데에도 있음. 장군총에서 출토된 와당에는 蓮蕾 꼭대기에 2개의 乳釘은 있으나, “V”자형의 돌기를 볼 수 없음. 와당의 진행규칙을 살펴보면 우산하2112호묘, 태왕릉, 장군총 순임. 태왕릉에서 일찍이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 명문전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광개토대왕의 능으로 추정. 광개토대왕은 392년에 즉위해서 412년에 죽었으며, 414년에 태왕릉에 안장됨. 계단적석묘인 우산하2112호묘는 태왕릉보다 이르므로 그 상대연대는 약 4세기 말~5세기 초가 됨. 張福有·孫仁傑·遲勇은 우산하 2112호묘를 적석묘가 봉토묘로 가는 과도기 단계로 보면서 피장자로 장수왕의 아들인 助多로 추정. 문헌자료 중 『양사』권 54 동이전 고구려전에 “其死 有槨無棺”이란 기록이 있는데, 초기 적석총 중에 목관구조가 발견되지 않아 고구려 적석총에 목곽은 있고, 목관은 없다고 대부분 인식함. 그런데 우산하 2112호묘에서는 형태가 같지 않은 棺釘 34건, 철제 扒鋦 45건이 출토됨. 棺釘은 목관을 만들기 위해 사용된 못이고, 扒鋦은 목곽에 만들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목관과 목곽이 이 묘에 동시에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음. 적석석광묘 중에 철제 관정이 출토되는 현상은 우산묘구의 여러 묘에서 보이는데, 그 무덤의 연대는 4~5세기 전후로, 우산하2112호묘와 가까움. 즉 4세기에 이르러 고구려에서 목관과 목곽이 적석석광묘에 동시에 사용되었다고 설명됨. 적석석광묘는 고구려 고유의 묘제로, 통구고분군의 적석묘에서 다수를 차지하는데, 석광은 無段·有段적석총 중에 존재함. 그 중 대부분은 단일석광이고, 평면은 장방형이고, 돌로 광벽을 쌓고, 일부에서 석광 한측에 墓道와 石箱, 耳室이 축조되어 있기도 함. 이러한 무덤의 연대는 상대적으로 늦음. 그 중 耳室이 축조된 묘가 石箱이 축조된 묘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음. 그 발전변화궤적은 ‘單一 石壙 - 石箱 - 墓道 - 耳室’이 됨. 耳室이 있는 적석석광묘는 비교적 늦은 묘 형태로, 우산하 2112호묘가 여기에 속함. 耳室이 있는 적석석광묘는 통구고분군에서 많이 발견되지 않음. 그 연대는 일반적으로 4~5세기에 존재함. 시간상으로 볼 때, 이러한 구조의 묘장은 비교적 짧고 명확한 발전과정을 보냄. 고구려 전통묘제를 대표하는 단일 석광적석묘가 어떤 변화로 耳室이 있는 석광묘로 이어졌는가에 대해 명확하게 알 수 없으나, 고구려인이 외래문화의 영향을 받거나 민족내부의 중대변화 후에 묘제가 변하였다고 볼 수 있음. 우산하 2112호묘는 처음에 묘도와 이실을 만든 후에 석괴로 채웠고, 묘 방향은 초기석광묘의 남향 혹은 서남향에서 늦은 시기의 봉토석실묘에서는 보편적으로 동남향으로 변하게 됨.자연환경 주위에 대형 봉토석실분이 많음. 묘 남측으로 60m 떨어진 지점에 오회분 3호와 4호, 묘 동측으로 60m 떨어진 지점에는 四神墓가 있음.유물정보 금기 3점, 은기 1점, 금동기 140점, 철기 141점, 수막새 21점, 기타 44점.참고문헌 · 董峰, 「集安洞溝古墓群禹山墓區2112號墓」『北方文物』 2004-2, 2004 · 張福有·孫仁傑·遲勇, 「高句麗王陵通考要報」『東北史地』 2007-4, 2007

  • 우산하 사신묘(禹山下 四神墓)

  • 리스트여닫기 우산하 2114호묘(禹山下 2114號墓) 출토지 집안시 통구고분군 우산묘구 (集安市 洞溝古墳群 禹山墓區)연대 고구려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66 통구고분군 실측조사 때 통구고분군 禹山墓區 2114號墓, 즉 JYM2114호로 편호.2004 張福有, 孫仁傑, 遲勇등이 참여함.묘 주위에는 많은 암키와와 수키와 잔편을 수집.구조특징 봉토는 절두방추형. 아직 발굴되지 않아, 묘실내부 및 구조는 알 수 없음. 묘의 외측에서 15m 떨어진 곳에 돌로 쌓은 묘단이 있음. 현재 석괴는 대부분 이탈되거나 흙에 묻혀서 표면에 보이지 않음.역사적 의미 우산하 2114호묘는 왕릉 구역내에 있고, 대형봉토석실묘에 속하며, 묘 주변에 기와가 흩어져 있고, 묘단이 구축되어 있으므로 당연히 왕릉임. 우산하 2115호묘(JYM2115)의 남쪽, 사신총(JYM2113)의 북쪽에 위치하므로, 사신총보다는 빠르고 우산하 2115호묘보다는 늦음. 張福有·孫仁傑·遲勇은 양원왕의 또 다른 왕호가 陽崗上好王임을 주목하면서, 우산하2114호묘가 우산 남쪽의 우산하 2115호에 동남에 위치하면서 “陽崗”이라고 칭할 만하고, 오회분 5호묘의 동북쪽에 있어 “陽崗”의 “上好”에 칭할 수 있다고 하면서, 우산하 2114호묘를 고구려 24대 왕인 陽原王의 무덤으로 추정.자연환경 서북으로 약 90m 떨어진 지점에 우산하 2115호묘(JYM2115)가 있음. 서남으로 약 120m 떨어진 지점에 오회분 5호묘(JYM2105)가 있음. 남측에는 集安~果樹場의 公路가 있음. 중심지리좌표는 동경 126° 11′923″, 북위 41° 08′353″, 묘정상해발 243m.유물정보 기와편 다수.참고문헌 · 孫仁杰·遲勇, 『集安高句麗墓葬』, 香港亞洲出版社, 2007 · 張福有·孫仁傑·遲勇, 「高句麗王陵通考要報」『東北史地』 2007-4, 2007

  • 리스트여닫기 우산하 2115호묘(禹山下 2115號墓) 출토지 집안시 통구고분군 우산묘구 (集安市 洞溝古墳群 禹山墓區)연대 고구려 6세기 초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66 1966년 통구고분군 실측조사 때, 禹山墓區 2115號墓, 즉 JYM2115호라고 편호.2004 張福有, 孫仁傑, 遲勇등이 참여함.여러 차례에 걸쳐 조사·실측을 진행. 묘의 주변에서 기와 등 유물 출토.역사적 의미 오회분과 사신묘, 우산하 2114호묘와 우산하 2115호묘는 고구려가 평양천도 후에 다시 돌아와 장사를 지낸 봉토석실묘임. 우산하 2115호묘는 대형봉토석실묘인데, 규모, 출토된 기와, 고구려 왕릉구역에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왕릉급의 묘라고 판단할 수 있음. 왕릉구역과 국내성 사이에 위치한 동대자유적은 왕릉제사와 관계가 있음. 북한 평양주위에도 고구려시기 중·대형 봉토석실묘와 벽화묘가 출토되고 있으나 무덤과 묘실의 규모, 석재 선택, 가공공예수준과 벽화내용 등의 다방면을 살펴볼 때, 고구려 삼경중의 하나에 못 미침. 국내성 주위의 같은 유형의 묘장은, 고구려왕이 여전히 건재했던 상황에서, 아무도 함부로 이렇게 장엄하고 화려한 능묘를 만들어 왕권을 참월하는 이가 없었음. 혹 누군가가 이러한 용기가 있다하더라도 이런 실력은 없을 것임. 張福有·孫仁傑· 遲勇 등은 평양 천도 후 고구려왕릉의례에서 처음으로 집안으로 回葬했던 고구려 제21대왕인 文咨明王의 무덤으로 추정.자연환경 중심지리좌표는 동경 126° 11′815″, 북위 41° 08′349″, 묘정상 최고해발은 246m. 우산 남쪽 기슭의 비교적 광활하고 완만한 비탈에 위치. 우산묘구의 북고남저의 완만한 비탈지의 중상부에 위치. 압록강 중류 右岸 충적평원과 인접. 동쪽으로 약 90m 지점에 우산하 2114호묘가 있음. 남쪽으로 약 120m 지점에 우산하 2113호묘가 있음.유물정보 기와편 다수참고문헌 · 孫仁杰·遲勇, 『集安高句麗墓葬』, 香港亞洲出版社, 2007 · 張福有·孫仁傑·遲勇, 「高句麗王陵通考要報」『東北史地』 2007-4, 2007

  • 우산하 2117호묘(禹山下 2117號墓)

  • 우산하 2124호묘(禹山下 2124號墓)

  • 리스트여닫기 우산하 2125호묘(禹山下 2125號墓) 출토지 집안시 통구고분군 우산묘구 (集安市 洞溝古墳群 禹山墓區)연대 고구려 건축구조와 사용된 돌의 정황이 우산하 992호묘와 같으므로, 그 연대 또한 서로 비슷할 것으로 추정.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66 통구고분군 실측조사 때 JYM2125호로 편호.구조특징 방향 325°. 평면은 대략 방형. 2단의 계단을 볼 수 있는데, 그 상부 계단은 대부분 파손되었고 서·남 양측의 1단 계단이 보임. 동남모서리에는 단지 계단석 1개만 볼 수 있음. 남측의 제1단 계단은 2~3층으로 쌓았고, 높이는 1.3m 정도임. 계단석의 대부분은 약간 가공된 자연석으로 가장 큰 석괴는 길이가 1.8m, 너비가 1m, 높이가 0.6m 정도임. 제2단 계단은 제1단 계단 윗면에서 네면 모두 1.2m 안으로 들어가 축조되었음. 제2단 계단석은 약간 작은데, 동남모서리의 제2단 계단석은 길이 0.8m, 너비 0.4m, 높이가 0.4m 정도임. 묘 상부의 봉한 돌들은 대부분 강자갈이고 깨진 산돌이 매우 적게 있는데, 크기는 대부분 0.3m 정도임. 묘의 가운데부분은 융기되어 있고, 서측과 남측에는 구덩이가 여러 곳에 있음. 석괴는 대부분 이탈함. 묘 정상의 가운데 부분에 대량의 熔石이 있음.자연환경 남쪽으로 약 40m 떨어진 지점에 우산하 2115호묘가 있음. 서쪽으로 약 120m 떨어진 지점에 우산하 2117호묘가 있음. 북쪽으로 약 130m 떨어진 지점에 通集철로가 있음. 동쪽으로 약 1,000m 떨어진 지점에 태왕릉이 있음.유물정보 기와편 2점참고문헌 · 孫仁杰·遲勇, 『集安高句麗墓葬』, 香港亞洲出版社, 2007

  • 우산하 2174호묘(禹山下 2174號墓)

  • 리스트여닫기 우산하 삼실묘(禹山下 三室墓) 출토지 집안시(集安市)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09 1909~1910년 谷井濟一, 栗山俊一에 의해 『주선고적도보』(1915)에 기록.1913 關野貞에 의해 수차례 조사·기록. 관야정은 3개의 묘실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삼실묘라고 부름.1936 三上次男이 『高句麗と渤海』에 기록.1956 1956년 봄 集安縣 文化科에 의해 무덤문 봉쇄.1957길림성박물관(吉林省博物館)1957년 4월 王承禮, 周健鵬, 曲紹伯, 蘇才에 의해 전체적인 벽화묘조사 가운데 이루어짐.1961 1961년 가을 무덤문 폐쇄.1963 1963년 6월 무덤 앞에 나무설명표지판 설치.1972 흙무지를 돋우고 무덤문을 새로 손보는 등의 무덤수리.1975집안현문물보관소(集安縣文物保管所)1975년 5월 周云臺, 林至德에 의해 벽화에 대한 재조사와 벽화의 화학적 보존처리가 이루어졌고, 제1묘실 바닥의 진흙 제거. 인골·이배·鉢·壺·부뚜막 등을 발견.1997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집안시박물관(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市博物館)실측. 분구 한변 길이 30m, 높이 5m로 측정.1935, 1936 池內宏, 濱田耕作, 梅原末治이 1935년 9월 및 1936년 9월 두 차례에 걸쳐 집안에 가서 삼실묘를 조사·기록하였는데, 그 내용이 『통구』下에 실림.구조특징 봉토석실벽화묘 1914년 3개의 묘실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삼실묘라고 부름. 우산하 2231호묘(JYM 2231)로 편호. 봉토에는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고 함. 일찍이 도굴됨. 크기가 서로 비슷한 묘실로 이루어진 다실묘임. 3개 묘실이 동시에 축조되어 하나의 통일된 모습이 나타남. 모두 석재로 쌓았음. 먼저 긴 연도를 지나면 제1실에 도달하고, 그 왼쪽에 제2실이 있으며, 그 앞면에 제3실에 있는데, 각각 짧은 연도로 연결됨. 묘도의 입구는 돌로 막았는데, 그 너비는 3척 4촌, 길이는 13척임. 평면배치는 曲尺狀으로 연결됨. 석재에 백회를 바르고 백회벽면 위에 그림을 그림. 묘실지면에 백회를 발라, 매우 매끄럽고 정연함. 묘실 지면 백회층 아래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작은 면적을 시굴하였는데, 백회층 아랫면은 냇돌층이 있고, 그아래로는 항토 다짐층이며, 夯土層 아래는 生土였음. 삼실묘를 축조할 때, 먼저 땅을 다져서 지반을 단단하게 한 다음, 다져진 지반 위에 냇돌을 깔아 묘실에 습기가 스며들지 못하게 함(묘가 있는 지점이 산기슭이기 때문에 지하수위가 비교적 높음). 긴 묘도가 이 묘실 서벽중부를 통과하고, 묘실 안에서 方을 볼 수 있음. 제1실의 주위의 벽은 돌로 축조. 네 벽은 안으로 약간 기울어졌음. 네 벽 위에는 5층 평행고임을 구축하고, 다시 2층 말각고임을 구축한 다음, 그 위에 장방형 석판 2개를 덮었음. 백회가 발라져 있음. 일본인들이 이 고분을 조사할 때, 고분의 천정석을 열고 사다리를 이용해서 들어감. 제2실은 제1실의 북쪽에 위치. 두 묘실 사이에는 연도로 서로 연결됨. 연도는 제1실 북벽 동쪽 끝에 위치. 제2실은 제1실보다 약간 작음. 묘실평면은 방형임. 천정구조는 제1실과 같은데, 다만 4층 평행고임을 구축하고, 다시 2층말각고임을 구축한 후에, 그 위는 거대한 돌로 덮었음. 제3실은 제2실의 서쪽에 위치하고, 제2실 서벽과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음. 크기는 제2실과 거의 같음. 묘꼭대기 구조는 5단의 평행고임을 구축하고, 다시 3단의 말각고임을 구축함. 석재에 백회를 바르고 백회벽면 위에 그림을 그림. 연도, 통로, 3개 묘실 네 벽, 천정 모두 벽화가 그려짐. 벽화 전체의 주제는 생활풍속과 사신도임. 각 묘실의 네 벽 모서리와 벽 상단에는 적갈색 안료로 기둥과 두공, 도리를 그림. 네 벽은 사회풍속화를 주제로 함. 평행고임 천정에는 사신과 권운문을 그려 천공을 나타냄. 묘실 네벽 모서리에는 주홍색 斗拱이 그려졌음. 네 벽 위쪽 끝부분에는 홍색과 황색 두 색의 휘장을 그렸는데, 남벽 휘장은 바람에 펄럭이는 것 외에 瓔珞이 있음. 전체 묘실을 가옥처럼 꾸밈. 동벽은 제1실의 主壁으로, 남녀묘주가 가옥에서 대좌하는 벽화가 그려짐. 全壁에는 가옥 4채를 그렸음. 크기의 차이는 있지만, 배치가 안정됨. 남쪽의 제1가옥과 북쪽의 제2가옥은 크기와 모양이 같고, 색깔이 약간 다름. 그 외 나머지 두 가옥은 앞의 두 가옥에 비하여 작고, 2층으로 그려짐. 1호 가옥(남에서 북으로 1~4호로 호칭)은 屋頂이 황색이고, 兩坡水式이며, 등마루 끝에는 치미가 있고, 檐角은 反翹임. 묵선으로 윤곽을 그렸고, 주색 기둥 4개가 있음. 가옥 안에는 황색관을 쓴 여인이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채, 북쪽면을 향하여 무릎 꿇고 앉아 있음. 하반신은 박락되어 명확히 보이지 않음. 머리에는 황색관을 쓰고 묵색合袵紅服을 입었음. 1호 가옥 밖으로 남자시종이 북쪽을 향하고 서 있는데, 머리를 높이 묶었고, 合袵黑點黃服을 입었으며, 하반신을 박락되었음. 2호 가옥은 벽 정가운데 있는데, 2층으로 그려짐. 屋頂은 홍색이고, 兩坡水式이며, 등마루 중간에 寶頂을 그렸음. 아래층은 검은색 기둥임. 아래층에 한 여인은 얼굴을 북쪽을 향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있음. 合袵黃色裙服을 입었고, 밑부분은 박락됨. 상술한 두 여인은 남주인의 처와 첩임.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여인 뒷면에는 시녀가 서 있음. 3호 가옥은 처마 아래에 홍·황색 두가지 색의 휘장이 있는데, 주홍색 기둥에 연결되어 있고, 가옥 내의 후벽 벽화에 황금색 비단 도안의 壁帳이 있다는 점에서 1호 가옥과 다름. 새깃을 꽂은 관을 쓴 남자가 남쪽을 향하여 앉아 있는데, 묘주인으로 추정. 붉은 입술과 짧은 수염이 있음. 위에는 황색合袵短襦를 입고, 두 손을 가슴 앞에 대고 있으며, 하반신은 박락되었음. 4호 가옥은 2호 가옥과 마찬가지로 2층이지만, 寶頂이 없고 등마루에 치미가 있다는 점에서 2호 가옥과 다름. 아래층에는 시종 두 명이 무덤주인쪽을 향해 나란히 서 있음. 앞에 있는 시종은 머리를 높이 묶었고, 손에는 긴 손잡이가 달린 부채를 들었음. 뒤에 있는 시종은 홍색의복을 입고, 두 손은 가슴 앞으로 한 물건을 들고 있음. 동벽전체에는 가옥 4채를 그렸음. 사람은 7명, 남주인 1명, 여주인 2명으로, 각각 가옥을 차지하고 있음. 남여주인의 측면에 남녀노복 4명을 그렸음. 전체화면은 묘주인이 집에서 살고 있는 정경을 그림. 동남벽은 네모진 전돌이 깔린 듯한 가로로 길게 뻗은 길에 의해 위아래로 벽면을 나누어짐. 윗면에는 무덤주인부부 출행그림을 그리고(출행도), 아랫면에는 사냥그림을 그렸음(수렵도). 11명으로 이루어진 행렬은 안벽인 동북벽을 향하고 있으며 신분에 따라 사람크기가 다름. 양산을 받쳐 든 7, 8번째의 두 인물과 무엇인가를 받친 듯이 오른손 바닥을 위로 젖힌 11번째 인물 외에는 모든 인물이 두 손을 가슴 앞에 올려 맞잡은 채 걷고 있음. 인물들의 옷은 모두 맞섶(合袵)이며 대부분 고구려 특유의 점무늬 바지 혹은 점무늬 저고리 및 치마를 입었음. 첫 번째 사람은 인도하는 남자노복으로, 머리는 풀어 헤쳤음. 위에는 合袵黑點黃色短襦를 입었고, 허리를 매었으며, 아래에는 통이 넓은 바지를 입었음. 바닥이 빨간 검은색 신발을 신었음. 두 손은 가슴 앞에서 서로 마주잡고 있음. 두 번째 사람은 남주인임. 머리에는 황색의 절풍을 썼음. 용모는 수려하고, 붉은 입술에 짧은 수염을 가졌으며, 두 손은 소매 끝을 가슴에 대고 있음. 위에는 合袵黑邊短襦를 입었고, 외투는 흑색의 짧은 마고자(掛)를 입었으며, 허리를 매었고, 아래에는 통이 넓은 바지를 입었음. 황색 신발을 신음. 세 번째 사람은 여주인임. 머리에는 황색 巾帼을 씀. 몸에는 褉緣을 더한 左衽黃色裙服을 입었고, 허리에는 긴 띠를 매었으며, 두 손은 가슴 앞에서 서로 마주잡고 있음. 네 번째 사람은 아이임. 머리는 풀어헤침. 위에는 合袵紅色短襦를 입었고, 아래에는 흑점이 있는 통이 넓은 황색바지를 입었음. 붉은 바닥의 신발을 신었음. 두 손은 가슴 앞에서 서로 마주잡고 있음. 다섯 번째 사람은 남자임. 얼굴에 짧은 수염이 있음. 머리에는 황색 절풍을 썼음. 合袵黑袖金黃色短襦와 圓領內衣를 입었고, 허리는 매었으며, 흑점이 있는 통이 넓은 황색 바지를 입었음. 붉은 바닥의 검은색 신발을 신었음. 두 손은 가슴 앞에서 서로 마주잡고 있음. 여섯 번째는 여자의 모습임. 검은색 머리를 어깨에 늘어뜨렸음. 褉緣을 더한 合袵裙服을 입었음. 두 손은 가슴 앞에서 서로 마주 잡고 있음. 용모는 희미해서 자세히 알 수 없음.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 사람은 노복 남녀 두명으로, 손에 양산을 잡고 있음. 남자는 앞에 있는데, 머리는 벗겨짐. 黃色合袵短襦와 흑점이 있고 통이 넓은 황색 바지를 입었음. 붉은 바닥의 검은색 신발을 신었음. 여자는 뒤편에 있는데, 褉緣을 더한 合袵黑點金黃色裙을 입었고, 허리는 몸 뒤로 매었음. 아홉 번째는 여인의 모습임. 몸의 크기는 앞에서 언급한 남여주인 다음으로 큰데, 남주인의 첩으로 추정됨. 검은색 머리를 頭頂에 매었음. 圓領內衣와 褉緣을 더한 左袵裙服을 입었음. 두 손은 가슴앞에서 마주잡았음. 열 번째와 열 한번째 사람은 두 명의 노복으로, 긴 행렬의 뒤를 따르고 있음. 두 명 모두 황색 절풍을 쓰고, 턱 아래에 홍색 띠를 둘렀음. 수염이 조금 나 있음. 앞에 있는 사람은 흑점이 있는 황색 상의를 입었고, 허리를 동여 매었으며, 자색의 통이 넓은 바지를 입었음. 두 손은 가슴 앞에서 모으고 있음. 뒤에 있는 사람은 나이가 많아, 등이 약간 굽었고, 짧은 수염이 있음. 오른쪽 팔은 굽혀서 손바닥을 위로 향하여 있고, 왼손은 주먹을 쥐고 가슴 옆에 대고 있음. 合袵자색 상의를 입었고, 허리를 매었으며, 황색바지를 입었음. 출행도를 보면, 一字雁行으로 왼쪽으로 향하고 있음. 우산을 들고 있는 두 명과 뒤의 노복을 제외하고 모두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바로 고구려인이 가진 특유의 ‘行必揷手’ 의 표현임. 남벽 아랫부분에 벽화 절반이 남아 있는데, 수렵을 주제로 한 벽화로, 묘주인 생전에 사냥한 정경을 묘사한 것임. 현재는 말을 타고 있는 인물 두 명이 남아 있음. 앞에 있는 사람은 상반신만 남아 있고, 타고 있는 말은 박락되었음. 머리에 관을 썼는데, 관에 새깃 2개를 꽂았음. 몸에는 황색緊袖襦衣를 입었고, 허리는 동여 매었으며, 화살통을 차고 있음. 사냥을 하고 있음. 뒤에 있는 사람은 홍색의 말을 타고 앞으로 달려가고 있음. 머리는 풀어 헤쳤음. 紅袵緣緊袖黃襦衣를 입었고, 허리는 동여 매었음. 왼쪽 팔은 앞으로 뻗었는데, 새매(鷂)가 팔에 머물고 있음. 말 앞에는 매가 꿩을 쫓고 있음. 북벽에는 공성도가 있음. 성벽 바깥의 벌판에서는 말갑옷과 말투구로 무장한 말을 탄 두 갑주무사가 긴 창을 휘두르며 서로 쫓고 쫓기고 있음. 말 한 마리는 적색이고, 다른 마리는 흑색임. 城垣은 굽어져 있고, 문과 樓가 있으며, 성안에 가옥이 있음. 성벽 바깥의 오른쪽 상단에서는 두 사람이 격투를 벌이고 있음. 성안에는 한 인물이 담벽에 기대서 겁먹은 모습으로, 성 밖에서 싸우는 모습을 몰래 보고 있음. 벽의 중앙으로 연도가 나 있어, 좌우 두 부분으로 나누어짐. 묘실입구 좌벽과 우벽에는 각각 실물크기의 문지기를 그렸음. 남측에 있는 문지기는 머리에 연화관을 썼고 영대가 휘날림. 이마는 넓고 눈이 크며, 짧은 수염이 있음. 선량한 문관풍으로 그림. 圓領長服을 입고, 허리는 동여 매었음. 북측에 있는 문지기는 머리를 높이 묶고, 영대를 매었음. 두 눈을 부릅뜨고 검보라빛 얼굴을 지닌 무인형으로 묘사. 붉은 가슴을 노출시켰고, 어깨에는 赭石과 수건을 걸침. 자색 바지를 입었음. 두 손은 가슴에 모으고 있음. 천장고임벽화는 평행고임 제1중과 2중, 4중의 일부 면에만 남아 있음. 제1중 梁枋 측면에 꼬인구름무늬(권운문)가 그려졌는데, 꼬인구름무늬(권운문)는 벽 사방을 통과하는 연속된 도안임. 제1중 梁枋 위는 평행고임으로, 각 층 백회는 대부분 박락되었는데, 제2중 石側 서면에 두 마리의 주작이 서로 바라보면서 서 있는 벽화가 남아 있음. 주작 양측에는 각각 보리수 한 그루가 있음. 동벽에는 현무 한쌍이 있음. 평행고임 제4중 앞면에는 봉황으로 보이는 새 한 마리가 남아 있음. 천정에 남아 있는 벽화를 볼 때, 제2중 측면은 쌍사신도를 그렸는데, 현무는 동면, 주작은 서면에 그렸음. 이것은 묘의 방향 혹은 묘주인 장식과 연관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화가가 방향을 판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북방신의 상징인 현무를 동벽에 그린 것이라고 추정됨. 연도 양측에 벽화가 그려져 있으나 대부분 박락. 남벽에 묘실을 향한 인물행렬의 일부, 천장면에 해와 달을 비롯한 10여개의 별 그림이 남아 있음. 네 벽에는 제1실에서와 달리 역사와 장수를 그렸음. 천정에는 연화, 새, 짐승, 祥雲, 선인, 星宿을 그렸음. 남·북·동 세 벽에는 각각 역사 한명이 그려져 있음. 두 다리는 기마자세를 취하고, 두 팔로는 도리 밑을 받쳐 들고 있음. 세 역사는 자세는 같으나 의복은 다름. 남벽 역사는 검은 머리를 頭頂에서 매었음. 황색 얼굴색에 붉은 입술, 큰 귀, 짧은 수염이 있음. 圓領緊袖金黃色錦衣를 입었는데, 緊袖에 蓮瓣紋이 장식되어 있음. 허리에 황색띠를 매었고, 대퇴도 매었으며, 몸 뒤에 휘날리고 있음. 아래에는 황색의 꼭 끼는 바지를 입었음. 다리부분은 희미하여 명확하지 않음. 북벽 역사는 검은 머리를 頭頂에서 매었음. 붉은빛 얼굴색에 큰 귀와 짧은 수염이 있고, 윗니는 아랫입술을 꽉물고 있음. 황색圓領緊袖羽衣를 입었고, 허리에는 홍색띠를 매었으며, 綠色羽袴를 입었음. 맨발임. 두 다리에는 각기 한 마리씩의 뱀이 감겼으며 온몸에서는 상서로운 기운이 뻗어 나오고 있음. 푸른빛 얼굴의 동남벽 역사의 짧은 소매 끝은 연꽃잎무늬로 장식되었으며 두 다리 부분은 안료의 퇴색이 심하여 뱀이 감겨 있는지 여부가 확실치 않음. 제3실의 연도와 이어지는 제2실 서남벽의 장수는 뿔 모양의 장식이 좌우로 뻗은 투구와 목가리개가 달린 갑옷, 뾰족한 못이 박힌 전투용 신발로 무장하였으며, 오른손에는 긴 창을 짚고, 왼손에는 환두대도를 칼집 째 들었음. 무사도 상대편 過道 옆에는 권운문이 있음. 묘실 내 서남모서리와 동북모서리에는 각각 흑색의 斗拱을 그렸고, 밑에는 흑색 柱礎를 그렸음. 천장부 평행고임 제1중에는 앞뒤좌우의 방향에 맞추어 雙四神을 그렸음. 동남면의 마주 보는 두 주작 사이에는 연꽃화생을 그렸음. 남쪽에는 청룡 두 마리가 있는데, 머리를 맞대고 서쪽으로 날고 있음. 북벽에는 백호 두 마리가 있는데, 입을 벌리고 이빨을 드러내며, 서쪽으로 달리고 있음. 흡사 청룡과 대칭하는 것 같음. 동벽에는 현무 2마리가 있는데, 두 현무는 뱀이 서로를 한 번 감은 후, 각기 자기가 휘감은 거북과 머리를 마주하게 그렸음. 제2중 고임에는 꽃받침과 받침줄기가 달린 5판연화를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 동벽에는 두 송이, 북벽에는 네 송이가 있고, 그 사이에는 작은 연화가 있음. 서벽에는 세 송이가 있고, 중간에 한 송이가 사람에게 꺾이고 있음. 남벽에는 네 송이가 있는데, 서쪽으로 두 번째 송이는 칼로 잘려진 흔적이 있음. 제3중의 서남면과 잇닿는 제4중의 다른 세 면은 天馬를 비롯한 여러 가지 상서동물로 장식. 고임 제5중에 해당하는 삼각고임 제1중의 각 면에는 남녀연꽃화생 및 소머리에 사람몸을 한 神人, 여러 종류의 飛天과 奏樂天을 그렸음. 삼각고임 제2중에는 갖가지 비천을 묘사하였고 삼각고임 제1중과 제2중의 밑면에는 커다란 연꽃을 그림. 천장석에는 해와 달, 북두5성, 남두6성으로 장식. 제1실에서 제2실로 통하는 연도 좌벽과 우벽에는 문지기 장수를 한 사람씩 그렸음. 두 문지기는 서로 侍立하고 있고, 제1실 쪽을 향하면서 2실을 수호하고 있음. 두 문지기 모두 황색 투구를 썼음. 백색 띠를 매었고, 앞뒤로 휘날리고 있음. 菊黃色 얼굴색에, 눈은 엄숙하고, 짧은 수염이 있음. 두 손에는 긴 창을 잡고 있음. 홍색 袍服을 입었고, 허리에 띠를 매었음. 雙叉를 세우고 어깨에는 황금색 두건을 둘렀으며, 두 팔을 동여매어 아래로 내려뜨림. 다리부분은 박락됨. 제 3실 네 벽에는 역사, 천정에는 사신·연화·새·祥雲·짐승, 星宿 등이 그려짐. 묘실 네 구석에는 흑색 斗拱이 그려짐. 네 벽에는 하늘세계를 떠받드는 역사를 한 사람씩 그렸음. 서북벽, 동북벽, 동남벽의 역사는 제2실 세 벽의 역사와 얼굴, 자세, 옷차림새 등이 같음. 서북벽 역사의 오른쪽 윗편에는 두 뱀이 몸을 뻗쳐오르면서 교미하는 모습을 그렸음. 동북벽 역사의 두 다리 사이에는 연꽃이 한 송이 떠 있으며, 동남벽 역사의 소매 끝은 연꽃잎무늬로 장식. 서남벽 역사는 뱀이 감긴 오른팔로는 창방을 받쳐 들고, 왼팔은 나무기둥근처로 뻗은 자세로 서 있음. 평행고임 제1중에는 방향에 맞추어 쌍사신을 그렸음. 서벽에는 주작 두 마리가 그려짐. 주작은 날개를 펴고 마주보며 서 있음. 주작의 뒤에는 측면에서 바라본 연화가 배치되어 있음. 동벽에는 현무 두 마리가 그려졌는데, 뱀이 거북이몸을 휘감고 있음. 뱀의 두 머리는 相交하면서, 머리를 돌려 거북이 머리를 서로 보고 있음. 두 현무 사이에는 꽃봉오리 한 개가 있고, 남쪽의 현무 뒷편에 그려진 물고기를 문 백로(白鷺)의 모습이 눈에 뜨임. 남벽에는 청룡 두 마리가 그려짐. 머리를 들고 입을 벌리며 혀를 내밀고 있음. 몸은 황색으로 붉은색 비늘이 있음. 용의 발가락은 3개임. 북벽에는 백호 두 마리가 그려짐. 입은 벌리고 혀를 내밀면서 앞으로 달려가고 있음. 앞의 호랑이는 청색이고, 뒤의 호랑이는 황색임. 평행고임 제2중의 서북면, 동북면, 동남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옆에서 바라본 五瓣연꽃을 그렸음. 매벽에는 세 송이가 있는데, 색은 주홍색이고 묵선으로 윤곽을 함. 그 동벽의 제2층고임과 남·서·북벽의 3층고임은 서로 연결되었고, 주홍색의 권운문이 있음. 평행고임 제4중의 각 면에는 상서로운 새들과 구름을 그렸으며 제4단의 뒷면과 제5단의 앞면 및 좌우 면에는 비둘기, 봉황, 긴꼬리 새, 백로 등과 같은 갖가지 상서로운 새를 묘사. 제1층 말각석 밑에는 각각 연화가 그려져 있음. 제1층 말각석 측면에는 여러 짐승이 있는데, 동남모서리에는 뿔 한 개가 있는 짐승이 있고, 동북모서리에는 천마 한마리가 있음. 서남·서북 모서리는 명확하게 보이지 않음. 제2층 말각석 측면에는 측면에서 바라본 五瓣연화 한송이가 있는데, 말각석 밑으로 뻗어 있음. 천장석에는 해와 달, 여러 가지 별자리를 배치. 2실에서 3실로 통하는 연도 좌벽과 우벽에는 긴 창을 쥐고 무덤칸을 지키는 문지기 장수를 한 사람씩 그렸는데, 2실을 향하고 있으면서 제3실을 수호하고 있음. 역사들은 제1실에서 제2실로 통하는 연도의 역사와 같이 긴 창을 들고 서 있음.내부규모 및 특징 묘도는 서쪽으로 나 있는데, 길이 4.5m, 너비 1.2m, 높이 1.2m, 방향은 남서쪽 73° 제1실은 약간 큰데, 길이 2.9m, 너비 3m, 높이 3.2m.역사적 의미 삼실묘의 배치는 새롭고 안정되어 고구려석조건축예술의 발전수준을 보여 주고 있음. 묘실구조를 보면 여러 층의 평행고임을 구축한 다음, 말각고임을 구축하는 방법을 채용하고, 그런 연후에 말각을 쌓는 일정한 기초를 세웠음. 벽화를 보면 각저묘, 무용묘, 통구 12호묘, 마선구 1호묘보다 새로운 내용이 풍부함. 예컨대 雙四神, 들보를 받치는 역사, 蓮花仙子, 뿔 하나 가진 짐승, 출행도, 공성도, 鷺鹚, 우수인신상 등임. 벽화내용을 보면 묘주인이 거주한 집은 상당히 화려함. 휘장이 걸려있고, 높이 들어서 橫梁에 묶고, 포대를 내려뜨는데 流苏와 같음. 벽에도 織錦式 도안을 그린 화려한 휘장이 있음. 이러한 건물은 고구려 일반인이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상층 통치계급의 주거지라고 할 수 있음. 그리고 남자 한 명과 여자 두 명이 각각 한 가옥을 차지하고 있음. 묘실구조의 재결합은 3실이 서로 연결되는 것임. 제1실 동벽 출행도에는 남자 한명과 여자 두 명의 주인이 가솔과 노복을 거느리고 출행하고 있는데, 삼실묘 묘주가 일남일처일첩이라는 것을 알려줌. 제1실 북벽의 공성도를 볼 때, 남자 묘주인은 이름 있는 장군으로 추정됨. 공성도는 묘주인이 어느 전장에서 공을 세운 장면을 묘사하는 것으로 추정. 關野貞(1932년)은 연화문이 북위이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아, 동진시대의 것으로 추정하고, 평양천도 이전으로 추정. 李殿福(1981년)은 묘실구조, 벽화내용, 제1실에서 출토된 시유도기 등을 살펴볼 때, 축조연대는 대체로 북위시기에 해당하는데, 통구 12호묘와 마선구 1호묘보다는 늦고, 사신묘와 오회분 4·5호묘보다 이르다고 할 수 있음. 대체적으로 5세기 혹은 5세기 이후로 추정됨. 魏存成(1994년)은 귀갑묘, 산연화묘, 장천 1호묘, 장천 4호묘, 하해방 31호묘, 모두루묘, 환문묘와 더불어 5세기 말~6세기 초로 추정. 方起東·劉萱堂(2002년)은 집안에서 발견된 벽화묘의 연대 및 분기와 관련하여, 4기로 나누어 살펴보면서, 3기로 파악. 제3기는 일부 단실과 삼실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쌍실묘가 주를 이룸. 묘꼭대기부분은 여러 층의 평행 고임과 覆斗式이 나타나는데, 말각고임의 간격(跨度)이 더욱 커짐. 묘방향은 대부분 서향임. 벽화내용은 묘주인의 생전생활장면과 장식무늬(도안) 두 유형이 주를 이루는데, 조성된 도안의 단독모양이 더욱 커짐. 이 시기의 사신그림은 더욱 완전해지고, 점차 돌출되며, 신선과 불교주제의 그림이 더욱 증가함. 이 시기의 묘장에는 장천 1호묘, 삼실묘, 환문묘, 모두루묘, 귀갑묘 등이 있고, 축조연대는 5세기 중엽~6세기 초로 추정. 孫仁杰·違勇(2007년)은 제1실은 山谷도상 위주이고, 제2·3실은 역사 위주이며, 천정은 雙사신도가 배치되어 있음. 사신도상은 각저묘·무용묘보다 늦고, 사신묘·오회분 4·5호묘보다 이르다고 할 수 있음. 화풍과 분포가 장천 2호묘와 비슷. 묘 내에서 출토된 황색시유도기 등은 고구려 중·만기의 유물임. 그러므로 축조연대는 5세기로 추정.자연환경 우산묘구 서쪽에 위치. 통구평원중부 우산남쪽기슭 태왕진 우산촌 5조 밭에 위치. 북쪽으로 20m 떨어진 지점에 통집철로 3호 표지가 이웃하고 있음. 남쪽으로 250m 떨어진 지점에 오회분이 있음.유물정보 人骨 다수 부뚜막 1개 외 土器類 7개 鐵釘 다수 동물뼈 다수참고문헌 · 關野貞, 「滿洲輯安縣及び平壤附近に於ける高句麗時代の遺跡(一)」『考古學雜誌』 5-3, 日本考古學會, 1914 · 關野貞 外, 『朝鮮古蹟圖譜』 上, 1915 · 關野貞, 『朝鮮美術史』, 朝鮮史學會, 1932 · 池內宏·梅原未治, 『通溝』 下: 満洲国通化省輯安県高句麗壁畫墳, 日滿文化協會, 1940 · 集安縣文物保管所·吉林省文物工作隊, 「吉林集安洞溝三室墓淸理記」『考古與文物』 1981-3, 1981 · 李殿福, 「集安洞構三室墓壁畵著錄補正」『考古與文物』 1981-3, 1981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4 · 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편, 『조선유적유물도감』 6, 1990 · 조선일보사, 『集安 고구려 고분벽화』, 조선일보사출판국, 1993 · 魏存成, 『高句麗考古』, 吉林大學出版社, 1994 · 한국방송공사, 『고구려 고분벽화』, 한국방송공사, 1994 · 강현숙, 『고구려 고분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2000 · 전호태,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 사계절출판사, 2000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通溝古墓群1997年調査測繪報告』, 科學出版社, 2002 · 方起東·劉萱堂, 「集安下解放第31號高句麗壁畵墓」『北方文物』 2002-3, 2002 · 전호태, 『고구려 고분벽화의 세계』,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 孫仁杰·違勇, 『集安高句麗墓葬』, 香港亞洲出版社, 2007 · 耿鐵華, 『高句麗古墓壁畵硏究』, 吉林大學出版社, 2008 · 전호태, 「고구려 집안권 벽화고분의 현황과 과제」『蔚山史學』 14, 蔚山大學校史學會, 2009

  • 리스트여닫기 우산하 2403호묘(禹山下 2403號墓) 출토지 집안시 통구고분군 우산묘구 (集安市 洞溝古墳群 禹山墓區)연대 고구려 4세기대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4~1985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집안시문물보관소(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市文物保管所)두 차례 조사에서 총 113기의 고분 발굴, 석관묘 1기, 적석총 38기, 봉토분 73기, 토석혼축묘 1기, 출토 유물은 931건임.발굴된 113기 고분은 대다수 이른 시기부터 파괴와 도굴을 당함. 형식이 확실치 않은 것도 있음. 발굴한 고분 중 111기는 고구려 고분임.구조특징 각 1기의 광실기단적석총과 광실계단적석총이 남북으로 배열되어 연접함. 모두 2개의 광실을 갖추고 있음. 남묘는 심각하게 파괴되어 명확치 않으며, 북묘는 비교적 양호함. 구축방법과 연접방식은 보통의 연접묘와 동일한데 북묘 광실은 독특한 차이점이 있음. 광실은 북묘의 중앙에 구축되었고 평면은 鏟形임. 네 벽은 가지런하게 축조되었는데 사용된 석판은 손질을 거치었으며 백회로 틈을 메움. 광실 동서 양벽의 길이 1.8m, 남북 양벽의 길이 2.1m, 깊이 0.6m이며 방향은 240°임. 묘실 바닥은 납작한 모양의 석판으로 평평하게 깔고 백회를 틈을 메움. 묘도는 광실 서벽의 중간에 열려 있는데, 동서 길이 2.8m, 남북 너비 1m, 깊이는 광실과 같은 0.6m임. 광실 안에는 鐵棺釘과 鐵棺環이 출토됨.역사적 의미 횡혈식 구조의 매장부를 가진 계단적석총 두 기를 연접한 무덤으로 수혈식구조의 석광에서 석실로의 과도기 모습을 보여주는 무덤임.자연환경 우산하 고분은 집안시구 북측에 위치하는데 大禹山 남쪽기슭의 동서 길이 3.5㎞, 남북 너비 1㎞의 좁고 긴 남향의 경사지에 자리하고 있음. 우산하 고분군의 분포 범위는 우산 남쪽 비탈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상하 방향의 배열을 하고 있음. 북면 산허리에 기대어 적석총이 절대다수를 점하고 있으며, 남면 완만한 비탈 지대에 기대어 주로 봉토분이 들어서 있으며, 중간에는 적석총과 봉토분이 서로 뒤섞여 혼잡함.유물정보 철기 다수참고문헌 · 吉林省博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3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文物保管所, 「集安洞溝古墳群禹山墓區集錫公路墓葬發掘」『高句麗硏究文集』, 延邊大學出版社, 1993 · 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 『洞溝古墓群: 1997年調查測繪報告』, 科學出版社, 2002 · 孫仁杰·遲勇, 『集安高句麗墓葬』, 香港亞洲出版社, 2007

  • 우산하 2890호묘(禹山下 2890號墓)

  • 리스트여닫기 우산하 2891호묘(禹山下 2891號墓) 출토지 집안시 통구고분군 우산묘구 (集安市 洞溝古墳群 禹山墓區)연대 고구려 4세기 중엽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4~1985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집안시문물보관소(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市文物保管所)제1차 조사에서는 89기의 고분을 발굴조사, 적석총 28기, 봉토분 61기, 출토 유물은 700여건.제2차 조사에서는 24기의 고분 발굴, 적석총 10기, 토석혼축묘 1기, 석관묘 1기, 봉토분 12기. 출토 유물 200여건임.두 차례 조사에서 총 113기의 고분 발굴, 석관묘 1기, 적석총 38기, 봉토분 73기, 토석혼축묘 1기, 출토 유물은 931건임.발굴된 113기 고분은 대다수 이른 시기부터 파괴와 도굴을 당함. 형식이 확실치 않은 것도 있음. 발굴한 고분 중 111기는 고구려 고분임.구조특징 3기의 광실을 갖춘 기단광실 연접묘로 방향은 장축 방형 235°임. 장방형 기단을 만들고 그 내부를 강자갈로 평평하게 메우고 그 상면 중앙부에는 남북배열로 광실 3개를 축조하고 JYM2891-①, JYM2891-②, JYM2891-③으로 편호함. 3개 광실은 모두 파괴되어 확실하지 않음. 광실은 최북면에 위치하며 동서 길이 3.5m, 남북 너비 3.0m 범위로 강돌을 깔아 광실의 범위를 추정할 수 있음. 광실 서벽에서는 동서 길이 1.5m, 남북 너비 1.8m, 깊이 0.6m의 묘도가 열려 있음. 묘도 서단의 양측에는 각각 石箱이 축조되어 있음. 북측 석상은 파괴당하여 몇 개의 돌만 남아 있고 유물은 보이지 않음. 남측 석상은 대석을 손질한 석재로 축조하였는데 동서 너비 0.7m, 남북 길이 1.1m, 깊이 0.8m이며 상면에는 석판을 덮었으며, 석상 안에는 銅質鎏金馬飾이 출토됨. 광실 및 묘도는 모두 파괴되어 함몰갱을 볼 수 있으며, 묘도 서단의 양측에는 石箱이 축조되어 있는데 북측 석상은 남북 길이 1m, 동서 너비 0.6m, 깊이 0.8m이며 상면은 석판으로 덮여 있음. 석상 안에는 토기편이 출토됨. 남측 석상은 파괴되었음. 광실 및 석상, 묘도는 모두 파괴당해 확실치 않음.역사적 의미 하나의 분구안에 횡혈식 구조의 매장부가 세 개가 있으며, 묘도 좌우에 석상이나 이실이 있는 구조라는 점에서 전, 현실 두칸 구조 무덤의 초보적 형태로 판단됨.자연환경 우산하 고분은 집안시구 북측에 위치하는데 大禹山 남쪽기슭의 동서 길이 3.5㎞, 남북 너비 1㎞의 좁고 긴 남향의 경사지에 자리하고 있음. 우산하 고분군의 분포 범위는 우산 남쪽 비탈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상하 방향의 배열을 하고 있음. 북면 산허리에 기대어 적석총이 절대다수를 점하고 있으며, 남면 완만한 비탈 지대에 기대어 주로 봉토분이 들어서 있으며, 중간에는 적석총과 봉토분이 서로 뒤섞여 혼잡함. 고분은 우산하 고분군 삼실묘 동북 약 150m 지점의 북고남저의 비탈 위에 위치.유물정보 토기, 금동기 다수참고문헌 · 吉林省博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3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文物保管所, 「集安洞溝古墳群禹山墓區集錫公路墓葬發掘」『高句麗硏究文集』, 延邊大學出版社, 1993 · 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 『洞溝古墓群: 1997年調查測繪報告』, 科學出版社, 2002 · 孫仁杰·遲勇, 『集安高句麗墓葬』, 香港亞洲出版社, 2007

  • 리스트여닫기 우산하 3105호묘(禹山下 3105號墓) 출토지 집안시 통구고분군 우산묘구 (集安市 洞溝古墳群 禹山墓區)연대 고구려 5세기 전반대구조특징 3기의 계단 광실묘가 연접해 이루어졌음. 연접방식을 보면, 비탈진 곳에 위 고분의 계단은 아래 고분의 계단과 연접할 때 중간 계단은 허물어 상·하 두 고분의 중간에는 계단의 흔적이 남지 않도록 하여 하나의 장방형계단을 이룸. 축조 방법은 먼저 제1단의 장방형 계단을 쌓고, 계단은 돌로 점차 손질하여 북면 비탈 상부의 계단은 돌이 비교적 작은 것을 사용해 높이 0.8m의 2층을 축조하며, 남면 비탈 아래면의 계단은 점차 큰 돌을 사용해 높이 2m의 4층으로 쌓음. 계단 안은 깨진 돌로 메워 상면을 평평하게 만들고 이후 사면 둘레를 0.6-1.5m로 들여쌓는데 고르지 않음. 제2단 계단은 높이 0.5m 정도이며 내부에는 깨진 돌로 메움. 제2단 계단 상면은 다시 사면 둘레를 들여쌓아 제3단 계단을 쌓았으나 파괴되어 제3단 계단은 불명확하며, 남은 높이는 0.3m 정도이며, 그 안은 깨진 돌로 평평하게 메움. 제3단 계단 평면의 중앙부에는 시기를 나누어 4개의 광실이 구축되어 있음. 북에서 남으로 광실은 순차적으로 JYM3105-①, JYM3105-②, JYM3105-③, JYM3105-④로 편호됨. 방향은 모두 240°임. ①광실은 최북면에 있으며, 제1기에 축조되었으며, 파괴가 심각하여 형식은 이미 확실치 않고 어떤 유물도 보이지 않음. ②광실과 ③광실은 제2기에 축조되었는데 축조법은 우선 고분 중앙부에 장방형의 제4단 계단을 둘러쌓았음. 그 남북 길이 8.5m, 동서 너비 5.6m, 높이 0.7m이며 북으로는 제3단 계단과 6m 떨어져 있고 동·서 양면은 제3단 계단과 3.5m 떨어져 있음. 동시에 제4단 계단의 장방 테두리안에 남북배열로 ②광실과 ③광실을 쌓음. 광실과 계단 중간은 깨진 돌로 메움. ②광실은 북면에 위치하며 대략 정방형을 띠며, 둘레 길이 2.5m, 깊이 0.6m이며 바닥에는 0.1m 크기의 강자갈로 한겹 깔음. 광실 서벽의 중앙부에는 墓道가 열려 있는데 돌로 축조한 동서 길이는 2.0m이며, 남북으로 마주하는 두 석열은 너비 1.5m이며 높이는 광실과 동일하여 0. 7m이며, 바닥에는 광실의 바닥보다 0.25m 낮으며 상면에는 덮개돌이 없으며, 묘도 안에는 깨진 돌로 가득 채워 있음. 묘도 서단은 제4단 계단의 서측 벽으로 막혀 있음. 묘도 서단의 북측에 치우쳐 제4단 계단 서단 바깥측에 石箱이 축조되어 있음. 석상은 동서 길이 0.8m, 남북 너비 0.5m, 깊이 0.8m이며, 상면은 석판으로 덮음. 석상 안은 3壺 1釜 조합의 토기가 부장되어 있음. ②광실내 동단이 남쪽으로 치우쳐진 곳에서는 銅質鎏金冠飾 1건이 출토되었고, 서단에서 남쪽으로 치우쳐진 곳에서는 銅質鎏金釘飾 1쌍과 사람 趾骨 잔재가 있는데 冠飾과 釘鞋의 사이와는 1.70m 떨어져 있어 시신의 키를 추정할 수 있음. 비교적 분명한 것은 고구려 적석총은 ‘頭東脚西直肢’ 장식을 반영하였음. 광실 중앙부에서는 鐵鏃이 출토되었으며, 광실 서단은 묘도입구와 연접하는 지점에서 鐵鋦 10건을 출토되었으며, 광실 안은 기타 鎏金飾件이 출토됨. ③광실은 ②광실의 남쪽 1.3m에 자리하며, 평면은 장방형이며 남북 너비 1.9m, 동서 길이 2.5m, 깊이 0.6m임. 바닥에는 납작한 모양의 작은 강자갈이 깔려 있으며, 묘도는 광실 서벽의 북측에 열려 있음. 묘도의 동서 길이 1.5m, 남북 너비 1.3m, 높이는 광실과 같으며, 상부에는 덮개돌이 없으며, 내부는 깨진 돌로 메움. 묘도 서단의 偏南쪽에서는 제4단 계단 밖에 石箱이 축조되어 있음. 石箱은 방형에 가까우며, 둘레 길이 0.7m, 깊이 0.7m이며 네 벽은 돌로 축조되었고 상면은 석판이 덮여 있음. 부장 토기의 조합은 3壺 1釜 1甑으로 이루어짐. ③광실 안에는 기타 유물이 일찍 도굴당해 金針, 蓮花金葉, 銅質鎏金鞋釘, 鐵鋦, 鐵帳句 등만이 남아 있음. ④광실은 고분의 최남단 제3단 계단상에 위치하며, 북으로는 ③광실과 4m 떨어져 있음. 과거 도굴되어 파헤쳐지면서 광실의 네 벽은 이미 파괴되어 보이지 않음. 발굴 당시 광실 바닥에 작은 강자갈이 깔린 정황상, 동서 길이 3.5m, 남북 너비 2.0m의 범위로 볼 수 있는데 ④광실의 바닥일 수 있으며, 이 부위에 남겨진 유물은 鐵棺釘, 鐵鋦이 있음. 광실 서단에는 甬道, 耳室, 墓道시설 등이 있음. 용도는 남북으로 맞주하는 동서 길이 1m, 높이 1.2m의 석장이 있음. 용도의 남북간의 너비 1.4m, 용도바닥과 광실 바닥은 평평하게 함. 용도의 서단은 남북이 마주하는 2耳室과 접하며, 두 이실 사이는 1.4m 떨어져 있음. 남이실의 덮개돌은 이미 파괴당해 남아 있지 않음. 북이실은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며, 정상부는 들여쌓아 覆頭形을 띠며, 바닥부 동서 너비 1.85m, 길이 1.1m, 높이 1.2m임. 가공한 대형 석재로 축조함. 2이실의 서단은 동서 주향의 묘도와 접하고 있으며, 묘도는 높이 쌓아 이실과 서로 같으며, 길이 2.1m, 너비 1.4m임. 이실은 묘도의 바닥이 평평하게 하여 용도의 바닥보다 0.3m 낮음. 이실은 덮개돌을 설치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묘도, 용도, 광실에는 모두 덮개돌이 보이지 않음. 그 안은 모두 깨진 돌로 메워 덮었음. 북이실에서 1건의 四耳陶罐만이 남아 있음. 고분의 남변 계단 바깥측 아래 비탈되는 곳에는 동서 길이 15m, 남북 너비 4m의 ‘墓舌’이 펼쳐 있는데 높이 1.5m이며 3단으로 나누어 들여쌓아 계단형을 띠고 있음.역사적 의미 횡혈식 구조의 매장부가 연접된 무덤으로, 이는 수혈식구조에서 횡혈식 구조로의 과도기 양상, 특히 JYM3105-④광실에서 통로와 이실, 묘도로 이루어진 구조는 봉토석실분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석상은 전현실 두칸구조의 초보형이라고 할 수 있다. JYM3105-②광실내에서 출토된 금동제 관식과 못신은 사용흔적이 보이지 않은 장식성 명기이며, 頭東足西와 直肢葬임을 알 수 있다. 석상에 부장된 토기의 조합은 3罐 혹은 3壺1釜1甑로 정형성을 갖고 있다. 부장된 전연호는 4세기 말에서 5세기 전반의 특징을 갖고 있으며, 행엽도 4세기 말에서 5세기 전반의 고분에서 주로 출토된다. 금제 연화장식은 고구려 봉토벽화분에 그려진 側視蓮花造型과 일치한다. 따라서 고분의 연대는 5세기 전반대로 비정된다. 통구고분군 대형 적석총 가령 장군총, 태왕릉, 천추총, 서대총, 임강총에서는 암키와편과 와당이 발견되어서 묘상건축물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있지만, 2891호분은 중형분으로, 많은 양은 아니나 중형분에서 기와가 출토되었다는 앞으로 연구가 필요하다.자연환경 우산하 고분은 집안시구 북측에 위치하는데 大禹山 남쪽기슭의 동서 길이 3.5㎞, 남북 너비 1㎞의 좁고 긴 남향의 경사지에 자리하고 있음. 우산하 고분군의 분포 범위는 우산 남쪽 비탈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상하 방향의 배열을 하고 있음. 북면 산허리에 기대어 적석총이 절대다수를 점하고 있으며, 남면 완만한 비탈 지대에 기대어 주로 봉토분이 들어서 있으며, 중간에는 적석총과 봉토분이 서로 뒤섞여 혼잡함. 고분은 電線廠 북쪽의 동단에 위치하며 남으로는 철로에 접하고 있고 동으로는 삼실묘와 150m 떨어진 지점의 북고남저의 비탈에 위치.유물정보 철기, 금동기, 토기류 다수.참고문헌 · 吉林省博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3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文物保管所, 「集安洞溝古墳群禹山墓區集錫公路墓葬發掘」『高句麗硏究文集』, 延邊大學出版社, 1993 · 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 『洞溝古墓群: 1997年調查測繪報告』, 科學出版社, 2002 · 孫仁杰·遲勇, 『集安高句麗墓葬』, 香港亞洲出版社, 2007

  • 리스트여닫기 우산하 3146호묘(禹山下 3146號墓) 출토지 집안시 통구고분군 우산묘구 (集安市 洞溝古墳群 禹山墓區)연대 고구려 4세기대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4~1985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집안시문물보관소(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市文物保管所)제1차 조사에서는 89기의 고분을 발굴조사, 적석총 28기, 봉토분 61기, 출토 유물은 700여건.제2차 조사에서는 24기의 고분 발굴, 적석총 10기, 토석혼축묘 1기, 석관묘 1기, 봉토분 12기. 출토 유물 200여건임.두 차례 조사에서 총 113기의 고분 발굴, 석관묘 1기, 적석총 38기, 봉토분 73기, 토석혼축묘 1기, 출토 유물은 931건임.발굴된 113기 고분은 대다수 이른 시기부터 파괴와 도굴을 당함. 형식이 확실치 않은 것도 있음. 발굴한 고분 중 111기는 고구려 고분임.구조특징 축조법을 보면 우선 동·서·북 3면은 제1단 계단을 쌓고, 고분의 남변은 비탈길 아래로 지세가 낮으므로 남변에 2단의 계단을 쌓아 남부의 높이가 늘림. 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