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넷

상세검색 공유하기 모바일 메뉴 검색 공유
닫기
리스트

고구려문화유산자료

사료라이브러리 열기
  • 서산남파 고분군(西山南坡 古墳群)

  • 리스트여닫기 만발발자 고분군(萬發拔子 古墳群) 출토지 통화시 금창진 약진촌 (通化市 金廠鎮 躍進村)연대 만발발자 유적지는 고구려 문화와 청동기문화를 연결시킬 수 있는 고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임. 신석기시대 中晩期, 商周, 春秋戰國, 兩漢, 魏晉, 明에 해당되는 6개 층위관계가 확인되었음. 무덤은 土坑墓, 土坑石槨墓, 土坑石槨石棺墓, 大蓋石墓, 大蓋石積石墓, 積石墓, 階壇積石墓 등 7개 형식이 확인되며, 춘추전국·양한·위·진 시기의 3시기에 해당됨. 출토유물과 고분 형식에 의해 연대를 추정해보면 토갱묘, 토갱석곽묘 토갱석곽석관묘, 대개석묘 등은 춘추전국 시기로 기원전 3세기에 해당, 대개석적석묘와 적석묘는 양한 시기로 기원전 2~1세기에 해당, 계단적석묘는 위진 시기로 기원 4~5세기에 해당됨.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97년 5월~1999년 10월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통화시문물관리위원회판공실, 집안시박물관(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通化市文管會辦公室, 集安市博物館)王靑, 張健宇, 王志敏, 于麗萍, 孫仁杰, 遲勇, 周榮順, 董峰, 李輝 등이 참여하여 6,015㎡의 발굴면적에서 56기의 서로 다른 시기 고분 확인함구조특징 土坑墓, 土坑石槨墓, 土坑石槨石棺墓, 大蓋石墓, 大蓋石積石墓, 積石墓, 階壇積石墓 등이 분포, 이 고분들은 石板墓에서 積石墓 순으로 발전해감. 토갱묘와 토갱석곽묘 두 고분 모두 고구려 이전의 유적으로, 연대는 대체로 춘추전국시기임. 單人仰身曲肢葬墓과 多人合葬墓로 크게 구별됨. 연대는 토갱묘가 토갱석관묘보다 상대적으로 빠름. 토갱석곽석관묘의 연대는 戰國 中晩期에 해당되며 당시 多人·多次 화장이 성행했음. 대개석묘의 연대는 전국 말기~한대 초기에 해당. 대다수 지세가 험준한 산등성마루 위에 분포함. 묘내에서 화장하여 인골은 모두 불탔으나 탄 정도는 높지 않음. 대개석적석묘는 대개석묘와 고구려 초기 적석총 사이의 과도기 묘제로 장제 방식은 대개석묘와 서로 같으나, 割石으로 蓋石을 덮음. 계단적석총은 고구려의 전형적 고분으로 연대는 위·진 시기에 해당됨. 고구려 초기 적석총과 장례형식에서 전승관계가 명확함.역사적 의미 왕면후는 예와 맥을 분리해보는 입장에서 통화 만발발자 유적지의 3기와 4기의 고분을 고구려에 선행한 맥족의 문화로 설명함. 즉 제3기부터 출현하기 시작한 대석개묘·대석개적석묘·조기방단적석묘는 ‘혼강 및 압록강’과 ‘태자하 및 혼하’ 유역에서 상응하는 시기의 석묘·출토품과 동일한 성질에 속하므로, 고구려가 혼강에 건국되는 서한 중기 이전에, ‘혼강 및 압록강’과 ‘태자하’ 상류를 중심으로한 古 “貊”(高夷) 유적지임. 이는 “高句麗先世文化” 또는 “前高句麗時期의 문화”로 명명. 만발발자 “4기” 및 그 이하의 석개묘와 적석묘 등 주요 葬式·葬俗·遺物을 “고구려조기 유적지”로 부르나, 이는 고구려건국 이전의 “맥”족 유적으로, 그 북쪽의 夫餘文化先世 “濊”족의 특징은 극히 드묾. 즉 만발발자 “3기”의 토갱묘와 토갱석곽(관)묘는 대표적 앙신굴지이고, 화장습속은 드물고, 소량의 삼족기가 비교적 조기 고분형식에서 출토되었음. 이는 춘추전국 이전에 송화강 유역의 古 “濊人”, 즉 “서단산문화”의 영향을 반영한 것으로 길림시를 중심으로 “서단산문화구”, 예컨대 일찍 발견된 猴石山, 長蛇山, 狼頭山, 兩半山 등 청동문화의 무덤은 모두 토갱석관묘를 주요 葬式으로 갖추고 있음. 출토된 도기는 다수가 중원 한문화의 영향을 받은 三足鼎·隔 등으로 만말발자 3기의 문화는 서단산문화이 영향으로 예족과 맥족의 문화가 남북으로 교류한 결과임. 오강원은 만발발자 유적을 통화 지역문화가 기원전 3세기를 기점으로 느슨한 청동기 사회에서 완전한 청동기 사회로 변모하고, 기원전 2~1세기에서 토갱묘·석관묘에서 적석묘로 급격히 변모한다는 점에 주목함. 통화지역에 원고구려문화, 즉 적석묘문화가 출현하는 시점은 요동 동부의 다른 지역보다 1세기 가량 늦은 기원전 2~1세기로, 요동반도의 적석묘 문화가 환인집단을 경유하여 통화지역으로 전해졌고, 통화지역에서는 적석묘 문화의 형성과 함께 방어적 성격이 강한 환호와 구상 유구를 갖춘 대형 취락이 등장한다고 보았음. 기원전 3세기의 사회의 완만한 변화 양상을 볼 때, 통화지역의 토착집단이 주변과의 교섭을 통해 내적으로 변화한 반면 기원전 2~1세기의 급격한 사회변모는 혼강 중류 유역 환인 방면으로부터 들어온 적석묘집단에 의해 지역집단이 통합된 것으로 추정함.자연환경 유적지는 통화시 금창진 약진촌과 환통향 강남촌의 경계지점에 있는 작은 구릉 정상부의 평탄면에 위치함. 유적지 서부는 둥근 언덕, 동쪽에는 완만한 산등성마루와 연이어진 구릉과 접하고 있음. 유적지는 통화-집안 도로가 동북지구와 서남 지구를 관통하면서 동서로 양분되어지는데 서부는 원구, 산등성마루에는 생활거주지가 다수 보임. 동부는 고분의 주요 분포지역으로, 대다수 고분은 동부 제1층 아래 생토층을 파괴. 유적지 남측에는 현대 촌락이 자리하고 있으며 약 250m 떨어진 곳에서 金廠河가 유적지 동남부를 지나 혼강으로 유입됨. 북쪽 약 3㎞ 거리에 통화시 위치하고 북동쪽 5㎞ 거리의 혼강 동안에 청동기시대 생활유적인 九仙峰 유적이 위치함. 북서쪽 5㎞ 거리의 혼강 서안에 청동기시대에 해당하는 西山 고분군 위치함. 남쪽 13㎞ 거리에 고구려 시대의 江沿村 고분군 위치하고 남쪽 20㎞ 거리에 고구려 시대의 南頭屯 고분군 위치함. 서남 방향의 환인 고구려 유적지와는 약 100㎞ 떨어져 있음.참고문헌 · 國家文物局 主編, 「吉林通化萬發撥子遺址」『1999中國重要考古發現』, 文物出版社, 2001 · 王綿厚, 「通化萬發拔子遺址的考古與民族學觀察」『東北史硏究動態』 2001-3, 2001 · 金旭樂·趙殿坤·董峰, 「吉林通化市萬發撥子遺址二十一號墓的發掘」『考古』 2003-8, 2003 · 오강원, 「萬發撥子를 통하여 본 通化地域 先原史文化의 展開와 初期 高句麗文化의 形成過程」『북방사논총』 1, 동북아역사재단, 2004 · 朱泓·賈瑩·金旭東·趙展坤, 「通化萬發拔子遺址春秋戰國時期叢葬墓顱骨的觀察與測量」『邊疆考古硏究』 2, 2004

  • 리스트여닫기 강남활설장 고분군(江南滑雪場 古墳群) 출토지 통화시 환통향 강남촌 석판구문 (通化市 環通鄉 江南村 石板溝門)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57년과 1958년 스키장 사무실 수축시 유골, 동제 허리띠장식(銅帶飾)·세발달린 철제 솥(三族鐵鍋)·호(陶壺)·뼈(骨)·이빨장식(牙飾) 등이 발견됨. 출토 유물은 길림성박물관에 소장됨.1985년통화시문물보사대(通化市文物普査隊)유물이 발견된 곳에서 흔적을 전혀 확인 못함.1985년 7월통화시문물보사대(通化市文物普査隊)길림성박물관에 소장된 문물을 재조사구조특징 고분군과 고분을 소개한 내용은 없음.역사적 의미 강남 활설장 고분군은 帶銙로 미루어 발해시기의 고분으로 추정됨. 唐代 문화가 발해 귀족에 많은 영향을 주었음. 그 대표적인 것인 帶銙로, 이미 발굴된 많은 발해시기 유적과 고분 안에는 모두 이 유물이 출토됨. 강남 활설장 帶銙도 같은 형식임. 이는 고구려 故地, 발해 주민이 여전히 민족의 전통과 습속을 지키고 발전시켰다는 것을 보여줌. 한편 출토유물 가운데는 遼金 시기의 것도 포함되어 있음.자연환경 현재 市委黨敎 校址 사용, 市區 중심과 2.5㎞ 떨어져 있음. 시위당교 터는 원래 통화시 강남 스키장(滑雪場) 건물인데 남산이 스키장, 동쪽과 북쪽으로는 비교적 험한 산봉우리가 있음. 통화-집안의 구도로가 고분군을 통과하며 서북은 혼강과 1㎞ 떨어져 있고, 서부는 넓은 채소밭임.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通化市文物志』, 1986

  • 리스트여닫기 자안산성(自安山城) 출토지 통화시 강동현(강동향) 자안촌(속칭 치안촌) 협심둔의 북산. 通化市 중심지에서 4㎞ 거리임(通化市 江東縣(江東鄉) 自安村(治安村) 夾心屯 北山. 通化市 中心地 4㎞ 踞離)연대 고구려 - 遼·金代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4년 11월 27일통화시인민정부(通化市人民政府)通化市 重點文物保護單位로 공포.1983년 봄 및 6월통화시문화국문화지 편집부, 통화시문화관, 통화시문물관리위원회 판공실(通化市文化局文化志編輯部, 通化市文化館, 通化市文物管理委員會辦公室)제1차(봄) 및 제2차(6월) 조사와 실측 및 촬영함.1985년통화시문물조사대(通化市文物調査隊)조사와 실측, 촬영을 재차 시행하였으며 吉林省文物志編委會, 1986 『通化市文物志』에 발표함.1988년과 1989년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의 유남·소춘화, 통화시 문물관리판공실의 양립신(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柳嵐·邵春華), 通化市文物管理辦公室(楊立新))두 차례에 걸쳐 산성을 상세히 조사하고 실측하고, 柳嵐·邵春華, 1991 「吉林通化市漢代自安山城調査與考證」『博物館硏究』1991-3에 발표함.구조특징 성벽은 험준한 자연 지세를 잘 이용하여 구축하였음. 산세가 가파르고 험준한 동쪽과 남쪽 양면은 낭떠러지와 절벽을 천연성벽으로 삼았으며 산세가 비교적 완만한 서·북 양면은 다듬은 돌로 인공성벽을 축조함. 불규칙한 長方形, 남북이 길고 동서가 좁음. 성곽 내부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으며, 북쪽이 남쪽보다 높음. 가장 높은 지점은 해발 507m. 인공으로 축조한 서벽과 남벽은 대부분 파괴되어 현재 성벽 기초만 볼 수 있고, 서벽의 북단과 북벽의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함. 현재 성벽 위쪽은 10-20㎝ 두께의 흙으로 덮여 있고, 성벽이 만곡하는 곳에는 바깥쪽에 보조용 성벽을 여러 겹 축조하였음. 성 안쪽에는 잡초와 관목이 무성하여 성 내부의 상황을 한눈에 파악하기는 어려운 상태이며, 서북쪽은 계단식 밭으로 개간되어 경작되고 있음. 현대의 民墓가 군을 이룬 곳도 있는데, 큰 나무 몇 그루로 둘러싸여 있음.역사적 의미 자안산성의 서남쪽 30㎞에는 赤柏松古城이 있는데, 玄菟郡 上殷臺縣의 治所로 추정되고 있음. 그밖에 통화지역에서 고구려 두 번째 도성이었던 국내성으로 향하는 老嶺山脈 북사면에는 통화 이도구문관애와 석호관애를 비롯하여 집안 대천초소, 관마장산성 등이 있음. 지정학적으로 蛤蜜河와 渾江이 합류하는 곳이며 자안산성이 위치한 通化市 일대는 渾江 상류의 중심지이고, 輝發河에서 龍崗山脈을 넘어 통구분지로 나아가거나, 富爾江 상류에서 喇咕河를 거쳐 통구분지로 들어갈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전략적 요충지임. 산성의 기능과 성격에 대한 견해는 다양함 먼저 漢代-高句麗-遼金淸代 성곽설이 있음. 漢의 군현 설치와 함께 축조되어 고구려 시기뿐 아니라 遼·金·淸代까지 계속 사용되었다는 견해임[吉林省文物志編委會, 李殿福]. 성내에서 漢代 토기의 특징을 지닌 것이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漢郡縣의 설치와 함께 축조되었을 것으로 상정되고, 산성의 축조방식이나 출토된 토기편이 집안 산성자산성·패왕조산성 등과 동일하다는 점에서 고구려 시기에 대규모로 개축되어 고구려 북도상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 기능하였다는 것임. 그리고 고구려 시기 이후에도 계속 사용되었다고 추정되는데, 특히 明末 누르하치가 建州女眞을 통일할 무렵, 이곳은 오랫동안 女眞 完顔部의 거주 및 저항의 거점이었을 것으로 추정됨. 이에 비해 漢代에만 사용되었다는 견해도 있음[柳嵐·邵春華]. 산성에서 출토된 유물은 모두 漢代의 것이고, 특히 토기 문양은 漢代 토기의 특징을 많이 지녔다고 함. 항아리와 시루의 형태, 소성온도, 태토 등은 內蒙古 哲里木猛 奈曼旗 沙巴營子의 漢城이나 吉林省 永吉縣 大海猛 2期 漢代 유적에서 출토된 것과 동일하다고 함. 그리고 遼·金代의 布紋 기와편이 출토된 적이 있지만, 그밖에는 遼·金代의 유물이 출토된 것이 없음. 특히 돌로 성벽을 축조하였다는 점은 분명히 고구려 城의 특징이지만, 성 내부에서 漢代 유물만 출토되고 고구려 시기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고구려인이 축조하였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임. 더욱이 자안산성 서남쪽 30㎞에는 玄菟郡 上殷臺縣 治所로 추정되는 赤柏松古城이 있는데, 자안산성과 적백송고성은 밀접히 관련된다고 여겨짐. 즉 자안산성은 漢의 玄菟郡과 함께 축조되었다가 玄菟郡이 요동지역으로 쫒겨가면서 폐기되었다는 것임. 마지막으로 渾江 상류의 군사 방어성이면서 지방지배의 거점이라는 견해가 있음. 漢郡縣 治所가 일반적으로 소규모 토성인데 비해 자안산성은 둘레가 2.7㎞에 이르는 대형 石城이며 遼·金代 기와편도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고구려 시기 이래 계속 사용되었다고 판단됨. 더욱이 자안산성이 위치한 通化市 일원은 渾江 상류의 중심지이고, 輝發河에서 龍崗山脈을 넘어 통구분지로 나아가거나 아니면 富爾江 상류에서 喇咕河를 거쳐 통구분지로 들어갈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전략적 요충지임. 이로 보아 자안산성은 고구려 시기에 석성으로 구축되어 渾江 상류일대의 중심성으로 기능하였을 가능성이 높음. 이 일대에 고구려 초기 적석묘가 상당수 분포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를 반영함. 다만 자안산성은 지리적 위치나 규모로 보아 단순한 군사시설이라기 보다는 지방지배의 거점으로도 기능하였다고 추정됨. 자안산성은 소자하 상류에서 喇咕河를 거쳐 渾江으로 향하던 교통로와 輝發河 유역에서 용강산맥을 넘어 渾江으로 향하던 교통로 등을 공제하던 군사방어시설로서 渾江 右岸의 弧形·軸線방어체계에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고 추정됨[余昊奎].자연환경 산성 서남쪽 아래로 哈蜜河(속칭 哈泥河 혹은 哈民河)가 흐르며, 동쪽의 절벽 아래로는 渾江이 유유히 흐르고 있으며, 남쪽은 哈蜜河와 渾江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산성은 전체적으로 三角洲의 형세를 이룸. 산성의 서쪽과 북쪽으로 산봉우리가 기복을 이루며 연이어지고 있음. 가장 높은 곳은 해발 526m로서 이곳에 서면 통화분지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옴. 산성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내려다보는 형세로 지키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려운 천혜의 험준한 지형임.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通化市文物志』, 1986 · 孫進己·馮永謙, 『東北歷史地理』 (二), 黑龍江人民出版社, 1988

  • 리스트여닫기 만발발자유적(萬發拔子遺蹟) 출토지 통화시 금창진 약진촌 (通化市 金廠鎮 躍進村)연대 신석기 말기-청동기 시대, 고구려 초기와 중기역사적 의미 우선 신석기-청동기시대 유적으로 보는 견해가 있음. 이 유적의 출토 유물은 渾江 중류 양안의 集安 荒崴子·長崗·東村·梨水·南臺子·二道崴子, 通化 下龍頭·江沿村南山·江口村 등의 유적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성격이 같음. 석기는 석제 괭이(打製 石鎬), 석제 호미(石鋤) 등이 있고, 마제석촉(磨製石鏃), 석제 창(石矛), 침상기(枕狀器) 등이 있음. 토기는 배(杯), 고배(豆), 호(罐), 발(鉢), 방추차(紡輪), 어망추(罔墜) 등이 있음. 三足器의 器足도 발견되었음. 이로 보아 유적지의 상한이 신석기시대, 하한은 청동기시대로 추정됨. 또한 출토 유물로 보아 채집 수렵 단계에서 농업, 어렵을 위주로 하는 定住단계로 진입했다고 추정되기 때문임.[通化市文物志]. 초기 貊族의 씨족취락설도 있음. 이 유적지의 3, 4기 문화층은 춘추-전국에서 서한 시기에 해당하는데, 二江(압록강, 혼강)과 二河(태자하, 혼하) 상류를 중심으로 동북 맥 계통의 貊족이 집중 분포한 시기임. 만발발자 유적은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주요 부분인데, 주거지, 고분, 출토유물 등에서 二江유역 토착 문화의 성격을 모두 갖추고 있음. 그 중 3기 문화층은 전체 유적지에 넓으며 출토유물도 가장 풍부함. 이 시기의 문화층은 石棺(盖)墓와 靑銅短劍을 주요 특징으로 하는 고구려 선대 동북 貊族의 청동문화에 속하는 것으로 파악됨. 따라서 만발발자 3-4기 문화층은 고구려 건국 직전에 二江 유역에 분포한 초기 貊族의 씨족취락으로 추정됨. 계곡의 높은 대지 위에 건축한 “環山圍溝(壕)”와 “石垣聚落”으로서 고구려 건국 이후에 출현하는 “성읍취락(주로 산성)”의 전신 내지는 기원으로 추정됨[王綿厚]. 비류국(연노부, 소수맥) 소재지로 보기도 함. 송양의 비류국은 졸본천 상류에 있다고 함. 지금까지 통화지역에서는 만발발자 유적을 포함하여 灣灣川 유적, 黎明 유적, 자안산성, 夾心屯 유적, 平崗山 유적, 樺樹河口 유적, 砬砬屯 유적, 耐火廠北山 유적, 西熱村 유적, 東熱村 유적, 向陽 유적, 鴨園隧洞山頂 유적 등이 발견됨. 이들 유적은 졸본천의 상류에 위치한 비류국의 문화유적으로 추정됨. 졸본천과 비류국은 모두 고구려 건국기의 涓奴部에 속함. 고구려 초기 정권은 졸본천의 涓奴部에 위치했고 그 중 비류국의 지역을 포함함. 대체로 지금의 통화지역이 연노부로 추정되며, 만발발자 유적지는 대표적인 고대 취락지로 고구려를 흥기시킨 “연노부”와 관련된 것으로 파악됨[東北史地 2006-2]. 또한 만발발자 유적은 압록강 중상류의 청동시시대, 고구려시기의 고고환경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함. 특히 청동기시대-초기 철기시대의 유물 분포 면적은 크고 풍부한 반면, 고구려 초기의 유물 분포 면적은 비교적 크지만 그 문화 퇴적층은 비교적 얇음. 이는 생업유형의 변화를 반영하는데, 西漢 이후 이 지역은 상대적으로 차고 건조한 기후로 변화되어 농경의 어려움이 확대되고 인구압이 증가해 생태환경압력이 크게 증가했을 것으로 추정됨. 또한 고구려 초기 단계[西漢 시기]에는 環壕를 구축했는데, 이는 유적지가 이미 엄밀하게 조직된 대형 촌락에 속하게 되었으며, 획득한 식물자원과 생활공간에 대한 보호와 관리가 강화되었음을 반영함[邊疆考古硏究 2]. 한편 만발발자 유적은 통화지역의 선사-고대문화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표준유적의 성격을 띄고 있음. 만발발자에서 주목되는 발형토기류나 적석류의 무덤은 혼강유역 고구려 토착문화이자 기저문화로서의 측면을 반영하며, 고구려 건국 후 기원후 5세기대에 이르기까지도 이러한 측면이 고구려 지역에 강하게 지속되었음을 반영함. 이 유적을 통해 통화의 지역문화가 기원전 3세기를 기점으로 느슨한 청동기사회에서 완전한 청동기사회로, 그리고 기원전 2-1세기를 기점으로 괴석조 석관묘, 대석개묘, 종횡세장형 토광묘, 직장, 앙신굴지장의 문화에서 적석묘, 세골장, 화장의 문화로 변모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음. 또한 적석묘 문화의 형성과 함께 취락이 대형화하고 방어적 성격이 강한 환호와 구상유구가 등장하였음도 알 수 있음. 이렇게 볼 때 통화지역은 기원전 3세기에는 토착집단이 주변과의 교섭을 통해 내적인 변화를 일으킨 것으로 판단되고, 기원전 2-1세기에는 혼강 중류역, 즉 환인 방면으로부터 밀려들어온 적석묘집단에 의해 지역집단이 통합된 것으로 생각되며, 이 때부터는 환인지역보다 위상이 내려가게 되었던 것으로 여겨짐. 아무튼 통화지역에 ‘원고구려문화=적석묘문화’가 출현하는 시점은 요동 동부의 다른 지역보다 한 세기 가량 늦은 기원전 2-1세기이고, 그러한 변모는 갈등적인 측면이 강하였다고 할 수 있음[오강원].자연환경 남안의 언덕산에 위치함. 通化市 중심가에서 남쪽으로 3㎞ 거리이며, 통화-집안 도로가 유적지 아래로 지나감. 萬發拔子의 原名은 萬寶鈸子로 ‘王八脖子’는 속명임. 유적은 동북에서 서남으로 뻗어내린 산줄기의 끝단에 위치해 있는데, 산능선과 언덕산으로 이루어진 지형이 마치 자라의 형상을 닮았다 하여 ‘王八脖子’라 칭했음. 종래 通化-集安 도로(303국도)가 자라의 목에 해당하는 동북쪽 산능선과 서남쪽 언덕산 사이의 ‘凹’자 부분을 지나갔는데, 최근 도로를 확장하면서 언덕산 서편 아래로 도로의 경로가 바뀌게 되었음. 유적지 남쪽에서 金廠河(원명 大廟溝河)가 서북쪽으로 흘러 구릉 서면의 평원을 지나 서북 500m 지점에서 혼강으로 유입됨. 유적지의 북, 서, 남 3면에는 1-2단으로 이루어진 충적평지가 넓게 펼쳐져 있는데, 특히 서북 방면으로는 渾江 남안의 충적평지로 이어짐.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通化縣文物志』, 1987 ·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 編, 『吉林省志』 43(文物志), 吉林人民出版社, 1991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通化市文物管理協公室, 「通化市王八脖子遺址及附近幾處地點的調査與發掘」『博物館研究』 1997-2, 1997 · 金旭東·安文榮·楊立新, 「探索高句麗早期遺存及通起源」『中國文物報』 2000年 3月 19日版, 2000 · 國家文物局 主編, 「吉林通化萬發撥子遺址」『1999中國重要考古發現』, 文物出版社, 2001 · 王綿厚, 「關於通化萬發撥子遺址的考古與民族學考察」『北方文物』 2001-3, 2001 · 金旭東, 『東北地區三至十世紀古文化學術討論會』, · 金旭樂·趙殿坤·董峰, 「吉林通化市萬發撥子遺址二十一號墓的發掘」『考古』 2003-8, 2003 · 오강원, 「萬發撥子를 통하여 본 通化地域 先原史文化의 展開와 初期 高句麗文化의 形成過程」『북방사논총』 1, 동북아역사재단, 2004 · 湯卓煒·金旭東·楊立新, 「吉林通化萬發撥子遺址地學環境考古研究」『邊疆考古硏究』 1, 2003 · 王志敏, 「通化江沿遺跡群調査」『東北史地』 2006-6, 2006 · 王貴玉·王珺·王志敏, 「通化江沿遺跡群所在地當卽卒本夫餘初居地」『東北史地』 2006-6, 2006

  • 만발발자 21호분(萬發拔子 21號墳)

  • 만발발자 29호분(萬發拔子 29號墳)

  • 만발발자 34호분(萬發拔子 34號墳)

  • 만발발자 36호분(萬發拔子 36號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