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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송 신안유적지(撫松 新安遺址)

 
  • 구분유적
  • 시대발해
  • 문서번호50-D3-04
  • 위치(출토지)무송진(撫松鎮) 신안촌(新安村)
  • 지역무송(撫松縣)
  • 유형유적지 〉생활유적, 고성
  • 형태사항 대량  
 

출토지

 

백산시 무송현 무송진 신안촌
 

연대

 

발해
 

조사내용

 

 
:1
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
1983년 11월왕지민(王志敏), 서평(徐平, 撫松縣文化館)· 撫松縣 新安鄕 新安村 촌민 周成貴가 자신의 집 채소밭에서 야채움을 팔 때, 연화문 와당·포문 기와·銅雙環器·銅弓形器·어망추(網墜)·토기편 등이 발견됨. 지역 文管會가 이 소식을 들었고, 王志敏과 撫松縣文化館 徐平이 조사를 진행함. 산언덕에서 아래 산비탈까지 회색 토기편과 기와편 등의 유물이 흩어져 있었음. 출토 유물을 근거로 유적지의 연대를 발해시기로 추정함. 이 조사에서는 도면과 사진자료를 남기지 않았고, 유물 출토 지점에 대한 설명이 없음.
1985년 봄 · 주민이 상술한 출토지점에서 북측으로 70m 떨어진 비탈에 집을 짓기 위해서 기초를 파다가, 철제 화살촉(鐵鏃) 두 묶음을 발견함. 각 묶음에는 20여개가 있었음. 농민들의 말에 의하면, 화살촉은 梭形起脊과 短鋌方柱形 두 종류가 있었다고 함. 周成貴의 부친 말에 의하면,그 집 채소밭에서 2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는 이웃집 촌민이 야채움을 파다가 1.4~1.6m 깊이의 지충에서 돌로 쌓은 주거지벽 기초(房屋墻基)를 발견하였는데, 기초(基)의 너비는 30~40cm였다고 함. 이 돌은 현지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라, 2.5㎞ 밖의 牛崗才에 있는 것임. 근대 사람들은 이 돌을 캐서 집을 짓지 않았고 석벽(石牆)이 비교적 깊게 매장되어 있는 점을 근거로 근대의 것이 아니고, 발해시기의 주거지라고 봄.
1986년 5월무송현문물보사대(撫松縣文物普査隊)· 유적지 서남모서리 근처의 지표에 유물이 많은 약간 높은 대지(高埠)를 시굴하였는데, 연화문 와당·치미 등 전형적인 발해시기의 건축부재가 출토됨. 유적지 동·남·서 바깥 주위에 성벽과 성문 흔적이 발견되면서 발해시기의 성지로 파악하였고, ‘新安古城遺址’로 명명함. 또한 사료 기록을 토대로 하여 渤海 豐州 治所로 추정하였음. 조사를 통해 신안유적지의 범위를 확정하였고, 성벽 벽체 기본구조를 묘사하였으며, 출토 유물의 종류와 수량을 공포하였음. 비교적 과학적인 고고발굴을 진행함으로써, 많은 유물을 발견하였고 내용도 풍부하여, 학술계에 꽤 깊은 영향을 주었고, 그 성과는 지금까지도 광범위하게 인용되고 있음. 다만 정식적인 고고학적 보고서가 발표되지 않았는데, 文物志에 간단한 기록과 출토 유물 일부에 대한 사진과 도면이 있을 뿐임. 그리하여 발굴과정, 유적의 형태, 유물이 출토된 구체적인 지점, 遺存이 분포된 정황과 상호 사이의 관계 등의 문제 등에 대해 알 수가 없음.
1986년 6월 · 6월 27일 유적지를 조사할 때, 동북모서리 외측에서 제련유적지(煉鐵) 1곳을 발견함.
1986년 7월 · 1986년 7월 新安村의 한 농민이 유적지 안에서 나무 뿌리를 캐다가 동제 허리띠고리(銅帶扣), 철제 칼(鐵刀), 철제 화살촉(鐵鏃) 등을 발견함.
1994년 가을· 조사기관 :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
· 조사자 : 하명(何明), 왕청(王青), 장건우(張建宇), 포현빈(包顯斌) (이상 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 왕문흥(王文興, 撫松縣文管所)
· 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가 유적지에 대해 재차 조사와 시굴을 진행함. 이 조사에서는 유적지의 지리 상황과 보존 상태를 상세하게 기록하였음. 유적지 범위 안을 동·중·서 세 구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마다 시굴에 적절한 지점을 선정하여, 트렌치를 파는 방식을 진행함. 각 구역 가운데 서쪽 구역에 위치한 피트에서 비교적 풍부한 유구와 유물이 발견되었음. 발굴 규모가 비교적 작아 유적지 일부분만 노출되면서, 유적지의 전모를 알기는 어려웠음. 그리하여 주거지(房址)의 평면구조, 실내시설, 방향, 문길 등의 정황을 파악하지 못함. 다만 서쪽구역이 중요한 건축지들의 소재지임을 파악하였음. 조사보고서에는 시굴 성과를 간단하게 소개하고,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어 오가는데 매우 편리하다고 기술하였는데, ‘榆樹川 나루터에서 선착장에 도착한 다음, 동문을 통해 성내를 진입하고 다시 抽水로 갈 수 있다. 혹은 강 맞은편의 二道花園에서 강을 건너 남벽의 동쪽 성문을 통해 성내로 진입한 후 抽水로 갈 수 있다’고 언급하였음. 그 이외에 성곽 북면·서쪽구역과 마주하는 산봉우리 정상에서 봉화대와 유사한 유적을 발견하였는데, 북부 산 위의 요망시설로 보았음. 신안고성을 발해시기 朝貢道의 중요 城市로 보면서, 대체적으로 기존의 결론을 긍정함. 다만 보고서에서는 시굴지점의 구체적인 위치와 유물이 출토된 명확한 지점을 언급하지 않았고, 출토 유물의 도면 혹은 사진을 제시되지 않았음. 또한 유적지 성격에 대한 진전된 견해가 보이지 않음.
2009년· 조사기관 :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
· 조사자 : 송옥빈(宋玉彬, 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 발굴 책임, 보고서 편저 지도),양회려(梁會麗, 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 집행 책임, 도면과 사진 담당), 어단(於丹, 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 장철(張哲, 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 곡환(穀芄, 白山市文物管理委員會辦公室), 왕문흥(王文興, 撫松縣文物管理所), 류휘(劉輝, 吉林大學考古系研究), 이음철(李窨哲, 吉林大學考古系研究), 어려군(於麗群, 토기 복원 및 탁본 담당), 장옥춘(張玉春, 금속기 보호와 복원), 왕배신(王培新, 吉林大學邊疆考古研究中心, 보고서 편저 지도)
· 2009년 5월 營(營城子)-松(松江河)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吉林省文物考古研究가 고속도로 공사 범위와 부근 구역에 대해 구제발굴을 진행하였는데, 6개월 동안 2,100평방미터를 발굴함. 발굴구역은 유적지 서남모서리에 위치하는데, 1986년 시굴지점과 중복됨. 지리좌표는 동경 127° 11′04″, 북위 42° 19′ 54″이고, 해발은 420m임. 遺存이 가장 풍부한 서남쪽 대지를 전면적으로 발굴해, 건축지의 規格·형태 등의 정황을 파악함. 아울러 남쪽 성벽에 대한 절개조사를 진행함. 확인된 성지 범위 안에서 이전에 언급된 “전체 유적지 범위 내에 기와편의 유물이 분포되었다”라는 정황은 발견하지 못함. 성지 서남모서리 즉 발굴구역에 해당하는 대지 위에서 풍부한 유물을 발견함. 발굴을 통하여 유적지의 성격을 파악하고, 새로운 발해시기의 유적·유물 자료를 대거 수집함으로써, 유적지와 관련한 발해에 대한 인식이 풍부해짐. 그리고 유적지에 남아 있는 명확한 지층을 통해 後漢, 발해 중기, 발해 후기~金 초 등 3기 遺存을 확인함으로써, 유적지가 渤海遺存의 단일 문화유적지가 아님을 확인함.

 

구조특징

 

1983년 처음으로 무송 신안유적에 대한 조사가 있었는데, 출토유물을 근거로 유적을 발해시기로 추정하였다. 1985년에는 건물 신축과정에서 주거지벽 기초가 발견되어 발해시기의 주거지로 추정하였다. 1986년 시굴조사를 통하여 유적지 동, 남, 서쪽에서 성벽과 성문 흔적이 발견되면서 발해시기의 성지로 파악하고 ‘신안고성유지’로 명명하였다. 이 과정에서 발해 풍주(豐州)의 치소로 추정하였다. 고성의 형태는 긴 사각형태였고, 동벽 길이는 490m, 남벽 길이는 1,150m, 서벽 길이는 680m이다. 북벽은 경작지와 평면을 이루고 있는데, 길 옆 단면에서 판축 흔적과 대체적인 방향을 볼 수 있고, 길이는 1,020m이다. 성벽의 전체 둘레는 3,340m이다. 또 유적지의 동북 모서리에서 제련유적 1곳도 발견하였다. 동서 길이는 50m이고, 너비는 명확하지 않다.
1994년에는 조사와 시굴을 진행하였는데, 성곽 북쪽 산봉우리 정상에서 봉화대와 유사한 유적을 발견하였는데, 신안고성을 조공도(朝貢道) 상의 중요 성시(城市)로 파악하는 것의 한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유적지에 대한 도면, 사진은 제시되지 않았고, 주거지, 성곽 등의 전모에 대한 보고도 미비하였다. 보고에 따르면, 유적의 평면은 불규칙한 평행사변형이다. 동·남·서 세 면에 성벽이 있고, 북면은 산세를 자연 성벽으로 삼았다. 동벽은 490m이고, 한 개의 문(동문)이 있다. 남벽은 1,150m이고, 두 개의 성문(동쪽과 서쪽 양측에 각각 한 개)이 있다. 서벽은 680m이고, 두 개의 성문(남쪽과 북쪽 양측에 각각 한 개)이 있다. 북면은 산세 방향과 동서 양벽 사이의 거리를 볼 때, 1,000여m로 볼 수 있다. 북벽의 흔적은 발견하지 못하였다.
2009년, 발해시기 기와편, 토기편이 흩어져있는 대지를 발굴하였다. 여기서 출토된 유물들을 분석한 결과 한, 부여, 고구려, 발해 시기의 문화적 특징을 발견하였다. 주거지 흔적은 명확하지 않지만, 출토유물이 대부분 생활용기였음으로 주거지로 파악되었다. 유적지는 ‘신안유적지 제1기 유존(遺存)’으로 명명하였다.
 

역사적 의미

 

무송 신안유적지는 범위가 매우 크고, 유물도 비교적 풍부하게 출토되었다. 특히 건축자재가 많고, 크기가 크다는 점은 이곳에 거대 건축물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즉 고고발굴을 통해 비교적 높은 건축등급을 갖추고 있고, 적어도 보통 민들의 주거지나 사용 건물은 아니라는 점이 밝혀졌다. 유적의 성격을 특정할 수는 없지만, 관방기구(官方機構) 이상 급의 유적임이 유추된다. 그런데 1977년, 신안유적지 인근에서 발해 고분 3기가 조사되면서 두 유적간의 거리로 볼 때, 서로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고, 신안유적지에서 출토된 유물이 거의 모두 발해문화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어서, 신안유적은 일찍부터 발해의 중요 시설로 인식되어 왔다. 나아가 신안유적을 발해 서경압록부(西京鴨淥府)의 풍주성(豊州城) 구지(舊址)로 비정하는 의견이 1980년대 이래 학계의 지지를 받아 왔다. 기록에 풍주성은 발해 조공로 상에 위치해 있다고 했는데, 신안 유적지 역시 대체로 사료에 기록된 범위 안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추정은 정밀 고고 발굴 조사 없이 시굴조사에서 얻은 결과였고, 구체적인 정황 없이 장기간 정체되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2000년대 이르러 이에 대한 반론도 제기되었는데, 무엇보다 유적지의 위치가 교통이 불편하고, 유적의 경작지가 자급자족 방식의 주성(州城)을 경영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 그리고 유적에서 성벽과, 성문이 그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더욱이 출토유물이 모두 발해시기의 것이라는 보고도 기와에 한정된 것으로 여타 유물의 상관관계도 모호했기 때문이다.
2009년 신안유적에 대한 조사와 발굴이 시작되면서 유적의 성격을 깊이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현 단계까지도 판단을 내릴 수는 없지만, 대체로 풍주성에 비정하는 논리는 상당부분 후퇴한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성벽으로 인식되었던 벽은 현지인이 강물의 범람을 막기 위해 설치한 토루로 파악되기도 했다. 또 기본적인 성시 배치와 시설과는 거리가 있고, 출토유물의 문화적 성격은 한대, 부여, 고구려, 발해의 모습도 보이고 있어서 이 역시 향후 연구되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조사보고자는 신안유적이 풍주성이 아닐 가능성이 더 높으나, 만약에 풍주성이 아니라면, 풍주성에 대해 중요한 보조 기능을 하는 관문(關卡)으로 추정하기도 하였다. 신안유적지가 위치한 지점은 외부에서 수로를 통하여 풍주성으로 갈 때 반드시 지나야 하는 곳으로 주성(州城)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면서 검문소 성격의 수로교통역참이었을 것으로 파악하였다. 뿐만 아니라 두도송화강(頭道松花江)을 왕래하는 선박에 대한 여객과 화물의 환승, 물자 보급 등과 관련한 편리한 조건을 제공할 수 있어, 이상적인 항구 혹은 역참이 되고, 주성(州城) 진출입을 위해 설치된 확실한 장벽으로도 볼 수 있다고 평가 하였다.
 

자연환경

 

유적은 길림성 백산시 무송현 무송진 신안촌에서 서쪽은 약 1km 거리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 무송진은 동남쪽 7.5km 정도에 위치하며, 백산시의 시중심에서는 동북 77km 지점이다. 유적지에서 동남 약 80km 지점에는 백두산 천지가 있다.
유적지는 매우 개활한 경작지에 위치하고 있고, 유적지 앞(남쪽)으로는 두도송화강(頭道松花江)이 흐르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산에 의치하고 있다. 북면의 계속 이어지는 여러 산들과 유적지를 둘러싸고 있는 頭道松花江이 천연장벽이 되면서, 공격과 퇴각이 가능하고 수비가 가능한 전략적인 지위를 보유하게 되었고, 교통 중심지를 통제하는 요충지가 작용할 수 있다.
유적지는 저수지 침수범위 안에 있는데, 남측과 서측 가장자리가 장기간 강물에 침식되어, 면적이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다. 신안유적지는 이 대지 서부에 위치하면서 서·남 양측이 대지 가장자리 가까이에 있어 비교적 심하게 침식되었기 때문에, 이전에 확정된 유적지 범위 일부가 없어졌다. 유적지가 위치한 대지는 지세의 기복이 크고, 홍수에 따른 침식으로 형성된 남북향의 골짜기(沖溝)가 여러 줄기 있는데, 유적지를 관통하여 두도송화강 안으로 합류하고 있다.
 

유물정보

 

신안유적지는 지표에서 토기편과 기와편이 대량으로 수습되었다. 지표에서 수습된 유물들은 대부분 발해시기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지표와 시굴조사를 통해서 화살촉 등의 철기류, 석기, 동기 등도 다양한 종류, 다량 출토되었다.
 

참고문헌

 

· 王志敏, 1985, 「吉林撫松新安渤海遺址」『博物館研究』1985-2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1987, 『撫松縣文物志』
· 張殿甲, 1988, 「渾江地區渤海遺跡與遺物」『博物館研究』1988-1
· 國家文物局, 1993, 『中國文物地圖集』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 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 2000, 「撫松新安渤海古城的調査與發掘」『博物館研究』 2000-2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2013, 「吉林撫松新安遺址發掘報告」『考古學報』2013-3
· 梁會麗, 2013, 「新安遺址渤海遺存性質新論」『東北史地』2013-24
· 梁會麗, 2014, 「試論新安遺址第一期遺存」『考古與文物』2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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