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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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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십사도구 전참 고분군(十四道溝 電站 古墳群)

  • 동강 고분군(東江 古墳群)

  • 리스트여닫기 십이도구 고분군(十二道溝 古墳群) 출토지 장백현 12도구진 12도구촌 (長白縣 十二道溝鎮 十二道溝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6장백현문물보사대(長白縣文物普査隊)2기의 원형적석묘 확인2004길림성장백산문화연구회, 백산시문관판, 집안시박물관(吉林省長白山文化硏究會, 白山市文管判, 集安市博物館)기단적석총 2기 확인구조특징 고분군 면적은 매우 큰 편으로 원래 고분이 30여기에 이르나 계단식 밭으로 개간되면서 고분이 심각하게 훼손, 현재 2기 고분만 남아 있는 상태로, 서로 140m 거리에 위치. 2기 고분은 적석총으로 고분의 적석은 4개층으로 구분가능함. 1층 대석층, 2층 河光石層, 3층 작은 자갈돌층, 4층 대석층으로 나누어짐. 3층과 4층에서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3층의 유물은 철제 자귀(鐵鏟) 1건, 동제 호미(銅鐲) 1건, 인골 1구가 나왔고 4층의 유물은 고리자루칼(環首鐵削刀) 1건이 출토됨. 적석부의 직경은 약 8m정도임.역사적 의미 12도구 고분의 형식은 대체로 고구려 초기 적석총과 유사하며, 環首鐵削刀, 鐵鏟, 銅鐲 등 고구려 유물이 출토되어, 고구려의 고분으로 인정됨.자연환경 북쪽으로는 험준한 산등성이가 동서로 펼쳐져 있고 남쪽에는 창자하가 인접해 있는데, 창자하 남쪽에는 12도구촌과 압록강변의 대지가 자리하고 있으며 서쪽으로 약 300m에는 寶泉山 발전소가 있음.유물정보 철제 자귀(鐵鏟), 동제 호미(銅鐲), 고리자루칼(環首鐵削刀)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纂委會, 『長白朝鮮族自治縣文物志』, 1986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孫仁杰·遲勇·張殿甲, 「鴨綠江上流右岸考古調査」『東北史地』 2004-5, 2004

  • 하외자 고분군(下崴子 古墳群)

  • 안락 고분군(安樂 古墳群)

  • 양종장 고분군(良種場 古墳群)

  • 금화 고분군(金華 古墳群)

  • 팔도구진산성(八道溝鎭山城)

  • 십사도구 고성(十四道溝 古城)

  • 리스트여닫기 십사도구 관애(十四道溝 關隘) 출토지 장백현 십사도구진 십사도구촌 (長白縣 十四道溝鎮 十四道溝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60통화지구문물보사대(通化地區文物普査隊)유적 발견1986장백현문물보사대(長白縣文物普査隊)실측과 기록 및 유물 채집을 통해 『長白縣文物志』 중의 ‘十四道口村邑과 關隘’로 발표2004길림성장백산문화연구회, 백산시문관변, 집안시박물관(吉林省長白山文化硏究會, 白山市文管辦, 集安市博物館)개괄적인 현황 파악 후 『東北史地』2004-5에 발표구조특징 古城의 서쪽에 위치하고 양자 사이에는 남북 방향의 도랑이 있음. 고성의 남벽과 일직선으로 축조했는데 길이는 500여m이고 압록강과 평행으로 달리며 대지 서쪽의 산 아래까지 이어졌음. 본래 석축성벽이었다고 함. 고성과 관애 안팎이 모두 농지로 개간되어 경작되고 있어 훼손이 심한데 고성의 성벽은 동북 모서리 부분, 남벽 동단만 조금 남아 있지만 古城 안팎의 토양과 색깔이 달라 전체 범위는 판별할 있음. 관애도 거의 모두 사라지고 현재 관애터는 밭으로 경작되는 주변 지역과 달리 진흙과 갈대밭으로 남아 있어 전체 범위를 쉽게 판별할 수 있음.역사적 의미 十四道溝古城은 형태상 集安 長川古城과 유사하며, 關隘는 集安 老邊墻 關隘와 비슷하다고 추정됨. 출토된 철제 솥은 집안(舊 집안현 郊區鄕) 勝利7隊 출토품과 유사하며, 토기 파수는 東臺子 유적 출토품과 비슷함. 이에 十四道溝古城과 關隘는 고구려 시기의 유적으로 추정할 수 있음. 다만 사질토기를 비롯하여 석제 도끼나 반달돌칼 등은 원시사회 말기의 유물로 추정되는데 이는 십사도구고성이 원시사회 유적 위에 축조되었음을 반영하는 결과임. 현재 압록강 상류에는 성곽과 관애가 본류 右岸을 따라 많이 분포되어 있는데 가령 十四道溝古城에서 압록강을 따라 40여㎞ 내려가면 長白 十二道溝灣關隘, 여기에서 다시 40여㎞를 내려가면 長白 八道溝山城, 다시 10여㎞ 내려가면 臨江 東馬鹿泡子古城, 20여㎞를 더 내려가면 夾皮溝古城, 10여㎞를 더 내려가면 樺皮甸子古城이 각각 나옴. 또한 압록강 상류로 40여㎞를 거슬러 올라가면 발해시기의 성곽인 長白古城이 나옴. 이 가운데 강변 평지성인 東馬鹿泡子古城, 夾皮溝古城, 樺皮甸子古城 등은 압록강 수로와 연관된 역참의 성격이 강한 반면, 산상에 위치한 八道溝山城과 十二道溝灣關隘는 군사방어적 성격이 강한 것으로 추정됨. 그런데 十四道溝古城과 關隘는 소형 평지성과 관애가 동시에 축조되었다는 점에서 역참과 군사적 요충지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 것으로 추정되고 특히 關隘가 압록강 右岸을 따라 동서 방향으로 기다랗게 축조되었다는 점에서 주로 압록강 상류로를 차단하기 위해 축조했을 것으로 추정됨.자연환경 유적은 마을 남쪽 약 1.5㎞에 위치하며 臨江-長白 도로가 古城 북쪽의 대지를 가로 질러 동서 방향으로 있고 古城은 十四道溝河가 압록강으로 유입되는 합류처 서북쪽에 위치해 있음. 十四道溝河와의 거리는 20여m, 압록강과의 거리도 100여m에 불과함. 古城 서쪽 약 50m 거리에 十四道溝 풍력발전소가 있었는데, 지금은 발전소를 가동하지 않고 풍차를 달았던 지지대만 남아 있음. 古城과 關隘가 위치한 곳은 압록강 상류의 산간지대인데, 압록강 북안에 동서 길이 1㎞ 전후, 남북 500m 정도의 충적대지가 펼쳐져 있고, 대지 북쪽으로도 경사가 비교적 완만한 산기슭이 이어지고 있음. 충적대지 남쪽에는 압록강이 동북에서 서남쪽으로 유유히 흐르고 있으며, 압록강의 지류인 십사도구하가 충적대지 동편에서 南流하다가 古城의 동쪽을 지나 동남쪽에서 압록강과 합류함. 古城과 關隘는 이 충적대지의 동남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주변의 토질이 상당히 비옥하여 고성 서쪽 일대는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북쪽 일대는 논으로 개간되어 경작되고 있음.유물정보 석기, 철기, 토기, 기와류 등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長白朝鮮族自治縣文物志』, 1986 · 國家文物局 主編, 「十四道溝遺址」『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長白縣志編纂委員會, 「文物·古迹」『長白朝鮮族自治縣縣志』, 1993 · 王禹浪·王宏北, 「中國吉林省長白縣十四道溝鎭高句麗的村邑與關隘」『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1994 · 余昊奎, 「長白 十四道溝關隘」『高句麗 城』 Ⅰ(鴨綠江 中上流篇), 國防軍史硏究所, 1998 · 孫仁杰·遲龍·張殿甲, 「鴨綠江上流右岸考古調査」『東北史地』 2004-5, 2004

  • 십이도만 관애(十二道灣 關隘)

  • 리스트여닫기 장백고성(長白古城) 출토지 장백현 민주촌 (長白縣 民主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60장백현문물보사대(長白縣文物普査隊)강돌로 축조한 성벽 발견, 현황 조사 및 유물 채집.1986장백현문물보사대(長白縣文物普査隊)1960년에 이은 2차 조사로, 현황 조사 및 유물 채집 후 『長白縣文物志』 중의 ‘長白古城’으로 발표구조특징 1960년대에 조사했던 仙人島 西側 과수원 일대의 성벽은 1986년 조사시에 이미 파괴되어 평평해졌고, 주변에는 기와편 등만 흩어져 있었음. 현지 주민에 따르면 성돌로 채소밭 온실 벽을 만들었다고 하고 성벽 안팎이 채소밭과 과수원으로 경작되고 있어 훼손 상태가 심각함. 1960년에는 仙人島 서측 과수원 일대의 성곽 내부의 건물을 조사했는데 광이 나는 강돌로 축조했고 남북 길이 26m, 동서 너비 20m의 범위로 기단 너비 8.4m, 윗 너비 1.5m, 높이 0.5-1.5m의 규모임. 1986년 이 유적 외곽에서 동서 380m, 동서 240m 정도의 성곽을 확인한 만큼 이 유구는 성곽 내부의 건물로 추정되고 이 유구의 남벽에서 확인했다는 너비 3m 정도의 트인 부분도 성문이 아니라 건물지의 출입 시설로 추정됨. 성벽중 남벽 동단과 서단부에 해당하는 성벽 기초부 발견되었고 두 기단부의 동서 거리는 350m인데 현지 주민에 따르면 새로이 발견된 서쪽 기단에서 서쪽으로 약 30m 뻗어나간 후 북쪽으로 돌아가 계속 대지의 북쪽 큰 두둑 아래까지 뻗어나간다고 하며 남벽의 길이는 약 380m임. 서벽은 남벽 서단과 대지 북쪽의 둔덕 사이로 길이는 약 240m이며 북벽은 대지 북쪽에 위치한 높이 5m 전후의 둔덕으로 추정됨. 전체 규모는 동서 380m, 남북 240m 전후임.역사적 의미 鴨綠江 상류 연안에는 臨江 樺皮甸子古城, 夾皮溝古城, 東馬鹿泡子古城, 長白 十四道溝古城-關隘 등 압록강 수로와 연관된 고구려 시기 평지성이 다수 분포하며 長白古城은 축조 기법이나 위치 등을 근거로 고구려 시기에 축조하여 발해시기까지 축조된 평지성으로 파악하기도 함. 다만 현재까지 출토된 권점문 암키와(圈點紋板瓦), 승문 암키와(繩紋板瓦), 연화문와당(乳釘蓮花紋瓦當) 등은 발해시기의 유물(일부 고구려)로 추정되고 있고 특히 연화문와당(乳釘蓮花紋瓦當)은 전형적인 발해 와당으로 따라서 현재로서는 장백고성을 발해 시기의 평지성으로 비정할 수 밖에 없으며, 그 상한은 향후 고고학 발굴성과를 기다릴 필요가 있음.자연환경 중국의 장백현 소재지와 북한의 혜산시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며 압록강 최상류에서 상당히 넓은 분지를 형성하고 있는데 특히 압록강 북쪽에 위치한 장백현 소재지의 경우, 압록강 부근에는 상하 2단의 충적대지가 형성되어 있고, 그 위쪽으로 완만한 경사지가 전개됨. 古城은 압록강 우안의 2단 충적대지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는데, 고성 동쪽에는 압록강이 서남향으로 흐르다가 古城 동남쪽 부근에서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流向을 서쪽으로 바꾸어 고성 남쪽을 지나가고 있음. 고성의 동쪽과 남쪽 모두 압록강과의 거리는 100-200m 전후이며, 고성과 압록강 사이에는 좁고 기다란 1단 충적대지가 펼쳐져 있음. 고성이 위치한 대지의 북쪽에는 높이 5m 정도의 큰 두둑이 있는데(북벽으로 추정), 그 북쪽으로 장백현 소재지의 주택지구가 펼쳐져 있고 현재 고성이 위치한 대지는 채소밭과 과수원으로 변했음.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長白朝鮮族自治縣文物志』, 1986 · 王禹浪·王宏北, 「中國吉林省長白縣十四道溝鎭高句麗的村邑與關隘」『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1994 · 國家文物局 主編, 「長白城址」『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長白縣志編纂委員會, 「文物·古迹」『長白朝鮮族自治縣縣志』, 1993

  • 마록구고전호(馬鹿溝古戰壕)

  • 리스트여닫기 하외자유적(下崴子遺蹟) 출토지 장백현 십삼도구향 (長白縣 十三道溝鄉)연대 원시사회 말기(기원전 4-3세기)에서 고구려시기 원시사회 말기로 추정되는 사질의 토기편과 석기편이 출토됨. 고구려시기 유적으로 추정되는 흙무지[土包]와 석축방단 발견됨.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6장백현문물보사대(長白縣文物普査隊)실측과 기록을 했고 이를 통해 『長白縣文物志』 중의 ‘下崴子遺址’로 발표구조특징 흙무지와 석축방단이 발견되었는데, 흙무지[土包]는 유적 중앙의 동서에 2개 있고 서로 거리는 50m로 만두 모양이며 지표보다 0.5m 정도 높음. 흙무지 윗면은 광이 나는 강돌로 덮었으며 강돌로 덮힌 흙무지 윗면에서 토기편과 석기편 다량 출토됨. 동쪽 흙무지는 동서 길이 20m, 남북 너비 10m이고 서쪽 흙무지는 동서 길이 10m, 남북 너비 5m임. 건축물로 추정되는 석축 방단은 흙무지 서쪽 100m 지점에 있고 방형으로 한변의 길이가 11.5m, 높이 2.05m임. 층위는 위에서 아래로 제3층까지는 강돌층, 하단의 제4층은 生土層임.역사적 의미 원시사회 말기부터 사람들이 거주하던 유적으로 석축방단은 하단의 생토층을 제외하면 3층으로 된 건축물로 추정됨. 원시사회 말기 이래 고구려시기에 걸친 마을 유적으로 추정가능함.자연환경 북한의 長津江이 압록강과 합류하는 지역으로 압록강 연안을 따라 길이 2.5㎞, 너비 0.5㎞ 전후의 좁고 기다란 충적대지가 형성되어 있는데, 유적은 이 충적대지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음. 충적대지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으며, 북한의 장진강도 이 일대에서 압록강으로 유입되고 있음. 유적과 압록강의 거리는 100여m에 불과함. 충적대지 북쪽에는 동서 방향으로 산줄기들이 이어지고 있는데, 경사가 상당히 가파른 편임. 반면 압록강 맞은편의 산줄기들은 경사가 비교적 완만한 편이며 산기슭 아래로 비교적 넓은 대지가 펼쳐져 있음.유물정보 토기편, 석기 등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長白朝鮮族自治縣文物志』, 1986 · 國家文物局 主編, 「下崴子遺址」『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長白縣志編纂委員會, 「文物·古迹」『長白朝鮮族自治縣縣志』, 1993

  • 리스트여닫기 도권리유적(桃圈里遺蹟) 출토지 장백현 팔도구진 신흥촌 도권리 (長白縣 八道溝鎮 新興村 桃圈里)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95백산시문물보사대(白山市文物普査隊)유적의 전체 현황 조사 및 유물 채집 후 『北方文物』2000-2에 발표구조특징 유적지는 동서 길이 약 100m, 남북 너비 약 50m로 표면에 비교적 많은 토기편과 黑曜石이 흩어져 있음.역사적 의미 약 2㎞ 거리에 北興村 大地 유적지가 있는데 도권리 유적지는 산 끝자락의 완만한 기슭 대지에 자리하고 있으며, 산 정상은 평탄한 지세로 대부분 경작지로 개간되었지만 지세는 비교적 높아 北興村 大地 유적지와 같은 산 위에 위치함. 도권리 유적지와 北興村 대지 유적지의 유물을 비교 분석하면 두 유적의 문화 면모는 기본적으로 일치하며. 특히 이곳에서 10㎞ 못 미치는 거리에 있는 七道溝 유적지에서도 이곳처럼 흑요석기(黑曜石製 刮削器)가 출토되어 양자 사이의 문화적 연관성을 시사해주고 있음. 고구려에서 발해 시기에 걸친 생활유적으로 추정됨.자연환경 유적지는 압록강 지류인 八道溝河 유역의 산 끝자락의 완만한 기슭 대지에 자리하고 있음. 산 정상부는 평탄한 지세로 탁 트였는데 대부분 경작지로 개간되었음.유물정보 토기, 석기, 자기류 등참고문헌 · 張殿甲, 「鴨綠江中上游高句麗·渤海遺址調査綜述」『北方文物』 2000-2, 2000

  • 대지유적(大地遺蹟)

  • 합마천 고분군(蛤蟆川 古墳群)

  • 간구자 고분군(干溝子 古墳群)

  • 리스트여닫기 간구자 1호분(干溝子 1號墳) 출토지 길림성 장백현 십사도구진 간구자촌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鎮 干溝子村)연대 상한: 戰國中期~末期, 하한: 西漢 상한 : B.C 4세기~B.C 3세기초, 하한 - 기원전후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6장백조선족자치현문물보사대(長白朝鮮族自治縣文物普査隊)6월에 고분 19기를 확인 후 편호하고, 파괴된 고분에서 유물 수집하는데 토기(陶罐, 陶盅) 2건과 멧돼지 이빨장식(野猪牙飾) 2건, 녹송석 대롱장식(綠松石管飾) 1건, 일반인이 보유하던 석제 도끼(石斧) 2개 등을 회수함.구조특징 중형묘로 묘역의 돌기단은 장방형임(1986년 문물지와 박윤무의 1995년 글(『압록강 유역 간구자 적석무덤에 대한 조사연구』)을 참조했는데, 박윤무의 1990년 글(「長白縣干溝子墓地調査」)에서는 ‘타원형 기단’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1995년 글에서 ‘타원형의 기단은 원래 방형이었으나 …(중략)…원상태를 잃은 것’이라고 보았다는 점에서 표현상 차이로 보임). 기단은 대괴석으로 쌓았고, 현재 두터운 부식토 표층에 눌려 있으며, 기단 네 모서리 돌이 떨어져 타원형으로 변형된 상태임. 돌기단 위에 3개의 동일한 원형석광적석곶묘가 자리하고 있는데, 무덤의 외부 형태는 원형으로 직경 11m임. 묘광 축조 과정을 보면, 먼저 무덤의 외벽은 길이 0.8-1m, 너비 0.5m, 두께 0.6m의 다듬은 장대석을 촘촘히 둘러 세워 원형으로 쌓고, 묘광(간구자 고분군의 중국 글들에서는 ‘框室’ ‘墓壙’ ‘石壙’ 등으로 표현하고 있으나 ‘묘광’이 보다 적합한 표현으로 판단되므로 이에 따라 정리함.) 내부를 크기가 다른 막돌과 강돌로 채운 후, 주먹크기의 돌을 여러 벌 덮어 정상부를 덮었는데, 원구모양을 하고 있음. 3개 석광적석묘는 삼각형태로 배열되어 있는데, 각 무덤의 간격은 0.5m이고, 무덤 사이사이에는 장방체의 긴돌을 일렬로 서로 연결시켜 일정 형식의 유기적 통일체를 형성하며, 묘광 바깥에는 묘광 높이와 같게 큰 돌을 채워 안팎의 평형을 유지함. 대부분의 묘광 외벽은 소실되고 너비 0.5m, 깊이 0.6m의 구덩이 흔적이 남아 있고, 내부 구조가 노출된 상태임. 1985년 장백조선족자치현 문화국에서 서남쪽에 위치한 제1호 묘광 을 시굴했는데, 동서 9m 길이의 묘광을 관통하는 ‘T’자형 구덩이가 묘광 중앙에서는 북으로 4m가 확장되어 관통함. 이 때 묘광의 4개 단면층을 확인했는데(박윤무의 1995년 글(「압록강 유역 간구자 적석무덤에 대한 조사연구」) 참조함. 1986년 문물지에서도 제1층의 퇴적층(두께 0.2m), 제2층의 河光石層(두께 0.4m), 제3층의 小河卵石層(두께 0.8m, 불탄 인골조각편과 도기, 野猪牙飾, 綠松石管, 석기 등이 발견), 제4층의 大石塊層(두께0.4~0.5m), 제5층의 생토층 등으로 구분하고 있음. 박윤무의 1990년 글(「長白縣干溝子墓地調査」)에서는 제1층의 大石塊層(기단층으로 두께 1.40m), 제2층의 작은 돌과 모래층(묘실이 이 평면층 위에 시설, 두께 0.40~0.50m), 제3층은 小石層으로 구분하고 있음), 제1층은 길이가 보통 0.5-0.8m 정도의 돌을 포개 축조했고, 두께는 1m 정도이며, 묘광을 마련하기 위한 기단층이 있음. 제2층은 기단층 위에 주먹만한 작은 돌과 자갈, 모래 등을 쌓고, 두께는 10㎝ 정도로 반듯한 평면을 이루며, 묘광 외벽은 바로 이 평면층 위로부터 쌓아지기 시작함. 제3층은 묘광 외벽의 높이와 거의 같게 0.4-0.6m 두께를 이룬 큰 돌층이 형성되며, 제4층은 맨 위층으로 자갈과 강돌로 쌓았고, 두께는 0.2-0.3m임. 묘광 상황을 보면, 주검 칸과 葬具가 없고, 인골과 부장품(도기·장식품)은 돌 틈 사이에서 발견되는데, 대부분 자갈층(제2층) 수평면에서 나오며, 器物 등이 놓여 진 모습에 일정한 규칙성이 없음. 인골은 모두 불에 타서 검은 색 혹은 회백색을 띠는 잔편으로 개체의 숫자, 연령 및 성별에 판단이 어렵고, 인골 주위에서 대량의 목탄 발견이 되어 주검을 묻은 후 화장하였던 사실이 확인됨. 제1호분의 고분 구조와 유사한 고분이 제3호 및 제4호분임.역사적 의미 축조방식은 지면에 커다란 돌을 사용하여 일정 범위의 묘역을 조성한 후 냇돌과 할석을 깔아 평면하게 지면을 고르고 무덤의 기저부를 만든 후, 그 위에 단을 쌓아 몇 기의 무덤이 연접되도록 함. 매장방식은 무덤 밖에서 화장한 후 燒骨을 매장한 2차장하고, 대다수 묘광 내부에 불에 타거나 그을린 흔적이 없음. 불에 탄 인골편은 작은 조각으로 가장 큰 것이 길이 5㎝가 안되며, 대략 1/3의 소골은 회백색이며 나머지는 赭色(자색)과 흑색임. 다만 BM2ZK1에서 목탄편이 출토되었고, 1986년 조사된 간구자 1호분(M1)의 석광 안에는 주검칸이나 葬具를 따로 마련하지 않았고 불에 태워진 인골과 대량의 목탄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시신을 묘광 안에 놓고 화장했던 것으로 추정됨. 燒骨은 묘광 내 2, 3곳에 무더기로 안치되었으며, 토기는 묘광 양단에 나누어 부장한 점으로 미루어 一代 혹은 한 가정의 合葬 즉 동일가족 數代의 합장묘 유적일 것임. 따라서 신분 혹은 항렬이 비교적 높은 사람이 주묘단의 중심에 매장되고, 다수 속·부묘단은 항렬의 대소 또는 昭穆제도에 따라 附葬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2001년 발굴한 7기 고분의 부장품은 총 283점으로 작은 장식품을 제외하면 평균 각 묘광에 3점이 부장되었으므로 厚葬은 아님. 전체 부장품 중 토기가 총73점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나 완형보다는 다수가 파편으로 출토되어 토기의 毁器習俗으로 짐작됨. 출토된 그릇은 모두 민무늬의 夾沙褐陶로 모양이 간단하고 종류가 단조롭고 제작 기술이 거칠어 원시성을 반영하며, 그 외 野猪牙飾, 綠松石管 등의 장식품은 모두 압록강 유역과 두만강 유역의 원시문화에서 일찍이 보여주는 전형적 기물임. 간구자 고분군의 무덤들은 하나의 기단 위에 여러 기의 고분이 배열되어 있는데, 특히 7호분은 1기의 원형석광적석묘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장방형의 작은 돌무덤이 방사상으로 배치되어 무덤 사이의 主次관계를 시사함. 즉 중심무덤의 피장자는 주위의 무덤에 비해 사회적 지위가 높은 편이나 반대의 무덤은 중심무덤에 예속된 상태로 추정됨. 반면에 1호분 및 4호분과 같은 단일한 원형석광무덤의 무덤배열 상태에서는 주종 관계가 전혀 보이지 않음. 한 墓區내의 여러 개 무덤은 그 크기와 모양이 같으며 또한 무덤 사이마다 돌로 서로 연결되어 한 무덤구역내의 피장자들 관계가 평등하였다는 것을 시사하며, 이는 혈연관계를 이루고 있는 가족 성원의 무덤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임. 부장품은 장식품이 많고 생산 공구 및 기타 그릇 류가 비교적 적은데, 이는 길림성 중부지구의 九台關馬山, 公主嶺猴石, 樺甸橫道河子 및 東豊, 遼源 일대 많은 大蓋石墓의 부장 특징과 서로 일치하며, 동북지구 남부에서는 戰國晩期~漢代 보편적으로 유행함. 상한연대는 2기 고분에서 方孔圓錢- 半兩錢과 一化으로 추정할 수 있음. 半兩錢은 秦末半兩 혹은 漢初의 八銖半兩이며, 一化는 ‘一刀’로 해석되며, 周秦 또는 秦初 시기의 화폐임. 赤峰 新窝堡와 鐵嶺 邱家台지역의 퇴장유적에서 이들 화폐가 燕·趙의 刀幣 및 반량전과 같이 출토되어 燕國晩期의 화폐로 확정되었으므로 묘지연대의 상한은 戰國末期, 비교적 이른 것은 戰國 中期에 해당됨. 하한연대는 AM1에서 출토된 鐵钁과 AM3·AM4 주묘단에서 채집된 鐵刀로 추정할 수 있는데, 钁은 漢代유행하는 것과 형태가 유사하며, 철도는 直柄環首로 일찍이 集安의 板岔嶺에서 동일한 것이 발굴된 바 있는데, 고구려 적석묘에서 대량 보이는 環首刀보다 조금 이름. 집안 판차령에서 “一化”圓錢이 “半兩”, “五銖”, “大泉五十”, 등의 한대화폐와 함께 출토되었고, 그 유통 시간은 전국말기~東漢임. 그러나 간구자묘지에서는 “오수” 및 동한화폐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고분의 하한은 대체로 동한이전의 서한시기로 비정됨. 간구자묘지의 연대가 집안, 환인 일대의 고구려 적석총보다 앞서므로, 고구려적석총의 가장 이른 형식인 無階段 圓丘上積石墓와 관련이 있을 것임. 고구려 초기의 적석묘의 발전과정을 보면, 무덤은 석광이 따로 없는 간단한 시설로부터 계단식 기단으로 이루어진 ‘框室(앞에서 박윤무의 1995년 글에 따라 ‘묘실’이라 정리하던 개념인데, 이 글에서 이 부분을 ‘框室’로 표현하고 있어 그대로 따랐음)’ 무덤으로 발전하고, ‘광실’은 장방형으로부터 정방형 형태로 변화·발전함. 묘광 위치에서도 위로부터 아래로 점차 내려옴. 이를 종합해 볼 때 간구자의 원형석광적석묘는 고구려 초기 적석총과 유사함. 첫째, 주검칸이 따로 없이 무덤의 기단 윗면을 자갈과 모래로 수평하게 마련하고 그 위에 주검과 부장품을 놓고 막돌로 덮어 정상부를 마무리 한 것은 이것은 환인 201호 및 19호분과 매우 흡사함. 둘째, 기단의 단수와 묘광 형태에서 차이가 있으나 한 무덤구역에 여러 기의 무덤을 연이어 마련한 점은 환인 23-33호분과 일치함. 셋째, 화장하여 묻는 습관이 환인 23호 및 20호분이나 15호분에서 확인되며, 집안 일대의 일부 적석총은 묘광벽이 불에 녹아 응결된 흔적으로 화장하였을 것으로 짐작됨. 따라서 간구자 무덤은 시기적으로 환인 적석총을 위주로 한 고구려 초기 무덤보다는 이르며 대체로 환인 적석총보다 선행된 고구려 早期의 무덤형식으로 고구려족계의 원시적 매장 특징이 짙게 반영됨. 또한 간구자 고분군은 여대지구 청동기 시대 무덤 및 청동단검고분의 특징을 내포하고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와 노철산 고분은 모두 여러 기의 무덤을 서로 가까이하여 ‘벌집형(蜂巢狀)’이며,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평면 형태는 원형으로 된 것도 있음. 이것은 간구자 1호분(M1)·2호분(M2)의 특징과 유사함. 강상묘는 하나의 무덤구역에 1기의 중심무덤을 마련하고 그 둘레를 돌면서 여러 기의 무덤을 방사선 형태로 마련하였는데, 이것은 간구자 7호분(M7)과 매우 유사함. 그리고 강상·누상묘 등 적지 않은 청동단검묘는 모두 화장한 무덤이라는 사실에서도 간구자 고분과 일치함.(『조선고고학개요』에서는 ‘노철산 및 장군산 고분→강상·누상묘→고구려 적석묘’라는 계승 발전관계를 설정하고 있고, 왕성생(1981, 「요하 유역 및 부근지역의 短鋌曲刃劍 연구」『요녕성고고박물관학회설립대회』회간)은 강상묘를 비롯한 요동문화유형의 무덤 형식과 매장습속이 환인 고구려 적석무덤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고구려 적석묘는 강상묘의 계승과 발전’이라고 보고 있음) 또한 여대지구 강상과 루상, 우가촌 타두 적석묘 등과 같은 집단묘로서, 家族合葬墓라는 점에서 공통됨. 반면 강상·누상 적석묘는 평지에 축조되었으며, 묘단은 없고, 묘광이 장방 혹은 방사상으로 분포하며, 중심 묘광의 4벽은 판석을 세워 만들었고, 우가촌 타두 적석묘 역시 묘광이 타원형 또는 부정형으로, 보통 평행을 이루는 가로배열로 분포하며 묘단을 만들지 않았음. 따라서 강상·루상과 우가촌 타두는 간구자 적석묘와는 축조 방법에서의 차이가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연대는 3230±90년B.P. 이고, 강상·누상묘는 기원전 1세기 전반기에 해당된 고조선 시기이며, 환인 지역 적석묘는 제15호분에서 環首式 철칼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東漢 시대로, 늦어도 漢·魏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음. 간구자 고분군의 상대적 축조연대는 대체로 전국시기로부터 서한 말기에 해당되므로, 간구자 고분군은 강상·누상묘에서 환인 적석묘로 발전해 나아가는 과정의 과도기 단계로서 고구려 선인들의 토착문화로 추정됨. 연접 방식은 3형식으로 나뉘는데, 제1형식은 속·부묘단이 주묘단을 둘러싸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지 않으며(AM3, AM4, BM5), 제2형식은 속·부묘단의 밖에 다시 제2속묘단이 외접하고, 제1형식이 주묘단만을 둘러싸지만, 제2형식은 연이어 속묘단이 함께 둘러싸고 하나의 부묘단이 기점이 되어 2개의 방향으로 나누어 펼쳐짐(BM2, BM4). 3형식 : 먼저 주묘단을 두르고 밖으로 다시 속묘단을 쌓고, 빈곳에 1, 2개의 부묘단을 세운 후 연속으로 서남방향에 속묘단을 설치한 후, 양쪽에 연속하여 부묘단을 대칭으로 축조함(AM1, AM2). 제1형식이 제2형식의 미완성형식이라면 비교적 이른 고분은 모두 먼저 주묘단을 쌓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였는데, 부·속묘단이 연접하는 방향은 서남쪽으로 접속하지만, 일정하지 않다가 비교적 늦은 고분에서 서남쪽으로 확장방향이 정형성을 띰. 속묘단은 중심선에 의해 대다수 서남방향으로 연접하며 부묘단은 양쪽으로 分列하는데, 대다수는 비교적 대칭적임. 연접 방식에 따른 배열법의 변천순서는 제1형식→제2형식→제3형식 순으로 변하고, 이런 양상은 고분군의 분포 양상과도 합치됨. A와 B구역을 보면, 산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가 이른데 비해, 강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는 비교적 늦음. 上→下의 배열과 발전과정은 환인과 집안 일대의 고구려적석총의 배열과 일치함.자연환경 간구자1호분은 서간구자하 동쪽 구역 서남단, 장백과 임강을 잇는 長臨 도로가에 위치함. 간구자촌은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鎭 서쪽 0.5㎞ 지점에 위치하고, 고분은 干溝子村의 東·西干溝河 양안의 하곡 충적대지상에 분포함. 동쪽으로 長白縣城과 45㎞ 떨어져 있고, 동·서·북 3면이 高山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름. 압록강과 고분군 사이의 馬架子山을 기준으로 동쪽의 동간구하, 서쪽의 서간구하가 흐르는데, 서간구하는 동북에서 서남으로 흘러 고분군를 거쳐 압록강으로 흘러 감. 장백과 임강을 잇는 長臨도로가 동남에서 서북으로 뻗어 고분군을 양분하고, 고분군의 서·남 양쪽 산위에는 청동기시대 유적 분포함. 간구자 고분은 여러 차례 조사가 있었으나 1986년과 2001년 조사로 대별되는데, 특히 2001년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계기로 1986년 조사때보다 묘역이 크게 확대되었음. 앞서 고분 분포현황에서 언급하였듯이 2001년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묘역은 크게 A, B, C, D의 4구역으로 이루어졌는데 비해, 1986년 보고서에는 2001년 보고서의 A와 B 지역 일대를 파악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으므로 2001년 고분의 편호는 1986년 조사를 고려하지 않고 새로 편호하고 있기 때문에 양자의 개별 고분들을 직접 연결시켜 파악하기는 어려운 상황임. 때문에 개별고분의 상황을 두 시기로 나누어 정리하였음.유물정보 복원 가능한 토기 2점, 완(陶碗) 1점, 잔(陶杯) 1점, 석제 도끼(石斧) 2점, 멧돼지이빨장식(野猪牙飾) 2점, 대롱장식(綠松石管飾) 1점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長白朝鮮族自治縣文物志』, 1986 · 朴潤武, 「長白縣干溝子墓地調査」『博物館研究』 1990-3, 1990 ·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 編, 『吉林省志』 45(民族志), 吉林人民出版社, 1991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朴潤武, 「압록강 유역 干溝子 적성무덤에 대한 조사연구」『中國境內 高句麗遺蹟 硏究』, 예하출판, 1995 · 王洪峰·孫仁傑·遲勇, 「吉林長白縣干溝子墓地發掘簡報」『考古』 2003-8, 2003 · 孫仁杰·遲勇·張殿甲, 「鴨綠江上流右岸考古調査」『東北史地』 2004-5, 2004

  • 간구자 2호분(干溝子 2號墳)

  • 간구자 3호분(干溝子 3號墳)

  • 간구자 4호분(干溝子 4號墳)

  • 간구자 7호분(干溝子 7號墳)

  • 간구자 무기단적석묘(干溝子 無基壇積石墓)

  • 리스트여닫기 간구자 AM1호분(干溝子 AM1號墳) 출토지 길림성 장백현 십사도구진 간구자촌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鎮 干溝子村)연대 상한: 戰國中期~末期, 하한: 西漢 상한 - B.C 4세기~B.C 3세기초, 하한 - 기원전후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2001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장백현문물보호관리소, 집안시박물관(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長白縣文物保護管理所, 集安市博物館)5월-7월 조사에서 1986년 편호와 달리 새로이 편호하는데 1986년 편호된 고분가운데 M15~M19의 5기 가운데 1기만 남아 있고, 1986년도에 편호되지 않은 고분 중 고분 형식을 판별할 수 있는 고분 고려하여 새로이 편호하였으며, 서간구하 북안의 A구 4기와 그 남안의 B구 3기를 발굴함.구조특징 A구 남부에 위치하며 전체 형태는 橢圓丘狀으로 정상부 최고 높이는 1.5m임. 주묘단 1기, 속묘단 3기, 부묘단 6기로 구성되어 있고, 고분의 남면과 서쪽의 바깥쪽 부묘단이 이미 남아 있지 않으며, 지상에는 내부 부묘단과 연결된 벽이 노출된 상태임. 주묘단(ZT)은 원형으로 직경 5~5.2m, 높이 1.25m이고, 판석으로 사방을 쌓았으며, 보존상태는 양호함. 높이가 0.8~0.9m이고 지탱석이 남아 있는 상태로 중심묘광(ZK1)의 방향은 75도이고, 평면은 타원형임. 둘레는 냇돌이 2줄 돌아가는데 길이 1m, 너비 0.65m, 묘광의 깊이(壙深) 0.15m임. 묘광 바닥은 잔 냇돌을 0.2m 두께로 깔았고, 묘광 내에는 불탄 인골조각이 있음. 2개의 작은 타원형 돌무지가 있는데 주묘단의 서쪽 묘단 가장자리 부근에 남북으로 배열되어 있고, 그 바깥 둘레에 돌을 놓아 대체로 원을 이루며, 북쪽 돌무지의 범위는 길이 0.8m, 너비 0.65m, 두께 0.1m이고, 陶罐 잔편이 1개 보이나 인골은 없음. 남쪽 돌무지는 길이 0.7m, 너비 0.5m, 두께 0.14m이고, 인골이나 유물이 보이지 않음. 속묘단(XT1-XT3)은 주묘단 남·북 양쪽에 속묘단이 연접해 있는데 XT1, XT2, XT3가 있음. XT1과 XT3은 서남방향으로 연접하고, XT2는 동북방향으로 연접해 있음. XT1은 타원형 평면으로 직경 5.2m이고, 돌 울타리의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殘高 0.6m임. 상부에는 7·8층의 평평한 할석을 쌓쌓았고, 밖에는 지탱석과 커다란 할석이 있음. 묘광(XK1)은 주묘단의 둘레돌에 기대어 있는데, 평면 타원형으로 길이 2.2m, 너비 0.7m, 깊이 0.05m이고, 묘광바닥의 냇돌의 두께는 0.12m이며, 燒骨, 철제 괭이(鐵钁) 1건, 석제 호미(石鋤) 2건(Ⅰ식·Ⅱ식)이 출토됨. XT2는 반원형 평면으로 직경 약 4m이고, 묘단 둘레가 남아 있지 않고 바닥만 남아 있음. 묘광(XK2)은 圓角長方形형으로 길이 1.6m, 너비 0.65m, 깊이 0.08m이고, 방향은 XK1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며, 주묘단 ZK1의 방향과 수직으로 위치함. 묘광 내 두께 0.05m의 작은 강돌층이 있고, 사질토기(夾砂褐陶) 잔편이 출토되었으나 인골은 보이지 않음. XT3은 타원형 평면으로 직경 4.6m이고, 둘레 돌이 무너져 殘高 0.4~0.6m임. 묘광(XK3)은 圓角長方形인데 길이 1.8m, 너비 0.87. 깊이 0.1m이고, 묘광 내 두께 0.12m의 강돌층이 있음. 묘광 중간에 燒骨이 있는데, 동남부에서 심발형토기(深腹罐 CⅡ식)과 骨器 각 1건, 남색·백색 대롱(藍·白管) 13건이 출토함. 묘광(XK4)은 부정형으로 한변 길이 1.2m, 너비 0.8m, 두께 0.1m의 작은 냇돌로 축조했고, 토기편·석제 방추차(石紡輪) 각 1건, 흰색 대롱(白管) 4건이 출토함. XT3 서쪽에 1기의 속묘단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고, XT3 남쪽에는 돌덩어리가 비교적 많이 산재해 있으며, 동서 방향으로 대략 3.8m가 떨어져 보이는 둘레돌 기초 2줄 확인되나 파괴가 심함. 부묘단(FT1~FT6)은 주·속묘단 중심축의 양쪽에 마주하여 위치하고, 묘광 방향은 주묘단 묘광의 장축과 대부분 일치함. FT1은 타원형 평면으로 길이 4.7m, 너비 1.7m이고, 묘광(FK1)은 장방형으로 길이 약 4m, 너비 1m이고, 묘광 바닥의 0.14m 두께로 냇돌 깔았으며, 두 덩어리의 불탄 뼈조각과 심발형토기 1건(深腹罐 BⅡ식)이 출토됨. FT2는 반원형으로 직경 약 5m이고, 바깥 가장자리의 둘레돌은 남아 있지 않음. 묘광(FK2)는 타원형으로 길이 3m, 너비 1.3m, 깊이 0.5m이고, 바닥의 냇돌 두께는 0.16m이며, 묘광내 남·북 2곳에서 燒骨 각 1 무더기, 토기편 각 1건이 출토함. FT3은 橢圓形에 가까운 평면형태로 길이 4.2m, 너비 1m이고, 둘레돌은 보존이 양호하며, 둘레 돌 밖에 지탱석인 倚石 3개가 잔존하며, 돌레돌 높이는 0.85m임. 묘광(FK3)은 墓壙壁이 보이지 않고, 바닥의 냇돌 범위는 길이 3.5m, 너비 0.8m, 두께 0.14m이며, 燒骨, 백색 대롱(白管) 10점, 토기편이 약간 출토됨. FT4는 반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직경 약 4.5m이고, 둘레 돌은 대부분 훼손되었음. 묘광(FK4)는 타원형으로 길이 2.6m, 너비 1m, 깊이 0.18m이고, 묘광 바닥의 냇돌은 두께 0.08m이며, 燒骨·심발형토기편 2건(深腹罐 AⅡ식)·백색 대롱 3개가 출토함. 작은 돌무지는 묘광(FK4) 남쪽의 XT3의 둘레돌 아래 인접하여 위치하고, 평면 원형으로 주위에는 냇돌로 둘레를 돌렸는데 직경 약 0.5m, 두께 0.08m이고, 돌무지 안에는 碎骨이 있음. FT5는 파괴가 심하여 둘레돌 흔적만 남음. 묘광(FK5)은 평면 타원형의 냇돌층만 잔존하고, 길이는 0.5m, 너비 0.4m, 두께 0.06m이며, 석제 방추차 1건과 토기 잔편 1건이 출토되었었으나 인골은 보이지 않음. FT6으로 추정되는 것은 FT1과 XT2 사이의 공간에 많은 큰 돌이 산재하고 둘레가 정리된 상태로, FT1과 FT3 동쪽으로 많은 배열을 이루는 커다란 냇돌이 있음.역사적 의미 축조방식은 지면에 커다란 돌을 사용하여 일정 범위의 묘역을 조성한 후 냇돌과 할석을 깔아 평면하게 지면을 고르고 무덤의 기저부를 만든 후, 그 위에 단을 쌓아 몇 기의 무덤이 연접되도록 함. 매장방식은 무덤 밖에서 화장한 후 燒骨을 매장한 2차장하고, 대다수 묘광 내부에 불에 타거나 그을린 흔적이 없음. 불에 탄 인골편은 작은 조각으로 가장 큰 것이 길이 5㎝가 안되며, 대략 1/3의 소골은 회백색이며 나머지는 赭色(자색)과 흑색임. 다만 BM2ZK1에서 목탄편이 출토되었고, 1986년 조사된 간구자 1호분(M1)의 석광 안에는 주검칸이나 葬具를 따로 마련하지 않았고 불에 태워진 인골과 대량의 목탄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시신을 묘광 안에 놓고 화장했던 것으로 추정됨. 燒骨은 묘광 내 2, 3곳에 무더기로 안치되었으며, 토기는 묘광 양단에 나누어 부장한 점으로 미루어 一代 혹은 한 가정의 合葬 즉 동일가족 數代의 합장묘 유적일 것임. 따라서 신분 혹은 항렬이 비교적 높은 사람이 주묘단의 중심에 매장되고, 다수 속·부묘단은 항렬의 대소 또는 昭穆제도에 따라 附葬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2001년 발굴한 7기 고분의 부장품은 총 283점으로 작은 장식품을 제외하면 평균 각 묘광에 3점이 부장되었으므로 厚葬은 아님. 전체 부장품 중 토기가 총73점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나 완형보다는 다수가 파편으로 출토되어 토기의 毁器習俗으로 짐작됨. 출토된 그릇은 모두 민무늬의 夾沙褐陶로 모양이 간단하고 종류가 단조롭고 제작 기술이 거칠어 원시성을 반영하며, 그 외 野猪牙飾, 綠松石管 등의 장식품은 모두 압록강 유역과 두만강 유역의 원시문화에서 일찍이 보여주는 전형적 기물임. 간구자 고분군의 무덤들은 하나의 기단 위에 여러 기의 고분이 배열되어 있는데, 특히 7호분은 1기의 원형석광적석묘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장방형의 작은 돌무덤이 방사상으로 배치되어 무덤 사이의 主次관계를 시사함. 즉 중심무덤의 피장자는 주위의 무덤에 비해 사회적 지위가 높은 편이나 반대의 무덤은 중심무덤에 예속된 상태로 추정됨. 반면에 1호분 및 4호분과 같은 단일한 원형석광무덤의 무덤배열 상태에서는 주종 관계가 전혀 보이지 않음. 한 墓區내의 여러 개 무덤은 그 크기와 모양이 같으며 또한 무덤 사이마다 돌로 서로 연결되어 한 무덤구역내의 피장자들 관계가 평등하였다는 것을 시사하며, 이는 혈연관계를 이루고 있는 가족 성원의 무덤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임. 부장품은 장식품이 많고 생산 공구 및 기타 그릇 류가 비교적 적은데, 이는 길림성 중부지구의 九台關馬山, 公主嶺猴石, 樺甸橫道河子 및 東豊, 遼源 일대 많은 大蓋石墓의 부장 특징과 서로 일치하며, 동북지구 남부에서는 戰國晩期~漢代 보편적으로 유행함. 상한연대는 2기 고분에서 方孔圓錢- 半兩錢과 一化으로 추정할 수 있음. 半兩錢은 秦末半兩 혹은 漢初의 八銖半兩이며, 一化는 ‘一刀’로 해석되며, 周秦 또는 秦初 시기의 화폐임. 赤峰 新窝堡와 鐵嶺 邱家台지역의 퇴장유적에서 이들 화폐가 燕·趙의 刀幣 및 반량전과 같이 출토되어 燕國晩期의 화폐로 확정되었으므로 묘지연대의 상한은 戰國末期, 비교적 이른 것은 戰國 中期에 해당됨. 하한연대는 AM1에서 출토된 鐵钁과 AM3·AM4 주묘단에서 채집된 鐵刀로 추정할 수 있는데, 钁은 漢代유행하는 것과 형태가 유사하며, 철도는 直柄環首로 일찍이 集安의 板岔嶺에서 동일한 것이 발굴된 바 있는데, 고구려 적석묘에서 대량 보이는 環首刀보다 조금 이름. 집안 판차령에서 “一化”圓錢이 “半兩”, “五銖”, “大泉五十”, 등의 한대화폐와 함께 출토되었고, 그 유통 시간은 전국말기~東漢임. 그러나 간구자묘지에서는 “오수” 및 동한화폐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고분의 하한은 대체로 동한이전의 서한시기로 비정됨. 간구자묘지의 연대가 집안, 환인 일대의 고구려 적석총보다 앞서므로, 고구려적석총의 가장 이른 형식인 無階段 圓丘上積石墓와 관련이 있을 것임. 고구려 초기의 적석묘의 발전과정을 보면, 무덤은 석광이 따로 없는 간단한 시설로부터 계단식 기단으로 이루어진 ‘框室(앞에서 박윤무의 1995년 글에 따라 ‘묘실’이라 정리하던 개념인데, 이 글에서 이 부분을 ‘框室’로 표현하고 있어 그대로 따랐음)’ 무덤으로 발전하고, ‘광실’은 장방형으로부터 정방형 형태로 변화·발전함. 묘광 위치에서도 위로부터 아래로 점차 내려옴. 이를 종합해 볼 때 간구자의 원형석광적석묘는 고구려 초기 적석총과 유사함. 첫째, 주검칸이 따로 없이 무덤의 기단 윗면을 자갈과 모래로 수평하게 마련하고 그 위에 주검과 부장품을 놓고 막돌로 덮어 정상부를 마무리 한 것은 이것은 환인 201호 및 19호분과 매우 흡사함. 둘째, 기단의 단수와 묘광 형태에서 차이가 있으나 한 무덤구역에 여러 기의 무덤을 연이어 마련한 점은 환인 23-33호분과 일치함. 셋째, 화장하여 묻는 습관이 환인 23호 및 20호분이나 15호분에서 확인되며, 집안 일대의 일부 적석총은 묘광벽이 불에 녹아 응결된 흔적으로 화장하였을 것으로 짐작됨. 따라서 간구자 무덤은 시기적으로 환인 적석총을 위주로 한 고구려 초기 무덤보다는 이르며 대체로 환인 적석총보다 선행된 고구려 早期의 무덤형식으로 고구려족계의 원시적 매장 특징이 짙게 반영됨. 또한 간구자 고분군은 여대지구 청동기 시대 무덤 및 청동단검고분의 특징을 내포하고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와 노철산 고분은 모두 여러 기의 무덤을 서로 가까이하여 ‘벌집형(蜂巢狀)’이며,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평면 형태는 원형으로 된 것도 있음. 이것은 간구자 1호분(M1)·2호분(M2)의 특징과 유사함. 강상묘는 하나의 무덤구역에 1기의 중심무덤을 마련하고 그 둘레를 돌면서 여러 기의 무덤을 방사선 형태로 마련하였는데, 이것은 간구자 7호분(M7)과 매우 유사함. 그리고 강상·누상묘 등 적지 않은 청동단검묘는 모두 화장한 무덤이라는 사실에서도 간구자 고분과 일치함.(『조선고고학개요』에서는 ‘노철산 및 장군산 고분→강상·누상묘→고구려 적석묘’라는 계승 발전관계를 설정하고 있고, 왕성생(1981, 「요하 유역 및 부근지역의 短鋌曲刃劍 연구」『요녕성고고박물관학회설립대회』회간)은 강상묘를 비롯한 요동문화유형의 무덤 형식과 매장습속이 환인 고구려 적석무덤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고구려 적석묘는 강상묘의 계승과 발전’이라고 보고 있음) 또한 여대지구 강상과 루상, 우가촌 타두 적석묘 등과 같은 집단묘로서, 家族合葬墓라는 점에서 공통됨. 반면 강상·누상 적석묘는 평지에 축조되었으며, 묘단은 없고, 묘광이 장방 혹은 방사상으로 분포하며, 중심 묘광의 4벽은 판석을 세워 만들었고, 우가촌 타두 적석묘 역시 묘광이 타원형 또는 부정형으로, 보통 평행을 이루는 가로배열로 분포하며 묘단을 만들지 않았음. 따라서 강상·루상과 우가촌 타두는 간구자 적석묘와는 축조 방법에서의 차이가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연대는 3230±90년B.P. 이고, 강상·누상묘는 기원전 1세기 전반기에 해당된 고조선 시기이며, 환인 지역 적석묘는 제15호분에서 環首式 철칼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東漢 시대로, 늦어도 漢·魏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음. 간구자 고분군의 상대적 축조연대는 대체로 전국시기로부터 서한 말기에 해당되므로, 간구자 고분군은 강상·누상묘에서 환인 적석묘로 발전해 나아가는 과정의 과도기 단계로서 고구려 선인들의 토착문화로 추정됨. 연접 방식은 3형식으로 나뉘는데, 제1형식은 속·부묘단이 주묘단을 둘러싸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지 않으며(AM3, AM4, BM5), 제2형식은 속·부묘단의 밖에 다시 제2속묘단이 외접하고, 제1형식이 주묘단만을 둘러싸지만, 제2형식은 연이어 속묘단이 함께 둘러싸고 하나의 부묘단이 기점이 되어 2개의 방향으로 나누어 펼쳐짐(BM2, BM4). 3형식 : 먼저 주묘단을 두르고 밖으로 다시 속묘단을 쌓고, 빈곳에 1, 2개의 부묘단을 세운 후 연속으로 서남방향에 속묘단을 설치한 후, 양쪽에 연속하여 부묘단을 대칭으로 축조함(AM1, AM2). 제1형식이 제2형식의 미완성형식이라면 비교적 이른 고분은 모두 먼저 주묘단을 쌓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였는데, 부·속묘단이 연접하는 방향은 서남쪽으로 접속하지만, 일정하지 않다가 비교적 늦은 고분에서 서남쪽으로 확장방향이 정형성을 띰. 속묘단은 중심선에 의해 대다수 서남방향으로 연접하며 부묘단은 양쪽으로 分列하는데, 대다수는 비교적 대칭적임. 연접 방식에 따른 배열법의 변천순서는 제1형식→제2형식→제3형식 순으로 변하고, 이런 양상은 고분군의 분포 양상과도 합치됨. A와 B구역을 보면, 산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가 이른데 비해, 강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는 비교적 늦음. 上→下의 배열과 발전과정은 환인과 집안 일대의 고구려적석총의 배열과 일치함.자연환경 간구자촌은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鎭 서쪽 0.5㎞ 지점에 위치하고, 고분은 干溝子村의 東·西干溝河 양안의 하곡 충적대지상에 분포함. 동쪽으로 長白縣城과 45㎞ 떨어져 있고, 동·서·북 3면이 高山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름. 압록강과 고분군 사이의 馬架子山을 기준으로 동쪽의 동간구하, 서쪽의 서간구하가 흐르는데, 서간구하는 동북에서 서남으로 흘러 고분군를 거쳐 압록강으로 흘러 감. 장백과 임강을 잇는 長臨도로가 동남에서 서북으로 뻗어 고분군을 양분하고, 고분군의 서·남 양쪽 산위에는 청동기시대 유적 분포함. 간구자 고분은 여러 차례 조사가 있었으나 1986년과 2001년 조사로 대별되는데, 특히 2001년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계기로 1986년 조사때보다 묘역이 크게 확대되었음. 앞서 고분 분포현황에서 언급하였듯이 2001년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묘역은 크게 A, B, C, D의 4구역으로 이루어졌는데 비해, 1986년 보고서에는 2001년 보고서의 A와 B 지역 일대를 파악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으므로 2001년 고분의 편호는 1986년 조사를 고려하지 않고 새로 편호하고 있기 때문에 양자의 개별 고분들을 직접 연결시켜 파악하기는 어려운 상황임. 때문에 개별고분의 상황을 두 시기로 나누어 정리하였음.유물정보 심발형토기 3점, 옥드리개 1점, 석제 호미 2점, 방추차 3점, 대롱 1점, 철제 괭이 1점, 흰색대롱 다수, 뼈드리개 1점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長白朝鮮族自治縣文物志』, 1986 · 朴潤武, 「長白縣干溝子墓地調査」『博物館研究』 1990-3, 1990 ·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 編, 『吉林省志』 45(民族志), 吉林人民出版社, 1991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朴潤武, 「압록강 유역 干溝子 적성무덤에 대한 조사연구」『中國境內 高句麗遺蹟 硏究』, 예하출판, 1995 · 王洪峰·孫仁傑·遲勇, 「吉林長白縣干溝子墓地發掘簡報」『考古』 2003-8, 2003 · 孫仁杰·遲勇·張殿甲, 「鴨綠江上流右岸考古調査」『東北史地』 2004-5, 2004

  • 리스트여닫기 간구자 AM2호분(干溝子 AM2號墳) 출토지 길림성 장백현 십사도구진 간구자촌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鎮 干溝子村)연대 상한: 戰國中期~末期, 하한: 西漢 상한 - B.C 4세기~B.C 3세기초, 하한 - 기원전후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2001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장백현문물보호관리소, 집안시박물관(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長白縣文物保護管理所, 集安市博物館)5월-7월 조사에서 1986년 편호와 달리 새로이 편호하는데 1986년 편호된 고분가운데 M15~M19의 5기 가운데 1기만 남아 있고, 1986년도에 편호되지 않은 고분 중 고분 형식을 판별할 수 있는 고분 고려하여 새로이 편호하였으며, 서간구하 북안의 A구 4기와 그 남안의 B구 3기를 발굴함.구조특징 주묘단 2기, 속묘단 5기, 부묘단 9기로 조성되어 있고, 중심부분 높이는 2.1m이며, 전체형태는 橢圓丘狀으로 중심축의 방향은 55°임. 고분은 일찍 파괴되었는데, 동쪽 주묘단 邊墻은 1/3이 파괴되었고, 남면의 부묘단 5기(FT5~FT9)도 기초부만 남아 있음. 주묘단(ZT1, ZT2)은 쌍주묘단으로 구조는 다른 고분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나 다만 묘광 아래 묘실이 없고, 묘단 아래에는 腰坑이 없음. 층위상 2호 주묘단(ZT2)이 먼저 만들어졌음. 주묘단은 동·서로 배열되어 있는데, 서로 1.2m 떨어져 있고 중간에 XT1이 연접되어 있음. ZT1은 원형으로 직경 6m, 높이 1.6m이고, 2개의 묘광이 있는데, ZK1과 ZK2가 서로 평행하고, 방향은 모두 140°임. 묘광(ZK1)은 타원형으로 길이 2.5m, 너비 0.85~1.2m, 깊이 0.2m이고, 묘광 둘레를 쌓은 돌은 비교적 적으며, 밑바닥의 강돌층은 0.08m 두께이며, 燒骨과 토기편 1점이 출토됨. 묘광(ZK2)는 말각장방형으로 길이 2.5m, 너비 0.6m, 깊이 0.15m이고, 밑바닥의 작은 강돌층 두께가 0.06m임. ZK1과 0.5m 떨어져 위치하고, 燒骨이 양쪽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토기 1점, 藍管 2점이 출토됨. ZT2는 타원형으로 길이 7m, 너비 6m이고, 둘레돌의 보존은 양호함. 높이 1.5~1.9m로 얇은 할석과 편평한 냇돌로 틈새를 메웠고, 서쪽은 가장 높은 곳은 14층을 쌓아 올렸으며, 가장자리는 弧線으로 정리함. 주묘단 주위에는 지탱석 52개가 세워져 있는데, 지탱석 사이의 거리는 0.3~0.5m이고, 지탱석은 장방형이거나 커다란 할석도 있음. 묘광은 3개이고 방향은 138°임. 묘광(ZK4)은 圓角長方形으로 길이 2.5, 너비 0.9m, 깊이 0.22m이고, 둘레는 비교적 큰 돌로 축조했으며, 밑바닥에 두께는 0.08m로 냇돌 깔음. 燒骨과 심발형토기 3건(深腹罐 CⅠ식, 淺腹罐 BaⅡ식)이 출토함. 묘광(ZK3)은 동쪽에 위치하는데 타원형으로 길이 2.3m 너비 0.85m, 깊이 0.2m이고 묘광벽은 작은 판석으로 축조했으며, 바닥은 0.1m 두께로 냇돌을 깔음. 많은 불탄 뼈조각들과 발 1건(淺腹罐 Cb식)이 부장됨. 묘광(ZK5)은 서쪽에 위치하고, 타원형으로 길이 2.4m, 너비 0.8m, 깊이 0.15m임. 묘광벽은 판석으로 축조했고, 묘광 바닥은 두께 0.06m로 냇돌을 깔음. 소량의 燒骨과 白管 24개 및 소량의 발편(淺腹罐 BaⅢ식)이 출토됨. 속묘단(XT1~XT5)은 모두 5기로 안쪽의 3기(XT1~XT3)는 모두 중심축선상에 축조되었고, 바깥쪽 2기(XT4~XT5)는 중심축에서 조금 벗어나 축조되었는데, 속묘단 묘광방향과 주묘단 묘광은 기본적으로 동일함. XT1은 동, 서 주묘단의 사이에 위치하고, 묘광(XK1)는 타원형으로 길이 2.5m, 너비 0.9m, 깊이 0.12m이고, 바닥의 강돌층 두께는 0.07m이며, 불탄 인골 조각·대롱(陶管), 발(淺腹罐 Bc식)과 방추차(紡輪) 각 1건·소량의 토기편이 출토됨. XT2는 반원형으로 직경 5.3m, 높이 1.6m이고, 둘레돌은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지탱석 사이 간격은 약 0.5m임. 묘광(XK2)은 타원형으로 할석으로 축조했고, 길이 2.2m, 너비 0.7m, 깊이 0.1m임. 밑바닥 강돌층 두께는 0.04m이고, 묘광에서 발 2건(淺腹罐 BaⅢ식 및 Bc식), 燒骨이 산재되어 있음. XT3은 반원형으로 직경 4.5m, 둘레돌 높이 1.45이고, 지탱석 8개가 세워져 있음. 묘광(XK3)은 타원형으로 길이 1.5m, 너비 0.7m, 밑바닥 강돌층 두께 0.06m임. 주변에는 1층의 塊石을 두었고, 燒骨을 비롯 흰색 대롱 4건과 토기편 1건이 출토됨. XT4는 타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길이 6m, 너비 약 4m인데, 북쪽 둘레돌은 이미 파괴되었으며, 남쪽 둘레돌도 기울어져 무너짐. XT4의 중간부의 묘광 바닥 냇돌 아래에서 꺽여 돌아가는 높이 약 0.5m 정도의 벽석을 발견했는데, 벽석은 비교적 커다란 할석으로 축조하여, XT4 기초 위에 쌓아 기초부를 견고하게 함. 묘광(XK4)은 불규칙한 할석으로 축조되었고 타원형으로 길이 1.8m, 너비 0.5m, 깊이 0.08m이며, 밑바닥에는 작은 돌을 0.05m 두께로 깔음. 묘광에서 흰색 대롱 5건, 토기편 1건, 燒骨이 출토함. XT5는 타원형으로 직경 7.3m이고, 둘레돌은 남아 있지 않으며 기초만 판별 가능함. 묘광(XK5)은 묘광벽이 남단만 잔존하고, 묘광 밑바닥의 작은 강돌은 타원형에 가까운 형태이며, 길이 2.5m, 너비 1m, 두께 0.06m임. 燒骨과 소량의 도편이 산재하고 있음. 부묘단(FT1~FT9)은 중심축선 양쪽으로 나누어 축조되었는데 대칭은 아님. 중심축선 북쪽에 부묘단 4기(FT1-FT4)가 축조되었고, 중심축선 남쪽에 부묘단 약 4기(FT5-FT8)가 축조되었으며, 주묘단에서 XT4 방향으로 차례대로 축조됨. FT1은 타원형으로 길이 2.4m, 너비 0.8m, 깊이 0.12m이고, 묘광 주변은 크기가 다른 괴석들로 축조하였고, 바닥의 두께는 0.05m의 작은 냇돌층이며, 대량의 燒骨, 동제 고리(銅環)(環 B식) 및 발 각 1건(淺腹罐 AⅡ식), 토기편 1건이 출토됨. FT2는 타원형으로 길이 2.2m, 너비 0.6m, 두께 0.04m이고, 보존상태는 양호하며, 묘광 바닥에 냇돌 깔았음. 묘광에서 소량의 燒骨과 토기편 1건이 출토함. FT3은 扇形으로 半徑 2.9m이고, 둘레 돌은 이미 붕괴되었음. 묘광(FK3)은 扇形으로 반경 약 1.2m이고 바닥의 작은 냇돌 두께는 0.05m임. 묘광 내 燒骨은 많지 않고 토기편 1건, “半兩”(A식-E식)과 “一化” 圓錢 등의 화폐가 총 30매 출토됨. FT4는 扇形으로 半徑 약 2.5m이며, 둘레 돌은 원래부터 없었고, XT4와 만나는 부분은 이미 파괴되었음. 묘광(FK4)는 둘레 의 훼손이 심하고, 바닥의 냇돌층만 잔존함. 타원형 평면이고 길이 2.1m, 너비 0.9m이며, 묘광 내 소량의 燒骨과 토기편이 출토됨. FT5는 반원형으로 직경 4.5m임. FT6 및 FT7는 크기 차이가 별로 없고 半徑 약 2m의 扇形이고, FT8는 면적이 매우 작으며, FT9는 扇形으로 반경은 약 2m임. 앞서의 부묘단과는 반대 방향으로 주묘단 ZT1을 둘러싸고 축조됨.역사적 의미 축조방식은 지면에 커다란 돌을 사용하여 일정 범위의 묘역을 조성한 후 냇돌과 할석을 깔아 평면하게 지면을 고르고 무덤의 기저부를 만든 후, 그 위에 단을 쌓아 몇 기의 무덤이 연접되도록 함. 매장방식은 무덤 밖에서 화장한 후 燒骨을 매장한 2차장하고, 대다수 묘광 내부에 불에 타거나 그을린 흔적이 없음. 불에 탄 인골편은 작은 조각으로 가장 큰 것이 길이 5㎝가 안되며, 대략 1/3의 소골은 회백색이며 나머지는 赭色(자색)과 흑색임. 다만 BM2ZK1에서 목탄편이 출토되었고, 1986년 조사된 간구자 1호분(M1)의 석광 안에는 주검칸이나 葬具를 따로 마련하지 않았고 불에 태워진 인골과 대량의 목탄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시신을 묘광 안에 놓고 화장했던 것으로 추정됨. 燒骨은 묘광 내 2, 3곳에 무더기로 안치되었으며, 토기는 묘광 양단에 나누어 부장한 점으로 미루어 一代 혹은 한 가정의 合葬 즉 동일가족 數代의 합장묘 유적일 것임. 따라서 신분 혹은 항렬이 비교적 높은 사람이 주묘단의 중심에 매장되고, 다수 속·부묘단은 항렬의 대소 또는 昭穆제도에 따라 附葬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2001년 발굴한 7기 고분의 부장품은 총 283점으로 작은 장식품을 제외하면 평균 각 묘광에 3점이 부장되었으므로 厚葬은 아님. 전체 부장품 중 토기가 총73점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나 완형보다는 다수가 파편으로 출토되어 토기의 毁器習俗으로 짐작됨. 출토된 그릇은 모두 민무늬의 夾沙褐陶로 모양이 간단하고 종류가 단조롭고 제작 기술이 거칠어 원시성을 반영하며, 그 외 野猪牙飾, 綠松石管 등의 장식품은 모두 압록강 유역과 두만강 유역의 원시문화에서 일찍이 보여주는 전형적 기물임. 간구자 고분군의 무덤들은 하나의 기단 위에 여러 기의 고분이 배열되어 있는데, 특히 7호분은 1기의 원형석광적석묘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장방형의 작은 돌무덤이 방사상으로 배치되어 무덤 사이의 主次관계를 시사함. 즉 중심무덤의 피장자는 주위의 무덤에 비해 사회적 지위가 높은 편이나 반대의 무덤은 중심무덤에 예속된 상태로 추정됨. 반면에 1호분 및 4호분과 같은 단일한 원형석광무덤의 무덤배열 상태에서는 주종 관계가 전혀 보이지 않음. 한 墓區내의 여러 개 무덤은 그 크기와 모양이 같으며 또한 무덤 사이마다 돌로 서로 연결되어 한 무덤구역내의 피장자들 관계가 평등하였다는 것을 시사하며, 이는 혈연관계를 이루고 있는 가족 성원의 무덤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임. 부장품은 장식품이 많고 생산 공구 및 기타 그릇 류가 비교적 적은데, 이는 길림성 중부지구의 九台關馬山, 公主嶺猴石, 樺甸橫道河子 및 東豊, 遼源 일대 많은 大蓋石墓의 부장 특징과 서로 일치하며, 동북지구 남부에서는 戰國晩期~漢代 보편적으로 유행함. 상한연대는 2기 고분에서 方孔圓錢- 半兩錢과 一化으로 추정할 수 있음. 半兩錢은 秦末半兩 혹은 漢初의 八銖半兩이며, 一化는 ‘一刀’로 해석되며, 周秦 또는 秦初 시기의 화폐임. 赤峰 新窝堡와 鐵嶺 邱家台지역의 퇴장유적에서 이들 화폐가 燕·趙의 刀幣 및 반량전과 같이 출토되어 燕國晩期의 화폐로 확정되었으므로 묘지연대의 상한은 戰國末期, 비교적 이른 것은 戰國 中期에 해당됨. 하한연대는 AM1에서 출토된 鐵钁과 AM3·AM4 주묘단에서 채집된 鐵刀로 추정할 수 있는데, 钁은 漢代유행하는 것과 형태가 유사하며, 철도는 直柄環首로 일찍이 集安의 板岔嶺에서 동일한 것이 발굴된 바 있는데, 고구려 적석묘에서 대량 보이는 環首刀보다 조금 이름. 집안 판차령에서 “一化”圓錢이 “半兩”, “五銖”, “大泉五十”, 등의 한대화폐와 함께 출토되었고, 그 유통 시간은 전국말기~東漢임. 그러나 간구자묘지에서는 “오수” 및 동한화폐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고분의 하한은 대체로 동한이전의 서한시기로 비정됨. 간구자묘지의 연대가 집안, 환인 일대의 고구려 적석총보다 앞서므로, 고구려적석총의 가장 이른 형식인 無階段 圓丘上積石墓와 관련이 있을 것임. 고구려 초기의 적석묘의 발전과정을 보면, 무덤은 석광이 따로 없는 간단한 시설로부터 계단식 기단으로 이루어진 ‘框室(앞에서 박윤무의 1995년 글에 따라 ‘묘실’이라 정리하던 개념인데, 이 글에서 이 부분을 ‘框室’로 표현하고 있어 그대로 따랐음)’ 무덤으로 발전하고, ‘광실’은 장방형으로부터 정방형 형태로 변화·발전함. 묘광 위치에서도 위로부터 아래로 점차 내려옴. 이를 종합해 볼 때 간구자의 원형석광적석묘는 고구려 초기 적석총과 유사함. 첫째, 주검칸이 따로 없이 무덤의 기단 윗면을 자갈과 모래로 수평하게 마련하고 그 위에 주검과 부장품을 놓고 막돌로 덮어 정상부를 마무리 한 것은 이것은 환인 201호 및 19호분과 매우 흡사함. 둘째, 기단의 단수와 묘광 형태에서 차이가 있으나 한 무덤구역에 여러 기의 무덤을 연이어 마련한 점은 환인 23-33호분과 일치함. 셋째, 화장하여 묻는 습관이 환인 23호 및 20호분이나 15호분에서 확인되며, 집안 일대의 일부 적석총은 묘광벽이 불에 녹아 응결된 흔적으로 화장하였을 것으로 짐작됨. 따라서 간구자 무덤은 시기적으로 환인 적석총을 위주로 한 고구려 초기 무덤보다는 이르며 대체로 환인 적석총보다 선행된 고구려 早期의 무덤형식으로 고구려족계의 원시적 매장 특징이 짙게 반영됨. 또한 간구자 고분군은 여대지구 청동기 시대 무덤 및 청동단검고분의 특징을 내포하고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와 노철산 고분은 모두 여러 기의 무덤을 서로 가까이하여 ‘벌집형(蜂巢狀)’이며,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평면 형태는 원형으로 된 것도 있음. 이것은 간구자 1호분(M1)·2호분(M2)의 특징과 유사함. 강상묘는 하나의 무덤구역에 1기의 중심무덤을 마련하고 그 둘레를 돌면서 여러 기의 무덤을 방사선 형태로 마련하였는데, 이것은 간구자 7호분(M7)과 매우 유사함. 그리고 강상·누상묘 등 적지 않은 청동단검묘는 모두 화장한 무덤이라는 사실에서도 간구자 고분과 일치함.(『조선고고학개요』에서는 ‘노철산 및 장군산 고분→강상·누상묘→고구려 적석묘’라는 계승 발전관계를 설정하고 있고, 왕성생(1981, 「요하 유역 및 부근지역의 短鋌曲刃劍 연구」『요녕성고고박물관학회설립대회』회간)은 강상묘를 비롯한 요동문화유형의 무덤 형식과 매장습속이 환인 고구려 적석무덤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고구려 적석묘는 강상묘의 계승과 발전’이라고 보고 있음) 또한 여대지구 강상과 루상, 우가촌 타두 적석묘 등과 같은 집단묘로서, 家族合葬墓라는 점에서 공통됨. 반면 강상·누상 적석묘는 평지에 축조되었으며, 묘단은 없고, 묘광이 장방 혹은 방사상으로 분포하며, 중심 묘광의 4벽은 판석을 세워 만들었고, 우가촌 타두 적석묘 역시 묘광이 타원형 또는 부정형으로, 보통 평행을 이루는 가로배열로 분포하며 묘단을 만들지 않았음. 따라서 강상·루상과 우가촌 타두는 간구자 적석묘와는 축조 방법에서의 차이가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연대는 3230±90년B.P. 이고, 강상·누상묘는 기원전 1세기 전반기에 해당된 고조선 시기이며, 환인 지역 적석묘는 제15호분에서 環首式 철칼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東漢 시대로, 늦어도 漢·魏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음. 간구자 고분군의 상대적 축조연대는 대체로 전국시기로부터 서한 말기에 해당되므로, 간구자 고분군은 강상·누상묘에서 환인 적석묘로 발전해 나아가는 과정의 과도기 단계로서 고구려 선인들의 토착문화로 추정됨. 연접 방식은 3형식으로 나뉘는데, 제1형식은 속·부묘단이 주묘단을 둘러싸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지 않으며(AM3, AM4, BM5), 제2형식은 속·부묘단의 밖에 다시 제2속묘단이 외접하고, 제1형식이 주묘단만을 둘러싸지만, 제2형식은 연이어 속묘단이 함께 둘러싸고 하나의 부묘단이 기점이 되어 2개의 방향으로 나누어 펼쳐짐(BM2, BM4). 3형식 : 먼저 주묘단을 두르고 밖으로 다시 속묘단을 쌓고, 빈곳에 1, 2개의 부묘단을 세운 후 연속으로 서남방향에 속묘단을 설치한 후, 양쪽에 연속하여 부묘단을 대칭으로 축조함(AM1, AM2). 제1형식이 제2형식의 미완성형식이라면 비교적 이른 고분은 모두 먼저 주묘단을 쌓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였는데, 부·속묘단이 연접하는 방향은 서남쪽으로 접속하지만, 일정하지 않다가 비교적 늦은 고분에서 서남쪽으로 확장방향이 정형성을 띰. 속묘단은 중심선에 의해 대다수 서남방향으로 연접하며 부묘단은 양쪽으로 分列하는데, 대다수는 비교적 대칭적임. 연접 방식에 따른 배열법의 변천순서는 제1형식→제2형식→제3형식 순으로 변하고, 이런 양상은 고분군의 분포 양상과도 합치됨. A와 B구역을 보면, 산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가 이른데 비해, 강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는 비교적 늦음. 上→下의 배열과 발전과정은 환인과 집안 일대의 고구려적석총의 배열과 일치함.자연환경 AM2호분은 AM1과 AM3의 사이에 위치함. 간구자촌은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鎭 서쪽 0.5㎞ 지점에 위치하고, 고분은 干溝子村의 東·西干溝河 양안의 하곡 충적대지상에 분포함. 동쪽으로 長白縣城과 45㎞ 떨어져 있고, 동·서·북 3면이 高山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름. 압록강과 고분군 사이의 馬架子山을 기준으로 동쪽의 동간구하, 서쪽의 서간구하가 흐르는데, 서간구하는 동북에서 서남으로 흘러 고분군를 거쳐 압록강으로 흘러 감. 장백과 임강을 잇는 長臨도로가 동남에서 서북으로 뻗어 고분군을 양분하고, 고분군의 서·남 양쪽 산위에는 청동기시대 유적 분포함. 간구자 고분은 여러 차례 조사가 있었으나 1986년과 2001년 조사로 대별되는데, 특히 2001년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계기로 1986년 조사때보다 묘역이 크게 확대되었음. 앞서 고분 분포현황에서 언급하였듯이 2001년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묘역은 크게 A, B, C, D의 4구역으로 이루어졌는데 비해, 1986년 보고서에는 2001년 보고서의 A와 B 지역 일대를 파악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으므로 2001년 고분의 편호는 1986년 조사를 고려하지 않고 새로 편호하고 있기 때문에 양자의 개별 고분들을 직접 연결시켜 파악하기는 어려운 상황임. 때문에 개별고분의 상황을 두 시기로 나누어 정리하였음.유물정보 심발형토기 1점, 발 6점, 옥구슬 1점, 고리 1점, 반량전 18점, 일화전, 흰색대롱, 남색대롱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長白朝鮮族自治縣文物志』, 1986 · 朴潤武, 「長白縣干溝子墓地調査」『博物館研究』 1990-3, 1990 ·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 編, 『吉林省志』 45(民族志), 吉林人民出版社, 1991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朴潤武, 「압록강 유역 干溝子 적성무덤에 대한 조사연구」『中國境內 高句麗遺蹟 硏究』, 예하출판, 1995 · 王洪峰·孫仁傑·遲勇, 「吉林長白縣干溝子墓地發掘簡報」『考古』 2003-8, 2003 · 孫仁杰·遲勇·張殿甲, 「鴨綠江上流右岸考古調査」『東北史地』 2004-5, 2004

  • 리스트여닫기 간구자 AM3호분(干溝子 AM3號墳) 출토지 길림성 장백현 십사도구진 간구자촌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鎮 干溝子村)연대 상한: 戰國中期~末期, 하한: 西漢 상한 - B.C 4세기~B.C 3세기초, 하한 - 기원전후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2001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장백현문물보호관리소, 집안시박물관(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長白縣文物保護管理所, 集安市博物館)5월-7월 조사에서 1986년 편호와 달리 새로이 편호하는데 1986년 편호된 고분가운데 M15~M19의 5기 가운데 1기만 남아 있고, 1986년도에 편호되지 않은 고분 중 고분 형식을 판별할 수 있는 고분 고려하여 새로이 편호하였으며, 서간구하 북안의 A구 4기와 그 남안의 B구 3기를 발굴함.구조특징 외관은 圓丘狀으로 직경 13.5m, 높이 1.4m이고, 주묘단 1기, 부묘단 3기로 조성되어 있음. 주묘단(ZT)은 타원형으로 길이 11m, 너비 9.5m, 높이 1.3m이고, 남반부 둘레돌은 보존이 비교적 양호하며, 높이 0.8m임. 북반부분은 훼손되었는데, 지탱석 대부분이 기울어져 무너지고 있고, 기초부만 잔존함. 주묘단의 돌 무지 위에서 토기(陶罐), 철제 칼(鐵刀)(Ⅱ식), 어망추(網墜) 등이 출토됨. 주묘단의 묘광은 5기로, 묘광 ZK2~ZK5는 ZK1의 사방에 대칭으로 분포함. 묘광(ZK1)은 묘단의 중심에 위치하고, 근장방형으로 길이 2.7m, 너비 1m, 깊이 0.45m, 40°방향임. 묘광의 네 벽은 편형한 냇돌로 축조후 깨진 돌로 0.1m두께로 봉했고, 바닥은 두께 0.06~0.1m의 작은 냇돌을 깔았으며, 두 덩어리의 불에 탄 인골 조각들, 토기(陶罐) 1건이 출토됨. 묘광(ZK2)은 불규칙 타원형으로 길이 1.7m, 너비 0.3~0.6m, 깊이 0.06m이고, 바닥에 깔린 작은 냇돌층 두께는 0.03~0.06m임. 燒骨 조각, 심발형토기 1건(深腹罐 BⅡ식)이 출토함. 묘광(ZK3)은 타원형으로 길이 1.9m, 너비 0.45~0.8m, 깊이 0.2m이고 바닥의 작은 냇돌층은 두께 0.05m이며, 燒骨 덩이, 한쌍의 옥장식(玉飾), 발 2건(淺腹罐 BaⅡ식 및 Ca식)이 출토함. 묘광(ZK4)는 타원형, 길이 0.9m, 너비 0.55m, 깊이 0.3m이고, 바닥에 깔린 작은 냇돌층 두께는 0.05m임. 묘광에는 뼈조각, 동제 고리(銅環) 1건(環 B식), 철제 칼(鐵刀) 잔편 1건(Ⅰ식)이 출토됨. 묘광(ZK5)은 타원형으로 길이 1.8m, 너비 0.6m, 깊이 0.25m이고, 바닥에 깔린 작은 냇돌층 두께는 0.05m임. 묘광에는 碎骨이 있었으나 부장품은 보이지 않음. 부묘단(FT1~FT3)은 총 3기로 모두 주묘단를 둘러싸고 시계반대방향으로 축조되어 있음. FT1은 주묘단의 남쪽에 위치하고, 타원형으로 직경 6m이고, 묘단은 대부분 이미 파괴되었으며, 주묘단 부근에 높이 0.3m의 둘레돌 지탱석 일부분이 남아 있는 상태임. 묘광(FK1)은 타원형으로 길이 2.3m, 너비 0,8m, 깊이 0.2m이고, 바닥에 깔린 작은 냇돌층 두께는 0.4m임. 燒骨, 발 1건(淺腹罐 BaⅢ식)이 출토됨. FT2는 扇形으로 반경 약 4m이고, 가장자리는 비교적 정리되어 있음. 주묘단에서 가까운 곳에 타원형 묘광 FK2가 있는데 길이 2m, 너비 1m, 깊이 0.15m이고, 바닥에는 두께 0.05미터의 작은 강돌이 깔려 있음. 腿骨·頭骨·牙齒 등을 포함한 燒骨, 동제 귀걸이(銅耳飾)(環 A식)와 玉珠 각 한쌍씩 출토됨. FT3은 훼손이 비교적 심하고, 외관은 이미 훼손되었음. 기초만 남아 있으며, 기초부의 직경은 약 6m임. 묘광(FK3)은 부정형으로 한 면만을 쌓아 올려 묘광벽을 축조하였고, 길이 2.7m, 너비 0.6~0.9m, 깊이 0.1m이며, 바닥에는 작은 강돌을 깔음. 인골과 부장품이 없음.역사적 의미 축조방식은 지면에 커다란 돌을 사용하여 일정 범위의 묘역을 조성한 후 냇돌과 할석을 깔아 평면하게 지면을 고르고 무덤의 기저부를 만든 후, 그 위에 단을 쌓아 몇 기의 무덤이 연접되도록 함. 매장방식은 무덤 밖에서 화장한 후 燒骨을 매장한 2차장하고, 대다수 묘광 내부에 불에 타거나 그을린 흔적이 없음. 불에 탄 인골편은 작은 조각으로 가장 큰 것이 길이 5㎝가 안되며, 대략 1/3의 소골은 회백색이며 나머지는 赭色(자색)과 흑색임. 다만 BM2ZK1에서 목탄편이 출토되었고, 1986년 조사된 간구자 1호분(M1)의 석광 안에는 주검칸이나 葬具를 따로 마련하지 않았고 불에 태워진 인골과 대량의 목탄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시신을 묘광 안에 놓고 화장했던 것으로 추정됨. 燒骨은 묘광 내 2, 3곳에 무더기로 안치되었으며, 토기는 묘광 양단에 나누어 부장한 점으로 미루어 一代 혹은 한 가정의 合葬 즉 동일가족 數代의 합장묘 유적일 것임. 따라서 신분 혹은 항렬이 비교적 높은 사람이 주묘단의 중심에 매장되고, 다수 속·부묘단은 항렬의 대소 또는 昭穆제도에 따라 附葬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2001년 발굴한 7기 고분의 부장품은 총 283점으로 작은 장식품을 제외하면 평균 각 묘광에 3점이 부장되었으므로 厚葬은 아님. 전체 부장품 중 토기가 총73점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나 완형보다는 다수가 파편으로 출토되어 토기의 毁器習俗으로 짐작됨. 출토된 그릇은 모두 민무늬의 夾沙褐陶로 모양이 간단하고 종류가 단조롭고 제작 기술이 거칠어 원시성을 반영하며, 그 외 野猪牙飾, 綠松石管 등의 장식품은 모두 압록강 유역과 두만강 유역의 원시문화에서 일찍이 보여주는 전형적 기물임. 간구자 고분군의 무덤들은 하나의 기단 위에 여러 기의 고분이 배열되어 있는데, 특히 7호분은 1기의 원형석광적석묘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장방형의 작은 돌무덤이 방사상으로 배치되어 무덤 사이의 主次관계를 시사함. 즉 중심무덤의 피장자는 주위의 무덤에 비해 사회적 지위가 높은 편이나 반대의 무덤은 중심무덤에 예속된 상태로 추정됨. 반면에 1호분 및 4호분과 같은 단일한 원형석광무덤의 무덤배열 상태에서는 주종 관계가 전혀 보이지 않음. 한 墓區내의 여러 개 무덤은 그 크기와 모양이 같으며 또한 무덤 사이마다 돌로 서로 연결되어 한 무덤구역내의 피장자들 관계가 평등하였다는 것을 시사하며, 이는 혈연관계를 이루고 있는 가족 성원의 무덤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임. 부장품은 장식품이 많고 생산 공구 및 기타 그릇 류가 비교적 적은데, 이는 길림성 중부지구의 九台關馬山, 公主嶺猴石, 樺甸橫道河子 및 東豊, 遼源 일대 많은 大蓋石墓의 부장 특징과 서로 일치하며, 동북지구 남부에서는 戰國晩期~漢代 보편적으로 유행함. 상한연대는 2기 고분에서 方孔圓錢- 半兩錢과 一化으로 추정할 수 있음. 半兩錢은 秦末半兩 혹은 漢初의 八銖半兩이며, 一化는 ‘一刀’로 해석되며, 周秦 또는 秦初 시기의 화폐임. 赤峰 新窝堡와 鐵嶺 邱家台지역의 퇴장유적에서 이들 화폐가 燕·趙의 刀幣 및 반량전과 같이 출토되어 燕國晩期의 화폐로 확정되었으므로 묘지연대의 상한은 戰國末期, 비교적 이른 것은 戰國 中期에 해당됨. 하한연대는 AM1에서 출토된 鐵钁과 AM3·AM4 주묘단에서 채집된 鐵刀로 추정할 수 있는데, 钁은 漢代유행하는 것과 형태가 유사하며, 철도는 直柄環首로 일찍이 集安의 板岔嶺에서 동일한 것이 발굴된 바 있는데, 고구려 적석묘에서 대량 보이는 環首刀보다 조금 이름. 집안 판차령에서 “一化”圓錢이 “半兩”, “五銖”, “大泉五十”, 등의 한대화폐와 함께 출토되었고, 그 유통 시간은 전국말기~東漢임. 그러나 간구자묘지에서는 “오수” 및 동한화폐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고분의 하한은 대체로 동한이전의 서한시기로 비정됨. 간구자묘지의 연대가 집안, 환인 일대의 고구려 적석총보다 앞서므로, 고구려적석총의 가장 이른 형식인 無階段 圓丘上積石墓와 관련이 있을 것임. 고구려 초기의 적석묘의 발전과정을 보면, 무덤은 석광이 따로 없는 간단한 시설로부터 계단식 기단으로 이루어진 ‘框室(앞에서 박윤무의 1995년 글에 따라 ‘묘실’이라 정리하던 개념인데, 이 글에서 이 부분을 ‘框室’로 표현하고 있어 그대로 따랐음)’ 무덤으로 발전하고, ‘광실’은 장방형으로부터 정방형 형태로 변화·발전함. 묘광 위치에서도 위로부터 아래로 점차 내려옴. 이를 종합해 볼 때 간구자의 원형석광적석묘는 고구려 초기 적석총과 유사함. 첫째, 주검칸이 따로 없이 무덤의 기단 윗면을 자갈과 모래로 수평하게 마련하고 그 위에 주검과 부장품을 놓고 막돌로 덮어 정상부를 마무리 한 것은 이것은 환인 201호 및 19호분과 매우 흡사함. 둘째, 기단의 단수와 묘광 형태에서 차이가 있으나 한 무덤구역에 여러 기의 무덤을 연이어 마련한 점은 환인 23-33호분과 일치함. 셋째, 화장하여 묻는 습관이 환인 23호 및 20호분이나 15호분에서 확인되며, 집안 일대의 일부 적석총은 묘광벽이 불에 녹아 응결된 흔적으로 화장하였을 것으로 짐작됨. 따라서 간구자 무덤은 시기적으로 환인 적석총을 위주로 한 고구려 초기 무덤보다는 이르며 대체로 환인 적석총보다 선행된 고구려 早期의 무덤형식으로 고구려족계의 원시적 매장 특징이 짙게 반영됨. 또한 간구자 고분군은 여대지구 청동기 시대 무덤 및 청동단검고분의 특징을 내포하고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와 노철산 고분은 모두 여러 기의 무덤을 서로 가까이하여 ‘벌집형(蜂巢狀)’이며,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평면 형태는 원형으로 된 것도 있음. 이것은 간구자 1호분(M1)·2호분(M2)의 특징과 유사함. 강상묘는 하나의 무덤구역에 1기의 중심무덤을 마련하고 그 둘레를 돌면서 여러 기의 무덤을 방사선 형태로 마련하였는데, 이것은 간구자 7호분(M7)과 매우 유사함. 그리고 강상·누상묘 등 적지 않은 청동단검묘는 모두 화장한 무덤이라는 사실에서도 간구자 고분과 일치함.(『조선고고학개요』에서는 ‘노철산 및 장군산 고분→강상·누상묘→고구려 적석묘’라는 계승 발전관계를 설정하고 있고, 왕성생(1981, 「요하 유역 및 부근지역의 短鋌曲刃劍 연구」『요녕성고고박물관학회설립대회』회간)은 강상묘를 비롯한 요동문화유형의 무덤 형식과 매장습속이 환인 고구려 적석무덤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고구려 적석묘는 강상묘의 계승과 발전’이라고 보고 있음) 또한 여대지구 강상과 루상, 우가촌 타두 적석묘 등과 같은 집단묘로서, 家族合葬墓라는 점에서 공통됨. 반면 강상·누상 적석묘는 평지에 축조되었으며, 묘단은 없고, 묘광이 장방 혹은 방사상으로 분포하며, 중심 묘광의 4벽은 판석을 세워 만들었고, 우가촌 타두 적석묘 역시 묘광이 타원형 또는 부정형으로, 보통 평행을 이루는 가로배열로 분포하며 묘단을 만들지 않았음. 따라서 강상·루상과 우가촌 타두는 간구자 적석묘와는 축조 방법에서의 차이가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연대는 3230±90년B.P. 이고, 강상·누상묘는 기원전 1세기 전반기에 해당된 고조선 시기이며, 환인 지역 적석묘는 제15호분에서 環首式 철칼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東漢 시대로, 늦어도 漢·魏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음. 간구자 고분군의 상대적 축조연대는 대체로 전국시기로부터 서한 말기에 해당되므로, 간구자 고분군은 강상·누상묘에서 환인 적석묘로 발전해 나아가는 과정의 과도기 단계로서 고구려 선인들의 토착문화로 추정됨. 연접 방식은 3형식으로 나뉘는데, 제1형식은 속·부묘단이 주묘단을 둘러싸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지 않으며(AM3, AM4, BM5), 제2형식은 속·부묘단의 밖에 다시 제2속묘단이 외접하고, 제1형식이 주묘단만을 둘러싸지만, 제2형식은 연이어 속묘단이 함께 둘러싸고 하나의 부묘단이 기점이 되어 2개의 방향으로 나누어 펼쳐짐(BM2, BM4). 3형식 : 먼저 주묘단을 두르고 밖으로 다시 속묘단을 쌓고, 빈곳에 1, 2개의 부묘단을 세운 후 연속으로 서남방향에 속묘단을 설치한 후, 양쪽에 연속하여 부묘단을 대칭으로 축조함(AM1, AM2). 제1형식이 제2형식의 미완성형식이라면 비교적 이른 고분은 모두 먼저 주묘단을 쌓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였는데, 부·속묘단이 연접하는 방향은 서남쪽으로 접속하지만, 일정하지 않다가 비교적 늦은 고분에서 서남쪽으로 확장방향이 정형성을 띰. 속묘단은 중심선에 의해 대다수 서남방향으로 연접하며 부묘단은 양쪽으로 分列하는데, 대다수는 비교적 대칭적임. 연접 방식에 따른 배열법의 변천순서는 제1형식→제2형식→제3형식 순으로 변하고, 이런 양상은 고분군의 분포 양상과도 합치됨. A와 B구역을 보면, 산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가 이른데 비해, 강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는 비교적 늦음. 上→下의 배열과 발전과정은 환인과 집안 일대의 고구려적석총의 배열과 일치함.자연환경 AM3호분은 AM2의 서북에 위치함. 간구자촌은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鎭 서쪽 0.5㎞ 지점에 위치하고, 고분은 干溝子村의 東·西干溝河 양안의 하곡 충적대지상에 분포함. 동쪽으로 長白縣城과 45㎞ 떨어져 있고, 동·서·북 3면이 高山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름. 압록강과 고분군 사이의 馬架子山을 기준으로 동쪽의 동간구하, 서쪽의 서간구하가 흐르는데, 서간구하는 동북에서 서남으로 흘러 고분군를 거쳐 압록강으로 흘러 감. 장백과 임강을 잇는 長臨도로가 동남에서 서북으로 뻗어 고분군을 양분하고, 고분군의 서·남 양쪽 산위에는 청동기시대 유적 분포함. 간구자 고분은 여러 차례 조사가 있었으나 1986년과 2001년 조사로 대별되는데, 특히 2001년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계기로 1986년 조사때보다 묘역이 크게 확대되었음. 앞서 고분 분포현황에서 언급하였듯이 2001년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묘역은 크게 A, B, C, D의 4구역으로 이루어졌는데 비해, 1986년 보고서에는 2001년 보고서의 A와 B 지역 일대를 파악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으므로 2001년 고분의 편호는 1986년 조사를 고려하지 않고 새로 편호하고 있기 때문에 양자의 개별 고분들을 직접 연결시켜 파악하기는 어려운 상황임. 때문에 개별고분의 상황을 두 시기로 나누어 정리하였음.유물정보 심발형토기 1점, 발 3점, 옥구슬 2점, 옥드리개 2점, 고리 2점, 철제칼 2점, 흰색대롱 다수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長白朝鮮族自治縣文物志』, 1986 · 朴潤武, 「長白縣干溝子墓地調査」『博物館研究』 1990-3, 1990 ·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 編, 『吉林省志』 45(民族志), 吉林人民出版社, 1991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朴潤武, 「압록강 유역 干溝子 적성무덤에 대한 조사연구」『中國境內 高句麗遺蹟 硏究』, 예하출판, 1995 · 王洪峰·孫仁傑·遲勇, 「吉林長白縣干溝子墓地發掘簡報」『考古』 2003-8, 2003 · 孫仁杰·遲勇·張殿甲, 「鴨綠江上流右岸考古調査」『東北史地』 2004-5, 2004

  • 리스트여닫기 간구자 AM4호분(干溝子 AM4號墳) 출토지 길림성 장백현 십사도구진 간구자촌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鎮 干溝子村)연대 상한: 戰國中期~末期, 하한: 西漢 상한 - B.C 4세기~B.C 3세기초, 하한 - 기원전후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2001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장백현문물보호관리소, 집안시박물관(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長白縣文物保護管理所, 集安市博物館)5월-7월 조사에서 1986년 편호와 달리 새로이 편호하는데 1986년 편호된 고분가운데 M15~M19의 5기 가운데 1기만 남아 있고, 1986년도에 편호되지 않은 고분 중 고분 형식을 판별할 수 있는 고분 고려하여 새로이 편호하였으며, 서간구하 북안의 A구 4기와 그 남안의 B구 3기를 발굴함.구조특징 외형은 圓丘狀으로 주묘단 1기, 부묘단 4기가 조성되어 있고, 부묘단은 접속순서가 AM3와 동일함. 주묘단(ZT)은 타원형으로 남북 길이 8m, 동서 너비 7.5m이고, 북쪽 둘레돌이 기울어지고 지탱석이 쓰러져 있을 뿐, 그 외는 보존이 양호함. 서북에 가까운 가장자리의 봉석 위에서 철제 칼(鐵刀) 1건(Ⅱ식)을 채집했음. 묘단은 기초부 위로 11~13층을 쌓았고, 높이가 1.25m이며 정상부는 비교적 가지런하며, 주변에는 크기와 서로 간이 거리가 다른 장대석을 한 줄 세워 둠. 묘광 3개(ZK1~ZK3)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평행하게 배열되어 축조되어 있는데, 서로간 거리는 1.2m임. 묘광(ZK1)은 근장방형으로 장축 동서방향이고 길이 3.5m, 너비 1.1m, 깊이 0.15m임. 묘광벽은 2~4층의 석괴로 축조했고, 바닥에 작은 냇돌 두께 0.08m로 깔았으며, 인골잔편, 대롱(料管) 10건, 토기편 1건이 출토됨. 묘광(ZK2)는 불규칙 타원형으로 길이 2.6m, 너비 0.6m, 깊이 0.12m이고, 바닥에 깔은 작은 강돌의 두께는 0.05m이며, 燒骨, 토기편 1건이 출토됨. 묘광(ZK3)은 남쪽에 위치하고, 말각장방형으로 길이 2.2m, 너비 0.5m, 깊이 0.1m이고, 바닥에 깔은 작은 강돌의 두께 0.07m이며, 燒骨, 백색 대롱(白管) 10건, 토기 1건이 출토됨. 부묘단(FT1~FT4)은 총 4기임. FT1는 서쪽에 위치하고, 반원형으로 직경 6.2m, 높이 0.6m임, FK1은 반원형으로 길이 1.7m, 너비 1m, 깊이 0.08m이고, 바닥에 깔린 강돌 두께는 0.03m이며, 소량의 燒骨과 사질갈색토기(夾砂褐陶器) 1건이 출토됨. FT2는 반원형으로 직경 6m, 높이 0.7m이고, 東半部 둘레돌은 비교적 양호함. FK2는 말각장방형으로 길이 2.3m, 너비 1m이고, 바닥 깔린 자갈층 두께는 0.06m임. 묘광 벽은 괴석 한매만 남아 있으며, 묘광 내에서 燒骨 및 흰색 대롱 6건이 출토됨. FT3은 반원형으로 직경 6.7m이고, 둘레 돌의 붕괴가 심함. FK3은 타원형으로 길이 2.5m, 너비 0.6m, 깊이 0.15m이고, 바닥에 깔은 강돌 두께는 0.08m임. 묘광벽은 3층으로 판상석으로 쌓았고, 燒骨덩이가 0.5m 간격으로 잔존하며, 남쪽에 치우친 燒骨 더미 부근에서 남색 대롱(藍管) 2건이 함께 출토됨. FT4는 타원형으로 길이6m, 너비 2.5m, 높이 0.6m임. 묘광(FK4)은 타원형으로 길이 2.7m, 너비 0.8m, 깊이 0.1m이고, 바닥 강돌층의 두께는 0.1m임. 묘광벽은 3층으로 판상석으로 쌓았고, 비교적 많은 燒骨, 흰색 대롱 7건, 토기편 3건이 출토됨.역사적 의미 축조방식은 지면에 커다란 돌을 사용하여 일정 범위의 묘역을 조성한 후 냇돌과 할석을 깔아 평면하게 지면을 고르고 무덤의 기저부를 만든 후, 그 위에 단을 쌓아 몇 기의 무덤이 연접되도록 함. 매장방식은 무덤 밖에서 화장한 후 燒骨을 매장한 2차장하고, 대다수 묘광 내부에 불에 타거나 그을린 흔적이 없음. 불에 탄 인골편은 작은 조각으로 가장 큰 것이 길이 5㎝가 안되며, 대략 1/3의 소골은 회백색이며 나머지는 赭色(자색)과 흑색임. 다만 BM2ZK1에서 목탄편이 출토되었고, 1986년 조사된 간구자 1호분(M1)의 석광 안에는 주검칸이나 葬具를 따로 마련하지 않았고 불에 태워진 인골과 대량의 목탄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시신을 묘광 안에 놓고 화장했던 것으로 추정됨. 燒骨은 묘광 내 2, 3곳에 무더기로 안치되었으며, 토기는 묘광 양단에 나누어 부장한 점으로 미루어 一代 혹은 한 가정의 合葬 즉 동일가족 數代의 합장묘 유적일 것임. 따라서 신분 혹은 항렬이 비교적 높은 사람이 주묘단의 중심에 매장되고, 다수 속·부묘단은 항렬의 대소 또는 昭穆제도에 따라 附葬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2001년 발굴한 7기 고분의 부장품은 총 283점으로 작은 장식품을 제외하면 평균 각 묘광에 3점이 부장되었으므로 厚葬은 아님. 전체 부장품 중 토기가 총73점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나 완형보다는 다수가 파편으로 출토되어 토기의 毁器習俗으로 짐작됨. 출토된 그릇은 모두 민무늬의 夾沙褐陶로 모양이 간단하고 종류가 단조롭고 제작 기술이 거칠어 원시성을 반영하며, 그 외 野猪牙飾, 綠松石管 등의 장식품은 모두 압록강 유역과 두만강 유역의 원시문화에서 일찍이 보여주는 전형적 기물임. 간구자 고분군의 무덤들은 하나의 기단 위에 여러 기의 고분이 배열되어 있는데, 특히 7호분은 1기의 원형석광적석묘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장방형의 작은 돌무덤이 방사상으로 배치되어 무덤 사이의 主次관계를 시사함. 즉 중심무덤의 피장자는 주위의 무덤에 비해 사회적 지위가 높은 편이나 반대의 무덤은 중심무덤에 예속된 상태로 추정됨. 반면에 1호분 및 4호분과 같은 단일한 원형석광무덤의 무덤배열 상태에서는 주종 관계가 전혀 보이지 않음. 한 墓區내의 여러 개 무덤은 그 크기와 모양이 같으며 또한 무덤 사이마다 돌로 서로 연결되어 한 무덤구역내의 피장자들 관계가 평등하였다는 것을 시사하며, 이는 혈연관계를 이루고 있는 가족 성원의 무덤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임. 부장품은 장식품이 많고 생산 공구 및 기타 그릇 류가 비교적 적은데, 이는 길림성 중부지구의 九台關馬山, 公主嶺猴石, 樺甸橫道河子 및 東豊, 遼源 일대 많은 大蓋石墓의 부장 특징과 서로 일치하며, 동북지구 남부에서는 戰國晩期~漢代 보편적으로 유행함. 상한연대는 2기 고분에서 方孔圓錢- 半兩錢과 一化으로 추정할 수 있음. 半兩錢은 秦末半兩 혹은 漢初의 八銖半兩이며, 一化는 ‘一刀’로 해석되며, 周秦 또는 秦初 시기의 화폐임. 赤峰 新窝堡와 鐵嶺 邱家台지역의 퇴장유적에서 이들 화폐가 燕·趙의 刀幣 및 반량전과 같이 출토되어 燕國晩期의 화폐로 확정되었으므로 묘지연대의 상한은 戰國末期, 비교적 이른 것은 戰國 中期에 해당됨. 하한연대는 AM1에서 출토된 鐵钁과 AM3·AM4 주묘단에서 채집된 鐵刀로 추정할 수 있는데, 钁은 漢代유행하는 것과 형태가 유사하며, 철도는 直柄環首로 일찍이 集安의 板岔嶺에서 동일한 것이 발굴된 바 있는데, 고구려 적석묘에서 대량 보이는 環首刀보다 조금 이름. 집안 판차령에서 “一化”圓錢이 “半兩”, “五銖”, “大泉五十”, 등의 한대화폐와 함께 출토되었고, 그 유통 시간은 전국말기~東漢임. 그러나 간구자묘지에서는 “오수” 및 동한화폐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고분의 하한은 대체로 동한이전의 서한시기로 비정됨. 간구자묘지의 연대가 집안, 환인 일대의 고구려 적석총보다 앞서므로, 고구려적석총의 가장 이른 형식인 無階段 圓丘上積石墓와 관련이 있을 것임. 고구려 초기의 적석묘의 발전과정을 보면, 무덤은 석광이 따로 없는 간단한 시설로부터 계단식 기단으로 이루어진 ‘框室(앞에서 박윤무의 1995년 글에 따라 ‘묘실’이라 정리하던 개념인데, 이 글에서 이 부분을 ‘框室’로 표현하고 있어 그대로 따랐음)’ 무덤으로 발전하고, ‘광실’은 장방형으로부터 정방형 형태로 변화·발전함. 묘광 위치에서도 위로부터 아래로 점차 내려옴. 이를 종합해 볼 때 간구자의 원형석광적석묘는 고구려 초기 적석총과 유사함. 첫째, 주검칸이 따로 없이 무덤의 기단 윗면을 자갈과 모래로 수평하게 마련하고 그 위에 주검과 부장품을 놓고 막돌로 덮어 정상부를 마무리 한 것은 이것은 환인 201호 및 19호분과 매우 흡사함. 둘째, 기단의 단수와 묘광 형태에서 차이가 있으나 한 무덤구역에 여러 기의 무덤을 연이어 마련한 점은 환인 23-33호분과 일치함. 셋째, 화장하여 묻는 습관이 환인 23호 및 20호분이나 15호분에서 확인되며, 집안 일대의 일부 적석총은 묘광벽이 불에 녹아 응결된 흔적으로 화장하였을 것으로 짐작됨. 따라서 간구자 무덤은 시기적으로 환인 적석총을 위주로 한 고구려 초기 무덤보다는 이르며 대체로 환인 적석총보다 선행된 고구려 早期의 무덤형식으로 고구려족계의 원시적 매장 특징이 짙게 반영됨. 또한 간구자 고분군은 여대지구 청동기 시대 무덤 및 청동단검고분의 특징을 내포하고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와 노철산 고분은 모두 여러 기의 무덤을 서로 가까이하여 ‘벌집형(蜂巢狀)’이며,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평면 형태는 원형으로 된 것도 있음. 이것은 간구자 1호분(M1)·2호분(M2)의 특징과 유사함. 강상묘는 하나의 무덤구역에 1기의 중심무덤을 마련하고 그 둘레를 돌면서 여러 기의 무덤을 방사선 형태로 마련하였는데, 이것은 간구자 7호분(M7)과 매우 유사함. 그리고 강상·누상묘 등 적지 않은 청동단검묘는 모두 화장한 무덤이라는 사실에서도 간구자 고분과 일치함.(『조선고고학개요』에서는 ‘노철산 및 장군산 고분→강상·누상묘→고구려 적석묘’라는 계승 발전관계를 설정하고 있고, 왕성생(1981, 「요하 유역 및 부근지역의 短鋌曲刃劍 연구」『요녕성고고박물관학회설립대회』회간)은 강상묘를 비롯한 요동문화유형의 무덤 형식과 매장습속이 환인 고구려 적석무덤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고구려 적석묘는 강상묘의 계승과 발전’이라고 보고 있음) 또한 여대지구 강상과 루상, 우가촌 타두 적석묘 등과 같은 집단묘로서, 家族合葬墓라는 점에서 공통됨. 반면 강상·누상 적석묘는 평지에 축조되었으며, 묘단은 없고, 묘광이 장방 혹은 방사상으로 분포하며, 중심 묘광의 4벽은 판석을 세워 만들었고, 우가촌 타두 적석묘 역시 묘광이 타원형 또는 부정형으로, 보통 평행을 이루는 가로배열로 분포하며 묘단을 만들지 않았음. 따라서 강상·루상과 우가촌 타두는 간구자 적석묘와는 축조 방법에서의 차이가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연대는 3230±90년B.P. 이고, 강상·누상묘는 기원전 1세기 전반기에 해당된 고조선 시기이며, 환인 지역 적석묘는 제15호분에서 環首式 철칼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東漢 시대로, 늦어도 漢·魏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음. 간구자 고분군의 상대적 축조연대는 대체로 전국시기로부터 서한 말기에 해당되므로, 간구자 고분군은 강상·누상묘에서 환인 적석묘로 발전해 나아가는 과정의 과도기 단계로서 고구려 선인들의 토착문화로 추정됨. 연접 방식은 3형식으로 나뉘는데, 제1형식은 속·부묘단이 주묘단을 둘러싸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지 않으며(AM3, AM4, BM5), 제2형식은 속·부묘단의 밖에 다시 제2속묘단이 외접하고, 제1형식이 주묘단만을 둘러싸지만, 제2형식은 연이어 속묘단이 함께 둘러싸고 하나의 부묘단이 기점이 되어 2개의 방향으로 나누어 펼쳐짐(BM2, BM4). 3형식 : 먼저 주묘단을 두르고 밖으로 다시 속묘단을 쌓고, 빈곳에 1, 2개의 부묘단을 세운 후 연속으로 서남방향에 속묘단을 설치한 후, 양쪽에 연속하여 부묘단을 대칭으로 축조함(AM1, AM2). 제1형식이 제2형식의 미완성형식이라면 비교적 이른 고분은 모두 먼저 주묘단을 쌓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였는데, 부·속묘단이 연접하는 방향은 서남쪽으로 접속하지만, 일정하지 않다가 비교적 늦은 고분에서 서남쪽으로 확장방향이 정형성을 띰. 속묘단은 중심선에 의해 대다수 서남방향으로 연접하며 부묘단은 양쪽으로 分列하는데, 대다수는 비교적 대칭적임. 연접 방식에 따른 배열법의 변천순서는 제1형식→제2형식→제3형식 순으로 변하고, 이런 양상은 고분군의 분포 양상과도 합치됨. A와 B구역을 보면, 산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가 이른데 비해, 강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는 비교적 늦음. 上→下의 배열과 발전과정은 환인과 집안 일대의 고구려적석총의 배열과 일치함.자연환경 AM4호분은 AM3으로부터 동쪽 120m 지점에 위치하고, 북으로는 미발굴된 AM5가 있음. 간구자촌은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鎭 서쪽 0.5㎞ 지점에 위치하고, 고분은 干溝子村의 東·西干溝河 양안의 하곡 충적대지상에 분포함. 동쪽으로 長白縣城과 45㎞ 떨어져 있고, 동·서·북 3면이 高山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름. 압록강과 고분군 사이의 馬架子山을 기준으로 동쪽의 동간구하, 서쪽의 서간구하가 흐르는데, 서간구하는 동북에서 서남으로 흘러 고분군를 거쳐 압록강으로 흘러 감. 장백과 임강을 잇는 長臨도로가 동남에서 서북으로 뻗어 고분군을 양분하고, 고분군의 서·남 양쪽 산위에는 청동기시대 유적 분포함. 간구자 고분은 여러 차례 조사가 있었으나 1986년과 2001년 조사로 대별되는데, 특히 2001년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계기로 1986년 조사때보다 묘역이 크게 확대되었음. 앞서 고분 분포현황에서 언급하였듯이 2001년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묘역은 크게 A, B, C, D의 4구역으로 이루어졌는데 비해, 1986년 보고서에는 2001년 보고서의 A와 B 지역 일대를 파악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으므로 2001년 고분의 편호는 1986년 조사를 고려하지 않고 새로 편호하고 있기 때문에 양자의 개별 고분들을 직접 연결시켜 파악하기는 어려운 상황임. 때문에 개별고분의 상황을 두 시기로 나누어 정리하였음.유물정보 철제칼 1점, 흰색대롱, 남색대롱,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長白朝鮮族自治縣文物志』, 1986 · 朴潤武, 「長白縣干溝子墓地調査」『博物館研究』 1990-3, 1990 ·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 編, 『吉林省志』 45(民族志), 吉林人民出版社, 1991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朴潤武, 「압록강 유역 干溝子 적성무덤에 대한 조사연구」『中國境內 高句麗遺蹟 硏究』, 예하출판, 1995 · 王洪峰·孫仁傑·遲勇, 「吉林長白縣干溝子墓地發掘簡報」『考古』 2003-8, 2003 · 孫仁杰·遲勇·張殿甲, 「鴨綠江上流右岸考古調査」『東北史地』 2004-5, 2004

  • 리스트여닫기 간구자 BM2호분(干溝子 BM2號墳) 출토지 길림성 장백현 십사도구진 간구자촌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鎮 干溝子村)연대 상한: 戰國中期~末期, 하한: 西漢 상한 - B.C 4세기~B.C 3세기초, 하한 - 기원전후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2001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장백현문물보호관리소, 집안시박물관(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長白縣文物保護管理所, 集安市博物館)5월-7월 조사에서 1986년 편호와 달리 새로이 편호하는데 1986년 편호된 고분가운데 M15~M19의 5기 가운데 1기만 남아 있고, 1986년도에 편호되지 않은 고분 중 고분 형식을 판별할 수 있는 고분 고려하여 새로이 편호하였으며, 서간구하 북안의 A구 4기와 그 남안의 B구 3기를 발굴함.구조특징 타원형으로 동북에서 서남 방향이고, 주묘단 1기, 속묘단 5기, 부묘단 11기로 조성되어 있으며, 대부분 묘단과 묘광 상태가 양호함. 주묘단(ZT)은 타원형으로 길이 7m, 너비 6.4m, 적석의 높이 1.6m이고, 기저부 둘레 돌의 축조상태는 비교적 양호함. 북반부에 14개 지탱석 있는데, 지탱석 간의 간격은 0.6~1m이고, 지탱석의 다수는 多稜의 장대석임. 3개의 묘광(ZK1~ZK3)은 말각장방형으로 장축 방향은 135도임. 묘광(ZK1)은 길이 2,5m, 너비 0.75, 깊이 0.2m이고, 바닥에는 작은 강돌이 깔려 있음. 비교적 커다란 강돌로 묘광벽 쌓았고, 비교적 많은 燒骨, 심발형토기 1건(淺腹罐 AⅠ식), 대롱장식(管飾) 34건, 목탄 몇 덩어리가 출토됨. 묘광(ZK2)은 길이 2.3m, 너비 0.85m, 깊이 0.15m이고 바닥에는 강돌이 깔려 있음. 묘광 벽은 비교적 작은 돌로 축조되었으며, 燒骨 두 무더기, 발 2건(淺腹罐 BaⅠ식, Ca식), 흰색 대롱(白管) 6건이 출토됨. 묘광(ZK3)은 길이 2.4m, 너비 0.7m, 깊이 0.25m이고, 바닥에 강돌을 깔음. 작은 냇돌로 묘광 벽을 축조하였고, 벽의 상부 돌은 비교적 크며, 燒骨, 토기와 옥구슬(玉珠) 각 1건이 출토됨. 속묘단(XT1~XT5)은 모두 5기로 XT1과 XT2는 주묘단의 양쪽에 접하고 있고, XT3~XT5는 기타 부묘단에서 바깥으로 펼쳐져 있음. XT1은 타원형으로 직경 4.2m, 높이 0.9m이고, 가장자리는 가지런함. 묘광(XK1)은 말각장방형으로 길이 2.2m, 너비 0.6m, 깊이 0.15m이고, 강돌을 깔은 바닥에는 燒骨이 양끝에 산재하고 있는데, 각각 심발형토기 1건씩(深腹罐 AⅠ식 및 BⅠ식)이 출토됨. XT2는 반원형으로 직경 5.2m, 높이 1.2m이고, 기단 둘레 돌은 가지런함. 묘광(XK2)은 타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길이 2.5m, 너비 0.8m, 깊이 0.1m이고, 묘광 내 양끝에는 燒骨부스러기, 도관 각각 1건씩이 부장됨. XT3은 반원형으로 직경 4m임. 묘광(XK3)는 방향은 주묘단 각 묘광과 동일하고, 말각장방형으로 길이 1.8m, 너비 0.6m, 깊이 0.12m이며, 대량의 燒骨이 있으나 부장품은 발견되지 않음. XT4는 반원형으로 직경 5.2m, 높이 1.2m이고, 바깥쪽 둘레 돌은 비교적 가지런함. 묘광(XK4)은 장방형으로 길이 2.6m, 너비 0.8m, 깊이 0.2m이고, 바닥에 강돌을 깔음. 대량의 燒骨이 있으나 부장품은 없음. XT5은 반원형으로 직경 5.2m, 높이 1.2m이고, 무덤 기저부 둘레 돌은 가지런하며, 동쪽 지탱석은 비교적 밀집함. 묘광(XK5)은 말각장방형으로 길이 2m, 너비 0.7m, 깊이 0.2m이고, 바닥에는 강돌이 깔려 있이며, 묘광에는 燒骨이 부장되었으나 부장품은 없음. 부묘단(FT1~FT11)인 FT1은 반원형으로 직경 4m, 높이 1.2m임. 묘광(FK1)은 말각장방형으로 길이 2.05m, 너비 0.6m, 깊이 0.15m이고, 비교적 큰 강돌로 2층 쌓음. 바닥에는 작은 자갈을 깔았고, 燒骨, 심발형토기 1건(深腹罐 BⅠ식)이 출토됨. FT2은 직경 5.5m, 높이 1m이고, 서쪽 부분은 대부분 기울어져 붕괴됨. 묘광(FK2)은 길이 2.3m, 너비 0.7~0.9m, 깊이 0.12m이고, 바닥에는 작은 강돌을 깔았으며, 인골 2 무더기, 부장품 발 2건(淺腹罐 AⅡ식, BbⅠ식)이 출토됨. FT3은 FT1과 XT1의 사이에 접해 있는데, 타원형으로 길이 약 6.5m, 너비 약 3m이고, 무덤 기저부 둘레돌의 훼손이 진행되고 있음. 묘광(FK3)은 묘단의 중앙에 위치하고, 장방형으로 길이 2.5m, 너비 0.5m, 깊이 0.1m이고, 바닥에는 작은 강돌이 깔려 있으며, 대량의 燒骨이 있으나 부장품은 아직 미발견됨. FT4은 반원형으로 무덤 기저 둘레돌 많이 기울어져 있음. 묘광(FK4)은 중앙부에 위치하고, 타원형 평면으로 길이 1.7m, 너비 1m, 깊이 0.1m이고, 인골, 심발형토기 1건(深腹罐 BⅢ식)이 출토됨. FT5는 반원형으로 직경 5.5m, 높이 1.2m이고, 무덤 기저 둘레돌의 동단을 제외하면 대부분 보존상태는 비교적 양호함. 묘광(FK5)는 장방형으로 길이 2.2m, 너비 0.6m, 깊이 0.14m이고 네벽은 커다란 돌로 축조하였으며, 바닥에 냇돌 깔음. 대량의 燒骨, 심발형토기 1건(深腹罐 BⅣ식)이 출토됨. FT6은 계단형(梯形)으로 무덤 둘레 길이 3m, 둘레 돌 높이는 0.75m임. 묘광(FK6)은 타원형으로 길이 2.3m, 너비 1m, 깊이 0.45m이고 바닥에는 작은 강돌을 쌓았으며, 燒骨, 동제 고리(銅環) 1건(環 C식), 발 1건(淺腹罐 Cb식)이 출토됨. FT7은 扇形으로 반경 약 2.3m이고, 무덤 기저 둘레 돌은 일부 붕괴되었으며, 잔존 높이 약 1m임. 묘광(FK7)은 부정형으로 길이 2.5m, 너비 0.6m이고, 인골, 흰색 대롱(白管) 1건, 심발형토기 1건(深腹罐 AⅡ식)이 출토됨. FT8은 반원형으로 직경 6.5m이고, 무덤 기저 둘레 돌은 대부분 붕괴됨. 묘광(FK8)은 말각장방형으로 길이 2.4m, 너비 0.7m, 깊이 0.12m이고, 바닥에는 작은 강돌이 깔려 있음. 燒骨, 심발형토기 1건(深腹罐 AⅢ식), 옥드리개(玉墜) 1쌍이 출토됨. FT9와 FT10은 고분 중심축선상에 있는 XT5를 기준으로 대칭되고, 扇形으로 반경 약 2.5m이며, 무덤 기저부 둘레 돌은 붕괴되었음. 묘광은 모두 말각장방형으로 묘단중앙부에 위치하는데, 묘광(FK9)는 길이 2m, 너비 0.65m임. 묘광(FK10)은 길이 2.3m, 너비 0.75m이고, 燒骨은 모두 묘광 중앙부에 있고, 부장품은 발견되지 않음. FT11은 파괴가 심각하고, 묘광은 이미 없어졌으며, 반경 약 2.8m의 扇形 묘단의 기초부만 남아 있음. BM2 동쪽과 남쪽 양단에서 고분의 충적토를 발굴 조사 하던 중에 사질토기(夾砂陶器)편이 발견됨.역사적 의미 축조방식은 지면에 커다란 돌을 사용하여 일정 범위의 묘역을 조성한 후 냇돌과 할석을 깔아 평면하게 지면을 고르고 무덤의 기저부를 만든 후, 그 위에 단을 쌓아 몇 기의 무덤이 연접되도록 함. 매장방식은 무덤 밖에서 화장한 후 燒骨을 매장한 2차장하고, 대다수 묘광 내부에 불에 타거나 그을린 흔적이 없음. 불에 탄 인골편은 작은 조각으로 가장 큰 것이 길이 5㎝가 안되며, 대략 1/3의 소골은 회백색이며 나머지는 赭色(자색)과 흑색임. 다만 BM2ZK1에서 목탄편이 출토되었고, 1986년 조사된 간구자 1호분(M1)의 석광 안에는 주검칸이나 葬具를 따로 마련하지 않았고 불에 태워진 인골과 대량의 목탄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시신을 묘광 안에 놓고 화장했던 것으로 추정됨. 燒骨은 묘광 내 2, 3곳에 무더기로 안치되었으며, 토기는 묘광 양단에 나누어 부장한 점으로 미루어 一代 혹은 한 가정의 合葬 즉 동일가족 數代의 합장묘 유적일 것임. 따라서 신분 혹은 항렬이 비교적 높은 사람이 주묘단의 중심에 매장되고, 다수 속·부묘단은 항렬의 대소 또는 昭穆제도에 따라 附葬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2001년 발굴한 7기 고분의 부장품은 총 283점으로 작은 장식품을 제외하면 평균 각 묘광에 3점이 부장되었으므로 厚葬은 아님. 전체 부장품 중 토기가 총73점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나 완형보다는 다수가 파편으로 출토되어 토기의 毁器習俗으로 짐작됨. 출토된 그릇은 모두 민무늬의 夾沙褐陶로 모양이 간단하고 종류가 단조롭고 제작 기술이 거칠어 원시성을 반영하며, 그 외 野猪牙飾, 綠松石管 등의 장식품은 모두 압록강 유역과 두만강 유역의 원시문화에서 일찍이 보여주는 전형적 기물임. 간구자 고분군의 무덤들은 하나의 기단 위에 여러 기의 고분이 배열되어 있는데, 특히 7호분은 1기의 원형석광적석묘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장방형의 작은 돌무덤이 방사상으로 배치되어 무덤 사이의 主次관계를 시사함. 즉 중심무덤의 피장자는 주위의 무덤에 비해 사회적 지위가 높은 편이나 반대의 무덤은 중심무덤에 예속된 상태로 추정됨. 반면에 1호분 및 4호분과 같은 단일한 원형석광무덤의 무덤배열 상태에서는 주종 관계가 전혀 보이지 않음. 한 墓區내의 여러 개 무덤은 그 크기와 모양이 같으며 또한 무덤 사이마다 돌로 서로 연결되어 한 무덤구역내의 피장자들 관계가 평등하였다는 것을 시사하며, 이는 혈연관계를 이루고 있는 가족 성원의 무덤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임. 부장품은 장식품이 많고 생산 공구 및 기타 그릇 류가 비교적 적은데, 이는 길림성 중부지구의 九台關馬山, 公主嶺猴石, 樺甸橫道河子 및 東豊, 遼源 일대 많은 大蓋石墓의 부장 특징과 서로 일치하며, 동북지구 남부에서는 戰國晩期~漢代 보편적으로 유행함. 상한연대는 2기 고분에서 方孔圓錢- 半兩錢과 一化으로 추정할 수 있음. 半兩錢은 秦末半兩 혹은 漢初의 八銖半兩이며, 一化는 ‘一刀’로 해석되며, 周秦 또는 秦初 시기의 화폐임. 赤峰 新窝堡와 鐵嶺 邱家台지역의 퇴장유적에서 이들 화폐가 燕·趙의 刀幣 및 반량전과 같이 출토되어 燕國晩期의 화폐로 확정되었으므로 묘지연대의 상한은 戰國末期, 비교적 이른 것은 戰國 中期에 해당됨. 하한연대는 AM1에서 출토된 鐵钁과 AM3·AM4 주묘단에서 채집된 鐵刀로 추정할 수 있는데, 钁은 漢代유행하는 것과 형태가 유사하며, 철도는 直柄環首로 일찍이 集安의 板岔嶺에서 동일한 것이 발굴된 바 있는데, 고구려 적석묘에서 대량 보이는 環首刀보다 조금 이름. 집안 판차령에서 “一化”圓錢이 “半兩”, “五銖”, “大泉五十”, 등의 한대화폐와 함께 출토되었고, 그 유통 시간은 전국말기~東漢임. 그러나 간구자묘지에서는 “오수” 및 동한화폐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고분의 하한은 대체로 동한이전의 서한시기로 비정됨. 간구자묘지의 연대가 집안, 환인 일대의 고구려 적석총보다 앞서므로, 고구려적석총의 가장 이른 형식인 無階段 圓丘上積石墓와 관련이 있을 것임. 고구려 초기의 적석묘의 발전과정을 보면, 무덤은 석광이 따로 없는 간단한 시설로부터 계단식 기단으로 이루어진 ‘框室(앞에서 박윤무의 1995년 글에 따라 ‘묘실’이라 정리하던 개념인데, 이 글에서 이 부분을 ‘框室’로 표현하고 있어 그대로 따랐음)’ 무덤으로 발전하고, ‘광실’은 장방형으로부터 정방형 형태로 변화·발전함. 묘광 위치에서도 위로부터 아래로 점차 내려옴. 이를 종합해 볼 때 간구자의 원형석광적석묘는 고구려 초기 적석총과 유사함. 첫째, 주검칸이 따로 없이 무덤의 기단 윗면을 자갈과 모래로 수평하게 마련하고 그 위에 주검과 부장품을 놓고 막돌로 덮어 정상부를 마무리 한 것은 이것은 환인 201호 및 19호분과 매우 흡사함. 둘째, 기단의 단수와 묘광 형태에서 차이가 있으나 한 무덤구역에 여러 기의 무덤을 연이어 마련한 점은 환인 23-33호분과 일치함. 셋째, 화장하여 묻는 습관이 환인 23호 및 20호분이나 15호분에서 확인되며, 집안 일대의 일부 적석총은 묘광벽이 불에 녹아 응결된 흔적으로 화장하였을 것으로 짐작됨. 따라서 간구자 무덤은 시기적으로 환인 적석총을 위주로 한 고구려 초기 무덤보다는 이르며 대체로 환인 적석총보다 선행된 고구려 早期의 무덤형식으로 고구려족계의 원시적 매장 특징이 짙게 반영됨. 또한 간구자 고분군은 여대지구 청동기 시대 무덤 및 청동단검고분의 특징을 내포하고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와 노철산 고분은 모두 여러 기의 무덤을 서로 가까이하여 ‘벌집형(蜂巢狀)’이며,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평면 형태는 원형으로 된 것도 있음. 이것은 간구자 1호분(M1)·2호분(M2)의 특징과 유사함. 강상묘는 하나의 무덤구역에 1기의 중심무덤을 마련하고 그 둘레를 돌면서 여러 기의 무덤을 방사선 형태로 마련하였는데, 이것은 간구자 7호분(M7)과 매우 유사함. 그리고 강상·누상묘 등 적지 않은 청동단검묘는 모두 화장한 무덤이라는 사실에서도 간구자 고분과 일치함.(『조선고고학개요』에서는 ‘노철산 및 장군산 고분→강상·누상묘→고구려 적석묘’라는 계승 발전관계를 설정하고 있고, 왕성생(1981, 「요하 유역 및 부근지역의 短鋌曲刃劍 연구」『요녕성고고박물관학회설립대회』회간)은 강상묘를 비롯한 요동문화유형의 무덤 형식과 매장습속이 환인 고구려 적석무덤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고구려 적석묘는 강상묘의 계승과 발전’이라고 보고 있음) 또한 여대지구 강상과 루상, 우가촌 타두 적석묘 등과 같은 집단묘로서, 家族合葬墓라는 점에서 공통됨. 반면 강상·누상 적석묘는 평지에 축조되었으며, 묘단은 없고, 묘광이 장방 혹은 방사상으로 분포하며, 중심 묘광의 4벽은 판석을 세워 만들었고, 우가촌 타두 적석묘 역시 묘광이 타원형 또는 부정형으로, 보통 평행을 이루는 가로배열로 분포하며 묘단을 만들지 않았음. 따라서 강상·루상과 우가촌 타두는 간구자 적석묘와는 축조 방법에서의 차이가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연대는 3230±90년B.P. 이고, 강상·누상묘는 기원전 1세기 전반기에 해당된 고조선 시기이며, 환인 지역 적석묘는 제15호분에서 環首式 철칼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東漢 시대로, 늦어도 漢·魏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음. 간구자 고분군의 상대적 축조연대는 대체로 전국시기로부터 서한 말기에 해당되므로, 간구자 고분군은 강상·누상묘에서 환인 적석묘로 발전해 나아가는 과정의 과도기 단계로서 고구려 선인들의 토착문화로 추정됨. 연접 방식은 3형식으로 나뉘는데, 제1형식은 속·부묘단이 주묘단을 둘러싸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지 않으며(AM3, AM4, BM5), 제2형식은 속·부묘단의 밖에 다시 제2속묘단이 외접하고, 제1형식이 주묘단만을 둘러싸지만, 제2형식은 연이어 속묘단이 함께 둘러싸고 하나의 부묘단이 기점이 되어 2개의 방향으로 나누어 펼쳐짐(BM2, BM4). 3형식 : 먼저 주묘단을 두르고 밖으로 다시 속묘단을 쌓고, 빈곳에 1, 2개의 부묘단을 세운 후 연속으로 서남방향에 속묘단을 설치한 후, 양쪽에 연속하여 부묘단을 대칭으로 축조함(AM1, AM2). 제1형식이 제2형식의 미완성형식이라면 비교적 이른 고분은 모두 먼저 주묘단을 쌓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였는데, 부·속묘단이 연접하는 방향은 서남쪽으로 접속하지만, 일정하지 않다가 비교적 늦은 고분에서 서남쪽으로 확장방향이 정형성을 띰. 속묘단은 중심선에 의해 대다수 서남방향으로 연접하며 부묘단은 양쪽으로 分列하는데, 대다수는 비교적 대칭적임. 연접 방식에 따른 배열법의 변천순서는 제1형식→제2형식→제3형식 순으로 변하고, 이런 양상은 고분군의 분포 양상과도 합치됨. A와 B구역을 보면, 산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가 이른데 비해, 강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는 비교적 늦음. 上→下의 배열과 발전과정은 환인과 집안 일대의 고구려적석총의 배열과 일치함.자연환경 BM2호분이 위치한 B구역은 북부 산 근처에 있고, 서쪽으로 BM3가 인접하여 있음. 간구자촌은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鎭 서쪽 0.5㎞ 지점에 위치하고, 고분은 干溝子村의 東·西干溝河 양안의 하곡 충적대지상에 분포함. 동쪽으로 長白縣城과 45㎞ 떨어져 있고, 동·서·북 3면이 高山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름. 압록강과 고분군 사이의 馬架子山을 기준으로 동쪽의 동간구하, 서쪽의 서간구하가 흐르는데, 서간구하는 동북에서 서남으로 흘러 고분군를 거쳐 압록강으로 흘러 감. 장백과 임강을 잇는 長臨도로가 동남에서 서북으로 뻗어 고분군을 양분하고, 고분군의 서·남 양쪽 산위에는 청동기시대 유적 분포함. 간구자 고분은 여러 차례 조사가 있었으나 1986년과 2001년 조사로 대별되는데, 특히 2001년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계기로 1986년 조사때보다 묘역이 크게 확대되었음. 앞서 고분 분포현황에서 언급하였듯이 2001년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묘역은 크게 A, B, C, D의 4구역으로 이루어졌는데 비해, 1986년 보고서에는 2001년 보고서의 A와 B 지역 일대를 파악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으므로 2001년 고분의 편호는 1986년 조사를 고려하지 않고 새로 편호하고 있기 때문에 양자의 개별 고분들을 직접 연결시켜 파악하기는 어려운 상황임. 때문에 개별고분의 상황을 두 시기로 나누어 정리하였음.유물정보 심발형토기 7점, 발 5점, 옥구슬 1점, 녹송석 드리개(綠松石墜) 2점, 고리 1점, 남색대롱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長白朝鮮族自治縣文物志』, 1986 · 朴潤武, 「長白縣干溝子墓地調査」『博物館研究』 1990-3, 1990 ·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 編, 『吉林省志』 45(民族志), 吉林人民出版社, 1991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朴潤武, 「압록강 유역 干溝子 적성무덤에 대한 조사연구」『中國境內 高句麗遺蹟 硏究』, 예하출판, 1995 · 王洪峰·孫仁傑·遲勇, 「吉林長白縣干溝子墓地發掘簡報」『考古』 2003-8, 2003 · 孫仁杰·遲勇·張殿甲, 「鴨綠江上流右岸考古調査」『東北史地』 2004-5, 2004

  • 리스트여닫기 간구자 BM4호분(干溝子 BM4號墳) 출토지 길림성 장백현 십사도구진 간구자촌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鎮 干溝子村)연대 상한: 戰國中期~末期, 하한: 西漢 상한 - B.C 4세기~B.C 3세기초, 하한 - 기원전후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2001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장백현문물보호관리소, 집안시박물관(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長白縣文物保護管理所, 集安市博物館)5월-7월 조사에서 1986년 편호와 달리 새로이 편호하는데 1986년 편호된 고분가운데 M15~M19의 5기 가운데 1기만 남아 있고, 1986년도에 편호되지 않은 고분 중 고분 형식을 판별할 수 있는 고분 고려하여 새로이 편호하였으며, 서간구하 북안의 A구 4기와 그 남안의 B구 3기를 발굴함.구조특징 전체형태는 橢圓丘狀으로 주묘단 1기, 속묘단 2기, 부묘단 6기로 조성되어 있고, 길이 16.5m, 너비 12.5m, 정상부 최고 높이는 1.5m이며, 西·南 양쪽은 일찍이 파괴되었음. 주묘단(ZT)은 고분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원형으로 직경 6m이며, 서남면은 이미 붕괴되고, 나머지 둘레 돌의 殘高는 0.5m임. 묘광은 2기로 장축 방향은 모두 150°임. 묘광(ZK1)은 타원형으로 길이 2.9m, 너비 1.05m, 깊이 0.15m이고, 바닥에는 작은 강돌이 깔려 있으며, 燒骨, 발 1건(淺腹罐 BaⅡ식), 어망추(網墜) 1건이 출토됨. 묘광(ZK2)은 타원형으로 길이 2.2m, 너비 0.7m, 깊이 0.1m이고, 바닥에 깔린 강돌층 두께는 0.05~0.08m이며, 燒骨과 심발형토기 1건(深腹罐 BⅢ식)이 출토됨. 속묘단(XT1, XT2)인 XT1은 半圓形으로 직경 약 5.5m, 높이 1.2m이고, 가장자리의 보존 상태는 양호함. 묘광(XK1)은 말각장방형으로 길이 2.5m, 너비 0.8m, 깊이 0.12m이고, 묘광 바닥에는 작은 강돌이 깔려 있음으며, 燒骨, 멧돼지이빨장식 1점이 출토함. XT2는 반원형으로 직경 약 6.5m이고, 북쪽의 殘高는 0.7m이며, 둘레돌은 둥근 호선을 그림. 묘광(XK2)은 타원형으로 길이 2.5m, 너비 0.7m, 깊이 0.15m이고, 바닥에 0.06m 두께로 작은 냇돌 깔았으며, 燒骨, 이빨장식(牙飾) 1건이 출토함. 부묘단(FT1~FT6)인 FT1은 반원형으로 직경 약 4.8m이고, 둘레 돌은 기본적으로 남아 있지 않으며, 지탱석은 기울어졌으나, 가장자리는 아직 가지런함. 묘광(FK1)은 불규칙한 타원형으로 길이 2.1m, 너비 0.4~0.7m, 깊이 0.08m이고, 묘광 바닥에는 작은 강돌을 깔았으며, 燒骨, 토기 1건이 출토함. FT2는 반원형으로 직경 약 4.5m, 적석 높이 1m이고, 둘레 돌은 가지런히 쌓아 올렸으며, 둘레 돌 밖에는 지탱석이 있음. 묘광(FK2)는 말각장방형으로 길이 2.5m, 너비 0.65m, 깊이 0.15m이고, 바닥에는 작은 강돌이 쌓여 있으며, 燒骨, 심발형토기 1건(深腹罐 AⅢ식)이 출토함. FT3은 扇形으로 반경 약 2m이고, 가장자리는 이미 붕괴됨. 묘광(FK3)은 장방형으로 가장자리가 비교적 가지런하고 길이 2.2m 너비 0.8m, 깊이 0.12m이며, 바닥에는 강돌이 깔려 있음. 燒骨, 구멍뚫린 숫돌(礪石) 1건이 출토함. FT4는 부정형으로 안쪽 묘광벽은 이미 훼손되었고, 바닥에 깔은 강돌은 대체로 타원형이며, 인골, 방추차(陶紡輪) 1건, 소량의 토기편이 출토함. FT5와 FT6은 기초만이 남아 있으며, 扇形으로 반경이 약 2m임.역사적 의미 축조방식은 지면에 커다란 돌을 사용하여 일정 범위의 묘역을 조성한 후 냇돌과 할석을 깔아 평면하게 지면을 고르고 무덤의 기저부를 만든 후, 그 위에 단을 쌓아 몇 기의 무덤이 연접되도록 함. 매장방식은 무덤 밖에서 화장한 후 燒骨을 매장한 2차장하고, 대다수 묘광 내부에 불에 타거나 그을린 흔적이 없음. 불에 탄 인골편은 작은 조각으로 가장 큰 것이 길이 5㎝가 안되며, 대략 1/3의 소골은 회백색이며 나머지는 赭色(자색)과 흑색임. 다만 BM2ZK1에서 목탄편이 출토되었고, 1986년 조사된 간구자 1호분(M1)의 석광 안에는 주검칸이나 葬具를 따로 마련하지 않았고 불에 태워진 인골과 대량의 목탄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시신을 묘광 안에 놓고 화장했던 것으로 추정됨. 燒骨은 묘광 내 2, 3곳에 무더기로 안치되었으며, 토기는 묘광 양단에 나누어 부장한 점으로 미루어 一代 혹은 한 가정의 合葬 즉 동일가족 數代의 합장묘 유적일 것임. 따라서 신분 혹은 항렬이 비교적 높은 사람이 주묘단의 중심에 매장되고, 다수 속·부묘단은 항렬의 대소 또는 昭穆제도에 따라 附葬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2001년 발굴한 7기 고분의 부장품은 총 283점으로 작은 장식품을 제외하면 평균 각 묘광에 3점이 부장되었으므로 厚葬은 아님. 전체 부장품 중 토기가 총73점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나 완형보다는 다수가 파편으로 출토되어 토기의 毁器習俗으로 짐작됨. 출토된 그릇은 모두 민무늬의 夾沙褐陶로 모양이 간단하고 종류가 단조롭고 제작 기술이 거칠어 원시성을 반영하며, 그 외 野猪牙飾, 綠松石管 등의 장식품은 모두 압록강 유역과 두만강 유역의 원시문화에서 일찍이 보여주는 전형적 기물임. 간구자 고분군의 무덤들은 하나의 기단 위에 여러 기의 고분이 배열되어 있는데, 특히 7호분은 1기의 원형석광적석묘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장방형의 작은 돌무덤이 방사상으로 배치되어 무덤 사이의 主次관계를 시사함. 즉 중심무덤의 피장자는 주위의 무덤에 비해 사회적 지위가 높은 편이나 반대의 무덤은 중심무덤에 예속된 상태로 추정됨. 반면에 1호분 및 4호분과 같은 단일한 원형석광무덤의 무덤배열 상태에서는 주종 관계가 전혀 보이지 않음. 한 墓區내의 여러 개 무덤은 그 크기와 모양이 같으며 또한 무덤 사이마다 돌로 서로 연결되어 한 무덤구역내의 피장자들 관계가 평등하였다는 것을 시사하며, 이는 혈연관계를 이루고 있는 가족 성원의 무덤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임. 부장품은 장식품이 많고 생산 공구 및 기타 그릇 류가 비교적 적은데, 이는 길림성 중부지구의 九台關馬山, 公主嶺猴石, 樺甸橫道河子 및 東豊, 遼源 일대 많은 大蓋石墓의 부장 특징과 서로 일치하며, 동북지구 남부에서는 戰國晩期~漢代 보편적으로 유행함. 상한연대는 2기 고분에서 方孔圓錢- 半兩錢과 一化으로 추정할 수 있음. 半兩錢은 秦末半兩 혹은 漢初의 八銖半兩이며, 一化는 ‘一刀’로 해석되며, 周秦 또는 秦初 시기의 화폐임. 赤峰 新窝堡와 鐵嶺 邱家台지역의 퇴장유적에서 이들 화폐가 燕·趙의 刀幣 및 반량전과 같이 출토되어 燕國晩期의 화폐로 확정되었으므로 묘지연대의 상한은 戰國末期, 비교적 이른 것은 戰國 中期에 해당됨. 하한연대는 AM1에서 출토된 鐵钁과 AM3·AM4 주묘단에서 채집된 鐵刀로 추정할 수 있는데, 钁은 漢代유행하는 것과 형태가 유사하며, 철도는 直柄環首로 일찍이 集安의 板岔嶺에서 동일한 것이 발굴된 바 있는데, 고구려 적석묘에서 대량 보이는 環首刀보다 조금 이름. 집안 판차령에서 “一化”圓錢이 “半兩”, “五銖”, “大泉五十”, 등의 한대화폐와 함께 출토되었고, 그 유통 시간은 전국말기~東漢임. 그러나 간구자묘지에서는 “오수” 및 동한화폐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고분의 하한은 대체로 동한이전의 서한시기로 비정됨. 간구자묘지의 연대가 집안, 환인 일대의 고구려 적석총보다 앞서므로, 고구려적석총의 가장 이른 형식인 無階段 圓丘上積石墓와 관련이 있을 것임. 고구려 초기의 적석묘의 발전과정을 보면, 무덤은 석광이 따로 없는 간단한 시설로부터 계단식 기단으로 이루어진 ‘框室(앞에서 박윤무의 1995년 글에 따라 ‘묘실’이라 정리하던 개념인데, 이 글에서 이 부분을 ‘框室’로 표현하고 있어 그대로 따랐음)’ 무덤으로 발전하고, ‘광실’은 장방형으로부터 정방형 형태로 변화·발전함. 묘광 위치에서도 위로부터 아래로 점차 내려옴. 이를 종합해 볼 때 간구자의 원형석광적석묘는 고구려 초기 적석총과 유사함. 첫째, 주검칸이 따로 없이 무덤의 기단 윗면을 자갈과 모래로 수평하게 마련하고 그 위에 주검과 부장품을 놓고 막돌로 덮어 정상부를 마무리 한 것은 이것은 환인 201호 및 19호분과 매우 흡사함. 둘째, 기단의 단수와 묘광 형태에서 차이가 있으나 한 무덤구역에 여러 기의 무덤을 연이어 마련한 점은 환인 23-33호분과 일치함. 셋째, 화장하여 묻는 습관이 환인 23호 및 20호분이나 15호분에서 확인되며, 집안 일대의 일부 적석총은 묘광벽이 불에 녹아 응결된 흔적으로 화장하였을 것으로 짐작됨. 따라서 간구자 무덤은 시기적으로 환인 적석총을 위주로 한 고구려 초기 무덤보다는 이르며 대체로 환인 적석총보다 선행된 고구려 早期의 무덤형식으로 고구려족계의 원시적 매장 특징이 짙게 반영됨. 또한 간구자 고분군은 여대지구 청동기 시대 무덤 및 청동단검고분의 특징을 내포하고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와 노철산 고분은 모두 여러 기의 무덤을 서로 가까이하여 ‘벌집형(蜂巢狀)’이며,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평면 형태는 원형으로 된 것도 있음. 이것은 간구자 1호분(M1)·2호분(M2)의 특징과 유사함. 강상묘는 하나의 무덤구역에 1기의 중심무덤을 마련하고 그 둘레를 돌면서 여러 기의 무덤을 방사선 형태로 마련하였는데, 이것은 간구자 7호분(M7)과 매우 유사함. 그리고 강상·누상묘 등 적지 않은 청동단검묘는 모두 화장한 무덤이라는 사실에서도 간구자 고분과 일치함.(『조선고고학개요』에서는 ‘노철산 및 장군산 고분→강상·누상묘→고구려 적석묘’라는 계승 발전관계를 설정하고 있고, 왕성생(1981, 「요하 유역 및 부근지역의 短鋌曲刃劍 연구」『요녕성고고박물관학회설립대회』회간)은 강상묘를 비롯한 요동문화유형의 무덤 형식과 매장습속이 환인 고구려 적석무덤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고구려 적석묘는 강상묘의 계승과 발전’이라고 보고 있음) 또한 여대지구 강상과 루상, 우가촌 타두 적석묘 등과 같은 집단묘로서, 家族合葬墓라는 점에서 공통됨. 반면 강상·누상 적석묘는 평지에 축조되었으며, 묘단은 없고, 묘광이 장방 혹은 방사상으로 분포하며, 중심 묘광의 4벽은 판석을 세워 만들었고, 우가촌 타두 적석묘 역시 묘광이 타원형 또는 부정형으로, 보통 평행을 이루는 가로배열로 분포하며 묘단을 만들지 않았음. 따라서 강상·루상과 우가촌 타두는 간구자 적석묘와는 축조 방법에서의 차이가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연대는 3230±90년B.P. 이고, 강상·누상묘는 기원전 1세기 전반기에 해당된 고조선 시기이며, 환인 지역 적석묘는 제15호분에서 環首式 철칼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東漢 시대로, 늦어도 漢·魏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음. 간구자 고분군의 상대적 축조연대는 대체로 전국시기로부터 서한 말기에 해당되므로, 간구자 고분군은 강상·누상묘에서 환인 적석묘로 발전해 나아가는 과정의 과도기 단계로서 고구려 선인들의 토착문화로 추정됨. 연접 방식은 3형식으로 나뉘는데, 제1형식은 속·부묘단이 주묘단을 둘러싸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지 않으며(AM3, AM4, BM5), 제2형식은 속·부묘단의 밖에 다시 제2속묘단이 외접하고, 제1형식이 주묘단만을 둘러싸지만, 제2형식은 연이어 속묘단이 함께 둘러싸고 하나의 부묘단이 기점이 되어 2개의 방향으로 나누어 펼쳐짐(BM2, BM4). 3형식 : 먼저 주묘단을 두르고 밖으로 다시 속묘단을 쌓고, 빈곳에 1, 2개의 부묘단을 세운 후 연속으로 서남방향에 속묘단을 설치한 후, 양쪽에 연속하여 부묘단을 대칭으로 축조함(AM1, AM2). 제1형식이 제2형식의 미완성형식이라면 비교적 이른 고분은 모두 먼저 주묘단을 쌓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였는데, 부·속묘단이 연접하는 방향은 서남쪽으로 접속하지만, 일정하지 않다가 비교적 늦은 고분에서 서남쪽으로 확장방향이 정형성을 띰. 속묘단은 중심선에 의해 대다수 서남방향으로 연접하며 부묘단은 양쪽으로 分列하는데, 대다수는 비교적 대칭적임. 연접 방식에 따른 배열법의 변천순서는 제1형식→제2형식→제3형식 순으로 변하고, 이런 양상은 고분군의 분포 양상과도 합치됨. A와 B구역을 보면, 산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가 이른데 비해, 강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는 비교적 늦음. 上→下의 배열과 발전과정은 환인과 집안 일대의 고구려적석총의 배열과 일치함.자연환경 BM4호분은 BM2 이남에 위치함. 간구자촌은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鎭 서쪽 0.5㎞ 지점에 위치하고, 고분은 干溝子村의 東·西干溝河 양안의 하곡 충적대지상에 분포함. 동쪽으로 長白縣城과 45㎞ 떨어져 있고, 동·서·북 3면이 高山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름. 압록강과 고분군 사이의 馬架子山을 기준으로 동쪽의 동간구하, 서쪽의 서간구하가 흐르는데, 서간구하는 동북에서 서남으로 흘러 고분군를 거쳐 압록강으로 흘러 감. 장백과 임강을 잇는 長臨도로가 동남에서 서북으로 뻗어 고분군을 양분하고, 고분군의 서·남 양쪽 산위에는 청동기시대 유적 분포함. 간구자 고분은 여러 차례 조사가 있었으나 1986년과 2001년 조사로 대별되는데, 특히 2001년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계기로 1986년 조사때보다 묘역이 크게 확대되었음. 앞서 고분 분포현황에서 언급하였듯이 2001년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묘역은 크게 A, B, C, D의 4구역으로 이루어졌는데 비해, 1986년 보고서에는 2001년 보고서의 A와 B 지역 일대를 파악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으므로 2001년 고분의 편호는 1986년 조사를 고려하지 않고 새로 편호하고 있기 때문에 양자의 개별 고분들을 직접 연결시켜 파악하기는 어려운 상황임. 때문에 개별고분의 상황을 두 시기로 나누어 정리하였음.유물정보 심발형토기 2점, 발 1점, 숫돌 1점, 이빨장식 2점,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長白朝鮮族自治縣文物志』, 1986 · 朴潤武, 「長白縣干溝子墓地調査」『博物館研究』 1990-3, 1990 ·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 編, 『吉林省志』 45(民族志), 吉林人民出版社, 1991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朴潤武, 「압록강 유역 干溝子 적성무덤에 대한 조사연구」『中國境內 高句麗遺蹟 硏究』, 예하출판, 1995 · 王洪峰·孫仁傑·遲勇, 「吉林長白縣干溝子墓地發掘簡報」『考古』 2003-8, 2003 · 孫仁杰·遲勇·張殿甲, 「鴨綠江上流右岸考古調査」『東北史地』 2004-5, 2004

  • 리스트여닫기 간구자 BM5호분(干溝子 BM5號墳) 출토지 길림성 장백현 십사도구진 간구자촌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鎮 干溝子村)연대 상한: 戰國中期~末期, 하한: 西漢 상한 - B.C 4세기~B.C 3세기초, 하한 - 기원전후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2001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장백현문물보호관리소, 집안시박물관(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長白縣文物保護管理所, 集安市博物館)5월-7월 조사에서 1986년 편호와 달리 새로이 편호하는데 1986년 편호된 고분가운데 M15~M19의 5기 가운데 1기만 남아 있고, 1986년도에 편호되지 않은 고분 중 고분 형식을 판별할 수 있는 고분 고려하여 새로이 편호하였으며, 서간구하 북안의 A구 4기와 그 남안의 B구 3기를 발굴함.구조특징 구조는 간단하고, 주묘단 1기, 부묘단 2기로 조성되어 있음. 전체 형태는 圓丘狀으로 직경 11m이고, 둘레 돌은 이미 훼손되었으며, 중심부 적석 높이는 1.5m임. 주묘단(ZK1)은 원형 평면으로 동쪽에 위치하고, 직경 5.5m임. 기초부와 둘레 돌의 하단은 모두 백색 流紋巖으로 축조하였고, 東半部는 이미 기울어지고 서쪽 부분은 잔존 상태가 양호하며, 둘레 돌의 殘高는 0.3m로 둘레돌 밖의 지탱석은 양호함. 타원형 묘광이 2개 있는데, 묘광(ZK1)은 길이 2.6m, 너비 0.9m, 깊이 0.25m, 장축 방향 30도이고, 묘광바닥에 깔은 돌의 두께는 0.13m이며, 화장한 인골편들이 있고, 부장품은 없음. 묘광(ZK2)은 길이 1.5m, 너비 0.7m, 깊이 0.1m이고, 바닥에는 두께 0.05m의 작은 강돌을 깔았으며, 장축 방향은 ZK1과 대략 동일하고, 燒骨만 출토되고 부장품이 없음. 속묘단인 FT1은 반원형으로 정상부 높이 1.1m이고, 남부는 비교적 심하게 파손되었으며, 北半部 둘레돌과 지탱석은 비교적 양호함. 묘광(FK1)은 말각장방형으로 길이 3m, 너비 0.7m, 깊이 0.1m이고, 바닥 강돌층 두께는 0.08m이며, 燒骨은 있으나 부장품은 없음. FT2은 扇形으로 반경 약 4m이고, 가장자리는 이미 붕괴되었음. 묘광(FK2)은 불규칙한 타원형으로 길이 2.8m, 너비 0.7m, 깊이 0.1~0.2m이고, 바닥에 깔은 작은 강돌의 두께는 0.08m이며, 대량의 燒骨, “一化”小圓錢 5점, 도기 1건(淺腹罐 BbⅡ식)이 출토함.역사적 의미 축조방식은 지면에 커다란 돌을 사용하여 일정 범위의 묘역을 조성한 후 냇돌과 할석을 깔아 평면하게 지면을 고르고 무덤의 기저부를 만든 후, 그 위에 단을 쌓아 몇 기의 무덤이 연접되도록 함. 매장방식은 무덤 밖에서 화장한 후 燒骨을 매장한 2차장하고, 대다수 묘광 내부에 불에 타거나 그을린 흔적이 없음. 불에 탄 인골편은 작은 조각으로 가장 큰 것이 길이 5㎝가 안되며, 대략 1/3의 소골은 회백색이며 나머지는 赭色(자색)과 흑색임. 다만 BM2ZK1에서 목탄편이 출토되었고, 1986년 조사된 간구자 1호분(M1)의 석광 안에는 주검칸이나 葬具를 따로 마련하지 않았고 불에 태워진 인골과 대량의 목탄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시신을 묘광 안에 놓고 화장했던 것으로 추정됨. 燒骨은 묘광 내 2, 3곳에 무더기로 안치되었으며, 토기는 묘광 양단에 나누어 부장한 점으로 미루어 一代 혹은 한 가정의 合葬 즉 동일가족 數代의 합장묘 유적일 것임. 따라서 신분 혹은 항렬이 비교적 높은 사람이 주묘단의 중심에 매장되고, 다수 속·부묘단은 항렬의 대소 또는 昭穆제도에 따라 附葬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2001년 발굴한 7기 고분의 부장품은 총 283점으로 작은 장식품을 제외하면 평균 각 묘광에 3점이 부장되었으므로 厚葬은 아님. 전체 부장품 중 토기가 총73점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나 완형보다는 다수가 파편으로 출토되어 토기의 毁器習俗으로 짐작됨. 출토된 그릇은 모두 민무늬의 夾沙褐陶로 모양이 간단하고 종류가 단조롭고 제작 기술이 거칠어 원시성을 반영하며, 그 외 野猪牙飾, 綠松石管 등의 장식품은 모두 압록강 유역과 두만강 유역의 원시문화에서 일찍이 보여주는 전형적 기물임. 간구자 고분군의 무덤들은 하나의 기단 위에 여러 기의 고분이 배열되어 있는데, 특히 7호분은 1기의 원형석광적석묘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장방형의 작은 돌무덤이 방사상으로 배치되어 무덤 사이의 主次관계를 시사함. 즉 중심무덤의 피장자는 주위의 무덤에 비해 사회적 지위가 높은 편이나 반대의 무덤은 중심무덤에 예속된 상태로 추정됨. 반면에 1호분 및 4호분과 같은 단일한 원형석광무덤의 무덤배열 상태에서는 주종 관계가 전혀 보이지 않음. 한 墓區내의 여러 개 무덤은 그 크기와 모양이 같으며 또한 무덤 사이마다 돌로 서로 연결되어 한 무덤구역내의 피장자들 관계가 평등하였다는 것을 시사하며, 이는 혈연관계를 이루고 있는 가족 성원의 무덤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임. 부장품은 장식품이 많고 생산 공구 및 기타 그릇 류가 비교적 적은데, 이는 길림성 중부지구의 九台關馬山, 公主嶺猴石, 樺甸橫道河子 및 東豊, 遼源 일대 많은 大蓋石墓의 부장 특징과 서로 일치하며, 동북지구 남부에서는 戰國晩期~漢代 보편적으로 유행함. 상한연대는 2기 고분에서 方孔圓錢- 半兩錢과 一化으로 추정할 수 있음. 半兩錢은 秦末半兩 혹은 漢初의 八銖半兩이며, 一化는 ‘一刀’로 해석되며, 周秦 또는 秦初 시기의 화폐임. 赤峰 新窝堡와 鐵嶺 邱家台지역의 퇴장유적에서 이들 화폐가 燕·趙의 刀幣 및 반량전과 같이 출토되어 燕國晩期의 화폐로 확정되었으므로 묘지연대의 상한은 戰國末期, 비교적 이른 것은 戰國 中期에 해당됨. 하한연대는 AM1에서 출토된 鐵钁과 AM3·AM4 주묘단에서 채집된 鐵刀로 추정할 수 있는데, 钁은 漢代유행하는 것과 형태가 유사하며, 철도는 直柄環首로 일찍이 集安의 板岔嶺에서 동일한 것이 발굴된 바 있는데, 고구려 적석묘에서 대량 보이는 環首刀보다 조금 이름. 집안 판차령에서 “一化”圓錢이 “半兩”, “五銖”, “大泉五十”, 등의 한대화폐와 함께 출토되었고, 그 유통 시간은 전국말기~東漢임. 그러나 간구자묘지에서는 “오수” 및 동한화폐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고분의 하한은 대체로 동한이전의 서한시기로 비정됨. 간구자묘지의 연대가 집안, 환인 일대의 고구려 적석총보다 앞서므로, 고구려적석총의 가장 이른 형식인 無階段 圓丘上積石墓와 관련이 있을 것임. 고구려 초기의 적석묘의 발전과정을 보면, 무덤은 석광이 따로 없는 간단한 시설로부터 계단식 기단으로 이루어진 ‘框室(앞에서 박윤무의 1995년 글에 따라 ‘묘실’이라 정리하던 개념인데, 이 글에서 이 부분을 ‘框室’로 표현하고 있어 그대로 따랐음)’ 무덤으로 발전하고, ‘광실’은 장방형으로부터 정방형 형태로 변화·발전함. 묘광 위치에서도 위로부터 아래로 점차 내려옴. 이를 종합해 볼 때 간구자의 원형석광적석묘는 고구려 초기 적석총과 유사함. 첫째, 주검칸이 따로 없이 무덤의 기단 윗면을 자갈과 모래로 수평하게 마련하고 그 위에 주검과 부장품을 놓고 막돌로 덮어 정상부를 마무리 한 것은 이것은 환인 201호 및 19호분과 매우 흡사함. 둘째, 기단의 단수와 묘광 형태에서 차이가 있으나 한 무덤구역에 여러 기의 무덤을 연이어 마련한 점은 환인 23-33호분과 일치함. 셋째, 화장하여 묻는 습관이 환인 23호 및 20호분이나 15호분에서 확인되며, 집안 일대의 일부 적석총은 묘광벽이 불에 녹아 응결된 흔적으로 화장하였을 것으로 짐작됨. 따라서 간구자 무덤은 시기적으로 환인 적석총을 위주로 한 고구려 초기 무덤보다는 이르며 대체로 환인 적석총보다 선행된 고구려 早期의 무덤형식으로 고구려족계의 원시적 매장 특징이 짙게 반영됨. 또한 간구자 고분군은 여대지구 청동기 시대 무덤 및 청동단검고분의 특징을 내포하고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와 노철산 고분은 모두 여러 기의 무덤을 서로 가까이하여 ‘벌집형(蜂巢狀)’이며,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평면 형태는 원형으로 된 것도 있음. 이것은 간구자 1호분(M1)·2호분(M2)의 특징과 유사함. 강상묘는 하나의 무덤구역에 1기의 중심무덤을 마련하고 그 둘레를 돌면서 여러 기의 무덤을 방사선 형태로 마련하였는데, 이것은 간구자 7호분(M7)과 매우 유사함. 그리고 강상·누상묘 등 적지 않은 청동단검묘는 모두 화장한 무덤이라는 사실에서도 간구자 고분과 일치함.(『조선고고학개요』에서는 ‘노철산 및 장군산 고분→강상·누상묘→고구려 적석묘’라는 계승 발전관계를 설정하고 있고, 왕성생(1981, 「요하 유역 및 부근지역의 短鋌曲刃劍 연구」『요녕성고고박물관학회설립대회』회간)은 강상묘를 비롯한 요동문화유형의 무덤 형식과 매장습속이 환인 고구려 적석무덤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고구려 적석묘는 강상묘의 계승과 발전’이라고 보고 있음) 또한 여대지구 강상과 루상, 우가촌 타두 적석묘 등과 같은 집단묘로서, 家族合葬墓라는 점에서 공통됨. 반면 강상·누상 적석묘는 평지에 축조되었으며, 묘단은 없고, 묘광이 장방 혹은 방사상으로 분포하며, 중심 묘광의 4벽은 판석을 세워 만들었고, 우가촌 타두 적석묘 역시 묘광이 타원형 또는 부정형으로, 보통 평행을 이루는 가로배열로 분포하며 묘단을 만들지 않았음. 따라서 강상·루상과 우가촌 타두는 간구자 적석묘와는 축조 방법에서의 차이가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연대는 3230±90년B.P. 이고, 강상·누상묘는 기원전 1세기 전반기에 해당된 고조선 시기이며, 환인 지역 적석묘는 제15호분에서 環首式 철칼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東漢 시대로, 늦어도 漢·魏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음. 간구자 고분군의 상대적 축조연대는 대체로 전국시기로부터 서한 말기에 해당되므로, 간구자 고분군은 강상·누상묘에서 환인 적석묘로 발전해 나아가는 과정의 과도기 단계로서 고구려 선인들의 토착문화로 추정됨. 연접 방식은 3형식으로 나뉘는데, 제1형식은 속·부묘단이 주묘단을 둘러싸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지 않으며(AM3, AM4, BM5), 제2형식은 속·부묘단의 밖에 다시 제2속묘단이 외접하고, 제1형식이 주묘단만을 둘러싸지만, 제2형식은 연이어 속묘단이 함께 둘러싸고 하나의 부묘단이 기점이 되어 2개의 방향으로 나누어 펼쳐짐(BM2, BM4). 3형식 : 먼저 주묘단을 두르고 밖으로 다시 속묘단을 쌓고, 빈곳에 1, 2개의 부묘단을 세운 후 연속으로 서남방향에 속묘단을 설치한 후, 양쪽에 연속하여 부묘단을 대칭으로 축조함(AM1, AM2). 제1형식이 제2형식의 미완성형식이라면 비교적 이른 고분은 모두 먼저 주묘단을 쌓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였는데, 부·속묘단이 연접하는 방향은 서남쪽으로 접속하지만, 일정하지 않다가 비교적 늦은 고분에서 서남쪽으로 확장방향이 정형성을 띰. 속묘단은 중심선에 의해 대다수 서남방향으로 연접하며 부묘단은 양쪽으로 分列하는데, 대다수는 비교적 대칭적임. 연접 방식에 따른 배열법의 변천순서는 제1형식→제2형식→제3형식 순으로 변하고, 이런 양상은 고분군의 분포 양상과도 합치됨. A와 B구역을 보면, 산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가 이른데 비해, 강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는 비교적 늦음. 上→下의 배열과 발전과정은 환인과 집안 일대의 고구려적석총의 배열과 일치함.자연환경 간구자촌은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鎭 서쪽 0.5㎞ 지점에 위치하고, 고분은 干溝子村의 東·西干溝河 양안의 하곡 충적대지상에 분포함. 동쪽으로 長白縣城과 45㎞ 떨어져 있고, 동·서·북 3면이 高山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름. 압록강과 고분군 사이의 馬架子山을 기준으로 동쪽의 동간구하, 서쪽의 서간구하가 흐르는데, 서간구하는 동북에서 서남으로 흘러 고분군를 거쳐 압록강으로 흘러 감. 장백과 임강을 잇는 長臨도로가 동남에서 서북으로 뻗어 고분군을 양분하고, 고분군의 서·남 양쪽 산위에는 청동기시대 유적 분포함. 간구자 고분은 여러 차례 조사가 있었으나 1986년과 2001년 조사로 대별되는데, 특히 2001년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계기로 1986년 조사때보다 묘역이 크게 확대되었음. 앞서 고분 분포현황에서 언급하였듯이 2001년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묘역은 크게 A, B, C, D의 4구역으로 이루어졌는데 비해, 1986년 보고서에는 2001년 보고서의 A와 B 지역 일대를 파악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으므로 2001년 고분의 편호는 1986년 조사를 고려하지 않고 새로 편호하고 있기 때문에 양자의 개별 고분들을 직접 연결시켜 파악하기는 어려운 상황임. 때문에 개별고분의 상황을 두 시기로 나누어 정리하였음.유물정보 발 2점, 일화전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長白朝鮮族自治縣文物志』, 1986 · 朴潤武, 「長白縣干溝子墓地調査」『博物館研究』 1990-3, 1990 ·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 編, 『吉林省志』 45(民族志), 吉林人民出版社, 1991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朴潤武, 「압록강 유역 干溝子 적성무덤에 대한 조사연구」『中國境內 高句麗遺蹟 硏究』, 예하출판, 1995 · 王洪峰·孫仁傑·遲勇, 「吉林長白縣干溝子墓地發掘簡報」『考古』 2003-8, 2003 · 孫仁杰·遲勇·張殿甲, 「鴨綠江上流右岸考古調査」『東北史地』 2004-5,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