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넷

상세검색 공유하기 모바일 메뉴 검색 공유
닫기
리스트

고구려문화유산자료

사료라이브러리 열기
ID :NAHF.ku.d_0001_0010IDURL
역사이슈 열기
  • 리스트여닫기 임강시(臨江市)

    • 호로투 고분군(葫蘆套 古墳群)

    • 이도하자 고분군(二道河子 古墳群)

    • 이도하자 1호분(二道河子 1號墳)

    • 대율자 고분군(大栗子 古墳群)

    • 리스트여닫기 장천 고분군(長川 古墳群) 출토지 임강시 4도구진 장천촌 북쪽에 위치함(臨江市 四道溝鎮 長川村 北側位置).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7년 5월임강전참고구문물보사대(臨江電站庫區文物普査隊)石肖元, 張立夫, 張立新, 王洪峰, 張殿甲가 참여하여3개 구역에서 고분 확인.구조특징 비교적 넓은 범위에 분포함.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면서 3개 구역으로 구획되는데, 1구는 장천 2대촌 북쪽 과수원에 위치하며 2구는 新學校 북쪽 산간 평지에 위치하고 3구는 본래 老學校의 옛 터인 장천 1대촌 뒤에 위치함. 구역 사이의 거리는 각기 2里 정도임. 2구역은 고분이 가장 많이 분포했으나 이미 과수원과 계단식 밭이 들어서면서 대량으로 파괴된 상태임. 현재 몇 기만이 잔존하나, 원래 모습이 훼손됨. 3구역은 보존 상태 양호했으나 현재 다수 고분이 집을 짓기 위해 取石되면서 소멸되어 감. 6기 정도는 보존 상태 양호한 편임. 그중 3기는 기단적석총으로 둘레 길이 5-6m 내외임. 연접 적석총은 1기로 길이 12m, 너비 5m이며 과수원을 만들때 고분의 외형이 파괴됨. 기단적석총은 2기로 기단이 없어져 외형은 무기단 적석총과 유사함. 기단석 위에 熔石이 확인되고 있어 매장할 때에 화장풍속이 있었다고 추정됨.역사적 의미 장천 고분의 형식과 구조, 부장품은 고구려 고분과 유사하므로 고구려 유적으로 추정됨.자연환경 고분의 서북 약 3㎞ 거리에는 4도구진이 위치함. 장천은 4도구하 우안의 커다란 대지에 위치하며 대지 남쪽으로는 압록강, 북쪽으로는 긴 산맥이 자리함. 狹長한 지세로 평탄 개활지가 펼쳐져 있음.유물정보 현지인들에 의해 훼손된 1·2구역 토기(陶罐), 철제 칼(鐵刀), 전촉(箭頭), 3구역에서 토기(陶罐), 동제 장식(銅飾), 철제 괭이(鐵䦆) 등이 수습됨. 1987년 조사 당시 철제 괭이와 석제 화살촉 각 1개를 회수.참고문헌 · 王洪峰, 「臨江電站庫區古遺存調査綜述」『博物館研究』 1988-3, 1988

    • 파구 고분군(坡口 古墳群)

    • 고가영 고분군(賈家營 古墳群)

    • 입대 고분군(砬臺 古墳群)

    • 리스트여닫기 동전자 고분군(東甸子 古墳群) 출토지 임강시 6도구진 동전자촌(일명 동화피전자촌) 서쪽 대지와 後山 남쪽 언덕에 위치함. (臨江市 六道溝鎮 東甸子村(東樺皮甸子村) 西側臺地, 後山 南側崗 位置).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2004년 7월 10일길림성장백산문화연구회, 백산시문관판, 집안시박물관(吉林省長白山文化硏究會, 白山市文管判, 集安市博物館)張福有, 孫仁杰, 遲勇, 張殿甲, 谷芃 등이 참여했고 1987년 조사대용과 동일함.1960년 4월혼강시문물보사대(渾江市文物普査隊)백수십여기의 고분 발견함.1984년 5월 및 6월 조사혼강시문물보사대(渾江市文物普査隊)2개의 구역으로 나뉘며, 고분 60여 기 확인함.1987년 5월임강전참고구문물보사대(臨江電站庫區文物普査隊)石肖元, 張立夫, 張立新, 王洪峰, 張殿甲이 동전자촌 서쪽 대지에서 30여기 고분 확인, 동전자 후산 남쪽 언덕에서 5기 고분 확인함.구조특징 고분군은 2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음. 도로 남쪽에 형성된 마을의 서쪽 대지상 분포하는Ⅰ구역과 도로 북쪽, 마을 동쪽 後山 언덕위의 분포 구역(Ⅱ)임.Ⅰ구역 고분군의 대부분이 기단적석총에 해당됨. 둘레 길이 5-6m 정도이나 10여m에 이르는 고분도 있음. 계단적석총은 소수만 확인됨. 계단의 보존 상태는 불명확하고 계단석은 비교적 크며, 자연석을 이용하거나 가공한 것도 있음. 계단의 수는 2-3단임. 기단적석 연접묘는 2기 정도이고 보존 상태 양호함. 일부 고분은 기단석 훼손으로 무기단적석총 형태로 변형. 고분의 방향은 180~230°이고 고분은 깨진 돌로 봉해졌으며, 일부는 함몰갱이 확인됨. Ⅱ구역 고분군에선 대규모 계단적석총이 확인됨.역사적 의미 동전자 後山의 대형계단적석총 M1과 M2의 축조방식은 집안 통구 고분군 산성하구의 兄塚·弟塚과 유사하므로, 이들 무덤과 비슷한 고구려 4·5세기로 추정됨. 후산 고분은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하며, 큰 규모로 미루어 귀족의 고분일 가능성이 큼. `동전자 고분군은 혼강 경내 최대의 고분으로 고구려의 세력 범위, 풍속습관, 사회생활, 고분 분기 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임.자연환경 원래 ‘高麗墓子’로도 불렸음. 동전자 동쪽 4㎞ 거리에 6도구향이 위치하고, 동전자 남단에는 압록강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감. 동전자는 압록강 右岸의 狹長한 충적대지 위에 자리함. 대지 남쪽에는 압록강, 북쪽에는 많은 산들에 접하고 있는데 동서 길이 2.5㎞, 남북 너비 약 1㎞임. 대지 중앙에서 남쪽으로 치우진 곳은 압록강의 옛길인 저지대였으나, 지금은 농경지로 개간됨. 대지 북쪽은 높이가 6m 정도에 이르는 2급대지임. 동전자 주민은 대지의 북쪽에 치우친 곳에 거주하며 동전자촌 중앙에는 임강과 장백을 잇는 臨長도로가 관통하고 있음.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渾江市文物志』, 1987 · 王洪峰, 「臨江電站庫區古遺存調査綜述」『博物館研究』 1988-3, 1988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孫仁杰·遲勇·張殿甲, 「鴨綠江上流右岸考古調査」『東北史地』 2004-5, 2004

    • 동전자 1호분(東甸子 1號墳)

    • 동전자 2호분(東甸子 2號墳)

    • 동전자 4호분(東甸子 4號墳)

    • 동전자 8호분(東甸子 8號墳)

    • 동전자 10호분(東甸子 10號墳)

    • 동전자 2구역 1호분(東甸子 2區域 1號墳)

    • 동전자 2구역 2호분(東甸子 2區域 2號墳)

    • 서마록포자 고분군(西馬鹿泡子 古墳群)

    • 용강 고분군(龍崗 古墳群)

    • 리스트여닫기 임성고성(臨城古城) 출토지 임강진(현재 임강시 소재지)에서 삼도구하를 따라 동쪽으로 5㎞ 정도 떨어진 임성 8대[임동촌] 북쪽의 산봉우리에 위치함(臨江鎭 東側 5㎞ 距離 臨東村 北側嶂 位置).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2004년 7월 10일길림성장백산문화연구회, 백산시문관판, 집안시박물관(吉林省長白山文化硏究會, 白山市文管判, 集安市博物館)張福有, 張殿甲, 遲龍, 孫仁杰 등이 참여하여 개괄적인 현황 파악함. 『東北史地』2004-5에 발표함.1983년 6월혼강시문화국(渾江市文化局)소량의 토기편을 채집하고 1984년 3월 8일에 渾江市 重點文物保護單位로 지정됨.1984년혼강시문물보사대(渾江市文物普査隊)실측과 기록함. (『渾江市文物志』중의 ‘臨城城址’)구조특징 성은 三道溝河를 향해 남쪽으로 뻗은 언덕산의 정상에 위치함. 성이 위치한 산봉우리는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지형이며, 성 안은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음. 동벽 바깥은 가파른 낭떠러지이고, 북벽과 서벽 바깥은 높이 3-5m 정도의 벼랑임. 남벽 바깥으로는 너비 20m 길이 50m 정도의 평탄한 대지가 펼쳐져 있는데 밭으로 경작되고 있음. 성곽의 평면은 전체적으로 조금 찌그러진 공모양임. 성벽은 많이 허물어져 성돌을 가지런하게 쌓은 모습을 찾아보기 힘듦. 다만 성돌이 대부분 성벽 주변에 무너진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에 성곽의 윤곽을 확인하기는 어렵지 않은 상태임. 동벽 바깥은 가파른 절벽, 북벽과 서벽 바깥은 높이 3-5m 정도의 암벽으로 각 성벽은 이러한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축조함. 석재는 대부분 깬돌인데 잘 다듬지는 않았음. 강돌도 일부 섞여 있음. 크기는 대체로 길이가 20-40㎝ 사이임. 성 안은 유적의 흔적은 명확하게 보이지 않음. 서벽 안쪽에 약간 깊은 구덩이가 있는데, 용도는 정확히 알 수 없음.역사적 의미 臨城고성은 三道溝河 하류에 위치하여 압록강과 여러 지류연안의 水路 교통을 공제하던 전략적 요충지로 추정됨. 부근에서 별다른 군사주둔지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비록 규모는 작지만 임성고성 자체가 방어용 城堡였던 것으로 추정됨. 고구려 중기에 축조되어 발해시기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됨.자연환경 압록강 지류인 三道溝河가 마을 동북쪽에서 흘러들어와 마을 남쪽을 지나 古城이 위치한 산기슭 아래에서 활모양으로 성의 동·남·서를 휘감아 돈 다음, 방향을 꺾어 남쪽으로 흐르다가 臨城村 부근에서 압록강으로 유입됨. 성터가 있는 산봉우리는 북쪽 산줄기에서 三道溝河를 향해 남쪽으로 쭉 뻗은 언덕산에 위치했는데, 높이 약 200m 정도로 우뚝 솟아오른 것이 마치 누워있는 소와 같으며, 三道溝 河谷을 기다랗게 가로막고 있음. 山城 맞은편 산기슭에는 臨江-長白 도로가 있고, 산성 북쪽 산기슭 아래로는 臨江-大湖석탄광[煤礦] 철로가 통과하고 있음. 성에 올라서면 서쪽으로 臨江鎭과 압록강, 남쪽으로 臨江-長白도로, 동쪽으로 三道溝 골짜기, 북쪽으로 楊木頂子山脈 등이 한눈에 들어옮.유물정보 토기편과 도끼날형[鏟形] 철제 화살촉 등 채집함. 토기는 니질회색토기(泥質灰陶)와 황갈색토기(黃褐陶)로서 비교적 두꺼운 편인데, 토기 형태를 판별하기는 어려움.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渾江市文物志』, 1987 · 國家文物局 主編, 「臨城城址」『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王禹浪·王宏北, 「中國吉林省渾江市三道溝河臨城八隊高句麗古城址」『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1994 · 余昊奎, 「臨江 臨城古城」『高句麗 城』 Ⅰ(鴨綠江 中上流篇), 國防軍史硏究所, 1998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北方史地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4 · 孫仁杰·遲龍·張殿甲, 「鴨綠江上流右岸考古調査」『東北史地』 2004-5, 2004

    • 리스트여닫기 화피전자고성(樺皮甸子古城) 출토지 혼강시[임강시] 육도구향 화피전자촌 (渾江市[臨江市] 六道溝鄉 樺皮甸子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2004년 7월 10일길림성장백산문화연구회, 백산시문관판, 집안시박물관(吉林省長白山文化硏究會, 白山市文管判, 集安市博物館)張福有, 張殿甲, 遲龍, 孫仁杰 등이 참가하여 전체적인 현황 파악 및 유물 채집함. 『東北史地』2004-5에 발표함.2004년 9월 12일길림성장백산문화연구회(吉林省長白山文化硏究會)張福有, 遲龍, 孫仁杰 등이 참가하여 전체적인 현황 파악 및 유물 채집함. 『東北史地』2004-5에 발표함.1960년 4월혼강시문물보사대(渾江市文物普査隊)성곽의 현황 파악 및 간략한 기록함.1974년 마을 주민이 성돌을 채취하여 민가를 짓다가 靑花白磁 1점을 발견했다고 함.1984년 5월과 6월 27일통화시문물보사대(渾江市文物普査隊)5월에 유적의 조사 및 촬영이 이루어지고, 재조사 및 실측과 기록이 6월에 행해짐. 두 차례의 조사에서 유물 채집함. 『渾江市文物志』 중의 ‘樺皮甸子城址’에 발표함. 조사 착수에 앞서 1984년 3월 8일에 渾江市 重點文物保護單位로 지정함.1987 5월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와 혼강시문물관리위원회(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渾江市文物管理委員會)石肖元, 張立夫, 張立新, 王洪峰등이 참가하여 임강댐 수몰지구 조사차 성곽의 전체 현황 파악함. 『博物館硏究』1988-3에 발표함.1995년 5월백산시문물보사대(白山市文物普査隊)張殿甲 등이 참여하여 성곽 현황 파악 및 유물 채집함. 『北方文物』2000-2에 발표함.구조특징 성곽 방향은 135°로 평면은 동서 방향으로 긴 장방형으로 사각이 균일하지는 않음. 성곽 내부는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으며, 0.8m 정도의 고도차가 있음. 土石混築이라고 하지만(『渾江市文物志』), 동벽 북단의 절단면이나 북벽 중반부의 절단면으로 보아 강돌과 깬돌을 섞어서 허튼쌓기를 한 石築 성벽일 가능성도 있음. 석재는 강돌과 깬돌이 섞임. 동벽과 남벽의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한 편이지만, 동벽 북단은 절단되어 성벽 단면이 드러나 있고, 남벽 서단 모서리도 민가에 의해 일부가 파괴되었음. 서벽과 북벽은 훼손 정도가 심한데, 서벽 남단의 각대로 추정되는 부분은 송전탑 건설로 많이 훼손되었음. 북벽의 동반부는 성벽이 거의 모두 유실되었고, 서단도 민가에 의해 많이 훼손되었음. 특히 2단 충적대지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북벽 아래쪽에는 흘러내린 성돌이 많이 퇴적되어 있음. 동북모서리엔 붉게 탄 흙덩이가 흩어져 있음. 동벽 외곽의 경작지에서 기와, 벽돌, 토기편 등이 대량 출토되었음. 유물 산포지의 면적은 길이 100m, 폭 30m임. 건물지 또는 취락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됨.역사적 의미 유물 출토현황이나 성벽구조로 보아 당시 성곽 안팎에는 비교적 큰 취락이 저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됨. 위치상 군사요새로 보이지는 않으며, 동마록포자고성이나 협피구고성처럼 압록강 수로상의 역참으로 추정됨. 특히 축조 방법, 규모, 위치 등이 상류 30㎞ 지점에 있는 동마록포자고성과 같음. 이곳에서 강을 거슬러 협피구고성을 경유하여 동마록포자고성까지는 하루 일정이라고 함. 남쪽 언덕상의 王八脖子窯址 및 동남쪽 2㎞ 거리에 위치한 東甸子古墳群 등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됨. 동마록포자고성에서는 일찍이 高句麗 시기의 도끼날형 화살촉과 근대철기가 출토되었는데 樺皮甸子古城의 연대 역시 이와 비슷할 것으로 추정됨. 樺皮甸子古城은 곧 고구려 중기 이후에 세워진 평지성임. 동벽 외곽에서 고구려 시기의 기와나 토기편이 출토된다는 사실도 이를 반증함. 고구려는 342년 前燕 慕容皝의 침공을 받아 환도성이 함락당하자, 이듬해인 343년(고국원왕 13) ‘平壤東黃城’으로 移居했다고 함. 여기의 ‘平壤東黃城’을 ‘平壤’ 동쪽의 ‘黃城’으로 해석한 다음, 平壤을 集安 良民甸子古城으로 비정하고, 그 동쪽에 위치했다는 黃城을 임강 화피전자고성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최근 제기됨. 화피전자고성이 양민전자고성의 동쪽에 위치했다는 것, 화피전자고성이 위치한 지역이 압록강 상류에서 가장 넓은 충적분지의 하나라는 점, 주변에 유적이 집중되어 있다는 점, 피난을 목적으로 잠시 移居한 것에 불과하다는 점, 주변에 고구려 고분군이 밀집했으며 규모가 커다는 점, 주변에 야생동물이 많다는 점, 발해시기 서경압록부 소재지였던 임강의 동쪽에 위치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제시함(『東北史地』2004-5).자연환경 압록강이 남에서 흘러들어와 성의 서쪽 200m 지점에서 방향을 꺾어 북쪽으로 유유히 흘러감. 압록강 右岸에 비교적 넓은 초승달 모양 臺地가 펼쳐져 있는데, 고성은 이 대지의 남쪽 끝부분에 자리잡고 있음. 古城이 위치한 압록강 연안의 대지는 2단으로 되어 있는데, 강 연안에 바로 인접하여 좁고 기다란 1단 대지가 형성되어 있고, 그 안쪽에 1단 대지보다 5-10m 정도 높은 2단 대지가 펼쳐져 있음. 古城은 2단 충적대지의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어 압록강변에서 바라보면 상당히 웅장하게 보임. 또한 고성은 충적대지의 남쪽 끝단에 위치하여 충적대지 방향인 북쪽을 제외하면 삼면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음.유물정보 다양한 유물 채집됨.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渾江市文物志』, 1987 · 王洪峰, 「臨江電站庫區古遺存調査綜述」『博物館研究』 1988-3, 1988 · 國家文物局 主編, 「樺皮甸子城址」『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北方史地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4 · 王禹浪·王宏北, 「中國吉林省渾江市三道溝河臨城八隊高句麗古城址」『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1994 · 張天鵬, 「文物」『渾江市志』, 中華書局, 1994 · 余昊奎, 「臨江 東馬鹿村古城」『高句麗 城』 Ⅰ(鴨綠江 中上流篇), 國防軍史硏究所, 1998 · 張殿甲, 「鴨綠江中上游高句麗·渤海遺址調査綜述」『北方文物』 2000-2, 2000 · 魏存成, 『高句麗遺跡』, 文物出版社, 2002 · 孫仁杰·遲龍·張殿甲, 「鴨綠江上流右岸考古調査」『東北史地』 2004-5, 2004 · 張福有, 「高句麗平壤東黃城考」『東北史地』 2004-5, 2004

    • 리스트여닫기 협피구고성(夾皮溝古城) 출토지 임강시 육도구향 소재지 남쪽 3㎞ 협피촌(臨江市 六道溝鄉 所在地 南側 3㎞ 夾皮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2004년 7월 10일길림성장백산문화연구회, 백산시문관판, 집안시박물관(吉林省長白山文化硏究會, 白山市文管判, 集安市博物館)張福有, 張殿甲, 遲龍, 孫仁杰 등이 참가하여 개괄적인 현황을 파악함. 『東北史地』2004-5에 발표됨.1960년 4월혼강시문물보사대(渾江市文物普査隊)성곽 내부에서 석제 화살촉, 刮削火石, 토기편, 창(三稜槍), 철제 화살촉, ‘長平’자 모양의 동전 등의 유물 채집함. 당시 ‘淸 太祖의 古城’이라고 칭했다고 함.1984년 5·6월혼강시문물보사대(渾江市文物普査隊)5월에 전체 현황을 조사, 6월에 실측과 기록 시행함. 『渾江市文物志』중의 ‘夾皮溝城址’에 발표함. 조사 착수에 앞서 1984년 3월 8일에 渾江市 重點文物保護單位로 지정함.1987년 5월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와 혼강시문물관리위원회(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渾江市文物管理委員會)임강댐 수몰 지구 조사차 전체 현황 파악 및 유물 채집함. 『博物館硏究』1988-3에 발표함.20세기 전반 1935년에 간행된 『臨江縣志』에 따르면 당시 臨江縣 동남 130里 거리의 夾皮溝에 ‘高麗城子’라 불리는 古城이 있었다고 함. 당시 성벽은 무너졌으나, 성벽 기단 부근에는 벽돌이나 기와 조각이 흩어져 있었으며, 네 성문의 형적 또한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함. 전체 둘레는 약 2方里였다고 함.구조특징 평면은 불규칙한 장방형으로 동, 북, 서 3면에 돌로 성벽을 축조했으며, 산기슭으로 이어지는 남쪽에는 성벽을 축조하지 않은 것으로 보임. 모래사장으로 이어지는 동, 북, 서 3면에 성벽을 축조했음. 성벽은 북쪽이 높고 남쪽으로 갈수록 낮아져 지표와 평평하게 되며, 산기슭으로 이어지는 남쪽에는 본래부터 성벽을 쌓지 않았던 것으로 파악됨. 산돌과 깬돌을 허튼쌓기로 층층이 축조했는데, 북벽 서반부에서는 11층까지 확인할 수 있음. 성곽 외벽의 벽면은 비교적 평평하고 가지런한 편이며, 성벽 안쪽에는 흙으로 메웠기 때문에 성벽의 두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음. 1960년대 조사 당시에 이미 성곽 내부에 성벽과 비슷한 높이로 흙이 쌓여 있는데, 성으로 흙이 유입될 만한 개울이나 계곡이 없으므로 자연적으로 퇴적된 것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조성한 것으로 추정됨. 1980년대 조사 당시 동벽의 북단, 북벽의 동단, 서벽의 남단 등의 성벽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다고 함. 지금도 북벽 동단부는 성벽 축조상태를 관찰할 수 있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임. 최근 臨江-長白 도로를 확·포장하면서 성곽 남단부를 덮어 남단뿐 아니라 동벽과 서벽의 남단도 도로에 덮혀 원형을 찾아볼 수 없게 됨. 동벽은 압록강으로 나아가는 小路에 의해 성벽이 상하단으로 분리되어 전체적인 축조양상을 명확히 파악할 수는 없음. 북벽 서반부는 퇴적으로 인해 성곽의 축조양상을 파악할 수 없으며, 서벽의 북반부는 성벽 자체가 유실된 것으로 파악됨. 성곽 서북쪽 강변에서는 모래와 자갈 채취가 계속 이루어지고 있어 앞으로도 성곽에 대한 훼손이 지속될 것으로 보임.역사적 의미 夾皮溝는 큰 산 사이에 있고, 계곡이 깊고 가파른 절벽으로 되어 있어 陸路 교통이 불편함. 夾皮溝古城은 압록강 수운과 관련될 것으로 추정됨. 특히 古城이 강가에 위치해 있으며, 모래사장으로 이어지는 동, 북, 서 3면에만 성벽을 축조하고, 산기슭으로 이어지는 남쪽에는 성벽을 축조하지 않았음. 그리고 성곽 내부는 흙으로 메워 성벽과 평평하게 하였음. 古城의 북쪽은 바로 강가이며, 증수기 때가 되면 강물이 불어나 성벽 아래까지 넘치고, 심한 경우 수몰되기도 함. 이는 군사적 방어나 거주에는 매우 불리한 조건임. 따라서 고성은 압록강을 오가던 선박이나 뗏목을 정박하던 선착장[碼頭]으로 추정됨.자연환경 古城의 북쪽은 압록강이고, 서쪽에 夾皮溝 골짜기, 동쪽과 남쪽에는 산들이 연이어져 있음. 夾皮溝는 큰 산 사이의 좁은 협곡으로 산비탈이 계단식 지형에 속하는데, 골짜기 사이를 흐르는 작은 개울이 北流하여 古城 서벽 외곽을 지나 압록강에 유입됨. 압록강이 서쪽에서 흘러들어와 古城의 북쪽을 지난 다음, 夾皮村 동쪽에서 방향을 꺾어 북쪽으로 흐르다가 六道溝河 河口에서 다시 방향을 바꾸어 서쪽으로 흘러나가는데, 流向이 古城 부근에서 180° 바뀜. 古城 남쪽에 위치한 夾皮村은 남북으로 길게 자리잡고 있으며, 동쪽과 서쪽은 모두 험준한 산맥임. 夾皮村 북쪽에 臨江-長白 도로가 지나가고 있는데 최근 도로를 확·포장하면서 고성의 남단부를 덮어 버렸음. 古城의 남쪽은 점차 낮아지는 산록과 맞닿아 있고, 북쪽은 압록강가임. 古城은 압록강 右岸의 모래사장에 자리잡고 있는데, 북쪽으로 불과 20여m 거리에 압록강이 있으며 성곽은 강 수면보다 2m 정도 높음.유물정보 1960년대 : 석제 창, 석제 화살촉, 토기편, 철제 화살촉, 동전 등 출토됨. 1987년 : 니질회색토기(泥質灰陶), 사질갈색토기편(夾砂褐陶片), 석제 칼 편(石刀片) 등 채집함.참고문헌 · 羅寶書·邱在官, 『臨江縣志』, 臨江藝文齋印刷所, 1935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渾江市文物志』, 1987 · 王洪峰, 「臨江電站庫區古遺存調査綜述」『博物館研究』 1988-3, 1988 · 國家文物局 主編, 「夾皮溝城址」『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北方史地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4 · 王禹浪·王宏北, 「中國吉林省渾江市三道溝河臨城八隊高句麗古城址」『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1994 · 張天鵬, 「文物」『渾江市志』, 中華書局, 1994 · 余昊奎, 「臨江 東馬鹿村古城」『高句麗 城』 Ⅰ(鴨綠江 中上流篇), 國防軍史硏究所, 1998 · 魏存成, 『高句麗遺跡』, 文物出版社, 2002 · 孫仁杰·遲龍·張殿甲, 「鴨綠江上流右岸考古調査」『東北史地』 2004-5, 2004

    • 리스트여닫기 동마록포자고성(東馬鹿泡子古城) 출토지 임강시 육도구향 동마록촌 압록강 右岸에 위치함(臨江市 六道溝鄉 東馬鹿村 鴨綠江 右岸 位置).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2004년 7월 10일길림성장백산문화연구회, 백산시문관판, 집안시박물관(吉林省長白山文化硏究會, 白山市文管判, 集安市博物館)張福有, 張殿甲, 遲龍, 孫仁杰 등이 참가하여 개괄적인 조사와 측량함. 『東北史地』2004-5에 발표됨.1950년 말경 성곽 서쪽 400여m 떨어진 東馬小學院 內에서 철제 삼족기(三足鐵器), 철제 화살촉(鐵鏃) 등이 출토되었다고 함.1983년 가을혼강시문화국(渾江市文化局)1984년 3월 8일에 渾江市 重點文物保護單位로 지정함.1984년 봄과 6월혼강시문물보사대(渾江市文物普査隊)봄에 유적지 기록 및 사진 촬영, 6월에 실측함. 『渾江市文物志』중의 ‘東馬城址에 발표됨.구조특징 성벽 내부를 흙으로 축조하고, 바깥을 다듬은 돌로 축조한 토석혼축 성벽이라고 함. 성곽 안팎이 모두 밭으로 개간되어 심하게 허물어졌지만, 성곽의 전체적인 윤곽은 잘 드러나 있음. 1984년 당시 동벽과 남벽만 남아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동벽 상부는 흙더미로 퇴적되어 있으며 밭으로 경작되고 있어 원형을 파악할 수 없음. 남벽 서반부의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하지만, 동반부는 흙으로 퇴적되어 밭으로 경작되고 있어 원형을 파악할 수 없음. 북벽과 서벽은 심하게 훼손되었지만, 성벽 가장자리를 따라 성돌이 퇴적되어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아직 성벽 기단부를 볼 수 있음. 1984년 당시 현지인의 말에 의하면 북벽에 원래 문이 하나 있었으나, 이미 북벽과 같이 훼손되어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함. 성 내부는 매우 협소하고 돌더미가 널려 있음. 간혹 건물 기초 흔적으로 보이는 것도 있음역사적 의미 고성은 2단 충적대지의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주변 지세도 비교적 평탄하여 방어와 거주에 적합한 城寨로 추정됨. 또한 압록강을 따라 하류 30㎞ 이내에 이와 서로 유사한 고성이 두 곳이 있는데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여겨짐. 특히 압록강을 향해 있는 남벽에 남문이 있고, 그 바깥에 있었다는 돌계단은 1단 충적대지를 통해 압록강으로 나아가던 통로와 관련된 유적으로 추정됨. 성곽 내부에서 출토된 도끼날형 철촉은 고구려 시기의 화살촉과 비슷하다고 추정됨. 고구려 중기 이후에 축조되어 청말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성 내부에서 발견된 활시위는 청 말에 변경의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생활하였던 유민이 남긴 것으로 추정됨.자연환경 일찍이 이 일대에는 말과 사슴이 많아서 馬鹿泡子라 불렸다고 함. 지금은 충적대지 일대를 농지로 개간하여 비옥한 산간분지로 변함. 동쪽에서 흘러들어온 압록강이 남쪽으로 완만하게 만곡하여 서쪽으로 흘러나가면서 강의 북쪽에 길이 2㎞, 폭 500m 전후의 충적대지 형성함. 충적대지는 2단으로 이루어졌는데, 압록강에 인접하여 좁고 길다란 1단 충적대지가 있고, 그 북쪽으로 1단 대지보다 5-10m 정도 높은 2단 충적대지가 넓게 펼쳐져 있음. 동마록촌은 2단 충적대지의 북쪽 산기슭 아래에 위치함. 고성은 2단 충적대지의 동남쪽 가장자리에 위치하여 있으며, 남쪽 100여m 거리에 위치한 압록강과는 아래쪽 충적대지를 통해 연결됨. 충적대지는 산으로 둘러싸여 분지를 이루는데, 남, 동, 서 3면의 산은 경사가 가파르지만, 북쪽으로는 경사가 비교적 완만한 산줄기가 이어짐.유물정보 화살촉, 창등이 출토됨.참고문헌 · 王禹浪·王宏北, 「中國吉林省渾江市三道溝河臨城八隊高句麗古城址」『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1994 · 余昊奎, 「臨江 東馬鹿村古城」『高句麗 城』 Ⅰ(鴨綠江 中上流篇), 國防軍史硏究所, 1998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渾江市文物志』, 1987 · 國家文物局 主編, 「東馬鹿泡子城址」『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北方史地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4 · 孫仁杰·遲龍·張殿甲, 「鴨綠江上流右岸考古調査」『東北史地』 2004-5, 2004

    • 파구유적(坡口遺蹟)

    • 고가영 고분군 대형고분(賈家營 古墳群 大形古墳)

    • 고가형 고분군 소형고분(賈家營 古墳群 小形古墳)

    • 리스트여닫기 칠도구유적(七道溝遺蹟) 출토지 임강시 육도구향 칠도구촌 (臨江市 六道溝鄉 七道溝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4혼강시문물보사대(渾江市文物普査隊)6월에 유적을 발견하고, 현황과 층위 파악 및 유물을 채집하였으며, 『渾江市文物志』중의 ‘七道溝遺址’를 발표함.1987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혼강시문물관리위원회(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渾江市文物管理委員會)5월에 石肖元, 張立夫, 張立新, 王洪峰이 참가하여 임강댐 수몰지구 조사차 고분군과 더불어 유적을 조사하고, 『博物館硏究』1988-3에 발표함.구조특징 1984년도 조사시에는 七道溝村 동북쪽에 흙을 채취하던 커다란 採土場에 위치하고, 길이 150m, 너비 100m. 깊이 1.8-2.0m 규모의 흙구덩이가 있음. 층위는 지표하 0.30-1.00m는 경작층과 교란층, 1.00-1.50m는 문화층, 1.60m 이하는 황토층으로 생토층이고, 지표하 1.0-1.5m의 문화층에서 파괴된 재구덩이[灰坑]가 나타났으며, 토기편이 다수 출토되었다고 함. 1987년도 조사시에는 2단 대지상에 짙은 회색의 암키와와 수키와, 흑요석, 토기편 등이 많이 흩어져 있었는데, 범위는 남북 100m, 동서 50m임. 문화층인 마을 북쪽은 유적 서편에 해당하는데, 이곳에 채토를 하던 커다란 흙구덩이가 있음. 크게 3개의 층위로 나뉘는데, 제1층은 두께 20㎝로 표토층, 제2층은 두께 80㎝로 黑褐土의 문화층, 제3층은 黃沙土로 생토층임. 제2층의 문화층에서 불탄 흙덩어리, 숯, 토기편 등이 출토됨. 1984년 조사시에 토기편이 다수 출토되었고, 1987년 조사시에 평기와, 수키와, 흑요석, 불탄 흙덩어리, 숯, 토기편 등이 출토되었음.역사적 의미 유적에서 서쪽으로 500-1,000m 거리에 길이 300m, 너비 150m에 이르는 고구려 시기 고분군이 분포하는데, 대부분 적석묘이며, 고분군 남쪽에는 봉토석실묘도 있음. 七道溝 유적은 1984년 조사 때 새로 발견된 유적으로,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과 서측에 분포한 고분군으로 보아 고구려 시기의 마을 유적으로 추정되나, 黑曜石이 대거 분포한 것에서 보듯이 고구려 건국 이전부터 취락이 자리잡았을 가능성이 높음.자연환경 임강시 육도구향 칠도구촌의 동북쪽에 위치함. 유적지에서 서북쪽으로 10여㎞ 거리에 六道溝鄕 소재지가 있고, 유적지에서 동쪽으로 1㎞ 정도만 가면 臨江市와 長白縣의 경계이며, 臨江-長白 도로가 유적지 북쪽을 지나가고 있음. 압록강 북안에 상하 2단의 대지가 산으로 둘러싸여 盆地를 형성했는데, 압록강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盆地 서남단에서 流向을 북쪽으로 꺾은 다음, 盆地 서북단을 지나고나서 다시 방향을 꺾어 西流하고 있음. 盆地 서북쪽에 비교적 넓은 1단 충적대지가 자리잡고 있는데, 논으로 경작되고 있고 그 사이를 七道溝河가 가로질러 압록강에 유입됨. 盆地 동남쪽에 동서 방향의 2단 대지가 자리잡고 있는데, 동쪽으로는 높은 산과 접해 있고, 남쪽 100m 거리에 압록강이 있고, 서북쪽으로는 평탄한 1단 충적대지가 펼쳐져 있음. 2단 대지의 남북 너비는 200m에 불과하며, 그 위에 七道溝村이 자리잡고 있고, 유적은 마을의 동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2단 대지 西端의 小學校 북쪽에는 고구려 시기의 적석묘가 다수 분포해 있음.유물정보 토기 저부 1점, 토기편 다수, 암키와 1점, 수키와 1점, 흑요석기(刮削器) 2점, 석기 2점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渾江市文物志』, 1987 · 王洪峰, 「臨江電站庫區古遺存調査綜述」『博物館研究』 1988-3, 1988 · 國家文物局 主編, 「七道溝遺址」『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칠도구 고분군(七道溝 古墳群)

    • 칠도구 1호분(七道溝 1號墳)

    • 칠도구 2호분(七道溝 2號墳)

    • 칠도구 6호분(七道溝 6號墳)

    • 리스트여닫기 동전자유적(東甸子遺蹟) 출토지 임강시 육도구향 동전자촌 (臨江市 六道溝鄉 東甸子村)연대 원시시대 말기~고구려초기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57 현지 농민인 李秀海가 3-5尺 깊이의 저장 구덩이를 파다가 토기 항아리 2개 채집함. 일찍이 성벽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함.1958 농지를 경작하다가 돌도끼, 돌화살촉, 돌보습 등이 출토함.1960 1960년 기록에서 유적의 동서 길이는 645m, 남북 너비 400m이고, 지표면에서 토기편, 자기편, 어망추 등을 쉽게 볼 수 있었으며, 당시 西面의 고분군과 유적지는 인접하여 이어져 있었으며, 압록강과 도로 중간의 좁고 긴 지대를 유적과 고분군이 점유하고 있었다고 함.1984혼강시문물보사대(渾江市文物普査隊)6월에 유적의 현황을 파악했고, 거의 파괴되었다고 함. 『渾江市文物志』중의 ‘東甸子遺址’로 발표했으며, 유적 조사에 앞서 1984년 3월 8일에 渾江市 重點文物保護單位로 지정됨.1987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혼강시문물관리위원회(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渾江市文物管理委員會)5월에 石肖元, 張立夫, 張立新, 王洪峰이 참가하여 임강댐 수몰지구 조사차 고분군과 더불어 유적을 조사하였고, 『博物館硏究』1988-3에 발표함.구조특징 압록강에 인접한 2단 충적대지상에 분포하며 마을유적이기 때문에 정형화된 평면을 확인하기는 어려운 상태임. 1950년대에 성벽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渾江市志』), 다른 자료에는 관련 언급이 없어서 명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움. 1984년 6월 渾江市 文物普査隊가 재조사할 때는 어떠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고, 원래 있던 100여 기의 고분군 역시 많이 파괴되어 몇 십 기만 남아 있었다고 하나, 1987년 조사에서는 유적의 전체적인 범위와 함께 石器類를 다수 채집했다고 함. 1957년에는 현지 농민이 저장 구덩이를 파다가 토기 항아리 2개 채집하였고, 1958년에는 농지를 경작하다가 석제 도끼, 석제 화살촉, 석제 보습 등 출토되었으며, 1960년대 기록에서는 토기편, 자기편, 어망추 등이 출토되었다고 나와있으며, 1987년 조사에서 석기류를 다수 채집함.역사적 의미 고분군은 1960년대만 하더라도 유적과 인접하여 백여기 이상의 고분이 밀집해 있었지만, 1980년대에는 몇 십 기만 남아 있었다고 함. 그렇지만 지금도 동전자촌 서쪽 경작지와 마을 안쪽에서 수십기의 적석묘를 확인할 수 있으며, 마을 뒤쪽 산기슭에서는 거대한 적석묘가 여러 기 분포해 있음. 유적에서 압록강 하류를 따라 약 2㎞ 정도만 내려가면 樺皮甸子古城이 나오며, 상류를 거슬러 약 8㎞ 정도 가면 夾皮溝古城, 다시 20여㎞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東馬鹿泡子古城이 나옴. 유적에서 臨江-長白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모퉁이를 돌아가면 본래 언덕 위에 臨江 王八脖子窯址가 있었으나 현재는 도로 개설 등으로 모두 유실되었음. 유적지 인근에 고구려시기의 고분군이 대량으로 분포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대체로 고구려 시기의 마을유적으로 추정되나, 유적지 안에서 주로 石器가 발견되고 있어 당시 거주민의 생산력 수준은 비교적 낮았던 것으로 파악되며, 고구려 건국 초기의 일반적인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추정됨. 1950년대에 성벽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渾江市志』), 다른 자료에는 관련 언급이 없어서 명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우나, 실제 성벽이 존재했다면 단순한 마을유적이 아니라 압록강 수로와 연관된 古城일 가능성이 높음.자연환경 고분군은 臨江市 六道溝鄕 東甸子村 남쪽 200m 지점의 경작지에 위치함. 유적지에서 동쪽으로 4㎞ 거리에 六道溝鄕 소재지가 있고, 臨江-長白 도로가 충적대지 북쪽의 산기슭 아래로 통과하고 있으며, 압록강과 도로 사이의 충적대지에 유적지가 광범위하게 분포함. 동쪽에서 흘러들어온 압록강이 완만하게 서쪽으로 흘러나가면서 강의 북쪽에 길이 2㎞, 폭 200-300m 전후의 2단 충적대지를 형성했는데, 압록강에 인접하여 좁고 길다란 1단 충적대지가 있고, 그 북쪽으로 1단 대지보다 5m 정도 높은 2단 충적대지가 넓게 펼쳐져 있음. 동전자 마을은 2단 충적대지의 북쪽 산기슭 아래에 위치해 있는데 지금은 臨江-長白 도로에 의해 마을이 두 개로 분리되어 있음. 유적지는 대지 서단의 2단 충적대지에 위치하여 있으며, 남쪽 50여m 거리에 압록강이 있음. 충적대지는 사면이 모두 경사가 가파른 산으로 둘러싸여 하나의 자그마한 분지를 이루고 있으며, 대지는 농지로 개간되어 경작되고 있음.유물정보 토기 구연부 2점, 석제 도끼 2점, 석제 칼 3점, 어망추 1점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渾江市文物志』, 1987 · 王洪峰, 「臨江電站庫區古遺存調査綜述」『博物館研究』 1988-3, 1988 · 國家文物局 主編, 「東甸子遺址」『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張天鵬, 「文物」『渾江市志』, 中華書局, 1994

    • 왕팔발자요지(王八脖子窯址)

    • 리스트여닫기 육도구동광지(六道溝銅礦址, 夾心崗古銅鑛址) 출토지 임강시 착초정자향(현재의 보산진) 향산진 (臨江市 錯草頂子鄉[現在 寶山鎮] 銅山鎮)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4혼강시문물보사대(渾江市文物普査隊)6월 하순에 동광 발견의 한 사람인 錯草頂子鄕 黨委 書記 周正發 등이 참가하여 광산 간부 등의 도움을 받아 동광의 흔적을 확인하고, 『渾江市文物志』중의 ‘六道溝銅鑛址’에 발표함.1995백산시문물보사대(白山市文物普査隊)5월에 張殿甲 등이 참가하여 古銅鑛 부근의 寶山鎭(原名 錯草頂子鄕) 下亂泥塘四社(舊名 後小溝)의 경작지에서 冶鍊 유적을 발견하고, 『北方文物』2000-2에 발표함.1885(光緖 11) 臨江市 六道溝 동북쪽 산에서 깊이 6m인 오래된 채광 갱도 4개를 발견했고, 이때 제련시에 남긴 찌꺼기[鑛渣]도 많이 발견함.1887-1958 동광 개발 연혁을 보면, 1887년경 鄭鐸民, 孟蘭亭, 郝金堂 등이 채광을 시도하다가 기술적 낙후로 모두 그만뒀고, 1923년부터 개발되어 ‘臨江銅鑛’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1932년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 더욱 본격적으로 채광을 함. 1940년 이후에는 구리보다 군사적 목적에서 몰리브덴[鉬]을 주로 채광했고, 중국 정부 성립 이후 동광 매장량을 조사했으며,1958년부터 광산을 건설해 채광하다가 1983년에 폐광함.1954-1958 이 무렵 중국 정부가 광산을 개발하기 위해 준비에 착수했는데, 당시 沈陽地質勘探公司 108隊[吉林省 冶金 地質 601 勘探隊]의 周正發이 六道溝 銅山鎭(舊名 老黑頂子) 일대를 탐사하다가 2호 동굴에서 오래된 좁은 갱도를 발견했고, 당시 601대가 그린 갱도의 평면도가 欓案 자료로 남아 있음.구조특징 礦脈은 동서 2,600m, 남북 1,000m 범위에 분포하고, 礦石品位는 대체로 0.2% 정도이며, 개별 富礦脈 品位는 20% 정도임. 鑛床은 矽卡岩型의 小型 礦床, 黃銅礦, 斑銅礦과 輝鉬礦 등이 매장됐는데, 매장량(1950년대)은 총 245만톤, 銅 1.7만톤, 몰리브덴[鉬] 1,824톤임. 1885년에 깊이 6m인 채광 갱도 4개를 발견했다고 함. 1950년대에 광산 개발을 위해 이 일대를 탐사하다가 2호 동굴에서 발견한 갱도는 方圓形으로 폭이 0.7m에 불과하며, 깊이는 알 수 없었으나, 갱도에서 靑銅製 등잔과 목제 가래 등이 발견됨. 臨江銅鑛에서 일했던 인부들이 古礦洞의 현황에 대한 전언에 따르면, 채굴하다가 고갱도 발견했고, 고갱도에서 소나무 횃불[明子]을 발견했다고 함. 현대의 갱도는 平行 巷道式 채굴법을 채용하여 여러 갱도를 평행으로 굴진한 다음 다시 주 갱에서 관통해 폭파시켜 광석을 채취하므로 처음 팠던 갱도는 모두 커다란 동굴로 변함. 이에 비해 古坑道는 수직 구덩이식[竪井]을 위주로 했고, 대부분 富礦脈을 따라 굴진해 분포 상태가 불규칙함. 1950년대 말 이래 20여년간 채광하면서 고동광은 거의 모두 사라짐. 1950년대말 六道溝鄕 曲柳樹[현재의 錯草頂子鄕 立新村, 夾心崗이라고도 불림)일대의 冶鍊址에서 석제 도끼, 석제 화살촉, 철제 화살촉, 철제 솥, 동제 불상(銅佛), 마제 석촉이 발견되었고, 부근에서 아궁이[炕址]와 재 구덩이[灰坑] 등도 발견됨. 이 일대 언덕에는 冶鍊址와 목탄과 야련 찌꺼기[溶渣] 등이 남아 있음. 동광 전문가에 따르면 노천 야련은 온도가 높지 않아도 되며, 목탄을 연료로 사용해도 가능하다고 함. 冰湖村 산 위의 冶鍊址는 吉林 冶金 地質 602隊를 퇴직한 趙興國씨의 회상에 따르면, 1950년대 冰湖村 산 위에 가득 흩어져있는 銅渣堆가 발견되었는데, 이 동 찌꺼기들은 近代의 것이 아니었다고 함. 1995년 曲柳樹[夾心崗] 야련지에서 서남쪽으로 2㎞ 정도 떨어진 寶山鎭(原名 錯草頂子鄕) 下亂泥塘4社(舊名 後小溝) 경작지에서 발견되었는데, 유적지 북쪽 300m 거리에 四社, 남쪽 50m 거리에 七道溝河가 있으며, 七道溝河 右岸 2단 대지 위에 위치해 지세는 확 트였고 평탄함. 유적지 규모는 동서 약 200m, 남북 약 100m로서 토질이 비옥하며, 층위는 耕土層 약 15-20㎝, 그 아래 문화층에 탄층[炭層]과 붉게 탄 흙덩이[紅燒土]가 있음. 유적지 표면에 토기편과 銅渣(동 찌꺼기) 등이 흩어져 있고, 현지 학생이 四社 동측의 두 번째 산골짜기에서 동 찌꺼기를 채집함. 1950년대에 발견한 古坑道에서 청동제 등잔과 목제 가래가 발견되었고, 曲柳樹[立新村, 夾心崗] 일대의 冶鍊址에서 석제 도끼, 석제 화살촉, 철제 화살촉, 철제 솥, 동제 불상(銅佛), 마제 석촉 등을 발견했다고 함. 寶山鎭(原名 錯草頂子鄕) 下亂泥塘四社 冶鍊址에서는 동찌꺼기와 함께 토기편을 다수 채집함.역사적 의미 근현대 坑道와 다른 古坑道 현황, 주변의 冶鍊址에서 채집된 유물과 야련 찌꺼기 등으로 보아 고대 銅鑛 및 冶鍊 유적으로 추정되며, 고구려시기부터 개발되어 발해 시기에도 채굴했을 것으로 추정됨. 高麗에 銅이 많다는 『宣和奉使 高麗圖經』의 기록, 周나라 世宗이 비단을 고려의 銅과 교환해 鑄錢했다는 『五代史証』의 기록 등은 본래 고구려 경내에도 銅礦이 있었음을 증명한다고 추정됨. 『冊府元龜』권999에는 ‘唐 文宗 開成 元年(836년) 6월에 淄靑節度使가 상주해 발해가 銅을 정련해 보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당시 압록강 수로를 경유하던 ‘朝貢道’를 통해 발해가 당과 무역하던 상황을 감안하면, 이 기록의 銅은 臨江 銅鑛에서 채굴해 제련(冶煉)한 純銅을 六道溝 河谷-압록강 수로를 거쳐 唐의 淄靑節度使가 주재하던 登州까지 보냈을 가능성이 높음.자연환경 臨江市 六道溝鄕에서 동북쪽 13㎞ 떨어진 錯草頂子鄕[현재의 寶山鎭] 관할의 銅山鎭 서측 산 위에 위치하며, 지금은 폐광된 臨江銅鑛에서 동쪽으로 1㎞ 정도 떨어진 평탄한 산등성이에 위치함. 古銅鑛이 위치한 산등성이는 해발 760m, 比高 300m로 평탄하며, 둥그스럼한 방형으로 면적은 20여만㎞2에 이름.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渾江市文物志』, 1987 · 國家文物局 主編, 「夾心崗古銅鑛址」『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張天鵬, 「鑛業」『渾江市志』, 中華書局, 1994 · 張殿甲, 「鴨綠江中上游高句麗·渤海遺址調査綜述」『北方文物』 2000-2, 2000

    • 리스트여닫기 하남둔유지(河南屯遺址) 출토지 임강시 사도구향 하남둔촌 (臨江市 四道溝鎮 河南屯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4혼강시문물보사대(渾江市文物普査隊)6월에 유적의 현황을 파악하고, 유물을 채집하였으며, 『渾江市文物志』 중의 ‘河南屯遺址’를 발표함.1987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혼강시문물관리위원회(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渾江市文物管理委員會)5월에 石肖元, 張立夫, 張立新, 王洪峰이 참가하여 임강댐 수몰지구 조사차 고분군과 더불어 유적을 조사하였으며, 『博物館硏究』1988-3에 발표함.1995백산시문물보사대(白山市文物普査隊)5월에 張殿甲 등이 참가하여 성곽 현황 파악 및 유물을 채집하고, 『北方文物』2000-2에 발표함.2004길림성장백산문화연구회, 백산시문관판, 집안시박물관(吉林省長白山文化硏究會, 白山市文管判, 集安市博物館)7월 10일에 張福有, 張殿甲, 遲龍, 孫仁杰 등이 참가하여 전체적인 현황 파악 및 유물을 채집하고 『東北史地』2004-5에 발표함.구조특징 1984년 조사 당시에 벽돌공장 북쪽 일대에서 布紋 기와편과 소량의 토기편을 채집했는데, 색상은 회갈색과 황갈색 두 가지 종류가 있고 회갈색이 비교적 많고, 기종은 단지, 바리 등임. 1987년 조사 당시 유적의 분포범위는 마을의 도로를 중심으로 대략 동서 200m, 남북 100m 전후이고, 층위는 제1층 표토층 25㎝, 제2층 황색 모래층 45㎝, 제3층 흑갈토층 15-20㎝이며. 제2층에는 유물이 거의 없고, 제1층·제3층에 유물이 많다고 함. 도로 서측에는 기와편, 동측에는 토기편이 많음. 1995년 조사 당시에는 분포 범위가 남북 100m, 동서 50m이고, 2004년 조사 당시에는 분포 범위가 남북 300m, 동서 200m임. 1984년 조사 당시 담장은 이미 무너진 상태였고, 1987년 당시 유적지 북쪽 부분에는 민가가 자리잡고 있어 유적의 훼손이 심했다고 하며, 1995년 당시 유적 동남부는 마을의 민가로 뒤덮임. 1984년 조사당시 유물 채집 지역 서남쪽에 흙으로 다져 쌓은 담장이 있었는데, 당시에 이미 많이 무너져 殘長 50m, 높이 0.2-0.4m, 최고 높이 1m 정도에 불과했다고 함. 2004년 조사 당시 유적의 서남쪽에 殘長 50m, 높이 0.4-1m, 기단 너비 6m의 城址가 있었다고 함. 2004년 조사 당시 성지 내부의 몇 곳에서 정연하게 배열된 채 높이 솟은 경작지의 흙담이 있었는데, 건축물의 흔적으로 파악됨.역사적 의미 하남둔 유적에서 출토된 기와편이나 토기편 등은 대체로 발해 시기 유물로 추정되는데, 이에 발해시기의 성터 또는 절터로 추정하며, 대체로 西京鴨綠府에 소속된 神州 관할의 神化縣이나 釗門縣 소재지로 추정하고 있음. 한편 하남둔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편들이 고구려 토기의 특징을 비교적 많이 보유하고 있다고 파악하기도 함(王洪峰).자연환경 臨江市 四道溝鄕 河南屯村 북쪽 3㎞의 하남둔에 위치하며, 서북쪽 4㎞에 四道溝鄕 소재지가 있으며, 북쪽 약 500m에 五道溝河가 있음. 압록강가의 대지상에 마을이 있는데, 현대 벽돌 공장이 있고, 이곳에서 오도구하를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四道溝 坡口遺蹟이 나옴. 河南屯은 압록강의 右岸, 오도구하의 南岸에 위치하고, 五道溝河와 압록강 합류지점 동남쪽에 충적대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압록강이 하남둔 서쪽에서 유유히 北流하다가 오도구하와의 합류처를 지난 다음, 사도구하와 합류하면서 流向을 서쪽으로 꺾어 흘러나가고 있음. 특히 하남둔 유적의 압록강 건너편에는 상당히 넓은 충적대지가 펼쳐져 있으며, 하남둔 대지의 동남쪽 산기슭도 경사가 상당히 완만한 편임.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渾江市文物志』, 1987 · 王洪峰, 「臨江電站庫區古遺存調査綜述」『博物館研究』 1988-3, 1988 · 國家文物局 主編, 「河南屯遺址」『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張天鵬, 「文物」『渾江市志』, 中華書局, 1994 · 張殿甲, 「鴨綠江中上游高句麗·渤海遺址調査綜述」『北方文物』 2000-2, 2000 · 孫仁杰·遲龍·張殿甲, 「鴨綠江上流右岸考古調査」『東北史地』 2004-5, 2004

    • 임강 1구역 제10호분(臨江 1區域 第10號墳)

  • 리스트여닫기 장백현(長白縣)

    • 십사도구 전참 고분군(十四道溝 電站 古墳群)

    • 동강 고분군(東江 古墳群)

    • 리스트여닫기 십이도구 고분군(十二道溝 古墳群) 출토지 장백현 12도구진 12도구촌 (長白縣 十二道溝鎮 十二道溝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6장백현문물보사대(長白縣文物普査隊)2기의 원형적석묘 확인2004길림성장백산문화연구회, 백산시문관판, 집안시박물관(吉林省長白山文化硏究會, 白山市文管判, 集安市博物館)기단적석총 2기 확인구조특징 고분군 면적은 매우 큰 편으로 원래 고분이 30여기에 이르나 계단식 밭으로 개간되면서 고분이 심각하게 훼손, 현재 2기 고분만 남아 있는 상태로, 서로 140m 거리에 위치. 2기 고분은 적석총으로 고분의 적석은 4개층으로 구분가능함. 1층 대석층, 2층 河光石層, 3층 작은 자갈돌층, 4층 대석층으로 나누어짐. 3층과 4층에서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3층의 유물은 철제 자귀(鐵鏟) 1건, 동제 호미(銅鐲) 1건, 인골 1구가 나왔고 4층의 유물은 고리자루칼(環首鐵削刀) 1건이 출토됨. 적석부의 직경은 약 8m정도임.역사적 의미 12도구 고분의 형식은 대체로 고구려 초기 적석총과 유사하며, 環首鐵削刀, 鐵鏟, 銅鐲 등 고구려 유물이 출토되어, 고구려의 고분으로 인정됨.자연환경 북쪽으로는 험준한 산등성이가 동서로 펼쳐져 있고 남쪽에는 창자하가 인접해 있는데, 창자하 남쪽에는 12도구촌과 압록강변의 대지가 자리하고 있으며 서쪽으로 약 300m에는 寶泉山 발전소가 있음.유물정보 철제 자귀(鐵鏟), 동제 호미(銅鐲), 고리자루칼(環首鐵削刀)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纂委會, 『長白朝鮮族自治縣文物志』, 1986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孫仁杰·遲勇·張殿甲, 「鴨綠江上流右岸考古調査」『東北史地』 2004-5, 2004

    • 하외자 고분군(下崴子 古墳群)

    • 안락 고분군(安樂 古墳群)

    • 양종장 고분군(良種場 古墳群)

    • 금화 고분군(金華 古墳群)

    • 팔도구진산성(八道溝鎭山城)

    • 십사도구 고성(十四道溝 古城)

    • 리스트여닫기 십사도구 관애(十四道溝 關隘) 출토지 장백현 십사도구진 십사도구촌 (長白縣 十四道溝鎮 十四道溝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60통화지구문물보사대(通化地區文物普査隊)유적 발견1986장백현문물보사대(長白縣文物普査隊)실측과 기록 및 유물 채집을 통해 『長白縣文物志』 중의 ‘十四道口村邑과 關隘’로 발표2004길림성장백산문화연구회, 백산시문관변, 집안시박물관(吉林省長白山文化硏究會, 白山市文管辦, 集安市博物館)개괄적인 현황 파악 후 『東北史地』2004-5에 발표구조특징 古城의 서쪽에 위치하고 양자 사이에는 남북 방향의 도랑이 있음. 고성의 남벽과 일직선으로 축조했는데 길이는 500여m이고 압록강과 평행으로 달리며 대지 서쪽의 산 아래까지 이어졌음. 본래 석축성벽이었다고 함. 고성과 관애 안팎이 모두 농지로 개간되어 경작되고 있어 훼손이 심한데 고성의 성벽은 동북 모서리 부분, 남벽 동단만 조금 남아 있지만 古城 안팎의 토양과 색깔이 달라 전체 범위는 판별할 있음. 관애도 거의 모두 사라지고 현재 관애터는 밭으로 경작되는 주변 지역과 달리 진흙과 갈대밭으로 남아 있어 전체 범위를 쉽게 판별할 수 있음.역사적 의미 十四道溝古城은 형태상 集安 長川古城과 유사하며, 關隘는 集安 老邊墻 關隘와 비슷하다고 추정됨. 출토된 철제 솥은 집안(舊 집안현 郊區鄕) 勝利7隊 출토품과 유사하며, 토기 파수는 東臺子 유적 출토품과 비슷함. 이에 十四道溝古城과 關隘는 고구려 시기의 유적으로 추정할 수 있음. 다만 사질토기를 비롯하여 석제 도끼나 반달돌칼 등은 원시사회 말기의 유물로 추정되는데 이는 십사도구고성이 원시사회 유적 위에 축조되었음을 반영하는 결과임. 현재 압록강 상류에는 성곽과 관애가 본류 右岸을 따라 많이 분포되어 있는데 가령 十四道溝古城에서 압록강을 따라 40여㎞ 내려가면 長白 十二道溝灣關隘, 여기에서 다시 40여㎞를 내려가면 長白 八道溝山城, 다시 10여㎞ 내려가면 臨江 東馬鹿泡子古城, 20여㎞를 더 내려가면 夾皮溝古城, 10여㎞를 더 내려가면 樺皮甸子古城이 각각 나옴. 또한 압록강 상류로 40여㎞를 거슬러 올라가면 발해시기의 성곽인 長白古城이 나옴. 이 가운데 강변 평지성인 東馬鹿泡子古城, 夾皮溝古城, 樺皮甸子古城 등은 압록강 수로와 연관된 역참의 성격이 강한 반면, 산상에 위치한 八道溝山城과 十二道溝灣關隘는 군사방어적 성격이 강한 것으로 추정됨. 그런데 十四道溝古城과 關隘는 소형 평지성과 관애가 동시에 축조되었다는 점에서 역참과 군사적 요충지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 것으로 추정되고 특히 關隘가 압록강 右岸을 따라 동서 방향으로 기다랗게 축조되었다는 점에서 주로 압록강 상류로를 차단하기 위해 축조했을 것으로 추정됨.자연환경 유적은 마을 남쪽 약 1.5㎞에 위치하며 臨江-長白 도로가 古城 북쪽의 대지를 가로 질러 동서 방향으로 있고 古城은 十四道溝河가 압록강으로 유입되는 합류처 서북쪽에 위치해 있음. 十四道溝河와의 거리는 20여m, 압록강과의 거리도 100여m에 불과함. 古城 서쪽 약 50m 거리에 十四道溝 풍력발전소가 있었는데, 지금은 발전소를 가동하지 않고 풍차를 달았던 지지대만 남아 있음. 古城과 關隘가 위치한 곳은 압록강 상류의 산간지대인데, 압록강 북안에 동서 길이 1㎞ 전후, 남북 500m 정도의 충적대지가 펼쳐져 있고, 대지 북쪽으로도 경사가 비교적 완만한 산기슭이 이어지고 있음. 충적대지 남쪽에는 압록강이 동북에서 서남쪽으로 유유히 흐르고 있으며, 압록강의 지류인 십사도구하가 충적대지 동편에서 南流하다가 古城의 동쪽을 지나 동남쪽에서 압록강과 합류함. 古城과 關隘는 이 충적대지의 동남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주변의 토질이 상당히 비옥하여 고성 서쪽 일대는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북쪽 일대는 논으로 개간되어 경작되고 있음.유물정보 석기, 철기, 토기, 기와류 등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長白朝鮮族自治縣文物志』, 1986 · 國家文物局 主編, 「十四道溝遺址」『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長白縣志編纂委員會, 「文物·古迹」『長白朝鮮族自治縣縣志』, 1993 · 王禹浪·王宏北, 「中國吉林省長白縣十四道溝鎭高句麗的村邑與關隘」『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1994 · 余昊奎, 「長白 十四道溝關隘」『高句麗 城』 Ⅰ(鴨綠江 中上流篇), 國防軍史硏究所, 1998 · 孫仁杰·遲龍·張殿甲, 「鴨綠江上流右岸考古調査」『東北史地』 2004-5, 2004

    • 십이도만 관애(十二道灣 關隘)

    • 리스트여닫기 장백고성(長白古城) 출토지 장백현 민주촌 (長白縣 民主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60장백현문물보사대(長白縣文物普査隊)강돌로 축조한 성벽 발견, 현황 조사 및 유물 채집.1986장백현문물보사대(長白縣文物普査隊)1960년에 이은 2차 조사로, 현황 조사 및 유물 채집 후 『長白縣文物志』 중의 ‘長白古城’으로 발표구조특징 1960년대에 조사했던 仙人島 西側 과수원 일대의 성벽은 1986년 조사시에 이미 파괴되어 평평해졌고, 주변에는 기와편 등만 흩어져 있었음. 현지 주민에 따르면 성돌로 채소밭 온실 벽을 만들었다고 하고 성벽 안팎이 채소밭과 과수원으로 경작되고 있어 훼손 상태가 심각함. 1960년에는 仙人島 서측 과수원 일대의 성곽 내부의 건물을 조사했는데 광이 나는 강돌로 축조했고 남북 길이 26m, 동서 너비 20m의 범위로 기단 너비 8.4m, 윗 너비 1.5m, 높이 0.5-1.5m의 규모임. 1986년 이 유적 외곽에서 동서 380m, 동서 240m 정도의 성곽을 확인한 만큼 이 유구는 성곽 내부의 건물로 추정되고 이 유구의 남벽에서 확인했다는 너비 3m 정도의 트인 부분도 성문이 아니라 건물지의 출입 시설로 추정됨. 성벽중 남벽 동단과 서단부에 해당하는 성벽 기초부 발견되었고 두 기단부의 동서 거리는 350m인데 현지 주민에 따르면 새로이 발견된 서쪽 기단에서 서쪽으로 약 30m 뻗어나간 후 북쪽으로 돌아가 계속 대지의 북쪽 큰 두둑 아래까지 뻗어나간다고 하며 남벽의 길이는 약 380m임. 서벽은 남벽 서단과 대지 북쪽의 둔덕 사이로 길이는 약 240m이며 북벽은 대지 북쪽에 위치한 높이 5m 전후의 둔덕으로 추정됨. 전체 규모는 동서 380m, 남북 240m 전후임.역사적 의미 鴨綠江 상류 연안에는 臨江 樺皮甸子古城, 夾皮溝古城, 東馬鹿泡子古城, 長白 十四道溝古城-關隘 등 압록강 수로와 연관된 고구려 시기 평지성이 다수 분포하며 長白古城은 축조 기법이나 위치 등을 근거로 고구려 시기에 축조하여 발해시기까지 축조된 평지성으로 파악하기도 함. 다만 현재까지 출토된 권점문 암키와(圈點紋板瓦), 승문 암키와(繩紋板瓦), 연화문와당(乳釘蓮花紋瓦當) 등은 발해시기의 유물(일부 고구려)로 추정되고 있고 특히 연화문와당(乳釘蓮花紋瓦當)은 전형적인 발해 와당으로 따라서 현재로서는 장백고성을 발해 시기의 평지성으로 비정할 수 밖에 없으며, 그 상한은 향후 고고학 발굴성과를 기다릴 필요가 있음.자연환경 중국의 장백현 소재지와 북한의 혜산시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며 압록강 최상류에서 상당히 넓은 분지를 형성하고 있는데 특히 압록강 북쪽에 위치한 장백현 소재지의 경우, 압록강 부근에는 상하 2단의 충적대지가 형성되어 있고, 그 위쪽으로 완만한 경사지가 전개됨. 古城은 압록강 우안의 2단 충적대지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는데, 고성 동쪽에는 압록강이 서남향으로 흐르다가 古城 동남쪽 부근에서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流向을 서쪽으로 바꾸어 고성 남쪽을 지나가고 있음. 고성의 동쪽과 남쪽 모두 압록강과의 거리는 100-200m 전후이며, 고성과 압록강 사이에는 좁고 기다란 1단 충적대지가 펼쳐져 있음. 고성이 위치한 대지의 북쪽에는 높이 5m 정도의 큰 두둑이 있는데(북벽으로 추정), 그 북쪽으로 장백현 소재지의 주택지구가 펼쳐져 있고 현재 고성이 위치한 대지는 채소밭과 과수원으로 변했음.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長白朝鮮族自治縣文物志』, 1986 · 王禹浪·王宏北, 「中國吉林省長白縣十四道溝鎭高句麗的村邑與關隘」『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1994 · 國家文物局 主編, 「長白城址」『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長白縣志編纂委員會, 「文物·古迹」『長白朝鮮族自治縣縣志』, 1993

    • 마록구고전호(馬鹿溝古戰壕)

    • 리스트여닫기 하외자유적(下崴子遺蹟) 출토지 장백현 십삼도구향 (長白縣 十三道溝鄉)연대 원시사회 말기(기원전 4-3세기)에서 고구려시기 원시사회 말기로 추정되는 사질의 토기편과 석기편이 출토됨. 고구려시기 유적으로 추정되는 흙무지[土包]와 석축방단 발견됨.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6장백현문물보사대(長白縣文物普査隊)실측과 기록을 했고 이를 통해 『長白縣文物志』 중의 ‘下崴子遺址’로 발표구조특징 흙무지와 석축방단이 발견되었는데, 흙무지[土包]는 유적 중앙의 동서에 2개 있고 서로 거리는 50m로 만두 모양이며 지표보다 0.5m 정도 높음. 흙무지 윗면은 광이 나는 강돌로 덮었으며 강돌로 덮힌 흙무지 윗면에서 토기편과 석기편 다량 출토됨. 동쪽 흙무지는 동서 길이 20m, 남북 너비 10m이고 서쪽 흙무지는 동서 길이 10m, 남북 너비 5m임. 건축물로 추정되는 석축 방단은 흙무지 서쪽 100m 지점에 있고 방형으로 한변의 길이가 11.5m, 높이 2.05m임. 층위는 위에서 아래로 제3층까지는 강돌층, 하단의 제4층은 生土層임.역사적 의미 원시사회 말기부터 사람들이 거주하던 유적으로 석축방단은 하단의 생토층을 제외하면 3층으로 된 건축물로 추정됨. 원시사회 말기 이래 고구려시기에 걸친 마을 유적으로 추정가능함.자연환경 북한의 長津江이 압록강과 합류하는 지역으로 압록강 연안을 따라 길이 2.5㎞, 너비 0.5㎞ 전후의 좁고 기다란 충적대지가 형성되어 있는데, 유적은 이 충적대지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음. 충적대지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으며, 북한의 장진강도 이 일대에서 압록강으로 유입되고 있음. 유적과 압록강의 거리는 100여m에 불과함. 충적대지 북쪽에는 동서 방향으로 산줄기들이 이어지고 있는데, 경사가 상당히 가파른 편임. 반면 압록강 맞은편의 산줄기들은 경사가 비교적 완만한 편이며 산기슭 아래로 비교적 넓은 대지가 펼쳐져 있음.유물정보 토기편, 석기 등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長白朝鮮族自治縣文物志』, 1986 · 國家文物局 主編, 「下崴子遺址」『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長白縣志編纂委員會, 「文物·古迹」『長白朝鮮族自治縣縣志』, 1993

    • 리스트여닫기 도권리유적(桃圈里遺蹟) 출토지 장백현 팔도구진 신흥촌 도권리 (長白縣 八道溝鎮 新興村 桃圈里)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95백산시문물보사대(白山市文物普査隊)유적의 전체 현황 조사 및 유물 채집 후 『北方文物』2000-2에 발표구조특징 유적지는 동서 길이 약 100m, 남북 너비 약 50m로 표면에 비교적 많은 토기편과 黑曜石이 흩어져 있음.역사적 의미 약 2㎞ 거리에 北興村 大地 유적지가 있는데 도권리 유적지는 산 끝자락의 완만한 기슭 대지에 자리하고 있으며, 산 정상은 평탄한 지세로 대부분 경작지로 개간되었지만 지세는 비교적 높아 北興村 大地 유적지와 같은 산 위에 위치함. 도권리 유적지와 北興村 대지 유적지의 유물을 비교 분석하면 두 유적의 문화 면모는 기본적으로 일치하며. 특히 이곳에서 10㎞ 못 미치는 거리에 있는 七道溝 유적지에서도 이곳처럼 흑요석기(黑曜石製 刮削器)가 출토되어 양자 사이의 문화적 연관성을 시사해주고 있음. 고구려에서 발해 시기에 걸친 생활유적으로 추정됨.자연환경 유적지는 압록강 지류인 八道溝河 유역의 산 끝자락의 완만한 기슭 대지에 자리하고 있음. 산 정상부는 평탄한 지세로 탁 트였는데 대부분 경작지로 개간되었음.유물정보 토기, 석기, 자기류 등참고문헌 · 張殿甲, 「鴨綠江中上游高句麗·渤海遺址調査綜述」『北方文物』 2000-2, 2000

    • 대지유적(大地遺蹟)

    • 합마천 고분군(蛤蟆川 古墳群)

    • 간구자 고분군(干溝子 古墳群)

    • 리스트여닫기 간구자 1호분(干溝子 1號墳) 출토지 길림성 장백현 십사도구진 간구자촌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鎮 干溝子村)연대 상한: 戰國中期~末期, 하한: 西漢 상한 : B.C 4세기~B.C 3세기초, 하한 - 기원전후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6장백조선족자치현문물보사대(長白朝鮮族自治縣文物普査隊)6월에 고분 19기를 확인 후 편호하고, 파괴된 고분에서 유물 수집하는데 토기(陶罐, 陶盅) 2건과 멧돼지 이빨장식(野猪牙飾) 2건, 녹송석 대롱장식(綠松石管飾) 1건, 일반인이 보유하던 석제 도끼(石斧) 2개 등을 회수함.구조특징 중형묘로 묘역의 돌기단은 장방형임(1986년 문물지와 박윤무의 1995년 글(『압록강 유역 간구자 적석무덤에 대한 조사연구』)을 참조했는데, 박윤무의 1990년 글(「長白縣干溝子墓地調査」)에서는 ‘타원형 기단’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1995년 글에서 ‘타원형의 기단은 원래 방형이었으나 …(중략)…원상태를 잃은 것’이라고 보았다는 점에서 표현상 차이로 보임). 기단은 대괴석으로 쌓았고, 현재 두터운 부식토 표층에 눌려 있으며, 기단 네 모서리 돌이 떨어져 타원형으로 변형된 상태임. 돌기단 위에 3개의 동일한 원형석광적석곶묘가 자리하고 있는데, 무덤의 외부 형태는 원형으로 직경 11m임. 묘광 축조 과정을 보면, 먼저 무덤의 외벽은 길이 0.8-1m, 너비 0.5m, 두께 0.6m의 다듬은 장대석을 촘촘히 둘러 세워 원형으로 쌓고, 묘광(간구자 고분군의 중국 글들에서는 ‘框室’ ‘墓壙’ ‘石壙’ 등으로 표현하고 있으나 ‘묘광’이 보다 적합한 표현으로 판단되므로 이에 따라 정리함.) 내부를 크기가 다른 막돌과 강돌로 채운 후, 주먹크기의 돌을 여러 벌 덮어 정상부를 덮었는데, 원구모양을 하고 있음. 3개 석광적석묘는 삼각형태로 배열되어 있는데, 각 무덤의 간격은 0.5m이고, 무덤 사이사이에는 장방체의 긴돌을 일렬로 서로 연결시켜 일정 형식의 유기적 통일체를 형성하며, 묘광 바깥에는 묘광 높이와 같게 큰 돌을 채워 안팎의 평형을 유지함. 대부분의 묘광 외벽은 소실되고 너비 0.5m, 깊이 0.6m의 구덩이 흔적이 남아 있고, 내부 구조가 노출된 상태임. 1985년 장백조선족자치현 문화국에서 서남쪽에 위치한 제1호 묘광 을 시굴했는데, 동서 9m 길이의 묘광을 관통하는 ‘T’자형 구덩이가 묘광 중앙에서는 북으로 4m가 확장되어 관통함. 이 때 묘광의 4개 단면층을 확인했는데(박윤무의 1995년 글(「압록강 유역 간구자 적석무덤에 대한 조사연구」) 참조함. 1986년 문물지에서도 제1층의 퇴적층(두께 0.2m), 제2층의 河光石層(두께 0.4m), 제3층의 小河卵石層(두께 0.8m, 불탄 인골조각편과 도기, 野猪牙飾, 綠松石管, 석기 등이 발견), 제4층의 大石塊層(두께0.4~0.5m), 제5층의 생토층 등으로 구분하고 있음. 박윤무의 1990년 글(「長白縣干溝子墓地調査」)에서는 제1층의 大石塊層(기단층으로 두께 1.40m), 제2층의 작은 돌과 모래층(묘실이 이 평면층 위에 시설, 두께 0.40~0.50m), 제3층은 小石層으로 구분하고 있음), 제1층은 길이가 보통 0.5-0.8m 정도의 돌을 포개 축조했고, 두께는 1m 정도이며, 묘광을 마련하기 위한 기단층이 있음. 제2층은 기단층 위에 주먹만한 작은 돌과 자갈, 모래 등을 쌓고, 두께는 10㎝ 정도로 반듯한 평면을 이루며, 묘광 외벽은 바로 이 평면층 위로부터 쌓아지기 시작함. 제3층은 묘광 외벽의 높이와 거의 같게 0.4-0.6m 두께를 이룬 큰 돌층이 형성되며, 제4층은 맨 위층으로 자갈과 강돌로 쌓았고, 두께는 0.2-0.3m임. 묘광 상황을 보면, 주검 칸과 葬具가 없고, 인골과 부장품(도기·장식품)은 돌 틈 사이에서 발견되는데, 대부분 자갈층(제2층) 수평면에서 나오며, 器物 등이 놓여 진 모습에 일정한 규칙성이 없음. 인골은 모두 불에 타서 검은 색 혹은 회백색을 띠는 잔편으로 개체의 숫자, 연령 및 성별에 판단이 어렵고, 인골 주위에서 대량의 목탄 발견이 되어 주검을 묻은 후 화장하였던 사실이 확인됨. 제1호분의 고분 구조와 유사한 고분이 제3호 및 제4호분임.역사적 의미 축조방식은 지면에 커다란 돌을 사용하여 일정 범위의 묘역을 조성한 후 냇돌과 할석을 깔아 평면하게 지면을 고르고 무덤의 기저부를 만든 후, 그 위에 단을 쌓아 몇 기의 무덤이 연접되도록 함. 매장방식은 무덤 밖에서 화장한 후 燒骨을 매장한 2차장하고, 대다수 묘광 내부에 불에 타거나 그을린 흔적이 없음. 불에 탄 인골편은 작은 조각으로 가장 큰 것이 길이 5㎝가 안되며, 대략 1/3의 소골은 회백색이며 나머지는 赭色(자색)과 흑색임. 다만 BM2ZK1에서 목탄편이 출토되었고, 1986년 조사된 간구자 1호분(M1)의 석광 안에는 주검칸이나 葬具를 따로 마련하지 않았고 불에 태워진 인골과 대량의 목탄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시신을 묘광 안에 놓고 화장했던 것으로 추정됨. 燒骨은 묘광 내 2, 3곳에 무더기로 안치되었으며, 토기는 묘광 양단에 나누어 부장한 점으로 미루어 一代 혹은 한 가정의 合葬 즉 동일가족 數代의 합장묘 유적일 것임. 따라서 신분 혹은 항렬이 비교적 높은 사람이 주묘단의 중심에 매장되고, 다수 속·부묘단은 항렬의 대소 또는 昭穆제도에 따라 附葬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2001년 발굴한 7기 고분의 부장품은 총 283점으로 작은 장식품을 제외하면 평균 각 묘광에 3점이 부장되었으므로 厚葬은 아님. 전체 부장품 중 토기가 총73점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나 완형보다는 다수가 파편으로 출토되어 토기의 毁器習俗으로 짐작됨. 출토된 그릇은 모두 민무늬의 夾沙褐陶로 모양이 간단하고 종류가 단조롭고 제작 기술이 거칠어 원시성을 반영하며, 그 외 野猪牙飾, 綠松石管 등의 장식품은 모두 압록강 유역과 두만강 유역의 원시문화에서 일찍이 보여주는 전형적 기물임. 간구자 고분군의 무덤들은 하나의 기단 위에 여러 기의 고분이 배열되어 있는데, 특히 7호분은 1기의 원형석광적석묘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장방형의 작은 돌무덤이 방사상으로 배치되어 무덤 사이의 主次관계를 시사함. 즉 중심무덤의 피장자는 주위의 무덤에 비해 사회적 지위가 높은 편이나 반대의 무덤은 중심무덤에 예속된 상태로 추정됨. 반면에 1호분 및 4호분과 같은 단일한 원형석광무덤의 무덤배열 상태에서는 주종 관계가 전혀 보이지 않음. 한 墓區내의 여러 개 무덤은 그 크기와 모양이 같으며 또한 무덤 사이마다 돌로 서로 연결되어 한 무덤구역내의 피장자들 관계가 평등하였다는 것을 시사하며, 이는 혈연관계를 이루고 있는 가족 성원의 무덤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임. 부장품은 장식품이 많고 생산 공구 및 기타 그릇 류가 비교적 적은데, 이는 길림성 중부지구의 九台關馬山, 公主嶺猴石, 樺甸橫道河子 및 東豊, 遼源 일대 많은 大蓋石墓의 부장 특징과 서로 일치하며, 동북지구 남부에서는 戰國晩期~漢代 보편적으로 유행함. 상한연대는 2기 고분에서 方孔圓錢- 半兩錢과 一化으로 추정할 수 있음. 半兩錢은 秦末半兩 혹은 漢初의 八銖半兩이며, 一化는 ‘一刀’로 해석되며, 周秦 또는 秦初 시기의 화폐임. 赤峰 新窝堡와 鐵嶺 邱家台지역의 퇴장유적에서 이들 화폐가 燕·趙의 刀幣 및 반량전과 같이 출토되어 燕國晩期의 화폐로 확정되었으므로 묘지연대의 상한은 戰國末期, 비교적 이른 것은 戰國 中期에 해당됨. 하한연대는 AM1에서 출토된 鐵钁과 AM3·AM4 주묘단에서 채집된 鐵刀로 추정할 수 있는데, 钁은 漢代유행하는 것과 형태가 유사하며, 철도는 直柄環首로 일찍이 集安의 板岔嶺에서 동일한 것이 발굴된 바 있는데, 고구려 적석묘에서 대량 보이는 環首刀보다 조금 이름. 집안 판차령에서 “一化”圓錢이 “半兩”, “五銖”, “大泉五十”, 등의 한대화폐와 함께 출토되었고, 그 유통 시간은 전국말기~東漢임. 그러나 간구자묘지에서는 “오수” 및 동한화폐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고분의 하한은 대체로 동한이전의 서한시기로 비정됨. 간구자묘지의 연대가 집안, 환인 일대의 고구려 적석총보다 앞서므로, 고구려적석총의 가장 이른 형식인 無階段 圓丘上積石墓와 관련이 있을 것임. 고구려 초기의 적석묘의 발전과정을 보면, 무덤은 석광이 따로 없는 간단한 시설로부터 계단식 기단으로 이루어진 ‘框室(앞에서 박윤무의 1995년 글에 따라 ‘묘실’이라 정리하던 개념인데, 이 글에서 이 부분을 ‘框室’로 표현하고 있어 그대로 따랐음)’ 무덤으로 발전하고, ‘광실’은 장방형으로부터 정방형 형태로 변화·발전함. 묘광 위치에서도 위로부터 아래로 점차 내려옴. 이를 종합해 볼 때 간구자의 원형석광적석묘는 고구려 초기 적석총과 유사함. 첫째, 주검칸이 따로 없이 무덤의 기단 윗면을 자갈과 모래로 수평하게 마련하고 그 위에 주검과 부장품을 놓고 막돌로 덮어 정상부를 마무리 한 것은 이것은 환인 201호 및 19호분과 매우 흡사함. 둘째, 기단의 단수와 묘광 형태에서 차이가 있으나 한 무덤구역에 여러 기의 무덤을 연이어 마련한 점은 환인 23-33호분과 일치함. 셋째, 화장하여 묻는 습관이 환인 23호 및 20호분이나 15호분에서 확인되며, 집안 일대의 일부 적석총은 묘광벽이 불에 녹아 응결된 흔적으로 화장하였을 것으로 짐작됨. 따라서 간구자 무덤은 시기적으로 환인 적석총을 위주로 한 고구려 초기 무덤보다는 이르며 대체로 환인 적석총보다 선행된 고구려 早期의 무덤형식으로 고구려족계의 원시적 매장 특징이 짙게 반영됨. 또한 간구자 고분군은 여대지구 청동기 시대 무덤 및 청동단검고분의 특징을 내포하고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와 노철산 고분은 모두 여러 기의 무덤을 서로 가까이하여 ‘벌집형(蜂巢狀)’이며,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평면 형태는 원형으로 된 것도 있음. 이것은 간구자 1호분(M1)·2호분(M2)의 특징과 유사함. 강상묘는 하나의 무덤구역에 1기의 중심무덤을 마련하고 그 둘레를 돌면서 여러 기의 무덤을 방사선 형태로 마련하였는데, 이것은 간구자 7호분(M7)과 매우 유사함. 그리고 강상·누상묘 등 적지 않은 청동단검묘는 모두 화장한 무덤이라는 사실에서도 간구자 고분과 일치함.(『조선고고학개요』에서는 ‘노철산 및 장군산 고분→강상·누상묘→고구려 적석묘’라는 계승 발전관계를 설정하고 있고, 왕성생(1981, 「요하 유역 및 부근지역의 短鋌曲刃劍 연구」『요녕성고고박물관학회설립대회』회간)은 강상묘를 비롯한 요동문화유형의 무덤 형식과 매장습속이 환인 고구려 적석무덤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고구려 적석묘는 강상묘의 계승과 발전’이라고 보고 있음) 또한 여대지구 강상과 루상, 우가촌 타두 적석묘 등과 같은 집단묘로서, 家族合葬墓라는 점에서 공통됨. 반면 강상·누상 적석묘는 평지에 축조되었으며, 묘단은 없고, 묘광이 장방 혹은 방사상으로 분포하며, 중심 묘광의 4벽은 판석을 세워 만들었고, 우가촌 타두 적석묘 역시 묘광이 타원형 또는 부정형으로, 보통 평행을 이루는 가로배열로 분포하며 묘단을 만들지 않았음. 따라서 강상·루상과 우가촌 타두는 간구자 적석묘와는 축조 방법에서의 차이가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연대는 3230±90년B.P. 이고, 강상·누상묘는 기원전 1세기 전반기에 해당된 고조선 시기이며, 환인 지역 적석묘는 제15호분에서 環首式 철칼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東漢 시대로, 늦어도 漢·魏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음. 간구자 고분군의 상대적 축조연대는 대체로 전국시기로부터 서한 말기에 해당되므로, 간구자 고분군은 강상·누상묘에서 환인 적석묘로 발전해 나아가는 과정의 과도기 단계로서 고구려 선인들의 토착문화로 추정됨. 연접 방식은 3형식으로 나뉘는데, 제1형식은 속·부묘단이 주묘단을 둘러싸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지 않으며(AM3, AM4, BM5), 제2형식은 속·부묘단의 밖에 다시 제2속묘단이 외접하고, 제1형식이 주묘단만을 둘러싸지만, 제2형식은 연이어 속묘단이 함께 둘러싸고 하나의 부묘단이 기점이 되어 2개의 방향으로 나누어 펼쳐짐(BM2, BM4). 3형식 : 먼저 주묘단을 두르고 밖으로 다시 속묘단을 쌓고, 빈곳에 1, 2개의 부묘단을 세운 후 연속으로 서남방향에 속묘단을 설치한 후, 양쪽에 연속하여 부묘단을 대칭으로 축조함(AM1, AM2). 제1형식이 제2형식의 미완성형식이라면 비교적 이른 고분은 모두 먼저 주묘단을 쌓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였는데, 부·속묘단이 연접하는 방향은 서남쪽으로 접속하지만, 일정하지 않다가 비교적 늦은 고분에서 서남쪽으로 확장방향이 정형성을 띰. 속묘단은 중심선에 의해 대다수 서남방향으로 연접하며 부묘단은 양쪽으로 分列하는데, 대다수는 비교적 대칭적임. 연접 방식에 따른 배열법의 변천순서는 제1형식→제2형식→제3형식 순으로 변하고, 이런 양상은 고분군의 분포 양상과도 합치됨. A와 B구역을 보면, 산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가 이른데 비해, 강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는 비교적 늦음. 上→下의 배열과 발전과정은 환인과 집안 일대의 고구려적석총의 배열과 일치함.자연환경 간구자1호분은 서간구자하 동쪽 구역 서남단, 장백과 임강을 잇는 長臨 도로가에 위치함. 간구자촌은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鎭 서쪽 0.5㎞ 지점에 위치하고, 고분은 干溝子村의 東·西干溝河 양안의 하곡 충적대지상에 분포함. 동쪽으로 長白縣城과 45㎞ 떨어져 있고, 동·서·북 3면이 高山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름. 압록강과 고분군 사이의 馬架子山을 기준으로 동쪽의 동간구하, 서쪽의 서간구하가 흐르는데, 서간구하는 동북에서 서남으로 흘러 고분군를 거쳐 압록강으로 흘러 감. 장백과 임강을 잇는 長臨도로가 동남에서 서북으로 뻗어 고분군을 양분하고, 고분군의 서·남 양쪽 산위에는 청동기시대 유적 분포함. 간구자 고분은 여러 차례 조사가 있었으나 1986년과 2001년 조사로 대별되는데, 특히 2001년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계기로 1986년 조사때보다 묘역이 크게 확대되었음. 앞서 고분 분포현황에서 언급하였듯이 2001년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묘역은 크게 A, B, C, D의 4구역으로 이루어졌는데 비해, 1986년 보고서에는 2001년 보고서의 A와 B 지역 일대를 파악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으므로 2001년 고분의 편호는 1986년 조사를 고려하지 않고 새로 편호하고 있기 때문에 양자의 개별 고분들을 직접 연결시켜 파악하기는 어려운 상황임. 때문에 개별고분의 상황을 두 시기로 나누어 정리하였음.유물정보 복원 가능한 토기 2점, 완(陶碗) 1점, 잔(陶杯) 1점, 석제 도끼(石斧) 2점, 멧돼지이빨장식(野猪牙飾) 2점, 대롱장식(綠松石管飾) 1점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長白朝鮮族自治縣文物志』, 1986 · 朴潤武, 「長白縣干溝子墓地調査」『博物館研究』 1990-3, 1990 ·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 編, 『吉林省志』 45(民族志), 吉林人民出版社, 1991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朴潤武, 「압록강 유역 干溝子 적성무덤에 대한 조사연구」『中國境內 高句麗遺蹟 硏究』, 예하출판, 1995 · 王洪峰·孫仁傑·遲勇, 「吉林長白縣干溝子墓地發掘簡報」『考古』 2003-8, 2003 · 孫仁杰·遲勇·張殿甲, 「鴨綠江上流右岸考古調査」『東北史地』 2004-5, 2004

    • 간구자 2호분(干溝子 2號墳)

    • 간구자 3호분(干溝子 3號墳)

    • 간구자 4호분(干溝子 4號墳)

    • 간구자 7호분(干溝子 7號墳)

    • 간구자 무기단적석묘(干溝子 無基壇積石墓)

    • 리스트여닫기 간구자 AM1호분(干溝子 AM1號墳) 출토지 길림성 장백현 십사도구진 간구자촌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鎮 干溝子村)연대 상한: 戰國中期~末期, 하한: 西漢 상한 - B.C 4세기~B.C 3세기초, 하한 - 기원전후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2001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장백현문물보호관리소, 집안시박물관(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長白縣文物保護管理所, 集安市博物館)5월-7월 조사에서 1986년 편호와 달리 새로이 편호하는데 1986년 편호된 고분가운데 M15~M19의 5기 가운데 1기만 남아 있고, 1986년도에 편호되지 않은 고분 중 고분 형식을 판별할 수 있는 고분 고려하여 새로이 편호하였으며, 서간구하 북안의 A구 4기와 그 남안의 B구 3기를 발굴함.구조특징 A구 남부에 위치하며 전체 형태는 橢圓丘狀으로 정상부 최고 높이는 1.5m임. 주묘단 1기, 속묘단 3기, 부묘단 6기로 구성되어 있고, 고분의 남면과 서쪽의 바깥쪽 부묘단이 이미 남아 있지 않으며, 지상에는 내부 부묘단과 연결된 벽이 노출된 상태임. 주묘단(ZT)은 원형으로 직경 5~5.2m, 높이 1.25m이고, 판석으로 사방을 쌓았으며, 보존상태는 양호함. 높이가 0.8~0.9m이고 지탱석이 남아 있는 상태로 중심묘광(ZK1)의 방향은 75도이고, 평면은 타원형임. 둘레는 냇돌이 2줄 돌아가는데 길이 1m, 너비 0.65m, 묘광의 깊이(壙深) 0.15m임. 묘광 바닥은 잔 냇돌을 0.2m 두께로 깔았고, 묘광 내에는 불탄 인골조각이 있음. 2개의 작은 타원형 돌무지가 있는데 주묘단의 서쪽 묘단 가장자리 부근에 남북으로 배열되어 있고, 그 바깥 둘레에 돌을 놓아 대체로 원을 이루며, 북쪽 돌무지의 범위는 길이 0.8m, 너비 0.65m, 두께 0.1m이고, 陶罐 잔편이 1개 보이나 인골은 없음. 남쪽 돌무지는 길이 0.7m, 너비 0.5m, 두께 0.14m이고, 인골이나 유물이 보이지 않음. 속묘단(XT1-XT3)은 주묘단 남·북 양쪽에 속묘단이 연접해 있는데 XT1, XT2, XT3가 있음. XT1과 XT3은 서남방향으로 연접하고, XT2는 동북방향으로 연접해 있음. XT1은 타원형 평면으로 직경 5.2m이고, 돌 울타리의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殘高 0.6m임. 상부에는 7·8층의 평평한 할석을 쌓쌓았고, 밖에는 지탱석과 커다란 할석이 있음. 묘광(XK1)은 주묘단의 둘레돌에 기대어 있는데, 평면 타원형으로 길이 2.2m, 너비 0.7m, 깊이 0.05m이고, 묘광바닥의 냇돌의 두께는 0.12m이며, 燒骨, 철제 괭이(鐵钁) 1건, 석제 호미(石鋤) 2건(Ⅰ식·Ⅱ식)이 출토됨. XT2는 반원형 평면으로 직경 약 4m이고, 묘단 둘레가 남아 있지 않고 바닥만 남아 있음. 묘광(XK2)은 圓角長方形형으로 길이 1.6m, 너비 0.65m, 깊이 0.08m이고, 방향은 XK1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며, 주묘단 ZK1의 방향과 수직으로 위치함. 묘광 내 두께 0.05m의 작은 강돌층이 있고, 사질토기(夾砂褐陶) 잔편이 출토되었으나 인골은 보이지 않음. XT3은 타원형 평면으로 직경 4.6m이고, 둘레 돌이 무너져 殘高 0.4~0.6m임. 묘광(XK3)은 圓角長方形인데 길이 1.8m, 너비 0.87. 깊이 0.1m이고, 묘광 내 두께 0.12m의 강돌층이 있음. 묘광 중간에 燒骨이 있는데, 동남부에서 심발형토기(深腹罐 CⅡ식)과 骨器 각 1건, 남색·백색 대롱(藍·白管) 13건이 출토함. 묘광(XK4)은 부정형으로 한변 길이 1.2m, 너비 0.8m, 두께 0.1m의 작은 냇돌로 축조했고, 토기편·석제 방추차(石紡輪) 각 1건, 흰색 대롱(白管) 4건이 출토함. XT3 서쪽에 1기의 속묘단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고, XT3 남쪽에는 돌덩어리가 비교적 많이 산재해 있으며, 동서 방향으로 대략 3.8m가 떨어져 보이는 둘레돌 기초 2줄 확인되나 파괴가 심함. 부묘단(FT1~FT6)은 주·속묘단 중심축의 양쪽에 마주하여 위치하고, 묘광 방향은 주묘단 묘광의 장축과 대부분 일치함. FT1은 타원형 평면으로 길이 4.7m, 너비 1.7m이고, 묘광(FK1)은 장방형으로 길이 약 4m, 너비 1m이고, 묘광 바닥의 0.14m 두께로 냇돌 깔았으며, 두 덩어리의 불탄 뼈조각과 심발형토기 1건(深腹罐 BⅡ식)이 출토됨. FT2는 반원형으로 직경 약 5m이고, 바깥 가장자리의 둘레돌은 남아 있지 않음. 묘광(FK2)는 타원형으로 길이 3m, 너비 1.3m, 깊이 0.5m이고, 바닥의 냇돌 두께는 0.16m이며, 묘광내 남·북 2곳에서 燒骨 각 1 무더기, 토기편 각 1건이 출토함. FT3은 橢圓形에 가까운 평면형태로 길이 4.2m, 너비 1m이고, 둘레돌은 보존이 양호하며, 둘레 돌 밖에 지탱석인 倚石 3개가 잔존하며, 돌레돌 높이는 0.85m임. 묘광(FK3)은 墓壙壁이 보이지 않고, 바닥의 냇돌 범위는 길이 3.5m, 너비 0.8m, 두께 0.14m이며, 燒骨, 백색 대롱(白管) 10점, 토기편이 약간 출토됨. FT4는 반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직경 약 4.5m이고, 둘레 돌은 대부분 훼손되었음. 묘광(FK4)는 타원형으로 길이 2.6m, 너비 1m, 깊이 0.18m이고, 묘광 바닥의 냇돌은 두께 0.08m이며, 燒骨·심발형토기편 2건(深腹罐 AⅡ식)·백색 대롱 3개가 출토함. 작은 돌무지는 묘광(FK4) 남쪽의 XT3의 둘레돌 아래 인접하여 위치하고, 평면 원형으로 주위에는 냇돌로 둘레를 돌렸는데 직경 약 0.5m, 두께 0.08m이고, 돌무지 안에는 碎骨이 있음. FT5는 파괴가 심하여 둘레돌 흔적만 남음. 묘광(FK5)은 평면 타원형의 냇돌층만 잔존하고, 길이는 0.5m, 너비 0.4m, 두께 0.06m이며, 석제 방추차 1건과 토기 잔편 1건이 출토되었었으나 인골은 보이지 않음. FT6으로 추정되는 것은 FT1과 XT2 사이의 공간에 많은 큰 돌이 산재하고 둘레가 정리된 상태로, FT1과 FT3 동쪽으로 많은 배열을 이루는 커다란 냇돌이 있음.역사적 의미 축조방식은 지면에 커다란 돌을 사용하여 일정 범위의 묘역을 조성한 후 냇돌과 할석을 깔아 평면하게 지면을 고르고 무덤의 기저부를 만든 후, 그 위에 단을 쌓아 몇 기의 무덤이 연접되도록 함. 매장방식은 무덤 밖에서 화장한 후 燒骨을 매장한 2차장하고, 대다수 묘광 내부에 불에 타거나 그을린 흔적이 없음. 불에 탄 인골편은 작은 조각으로 가장 큰 것이 길이 5㎝가 안되며, 대략 1/3의 소골은 회백색이며 나머지는 赭色(자색)과 흑색임. 다만 BM2ZK1에서 목탄편이 출토되었고, 1986년 조사된 간구자 1호분(M1)의 석광 안에는 주검칸이나 葬具를 따로 마련하지 않았고 불에 태워진 인골과 대량의 목탄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시신을 묘광 안에 놓고 화장했던 것으로 추정됨. 燒骨은 묘광 내 2, 3곳에 무더기로 안치되었으며, 토기는 묘광 양단에 나누어 부장한 점으로 미루어 一代 혹은 한 가정의 合葬 즉 동일가족 數代의 합장묘 유적일 것임. 따라서 신분 혹은 항렬이 비교적 높은 사람이 주묘단의 중심에 매장되고, 다수 속·부묘단은 항렬의 대소 또는 昭穆제도에 따라 附葬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2001년 발굴한 7기 고분의 부장품은 총 283점으로 작은 장식품을 제외하면 평균 각 묘광에 3점이 부장되었으므로 厚葬은 아님. 전체 부장품 중 토기가 총73점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나 완형보다는 다수가 파편으로 출토되어 토기의 毁器習俗으로 짐작됨. 출토된 그릇은 모두 민무늬의 夾沙褐陶로 모양이 간단하고 종류가 단조롭고 제작 기술이 거칠어 원시성을 반영하며, 그 외 野猪牙飾, 綠松石管 등의 장식품은 모두 압록강 유역과 두만강 유역의 원시문화에서 일찍이 보여주는 전형적 기물임. 간구자 고분군의 무덤들은 하나의 기단 위에 여러 기의 고분이 배열되어 있는데, 특히 7호분은 1기의 원형석광적석묘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장방형의 작은 돌무덤이 방사상으로 배치되어 무덤 사이의 主次관계를 시사함. 즉 중심무덤의 피장자는 주위의 무덤에 비해 사회적 지위가 높은 편이나 반대의 무덤은 중심무덤에 예속된 상태로 추정됨. 반면에 1호분 및 4호분과 같은 단일한 원형석광무덤의 무덤배열 상태에서는 주종 관계가 전혀 보이지 않음. 한 墓區내의 여러 개 무덤은 그 크기와 모양이 같으며 또한 무덤 사이마다 돌로 서로 연결되어 한 무덤구역내의 피장자들 관계가 평등하였다는 것을 시사하며, 이는 혈연관계를 이루고 있는 가족 성원의 무덤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임. 부장품은 장식품이 많고 생산 공구 및 기타 그릇 류가 비교적 적은데, 이는 길림성 중부지구의 九台關馬山, 公主嶺猴石, 樺甸橫道河子 및 東豊, 遼源 일대 많은 大蓋石墓의 부장 특징과 서로 일치하며, 동북지구 남부에서는 戰國晩期~漢代 보편적으로 유행함. 상한연대는 2기 고분에서 方孔圓錢- 半兩錢과 一化으로 추정할 수 있음. 半兩錢은 秦末半兩 혹은 漢初의 八銖半兩이며, 一化는 ‘一刀’로 해석되며, 周秦 또는 秦初 시기의 화폐임. 赤峰 新窝堡와 鐵嶺 邱家台지역의 퇴장유적에서 이들 화폐가 燕·趙의 刀幣 및 반량전과 같이 출토되어 燕國晩期의 화폐로 확정되었으므로 묘지연대의 상한은 戰國末期, 비교적 이른 것은 戰國 中期에 해당됨. 하한연대는 AM1에서 출토된 鐵钁과 AM3·AM4 주묘단에서 채집된 鐵刀로 추정할 수 있는데, 钁은 漢代유행하는 것과 형태가 유사하며, 철도는 直柄環首로 일찍이 集安의 板岔嶺에서 동일한 것이 발굴된 바 있는데, 고구려 적석묘에서 대량 보이는 環首刀보다 조금 이름. 집안 판차령에서 “一化”圓錢이 “半兩”, “五銖”, “大泉五十”, 등의 한대화폐와 함께 출토되었고, 그 유통 시간은 전국말기~東漢임. 그러나 간구자묘지에서는 “오수” 및 동한화폐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고분의 하한은 대체로 동한이전의 서한시기로 비정됨. 간구자묘지의 연대가 집안, 환인 일대의 고구려 적석총보다 앞서므로, 고구려적석총의 가장 이른 형식인 無階段 圓丘上積石墓와 관련이 있을 것임. 고구려 초기의 적석묘의 발전과정을 보면, 무덤은 석광이 따로 없는 간단한 시설로부터 계단식 기단으로 이루어진 ‘框室(앞에서 박윤무의 1995년 글에 따라 ‘묘실’이라 정리하던 개념인데, 이 글에서 이 부분을 ‘框室’로 표현하고 있어 그대로 따랐음)’ 무덤으로 발전하고, ‘광실’은 장방형으로부터 정방형 형태로 변화·발전함. 묘광 위치에서도 위로부터 아래로 점차 내려옴. 이를 종합해 볼 때 간구자의 원형석광적석묘는 고구려 초기 적석총과 유사함. 첫째, 주검칸이 따로 없이 무덤의 기단 윗면을 자갈과 모래로 수평하게 마련하고 그 위에 주검과 부장품을 놓고 막돌로 덮어 정상부를 마무리 한 것은 이것은 환인 201호 및 19호분과 매우 흡사함. 둘째, 기단의 단수와 묘광 형태에서 차이가 있으나 한 무덤구역에 여러 기의 무덤을 연이어 마련한 점은 환인 23-33호분과 일치함. 셋째, 화장하여 묻는 습관이 환인 23호 및 20호분이나 15호분에서 확인되며, 집안 일대의 일부 적석총은 묘광벽이 불에 녹아 응결된 흔적으로 화장하였을 것으로 짐작됨. 따라서 간구자 무덤은 시기적으로 환인 적석총을 위주로 한 고구려 초기 무덤보다는 이르며 대체로 환인 적석총보다 선행된 고구려 早期의 무덤형식으로 고구려족계의 원시적 매장 특징이 짙게 반영됨. 또한 간구자 고분군은 여대지구 청동기 시대 무덤 및 청동단검고분의 특징을 내포하고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와 노철산 고분은 모두 여러 기의 무덤을 서로 가까이하여 ‘벌집형(蜂巢狀)’이며,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평면 형태는 원형으로 된 것도 있음. 이것은 간구자 1호분(M1)·2호분(M2)의 특징과 유사함. 강상묘는 하나의 무덤구역에 1기의 중심무덤을 마련하고 그 둘레를 돌면서 여러 기의 무덤을 방사선 형태로 마련하였는데, 이것은 간구자 7호분(M7)과 매우 유사함. 그리고 강상·누상묘 등 적지 않은 청동단검묘는 모두 화장한 무덤이라는 사실에서도 간구자 고분과 일치함.(『조선고고학개요』에서는 ‘노철산 및 장군산 고분→강상·누상묘→고구려 적석묘’라는 계승 발전관계를 설정하고 있고, 왕성생(1981, 「요하 유역 및 부근지역의 短鋌曲刃劍 연구」『요녕성고고박물관학회설립대회』회간)은 강상묘를 비롯한 요동문화유형의 무덤 형식과 매장습속이 환인 고구려 적석무덤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고구려 적석묘는 강상묘의 계승과 발전’이라고 보고 있음) 또한 여대지구 강상과 루상, 우가촌 타두 적석묘 등과 같은 집단묘로서, 家族合葬墓라는 점에서 공통됨. 반면 강상·누상 적석묘는 평지에 축조되었으며, 묘단은 없고, 묘광이 장방 혹은 방사상으로 분포하며, 중심 묘광의 4벽은 판석을 세워 만들었고, 우가촌 타두 적석묘 역시 묘광이 타원형 또는 부정형으로, 보통 평행을 이루는 가로배열로 분포하며 묘단을 만들지 않았음. 따라서 강상·루상과 우가촌 타두는 간구자 적석묘와는 축조 방법에서의 차이가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연대는 3230±90년B.P. 이고, 강상·누상묘는 기원전 1세기 전반기에 해당된 고조선 시기이며, 환인 지역 적석묘는 제15호분에서 環首式 철칼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東漢 시대로, 늦어도 漢·魏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음. 간구자 고분군의 상대적 축조연대는 대체로 전국시기로부터 서한 말기에 해당되므로, 간구자 고분군은 강상·누상묘에서 환인 적석묘로 발전해 나아가는 과정의 과도기 단계로서 고구려 선인들의 토착문화로 추정됨. 연접 방식은 3형식으로 나뉘는데, 제1형식은 속·부묘단이 주묘단을 둘러싸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지 않으며(AM3, AM4, BM5), 제2형식은 속·부묘단의 밖에 다시 제2속묘단이 외접하고, 제1형식이 주묘단만을 둘러싸지만, 제2형식은 연이어 속묘단이 함께 둘러싸고 하나의 부묘단이 기점이 되어 2개의 방향으로 나누어 펼쳐짐(BM2, BM4). 3형식 : 먼저 주묘단을 두르고 밖으로 다시 속묘단을 쌓고, 빈곳에 1, 2개의 부묘단을 세운 후 연속으로 서남방향에 속묘단을 설치한 후, 양쪽에 연속하여 부묘단을 대칭으로 축조함(AM1, AM2). 제1형식이 제2형식의 미완성형식이라면 비교적 이른 고분은 모두 먼저 주묘단을 쌓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였는데, 부·속묘단이 연접하는 방향은 서남쪽으로 접속하지만, 일정하지 않다가 비교적 늦은 고분에서 서남쪽으로 확장방향이 정형성을 띰. 속묘단은 중심선에 의해 대다수 서남방향으로 연접하며 부묘단은 양쪽으로 分列하는데, 대다수는 비교적 대칭적임. 연접 방식에 따른 배열법의 변천순서는 제1형식→제2형식→제3형식 순으로 변하고, 이런 양상은 고분군의 분포 양상과도 합치됨. A와 B구역을 보면, 산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가 이른데 비해, 강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는 비교적 늦음. 上→下의 배열과 발전과정은 환인과 집안 일대의 고구려적석총의 배열과 일치함.자연환경 간구자촌은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鎭 서쪽 0.5㎞ 지점에 위치하고, 고분은 干溝子村의 東·西干溝河 양안의 하곡 충적대지상에 분포함. 동쪽으로 長白縣城과 45㎞ 떨어져 있고, 동·서·북 3면이 高山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름. 압록강과 고분군 사이의 馬架子山을 기준으로 동쪽의 동간구하, 서쪽의 서간구하가 흐르는데, 서간구하는 동북에서 서남으로 흘러 고분군를 거쳐 압록강으로 흘러 감. 장백과 임강을 잇는 長臨도로가 동남에서 서북으로 뻗어 고분군을 양분하고, 고분군의 서·남 양쪽 산위에는 청동기시대 유적 분포함. 간구자 고분은 여러 차례 조사가 있었으나 1986년과 2001년 조사로 대별되는데, 특히 2001년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계기로 1986년 조사때보다 묘역이 크게 확대되었음. 앞서 고분 분포현황에서 언급하였듯이 2001년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묘역은 크게 A, B, C, D의 4구역으로 이루어졌는데 비해, 1986년 보고서에는 2001년 보고서의 A와 B 지역 일대를 파악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으므로 2001년 고분의 편호는 1986년 조사를 고려하지 않고 새로 편호하고 있기 때문에 양자의 개별 고분들을 직접 연결시켜 파악하기는 어려운 상황임. 때문에 개별고분의 상황을 두 시기로 나누어 정리하였음.유물정보 심발형토기 3점, 옥드리개 1점, 석제 호미 2점, 방추차 3점, 대롱 1점, 철제 괭이 1점, 흰색대롱 다수, 뼈드리개 1점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長白朝鮮族自治縣文物志』, 1986 · 朴潤武, 「長白縣干溝子墓地調査」『博物館研究』 1990-3, 1990 ·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 編, 『吉林省志』 45(民族志), 吉林人民出版社, 1991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朴潤武, 「압록강 유역 干溝子 적성무덤에 대한 조사연구」『中國境內 高句麗遺蹟 硏究』, 예하출판, 1995 · 王洪峰·孫仁傑·遲勇, 「吉林長白縣干溝子墓地發掘簡報」『考古』 2003-8, 2003 · 孫仁杰·遲勇·張殿甲, 「鴨綠江上流右岸考古調査」『東北史地』 2004-5, 2004

    • 리스트여닫기 간구자 AM2호분(干溝子 AM2號墳) 출토지 길림성 장백현 십사도구진 간구자촌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鎮 干溝子村)연대 상한: 戰國中期~末期, 하한: 西漢 상한 - B.C 4세기~B.C 3세기초, 하한 - 기원전후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2001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장백현문물보호관리소, 집안시박물관(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長白縣文物保護管理所, 集安市博物館)5월-7월 조사에서 1986년 편호와 달리 새로이 편호하는데 1986년 편호된 고분가운데 M15~M19의 5기 가운데 1기만 남아 있고, 1986년도에 편호되지 않은 고분 중 고분 형식을 판별할 수 있는 고분 고려하여 새로이 편호하였으며, 서간구하 북안의 A구 4기와 그 남안의 B구 3기를 발굴함.구조특징 주묘단 2기, 속묘단 5기, 부묘단 9기로 조성되어 있고, 중심부분 높이는 2.1m이며, 전체형태는 橢圓丘狀으로 중심축의 방향은 55°임. 고분은 일찍 파괴되었는데, 동쪽 주묘단 邊墻은 1/3이 파괴되었고, 남면의 부묘단 5기(FT5~FT9)도 기초부만 남아 있음. 주묘단(ZT1, ZT2)은 쌍주묘단으로 구조는 다른 고분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나 다만 묘광 아래 묘실이 없고, 묘단 아래에는 腰坑이 없음. 층위상 2호 주묘단(ZT2)이 먼저 만들어졌음. 주묘단은 동·서로 배열되어 있는데, 서로 1.2m 떨어져 있고 중간에 XT1이 연접되어 있음. ZT1은 원형으로 직경 6m, 높이 1.6m이고, 2개의 묘광이 있는데, ZK1과 ZK2가 서로 평행하고, 방향은 모두 140°임. 묘광(ZK1)은 타원형으로 길이 2.5m, 너비 0.85~1.2m, 깊이 0.2m이고, 묘광 둘레를 쌓은 돌은 비교적 적으며, 밑바닥의 강돌층은 0.08m 두께이며, 燒骨과 토기편 1점이 출토됨. 묘광(ZK2)는 말각장방형으로 길이 2.5m, 너비 0.6m, 깊이 0.15m이고, 밑바닥의 작은 강돌층 두께가 0.06m임. ZK1과 0.5m 떨어져 위치하고, 燒骨이 양쪽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토기 1점, 藍管 2점이 출토됨. ZT2는 타원형으로 길이 7m, 너비 6m이고, 둘레돌의 보존은 양호함. 높이 1.5~1.9m로 얇은 할석과 편평한 냇돌로 틈새를 메웠고, 서쪽은 가장 높은 곳은 14층을 쌓아 올렸으며, 가장자리는 弧線으로 정리함. 주묘단 주위에는 지탱석 52개가 세워져 있는데, 지탱석 사이의 거리는 0.3~0.5m이고, 지탱석은 장방형이거나 커다란 할석도 있음. 묘광은 3개이고 방향은 138°임. 묘광(ZK4)은 圓角長方形으로 길이 2.5, 너비 0.9m, 깊이 0.22m이고, 둘레는 비교적 큰 돌로 축조했으며, 밑바닥에 두께는 0.08m로 냇돌 깔음. 燒骨과 심발형토기 3건(深腹罐 CⅠ식, 淺腹罐 BaⅡ식)이 출토함. 묘광(ZK3)은 동쪽에 위치하는데 타원형으로 길이 2.3m 너비 0.85m, 깊이 0.2m이고 묘광벽은 작은 판석으로 축조했으며, 바닥은 0.1m 두께로 냇돌을 깔음. 많은 불탄 뼈조각들과 발 1건(淺腹罐 Cb식)이 부장됨. 묘광(ZK5)은 서쪽에 위치하고, 타원형으로 길이 2.4m, 너비 0.8m, 깊이 0.15m임. 묘광벽은 판석으로 축조했고, 묘광 바닥은 두께 0.06m로 냇돌을 깔음. 소량의 燒骨과 白管 24개 및 소량의 발편(淺腹罐 BaⅢ식)이 출토됨. 속묘단(XT1~XT5)은 모두 5기로 안쪽의 3기(XT1~XT3)는 모두 중심축선상에 축조되었고, 바깥쪽 2기(XT4~XT5)는 중심축에서 조금 벗어나 축조되었는데, 속묘단 묘광방향과 주묘단 묘광은 기본적으로 동일함. XT1은 동, 서 주묘단의 사이에 위치하고, 묘광(XK1)는 타원형으로 길이 2.5m, 너비 0.9m, 깊이 0.12m이고, 바닥의 강돌층 두께는 0.07m이며, 불탄 인골 조각·대롱(陶管), 발(淺腹罐 Bc식)과 방추차(紡輪) 각 1건·소량의 토기편이 출토됨. XT2는 반원형으로 직경 5.3m, 높이 1.6m이고, 둘레돌은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지탱석 사이 간격은 약 0.5m임. 묘광(XK2)은 타원형으로 할석으로 축조했고, 길이 2.2m, 너비 0.7m, 깊이 0.1m임. 밑바닥 강돌층 두께는 0.04m이고, 묘광에서 발 2건(淺腹罐 BaⅢ식 및 Bc식), 燒骨이 산재되어 있음. XT3은 반원형으로 직경 4.5m, 둘레돌 높이 1.45이고, 지탱석 8개가 세워져 있음. 묘광(XK3)은 타원형으로 길이 1.5m, 너비 0.7m, 밑바닥 강돌층 두께 0.06m임. 주변에는 1층의 塊石을 두었고, 燒骨을 비롯 흰색 대롱 4건과 토기편 1건이 출토됨. XT4는 타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길이 6m, 너비 약 4m인데, 북쪽 둘레돌은 이미 파괴되었으며, 남쪽 둘레돌도 기울어져 무너짐. XT4의 중간부의 묘광 바닥 냇돌 아래에서 꺽여 돌아가는 높이 약 0.5m 정도의 벽석을 발견했는데, 벽석은 비교적 커다란 할석으로 축조하여, XT4 기초 위에 쌓아 기초부를 견고하게 함. 묘광(XK4)은 불규칙한 할석으로 축조되었고 타원형으로 길이 1.8m, 너비 0.5m, 깊이 0.08m이며, 밑바닥에는 작은 돌을 0.05m 두께로 깔음. 묘광에서 흰색 대롱 5건, 토기편 1건, 燒骨이 출토함. XT5는 타원형으로 직경 7.3m이고, 둘레돌은 남아 있지 않으며 기초만 판별 가능함. 묘광(XK5)은 묘광벽이 남단만 잔존하고, 묘광 밑바닥의 작은 강돌은 타원형에 가까운 형태이며, 길이 2.5m, 너비 1m, 두께 0.06m임. 燒骨과 소량의 도편이 산재하고 있음. 부묘단(FT1~FT9)은 중심축선 양쪽으로 나누어 축조되었는데 대칭은 아님. 중심축선 북쪽에 부묘단 4기(FT1-FT4)가 축조되었고, 중심축선 남쪽에 부묘단 약 4기(FT5-FT8)가 축조되었으며, 주묘단에서 XT4 방향으로 차례대로 축조됨. FT1은 타원형으로 길이 2.4m, 너비 0.8m, 깊이 0.12m이고, 묘광 주변은 크기가 다른 괴석들로 축조하였고, 바닥의 두께는 0.05m의 작은 냇돌층이며, 대량의 燒骨, 동제 고리(銅環)(環 B식) 및 발 각 1건(淺腹罐 AⅡ식), 토기편 1건이 출토됨. FT2는 타원형으로 길이 2.2m, 너비 0.6m, 두께 0.04m이고, 보존상태는 양호하며, 묘광 바닥에 냇돌 깔았음. 묘광에서 소량의 燒骨과 토기편 1건이 출토함. FT3은 扇形으로 半徑 2.9m이고, 둘레 돌은 이미 붕괴되었음. 묘광(FK3)은 扇形으로 반경 약 1.2m이고 바닥의 작은 냇돌 두께는 0.05m임. 묘광 내 燒骨은 많지 않고 토기편 1건, “半兩”(A식-E식)과 “一化” 圓錢 등의 화폐가 총 30매 출토됨. FT4는 扇形으로 半徑 약 2.5m이며, 둘레 돌은 원래부터 없었고, XT4와 만나는 부분은 이미 파괴되었음. 묘광(FK4)는 둘레 의 훼손이 심하고, 바닥의 냇돌층만 잔존함. 타원형 평면이고 길이 2.1m, 너비 0.9m이며, 묘광 내 소량의 燒骨과 토기편이 출토됨. FT5는 반원형으로 직경 4.5m임. FT6 및 FT7는 크기 차이가 별로 없고 半徑 약 2m의 扇形이고, FT8는 면적이 매우 작으며, FT9는 扇形으로 반경은 약 2m임. 앞서의 부묘단과는 반대 방향으로 주묘단 ZT1을 둘러싸고 축조됨.역사적 의미 축조방식은 지면에 커다란 돌을 사용하여 일정 범위의 묘역을 조성한 후 냇돌과 할석을 깔아 평면하게 지면을 고르고 무덤의 기저부를 만든 후, 그 위에 단을 쌓아 몇 기의 무덤이 연접되도록 함. 매장방식은 무덤 밖에서 화장한 후 燒骨을 매장한 2차장하고, 대다수 묘광 내부에 불에 타거나 그을린 흔적이 없음. 불에 탄 인골편은 작은 조각으로 가장 큰 것이 길이 5㎝가 안되며, 대략 1/3의 소골은 회백색이며 나머지는 赭色(자색)과 흑색임. 다만 BM2ZK1에서 목탄편이 출토되었고, 1986년 조사된 간구자 1호분(M1)의 석광 안에는 주검칸이나 葬具를 따로 마련하지 않았고 불에 태워진 인골과 대량의 목탄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시신을 묘광 안에 놓고 화장했던 것으로 추정됨. 燒骨은 묘광 내 2, 3곳에 무더기로 안치되었으며, 토기는 묘광 양단에 나누어 부장한 점으로 미루어 一代 혹은 한 가정의 合葬 즉 동일가족 數代의 합장묘 유적일 것임. 따라서 신분 혹은 항렬이 비교적 높은 사람이 주묘단의 중심에 매장되고, 다수 속·부묘단은 항렬의 대소 또는 昭穆제도에 따라 附葬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2001년 발굴한 7기 고분의 부장품은 총 283점으로 작은 장식품을 제외하면 평균 각 묘광에 3점이 부장되었으므로 厚葬은 아님. 전체 부장품 중 토기가 총73점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나 완형보다는 다수가 파편으로 출토되어 토기의 毁器習俗으로 짐작됨. 출토된 그릇은 모두 민무늬의 夾沙褐陶로 모양이 간단하고 종류가 단조롭고 제작 기술이 거칠어 원시성을 반영하며, 그 외 野猪牙飾, 綠松石管 등의 장식품은 모두 압록강 유역과 두만강 유역의 원시문화에서 일찍이 보여주는 전형적 기물임. 간구자 고분군의 무덤들은 하나의 기단 위에 여러 기의 고분이 배열되어 있는데, 특히 7호분은 1기의 원형석광적석묘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장방형의 작은 돌무덤이 방사상으로 배치되어 무덤 사이의 主次관계를 시사함. 즉 중심무덤의 피장자는 주위의 무덤에 비해 사회적 지위가 높은 편이나 반대의 무덤은 중심무덤에 예속된 상태로 추정됨. 반면에 1호분 및 4호분과 같은 단일한 원형석광무덤의 무덤배열 상태에서는 주종 관계가 전혀 보이지 않음. 한 墓區내의 여러 개 무덤은 그 크기와 모양이 같으며 또한 무덤 사이마다 돌로 서로 연결되어 한 무덤구역내의 피장자들 관계가 평등하였다는 것을 시사하며, 이는 혈연관계를 이루고 있는 가족 성원의 무덤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임. 부장품은 장식품이 많고 생산 공구 및 기타 그릇 류가 비교적 적은데, 이는 길림성 중부지구의 九台關馬山, 公主嶺猴石, 樺甸橫道河子 및 東豊, 遼源 일대 많은 大蓋石墓의 부장 특징과 서로 일치하며, 동북지구 남부에서는 戰國晩期~漢代 보편적으로 유행함. 상한연대는 2기 고분에서 方孔圓錢- 半兩錢과 一化으로 추정할 수 있음. 半兩錢은 秦末半兩 혹은 漢初의 八銖半兩이며, 一化는 ‘一刀’로 해석되며, 周秦 또는 秦初 시기의 화폐임. 赤峰 新窝堡와 鐵嶺 邱家台지역의 퇴장유적에서 이들 화폐가 燕·趙의 刀幣 및 반량전과 같이 출토되어 燕國晩期의 화폐로 확정되었으므로 묘지연대의 상한은 戰國末期, 비교적 이른 것은 戰國 中期에 해당됨. 하한연대는 AM1에서 출토된 鐵钁과 AM3·AM4 주묘단에서 채집된 鐵刀로 추정할 수 있는데, 钁은 漢代유행하는 것과 형태가 유사하며, 철도는 直柄環首로 일찍이 集安의 板岔嶺에서 동일한 것이 발굴된 바 있는데, 고구려 적석묘에서 대량 보이는 環首刀보다 조금 이름. 집안 판차령에서 “一化”圓錢이 “半兩”, “五銖”, “大泉五十”, 등의 한대화폐와 함께 출토되었고, 그 유통 시간은 전국말기~東漢임. 그러나 간구자묘지에서는 “오수” 및 동한화폐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고분의 하한은 대체로 동한이전의 서한시기로 비정됨. 간구자묘지의 연대가 집안, 환인 일대의 고구려 적석총보다 앞서므로, 고구려적석총의 가장 이른 형식인 無階段 圓丘上積石墓와 관련이 있을 것임. 고구려 초기의 적석묘의 발전과정을 보면, 무덤은 석광이 따로 없는 간단한 시설로부터 계단식 기단으로 이루어진 ‘框室(앞에서 박윤무의 1995년 글에 따라 ‘묘실’이라 정리하던 개념인데, 이 글에서 이 부분을 ‘框室’로 표현하고 있어 그대로 따랐음)’ 무덤으로 발전하고, ‘광실’은 장방형으로부터 정방형 형태로 변화·발전함. 묘광 위치에서도 위로부터 아래로 점차 내려옴. 이를 종합해 볼 때 간구자의 원형석광적석묘는 고구려 초기 적석총과 유사함. 첫째, 주검칸이 따로 없이 무덤의 기단 윗면을 자갈과 모래로 수평하게 마련하고 그 위에 주검과 부장품을 놓고 막돌로 덮어 정상부를 마무리 한 것은 이것은 환인 201호 및 19호분과 매우 흡사함. 둘째, 기단의 단수와 묘광 형태에서 차이가 있으나 한 무덤구역에 여러 기의 무덤을 연이어 마련한 점은 환인 23-33호분과 일치함. 셋째, 화장하여 묻는 습관이 환인 23호 및 20호분이나 15호분에서 확인되며, 집안 일대의 일부 적석총은 묘광벽이 불에 녹아 응결된 흔적으로 화장하였을 것으로 짐작됨. 따라서 간구자 무덤은 시기적으로 환인 적석총을 위주로 한 고구려 초기 무덤보다는 이르며 대체로 환인 적석총보다 선행된 고구려 早期의 무덤형식으로 고구려족계의 원시적 매장 특징이 짙게 반영됨. 또한 간구자 고분군은 여대지구 청동기 시대 무덤 및 청동단검고분의 특징을 내포하고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와 노철산 고분은 모두 여러 기의 무덤을 서로 가까이하여 ‘벌집형(蜂巢狀)’이며,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평면 형태는 원형으로 된 것도 있음. 이것은 간구자 1호분(M1)·2호분(M2)의 특징과 유사함. 강상묘는 하나의 무덤구역에 1기의 중심무덤을 마련하고 그 둘레를 돌면서 여러 기의 무덤을 방사선 형태로 마련하였는데, 이것은 간구자 7호분(M7)과 매우 유사함. 그리고 강상·누상묘 등 적지 않은 청동단검묘는 모두 화장한 무덤이라는 사실에서도 간구자 고분과 일치함.(『조선고고학개요』에서는 ‘노철산 및 장군산 고분→강상·누상묘→고구려 적석묘’라는 계승 발전관계를 설정하고 있고, 왕성생(1981, 「요하 유역 및 부근지역의 短鋌曲刃劍 연구」『요녕성고고박물관학회설립대회』회간)은 강상묘를 비롯한 요동문화유형의 무덤 형식과 매장습속이 환인 고구려 적석무덤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고구려 적석묘는 강상묘의 계승과 발전’이라고 보고 있음) 또한 여대지구 강상과 루상, 우가촌 타두 적석묘 등과 같은 집단묘로서, 家族合葬墓라는 점에서 공통됨. 반면 강상·누상 적석묘는 평지에 축조되었으며, 묘단은 없고, 묘광이 장방 혹은 방사상으로 분포하며, 중심 묘광의 4벽은 판석을 세워 만들었고, 우가촌 타두 적석묘 역시 묘광이 타원형 또는 부정형으로, 보통 평행을 이루는 가로배열로 분포하며 묘단을 만들지 않았음. 따라서 강상·루상과 우가촌 타두는 간구자 적석묘와는 축조 방법에서의 차이가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연대는 3230±90년B.P. 이고, 강상·누상묘는 기원전 1세기 전반기에 해당된 고조선 시기이며, 환인 지역 적석묘는 제15호분에서 環首式 철칼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東漢 시대로, 늦어도 漢·魏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음. 간구자 고분군의 상대적 축조연대는 대체로 전국시기로부터 서한 말기에 해당되므로, 간구자 고분군은 강상·누상묘에서 환인 적석묘로 발전해 나아가는 과정의 과도기 단계로서 고구려 선인들의 토착문화로 추정됨. 연접 방식은 3형식으로 나뉘는데, 제1형식은 속·부묘단이 주묘단을 둘러싸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지 않으며(AM3, AM4, BM5), 제2형식은 속·부묘단의 밖에 다시 제2속묘단이 외접하고, 제1형식이 주묘단만을 둘러싸지만, 제2형식은 연이어 속묘단이 함께 둘러싸고 하나의 부묘단이 기점이 되어 2개의 방향으로 나누어 펼쳐짐(BM2, BM4). 3형식 : 먼저 주묘단을 두르고 밖으로 다시 속묘단을 쌓고, 빈곳에 1, 2개의 부묘단을 세운 후 연속으로 서남방향에 속묘단을 설치한 후, 양쪽에 연속하여 부묘단을 대칭으로 축조함(AM1, AM2). 제1형식이 제2형식의 미완성형식이라면 비교적 이른 고분은 모두 먼저 주묘단을 쌓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였는데, 부·속묘단이 연접하는 방향은 서남쪽으로 접속하지만, 일정하지 않다가 비교적 늦은 고분에서 서남쪽으로 확장방향이 정형성을 띰. 속묘단은 중심선에 의해 대다수 서남방향으로 연접하며 부묘단은 양쪽으로 分列하는데, 대다수는 비교적 대칭적임. 연접 방식에 따른 배열법의 변천순서는 제1형식→제2형식→제3형식 순으로 변하고, 이런 양상은 고분군의 분포 양상과도 합치됨. A와 B구역을 보면, 산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가 이른데 비해, 강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는 비교적 늦음. 上→下의 배열과 발전과정은 환인과 집안 일대의 고구려적석총의 배열과 일치함.자연환경 AM2호분은 AM1과 AM3의 사이에 위치함. 간구자촌은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鎭 서쪽 0.5㎞ 지점에 위치하고, 고분은 干溝子村의 東·西干溝河 양안의 하곡 충적대지상에 분포함. 동쪽으로 長白縣城과 45㎞ 떨어져 있고, 동·서·북 3면이 高山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름. 압록강과 고분군 사이의 馬架子山을 기준으로 동쪽의 동간구하, 서쪽의 서간구하가 흐르는데, 서간구하는 동북에서 서남으로 흘러 고분군를 거쳐 압록강으로 흘러 감. 장백과 임강을 잇는 長臨도로가 동남에서 서북으로 뻗어 고분군을 양분하고, 고분군의 서·남 양쪽 산위에는 청동기시대 유적 분포함. 간구자 고분은 여러 차례 조사가 있었으나 1986년과 2001년 조사로 대별되는데, 특히 2001년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계기로 1986년 조사때보다 묘역이 크게 확대되었음. 앞서 고분 분포현황에서 언급하였듯이 2001년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묘역은 크게 A, B, C, D의 4구역으로 이루어졌는데 비해, 1986년 보고서에는 2001년 보고서의 A와 B 지역 일대를 파악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으므로 2001년 고분의 편호는 1986년 조사를 고려하지 않고 새로 편호하고 있기 때문에 양자의 개별 고분들을 직접 연결시켜 파악하기는 어려운 상황임. 때문에 개별고분의 상황을 두 시기로 나누어 정리하였음.유물정보 심발형토기 1점, 발 6점, 옥구슬 1점, 고리 1점, 반량전 18점, 일화전, 흰색대롱, 남색대롱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長白朝鮮族自治縣文物志』, 1986 · 朴潤武, 「長白縣干溝子墓地調査」『博物館研究』 1990-3, 1990 ·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 編, 『吉林省志』 45(民族志), 吉林人民出版社, 1991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朴潤武, 「압록강 유역 干溝子 적성무덤에 대한 조사연구」『中國境內 高句麗遺蹟 硏究』, 예하출판, 1995 · 王洪峰·孫仁傑·遲勇, 「吉林長白縣干溝子墓地發掘簡報」『考古』 2003-8, 2003 · 孫仁杰·遲勇·張殿甲, 「鴨綠江上流右岸考古調査」『東北史地』 2004-5, 2004

    • 리스트여닫기 간구자 AM3호분(干溝子 AM3號墳) 출토지 길림성 장백현 십사도구진 간구자촌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鎮 干溝子村)연대 상한: 戰國中期~末期, 하한: 西漢 상한 - B.C 4세기~B.C 3세기초, 하한 - 기원전후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2001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장백현문물보호관리소, 집안시박물관(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長白縣文物保護管理所, 集安市博物館)5월-7월 조사에서 1986년 편호와 달리 새로이 편호하는데 1986년 편호된 고분가운데 M15~M19의 5기 가운데 1기만 남아 있고, 1986년도에 편호되지 않은 고분 중 고분 형식을 판별할 수 있는 고분 고려하여 새로이 편호하였으며, 서간구하 북안의 A구 4기와 그 남안의 B구 3기를 발굴함.구조특징 외관은 圓丘狀으로 직경 13.5m, 높이 1.4m이고, 주묘단 1기, 부묘단 3기로 조성되어 있음. 주묘단(ZT)은 타원형으로 길이 11m, 너비 9.5m, 높이 1.3m이고, 남반부 둘레돌은 보존이 비교적 양호하며, 높이 0.8m임. 북반부분은 훼손되었는데, 지탱석 대부분이 기울어져 무너지고 있고, 기초부만 잔존함. 주묘단의 돌 무지 위에서 토기(陶罐), 철제 칼(鐵刀)(Ⅱ식), 어망추(網墜) 등이 출토됨. 주묘단의 묘광은 5기로, 묘광 ZK2~ZK5는 ZK1의 사방에 대칭으로 분포함. 묘광(ZK1)은 묘단의 중심에 위치하고, 근장방형으로 길이 2.7m, 너비 1m, 깊이 0.45m, 40°방향임. 묘광의 네 벽은 편형한 냇돌로 축조후 깨진 돌로 0.1m두께로 봉했고, 바닥은 두께 0.06~0.1m의 작은 냇돌을 깔았으며, 두 덩어리의 불에 탄 인골 조각들, 토기(陶罐) 1건이 출토됨. 묘광(ZK2)은 불규칙 타원형으로 길이 1.7m, 너비 0.3~0.6m, 깊이 0.06m이고, 바닥에 깔린 작은 냇돌층 두께는 0.03~0.06m임. 燒骨 조각, 심발형토기 1건(深腹罐 BⅡ식)이 출토함. 묘광(ZK3)은 타원형으로 길이 1.9m, 너비 0.45~0.8m, 깊이 0.2m이고 바닥의 작은 냇돌층은 두께 0.05m이며, 燒骨 덩이, 한쌍의 옥장식(玉飾), 발 2건(淺腹罐 BaⅡ식 및 Ca식)이 출토함. 묘광(ZK4)는 타원형, 길이 0.9m, 너비 0.55m, 깊이 0.3m이고, 바닥에 깔린 작은 냇돌층 두께는 0.05m임. 묘광에는 뼈조각, 동제 고리(銅環) 1건(環 B식), 철제 칼(鐵刀) 잔편 1건(Ⅰ식)이 출토됨. 묘광(ZK5)은 타원형으로 길이 1.8m, 너비 0.6m, 깊이 0.25m이고, 바닥에 깔린 작은 냇돌층 두께는 0.05m임. 묘광에는 碎骨이 있었으나 부장품은 보이지 않음. 부묘단(FT1~FT3)은 총 3기로 모두 주묘단를 둘러싸고 시계반대방향으로 축조되어 있음. FT1은 주묘단의 남쪽에 위치하고, 타원형으로 직경 6m이고, 묘단은 대부분 이미 파괴되었으며, 주묘단 부근에 높이 0.3m의 둘레돌 지탱석 일부분이 남아 있는 상태임. 묘광(FK1)은 타원형으로 길이 2.3m, 너비 0,8m, 깊이 0.2m이고, 바닥에 깔린 작은 냇돌층 두께는 0.4m임. 燒骨, 발 1건(淺腹罐 BaⅢ식)이 출토됨. FT2는 扇形으로 반경 약 4m이고, 가장자리는 비교적 정리되어 있음. 주묘단에서 가까운 곳에 타원형 묘광 FK2가 있는데 길이 2m, 너비 1m, 깊이 0.15m이고, 바닥에는 두께 0.05미터의 작은 강돌이 깔려 있음. 腿骨·頭骨·牙齒 등을 포함한 燒骨, 동제 귀걸이(銅耳飾)(環 A식)와 玉珠 각 한쌍씩 출토됨. FT3은 훼손이 비교적 심하고, 외관은 이미 훼손되었음. 기초만 남아 있으며, 기초부의 직경은 약 6m임. 묘광(FK3)은 부정형으로 한 면만을 쌓아 올려 묘광벽을 축조하였고, 길이 2.7m, 너비 0.6~0.9m, 깊이 0.1m이며, 바닥에는 작은 강돌을 깔음. 인골과 부장품이 없음.역사적 의미 축조방식은 지면에 커다란 돌을 사용하여 일정 범위의 묘역을 조성한 후 냇돌과 할석을 깔아 평면하게 지면을 고르고 무덤의 기저부를 만든 후, 그 위에 단을 쌓아 몇 기의 무덤이 연접되도록 함. 매장방식은 무덤 밖에서 화장한 후 燒骨을 매장한 2차장하고, 대다수 묘광 내부에 불에 타거나 그을린 흔적이 없음. 불에 탄 인골편은 작은 조각으로 가장 큰 것이 길이 5㎝가 안되며, 대략 1/3의 소골은 회백색이며 나머지는 赭色(자색)과 흑색임. 다만 BM2ZK1에서 목탄편이 출토되었고, 1986년 조사된 간구자 1호분(M1)의 석광 안에는 주검칸이나 葬具를 따로 마련하지 않았고 불에 태워진 인골과 대량의 목탄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시신을 묘광 안에 놓고 화장했던 것으로 추정됨. 燒骨은 묘광 내 2, 3곳에 무더기로 안치되었으며, 토기는 묘광 양단에 나누어 부장한 점으로 미루어 一代 혹은 한 가정의 合葬 즉 동일가족 數代의 합장묘 유적일 것임. 따라서 신분 혹은 항렬이 비교적 높은 사람이 주묘단의 중심에 매장되고, 다수 속·부묘단은 항렬의 대소 또는 昭穆제도에 따라 附葬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2001년 발굴한 7기 고분의 부장품은 총 283점으로 작은 장식품을 제외하면 평균 각 묘광에 3점이 부장되었으므로 厚葬은 아님. 전체 부장품 중 토기가 총73점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나 완형보다는 다수가 파편으로 출토되어 토기의 毁器習俗으로 짐작됨. 출토된 그릇은 모두 민무늬의 夾沙褐陶로 모양이 간단하고 종류가 단조롭고 제작 기술이 거칠어 원시성을 반영하며, 그 외 野猪牙飾, 綠松石管 등의 장식품은 모두 압록강 유역과 두만강 유역의 원시문화에서 일찍이 보여주는 전형적 기물임. 간구자 고분군의 무덤들은 하나의 기단 위에 여러 기의 고분이 배열되어 있는데, 특히 7호분은 1기의 원형석광적석묘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장방형의 작은 돌무덤이 방사상으로 배치되어 무덤 사이의 主次관계를 시사함. 즉 중심무덤의 피장자는 주위의 무덤에 비해 사회적 지위가 높은 편이나 반대의 무덤은 중심무덤에 예속된 상태로 추정됨. 반면에 1호분 및 4호분과 같은 단일한 원형석광무덤의 무덤배열 상태에서는 주종 관계가 전혀 보이지 않음. 한 墓區내의 여러 개 무덤은 그 크기와 모양이 같으며 또한 무덤 사이마다 돌로 서로 연결되어 한 무덤구역내의 피장자들 관계가 평등하였다는 것을 시사하며, 이는 혈연관계를 이루고 있는 가족 성원의 무덤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임. 부장품은 장식품이 많고 생산 공구 및 기타 그릇 류가 비교적 적은데, 이는 길림성 중부지구의 九台關馬山, 公主嶺猴石, 樺甸橫道河子 및 東豊, 遼源 일대 많은 大蓋石墓의 부장 특징과 서로 일치하며, 동북지구 남부에서는 戰國晩期~漢代 보편적으로 유행함. 상한연대는 2기 고분에서 方孔圓錢- 半兩錢과 一化으로 추정할 수 있음. 半兩錢은 秦末半兩 혹은 漢初의 八銖半兩이며, 一化는 ‘一刀’로 해석되며, 周秦 또는 秦初 시기의 화폐임. 赤峰 新窝堡와 鐵嶺 邱家台지역의 퇴장유적에서 이들 화폐가 燕·趙의 刀幣 및 반량전과 같이 출토되어 燕國晩期의 화폐로 확정되었으므로 묘지연대의 상한은 戰國末期, 비교적 이른 것은 戰國 中期에 해당됨. 하한연대는 AM1에서 출토된 鐵钁과 AM3·AM4 주묘단에서 채집된 鐵刀로 추정할 수 있는데, 钁은 漢代유행하는 것과 형태가 유사하며, 철도는 直柄環首로 일찍이 集安의 板岔嶺에서 동일한 것이 발굴된 바 있는데, 고구려 적석묘에서 대량 보이는 環首刀보다 조금 이름. 집안 판차령에서 “一化”圓錢이 “半兩”, “五銖”, “大泉五十”, 등의 한대화폐와 함께 출토되었고, 그 유통 시간은 전국말기~東漢임. 그러나 간구자묘지에서는 “오수” 및 동한화폐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고분의 하한은 대체로 동한이전의 서한시기로 비정됨. 간구자묘지의 연대가 집안, 환인 일대의 고구려 적석총보다 앞서므로, 고구려적석총의 가장 이른 형식인 無階段 圓丘上積石墓와 관련이 있을 것임. 고구려 초기의 적석묘의 발전과정을 보면, 무덤은 석광이 따로 없는 간단한 시설로부터 계단식 기단으로 이루어진 ‘框室(앞에서 박윤무의 1995년 글에 따라 ‘묘실’이라 정리하던 개념인데, 이 글에서 이 부분을 ‘框室’로 표현하고 있어 그대로 따랐음)’ 무덤으로 발전하고, ‘광실’은 장방형으로부터 정방형 형태로 변화·발전함. 묘광 위치에서도 위로부터 아래로 점차 내려옴. 이를 종합해 볼 때 간구자의 원형석광적석묘는 고구려 초기 적석총과 유사함. 첫째, 주검칸이 따로 없이 무덤의 기단 윗면을 자갈과 모래로 수평하게 마련하고 그 위에 주검과 부장품을 놓고 막돌로 덮어 정상부를 마무리 한 것은 이것은 환인 201호 및 19호분과 매우 흡사함. 둘째, 기단의 단수와 묘광 형태에서 차이가 있으나 한 무덤구역에 여러 기의 무덤을 연이어 마련한 점은 환인 23-33호분과 일치함. 셋째, 화장하여 묻는 습관이 환인 23호 및 20호분이나 15호분에서 확인되며, 집안 일대의 일부 적석총은 묘광벽이 불에 녹아 응결된 흔적으로 화장하였을 것으로 짐작됨. 따라서 간구자 무덤은 시기적으로 환인 적석총을 위주로 한 고구려 초기 무덤보다는 이르며 대체로 환인 적석총보다 선행된 고구려 早期의 무덤형식으로 고구려족계의 원시적 매장 특징이 짙게 반영됨. 또한 간구자 고분군은 여대지구 청동기 시대 무덤 및 청동단검고분의 특징을 내포하고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와 노철산 고분은 모두 여러 기의 무덤을 서로 가까이하여 ‘벌집형(蜂巢狀)’이며,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평면 형태는 원형으로 된 것도 있음. 이것은 간구자 1호분(M1)·2호분(M2)의 특징과 유사함. 강상묘는 하나의 무덤구역에 1기의 중심무덤을 마련하고 그 둘레를 돌면서 여러 기의 무덤을 방사선 형태로 마련하였는데, 이것은 간구자 7호분(M7)과 매우 유사함. 그리고 강상·누상묘 등 적지 않은 청동단검묘는 모두 화장한 무덤이라는 사실에서도 간구자 고분과 일치함.(『조선고고학개요』에서는 ‘노철산 및 장군산 고분→강상·누상묘→고구려 적석묘’라는 계승 발전관계를 설정하고 있고, 왕성생(1981, 「요하 유역 및 부근지역의 短鋌曲刃劍 연구」『요녕성고고박물관학회설립대회』회간)은 강상묘를 비롯한 요동문화유형의 무덤 형식과 매장습속이 환인 고구려 적석무덤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고구려 적석묘는 강상묘의 계승과 발전’이라고 보고 있음) 또한 여대지구 강상과 루상, 우가촌 타두 적석묘 등과 같은 집단묘로서, 家族合葬墓라는 점에서 공통됨. 반면 강상·누상 적석묘는 평지에 축조되었으며, 묘단은 없고, 묘광이 장방 혹은 방사상으로 분포하며, 중심 묘광의 4벽은 판석을 세워 만들었고, 우가촌 타두 적석묘 역시 묘광이 타원형 또는 부정형으로, 보통 평행을 이루는 가로배열로 분포하며 묘단을 만들지 않았음. 따라서 강상·루상과 우가촌 타두는 간구자 적석묘와는 축조 방법에서의 차이가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연대는 3230±90년B.P. 이고, 강상·누상묘는 기원전 1세기 전반기에 해당된 고조선 시기이며, 환인 지역 적석묘는 제15호분에서 環首式 철칼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東漢 시대로, 늦어도 漢·魏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음. 간구자 고분군의 상대적 축조연대는 대체로 전국시기로부터 서한 말기에 해당되므로, 간구자 고분군은 강상·누상묘에서 환인 적석묘로 발전해 나아가는 과정의 과도기 단계로서 고구려 선인들의 토착문화로 추정됨. 연접 방식은 3형식으로 나뉘는데, 제1형식은 속·부묘단이 주묘단을 둘러싸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지 않으며(AM3, AM4, BM5), 제2형식은 속·부묘단의 밖에 다시 제2속묘단이 외접하고, 제1형식이 주묘단만을 둘러싸지만, 제2형식은 연이어 속묘단이 함께 둘러싸고 하나의 부묘단이 기점이 되어 2개의 방향으로 나누어 펼쳐짐(BM2, BM4). 3형식 : 먼저 주묘단을 두르고 밖으로 다시 속묘단을 쌓고, 빈곳에 1, 2개의 부묘단을 세운 후 연속으로 서남방향에 속묘단을 설치한 후, 양쪽에 연속하여 부묘단을 대칭으로 축조함(AM1, AM2). 제1형식이 제2형식의 미완성형식이라면 비교적 이른 고분은 모두 먼저 주묘단을 쌓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였는데, 부·속묘단이 연접하는 방향은 서남쪽으로 접속하지만, 일정하지 않다가 비교적 늦은 고분에서 서남쪽으로 확장방향이 정형성을 띰. 속묘단은 중심선에 의해 대다수 서남방향으로 연접하며 부묘단은 양쪽으로 分列하는데, 대다수는 비교적 대칭적임. 연접 방식에 따른 배열법의 변천순서는 제1형식→제2형식→제3형식 순으로 변하고, 이런 양상은 고분군의 분포 양상과도 합치됨. A와 B구역을 보면, 산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가 이른데 비해, 강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는 비교적 늦음. 上→下의 배열과 발전과정은 환인과 집안 일대의 고구려적석총의 배열과 일치함.자연환경 AM3호분은 AM2의 서북에 위치함. 간구자촌은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鎭 서쪽 0.5㎞ 지점에 위치하고, 고분은 干溝子村의 東·西干溝河 양안의 하곡 충적대지상에 분포함. 동쪽으로 長白縣城과 45㎞ 떨어져 있고, 동·서·북 3면이 高山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름. 압록강과 고분군 사이의 馬架子山을 기준으로 동쪽의 동간구하, 서쪽의 서간구하가 흐르는데, 서간구하는 동북에서 서남으로 흘러 고분군를 거쳐 압록강으로 흘러 감. 장백과 임강을 잇는 長臨도로가 동남에서 서북으로 뻗어 고분군을 양분하고, 고분군의 서·남 양쪽 산위에는 청동기시대 유적 분포함. 간구자 고분은 여러 차례 조사가 있었으나 1986년과 2001년 조사로 대별되는데, 특히 2001년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계기로 1986년 조사때보다 묘역이 크게 확대되었음. 앞서 고분 분포현황에서 언급하였듯이 2001년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묘역은 크게 A, B, C, D의 4구역으로 이루어졌는데 비해, 1986년 보고서에는 2001년 보고서의 A와 B 지역 일대를 파악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으므로 2001년 고분의 편호는 1986년 조사를 고려하지 않고 새로 편호하고 있기 때문에 양자의 개별 고분들을 직접 연결시켜 파악하기는 어려운 상황임. 때문에 개별고분의 상황을 두 시기로 나누어 정리하였음.유물정보 심발형토기 1점, 발 3점, 옥구슬 2점, 옥드리개 2점, 고리 2점, 철제칼 2점, 흰색대롱 다수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長白朝鮮族自治縣文物志』, 1986 · 朴潤武, 「長白縣干溝子墓地調査」『博物館研究』 1990-3, 1990 ·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 編, 『吉林省志』 45(民族志), 吉林人民出版社, 1991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朴潤武, 「압록강 유역 干溝子 적성무덤에 대한 조사연구」『中國境內 高句麗遺蹟 硏究』, 예하출판, 1995 · 王洪峰·孫仁傑·遲勇, 「吉林長白縣干溝子墓地發掘簡報」『考古』 2003-8, 2003 · 孫仁杰·遲勇·張殿甲, 「鴨綠江上流右岸考古調査」『東北史地』 2004-5, 2004

    • 리스트여닫기 간구자 AM4호분(干溝子 AM4號墳) 출토지 길림성 장백현 십사도구진 간구자촌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鎮 干溝子村)연대 상한: 戰國中期~末期, 하한: 西漢 상한 - B.C 4세기~B.C 3세기초, 하한 - 기원전후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2001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장백현문물보호관리소, 집안시박물관(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長白縣文物保護管理所, 集安市博物館)5월-7월 조사에서 1986년 편호와 달리 새로이 편호하는데 1986년 편호된 고분가운데 M15~M19의 5기 가운데 1기만 남아 있고, 1986년도에 편호되지 않은 고분 중 고분 형식을 판별할 수 있는 고분 고려하여 새로이 편호하였으며, 서간구하 북안의 A구 4기와 그 남안의 B구 3기를 발굴함.구조특징 외형은 圓丘狀으로 주묘단 1기, 부묘단 4기가 조성되어 있고, 부묘단은 접속순서가 AM3와 동일함. 주묘단(ZT)은 타원형으로 남북 길이 8m, 동서 너비 7.5m이고, 북쪽 둘레돌이 기울어지고 지탱석이 쓰러져 있을 뿐, 그 외는 보존이 양호함. 서북에 가까운 가장자리의 봉석 위에서 철제 칼(鐵刀) 1건(Ⅱ식)을 채집했음. 묘단은 기초부 위로 11~13층을 쌓았고, 높이가 1.25m이며 정상부는 비교적 가지런하며, 주변에는 크기와 서로 간이 거리가 다른 장대석을 한 줄 세워 둠. 묘광 3개(ZK1~ZK3)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평행하게 배열되어 축조되어 있는데, 서로간 거리는 1.2m임. 묘광(ZK1)은 근장방형으로 장축 동서방향이고 길이 3.5m, 너비 1.1m, 깊이 0.15m임. 묘광벽은 2~4층의 석괴로 축조했고, 바닥에 작은 냇돌 두께 0.08m로 깔았으며, 인골잔편, 대롱(料管) 10건, 토기편 1건이 출토됨. 묘광(ZK2)는 불규칙 타원형으로 길이 2.6m, 너비 0.6m, 깊이 0.12m이고, 바닥에 깔은 작은 강돌의 두께는 0.05m이며, 燒骨, 토기편 1건이 출토됨. 묘광(ZK3)은 남쪽에 위치하고, 말각장방형으로 길이 2.2m, 너비 0.5m, 깊이 0.1m이고, 바닥에 깔은 작은 강돌의 두께 0.07m이며, 燒骨, 백색 대롱(白管) 10건, 토기 1건이 출토됨. 부묘단(FT1~FT4)은 총 4기임. FT1는 서쪽에 위치하고, 반원형으로 직경 6.2m, 높이 0.6m임, FK1은 반원형으로 길이 1.7m, 너비 1m, 깊이 0.08m이고, 바닥에 깔린 강돌 두께는 0.03m이며, 소량의 燒骨과 사질갈색토기(夾砂褐陶器) 1건이 출토됨. FT2는 반원형으로 직경 6m, 높이 0.7m이고, 東半部 둘레돌은 비교적 양호함. FK2는 말각장방형으로 길이 2.3m, 너비 1m이고, 바닥 깔린 자갈층 두께는 0.06m임. 묘광 벽은 괴석 한매만 남아 있으며, 묘광 내에서 燒骨 및 흰색 대롱 6건이 출토됨. FT3은 반원형으로 직경 6.7m이고, 둘레 돌의 붕괴가 심함. FK3은 타원형으로 길이 2.5m, 너비 0.6m, 깊이 0.15m이고, 바닥에 깔은 강돌 두께는 0.08m임. 묘광벽은 3층으로 판상석으로 쌓았고, 燒骨덩이가 0.5m 간격으로 잔존하며, 남쪽에 치우친 燒骨 더미 부근에서 남색 대롱(藍管) 2건이 함께 출토됨. FT4는 타원형으로 길이6m, 너비 2.5m, 높이 0.6m임. 묘광(FK4)은 타원형으로 길이 2.7m, 너비 0.8m, 깊이 0.1m이고, 바닥 강돌층의 두께는 0.1m임. 묘광벽은 3층으로 판상석으로 쌓았고, 비교적 많은 燒骨, 흰색 대롱 7건, 토기편 3건이 출토됨.역사적 의미 축조방식은 지면에 커다란 돌을 사용하여 일정 범위의 묘역을 조성한 후 냇돌과 할석을 깔아 평면하게 지면을 고르고 무덤의 기저부를 만든 후, 그 위에 단을 쌓아 몇 기의 무덤이 연접되도록 함. 매장방식은 무덤 밖에서 화장한 후 燒骨을 매장한 2차장하고, 대다수 묘광 내부에 불에 타거나 그을린 흔적이 없음. 불에 탄 인골편은 작은 조각으로 가장 큰 것이 길이 5㎝가 안되며, 대략 1/3의 소골은 회백색이며 나머지는 赭色(자색)과 흑색임. 다만 BM2ZK1에서 목탄편이 출토되었고, 1986년 조사된 간구자 1호분(M1)의 석광 안에는 주검칸이나 葬具를 따로 마련하지 않았고 불에 태워진 인골과 대량의 목탄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시신을 묘광 안에 놓고 화장했던 것으로 추정됨. 燒骨은 묘광 내 2, 3곳에 무더기로 안치되었으며, 토기는 묘광 양단에 나누어 부장한 점으로 미루어 一代 혹은 한 가정의 合葬 즉 동일가족 數代의 합장묘 유적일 것임. 따라서 신분 혹은 항렬이 비교적 높은 사람이 주묘단의 중심에 매장되고, 다수 속·부묘단은 항렬의 대소 또는 昭穆제도에 따라 附葬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2001년 발굴한 7기 고분의 부장품은 총 283점으로 작은 장식품을 제외하면 평균 각 묘광에 3점이 부장되었으므로 厚葬은 아님. 전체 부장품 중 토기가 총73점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나 완형보다는 다수가 파편으로 출토되어 토기의 毁器習俗으로 짐작됨. 출토된 그릇은 모두 민무늬의 夾沙褐陶로 모양이 간단하고 종류가 단조롭고 제작 기술이 거칠어 원시성을 반영하며, 그 외 野猪牙飾, 綠松石管 등의 장식품은 모두 압록강 유역과 두만강 유역의 원시문화에서 일찍이 보여주는 전형적 기물임. 간구자 고분군의 무덤들은 하나의 기단 위에 여러 기의 고분이 배열되어 있는데, 특히 7호분은 1기의 원형석광적석묘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장방형의 작은 돌무덤이 방사상으로 배치되어 무덤 사이의 主次관계를 시사함. 즉 중심무덤의 피장자는 주위의 무덤에 비해 사회적 지위가 높은 편이나 반대의 무덤은 중심무덤에 예속된 상태로 추정됨. 반면에 1호분 및 4호분과 같은 단일한 원형석광무덤의 무덤배열 상태에서는 주종 관계가 전혀 보이지 않음. 한 墓區내의 여러 개 무덤은 그 크기와 모양이 같으며 또한 무덤 사이마다 돌로 서로 연결되어 한 무덤구역내의 피장자들 관계가 평등하였다는 것을 시사하며, 이는 혈연관계를 이루고 있는 가족 성원의 무덤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임. 부장품은 장식품이 많고 생산 공구 및 기타 그릇 류가 비교적 적은데, 이는 길림성 중부지구의 九台關馬山, 公主嶺猴石, 樺甸橫道河子 및 東豊, 遼源 일대 많은 大蓋石墓의 부장 특징과 서로 일치하며, 동북지구 남부에서는 戰國晩期~漢代 보편적으로 유행함. 상한연대는 2기 고분에서 方孔圓錢- 半兩錢과 一化으로 추정할 수 있음. 半兩錢은 秦末半兩 혹은 漢初의 八銖半兩이며, 一化는 ‘一刀’로 해석되며, 周秦 또는 秦初 시기의 화폐임. 赤峰 新窝堡와 鐵嶺 邱家台지역의 퇴장유적에서 이들 화폐가 燕·趙의 刀幣 및 반량전과 같이 출토되어 燕國晩期의 화폐로 확정되었으므로 묘지연대의 상한은 戰國末期, 비교적 이른 것은 戰國 中期에 해당됨. 하한연대는 AM1에서 출토된 鐵钁과 AM3·AM4 주묘단에서 채집된 鐵刀로 추정할 수 있는데, 钁은 漢代유행하는 것과 형태가 유사하며, 철도는 直柄環首로 일찍이 集安의 板岔嶺에서 동일한 것이 발굴된 바 있는데, 고구려 적석묘에서 대량 보이는 環首刀보다 조금 이름. 집안 판차령에서 “一化”圓錢이 “半兩”, “五銖”, “大泉五十”, 등의 한대화폐와 함께 출토되었고, 그 유통 시간은 전국말기~東漢임. 그러나 간구자묘지에서는 “오수” 및 동한화폐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고분의 하한은 대체로 동한이전의 서한시기로 비정됨. 간구자묘지의 연대가 집안, 환인 일대의 고구려 적석총보다 앞서므로, 고구려적석총의 가장 이른 형식인 無階段 圓丘上積石墓와 관련이 있을 것임. 고구려 초기의 적석묘의 발전과정을 보면, 무덤은 석광이 따로 없는 간단한 시설로부터 계단식 기단으로 이루어진 ‘框室(앞에서 박윤무의 1995년 글에 따라 ‘묘실’이라 정리하던 개념인데, 이 글에서 이 부분을 ‘框室’로 표현하고 있어 그대로 따랐음)’ 무덤으로 발전하고, ‘광실’은 장방형으로부터 정방형 형태로 변화·발전함. 묘광 위치에서도 위로부터 아래로 점차 내려옴. 이를 종합해 볼 때 간구자의 원형석광적석묘는 고구려 초기 적석총과 유사함. 첫째, 주검칸이 따로 없이 무덤의 기단 윗면을 자갈과 모래로 수평하게 마련하고 그 위에 주검과 부장품을 놓고 막돌로 덮어 정상부를 마무리 한 것은 이것은 환인 201호 및 19호분과 매우 흡사함. 둘째, 기단의 단수와 묘광 형태에서 차이가 있으나 한 무덤구역에 여러 기의 무덤을 연이어 마련한 점은 환인 23-33호분과 일치함. 셋째, 화장하여 묻는 습관이 환인 23호 및 20호분이나 15호분에서 확인되며, 집안 일대의 일부 적석총은 묘광벽이 불에 녹아 응결된 흔적으로 화장하였을 것으로 짐작됨. 따라서 간구자 무덤은 시기적으로 환인 적석총을 위주로 한 고구려 초기 무덤보다는 이르며 대체로 환인 적석총보다 선행된 고구려 早期의 무덤형식으로 고구려족계의 원시적 매장 특징이 짙게 반영됨. 또한 간구자 고분군은 여대지구 청동기 시대 무덤 및 청동단검고분의 특징을 내포하고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와 노철산 고분은 모두 여러 기의 무덤을 서로 가까이하여 ‘벌집형(蜂巢狀)’이며,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평면 형태는 원형으로 된 것도 있음. 이것은 간구자 1호분(M1)·2호분(M2)의 특징과 유사함. 강상묘는 하나의 무덤구역에 1기의 중심무덤을 마련하고 그 둘레를 돌면서 여러 기의 무덤을 방사선 형태로 마련하였는데, 이것은 간구자 7호분(M7)과 매우 유사함. 그리고 강상·누상묘 등 적지 않은 청동단검묘는 모두 화장한 무덤이라는 사실에서도 간구자 고분과 일치함.(『조선고고학개요』에서는 ‘노철산 및 장군산 고분→강상·누상묘→고구려 적석묘’라는 계승 발전관계를 설정하고 있고, 왕성생(1981, 「요하 유역 및 부근지역의 短鋌曲刃劍 연구」『요녕성고고박물관학회설립대회』회간)은 강상묘를 비롯한 요동문화유형의 무덤 형식과 매장습속이 환인 고구려 적석무덤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고구려 적석묘는 강상묘의 계승과 발전’이라고 보고 있음) 또한 여대지구 강상과 루상, 우가촌 타두 적석묘 등과 같은 집단묘로서, 家族合葬墓라는 점에서 공통됨. 반면 강상·누상 적석묘는 평지에 축조되었으며, 묘단은 없고, 묘광이 장방 혹은 방사상으로 분포하며, 중심 묘광의 4벽은 판석을 세워 만들었고, 우가촌 타두 적석묘 역시 묘광이 타원형 또는 부정형으로, 보통 평행을 이루는 가로배열로 분포하며 묘단을 만들지 않았음. 따라서 강상·루상과 우가촌 타두는 간구자 적석묘와는 축조 방법에서의 차이가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연대는 3230±90년B.P. 이고, 강상·누상묘는 기원전 1세기 전반기에 해당된 고조선 시기이며, 환인 지역 적석묘는 제15호분에서 環首式 철칼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東漢 시대로, 늦어도 漢·魏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음. 간구자 고분군의 상대적 축조연대는 대체로 전국시기로부터 서한 말기에 해당되므로, 간구자 고분군은 강상·누상묘에서 환인 적석묘로 발전해 나아가는 과정의 과도기 단계로서 고구려 선인들의 토착문화로 추정됨. 연접 방식은 3형식으로 나뉘는데, 제1형식은 속·부묘단이 주묘단을 둘러싸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지 않으며(AM3, AM4, BM5), 제2형식은 속·부묘단의 밖에 다시 제2속묘단이 외접하고, 제1형식이 주묘단만을 둘러싸지만, 제2형식은 연이어 속묘단이 함께 둘러싸고 하나의 부묘단이 기점이 되어 2개의 방향으로 나누어 펼쳐짐(BM2, BM4). 3형식 : 먼저 주묘단을 두르고 밖으로 다시 속묘단을 쌓고, 빈곳에 1, 2개의 부묘단을 세운 후 연속으로 서남방향에 속묘단을 설치한 후, 양쪽에 연속하여 부묘단을 대칭으로 축조함(AM1, AM2). 제1형식이 제2형식의 미완성형식이라면 비교적 이른 고분은 모두 먼저 주묘단을 쌓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였는데, 부·속묘단이 연접하는 방향은 서남쪽으로 접속하지만, 일정하지 않다가 비교적 늦은 고분에서 서남쪽으로 확장방향이 정형성을 띰. 속묘단은 중심선에 의해 대다수 서남방향으로 연접하며 부묘단은 양쪽으로 分列하는데, 대다수는 비교적 대칭적임. 연접 방식에 따른 배열법의 변천순서는 제1형식→제2형식→제3형식 순으로 변하고, 이런 양상은 고분군의 분포 양상과도 합치됨. A와 B구역을 보면, 산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가 이른데 비해, 강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는 비교적 늦음. 上→下의 배열과 발전과정은 환인과 집안 일대의 고구려적석총의 배열과 일치함.자연환경 AM4호분은 AM3으로부터 동쪽 120m 지점에 위치하고, 북으로는 미발굴된 AM5가 있음. 간구자촌은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鎭 서쪽 0.5㎞ 지점에 위치하고, 고분은 干溝子村의 東·西干溝河 양안의 하곡 충적대지상에 분포함. 동쪽으로 長白縣城과 45㎞ 떨어져 있고, 동·서·북 3면이 高山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름. 압록강과 고분군 사이의 馬架子山을 기준으로 동쪽의 동간구하, 서쪽의 서간구하가 흐르는데, 서간구하는 동북에서 서남으로 흘러 고분군를 거쳐 압록강으로 흘러 감. 장백과 임강을 잇는 長臨도로가 동남에서 서북으로 뻗어 고분군을 양분하고, 고분군의 서·남 양쪽 산위에는 청동기시대 유적 분포함. 간구자 고분은 여러 차례 조사가 있었으나 1986년과 2001년 조사로 대별되는데, 특히 2001년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계기로 1986년 조사때보다 묘역이 크게 확대되었음. 앞서 고분 분포현황에서 언급하였듯이 2001년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묘역은 크게 A, B, C, D의 4구역으로 이루어졌는데 비해, 1986년 보고서에는 2001년 보고서의 A와 B 지역 일대를 파악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으므로 2001년 고분의 편호는 1986년 조사를 고려하지 않고 새로 편호하고 있기 때문에 양자의 개별 고분들을 직접 연결시켜 파악하기는 어려운 상황임. 때문에 개별고분의 상황을 두 시기로 나누어 정리하였음.유물정보 철제칼 1점, 흰색대롱, 남색대롱,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長白朝鮮族自治縣文物志』, 1986 · 朴潤武, 「長白縣干溝子墓地調査」『博物館研究』 1990-3, 1990 ·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 編, 『吉林省志』 45(民族志), 吉林人民出版社, 1991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朴潤武, 「압록강 유역 干溝子 적성무덤에 대한 조사연구」『中國境內 高句麗遺蹟 硏究』, 예하출판, 1995 · 王洪峰·孫仁傑·遲勇, 「吉林長白縣干溝子墓地發掘簡報」『考古』 2003-8, 2003 · 孫仁杰·遲勇·張殿甲, 「鴨綠江上流右岸考古調査」『東北史地』 2004-5, 2004

    • 리스트여닫기 간구자 BM2호분(干溝子 BM2號墳) 출토지 길림성 장백현 십사도구진 간구자촌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鎮 干溝子村)연대 상한: 戰國中期~末期, 하한: 西漢 상한 - B.C 4세기~B.C 3세기초, 하한 - 기원전후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2001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장백현문물보호관리소, 집안시박물관(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長白縣文物保護管理所, 集安市博物館)5월-7월 조사에서 1986년 편호와 달리 새로이 편호하는데 1986년 편호된 고분가운데 M15~M19의 5기 가운데 1기만 남아 있고, 1986년도에 편호되지 않은 고분 중 고분 형식을 판별할 수 있는 고분 고려하여 새로이 편호하였으며, 서간구하 북안의 A구 4기와 그 남안의 B구 3기를 발굴함.구조특징 타원형으로 동북에서 서남 방향이고, 주묘단 1기, 속묘단 5기, 부묘단 11기로 조성되어 있으며, 대부분 묘단과 묘광 상태가 양호함. 주묘단(ZT)은 타원형으로 길이 7m, 너비 6.4m, 적석의 높이 1.6m이고, 기저부 둘레 돌의 축조상태는 비교적 양호함. 북반부에 14개 지탱석 있는데, 지탱석 간의 간격은 0.6~1m이고, 지탱석의 다수는 多稜의 장대석임. 3개의 묘광(ZK1~ZK3)은 말각장방형으로 장축 방향은 135도임. 묘광(ZK1)은 길이 2,5m, 너비 0.75, 깊이 0.2m이고, 바닥에는 작은 강돌이 깔려 있음. 비교적 커다란 강돌로 묘광벽 쌓았고, 비교적 많은 燒骨, 심발형토기 1건(淺腹罐 AⅠ식), 대롱장식(管飾) 34건, 목탄 몇 덩어리가 출토됨. 묘광(ZK2)은 길이 2.3m, 너비 0.85m, 깊이 0.15m이고 바닥에는 강돌이 깔려 있음. 묘광 벽은 비교적 작은 돌로 축조되었으며, 燒骨 두 무더기, 발 2건(淺腹罐 BaⅠ식, Ca식), 흰색 대롱(白管) 6건이 출토됨. 묘광(ZK3)은 길이 2.4m, 너비 0.7m, 깊이 0.25m이고, 바닥에 강돌을 깔음. 작은 냇돌로 묘광 벽을 축조하였고, 벽의 상부 돌은 비교적 크며, 燒骨, 토기와 옥구슬(玉珠) 각 1건이 출토됨. 속묘단(XT1~XT5)은 모두 5기로 XT1과 XT2는 주묘단의 양쪽에 접하고 있고, XT3~XT5는 기타 부묘단에서 바깥으로 펼쳐져 있음. XT1은 타원형으로 직경 4.2m, 높이 0.9m이고, 가장자리는 가지런함. 묘광(XK1)은 말각장방형으로 길이 2.2m, 너비 0.6m, 깊이 0.15m이고, 강돌을 깔은 바닥에는 燒骨이 양끝에 산재하고 있는데, 각각 심발형토기 1건씩(深腹罐 AⅠ식 및 BⅠ식)이 출토됨. XT2는 반원형으로 직경 5.2m, 높이 1.2m이고, 기단 둘레 돌은 가지런함. 묘광(XK2)은 타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길이 2.5m, 너비 0.8m, 깊이 0.1m이고, 묘광 내 양끝에는 燒骨부스러기, 도관 각각 1건씩이 부장됨. XT3은 반원형으로 직경 4m임. 묘광(XK3)는 방향은 주묘단 각 묘광과 동일하고, 말각장방형으로 길이 1.8m, 너비 0.6m, 깊이 0.12m이며, 대량의 燒骨이 있으나 부장품은 발견되지 않음. XT4는 반원형으로 직경 5.2m, 높이 1.2m이고, 바깥쪽 둘레 돌은 비교적 가지런함. 묘광(XK4)은 장방형으로 길이 2.6m, 너비 0.8m, 깊이 0.2m이고, 바닥에 강돌을 깔음. 대량의 燒骨이 있으나 부장품은 없음. XT5은 반원형으로 직경 5.2m, 높이 1.2m이고, 무덤 기저부 둘레 돌은 가지런하며, 동쪽 지탱석은 비교적 밀집함. 묘광(XK5)은 말각장방형으로 길이 2m, 너비 0.7m, 깊이 0.2m이고, 바닥에는 강돌이 깔려 있이며, 묘광에는 燒骨이 부장되었으나 부장품은 없음. 부묘단(FT1~FT11)인 FT1은 반원형으로 직경 4m, 높이 1.2m임. 묘광(FK1)은 말각장방형으로 길이 2.05m, 너비 0.6m, 깊이 0.15m이고, 비교적 큰 강돌로 2층 쌓음. 바닥에는 작은 자갈을 깔았고, 燒骨, 심발형토기 1건(深腹罐 BⅠ식)이 출토됨. FT2은 직경 5.5m, 높이 1m이고, 서쪽 부분은 대부분 기울어져 붕괴됨. 묘광(FK2)은 길이 2.3m, 너비 0.7~0.9m, 깊이 0.12m이고, 바닥에는 작은 강돌을 깔았으며, 인골 2 무더기, 부장품 발 2건(淺腹罐 AⅡ식, BbⅠ식)이 출토됨. FT3은 FT1과 XT1의 사이에 접해 있는데, 타원형으로 길이 약 6.5m, 너비 약 3m이고, 무덤 기저부 둘레돌의 훼손이 진행되고 있음. 묘광(FK3)은 묘단의 중앙에 위치하고, 장방형으로 길이 2.5m, 너비 0.5m, 깊이 0.1m이고, 바닥에는 작은 강돌이 깔려 있으며, 대량의 燒骨이 있으나 부장품은 아직 미발견됨. FT4은 반원형으로 무덤 기저 둘레돌 많이 기울어져 있음. 묘광(FK4)은 중앙부에 위치하고, 타원형 평면으로 길이 1.7m, 너비 1m, 깊이 0.1m이고, 인골, 심발형토기 1건(深腹罐 BⅢ식)이 출토됨. FT5는 반원형으로 직경 5.5m, 높이 1.2m이고, 무덤 기저 둘레돌의 동단을 제외하면 대부분 보존상태는 비교적 양호함. 묘광(FK5)는 장방형으로 길이 2.2m, 너비 0.6m, 깊이 0.14m이고 네벽은 커다란 돌로 축조하였으며, 바닥에 냇돌 깔음. 대량의 燒骨, 심발형토기 1건(深腹罐 BⅣ식)이 출토됨. FT6은 계단형(梯形)으로 무덤 둘레 길이 3m, 둘레 돌 높이는 0.75m임. 묘광(FK6)은 타원형으로 길이 2.3m, 너비 1m, 깊이 0.45m이고 바닥에는 작은 강돌을 쌓았으며, 燒骨, 동제 고리(銅環) 1건(環 C식), 발 1건(淺腹罐 Cb식)이 출토됨. FT7은 扇形으로 반경 약 2.3m이고, 무덤 기저 둘레 돌은 일부 붕괴되었으며, 잔존 높이 약 1m임. 묘광(FK7)은 부정형으로 길이 2.5m, 너비 0.6m이고, 인골, 흰색 대롱(白管) 1건, 심발형토기 1건(深腹罐 AⅡ식)이 출토됨. FT8은 반원형으로 직경 6.5m이고, 무덤 기저 둘레 돌은 대부분 붕괴됨. 묘광(FK8)은 말각장방형으로 길이 2.4m, 너비 0.7m, 깊이 0.12m이고, 바닥에는 작은 강돌이 깔려 있음. 燒骨, 심발형토기 1건(深腹罐 AⅢ식), 옥드리개(玉墜) 1쌍이 출토됨. FT9와 FT10은 고분 중심축선상에 있는 XT5를 기준으로 대칭되고, 扇形으로 반경 약 2.5m이며, 무덤 기저부 둘레 돌은 붕괴되었음. 묘광은 모두 말각장방형으로 묘단중앙부에 위치하는데, 묘광(FK9)는 길이 2m, 너비 0.65m임. 묘광(FK10)은 길이 2.3m, 너비 0.75m이고, 燒骨은 모두 묘광 중앙부에 있고, 부장품은 발견되지 않음. FT11은 파괴가 심각하고, 묘광은 이미 없어졌으며, 반경 약 2.8m의 扇形 묘단의 기초부만 남아 있음. BM2 동쪽과 남쪽 양단에서 고분의 충적토를 발굴 조사 하던 중에 사질토기(夾砂陶器)편이 발견됨.역사적 의미 축조방식은 지면에 커다란 돌을 사용하여 일정 범위의 묘역을 조성한 후 냇돌과 할석을 깔아 평면하게 지면을 고르고 무덤의 기저부를 만든 후, 그 위에 단을 쌓아 몇 기의 무덤이 연접되도록 함. 매장방식은 무덤 밖에서 화장한 후 燒骨을 매장한 2차장하고, 대다수 묘광 내부에 불에 타거나 그을린 흔적이 없음. 불에 탄 인골편은 작은 조각으로 가장 큰 것이 길이 5㎝가 안되며, 대략 1/3의 소골은 회백색이며 나머지는 赭色(자색)과 흑색임. 다만 BM2ZK1에서 목탄편이 출토되었고, 1986년 조사된 간구자 1호분(M1)의 석광 안에는 주검칸이나 葬具를 따로 마련하지 않았고 불에 태워진 인골과 대량의 목탄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시신을 묘광 안에 놓고 화장했던 것으로 추정됨. 燒骨은 묘광 내 2, 3곳에 무더기로 안치되었으며, 토기는 묘광 양단에 나누어 부장한 점으로 미루어 一代 혹은 한 가정의 合葬 즉 동일가족 數代의 합장묘 유적일 것임. 따라서 신분 혹은 항렬이 비교적 높은 사람이 주묘단의 중심에 매장되고, 다수 속·부묘단은 항렬의 대소 또는 昭穆제도에 따라 附葬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2001년 발굴한 7기 고분의 부장품은 총 283점으로 작은 장식품을 제외하면 평균 각 묘광에 3점이 부장되었으므로 厚葬은 아님. 전체 부장품 중 토기가 총73점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나 완형보다는 다수가 파편으로 출토되어 토기의 毁器習俗으로 짐작됨. 출토된 그릇은 모두 민무늬의 夾沙褐陶로 모양이 간단하고 종류가 단조롭고 제작 기술이 거칠어 원시성을 반영하며, 그 외 野猪牙飾, 綠松石管 등의 장식품은 모두 압록강 유역과 두만강 유역의 원시문화에서 일찍이 보여주는 전형적 기물임. 간구자 고분군의 무덤들은 하나의 기단 위에 여러 기의 고분이 배열되어 있는데, 특히 7호분은 1기의 원형석광적석묘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장방형의 작은 돌무덤이 방사상으로 배치되어 무덤 사이의 主次관계를 시사함. 즉 중심무덤의 피장자는 주위의 무덤에 비해 사회적 지위가 높은 편이나 반대의 무덤은 중심무덤에 예속된 상태로 추정됨. 반면에 1호분 및 4호분과 같은 단일한 원형석광무덤의 무덤배열 상태에서는 주종 관계가 전혀 보이지 않음. 한 墓區내의 여러 개 무덤은 그 크기와 모양이 같으며 또한 무덤 사이마다 돌로 서로 연결되어 한 무덤구역내의 피장자들 관계가 평등하였다는 것을 시사하며, 이는 혈연관계를 이루고 있는 가족 성원의 무덤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임. 부장품은 장식품이 많고 생산 공구 및 기타 그릇 류가 비교적 적은데, 이는 길림성 중부지구의 九台關馬山, 公主嶺猴石, 樺甸橫道河子 및 東豊, 遼源 일대 많은 大蓋石墓의 부장 특징과 서로 일치하며, 동북지구 남부에서는 戰國晩期~漢代 보편적으로 유행함. 상한연대는 2기 고분에서 方孔圓錢- 半兩錢과 一化으로 추정할 수 있음. 半兩錢은 秦末半兩 혹은 漢初의 八銖半兩이며, 一化는 ‘一刀’로 해석되며, 周秦 또는 秦初 시기의 화폐임. 赤峰 新窝堡와 鐵嶺 邱家台지역의 퇴장유적에서 이들 화폐가 燕·趙의 刀幣 및 반량전과 같이 출토되어 燕國晩期의 화폐로 확정되었으므로 묘지연대의 상한은 戰國末期, 비교적 이른 것은 戰國 中期에 해당됨. 하한연대는 AM1에서 출토된 鐵钁과 AM3·AM4 주묘단에서 채집된 鐵刀로 추정할 수 있는데, 钁은 漢代유행하는 것과 형태가 유사하며, 철도는 直柄環首로 일찍이 集安의 板岔嶺에서 동일한 것이 발굴된 바 있는데, 고구려 적석묘에서 대량 보이는 環首刀보다 조금 이름. 집안 판차령에서 “一化”圓錢이 “半兩”, “五銖”, “大泉五十”, 등의 한대화폐와 함께 출토되었고, 그 유통 시간은 전국말기~東漢임. 그러나 간구자묘지에서는 “오수” 및 동한화폐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고분의 하한은 대체로 동한이전의 서한시기로 비정됨. 간구자묘지의 연대가 집안, 환인 일대의 고구려 적석총보다 앞서므로, 고구려적석총의 가장 이른 형식인 無階段 圓丘上積石墓와 관련이 있을 것임. 고구려 초기의 적석묘의 발전과정을 보면, 무덤은 석광이 따로 없는 간단한 시설로부터 계단식 기단으로 이루어진 ‘框室(앞에서 박윤무의 1995년 글에 따라 ‘묘실’이라 정리하던 개념인데, 이 글에서 이 부분을 ‘框室’로 표현하고 있어 그대로 따랐음)’ 무덤으로 발전하고, ‘광실’은 장방형으로부터 정방형 형태로 변화·발전함. 묘광 위치에서도 위로부터 아래로 점차 내려옴. 이를 종합해 볼 때 간구자의 원형석광적석묘는 고구려 초기 적석총과 유사함. 첫째, 주검칸이 따로 없이 무덤의 기단 윗면을 자갈과 모래로 수평하게 마련하고 그 위에 주검과 부장품을 놓고 막돌로 덮어 정상부를 마무리 한 것은 이것은 환인 201호 및 19호분과 매우 흡사함. 둘째, 기단의 단수와 묘광 형태에서 차이가 있으나 한 무덤구역에 여러 기의 무덤을 연이어 마련한 점은 환인 23-33호분과 일치함. 셋째, 화장하여 묻는 습관이 환인 23호 및 20호분이나 15호분에서 확인되며, 집안 일대의 일부 적석총은 묘광벽이 불에 녹아 응결된 흔적으로 화장하였을 것으로 짐작됨. 따라서 간구자 무덤은 시기적으로 환인 적석총을 위주로 한 고구려 초기 무덤보다는 이르며 대체로 환인 적석총보다 선행된 고구려 早期의 무덤형식으로 고구려족계의 원시적 매장 특징이 짙게 반영됨. 또한 간구자 고분군은 여대지구 청동기 시대 무덤 및 청동단검고분의 특징을 내포하고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와 노철산 고분은 모두 여러 기의 무덤을 서로 가까이하여 ‘벌집형(蜂巢狀)’이며,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평면 형태는 원형으로 된 것도 있음. 이것은 간구자 1호분(M1)·2호분(M2)의 특징과 유사함. 강상묘는 하나의 무덤구역에 1기의 중심무덤을 마련하고 그 둘레를 돌면서 여러 기의 무덤을 방사선 형태로 마련하였는데, 이것은 간구자 7호분(M7)과 매우 유사함. 그리고 강상·누상묘 등 적지 않은 청동단검묘는 모두 화장한 무덤이라는 사실에서도 간구자 고분과 일치함.(『조선고고학개요』에서는 ‘노철산 및 장군산 고분→강상·누상묘→고구려 적석묘’라는 계승 발전관계를 설정하고 있고, 왕성생(1981, 「요하 유역 및 부근지역의 短鋌曲刃劍 연구」『요녕성고고박물관학회설립대회』회간)은 강상묘를 비롯한 요동문화유형의 무덤 형식과 매장습속이 환인 고구려 적석무덤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고구려 적석묘는 강상묘의 계승과 발전’이라고 보고 있음) 또한 여대지구 강상과 루상, 우가촌 타두 적석묘 등과 같은 집단묘로서, 家族合葬墓라는 점에서 공통됨. 반면 강상·누상 적석묘는 평지에 축조되었으며, 묘단은 없고, 묘광이 장방 혹은 방사상으로 분포하며, 중심 묘광의 4벽은 판석을 세워 만들었고, 우가촌 타두 적석묘 역시 묘광이 타원형 또는 부정형으로, 보통 평행을 이루는 가로배열로 분포하며 묘단을 만들지 않았음. 따라서 강상·루상과 우가촌 타두는 간구자 적석묘와는 축조 방법에서의 차이가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연대는 3230±90년B.P. 이고, 강상·누상묘는 기원전 1세기 전반기에 해당된 고조선 시기이며, 환인 지역 적석묘는 제15호분에서 環首式 철칼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東漢 시대로, 늦어도 漢·魏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음. 간구자 고분군의 상대적 축조연대는 대체로 전국시기로부터 서한 말기에 해당되므로, 간구자 고분군은 강상·누상묘에서 환인 적석묘로 발전해 나아가는 과정의 과도기 단계로서 고구려 선인들의 토착문화로 추정됨. 연접 방식은 3형식으로 나뉘는데, 제1형식은 속·부묘단이 주묘단을 둘러싸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지 않으며(AM3, AM4, BM5), 제2형식은 속·부묘단의 밖에 다시 제2속묘단이 외접하고, 제1형식이 주묘단만을 둘러싸지만, 제2형식은 연이어 속묘단이 함께 둘러싸고 하나의 부묘단이 기점이 되어 2개의 방향으로 나누어 펼쳐짐(BM2, BM4). 3형식 : 먼저 주묘단을 두르고 밖으로 다시 속묘단을 쌓고, 빈곳에 1, 2개의 부묘단을 세운 후 연속으로 서남방향에 속묘단을 설치한 후, 양쪽에 연속하여 부묘단을 대칭으로 축조함(AM1, AM2). 제1형식이 제2형식의 미완성형식이라면 비교적 이른 고분은 모두 먼저 주묘단을 쌓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였는데, 부·속묘단이 연접하는 방향은 서남쪽으로 접속하지만, 일정하지 않다가 비교적 늦은 고분에서 서남쪽으로 확장방향이 정형성을 띰. 속묘단은 중심선에 의해 대다수 서남방향으로 연접하며 부묘단은 양쪽으로 分列하는데, 대다수는 비교적 대칭적임. 연접 방식에 따른 배열법의 변천순서는 제1형식→제2형식→제3형식 순으로 변하고, 이런 양상은 고분군의 분포 양상과도 합치됨. A와 B구역을 보면, 산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가 이른데 비해, 강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는 비교적 늦음. 上→下의 배열과 발전과정은 환인과 집안 일대의 고구려적석총의 배열과 일치함.자연환경 BM2호분이 위치한 B구역은 북부 산 근처에 있고, 서쪽으로 BM3가 인접하여 있음. 간구자촌은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鎭 서쪽 0.5㎞ 지점에 위치하고, 고분은 干溝子村의 東·西干溝河 양안의 하곡 충적대지상에 분포함. 동쪽으로 長白縣城과 45㎞ 떨어져 있고, 동·서·북 3면이 高山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름. 압록강과 고분군 사이의 馬架子山을 기준으로 동쪽의 동간구하, 서쪽의 서간구하가 흐르는데, 서간구하는 동북에서 서남으로 흘러 고분군를 거쳐 압록강으로 흘러 감. 장백과 임강을 잇는 長臨도로가 동남에서 서북으로 뻗어 고분군을 양분하고, 고분군의 서·남 양쪽 산위에는 청동기시대 유적 분포함. 간구자 고분은 여러 차례 조사가 있었으나 1986년과 2001년 조사로 대별되는데, 특히 2001년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계기로 1986년 조사때보다 묘역이 크게 확대되었음. 앞서 고분 분포현황에서 언급하였듯이 2001년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묘역은 크게 A, B, C, D의 4구역으로 이루어졌는데 비해, 1986년 보고서에는 2001년 보고서의 A와 B 지역 일대를 파악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으므로 2001년 고분의 편호는 1986년 조사를 고려하지 않고 새로 편호하고 있기 때문에 양자의 개별 고분들을 직접 연결시켜 파악하기는 어려운 상황임. 때문에 개별고분의 상황을 두 시기로 나누어 정리하였음.유물정보 심발형토기 7점, 발 5점, 옥구슬 1점, 녹송석 드리개(綠松石墜) 2점, 고리 1점, 남색대롱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長白朝鮮族自治縣文物志』, 1986 · 朴潤武, 「長白縣干溝子墓地調査」『博物館研究』 1990-3, 1990 ·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 編, 『吉林省志』 45(民族志), 吉林人民出版社, 1991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朴潤武, 「압록강 유역 干溝子 적성무덤에 대한 조사연구」『中國境內 高句麗遺蹟 硏究』, 예하출판, 1995 · 王洪峰·孫仁傑·遲勇, 「吉林長白縣干溝子墓地發掘簡報」『考古』 2003-8, 2003 · 孫仁杰·遲勇·張殿甲, 「鴨綠江上流右岸考古調査」『東北史地』 2004-5, 2004

    • 리스트여닫기 간구자 BM4호분(干溝子 BM4號墳) 출토지 길림성 장백현 십사도구진 간구자촌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鎮 干溝子村)연대 상한: 戰國中期~末期, 하한: 西漢 상한 - B.C 4세기~B.C 3세기초, 하한 - 기원전후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2001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장백현문물보호관리소, 집안시박물관(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長白縣文物保護管理所, 集安市博物館)5월-7월 조사에서 1986년 편호와 달리 새로이 편호하는데 1986년 편호된 고분가운데 M15~M19의 5기 가운데 1기만 남아 있고, 1986년도에 편호되지 않은 고분 중 고분 형식을 판별할 수 있는 고분 고려하여 새로이 편호하였으며, 서간구하 북안의 A구 4기와 그 남안의 B구 3기를 발굴함.구조특징 전체형태는 橢圓丘狀으로 주묘단 1기, 속묘단 2기, 부묘단 6기로 조성되어 있고, 길이 16.5m, 너비 12.5m, 정상부 최고 높이는 1.5m이며, 西·南 양쪽은 일찍이 파괴되었음. 주묘단(ZT)은 고분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원형으로 직경 6m이며, 서남면은 이미 붕괴되고, 나머지 둘레 돌의 殘高는 0.5m임. 묘광은 2기로 장축 방향은 모두 150°임. 묘광(ZK1)은 타원형으로 길이 2.9m, 너비 1.05m, 깊이 0.15m이고, 바닥에는 작은 강돌이 깔려 있으며, 燒骨, 발 1건(淺腹罐 BaⅡ식), 어망추(網墜) 1건이 출토됨. 묘광(ZK2)은 타원형으로 길이 2.2m, 너비 0.7m, 깊이 0.1m이고, 바닥에 깔린 강돌층 두께는 0.05~0.08m이며, 燒骨과 심발형토기 1건(深腹罐 BⅢ식)이 출토됨. 속묘단(XT1, XT2)인 XT1은 半圓形으로 직경 약 5.5m, 높이 1.2m이고, 가장자리의 보존 상태는 양호함. 묘광(XK1)은 말각장방형으로 길이 2.5m, 너비 0.8m, 깊이 0.12m이고, 묘광 바닥에는 작은 강돌이 깔려 있음으며, 燒骨, 멧돼지이빨장식 1점이 출토함. XT2는 반원형으로 직경 약 6.5m이고, 북쪽의 殘高는 0.7m이며, 둘레돌은 둥근 호선을 그림. 묘광(XK2)은 타원형으로 길이 2.5m, 너비 0.7m, 깊이 0.15m이고, 바닥에 0.06m 두께로 작은 냇돌 깔았으며, 燒骨, 이빨장식(牙飾) 1건이 출토함. 부묘단(FT1~FT6)인 FT1은 반원형으로 직경 약 4.8m이고, 둘레 돌은 기본적으로 남아 있지 않으며, 지탱석은 기울어졌으나, 가장자리는 아직 가지런함. 묘광(FK1)은 불규칙한 타원형으로 길이 2.1m, 너비 0.4~0.7m, 깊이 0.08m이고, 묘광 바닥에는 작은 강돌을 깔았으며, 燒骨, 토기 1건이 출토함. FT2는 반원형으로 직경 약 4.5m, 적석 높이 1m이고, 둘레 돌은 가지런히 쌓아 올렸으며, 둘레 돌 밖에는 지탱석이 있음. 묘광(FK2)는 말각장방형으로 길이 2.5m, 너비 0.65m, 깊이 0.15m이고, 바닥에는 작은 강돌이 쌓여 있으며, 燒骨, 심발형토기 1건(深腹罐 AⅢ식)이 출토함. FT3은 扇形으로 반경 약 2m이고, 가장자리는 이미 붕괴됨. 묘광(FK3)은 장방형으로 가장자리가 비교적 가지런하고 길이 2.2m 너비 0.8m, 깊이 0.12m이며, 바닥에는 강돌이 깔려 있음. 燒骨, 구멍뚫린 숫돌(礪石) 1건이 출토함. FT4는 부정형으로 안쪽 묘광벽은 이미 훼손되었고, 바닥에 깔은 강돌은 대체로 타원형이며, 인골, 방추차(陶紡輪) 1건, 소량의 토기편이 출토함. FT5와 FT6은 기초만이 남아 있으며, 扇形으로 반경이 약 2m임.역사적 의미 축조방식은 지면에 커다란 돌을 사용하여 일정 범위의 묘역을 조성한 후 냇돌과 할석을 깔아 평면하게 지면을 고르고 무덤의 기저부를 만든 후, 그 위에 단을 쌓아 몇 기의 무덤이 연접되도록 함. 매장방식은 무덤 밖에서 화장한 후 燒骨을 매장한 2차장하고, 대다수 묘광 내부에 불에 타거나 그을린 흔적이 없음. 불에 탄 인골편은 작은 조각으로 가장 큰 것이 길이 5㎝가 안되며, 대략 1/3의 소골은 회백색이며 나머지는 赭色(자색)과 흑색임. 다만 BM2ZK1에서 목탄편이 출토되었고, 1986년 조사된 간구자 1호분(M1)의 석광 안에는 주검칸이나 葬具를 따로 마련하지 않았고 불에 태워진 인골과 대량의 목탄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시신을 묘광 안에 놓고 화장했던 것으로 추정됨. 燒骨은 묘광 내 2, 3곳에 무더기로 안치되었으며, 토기는 묘광 양단에 나누어 부장한 점으로 미루어 一代 혹은 한 가정의 合葬 즉 동일가족 數代의 합장묘 유적일 것임. 따라서 신분 혹은 항렬이 비교적 높은 사람이 주묘단의 중심에 매장되고, 다수 속·부묘단은 항렬의 대소 또는 昭穆제도에 따라 附葬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2001년 발굴한 7기 고분의 부장품은 총 283점으로 작은 장식품을 제외하면 평균 각 묘광에 3점이 부장되었으므로 厚葬은 아님. 전체 부장품 중 토기가 총73점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나 완형보다는 다수가 파편으로 출토되어 토기의 毁器習俗으로 짐작됨. 출토된 그릇은 모두 민무늬의 夾沙褐陶로 모양이 간단하고 종류가 단조롭고 제작 기술이 거칠어 원시성을 반영하며, 그 외 野猪牙飾, 綠松石管 등의 장식품은 모두 압록강 유역과 두만강 유역의 원시문화에서 일찍이 보여주는 전형적 기물임. 간구자 고분군의 무덤들은 하나의 기단 위에 여러 기의 고분이 배열되어 있는데, 특히 7호분은 1기의 원형석광적석묘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장방형의 작은 돌무덤이 방사상으로 배치되어 무덤 사이의 主次관계를 시사함. 즉 중심무덤의 피장자는 주위의 무덤에 비해 사회적 지위가 높은 편이나 반대의 무덤은 중심무덤에 예속된 상태로 추정됨. 반면에 1호분 및 4호분과 같은 단일한 원형석광무덤의 무덤배열 상태에서는 주종 관계가 전혀 보이지 않음. 한 墓區내의 여러 개 무덤은 그 크기와 모양이 같으며 또한 무덤 사이마다 돌로 서로 연결되어 한 무덤구역내의 피장자들 관계가 평등하였다는 것을 시사하며, 이는 혈연관계를 이루고 있는 가족 성원의 무덤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임. 부장품은 장식품이 많고 생산 공구 및 기타 그릇 류가 비교적 적은데, 이는 길림성 중부지구의 九台關馬山, 公主嶺猴石, 樺甸橫道河子 및 東豊, 遼源 일대 많은 大蓋石墓의 부장 특징과 서로 일치하며, 동북지구 남부에서는 戰國晩期~漢代 보편적으로 유행함. 상한연대는 2기 고분에서 方孔圓錢- 半兩錢과 一化으로 추정할 수 있음. 半兩錢은 秦末半兩 혹은 漢初의 八銖半兩이며, 一化는 ‘一刀’로 해석되며, 周秦 또는 秦初 시기의 화폐임. 赤峰 新窝堡와 鐵嶺 邱家台지역의 퇴장유적에서 이들 화폐가 燕·趙의 刀幣 및 반량전과 같이 출토되어 燕國晩期의 화폐로 확정되었으므로 묘지연대의 상한은 戰國末期, 비교적 이른 것은 戰國 中期에 해당됨. 하한연대는 AM1에서 출토된 鐵钁과 AM3·AM4 주묘단에서 채집된 鐵刀로 추정할 수 있는데, 钁은 漢代유행하는 것과 형태가 유사하며, 철도는 直柄環首로 일찍이 集安의 板岔嶺에서 동일한 것이 발굴된 바 있는데, 고구려 적석묘에서 대량 보이는 環首刀보다 조금 이름. 집안 판차령에서 “一化”圓錢이 “半兩”, “五銖”, “大泉五十”, 등의 한대화폐와 함께 출토되었고, 그 유통 시간은 전국말기~東漢임. 그러나 간구자묘지에서는 “오수” 및 동한화폐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고분의 하한은 대체로 동한이전의 서한시기로 비정됨. 간구자묘지의 연대가 집안, 환인 일대의 고구려 적석총보다 앞서므로, 고구려적석총의 가장 이른 형식인 無階段 圓丘上積石墓와 관련이 있을 것임. 고구려 초기의 적석묘의 발전과정을 보면, 무덤은 석광이 따로 없는 간단한 시설로부터 계단식 기단으로 이루어진 ‘框室(앞에서 박윤무의 1995년 글에 따라 ‘묘실’이라 정리하던 개념인데, 이 글에서 이 부분을 ‘框室’로 표현하고 있어 그대로 따랐음)’ 무덤으로 발전하고, ‘광실’은 장방형으로부터 정방형 형태로 변화·발전함. 묘광 위치에서도 위로부터 아래로 점차 내려옴. 이를 종합해 볼 때 간구자의 원형석광적석묘는 고구려 초기 적석총과 유사함. 첫째, 주검칸이 따로 없이 무덤의 기단 윗면을 자갈과 모래로 수평하게 마련하고 그 위에 주검과 부장품을 놓고 막돌로 덮어 정상부를 마무리 한 것은 이것은 환인 201호 및 19호분과 매우 흡사함. 둘째, 기단의 단수와 묘광 형태에서 차이가 있으나 한 무덤구역에 여러 기의 무덤을 연이어 마련한 점은 환인 23-33호분과 일치함. 셋째, 화장하여 묻는 습관이 환인 23호 및 20호분이나 15호분에서 확인되며, 집안 일대의 일부 적석총은 묘광벽이 불에 녹아 응결된 흔적으로 화장하였을 것으로 짐작됨. 따라서 간구자 무덤은 시기적으로 환인 적석총을 위주로 한 고구려 초기 무덤보다는 이르며 대체로 환인 적석총보다 선행된 고구려 早期의 무덤형식으로 고구려족계의 원시적 매장 특징이 짙게 반영됨. 또한 간구자 고분군은 여대지구 청동기 시대 무덤 및 청동단검고분의 특징을 내포하고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와 노철산 고분은 모두 여러 기의 무덤을 서로 가까이하여 ‘벌집형(蜂巢狀)’이며,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평면 형태는 원형으로 된 것도 있음. 이것은 간구자 1호분(M1)·2호분(M2)의 특징과 유사함. 강상묘는 하나의 무덤구역에 1기의 중심무덤을 마련하고 그 둘레를 돌면서 여러 기의 무덤을 방사선 형태로 마련하였는데, 이것은 간구자 7호분(M7)과 매우 유사함. 그리고 강상·누상묘 등 적지 않은 청동단검묘는 모두 화장한 무덤이라는 사실에서도 간구자 고분과 일치함.(『조선고고학개요』에서는 ‘노철산 및 장군산 고분→강상·누상묘→고구려 적석묘’라는 계승 발전관계를 설정하고 있고, 왕성생(1981, 「요하 유역 및 부근지역의 短鋌曲刃劍 연구」『요녕성고고박물관학회설립대회』회간)은 강상묘를 비롯한 요동문화유형의 무덤 형식과 매장습속이 환인 고구려 적석무덤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고구려 적석묘는 강상묘의 계승과 발전’이라고 보고 있음) 또한 여대지구 강상과 루상, 우가촌 타두 적석묘 등과 같은 집단묘로서, 家族合葬墓라는 점에서 공통됨. 반면 강상·누상 적석묘는 평지에 축조되었으며, 묘단은 없고, 묘광이 장방 혹은 방사상으로 분포하며, 중심 묘광의 4벽은 판석을 세워 만들었고, 우가촌 타두 적석묘 역시 묘광이 타원형 또는 부정형으로, 보통 평행을 이루는 가로배열로 분포하며 묘단을 만들지 않았음. 따라서 강상·루상과 우가촌 타두는 간구자 적석묘와는 축조 방법에서의 차이가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연대는 3230±90년B.P. 이고, 강상·누상묘는 기원전 1세기 전반기에 해당된 고조선 시기이며, 환인 지역 적석묘는 제15호분에서 環首式 철칼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東漢 시대로, 늦어도 漢·魏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음. 간구자 고분군의 상대적 축조연대는 대체로 전국시기로부터 서한 말기에 해당되므로, 간구자 고분군은 강상·누상묘에서 환인 적석묘로 발전해 나아가는 과정의 과도기 단계로서 고구려 선인들의 토착문화로 추정됨. 연접 방식은 3형식으로 나뉘는데, 제1형식은 속·부묘단이 주묘단을 둘러싸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지 않으며(AM3, AM4, BM5), 제2형식은 속·부묘단의 밖에 다시 제2속묘단이 외접하고, 제1형식이 주묘단만을 둘러싸지만, 제2형식은 연이어 속묘단이 함께 둘러싸고 하나의 부묘단이 기점이 되어 2개의 방향으로 나누어 펼쳐짐(BM2, BM4). 3형식 : 먼저 주묘단을 두르고 밖으로 다시 속묘단을 쌓고, 빈곳에 1, 2개의 부묘단을 세운 후 연속으로 서남방향에 속묘단을 설치한 후, 양쪽에 연속하여 부묘단을 대칭으로 축조함(AM1, AM2). 제1형식이 제2형식의 미완성형식이라면 비교적 이른 고분은 모두 먼저 주묘단을 쌓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였는데, 부·속묘단이 연접하는 방향은 서남쪽으로 접속하지만, 일정하지 않다가 비교적 늦은 고분에서 서남쪽으로 확장방향이 정형성을 띰. 속묘단은 중심선에 의해 대다수 서남방향으로 연접하며 부묘단은 양쪽으로 分列하는데, 대다수는 비교적 대칭적임. 연접 방식에 따른 배열법의 변천순서는 제1형식→제2형식→제3형식 순으로 변하고, 이런 양상은 고분군의 분포 양상과도 합치됨. A와 B구역을 보면, 산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가 이른데 비해, 강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는 비교적 늦음. 上→下의 배열과 발전과정은 환인과 집안 일대의 고구려적석총의 배열과 일치함.자연환경 BM4호분은 BM2 이남에 위치함. 간구자촌은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鎭 서쪽 0.5㎞ 지점에 위치하고, 고분은 干溝子村의 東·西干溝河 양안의 하곡 충적대지상에 분포함. 동쪽으로 長白縣城과 45㎞ 떨어져 있고, 동·서·북 3면이 高山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름. 압록강과 고분군 사이의 馬架子山을 기준으로 동쪽의 동간구하, 서쪽의 서간구하가 흐르는데, 서간구하는 동북에서 서남으로 흘러 고분군를 거쳐 압록강으로 흘러 감. 장백과 임강을 잇는 長臨도로가 동남에서 서북으로 뻗어 고분군을 양분하고, 고분군의 서·남 양쪽 산위에는 청동기시대 유적 분포함. 간구자 고분은 여러 차례 조사가 있었으나 1986년과 2001년 조사로 대별되는데, 특히 2001년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계기로 1986년 조사때보다 묘역이 크게 확대되었음. 앞서 고분 분포현황에서 언급하였듯이 2001년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묘역은 크게 A, B, C, D의 4구역으로 이루어졌는데 비해, 1986년 보고서에는 2001년 보고서의 A와 B 지역 일대를 파악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으므로 2001년 고분의 편호는 1986년 조사를 고려하지 않고 새로 편호하고 있기 때문에 양자의 개별 고분들을 직접 연결시켜 파악하기는 어려운 상황임. 때문에 개별고분의 상황을 두 시기로 나누어 정리하였음.유물정보 심발형토기 2점, 발 1점, 숫돌 1점, 이빨장식 2점,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長白朝鮮族自治縣文物志』, 1986 · 朴潤武, 「長白縣干溝子墓地調査」『博物館研究』 1990-3, 1990 ·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 編, 『吉林省志』 45(民族志), 吉林人民出版社, 1991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朴潤武, 「압록강 유역 干溝子 적성무덤에 대한 조사연구」『中國境內 高句麗遺蹟 硏究』, 예하출판, 1995 · 王洪峰·孫仁傑·遲勇, 「吉林長白縣干溝子墓地發掘簡報」『考古』 2003-8, 2003 · 孫仁杰·遲勇·張殿甲, 「鴨綠江上流右岸考古調査」『東北史地』 2004-5, 2004

    • 리스트여닫기 간구자 BM5호분(干溝子 BM5號墳) 출토지 길림성 장백현 십사도구진 간구자촌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鎮 干溝子村)연대 상한: 戰國中期~末期, 하한: 西漢 상한 - B.C 4세기~B.C 3세기초, 하한 - 기원전후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2001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장백현문물보호관리소, 집안시박물관(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長白縣文物保護管理所, 集安市博物館)5월-7월 조사에서 1986년 편호와 달리 새로이 편호하는데 1986년 편호된 고분가운데 M15~M19의 5기 가운데 1기만 남아 있고, 1986년도에 편호되지 않은 고분 중 고분 형식을 판별할 수 있는 고분 고려하여 새로이 편호하였으며, 서간구하 북안의 A구 4기와 그 남안의 B구 3기를 발굴함.구조특징 구조는 간단하고, 주묘단 1기, 부묘단 2기로 조성되어 있음. 전체 형태는 圓丘狀으로 직경 11m이고, 둘레 돌은 이미 훼손되었으며, 중심부 적석 높이는 1.5m임. 주묘단(ZK1)은 원형 평면으로 동쪽에 위치하고, 직경 5.5m임. 기초부와 둘레 돌의 하단은 모두 백색 流紋巖으로 축조하였고, 東半部는 이미 기울어지고 서쪽 부분은 잔존 상태가 양호하며, 둘레 돌의 殘高는 0.3m로 둘레돌 밖의 지탱석은 양호함. 타원형 묘광이 2개 있는데, 묘광(ZK1)은 길이 2.6m, 너비 0.9m, 깊이 0.25m, 장축 방향 30도이고, 묘광바닥에 깔은 돌의 두께는 0.13m이며, 화장한 인골편들이 있고, 부장품은 없음. 묘광(ZK2)은 길이 1.5m, 너비 0.7m, 깊이 0.1m이고, 바닥에는 두께 0.05m의 작은 강돌을 깔았으며, 장축 방향은 ZK1과 대략 동일하고, 燒骨만 출토되고 부장품이 없음. 속묘단인 FT1은 반원형으로 정상부 높이 1.1m이고, 남부는 비교적 심하게 파손되었으며, 北半部 둘레돌과 지탱석은 비교적 양호함. 묘광(FK1)은 말각장방형으로 길이 3m, 너비 0.7m, 깊이 0.1m이고, 바닥 강돌층 두께는 0.08m이며, 燒骨은 있으나 부장품은 없음. FT2은 扇形으로 반경 약 4m이고, 가장자리는 이미 붕괴되었음. 묘광(FK2)은 불규칙한 타원형으로 길이 2.8m, 너비 0.7m, 깊이 0.1~0.2m이고, 바닥에 깔은 작은 강돌의 두께는 0.08m이며, 대량의 燒骨, “一化”小圓錢 5점, 도기 1건(淺腹罐 BbⅡ식)이 출토함.역사적 의미 축조방식은 지면에 커다란 돌을 사용하여 일정 범위의 묘역을 조성한 후 냇돌과 할석을 깔아 평면하게 지면을 고르고 무덤의 기저부를 만든 후, 그 위에 단을 쌓아 몇 기의 무덤이 연접되도록 함. 매장방식은 무덤 밖에서 화장한 후 燒骨을 매장한 2차장하고, 대다수 묘광 내부에 불에 타거나 그을린 흔적이 없음. 불에 탄 인골편은 작은 조각으로 가장 큰 것이 길이 5㎝가 안되며, 대략 1/3의 소골은 회백색이며 나머지는 赭色(자색)과 흑색임. 다만 BM2ZK1에서 목탄편이 출토되었고, 1986년 조사된 간구자 1호분(M1)의 석광 안에는 주검칸이나 葬具를 따로 마련하지 않았고 불에 태워진 인골과 대량의 목탄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시신을 묘광 안에 놓고 화장했던 것으로 추정됨. 燒骨은 묘광 내 2, 3곳에 무더기로 안치되었으며, 토기는 묘광 양단에 나누어 부장한 점으로 미루어 一代 혹은 한 가정의 合葬 즉 동일가족 數代의 합장묘 유적일 것임. 따라서 신분 혹은 항렬이 비교적 높은 사람이 주묘단의 중심에 매장되고, 다수 속·부묘단은 항렬의 대소 또는 昭穆제도에 따라 附葬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2001년 발굴한 7기 고분의 부장품은 총 283점으로 작은 장식품을 제외하면 평균 각 묘광에 3점이 부장되었으므로 厚葬은 아님. 전체 부장품 중 토기가 총73점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나 완형보다는 다수가 파편으로 출토되어 토기의 毁器習俗으로 짐작됨. 출토된 그릇은 모두 민무늬의 夾沙褐陶로 모양이 간단하고 종류가 단조롭고 제작 기술이 거칠어 원시성을 반영하며, 그 외 野猪牙飾, 綠松石管 등의 장식품은 모두 압록강 유역과 두만강 유역의 원시문화에서 일찍이 보여주는 전형적 기물임. 간구자 고분군의 무덤들은 하나의 기단 위에 여러 기의 고분이 배열되어 있는데, 특히 7호분은 1기의 원형석광적석묘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장방형의 작은 돌무덤이 방사상으로 배치되어 무덤 사이의 主次관계를 시사함. 즉 중심무덤의 피장자는 주위의 무덤에 비해 사회적 지위가 높은 편이나 반대의 무덤은 중심무덤에 예속된 상태로 추정됨. 반면에 1호분 및 4호분과 같은 단일한 원형석광무덤의 무덤배열 상태에서는 주종 관계가 전혀 보이지 않음. 한 墓區내의 여러 개 무덤은 그 크기와 모양이 같으며 또한 무덤 사이마다 돌로 서로 연결되어 한 무덤구역내의 피장자들 관계가 평등하였다는 것을 시사하며, 이는 혈연관계를 이루고 있는 가족 성원의 무덤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임. 부장품은 장식품이 많고 생산 공구 및 기타 그릇 류가 비교적 적은데, 이는 길림성 중부지구의 九台關馬山, 公主嶺猴石, 樺甸橫道河子 및 東豊, 遼源 일대 많은 大蓋石墓의 부장 특징과 서로 일치하며, 동북지구 남부에서는 戰國晩期~漢代 보편적으로 유행함. 상한연대는 2기 고분에서 方孔圓錢- 半兩錢과 一化으로 추정할 수 있음. 半兩錢은 秦末半兩 혹은 漢初의 八銖半兩이며, 一化는 ‘一刀’로 해석되며, 周秦 또는 秦初 시기의 화폐임. 赤峰 新窝堡와 鐵嶺 邱家台지역의 퇴장유적에서 이들 화폐가 燕·趙의 刀幣 및 반량전과 같이 출토되어 燕國晩期의 화폐로 확정되었으므로 묘지연대의 상한은 戰國末期, 비교적 이른 것은 戰國 中期에 해당됨. 하한연대는 AM1에서 출토된 鐵钁과 AM3·AM4 주묘단에서 채집된 鐵刀로 추정할 수 있는데, 钁은 漢代유행하는 것과 형태가 유사하며, 철도는 直柄環首로 일찍이 集安의 板岔嶺에서 동일한 것이 발굴된 바 있는데, 고구려 적석묘에서 대량 보이는 環首刀보다 조금 이름. 집안 판차령에서 “一化”圓錢이 “半兩”, “五銖”, “大泉五十”, 등의 한대화폐와 함께 출토되었고, 그 유통 시간은 전국말기~東漢임. 그러나 간구자묘지에서는 “오수” 및 동한화폐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고분의 하한은 대체로 동한이전의 서한시기로 비정됨. 간구자묘지의 연대가 집안, 환인 일대의 고구려 적석총보다 앞서므로, 고구려적석총의 가장 이른 형식인 無階段 圓丘上積石墓와 관련이 있을 것임. 고구려 초기의 적석묘의 발전과정을 보면, 무덤은 석광이 따로 없는 간단한 시설로부터 계단식 기단으로 이루어진 ‘框室(앞에서 박윤무의 1995년 글에 따라 ‘묘실’이라 정리하던 개념인데, 이 글에서 이 부분을 ‘框室’로 표현하고 있어 그대로 따랐음)’ 무덤으로 발전하고, ‘광실’은 장방형으로부터 정방형 형태로 변화·발전함. 묘광 위치에서도 위로부터 아래로 점차 내려옴. 이를 종합해 볼 때 간구자의 원형석광적석묘는 고구려 초기 적석총과 유사함. 첫째, 주검칸이 따로 없이 무덤의 기단 윗면을 자갈과 모래로 수평하게 마련하고 그 위에 주검과 부장품을 놓고 막돌로 덮어 정상부를 마무리 한 것은 이것은 환인 201호 및 19호분과 매우 흡사함. 둘째, 기단의 단수와 묘광 형태에서 차이가 있으나 한 무덤구역에 여러 기의 무덤을 연이어 마련한 점은 환인 23-33호분과 일치함. 셋째, 화장하여 묻는 습관이 환인 23호 및 20호분이나 15호분에서 확인되며, 집안 일대의 일부 적석총은 묘광벽이 불에 녹아 응결된 흔적으로 화장하였을 것으로 짐작됨. 따라서 간구자 무덤은 시기적으로 환인 적석총을 위주로 한 고구려 초기 무덤보다는 이르며 대체로 환인 적석총보다 선행된 고구려 早期의 무덤형식으로 고구려족계의 원시적 매장 특징이 짙게 반영됨. 또한 간구자 고분군은 여대지구 청동기 시대 무덤 및 청동단검고분의 특징을 내포하고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와 노철산 고분은 모두 여러 기의 무덤을 서로 가까이하여 ‘벌집형(蜂巢狀)’이며,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평면 형태는 원형으로 된 것도 있음. 이것은 간구자 1호분(M1)·2호분(M2)의 특징과 유사함. 강상묘는 하나의 무덤구역에 1기의 중심무덤을 마련하고 그 둘레를 돌면서 여러 기의 무덤을 방사선 형태로 마련하였는데, 이것은 간구자 7호분(M7)과 매우 유사함. 그리고 강상·누상묘 등 적지 않은 청동단검묘는 모두 화장한 무덤이라는 사실에서도 간구자 고분과 일치함.(『조선고고학개요』에서는 ‘노철산 및 장군산 고분→강상·누상묘→고구려 적석묘’라는 계승 발전관계를 설정하고 있고, 왕성생(1981, 「요하 유역 및 부근지역의 短鋌曲刃劍 연구」『요녕성고고박물관학회설립대회』회간)은 강상묘를 비롯한 요동문화유형의 무덤 형식과 매장습속이 환인 고구려 적석무덤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고구려 적석묘는 강상묘의 계승과 발전’이라고 보고 있음) 또한 여대지구 강상과 루상, 우가촌 타두 적석묘 등과 같은 집단묘로서, 家族合葬墓라는 점에서 공통됨. 반면 강상·누상 적석묘는 평지에 축조되었으며, 묘단은 없고, 묘광이 장방 혹은 방사상으로 분포하며, 중심 묘광의 4벽은 판석을 세워 만들었고, 우가촌 타두 적석묘 역시 묘광이 타원형 또는 부정형으로, 보통 평행을 이루는 가로배열로 분포하며 묘단을 만들지 않았음. 따라서 강상·루상과 우가촌 타두는 간구자 적석묘와는 축조 방법에서의 차이가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연대는 3230±90년B.P. 이고, 강상·누상묘는 기원전 1세기 전반기에 해당된 고조선 시기이며, 환인 지역 적석묘는 제15호분에서 環首式 철칼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東漢 시대로, 늦어도 漢·魏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음. 간구자 고분군의 상대적 축조연대는 대체로 전국시기로부터 서한 말기에 해당되므로, 간구자 고분군은 강상·누상묘에서 환인 적석묘로 발전해 나아가는 과정의 과도기 단계로서 고구려 선인들의 토착문화로 추정됨. 연접 방식은 3형식으로 나뉘는데, 제1형식은 속·부묘단이 주묘단을 둘러싸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지 않으며(AM3, AM4, BM5), 제2형식은 속·부묘단의 밖에 다시 제2속묘단이 외접하고, 제1형식이 주묘단만을 둘러싸지만, 제2형식은 연이어 속묘단이 함께 둘러싸고 하나의 부묘단이 기점이 되어 2개의 방향으로 나누어 펼쳐짐(BM2, BM4). 3형식 : 먼저 주묘단을 두르고 밖으로 다시 속묘단을 쌓고, 빈곳에 1, 2개의 부묘단을 세운 후 연속으로 서남방향에 속묘단을 설치한 후, 양쪽에 연속하여 부묘단을 대칭으로 축조함(AM1, AM2). 제1형식이 제2형식의 미완성형식이라면 비교적 이른 고분은 모두 먼저 주묘단을 쌓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였는데, 부·속묘단이 연접하는 방향은 서남쪽으로 접속하지만, 일정하지 않다가 비교적 늦은 고분에서 서남쪽으로 확장방향이 정형성을 띰. 속묘단은 중심선에 의해 대다수 서남방향으로 연접하며 부묘단은 양쪽으로 分列하는데, 대다수는 비교적 대칭적임. 연접 방식에 따른 배열법의 변천순서는 제1형식→제2형식→제3형식 순으로 변하고, 이런 양상은 고분군의 분포 양상과도 합치됨. A와 B구역을 보면, 산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가 이른데 비해, 강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는 비교적 늦음. 上→下의 배열과 발전과정은 환인과 집안 일대의 고구려적석총의 배열과 일치함.자연환경 간구자촌은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鎭 서쪽 0.5㎞ 지점에 위치하고, 고분은 干溝子村의 東·西干溝河 양안의 하곡 충적대지상에 분포함. 동쪽으로 長白縣城과 45㎞ 떨어져 있고, 동·서·북 3면이 高山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름. 압록강과 고분군 사이의 馬架子山을 기준으로 동쪽의 동간구하, 서쪽의 서간구하가 흐르는데, 서간구하는 동북에서 서남으로 흘러 고분군를 거쳐 압록강으로 흘러 감. 장백과 임강을 잇는 長臨도로가 동남에서 서북으로 뻗어 고분군을 양분하고, 고분군의 서·남 양쪽 산위에는 청동기시대 유적 분포함. 간구자 고분은 여러 차례 조사가 있었으나 1986년과 2001년 조사로 대별되는데, 특히 2001년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계기로 1986년 조사때보다 묘역이 크게 확대되었음. 앞서 고분 분포현황에서 언급하였듯이 2001년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묘역은 크게 A, B, C, D의 4구역으로 이루어졌는데 비해, 1986년 보고서에는 2001년 보고서의 A와 B 지역 일대를 파악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으므로 2001년 고분의 편호는 1986년 조사를 고려하지 않고 새로 편호하고 있기 때문에 양자의 개별 고분들을 직접 연결시켜 파악하기는 어려운 상황임. 때문에 개별고분의 상황을 두 시기로 나누어 정리하였음.유물정보 발 2점, 일화전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長白朝鮮族自治縣文物志』, 1986 · 朴潤武, 「長白縣干溝子墓地調査」『博物館研究』 1990-3, 1990 ·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 編, 『吉林省志』 45(民族志), 吉林人民出版社, 1991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朴潤武, 「압록강 유역 干溝子 적성무덤에 대한 조사연구」『中國境內 高句麗遺蹟 硏究』, 예하출판, 1995 · 王洪峰·孫仁傑·遲勇, 「吉林長白縣干溝子墓地發掘簡報」『考古』 2003-8, 2003 · 孫仁杰·遲勇·張殿甲, 「鴨綠江上流右岸考古調査」『東北史地』 2004-5, 2004

  • 리스트여닫기 혼강구(渾江區)

  • 리스트여닫기 무송현(撫松縣)

    • 무송 감장후산 고분(撫松 碱場後山 古墳)

    • 무송 감장서감 고분군(撫松 碱場西坎 古墳群)

    • 무송 신안 고분(撫松 新安 古墳)

    • 리스트여닫기 무송 대방(황)정자 적석고분군(撫松 大方(荒)頂子 積石古墳群) 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60년 6월 : 1차· 조사 기관 : 통화지구문물보사대(通化地區文物普査隊)· 조사 참여자 : 전성죽(戰成竹), 장동재(張棟才) 등· 제1차 전국문물조사 당시에 조사되어 『撫松縣文物志』에 기재됨.· 신석기시대와 고구려시대의 古城”으로 소개됨.1986년 : 2차· 조사 기관 : 무송현문보소(撫松縣文保所)· 조사 참여자 : 왕문흥(王文興) 등· 제2차 문물조사 당시 대방정자산 고대유적지에 대해 재조사가 실시되어 『撫松縣文物志』에 기재됨.· 지표에서는 아직 어떤 유물도 발견되지 않았음.· 단, 평탄한 언덕 위에 직경이 서로 다른 돌무지(石堆) 6개와 우물 하나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배열되어 있음. 또한 길이 50m, 너비 1m, 높이 0.35m의 석열(石帶)이 하나 있음. 6개의 돌무지는 후대인이 돌을 쌓아 올린 것은 아니며, 원래 성벽(城墻) 옛터에서 사용된 돌무지인지의 여부조차 단언할 수 없음. · 따라서 해당 유적의 돌무지와 석열은 자연스런 무지가 아니며, 비록 인위적으로 파괴당하였으나 여전히 고대인류의 생활면모를 반영하고 있으며, 돌로 쌓은 석열에서 고대 성벽(城垣)의 흔적을 판별할 수 있어 고구려 시기의 성터 소재지일 가능성이 매우 높음.2008년 10월 : 3차· 조사 기관 : 무송현문보소(撫松縣文保所)· 조사 참여자 : 왕문흥(王文興), 고령박(顧聆博) 등· 제3차 문물조사 당시 다시 대방정자산 정상 적석무지를 조사함.· 문보소의 조사 보고서(登記表)를 보면, 조사대는 돌무지 6개를 고구려 적석묘로 판단하고, 북쪽에서부터 남쪽으로 M1~M6이라고 편호함. · 동시에 조사대는 대방정자산 주봉 동북 1.3km의 작은 산 정상에서 대방촌 신석기시대 유적지를 조사함. 여기서 흑요석제 괄삭기(黑曜巖刮削器), 협사흑도 구연편(夾砂黑陶口沿), 굽이 있는 바닥편(高臺底의 基底部) 등의 유물이 출토됨. · 그러나 1986년 조사에서 발견한 석대를 찾지 못함.2008년 5월· 조사 기관 : 길림성임업국(吉林省林業局)(?)· 조사 참여자 : 진경하(陳景河) 등의 장백문화(長白文化) 연구자· 장백문화 학자들에 의해 조사연구가 시작되었음. · 陳景河는 답사 후에 고구려 고성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大荒頂子祭壇이 金 여진황족의 望祭가 장백산에서 참배하였다는 제단인지의 문제를 제기함. 그의 적극적 제창 하에 3년 동안 林業局에서 여러 차례 학자를 조직하여 현지조사 및 방문과 논증을 하였음. 임업국조직의 몇 차례의 현지조사는 모두 나무와 풀이 무성한 계절이었기 때문에 적석무지는 나무와 잡초가 덮여 가려져 있었으며, 돌무지의 수량 및 형상이 모두 명확치 않았으며, 학자들의 견해는 크게 나뉘었음2011년 6월 및 9월· 조사 기관 : 吉林大學邊疆考古中心(吉林省文物局 위탁, 泉陽林業局과 撫松文保所의 지원)· 조사 참여자 : 謝浩, 馬天夫, 梁娜, 陳影, 馮恩學· 대방정자산 돌무지(石堆) 유적에 대한 고고조사를 실시함. · 몇 개의 돌무지를 평면 분포형태가 인공으로 쌓은 유적인지, 제단 또는 기타 유적을 확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함.구조특징적석무지는 대방정자산 남반부의 산등성이를 따라 북에서 남으로 분포하고 있음. 1980년대 산 정상에 방화 조망탑을 세우고 산길을 만들면서 필요한 석재들을 적석무지에서 채취함에 따라 소실된 것이 많음.역사적 의미1. 유적성격1) 성터1987년 吉林省文物志編纂委會가 길이 50m, 너비 1m, 높이 0.35m의 석대를 발견했는데 이를 고대 성벽 흔적으로 파악하고 고구려 성터의 가능성을 제기함.2) 제단金 여진황족의 望祭가 이루어진 유적으로 보거나, 唐代에 조영되어 明代까지 이어지며 사용된 제단으로 이해함.3) 고구려 적석묘2008년 조사에서 돌무지 6개를 고구려 적석묘로 규정하였고, 2012년 조사에서는 적석무지가 산성의 포대나 제단이 아니라 적석묘군에 속한다는 것을 확인함.2. 고분연대해당 유적은 고구려 적석묘에서 일찍이 보이는 구축방법으로 고구려 건국 전후의 적석묘군일 가능성이 보임.자연환경대방정자산 산정상 등마루 위에 위치함. 지리좌표는 동경 127° 19′, 북위 42° 24′임. 산은 무송현으로부터 동북 10km, 대방촌 서남 2km 지점에 위치하며 동남으로는 장백산 주봉과 75km 떨어져 있음. 松江河 지류인 大浦江 북안에 자리함. 대황정자산은 해발 912m로 주봉 동쪽 山體의 상대고도는 300m이며, 주변 10km내에서 가장 높은 곳임.참고문헌· 吉林省文物志編纂委會, 1987, 「大方頂子城址」 『撫松縣文物志』· 國家文物局 主編, 1992, 『中國文物地圖集』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陳景河 等, 2008, 「大方頂子古祭壇遺址的考察報告」 『協商新報』2008-12-19· 張璇如, 2009, 「長白山祭壇探源」 『東北史地』2009-5· 馮恩學·馬天夫, 2012, 「抚顺大方(荒)頂子積石堆調査報告」 『邊疆考古硏究』11

    • 리스트여닫기 무송 대방정자성(撫松 大方頂子城址 ; 大方頂子山城) 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60년 5월무송현 문물보사대· 대방정자성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여 돌로 쌓은 성벽을 발견, 이 곳이 신석기 시대와 고구려 시대의 고성임을 확인함.1986년 5월무송현 문물보사대· 대방정자성에 대한 재조사를 진행하였으며, 지표에서는 어떤 유물도 발견하지 못하였음. 다만 현재 산등성이 위에서 6개의 돌더미(石堆)와 우물(枯井) 및 석벽(石帶)을 발견하였음.구조특징厂자 모양을 이루고 있음. 산등성이 위에서 말라버린 우물이 발견됨.역사적 의미고구려 및 발해의 성터지금까지의 조사 결과를 분석하면 이곳의 돌더미와 석벽은 성벽의 흔적으로 판단되며, 고구려 시기의 성터였을 것으로 보임.자연환경대방촌 서남쪽 4km 지점의 평원(平崗)에 위치함. 속칭 대방정자라 불리며, 동서 방향으로 뻗어가다가 남북 방향으로 꺾임. 양쪽은 골짜기이고 북쪽은 무송-천양간 도로가 있음.유물정보없음.참고문헌· 吉林省文物志編委會, 1987, 『撫松縣文物志』, 吉林省文物志編修委員會· 國家文物局, 1993, 『中國文物地圖集』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王禹浪·王宏北, 1994,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上), 哈爾濱出版社· 東潮·田中俊明, 1995, 『高句麗の歷史と遺跡』, 中央公論社· 馮永謙, 1994, 「高句麗城址輯要」『北方史地硏究』, 中州古蹟出版社· 남대명, 1995, 『연변문화 유물략편』, 민족문화· 魏存成, 1999, 「길림성 내 고구려산성의 현황과 특징」『고구려연구』8· 魏存成, 2002, 『高句麗遺迹』, 文物出版社· 劉子敏, 2008, 「也談大武神王伐扶余」『東北史地』2008-3· 魏存成, 2011, 「中國境內發現的高句麗山城」『社會科學戰線』2011-1

    • 리스트여닫기 무송 양동유적(撫松 羊洞遺蹟) 출토지유적 내연대고구려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6년 5월무송현문물보사대(撫松縣文物普査隊)· 문물조사 당시 해당 유적을 발견함.구조특징강변의 15~20cm 두께의 경작층 아래 40~60cm의 문화층이 확인되고 그 아래는 생토층임.역사적 의미출토 유물을 분석하면 금속과 석기가 병행한 시대임을 보여줌. 토기의 모양으로 미루어 고구려 시기로 판단되나, 석기의 존재로 인해 구체적 시기 판단이 어려움.자연환경西江村 서남 약 1km 지점 漫江 우안의 대지 위에 위치. 강은 호형으로 유적지를 감싸고 북으로 흘러감. 강 맞은편은 낭떠러지이며 자연적으로 형성된 동굴이 있음.유물정보석부, 토기편 다수, 청동기 잔편, 철기 잔편참고문헌· 吉林省文物志編委會, 1987, 『撫松縣文物志』· 國家文物局 主編, 1992, 『中國文物地圖集-吉林分冊』, 文物出版社

    • 무송 황니외자유적(撫松 黃泥崴子遺蹟)

    • 무송 소남구 유적(撫松 小南溝 遺蹟)

    • 리스트여닫기 무송 신안유적지(撫松 新安遺址) 출토지백산시 무송현 무송진 신안촌연대발해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3년 11월왕지민(王志敏), 서평(徐平, 撫松縣文化館)· 撫松縣 新安鄕 新安村 촌민 周成貴가 자신의 집 채소밭에서 야채움을 팔 때, 연화문 와당·포문 기와·銅雙環器·銅弓形器·어망추(網墜)·토기편 등이 발견됨. 지역 文管會가 이 소식을 들었고, 王志敏과 撫松縣文化館 徐平이 조사를 진행함. 산언덕에서 아래 산비탈까지 회색 토기편과 기와편 등의 유물이 흩어져 있었음. 출토 유물을 근거로 유적지의 연대를 발해시기로 추정함. 이 조사에서는 도면과 사진자료를 남기지 않았고, 유물 출토 지점에 대한 설명이 없음.1985년 봄· 주민이 상술한 출토지점에서 북측으로 70m 떨어진 비탈에 집을 짓기 위해서 기초를 파다가, 철제 화살촉(鐵鏃) 두 묶음을 발견함. 각 묶음에는 20여개가 있었음. 농민들의 말에 의하면, 화살촉은 梭形起脊과 短鋌方柱形 두 종류가 있었다고 함. 周成貴의 부친 말에 의하면,그 집 채소밭에서 2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는 이웃집 촌민이 야채움을 파다가 1.4~1.6m 깊이의 지충에서 돌로 쌓은 주거지벽 기초(房屋墻基)를 발견하였는데, 기초(基)의 너비는 30~40cm였다고 함. 이 돌은 현지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라, 2.5㎞ 밖의 牛崗才에 있는 것임. 근대 사람들은 이 돌을 캐서 집을 짓지 않았고 석벽(石牆)이 비교적 깊게 매장되어 있는 점을 근거로 근대의 것이 아니고, 발해시기의 주거지라고 봄.1986년 5월무송현문물보사대(撫松縣文物普査隊)· 유적지 서남모서리 근처의 지표에 유물이 많은 약간 높은 대지(高埠)를 시굴하였는데, 연화문 와당·치미 등 전형적인 발해시기의 건축부재가 출토됨. 유적지 동·남·서 바깥 주위에 성벽과 성문 흔적이 발견되면서 발해시기의 성지로 파악하였고, ‘新安古城遺址’로 명명함. 또한 사료 기록을 토대로 하여 渤海 豐州 治所로 추정하였음. 조사를 통해 신안유적지의 범위를 확정하였고, 성벽 벽체 기본구조를 묘사하였으며, 출토 유물의 종류와 수량을 공포하였음. 비교적 과학적인 고고발굴을 진행함으로써, 많은 유물을 발견하였고 내용도 풍부하여, 학술계에 꽤 깊은 영향을 주었고, 그 성과는 지금까지도 광범위하게 인용되고 있음. 다만 정식적인 고고학적 보고서가 발표되지 않았는데, 文物志에 간단한 기록과 출토 유물 일부에 대한 사진과 도면이 있을 뿐임. 그리하여 발굴과정, 유적의 형태, 유물이 출토된 구체적인 지점, 遺存이 분포된 정황과 상호 사이의 관계 등의 문제 등에 대해 알 수가 없음.1986년 6월· 6월 27일 유적지를 조사할 때, 동북모서리 외측에서 제련유적지(煉鐵) 1곳을 발견함.1986년 7월· 1986년 7월 新安村의 한 농민이 유적지 안에서 나무 뿌리를 캐다가 동제 허리띠고리(銅帶扣), 철제 칼(鐵刀), 철제 화살촉(鐵鏃) 등을 발견함.1994년 가을· 조사기관 :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 조사자 : 하명(何明), 왕청(王青), 장건우(張建宇), 포현빈(包顯斌) (이상 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 왕문흥(王文興, 撫松縣文管所)· 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가 유적지에 대해 재차 조사와 시굴을 진행함. 이 조사에서는 유적지의 지리 상황과 보존 상태를 상세하게 기록하였음. 유적지 범위 안을 동·중·서 세 구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마다 시굴에 적절한 지점을 선정하여, 트렌치를 파는 방식을 진행함. 각 구역 가운데 서쪽 구역에 위치한 피트에서 비교적 풍부한 유구와 유물이 발견되었음. 발굴 규모가 비교적 작아 유적지 일부분만 노출되면서, 유적지의 전모를 알기는 어려웠음. 그리하여 주거지(房址)의 평면구조, 실내시설, 방향, 문길 등의 정황을 파악하지 못함. 다만 서쪽구역이 중요한 건축지들의 소재지임을 파악하였음. 조사보고서에는 시굴 성과를 간단하게 소개하고,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어 오가는데 매우 편리하다고 기술하였는데, ‘榆樹川 나루터에서 선착장에 도착한 다음, 동문을 통해 성내를 진입하고 다시 抽水로 갈 수 있다. 혹은 강 맞은편의 二道花園에서 강을 건너 남벽의 동쪽 성문을 통해 성내로 진입한 후 抽水로 갈 수 있다’고 언급하였음. 그 이외에 성곽 북면·서쪽구역과 마주하는 산봉우리 정상에서 봉화대와 유사한 유적을 발견하였는데, 북부 산 위의 요망시설로 보았음. 신안고성을 발해시기 朝貢道의 중요 城市로 보면서, 대체적으로 기존의 결론을 긍정함. 다만 보고서에서는 시굴지점의 구체적인 위치와 유물이 출토된 명확한 지점을 언급하지 않았고, 출토 유물의 도면 혹은 사진을 제시되지 않았음. 또한 유적지 성격에 대한 진전된 견해가 보이지 않음.2009년· 조사기관 :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 조사자 : 송옥빈(宋玉彬, 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 발굴 책임, 보고서 편저 지도),양회려(梁會麗, 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 집행 책임, 도면과 사진 담당), 어단(於丹, 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 장철(張哲, 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 곡환(穀芄, 白山市文物管理委員會辦公室), 왕문흥(王文興, 撫松縣文物管理所), 류휘(劉輝, 吉林大學考古系研究), 이음철(李窨哲, 吉林大學考古系研究), 어려군(於麗群, 토기 복원 및 탁본 담당), 장옥춘(張玉春, 금속기 보호와 복원), 왕배신(王培新, 吉林大學邊疆考古研究中心, 보고서 편저 지도)· 2009년 5월 營(營城子)-松(松江河)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吉林省文物考古研究가 고속도로 공사 범위와 부근 구역에 대해 구제발굴을 진행하였는데, 6개월 동안 2,100평방미터를 발굴함. 발굴구역은 유적지 서남모서리에 위치하는데, 1986년 시굴지점과 중복됨. 지리좌표는 동경 127° 11′04″, 북위 42° 19′ 54″이고, 해발은 420m임. 遺存이 가장 풍부한 서남쪽 대지를 전면적으로 발굴해, 건축지의 規格·형태 등의 정황을 파악함. 아울러 남쪽 성벽에 대한 절개조사를 진행함. 확인된 성지 범위 안에서 이전에 언급된 “전체 유적지 범위 내에 기와편의 유물이 분포되었다”라는 정황은 발견하지 못함. 성지 서남모서리 즉 발굴구역에 해당하는 대지 위에서 풍부한 유물을 발견함. 발굴을 통하여 유적지의 성격을 파악하고, 새로운 발해시기의 유적·유물 자료를 대거 수집함으로써, 유적지와 관련한 발해에 대한 인식이 풍부해짐. 그리고 유적지에 남아 있는 명확한 지층을 통해 後漢, 발해 중기, 발해 후기~金 초 등 3기 遺存을 확인함으로써, 유적지가 渤海遺存의 단일 문화유적지가 아님을 확인함.구조특징1983년 처음으로 무송 신안유적에 대한 조사가 있었는데, 출토유물을 근거로 유적을 발해시기로 추정하였다. 1985년에는 건물 신축과정에서 주거지벽 기초가 발견되어 발해시기의 주거지로 추정하였다. 1986년 시굴조사를 통하여 유적지 동, 남, 서쪽에서 성벽과 성문 흔적이 발견되면서 발해시기의 성지로 파악하고 ‘신안고성유지’로 명명하였다. 이 과정에서 발해 풍주(豐州)의 치소로 추정하였다. 고성의 형태는 긴 사각형태였고, 동벽 길이는 490m, 남벽 길이는 1,150m, 서벽 길이는 680m이다. 북벽은 경작지와 평면을 이루고 있는데, 길 옆 단면에서 판축 흔적과 대체적인 방향을 볼 수 있고, 길이는 1,020m이다. 성벽의 전체 둘레는 3,340m이다. 또 유적지의 동북 모서리에서 제련유적 1곳도 발견하였다. 동서 길이는 50m이고, 너비는 명확하지 않다.1994년에는 조사와 시굴을 진행하였는데, 성곽 북쪽 산봉우리 정상에서 봉화대와 유사한 유적을 발견하였는데, 신안고성을 조공도(朝貢道) 상의 중요 성시(城市)로 파악하는 것의 한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유적지에 대한 도면, 사진은 제시되지 않았고, 주거지, 성곽 등의 전모에 대한 보고도 미비하였다. 보고에 따르면, 유적의 평면은 불규칙한 평행사변형이다. 동·남·서 세 면에 성벽이 있고, 북면은 산세를 자연 성벽으로 삼았다. 동벽은 490m이고, 한 개의 문(동문)이 있다. 남벽은 1,150m이고, 두 개의 성문(동쪽과 서쪽 양측에 각각 한 개)이 있다. 서벽은 680m이고, 두 개의 성문(남쪽과 북쪽 양측에 각각 한 개)이 있다. 북면은 산세 방향과 동서 양벽 사이의 거리를 볼 때, 1,000여m로 볼 수 있다. 북벽의 흔적은 발견하지 못하였다.2009년, 발해시기 기와편, 토기편이 흩어져있는 대지를 발굴하였다. 여기서 출토된 유물들을 분석한 결과 한, 부여, 고구려, 발해 시기의 문화적 특징을 발견하였다. 주거지 흔적은 명확하지 않지만, 출토유물이 대부분 생활용기였음으로 주거지로 파악되었다. 유적지는 ‘신안유적지 제1기 유존(遺存)’으로 명명하였다.역사적 의미무송 신안유적지는 범위가 매우 크고, 유물도 비교적 풍부하게 출토되었다. 특히 건축자재가 많고, 크기가 크다는 점은 이곳에 거대 건축물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즉 고고발굴을 통해 비교적 높은 건축등급을 갖추고 있고, 적어도 보통 민들의 주거지나 사용 건물은 아니라는 점이 밝혀졌다. 유적의 성격을 특정할 수는 없지만, 관방기구(官方機構) 이상 급의 유적임이 유추된다. 그런데 1977년, 신안유적지 인근에서 발해 고분 3기가 조사되면서 두 유적간의 거리로 볼 때, 서로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고, 신안유적지에서 출토된 유물이 거의 모두 발해문화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어서, 신안유적은 일찍부터 발해의 중요 시설로 인식되어 왔다. 나아가 신안유적을 발해 서경압록부(西京鴨淥府)의 풍주성(豊州城) 구지(舊址)로 비정하는 의견이 1980년대 이래 학계의 지지를 받아 왔다. 기록에 풍주성은 발해 조공로 상에 위치해 있다고 했는데, 신안 유적지 역시 대체로 사료에 기록된 범위 안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추정은 정밀 고고 발굴 조사 없이 시굴조사에서 얻은 결과였고, 구체적인 정황 없이 장기간 정체되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2000년대 이르러 이에 대한 반론도 제기되었는데, 무엇보다 유적지의 위치가 교통이 불편하고, 유적의 경작지가 자급자족 방식의 주성(州城)을 경영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 그리고 유적에서 성벽과, 성문이 그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더욱이 출토유물이 모두 발해시기의 것이라는 보고도 기와에 한정된 것으로 여타 유물의 상관관계도 모호했기 때문이다.2009년 신안유적에 대한 조사와 발굴이 시작되면서 유적의 성격을 깊이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현 단계까지도 판단을 내릴 수는 없지만, 대체로 풍주성에 비정하는 논리는 상당부분 후퇴한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성벽으로 인식되었던 벽은 현지인이 강물의 범람을 막기 위해 설치한 토루로 파악되기도 했다. 또 기본적인 성시 배치와 시설과는 거리가 있고, 출토유물의 문화적 성격은 한대, 부여, 고구려, 발해의 모습도 보이고 있어서 이 역시 향후 연구되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조사보고자는 신안유적이 풍주성이 아닐 가능성이 더 높으나, 만약에 풍주성이 아니라면, 풍주성에 대해 중요한 보조 기능을 하는 관문(關卡)으로 추정하기도 하였다. 신안유적지가 위치한 지점은 외부에서 수로를 통하여 풍주성으로 갈 때 반드시 지나야 하는 곳으로 주성(州城)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면서 검문소 성격의 수로교통역참이었을 것으로 파악하였다. 뿐만 아니라 두도송화강(頭道松花江)을 왕래하는 선박에 대한 여객과 화물의 환승, 물자 보급 등과 관련한 편리한 조건을 제공할 수 있어, 이상적인 항구 혹은 역참이 되고, 주성(州城) 진출입을 위해 설치된 확실한 장벽으로도 볼 수 있다고 평가 하였다.자연환경유적은 길림성 백산시 무송현 무송진 신안촌에서 서쪽은 약 1km 거리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 무송진은 동남쪽 7.5km 정도에 위치하며, 백산시의 시중심에서는 동북 77km 지점이다. 유적지에서 동남 약 80km 지점에는 백두산 천지가 있다.유적지는 매우 개활한 경작지에 위치하고 있고, 유적지 앞(남쪽)으로는 두도송화강(頭道松花江)이 흐르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산에 의치하고 있다. 북면의 계속 이어지는 여러 산들과 유적지를 둘러싸고 있는 頭道松花江이 천연장벽이 되면서, 공격과 퇴각이 가능하고 수비가 가능한 전략적인 지위를 보유하게 되었고, 교통 중심지를 통제하는 요충지가 작용할 수 있다.유적지는 저수지 침수범위 안에 있는데, 남측과 서측 가장자리가 장기간 강물에 침식되어, 면적이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다. 신안유적지는 이 대지 서부에 위치하면서 서·남 양측이 대지 가장자리 가까이에 있어 비교적 심하게 침식되었기 때문에, 이전에 확정된 유적지 범위 일부가 없어졌다. 유적지가 위치한 대지는 지세의 기복이 크고, 홍수에 따른 침식으로 형성된 남북향의 골짜기(沖溝)가 여러 줄기 있는데, 유적지를 관통하여 두도송화강 안으로 합류하고 있다.유물정보신안유적지는 지표에서 토기편과 기와편이 대량으로 수습되었다. 지표에서 수습된 유물들은 대부분 발해시기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지표와 시굴조사를 통해서 화살촉 등의 철기류, 석기, 동기 등도 다양한 종류, 다량 출토되었다.참고문헌· 王志敏, 1985, 「吉林撫松新安渤海遺址」『博物館研究』1985-2· 吉林省文物志編委會, 1987, 『撫松縣文物志』· 張殿甲, 1988, 「渾江地區渤海遺跡與遺物」『博物館研究』1988-1· 國家文物局, 1993, 『中國文物地圖集』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 2000, 「撫松新安渤海古城的調査與發掘」『博物館研究』 2000-2·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2013, 「吉林撫松新安遺址發掘報告」『考古學報』2013-3· 梁會麗, 2013, 「新安遺址渤海遺存性質新論」『東北史地』2013-24· 梁會麗, 2014, 「試論新安遺址第一期遺存」『考古與文物』2014-4

  • 리스트여닫기 정우현(靖宇縣)

    • 정우 승리 고분군(靖宇 勝利 古墳群)

    • 리스트여닫기 정우 유수천고성(靖宇 楡樹川古城 ; 楡樹川山城) 출토지성 안 동남쪽 경작지연대고구려/발해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57년· 1957년 여러 차례의 조사를 하였고,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재조사를 하였음(國家文物局, 1993).1986년 이전· 1986년 이전에도 여러 해에 걸쳐 조사했으며, 채집된 유물은 매우 소량임. 기왕의 조사자들은 대체로 현지인들이 전하는 말에 따라 고구려 시기의 산성으로 판단하였음1986년1987년· 1986년과 1987년 연속으로 2차례에 걸친 조사에서, 성 안의 동남쪽 경작지에서 소량의 유물을 채집하였으며, 성의 전반적인 유적을 조사하고 발해 시기의 성터로 새로 인정함.· 현문물보호단위.구조특징장방형의 성곽으로 남벽 정중앙에 반원형의 옹문이 설치되어 있고, 성 내에 우물 유적이 2곳 있음.역사적 의미1) 撫松縣의 신안고성(新安城址)과 자매성설유수천고성은 무송현의 신안고성과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고, 두 성 간의 거리가 가까우며, 같은 시기의 성으로서 관계가 매우 밀접하므로 자매성으로 보임.2) 발해의 豊州 치소설 『渤海國志長篇』 下編 「地理考」 豊州條 下에는 풍주(일명 盤安郡)가 西京鴨綠府에서 동북쪽으로 210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음. 서경압록부의 치소는 대체로 臨江鎭에 비정되는데, 유수천고성과 신안고성은 임강에서 동북쪽으로 200여리 떨어진 곳에 있어 방위와 거리가 서로 부합됨. 성의 규모 또한 두 곳 모두 치소성으로 삼을만하므로 풍주의 소재지로 볼 수 있음.자연환경유수천고성의 동, 서, 북쪽은 가파른 절벽이며 높이가 거의 100m에 달함. 남쪽은 산의 평탄한 언덕을 형성하고 있음. 서쪽 산기슭에는 三道花園河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 성의 서쪽을 지나 頭道松花江에 유입됨.유물정보모래혼입 황갈토기, 니질 회색토기, 수키와 잔편이 출토. 강의 북안에 위치한 신안고성의 유물과 같음.참고문헌· 吉林省文物志編委會, 1988, 『靖宇縣文物志』, 吉林省文物志編修委員會· 孫進己·馮永謙, 1989, 『東北歷史地理』2, 黑龍江人民出版社· 國家文物局, 1993, 『中國文物地圖集』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馮永謙, 1994, 「高句麗城址輯要」『北方史地硏究』, 中州古蹟出版社· 東潮·田中俊明, 1995, 『高句麗の歷史と遺跡』, 中央公論社· 魏存成, 1999, 「길림성 내 고구려산성의 현황과 특징」『고구려연구』8· 王綿厚, 2002,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김진광, 2012, 『북국 발해 탐험』, 박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