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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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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스트여닫기 길림성 백산시(吉林省 白山市)

    • 리스트여닫기 임강시(臨江市)

      • 호로투 고분군(葫蘆套 古墳群)

      • 이도하자 고분군(二道河子 古墳群)

      • 이도하자 1호분(二道河子 1號墳)

      • 대율자 고분군(大栗子 古墳群)

      • 리스트여닫기 장천 고분군(長川 古墳群) 출토지 임강시 4도구진 장천촌 북쪽에 위치함(臨江市 四道溝鎮 長川村 北側位置).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7년 5월임강전참고구문물보사대(臨江電站庫區文物普査隊)石肖元, 張立夫, 張立新, 王洪峰, 張殿甲가 참여하여3개 구역에서 고분 확인.구조특징 비교적 넓은 범위에 분포함.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면서 3개 구역으로 구획되는데, 1구는 장천 2대촌 북쪽 과수원에 위치하며 2구는 新學校 북쪽 산간 평지에 위치하고 3구는 본래 老學校의 옛 터인 장천 1대촌 뒤에 위치함. 구역 사이의 거리는 각기 2里 정도임. 2구역은 고분이 가장 많이 분포했으나 이미 과수원과 계단식 밭이 들어서면서 대량으로 파괴된 상태임. 현재 몇 기만이 잔존하나, 원래 모습이 훼손됨. 3구역은 보존 상태 양호했으나 현재 다수 고분이 집을 짓기 위해 取石되면서 소멸되어 감. 6기 정도는 보존 상태 양호한 편임. 그중 3기는 기단적석총으로 둘레 길이 5-6m 내외임. 연접 적석총은 1기로 길이 12m, 너비 5m이며 과수원을 만들때 고분의 외형이 파괴됨. 기단적석총은 2기로 기단이 없어져 외형은 무기단 적석총과 유사함. 기단석 위에 熔石이 확인되고 있어 매장할 때에 화장풍속이 있었다고 추정됨.역사적 의미 장천 고분의 형식과 구조, 부장품은 고구려 고분과 유사하므로 고구려 유적으로 추정됨.자연환경 고분의 서북 약 3㎞ 거리에는 4도구진이 위치함. 장천은 4도구하 우안의 커다란 대지에 위치하며 대지 남쪽으로는 압록강, 북쪽으로는 긴 산맥이 자리함. 狹長한 지세로 평탄 개활지가 펼쳐져 있음.유물정보 현지인들에 의해 훼손된 1·2구역 토기(陶罐), 철제 칼(鐵刀), 전촉(箭頭), 3구역에서 토기(陶罐), 동제 장식(銅飾), 철제 괭이(鐵䦆) 등이 수습됨. 1987년 조사 당시 철제 괭이와 석제 화살촉 각 1개를 회수.참고문헌 · 王洪峰, 「臨江電站庫區古遺存調査綜述」『博物館研究』 1988-3, 1988

      • 파구 고분군(坡口 古墳群)

      • 고가영 고분군(賈家營 古墳群)

      • 입대 고분군(砬臺 古墳群)

      • 리스트여닫기 동전자 고분군(東甸子 古墳群) 출토지 임강시 6도구진 동전자촌(일명 동화피전자촌) 서쪽 대지와 後山 남쪽 언덕에 위치함. (臨江市 六道溝鎮 東甸子村(東樺皮甸子村) 西側臺地, 後山 南側崗 位置).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2004년 7월 10일길림성장백산문화연구회, 백산시문관판, 집안시박물관(吉林省長白山文化硏究會, 白山市文管判, 集安市博物館)張福有, 孫仁杰, 遲勇, 張殿甲, 谷芃 등이 참여했고 1987년 조사대용과 동일함.1960년 4월혼강시문물보사대(渾江市文物普査隊)백수십여기의 고분 발견함.1984년 5월 및 6월 조사혼강시문물보사대(渾江市文物普査隊)2개의 구역으로 나뉘며, 고분 60여 기 확인함.1987년 5월임강전참고구문물보사대(臨江電站庫區文物普査隊)石肖元, 張立夫, 張立新, 王洪峰, 張殿甲이 동전자촌 서쪽 대지에서 30여기 고분 확인, 동전자 후산 남쪽 언덕에서 5기 고분 확인함.구조특징 고분군은 2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음. 도로 남쪽에 형성된 마을의 서쪽 대지상 분포하는Ⅰ구역과 도로 북쪽, 마을 동쪽 後山 언덕위의 분포 구역(Ⅱ)임.Ⅰ구역 고분군의 대부분이 기단적석총에 해당됨. 둘레 길이 5-6m 정도이나 10여m에 이르는 고분도 있음. 계단적석총은 소수만 확인됨. 계단의 보존 상태는 불명확하고 계단석은 비교적 크며, 자연석을 이용하거나 가공한 것도 있음. 계단의 수는 2-3단임. 기단적석 연접묘는 2기 정도이고 보존 상태 양호함. 일부 고분은 기단석 훼손으로 무기단적석총 형태로 변형. 고분의 방향은 180~230°이고 고분은 깨진 돌로 봉해졌으며, 일부는 함몰갱이 확인됨. Ⅱ구역 고분군에선 대규모 계단적석총이 확인됨.역사적 의미 동전자 後山의 대형계단적석총 M1과 M2의 축조방식은 집안 통구 고분군 산성하구의 兄塚·弟塚과 유사하므로, 이들 무덤과 비슷한 고구려 4·5세기로 추정됨. 후산 고분은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하며, 큰 규모로 미루어 귀족의 고분일 가능성이 큼. `동전자 고분군은 혼강 경내 최대의 고분으로 고구려의 세력 범위, 풍속습관, 사회생활, 고분 분기 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임.자연환경 원래 ‘高麗墓子’로도 불렸음. 동전자 동쪽 4㎞ 거리에 6도구향이 위치하고, 동전자 남단에는 압록강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감. 동전자는 압록강 右岸의 狹長한 충적대지 위에 자리함. 대지 남쪽에는 압록강, 북쪽에는 많은 산들에 접하고 있는데 동서 길이 2.5㎞, 남북 너비 약 1㎞임. 대지 중앙에서 남쪽으로 치우진 곳은 압록강의 옛길인 저지대였으나, 지금은 농경지로 개간됨. 대지 북쪽은 높이가 6m 정도에 이르는 2급대지임. 동전자 주민은 대지의 북쪽에 치우친 곳에 거주하며 동전자촌 중앙에는 임강과 장백을 잇는 臨長도로가 관통하고 있음.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渾江市文物志』, 1987 · 王洪峰, 「臨江電站庫區古遺存調査綜述」『博物館研究』 1988-3, 1988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孫仁杰·遲勇·張殿甲, 「鴨綠江上流右岸考古調査」『東北史地』 2004-5, 2004

      • 동전자 1호분(東甸子 1號墳)

      • 동전자 2호분(東甸子 2號墳)

      • 동전자 4호분(東甸子 4號墳)

      • 동전자 8호분(東甸子 8號墳)

      • 동전자 10호분(東甸子 10號墳)

      • 동전자 2구역 1호분(東甸子 2區域 1號墳)

      • 동전자 2구역 2호분(東甸子 2區域 2號墳)

      • 서마록포자 고분군(西馬鹿泡子 古墳群)

      • 용강 고분군(龍崗 古墳群)

      • 리스트여닫기 임성고성(臨城古城) 출토지 임강진(현재 임강시 소재지)에서 삼도구하를 따라 동쪽으로 5㎞ 정도 떨어진 임성 8대[임동촌] 북쪽의 산봉우리에 위치함(臨江鎭 東側 5㎞ 距離 臨東村 北側嶂 位置).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2004년 7월 10일길림성장백산문화연구회, 백산시문관판, 집안시박물관(吉林省長白山文化硏究會, 白山市文管判, 集安市博物館)張福有, 張殿甲, 遲龍, 孫仁杰 등이 참여하여 개괄적인 현황 파악함. 『東北史地』2004-5에 발표함.1983년 6월혼강시문화국(渾江市文化局)소량의 토기편을 채집하고 1984년 3월 8일에 渾江市 重點文物保護單位로 지정됨.1984년혼강시문물보사대(渾江市文物普査隊)실측과 기록함. (『渾江市文物志』중의 ‘臨城城址’)구조특징 성은 三道溝河를 향해 남쪽으로 뻗은 언덕산의 정상에 위치함. 성이 위치한 산봉우리는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지형이며, 성 안은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음. 동벽 바깥은 가파른 낭떠러지이고, 북벽과 서벽 바깥은 높이 3-5m 정도의 벼랑임. 남벽 바깥으로는 너비 20m 길이 50m 정도의 평탄한 대지가 펼쳐져 있는데 밭으로 경작되고 있음. 성곽의 평면은 전체적으로 조금 찌그러진 공모양임. 성벽은 많이 허물어져 성돌을 가지런하게 쌓은 모습을 찾아보기 힘듦. 다만 성돌이 대부분 성벽 주변에 무너진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에 성곽의 윤곽을 확인하기는 어렵지 않은 상태임. 동벽 바깥은 가파른 절벽, 북벽과 서벽 바깥은 높이 3-5m 정도의 암벽으로 각 성벽은 이러한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축조함. 석재는 대부분 깬돌인데 잘 다듬지는 않았음. 강돌도 일부 섞여 있음. 크기는 대체로 길이가 20-40㎝ 사이임. 성 안은 유적의 흔적은 명확하게 보이지 않음. 서벽 안쪽에 약간 깊은 구덩이가 있는데, 용도는 정확히 알 수 없음.역사적 의미 臨城고성은 三道溝河 하류에 위치하여 압록강과 여러 지류연안의 水路 교통을 공제하던 전략적 요충지로 추정됨. 부근에서 별다른 군사주둔지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비록 규모는 작지만 임성고성 자체가 방어용 城堡였던 것으로 추정됨. 고구려 중기에 축조되어 발해시기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됨.자연환경 압록강 지류인 三道溝河가 마을 동북쪽에서 흘러들어와 마을 남쪽을 지나 古城이 위치한 산기슭 아래에서 활모양으로 성의 동·남·서를 휘감아 돈 다음, 방향을 꺾어 남쪽으로 흐르다가 臨城村 부근에서 압록강으로 유입됨. 성터가 있는 산봉우리는 북쪽 산줄기에서 三道溝河를 향해 남쪽으로 쭉 뻗은 언덕산에 위치했는데, 높이 약 200m 정도로 우뚝 솟아오른 것이 마치 누워있는 소와 같으며, 三道溝 河谷을 기다랗게 가로막고 있음. 山城 맞은편 산기슭에는 臨江-長白 도로가 있고, 산성 북쪽 산기슭 아래로는 臨江-大湖석탄광[煤礦] 철로가 통과하고 있음. 성에 올라서면 서쪽으로 臨江鎭과 압록강, 남쪽으로 臨江-長白도로, 동쪽으로 三道溝 골짜기, 북쪽으로 楊木頂子山脈 등이 한눈에 들어옮.유물정보 토기편과 도끼날형[鏟形] 철제 화살촉 등 채집함. 토기는 니질회색토기(泥質灰陶)와 황갈색토기(黃褐陶)로서 비교적 두꺼운 편인데, 토기 형태를 판별하기는 어려움.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渾江市文物志』, 1987 · 國家文物局 主編, 「臨城城址」『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王禹浪·王宏北, 「中國吉林省渾江市三道溝河臨城八隊高句麗古城址」『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1994 · 余昊奎, 「臨江 臨城古城」『高句麗 城』 Ⅰ(鴨綠江 中上流篇), 國防軍史硏究所, 1998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北方史地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4 · 孫仁杰·遲龍·張殿甲, 「鴨綠江上流右岸考古調査」『東北史地』 2004-5, 2004

      • 리스트여닫기 화피전자고성(樺皮甸子古城) 출토지 혼강시[임강시] 육도구향 화피전자촌 (渾江市[臨江市] 六道溝鄉 樺皮甸子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2004년 7월 10일길림성장백산문화연구회, 백산시문관판, 집안시박물관(吉林省長白山文化硏究會, 白山市文管判, 集安市博物館)張福有, 張殿甲, 遲龍, 孫仁杰 등이 참가하여 전체적인 현황 파악 및 유물 채집함. 『東北史地』2004-5에 발표함.2004년 9월 12일길림성장백산문화연구회(吉林省長白山文化硏究會)張福有, 遲龍, 孫仁杰 등이 참가하여 전체적인 현황 파악 및 유물 채집함. 『東北史地』2004-5에 발표함.1960년 4월혼강시문물보사대(渾江市文物普査隊)성곽의 현황 파악 및 간략한 기록함.1974년 마을 주민이 성돌을 채취하여 민가를 짓다가 靑花白磁 1점을 발견했다고 함.1984년 5월과 6월 27일통화시문물보사대(渾江市文物普査隊)5월에 유적의 조사 및 촬영이 이루어지고, 재조사 및 실측과 기록이 6월에 행해짐. 두 차례의 조사에서 유물 채집함. 『渾江市文物志』 중의 ‘樺皮甸子城址’에 발표함. 조사 착수에 앞서 1984년 3월 8일에 渾江市 重點文物保護單位로 지정함.1987 5월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와 혼강시문물관리위원회(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渾江市文物管理委員會)石肖元, 張立夫, 張立新, 王洪峰등이 참가하여 임강댐 수몰지구 조사차 성곽의 전체 현황 파악함. 『博物館硏究』1988-3에 발표함.1995년 5월백산시문물보사대(白山市文物普査隊)張殿甲 등이 참여하여 성곽 현황 파악 및 유물 채집함. 『北方文物』2000-2에 발표함.구조특징 성곽 방향은 135°로 평면은 동서 방향으로 긴 장방형으로 사각이 균일하지는 않음. 성곽 내부는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으며, 0.8m 정도의 고도차가 있음. 土石混築이라고 하지만(『渾江市文物志』), 동벽 북단의 절단면이나 북벽 중반부의 절단면으로 보아 강돌과 깬돌을 섞어서 허튼쌓기를 한 石築 성벽일 가능성도 있음. 석재는 강돌과 깬돌이 섞임. 동벽과 남벽의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한 편이지만, 동벽 북단은 절단되어 성벽 단면이 드러나 있고, 남벽 서단 모서리도 민가에 의해 일부가 파괴되었음. 서벽과 북벽은 훼손 정도가 심한데, 서벽 남단의 각대로 추정되는 부분은 송전탑 건설로 많이 훼손되었음. 북벽의 동반부는 성벽이 거의 모두 유실되었고, 서단도 민가에 의해 많이 훼손되었음. 특히 2단 충적대지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북벽 아래쪽에는 흘러내린 성돌이 많이 퇴적되어 있음. 동북모서리엔 붉게 탄 흙덩이가 흩어져 있음. 동벽 외곽의 경작지에서 기와, 벽돌, 토기편 등이 대량 출토되었음. 유물 산포지의 면적은 길이 100m, 폭 30m임. 건물지 또는 취락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됨.역사적 의미 유물 출토현황이나 성벽구조로 보아 당시 성곽 안팎에는 비교적 큰 취락이 저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됨. 위치상 군사요새로 보이지는 않으며, 동마록포자고성이나 협피구고성처럼 압록강 수로상의 역참으로 추정됨. 특히 축조 방법, 규모, 위치 등이 상류 30㎞ 지점에 있는 동마록포자고성과 같음. 이곳에서 강을 거슬러 협피구고성을 경유하여 동마록포자고성까지는 하루 일정이라고 함. 남쪽 언덕상의 王八脖子窯址 및 동남쪽 2㎞ 거리에 위치한 東甸子古墳群 등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됨. 동마록포자고성에서는 일찍이 高句麗 시기의 도끼날형 화살촉과 근대철기가 출토되었는데 樺皮甸子古城의 연대 역시 이와 비슷할 것으로 추정됨. 樺皮甸子古城은 곧 고구려 중기 이후에 세워진 평지성임. 동벽 외곽에서 고구려 시기의 기와나 토기편이 출토된다는 사실도 이를 반증함. 고구려는 342년 前燕 慕容皝의 침공을 받아 환도성이 함락당하자, 이듬해인 343년(고국원왕 13) ‘平壤東黃城’으로 移居했다고 함. 여기의 ‘平壤東黃城’을 ‘平壤’ 동쪽의 ‘黃城’으로 해석한 다음, 平壤을 集安 良民甸子古城으로 비정하고, 그 동쪽에 위치했다는 黃城을 임강 화피전자고성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최근 제기됨. 화피전자고성이 양민전자고성의 동쪽에 위치했다는 것, 화피전자고성이 위치한 지역이 압록강 상류에서 가장 넓은 충적분지의 하나라는 점, 주변에 유적이 집중되어 있다는 점, 피난을 목적으로 잠시 移居한 것에 불과하다는 점, 주변에 고구려 고분군이 밀집했으며 규모가 커다는 점, 주변에 야생동물이 많다는 점, 발해시기 서경압록부 소재지였던 임강의 동쪽에 위치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제시함(『東北史地』2004-5).자연환경 압록강이 남에서 흘러들어와 성의 서쪽 200m 지점에서 방향을 꺾어 북쪽으로 유유히 흘러감. 압록강 右岸에 비교적 넓은 초승달 모양 臺地가 펼쳐져 있는데, 고성은 이 대지의 남쪽 끝부분에 자리잡고 있음. 古城이 위치한 압록강 연안의 대지는 2단으로 되어 있는데, 강 연안에 바로 인접하여 좁고 기다란 1단 대지가 형성되어 있고, 그 안쪽에 1단 대지보다 5-10m 정도 높은 2단 대지가 펼쳐져 있음. 古城은 2단 충적대지의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어 압록강변에서 바라보면 상당히 웅장하게 보임. 또한 고성은 충적대지의 남쪽 끝단에 위치하여 충적대지 방향인 북쪽을 제외하면 삼면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음.유물정보 다양한 유물 채집됨.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渾江市文物志』, 1987 · 王洪峰, 「臨江電站庫區古遺存調査綜述」『博物館研究』 1988-3, 1988 · 國家文物局 主編, 「樺皮甸子城址」『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北方史地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4 · 王禹浪·王宏北, 「中國吉林省渾江市三道溝河臨城八隊高句麗古城址」『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1994 · 張天鵬, 「文物」『渾江市志』, 中華書局, 1994 · 余昊奎, 「臨江 東馬鹿村古城」『高句麗 城』 Ⅰ(鴨綠江 中上流篇), 國防軍史硏究所, 1998 · 張殿甲, 「鴨綠江中上游高句麗·渤海遺址調査綜述」『北方文物』 2000-2, 2000 · 魏存成, 『高句麗遺跡』, 文物出版社, 2002 · 孫仁杰·遲龍·張殿甲, 「鴨綠江上流右岸考古調査」『東北史地』 2004-5, 2004 · 張福有, 「高句麗平壤東黃城考」『東北史地』 2004-5, 2004

      • 리스트여닫기 협피구고성(夾皮溝古城) 출토지 임강시 육도구향 소재지 남쪽 3㎞ 협피촌(臨江市 六道溝鄉 所在地 南側 3㎞ 夾皮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2004년 7월 10일길림성장백산문화연구회, 백산시문관판, 집안시박물관(吉林省長白山文化硏究會, 白山市文管判, 集安市博物館)張福有, 張殿甲, 遲龍, 孫仁杰 등이 참가하여 개괄적인 현황을 파악함. 『東北史地』2004-5에 발표됨.1960년 4월혼강시문물보사대(渾江市文物普査隊)성곽 내부에서 석제 화살촉, 刮削火石, 토기편, 창(三稜槍), 철제 화살촉, ‘長平’자 모양의 동전 등의 유물 채집함. 당시 ‘淸 太祖의 古城’이라고 칭했다고 함.1984년 5·6월혼강시문물보사대(渾江市文物普査隊)5월에 전체 현황을 조사, 6월에 실측과 기록 시행함. 『渾江市文物志』중의 ‘夾皮溝城址’에 발표함. 조사 착수에 앞서 1984년 3월 8일에 渾江市 重點文物保護單位로 지정함.1987년 5월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와 혼강시문물관리위원회(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渾江市文物管理委員會)임강댐 수몰 지구 조사차 전체 현황 파악 및 유물 채집함. 『博物館硏究』1988-3에 발표함.20세기 전반 1935년에 간행된 『臨江縣志』에 따르면 당시 臨江縣 동남 130里 거리의 夾皮溝에 ‘高麗城子’라 불리는 古城이 있었다고 함. 당시 성벽은 무너졌으나, 성벽 기단 부근에는 벽돌이나 기와 조각이 흩어져 있었으며, 네 성문의 형적 또한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함. 전체 둘레는 약 2方里였다고 함.구조특징 평면은 불규칙한 장방형으로 동, 북, 서 3면에 돌로 성벽을 축조했으며, 산기슭으로 이어지는 남쪽에는 성벽을 축조하지 않은 것으로 보임. 모래사장으로 이어지는 동, 북, 서 3면에 성벽을 축조했음. 성벽은 북쪽이 높고 남쪽으로 갈수록 낮아져 지표와 평평하게 되며, 산기슭으로 이어지는 남쪽에는 본래부터 성벽을 쌓지 않았던 것으로 파악됨. 산돌과 깬돌을 허튼쌓기로 층층이 축조했는데, 북벽 서반부에서는 11층까지 확인할 수 있음. 성곽 외벽의 벽면은 비교적 평평하고 가지런한 편이며, 성벽 안쪽에는 흙으로 메웠기 때문에 성벽의 두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음. 1960년대 조사 당시에 이미 성곽 내부에 성벽과 비슷한 높이로 흙이 쌓여 있는데, 성으로 흙이 유입될 만한 개울이나 계곡이 없으므로 자연적으로 퇴적된 것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조성한 것으로 추정됨. 1980년대 조사 당시 동벽의 북단, 북벽의 동단, 서벽의 남단 등의 성벽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다고 함. 지금도 북벽 동단부는 성벽 축조상태를 관찰할 수 있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임. 최근 臨江-長白 도로를 확·포장하면서 성곽 남단부를 덮어 남단뿐 아니라 동벽과 서벽의 남단도 도로에 덮혀 원형을 찾아볼 수 없게 됨. 동벽은 압록강으로 나아가는 小路에 의해 성벽이 상하단으로 분리되어 전체적인 축조양상을 명확히 파악할 수는 없음. 북벽 서반부는 퇴적으로 인해 성곽의 축조양상을 파악할 수 없으며, 서벽의 북반부는 성벽 자체가 유실된 것으로 파악됨. 성곽 서북쪽 강변에서는 모래와 자갈 채취가 계속 이루어지고 있어 앞으로도 성곽에 대한 훼손이 지속될 것으로 보임.역사적 의미 夾皮溝는 큰 산 사이에 있고, 계곡이 깊고 가파른 절벽으로 되어 있어 陸路 교통이 불편함. 夾皮溝古城은 압록강 수운과 관련될 것으로 추정됨. 특히 古城이 강가에 위치해 있으며, 모래사장으로 이어지는 동, 북, 서 3면에만 성벽을 축조하고, 산기슭으로 이어지는 남쪽에는 성벽을 축조하지 않았음. 그리고 성곽 내부는 흙으로 메워 성벽과 평평하게 하였음. 古城의 북쪽은 바로 강가이며, 증수기 때가 되면 강물이 불어나 성벽 아래까지 넘치고, 심한 경우 수몰되기도 함. 이는 군사적 방어나 거주에는 매우 불리한 조건임. 따라서 고성은 압록강을 오가던 선박이나 뗏목을 정박하던 선착장[碼頭]으로 추정됨.자연환경 古城의 북쪽은 압록강이고, 서쪽에 夾皮溝 골짜기, 동쪽과 남쪽에는 산들이 연이어져 있음. 夾皮溝는 큰 산 사이의 좁은 협곡으로 산비탈이 계단식 지형에 속하는데, 골짜기 사이를 흐르는 작은 개울이 北流하여 古城 서벽 외곽을 지나 압록강에 유입됨. 압록강이 서쪽에서 흘러들어와 古城의 북쪽을 지난 다음, 夾皮村 동쪽에서 방향을 꺾어 북쪽으로 흐르다가 六道溝河 河口에서 다시 방향을 바꾸어 서쪽으로 흘러나가는데, 流向이 古城 부근에서 180° 바뀜. 古城 남쪽에 위치한 夾皮村은 남북으로 길게 자리잡고 있으며, 동쪽과 서쪽은 모두 험준한 산맥임. 夾皮村 북쪽에 臨江-長白 도로가 지나가고 있는데 최근 도로를 확·포장하면서 고성의 남단부를 덮어 버렸음. 古城의 남쪽은 점차 낮아지는 산록과 맞닿아 있고, 북쪽은 압록강가임. 古城은 압록강 右岸의 모래사장에 자리잡고 있는데, 북쪽으로 불과 20여m 거리에 압록강이 있으며 성곽은 강 수면보다 2m 정도 높음.유물정보 1960년대 : 석제 창, 석제 화살촉, 토기편, 철제 화살촉, 동전 등 출토됨. 1987년 : 니질회색토기(泥質灰陶), 사질갈색토기편(夾砂褐陶片), 석제 칼 편(石刀片) 등 채집함.참고문헌 · 羅寶書·邱在官, 『臨江縣志』, 臨江藝文齋印刷所, 1935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渾江市文物志』, 1987 · 王洪峰, 「臨江電站庫區古遺存調査綜述」『博物館研究』 1988-3, 1988 · 國家文物局 主編, 「夾皮溝城址」『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北方史地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4 · 王禹浪·王宏北, 「中國吉林省渾江市三道溝河臨城八隊高句麗古城址」『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1994 · 張天鵬, 「文物」『渾江市志』, 中華書局, 1994 · 余昊奎, 「臨江 東馬鹿村古城」『高句麗 城』 Ⅰ(鴨綠江 中上流篇), 國防軍史硏究所, 1998 · 魏存成, 『高句麗遺跡』, 文物出版社, 2002 · 孫仁杰·遲龍·張殿甲, 「鴨綠江上流右岸考古調査」『東北史地』 2004-5, 2004

      • 리스트여닫기 동마록포자고성(東馬鹿泡子古城) 출토지 임강시 육도구향 동마록촌 압록강 右岸에 위치함(臨江市 六道溝鄉 東馬鹿村 鴨綠江 右岸 位置).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2004년 7월 10일길림성장백산문화연구회, 백산시문관판, 집안시박물관(吉林省長白山文化硏究會, 白山市文管判, 集安市博物館)張福有, 張殿甲, 遲龍, 孫仁杰 등이 참가하여 개괄적인 조사와 측량함. 『東北史地』2004-5에 발표됨.1950년 말경 성곽 서쪽 400여m 떨어진 東馬小學院 內에서 철제 삼족기(三足鐵器), 철제 화살촉(鐵鏃) 등이 출토되었다고 함.1983년 가을혼강시문화국(渾江市文化局)1984년 3월 8일에 渾江市 重點文物保護單位로 지정함.1984년 봄과 6월혼강시문물보사대(渾江市文物普査隊)봄에 유적지 기록 및 사진 촬영, 6월에 실측함. 『渾江市文物志』중의 ‘東馬城址에 발표됨.구조특징 성벽 내부를 흙으로 축조하고, 바깥을 다듬은 돌로 축조한 토석혼축 성벽이라고 함. 성곽 안팎이 모두 밭으로 개간되어 심하게 허물어졌지만, 성곽의 전체적인 윤곽은 잘 드러나 있음. 1984년 당시 동벽과 남벽만 남아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동벽 상부는 흙더미로 퇴적되어 있으며 밭으로 경작되고 있어 원형을 파악할 수 없음. 남벽 서반부의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하지만, 동반부는 흙으로 퇴적되어 밭으로 경작되고 있어 원형을 파악할 수 없음. 북벽과 서벽은 심하게 훼손되었지만, 성벽 가장자리를 따라 성돌이 퇴적되어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아직 성벽 기단부를 볼 수 있음. 1984년 당시 현지인의 말에 의하면 북벽에 원래 문이 하나 있었으나, 이미 북벽과 같이 훼손되어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함. 성 내부는 매우 협소하고 돌더미가 널려 있음. 간혹 건물 기초 흔적으로 보이는 것도 있음역사적 의미 고성은 2단 충적대지의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주변 지세도 비교적 평탄하여 방어와 거주에 적합한 城寨로 추정됨. 또한 압록강을 따라 하류 30㎞ 이내에 이와 서로 유사한 고성이 두 곳이 있는데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여겨짐. 특히 압록강을 향해 있는 남벽에 남문이 있고, 그 바깥에 있었다는 돌계단은 1단 충적대지를 통해 압록강으로 나아가던 통로와 관련된 유적으로 추정됨. 성곽 내부에서 출토된 도끼날형 철촉은 고구려 시기의 화살촉과 비슷하다고 추정됨. 고구려 중기 이후에 축조되어 청말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성 내부에서 발견된 활시위는 청 말에 변경의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생활하였던 유민이 남긴 것으로 추정됨.자연환경 일찍이 이 일대에는 말과 사슴이 많아서 馬鹿泡子라 불렸다고 함. 지금은 충적대지 일대를 농지로 개간하여 비옥한 산간분지로 변함. 동쪽에서 흘러들어온 압록강이 남쪽으로 완만하게 만곡하여 서쪽으로 흘러나가면서 강의 북쪽에 길이 2㎞, 폭 500m 전후의 충적대지 형성함. 충적대지는 2단으로 이루어졌는데, 압록강에 인접하여 좁고 길다란 1단 충적대지가 있고, 그 북쪽으로 1단 대지보다 5-10m 정도 높은 2단 충적대지가 넓게 펼쳐져 있음. 동마록촌은 2단 충적대지의 북쪽 산기슭 아래에 위치함. 고성은 2단 충적대지의 동남쪽 가장자리에 위치하여 있으며, 남쪽 100여m 거리에 위치한 압록강과는 아래쪽 충적대지를 통해 연결됨. 충적대지는 산으로 둘러싸여 분지를 이루는데, 남, 동, 서 3면의 산은 경사가 가파르지만, 북쪽으로는 경사가 비교적 완만한 산줄기가 이어짐.유물정보 화살촉, 창등이 출토됨.참고문헌 · 王禹浪·王宏北, 「中國吉林省渾江市三道溝河臨城八隊高句麗古城址」『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1994 · 余昊奎, 「臨江 東馬鹿村古城」『高句麗 城』 Ⅰ(鴨綠江 中上流篇), 國防軍史硏究所, 1998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渾江市文物志』, 1987 · 國家文物局 主編, 「東馬鹿泡子城址」『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北方史地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4 · 孫仁杰·遲龍·張殿甲, 「鴨綠江上流右岸考古調査」『東北史地』 2004-5, 2004

      • 파구유적(坡口遺蹟)

      • 고가영 고분군 대형고분(賈家營 古墳群 大形古墳)

      • 고가형 고분군 소형고분(賈家營 古墳群 小形古墳)

      • 리스트여닫기 칠도구유적(七道溝遺蹟) 출토지 임강시 육도구향 칠도구촌 (臨江市 六道溝鄉 七道溝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4혼강시문물보사대(渾江市文物普査隊)6월에 유적을 발견하고, 현황과 층위 파악 및 유물을 채집하였으며, 『渾江市文物志』중의 ‘七道溝遺址’를 발표함.1987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혼강시문물관리위원회(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渾江市文物管理委員會)5월에 石肖元, 張立夫, 張立新, 王洪峰이 참가하여 임강댐 수몰지구 조사차 고분군과 더불어 유적을 조사하고, 『博物館硏究』1988-3에 발표함.구조특징 1984년도 조사시에는 七道溝村 동북쪽에 흙을 채취하던 커다란 採土場에 위치하고, 길이 150m, 너비 100m. 깊이 1.8-2.0m 규모의 흙구덩이가 있음. 층위는 지표하 0.30-1.00m는 경작층과 교란층, 1.00-1.50m는 문화층, 1.60m 이하는 황토층으로 생토층이고, 지표하 1.0-1.5m의 문화층에서 파괴된 재구덩이[灰坑]가 나타났으며, 토기편이 다수 출토되었다고 함. 1987년도 조사시에는 2단 대지상에 짙은 회색의 암키와와 수키와, 흑요석, 토기편 등이 많이 흩어져 있었는데, 범위는 남북 100m, 동서 50m임. 문화층인 마을 북쪽은 유적 서편에 해당하는데, 이곳에 채토를 하던 커다란 흙구덩이가 있음. 크게 3개의 층위로 나뉘는데, 제1층은 두께 20㎝로 표토층, 제2층은 두께 80㎝로 黑褐土의 문화층, 제3층은 黃沙土로 생토층임. 제2층의 문화층에서 불탄 흙덩어리, 숯, 토기편 등이 출토됨. 1984년 조사시에 토기편이 다수 출토되었고, 1987년 조사시에 평기와, 수키와, 흑요석, 불탄 흙덩어리, 숯, 토기편 등이 출토되었음.역사적 의미 유적에서 서쪽으로 500-1,000m 거리에 길이 300m, 너비 150m에 이르는 고구려 시기 고분군이 분포하는데, 대부분 적석묘이며, 고분군 남쪽에는 봉토석실묘도 있음. 七道溝 유적은 1984년 조사 때 새로 발견된 유적으로,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과 서측에 분포한 고분군으로 보아 고구려 시기의 마을 유적으로 추정되나, 黑曜石이 대거 분포한 것에서 보듯이 고구려 건국 이전부터 취락이 자리잡았을 가능성이 높음.자연환경 임강시 육도구향 칠도구촌의 동북쪽에 위치함. 유적지에서 서북쪽으로 10여㎞ 거리에 六道溝鄕 소재지가 있고, 유적지에서 동쪽으로 1㎞ 정도만 가면 臨江市와 長白縣의 경계이며, 臨江-長白 도로가 유적지 북쪽을 지나가고 있음. 압록강 북안에 상하 2단의 대지가 산으로 둘러싸여 盆地를 형성했는데, 압록강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盆地 서남단에서 流向을 북쪽으로 꺾은 다음, 盆地 서북단을 지나고나서 다시 방향을 꺾어 西流하고 있음. 盆地 서북쪽에 비교적 넓은 1단 충적대지가 자리잡고 있는데, 논으로 경작되고 있고 그 사이를 七道溝河가 가로질러 압록강에 유입됨. 盆地 동남쪽에 동서 방향의 2단 대지가 자리잡고 있는데, 동쪽으로는 높은 산과 접해 있고, 남쪽 100m 거리에 압록강이 있고, 서북쪽으로는 평탄한 1단 충적대지가 펼쳐져 있음. 2단 대지의 남북 너비는 200m에 불과하며, 그 위에 七道溝村이 자리잡고 있고, 유적은 마을의 동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2단 대지 西端의 小學校 북쪽에는 고구려 시기의 적석묘가 다수 분포해 있음.유물정보 토기 저부 1점, 토기편 다수, 암키와 1점, 수키와 1점, 흑요석기(刮削器) 2점, 석기 2점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渾江市文物志』, 1987 · 王洪峰, 「臨江電站庫區古遺存調査綜述」『博物館研究』 1988-3, 1988 · 國家文物局 主編, 「七道溝遺址」『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칠도구 고분군(七道溝 古墳群)

      • 칠도구 1호분(七道溝 1號墳)

      • 칠도구 2호분(七道溝 2號墳)

      • 칠도구 6호분(七道溝 6號墳)

      • 리스트여닫기 동전자유적(東甸子遺蹟) 출토지 임강시 육도구향 동전자촌 (臨江市 六道溝鄉 東甸子村)연대 원시시대 말기~고구려초기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57 현지 농민인 李秀海가 3-5尺 깊이의 저장 구덩이를 파다가 토기 항아리 2개 채집함. 일찍이 성벽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함.1958 농지를 경작하다가 돌도끼, 돌화살촉, 돌보습 등이 출토함.1960 1960년 기록에서 유적의 동서 길이는 645m, 남북 너비 400m이고, 지표면에서 토기편, 자기편, 어망추 등을 쉽게 볼 수 있었으며, 당시 西面의 고분군과 유적지는 인접하여 이어져 있었으며, 압록강과 도로 중간의 좁고 긴 지대를 유적과 고분군이 점유하고 있었다고 함.1984혼강시문물보사대(渾江市文物普査隊)6월에 유적의 현황을 파악했고, 거의 파괴되었다고 함. 『渾江市文物志』중의 ‘東甸子遺址’로 발표했으며, 유적 조사에 앞서 1984년 3월 8일에 渾江市 重點文物保護單位로 지정됨.1987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혼강시문물관리위원회(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渾江市文物管理委員會)5월에 石肖元, 張立夫, 張立新, 王洪峰이 참가하여 임강댐 수몰지구 조사차 고분군과 더불어 유적을 조사하였고, 『博物館硏究』1988-3에 발표함.구조특징 압록강에 인접한 2단 충적대지상에 분포하며 마을유적이기 때문에 정형화된 평면을 확인하기는 어려운 상태임. 1950년대에 성벽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渾江市志』), 다른 자료에는 관련 언급이 없어서 명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움. 1984년 6월 渾江市 文物普査隊가 재조사할 때는 어떠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고, 원래 있던 100여 기의 고분군 역시 많이 파괴되어 몇 십 기만 남아 있었다고 하나, 1987년 조사에서는 유적의 전체적인 범위와 함께 石器類를 다수 채집했다고 함. 1957년에는 현지 농민이 저장 구덩이를 파다가 토기 항아리 2개 채집하였고, 1958년에는 농지를 경작하다가 석제 도끼, 석제 화살촉, 석제 보습 등 출토되었으며, 1960년대 기록에서는 토기편, 자기편, 어망추 등이 출토되었다고 나와있으며, 1987년 조사에서 석기류를 다수 채집함.역사적 의미 고분군은 1960년대만 하더라도 유적과 인접하여 백여기 이상의 고분이 밀집해 있었지만, 1980년대에는 몇 십 기만 남아 있었다고 함. 그렇지만 지금도 동전자촌 서쪽 경작지와 마을 안쪽에서 수십기의 적석묘를 확인할 수 있으며, 마을 뒤쪽 산기슭에서는 거대한 적석묘가 여러 기 분포해 있음. 유적에서 압록강 하류를 따라 약 2㎞ 정도만 내려가면 樺皮甸子古城이 나오며, 상류를 거슬러 약 8㎞ 정도 가면 夾皮溝古城, 다시 20여㎞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東馬鹿泡子古城이 나옴. 유적에서 臨江-長白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모퉁이를 돌아가면 본래 언덕 위에 臨江 王八脖子窯址가 있었으나 현재는 도로 개설 등으로 모두 유실되었음. 유적지 인근에 고구려시기의 고분군이 대량으로 분포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대체로 고구려 시기의 마을유적으로 추정되나, 유적지 안에서 주로 石器가 발견되고 있어 당시 거주민의 생산력 수준은 비교적 낮았던 것으로 파악되며, 고구려 건국 초기의 일반적인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추정됨. 1950년대에 성벽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渾江市志』), 다른 자료에는 관련 언급이 없어서 명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우나, 실제 성벽이 존재했다면 단순한 마을유적이 아니라 압록강 수로와 연관된 古城일 가능성이 높음.자연환경 고분군은 臨江市 六道溝鄕 東甸子村 남쪽 200m 지점의 경작지에 위치함. 유적지에서 동쪽으로 4㎞ 거리에 六道溝鄕 소재지가 있고, 臨江-長白 도로가 충적대지 북쪽의 산기슭 아래로 통과하고 있으며, 압록강과 도로 사이의 충적대지에 유적지가 광범위하게 분포함. 동쪽에서 흘러들어온 압록강이 완만하게 서쪽으로 흘러나가면서 강의 북쪽에 길이 2㎞, 폭 200-300m 전후의 2단 충적대지를 형성했는데, 압록강에 인접하여 좁고 길다란 1단 충적대지가 있고, 그 북쪽으로 1단 대지보다 5m 정도 높은 2단 충적대지가 넓게 펼쳐져 있음. 동전자 마을은 2단 충적대지의 북쪽 산기슭 아래에 위치해 있는데 지금은 臨江-長白 도로에 의해 마을이 두 개로 분리되어 있음. 유적지는 대지 서단의 2단 충적대지에 위치하여 있으며, 남쪽 50여m 거리에 압록강이 있음. 충적대지는 사면이 모두 경사가 가파른 산으로 둘러싸여 하나의 자그마한 분지를 이루고 있으며, 대지는 농지로 개간되어 경작되고 있음.유물정보 토기 구연부 2점, 석제 도끼 2점, 석제 칼 3점, 어망추 1점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渾江市文物志』, 1987 · 王洪峰, 「臨江電站庫區古遺存調査綜述」『博物館研究』 1988-3, 1988 · 國家文物局 主編, 「東甸子遺址」『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張天鵬, 「文物」『渾江市志』, 中華書局, 1994

      • 왕팔발자요지(王八脖子窯址)

      • 리스트여닫기 육도구동광지(六道溝銅礦址, 夾心崗古銅鑛址) 출토지 임강시 착초정자향(현재의 보산진) 향산진 (臨江市 錯草頂子鄉[現在 寶山鎮] 銅山鎮)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4혼강시문물보사대(渾江市文物普査隊)6월 하순에 동광 발견의 한 사람인 錯草頂子鄕 黨委 書記 周正發 등이 참가하여 광산 간부 등의 도움을 받아 동광의 흔적을 확인하고, 『渾江市文物志』중의 ‘六道溝銅鑛址’에 발표함.1995백산시문물보사대(白山市文物普査隊)5월에 張殿甲 등이 참가하여 古銅鑛 부근의 寶山鎭(原名 錯草頂子鄕) 下亂泥塘四社(舊名 後小溝)의 경작지에서 冶鍊 유적을 발견하고, 『北方文物』2000-2에 발표함.1885(光緖 11) 臨江市 六道溝 동북쪽 산에서 깊이 6m인 오래된 채광 갱도 4개를 발견했고, 이때 제련시에 남긴 찌꺼기[鑛渣]도 많이 발견함.1887-1958 동광 개발 연혁을 보면, 1887년경 鄭鐸民, 孟蘭亭, 郝金堂 등이 채광을 시도하다가 기술적 낙후로 모두 그만뒀고, 1923년부터 개발되어 ‘臨江銅鑛’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1932년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 더욱 본격적으로 채광을 함. 1940년 이후에는 구리보다 군사적 목적에서 몰리브덴[鉬]을 주로 채광했고, 중국 정부 성립 이후 동광 매장량을 조사했으며,1958년부터 광산을 건설해 채광하다가 1983년에 폐광함.1954-1958 이 무렵 중국 정부가 광산을 개발하기 위해 준비에 착수했는데, 당시 沈陽地質勘探公司 108隊[吉林省 冶金 地質 601 勘探隊]의 周正發이 六道溝 銅山鎭(舊名 老黑頂子) 일대를 탐사하다가 2호 동굴에서 오래된 좁은 갱도를 발견했고, 당시 601대가 그린 갱도의 평면도가 欓案 자료로 남아 있음.구조특징 礦脈은 동서 2,600m, 남북 1,000m 범위에 분포하고, 礦石品位는 대체로 0.2% 정도이며, 개별 富礦脈 品位는 20% 정도임. 鑛床은 矽卡岩型의 小型 礦床, 黃銅礦, 斑銅礦과 輝鉬礦 등이 매장됐는데, 매장량(1950년대)은 총 245만톤, 銅 1.7만톤, 몰리브덴[鉬] 1,824톤임. 1885년에 깊이 6m인 채광 갱도 4개를 발견했다고 함. 1950년대에 광산 개발을 위해 이 일대를 탐사하다가 2호 동굴에서 발견한 갱도는 方圓形으로 폭이 0.7m에 불과하며, 깊이는 알 수 없었으나, 갱도에서 靑銅製 등잔과 목제 가래 등이 발견됨. 臨江銅鑛에서 일했던 인부들이 古礦洞의 현황에 대한 전언에 따르면, 채굴하다가 고갱도 발견했고, 고갱도에서 소나무 횃불[明子]을 발견했다고 함. 현대의 갱도는 平行 巷道式 채굴법을 채용하여 여러 갱도를 평행으로 굴진한 다음 다시 주 갱에서 관통해 폭파시켜 광석을 채취하므로 처음 팠던 갱도는 모두 커다란 동굴로 변함. 이에 비해 古坑道는 수직 구덩이식[竪井]을 위주로 했고, 대부분 富礦脈을 따라 굴진해 분포 상태가 불규칙함. 1950년대 말 이래 20여년간 채광하면서 고동광은 거의 모두 사라짐. 1950년대말 六道溝鄕 曲柳樹[현재의 錯草頂子鄕 立新村, 夾心崗이라고도 불림)일대의 冶鍊址에서 석제 도끼, 석제 화살촉, 철제 화살촉, 철제 솥, 동제 불상(銅佛), 마제 석촉이 발견되었고, 부근에서 아궁이[炕址]와 재 구덩이[灰坑] 등도 발견됨. 이 일대 언덕에는 冶鍊址와 목탄과 야련 찌꺼기[溶渣] 등이 남아 있음. 동광 전문가에 따르면 노천 야련은 온도가 높지 않아도 되며, 목탄을 연료로 사용해도 가능하다고 함. 冰湖村 산 위의 冶鍊址는 吉林 冶金 地質 602隊를 퇴직한 趙興國씨의 회상에 따르면, 1950년대 冰湖村 산 위에 가득 흩어져있는 銅渣堆가 발견되었는데, 이 동 찌꺼기들은 近代의 것이 아니었다고 함. 1995년 曲柳樹[夾心崗] 야련지에서 서남쪽으로 2㎞ 정도 떨어진 寶山鎭(原名 錯草頂子鄕) 下亂泥塘4社(舊名 後小溝) 경작지에서 발견되었는데, 유적지 북쪽 300m 거리에 四社, 남쪽 50m 거리에 七道溝河가 있으며, 七道溝河 右岸 2단 대지 위에 위치해 지세는 확 트였고 평탄함. 유적지 규모는 동서 약 200m, 남북 약 100m로서 토질이 비옥하며, 층위는 耕土層 약 15-20㎝, 그 아래 문화층에 탄층[炭層]과 붉게 탄 흙덩이[紅燒土]가 있음. 유적지 표면에 토기편과 銅渣(동 찌꺼기) 등이 흩어져 있고, 현지 학생이 四社 동측의 두 번째 산골짜기에서 동 찌꺼기를 채집함. 1950년대에 발견한 古坑道에서 청동제 등잔과 목제 가래가 발견되었고, 曲柳樹[立新村, 夾心崗] 일대의 冶鍊址에서 석제 도끼, 석제 화살촉, 철제 화살촉, 철제 솥, 동제 불상(銅佛), 마제 석촉 등을 발견했다고 함. 寶山鎭(原名 錯草頂子鄕) 下亂泥塘四社 冶鍊址에서는 동찌꺼기와 함께 토기편을 다수 채집함.역사적 의미 근현대 坑道와 다른 古坑道 현황, 주변의 冶鍊址에서 채집된 유물과 야련 찌꺼기 등으로 보아 고대 銅鑛 및 冶鍊 유적으로 추정되며, 고구려시기부터 개발되어 발해 시기에도 채굴했을 것으로 추정됨. 高麗에 銅이 많다는 『宣和奉使 高麗圖經』의 기록, 周나라 世宗이 비단을 고려의 銅과 교환해 鑄錢했다는 『五代史証』의 기록 등은 본래 고구려 경내에도 銅礦이 있었음을 증명한다고 추정됨. 『冊府元龜』권999에는 ‘唐 文宗 開成 元年(836년) 6월에 淄靑節度使가 상주해 발해가 銅을 정련해 보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당시 압록강 수로를 경유하던 ‘朝貢道’를 통해 발해가 당과 무역하던 상황을 감안하면, 이 기록의 銅은 臨江 銅鑛에서 채굴해 제련(冶煉)한 純銅을 六道溝 河谷-압록강 수로를 거쳐 唐의 淄靑節度使가 주재하던 登州까지 보냈을 가능성이 높음.자연환경 臨江市 六道溝鄕에서 동북쪽 13㎞ 떨어진 錯草頂子鄕[현재의 寶山鎭] 관할의 銅山鎭 서측 산 위에 위치하며, 지금은 폐광된 臨江銅鑛에서 동쪽으로 1㎞ 정도 떨어진 평탄한 산등성이에 위치함. 古銅鑛이 위치한 산등성이는 해발 760m, 比高 300m로 평탄하며, 둥그스럼한 방형으로 면적은 20여만㎞2에 이름.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渾江市文物志』, 1987 · 國家文物局 主編, 「夾心崗古銅鑛址」『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張天鵬, 「鑛業」『渾江市志』, 中華書局, 1994 · 張殿甲, 「鴨綠江中上游高句麗·渤海遺址調査綜述」『北方文物』 2000-2, 2000

      • 리스트여닫기 하남둔유지(河南屯遺址) 출토지 임강시 사도구향 하남둔촌 (臨江市 四道溝鎮 河南屯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4혼강시문물보사대(渾江市文物普査隊)6월에 유적의 현황을 파악하고, 유물을 채집하였으며, 『渾江市文物志』 중의 ‘河南屯遺址’를 발표함.1987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혼강시문물관리위원회(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渾江市文物管理委員會)5월에 石肖元, 張立夫, 張立新, 王洪峰이 참가하여 임강댐 수몰지구 조사차 고분군과 더불어 유적을 조사하였으며, 『博物館硏究』1988-3에 발표함.1995백산시문물보사대(白山市文物普査隊)5월에 張殿甲 등이 참가하여 성곽 현황 파악 및 유물을 채집하고, 『北方文物』2000-2에 발표함.2004길림성장백산문화연구회, 백산시문관판, 집안시박물관(吉林省長白山文化硏究會, 白山市文管判, 集安市博物館)7월 10일에 張福有, 張殿甲, 遲龍, 孫仁杰 등이 참가하여 전체적인 현황 파악 및 유물을 채집하고 『東北史地』2004-5에 발표함.구조특징 1984년 조사 당시에 벽돌공장 북쪽 일대에서 布紋 기와편과 소량의 토기편을 채집했는데, 색상은 회갈색과 황갈색 두 가지 종류가 있고 회갈색이 비교적 많고, 기종은 단지, 바리 등임. 1987년 조사 당시 유적의 분포범위는 마을의 도로를 중심으로 대략 동서 200m, 남북 100m 전후이고, 층위는 제1층 표토층 25㎝, 제2층 황색 모래층 45㎝, 제3층 흑갈토층 15-20㎝이며. 제2층에는 유물이 거의 없고, 제1층·제3층에 유물이 많다고 함. 도로 서측에는 기와편, 동측에는 토기편이 많음. 1995년 조사 당시에는 분포 범위가 남북 100m, 동서 50m이고, 2004년 조사 당시에는 분포 범위가 남북 300m, 동서 200m임. 1984년 조사 당시 담장은 이미 무너진 상태였고, 1987년 당시 유적지 북쪽 부분에는 민가가 자리잡고 있어 유적의 훼손이 심했다고 하며, 1995년 당시 유적 동남부는 마을의 민가로 뒤덮임. 1984년 조사당시 유물 채집 지역 서남쪽에 흙으로 다져 쌓은 담장이 있었는데, 당시에 이미 많이 무너져 殘長 50m, 높이 0.2-0.4m, 최고 높이 1m 정도에 불과했다고 함. 2004년 조사 당시 유적의 서남쪽에 殘長 50m, 높이 0.4-1m, 기단 너비 6m의 城址가 있었다고 함. 2004년 조사 당시 성지 내부의 몇 곳에서 정연하게 배열된 채 높이 솟은 경작지의 흙담이 있었는데, 건축물의 흔적으로 파악됨.역사적 의미 하남둔 유적에서 출토된 기와편이나 토기편 등은 대체로 발해 시기 유물로 추정되는데, 이에 발해시기의 성터 또는 절터로 추정하며, 대체로 西京鴨綠府에 소속된 神州 관할의 神化縣이나 釗門縣 소재지로 추정하고 있음. 한편 하남둔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편들이 고구려 토기의 특징을 비교적 많이 보유하고 있다고 파악하기도 함(王洪峰).자연환경 臨江市 四道溝鄕 河南屯村 북쪽 3㎞의 하남둔에 위치하며, 서북쪽 4㎞에 四道溝鄕 소재지가 있으며, 북쪽 약 500m에 五道溝河가 있음. 압록강가의 대지상에 마을이 있는데, 현대 벽돌 공장이 있고, 이곳에서 오도구하를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四道溝 坡口遺蹟이 나옴. 河南屯은 압록강의 右岸, 오도구하의 南岸에 위치하고, 五道溝河와 압록강 합류지점 동남쪽에 충적대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압록강이 하남둔 서쪽에서 유유히 北流하다가 오도구하와의 합류처를 지난 다음, 사도구하와 합류하면서 流向을 서쪽으로 꺾어 흘러나가고 있음. 특히 하남둔 유적의 압록강 건너편에는 상당히 넓은 충적대지가 펼쳐져 있으며, 하남둔 대지의 동남쪽 산기슭도 경사가 상당히 완만한 편임.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渾江市文物志』, 1987 · 王洪峰, 「臨江電站庫區古遺存調査綜述」『博物館研究』 1988-3, 1988 · 國家文物局 主編, 「河南屯遺址」『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張天鵬, 「文物」『渾江市志』, 中華書局, 1994 · 張殿甲, 「鴨綠江中上游高句麗·渤海遺址調査綜述」『北方文物』 2000-2, 2000 · 孫仁杰·遲龍·張殿甲, 「鴨綠江上流右岸考古調査」『東北史地』 2004-5, 2004

      • 임강 1구역 제10호분(臨江 1區域 第10號墳)

    • 리스트여닫기 장백현(長白縣)

      • 십사도구 전참 고분군(十四道溝 電站 古墳群)

      • 동강 고분군(東江 古墳群)

      • 리스트여닫기 십이도구 고분군(十二道溝 古墳群) 출토지 장백현 12도구진 12도구촌 (長白縣 十二道溝鎮 十二道溝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6장백현문물보사대(長白縣文物普査隊)2기의 원형적석묘 확인2004길림성장백산문화연구회, 백산시문관판, 집안시박물관(吉林省長白山文化硏究會, 白山市文管判, 集安市博物館)기단적석총 2기 확인구조특징 고분군 면적은 매우 큰 편으로 원래 고분이 30여기에 이르나 계단식 밭으로 개간되면서 고분이 심각하게 훼손, 현재 2기 고분만 남아 있는 상태로, 서로 140m 거리에 위치. 2기 고분은 적석총으로 고분의 적석은 4개층으로 구분가능함. 1층 대석층, 2층 河光石層, 3층 작은 자갈돌층, 4층 대석층으로 나누어짐. 3층과 4층에서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3층의 유물은 철제 자귀(鐵鏟) 1건, 동제 호미(銅鐲) 1건, 인골 1구가 나왔고 4층의 유물은 고리자루칼(環首鐵削刀) 1건이 출토됨. 적석부의 직경은 약 8m정도임.역사적 의미 12도구 고분의 형식은 대체로 고구려 초기 적석총과 유사하며, 環首鐵削刀, 鐵鏟, 銅鐲 등 고구려 유물이 출토되어, 고구려의 고분으로 인정됨.자연환경 북쪽으로는 험준한 산등성이가 동서로 펼쳐져 있고 남쪽에는 창자하가 인접해 있는데, 창자하 남쪽에는 12도구촌과 압록강변의 대지가 자리하고 있으며 서쪽으로 약 300m에는 寶泉山 발전소가 있음.유물정보 철제 자귀(鐵鏟), 동제 호미(銅鐲), 고리자루칼(環首鐵削刀)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纂委會, 『長白朝鮮族自治縣文物志』, 1986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孫仁杰·遲勇·張殿甲, 「鴨綠江上流右岸考古調査」『東北史地』 2004-5, 2004

      • 하외자 고분군(下崴子 古墳群)

      • 안락 고분군(安樂 古墳群)

      • 양종장 고분군(良種場 古墳群)

      • 금화 고분군(金華 古墳群)

      • 팔도구진산성(八道溝鎭山城)

      • 십사도구 고성(十四道溝 古城)

      • 리스트여닫기 십사도구 관애(十四道溝 關隘) 출토지 장백현 십사도구진 십사도구촌 (長白縣 十四道溝鎮 十四道溝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60통화지구문물보사대(通化地區文物普査隊)유적 발견1986장백현문물보사대(長白縣文物普査隊)실측과 기록 및 유물 채집을 통해 『長白縣文物志』 중의 ‘十四道口村邑과 關隘’로 발표2004길림성장백산문화연구회, 백산시문관변, 집안시박물관(吉林省長白山文化硏究會, 白山市文管辦, 集安市博物館)개괄적인 현황 파악 후 『東北史地』2004-5에 발표구조특징 古城의 서쪽에 위치하고 양자 사이에는 남북 방향의 도랑이 있음. 고성의 남벽과 일직선으로 축조했는데 길이는 500여m이고 압록강과 평행으로 달리며 대지 서쪽의 산 아래까지 이어졌음. 본래 석축성벽이었다고 함. 고성과 관애 안팎이 모두 농지로 개간되어 경작되고 있어 훼손이 심한데 고성의 성벽은 동북 모서리 부분, 남벽 동단만 조금 남아 있지만 古城 안팎의 토양과 색깔이 달라 전체 범위는 판별할 있음. 관애도 거의 모두 사라지고 현재 관애터는 밭으로 경작되는 주변 지역과 달리 진흙과 갈대밭으로 남아 있어 전체 범위를 쉽게 판별할 수 있음.역사적 의미 十四道溝古城은 형태상 集安 長川古城과 유사하며, 關隘는 集安 老邊墻 關隘와 비슷하다고 추정됨. 출토된 철제 솥은 집안(舊 집안현 郊區鄕) 勝利7隊 출토품과 유사하며, 토기 파수는 東臺子 유적 출토품과 비슷함. 이에 十四道溝古城과 關隘는 고구려 시기의 유적으로 추정할 수 있음. 다만 사질토기를 비롯하여 석제 도끼나 반달돌칼 등은 원시사회 말기의 유물로 추정되는데 이는 십사도구고성이 원시사회 유적 위에 축조되었음을 반영하는 결과임. 현재 압록강 상류에는 성곽과 관애가 본류 右岸을 따라 많이 분포되어 있는데 가령 十四道溝古城에서 압록강을 따라 40여㎞ 내려가면 長白 十二道溝灣關隘, 여기에서 다시 40여㎞를 내려가면 長白 八道溝山城, 다시 10여㎞ 내려가면 臨江 東馬鹿泡子古城, 20여㎞를 더 내려가면 夾皮溝古城, 10여㎞를 더 내려가면 樺皮甸子古城이 각각 나옴. 또한 압록강 상류로 40여㎞를 거슬러 올라가면 발해시기의 성곽인 長白古城이 나옴. 이 가운데 강변 평지성인 東馬鹿泡子古城, 夾皮溝古城, 樺皮甸子古城 등은 압록강 수로와 연관된 역참의 성격이 강한 반면, 산상에 위치한 八道溝山城과 十二道溝灣關隘는 군사방어적 성격이 강한 것으로 추정됨. 그런데 十四道溝古城과 關隘는 소형 평지성과 관애가 동시에 축조되었다는 점에서 역참과 군사적 요충지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 것으로 추정되고 특히 關隘가 압록강 右岸을 따라 동서 방향으로 기다랗게 축조되었다는 점에서 주로 압록강 상류로를 차단하기 위해 축조했을 것으로 추정됨.자연환경 유적은 마을 남쪽 약 1.5㎞에 위치하며 臨江-長白 도로가 古城 북쪽의 대지를 가로 질러 동서 방향으로 있고 古城은 十四道溝河가 압록강으로 유입되는 합류처 서북쪽에 위치해 있음. 十四道溝河와의 거리는 20여m, 압록강과의 거리도 100여m에 불과함. 古城 서쪽 약 50m 거리에 十四道溝 풍력발전소가 있었는데, 지금은 발전소를 가동하지 않고 풍차를 달았던 지지대만 남아 있음. 古城과 關隘가 위치한 곳은 압록강 상류의 산간지대인데, 압록강 북안에 동서 길이 1㎞ 전후, 남북 500m 정도의 충적대지가 펼쳐져 있고, 대지 북쪽으로도 경사가 비교적 완만한 산기슭이 이어지고 있음. 충적대지 남쪽에는 압록강이 동북에서 서남쪽으로 유유히 흐르고 있으며, 압록강의 지류인 십사도구하가 충적대지 동편에서 南流하다가 古城의 동쪽을 지나 동남쪽에서 압록강과 합류함. 古城과 關隘는 이 충적대지의 동남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주변의 토질이 상당히 비옥하여 고성 서쪽 일대는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북쪽 일대는 논으로 개간되어 경작되고 있음.유물정보 석기, 철기, 토기, 기와류 등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長白朝鮮族自治縣文物志』, 1986 · 國家文物局 主編, 「十四道溝遺址」『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長白縣志編纂委員會, 「文物·古迹」『長白朝鮮族自治縣縣志』, 1993 · 王禹浪·王宏北, 「中國吉林省長白縣十四道溝鎭高句麗的村邑與關隘」『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1994 · 余昊奎, 「長白 十四道溝關隘」『高句麗 城』 Ⅰ(鴨綠江 中上流篇), 國防軍史硏究所, 1998 · 孫仁杰·遲龍·張殿甲, 「鴨綠江上流右岸考古調査」『東北史地』 2004-5, 2004

      • 십이도만 관애(十二道灣 關隘)

      • 리스트여닫기 장백고성(長白古城) 출토지 장백현 민주촌 (長白縣 民主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60장백현문물보사대(長白縣文物普査隊)강돌로 축조한 성벽 발견, 현황 조사 및 유물 채집.1986장백현문물보사대(長白縣文物普査隊)1960년에 이은 2차 조사로, 현황 조사 및 유물 채집 후 『長白縣文物志』 중의 ‘長白古城’으로 발표구조특징 1960년대에 조사했던 仙人島 西側 과수원 일대의 성벽은 1986년 조사시에 이미 파괴되어 평평해졌고, 주변에는 기와편 등만 흩어져 있었음. 현지 주민에 따르면 성돌로 채소밭 온실 벽을 만들었다고 하고 성벽 안팎이 채소밭과 과수원으로 경작되고 있어 훼손 상태가 심각함. 1960년에는 仙人島 서측 과수원 일대의 성곽 내부의 건물을 조사했는데 광이 나는 강돌로 축조했고 남북 길이 26m, 동서 너비 20m의 범위로 기단 너비 8.4m, 윗 너비 1.5m, 높이 0.5-1.5m의 규모임. 1986년 이 유적 외곽에서 동서 380m, 동서 240m 정도의 성곽을 확인한 만큼 이 유구는 성곽 내부의 건물로 추정되고 이 유구의 남벽에서 확인했다는 너비 3m 정도의 트인 부분도 성문이 아니라 건물지의 출입 시설로 추정됨. 성벽중 남벽 동단과 서단부에 해당하는 성벽 기초부 발견되었고 두 기단부의 동서 거리는 350m인데 현지 주민에 따르면 새로이 발견된 서쪽 기단에서 서쪽으로 약 30m 뻗어나간 후 북쪽으로 돌아가 계속 대지의 북쪽 큰 두둑 아래까지 뻗어나간다고 하며 남벽의 길이는 약 380m임. 서벽은 남벽 서단과 대지 북쪽의 둔덕 사이로 길이는 약 240m이며 북벽은 대지 북쪽에 위치한 높이 5m 전후의 둔덕으로 추정됨. 전체 규모는 동서 380m, 남북 240m 전후임.역사적 의미 鴨綠江 상류 연안에는 臨江 樺皮甸子古城, 夾皮溝古城, 東馬鹿泡子古城, 長白 十四道溝古城-關隘 등 압록강 수로와 연관된 고구려 시기 평지성이 다수 분포하며 長白古城은 축조 기법이나 위치 등을 근거로 고구려 시기에 축조하여 발해시기까지 축조된 평지성으로 파악하기도 함. 다만 현재까지 출토된 권점문 암키와(圈點紋板瓦), 승문 암키와(繩紋板瓦), 연화문와당(乳釘蓮花紋瓦當) 등은 발해시기의 유물(일부 고구려)로 추정되고 있고 특히 연화문와당(乳釘蓮花紋瓦當)은 전형적인 발해 와당으로 따라서 현재로서는 장백고성을 발해 시기의 평지성으로 비정할 수 밖에 없으며, 그 상한은 향후 고고학 발굴성과를 기다릴 필요가 있음.자연환경 중국의 장백현 소재지와 북한의 혜산시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며 압록강 최상류에서 상당히 넓은 분지를 형성하고 있는데 특히 압록강 북쪽에 위치한 장백현 소재지의 경우, 압록강 부근에는 상하 2단의 충적대지가 형성되어 있고, 그 위쪽으로 완만한 경사지가 전개됨. 古城은 압록강 우안의 2단 충적대지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는데, 고성 동쪽에는 압록강이 서남향으로 흐르다가 古城 동남쪽 부근에서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流向을 서쪽으로 바꾸어 고성 남쪽을 지나가고 있음. 고성의 동쪽과 남쪽 모두 압록강과의 거리는 100-200m 전후이며, 고성과 압록강 사이에는 좁고 기다란 1단 충적대지가 펼쳐져 있음. 고성이 위치한 대지의 북쪽에는 높이 5m 정도의 큰 두둑이 있는데(북벽으로 추정), 그 북쪽으로 장백현 소재지의 주택지구가 펼쳐져 있고 현재 고성이 위치한 대지는 채소밭과 과수원으로 변했음.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長白朝鮮族自治縣文物志』, 1986 · 王禹浪·王宏北, 「中國吉林省長白縣十四道溝鎭高句麗的村邑與關隘」『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1994 · 國家文物局 主編, 「長白城址」『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長白縣志編纂委員會, 「文物·古迹」『長白朝鮮族自治縣縣志』, 1993

      • 마록구고전호(馬鹿溝古戰壕)

      • 리스트여닫기 하외자유적(下崴子遺蹟) 출토지 장백현 십삼도구향 (長白縣 十三道溝鄉)연대 원시사회 말기(기원전 4-3세기)에서 고구려시기 원시사회 말기로 추정되는 사질의 토기편과 석기편이 출토됨. 고구려시기 유적으로 추정되는 흙무지[土包]와 석축방단 발견됨.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6장백현문물보사대(長白縣文物普査隊)실측과 기록을 했고 이를 통해 『長白縣文物志』 중의 ‘下崴子遺址’로 발표구조특징 흙무지와 석축방단이 발견되었는데, 흙무지[土包]는 유적 중앙의 동서에 2개 있고 서로 거리는 50m로 만두 모양이며 지표보다 0.5m 정도 높음. 흙무지 윗면은 광이 나는 강돌로 덮었으며 강돌로 덮힌 흙무지 윗면에서 토기편과 석기편 다량 출토됨. 동쪽 흙무지는 동서 길이 20m, 남북 너비 10m이고 서쪽 흙무지는 동서 길이 10m, 남북 너비 5m임. 건축물로 추정되는 석축 방단은 흙무지 서쪽 100m 지점에 있고 방형으로 한변의 길이가 11.5m, 높이 2.05m임. 층위는 위에서 아래로 제3층까지는 강돌층, 하단의 제4층은 生土層임.역사적 의미 원시사회 말기부터 사람들이 거주하던 유적으로 석축방단은 하단의 생토층을 제외하면 3층으로 된 건축물로 추정됨. 원시사회 말기 이래 고구려시기에 걸친 마을 유적으로 추정가능함.자연환경 북한의 長津江이 압록강과 합류하는 지역으로 압록강 연안을 따라 길이 2.5㎞, 너비 0.5㎞ 전후의 좁고 기다란 충적대지가 형성되어 있는데, 유적은 이 충적대지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음. 충적대지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으며, 북한의 장진강도 이 일대에서 압록강으로 유입되고 있음. 유적과 압록강의 거리는 100여m에 불과함. 충적대지 북쪽에는 동서 방향으로 산줄기들이 이어지고 있는데, 경사가 상당히 가파른 편임. 반면 압록강 맞은편의 산줄기들은 경사가 비교적 완만한 편이며 산기슭 아래로 비교적 넓은 대지가 펼쳐져 있음.유물정보 토기편, 석기 등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長白朝鮮族自治縣文物志』, 1986 · 國家文物局 主編, 「下崴子遺址」『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長白縣志編纂委員會, 「文物·古迹」『長白朝鮮族自治縣縣志』, 1993

      • 리스트여닫기 도권리유적(桃圈里遺蹟) 출토지 장백현 팔도구진 신흥촌 도권리 (長白縣 八道溝鎮 新興村 桃圈里)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95백산시문물보사대(白山市文物普査隊)유적의 전체 현황 조사 및 유물 채집 후 『北方文物』2000-2에 발표구조특징 유적지는 동서 길이 약 100m, 남북 너비 약 50m로 표면에 비교적 많은 토기편과 黑曜石이 흩어져 있음.역사적 의미 약 2㎞ 거리에 北興村 大地 유적지가 있는데 도권리 유적지는 산 끝자락의 완만한 기슭 대지에 자리하고 있으며, 산 정상은 평탄한 지세로 대부분 경작지로 개간되었지만 지세는 비교적 높아 北興村 大地 유적지와 같은 산 위에 위치함. 도권리 유적지와 北興村 대지 유적지의 유물을 비교 분석하면 두 유적의 문화 면모는 기본적으로 일치하며. 특히 이곳에서 10㎞ 못 미치는 거리에 있는 七道溝 유적지에서도 이곳처럼 흑요석기(黑曜石製 刮削器)가 출토되어 양자 사이의 문화적 연관성을 시사해주고 있음. 고구려에서 발해 시기에 걸친 생활유적으로 추정됨.자연환경 유적지는 압록강 지류인 八道溝河 유역의 산 끝자락의 완만한 기슭 대지에 자리하고 있음. 산 정상부는 평탄한 지세로 탁 트였는데 대부분 경작지로 개간되었음.유물정보 토기, 석기, 자기류 등참고문헌 · 張殿甲, 「鴨綠江中上游高句麗·渤海遺址調査綜述」『北方文物』 2000-2, 2000

      • 대지유적(大地遺蹟)

      • 합마천 고분군(蛤蟆川 古墳群)

      • 간구자 고분군(干溝子 古墳群)

      • 리스트여닫기 간구자 1호분(干溝子 1號墳) 출토지 길림성 장백현 십사도구진 간구자촌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鎮 干溝子村)연대 상한: 戰國中期~末期, 하한: 西漢 상한 : B.C 4세기~B.C 3세기초, 하한 - 기원전후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6장백조선족자치현문물보사대(長白朝鮮族自治縣文物普査隊)6월에 고분 19기를 확인 후 편호하고, 파괴된 고분에서 유물 수집하는데 토기(陶罐, 陶盅) 2건과 멧돼지 이빨장식(野猪牙飾) 2건, 녹송석 대롱장식(綠松石管飾) 1건, 일반인이 보유하던 석제 도끼(石斧) 2개 등을 회수함.구조특징 중형묘로 묘역의 돌기단은 장방형임(1986년 문물지와 박윤무의 1995년 글(『압록강 유역 간구자 적석무덤에 대한 조사연구』)을 참조했는데, 박윤무의 1990년 글(「長白縣干溝子墓地調査」)에서는 ‘타원형 기단’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1995년 글에서 ‘타원형의 기단은 원래 방형이었으나 …(중략)…원상태를 잃은 것’이라고 보았다는 점에서 표현상 차이로 보임). 기단은 대괴석으로 쌓았고, 현재 두터운 부식토 표층에 눌려 있으며, 기단 네 모서리 돌이 떨어져 타원형으로 변형된 상태임. 돌기단 위에 3개의 동일한 원형석광적석곶묘가 자리하고 있는데, 무덤의 외부 형태는 원형으로 직경 11m임. 묘광 축조 과정을 보면, 먼저 무덤의 외벽은 길이 0.8-1m, 너비 0.5m, 두께 0.6m의 다듬은 장대석을 촘촘히 둘러 세워 원형으로 쌓고, 묘광(간구자 고분군의 중국 글들에서는 ‘框室’ ‘墓壙’ ‘石壙’ 등으로 표현하고 있으나 ‘묘광’이 보다 적합한 표현으로 판단되므로 이에 따라 정리함.) 내부를 크기가 다른 막돌과 강돌로 채운 후, 주먹크기의 돌을 여러 벌 덮어 정상부를 덮었는데, 원구모양을 하고 있음. 3개 석광적석묘는 삼각형태로 배열되어 있는데, 각 무덤의 간격은 0.5m이고, 무덤 사이사이에는 장방체의 긴돌을 일렬로 서로 연결시켜 일정 형식의 유기적 통일체를 형성하며, 묘광 바깥에는 묘광 높이와 같게 큰 돌을 채워 안팎의 평형을 유지함. 대부분의 묘광 외벽은 소실되고 너비 0.5m, 깊이 0.6m의 구덩이 흔적이 남아 있고, 내부 구조가 노출된 상태임. 1985년 장백조선족자치현 문화국에서 서남쪽에 위치한 제1호 묘광 을 시굴했는데, 동서 9m 길이의 묘광을 관통하는 ‘T’자형 구덩이가 묘광 중앙에서는 북으로 4m가 확장되어 관통함. 이 때 묘광의 4개 단면층을 확인했는데(박윤무의 1995년 글(「압록강 유역 간구자 적석무덤에 대한 조사연구」) 참조함. 1986년 문물지에서도 제1층의 퇴적층(두께 0.2m), 제2층의 河光石層(두께 0.4m), 제3층의 小河卵石層(두께 0.8m, 불탄 인골조각편과 도기, 野猪牙飾, 綠松石管, 석기 등이 발견), 제4층의 大石塊層(두께0.4~0.5m), 제5층의 생토층 등으로 구분하고 있음. 박윤무의 1990년 글(「長白縣干溝子墓地調査」)에서는 제1층의 大石塊層(기단층으로 두께 1.40m), 제2층의 작은 돌과 모래층(묘실이 이 평면층 위에 시설, 두께 0.40~0.50m), 제3층은 小石層으로 구분하고 있음), 제1층은 길이가 보통 0.5-0.8m 정도의 돌을 포개 축조했고, 두께는 1m 정도이며, 묘광을 마련하기 위한 기단층이 있음. 제2층은 기단층 위에 주먹만한 작은 돌과 자갈, 모래 등을 쌓고, 두께는 10㎝ 정도로 반듯한 평면을 이루며, 묘광 외벽은 바로 이 평면층 위로부터 쌓아지기 시작함. 제3층은 묘광 외벽의 높이와 거의 같게 0.4-0.6m 두께를 이룬 큰 돌층이 형성되며, 제4층은 맨 위층으로 자갈과 강돌로 쌓았고, 두께는 0.2-0.3m임. 묘광 상황을 보면, 주검 칸과 葬具가 없고, 인골과 부장품(도기·장식품)은 돌 틈 사이에서 발견되는데, 대부분 자갈층(제2층) 수평면에서 나오며, 器物 등이 놓여 진 모습에 일정한 규칙성이 없음. 인골은 모두 불에 타서 검은 색 혹은 회백색을 띠는 잔편으로 개체의 숫자, 연령 및 성별에 판단이 어렵고, 인골 주위에서 대량의 목탄 발견이 되어 주검을 묻은 후 화장하였던 사실이 확인됨. 제1호분의 고분 구조와 유사한 고분이 제3호 및 제4호분임.역사적 의미 축조방식은 지면에 커다란 돌을 사용하여 일정 범위의 묘역을 조성한 후 냇돌과 할석을 깔아 평면하게 지면을 고르고 무덤의 기저부를 만든 후, 그 위에 단을 쌓아 몇 기의 무덤이 연접되도록 함. 매장방식은 무덤 밖에서 화장한 후 燒骨을 매장한 2차장하고, 대다수 묘광 내부에 불에 타거나 그을린 흔적이 없음. 불에 탄 인골편은 작은 조각으로 가장 큰 것이 길이 5㎝가 안되며, 대략 1/3의 소골은 회백색이며 나머지는 赭色(자색)과 흑색임. 다만 BM2ZK1에서 목탄편이 출토되었고, 1986년 조사된 간구자 1호분(M1)의 석광 안에는 주검칸이나 葬具를 따로 마련하지 않았고 불에 태워진 인골과 대량의 목탄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시신을 묘광 안에 놓고 화장했던 것으로 추정됨. 燒骨은 묘광 내 2, 3곳에 무더기로 안치되었으며, 토기는 묘광 양단에 나누어 부장한 점으로 미루어 一代 혹은 한 가정의 合葬 즉 동일가족 數代의 합장묘 유적일 것임. 따라서 신분 혹은 항렬이 비교적 높은 사람이 주묘단의 중심에 매장되고, 다수 속·부묘단은 항렬의 대소 또는 昭穆제도에 따라 附葬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2001년 발굴한 7기 고분의 부장품은 총 283점으로 작은 장식품을 제외하면 평균 각 묘광에 3점이 부장되었으므로 厚葬은 아님. 전체 부장품 중 토기가 총73점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나 완형보다는 다수가 파편으로 출토되어 토기의 毁器習俗으로 짐작됨. 출토된 그릇은 모두 민무늬의 夾沙褐陶로 모양이 간단하고 종류가 단조롭고 제작 기술이 거칠어 원시성을 반영하며, 그 외 野猪牙飾, 綠松石管 등의 장식품은 모두 압록강 유역과 두만강 유역의 원시문화에서 일찍이 보여주는 전형적 기물임. 간구자 고분군의 무덤들은 하나의 기단 위에 여러 기의 고분이 배열되어 있는데, 특히 7호분은 1기의 원형석광적석묘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장방형의 작은 돌무덤이 방사상으로 배치되어 무덤 사이의 主次관계를 시사함. 즉 중심무덤의 피장자는 주위의 무덤에 비해 사회적 지위가 높은 편이나 반대의 무덤은 중심무덤에 예속된 상태로 추정됨. 반면에 1호분 및 4호분과 같은 단일한 원형석광무덤의 무덤배열 상태에서는 주종 관계가 전혀 보이지 않음. 한 墓區내의 여러 개 무덤은 그 크기와 모양이 같으며 또한 무덤 사이마다 돌로 서로 연결되어 한 무덤구역내의 피장자들 관계가 평등하였다는 것을 시사하며, 이는 혈연관계를 이루고 있는 가족 성원의 무덤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임. 부장품은 장식품이 많고 생산 공구 및 기타 그릇 류가 비교적 적은데, 이는 길림성 중부지구의 九台關馬山, 公主嶺猴石, 樺甸橫道河子 및 東豊, 遼源 일대 많은 大蓋石墓의 부장 특징과 서로 일치하며, 동북지구 남부에서는 戰國晩期~漢代 보편적으로 유행함. 상한연대는 2기 고분에서 方孔圓錢- 半兩錢과 一化으로 추정할 수 있음. 半兩錢은 秦末半兩 혹은 漢初의 八銖半兩이며, 一化는 ‘一刀’로 해석되며, 周秦 또는 秦初 시기의 화폐임. 赤峰 新窝堡와 鐵嶺 邱家台지역의 퇴장유적에서 이들 화폐가 燕·趙의 刀幣 및 반량전과 같이 출토되어 燕國晩期의 화폐로 확정되었으므로 묘지연대의 상한은 戰國末期, 비교적 이른 것은 戰國 中期에 해당됨. 하한연대는 AM1에서 출토된 鐵钁과 AM3·AM4 주묘단에서 채집된 鐵刀로 추정할 수 있는데, 钁은 漢代유행하는 것과 형태가 유사하며, 철도는 直柄環首로 일찍이 集安의 板岔嶺에서 동일한 것이 발굴된 바 있는데, 고구려 적석묘에서 대량 보이는 環首刀보다 조금 이름. 집안 판차령에서 “一化”圓錢이 “半兩”, “五銖”, “大泉五十”, 등의 한대화폐와 함께 출토되었고, 그 유통 시간은 전국말기~東漢임. 그러나 간구자묘지에서는 “오수” 및 동한화폐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고분의 하한은 대체로 동한이전의 서한시기로 비정됨. 간구자묘지의 연대가 집안, 환인 일대의 고구려 적석총보다 앞서므로, 고구려적석총의 가장 이른 형식인 無階段 圓丘上積石墓와 관련이 있을 것임. 고구려 초기의 적석묘의 발전과정을 보면, 무덤은 석광이 따로 없는 간단한 시설로부터 계단식 기단으로 이루어진 ‘框室(앞에서 박윤무의 1995년 글에 따라 ‘묘실’이라 정리하던 개념인데, 이 글에서 이 부분을 ‘框室’로 표현하고 있어 그대로 따랐음)’ 무덤으로 발전하고, ‘광실’은 장방형으로부터 정방형 형태로 변화·발전함. 묘광 위치에서도 위로부터 아래로 점차 내려옴. 이를 종합해 볼 때 간구자의 원형석광적석묘는 고구려 초기 적석총과 유사함. 첫째, 주검칸이 따로 없이 무덤의 기단 윗면을 자갈과 모래로 수평하게 마련하고 그 위에 주검과 부장품을 놓고 막돌로 덮어 정상부를 마무리 한 것은 이것은 환인 201호 및 19호분과 매우 흡사함. 둘째, 기단의 단수와 묘광 형태에서 차이가 있으나 한 무덤구역에 여러 기의 무덤을 연이어 마련한 점은 환인 23-33호분과 일치함. 셋째, 화장하여 묻는 습관이 환인 23호 및 20호분이나 15호분에서 확인되며, 집안 일대의 일부 적석총은 묘광벽이 불에 녹아 응결된 흔적으로 화장하였을 것으로 짐작됨. 따라서 간구자 무덤은 시기적으로 환인 적석총을 위주로 한 고구려 초기 무덤보다는 이르며 대체로 환인 적석총보다 선행된 고구려 早期의 무덤형식으로 고구려족계의 원시적 매장 특징이 짙게 반영됨. 또한 간구자 고분군은 여대지구 청동기 시대 무덤 및 청동단검고분의 특징을 내포하고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와 노철산 고분은 모두 여러 기의 무덤을 서로 가까이하여 ‘벌집형(蜂巢狀)’이며,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평면 형태는 원형으로 된 것도 있음. 이것은 간구자 1호분(M1)·2호분(M2)의 특징과 유사함. 강상묘는 하나의 무덤구역에 1기의 중심무덤을 마련하고 그 둘레를 돌면서 여러 기의 무덤을 방사선 형태로 마련하였는데, 이것은 간구자 7호분(M7)과 매우 유사함. 그리고 강상·누상묘 등 적지 않은 청동단검묘는 모두 화장한 무덤이라는 사실에서도 간구자 고분과 일치함.(『조선고고학개요』에서는 ‘노철산 및 장군산 고분→강상·누상묘→고구려 적석묘’라는 계승 발전관계를 설정하고 있고, 왕성생(1981, 「요하 유역 및 부근지역의 短鋌曲刃劍 연구」『요녕성고고박물관학회설립대회』회간)은 강상묘를 비롯한 요동문화유형의 무덤 형식과 매장습속이 환인 고구려 적석무덤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고구려 적석묘는 강상묘의 계승과 발전’이라고 보고 있음) 또한 여대지구 강상과 루상, 우가촌 타두 적석묘 등과 같은 집단묘로서, 家族合葬墓라는 점에서 공통됨. 반면 강상·누상 적석묘는 평지에 축조되었으며, 묘단은 없고, 묘광이 장방 혹은 방사상으로 분포하며, 중심 묘광의 4벽은 판석을 세워 만들었고, 우가촌 타두 적석묘 역시 묘광이 타원형 또는 부정형으로, 보통 평행을 이루는 가로배열로 분포하며 묘단을 만들지 않았음. 따라서 강상·루상과 우가촌 타두는 간구자 적석묘와는 축조 방법에서의 차이가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연대는 3230±90년B.P. 이고, 강상·누상묘는 기원전 1세기 전반기에 해당된 고조선 시기이며, 환인 지역 적석묘는 제15호분에서 環首式 철칼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東漢 시대로, 늦어도 漢·魏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음. 간구자 고분군의 상대적 축조연대는 대체로 전국시기로부터 서한 말기에 해당되므로, 간구자 고분군은 강상·누상묘에서 환인 적석묘로 발전해 나아가는 과정의 과도기 단계로서 고구려 선인들의 토착문화로 추정됨. 연접 방식은 3형식으로 나뉘는데, 제1형식은 속·부묘단이 주묘단을 둘러싸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지 않으며(AM3, AM4, BM5), 제2형식은 속·부묘단의 밖에 다시 제2속묘단이 외접하고, 제1형식이 주묘단만을 둘러싸지만, 제2형식은 연이어 속묘단이 함께 둘러싸고 하나의 부묘단이 기점이 되어 2개의 방향으로 나누어 펼쳐짐(BM2, BM4). 3형식 : 먼저 주묘단을 두르고 밖으로 다시 속묘단을 쌓고, 빈곳에 1, 2개의 부묘단을 세운 후 연속으로 서남방향에 속묘단을 설치한 후, 양쪽에 연속하여 부묘단을 대칭으로 축조함(AM1, AM2). 제1형식이 제2형식의 미완성형식이라면 비교적 이른 고분은 모두 먼저 주묘단을 쌓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였는데, 부·속묘단이 연접하는 방향은 서남쪽으로 접속하지만, 일정하지 않다가 비교적 늦은 고분에서 서남쪽으로 확장방향이 정형성을 띰. 속묘단은 중심선에 의해 대다수 서남방향으로 연접하며 부묘단은 양쪽으로 分列하는데, 대다수는 비교적 대칭적임. 연접 방식에 따른 배열법의 변천순서는 제1형식→제2형식→제3형식 순으로 변하고, 이런 양상은 고분군의 분포 양상과도 합치됨. A와 B구역을 보면, 산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가 이른데 비해, 강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는 비교적 늦음. 上→下의 배열과 발전과정은 환인과 집안 일대의 고구려적석총의 배열과 일치함.자연환경 간구자1호분은 서간구자하 동쪽 구역 서남단, 장백과 임강을 잇는 長臨 도로가에 위치함. 간구자촌은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鎭 서쪽 0.5㎞ 지점에 위치하고, 고분은 干溝子村의 東·西干溝河 양안의 하곡 충적대지상에 분포함. 동쪽으로 長白縣城과 45㎞ 떨어져 있고, 동·서·북 3면이 高山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름. 압록강과 고분군 사이의 馬架子山을 기준으로 동쪽의 동간구하, 서쪽의 서간구하가 흐르는데, 서간구하는 동북에서 서남으로 흘러 고분군를 거쳐 압록강으로 흘러 감. 장백과 임강을 잇는 長臨도로가 동남에서 서북으로 뻗어 고분군을 양분하고, 고분군의 서·남 양쪽 산위에는 청동기시대 유적 분포함. 간구자 고분은 여러 차례 조사가 있었으나 1986년과 2001년 조사로 대별되는데, 특히 2001년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계기로 1986년 조사때보다 묘역이 크게 확대되었음. 앞서 고분 분포현황에서 언급하였듯이 2001년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묘역은 크게 A, B, C, D의 4구역으로 이루어졌는데 비해, 1986년 보고서에는 2001년 보고서의 A와 B 지역 일대를 파악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으므로 2001년 고분의 편호는 1986년 조사를 고려하지 않고 새로 편호하고 있기 때문에 양자의 개별 고분들을 직접 연결시켜 파악하기는 어려운 상황임. 때문에 개별고분의 상황을 두 시기로 나누어 정리하였음.유물정보 복원 가능한 토기 2점, 완(陶碗) 1점, 잔(陶杯) 1점, 석제 도끼(石斧) 2점, 멧돼지이빨장식(野猪牙飾) 2점, 대롱장식(綠松石管飾) 1점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長白朝鮮族自治縣文物志』, 1986 · 朴潤武, 「長白縣干溝子墓地調査」『博物館研究』 1990-3, 1990 ·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 編, 『吉林省志』 45(民族志), 吉林人民出版社, 1991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朴潤武, 「압록강 유역 干溝子 적성무덤에 대한 조사연구」『中國境內 高句麗遺蹟 硏究』, 예하출판, 1995 · 王洪峰·孫仁傑·遲勇, 「吉林長白縣干溝子墓地發掘簡報」『考古』 2003-8, 2003 · 孫仁杰·遲勇·張殿甲, 「鴨綠江上流右岸考古調査」『東北史地』 2004-5, 2004

      • 간구자 2호분(干溝子 2號墳)

      • 간구자 3호분(干溝子 3號墳)

      • 간구자 4호분(干溝子 4號墳)

      • 간구자 7호분(干溝子 7號墳)

      • 간구자 무기단적석묘(干溝子 無基壇積石墓)

      • 리스트여닫기 간구자 AM1호분(干溝子 AM1號墳) 출토지 길림성 장백현 십사도구진 간구자촌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鎮 干溝子村)연대 상한: 戰國中期~末期, 하한: 西漢 상한 - B.C 4세기~B.C 3세기초, 하한 - 기원전후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2001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장백현문물보호관리소, 집안시박물관(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長白縣文物保護管理所, 集安市博物館)5월-7월 조사에서 1986년 편호와 달리 새로이 편호하는데 1986년 편호된 고분가운데 M15~M19의 5기 가운데 1기만 남아 있고, 1986년도에 편호되지 않은 고분 중 고분 형식을 판별할 수 있는 고분 고려하여 새로이 편호하였으며, 서간구하 북안의 A구 4기와 그 남안의 B구 3기를 발굴함.구조특징 A구 남부에 위치하며 전체 형태는 橢圓丘狀으로 정상부 최고 높이는 1.5m임. 주묘단 1기, 속묘단 3기, 부묘단 6기로 구성되어 있고, 고분의 남면과 서쪽의 바깥쪽 부묘단이 이미 남아 있지 않으며, 지상에는 내부 부묘단과 연결된 벽이 노출된 상태임. 주묘단(ZT)은 원형으로 직경 5~5.2m, 높이 1.25m이고, 판석으로 사방을 쌓았으며, 보존상태는 양호함. 높이가 0.8~0.9m이고 지탱석이 남아 있는 상태로 중심묘광(ZK1)의 방향은 75도이고, 평면은 타원형임. 둘레는 냇돌이 2줄 돌아가는데 길이 1m, 너비 0.65m, 묘광의 깊이(壙深) 0.15m임. 묘광 바닥은 잔 냇돌을 0.2m 두께로 깔았고, 묘광 내에는 불탄 인골조각이 있음. 2개의 작은 타원형 돌무지가 있는데 주묘단의 서쪽 묘단 가장자리 부근에 남북으로 배열되어 있고, 그 바깥 둘레에 돌을 놓아 대체로 원을 이루며, 북쪽 돌무지의 범위는 길이 0.8m, 너비 0.65m, 두께 0.1m이고, 陶罐 잔편이 1개 보이나 인골은 없음. 남쪽 돌무지는 길이 0.7m, 너비 0.5m, 두께 0.14m이고, 인골이나 유물이 보이지 않음. 속묘단(XT1-XT3)은 주묘단 남·북 양쪽에 속묘단이 연접해 있는데 XT1, XT2, XT3가 있음. XT1과 XT3은 서남방향으로 연접하고, XT2는 동북방향으로 연접해 있음. XT1은 타원형 평면으로 직경 5.2m이고, 돌 울타리의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殘高 0.6m임. 상부에는 7·8층의 평평한 할석을 쌓쌓았고, 밖에는 지탱석과 커다란 할석이 있음. 묘광(XK1)은 주묘단의 둘레돌에 기대어 있는데, 평면 타원형으로 길이 2.2m, 너비 0.7m, 깊이 0.05m이고, 묘광바닥의 냇돌의 두께는 0.12m이며, 燒骨, 철제 괭이(鐵钁) 1건, 석제 호미(石鋤) 2건(Ⅰ식·Ⅱ식)이 출토됨. XT2는 반원형 평면으로 직경 약 4m이고, 묘단 둘레가 남아 있지 않고 바닥만 남아 있음. 묘광(XK2)은 圓角長方形형으로 길이 1.6m, 너비 0.65m, 깊이 0.08m이고, 방향은 XK1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며, 주묘단 ZK1의 방향과 수직으로 위치함. 묘광 내 두께 0.05m의 작은 강돌층이 있고, 사질토기(夾砂褐陶) 잔편이 출토되었으나 인골은 보이지 않음. XT3은 타원형 평면으로 직경 4.6m이고, 둘레 돌이 무너져 殘高 0.4~0.6m임. 묘광(XK3)은 圓角長方形인데 길이 1.8m, 너비 0.87. 깊이 0.1m이고, 묘광 내 두께 0.12m의 강돌층이 있음. 묘광 중간에 燒骨이 있는데, 동남부에서 심발형토기(深腹罐 CⅡ식)과 骨器 각 1건, 남색·백색 대롱(藍·白管) 13건이 출토함. 묘광(XK4)은 부정형으로 한변 길이 1.2m, 너비 0.8m, 두께 0.1m의 작은 냇돌로 축조했고, 토기편·석제 방추차(石紡輪) 각 1건, 흰색 대롱(白管) 4건이 출토함. XT3 서쪽에 1기의 속묘단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고, XT3 남쪽에는 돌덩어리가 비교적 많이 산재해 있으며, 동서 방향으로 대략 3.8m가 떨어져 보이는 둘레돌 기초 2줄 확인되나 파괴가 심함. 부묘단(FT1~FT6)은 주·속묘단 중심축의 양쪽에 마주하여 위치하고, 묘광 방향은 주묘단 묘광의 장축과 대부분 일치함. FT1은 타원형 평면으로 길이 4.7m, 너비 1.7m이고, 묘광(FK1)은 장방형으로 길이 약 4m, 너비 1m이고, 묘광 바닥의 0.14m 두께로 냇돌 깔았으며, 두 덩어리의 불탄 뼈조각과 심발형토기 1건(深腹罐 BⅡ식)이 출토됨. FT2는 반원형으로 직경 약 5m이고, 바깥 가장자리의 둘레돌은 남아 있지 않음. 묘광(FK2)는 타원형으로 길이 3m, 너비 1.3m, 깊이 0.5m이고, 바닥의 냇돌 두께는 0.16m이며, 묘광내 남·북 2곳에서 燒骨 각 1 무더기, 토기편 각 1건이 출토함. FT3은 橢圓形에 가까운 평면형태로 길이 4.2m, 너비 1m이고, 둘레돌은 보존이 양호하며, 둘레 돌 밖에 지탱석인 倚石 3개가 잔존하며, 돌레돌 높이는 0.85m임. 묘광(FK3)은 墓壙壁이 보이지 않고, 바닥의 냇돌 범위는 길이 3.5m, 너비 0.8m, 두께 0.14m이며, 燒骨, 백색 대롱(白管) 10점, 토기편이 약간 출토됨. FT4는 반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직경 약 4.5m이고, 둘레 돌은 대부분 훼손되었음. 묘광(FK4)는 타원형으로 길이 2.6m, 너비 1m, 깊이 0.18m이고, 묘광 바닥의 냇돌은 두께 0.08m이며, 燒骨·심발형토기편 2건(深腹罐 AⅡ식)·백색 대롱 3개가 출토함. 작은 돌무지는 묘광(FK4) 남쪽의 XT3의 둘레돌 아래 인접하여 위치하고, 평면 원형으로 주위에는 냇돌로 둘레를 돌렸는데 직경 약 0.5m, 두께 0.08m이고, 돌무지 안에는 碎骨이 있음. FT5는 파괴가 심하여 둘레돌 흔적만 남음. 묘광(FK5)은 평면 타원형의 냇돌층만 잔존하고, 길이는 0.5m, 너비 0.4m, 두께 0.06m이며, 석제 방추차 1건과 토기 잔편 1건이 출토되었었으나 인골은 보이지 않음. FT6으로 추정되는 것은 FT1과 XT2 사이의 공간에 많은 큰 돌이 산재하고 둘레가 정리된 상태로, FT1과 FT3 동쪽으로 많은 배열을 이루는 커다란 냇돌이 있음.역사적 의미 축조방식은 지면에 커다란 돌을 사용하여 일정 범위의 묘역을 조성한 후 냇돌과 할석을 깔아 평면하게 지면을 고르고 무덤의 기저부를 만든 후, 그 위에 단을 쌓아 몇 기의 무덤이 연접되도록 함. 매장방식은 무덤 밖에서 화장한 후 燒骨을 매장한 2차장하고, 대다수 묘광 내부에 불에 타거나 그을린 흔적이 없음. 불에 탄 인골편은 작은 조각으로 가장 큰 것이 길이 5㎝가 안되며, 대략 1/3의 소골은 회백색이며 나머지는 赭色(자색)과 흑색임. 다만 BM2ZK1에서 목탄편이 출토되었고, 1986년 조사된 간구자 1호분(M1)의 석광 안에는 주검칸이나 葬具를 따로 마련하지 않았고 불에 태워진 인골과 대량의 목탄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시신을 묘광 안에 놓고 화장했던 것으로 추정됨. 燒骨은 묘광 내 2, 3곳에 무더기로 안치되었으며, 토기는 묘광 양단에 나누어 부장한 점으로 미루어 一代 혹은 한 가정의 合葬 즉 동일가족 數代의 합장묘 유적일 것임. 따라서 신분 혹은 항렬이 비교적 높은 사람이 주묘단의 중심에 매장되고, 다수 속·부묘단은 항렬의 대소 또는 昭穆제도에 따라 附葬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2001년 발굴한 7기 고분의 부장품은 총 283점으로 작은 장식품을 제외하면 평균 각 묘광에 3점이 부장되었으므로 厚葬은 아님. 전체 부장품 중 토기가 총73점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나 완형보다는 다수가 파편으로 출토되어 토기의 毁器習俗으로 짐작됨. 출토된 그릇은 모두 민무늬의 夾沙褐陶로 모양이 간단하고 종류가 단조롭고 제작 기술이 거칠어 원시성을 반영하며, 그 외 野猪牙飾, 綠松石管 등의 장식품은 모두 압록강 유역과 두만강 유역의 원시문화에서 일찍이 보여주는 전형적 기물임. 간구자 고분군의 무덤들은 하나의 기단 위에 여러 기의 고분이 배열되어 있는데, 특히 7호분은 1기의 원형석광적석묘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장방형의 작은 돌무덤이 방사상으로 배치되어 무덤 사이의 主次관계를 시사함. 즉 중심무덤의 피장자는 주위의 무덤에 비해 사회적 지위가 높은 편이나 반대의 무덤은 중심무덤에 예속된 상태로 추정됨. 반면에 1호분 및 4호분과 같은 단일한 원형석광무덤의 무덤배열 상태에서는 주종 관계가 전혀 보이지 않음. 한 墓區내의 여러 개 무덤은 그 크기와 모양이 같으며 또한 무덤 사이마다 돌로 서로 연결되어 한 무덤구역내의 피장자들 관계가 평등하였다는 것을 시사하며, 이는 혈연관계를 이루고 있는 가족 성원의 무덤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임. 부장품은 장식품이 많고 생산 공구 및 기타 그릇 류가 비교적 적은데, 이는 길림성 중부지구의 九台關馬山, 公主嶺猴石, 樺甸橫道河子 및 東豊, 遼源 일대 많은 大蓋石墓의 부장 특징과 서로 일치하며, 동북지구 남부에서는 戰國晩期~漢代 보편적으로 유행함. 상한연대는 2기 고분에서 方孔圓錢- 半兩錢과 一化으로 추정할 수 있음. 半兩錢은 秦末半兩 혹은 漢初의 八銖半兩이며, 一化는 ‘一刀’로 해석되며, 周秦 또는 秦初 시기의 화폐임. 赤峰 新窝堡와 鐵嶺 邱家台지역의 퇴장유적에서 이들 화폐가 燕·趙의 刀幣 및 반량전과 같이 출토되어 燕國晩期의 화폐로 확정되었으므로 묘지연대의 상한은 戰國末期, 비교적 이른 것은 戰國 中期에 해당됨. 하한연대는 AM1에서 출토된 鐵钁과 AM3·AM4 주묘단에서 채집된 鐵刀로 추정할 수 있는데, 钁은 漢代유행하는 것과 형태가 유사하며, 철도는 直柄環首로 일찍이 集安의 板岔嶺에서 동일한 것이 발굴된 바 있는데, 고구려 적석묘에서 대량 보이는 環首刀보다 조금 이름. 집안 판차령에서 “一化”圓錢이 “半兩”, “五銖”, “大泉五十”, 등의 한대화폐와 함께 출토되었고, 그 유통 시간은 전국말기~東漢임. 그러나 간구자묘지에서는 “오수” 및 동한화폐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고분의 하한은 대체로 동한이전의 서한시기로 비정됨. 간구자묘지의 연대가 집안, 환인 일대의 고구려 적석총보다 앞서므로, 고구려적석총의 가장 이른 형식인 無階段 圓丘上積石墓와 관련이 있을 것임. 고구려 초기의 적석묘의 발전과정을 보면, 무덤은 석광이 따로 없는 간단한 시설로부터 계단식 기단으로 이루어진 ‘框室(앞에서 박윤무의 1995년 글에 따라 ‘묘실’이라 정리하던 개념인데, 이 글에서 이 부분을 ‘框室’로 표현하고 있어 그대로 따랐음)’ 무덤으로 발전하고, ‘광실’은 장방형으로부터 정방형 형태로 변화·발전함. 묘광 위치에서도 위로부터 아래로 점차 내려옴. 이를 종합해 볼 때 간구자의 원형석광적석묘는 고구려 초기 적석총과 유사함. 첫째, 주검칸이 따로 없이 무덤의 기단 윗면을 자갈과 모래로 수평하게 마련하고 그 위에 주검과 부장품을 놓고 막돌로 덮어 정상부를 마무리 한 것은 이것은 환인 201호 및 19호분과 매우 흡사함. 둘째, 기단의 단수와 묘광 형태에서 차이가 있으나 한 무덤구역에 여러 기의 무덤을 연이어 마련한 점은 환인 23-33호분과 일치함. 셋째, 화장하여 묻는 습관이 환인 23호 및 20호분이나 15호분에서 확인되며, 집안 일대의 일부 적석총은 묘광벽이 불에 녹아 응결된 흔적으로 화장하였을 것으로 짐작됨. 따라서 간구자 무덤은 시기적으로 환인 적석총을 위주로 한 고구려 초기 무덤보다는 이르며 대체로 환인 적석총보다 선행된 고구려 早期의 무덤형식으로 고구려족계의 원시적 매장 특징이 짙게 반영됨. 또한 간구자 고분군은 여대지구 청동기 시대 무덤 및 청동단검고분의 특징을 내포하고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와 노철산 고분은 모두 여러 기의 무덤을 서로 가까이하여 ‘벌집형(蜂巢狀)’이며,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평면 형태는 원형으로 된 것도 있음. 이것은 간구자 1호분(M1)·2호분(M2)의 특징과 유사함. 강상묘는 하나의 무덤구역에 1기의 중심무덤을 마련하고 그 둘레를 돌면서 여러 기의 무덤을 방사선 형태로 마련하였는데, 이것은 간구자 7호분(M7)과 매우 유사함. 그리고 강상·누상묘 등 적지 않은 청동단검묘는 모두 화장한 무덤이라는 사실에서도 간구자 고분과 일치함.(『조선고고학개요』에서는 ‘노철산 및 장군산 고분→강상·누상묘→고구려 적석묘’라는 계승 발전관계를 설정하고 있고, 왕성생(1981, 「요하 유역 및 부근지역의 短鋌曲刃劍 연구」『요녕성고고박물관학회설립대회』회간)은 강상묘를 비롯한 요동문화유형의 무덤 형식과 매장습속이 환인 고구려 적석무덤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고구려 적석묘는 강상묘의 계승과 발전’이라고 보고 있음) 또한 여대지구 강상과 루상, 우가촌 타두 적석묘 등과 같은 집단묘로서, 家族合葬墓라는 점에서 공통됨. 반면 강상·누상 적석묘는 평지에 축조되었으며, 묘단은 없고, 묘광이 장방 혹은 방사상으로 분포하며, 중심 묘광의 4벽은 판석을 세워 만들었고, 우가촌 타두 적석묘 역시 묘광이 타원형 또는 부정형으로, 보통 평행을 이루는 가로배열로 분포하며 묘단을 만들지 않았음. 따라서 강상·루상과 우가촌 타두는 간구자 적석묘와는 축조 방법에서의 차이가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연대는 3230±90년B.P. 이고, 강상·누상묘는 기원전 1세기 전반기에 해당된 고조선 시기이며, 환인 지역 적석묘는 제15호분에서 環首式 철칼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東漢 시대로, 늦어도 漢·魏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음. 간구자 고분군의 상대적 축조연대는 대체로 전국시기로부터 서한 말기에 해당되므로, 간구자 고분군은 강상·누상묘에서 환인 적석묘로 발전해 나아가는 과정의 과도기 단계로서 고구려 선인들의 토착문화로 추정됨. 연접 방식은 3형식으로 나뉘는데, 제1형식은 속·부묘단이 주묘단을 둘러싸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지 않으며(AM3, AM4, BM5), 제2형식은 속·부묘단의 밖에 다시 제2속묘단이 외접하고, 제1형식이 주묘단만을 둘러싸지만, 제2형식은 연이어 속묘단이 함께 둘러싸고 하나의 부묘단이 기점이 되어 2개의 방향으로 나누어 펼쳐짐(BM2, BM4). 3형식 : 먼저 주묘단을 두르고 밖으로 다시 속묘단을 쌓고, 빈곳에 1, 2개의 부묘단을 세운 후 연속으로 서남방향에 속묘단을 설치한 후, 양쪽에 연속하여 부묘단을 대칭으로 축조함(AM1, AM2). 제1형식이 제2형식의 미완성형식이라면 비교적 이른 고분은 모두 먼저 주묘단을 쌓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였는데, 부·속묘단이 연접하는 방향은 서남쪽으로 접속하지만, 일정하지 않다가 비교적 늦은 고분에서 서남쪽으로 확장방향이 정형성을 띰. 속묘단은 중심선에 의해 대다수 서남방향으로 연접하며 부묘단은 양쪽으로 分列하는데, 대다수는 비교적 대칭적임. 연접 방식에 따른 배열법의 변천순서는 제1형식→제2형식→제3형식 순으로 변하고, 이런 양상은 고분군의 분포 양상과도 합치됨. A와 B구역을 보면, 산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가 이른데 비해, 강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는 비교적 늦음. 上→下의 배열과 발전과정은 환인과 집안 일대의 고구려적석총의 배열과 일치함.자연환경 간구자촌은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鎭 서쪽 0.5㎞ 지점에 위치하고, 고분은 干溝子村의 東·西干溝河 양안의 하곡 충적대지상에 분포함. 동쪽으로 長白縣城과 45㎞ 떨어져 있고, 동·서·북 3면이 高山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름. 압록강과 고분군 사이의 馬架子山을 기준으로 동쪽의 동간구하, 서쪽의 서간구하가 흐르는데, 서간구하는 동북에서 서남으로 흘러 고분군를 거쳐 압록강으로 흘러 감. 장백과 임강을 잇는 長臨도로가 동남에서 서북으로 뻗어 고분군을 양분하고, 고분군의 서·남 양쪽 산위에는 청동기시대 유적 분포함. 간구자 고분은 여러 차례 조사가 있었으나 1986년과 2001년 조사로 대별되는데, 특히 2001년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계기로 1986년 조사때보다 묘역이 크게 확대되었음. 앞서 고분 분포현황에서 언급하였듯이 2001년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묘역은 크게 A, B, C, D의 4구역으로 이루어졌는데 비해, 1986년 보고서에는 2001년 보고서의 A와 B 지역 일대를 파악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으므로 2001년 고분의 편호는 1986년 조사를 고려하지 않고 새로 편호하고 있기 때문에 양자의 개별 고분들을 직접 연결시켜 파악하기는 어려운 상황임. 때문에 개별고분의 상황을 두 시기로 나누어 정리하였음.유물정보 심발형토기 3점, 옥드리개 1점, 석제 호미 2점, 방추차 3점, 대롱 1점, 철제 괭이 1점, 흰색대롱 다수, 뼈드리개 1점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長白朝鮮族自治縣文物志』, 1986 · 朴潤武, 「長白縣干溝子墓地調査」『博物館研究』 1990-3, 1990 ·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 編, 『吉林省志』 45(民族志), 吉林人民出版社, 1991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朴潤武, 「압록강 유역 干溝子 적성무덤에 대한 조사연구」『中國境內 高句麗遺蹟 硏究』, 예하출판, 1995 · 王洪峰·孫仁傑·遲勇, 「吉林長白縣干溝子墓地發掘簡報」『考古』 2003-8, 2003 · 孫仁杰·遲勇·張殿甲, 「鴨綠江上流右岸考古調査」『東北史地』 2004-5, 2004

      • 리스트여닫기 간구자 AM2호분(干溝子 AM2號墳) 출토지 길림성 장백현 십사도구진 간구자촌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鎮 干溝子村)연대 상한: 戰國中期~末期, 하한: 西漢 상한 - B.C 4세기~B.C 3세기초, 하한 - 기원전후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2001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장백현문물보호관리소, 집안시박물관(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長白縣文物保護管理所, 集安市博物館)5월-7월 조사에서 1986년 편호와 달리 새로이 편호하는데 1986년 편호된 고분가운데 M15~M19의 5기 가운데 1기만 남아 있고, 1986년도에 편호되지 않은 고분 중 고분 형식을 판별할 수 있는 고분 고려하여 새로이 편호하였으며, 서간구하 북안의 A구 4기와 그 남안의 B구 3기를 발굴함.구조특징 주묘단 2기, 속묘단 5기, 부묘단 9기로 조성되어 있고, 중심부분 높이는 2.1m이며, 전체형태는 橢圓丘狀으로 중심축의 방향은 55°임. 고분은 일찍 파괴되었는데, 동쪽 주묘단 邊墻은 1/3이 파괴되었고, 남면의 부묘단 5기(FT5~FT9)도 기초부만 남아 있음. 주묘단(ZT1, ZT2)은 쌍주묘단으로 구조는 다른 고분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나 다만 묘광 아래 묘실이 없고, 묘단 아래에는 腰坑이 없음. 층위상 2호 주묘단(ZT2)이 먼저 만들어졌음. 주묘단은 동·서로 배열되어 있는데, 서로 1.2m 떨어져 있고 중간에 XT1이 연접되어 있음. ZT1은 원형으로 직경 6m, 높이 1.6m이고, 2개의 묘광이 있는데, ZK1과 ZK2가 서로 평행하고, 방향은 모두 140°임. 묘광(ZK1)은 타원형으로 길이 2.5m, 너비 0.85~1.2m, 깊이 0.2m이고, 묘광 둘레를 쌓은 돌은 비교적 적으며, 밑바닥의 강돌층은 0.08m 두께이며, 燒骨과 토기편 1점이 출토됨. 묘광(ZK2)는 말각장방형으로 길이 2.5m, 너비 0.6m, 깊이 0.15m이고, 밑바닥의 작은 강돌층 두께가 0.06m임. ZK1과 0.5m 떨어져 위치하고, 燒骨이 양쪽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토기 1점, 藍管 2점이 출토됨. ZT2는 타원형으로 길이 7m, 너비 6m이고, 둘레돌의 보존은 양호함. 높이 1.5~1.9m로 얇은 할석과 편평한 냇돌로 틈새를 메웠고, 서쪽은 가장 높은 곳은 14층을 쌓아 올렸으며, 가장자리는 弧線으로 정리함. 주묘단 주위에는 지탱석 52개가 세워져 있는데, 지탱석 사이의 거리는 0.3~0.5m이고, 지탱석은 장방형이거나 커다란 할석도 있음. 묘광은 3개이고 방향은 138°임. 묘광(ZK4)은 圓角長方形으로 길이 2.5, 너비 0.9m, 깊이 0.22m이고, 둘레는 비교적 큰 돌로 축조했으며, 밑바닥에 두께는 0.08m로 냇돌 깔음. 燒骨과 심발형토기 3건(深腹罐 CⅠ식, 淺腹罐 BaⅡ식)이 출토함. 묘광(ZK3)은 동쪽에 위치하는데 타원형으로 길이 2.3m 너비 0.85m, 깊이 0.2m이고 묘광벽은 작은 판석으로 축조했으며, 바닥은 0.1m 두께로 냇돌을 깔음. 많은 불탄 뼈조각들과 발 1건(淺腹罐 Cb식)이 부장됨. 묘광(ZK5)은 서쪽에 위치하고, 타원형으로 길이 2.4m, 너비 0.8m, 깊이 0.15m임. 묘광벽은 판석으로 축조했고, 묘광 바닥은 두께 0.06m로 냇돌을 깔음. 소량의 燒骨과 白管 24개 및 소량의 발편(淺腹罐 BaⅢ식)이 출토됨. 속묘단(XT1~XT5)은 모두 5기로 안쪽의 3기(XT1~XT3)는 모두 중심축선상에 축조되었고, 바깥쪽 2기(XT4~XT5)는 중심축에서 조금 벗어나 축조되었는데, 속묘단 묘광방향과 주묘단 묘광은 기본적으로 동일함. XT1은 동, 서 주묘단의 사이에 위치하고, 묘광(XK1)는 타원형으로 길이 2.5m, 너비 0.9m, 깊이 0.12m이고, 바닥의 강돌층 두께는 0.07m이며, 불탄 인골 조각·대롱(陶管), 발(淺腹罐 Bc식)과 방추차(紡輪) 각 1건·소량의 토기편이 출토됨. XT2는 반원형으로 직경 5.3m, 높이 1.6m이고, 둘레돌은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지탱석 사이 간격은 약 0.5m임. 묘광(XK2)은 타원형으로 할석으로 축조했고, 길이 2.2m, 너비 0.7m, 깊이 0.1m임. 밑바닥 강돌층 두께는 0.04m이고, 묘광에서 발 2건(淺腹罐 BaⅢ식 및 Bc식), 燒骨이 산재되어 있음. XT3은 반원형으로 직경 4.5m, 둘레돌 높이 1.45이고, 지탱석 8개가 세워져 있음. 묘광(XK3)은 타원형으로 길이 1.5m, 너비 0.7m, 밑바닥 강돌층 두께 0.06m임. 주변에는 1층의 塊石을 두었고, 燒骨을 비롯 흰색 대롱 4건과 토기편 1건이 출토됨. XT4는 타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길이 6m, 너비 약 4m인데, 북쪽 둘레돌은 이미 파괴되었으며, 남쪽 둘레돌도 기울어져 무너짐. XT4의 중간부의 묘광 바닥 냇돌 아래에서 꺽여 돌아가는 높이 약 0.5m 정도의 벽석을 발견했는데, 벽석은 비교적 커다란 할석으로 축조하여, XT4 기초 위에 쌓아 기초부를 견고하게 함. 묘광(XK4)은 불규칙한 할석으로 축조되었고 타원형으로 길이 1.8m, 너비 0.5m, 깊이 0.08m이며, 밑바닥에는 작은 돌을 0.05m 두께로 깔음. 묘광에서 흰색 대롱 5건, 토기편 1건, 燒骨이 출토함. XT5는 타원형으로 직경 7.3m이고, 둘레돌은 남아 있지 않으며 기초만 판별 가능함. 묘광(XK5)은 묘광벽이 남단만 잔존하고, 묘광 밑바닥의 작은 강돌은 타원형에 가까운 형태이며, 길이 2.5m, 너비 1m, 두께 0.06m임. 燒骨과 소량의 도편이 산재하고 있음. 부묘단(FT1~FT9)은 중심축선 양쪽으로 나누어 축조되었는데 대칭은 아님. 중심축선 북쪽에 부묘단 4기(FT1-FT4)가 축조되었고, 중심축선 남쪽에 부묘단 약 4기(FT5-FT8)가 축조되었으며, 주묘단에서 XT4 방향으로 차례대로 축조됨. FT1은 타원형으로 길이 2.4m, 너비 0.8m, 깊이 0.12m이고, 묘광 주변은 크기가 다른 괴석들로 축조하였고, 바닥의 두께는 0.05m의 작은 냇돌층이며, 대량의 燒骨, 동제 고리(銅環)(環 B식) 및 발 각 1건(淺腹罐 AⅡ식), 토기편 1건이 출토됨. FT2는 타원형으로 길이 2.2m, 너비 0.6m, 두께 0.04m이고, 보존상태는 양호하며, 묘광 바닥에 냇돌 깔았음. 묘광에서 소량의 燒骨과 토기편 1건이 출토함. FT3은 扇形으로 半徑 2.9m이고, 둘레 돌은 이미 붕괴되었음. 묘광(FK3)은 扇形으로 반경 약 1.2m이고 바닥의 작은 냇돌 두께는 0.05m임. 묘광 내 燒骨은 많지 않고 토기편 1건, “半兩”(A식-E식)과 “一化” 圓錢 등의 화폐가 총 30매 출토됨. FT4는 扇形으로 半徑 약 2.5m이며, 둘레 돌은 원래부터 없었고, XT4와 만나는 부분은 이미 파괴되었음. 묘광(FK4)는 둘레 의 훼손이 심하고, 바닥의 냇돌층만 잔존함. 타원형 평면이고 길이 2.1m, 너비 0.9m이며, 묘광 내 소량의 燒骨과 토기편이 출토됨. FT5는 반원형으로 직경 4.5m임. FT6 및 FT7는 크기 차이가 별로 없고 半徑 약 2m의 扇形이고, FT8는 면적이 매우 작으며, FT9는 扇形으로 반경은 약 2m임. 앞서의 부묘단과는 반대 방향으로 주묘단 ZT1을 둘러싸고 축조됨.역사적 의미 축조방식은 지면에 커다란 돌을 사용하여 일정 범위의 묘역을 조성한 후 냇돌과 할석을 깔아 평면하게 지면을 고르고 무덤의 기저부를 만든 후, 그 위에 단을 쌓아 몇 기의 무덤이 연접되도록 함. 매장방식은 무덤 밖에서 화장한 후 燒骨을 매장한 2차장하고, 대다수 묘광 내부에 불에 타거나 그을린 흔적이 없음. 불에 탄 인골편은 작은 조각으로 가장 큰 것이 길이 5㎝가 안되며, 대략 1/3의 소골은 회백색이며 나머지는 赭色(자색)과 흑색임. 다만 BM2ZK1에서 목탄편이 출토되었고, 1986년 조사된 간구자 1호분(M1)의 석광 안에는 주검칸이나 葬具를 따로 마련하지 않았고 불에 태워진 인골과 대량의 목탄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시신을 묘광 안에 놓고 화장했던 것으로 추정됨. 燒骨은 묘광 내 2, 3곳에 무더기로 안치되었으며, 토기는 묘광 양단에 나누어 부장한 점으로 미루어 一代 혹은 한 가정의 合葬 즉 동일가족 數代의 합장묘 유적일 것임. 따라서 신분 혹은 항렬이 비교적 높은 사람이 주묘단의 중심에 매장되고, 다수 속·부묘단은 항렬의 대소 또는 昭穆제도에 따라 附葬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2001년 발굴한 7기 고분의 부장품은 총 283점으로 작은 장식품을 제외하면 평균 각 묘광에 3점이 부장되었으므로 厚葬은 아님. 전체 부장품 중 토기가 총73점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나 완형보다는 다수가 파편으로 출토되어 토기의 毁器習俗으로 짐작됨. 출토된 그릇은 모두 민무늬의 夾沙褐陶로 모양이 간단하고 종류가 단조롭고 제작 기술이 거칠어 원시성을 반영하며, 그 외 野猪牙飾, 綠松石管 등의 장식품은 모두 압록강 유역과 두만강 유역의 원시문화에서 일찍이 보여주는 전형적 기물임. 간구자 고분군의 무덤들은 하나의 기단 위에 여러 기의 고분이 배열되어 있는데, 특히 7호분은 1기의 원형석광적석묘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장방형의 작은 돌무덤이 방사상으로 배치되어 무덤 사이의 主次관계를 시사함. 즉 중심무덤의 피장자는 주위의 무덤에 비해 사회적 지위가 높은 편이나 반대의 무덤은 중심무덤에 예속된 상태로 추정됨. 반면에 1호분 및 4호분과 같은 단일한 원형석광무덤의 무덤배열 상태에서는 주종 관계가 전혀 보이지 않음. 한 墓區내의 여러 개 무덤은 그 크기와 모양이 같으며 또한 무덤 사이마다 돌로 서로 연결되어 한 무덤구역내의 피장자들 관계가 평등하였다는 것을 시사하며, 이는 혈연관계를 이루고 있는 가족 성원의 무덤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임. 부장품은 장식품이 많고 생산 공구 및 기타 그릇 류가 비교적 적은데, 이는 길림성 중부지구의 九台關馬山, 公主嶺猴石, 樺甸橫道河子 및 東豊, 遼源 일대 많은 大蓋石墓의 부장 특징과 서로 일치하며, 동북지구 남부에서는 戰國晩期~漢代 보편적으로 유행함. 상한연대는 2기 고분에서 方孔圓錢- 半兩錢과 一化으로 추정할 수 있음. 半兩錢은 秦末半兩 혹은 漢初의 八銖半兩이며, 一化는 ‘一刀’로 해석되며, 周秦 또는 秦初 시기의 화폐임. 赤峰 新窝堡와 鐵嶺 邱家台지역의 퇴장유적에서 이들 화폐가 燕·趙의 刀幣 및 반량전과 같이 출토되어 燕國晩期의 화폐로 확정되었으므로 묘지연대의 상한은 戰國末期, 비교적 이른 것은 戰國 中期에 해당됨. 하한연대는 AM1에서 출토된 鐵钁과 AM3·AM4 주묘단에서 채집된 鐵刀로 추정할 수 있는데, 钁은 漢代유행하는 것과 형태가 유사하며, 철도는 直柄環首로 일찍이 集安의 板岔嶺에서 동일한 것이 발굴된 바 있는데, 고구려 적석묘에서 대량 보이는 環首刀보다 조금 이름. 집안 판차령에서 “一化”圓錢이 “半兩”, “五銖”, “大泉五十”, 등의 한대화폐와 함께 출토되었고, 그 유통 시간은 전국말기~東漢임. 그러나 간구자묘지에서는 “오수” 및 동한화폐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고분의 하한은 대체로 동한이전의 서한시기로 비정됨. 간구자묘지의 연대가 집안, 환인 일대의 고구려 적석총보다 앞서므로, 고구려적석총의 가장 이른 형식인 無階段 圓丘上積石墓와 관련이 있을 것임. 고구려 초기의 적석묘의 발전과정을 보면, 무덤은 석광이 따로 없는 간단한 시설로부터 계단식 기단으로 이루어진 ‘框室(앞에서 박윤무의 1995년 글에 따라 ‘묘실’이라 정리하던 개념인데, 이 글에서 이 부분을 ‘框室’로 표현하고 있어 그대로 따랐음)’ 무덤으로 발전하고, ‘광실’은 장방형으로부터 정방형 형태로 변화·발전함. 묘광 위치에서도 위로부터 아래로 점차 내려옴. 이를 종합해 볼 때 간구자의 원형석광적석묘는 고구려 초기 적석총과 유사함. 첫째, 주검칸이 따로 없이 무덤의 기단 윗면을 자갈과 모래로 수평하게 마련하고 그 위에 주검과 부장품을 놓고 막돌로 덮어 정상부를 마무리 한 것은 이것은 환인 201호 및 19호분과 매우 흡사함. 둘째, 기단의 단수와 묘광 형태에서 차이가 있으나 한 무덤구역에 여러 기의 무덤을 연이어 마련한 점은 환인 23-33호분과 일치함. 셋째, 화장하여 묻는 습관이 환인 23호 및 20호분이나 15호분에서 확인되며, 집안 일대의 일부 적석총은 묘광벽이 불에 녹아 응결된 흔적으로 화장하였을 것으로 짐작됨. 따라서 간구자 무덤은 시기적으로 환인 적석총을 위주로 한 고구려 초기 무덤보다는 이르며 대체로 환인 적석총보다 선행된 고구려 早期의 무덤형식으로 고구려족계의 원시적 매장 특징이 짙게 반영됨. 또한 간구자 고분군은 여대지구 청동기 시대 무덤 및 청동단검고분의 특징을 내포하고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와 노철산 고분은 모두 여러 기의 무덤을 서로 가까이하여 ‘벌집형(蜂巢狀)’이며,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평면 형태는 원형으로 된 것도 있음. 이것은 간구자 1호분(M1)·2호분(M2)의 특징과 유사함. 강상묘는 하나의 무덤구역에 1기의 중심무덤을 마련하고 그 둘레를 돌면서 여러 기의 무덤을 방사선 형태로 마련하였는데, 이것은 간구자 7호분(M7)과 매우 유사함. 그리고 강상·누상묘 등 적지 않은 청동단검묘는 모두 화장한 무덤이라는 사실에서도 간구자 고분과 일치함.(『조선고고학개요』에서는 ‘노철산 및 장군산 고분→강상·누상묘→고구려 적석묘’라는 계승 발전관계를 설정하고 있고, 왕성생(1981, 「요하 유역 및 부근지역의 短鋌曲刃劍 연구」『요녕성고고박물관학회설립대회』회간)은 강상묘를 비롯한 요동문화유형의 무덤 형식과 매장습속이 환인 고구려 적석무덤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고구려 적석묘는 강상묘의 계승과 발전’이라고 보고 있음) 또한 여대지구 강상과 루상, 우가촌 타두 적석묘 등과 같은 집단묘로서, 家族合葬墓라는 점에서 공통됨. 반면 강상·누상 적석묘는 평지에 축조되었으며, 묘단은 없고, 묘광이 장방 혹은 방사상으로 분포하며, 중심 묘광의 4벽은 판석을 세워 만들었고, 우가촌 타두 적석묘 역시 묘광이 타원형 또는 부정형으로, 보통 평행을 이루는 가로배열로 분포하며 묘단을 만들지 않았음. 따라서 강상·루상과 우가촌 타두는 간구자 적석묘와는 축조 방법에서의 차이가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연대는 3230±90년B.P. 이고, 강상·누상묘는 기원전 1세기 전반기에 해당된 고조선 시기이며, 환인 지역 적석묘는 제15호분에서 環首式 철칼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東漢 시대로, 늦어도 漢·魏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음. 간구자 고분군의 상대적 축조연대는 대체로 전국시기로부터 서한 말기에 해당되므로, 간구자 고분군은 강상·누상묘에서 환인 적석묘로 발전해 나아가는 과정의 과도기 단계로서 고구려 선인들의 토착문화로 추정됨. 연접 방식은 3형식으로 나뉘는데, 제1형식은 속·부묘단이 주묘단을 둘러싸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지 않으며(AM3, AM4, BM5), 제2형식은 속·부묘단의 밖에 다시 제2속묘단이 외접하고, 제1형식이 주묘단만을 둘러싸지만, 제2형식은 연이어 속묘단이 함께 둘러싸고 하나의 부묘단이 기점이 되어 2개의 방향으로 나누어 펼쳐짐(BM2, BM4). 3형식 : 먼저 주묘단을 두르고 밖으로 다시 속묘단을 쌓고, 빈곳에 1, 2개의 부묘단을 세운 후 연속으로 서남방향에 속묘단을 설치한 후, 양쪽에 연속하여 부묘단을 대칭으로 축조함(AM1, AM2). 제1형식이 제2형식의 미완성형식이라면 비교적 이른 고분은 모두 먼저 주묘단을 쌓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였는데, 부·속묘단이 연접하는 방향은 서남쪽으로 접속하지만, 일정하지 않다가 비교적 늦은 고분에서 서남쪽으로 확장방향이 정형성을 띰. 속묘단은 중심선에 의해 대다수 서남방향으로 연접하며 부묘단은 양쪽으로 分列하는데, 대다수는 비교적 대칭적임. 연접 방식에 따른 배열법의 변천순서는 제1형식→제2형식→제3형식 순으로 변하고, 이런 양상은 고분군의 분포 양상과도 합치됨. A와 B구역을 보면, 산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가 이른데 비해, 강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는 비교적 늦음. 上→下의 배열과 발전과정은 환인과 집안 일대의 고구려적석총의 배열과 일치함.자연환경 AM2호분은 AM1과 AM3의 사이에 위치함. 간구자촌은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鎭 서쪽 0.5㎞ 지점에 위치하고, 고분은 干溝子村의 東·西干溝河 양안의 하곡 충적대지상에 분포함. 동쪽으로 長白縣城과 45㎞ 떨어져 있고, 동·서·북 3면이 高山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름. 압록강과 고분군 사이의 馬架子山을 기준으로 동쪽의 동간구하, 서쪽의 서간구하가 흐르는데, 서간구하는 동북에서 서남으로 흘러 고분군를 거쳐 압록강으로 흘러 감. 장백과 임강을 잇는 長臨도로가 동남에서 서북으로 뻗어 고분군을 양분하고, 고분군의 서·남 양쪽 산위에는 청동기시대 유적 분포함. 간구자 고분은 여러 차례 조사가 있었으나 1986년과 2001년 조사로 대별되는데, 특히 2001년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계기로 1986년 조사때보다 묘역이 크게 확대되었음. 앞서 고분 분포현황에서 언급하였듯이 2001년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묘역은 크게 A, B, C, D의 4구역으로 이루어졌는데 비해, 1986년 보고서에는 2001년 보고서의 A와 B 지역 일대를 파악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으므로 2001년 고분의 편호는 1986년 조사를 고려하지 않고 새로 편호하고 있기 때문에 양자의 개별 고분들을 직접 연결시켜 파악하기는 어려운 상황임. 때문에 개별고분의 상황을 두 시기로 나누어 정리하였음.유물정보 심발형토기 1점, 발 6점, 옥구슬 1점, 고리 1점, 반량전 18점, 일화전, 흰색대롱, 남색대롱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長白朝鮮族自治縣文物志』, 1986 · 朴潤武, 「長白縣干溝子墓地調査」『博物館研究』 1990-3, 1990 ·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 編, 『吉林省志』 45(民族志), 吉林人民出版社, 1991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朴潤武, 「압록강 유역 干溝子 적성무덤에 대한 조사연구」『中國境內 高句麗遺蹟 硏究』, 예하출판, 1995 · 王洪峰·孫仁傑·遲勇, 「吉林長白縣干溝子墓地發掘簡報」『考古』 2003-8, 2003 · 孫仁杰·遲勇·張殿甲, 「鴨綠江上流右岸考古調査」『東北史地』 2004-5, 2004

      • 리스트여닫기 간구자 AM3호분(干溝子 AM3號墳) 출토지 길림성 장백현 십사도구진 간구자촌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鎮 干溝子村)연대 상한: 戰國中期~末期, 하한: 西漢 상한 - B.C 4세기~B.C 3세기초, 하한 - 기원전후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2001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장백현문물보호관리소, 집안시박물관(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長白縣文物保護管理所, 集安市博物館)5월-7월 조사에서 1986년 편호와 달리 새로이 편호하는데 1986년 편호된 고분가운데 M15~M19의 5기 가운데 1기만 남아 있고, 1986년도에 편호되지 않은 고분 중 고분 형식을 판별할 수 있는 고분 고려하여 새로이 편호하였으며, 서간구하 북안의 A구 4기와 그 남안의 B구 3기를 발굴함.구조특징 외관은 圓丘狀으로 직경 13.5m, 높이 1.4m이고, 주묘단 1기, 부묘단 3기로 조성되어 있음. 주묘단(ZT)은 타원형으로 길이 11m, 너비 9.5m, 높이 1.3m이고, 남반부 둘레돌은 보존이 비교적 양호하며, 높이 0.8m임. 북반부분은 훼손되었는데, 지탱석 대부분이 기울어져 무너지고 있고, 기초부만 잔존함. 주묘단의 돌 무지 위에서 토기(陶罐), 철제 칼(鐵刀)(Ⅱ식), 어망추(網墜) 등이 출토됨. 주묘단의 묘광은 5기로, 묘광 ZK2~ZK5는 ZK1의 사방에 대칭으로 분포함. 묘광(ZK1)은 묘단의 중심에 위치하고, 근장방형으로 길이 2.7m, 너비 1m, 깊이 0.45m, 40°방향임. 묘광의 네 벽은 편형한 냇돌로 축조후 깨진 돌로 0.1m두께로 봉했고, 바닥은 두께 0.06~0.1m의 작은 냇돌을 깔았으며, 두 덩어리의 불에 탄 인골 조각들, 토기(陶罐) 1건이 출토됨. 묘광(ZK2)은 불규칙 타원형으로 길이 1.7m, 너비 0.3~0.6m, 깊이 0.06m이고, 바닥에 깔린 작은 냇돌층 두께는 0.03~0.06m임. 燒骨 조각, 심발형토기 1건(深腹罐 BⅡ식)이 출토함. 묘광(ZK3)은 타원형으로 길이 1.9m, 너비 0.45~0.8m, 깊이 0.2m이고 바닥의 작은 냇돌층은 두께 0.05m이며, 燒骨 덩이, 한쌍의 옥장식(玉飾), 발 2건(淺腹罐 BaⅡ식 및 Ca식)이 출토함. 묘광(ZK4)는 타원형, 길이 0.9m, 너비 0.55m, 깊이 0.3m이고, 바닥에 깔린 작은 냇돌층 두께는 0.05m임. 묘광에는 뼈조각, 동제 고리(銅環) 1건(環 B식), 철제 칼(鐵刀) 잔편 1건(Ⅰ식)이 출토됨. 묘광(ZK5)은 타원형으로 길이 1.8m, 너비 0.6m, 깊이 0.25m이고, 바닥에 깔린 작은 냇돌층 두께는 0.05m임. 묘광에는 碎骨이 있었으나 부장품은 보이지 않음. 부묘단(FT1~FT3)은 총 3기로 모두 주묘단를 둘러싸고 시계반대방향으로 축조되어 있음. FT1은 주묘단의 남쪽에 위치하고, 타원형으로 직경 6m이고, 묘단은 대부분 이미 파괴되었으며, 주묘단 부근에 높이 0.3m의 둘레돌 지탱석 일부분이 남아 있는 상태임. 묘광(FK1)은 타원형으로 길이 2.3m, 너비 0,8m, 깊이 0.2m이고, 바닥에 깔린 작은 냇돌층 두께는 0.4m임. 燒骨, 발 1건(淺腹罐 BaⅢ식)이 출토됨. FT2는 扇形으로 반경 약 4m이고, 가장자리는 비교적 정리되어 있음. 주묘단에서 가까운 곳에 타원형 묘광 FK2가 있는데 길이 2m, 너비 1m, 깊이 0.15m이고, 바닥에는 두께 0.05미터의 작은 강돌이 깔려 있음. 腿骨·頭骨·牙齒 등을 포함한 燒骨, 동제 귀걸이(銅耳飾)(環 A식)와 玉珠 각 한쌍씩 출토됨. FT3은 훼손이 비교적 심하고, 외관은 이미 훼손되었음. 기초만 남아 있으며, 기초부의 직경은 약 6m임. 묘광(FK3)은 부정형으로 한 면만을 쌓아 올려 묘광벽을 축조하였고, 길이 2.7m, 너비 0.6~0.9m, 깊이 0.1m이며, 바닥에는 작은 강돌을 깔음. 인골과 부장품이 없음.역사적 의미 축조방식은 지면에 커다란 돌을 사용하여 일정 범위의 묘역을 조성한 후 냇돌과 할석을 깔아 평면하게 지면을 고르고 무덤의 기저부를 만든 후, 그 위에 단을 쌓아 몇 기의 무덤이 연접되도록 함. 매장방식은 무덤 밖에서 화장한 후 燒骨을 매장한 2차장하고, 대다수 묘광 내부에 불에 타거나 그을린 흔적이 없음. 불에 탄 인골편은 작은 조각으로 가장 큰 것이 길이 5㎝가 안되며, 대략 1/3의 소골은 회백색이며 나머지는 赭色(자색)과 흑색임. 다만 BM2ZK1에서 목탄편이 출토되었고, 1986년 조사된 간구자 1호분(M1)의 석광 안에는 주검칸이나 葬具를 따로 마련하지 않았고 불에 태워진 인골과 대량의 목탄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시신을 묘광 안에 놓고 화장했던 것으로 추정됨. 燒骨은 묘광 내 2, 3곳에 무더기로 안치되었으며, 토기는 묘광 양단에 나누어 부장한 점으로 미루어 一代 혹은 한 가정의 合葬 즉 동일가족 數代의 합장묘 유적일 것임. 따라서 신분 혹은 항렬이 비교적 높은 사람이 주묘단의 중심에 매장되고, 다수 속·부묘단은 항렬의 대소 또는 昭穆제도에 따라 附葬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2001년 발굴한 7기 고분의 부장품은 총 283점으로 작은 장식품을 제외하면 평균 각 묘광에 3점이 부장되었으므로 厚葬은 아님. 전체 부장품 중 토기가 총73점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나 완형보다는 다수가 파편으로 출토되어 토기의 毁器習俗으로 짐작됨. 출토된 그릇은 모두 민무늬의 夾沙褐陶로 모양이 간단하고 종류가 단조롭고 제작 기술이 거칠어 원시성을 반영하며, 그 외 野猪牙飾, 綠松石管 등의 장식품은 모두 압록강 유역과 두만강 유역의 원시문화에서 일찍이 보여주는 전형적 기물임. 간구자 고분군의 무덤들은 하나의 기단 위에 여러 기의 고분이 배열되어 있는데, 특히 7호분은 1기의 원형석광적석묘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장방형의 작은 돌무덤이 방사상으로 배치되어 무덤 사이의 主次관계를 시사함. 즉 중심무덤의 피장자는 주위의 무덤에 비해 사회적 지위가 높은 편이나 반대의 무덤은 중심무덤에 예속된 상태로 추정됨. 반면에 1호분 및 4호분과 같은 단일한 원형석광무덤의 무덤배열 상태에서는 주종 관계가 전혀 보이지 않음. 한 墓區내의 여러 개 무덤은 그 크기와 모양이 같으며 또한 무덤 사이마다 돌로 서로 연결되어 한 무덤구역내의 피장자들 관계가 평등하였다는 것을 시사하며, 이는 혈연관계를 이루고 있는 가족 성원의 무덤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임. 부장품은 장식품이 많고 생산 공구 및 기타 그릇 류가 비교적 적은데, 이는 길림성 중부지구의 九台關馬山, 公主嶺猴石, 樺甸橫道河子 및 東豊, 遼源 일대 많은 大蓋石墓의 부장 특징과 서로 일치하며, 동북지구 남부에서는 戰國晩期~漢代 보편적으로 유행함. 상한연대는 2기 고분에서 方孔圓錢- 半兩錢과 一化으로 추정할 수 있음. 半兩錢은 秦末半兩 혹은 漢初의 八銖半兩이며, 一化는 ‘一刀’로 해석되며, 周秦 또는 秦初 시기의 화폐임. 赤峰 新窝堡와 鐵嶺 邱家台지역의 퇴장유적에서 이들 화폐가 燕·趙의 刀幣 및 반량전과 같이 출토되어 燕國晩期의 화폐로 확정되었으므로 묘지연대의 상한은 戰國末期, 비교적 이른 것은 戰國 中期에 해당됨. 하한연대는 AM1에서 출토된 鐵钁과 AM3·AM4 주묘단에서 채집된 鐵刀로 추정할 수 있는데, 钁은 漢代유행하는 것과 형태가 유사하며, 철도는 直柄環首로 일찍이 集安의 板岔嶺에서 동일한 것이 발굴된 바 있는데, 고구려 적석묘에서 대량 보이는 環首刀보다 조금 이름. 집안 판차령에서 “一化”圓錢이 “半兩”, “五銖”, “大泉五十”, 등의 한대화폐와 함께 출토되었고, 그 유통 시간은 전국말기~東漢임. 그러나 간구자묘지에서는 “오수” 및 동한화폐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고분의 하한은 대체로 동한이전의 서한시기로 비정됨. 간구자묘지의 연대가 집안, 환인 일대의 고구려 적석총보다 앞서므로, 고구려적석총의 가장 이른 형식인 無階段 圓丘上積石墓와 관련이 있을 것임. 고구려 초기의 적석묘의 발전과정을 보면, 무덤은 석광이 따로 없는 간단한 시설로부터 계단식 기단으로 이루어진 ‘框室(앞에서 박윤무의 1995년 글에 따라 ‘묘실’이라 정리하던 개념인데, 이 글에서 이 부분을 ‘框室’로 표현하고 있어 그대로 따랐음)’ 무덤으로 발전하고, ‘광실’은 장방형으로부터 정방형 형태로 변화·발전함. 묘광 위치에서도 위로부터 아래로 점차 내려옴. 이를 종합해 볼 때 간구자의 원형석광적석묘는 고구려 초기 적석총과 유사함. 첫째, 주검칸이 따로 없이 무덤의 기단 윗면을 자갈과 모래로 수평하게 마련하고 그 위에 주검과 부장품을 놓고 막돌로 덮어 정상부를 마무리 한 것은 이것은 환인 201호 및 19호분과 매우 흡사함. 둘째, 기단의 단수와 묘광 형태에서 차이가 있으나 한 무덤구역에 여러 기의 무덤을 연이어 마련한 점은 환인 23-33호분과 일치함. 셋째, 화장하여 묻는 습관이 환인 23호 및 20호분이나 15호분에서 확인되며, 집안 일대의 일부 적석총은 묘광벽이 불에 녹아 응결된 흔적으로 화장하였을 것으로 짐작됨. 따라서 간구자 무덤은 시기적으로 환인 적석총을 위주로 한 고구려 초기 무덤보다는 이르며 대체로 환인 적석총보다 선행된 고구려 早期의 무덤형식으로 고구려족계의 원시적 매장 특징이 짙게 반영됨. 또한 간구자 고분군은 여대지구 청동기 시대 무덤 및 청동단검고분의 특징을 내포하고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와 노철산 고분은 모두 여러 기의 무덤을 서로 가까이하여 ‘벌집형(蜂巢狀)’이며,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평면 형태는 원형으로 된 것도 있음. 이것은 간구자 1호분(M1)·2호분(M2)의 특징과 유사함. 강상묘는 하나의 무덤구역에 1기의 중심무덤을 마련하고 그 둘레를 돌면서 여러 기의 무덤을 방사선 형태로 마련하였는데, 이것은 간구자 7호분(M7)과 매우 유사함. 그리고 강상·누상묘 등 적지 않은 청동단검묘는 모두 화장한 무덤이라는 사실에서도 간구자 고분과 일치함.(『조선고고학개요』에서는 ‘노철산 및 장군산 고분→강상·누상묘→고구려 적석묘’라는 계승 발전관계를 설정하고 있고, 왕성생(1981, 「요하 유역 및 부근지역의 短鋌曲刃劍 연구」『요녕성고고박물관학회설립대회』회간)은 강상묘를 비롯한 요동문화유형의 무덤 형식과 매장습속이 환인 고구려 적석무덤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고구려 적석묘는 강상묘의 계승과 발전’이라고 보고 있음) 또한 여대지구 강상과 루상, 우가촌 타두 적석묘 등과 같은 집단묘로서, 家族合葬墓라는 점에서 공통됨. 반면 강상·누상 적석묘는 평지에 축조되었으며, 묘단은 없고, 묘광이 장방 혹은 방사상으로 분포하며, 중심 묘광의 4벽은 판석을 세워 만들었고, 우가촌 타두 적석묘 역시 묘광이 타원형 또는 부정형으로, 보통 평행을 이루는 가로배열로 분포하며 묘단을 만들지 않았음. 따라서 강상·루상과 우가촌 타두는 간구자 적석묘와는 축조 방법에서의 차이가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연대는 3230±90년B.P. 이고, 강상·누상묘는 기원전 1세기 전반기에 해당된 고조선 시기이며, 환인 지역 적석묘는 제15호분에서 環首式 철칼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東漢 시대로, 늦어도 漢·魏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음. 간구자 고분군의 상대적 축조연대는 대체로 전국시기로부터 서한 말기에 해당되므로, 간구자 고분군은 강상·누상묘에서 환인 적석묘로 발전해 나아가는 과정의 과도기 단계로서 고구려 선인들의 토착문화로 추정됨. 연접 방식은 3형식으로 나뉘는데, 제1형식은 속·부묘단이 주묘단을 둘러싸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지 않으며(AM3, AM4, BM5), 제2형식은 속·부묘단의 밖에 다시 제2속묘단이 외접하고, 제1형식이 주묘단만을 둘러싸지만, 제2형식은 연이어 속묘단이 함께 둘러싸고 하나의 부묘단이 기점이 되어 2개의 방향으로 나누어 펼쳐짐(BM2, BM4). 3형식 : 먼저 주묘단을 두르고 밖으로 다시 속묘단을 쌓고, 빈곳에 1, 2개의 부묘단을 세운 후 연속으로 서남방향에 속묘단을 설치한 후, 양쪽에 연속하여 부묘단을 대칭으로 축조함(AM1, AM2). 제1형식이 제2형식의 미완성형식이라면 비교적 이른 고분은 모두 먼저 주묘단을 쌓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였는데, 부·속묘단이 연접하는 방향은 서남쪽으로 접속하지만, 일정하지 않다가 비교적 늦은 고분에서 서남쪽으로 확장방향이 정형성을 띰. 속묘단은 중심선에 의해 대다수 서남방향으로 연접하며 부묘단은 양쪽으로 分列하는데, 대다수는 비교적 대칭적임. 연접 방식에 따른 배열법의 변천순서는 제1형식→제2형식→제3형식 순으로 변하고, 이런 양상은 고분군의 분포 양상과도 합치됨. A와 B구역을 보면, 산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가 이른데 비해, 강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는 비교적 늦음. 上→下의 배열과 발전과정은 환인과 집안 일대의 고구려적석총의 배열과 일치함.자연환경 AM3호분은 AM2의 서북에 위치함. 간구자촌은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鎭 서쪽 0.5㎞ 지점에 위치하고, 고분은 干溝子村의 東·西干溝河 양안의 하곡 충적대지상에 분포함. 동쪽으로 長白縣城과 45㎞ 떨어져 있고, 동·서·북 3면이 高山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름. 압록강과 고분군 사이의 馬架子山을 기준으로 동쪽의 동간구하, 서쪽의 서간구하가 흐르는데, 서간구하는 동북에서 서남으로 흘러 고분군를 거쳐 압록강으로 흘러 감. 장백과 임강을 잇는 長臨도로가 동남에서 서북으로 뻗어 고분군을 양분하고, 고분군의 서·남 양쪽 산위에는 청동기시대 유적 분포함. 간구자 고분은 여러 차례 조사가 있었으나 1986년과 2001년 조사로 대별되는데, 특히 2001년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계기로 1986년 조사때보다 묘역이 크게 확대되었음. 앞서 고분 분포현황에서 언급하였듯이 2001년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묘역은 크게 A, B, C, D의 4구역으로 이루어졌는데 비해, 1986년 보고서에는 2001년 보고서의 A와 B 지역 일대를 파악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으므로 2001년 고분의 편호는 1986년 조사를 고려하지 않고 새로 편호하고 있기 때문에 양자의 개별 고분들을 직접 연결시켜 파악하기는 어려운 상황임. 때문에 개별고분의 상황을 두 시기로 나누어 정리하였음.유물정보 심발형토기 1점, 발 3점, 옥구슬 2점, 옥드리개 2점, 고리 2점, 철제칼 2점, 흰색대롱 다수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長白朝鮮族自治縣文物志』, 1986 · 朴潤武, 「長白縣干溝子墓地調査」『博物館研究』 1990-3, 1990 ·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 編, 『吉林省志』 45(民族志), 吉林人民出版社, 1991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朴潤武, 「압록강 유역 干溝子 적성무덤에 대한 조사연구」『中國境內 高句麗遺蹟 硏究』, 예하출판, 1995 · 王洪峰·孫仁傑·遲勇, 「吉林長白縣干溝子墓地發掘簡報」『考古』 2003-8, 2003 · 孫仁杰·遲勇·張殿甲, 「鴨綠江上流右岸考古調査」『東北史地』 2004-5, 2004

      • 리스트여닫기 간구자 AM4호분(干溝子 AM4號墳) 출토지 길림성 장백현 십사도구진 간구자촌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鎮 干溝子村)연대 상한: 戰國中期~末期, 하한: 西漢 상한 - B.C 4세기~B.C 3세기초, 하한 - 기원전후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2001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장백현문물보호관리소, 집안시박물관(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長白縣文物保護管理所, 集安市博物館)5월-7월 조사에서 1986년 편호와 달리 새로이 편호하는데 1986년 편호된 고분가운데 M15~M19의 5기 가운데 1기만 남아 있고, 1986년도에 편호되지 않은 고분 중 고분 형식을 판별할 수 있는 고분 고려하여 새로이 편호하였으며, 서간구하 북안의 A구 4기와 그 남안의 B구 3기를 발굴함.구조특징 외형은 圓丘狀으로 주묘단 1기, 부묘단 4기가 조성되어 있고, 부묘단은 접속순서가 AM3와 동일함. 주묘단(ZT)은 타원형으로 남북 길이 8m, 동서 너비 7.5m이고, 북쪽 둘레돌이 기울어지고 지탱석이 쓰러져 있을 뿐, 그 외는 보존이 양호함. 서북에 가까운 가장자리의 봉석 위에서 철제 칼(鐵刀) 1건(Ⅱ식)을 채집했음. 묘단은 기초부 위로 11~13층을 쌓았고, 높이가 1.25m이며 정상부는 비교적 가지런하며, 주변에는 크기와 서로 간이 거리가 다른 장대석을 한 줄 세워 둠. 묘광 3개(ZK1~ZK3)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평행하게 배열되어 축조되어 있는데, 서로간 거리는 1.2m임. 묘광(ZK1)은 근장방형으로 장축 동서방향이고 길이 3.5m, 너비 1.1m, 깊이 0.15m임. 묘광벽은 2~4층의 석괴로 축조했고, 바닥에 작은 냇돌 두께 0.08m로 깔았으며, 인골잔편, 대롱(料管) 10건, 토기편 1건이 출토됨. 묘광(ZK2)는 불규칙 타원형으로 길이 2.6m, 너비 0.6m, 깊이 0.12m이고, 바닥에 깔은 작은 강돌의 두께는 0.05m이며, 燒骨, 토기편 1건이 출토됨. 묘광(ZK3)은 남쪽에 위치하고, 말각장방형으로 길이 2.2m, 너비 0.5m, 깊이 0.1m이고, 바닥에 깔은 작은 강돌의 두께 0.07m이며, 燒骨, 백색 대롱(白管) 10건, 토기 1건이 출토됨. 부묘단(FT1~FT4)은 총 4기임. FT1는 서쪽에 위치하고, 반원형으로 직경 6.2m, 높이 0.6m임, FK1은 반원형으로 길이 1.7m, 너비 1m, 깊이 0.08m이고, 바닥에 깔린 강돌 두께는 0.03m이며, 소량의 燒骨과 사질갈색토기(夾砂褐陶器) 1건이 출토됨. FT2는 반원형으로 직경 6m, 높이 0.7m이고, 東半部 둘레돌은 비교적 양호함. FK2는 말각장방형으로 길이 2.3m, 너비 1m이고, 바닥 깔린 자갈층 두께는 0.06m임. 묘광 벽은 괴석 한매만 남아 있으며, 묘광 내에서 燒骨 및 흰색 대롱 6건이 출토됨. FT3은 반원형으로 직경 6.7m이고, 둘레 돌의 붕괴가 심함. FK3은 타원형으로 길이 2.5m, 너비 0.6m, 깊이 0.15m이고, 바닥에 깔은 강돌 두께는 0.08m임. 묘광벽은 3층으로 판상석으로 쌓았고, 燒骨덩이가 0.5m 간격으로 잔존하며, 남쪽에 치우친 燒骨 더미 부근에서 남색 대롱(藍管) 2건이 함께 출토됨. FT4는 타원형으로 길이6m, 너비 2.5m, 높이 0.6m임. 묘광(FK4)은 타원형으로 길이 2.7m, 너비 0.8m, 깊이 0.1m이고, 바닥 강돌층의 두께는 0.1m임. 묘광벽은 3층으로 판상석으로 쌓았고, 비교적 많은 燒骨, 흰색 대롱 7건, 토기편 3건이 출토됨.역사적 의미 축조방식은 지면에 커다란 돌을 사용하여 일정 범위의 묘역을 조성한 후 냇돌과 할석을 깔아 평면하게 지면을 고르고 무덤의 기저부를 만든 후, 그 위에 단을 쌓아 몇 기의 무덤이 연접되도록 함. 매장방식은 무덤 밖에서 화장한 후 燒骨을 매장한 2차장하고, 대다수 묘광 내부에 불에 타거나 그을린 흔적이 없음. 불에 탄 인골편은 작은 조각으로 가장 큰 것이 길이 5㎝가 안되며, 대략 1/3의 소골은 회백색이며 나머지는 赭色(자색)과 흑색임. 다만 BM2ZK1에서 목탄편이 출토되었고, 1986년 조사된 간구자 1호분(M1)의 석광 안에는 주검칸이나 葬具를 따로 마련하지 않았고 불에 태워진 인골과 대량의 목탄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시신을 묘광 안에 놓고 화장했던 것으로 추정됨. 燒骨은 묘광 내 2, 3곳에 무더기로 안치되었으며, 토기는 묘광 양단에 나누어 부장한 점으로 미루어 一代 혹은 한 가정의 合葬 즉 동일가족 數代의 합장묘 유적일 것임. 따라서 신분 혹은 항렬이 비교적 높은 사람이 주묘단의 중심에 매장되고, 다수 속·부묘단은 항렬의 대소 또는 昭穆제도에 따라 附葬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2001년 발굴한 7기 고분의 부장품은 총 283점으로 작은 장식품을 제외하면 평균 각 묘광에 3점이 부장되었으므로 厚葬은 아님. 전체 부장품 중 토기가 총73점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나 완형보다는 다수가 파편으로 출토되어 토기의 毁器習俗으로 짐작됨. 출토된 그릇은 모두 민무늬의 夾沙褐陶로 모양이 간단하고 종류가 단조롭고 제작 기술이 거칠어 원시성을 반영하며, 그 외 野猪牙飾, 綠松石管 등의 장식품은 모두 압록강 유역과 두만강 유역의 원시문화에서 일찍이 보여주는 전형적 기물임. 간구자 고분군의 무덤들은 하나의 기단 위에 여러 기의 고분이 배열되어 있는데, 특히 7호분은 1기의 원형석광적석묘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장방형의 작은 돌무덤이 방사상으로 배치되어 무덤 사이의 主次관계를 시사함. 즉 중심무덤의 피장자는 주위의 무덤에 비해 사회적 지위가 높은 편이나 반대의 무덤은 중심무덤에 예속된 상태로 추정됨. 반면에 1호분 및 4호분과 같은 단일한 원형석광무덤의 무덤배열 상태에서는 주종 관계가 전혀 보이지 않음. 한 墓區내의 여러 개 무덤은 그 크기와 모양이 같으며 또한 무덤 사이마다 돌로 서로 연결되어 한 무덤구역내의 피장자들 관계가 평등하였다는 것을 시사하며, 이는 혈연관계를 이루고 있는 가족 성원의 무덤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임. 부장품은 장식품이 많고 생산 공구 및 기타 그릇 류가 비교적 적은데, 이는 길림성 중부지구의 九台關馬山, 公主嶺猴石, 樺甸橫道河子 및 東豊, 遼源 일대 많은 大蓋石墓의 부장 특징과 서로 일치하며, 동북지구 남부에서는 戰國晩期~漢代 보편적으로 유행함. 상한연대는 2기 고분에서 方孔圓錢- 半兩錢과 一化으로 추정할 수 있음. 半兩錢은 秦末半兩 혹은 漢初의 八銖半兩이며, 一化는 ‘一刀’로 해석되며, 周秦 또는 秦初 시기의 화폐임. 赤峰 新窝堡와 鐵嶺 邱家台지역의 퇴장유적에서 이들 화폐가 燕·趙의 刀幣 및 반량전과 같이 출토되어 燕國晩期의 화폐로 확정되었으므로 묘지연대의 상한은 戰國末期, 비교적 이른 것은 戰國 中期에 해당됨. 하한연대는 AM1에서 출토된 鐵钁과 AM3·AM4 주묘단에서 채집된 鐵刀로 추정할 수 있는데, 钁은 漢代유행하는 것과 형태가 유사하며, 철도는 直柄環首로 일찍이 集安의 板岔嶺에서 동일한 것이 발굴된 바 있는데, 고구려 적석묘에서 대량 보이는 環首刀보다 조금 이름. 집안 판차령에서 “一化”圓錢이 “半兩”, “五銖”, “大泉五十”, 등의 한대화폐와 함께 출토되었고, 그 유통 시간은 전국말기~東漢임. 그러나 간구자묘지에서는 “오수” 및 동한화폐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고분의 하한은 대체로 동한이전의 서한시기로 비정됨. 간구자묘지의 연대가 집안, 환인 일대의 고구려 적석총보다 앞서므로, 고구려적석총의 가장 이른 형식인 無階段 圓丘上積石墓와 관련이 있을 것임. 고구려 초기의 적석묘의 발전과정을 보면, 무덤은 석광이 따로 없는 간단한 시설로부터 계단식 기단으로 이루어진 ‘框室(앞에서 박윤무의 1995년 글에 따라 ‘묘실’이라 정리하던 개념인데, 이 글에서 이 부분을 ‘框室’로 표현하고 있어 그대로 따랐음)’ 무덤으로 발전하고, ‘광실’은 장방형으로부터 정방형 형태로 변화·발전함. 묘광 위치에서도 위로부터 아래로 점차 내려옴. 이를 종합해 볼 때 간구자의 원형석광적석묘는 고구려 초기 적석총과 유사함. 첫째, 주검칸이 따로 없이 무덤의 기단 윗면을 자갈과 모래로 수평하게 마련하고 그 위에 주검과 부장품을 놓고 막돌로 덮어 정상부를 마무리 한 것은 이것은 환인 201호 및 19호분과 매우 흡사함. 둘째, 기단의 단수와 묘광 형태에서 차이가 있으나 한 무덤구역에 여러 기의 무덤을 연이어 마련한 점은 환인 23-33호분과 일치함. 셋째, 화장하여 묻는 습관이 환인 23호 및 20호분이나 15호분에서 확인되며, 집안 일대의 일부 적석총은 묘광벽이 불에 녹아 응결된 흔적으로 화장하였을 것으로 짐작됨. 따라서 간구자 무덤은 시기적으로 환인 적석총을 위주로 한 고구려 초기 무덤보다는 이르며 대체로 환인 적석총보다 선행된 고구려 早期의 무덤형식으로 고구려족계의 원시적 매장 특징이 짙게 반영됨. 또한 간구자 고분군은 여대지구 청동기 시대 무덤 및 청동단검고분의 특징을 내포하고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와 노철산 고분은 모두 여러 기의 무덤을 서로 가까이하여 ‘벌집형(蜂巢狀)’이며,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평면 형태는 원형으로 된 것도 있음. 이것은 간구자 1호분(M1)·2호분(M2)의 특징과 유사함. 강상묘는 하나의 무덤구역에 1기의 중심무덤을 마련하고 그 둘레를 돌면서 여러 기의 무덤을 방사선 형태로 마련하였는데, 이것은 간구자 7호분(M7)과 매우 유사함. 그리고 강상·누상묘 등 적지 않은 청동단검묘는 모두 화장한 무덤이라는 사실에서도 간구자 고분과 일치함.(『조선고고학개요』에서는 ‘노철산 및 장군산 고분→강상·누상묘→고구려 적석묘’라는 계승 발전관계를 설정하고 있고, 왕성생(1981, 「요하 유역 및 부근지역의 短鋌曲刃劍 연구」『요녕성고고박물관학회설립대회』회간)은 강상묘를 비롯한 요동문화유형의 무덤 형식과 매장습속이 환인 고구려 적석무덤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고구려 적석묘는 강상묘의 계승과 발전’이라고 보고 있음) 또한 여대지구 강상과 루상, 우가촌 타두 적석묘 등과 같은 집단묘로서, 家族合葬墓라는 점에서 공통됨. 반면 강상·누상 적석묘는 평지에 축조되었으며, 묘단은 없고, 묘광이 장방 혹은 방사상으로 분포하며, 중심 묘광의 4벽은 판석을 세워 만들었고, 우가촌 타두 적석묘 역시 묘광이 타원형 또는 부정형으로, 보통 평행을 이루는 가로배열로 분포하며 묘단을 만들지 않았음. 따라서 강상·루상과 우가촌 타두는 간구자 적석묘와는 축조 방법에서의 차이가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연대는 3230±90년B.P. 이고, 강상·누상묘는 기원전 1세기 전반기에 해당된 고조선 시기이며, 환인 지역 적석묘는 제15호분에서 環首式 철칼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東漢 시대로, 늦어도 漢·魏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음. 간구자 고분군의 상대적 축조연대는 대체로 전국시기로부터 서한 말기에 해당되므로, 간구자 고분군은 강상·누상묘에서 환인 적석묘로 발전해 나아가는 과정의 과도기 단계로서 고구려 선인들의 토착문화로 추정됨. 연접 방식은 3형식으로 나뉘는데, 제1형식은 속·부묘단이 주묘단을 둘러싸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지 않으며(AM3, AM4, BM5), 제2형식은 속·부묘단의 밖에 다시 제2속묘단이 외접하고, 제1형식이 주묘단만을 둘러싸지만, 제2형식은 연이어 속묘단이 함께 둘러싸고 하나의 부묘단이 기점이 되어 2개의 방향으로 나누어 펼쳐짐(BM2, BM4). 3형식 : 먼저 주묘단을 두르고 밖으로 다시 속묘단을 쌓고, 빈곳에 1, 2개의 부묘단을 세운 후 연속으로 서남방향에 속묘단을 설치한 후, 양쪽에 연속하여 부묘단을 대칭으로 축조함(AM1, AM2). 제1형식이 제2형식의 미완성형식이라면 비교적 이른 고분은 모두 먼저 주묘단을 쌓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였는데, 부·속묘단이 연접하는 방향은 서남쪽으로 접속하지만, 일정하지 않다가 비교적 늦은 고분에서 서남쪽으로 확장방향이 정형성을 띰. 속묘단은 중심선에 의해 대다수 서남방향으로 연접하며 부묘단은 양쪽으로 分列하는데, 대다수는 비교적 대칭적임. 연접 방식에 따른 배열법의 변천순서는 제1형식→제2형식→제3형식 순으로 변하고, 이런 양상은 고분군의 분포 양상과도 합치됨. A와 B구역을 보면, 산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가 이른데 비해, 강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는 비교적 늦음. 上→下의 배열과 발전과정은 환인과 집안 일대의 고구려적석총의 배열과 일치함.자연환경 AM4호분은 AM3으로부터 동쪽 120m 지점에 위치하고, 북으로는 미발굴된 AM5가 있음. 간구자촌은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鎭 서쪽 0.5㎞ 지점에 위치하고, 고분은 干溝子村의 東·西干溝河 양안의 하곡 충적대지상에 분포함. 동쪽으로 長白縣城과 45㎞ 떨어져 있고, 동·서·북 3면이 高山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름. 압록강과 고분군 사이의 馬架子山을 기준으로 동쪽의 동간구하, 서쪽의 서간구하가 흐르는데, 서간구하는 동북에서 서남으로 흘러 고분군를 거쳐 압록강으로 흘러 감. 장백과 임강을 잇는 長臨도로가 동남에서 서북으로 뻗어 고분군을 양분하고, 고분군의 서·남 양쪽 산위에는 청동기시대 유적 분포함. 간구자 고분은 여러 차례 조사가 있었으나 1986년과 2001년 조사로 대별되는데, 특히 2001년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계기로 1986년 조사때보다 묘역이 크게 확대되었음. 앞서 고분 분포현황에서 언급하였듯이 2001년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묘역은 크게 A, B, C, D의 4구역으로 이루어졌는데 비해, 1986년 보고서에는 2001년 보고서의 A와 B 지역 일대를 파악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으므로 2001년 고분의 편호는 1986년 조사를 고려하지 않고 새로 편호하고 있기 때문에 양자의 개별 고분들을 직접 연결시켜 파악하기는 어려운 상황임. 때문에 개별고분의 상황을 두 시기로 나누어 정리하였음.유물정보 철제칼 1점, 흰색대롱, 남색대롱,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長白朝鮮族自治縣文物志』, 1986 · 朴潤武, 「長白縣干溝子墓地調査」『博物館研究』 1990-3, 1990 ·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 編, 『吉林省志』 45(民族志), 吉林人民出版社, 1991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朴潤武, 「압록강 유역 干溝子 적성무덤에 대한 조사연구」『中國境內 高句麗遺蹟 硏究』, 예하출판, 1995 · 王洪峰·孫仁傑·遲勇, 「吉林長白縣干溝子墓地發掘簡報」『考古』 2003-8, 2003 · 孫仁杰·遲勇·張殿甲, 「鴨綠江上流右岸考古調査」『東北史地』 2004-5, 2004

      • 리스트여닫기 간구자 BM2호분(干溝子 BM2號墳) 출토지 길림성 장백현 십사도구진 간구자촌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鎮 干溝子村)연대 상한: 戰國中期~末期, 하한: 西漢 상한 - B.C 4세기~B.C 3세기초, 하한 - 기원전후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2001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장백현문물보호관리소, 집안시박물관(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長白縣文物保護管理所, 集安市博物館)5월-7월 조사에서 1986년 편호와 달리 새로이 편호하는데 1986년 편호된 고분가운데 M15~M19의 5기 가운데 1기만 남아 있고, 1986년도에 편호되지 않은 고분 중 고분 형식을 판별할 수 있는 고분 고려하여 새로이 편호하였으며, 서간구하 북안의 A구 4기와 그 남안의 B구 3기를 발굴함.구조특징 타원형으로 동북에서 서남 방향이고, 주묘단 1기, 속묘단 5기, 부묘단 11기로 조성되어 있으며, 대부분 묘단과 묘광 상태가 양호함. 주묘단(ZT)은 타원형으로 길이 7m, 너비 6.4m, 적석의 높이 1.6m이고, 기저부 둘레 돌의 축조상태는 비교적 양호함. 북반부에 14개 지탱석 있는데, 지탱석 간의 간격은 0.6~1m이고, 지탱석의 다수는 多稜의 장대석임. 3개의 묘광(ZK1~ZK3)은 말각장방형으로 장축 방향은 135도임. 묘광(ZK1)은 길이 2,5m, 너비 0.75, 깊이 0.2m이고, 바닥에는 작은 강돌이 깔려 있음. 비교적 커다란 강돌로 묘광벽 쌓았고, 비교적 많은 燒骨, 심발형토기 1건(淺腹罐 AⅠ식), 대롱장식(管飾) 34건, 목탄 몇 덩어리가 출토됨. 묘광(ZK2)은 길이 2.3m, 너비 0.85m, 깊이 0.15m이고 바닥에는 강돌이 깔려 있음. 묘광 벽은 비교적 작은 돌로 축조되었으며, 燒骨 두 무더기, 발 2건(淺腹罐 BaⅠ식, Ca식), 흰색 대롱(白管) 6건이 출토됨. 묘광(ZK3)은 길이 2.4m, 너비 0.7m, 깊이 0.25m이고, 바닥에 강돌을 깔음. 작은 냇돌로 묘광 벽을 축조하였고, 벽의 상부 돌은 비교적 크며, 燒骨, 토기와 옥구슬(玉珠) 각 1건이 출토됨. 속묘단(XT1~XT5)은 모두 5기로 XT1과 XT2는 주묘단의 양쪽에 접하고 있고, XT3~XT5는 기타 부묘단에서 바깥으로 펼쳐져 있음. XT1은 타원형으로 직경 4.2m, 높이 0.9m이고, 가장자리는 가지런함. 묘광(XK1)은 말각장방형으로 길이 2.2m, 너비 0.6m, 깊이 0.15m이고, 강돌을 깔은 바닥에는 燒骨이 양끝에 산재하고 있는데, 각각 심발형토기 1건씩(深腹罐 AⅠ식 및 BⅠ식)이 출토됨. XT2는 반원형으로 직경 5.2m, 높이 1.2m이고, 기단 둘레 돌은 가지런함. 묘광(XK2)은 타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길이 2.5m, 너비 0.8m, 깊이 0.1m이고, 묘광 내 양끝에는 燒骨부스러기, 도관 각각 1건씩이 부장됨. XT3은 반원형으로 직경 4m임. 묘광(XK3)는 방향은 주묘단 각 묘광과 동일하고, 말각장방형으로 길이 1.8m, 너비 0.6m, 깊이 0.12m이며, 대량의 燒骨이 있으나 부장품은 발견되지 않음. XT4는 반원형으로 직경 5.2m, 높이 1.2m이고, 바깥쪽 둘레 돌은 비교적 가지런함. 묘광(XK4)은 장방형으로 길이 2.6m, 너비 0.8m, 깊이 0.2m이고, 바닥에 강돌을 깔음. 대량의 燒骨이 있으나 부장품은 없음. XT5은 반원형으로 직경 5.2m, 높이 1.2m이고, 무덤 기저부 둘레 돌은 가지런하며, 동쪽 지탱석은 비교적 밀집함. 묘광(XK5)은 말각장방형으로 길이 2m, 너비 0.7m, 깊이 0.2m이고, 바닥에는 강돌이 깔려 있이며, 묘광에는 燒骨이 부장되었으나 부장품은 없음. 부묘단(FT1~FT11)인 FT1은 반원형으로 직경 4m, 높이 1.2m임. 묘광(FK1)은 말각장방형으로 길이 2.05m, 너비 0.6m, 깊이 0.15m이고, 비교적 큰 강돌로 2층 쌓음. 바닥에는 작은 자갈을 깔았고, 燒骨, 심발형토기 1건(深腹罐 BⅠ식)이 출토됨. FT2은 직경 5.5m, 높이 1m이고, 서쪽 부분은 대부분 기울어져 붕괴됨. 묘광(FK2)은 길이 2.3m, 너비 0.7~0.9m, 깊이 0.12m이고, 바닥에는 작은 강돌을 깔았으며, 인골 2 무더기, 부장품 발 2건(淺腹罐 AⅡ식, BbⅠ식)이 출토됨. FT3은 FT1과 XT1의 사이에 접해 있는데, 타원형으로 길이 약 6.5m, 너비 약 3m이고, 무덤 기저부 둘레돌의 훼손이 진행되고 있음. 묘광(FK3)은 묘단의 중앙에 위치하고, 장방형으로 길이 2.5m, 너비 0.5m, 깊이 0.1m이고, 바닥에는 작은 강돌이 깔려 있으며, 대량의 燒骨이 있으나 부장품은 아직 미발견됨. FT4은 반원형으로 무덤 기저 둘레돌 많이 기울어져 있음. 묘광(FK4)은 중앙부에 위치하고, 타원형 평면으로 길이 1.7m, 너비 1m, 깊이 0.1m이고, 인골, 심발형토기 1건(深腹罐 BⅢ식)이 출토됨. FT5는 반원형으로 직경 5.5m, 높이 1.2m이고, 무덤 기저 둘레돌의 동단을 제외하면 대부분 보존상태는 비교적 양호함. 묘광(FK5)는 장방형으로 길이 2.2m, 너비 0.6m, 깊이 0.14m이고 네벽은 커다란 돌로 축조하였으며, 바닥에 냇돌 깔음. 대량의 燒骨, 심발형토기 1건(深腹罐 BⅣ식)이 출토됨. FT6은 계단형(梯形)으로 무덤 둘레 길이 3m, 둘레 돌 높이는 0.75m임. 묘광(FK6)은 타원형으로 길이 2.3m, 너비 1m, 깊이 0.45m이고 바닥에는 작은 강돌을 쌓았으며, 燒骨, 동제 고리(銅環) 1건(環 C식), 발 1건(淺腹罐 Cb식)이 출토됨. FT7은 扇形으로 반경 약 2.3m이고, 무덤 기저 둘레 돌은 일부 붕괴되었으며, 잔존 높이 약 1m임. 묘광(FK7)은 부정형으로 길이 2.5m, 너비 0.6m이고, 인골, 흰색 대롱(白管) 1건, 심발형토기 1건(深腹罐 AⅡ식)이 출토됨. FT8은 반원형으로 직경 6.5m이고, 무덤 기저 둘레 돌은 대부분 붕괴됨. 묘광(FK8)은 말각장방형으로 길이 2.4m, 너비 0.7m, 깊이 0.12m이고, 바닥에는 작은 강돌이 깔려 있음. 燒骨, 심발형토기 1건(深腹罐 AⅢ식), 옥드리개(玉墜) 1쌍이 출토됨. FT9와 FT10은 고분 중심축선상에 있는 XT5를 기준으로 대칭되고, 扇形으로 반경 약 2.5m이며, 무덤 기저부 둘레 돌은 붕괴되었음. 묘광은 모두 말각장방형으로 묘단중앙부에 위치하는데, 묘광(FK9)는 길이 2m, 너비 0.65m임. 묘광(FK10)은 길이 2.3m, 너비 0.75m이고, 燒骨은 모두 묘광 중앙부에 있고, 부장품은 발견되지 않음. FT11은 파괴가 심각하고, 묘광은 이미 없어졌으며, 반경 약 2.8m의 扇形 묘단의 기초부만 남아 있음. BM2 동쪽과 남쪽 양단에서 고분의 충적토를 발굴 조사 하던 중에 사질토기(夾砂陶器)편이 발견됨.역사적 의미 축조방식은 지면에 커다란 돌을 사용하여 일정 범위의 묘역을 조성한 후 냇돌과 할석을 깔아 평면하게 지면을 고르고 무덤의 기저부를 만든 후, 그 위에 단을 쌓아 몇 기의 무덤이 연접되도록 함. 매장방식은 무덤 밖에서 화장한 후 燒骨을 매장한 2차장하고, 대다수 묘광 내부에 불에 타거나 그을린 흔적이 없음. 불에 탄 인골편은 작은 조각으로 가장 큰 것이 길이 5㎝가 안되며, 대략 1/3의 소골은 회백색이며 나머지는 赭色(자색)과 흑색임. 다만 BM2ZK1에서 목탄편이 출토되었고, 1986년 조사된 간구자 1호분(M1)의 석광 안에는 주검칸이나 葬具를 따로 마련하지 않았고 불에 태워진 인골과 대량의 목탄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시신을 묘광 안에 놓고 화장했던 것으로 추정됨. 燒骨은 묘광 내 2, 3곳에 무더기로 안치되었으며, 토기는 묘광 양단에 나누어 부장한 점으로 미루어 一代 혹은 한 가정의 合葬 즉 동일가족 數代의 합장묘 유적일 것임. 따라서 신분 혹은 항렬이 비교적 높은 사람이 주묘단의 중심에 매장되고, 다수 속·부묘단은 항렬의 대소 또는 昭穆제도에 따라 附葬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2001년 발굴한 7기 고분의 부장품은 총 283점으로 작은 장식품을 제외하면 평균 각 묘광에 3점이 부장되었으므로 厚葬은 아님. 전체 부장품 중 토기가 총73점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나 완형보다는 다수가 파편으로 출토되어 토기의 毁器習俗으로 짐작됨. 출토된 그릇은 모두 민무늬의 夾沙褐陶로 모양이 간단하고 종류가 단조롭고 제작 기술이 거칠어 원시성을 반영하며, 그 외 野猪牙飾, 綠松石管 등의 장식품은 모두 압록강 유역과 두만강 유역의 원시문화에서 일찍이 보여주는 전형적 기물임. 간구자 고분군의 무덤들은 하나의 기단 위에 여러 기의 고분이 배열되어 있는데, 특히 7호분은 1기의 원형석광적석묘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장방형의 작은 돌무덤이 방사상으로 배치되어 무덤 사이의 主次관계를 시사함. 즉 중심무덤의 피장자는 주위의 무덤에 비해 사회적 지위가 높은 편이나 반대의 무덤은 중심무덤에 예속된 상태로 추정됨. 반면에 1호분 및 4호분과 같은 단일한 원형석광무덤의 무덤배열 상태에서는 주종 관계가 전혀 보이지 않음. 한 墓區내의 여러 개 무덤은 그 크기와 모양이 같으며 또한 무덤 사이마다 돌로 서로 연결되어 한 무덤구역내의 피장자들 관계가 평등하였다는 것을 시사하며, 이는 혈연관계를 이루고 있는 가족 성원의 무덤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임. 부장품은 장식품이 많고 생산 공구 및 기타 그릇 류가 비교적 적은데, 이는 길림성 중부지구의 九台關馬山, 公主嶺猴石, 樺甸橫道河子 및 東豊, 遼源 일대 많은 大蓋石墓의 부장 특징과 서로 일치하며, 동북지구 남부에서는 戰國晩期~漢代 보편적으로 유행함. 상한연대는 2기 고분에서 方孔圓錢- 半兩錢과 一化으로 추정할 수 있음. 半兩錢은 秦末半兩 혹은 漢初의 八銖半兩이며, 一化는 ‘一刀’로 해석되며, 周秦 또는 秦初 시기의 화폐임. 赤峰 新窝堡와 鐵嶺 邱家台지역의 퇴장유적에서 이들 화폐가 燕·趙의 刀幣 및 반량전과 같이 출토되어 燕國晩期의 화폐로 확정되었으므로 묘지연대의 상한은 戰國末期, 비교적 이른 것은 戰國 中期에 해당됨. 하한연대는 AM1에서 출토된 鐵钁과 AM3·AM4 주묘단에서 채집된 鐵刀로 추정할 수 있는데, 钁은 漢代유행하는 것과 형태가 유사하며, 철도는 直柄環首로 일찍이 集安의 板岔嶺에서 동일한 것이 발굴된 바 있는데, 고구려 적석묘에서 대량 보이는 環首刀보다 조금 이름. 집안 판차령에서 “一化”圓錢이 “半兩”, “五銖”, “大泉五十”, 등의 한대화폐와 함께 출토되었고, 그 유통 시간은 전국말기~東漢임. 그러나 간구자묘지에서는 “오수” 및 동한화폐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고분의 하한은 대체로 동한이전의 서한시기로 비정됨. 간구자묘지의 연대가 집안, 환인 일대의 고구려 적석총보다 앞서므로, 고구려적석총의 가장 이른 형식인 無階段 圓丘上積石墓와 관련이 있을 것임. 고구려 초기의 적석묘의 발전과정을 보면, 무덤은 석광이 따로 없는 간단한 시설로부터 계단식 기단으로 이루어진 ‘框室(앞에서 박윤무의 1995년 글에 따라 ‘묘실’이라 정리하던 개념인데, 이 글에서 이 부분을 ‘框室’로 표현하고 있어 그대로 따랐음)’ 무덤으로 발전하고, ‘광실’은 장방형으로부터 정방형 형태로 변화·발전함. 묘광 위치에서도 위로부터 아래로 점차 내려옴. 이를 종합해 볼 때 간구자의 원형석광적석묘는 고구려 초기 적석총과 유사함. 첫째, 주검칸이 따로 없이 무덤의 기단 윗면을 자갈과 모래로 수평하게 마련하고 그 위에 주검과 부장품을 놓고 막돌로 덮어 정상부를 마무리 한 것은 이것은 환인 201호 및 19호분과 매우 흡사함. 둘째, 기단의 단수와 묘광 형태에서 차이가 있으나 한 무덤구역에 여러 기의 무덤을 연이어 마련한 점은 환인 23-33호분과 일치함. 셋째, 화장하여 묻는 습관이 환인 23호 및 20호분이나 15호분에서 확인되며, 집안 일대의 일부 적석총은 묘광벽이 불에 녹아 응결된 흔적으로 화장하였을 것으로 짐작됨. 따라서 간구자 무덤은 시기적으로 환인 적석총을 위주로 한 고구려 초기 무덤보다는 이르며 대체로 환인 적석총보다 선행된 고구려 早期의 무덤형식으로 고구려족계의 원시적 매장 특징이 짙게 반영됨. 또한 간구자 고분군은 여대지구 청동기 시대 무덤 및 청동단검고분의 특징을 내포하고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와 노철산 고분은 모두 여러 기의 무덤을 서로 가까이하여 ‘벌집형(蜂巢狀)’이며,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평면 형태는 원형으로 된 것도 있음. 이것은 간구자 1호분(M1)·2호분(M2)의 특징과 유사함. 강상묘는 하나의 무덤구역에 1기의 중심무덤을 마련하고 그 둘레를 돌면서 여러 기의 무덤을 방사선 형태로 마련하였는데, 이것은 간구자 7호분(M7)과 매우 유사함. 그리고 강상·누상묘 등 적지 않은 청동단검묘는 모두 화장한 무덤이라는 사실에서도 간구자 고분과 일치함.(『조선고고학개요』에서는 ‘노철산 및 장군산 고분→강상·누상묘→고구려 적석묘’라는 계승 발전관계를 설정하고 있고, 왕성생(1981, 「요하 유역 및 부근지역의 短鋌曲刃劍 연구」『요녕성고고박물관학회설립대회』회간)은 강상묘를 비롯한 요동문화유형의 무덤 형식과 매장습속이 환인 고구려 적석무덤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고구려 적석묘는 강상묘의 계승과 발전’이라고 보고 있음) 또한 여대지구 강상과 루상, 우가촌 타두 적석묘 등과 같은 집단묘로서, 家族合葬墓라는 점에서 공통됨. 반면 강상·누상 적석묘는 평지에 축조되었으며, 묘단은 없고, 묘광이 장방 혹은 방사상으로 분포하며, 중심 묘광의 4벽은 판석을 세워 만들었고, 우가촌 타두 적석묘 역시 묘광이 타원형 또는 부정형으로, 보통 평행을 이루는 가로배열로 분포하며 묘단을 만들지 않았음. 따라서 강상·루상과 우가촌 타두는 간구자 적석묘와는 축조 방법에서의 차이가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연대는 3230±90년B.P. 이고, 강상·누상묘는 기원전 1세기 전반기에 해당된 고조선 시기이며, 환인 지역 적석묘는 제15호분에서 環首式 철칼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東漢 시대로, 늦어도 漢·魏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음. 간구자 고분군의 상대적 축조연대는 대체로 전국시기로부터 서한 말기에 해당되므로, 간구자 고분군은 강상·누상묘에서 환인 적석묘로 발전해 나아가는 과정의 과도기 단계로서 고구려 선인들의 토착문화로 추정됨. 연접 방식은 3형식으로 나뉘는데, 제1형식은 속·부묘단이 주묘단을 둘러싸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지 않으며(AM3, AM4, BM5), 제2형식은 속·부묘단의 밖에 다시 제2속묘단이 외접하고, 제1형식이 주묘단만을 둘러싸지만, 제2형식은 연이어 속묘단이 함께 둘러싸고 하나의 부묘단이 기점이 되어 2개의 방향으로 나누어 펼쳐짐(BM2, BM4). 3형식 : 먼저 주묘단을 두르고 밖으로 다시 속묘단을 쌓고, 빈곳에 1, 2개의 부묘단을 세운 후 연속으로 서남방향에 속묘단을 설치한 후, 양쪽에 연속하여 부묘단을 대칭으로 축조함(AM1, AM2). 제1형식이 제2형식의 미완성형식이라면 비교적 이른 고분은 모두 먼저 주묘단을 쌓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였는데, 부·속묘단이 연접하는 방향은 서남쪽으로 접속하지만, 일정하지 않다가 비교적 늦은 고분에서 서남쪽으로 확장방향이 정형성을 띰. 속묘단은 중심선에 의해 대다수 서남방향으로 연접하며 부묘단은 양쪽으로 分列하는데, 대다수는 비교적 대칭적임. 연접 방식에 따른 배열법의 변천순서는 제1형식→제2형식→제3형식 순으로 변하고, 이런 양상은 고분군의 분포 양상과도 합치됨. A와 B구역을 보면, 산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가 이른데 비해, 강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는 비교적 늦음. 上→下의 배열과 발전과정은 환인과 집안 일대의 고구려적석총의 배열과 일치함.자연환경 BM2호분이 위치한 B구역은 북부 산 근처에 있고, 서쪽으로 BM3가 인접하여 있음. 간구자촌은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鎭 서쪽 0.5㎞ 지점에 위치하고, 고분은 干溝子村의 東·西干溝河 양안의 하곡 충적대지상에 분포함. 동쪽으로 長白縣城과 45㎞ 떨어져 있고, 동·서·북 3면이 高山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름. 압록강과 고분군 사이의 馬架子山을 기준으로 동쪽의 동간구하, 서쪽의 서간구하가 흐르는데, 서간구하는 동북에서 서남으로 흘러 고분군를 거쳐 압록강으로 흘러 감. 장백과 임강을 잇는 長臨도로가 동남에서 서북으로 뻗어 고분군을 양분하고, 고분군의 서·남 양쪽 산위에는 청동기시대 유적 분포함. 간구자 고분은 여러 차례 조사가 있었으나 1986년과 2001년 조사로 대별되는데, 특히 2001년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계기로 1986년 조사때보다 묘역이 크게 확대되었음. 앞서 고분 분포현황에서 언급하였듯이 2001년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묘역은 크게 A, B, C, D의 4구역으로 이루어졌는데 비해, 1986년 보고서에는 2001년 보고서의 A와 B 지역 일대를 파악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으므로 2001년 고분의 편호는 1986년 조사를 고려하지 않고 새로 편호하고 있기 때문에 양자의 개별 고분들을 직접 연결시켜 파악하기는 어려운 상황임. 때문에 개별고분의 상황을 두 시기로 나누어 정리하였음.유물정보 심발형토기 7점, 발 5점, 옥구슬 1점, 녹송석 드리개(綠松石墜) 2점, 고리 1점, 남색대롱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長白朝鮮族自治縣文物志』, 1986 · 朴潤武, 「長白縣干溝子墓地調査」『博物館研究』 1990-3, 1990 ·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 編, 『吉林省志』 45(民族志), 吉林人民出版社, 1991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朴潤武, 「압록강 유역 干溝子 적성무덤에 대한 조사연구」『中國境內 高句麗遺蹟 硏究』, 예하출판, 1995 · 王洪峰·孫仁傑·遲勇, 「吉林長白縣干溝子墓地發掘簡報」『考古』 2003-8, 2003 · 孫仁杰·遲勇·張殿甲, 「鴨綠江上流右岸考古調査」『東北史地』 2004-5, 2004

      • 리스트여닫기 간구자 BM4호분(干溝子 BM4號墳) 출토지 길림성 장백현 십사도구진 간구자촌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鎮 干溝子村)연대 상한: 戰國中期~末期, 하한: 西漢 상한 - B.C 4세기~B.C 3세기초, 하한 - 기원전후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2001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장백현문물보호관리소, 집안시박물관(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長白縣文物保護管理所, 集安市博物館)5월-7월 조사에서 1986년 편호와 달리 새로이 편호하는데 1986년 편호된 고분가운데 M15~M19의 5기 가운데 1기만 남아 있고, 1986년도에 편호되지 않은 고분 중 고분 형식을 판별할 수 있는 고분 고려하여 새로이 편호하였으며, 서간구하 북안의 A구 4기와 그 남안의 B구 3기를 발굴함.구조특징 전체형태는 橢圓丘狀으로 주묘단 1기, 속묘단 2기, 부묘단 6기로 조성되어 있고, 길이 16.5m, 너비 12.5m, 정상부 최고 높이는 1.5m이며, 西·南 양쪽은 일찍이 파괴되었음. 주묘단(ZT)은 고분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원형으로 직경 6m이며, 서남면은 이미 붕괴되고, 나머지 둘레 돌의 殘高는 0.5m임. 묘광은 2기로 장축 방향은 모두 150°임. 묘광(ZK1)은 타원형으로 길이 2.9m, 너비 1.05m, 깊이 0.15m이고, 바닥에는 작은 강돌이 깔려 있으며, 燒骨, 발 1건(淺腹罐 BaⅡ식), 어망추(網墜) 1건이 출토됨. 묘광(ZK2)은 타원형으로 길이 2.2m, 너비 0.7m, 깊이 0.1m이고, 바닥에 깔린 강돌층 두께는 0.05~0.08m이며, 燒骨과 심발형토기 1건(深腹罐 BⅢ식)이 출토됨. 속묘단(XT1, XT2)인 XT1은 半圓形으로 직경 약 5.5m, 높이 1.2m이고, 가장자리의 보존 상태는 양호함. 묘광(XK1)은 말각장방형으로 길이 2.5m, 너비 0.8m, 깊이 0.12m이고, 묘광 바닥에는 작은 강돌이 깔려 있음으며, 燒骨, 멧돼지이빨장식 1점이 출토함. XT2는 반원형으로 직경 약 6.5m이고, 북쪽의 殘高는 0.7m이며, 둘레돌은 둥근 호선을 그림. 묘광(XK2)은 타원형으로 길이 2.5m, 너비 0.7m, 깊이 0.15m이고, 바닥에 0.06m 두께로 작은 냇돌 깔았으며, 燒骨, 이빨장식(牙飾) 1건이 출토함. 부묘단(FT1~FT6)인 FT1은 반원형으로 직경 약 4.8m이고, 둘레 돌은 기본적으로 남아 있지 않으며, 지탱석은 기울어졌으나, 가장자리는 아직 가지런함. 묘광(FK1)은 불규칙한 타원형으로 길이 2.1m, 너비 0.4~0.7m, 깊이 0.08m이고, 묘광 바닥에는 작은 강돌을 깔았으며, 燒骨, 토기 1건이 출토함. FT2는 반원형으로 직경 약 4.5m, 적석 높이 1m이고, 둘레 돌은 가지런히 쌓아 올렸으며, 둘레 돌 밖에는 지탱석이 있음. 묘광(FK2)는 말각장방형으로 길이 2.5m, 너비 0.65m, 깊이 0.15m이고, 바닥에는 작은 강돌이 쌓여 있으며, 燒骨, 심발형토기 1건(深腹罐 AⅢ식)이 출토함. FT3은 扇形으로 반경 약 2m이고, 가장자리는 이미 붕괴됨. 묘광(FK3)은 장방형으로 가장자리가 비교적 가지런하고 길이 2.2m 너비 0.8m, 깊이 0.12m이며, 바닥에는 강돌이 깔려 있음. 燒骨, 구멍뚫린 숫돌(礪石) 1건이 출토함. FT4는 부정형으로 안쪽 묘광벽은 이미 훼손되었고, 바닥에 깔은 강돌은 대체로 타원형이며, 인골, 방추차(陶紡輪) 1건, 소량의 토기편이 출토함. FT5와 FT6은 기초만이 남아 있으며, 扇形으로 반경이 약 2m임.역사적 의미 축조방식은 지면에 커다란 돌을 사용하여 일정 범위의 묘역을 조성한 후 냇돌과 할석을 깔아 평면하게 지면을 고르고 무덤의 기저부를 만든 후, 그 위에 단을 쌓아 몇 기의 무덤이 연접되도록 함. 매장방식은 무덤 밖에서 화장한 후 燒骨을 매장한 2차장하고, 대다수 묘광 내부에 불에 타거나 그을린 흔적이 없음. 불에 탄 인골편은 작은 조각으로 가장 큰 것이 길이 5㎝가 안되며, 대략 1/3의 소골은 회백색이며 나머지는 赭色(자색)과 흑색임. 다만 BM2ZK1에서 목탄편이 출토되었고, 1986년 조사된 간구자 1호분(M1)의 석광 안에는 주검칸이나 葬具를 따로 마련하지 않았고 불에 태워진 인골과 대량의 목탄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시신을 묘광 안에 놓고 화장했던 것으로 추정됨. 燒骨은 묘광 내 2, 3곳에 무더기로 안치되었으며, 토기는 묘광 양단에 나누어 부장한 점으로 미루어 一代 혹은 한 가정의 合葬 즉 동일가족 數代의 합장묘 유적일 것임. 따라서 신분 혹은 항렬이 비교적 높은 사람이 주묘단의 중심에 매장되고, 다수 속·부묘단은 항렬의 대소 또는 昭穆제도에 따라 附葬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2001년 발굴한 7기 고분의 부장품은 총 283점으로 작은 장식품을 제외하면 평균 각 묘광에 3점이 부장되었으므로 厚葬은 아님. 전체 부장품 중 토기가 총73점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나 완형보다는 다수가 파편으로 출토되어 토기의 毁器習俗으로 짐작됨. 출토된 그릇은 모두 민무늬의 夾沙褐陶로 모양이 간단하고 종류가 단조롭고 제작 기술이 거칠어 원시성을 반영하며, 그 외 野猪牙飾, 綠松石管 등의 장식품은 모두 압록강 유역과 두만강 유역의 원시문화에서 일찍이 보여주는 전형적 기물임. 간구자 고분군의 무덤들은 하나의 기단 위에 여러 기의 고분이 배열되어 있는데, 특히 7호분은 1기의 원형석광적석묘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장방형의 작은 돌무덤이 방사상으로 배치되어 무덤 사이의 主次관계를 시사함. 즉 중심무덤의 피장자는 주위의 무덤에 비해 사회적 지위가 높은 편이나 반대의 무덤은 중심무덤에 예속된 상태로 추정됨. 반면에 1호분 및 4호분과 같은 단일한 원형석광무덤의 무덤배열 상태에서는 주종 관계가 전혀 보이지 않음. 한 墓區내의 여러 개 무덤은 그 크기와 모양이 같으며 또한 무덤 사이마다 돌로 서로 연결되어 한 무덤구역내의 피장자들 관계가 평등하였다는 것을 시사하며, 이는 혈연관계를 이루고 있는 가족 성원의 무덤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임. 부장품은 장식품이 많고 생산 공구 및 기타 그릇 류가 비교적 적은데, 이는 길림성 중부지구의 九台關馬山, 公主嶺猴石, 樺甸橫道河子 및 東豊, 遼源 일대 많은 大蓋石墓의 부장 특징과 서로 일치하며, 동북지구 남부에서는 戰國晩期~漢代 보편적으로 유행함. 상한연대는 2기 고분에서 方孔圓錢- 半兩錢과 一化으로 추정할 수 있음. 半兩錢은 秦末半兩 혹은 漢初의 八銖半兩이며, 一化는 ‘一刀’로 해석되며, 周秦 또는 秦初 시기의 화폐임. 赤峰 新窝堡와 鐵嶺 邱家台지역의 퇴장유적에서 이들 화폐가 燕·趙의 刀幣 및 반량전과 같이 출토되어 燕國晩期의 화폐로 확정되었으므로 묘지연대의 상한은 戰國末期, 비교적 이른 것은 戰國 中期에 해당됨. 하한연대는 AM1에서 출토된 鐵钁과 AM3·AM4 주묘단에서 채집된 鐵刀로 추정할 수 있는데, 钁은 漢代유행하는 것과 형태가 유사하며, 철도는 直柄環首로 일찍이 集安의 板岔嶺에서 동일한 것이 발굴된 바 있는데, 고구려 적석묘에서 대량 보이는 環首刀보다 조금 이름. 집안 판차령에서 “一化”圓錢이 “半兩”, “五銖”, “大泉五十”, 등의 한대화폐와 함께 출토되었고, 그 유통 시간은 전국말기~東漢임. 그러나 간구자묘지에서는 “오수” 및 동한화폐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고분의 하한은 대체로 동한이전의 서한시기로 비정됨. 간구자묘지의 연대가 집안, 환인 일대의 고구려 적석총보다 앞서므로, 고구려적석총의 가장 이른 형식인 無階段 圓丘上積石墓와 관련이 있을 것임. 고구려 초기의 적석묘의 발전과정을 보면, 무덤은 석광이 따로 없는 간단한 시설로부터 계단식 기단으로 이루어진 ‘框室(앞에서 박윤무의 1995년 글에 따라 ‘묘실’이라 정리하던 개념인데, 이 글에서 이 부분을 ‘框室’로 표현하고 있어 그대로 따랐음)’ 무덤으로 발전하고, ‘광실’은 장방형으로부터 정방형 형태로 변화·발전함. 묘광 위치에서도 위로부터 아래로 점차 내려옴. 이를 종합해 볼 때 간구자의 원형석광적석묘는 고구려 초기 적석총과 유사함. 첫째, 주검칸이 따로 없이 무덤의 기단 윗면을 자갈과 모래로 수평하게 마련하고 그 위에 주검과 부장품을 놓고 막돌로 덮어 정상부를 마무리 한 것은 이것은 환인 201호 및 19호분과 매우 흡사함. 둘째, 기단의 단수와 묘광 형태에서 차이가 있으나 한 무덤구역에 여러 기의 무덤을 연이어 마련한 점은 환인 23-33호분과 일치함. 셋째, 화장하여 묻는 습관이 환인 23호 및 20호분이나 15호분에서 확인되며, 집안 일대의 일부 적석총은 묘광벽이 불에 녹아 응결된 흔적으로 화장하였을 것으로 짐작됨. 따라서 간구자 무덤은 시기적으로 환인 적석총을 위주로 한 고구려 초기 무덤보다는 이르며 대체로 환인 적석총보다 선행된 고구려 早期의 무덤형식으로 고구려족계의 원시적 매장 특징이 짙게 반영됨. 또한 간구자 고분군은 여대지구 청동기 시대 무덤 및 청동단검고분의 특징을 내포하고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와 노철산 고분은 모두 여러 기의 무덤을 서로 가까이하여 ‘벌집형(蜂巢狀)’이며,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평면 형태는 원형으로 된 것도 있음. 이것은 간구자 1호분(M1)·2호분(M2)의 특징과 유사함. 강상묘는 하나의 무덤구역에 1기의 중심무덤을 마련하고 그 둘레를 돌면서 여러 기의 무덤을 방사선 형태로 마련하였는데, 이것은 간구자 7호분(M7)과 매우 유사함. 그리고 강상·누상묘 등 적지 않은 청동단검묘는 모두 화장한 무덤이라는 사실에서도 간구자 고분과 일치함.(『조선고고학개요』에서는 ‘노철산 및 장군산 고분→강상·누상묘→고구려 적석묘’라는 계승 발전관계를 설정하고 있고, 왕성생(1981, 「요하 유역 및 부근지역의 短鋌曲刃劍 연구」『요녕성고고박물관학회설립대회』회간)은 강상묘를 비롯한 요동문화유형의 무덤 형식과 매장습속이 환인 고구려 적석무덤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고구려 적석묘는 강상묘의 계승과 발전’이라고 보고 있음) 또한 여대지구 강상과 루상, 우가촌 타두 적석묘 등과 같은 집단묘로서, 家族合葬墓라는 점에서 공통됨. 반면 강상·누상 적석묘는 평지에 축조되었으며, 묘단은 없고, 묘광이 장방 혹은 방사상으로 분포하며, 중심 묘광의 4벽은 판석을 세워 만들었고, 우가촌 타두 적석묘 역시 묘광이 타원형 또는 부정형으로, 보통 평행을 이루는 가로배열로 분포하며 묘단을 만들지 않았음. 따라서 강상·루상과 우가촌 타두는 간구자 적석묘와는 축조 방법에서의 차이가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연대는 3230±90년B.P. 이고, 강상·누상묘는 기원전 1세기 전반기에 해당된 고조선 시기이며, 환인 지역 적석묘는 제15호분에서 環首式 철칼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東漢 시대로, 늦어도 漢·魏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음. 간구자 고분군의 상대적 축조연대는 대체로 전국시기로부터 서한 말기에 해당되므로, 간구자 고분군은 강상·누상묘에서 환인 적석묘로 발전해 나아가는 과정의 과도기 단계로서 고구려 선인들의 토착문화로 추정됨. 연접 방식은 3형식으로 나뉘는데, 제1형식은 속·부묘단이 주묘단을 둘러싸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지 않으며(AM3, AM4, BM5), 제2형식은 속·부묘단의 밖에 다시 제2속묘단이 외접하고, 제1형식이 주묘단만을 둘러싸지만, 제2형식은 연이어 속묘단이 함께 둘러싸고 하나의 부묘단이 기점이 되어 2개의 방향으로 나누어 펼쳐짐(BM2, BM4). 3형식 : 먼저 주묘단을 두르고 밖으로 다시 속묘단을 쌓고, 빈곳에 1, 2개의 부묘단을 세운 후 연속으로 서남방향에 속묘단을 설치한 후, 양쪽에 연속하여 부묘단을 대칭으로 축조함(AM1, AM2). 제1형식이 제2형식의 미완성형식이라면 비교적 이른 고분은 모두 먼저 주묘단을 쌓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였는데, 부·속묘단이 연접하는 방향은 서남쪽으로 접속하지만, 일정하지 않다가 비교적 늦은 고분에서 서남쪽으로 확장방향이 정형성을 띰. 속묘단은 중심선에 의해 대다수 서남방향으로 연접하며 부묘단은 양쪽으로 分列하는데, 대다수는 비교적 대칭적임. 연접 방식에 따른 배열법의 변천순서는 제1형식→제2형식→제3형식 순으로 변하고, 이런 양상은 고분군의 분포 양상과도 합치됨. A와 B구역을 보면, 산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가 이른데 비해, 강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는 비교적 늦음. 上→下의 배열과 발전과정은 환인과 집안 일대의 고구려적석총의 배열과 일치함.자연환경 BM4호분은 BM2 이남에 위치함. 간구자촌은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鎭 서쪽 0.5㎞ 지점에 위치하고, 고분은 干溝子村의 東·西干溝河 양안의 하곡 충적대지상에 분포함. 동쪽으로 長白縣城과 45㎞ 떨어져 있고, 동·서·북 3면이 高山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름. 압록강과 고분군 사이의 馬架子山을 기준으로 동쪽의 동간구하, 서쪽의 서간구하가 흐르는데, 서간구하는 동북에서 서남으로 흘러 고분군를 거쳐 압록강으로 흘러 감. 장백과 임강을 잇는 長臨도로가 동남에서 서북으로 뻗어 고분군을 양분하고, 고분군의 서·남 양쪽 산위에는 청동기시대 유적 분포함. 간구자 고분은 여러 차례 조사가 있었으나 1986년과 2001년 조사로 대별되는데, 특히 2001년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계기로 1986년 조사때보다 묘역이 크게 확대되었음. 앞서 고분 분포현황에서 언급하였듯이 2001년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묘역은 크게 A, B, C, D의 4구역으로 이루어졌는데 비해, 1986년 보고서에는 2001년 보고서의 A와 B 지역 일대를 파악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으므로 2001년 고분의 편호는 1986년 조사를 고려하지 않고 새로 편호하고 있기 때문에 양자의 개별 고분들을 직접 연결시켜 파악하기는 어려운 상황임. 때문에 개별고분의 상황을 두 시기로 나누어 정리하였음.유물정보 심발형토기 2점, 발 1점, 숫돌 1점, 이빨장식 2점,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長白朝鮮族自治縣文物志』, 1986 · 朴潤武, 「長白縣干溝子墓地調査」『博物館研究』 1990-3, 1990 ·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 編, 『吉林省志』 45(民族志), 吉林人民出版社, 1991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朴潤武, 「압록강 유역 干溝子 적성무덤에 대한 조사연구」『中國境內 高句麗遺蹟 硏究』, 예하출판, 1995 · 王洪峰·孫仁傑·遲勇, 「吉林長白縣干溝子墓地發掘簡報」『考古』 2003-8, 2003 · 孫仁杰·遲勇·張殿甲, 「鴨綠江上流右岸考古調査」『東北史地』 2004-5, 2004

      • 리스트여닫기 간구자 BM5호분(干溝子 BM5號墳) 출토지 길림성 장백현 십사도구진 간구자촌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鎮 干溝子村)연대 상한: 戰國中期~末期, 하한: 西漢 상한 - B.C 4세기~B.C 3세기초, 하한 - 기원전후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2001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장백현문물보호관리소, 집안시박물관(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長白縣文物保護管理所, 集安市博物館)5월-7월 조사에서 1986년 편호와 달리 새로이 편호하는데 1986년 편호된 고분가운데 M15~M19의 5기 가운데 1기만 남아 있고, 1986년도에 편호되지 않은 고분 중 고분 형식을 판별할 수 있는 고분 고려하여 새로이 편호하였으며, 서간구하 북안의 A구 4기와 그 남안의 B구 3기를 발굴함.구조특징 구조는 간단하고, 주묘단 1기, 부묘단 2기로 조성되어 있음. 전체 형태는 圓丘狀으로 직경 11m이고, 둘레 돌은 이미 훼손되었으며, 중심부 적석 높이는 1.5m임. 주묘단(ZK1)은 원형 평면으로 동쪽에 위치하고, 직경 5.5m임. 기초부와 둘레 돌의 하단은 모두 백색 流紋巖으로 축조하였고, 東半部는 이미 기울어지고 서쪽 부분은 잔존 상태가 양호하며, 둘레 돌의 殘高는 0.3m로 둘레돌 밖의 지탱석은 양호함. 타원형 묘광이 2개 있는데, 묘광(ZK1)은 길이 2.6m, 너비 0.9m, 깊이 0.25m, 장축 방향 30도이고, 묘광바닥에 깔은 돌의 두께는 0.13m이며, 화장한 인골편들이 있고, 부장품은 없음. 묘광(ZK2)은 길이 1.5m, 너비 0.7m, 깊이 0.1m이고, 바닥에는 두께 0.05m의 작은 강돌을 깔았으며, 장축 방향은 ZK1과 대략 동일하고, 燒骨만 출토되고 부장품이 없음. 속묘단인 FT1은 반원형으로 정상부 높이 1.1m이고, 남부는 비교적 심하게 파손되었으며, 北半部 둘레돌과 지탱석은 비교적 양호함. 묘광(FK1)은 말각장방형으로 길이 3m, 너비 0.7m, 깊이 0.1m이고, 바닥 강돌층 두께는 0.08m이며, 燒骨은 있으나 부장품은 없음. FT2은 扇形으로 반경 약 4m이고, 가장자리는 이미 붕괴되었음. 묘광(FK2)은 불규칙한 타원형으로 길이 2.8m, 너비 0.7m, 깊이 0.1~0.2m이고, 바닥에 깔은 작은 강돌의 두께는 0.08m이며, 대량의 燒骨, “一化”小圓錢 5점, 도기 1건(淺腹罐 BbⅡ식)이 출토함.역사적 의미 축조방식은 지면에 커다란 돌을 사용하여 일정 범위의 묘역을 조성한 후 냇돌과 할석을 깔아 평면하게 지면을 고르고 무덤의 기저부를 만든 후, 그 위에 단을 쌓아 몇 기의 무덤이 연접되도록 함. 매장방식은 무덤 밖에서 화장한 후 燒骨을 매장한 2차장하고, 대다수 묘광 내부에 불에 타거나 그을린 흔적이 없음. 불에 탄 인골편은 작은 조각으로 가장 큰 것이 길이 5㎝가 안되며, 대략 1/3의 소골은 회백색이며 나머지는 赭色(자색)과 흑색임. 다만 BM2ZK1에서 목탄편이 출토되었고, 1986년 조사된 간구자 1호분(M1)의 석광 안에는 주검칸이나 葬具를 따로 마련하지 않았고 불에 태워진 인골과 대량의 목탄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시신을 묘광 안에 놓고 화장했던 것으로 추정됨. 燒骨은 묘광 내 2, 3곳에 무더기로 안치되었으며, 토기는 묘광 양단에 나누어 부장한 점으로 미루어 一代 혹은 한 가정의 合葬 즉 동일가족 數代의 합장묘 유적일 것임. 따라서 신분 혹은 항렬이 비교적 높은 사람이 주묘단의 중심에 매장되고, 다수 속·부묘단은 항렬의 대소 또는 昭穆제도에 따라 附葬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2001년 발굴한 7기 고분의 부장품은 총 283점으로 작은 장식품을 제외하면 평균 각 묘광에 3점이 부장되었으므로 厚葬은 아님. 전체 부장품 중 토기가 총73점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나 완형보다는 다수가 파편으로 출토되어 토기의 毁器習俗으로 짐작됨. 출토된 그릇은 모두 민무늬의 夾沙褐陶로 모양이 간단하고 종류가 단조롭고 제작 기술이 거칠어 원시성을 반영하며, 그 외 野猪牙飾, 綠松石管 등의 장식품은 모두 압록강 유역과 두만강 유역의 원시문화에서 일찍이 보여주는 전형적 기물임. 간구자 고분군의 무덤들은 하나의 기단 위에 여러 기의 고분이 배열되어 있는데, 특히 7호분은 1기의 원형석광적석묘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장방형의 작은 돌무덤이 방사상으로 배치되어 무덤 사이의 主次관계를 시사함. 즉 중심무덤의 피장자는 주위의 무덤에 비해 사회적 지위가 높은 편이나 반대의 무덤은 중심무덤에 예속된 상태로 추정됨. 반면에 1호분 및 4호분과 같은 단일한 원형석광무덤의 무덤배열 상태에서는 주종 관계가 전혀 보이지 않음. 한 墓區내의 여러 개 무덤은 그 크기와 모양이 같으며 또한 무덤 사이마다 돌로 서로 연결되어 한 무덤구역내의 피장자들 관계가 평등하였다는 것을 시사하며, 이는 혈연관계를 이루고 있는 가족 성원의 무덤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임. 부장품은 장식품이 많고 생산 공구 및 기타 그릇 류가 비교적 적은데, 이는 길림성 중부지구의 九台關馬山, 公主嶺猴石, 樺甸橫道河子 및 東豊, 遼源 일대 많은 大蓋石墓의 부장 특징과 서로 일치하며, 동북지구 남부에서는 戰國晩期~漢代 보편적으로 유행함. 상한연대는 2기 고분에서 方孔圓錢- 半兩錢과 一化으로 추정할 수 있음. 半兩錢은 秦末半兩 혹은 漢初의 八銖半兩이며, 一化는 ‘一刀’로 해석되며, 周秦 또는 秦初 시기의 화폐임. 赤峰 新窝堡와 鐵嶺 邱家台지역의 퇴장유적에서 이들 화폐가 燕·趙의 刀幣 및 반량전과 같이 출토되어 燕國晩期의 화폐로 확정되었으므로 묘지연대의 상한은 戰國末期, 비교적 이른 것은 戰國 中期에 해당됨. 하한연대는 AM1에서 출토된 鐵钁과 AM3·AM4 주묘단에서 채집된 鐵刀로 추정할 수 있는데, 钁은 漢代유행하는 것과 형태가 유사하며, 철도는 直柄環首로 일찍이 集安의 板岔嶺에서 동일한 것이 발굴된 바 있는데, 고구려 적석묘에서 대량 보이는 環首刀보다 조금 이름. 집안 판차령에서 “一化”圓錢이 “半兩”, “五銖”, “大泉五十”, 등의 한대화폐와 함께 출토되었고, 그 유통 시간은 전국말기~東漢임. 그러나 간구자묘지에서는 “오수” 및 동한화폐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고분의 하한은 대체로 동한이전의 서한시기로 비정됨. 간구자묘지의 연대가 집안, 환인 일대의 고구려 적석총보다 앞서므로, 고구려적석총의 가장 이른 형식인 無階段 圓丘上積石墓와 관련이 있을 것임. 고구려 초기의 적석묘의 발전과정을 보면, 무덤은 석광이 따로 없는 간단한 시설로부터 계단식 기단으로 이루어진 ‘框室(앞에서 박윤무의 1995년 글에 따라 ‘묘실’이라 정리하던 개념인데, 이 글에서 이 부분을 ‘框室’로 표현하고 있어 그대로 따랐음)’ 무덤으로 발전하고, ‘광실’은 장방형으로부터 정방형 형태로 변화·발전함. 묘광 위치에서도 위로부터 아래로 점차 내려옴. 이를 종합해 볼 때 간구자의 원형석광적석묘는 고구려 초기 적석총과 유사함. 첫째, 주검칸이 따로 없이 무덤의 기단 윗면을 자갈과 모래로 수평하게 마련하고 그 위에 주검과 부장품을 놓고 막돌로 덮어 정상부를 마무리 한 것은 이것은 환인 201호 및 19호분과 매우 흡사함. 둘째, 기단의 단수와 묘광 형태에서 차이가 있으나 한 무덤구역에 여러 기의 무덤을 연이어 마련한 점은 환인 23-33호분과 일치함. 셋째, 화장하여 묻는 습관이 환인 23호 및 20호분이나 15호분에서 확인되며, 집안 일대의 일부 적석총은 묘광벽이 불에 녹아 응결된 흔적으로 화장하였을 것으로 짐작됨. 따라서 간구자 무덤은 시기적으로 환인 적석총을 위주로 한 고구려 초기 무덤보다는 이르며 대체로 환인 적석총보다 선행된 고구려 早期의 무덤형식으로 고구려족계의 원시적 매장 특징이 짙게 반영됨. 또한 간구자 고분군은 여대지구 청동기 시대 무덤 및 청동단검고분의 특징을 내포하고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와 노철산 고분은 모두 여러 기의 무덤을 서로 가까이하여 ‘벌집형(蜂巢狀)’이며,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평면 형태는 원형으로 된 것도 있음. 이것은 간구자 1호분(M1)·2호분(M2)의 특징과 유사함. 강상묘는 하나의 무덤구역에 1기의 중심무덤을 마련하고 그 둘레를 돌면서 여러 기의 무덤을 방사선 형태로 마련하였는데, 이것은 간구자 7호분(M7)과 매우 유사함. 그리고 강상·누상묘 등 적지 않은 청동단검묘는 모두 화장한 무덤이라는 사실에서도 간구자 고분과 일치함.(『조선고고학개요』에서는 ‘노철산 및 장군산 고분→강상·누상묘→고구려 적석묘’라는 계승 발전관계를 설정하고 있고, 왕성생(1981, 「요하 유역 및 부근지역의 短鋌曲刃劍 연구」『요녕성고고박물관학회설립대회』회간)은 강상묘를 비롯한 요동문화유형의 무덤 형식과 매장습속이 환인 고구려 적석무덤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고구려 적석묘는 강상묘의 계승과 발전’이라고 보고 있음) 또한 여대지구 강상과 루상, 우가촌 타두 적석묘 등과 같은 집단묘로서, 家族合葬墓라는 점에서 공통됨. 반면 강상·누상 적석묘는 평지에 축조되었으며, 묘단은 없고, 묘광이 장방 혹은 방사상으로 분포하며, 중심 묘광의 4벽은 판석을 세워 만들었고, 우가촌 타두 적석묘 역시 묘광이 타원형 또는 부정형으로, 보통 평행을 이루는 가로배열로 분포하며 묘단을 만들지 않았음. 따라서 강상·루상과 우가촌 타두는 간구자 적석묘와는 축조 방법에서의 차이가 있음. 우가촌 타두 적석묘의 연대는 3230±90년B.P. 이고, 강상·누상묘는 기원전 1세기 전반기에 해당된 고조선 시기이며, 환인 지역 적석묘는 제15호분에서 環首式 철칼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東漢 시대로, 늦어도 漢·魏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음. 간구자 고분군의 상대적 축조연대는 대체로 전국시기로부터 서한 말기에 해당되므로, 간구자 고분군은 강상·누상묘에서 환인 적석묘로 발전해 나아가는 과정의 과도기 단계로서 고구려 선인들의 토착문화로 추정됨. 연접 방식은 3형식으로 나뉘는데, 제1형식은 속·부묘단이 주묘단을 둘러싸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지 않으며(AM3, AM4, BM5), 제2형식은 속·부묘단의 밖에 다시 제2속묘단이 외접하고, 제1형식이 주묘단만을 둘러싸지만, 제2형식은 연이어 속묘단이 함께 둘러싸고 하나의 부묘단이 기점이 되어 2개의 방향으로 나누어 펼쳐짐(BM2, BM4). 3형식 : 먼저 주묘단을 두르고 밖으로 다시 속묘단을 쌓고, 빈곳에 1, 2개의 부묘단을 세운 후 연속으로 서남방향에 속묘단을 설치한 후, 양쪽에 연속하여 부묘단을 대칭으로 축조함(AM1, AM2). 제1형식이 제2형식의 미완성형식이라면 비교적 이른 고분은 모두 먼저 주묘단을 쌓고 다시 밖으로 접속하였는데, 부·속묘단이 연접하는 방향은 서남쪽으로 접속하지만, 일정하지 않다가 비교적 늦은 고분에서 서남쪽으로 확장방향이 정형성을 띰. 속묘단은 중심선에 의해 대다수 서남방향으로 연접하며 부묘단은 양쪽으로 分列하는데, 대다수는 비교적 대칭적임. 연접 방식에 따른 배열법의 변천순서는 제1형식→제2형식→제3형식 순으로 변하고, 이런 양상은 고분군의 분포 양상과도 합치됨. A와 B구역을 보면, 산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가 이른데 비해, 강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묘는 비교적 늦음. 上→下의 배열과 발전과정은 환인과 집안 일대의 고구려적석총의 배열과 일치함.자연환경 간구자촌은 吉林省 長白縣 十四道溝鎭 서쪽 0.5㎞ 지점에 위치하고, 고분은 干溝子村의 東·西干溝河 양안의 하곡 충적대지상에 분포함. 동쪽으로 長白縣城과 45㎞ 떨어져 있고, 동·서·북 3면이 高山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름. 압록강과 고분군 사이의 馬架子山을 기준으로 동쪽의 동간구하, 서쪽의 서간구하가 흐르는데, 서간구하는 동북에서 서남으로 흘러 고분군를 거쳐 압록강으로 흘러 감. 장백과 임강을 잇는 長臨도로가 동남에서 서북으로 뻗어 고분군을 양분하고, 고분군의 서·남 양쪽 산위에는 청동기시대 유적 분포함. 간구자 고분은 여러 차례 조사가 있었으나 1986년과 2001년 조사로 대별되는데, 특히 2001년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계기로 1986년 조사때보다 묘역이 크게 확대되었음. 앞서 고분 분포현황에서 언급하였듯이 2001년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묘역은 크게 A, B, C, D의 4구역으로 이루어졌는데 비해, 1986년 보고서에는 2001년 보고서의 A와 B 지역 일대를 파악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으므로 2001년 고분의 편호는 1986년 조사를 고려하지 않고 새로 편호하고 있기 때문에 양자의 개별 고분들을 직접 연결시켜 파악하기는 어려운 상황임. 때문에 개별고분의 상황을 두 시기로 나누어 정리하였음.유물정보 발 2점, 일화전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長白朝鮮族自治縣文物志』, 1986 · 朴潤武, 「長白縣干溝子墓地調査」『博物館研究』 1990-3, 1990 ·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 編, 『吉林省志』 45(民族志), 吉林人民出版社, 1991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朴潤武, 「압록강 유역 干溝子 적성무덤에 대한 조사연구」『中國境內 高句麗遺蹟 硏究』, 예하출판, 1995 · 王洪峰·孫仁傑·遲勇, 「吉林長白縣干溝子墓地發掘簡報」『考古』 2003-8, 2003 · 孫仁杰·遲勇·張殿甲, 「鴨綠江上流右岸考古調査」『東北史地』 2004-5, 2004

    • 리스트여닫기 혼강구(渾江區)

    • 리스트여닫기 무송현(撫松縣)

      • 무송 감장후산 고분(撫松 碱場後山 古墳)

      • 무송 감장서감 고분군(撫松 碱場西坎 古墳群)

      • 무송 신안 고분(撫松 新安 古墳)

      • 리스트여닫기 무송 대방(황)정자 적석고분군(撫松 大方(荒)頂子 積石古墳群) 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60년 6월 : 1차· 조사 기관 : 통화지구문물보사대(通化地區文物普査隊)· 조사 참여자 : 전성죽(戰成竹), 장동재(張棟才) 등· 제1차 전국문물조사 당시에 조사되어 『撫松縣文物志』에 기재됨.· 신석기시대와 고구려시대의 古城”으로 소개됨.1986년 : 2차· 조사 기관 : 무송현문보소(撫松縣文保所)· 조사 참여자 : 왕문흥(王文興) 등· 제2차 문물조사 당시 대방정자산 고대유적지에 대해 재조사가 실시되어 『撫松縣文物志』에 기재됨.· 지표에서는 아직 어떤 유물도 발견되지 않았음.· 단, 평탄한 언덕 위에 직경이 서로 다른 돌무지(石堆) 6개와 우물 하나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배열되어 있음. 또한 길이 50m, 너비 1m, 높이 0.35m의 석열(石帶)이 하나 있음. 6개의 돌무지는 후대인이 돌을 쌓아 올린 것은 아니며, 원래 성벽(城墻) 옛터에서 사용된 돌무지인지의 여부조차 단언할 수 없음. · 따라서 해당 유적의 돌무지와 석열은 자연스런 무지가 아니며, 비록 인위적으로 파괴당하였으나 여전히 고대인류의 생활면모를 반영하고 있으며, 돌로 쌓은 석열에서 고대 성벽(城垣)의 흔적을 판별할 수 있어 고구려 시기의 성터 소재지일 가능성이 매우 높음.2008년 10월 : 3차· 조사 기관 : 무송현문보소(撫松縣文保所)· 조사 참여자 : 왕문흥(王文興), 고령박(顧聆博) 등· 제3차 문물조사 당시 다시 대방정자산 정상 적석무지를 조사함.· 문보소의 조사 보고서(登記表)를 보면, 조사대는 돌무지 6개를 고구려 적석묘로 판단하고, 북쪽에서부터 남쪽으로 M1~M6이라고 편호함. · 동시에 조사대는 대방정자산 주봉 동북 1.3km의 작은 산 정상에서 대방촌 신석기시대 유적지를 조사함. 여기서 흑요석제 괄삭기(黑曜巖刮削器), 협사흑도 구연편(夾砂黑陶口沿), 굽이 있는 바닥편(高臺底의 基底部) 등의 유물이 출토됨. · 그러나 1986년 조사에서 발견한 석대를 찾지 못함.2008년 5월· 조사 기관 : 길림성임업국(吉林省林業局)(?)· 조사 참여자 : 진경하(陳景河) 등의 장백문화(長白文化) 연구자· 장백문화 학자들에 의해 조사연구가 시작되었음. · 陳景河는 답사 후에 고구려 고성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大荒頂子祭壇이 金 여진황족의 望祭가 장백산에서 참배하였다는 제단인지의 문제를 제기함. 그의 적극적 제창 하에 3년 동안 林業局에서 여러 차례 학자를 조직하여 현지조사 및 방문과 논증을 하였음. 임업국조직의 몇 차례의 현지조사는 모두 나무와 풀이 무성한 계절이었기 때문에 적석무지는 나무와 잡초가 덮여 가려져 있었으며, 돌무지의 수량 및 형상이 모두 명확치 않았으며, 학자들의 견해는 크게 나뉘었음2011년 6월 및 9월· 조사 기관 : 吉林大學邊疆考古中心(吉林省文物局 위탁, 泉陽林業局과 撫松文保所의 지원)· 조사 참여자 : 謝浩, 馬天夫, 梁娜, 陳影, 馮恩學· 대방정자산 돌무지(石堆) 유적에 대한 고고조사를 실시함. · 몇 개의 돌무지를 평면 분포형태가 인공으로 쌓은 유적인지, 제단 또는 기타 유적을 확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함.구조특징적석무지는 대방정자산 남반부의 산등성이를 따라 북에서 남으로 분포하고 있음. 1980년대 산 정상에 방화 조망탑을 세우고 산길을 만들면서 필요한 석재들을 적석무지에서 채취함에 따라 소실된 것이 많음.역사적 의미1. 유적성격1) 성터1987년 吉林省文物志編纂委會가 길이 50m, 너비 1m, 높이 0.35m의 석대를 발견했는데 이를 고대 성벽 흔적으로 파악하고 고구려 성터의 가능성을 제기함.2) 제단金 여진황족의 望祭가 이루어진 유적으로 보거나, 唐代에 조영되어 明代까지 이어지며 사용된 제단으로 이해함.3) 고구려 적석묘2008년 조사에서 돌무지 6개를 고구려 적석묘로 규정하였고, 2012년 조사에서는 적석무지가 산성의 포대나 제단이 아니라 적석묘군에 속한다는 것을 확인함.2. 고분연대해당 유적은 고구려 적석묘에서 일찍이 보이는 구축방법으로 고구려 건국 전후의 적석묘군일 가능성이 보임.자연환경대방정자산 산정상 등마루 위에 위치함. 지리좌표는 동경 127° 19′, 북위 42° 24′임. 산은 무송현으로부터 동북 10km, 대방촌 서남 2km 지점에 위치하며 동남으로는 장백산 주봉과 75km 떨어져 있음. 松江河 지류인 大浦江 북안에 자리함. 대황정자산은 해발 912m로 주봉 동쪽 山體의 상대고도는 300m이며, 주변 10km내에서 가장 높은 곳임.참고문헌· 吉林省文物志編纂委會, 1987, 「大方頂子城址」 『撫松縣文物志』· 國家文物局 主編, 1992, 『中國文物地圖集』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陳景河 等, 2008, 「大方頂子古祭壇遺址的考察報告」 『協商新報』2008-12-19· 張璇如, 2009, 「長白山祭壇探源」 『東北史地』2009-5· 馮恩學·馬天夫, 2012, 「抚顺大方(荒)頂子積石堆調査報告」 『邊疆考古硏究』11

      • 리스트여닫기 무송 대방정자성(撫松 大方頂子城址 ; 大方頂子山城) 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60년 5월무송현 문물보사대· 대방정자성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여 돌로 쌓은 성벽을 발견, 이 곳이 신석기 시대와 고구려 시대의 고성임을 확인함.1986년 5월무송현 문물보사대· 대방정자성에 대한 재조사를 진행하였으며, 지표에서는 어떤 유물도 발견하지 못하였음. 다만 현재 산등성이 위에서 6개의 돌더미(石堆)와 우물(枯井) 및 석벽(石帶)을 발견하였음.구조특징厂자 모양을 이루고 있음. 산등성이 위에서 말라버린 우물이 발견됨.역사적 의미고구려 및 발해의 성터지금까지의 조사 결과를 분석하면 이곳의 돌더미와 석벽은 성벽의 흔적으로 판단되며, 고구려 시기의 성터였을 것으로 보임.자연환경대방촌 서남쪽 4km 지점의 평원(平崗)에 위치함. 속칭 대방정자라 불리며, 동서 방향으로 뻗어가다가 남북 방향으로 꺾임. 양쪽은 골짜기이고 북쪽은 무송-천양간 도로가 있음.유물정보없음.참고문헌· 吉林省文物志編委會, 1987, 『撫松縣文物志』, 吉林省文物志編修委員會· 國家文物局, 1993, 『中國文物地圖集』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王禹浪·王宏北, 1994,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上), 哈爾濱出版社· 東潮·田中俊明, 1995, 『高句麗の歷史と遺跡』, 中央公論社· 馮永謙, 1994, 「高句麗城址輯要」『北方史地硏究』, 中州古蹟出版社· 남대명, 1995, 『연변문화 유물략편』, 민족문화· 魏存成, 1999, 「길림성 내 고구려산성의 현황과 특징」『고구려연구』8· 魏存成, 2002, 『高句麗遺迹』, 文物出版社· 劉子敏, 2008, 「也談大武神王伐扶余」『東北史地』2008-3· 魏存成, 2011, 「中國境內發現的高句麗山城」『社會科學戰線』2011-1

      • 리스트여닫기 무송 양동유적(撫松 羊洞遺蹟) 출토지유적 내연대고구려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6년 5월무송현문물보사대(撫松縣文物普査隊)· 문물조사 당시 해당 유적을 발견함.구조특징강변의 15~20cm 두께의 경작층 아래 40~60cm의 문화층이 확인되고 그 아래는 생토층임.역사적 의미출토 유물을 분석하면 금속과 석기가 병행한 시대임을 보여줌. 토기의 모양으로 미루어 고구려 시기로 판단되나, 석기의 존재로 인해 구체적 시기 판단이 어려움.자연환경西江村 서남 약 1km 지점 漫江 우안의 대지 위에 위치. 강은 호형으로 유적지를 감싸고 북으로 흘러감. 강 맞은편은 낭떠러지이며 자연적으로 형성된 동굴이 있음.유물정보석부, 토기편 다수, 청동기 잔편, 철기 잔편참고문헌· 吉林省文物志編委會, 1987, 『撫松縣文物志』· 國家文物局 主編, 1992, 『中國文物地圖集-吉林分冊』, 文物出版社

      • 무송 황니외자유적(撫松 黃泥崴子遺蹟)

      • 무송 소남구 유적(撫松 小南溝 遺蹟)

      • 리스트여닫기 무송 신안유적지(撫松 新安遺址) 출토지백산시 무송현 무송진 신안촌연대발해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3년 11월왕지민(王志敏), 서평(徐平, 撫松縣文化館)· 撫松縣 新安鄕 新安村 촌민 周成貴가 자신의 집 채소밭에서 야채움을 팔 때, 연화문 와당·포문 기와·銅雙環器·銅弓形器·어망추(網墜)·토기편 등이 발견됨. 지역 文管會가 이 소식을 들었고, 王志敏과 撫松縣文化館 徐平이 조사를 진행함. 산언덕에서 아래 산비탈까지 회색 토기편과 기와편 등의 유물이 흩어져 있었음. 출토 유물을 근거로 유적지의 연대를 발해시기로 추정함. 이 조사에서는 도면과 사진자료를 남기지 않았고, 유물 출토 지점에 대한 설명이 없음.1985년 봄· 주민이 상술한 출토지점에서 북측으로 70m 떨어진 비탈에 집을 짓기 위해서 기초를 파다가, 철제 화살촉(鐵鏃) 두 묶음을 발견함. 각 묶음에는 20여개가 있었음. 농민들의 말에 의하면, 화살촉은 梭形起脊과 短鋌方柱形 두 종류가 있었다고 함. 周成貴의 부친 말에 의하면,그 집 채소밭에서 2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는 이웃집 촌민이 야채움을 파다가 1.4~1.6m 깊이의 지충에서 돌로 쌓은 주거지벽 기초(房屋墻基)를 발견하였는데, 기초(基)의 너비는 30~40cm였다고 함. 이 돌은 현지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라, 2.5㎞ 밖의 牛崗才에 있는 것임. 근대 사람들은 이 돌을 캐서 집을 짓지 않았고 석벽(石牆)이 비교적 깊게 매장되어 있는 점을 근거로 근대의 것이 아니고, 발해시기의 주거지라고 봄.1986년 5월무송현문물보사대(撫松縣文物普査隊)· 유적지 서남모서리 근처의 지표에 유물이 많은 약간 높은 대지(高埠)를 시굴하였는데, 연화문 와당·치미 등 전형적인 발해시기의 건축부재가 출토됨. 유적지 동·남·서 바깥 주위에 성벽과 성문 흔적이 발견되면서 발해시기의 성지로 파악하였고, ‘新安古城遺址’로 명명함. 또한 사료 기록을 토대로 하여 渤海 豐州 治所로 추정하였음. 조사를 통해 신안유적지의 범위를 확정하였고, 성벽 벽체 기본구조를 묘사하였으며, 출토 유물의 종류와 수량을 공포하였음. 비교적 과학적인 고고발굴을 진행함으로써, 많은 유물을 발견하였고 내용도 풍부하여, 학술계에 꽤 깊은 영향을 주었고, 그 성과는 지금까지도 광범위하게 인용되고 있음. 다만 정식적인 고고학적 보고서가 발표되지 않았는데, 文物志에 간단한 기록과 출토 유물 일부에 대한 사진과 도면이 있을 뿐임. 그리하여 발굴과정, 유적의 형태, 유물이 출토된 구체적인 지점, 遺存이 분포된 정황과 상호 사이의 관계 등의 문제 등에 대해 알 수가 없음.1986년 6월· 6월 27일 유적지를 조사할 때, 동북모서리 외측에서 제련유적지(煉鐵) 1곳을 발견함.1986년 7월· 1986년 7월 新安村의 한 농민이 유적지 안에서 나무 뿌리를 캐다가 동제 허리띠고리(銅帶扣), 철제 칼(鐵刀), 철제 화살촉(鐵鏃) 등을 발견함.1994년 가을· 조사기관 :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 조사자 : 하명(何明), 왕청(王青), 장건우(張建宇), 포현빈(包顯斌) (이상 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 왕문흥(王文興, 撫松縣文管所)· 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가 유적지에 대해 재차 조사와 시굴을 진행함. 이 조사에서는 유적지의 지리 상황과 보존 상태를 상세하게 기록하였음. 유적지 범위 안을 동·중·서 세 구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마다 시굴에 적절한 지점을 선정하여, 트렌치를 파는 방식을 진행함. 각 구역 가운데 서쪽 구역에 위치한 피트에서 비교적 풍부한 유구와 유물이 발견되었음. 발굴 규모가 비교적 작아 유적지 일부분만 노출되면서, 유적지의 전모를 알기는 어려웠음. 그리하여 주거지(房址)의 평면구조, 실내시설, 방향, 문길 등의 정황을 파악하지 못함. 다만 서쪽구역이 중요한 건축지들의 소재지임을 파악하였음. 조사보고서에는 시굴 성과를 간단하게 소개하고,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어 오가는데 매우 편리하다고 기술하였는데, ‘榆樹川 나루터에서 선착장에 도착한 다음, 동문을 통해 성내를 진입하고 다시 抽水로 갈 수 있다. 혹은 강 맞은편의 二道花園에서 강을 건너 남벽의 동쪽 성문을 통해 성내로 진입한 후 抽水로 갈 수 있다’고 언급하였음. 그 이외에 성곽 북면·서쪽구역과 마주하는 산봉우리 정상에서 봉화대와 유사한 유적을 발견하였는데, 북부 산 위의 요망시설로 보았음. 신안고성을 발해시기 朝貢道의 중요 城市로 보면서, 대체적으로 기존의 결론을 긍정함. 다만 보고서에서는 시굴지점의 구체적인 위치와 유물이 출토된 명확한 지점을 언급하지 않았고, 출토 유물의 도면 혹은 사진을 제시되지 않았음. 또한 유적지 성격에 대한 진전된 견해가 보이지 않음.2009년· 조사기관 :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 조사자 : 송옥빈(宋玉彬, 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 발굴 책임, 보고서 편저 지도),양회려(梁會麗, 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 집행 책임, 도면과 사진 담당), 어단(於丹, 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 장철(張哲, 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 곡환(穀芄, 白山市文物管理委員會辦公室), 왕문흥(王文興, 撫松縣文物管理所), 류휘(劉輝, 吉林大學考古系研究), 이음철(李窨哲, 吉林大學考古系研究), 어려군(於麗群, 토기 복원 및 탁본 담당), 장옥춘(張玉春, 금속기 보호와 복원), 왕배신(王培新, 吉林大學邊疆考古研究中心, 보고서 편저 지도)· 2009년 5월 營(營城子)-松(松江河)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吉林省文物考古研究가 고속도로 공사 범위와 부근 구역에 대해 구제발굴을 진행하였는데, 6개월 동안 2,100평방미터를 발굴함. 발굴구역은 유적지 서남모서리에 위치하는데, 1986년 시굴지점과 중복됨. 지리좌표는 동경 127° 11′04″, 북위 42° 19′ 54″이고, 해발은 420m임. 遺存이 가장 풍부한 서남쪽 대지를 전면적으로 발굴해, 건축지의 規格·형태 등의 정황을 파악함. 아울러 남쪽 성벽에 대한 절개조사를 진행함. 확인된 성지 범위 안에서 이전에 언급된 “전체 유적지 범위 내에 기와편의 유물이 분포되었다”라는 정황은 발견하지 못함. 성지 서남모서리 즉 발굴구역에 해당하는 대지 위에서 풍부한 유물을 발견함. 발굴을 통하여 유적지의 성격을 파악하고, 새로운 발해시기의 유적·유물 자료를 대거 수집함으로써, 유적지와 관련한 발해에 대한 인식이 풍부해짐. 그리고 유적지에 남아 있는 명확한 지층을 통해 後漢, 발해 중기, 발해 후기~金 초 등 3기 遺存을 확인함으로써, 유적지가 渤海遺存의 단일 문화유적지가 아님을 확인함.구조특징1983년 처음으로 무송 신안유적에 대한 조사가 있었는데, 출토유물을 근거로 유적을 발해시기로 추정하였다. 1985년에는 건물 신축과정에서 주거지벽 기초가 발견되어 발해시기의 주거지로 추정하였다. 1986년 시굴조사를 통하여 유적지 동, 남, 서쪽에서 성벽과 성문 흔적이 발견되면서 발해시기의 성지로 파악하고 ‘신안고성유지’로 명명하였다. 이 과정에서 발해 풍주(豐州)의 치소로 추정하였다. 고성의 형태는 긴 사각형태였고, 동벽 길이는 490m, 남벽 길이는 1,150m, 서벽 길이는 680m이다. 북벽은 경작지와 평면을 이루고 있는데, 길 옆 단면에서 판축 흔적과 대체적인 방향을 볼 수 있고, 길이는 1,020m이다. 성벽의 전체 둘레는 3,340m이다. 또 유적지의 동북 모서리에서 제련유적 1곳도 발견하였다. 동서 길이는 50m이고, 너비는 명확하지 않다.1994년에는 조사와 시굴을 진행하였는데, 성곽 북쪽 산봉우리 정상에서 봉화대와 유사한 유적을 발견하였는데, 신안고성을 조공도(朝貢道) 상의 중요 성시(城市)로 파악하는 것의 한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유적지에 대한 도면, 사진은 제시되지 않았고, 주거지, 성곽 등의 전모에 대한 보고도 미비하였다. 보고에 따르면, 유적의 평면은 불규칙한 평행사변형이다. 동·남·서 세 면에 성벽이 있고, 북면은 산세를 자연 성벽으로 삼았다. 동벽은 490m이고, 한 개의 문(동문)이 있다. 남벽은 1,150m이고, 두 개의 성문(동쪽과 서쪽 양측에 각각 한 개)이 있다. 서벽은 680m이고, 두 개의 성문(남쪽과 북쪽 양측에 각각 한 개)이 있다. 북면은 산세 방향과 동서 양벽 사이의 거리를 볼 때, 1,000여m로 볼 수 있다. 북벽의 흔적은 발견하지 못하였다.2009년, 발해시기 기와편, 토기편이 흩어져있는 대지를 발굴하였다. 여기서 출토된 유물들을 분석한 결과 한, 부여, 고구려, 발해 시기의 문화적 특징을 발견하였다. 주거지 흔적은 명확하지 않지만, 출토유물이 대부분 생활용기였음으로 주거지로 파악되었다. 유적지는 ‘신안유적지 제1기 유존(遺存)’으로 명명하였다.역사적 의미무송 신안유적지는 범위가 매우 크고, 유물도 비교적 풍부하게 출토되었다. 특히 건축자재가 많고, 크기가 크다는 점은 이곳에 거대 건축물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즉 고고발굴을 통해 비교적 높은 건축등급을 갖추고 있고, 적어도 보통 민들의 주거지나 사용 건물은 아니라는 점이 밝혀졌다. 유적의 성격을 특정할 수는 없지만, 관방기구(官方機構) 이상 급의 유적임이 유추된다. 그런데 1977년, 신안유적지 인근에서 발해 고분 3기가 조사되면서 두 유적간의 거리로 볼 때, 서로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고, 신안유적지에서 출토된 유물이 거의 모두 발해문화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어서, 신안유적은 일찍부터 발해의 중요 시설로 인식되어 왔다. 나아가 신안유적을 발해 서경압록부(西京鴨淥府)의 풍주성(豊州城) 구지(舊址)로 비정하는 의견이 1980년대 이래 학계의 지지를 받아 왔다. 기록에 풍주성은 발해 조공로 상에 위치해 있다고 했는데, 신안 유적지 역시 대체로 사료에 기록된 범위 안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추정은 정밀 고고 발굴 조사 없이 시굴조사에서 얻은 결과였고, 구체적인 정황 없이 장기간 정체되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2000년대 이르러 이에 대한 반론도 제기되었는데, 무엇보다 유적지의 위치가 교통이 불편하고, 유적의 경작지가 자급자족 방식의 주성(州城)을 경영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 그리고 유적에서 성벽과, 성문이 그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더욱이 출토유물이 모두 발해시기의 것이라는 보고도 기와에 한정된 것으로 여타 유물의 상관관계도 모호했기 때문이다.2009년 신안유적에 대한 조사와 발굴이 시작되면서 유적의 성격을 깊이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현 단계까지도 판단을 내릴 수는 없지만, 대체로 풍주성에 비정하는 논리는 상당부분 후퇴한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성벽으로 인식되었던 벽은 현지인이 강물의 범람을 막기 위해 설치한 토루로 파악되기도 했다. 또 기본적인 성시 배치와 시설과는 거리가 있고, 출토유물의 문화적 성격은 한대, 부여, 고구려, 발해의 모습도 보이고 있어서 이 역시 향후 연구되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조사보고자는 신안유적이 풍주성이 아닐 가능성이 더 높으나, 만약에 풍주성이 아니라면, 풍주성에 대해 중요한 보조 기능을 하는 관문(關卡)으로 추정하기도 하였다. 신안유적지가 위치한 지점은 외부에서 수로를 통하여 풍주성으로 갈 때 반드시 지나야 하는 곳으로 주성(州城)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면서 검문소 성격의 수로교통역참이었을 것으로 파악하였다. 뿐만 아니라 두도송화강(頭道松花江)을 왕래하는 선박에 대한 여객과 화물의 환승, 물자 보급 등과 관련한 편리한 조건을 제공할 수 있어, 이상적인 항구 혹은 역참이 되고, 주성(州城) 진출입을 위해 설치된 확실한 장벽으로도 볼 수 있다고 평가 하였다.자연환경유적은 길림성 백산시 무송현 무송진 신안촌에서 서쪽은 약 1km 거리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 무송진은 동남쪽 7.5km 정도에 위치하며, 백산시의 시중심에서는 동북 77km 지점이다. 유적지에서 동남 약 80km 지점에는 백두산 천지가 있다.유적지는 매우 개활한 경작지에 위치하고 있고, 유적지 앞(남쪽)으로는 두도송화강(頭道松花江)이 흐르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산에 의치하고 있다. 북면의 계속 이어지는 여러 산들과 유적지를 둘러싸고 있는 頭道松花江이 천연장벽이 되면서, 공격과 퇴각이 가능하고 수비가 가능한 전략적인 지위를 보유하게 되었고, 교통 중심지를 통제하는 요충지가 작용할 수 있다.유적지는 저수지 침수범위 안에 있는데, 남측과 서측 가장자리가 장기간 강물에 침식되어, 면적이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다. 신안유적지는 이 대지 서부에 위치하면서 서·남 양측이 대지 가장자리 가까이에 있어 비교적 심하게 침식되었기 때문에, 이전에 확정된 유적지 범위 일부가 없어졌다. 유적지가 위치한 대지는 지세의 기복이 크고, 홍수에 따른 침식으로 형성된 남북향의 골짜기(沖溝)가 여러 줄기 있는데, 유적지를 관통하여 두도송화강 안으로 합류하고 있다.유물정보신안유적지는 지표에서 토기편과 기와편이 대량으로 수습되었다. 지표에서 수습된 유물들은 대부분 발해시기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지표와 시굴조사를 통해서 화살촉 등의 철기류, 석기, 동기 등도 다양한 종류, 다량 출토되었다.참고문헌· 王志敏, 1985, 「吉林撫松新安渤海遺址」『博物館研究』1985-2· 吉林省文物志編委會, 1987, 『撫松縣文物志』· 張殿甲, 1988, 「渾江地區渤海遺跡與遺物」『博物館研究』1988-1· 國家文物局, 1993, 『中國文物地圖集』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 2000, 「撫松新安渤海古城的調査與發掘」『博物館研究』 2000-2·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2013, 「吉林撫松新安遺址發掘報告」『考古學報』2013-3· 梁會麗, 2013, 「新安遺址渤海遺存性質新論」『東北史地』2013-24· 梁會麗, 2014, 「試論新安遺址第一期遺存」『考古與文物』2014-4

    • 리스트여닫기 정우현(靖宇縣)

      • 정우 승리 고분군(靖宇 勝利 古墳群)

      • 리스트여닫기 정우 유수천고성(靖宇 楡樹川古城 ; 楡樹川山城) 출토지성 안 동남쪽 경작지연대고구려/발해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57년· 1957년 여러 차례의 조사를 하였고,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재조사를 하였음(國家文物局, 1993).1986년 이전· 1986년 이전에도 여러 해에 걸쳐 조사했으며, 채집된 유물은 매우 소량임. 기왕의 조사자들은 대체로 현지인들이 전하는 말에 따라 고구려 시기의 산성으로 판단하였음1986년1987년· 1986년과 1987년 연속으로 2차례에 걸친 조사에서, 성 안의 동남쪽 경작지에서 소량의 유물을 채집하였으며, 성의 전반적인 유적을 조사하고 발해 시기의 성터로 새로 인정함.· 현문물보호단위.구조특징장방형의 성곽으로 남벽 정중앙에 반원형의 옹문이 설치되어 있고, 성 내에 우물 유적이 2곳 있음.역사적 의미1) 撫松縣의 신안고성(新安城址)과 자매성설유수천고성은 무송현의 신안고성과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고, 두 성 간의 거리가 가까우며, 같은 시기의 성으로서 관계가 매우 밀접하므로 자매성으로 보임.2) 발해의 豊州 치소설 『渤海國志長篇』 下編 「地理考」 豊州條 下에는 풍주(일명 盤安郡)가 西京鴨綠府에서 동북쪽으로 210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음. 서경압록부의 치소는 대체로 臨江鎭에 비정되는데, 유수천고성과 신안고성은 임강에서 동북쪽으로 200여리 떨어진 곳에 있어 방위와 거리가 서로 부합됨. 성의 규모 또한 두 곳 모두 치소성으로 삼을만하므로 풍주의 소재지로 볼 수 있음.자연환경유수천고성의 동, 서, 북쪽은 가파른 절벽이며 높이가 거의 100m에 달함. 남쪽은 산의 평탄한 언덕을 형성하고 있음. 서쪽 산기슭에는 三道花園河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 성의 서쪽을 지나 頭道松花江에 유입됨.유물정보모래혼입 황갈토기, 니질 회색토기, 수키와 잔편이 출토. 강의 북안에 위치한 신안고성의 유물과 같음.참고문헌· 吉林省文物志編委會, 1988, 『靖宇縣文物志』, 吉林省文物志編修委員會· 孫進己·馮永謙, 1989, 『東北歷史地理』2, 黑龍江人民出版社· 國家文物局, 1993, 『中國文物地圖集』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馮永謙, 1994, 「高句麗城址輯要」『北方史地硏究』, 中州古蹟出版社· 東潮·田中俊明, 1995, 『高句麗の歷史と遺跡』, 中央公論社· 魏存成, 1999, 「길림성 내 고구려산성의 현황과 특징」『고구려연구』8· 王綿厚, 2002,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김진광, 2012, 『북국 발해 탐험』, 박문사

  • 리스트여닫기 길림성 사평시(吉林省 四平市)

  • 리스트여닫기 길림성 요원시(吉林省 遼源市)

    • 리스트여닫기 용산구(龍山區)

      • 리스트여닫기 용수산성(龍首山城) 출토지 길림성 요원시 용수산(吉林省 遼源市 龍首山)연대 4세기 전반 이후(여호규, 1999)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50 1950년대에 용수산 정상부에서 산성을 발견하였음.1983 1983년 서남모서리에서 연화문 와당이 발견됨.1984 1984년 남쪽 연못 부근에서 홍갈색 귀문 암키와(홍갈색 귀문 대판와)가 발견되는 등 1980년대 이후 유물이 간헐적으로 발견됨.1990요원시문물관리소(遼源市文物管理所)1990년을 전후하여 요원시 문물관리소에서 여러 차례 조사하였는데, 1990년 7월 성안 남북 골짜기 연못에서 토기편이 대량 출토됨.구조특징 성벽은 용수산의 자연 산세를 따라 다진 흙으로 쌓았음. 대략 타원형임(불규칙한 타원형과 장방형의 중간 정도; 여호규). 산성은 동북·동남·서북 세 모서리의 지세가 비교적 높은 반면, 서측의 중부와 서남 모서리는 낮음. 성 내부는 남북이 길고, 동서가 짧음(동서가 길고 남북이 짧음; 요원시문물관리소). 성내의 높낮이는 일정하지 않지만 하나의 분곡(盆谷)과 같음. 현재 서쪽 성벽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음. 윗너비 1.5m, 기초 너비 7m, 잔고 약 2m. 서벽의 단면에서는 지금도 당시 흙을 다져 판축한 성벽 층위를 선명하게 볼 수 있음. 매 층의 다진 두께는 약 10-13㎝임. 흙으로 쌓은 산성의 서북쪽 모서리와 서남쪽 모서리에는 당시의 각루 흔적이 남아있는데, 흙벽 좌우로 튀어나와 있는 반원형의 고대(高臺)의 기초가 남아있음. 직경 6-7m임. 성문은 북문과 서문, 2개의 문지(門址)가 있음. 성내에 고구려 및 발해 시대의 유물이 대량으로 산포해 있음. 산성은 동·남·서 3면의 지세는 개활하며, 북면은 산줄기로 이어져 있음. 북쪽을 제외한 삼면의 경사가 모두 가파름. 특히 동쪽은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이며, 남쪽도 높이 20m 이상의 절벽임. 경사가 비교적 완만한 서쪽도 끝부분은 급경사면임. 성벽은 용수산의 자연 산세를 따라 다진 흙으로 쌓았음. 북벽은 동북 모서리에서 서쪽으로 뻗은 산등성이를 따라 축조하였음. 안팎의 경사가 모두 급함. 나머지 세 성벽은 절벽과 낭떠러지 가장자리에 자리잡고 있으며 세 성벽의 바깥쪽은 경사가 가파르지만 안쪽은 비교적 평탄함. 동북·동남·서북 세 모서리의 지세가 비교적 높은 반면, 서측의 중부와 서남 모서리는 낮음. 대체로 동벽이 높고 서벽이 낮은 산비탈에 성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서벽에서 동벽으로 갈수록 경사가 급해지며, 내부에는 평지도 협소한 편임. 서벽 부근의 남북 양단에 위치한 골짜기와 연못을 중심으로 약간의 평지가 형성되어 있음. 서벽의 보존상태가 양호함. 기단부의 너비 7m, 윗 너비 1.5m, 잔고 2m임. 서벽의 축성 상태를 보면 모래흙과 진흙을 번갈아가면서 층층이 다져 판축하였음. 서문 북측의 성벽 단면에는 황갈색 사질토를 8-9㎝ 두께 흑회색 니질(泥質)토를 3㎝ 두께로 번갈아가면서 층층이 판축한 층위가 선명하게 노출되어 있음. 남벽 서단의 성벽 높이 10m이며, 황갈색 사질토와 흑회색 니질토를 5㎝ 두께로 번갈아가면서 판축한 층위를 확인할 수 있음. 성벽을 불에 구워 단단하게 한 부분도 확인됨. 북벽의 서측 성벽도 비교적 잘 남아있음. 동벽 중단도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함. 기단부의 너비 3m, 윗너비 1m, 잔고 1m 전후임. 동벽의 남북 양끝 및 북벽의 동단은 심하게 파괴되어 성벽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듦. 산성 전체가 공원으로 개발, 조성, 이용되는 과정에서 많이 파괴되었으며, 특히 북벽 부근에 각종 시설이 들어서서 성벽이 많이 훼손되었음.역사적 의미 군사방어 및 지방거점성설이 있음. 요원지역은 고구려 초기 중심지인 압록강 중류일대에서 휘발하 일대를 거쳐 요하상류방면으로 나아갈 때 거쳐야하는 교통로의 요충지임. 고구려는 4세기 전반경 길림 방면의 부여지역을 둘러싸고 전연과 여러 차례 각축전을 벌였음. 고구려는 늦어도 4세기 전반 길림 지역의 부여를 병합하던 시기에는 요원지역으로 진출하였다고 추정됨. 그러므로 용수산성은 고구려가 이 지역으로 본격적으로 진출하였을 4세기 전반 이후에 축조되었다고 추정됨. 지형조건과 교통로로 보아 북쪽의 이통하, 서북쪽의 동요하(東遼河) 하류, 서남쪽의 구하(寇河) 등의 방면에서 요원지역을 거쳐 휘발하 일대로 나아가려는 적군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하였다고 추정됨. 이러한 점에서 용수산성 동북쪽 1.5㎞ 지점의 성자산산성은 주로 북쪽인 이통하 방면, 용수산성은 북쪽의 동요하 하류방면이나 서남쪽의 구하 방면에서 침공하는 적군을 방어하는 기능을 담당하였으며, 동남쪽의 공농산성은 위치상 배후산성으로 여겨짐. 한편, 용수산성에서는 성자산산성·공농산성에 비해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는데, 특히 성 내부의 계단상의 대지에서 기와가 대량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중요한 건물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추정됨. 용수산성은 요하일대의 지방거점성으로서 성 내부에는 군사시설 뿐아니라 지방지배를 위한 관청 등이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높음. 용수산성은 군사방어성인 동시에 지방지배를 위한 치소의 역할까지 담당하였을 것으로 추정됨(여호규, 1999). 연대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가 있음. 고구려 시기, 특히 고구려가 요동을 점거한 뒤 축조하였을 것임. 용수산성은 토축산성으로 토축성벽 방식은 고구려가 요동을 점거한 뒤부터 출현했음(이전복, 1994). 용수산성 출토 토기의 특징을 고려할 때 대체로 고구려 후기에 축조되어 발해 초기까지 계속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됨(요원시문물관리소, 1994). 4세기 전반 이후에 축조함(여호규, 1999).자연환경 길림성 중남부의 요원시 시내 동쪽의 용수산 위에 위치함. 용수산성 동남쪽으로 동요하(東遼河)·위진하(渭津河)가 합류하는 지점 건너편 2㎞에 공농산성(工農山城)이 위치함. 용수산성은 동북쪽으로 성자산산성(城子山山城)과 1.5㎞ 떨어져 있음. 용수산성의 남쪽 2㎞ 거리에 여명산(黎明山)이 있고, 서쪽으로는 요원시 시내와 이어져 있음. 용수산은 한 마리의 거대한 용이 북에서 남으로 쭉 뻗어나가 동요하안(東遼河岸)에 이르러 머리를 들고 멈춰있는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음. 용수산은 현재 용산공원이며, 시가지 확장으로 인해 동남방면을 제외한 사방이 시가지에 둘러싸여 있음. 용수산성은 남북으로 길게 뻗은 산줄기의 남단에 위치. 산줄기로 이어지는 북쪽을 제외한 동·남·서 3면은 평탄한 개활지로서 전체적으로 요원분지를 향해 돌출한 지형을 이루고 있음. 산성 남쪽으로 동요하가 남단의 절벽과 150m 거리를 두고 서쪽으로 흐르고(西流) 있고, 동남쪽에서 서북쪽으로 흐르던(西北流) 위진하, 서남쪽에서 동북쪽으로 흐르던(東北流) 이수하(梨樹河)가 동요하에 유입됨. 동요하는 요원시 동계의 이통하(伊通河)· 동요하 분수령에서 발원함.유물정보 홍갈색승문암키와(板瓦) 1점, 민무늬수키와(筒瓦) 1점, 명문기와(刻劃文字符號瓦片) 15점, 연화문와당(蓮花紋瓦當) 6점, 회색토기편(灰色陶片) 1점, 황갈색토기편(黃褐色陶片) 1점, 흑회색니질토기편(黑灰色泥質土器片) 1점, 접시(鎜) 1점, 소반(陶盤) 2점, 외반구연부편(敞口口沿陶片) 1점, 동이구연부편(盆口沿片) 2점, 광구장경호구연부편(廣口長頸壺口沿片) 1점, 호구연부편(陶口沿片) 17점, 사질토기편(砂質陶片) 1점, 토제솥다리(鼎足) 1점, 옹(陶瓮) 1점, 동이(陶盆) 4점, 잔(陶杯) 1점, 호(陶罐) 11점, 파수(把手) 2점, 시루저부편(陶甑底殘片) 2점, 구연부편(口沿片) 1점, 저부(底片) 2점, 시유도기(鼓腹釉陶器) 1점, 방추차(陶紡輪) 1점, 철촉(鐵鏃) 6점, 철도(鏃刀) 1점, 미상철기편(未詳鐵器片) 1점, 보습(鐵鏵) 1점, 철제식품(鐵製裝飾品) 2점, 말 이빨 1점, 돌절구(石臼) 4점, 석제건축장식품(石製建築裝飾品) 1점 동제팔찌(銅鐲) 1점, 철도(鐵刀) 1점, 철촉(鐵鏃) 9점, 철제허리띠고리(鐵帶扣) 1점, 철모(鐵矛) 1점, 철제끌(鐵鑿) 1점, 철제고리(鐵環) 1점, 철기파편(鐵器殘件) 2점(박물관연구2000-2)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修委員會, 『遼源市文物志』, 1988 · 細谷良夫, 『中國東北部における淸朝の史跡』, 東北大學, 1991 · 唐洪源, 「吉林遼源市龍首山城內考古調査簡報」『考古』 1994-3, 1994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합이빈출판사, 1994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王綿厚, 「鴨綠江右岸高句麗山城硏究」『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北方史地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4 · 唐洪源, 「吉林遼源市龍首山遺址的調查」『考古』 1997-2, 1997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唐洪源, 「遼源龍首山再次考古調査與淸理」『博物館研究』 2000-2, 2000 ·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馮永謙, 「高句麗千里長城建置辨」『社會科學戰線』 2002-1, 2002 · 張福有·孫仁傑·遲勇, 「高句麗千里長城調查要報」『東北史地』 2010-3, 2010

      • 리스트여닫기 성자산산성; 성자산산성(城子山山城; 城子山古城) 출토지 길림성 요원시 용산구 산만향(吉林省 遼源市 龍山區 山灣鄕)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30 성 내부의 북쪽 건물지에서 기와 등이 발견되었음.1980 1980년 조사시 고구려 시기의 토기를 대량 출토하였음.1981사평지구문물관리소(四平地區文物管理所)1981년 10월 중순에 사평지구 문물관리소에서 조사하여 요·금시기의 토기·기와를 대량 출토하였음.1994 1984년 봄 고고조사에서는 서벽 바깥쪽에서 50m 떨어진 곳에서 청동기 시대의 유적을 발견하였음.구조특징 요원 성자산산성은 산등성이를 빙 둘러싸고 흙을 다져 축조하였음. 산성은 타원형임. 성벽의 단면은 사다리꼴이며, 윗 너비 약2m, 기초 너비 6m, 높이 약 3m임. 성내 지세는 낮고 웅덩이 같은데 성내에서 서북 모서리가 가장 높음. 북문 바깥에 옹성이 있으며, 옹성은 고리 모양임. 북문의 옹성과 동성(東城)의 치(馬面) 사이에 천연 해자(水溝)가 하나 있음. 성벽 바깥에 약 2.5~4m 되는 지점에는 성벽을 보호하기 위한 참호(壕)를 팠으며, 위는 넓고 아래는 좁음. 참호 규모는 윗너비 3m, 아랫 너비 1.5m, 깊이 1m 정도임. 참호 바깥에 높이 약 1m되는 흙으로 쌓은 제방(土堤)을 구축했음. 성문은 남문과 북문 2개가 있으며, 성내에 남문과 북문을 연결하는 큰 길이 있음. 산성에서 가장 낮은 지점인 남벽 중앙에 정문이 있음. 골짜기 단애 입구를 이용해 성문을 수축하였으며, 문 너비 30m임. 북문은 북벽의 동단에 위치하며 북문 너비 4m임. 동남모서리에서 북쪽으로 50m 되는 지점에 치가 하나 있음. 반원형이며, 직경 6m임. 성벽과 마찬가지로 흙으로 축조하였으며 동남방면의 개활지에서 완만한 산비탈을 따라 산으로 오를 수 있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음. 북벽 서단에도 치로 추정되는 장방형의 성곽시설이 있음. 북문 바깥에 옹성이 있으며, 옹성은 고리 모양임. 성자산산성에서 지세가 가장 높은 서북 모서리와 서남 모서리에 모두 각루 흔적이 있음. 각루 유적은 반원형으로 만들었으며, 직경은 8m임.역사적 의미 산성의 규모, 위치 및 형태에 따르면 성자산산성은 용수산성, 공농산성과 함께 축조 연대상 긴밀한 연관관계가 있을 것으로 분석됨. 성자산산성이용수산성의 동북부에 위치하는 것으로 볼 때 용수산성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이 분명함. 성자산산성의 남쪽에 있는 도로는 곧 당시의 고대 교통로에 해당하므로 용수산성 동북모서리에 자리잡고 있는 성자산산성은 용수산성과 함께 교통로를 직접 공제하거나 봉쇄함으로써 외적의 침입을 방어할 수 있음. 성자산산성의 북면 지세로 보아 성자산산성은 방어 기능외에도 정찰과 경보 등의 기능도 하였음. 성자산산성은 비록 용수산성의 규모가 크고, 성내 유물도 용수산산성처럼 풍부하지 않지만 상호 거리 및 위치로 보아 성자산산성은 용수산산성의 외곽 위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됨(왕우랑·왕굉북, 1994; 여호규 1999).자연환경 요원 성자산산성은 요원시 용산구 산만향 71촌(七一村) 3대(三隊)의 북쪽 산 정상부에 위치하며, 성자산고성이라고도 부름. 서쪽 1㎞ 거리에 요원시 중심가가, 서남쪽 약 1.5㎞ 거리에 용수산산성이 위치하며, 남쪽으로 동요하(東遼河)를 사이에 두고 공농산성과 서로 마주보고 있음. 요원 성자산산성의 사면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남쪽 100m 떨어진 곳에 중심가를 오가는 전철 길이 있음. 요원 성자산산성 아랫면은 광활한 충적평원임. 현재 시가지의 확장으로 인해 산성의 남쪽 뿐 아니라 동쪽에도 각종 공장과 민가가 밀집해있음. 요원 성자산산성 남쪽에는 요원시 제1제약공장이 있으며, 공장 앞으로 요원에서 이통현으로 통하는 도로가 있음. 도로 남쪽에는 동요하가 서쪽으로 흐르고 있으며, 하천 양안에는 비교적 넓은 충적평지가 펼쳐져 있음.유물정보 구연부(口緣部) 1점, 대상파수(帶狀把手) 1점, 평저저부편(平底片) 1점, 황백색시유자기편(黃白色施秞陶器片) 1점, 포문기와(布文瓦) 1점, 도자기저부(瓷器底) 1점, 니질회색토기편(泥質灰色陶片) 1점, 모래혼입토기잔편(沙粒混入陶片)1점, 벽돌(塼) 1점, 도자기류(瓷器類) 1점참고문헌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합이빈출판사, 1994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北方史地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4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리스트여닫기 공농산성; 공농산고성(工農山城; 工農山古城) 출토지 길림성 요원시 용산구 공농향(吉林省 遼源市 龍山區 工農鄕)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58요원시문물관리소(遼源市文物管理所)1958년 이래 요원시 문물관리소에서 여러 차례 조사하였음.구조특징 성은 요원분지를 향해 동남에서 서북으로 돌출한 산줄기에 위치하였음. 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은 동북 모서리로 해발 384.25m임. 공농산성의 지세는 험준하며, 북벽과 북쪽의 큰 언덕과의 사이에 깊은 골짜기가 형성되어 있음. 공농산성은 대략 타원형임. 성벽은 산세를 따라 황갈색 사질토와 흑갈색의 니질(泥質)토로 축조하였음. 성벽은 황갈색 사질토와 흑갈색 니질토를 번갈아 층층이 다져쌓는 판축기법을 이용하여 성벽을 쌓았음. 서벽 중간 구간의 단면은 다져쌓은 층위가 선명하며, 두께는 균일하지 않음. 황갈색 흙의 두께는 약 12㎝, 흑갈색의 흙 두께는 약 10㎝ 정도임. 서벽은 다른 성벽에 비해 약간 높고 보존상태도 양호한 편임. 서벽 단면은 사다리꼴이며, 높이 약 5m, 윗너비 약 2m, 바닥 너비 8m임. 북벽 동쪽 구간은 서쪽 구간에 비해 약 1m 정도 더 긺. 동벽과 남벽 양 성벽의 지세는 가파른 산세를 이용해 축조하였음. 성벽은 현재 높이 약 1m임. 서북 모서리의 지세는 비교적 높으며 서에서 동쪽으로 비탈이 형성되어 있음.역사적 의미 용수산성의 방어용 전연성보(前沿城堡)설이 있음. 공농산성의 위치로 보아, 서북부에 동요하(東遼河)를 사이에 두고 용수산성과 근접해 있으며 북면으로는 성자산산성과 멀리 서로 마주보고 있음. 축조 연대는 성자산산성과 근사한데, 두 성의 성벽이 모두 천연의 산의 형태를 이용해 산등성이를 따라 토축하였음. 두 성은 모두 제고점이 있어 요망 초소의 기능을 하였음. 요망대에 서면 주위의 하천 상황을 한 눈에 감시할 수 있음. 공농산성은 남쪽으로 위사하, 북쪽으로 동요하에 잇닿아 있어 천연의 해자를 형성함. 공농산성은 용수산성 동남쪽에 위치하여 용수산성을 방어하는 전연(前沿) 성보 역할을 하였음. 공농산성과 성자산산성의 위치로 보아 두 성은 용수산성으로 향하는 주요 교통로를 공제하는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판단됨. 규모 및 성내 출토 유물로 보아 산성의 축조연대는 고구려 시기에 해당하며, 후에 발해와 요금 시대에도 계속 사용하였을 것임(왕우랑·왕굉북, 1994). 요원 용수산성의 외곽 위성설이 있음. 산성의 입지조건이나 축성방식 등이 주변에 위치한 용수산성, 성자산산성 등과 대체로 유사함. 공농산성은 고구려 시기에 축조되어 요금 시대까지 계속 사용된 것으로 파악됨. 공농산성을 요원 동남쪽에서 용수산성 방면으로 진공하려는 적군을 방어하는 전연성보로 파악하기도 함. 그렇지만 요원 지역 전체의 입지조건으로 보아 요원지역의 고구려 산성은 동북쪽의 이통하 방면, 서북쪽의 동요하 하류방면, 서남쪽의 구하(寇河) 방면에서 침공해 들어오는 적군을 저지하기 위해 축조되었다고 파악됨 따라서 공농산성은 용수산성 동남쪽에 위치해 있을 뿐 아니라 서북쪽의 동요하·위진하(渭津河)를 천연해자로 삼아 방어벽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용수산성의 배후산성으로 기능하였을 가능성이 높음. 용수산성과 공농산성이 서로 마주보는 지척거리에 위치한 만큼 유사시에는 상호 긴밀한 연락체계를 유지하면서 군사방어기능을 수행하였을 것임(여호규, 1999).자연환경 요원 공농산성은 요원시 용산구 공농향 소재지 동북쪽 1.5㎞ 거리의 공농산 정상부에 위치함. 서북쪽으로 약 3.5㎞ 거리에 요원시 중심가가 있으며, 동쪽 1㎞ 거리에 장마자구(張麻子溝) 골짜기가, 남쪽 2.5㎞ 거리에 위당구(葦塘溝) 골짜기가 있음. 요원시 중심가에서 용산대가(龍山大街)를 따라 남쪽으로 가다가 동요하(東遼河)를 건넌 다음, 다시 복진로를 따라 동남쪽으로 가다가 공농향(工農鄕) 소재지 부근에서 동북쪽으로 방향을 꺾어 위진하(葦津河)를 건너면 공농산이 나옴. 정북으로 동요하를 사이에 두고 용수산성 및 성자산산성과 마주보고 있으며 산성의 남쪽 산 아래에 위진하가 서류하다가 서남쪽에서 유로(流路)를 서북으로 꺾은 다음 동북쪽에서 동요하와 합류하여 서쪽으로 흘러감. 공농산성은 전체적으로 삼면이 하천에 의해 둘러싸여 있고, 한 면은 산줄기로 이어지는 돌출지형을 이루고 있는 천혜의 요새지임.유물정보 모래혼입토기손잡이(沙質陶器把手) 1점, 대상파수(帶狀把手) 1점, 모래혼입토기평저부(沙質陶器底片) 1점, 홍갈색세발달린솥(紅褐色鼎) 1점, 토기잔편(陶器殘片) 1점, 회색토기구연부(灰色陶器口片) 1점, 니질선문회색토기편(泥質線紋灰色陶器片) 1점, 압인문토기(押引文土器) 1점, 압인문회색토기편(押引文灰色土器片) 1점, 돌절구(石臼) 1점, 니질회색토기잔편(泥質灰色陶器片) 1점참고문헌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합이빈출판사, 1994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北方史地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4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馮永謙, 「高句麗千里長城建置辨」『社會科學戰線』 2002-1, 2002 · 張福有·孫仁傑·遲勇, 「高句麗千里長城調查要報」『東北史地』 2010-3, 2010 · 魏存成, 「中國境內發現的高句麗山城」『社會科學戰線』 2011-1, 2011

    • 리스트여닫기 동풍현(東豐縣)

      • 리스트여닫기 동풍 성지산산성(東豊 城址山山城 ; 城子山山城) 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63년1965년1978년· - 『東北史地考略』 pp.56-57에 의하면 “1963년, 1965년, 1978년에 걸친 3차례의 고고조사에서 海龍山城鎭山城 즉 北山城址 내에서 채집한 몇 개의 회색 및 홍갈색 가는 니질의 토기편 이외에 어떤 유물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함.· 1978년 6월의 실지 측량 결과, 산성의 둘레는 약 4리(2km)이며, 25개의 치(馬面), 성벽은 흙과 돌의 혼축(토석혼축)이며, 남문이 하나 있었다고 함.-현문물보호단위.구조특징평면은 대략 타원형이며 남문, 동남문, 북문, 서문 4개가 있음.- 14개의 치(馬面)와 5개의 각루, 회곽도(馬道) 및 해자(壕溝 ; 深溝) 와 平臺가 시설되어 있음.역사적 의미산성의 형태와 치로 보아, 이 성은 요·금 시기의 고성임을 추정할 수 있고, 발해고성은 아니다. 山城鎭山城이 자리한 곳은 남북 교통요충지로 장령자분수령 부근이며, 唐대 요동과 발해 접경지였으며 더욱이 산성 및 그 부근에는 고대 벽돌과 기와(塼瓦塊) 등 유물을 볼 수 없으므로, 渤海長嶺府 유적이라고 추정할 수 있음. 이 성의 위치는 중요하며 규모가 비교적 큰데, 海龍山城鎭과 遼寧 淸原縣 2개 縣의 교통을 공제할 수 있음. 이 성은 遼金시기의 옛 성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음[吉林省文物志編委會, 1987].자연환경주위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지세는 험요함.동쪽으로는 멀리 大架山과 마주 바라보고 있음.유물정보황백색의 시유 자기편(黃白釉鐵花瓷器片), 니질의 회색 토기 바닥편(泥質灰陶的平底陶器底), 회색의 토기 구연부(灰色圓唇器口沿), 니질의 紅陶綠釉殘片, 회색의 호 바닥(灰色陶罐殘底) 등임.참고문헌· 吉林省文物志編委會, 1987, 『東豊縣文物志』, 吉林省文物志編修委員會· 孫進己·馮永謙, 1989, 『東北歷史地理』2, 黑龍江人民出版社· 國家文物局, 1993, 『中國文物地圖集』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東潮·田中俊明, 1995, 『高句麗の歷史と遺跡』, 中央公論社 · 魏存成, 1999, 「길림성 내 고구려산성의 현황과 특징」『고구려연구』8· 王綿厚, 2002,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윤병모, 2013, 『요동지역의 고구려산성』2, 한국학술정보

  • 리스트여닫기 길림성 통화시(吉林省 通化市)

    • 리스트여닫기 동창구(東昌區)

      • 서산남파 고분군(西山南坡 古墳群)

      • 리스트여닫기 만발발자 고분군(萬發拔子 古墳群) 출토지 통화시 금창진 약진촌 (通化市 金廠鎮 躍進村)연대 만발발자 유적지는 고구려 문화와 청동기문화를 연결시킬 수 있는 고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임. 신석기시대 中晩期, 商周, 春秋戰國, 兩漢, 魏晉, 明에 해당되는 6개 층위관계가 확인되었음. 무덤은 土坑墓, 土坑石槨墓, 土坑石槨石棺墓, 大蓋石墓, 大蓋石積石墓, 積石墓, 階壇積石墓 등 7개 형식이 확인되며, 춘추전국·양한·위·진 시기의 3시기에 해당됨. 출토유물과 고분 형식에 의해 연대를 추정해보면 토갱묘, 토갱석곽묘 토갱석곽석관묘, 대개석묘 등은 춘추전국 시기로 기원전 3세기에 해당, 대개석적석묘와 적석묘는 양한 시기로 기원전 2~1세기에 해당, 계단적석묘는 위진 시기로 기원 4~5세기에 해당됨.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97년 5월~1999년 10월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통화시문물관리위원회판공실, 집안시박물관(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通化市文管會辦公室, 集安市博物館)王靑, 張健宇, 王志敏, 于麗萍, 孫仁杰, 遲勇, 周榮順, 董峰, 李輝 등이 참여하여 6,015㎡의 발굴면적에서 56기의 서로 다른 시기 고분 확인함구조특징 土坑墓, 土坑石槨墓, 土坑石槨石棺墓, 大蓋石墓, 大蓋石積石墓, 積石墓, 階壇積石墓 등이 분포, 이 고분들은 石板墓에서 積石墓 순으로 발전해감. 토갱묘와 토갱석곽묘 두 고분 모두 고구려 이전의 유적으로, 연대는 대체로 춘추전국시기임. 單人仰身曲肢葬墓과 多人合葬墓로 크게 구별됨. 연대는 토갱묘가 토갱석관묘보다 상대적으로 빠름. 토갱석곽석관묘의 연대는 戰國 中晩期에 해당되며 당시 多人·多次 화장이 성행했음. 대개석묘의 연대는 전국 말기~한대 초기에 해당. 대다수 지세가 험준한 산등성마루 위에 분포함. 묘내에서 화장하여 인골은 모두 불탔으나 탄 정도는 높지 않음. 대개석적석묘는 대개석묘와 고구려 초기 적석총 사이의 과도기 묘제로 장제 방식은 대개석묘와 서로 같으나, 割石으로 蓋石을 덮음. 계단적석총은 고구려의 전형적 고분으로 연대는 위·진 시기에 해당됨. 고구려 초기 적석총과 장례형식에서 전승관계가 명확함.역사적 의미 왕면후는 예와 맥을 분리해보는 입장에서 통화 만발발자 유적지의 3기와 4기의 고분을 고구려에 선행한 맥족의 문화로 설명함. 즉 제3기부터 출현하기 시작한 대석개묘·대석개적석묘·조기방단적석묘는 ‘혼강 및 압록강’과 ‘태자하 및 혼하’ 유역에서 상응하는 시기의 석묘·출토품과 동일한 성질에 속하므로, 고구려가 혼강에 건국되는 서한 중기 이전에, ‘혼강 및 압록강’과 ‘태자하’ 상류를 중심으로한 古 “貊”(高夷) 유적지임. 이는 “高句麗先世文化” 또는 “前高句麗時期의 문화”로 명명. 만발발자 “4기” 및 그 이하의 석개묘와 적석묘 등 주요 葬式·葬俗·遺物을 “고구려조기 유적지”로 부르나, 이는 고구려건국 이전의 “맥”족 유적으로, 그 북쪽의 夫餘文化先世 “濊”족의 특징은 극히 드묾. 즉 만발발자 “3기”의 토갱묘와 토갱석곽(관)묘는 대표적 앙신굴지이고, 화장습속은 드물고, 소량의 삼족기가 비교적 조기 고분형식에서 출토되었음. 이는 춘추전국 이전에 송화강 유역의 古 “濊人”, 즉 “서단산문화”의 영향을 반영한 것으로 길림시를 중심으로 “서단산문화구”, 예컨대 일찍 발견된 猴石山, 長蛇山, 狼頭山, 兩半山 등 청동문화의 무덤은 모두 토갱석관묘를 주요 葬式으로 갖추고 있음. 출토된 도기는 다수가 중원 한문화의 영향을 받은 三足鼎·隔 등으로 만말발자 3기의 문화는 서단산문화이 영향으로 예족과 맥족의 문화가 남북으로 교류한 결과임. 오강원은 만발발자 유적을 통화 지역문화가 기원전 3세기를 기점으로 느슨한 청동기 사회에서 완전한 청동기 사회로 변모하고, 기원전 2~1세기에서 토갱묘·석관묘에서 적석묘로 급격히 변모한다는 점에 주목함. 통화지역에 원고구려문화, 즉 적석묘문화가 출현하는 시점은 요동 동부의 다른 지역보다 1세기 가량 늦은 기원전 2~1세기로, 요동반도의 적석묘 문화가 환인집단을 경유하여 통화지역으로 전해졌고, 통화지역에서는 적석묘 문화의 형성과 함께 방어적 성격이 강한 환호와 구상 유구를 갖춘 대형 취락이 등장한다고 보았음. 기원전 3세기의 사회의 완만한 변화 양상을 볼 때, 통화지역의 토착집단이 주변과의 교섭을 통해 내적으로 변화한 반면 기원전 2~1세기의 급격한 사회변모는 혼강 중류 유역 환인 방면으로부터 들어온 적석묘집단에 의해 지역집단이 통합된 것으로 추정함.자연환경 유적지는 통화시 금창진 약진촌과 환통향 강남촌의 경계지점에 있는 작은 구릉 정상부의 평탄면에 위치함. 유적지 서부는 둥근 언덕, 동쪽에는 완만한 산등성마루와 연이어진 구릉과 접하고 있음. 유적지는 통화-집안 도로가 동북지구와 서남 지구를 관통하면서 동서로 양분되어지는데 서부는 원구, 산등성마루에는 생활거주지가 다수 보임. 동부는 고분의 주요 분포지역으로, 대다수 고분은 동부 제1층 아래 생토층을 파괴. 유적지 남측에는 현대 촌락이 자리하고 있으며 약 250m 떨어진 곳에서 金廠河가 유적지 동남부를 지나 혼강으로 유입됨. 북쪽 약 3㎞ 거리에 통화시 위치하고 북동쪽 5㎞ 거리의 혼강 동안에 청동기시대 생활유적인 九仙峰 유적이 위치함. 북서쪽 5㎞ 거리의 혼강 서안에 청동기시대에 해당하는 西山 고분군 위치함. 남쪽 13㎞ 거리에 고구려 시대의 江沿村 고분군 위치하고 남쪽 20㎞ 거리에 고구려 시대의 南頭屯 고분군 위치함. 서남 방향의 환인 고구려 유적지와는 약 100㎞ 떨어져 있음.참고문헌 · 國家文物局 主編, 「吉林通化萬發撥子遺址」『1999中國重要考古發現』, 文物出版社, 2001 · 王綿厚, 「通化萬發拔子遺址的考古與民族學觀察」『東北史硏究動態』 2001-3, 2001 · 金旭樂·趙殿坤·董峰, 「吉林通化市萬發撥子遺址二十一號墓的發掘」『考古』 2003-8, 2003 · 오강원, 「萬發撥子를 통하여 본 通化地域 先原史文化의 展開와 初期 高句麗文化의 形成過程」『북방사논총』 1, 동북아역사재단, 2004 · 朱泓·賈瑩·金旭東·趙展坤, 「通化萬發拔子遺址春秋戰國時期叢葬墓顱骨的觀察與測量」『邊疆考古硏究』 2, 2004

      • 리스트여닫기 강남활설장 고분군(江南滑雪場 古墳群) 출토지 통화시 환통향 강남촌 석판구문 (通化市 環通鄉 江南村 石板溝門)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57년과 1958년 스키장 사무실 수축시 유골, 동제 허리띠장식(銅帶飾)·세발달린 철제 솥(三族鐵鍋)·호(陶壺)·뼈(骨)·이빨장식(牙飾) 등이 발견됨. 출토 유물은 길림성박물관에 소장됨.1985년통화시문물보사대(通化市文物普査隊)유물이 발견된 곳에서 흔적을 전혀 확인 못함.1985년 7월통화시문물보사대(通化市文物普査隊)길림성박물관에 소장된 문물을 재조사구조특징 고분군과 고분을 소개한 내용은 없음.역사적 의미 강남 활설장 고분군은 帶銙로 미루어 발해시기의 고분으로 추정됨. 唐代 문화가 발해 귀족에 많은 영향을 주었음. 그 대표적인 것인 帶銙로, 이미 발굴된 많은 발해시기 유적과 고분 안에는 모두 이 유물이 출토됨. 강남 활설장 帶銙도 같은 형식임. 이는 고구려 故地, 발해 주민이 여전히 민족의 전통과 습속을 지키고 발전시켰다는 것을 보여줌. 한편 출토유물 가운데는 遼金 시기의 것도 포함되어 있음.자연환경 현재 市委黨敎 校址 사용, 市區 중심과 2.5㎞ 떨어져 있음. 시위당교 터는 원래 통화시 강남 스키장(滑雪場) 건물인데 남산이 스키장, 동쪽과 북쪽으로는 비교적 험한 산봉우리가 있음. 통화-집안의 구도로가 고분군을 통과하며 서북은 혼강과 1㎞ 떨어져 있고, 서부는 넓은 채소밭임.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通化市文物志』, 1986

      • 리스트여닫기 자안산성(自安山城) 출토지 통화시 강동현(강동향) 자안촌(속칭 치안촌) 협심둔의 북산. 通化市 중심지에서 4㎞ 거리임(通化市 江東縣(江東鄉) 自安村(治安村) 夾心屯 北山. 通化市 中心地 4㎞ 踞離)연대 고구려 - 遼·金代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4년 11월 27일통화시인민정부(通化市人民政府)通化市 重點文物保護單位로 공포.1983년 봄 및 6월통화시문화국문화지 편집부, 통화시문화관, 통화시문물관리위원회 판공실(通化市文化局文化志編輯部, 通化市文化館, 通化市文物管理委員會辦公室)제1차(봄) 및 제2차(6월) 조사와 실측 및 촬영함.1985년통화시문물조사대(通化市文物調査隊)조사와 실측, 촬영을 재차 시행하였으며 吉林省文物志編委會, 1986 『通化市文物志』에 발표함.1988년과 1989년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의 유남·소춘화, 통화시 문물관리판공실의 양립신(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柳嵐·邵春華), 通化市文物管理辦公室(楊立新))두 차례에 걸쳐 산성을 상세히 조사하고 실측하고, 柳嵐·邵春華, 1991 「吉林通化市漢代自安山城調査與考證」『博物館硏究』1991-3에 발표함.구조특징 성벽은 험준한 자연 지세를 잘 이용하여 구축하였음. 산세가 가파르고 험준한 동쪽과 남쪽 양면은 낭떠러지와 절벽을 천연성벽으로 삼았으며 산세가 비교적 완만한 서·북 양면은 다듬은 돌로 인공성벽을 축조함. 불규칙한 長方形, 남북이 길고 동서가 좁음. 성곽 내부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으며, 북쪽이 남쪽보다 높음. 가장 높은 지점은 해발 507m. 인공으로 축조한 서벽과 남벽은 대부분 파괴되어 현재 성벽 기초만 볼 수 있고, 서벽의 북단과 북벽의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함. 현재 성벽 위쪽은 10-20㎝ 두께의 흙으로 덮여 있고, 성벽이 만곡하는 곳에는 바깥쪽에 보조용 성벽을 여러 겹 축조하였음. 성 안쪽에는 잡초와 관목이 무성하여 성 내부의 상황을 한눈에 파악하기는 어려운 상태이며, 서북쪽은 계단식 밭으로 개간되어 경작되고 있음. 현대의 民墓가 군을 이룬 곳도 있는데, 큰 나무 몇 그루로 둘러싸여 있음.역사적 의미 자안산성의 서남쪽 30㎞에는 赤柏松古城이 있는데, 玄菟郡 上殷臺縣의 治所로 추정되고 있음. 그밖에 통화지역에서 고구려 두 번째 도성이었던 국내성으로 향하는 老嶺山脈 북사면에는 통화 이도구문관애와 석호관애를 비롯하여 집안 대천초소, 관마장산성 등이 있음. 지정학적으로 蛤蜜河와 渾江이 합류하는 곳이며 자안산성이 위치한 通化市 일대는 渾江 상류의 중심지이고, 輝發河에서 龍崗山脈을 넘어 통구분지로 나아가거나, 富爾江 상류에서 喇咕河를 거쳐 통구분지로 들어갈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전략적 요충지임. 산성의 기능과 성격에 대한 견해는 다양함 먼저 漢代-高句麗-遼金淸代 성곽설이 있음. 漢의 군현 설치와 함께 축조되어 고구려 시기뿐 아니라 遼·金·淸代까지 계속 사용되었다는 견해임[吉林省文物志編委會, 李殿福]. 성내에서 漢代 토기의 특징을 지닌 것이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漢郡縣의 설치와 함께 축조되었을 것으로 상정되고, 산성의 축조방식이나 출토된 토기편이 집안 산성자산성·패왕조산성 등과 동일하다는 점에서 고구려 시기에 대규모로 개축되어 고구려 북도상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 기능하였다는 것임. 그리고 고구려 시기 이후에도 계속 사용되었다고 추정되는데, 특히 明末 누르하치가 建州女眞을 통일할 무렵, 이곳은 오랫동안 女眞 完顔部의 거주 및 저항의 거점이었을 것으로 추정됨. 이에 비해 漢代에만 사용되었다는 견해도 있음[柳嵐·邵春華]. 산성에서 출토된 유물은 모두 漢代의 것이고, 특히 토기 문양은 漢代 토기의 특징을 많이 지녔다고 함. 항아리와 시루의 형태, 소성온도, 태토 등은 內蒙古 哲里木猛 奈曼旗 沙巴營子의 漢城이나 吉林省 永吉縣 大海猛 2期 漢代 유적에서 출토된 것과 동일하다고 함. 그리고 遼·金代의 布紋 기와편이 출토된 적이 있지만, 그밖에는 遼·金代의 유물이 출토된 것이 없음. 특히 돌로 성벽을 축조하였다는 점은 분명히 고구려 城의 특징이지만, 성 내부에서 漢代 유물만 출토되고 고구려 시기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고구려인이 축조하였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임. 더욱이 자안산성 서남쪽 30㎞에는 玄菟郡 上殷臺縣 治所로 추정되는 赤柏松古城이 있는데, 자안산성과 적백송고성은 밀접히 관련된다고 여겨짐. 즉 자안산성은 漢의 玄菟郡과 함께 축조되었다가 玄菟郡이 요동지역으로 쫒겨가면서 폐기되었다는 것임. 마지막으로 渾江 상류의 군사 방어성이면서 지방지배의 거점이라는 견해가 있음. 漢郡縣 治所가 일반적으로 소규모 토성인데 비해 자안산성은 둘레가 2.7㎞에 이르는 대형 石城이며 遼·金代 기와편도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고구려 시기 이래 계속 사용되었다고 판단됨. 더욱이 자안산성이 위치한 通化市 일원은 渾江 상류의 중심지이고, 輝發河에서 龍崗山脈을 넘어 통구분지로 나아가거나 아니면 富爾江 상류에서 喇咕河를 거쳐 통구분지로 들어갈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전략적 요충지임. 이로 보아 자안산성은 고구려 시기에 석성으로 구축되어 渾江 상류일대의 중심성으로 기능하였을 가능성이 높음. 이 일대에 고구려 초기 적석묘가 상당수 분포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를 반영함. 다만 자안산성은 지리적 위치나 규모로 보아 단순한 군사시설이라기 보다는 지방지배의 거점으로도 기능하였다고 추정됨. 자안산성은 소자하 상류에서 喇咕河를 거쳐 渾江으로 향하던 교통로와 輝發河 유역에서 용강산맥을 넘어 渾江으로 향하던 교통로 등을 공제하던 군사방어시설로서 渾江 右岸의 弧形·軸線방어체계에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고 추정됨[余昊奎].자연환경 산성 서남쪽 아래로 哈蜜河(속칭 哈泥河 혹은 哈民河)가 흐르며, 동쪽의 절벽 아래로는 渾江이 유유히 흐르고 있으며, 남쪽은 哈蜜河와 渾江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산성은 전체적으로 三角洲의 형세를 이룸. 산성의 서쪽과 북쪽으로 산봉우리가 기복을 이루며 연이어지고 있음. 가장 높은 곳은 해발 526m로서 이곳에 서면 통화분지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옴. 산성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내려다보는 형세로 지키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려운 천혜의 험준한 지형임.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通化市文物志』, 1986 · 孫進己·馮永謙, 『東北歷史地理』 (二), 黑龍江人民出版社, 1988

      • 리스트여닫기 만발발자유적(萬發拔子遺蹟) 출토지 통화시 금창진 약진촌 (通化市 金廠鎮 躍進村)연대 신석기 말기-청동기 시대, 고구려 초기와 중기역사적 의미 우선 신석기-청동기시대 유적으로 보는 견해가 있음. 이 유적의 출토 유물은 渾江 중류 양안의 集安 荒崴子·長崗·東村·梨水·南臺子·二道崴子, 通化 下龍頭·江沿村南山·江口村 등의 유적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성격이 같음. 석기는 석제 괭이(打製 石鎬), 석제 호미(石鋤) 등이 있고, 마제석촉(磨製石鏃), 석제 창(石矛), 침상기(枕狀器) 등이 있음. 토기는 배(杯), 고배(豆), 호(罐), 발(鉢), 방추차(紡輪), 어망추(罔墜) 등이 있음. 三足器의 器足도 발견되었음. 이로 보아 유적지의 상한이 신석기시대, 하한은 청동기시대로 추정됨. 또한 출토 유물로 보아 채집 수렵 단계에서 농업, 어렵을 위주로 하는 定住단계로 진입했다고 추정되기 때문임.[通化市文物志]. 초기 貊族의 씨족취락설도 있음. 이 유적지의 3, 4기 문화층은 춘추-전국에서 서한 시기에 해당하는데, 二江(압록강, 혼강)과 二河(태자하, 혼하) 상류를 중심으로 동북 맥 계통의 貊족이 집중 분포한 시기임. 만발발자 유적은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주요 부분인데, 주거지, 고분, 출토유물 등에서 二江유역 토착 문화의 성격을 모두 갖추고 있음. 그 중 3기 문화층은 전체 유적지에 넓으며 출토유물도 가장 풍부함. 이 시기의 문화층은 石棺(盖)墓와 靑銅短劍을 주요 특징으로 하는 고구려 선대 동북 貊族의 청동문화에 속하는 것으로 파악됨. 따라서 만발발자 3-4기 문화층은 고구려 건국 직전에 二江 유역에 분포한 초기 貊族의 씨족취락으로 추정됨. 계곡의 높은 대지 위에 건축한 “環山圍溝(壕)”와 “石垣聚落”으로서 고구려 건국 이후에 출현하는 “성읍취락(주로 산성)”의 전신 내지는 기원으로 추정됨[王綿厚]. 비류국(연노부, 소수맥) 소재지로 보기도 함. 송양의 비류국은 졸본천 상류에 있다고 함. 지금까지 통화지역에서는 만발발자 유적을 포함하여 灣灣川 유적, 黎明 유적, 자안산성, 夾心屯 유적, 平崗山 유적, 樺樹河口 유적, 砬砬屯 유적, 耐火廠北山 유적, 西熱村 유적, 東熱村 유적, 向陽 유적, 鴨園隧洞山頂 유적 등이 발견됨. 이들 유적은 졸본천의 상류에 위치한 비류국의 문화유적으로 추정됨. 졸본천과 비류국은 모두 고구려 건국기의 涓奴部에 속함. 고구려 초기 정권은 졸본천의 涓奴部에 위치했고 그 중 비류국의 지역을 포함함. 대체로 지금의 통화지역이 연노부로 추정되며, 만발발자 유적지는 대표적인 고대 취락지로 고구려를 흥기시킨 “연노부”와 관련된 것으로 파악됨[東北史地 2006-2]. 또한 만발발자 유적은 압록강 중상류의 청동시시대, 고구려시기의 고고환경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함. 특히 청동기시대-초기 철기시대의 유물 분포 면적은 크고 풍부한 반면, 고구려 초기의 유물 분포 면적은 비교적 크지만 그 문화 퇴적층은 비교적 얇음. 이는 생업유형의 변화를 반영하는데, 西漢 이후 이 지역은 상대적으로 차고 건조한 기후로 변화되어 농경의 어려움이 확대되고 인구압이 증가해 생태환경압력이 크게 증가했을 것으로 추정됨. 또한 고구려 초기 단계[西漢 시기]에는 環壕를 구축했는데, 이는 유적지가 이미 엄밀하게 조직된 대형 촌락에 속하게 되었으며, 획득한 식물자원과 생활공간에 대한 보호와 관리가 강화되었음을 반영함[邊疆考古硏究 2]. 한편 만발발자 유적은 통화지역의 선사-고대문화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표준유적의 성격을 띄고 있음. 만발발자에서 주목되는 발형토기류나 적석류의 무덤은 혼강유역 고구려 토착문화이자 기저문화로서의 측면을 반영하며, 고구려 건국 후 기원후 5세기대에 이르기까지도 이러한 측면이 고구려 지역에 강하게 지속되었음을 반영함. 이 유적을 통해 통화의 지역문화가 기원전 3세기를 기점으로 느슨한 청동기사회에서 완전한 청동기사회로, 그리고 기원전 2-1세기를 기점으로 괴석조 석관묘, 대석개묘, 종횡세장형 토광묘, 직장, 앙신굴지장의 문화에서 적석묘, 세골장, 화장의 문화로 변모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음. 또한 적석묘 문화의 형성과 함께 취락이 대형화하고 방어적 성격이 강한 환호와 구상유구가 등장하였음도 알 수 있음. 이렇게 볼 때 통화지역은 기원전 3세기에는 토착집단이 주변과의 교섭을 통해 내적인 변화를 일으킨 것으로 판단되고, 기원전 2-1세기에는 혼강 중류역, 즉 환인 방면으로부터 밀려들어온 적석묘집단에 의해 지역집단이 통합된 것으로 생각되며, 이 때부터는 환인지역보다 위상이 내려가게 되었던 것으로 여겨짐. 아무튼 통화지역에 ‘원고구려문화=적석묘문화’가 출현하는 시점은 요동 동부의 다른 지역보다 한 세기 가량 늦은 기원전 2-1세기이고, 그러한 변모는 갈등적인 측면이 강하였다고 할 수 있음[오강원].자연환경 남안의 언덕산에 위치함. 通化市 중심가에서 남쪽으로 3㎞ 거리이며, 통화-집안 도로가 유적지 아래로 지나감. 萬發拔子의 原名은 萬寶鈸子로 ‘王八脖子’는 속명임. 유적은 동북에서 서남으로 뻗어내린 산줄기의 끝단에 위치해 있는데, 산능선과 언덕산으로 이루어진 지형이 마치 자라의 형상을 닮았다 하여 ‘王八脖子’라 칭했음. 종래 通化-集安 도로(303국도)가 자라의 목에 해당하는 동북쪽 산능선과 서남쪽 언덕산 사이의 ‘凹’자 부분을 지나갔는데, 최근 도로를 확장하면서 언덕산 서편 아래로 도로의 경로가 바뀌게 되었음. 유적지 남쪽에서 金廠河(원명 大廟溝河)가 서북쪽으로 흘러 구릉 서면의 평원을 지나 서북 500m 지점에서 혼강으로 유입됨. 유적지의 북, 서, 남 3면에는 1-2단으로 이루어진 충적평지가 넓게 펼쳐져 있는데, 특히 서북 방면으로는 渾江 남안의 충적평지로 이어짐.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通化縣文物志』, 1987 ·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 編, 『吉林省志』 43(文物志), 吉林人民出版社, 1991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通化市文物管理協公室, 「通化市王八脖子遺址及附近幾處地點的調査與發掘」『博物館研究』 1997-2, 1997 · 金旭東·安文榮·楊立新, 「探索高句麗早期遺存及通起源」『中國文物報』 2000年 3月 19日版, 2000 · 國家文物局 主編, 「吉林通化萬發撥子遺址」『1999中國重要考古發現』, 文物出版社, 2001 · 王綿厚, 「關於通化萬發撥子遺址的考古與民族學考察」『北方文物』 2001-3, 2001 · 金旭東, 『東北地區三至十世紀古文化學術討論會』, · 金旭樂·趙殿坤·董峰, 「吉林通化市萬發撥子遺址二十一號墓的發掘」『考古』 2003-8, 2003 · 오강원, 「萬發撥子를 통하여 본 通化地域 先原史文化의 展開와 初期 高句麗文化의 形成過程」『북방사논총』 1, 동북아역사재단, 2004 · 湯卓煒·金旭東·楊立新, 「吉林通化萬發撥子遺址地學環境考古研究」『邊疆考古硏究』 1, 2003 · 王志敏, 「通化江沿遺跡群調査」『東北史地』 2006-6, 2006 · 王貴玉·王珺·王志敏, 「通化江沿遺跡群所在地當卽卒本夫餘初居地」『東北史地』 2006-6, 2006

      • 만발발자 21호분(萬發拔子 21號墳)

      • 만발발자 29호분(萬發拔子 29號墳)

      • 만발발자 34호분(萬發拔子 34號墳)

      • 만발발자 36호분(萬發拔子 36號墳)

    • 리스트여닫기 이도강구(二道江區)

      • 향양촌유적(向陽村遺址)

      • 향양촌 고분군(向陽村 古墳群)

      • 이도구문관애(二道溝門關隘)

      • 리스트여닫기 압원수동산정 유적(鴨園隧洞山頂 遺址) 출토지 통화시 압원진 (通化市 鴨園鎮)연대 원시시기, 고구려, 遼·金代구조특징 지표에 유물이 비교적 풍부하며, 보존 상태도 양호하다고 함. 유적지의 동, 북, 서 삼면은 경사가 가파른 산비탈이며, 남쪽으로는 평탄한 언덕 대지가 이어짐. 유적지가 위치한 대지 북단의 평탄면은 옥수수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북단 가장자리에는 고압전선의 철탑이 세워져 있음.역사적 의미 채집 유물로 보아 원시사회 시기부터 高句麗, 遼·金 시기에 생활공간으로 활용되었다고 하지만, 고구려시기에도 생활공간으로 이용되었는지 명확히 밝혀진 상태는 아님.자연환경 유적이 위치한 언덕산의 동쪽은 大羅圈溝河와 渾江이 만나는 삼각지대이고, 남쪽 1㎞ 거리에는 기차역이 위치해 있음. 서쪽으로는 산줄기가 첩첩히 이어짐. 북쪽 산 밑에는 通化-集安 철로의 터널이 통과하고 있는데 鴨園隧洞이라는 유적명칭은 이 터널에서 유래했음. 다만 현재 터널의 정식 명칭은 ‘鴨園隧洞’이 아니라 ‘鴨子隧道’임.유물정보 석제 괭이 4점(그림 2-1~3)과 석제 자귀 1점(1-4), 토기편 등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通化市文物志』, 1986 · 國家文物局 主編, 「通化市-鴨園隧洞山頂遺址」『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리스트여닫기 집안시(集安市)

      • 리스트여닫기 오도령구문고분(五道嶺溝門古墳) 출토지 집안현 마선향 오도령 (集安縣 麻線鄉 五道嶺)연대 전국 말기(B.C 3C)~서한 초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78집안현박물관(集安縣博物館)4월 24일 集安縣 太平公社 太平大隊 五道嶺溝門 도로 보수 중, 五道嶺 狍圈子溝門 맞은 편 지표에서 3m 높이의 남쪽 산비탈에서 돌을 옮기던 중에 1m 정도의 깊이의 대석 사이에서 청동기를 발견했으나 발견 당시 교란된 돌무지로 고분 및 청동기 외에 어떤 유물이나 흔적은 발견하지 못하고, 당시 인부들이 출토된 유물 11건을(실제 나열된 사례는 13건) 집안현 박물관에 보고하였음.4월 24일 집안현 박물관에서 제1차로 현장조사 및 유물 회수를 하고 발견 경위의 내용을 기록하였지만 고분은 발견하지 못함.1978집안현박물관(集安縣博物館)5월 31일부터 6월3일까지 제2차 조사가 이루어졌고, 劉景文, 閻毅之, 林至德, 趙素勤, 張雪岩이 참여하였으며, 청동단검의 출토지점에서 적석총(방단계제적석총)을 조사하였음.1979장설암(張雪岩)10월 길림성 고고학대회에서 고분을 소개하였는데 유물 출토 관련 내용은 제1차 조사 기록 참조하였고, 고분 형식은 제2차 조사의 기록과 도면을 참조하였으며, 발표내용은 1981년 『考古』에 수록함.1983장설암(張雪岩)공개적으로 원시적 계장적석묘로 수정하였고, 고분 방향은 南偏西 32°로, 평면이 정방형, 한변 길이 14m, 각 계단은 1.3-1.85m 들여쌓기를 했고, 殘高 약 80㎝라고 보고했음.구조특징 평면은 정방형이고, 방향은 南偏西 32°이며, 조사 당시 각 계단은 1.3-1.85m 들여쌓기를 함. 표면은 이미 고분의 흔적이 보이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서 산비탈 아래로 흐르는 자갈이 그 위를 덮은 것으로 보아 일명 창류석이라고 함. 산의 경사도는 25°로 동북이 높고, 서남이 낮은데, 북면(윗면)은 산을 따라 돌을 축조했으며 무계단이고, 남면(아래면)은 파괴가 심각한데 묘의 정상부 자갈이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3층 계단이 일정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으며, 각 층의 계단은 몇 개의 돌만 잔존하며, 계단은 명확치 않음. 고분의 북변 5m, 동변 21m 되는 지점에서 유물 출토되었으며, 현재 고분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음.역사적 의미 고분의 형식에 대한 여러 견해가 있는데, 첫째가 창류석으로 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산비탈 아래로 흐르는 자갈이 그 위를 덮은 것인데, 고분 흔적이 보이지 않은 것에 기인했고, 둘째가 계장적석총으로 산비탈의 각도가 25°이고, 동북이 높고 서남이 낮으며, 북면은 무계단이나, 남면은 명확치 않지만 묘의 정상부 자갈이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3층의 계단 흔적이 남아있는 것에 기인했으며, 셋째가 장설암의 견해로 발굴조사 참여시에는 이 고분의 형식을 방단계제적석묘로 보았으나, 이후 “창류석”로 변경하였다가 다시 계장식 적석총으로 분류하면서 계장이 발전하며 계단을 형성하게 된다고 보았음. 중국 동북 요동반도의 길림·장춘일대에서 출토된 청동검은 대부분 曲刃短劍으로 하한연대는 戰國 中晩期로 보고 있는데 오도령구문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단검의 根部와 刃部는 구부러짐이 없고, 劍身이 세밀하고 길며, 刃部는 비교적 平直한 형태로, 곡인단검보다 늦은 형태로 상한 연대는 대략 전국 晩期(B.C. 3C) 혹은 그 이후로 보며, 오도령구문 무덤의 상한 연대는 전국시대 말기로 볼 수 있고, 고분의 하한 연대는 고분에서 출토된 銅矛를 통해 추정할 수 있는데 오도령구문 청동모는 근래 단동지역, 통화, 혼강, 임강 등지에서 출토되는 청동기와 유사하며, 특히 통화 적백송고송은 漢代 현토군의 속현인 上殷台縣의 치소로 비정되므로 오도령구문 고분의 하한 연대는 漢 武帝가 4군을 설치한 이후로 추정됨.자연환경 집안현 마선향 오도령 산비탈 아래 위치하고 고분이 위치한 산비탈 아래로 집안과 환인을 연결하는 도로가 지나감. 이 고분은 집안시 태평향 소속이었으나 태평향이 없어지며 현재 마선향 소속으로 변경됨.유물정보 청동단검(靑銅短劍) 1점, 동제 도끼(銅斧) 1점, 동제 거울(銅鏡) 1점, 칼집끝장식(劍鏢) 1점, 동제 창(銅矛) 3점, 부채모양도끼(鉞形銅斧) 4점, 도끼날 철제화살촉 2점참고문헌 · 張雪巖, 「集安發現靑銅短劍墓」『考古』 1981-5, 1981 · 吉林省文物志編纂委會, 『集安縣文物志』, 1983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張雪岩, 「集安靑銅短劍墓及相關問題」『高句麗硏究論集』 上, 延邊大 出版部, 1993 · 張雪岩, 「集安靑銅短劍墓及相關問題」『박물관연구』 1995-1(再收錄), 1995 · 耿鐵華, 「高句麗紇升骨城新考」『高句麗考古硏究』, 吉林文史出版社, 2004

      • 고마령고려묘구 고분군(古馬嶺高麗墓溝 古墳群)

      • 고마령고려묘구 5호분(古馬嶺高麗墓溝 5號墳)

      • 고마령고려묘구 12호분(古馬嶺高麗墓溝 12號墳)

      • 고마령고려묘구 17호분(古馬嶺高麗墓溝 17號墳)

      • 고마령강구 고분군(古馬嶺江口 古墳群)

      • 고마령 고분군(古馬嶺 古墳群)

      • 대동구 고분군(大東溝 古墳群)

      • 노방구 고분군(老房溝 古墳群)

      • 대양차 고분군(大陽岔 古墳群)

      • 소양차 고분군(小陽岔 古墳群)

      • 대로촌 고분군(大路村 古墳群)

      • 파보촌 고분군(爬寶村 古墳群)

      • 고지 고분군(高地 古墳群)

      • 정의촌 고분군(正義村 古墳群)

      • 칠개정자구 고분군(七個頂子溝 古墳群)

      • 만구문 고분군(彎溝門 古墳群)

      • 석청구 고분군(石靑溝 古墳群)

      • 동구 고분군(東溝 古墳群)

      • 하동구문 고분군(下東溝門 古墳群)

      • 지구문 고분군(地溝門 古墳群)

      • 리스트여닫기 노호초 고분군(老虎哨 古墳群) 출토지 집안시 유림진 노호초촌 (集安市 榆林鎮 老虎哨村)연대 고구려 전반(3세기)~고구려 후기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62길림성박물관, 집안현문물보관소(吉林省博物館, 集安縣文物保管所)4월 조사1981집안현문물보관소(集安縣文物保管所)10월 조사에 林至德, 閻毅之, 趙書勤이 참가하였고, 노호초 수력발전소 건설로 인해 발굴 조사를 실시함.구조특징 고분은 총 17기 중 5기는 훼손이 심각하여, 봉토분 12기만을 발굴함. 고분의 매장부의 수에 따라 동분이혈(同墳異穴)의 이실 무덤과 단실무덤으로 구분하고, 석실 평면은 치우친 연도(刀形)과 중앙연도(鏟形)로 구분하며, 천정은 조정한 것과 평천정으로 구분함. 고분(석실분)의 유형에 따른 분포상황을 보면 횡구식 봉토석실분은 2기(M1, M4)로 석실 4벽에는 모두 불규칙한 석괴를 축조하였고, 벽 높이는 1-1.5m이며, 상부에는 간단한 抹角 조정 후 천정은 1-2개의 板狀大石으로 덮음. 묘도 입구에는 대부분 입구 표시석(迎門石)이 있고 頂部에는 大石板으로 덮었고, 분구의 형태는 丘狀임. 횡혈식 봉토석실분은 10기가 있는데, 단실무덤은 鏟形 1기(M8), 刀形 6기(M2, M3, M5, M6, M9, M11)로 총 7기가 있고, 동분이혈 이실무덤은 총 3기(M7, M10, M12)로 편재연도의 刀形 평면이고 동쪽 석실이 서쪽 석실보다 약간 큼. 수축 방법은 석실묘와 유사하나 석실 상부에 抹角이 없고 커다란 판석으로 頂部을 덮음. 석실과 연도의 바닥은 낮은 편으로 높은 것은 70-90㎝이고, 다수가 迎門石을 가지고 있음.역사적 의미 고구려 고분의 변천과정 상 석실봉토분은 3세기대 이미 출현하여, 4세기 중엽-5세기 중엽에 크게 발전하고, 6세기 중엽에는 고구려 고분양식의 주류를 형성하므로 봉토분이 중심이 되는 노호초고분군의 연대는 고구려 전반인 3세기부터 고구려 후기까지로 추정됨. 소형 봉토분은 피장자의 신분과 빈부의 차이와 빈부의 차이에 따라 재료 및 규모의 크기에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줌. 입구 표시석(迎門石)은 고구려 후기(6세기)로 비정되는 5회분 4호묘 및 5호묘, 통구 12호분(마조총) 등의 대형 고분에서 전실 앞의 묘도 중앙에 설치되어 “擋門石”이라 칭하는데, 이러한 시설은 고구려 소형 봉토분 중에서 발견된 예는 없으나, 노호초는 소형 고분임에도 발견되는 첫 사례로 고분 구조에서 반드시 필요한 시설은 아니며, 고구려 후기 葬俗에 의해 출현한 일종의 관념을 표명한 것으로 추정됨.자연환경 유림진 노호초촌 서쪽 200m에 위치하고 노호초 북면의 黑駝山 아래에 남북으로 펼쳐진 길고 좁다란 언덕의 중앙에 분포하며 분포 범위는 대략 3천㎡임. 노호초촌은 집안현에서 서남 50㎞ 거리에 위치하나 현재 수력발전소로 인해 완전 수몰되었고, 노호초의 동·남·서쪽 등 3면을 압록강이 둘러싸고 있으며,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渭源郡이 위치함.유물정보 석제 칼(石刀片) 1점, 석제 화살촉(石鏃) 3점, 토기편(陶片) 12점, 철제 화살촉(鐵鏃) 1점, 철제 손칼(鐵削) 1점, 은제 반지(銀指環)1점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纂委會, 『集安縣文物志』, 1983 · 趙書勤, 「集安縣老虎哨古墓」『文物』 1984-1, 1984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리스트여닫기 노호초 1호분(老虎哨 1號墳) 출토지 집안시 유림진 노호초촌 (集安市 榆林鎮 老虎哨村)연대 고구려 전반(3세기)~고구려 후기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62길림성박물관, 집안현문물보관소(吉林省博物館, 集安縣文物保管所) 1981집안현문물보관소(集安縣文物保管所)10월 조사에 林至德, 閻毅之, 趙書勤이 참가하였고, 노호초 수력발전소 건설로 인해 발굴 조사를 실시함.구조특징 주변 길이 35.5m의 同墳異穴 2실 무덤으로 방향은 南偏東 30°임. 동·서 2개 석실로 구성되어 있는데, 동일한 규모이고, 동실의 천정은 함몰되어 천정석이 보이지 않으며, 석실 천정은 각 2개의 커다란 長大石으로 덮여 있음. 석실의 4벽과 묘도는 모두 다듬지 않은 돌로 축조되었고, 평면은 중앙연도의 鏟形이며, 4벽은 약간 들여쌓기가 된 상태이고, 상부에는 板狀石으로 2층 말각 축조를 하였음. 석실 바닥에는 직경 5-10㎝ 되는 작은 냇돌을 깔았는데, 현재 지표보다 10㎝ 낮고, 동실문은 5개의 대석으로 봉했으며, 서실문 밖에서 묘도 입구에 이르기까지 2.25m 지점에 높이 0.5m 되는 입구 표시석(迎門石)을 세움.내부규모 및 특징 석실 길이 2.5m, 너비 1.9m, 높이 1.25m, 문벽의 두께 0.85m 동실 묘도 길이 2.7m, 너비 0.75m, 높이 0.35-1m 서실 묘도 길이 2.6m, 너비 0.7m, 높이 0.2-0.85m역사적 의미 고구려 고분의 변천과정 상 석실봉토분은 3세기대 이미 출현하여, 4세기 중엽-5세기 중엽에 크게 발전하고, 6세기 중엽에는 고구려 고분양식의 주류를 형성하므로 봉토분이 중심이 되는 노호초고분군의 연대는 고구려 전반인 3세기부터 고구려 후기까지로 추정됨. 소형 봉토분은 피장자의 신분과 빈부의 차이와 빈부의 차이에 따라 재료 및 규모의 크기에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줌. 입구 표시석(迎門石)은 고구려 후기(6세기)로 비정되는 5회분 4호묘 및 5호묘, 통구 12호분(마조총) 등의 대형 고분에서 전실 앞의 묘도 중앙에 설치되어 “擋門石”이라 칭하는데, 이러한 시설은 고구려 소형 봉토분 중에서 발견된 예는 없으나, 노호초는 소형 고분임에도 발견되는 첫 사례로 고분 구조에서 반드시 필요한 시설은 아니며, 고구려 후기 葬俗에 의해 출현한 일종의 관념을 표명한 것으로 추정됨.자연환경 유림진 노호초촌 서쪽 200m에 위치하고 노호초 북면의 黑駝山 아래에 남북으로 펼쳐진 길고 좁다란 언덕의 중앙에 분포하며 분포 범위는 대략 3천㎡임. 노호초촌은 집안현에서 서남 50㎞ 거리에 위치하나 현재 수력발전소로 인해 완전 수몰되었고, 노호초의 동·남·서쪽 등 3면을 압록강이 둘러싸고 있으며,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渭源郡이 위치함.유물정보 동실에서 석제 칼편(石刀片) 1점, 석제 화살촉(石鏃) 3점 출토 서실에서 이빨장식(牙飾) 1점 출토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纂委會, 『集安縣文物志』, 1983 · 趙書勤, 「集安縣老虎哨古墓」『文物』 1984-1, 1984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리스트여닫기 노호초 4호분(老虎哨 4號墳) 출토지 집안시 유림진 노호초촌 (集安市 榆林鎮 老虎哨村)연대 고구려 전반(3세기)~고구려 후기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62길림성박물관, 집안현문물보관소(吉林省博物館, 集安縣文物保管所) 1981집안현문물보관소(集安縣文物保管所)10월 조사에 林至德, 閻毅之, 趙書勤이 참가하였고, 노호초 수력발전소 건설로 인해 발굴 조사를 실시함.구조특징 외형은 丘狀으로 주변 길이 31.6m이고 방향은 南偏東 20°임. 석실은 단실로 평면이 刀形으로 壁石 위에 1단만 말각조정을 하고, 천정은 큰 돌 1매로 봉했으며, 천장 막음돌 크기는 길이 1.23m, 너비 0.85m, 두께 0.17m임. 석실 바닥은 현 지표보다 10㎝ 낮으며, 바닥에는 직경 10-15㎝의 넓적한 모양의 조약돌을 깔고, 소량의 숯이 발견되었으며, 석실 입구는 다듬지 않은 장대석을 쌓아 봉함. 연도는 서쪽으로 치우쳐져 있고, 석실 서벽이 연도 서벽으로 연결함. 천정은 장대형 대석으로 봉했고 길이 2.15m, 너비 0.8m, 두께 0.17m이며, 연도 입구 바닥은 넓고 위는 뾰족한 삼각형 모양의 迎門石이 하나 세워져 있음.내부규모 및 특징 석실 길이 2.6m, 너비 1.65m, 높이 1.3m. 연도 길이 1.9m, 너비 0.9m, 높이 1.9m역사적 의미 고구려 고분의 변천과정 상 석실봉토분은 3세기대 이미 출현하여, 4세기 중엽-5세기 중엽에 크게 발전하고, 6세기 중엽에는 고구려 고분양식의 주류를 형성하므로 봉토분이 중심이 되는 노호초고분군의 연대는 고구려 전반인 3세기부터 고구려 후기까지로 추정됨. 소형 봉토분은 피장자의 신분과 빈부의 차이와 빈부의 차이에 따라 재료 및 규모의 크기에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줌. 입구 표시석(迎門石)은 고구려 후기(6세기)로 비정되는 5회분 4호묘 및 5호묘, 통구 12호분(마조총) 등의 대형 고분에서 전실 앞의 묘도 중앙에 설치되어 “擋門石”이라 칭하는데, 이러한 시설은 고구려 소형 봉토분 중에서 발견된 예는 없으나, 노호초는 소형 고분임에도 발견되는 첫 사례로 고분 구조에서 반드시 필요한 시설은 아니며, 고구려 후기 葬俗에 의해 출현한 일종의 관념을 표명한 것으로 추정됨.자연환경 유림진 노호초촌 서쪽 200m에 위치하고 노호초 북면의 黑駝山 아래에 남북으로 펼쳐진 길고 좁다란 언덕의 중앙에 분포하며 분포 범위는 대략 3천㎡임. 노호초촌은 집안현에서 서남 50㎞ 거리에 위치하나 현재 수력발전소로 인해 완전 수몰되었고, 노호초의 동·남·서쪽 등 3면을 압록강이 둘러싸고 있으며,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渭源郡이 위치함.유물정보 석실 서북모서리의 토기편 1점, 석식 동남쪽의 은반지 1점, 연도 서북쪽의 철제 화살촉 1점, 석제 칼편 1점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纂委會, 『集安縣文物志』, 1983 · 趙書勤, 「集安縣老虎哨古墓」『文物』 1984-1, 1984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노호초 5호분(老虎哨 5號墳)

      • 노호초 7호분(老虎哨 7號墳)

      • 노호초 10호분(老虎哨 10號墳)

      • 관문립 고분군(關門砬 古墳群)

      • 영수 고분군(迎水 古墳群)

      • 대고려묘구 고분군(大高麗墓溝 古墳群)

      • 대고려묘구 21호분(大高麗墓溝 21號墳)

      • 대고려묘구 31호분(大高麗墓溝 31號墳)

      • 대고려묘구 43호분(大高麗墓溝 43號墳)

      • 대고려묘구 41호분(大高麗墓溝 41號墳)

      • 대고려묘구 43호분(大高麗墓溝 43號墳)

      • 대고려묘구 45호분(大高麗墓溝 45號墳)

      • 대고려묘구 46호분(大高麗墓溝 46號墳)

      • 대고려묘구 47호분(大高麗墓溝 47號墳)

      • 이실총(二室塚)

      • 무개총(無蓋塚)

      • 고총(高塚)

      • 석곽노출총(石槨露出塚)

      • 대총(大塚)

      • 삼실총(三室塚)

      • 소고려묘구 고분군(小高麗墓溝 古墳群)

      • 대주선구 고분군(大朱仙溝 古墳群)

      • 향양 고분군(向陽 古墳群)

      • 양자구 고분군(樣子溝 古墳群)

      • 복흥 고분군(復興 古墳群)

      • 하조구 고분군(下弔溝 古墳群)

      • 치안 고분군(治安 古墳群)

      • 사도구문 고분군(四道溝門 古墳群)

      • 판차구 고분군(板岔溝 古墳群)

      • 대양구고분(大陽溝古墳)

      • 소청구 고분군(小靑溝 古墳群)

      • 유가포자 고분군(劉家鋪子 古墳群)

      • 료지구문 고분군(鬧枝溝門 古墳群)

      • 삼도양차 고분군(三道陽岔 古墳群)

      • 황차구문 고분군(荒岔溝門 古墳群)

      • 화전자 고분군(化甸子 古墳群)

      • 횡로구대 고분군(橫路九隊 古墳群)

      • 횡로구대 5호분(橫路九隊 5號墳)

      • 황로구대 13호분(橫路九隊 13號墳)

      • 횡로구대 32호분(橫路九隊 32號墳)

      • 횡로구대 51호분(橫路九隊 51號墳)

      • 동차구문 고분군(東岔溝門 古墳群)

      • 합당촌 고분군(哈塘村 古墳群)

      • 재원 고분군(財源 古墳群)

      • 신건 고분군(新建 古墳群)

      • 마제구 고분군(馬蹄溝 古墳群)

      • 쌍흥 고분군(雙興 古墳群)

      • 보마 고분군(報馬 古墳群)

      • 모배령 고분군(母背嶺 古墳群)

      • 소방자구 고분군(燒房子溝 古墳群)

      • 금가 고분군(金家 古墳群)

      • 묘서 고분군(廟西 古墳群)

      • 요영자 고분군(腰營子 古墳群)

      • 반가가 고분군(潘家街 古墳群)

      • 홍석립자 고분군(紅石砬子 古墳群)

      • 종가 고분군(鍾家 古墳群)

      • 대천 고분군(大川 古墳群)

      • 청구자 고분군(靑溝子 古墳群)

      • 양목교자 고분군(楊木橋子 古墳群)

      • 대양목간자 고분군(大楊木杆子 古墳群)

      • 피덕기둔 고분군(皮德記屯 古墳群)

      • 대유수 고분군(大楡樹 古墳群)

      • 리스트여닫기 상활룡 고분군(上活龍 古墳群) 출토지 집안시 마선향 상활촌 (集安市 麻線鄉 上活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77집안현문물보관소(集安縣文物保管所)겨울에 상·하활룡 고분군을 조사함.1982집안현문물보관소(集安縣文物保管所)林至德, 閻毅之, 趙書勤, 付佳欣이 참가하여 5월-10월에 노호초 수력발전소 건설을 위해 상·하활룡 고분군 발굴 조사를 실시함.구조특징 적석총 3기, 계단적석총 5기, 봉토석실분 6기 등 총 14기가 분포하고 있음. 적석총 3기는 M1, M2, M7로 M1과 M2는 동서로 나란히 고분군의 최동단에 위치하고 M7은 고분군의 서뿍 모서리에 위치함. 계단적석총 5기는 M3, M5, M10, M11, M12로 이미 원형이 상실되었고 M5의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함. 봉토석실분 6기는 M4, M6, M8, M9, M13,M14로 모두 파괴되었고, 천청적 대부분이 결실되었으며, 천정 막음석을 덮은 후 황토로 봉했음. 분구는 원구상이며, 연도 위치에 따라 Ⅰ, Ⅱ식으로 나누는데 Ⅰ식은 편재 연도의 刀형 평면 석실로 총 2기(M13, M14)이고, Ⅱ식은 중앙 연도의 鏟형 평면 석실로 총 4기(M4, M5, M8, M9)임. M3은 현재 집이 들어서면서 훼손되었고, M4는 현재 절반이 잘려나간 상태임. 봉토석실분 Ⅱ식의 분구에는 土石混封도 포함되며, M9는 연도의 훼손이 삼각하고, M8·M9는 무기단석실적석총일 가능성이 큼. 봉토석실분 Ⅰ식의 M13, M14는 상부가 모두 훼손되었고, M12는 석실이 완전히 노출된 상태로 석실 밖 좌우에 대석이 각 1개씩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계단적석총이었을 것으로 추정됨.역사적 의미 상활룡 고분군의 적석총과 계단적석총에서 출토된 토기의 태토, 제작기법과 형식이 하활룡 고분군 출토 토기와 유사하므로, 상활룡 고분군의 연대는 하활룡 고분군으로 미루어 상한은 후한 시기이고 하한은 漢·魏의 교체기보다 늦지 않을 것으로 추정되나, 다만 상활용 고분군의 토기는 물레로 성형하고, 높은 온도에서 소성하여 하활용 고분군보다 하한이 내려올 가능성도 있음.자연환경 집안시 마선향 상활촌 북쪽에 있으며, 집안현성에서 서남쪽으로 8㎞ 지점에 위치하고, 모두 마을 북쪽의 충적 대지에 분포함. 고분군의 주변으로는 충적 대지 동쪽 320m 거리에 압록강이 흐르고, 서쪽으로 一漫崗과 접하며 배후에 산들이 충접함.(일명, 後山)유물정보 심발형토기 2점, 시루 1점, 호 2점, 동제 거울 1점, 회색토기편 1점, 연화문와당 1점, 명문토기 1점, 토기편 여러 점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纂委會, 『集安縣文物志』, 1983 · 孫仁傑, 「集安縣上·下活龍村高句麗古墓淸理簡報」『文物』 1984-1, 1984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리스트여닫기 상활룡 2호분(上活龍 2號墳) 출토지 집안시 마선향 상활촌 (集安市 麻線鄉 上活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77집안현문물보관소(集安縣文物保管所)겨울에 상·하활룡 고분군을 조사함.1982집안현문물보관소(集安縣文物保管所)林至德, 閻毅之, 趙書勤, 付佳欣이 참가하여 5월-10월에 노호초 수력발전소 건설을 위해 상·하활룡 고분군 발굴 조사를 실시함.구조특징 방형 평면이고, 방향은 180˚직경이며, 10-20㎝ 되는 강자갈을 지표 위에 쌓았고, 발굴 전에 분구 천정부의 북쪽에서 함몰갱(길이 및 너비가 각 3m)이 확인됨. 묘광은 지표와 바닥의 높이와 같으며, 무덤의 중앙에 위치하고, 네벽은 대부분 파괴되었으며, 남면에서 동서방향의 墓壙 벽선이 확인되는데 직경 30×50㎝의 강자갈로 축조했으며, 묘광 내부에서 심발형토기(陶罐)과 시루(陶甑) 등이 상당수 발견됨.내부규모 및 특징 묘광 현 길이 4.8m, 잔고 0.30m역사적 의미 상활룡 고분군의 적석총과 계단적석총에서 출토된 토기의 태토, 제작기법과 형식이 하활룡 고분군 출토 토기와 유사하므로, 상활룡 고분군의 연대는 하활룡 고분군으로 미루어 상한은 후한 시기이고 하한은 漢·魏의 교체기보다 늦지 않을 것으로 추정되나, 다만 상활용 고분군의 토기는 물레로 성형하고, 높은 온도에서 소성하여 하활용 고분군보다 하한이 내려올 가능성도 있음.자연환경 집안시 마선향 상활촌 북쪽에 있으며, 집안현성에서 서남쪽으로 8㎞ 지점에 위치하고, 모두 마을 북쪽의 충적 대지에 분포함. 고분군의 주변으로는 충적 대지 동쪽 320m 거리에 압록강이 흐르고, 서쪽으로 一漫崗과 접하며 배후에 산들이 충접함.(일명, 後山)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纂委會, 『集安縣文物志』, 1983 · 孫仁傑, 「集安縣上·下活龍村高句麗古墓淸理簡報」『文物』 1984-1, 1984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리스트여닫기 상활룡 4호분(上活龍 4號墳) 출토지 집안시 마선향 상활촌 (集安市 麻線鄉 上活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77집안현문물보관소(集安縣文物保管所)겨울에 상·하활룡 고분군을 조사함.1982집안현문물보관소(集安縣文物保管所)林至德, 閻毅之, 趙書勤, 付佳欣이 참가하여 5월-10월에 노호초 수력발전소 건설을 위해 상·하활룡 고분군 발굴 조사를 실시함.구조특징 석실 평면은 鏟형으로 지표 하 10㎝ 되는 곳에 자리하며, 석실 네 벽은 괴석을 사용해 들여쌓기로 3-4층을 쌓았고, 석실 중앙에서 서벽으로 40㎝ 되는 곳에서 동제 거울(銅鏡片) 1점, 토기(夾沙灰陶, 夾沙褐陶, 泥質灰陶) 잔편 등이 출토되었으며, 천정의 북쪽 부분에는 천정 막음돌 2매가 남아 있음. 연도는 남벽 중앙에 위치하며, 연도 중앙에는 돌을 쌓아 폐쇄시킴.내부규모 및 특징 석실 길이 2.5m, 너비 1.35m, 높이 1.1m 연도 길이 1m, 너비 0.64m, 높이 0.8m역사적 의미 상활룡 고분군의 적석총과 계단적석총에서 출토된 토기의 태토, 제작기법과 형식이 하활룡 고분군 출토 토기와 유사하므로, 상활룡 고분군의 연대는 하활룡 고분군으로 미루어 상한은 후한 시기이고 하한은 漢·魏의 교체기보다 늦지 않을 것으로 추정되나, 다만 상활용 고분군의 토기는 물레로 성형하고, 높은 온도에서 소성하여 하활용 고분군보다 하한이 내려올 가능성도 있음.자연환경 집안시 마선향 상활촌 북쪽에 있으며, 집안현성에서 서남쪽으로 8㎞ 지점에 위치하고, 모두 마을 북쪽의 충적 대지에 분포함. 고분군의 주변으로는 충적 대지 동쪽 320m 거리에 압록강이 흐르고, 서쪽으로 一漫崗과 접하며 배후에 산들이 충접함.(일명, 後山)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纂委會, 『集安縣文物志』, 1983 · 孫仁傑, 「集安縣上·下活龍村高句麗古墓淸理簡報」『文物』 1984-1, 1984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리스트여닫기 상활룡 5호분(上活龍 5號墳) 출토지 집안시 마선향 상활촌 (集安市 麻線鄉 上活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77집안현문물보관소(集安縣文物保管所)겨울에 상·하활룡 고분군을 조사함.1982집안현문물보관소(集安縣文物保管所)林至德, 閻毅之, 趙書勤, 付佳欣이 참가하여 5월-10월에 노호초 수력발전소 건설을 위해 상·하활룡 고분군 발굴 조사를 실시함.구조특징 방구상 평면으로 180˚방향임. 기단은 지표에 강자갈을 깔아 기초를 만들고, 그 위에 기단을 축조했는데 가공된 석회석을 3단으로 쌓았고, 각 층은 12-13개의 돌을 사용하였으며, 총 높이는 0.70m로, 기단 위의 4면을 1-2m 안으로 들여쌓아 계단을 축조했으며, 기단 동남 모서리에서 2m 떨어진 곳의 지표하 30㎝에서 파손된 연화문와당이 출토됨. 2층 계단은 직경 40×20m 되는 강자갈로 축조했고 높이 0.70m로 계단 내부는 돌을 채운 후에 들여쌓으면서 묘광실을 축조함. 묘광은 지표에서 1.40m 높이에 위치하며 4벽은 파괴되었고 동남북 3면에 여러 개의 잘 다듬어진 돌이 잔존하는데, 돌의 크기는 50×20×10㎝임. 남북 방향의 장방형이고, 길이가 약 3m이나 너비는 확인이 불가하며, 묘광 내에서 고운 점토의 회색토기(灰陶) 구연부편이 출토되었음. 묘광 상부에는 크기가 제각기인 강자갈로 분구를 만듦.내부규모 및 특징 묘광 길이 약 3m역사적 의미 상활룡 고분군의 적석총과 계단적석총에서 출토된 토기의 태토, 제작기법과 형식이 하활룡 고분군 출토 토기와 유사하므로, 상활룡 고분군의 연대는 하활룡 고분군으로 미루어 상한은 후한 시기이고 하한은 漢·魏의 교체기보다 늦지 않을 것으로 추정되나, 다만 상활용 고분군의 토기는 물레로 성형하고, 높은 온도에서 소성하여 하활용 고분군보다 하한이 내려올 가능성도 있음.자연환경 집안시 마선향 상활촌 북쪽에 있으며, 집안현성에서 서남쪽으로 8㎞ 지점에 위치하고, 모두 마을 북쪽의 충적 대지에 분포함. 고분군의 주변으로는 충적 대지 동쪽 320m 거리에 압록강이 흐르고, 서쪽으로 一漫崗과 접하며 배후에 산들이 충접함.(일명, 後山)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纂委會, 『集安縣文物志』, 1983 · 孫仁傑, 「集安縣上·下活龍村高句麗古墓淸理簡報」『文物』 1984-1, 1984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리스트여닫기 상활룡 13호분(上活龍 13號墳) 출토지 집안시 마선향 상활촌 (集安市 麻線鄉 上活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77집안현문물보관소(集安縣文物保管所)겨울에 상·하활룡 고분군을 조사함.1982집안현문물보관소(集安縣文物保管所)林至德, 閻毅之, 趙書勤, 付佳欣이 참가하여 5월-10월에 노호초 수력발전소 건설을 위해 상·하활룡 고분군 발굴 조사를 실시함.구조특징 석실의 바닥은 지표보다 20㎝ 낮고, 한겹 작은 냇돌을 깔았으며, 석실 평면은 편재연도의 刀형으로 4벽은 화강암으로 축조했으며, 방향은 180˚임. 연도는 남벽 좌측에 위치하고 연도 중앙에 돌로 폐쇄하였음. 북쪽에서 두개골을 발견한 상황으로 볼 때 葬制는 頭北南足이며, 부장 유물은 고운 점토의 회색토기(灰陶)와 갈색토기(褐陶) 등의 토기편이 출토됨.내부규모 및 특징 석실 길이 1.75m, 너비 1.10m, 높이 0.75m 연도 길이 1.20m, 너비 0.60m, 높이 0.65m역사적 의미 상활룡 고분군의 적석총과 계단적석총에서 출토된 토기의 태토, 제작기법과 형식이 하활룡 고분군 출토 토기와 유사하므로, 상활룡 고분군의 연대는 하활룡 고분군으로 미루어 상한은 후한 시기이고 하한은 漢·魏의 교체기보다 늦지 않을 것으로 추정되나, 다만 상활용 고분군의 토기는 물레로 성형하고, 높은 온도에서 소성하여 하활용 고분군보다 하한이 내려올 가능성도 있음.자연환경 집안시 마선향 상활촌 북쪽에 있으며, 집안현성에서 서남쪽으로 8㎞ 지점에 위치하고, 모두 마을 북쪽의 충적 대지에 분포함. 고분군의 주변으로는 충적 대지 동쪽 320m 거리에 압록강이 흐르고, 서쪽으로 一漫崗과 접하며 배후에 산들이 충접함.(일명, 後山)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纂委會, 『集安縣文物志』, 1983 · 孫仁傑, 「集安縣上·下活龍村高句麗古墓淸理簡報」『文物』 1984-1, 1984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리스트여닫기 하활룡 고분군(下活龍 古墳群) 출토지 집안시 마선향 하활촌 (集安市 麻線鄉 下活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77집안현문물보관소(集安縣文物保管所)겨울에 상·하활룡 고분군을 조사함.1982집안현문물보관소(集安縣文物保管所)5월-10월에 걸쳐 임지덕, 염의지, 조서근, 부가흔이 참가하여 노호초 수력발전소 건설을 위해 상·하활룡 고분군을 조사함.구조특징 고분군의 범위는 동서 너비 1㎞, 남북 길이 1.5m로 총 34기의 적석총이 분포함. 적석총은 묘광의 크기에 따라 2式으로 구분되는데 Ⅰ식 고분은 총 29기로 남쪽의 경사진 언덕 위에 위치하는 M8이 대표적 사례이며, 고분 둘레는 대부분 8-15m임. Ⅱ식 고분은 총 5기(M24, M3, M4, M13, M14)로 고분 둘레가 3-6m이며, 고분 축조가 Ⅰ식 고분과 동일한 광실로 규모는 Ⅰ식 고분에 비해 매우 작고, 매장 공간은 길이 0.8-1.1m, 너비 0.25-0.6m의 소형임.역사적 의미 고분군의 연대는 고분 구조와 부장품으로 미루어 상한은 후한, 하한은 漢·魏의 교체기로 비정되며, 고분 구조를 보면 적석총은 원형, 방형 평면 등 정형성을 갖추지 못하였고, 매장부의 위치가 분구 중 혹은 지표에 있기도 함. 장속의 일부는 묘광이 시체를 안치하기에 너무 작은 것도 있는데, 이것은 『北史』고려전의 기록 “死者殯在屋內 經三年 擇日而葬”에서 말하는 2차장의 습속과 연관지어 볼 수 있으나 뼈만 추려 매장했을 가능성 또는 어린아이를 매장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음.자연환경 집안현성에서 서남 방향 16㎞ 거리의 집안시 마선향 하활촌 남쪽에 고분군이 위치하는데 동남 양쪽으로 압록강이 흐르고, 서북 양쪽으로는 가파른 大黑砬子山이 둘러싸고 있으며, 북쪽 8㎞ 거리에 상활룡촌이 자리잡고 있음. 고분군은 반원형 충적 분지 동쪽의 언덕으로, 압록강 수면보다 약 5m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노호초 수력발전소의 건설로 인해 완전히 수몰됨.유물정보 고리자루칼 2점, 철제 도끼 1점, 철제 낫 1점, 철제 띠고리 1점, 화살촉 집 1점, 동제 단추장식 1점, 동제 장식 1점, 양이호 1점, 사이호 1점, 방추차 1점, 어망추 1점, 유리구슬장식 6점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纂委會, 『集安縣文物志』, 1983 · 孫仁傑, 「集安縣上·下活龍村高句麗古墓淸理簡報」『文物』 1984-1, 1984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리스트여닫기 하활룡 8호분(下活龍 8號墳) 출토지 집안시 마선향 하활촌 (集安市 麻線鄉 下活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77집안현문물보관소(集安縣文物保管所)겨울에 상·하활룡 고분군을 조사함.1982집안현문물보관소(集安縣文物保管所)5월-10월에 걸쳐 임지덕, 염의지, 조서근, 부가흔이 참가하여 노호초 수력발전소 건설을 위해 상·하활룡 고분군을 조사함.구조특징 원형 평면으로 직경 50×50㎝ 되는 강자갈을 묘 주위에 깔음. 묘광은 南偏西 35˚방향으로 모래와 강자갈을 섞어 지표에 직접 축조하였으며, 직경 30×40㎝ 정도의 강자갈로 쌓았고, 묘광 상부는 작은 강자갈로 봉함.내부규모 및 특징 묘광 동벽 길이 1.7m, 높이 0.8m 묘광 서벽 길이 1.8m, 높이 0.9m 묘광 남벽 너비 1.1m, 높이 0.9m 묘광 북벽 너비 1.0m, 높이 0.8m역사적 의미 고분군의 연대는 고분 구조와 부장품으로 미루어 상한은 후한, 하한은 漢·魏의 교체기로 비정되며, 고분 구조를 보면 적석총은 원형, 방형 평면 등 정형성을 갖추지 못하였고, 매장부의 위치가 분구 중 혹은 지표에 있기도 함. 장속의 일부는 묘광이 시체를 안치하기에 너무 작은 것도 있는데, 이것은 『北史』고려전의 기록 “死者殯在屋內 經三年 擇日而葬”에서 말하는 2차장의 습속과 연관지어 볼 수 있으나 뼈만 추려 매장했을 가능성 또는 어린아이를 매장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음.자연환경 집안현성에서 서남 방향 16㎞ 거리의 집안시 마선향 하활촌 남쪽에 고분군이 위치하는데 동남 양쪽으로 압록강이 흐르고, 서북 양쪽으로는 가파른 大黑砬子山이 둘러싸고 있으며, 북쪽 8㎞ 거리에 상활룡촌이 자리잡고 있음. 고분군은 반원형 충적 분지 동쪽의 언덕으로, 압록강 수면보다 약 5m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노호초 수력발전소의 건설로 인해 완전히 수몰됨.유물정보 Ⅱ식 고리자루칼(環首鐵刀) 1점, 철제 도끼(鐵錛) 1점, 철제 낫(鐵鎌刀) 1점, 철제 장식(鐵附件) 1점, 철제 띠고리(鐵帶卡) 1점, Ⅰ식 및 Ⅱ식의 양이호, 사이호(陶罐) 각 1점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纂委會, 『集安縣文物志』, 1983 · 孫仁傑, 「集安縣上·下活龍村高句麗古墓淸理簡報」『文物』 1984-1, 1984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하활룡 24호분(下活龍 24號墳)

      • 하활용 묘군 M8(下活龍 墓群 M8)

      • 태평구 고분군(太平溝 古墳群)

      • 태평구 59호분(太平溝 59號墳)

      • 사구령 고분군(斜溝嶺 古墳群)

      • 흥농 고분군(興農 古墳群)

      • 흥농교 고분군(興農橋 古墳群)

      • 자흥 고분군(自興 古墳群)

      • 두도양차 고분군(頭道陽岔 古墳群)

      • 산성촌 고분군(山城村 古墳群)

      • 양차 고분군(陽岔 古墳群)

      • 장천 고분군(長川 古墳群)

      • 장천 1호분(長川 1號墳)

      • 리스트여닫기 장천 2호분(長川 2號墳) 출토지 집안시 황백향 장천촌 (集安市 黃柏鄉 長川村)연대 5세기 중반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62 집안시 전역 문물답사시 발견함.1972길림성박물관, 집안현문물보관소(吉林省博物館, 集安縣文物保管所)4-5월에 걸쳐 陳相偉, 劉萱堂, 王澤慶이 참가하여 장천 2호분을 발굴함.구조특징 장천2호분(JCM002)은 봉토석실 벽화분으로 방대형의 분구이며, 둘레는 143m임. 매장부의 연도는 방향이 254˚이고, 연도 입구는 장방형 또는 방형의 돌로 막았으며, 바닥은 석판을 깔음. 이실은 연도의 남과 북에 각 1개가 있고, 장방형 평면, 평천정이며, 바닥은 통로 바닥보다 12㎝ 높음. 통로의 양벽은 잘 다듬어진 장대석으로 4단을 축조하였고, 통로의 끝에 현실 문을 축조하였는데 0.70m 너비의 門楣와 門框이 설치되어 있고, 문미 위쪽에 직경 0.12m, 깊이 0.07m의 기둥구멍(門軸을 놓았던 자리)이 있으며, 2개의 석문을 설치하였는데 남문은 훼손되고 북문은 너비 0.70m, 높이 1.50m로 상태가 양호함. 묘실은 방형 평면으로 통로가 서벽 중앙에 연결되어 있고, 천정은 4중 평행고임에 거대 頂石을 덮은 평행고임 천정이며, 벽장을 걸기 위한 못자리 구멍이 있는데 4벽 상단에 일정간격을 유지하여 남·북벽에 각 5개, 동벽 8개, 서벽 4개가 있고, 동벽 남단과 서벽 북단에는 도금 고리가 남아 있는 상태로 발견됨. 관대는 화강암으로 제작된 2개의 관대가 남북으로 배치되어 있음. 철기 총 15점, 모두 銅質에 도금한 도금류 총 27점, 황유토기 중 북쪽 이실에서 釉陶의 부뚜막(陶灶), 남쪽 이실에서 사이호(四耳釉陶壺)가 출토되었고, 남쪽 관대 서북 모서리에서 비단 조각편이 출토되었으며, 관대 위에서 표면에 옻칠이 된 목관 잔편이 출토되었고, 남쪽 관대 중앙부에서 목령패편이 출토되었는데 말각장방형으로 표면에 옻칠이 되어 있으며, 묘도 앞의 교란된 구덩이에서 원주형의 목기편이 출토되었고 남쪽 관대의 서단에서 기와편이 출토되었음. 벽화내용을 보면 남·북 이실은 벽에 ‘王’자로 권운문이 연속되는 도안으로 가로 25줄, 세로 23줄이고, ‘王’자 바깥에 墨線의 운문이 둘러쌈. 현문의 앞면에는 머리에 방책을 착용하고 몸에 短襦肥袴를 입고 허리는 띠로 묶고 발에 釘履를 신은 문지기가 있고, 뒷면에는 合袵長服襈裙을 입고 두 손을 가슴 앞쪽에 모으고 오른쪽으로 몸을 돌린 모습의 시녀가 있음. 묘실에는 전·후벽 및 좌·우벽의 천정에 연꽃이 있고 천정석 아래의 影作樑枋에 인동문이 있으며 천정 막음돌은 흑선으로 9개의 네모칸으로 나누었는데 정중앙 및 4모서리의 5개 네모칸 안에는 정면에서 바라본 연화도안을 배치하였고, 나머지 4개 네모칸에는 마름모형의 기하문양을 배치하였으며, 묘실문 안쪽 부분에는 위쪽 부분과 좌우 양측에 墨線으로 螭雲圖案, 門楣, 門框 등을 배치함.역사적 의미 고구려 귀족 또는 왕족의 무덤임. 연대는 5세기 중반인데 고분 벽화 2기의 전형인 우산 1894호분(『考古與文物』1983-1인용, 통구 12호분(일명, 마조묘)가 현재 우산 1894호;or 우산 332호분)의 구조가 묘실과 남·북 이실로 구성되어 있고 묘실의 천장은 평행고임이며 벽화 내용상 석문에 그려진 시녀의 형태와 복식 및 연꽃잎이 뾰족하고 쇠약한 점에서 유사한 구조이고, 우산하 1894호분의 벽화가 풍속화인데 비해 장천 2호분은 도안 위주의 벽화이라는 점에서 벽화소재의 차이가 나는데 이는 유형상의 차이임.자연환경 집안현성 동북 25㎞쯤의 황백향 장천촌 북쪽 제1단과 제2단 대지에 위치하는데, 장천은 동서로 좁고 길게 뻗은 하곡분지로, 계절하인 乾溝河(干溝河)가 북쪽 산골짜기에서 분지 중앙을 지나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유입되는데, 건구하 양안을 따라 100여기의 고구려 고분이 밀집함. 고분군은 북쪽은 높은 산에 기대어 있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자리하며, 고분군이 자리한 장천촌을 집안-청석 간 도로가 동서로 관통함. 장천 분지에는 2개의 계절하가 북에서 남으로 흘러가는데, 서쪽이 건구하이고 동쪽이 後林子溝河임.유물정보 철제 망치 1점, 철제 칼 1점, 철제 화살촉 5점, 철제 못(釘) 4점, 문고리(門鐐) 2점, 철기 띠고리(帶卡) 2점, 행엽 1점, 도금 띠고리 2점, 걸이쇄(掛鉤) 2점, 못(釘) 6점, 고리(環) 1점, 장방형 장식품 2점, 입식부 운주 2점, 화판형 관장식 Ⅰ식 6점, Ⅱ식 5점, 釉陶 부뚜막(陶灶) 1점, 사이호(四耳釉陶壺) 1점, 비단 조각편 1점, 목관 잔편 1점, 목령패편 1점, 원주형의 목기편 1점, 기와편 1점참고문헌 · 陳相偉·方起東, 「集安長川一號壁畵墓」『東北考古與歷史』 1982-1, 1982 · 陳相偉, 「集安長川二號封土墓發掘簡記」『文物考古彙編』 1982-1, 1982 · 陳相偉, 「集安長川二號封土墓發掘紀要」『考古與文物』 1983-1, 1983 · 張雪岩, 「集安兩座高句麗封土墓」『博物館研究』 1988-1, 1988 · 孫進己·孫海, 『高句麗渤海硏究集成』 高句麗 卷(二), 哈爾濱出版社, 1997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전호태,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 사계절출판사, 2000

      • 장천 3호분(長川 3號墳)

      • 장천 4호분(長川 4號墳)

      • 장천 5호분(長川 5號墳)

      • 리스트여닫기 장천고성; 장천촌읍지(長川古城; 長川村邑址) 출토지 길림성 집안시 황백향 장천촌 (吉林省 集安市 黃柏鄉 長川村)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62길림성박물관 집안고고대(吉林省博物館集安考古隊)4월에 상기 고고대의 방기동 및 길림사범대학 조정용, 길림성 철학사회과학연구소 주함강, 집안현 문물관리소 직원이 참가하여 성벽을 실측하고 유물을 채집함. 정식보고서는 간행하지 않았고, 길림성문물지위원회, 1984 『集安縣文物志』 및 집안현문물보관소, 1986 「集安嶺前鴨綠江流域原始社會遺址」『博物館硏究』1986-2에 일부 내용을 기재함.1972 유적 내에서 동제 검(銅劍)을 모방한 석제 검(石劍)이 출토함.1980 가을에 현지 주민이 採土 작업을 하다가 토기편을 대량으로 발견했고, 집안현 박물관의 周雲台가 장천벽화고분 유지보수 작업을 하면서 현지 주민을 데리고 채토 지점에 대한 조사를 진행함.1983집안현박물관문물조사대(集安縣博物館文物調査隊)5월 30일에 서운강, 경철호, 동장부, 장설암이 참가하여 성벽 보존상태를 재확인함. 길림성문물지편위회, 1984 『집안현문물지』에 발표하였고, 조사결과를 토대로 1983년 10월 19일 집안현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됨.구조특징 고성은 압록강 강변에 펼쳐진 충적대지보다 10m 정도 높은 2단 충적대지의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동서 길이 110m, 남북 너비 100m 전후로 이 고성과 유사한 혼강-장백 지역의 사례로 보아 전체 평면이 정방형 내지 방형인 평지성으로 추정됨. 1962년 조사 당시에는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여 성벽의 둘레를 확인할 수 있었으며, 1983년 재조사할 때도 남벽과 북벽은 土築, 동벽과 서벽은 石築으로 성벽의 축조상태를 비교적 정확히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성벽이 거의 매몰되어 있어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 힘든 상태이며, 고성의 표지판을 세워놓은 서북벽 동북단의 일부를 겨우 확인할 수 있는 정도로 더욱이 성곽이 위치한 2단 충적대지 일대가 포도밭으로 경작되고 있어 유적이 훼손될 가능성도 상당히 높은 상태임. 출토유물로 성곽 내부에서 일찍이 철제 화살촉과 황색니질토기(黃色泥質陶) 및 사질혼입토기(夾砂陶)편이 출토되었는데, 그 가운데 고구려 시기의 전형적인 대상파수(橫橋耳)도 있음. 성곽 서쪽에서 토기편이 대량으로 출토된 청동기시대 유적이 확인된 바 있고, 1972년에는 성곽 내부에서 동제 검(銅劍)을 모방한 석제 검(石劍)이 출토된 바 있음.역사적 의미 주변에 적석묘·봉토석실묘 등 고구려 시기 고분이 다수 있고, 장천 1호분과 2호분을 비롯한 대형 벽화고분도 있으며, 고성의 서쪽 일대에는 청동기시대 토기편 산포지가 자리잡고 있음. 지정학적으로 고구려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이 위치했던 집안현성(길림성 집안시)에서 압록강을 거슬러 동북 23㎞ 정도 떨어져 있고, 국내성에서 비교적 가까우며 고구려시기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대형 계단식 석실적석총과 벽화고분이 주변에 분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구려 귀족세력과 밀접히 연관된 지역으로 추정됨. 주변에 밀집하게 분포한 고구려 시기의 고분과 성곽 내부에서 출토된 고구려 시기의 토기편을 근거로 대체로 고구려시기의 마을 유적으로 파악하고 있음(『집안현문물지』). 다만 성곽이 비교적 소규모이고, 압록강변 충적대지의 가장자리에 위치했다는 점에서 단순한 마을유적으로 보기는 힘들고, 최근 양민고성을 비롯하여 압록강 중상류 연안에서 장천고성과 입지조건이나 규모 등이 유사한 성곽이 다수 확인되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압록강변 2단 충적대지의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으며 방형 내지 장방형의 소규모 평지성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음. 이로 보아 장천고성도 이들과 동일한 성격의 평지서응로 압록강 수로를 이용·통제하기 위해 축조한 수로상의 성곽으로 추정됨.자연환경 집안현성(길림성 집안시)에서 동북으로 23㎞ 떨어진 황백향 장천촌 서측 압록강변의 대지상에 위치하고, 남쪽으로 약 150m 거리에 압록강이 있고, 북쪽으로 집안-청석 도로에 잇닿아 있으며, 동쪽 50m 거리에 장천촌의 주택가가 위치해 있음. 압록강이 동북에서 서남으로 완만한 유속으로 유유히 흘러가고 있으며, 압록강 남쪽과 북쪽에는 강과 거의 평행으로 산줄기가 계속 연이어짐. 장천촌 일대는 압록강 연안에서 비교적 넓은 충적대지를 이루고 있으며, 특히 장천촌 동쪽에는 서북쪽의 산줄기에서 발원한 두 줄기의 계절 하천이 서북에서 동남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합류하고 있음. 고성이 위치한 압록강 연안의 충적대지는 2단으로 되어 있는데, 강 연안에 바로 인접하여 좁고 기다란 1단의 대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그 안쪽에 1단 대지보다 10m 정도 높은 2단 대지가 펼쳐져 있음. 고성은 2단 충적대지의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는데, 고성의 서쪽에서 청동기시대로 추정되는 유적이 확인된 바 있음. 장천촌 동쪽 계절 하천 주변의 충적대지에는 고구려 적석묘가 백여기 이상 분포해 있으며 장천촌 서북쪽 산기슭에는 장천2호분을 비롯한 벽화고분과 대형 계단식석실적석묘가 위치해 있고, 고성 서남쪽 충적대지상에도 대형적석묘 2기가 위치해 있음.참고문헌 · 李殿福, 「1962年春季吉林輯安考古調査簡報」『考古』 1962-11, 1962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4 · 張雪岩·周云台, 「集安嶺前鴨綠江流域原始社會遺址」『博物館研究』 1986-2, 1986 · 國家文物局 主編, 「集安市-長川古村邑址」『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王禹浪·王宏北, 「中國吉林省集安市黃柏鄕長川村高句麗古城址」『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1994 · 余昊奎, 「集安 長川古城」『高句麗 城』 Ⅰ(鴨綠江 中上流篇), 國防軍史硏究所, 1998

      • 장천 유적지(長川 遺跡地)

      • 장천 2호 고분(長川 2號 古墳)

      • 호자구 고분군(蒿子溝 古墳群)

      • 리스트여닫기 호자구 1호분(蒿子溝 1號墳) 출토지 집안시 황백향 호자구촌 (集安市 黃柏鄉 蒿子溝村)연대 3세기경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3집안시박물관(集安市博物館)5월에 실시하여 고분 7기(JHM1-JHM7호)가 확인했는데, JHM1호분만 기록하였고 그 외 6개 고분은 기록하지 않음.2004, 2005집안시박물관(集安市博物館)2004년 11월 및 2005년 4월에 장복유, 손인걸, 지용이 참가하여 고분 6기를 확인하였고, JHM1·3·4·5·6·7호로 편호함. 1983년 JHM2호로 편호된 고분은 JHM1호분의 부속시설로 확인됨.구조특징 호자구1호분(JHM1)은 기단석광적석총으로 1983년 조사시에는 방단계제적석묘로, 2005년 조사시에는 6기 모두 유단적석석광묘로 표기했었음. 장방형 평면, 南偏西 20˚방향이고, 기단은 4면 모두 확인되는데 미가공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일반적으로 4-7층으로 축조하였고, 기단석은 대략 길이 0.5m, 너비 0.3m, 높이 0.2m 정도의 크기이며, 돌 울타리의 잔고는 서쪽 중앙은 1.2m, 북쪽은 0.8m, 동·남쪽은 1.5m임. 기단 밖에는 대형 護墳石(立石)을 세웠는데 다수가 홍갈색 화강암이고, 회색화강암, 현무암 등의 미가공된 상태의 석질을 사용하였으며, 크기는 남쪽의 지표에 드러난 부분의 높이는 1.5m, 너비 1.2m, 두께 1m이고, 북쪽의 지표에 드러난 부분의 높이는 1.2m, 너비 2m, 두께 0.6m이며, 동·서쪽의 높이는 1-0.8m, 너비 0.8-0.6m, 두께 0.6-0.3m임. 고분 서쪽면 남단과 고분의 남쪽면 사이에서 2줄의 돌 울타리(계장)가 확인되었는데, 서쪽면 남단의 계장은 서남모서리에서 6m 지점에서 시작하고, 서쪽면 남단의 계장은 아랫단에서 1.5m 정도 들어간 위에 단을 축조함. 분구는 다량의 산자갈과 소량의 강돌로 쌓았으며, 분구 중앙 함몰 상태로 미루어 석광은 훼손이 심각한데 분구 적석 사이에 다수의 암키와, 수키와 잔편, 용석, 불타서 변형된 기와 등이 발견되었고, 1983년 조사 때 겹겹이 눌린 방추차 4건, 용석 등을 발견함. 고분의 북쪽은 농경지로 개간되어 훼손됨.역사적 의미 고분군의 연대를 보면 호자구 1호분은 3세기경으로, 고분 축조방식에서 대형적석총인 집안 마선구 2378호 및 칠성산 871호의 기단 바깥으로 立石을 설치하고 계장을 구축하는 방식과 유사하기 때문에 이것은 고구려 초기의 적석총 축조기법이지만, 고분 남쪽면에서 비교적 낮은 곳에 있고, 모서리가 점차 네모져지는 점, 봉석 가운데 강돌이 보이고, 筒瓦의 어깨부분이 점차 높아지는 점에서 차이를 보여 호자구 고분은 마선구 2378호, 칠성산 871호분보다 연대가 조금 늦음. 호자구 3·4·5·6·7호분은 3세기경으로 1호분과 고분 유형은 일치하나 규모가 작고 고분 연대는 1호분과 비슷함. 호자구 1호분은 왕릉으로 3세기 대형적석묘이며 호자구 1호분의 동·북 양쪽의 유적으로 장방형 돌무지로 陵墻類의 시설로 추정되는 왕릉 시설물이 있고, 고분 남면은 벼랑이고, 서면은 고랑 경사로 능묘시설이 보이지 않음. 호구자 3-7호분은 JHM1호분과 동일 연대로 규모가 작다는 점에서 배총으로 추정됨. 최근 중국에서는 JHM1호분의 주인공을 동천왕으로 비정하고 있는데, 그 근거로 고분의 연대와 규모면에서 연대가 3세기경이고, 고분 규모와 부속시설이 왕릉의 구비조건과 부합하며, 魏 관구검의 환도성 침공 후, 동천왕 21년(247) ‘築平壤城, 移民及廟社’한 기록하고 있으며, 고분이 위치한 호자구는 지리적으로 국내성의 동쪽(東川)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고, 호자구 지명과 동천왕 장지명의 관계에서 장천의 동쪽은 ‘黃柏’에서 ‘호자구’라고 칭했으며, 호자구는 금일 ‘柴子溝’로도 불리는데, 이것은 동천왕의 장지 ‘柴原’과 일치하고, 동천왕대 기록에 동천왕 21년(247)에 축조한 평양성은 ‘양민고성’으로 상정했고, 호자구 지역은 국내성과 평양성의 중간지대이며, 동천왕은 평양성 축조 이듬해인 249년 훙거함. 중국학계의 고분군 해석에 대한 문제로는 현재 잔존된 상태로 미루어 보고자의 견해대로 왕릉으로 볼 근거는 확실하지 않고, 여러 기가 열상 배치되어 독립된 묘역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규모는 마선구 2378호분과 칠성산 871호분에 비해 소형에 해당됨. 연대 판단의 근거도 없는데 마선구 2378호분은 보고서에 의하면 1세기 전후로 비정되고, 칠성산 871호분은 2세기경으로 비정하고 있기 때문에 같은 축조기법이 200년 이상 지속되므로, 축조기법은 연대 판단의 적극적인 근거가 될 수 없음. 적석분구에서 용석이 발견되는 것은 집안 일대 이른 시기 석광적석총에서 흔히 보이는 현상이며, 중·소형분에서도 기와의 출토 예가 있음. 따라서 무덤 축조 형식이나 분구에서 기와가 출토된 점으로 왕릉으로 비정하는 것은 불합리한 해석이며, 더구나 동천왕으로 볼 객관적 근거도 없음.자연환경 고분군은 집안현성 동쪽 약 31㎞ 떨어진 황백향 호자구촌 동북에 위치하며, 호자구 충적대지 중앙의 동서 1.5㎞, 남북 1㎞ 가량의 작은 언덕 최남단에 위치함. (이 고분의 행정 소재지는 예전에는 황백향이었으나, 최근 靑石鎭 관할로 변경됨.) 호자구는 동서 2.5㎞, 남북 1.5㎞의 충적대지로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고 있고, 남쪽에 압록강이 흐르고, 고분군이 위치하는 언덕에서 남쪽으로 약 50m 떨어져 호자구소학교가 위치하며, 청석진과 집안을 연결하는 도로(集靑公路)가 소학교 앞을 동서로 관통함.참고문헌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李殿福, 「國內城始人建于戰國晩期燕國遼東郡塞外的一介據點之上」『東北史地』 2006-3, 2006

      • 호자구 3호분(蒿子溝 3號墳)

      • 호자구 4호분(蒿子溝 4號墳)

      • 호자구 5호분(蒿子溝 5號墳)

      • 호자구 6호분(蒿子溝 6號墳)

      • 호자구 7호분(蒿子溝 7號墳)

      • 하투 고분군(下套 古墳群)

      • 추피 고분군(秋皮 古墳群)

      • 석호 고분군(石湖 古墳群)

      • 양민 고분군(良民 古墳群)

      • 양민 1호분(良民 1號墳)

      • 양민 2호분(良民 2號墳)

      • 양민 3호분(良民 3號墳)

      • 양민 4호분(良民 4號墳)

      • 양민 5호분(良民 5號墳)

      • 양민 6호분(良民 6號墳)

      • 양민 7호분(良民 7號墳)

      • 양민 8호분(良民 8號墳)

      • 양민 9호분(良民 9號墳)

      • 양민 10호분(良民 10號墳)

      • 양민 11호분(良民 11號墳)

      • 양민 12호분(良民 12號墳)

      • 양민 13호분(良民 13路墳)

      • 양민 30호분(良民 30號墳)

      • 양민 31호분(良民 31號墳)

      • 양민 72호분(良民 72號墳)

      • 양민 73호분(良民 73號墳)

      • 양민 74호분(良民 74號墳)

      • 양민 76호분(良民 76號墳)

      • 양민 92호분(良民 92號墳)

      • 양민 97호분(良民 97號墳)

      • 양민 168호분(良民 168號墳)

      • 리스트여닫기 양민고성, 양민전자고성(良民古城, 良民甸子古城) 출토지 집안시 청석진 양민전자 (集安市 靑石鎮 良民甸子)연대 고구려 중기 전후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동천왕 21(247년)에 축조했다는 평양성으로 비정하기도 함(張福有).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2004길림성장백문화연구회, 집안시박물관(吉林省長白文化硏究會, 集安市博物館)6월 3일, 7일, 19일에 장복유, 정원, 손인걸, 지용이 고성지 1곳과 고분 14기를 발견함.2004 6월 20일 오후 2시, 集安市 翠園호텔 2층 소회의실에서 좌담회에서 張福有, 길림성 장백산문화연구회 회장(양민출생, 중학교 때 이사)이 사회를 보고, 程遠, 집안시 文聯 주석, 賈蕾, 集安市委 宣傳部 干部가 소집되었으며, 孫志强 외 7인이 참석했음. 참석자 약력 사항으로 孫志强은 1927년 양민 출생으로 현재 78세로 원래 집안시 병원장이었으나 현재 퇴직했고, 16세 이후 외지로 나가 공부하고 일했으며, 지금은 집안시에 거주하며, 고향인 양민에 자주 감. 呂茂德은 1931년 양민 출생으로 현재 74세이며, 일찍이 양민 초등학교(小學校) 지도 주임, 교장을 역임했고, 이후 집안시 정부 비서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퇴직하여 집안시에 거주함. 馮振遠은 현재 78세로 일찍이 양민 초등하교(小學校) 교장을 6년간 역임하고 이후 집안시 인민 대회 상무위원회(集安市人大常委會) 財經 주임을 역임했으며, 지금은 퇴직하여 집안시에 거주함. 王金純은 1931년 양민에서 출생해서 현재 74세로 수몰 후 양민을 떠나, 일찍이 집안시 위원회 기율 검사 위원회(集安市委紀檢委) 監督員을 역임했으며, 지금은 퇴직해 집안시에 거주함. 周新博은 집안시 문서국(檔案局) 간부이고 遲勇과 孫仁杰은 집안시박물관 관원임.2006길림성장백산문화연구회(吉林省長白山文化硏究會)운봉댐 수리를 위해 방류를 하면서 수위를 41.13m나 낮추자 그동안 수몰되었던 고성이 드러나자 5월 2일에 장백산문화연구회 장복유, 집안시박물관 손인걸과 지용이 성곽의 전체 현황과 성벽 축조 양상 등을 조사함.1960년대 1962년에 길림성박물관의 王承禮 등이 운봉댐 수몰지구를 조사하면서 양민 일대도 조사했으나 고분만 확인함.1964년 5월에 方起東, 李健才, 陳相偉 등이 운봉댐 수몰지구를 조사하며 양민전자 일대의 고분군 30여기를 발굴하였지만 이때도 고성은 조사하지 않음.1966년 9월 9일에 운봉댐 완공으로 양민 일대가 수몰됨.구조특징 2004년 좌담회 참석자들의 회상에 따르면 양민고성은 양민전자 1·2단 충적대지 사이에 위치했다고 함. 성곽은 주성곽과 보조성벽 두 부부느올 이루어져 있는데 주성곽은 전체적으로 방형이고, 보조 석벽은 주성곽 북쪽에 압록강과 나란히 남북 방향으로 축조했다고 함. 특히 현지인 王恒英 노인은 보조 성벽은 秋皮-良民 도로 모퉁이의 낭떠러지에서 축조하기 시작해 학교 서측으로 이어지며 그 남측으로 주성곽의 토벽을 축조했다고 함. 주성곽의 규모는 2004년 좌담회에서 전체적으로 장방형으로 남북 길이 350-400m, 동서 너비 300m였던 것으로 회고했고, 2006년 5월 2일 조사에서 운봉댐 방류로 성곽이 노출되었는데, 전체적으로 방형이고 모서리는 圓角이었고, 서벽은 180m, 북벽은 220m 정도 수면 위로 노출됨. 보조 성벽은 2004년 좌담회에서 약 550-600m였다고 회고함. 1965년 운봉댐이 건설되면서 이 일대 고분과 기타 중요 유적이 수몰되었는데, 2006년 5월 운봉댐 수리를 위해 방류를 하며 댐의 수위를 41.3m나 낮춤에 따라 주성곽이 드러났는데 성벽의 보존 상태가 상당히 양호했음. 2004년 좌담회 참석자의 회상을 보면 장복유는 이곳에서 태어나 중학교 때 이곳을 떠났는데 초등학교 때 학교 운동장의 서측이 성벽에 가까이 있었고, 성벽 높이 2m 정도 였으며, 놀이를 할 때 먼저 성에 올라가는 사람이 이겼음. 현지 농민 姜崇國은 1947년 양민에서 태어났고, 수몰 당시 17살이었을 때였음. 이곳에 확실히 성이 있었고, 북면은 양민학교에서 시작해 남면은 양민 圍子角까지 이르렀음. 남북 길이는 약 500m, 동서는 도로 세 곳에 걸쳐 있으며 300여m임. 강변에 붙어 있는 면의 벽(즉, 동벽)은 납작한 사각형 성돌로 쌓았고, 또 계단이 있어서 올라갈 수 있었고, 2m 정도 높이였으며, 다른 면은 흙으로 되어 있었고 흙이 딱딱해 농사를 지어도 자라지 않고, 3m여 너비로, 이런 벽 중간에는 갈라진 틈이 있었음. 현지인 75세 王恒英 노인은 秋皮溝에서 태어나 9살 때 양민에 이사옴. 석벽은 양민 北砬子 앞에서 시작해 곧게 학교의 흙 두둑 아래까지 직선이고, 중간에 세 개의 트인 입구가 있는데 학교 이쪽의 트인 입구는 南門外라고 부르고, 우리는 학교 우물에 가서 물을 길러 이 트인 입구로 길을 건넜음. 北砬子 머리 가까이에 트인 입구가 있었고 내가 秋皮 부모님 집에 돌아올 때 항상 이 길로 갔으며 일찍이 동문으로 불렀음. 이른 시기에 劉天順(지금은 이미 작고했음)이 집을 지을 때 성벽의 돌을 날라다 지었는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집을 지을 때 모두 성벽 위에 지었음. 吳承緖 집 앞에 또 트인 입구가 있었고 砬子머리에서 학교의 이 석벽까지의 거리는 약 2리(약 700-800m)였음. 일본 군대가 왔을 때 남문과 동문을 모두 부수었는데, 학교에서 남쪽으로는 토벽이고 직선으로는 圍子角까지이고, 土墻角(토벽 모퉁이)는 타원이었음. 남쪽 圍子角 밖에는 辛起祥 집, 王風祥 집, 王發祥 집, 王金純 집 등 몇 집이 있었고, 그곳에는 大石碾盤(큰 돌로 된 연자방아)가 있어 거기에 가서 옥수수나 조 같은 곡물을 빻았음.) 孫志强의 회상을 보면 이 성 가운데 강 가까이 있는 것(즉, 성의 동벽)은 돌로 축조했는데 당시 높이 2m 정도였고, 北砬子머리에서 시작해 姜씨네 가게까지 곧장 이어졌음. 길이는 500m 이상으로 우리 집 문 앞에서부터 학교의 이 제 1단 석벽까지는 약간 낮았고, 이 벽의 중간에 溝(고랑)가 두 곳 있었는데, 水冲溝 두 개 중 하나는 약 20m에 가깝고, 모두 40m 정도이며, 벽이 없어 양민에는 많은 집들이 모두 이 석벽 위에 건축되어 있었음. 서, 남, 북면 모두 흙으로 쌓은 벽이며 높지 않고 너비 3m 정도로 모두 땅이 단단히 다져져 있었음. 呂茂德의 회상을 보면 당시 우리는 이 벽을 城墻(성벽)이라 불렀지만, 또한 圍子墻이라고 불렀음. 北砬子머리의 石頭墻에서 들어온 후에 남쪽으로 가면 먼저 도랑 하나가 있는데, 이 도랑은 동서로 나있고, 도랑의 남면은 바로 圍子墻으로, 토벽이고 이 토벽은 동에서 서면으로 이어져 300여m 길이(바로 성의 북벽)이고, 다시 남면으로 돌아 (바로 성의 서벽) 양민 2隊 飼養所에 이르러 또 동으로 돌아가는데(바로 성의 서남 모퉁이), 거의 장방형임. 吳喜貴의 회상을 보면 당시 많은 집들이 토벽 위에 지어졌고, 남쪽 圍子角의 바깥면(남측)에 水泡子(물구덩이)가 있었음. 서남의 油坊溝와 老厲家小溝에서 흘러나온 물이 웅덩이로 들어가고, 남쪽 圍子角 북면을 통과해 압록가으로 유입함. 서벽의 중간에 트인 입구가 있고 성 밖에 우물이 있어 이 트인 입구를 지나 우물에 물을 길으러 갔음. 서벽에도 문이 있었고, 남벽 밖에는 大坎子(큰 두둑)이 있었음. 王金純의 회상을 보면 양민의 석벽과 토벽을 당시에 古墻(고벽)이라 불렀는데 일본인이 주둔하기 전부터 있었음. 일본인이 왔을 때 성벽에 나무 말뚝을 묻었고, 말뚝에 철로 된 가시를 둘렀음. 이후에 孫洪壽 집, 朱元慶 집, 宋單華 집, 老郭 집 등 많은 집들이 벽 위에 지어졌고 연이어 남쪽에 楊家店, 金家店과 德興堂이, 벽의 바깥에는 鐵匠爐(대장간)가 있었음. 서쪽 면의 大坎子(큰 두둑) 가까이 있는 산기슭에는 黃泥坑(진흙 구덩이)가 있었고, 서벽 바깥쪽은 비교적 지세가 낮은 논이 있었음.역사적 의미 주변 유적 현황을 보면 첫째, 양민고분군이 있는데 양민고성 남쪽의 충적대지 중간지점에 약 200여 기의 고구려 고분군이 분포해 있었고, 고구려 초기의 적석묘와 함께 중후기의 봉토석실분이 병존했으며, 운봉댐 수몰선인 해발 299-310m 부근에서 수몰되지 않은 적석묘 13기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함. 둘째, 운봉댐 수몰지구의 고분군으로 운봉댐 수몰지구에는 양민고분군뿐 아니라 大荒溝, 大靑溝, 雙安, 秋皮, 石湖, 樺皮, 河套 등에 고구려 고분이 널리 분포해 있으며, 맞은편의 북한지역에도 압록강 좌안과 압록강 지류인 자성강 연안에 고구려 고분군이 아주 조밀하게 분포되어 있음. 2006년 5월 댐을 방류했을 때 운봉댐 수몰지구 일대를 조사하여 2000여기 이상의 고구려 고분을 조사했다고 하고, 양민고성 주성곽 내부와 그 북측에서도 10여기의 적석묘를 확인했다고 함. 그 가운데 성곽 내부에 분포한 1호분은 정방혀으이 계단적석묘로서 한 변의 길이 8m, 높이 2m이며, 당시 2층으로 축조한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함. 지정학적으로 양민고성은 고구려 두번째 도성인 국내성이 위치했더 집안시 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약 45㎞ 떨어진 압록강 중류 우안의 충적대지에 위치하며, 양민고성이 위치한 양민전자 일대의 충적대지는 남북 길이 4㎞, 동서 너비 3㎞로서 집안시 동북쪽에서는 가장 넓은 평원이라고 함. 국내성이 위치했던 집안시 소재지와 압록강 상류 일대를 연결하는 압록강 수로망의 전략적 요충지임. 양민고성의 기능과 성격을 보면, 첫째, 3세기 중후반의 平壤城 및 東北 新城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는데 고구려는 曹魏 모구검의 침공으로 환도성이 파괴되어 도읍으로 삼을 수 없게 되자, 247년에 평양성을 축조하여 백성과 廟社를 옯겼다고 함(『삼국사기』고구려본기5 동천왕 21년조). 고구려는 3세기 중후반에 동북 新城을 축조했으며, 서천왕이 이곳을 순행했고(『삼국사기』고구려본기5 서천왕 7년조 및 19년조), 봉상왕도 모용황의 침공을 받고 동북 新城으로 피신했다고 함(『삼국사기』고구려본기5 봉상왕 2년조). 고구려는 4세기 전반에는 334년에 평양성을 증축한 다음(『삼국사기』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4년조) 342년 전연 모용황에게 다시 환도성이 함락당하자 그 이듬해에 平壤 東黃城으로 이거함(『삼국사기』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13년조). 국내성이 있었던 집안시 소재지에서 동북방에 위치했고, 압록강 중상류 일대에서는 가장 넓은 충적대지에 펼쳐져 있고, 역사적으로 계속 大鎭이 설치되었으며, 초기 이래의 거의 모든 유형의 고구려 고분이 성곽 주변에 밀집해 있다는 사실 등의 근거로 3세기 중후반의 평양성 및 동북 신성으로 비정함. 이와 더불어 주성곽 북측에 위치한 보조 성곽은 334년에 증축했다는 평양성으로 파악함. 양민 일대는 247년 이래 약 1세기간 고구려 제2수도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양민고성이 바로 그 성곽이라는 견해임. 특히 환도성에서 양민고성에 이르는 교통로를 통해 양민고성이 3-4세기의 평야성이자 서천왕이 순행하고 봉상왕이 피신했던 동북 신성이라는 견해를 강하게 주장함. 즉 환도산성 아래의 大川에서 陽岔, 羅家營, 大靑溝를 지나 雙安에 이르는 길이 고구려 북도의 첫 부분인데, 쌍안에서 북쪼긍로 약 20㎞ 쯤 가면 통화 石湖關隘에 이르며, “쌍안”에서 동쪽으로 秋皮를 지나 10여㎞ 가면 바로 양민고성에 도착한다고 함. 양민고성과 국내성 지역을 통행하는 루트를 따라가면 고구려 고분이 매우 많고 관애시설이 구비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음. 특히 대천-쌍안 부근은 모용외 침입시 新城宰 高奴子가 신성으로 피신하던 봉상왕을 영접했다는 鵠林으로 추정됨. 즉 이일대의 통구하 남쪽 연안에는 자연 지형을 이용해 세운 관애와 거주지가 결합된 고구려 유적지가 있는데, 관애는 길이 560m, 너비 7m, 높이 1.2-1.8m의 토석혼축성벽이며, 남북 방향으로 뻗어 있다고 함. 이곳은 通集 철로의 黃栢역에서 남으로 50m 거리로서 동서 양측은 高山이며 성벽 서쪽에는 통구하를 따라 약 1500㎡의 高臺를 축조해 놓았음. 평대 주위에는 한변의 길이 5m 전후, 높이 1m 정도으 고구려 적석석광묘가 7기가 있음. 이에 이 일대를 高奴子가 烽上王을 영접했던 ‘鵠林’으로 비정함(장복유). 둘째, 한대 평지성설로, 2006년 운봉댐의 방류로 성곽이 드러났을 때 성곽 내외를 조사한 다음 성곽 내부에 위치한 계단적석묘의 연대를 4세기 전후로 비정한 다음, 성곽은 그보다 앞선 시기에 축조했을 것으로 파악하고, 그런 다음 성곽의 구조와 축조 방식이 고구려뿐 아니라 발해, 요, 금대의 성곽과 다르다면서 한대에 축조한 평지성으로 파악함(新華通信). 셋째, 압록강 수로상의 역참으로 3세기 중후반의 사료에 등장하는 고구려의 동북 신성은 동해안에 위치했던 것으로 파악됨. 또한 漢 서기전 75년경에 압록강 중상류 일대에서 지금의 소자하 방면으로 퇴축당했을 뿐 아니라 당시 漢이 축조했던 성곽은 모두 토성이었음. 따라서 양민고성은 압록강 중류연안에 위치했고, 토석혼축 및 석축 성벽이라는 점에서 동북 신성이나 한대 평지성으로 파악하기는 힘듦. 다만 427년 평양 천도 이전에 존재했다는 3-4세기의 평양성일 가능성은 전혀 없지 않은데 이에 대해서는 추후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음. 한편 양민 지역은 압록강 중상류 연안에서 집안분지 다음으로 넓은 충적대지가 펼쳐져 있을 뿐 아니라, 주변에는 고구려 시기의 고분이 집중적으로 펼쳐져 있음. 또한 압록강 중상류 연안에는 장천고성을 비롯하여 樺皮甸子古城, 夾皮溝古城, 東馬鹿村古城 등이 압록강 수로상의 요충지에 분포되어 있는데, 양민고성과 마찬가지로 모두 상하 2단으로 이루어진 강변 충적대지 중 1-2단 사이의 2단 충적대지 가장자리에 자리잡고 있음. 이로 보아 양민고성도 압록강 수로상의 교통요지를 공제하던 역참 기능을 수행했을 거승로 추정됨 다만 압록강 중상류 연안의 고구려 고성이 대체로 둘레 300-400m로 소형인데 비해, 양민고성은 1㎞ 전후의 중형 성곽이라는 점에서 수로 교통로상의 역참 기능뿐 아니라 지방지배, 나아가 왕족이나 귀족세력의 근거지 역할도 수행했을 가능성이 높음. 양민고성 주변에 고구려 고분이 밀집한 상황은 이러한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생각됨.자연환경 양민은 집안시 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약 45㎞ 떨어진 압록강 중류 우안에 위치하는데 이 일대는 남북 길이 4㎞, 동서 너비 3㎞의 비교적 넓은 충적 평원으로 동쪽은 압록강에 임해 있고 서쪽은 高山에 의지해 있음. 양민고성은 상기 충적대지가 막 시작되는 북쪽 끝에 위치하며 고성의 경도와 위도는 동경 126˚30'044", 북위 41˚25'108"로서 고구려 두번째 도성이었던 국내성(동경 126˚11'774", 북위 41˚07'21")의 동북방에 위치함. 양민고성은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였고, 한 면은 강에 임해 있으며, 지역이 開闊하고 토질이 비옥한데, 좌담회 참석자들은 양민전자의 지형적 특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함. 양민전자는 남북 길이 8리, 동서 너비 약 6리로서 상하 2단 대지로 구성되어 있음. 압록강은 북한쪽 가까이에 있고, 북에서 남으로 흘러감. 압록강 우안에 엽접해 있는 1단 대지는 강 수면에서 약 20여m 높고, 드넓은 평지에 토질이 비옥함. 1단 대지의 서측에 2단 대지가 위치해 있는데, 1단 대지보다 약 5m 정도 높음. 성곽은 1, 2단 대지 사이에 위치해 있음.참고문헌 · 李殿福, 「集安高句麗墓硏究」『考古學報』 1980-2, 1980 · 方起東, 「高句麗石墓的演進」『博物館研究』 1985-2, 1985 · 孫仁傑·遲勇, 「集安良民高句麗遺址調査」『東北史地』 2004-4, 2004 · 長福有, 「高句麗第一個平壤城在集安良民卽國之東北大鎭-新城」『東北史地』 2004-4, 2004 · 杜宇 編著, 「老四區及良民甸子」『集安風景名勝史話』, 通化師範學院照排印刷中心, 1999 · 新華通信, 2006년 5월 9일자 보도 ‘吉林省一座漢代古城浮出水面’[http://www.jl.xinhuanet.com], 2006

      • 리스트여닫기 패왕조산성(覇王朝山城) 출토지 길림성 집안시 재원향 패왕조촌 (吉林省 集安市 財源鄉 覇王朝村)연대 대체로 2-3세기경에 초축하여 후기까지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며, 경철화는 2001년 탐방 결과를 바탕으로 서기 1세기 초·중기에 축조했다고 파악함.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56길림성문물국문물조사조(吉林省文化局文物調査組)4월에 조사를 실시하였고, 환인댐 건설 때문에 동북박물관(요녕성박물관의 전신)이 환인 경내의 혼강 유역 수몰지구를 조사할 때 길림성문화국 문물조사조가 長崗유적, 南台유적과 함께 패왕조산성을 조사함. 그 결과, 이때의 조사를 토대로 1961년 4월 20일에 길림성인민위원회가 패왕조산성을 길림성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함.1962길림성박물관 집안고고대(吉林省博物館集安考古隊)4월 15일-16일에 걸쳐 상기 고고대의 왕승례, 이전복, 방기동, 진상위, 길림사범대학 조정용, 길림성 철학사회과학연구소 주함강, 집안현 문물관리소의 임지덕과 조벽인이 참가하여 성곽의 전반적인 제원 및 간략한 지표조사를 하였고 『고고』 1962-11호의 「吉林集安高句麗覇王朝山城」을 발표함.1983집안현박물관문물조사대(集安縣博物館文物調査隊)5월 30일에 성곽을 제원하고, 성벽 축조상태 확인 및 사진촬영을 하였으며, 『집안현문물지』의 ‘패왕조산성’을 발표함.1983길림성문물고고연구실, 집안현박물관(吉林省文物考古硏究室, 集安縣博物館)7월에 길림성문물고고연구실의 방기동 및 집안현박물관의 임지덕, 경철화, 손인걸이 참가하여 집안현 경내 남북 교통로의 계통을 조사하고, 『文物』1984-1의 「集安高句麗考古的新收穫」을 발표함.2001학자들의 비공식적인 조사10월 3일에 통화사범대학 교수 경철하, 길림성 문학예술계연합 당 조직 서기 장복유, 사진가 협회 부서기장 상옥주, 통화시 사학회 고문 손정진, 부회장 고어무 장해무가 참가하여 성곽 내부의 건물유적 조사 및 토기편을 수습하고 사진 촬영을 함. 경철화, 2002 「訪高句麗覇王朝山城」『學問』2002-2 및 경철화, 2004 「訪高句麗覇王朝山城」『高句麗考古硏究』를 발표함.20세기 전반 『집안현향토지』(1915년)에서는 집안현성 서쪽 220리에 위치한 패왕조의 산 위에 ‘石城古壘’가 있는데, 현지 주민들은 ‘山城子’라고 부른다고 함. 『집안현지』(1931년)에서는 “집안현에서 북쪽으로 180리 거리의 산성구 안의 산령에 석단이 남아 있으며 남쪽과 북쪽에 성문이 하나씩 있다”고 기재되어 있는데, 당시 “현지주민들은 산성자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축조 시기는 잘 모르겠다”고 기재되어 있음. 패왕조산성이 20세기 전반에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됨.구조특징 성곽은 산등성이의 자연 지세를 따라 험준하고 가파른 절벽을 이용하여 축조하였고,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아 箕(키) 모양을 이룸, 서북 모서리는 바깥쪽으로 뻗어나갔고, 남벽은 안으로 조금 휘어 전체 평면은 사다리꼴을 이룸. 산세가 낮은 곳과 남쪽 골짜기 입구의 평평하고 완만한 고셍는 화강암 성돌로 성벽을 높이 축조하였고, 지세가 낮은 곳일수록 성벽을 높이 축조하였으며, 전체적으로 서벽이 잘 보존되어 있음. 서벽 남단과 북벽 동단의 성벽을 높이 축조하였고, 이곳의 성벽은 매우 잘 보존되어 있으며, 특히, 성가퀴(女墻)와 기둥구멍(柱洞)의 흔적이 비교적 잘 남아 있음. 성문은 북문과 남문 등 2개가 있음. 성곽 내부에서 건물지가 발견되었다고 하지만 나무가 꽉 들어차 있기 때문에 유적을 확인하기는 쉽지 않은 상태로 1961년 4월 20일에 길림성인민위원회가 길림성 중점문문보호단위로 지정함. 1962년 조사 당시 건물지를 확인하지 못했고, 1983년 5월 조사 당시 산성 중앙 샘 북쪽의 평탄한 산비탈에서 비교적 큰 돌을 확인했는데 병사 둔지로 추정했으나 구체적인 조사는 하지 않음. 2001년 조사에서 세 개의 건물군이 확인되었으나 측량 장비가 없어 나뭇가지로 측량한 다음 나중에 실측함.역사적 의미 石城 유적으로 『集安縣鄕土志』(1931년)에는 “산성 부근 강 연안에도 석성이 있는데, 홍수로 모래 사장에 매몰되어 큰 돌만 몇 개 보인다”라고 기재되어 있으며, 『集安縣志』(1931년)에는 “성곽이 모래 사장에 매몰되어 그 전에는 큰 돌이 몇 개 노출되어 있었으나 그 위 (1915년 이후) 현지 주민들이 가옥을 지으면서 채석을 하여 (당시에는) 남아 있지 안았다”고 함. 1962년 조사 당시 현지 주민이 옛날에는 석성 유적이 북둔촌 서쪽의 혼강 강변에 있었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이미 볼 수 없었다고 함. 고분군은 산성에서 4㎞ 정도 떨어진 천안구촌 일대에 고구려 시기 고분군이 3곳 있으며 모두 70여기 정도됨. 관애는 패왕조산성에서 신개하를 따라 40㎞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望波嶺關隘가 나오는데 이곳은 입지조건상 신개하를 거슬러 올라오던 적군을 방어하던 군사시설로 추정됨. 지정학적으로는 고구려 첫번째 도성이 있었던 환인 오녀산성과 30㎞ 거리하며, 패왕조산성이 위치한 신개하 하구 일대는 환인분지나 부이강 방면에서 혼강 유역을 지나 국내성이 위치했던 집안으로 나가는 교통로의 길목임. 산성의 기능과 성격에 대한 견해를 보면 첫째, 군사방어성설으로 1962년 조사 결과, 거주나 경작에 적합하지 않은 산 위에 위치하였고, 둘레도 1㎞ 남짓 밖에 안된다는 점에서 일상적인 거주지로서의 기능은 없었을 것으로 추정한 다음, 군사적 성격이 강한 성이었다고 강조함. 국내성이 수도일 때 신개하 하구 일대를 공제하면서 수도원 외곽을 지키는 중요한 방어 산성의 하나로 망파령관애와 함께 신개하 일대에서 도성 외곽의 弧形방어선을 구성하였던 거승로 추정됨. 특히 집안 상성자산성, 환인 고검지산성, 신빈 흑구산성 등에 있는 성가퀴 안쪽의 기둥구멍이 이 산성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에서 패왕조산성은 이들과 함께 압록강 중류 일대의 입체적 군사방어 체계를 구성한 것으로 파악됨. 3세기 중엽 제3현토군을 출발하여 소자하·혼강을 거쳐 판차령을 넘어 환도성으로 진입한 魏 모구검을 비롯하여 고구려 국내성을 침공하였던 중국 왕조측 침공군 가운데 상당수는 이 일대를 지나쳤을 것으로 추정됨(방기동, 왕선후, 여호규). 둘째, 위나암성설으로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고구려 유리왕은 郊豕가 도망가기에 너무 먼 거리라는 점을 근거로 환인 오녀산성에서 30㎞ 떨어진 패왕조산성을 위나암성으로 비정하였고, 더욱이 패왕조산성 일대는 혼강·신개하·부이강의 합류지점으로서 ‘山水深險’하다는 기록과 합치하며, 패왕조산성은 산봉우리 위에 위치하였고 내부에는 샘(泉水)도 있어 ‘巖石之地’로서 ‘泉水’가 있다는 기록과도 일치한다고 파악함(이전복, 손진기, 왕선후, 풍영겸). 셋째, 거주성설으로 2001년 패왕조산성을 탐방했을 때 많은 건물지와 토기편이 발견되었는데 이에 거주나 경작지에 적합하지 않다는 종전의 인식을 바꾸어, 산비탈을 거주지로 활용하고, 성 바깥의 계곡을 논밭으로 경작했으며, 주변의 혼강과 신개하 일대에는 고기잡이와 사냥이 발달했다고 추정하며, 고구려 시기의 중요한 거주 성곽인 동시에 전략적 요충지로 추정함(경철화).자연환경 길림성 집안시 소재지 서북 97㎞, 재원향 패왕조촌 동북쪽 4㎞에 위치하며, 패왕조촌 동쪽 골짜기를 거슬러 동북으로약 2.5㎞ 지점에 이르면 험준한 산봉우리로 둘러싸인 협곡이 나타나는데 산성은 이 협곡의 해발 764m(방기동, 경철화/ 862.8m, 『吉林省志』, 王線厚/ 기타 765m와 862m 등)인 높은 산에 위치함. 노령산맥의 주맥인 ‘亮紅頂子’의 서단에 해당하고, 서쪽 30㎞에 환인 오녀산성이 위치함. 산성은 험준한 산봉우리로 둘러싸여 있고, 동벽과 서벽, 그리고 북벽의 서단은 모두 험준한 절벽임. 산성 내부는 경사가 가파른 산비탈이며, 중앙에 평평한 대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산성 북사면 아래에는 혼강 지류인 신개하가 북류하여 패왕조촌 앞에서 혼강에 합류함. 북쪽 골짜기를 따라 약 3.5㎞ 내려가면 혼강 연안의 泉眼溝村에 이르고, 또 골짜기 입구를 나와 혼강을 따라 약 4.5㎞ 내려가면 北屯村에 이르는데 북둔촌 앞에서 남류하던 富爾江이 혼강에 합류함. 산성 서쪽의 패왕조촌 앞으로는 혼강 유역에서 신개하 상류를 거슬러 노령산맥을 넘어 집안으로 향하는 도로가 지나가고, 산성은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여 혼강 연안을 한 눈에 관찰할 수 있으며, 혼강과 신개하 연안의 교통로를 공제할 수 있는 요충지임.유물정보 철제 차관(鐵車輨) 1점, 행엽(杏葉) 1점, 철경동촉(鐵鋌銅鏃) 4점, 철제 띠고리(鐵帶扣) 2점, 토기편 30여 점, 토기 호편 2점, 사이호편 1점, 석제 절구(石臼) 1점참고문헌 · 吳光國 編, 「地理」『輯安縣鄕土志』, 1915 · 張拱垣 編, 「古蹟」『輯安縣志』, 1931 · 方起東, 「吉林輯安高句麗覇王朝山城」『考古』 1962-11, 1962 · 李殿福, 「1962年春季吉林輯安考古調査簡報」『考古』 1962-11, 1962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4 · 孫進己·馮永謙, 『東北歷史地理』 (二), 黑龍江人民出版社, 1988 ·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 編, 「覇王朝山城」『吉林省志』 43(文物志), 吉林人民出版社, 1991 · 國家文物局 主編, 「集安市-覇王朝山城」『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李殿福, 「高句麗考古的回顧與展望」『遼海文物學刊』 1992-2, 1992 · 遲勇, 「高句麗都城的戰略防禦系統」『高句麗硏究文集』, 延邊大學出版社, 1993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王禹浪·王宏北, 「中國吉林省集安市高句麗覇王朝山城」『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1994 · 魏存成, 「城址·建築址」『高句麗考古』, 吉林大學出版社, 1994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北方史地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4 · 王綿厚, 「鴨綠江右岸高句麗山城硏究」『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余昊奎, 「集安 覇王朝山城」『高句麗 城』 Ⅰ(鴨綠江 中上流篇), 國防軍史硏究所, 1998 · 秦升陽, 「南北道上的關隘與城堡」『高句麗歷史與文化』, 吉林文史出版社, 2000 · 楊春吉·王曉南, 「高句麗疆域調査與硏究現狀」『高句麗歸屬問題硏究』, 吉林文史出版社, 2000 · 王綿厚, 「覇王朝山城」및「高句麗南北二道上諸城」『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耿鐵華, 「訪高句麗覇王朝山城」『學問』 2002-2, 2002 · 耿鐵華, 「高句麗紇升骨城新考」『高句麗考古硏究』, 吉林文史出版社, 2004 · 魏存成, 「中期都城通往遼河流域的兩條道路與毌丘儉紀功碑」, 「山城的分布」『高句麗遺跡』, 文物出版社, 2002 · 李樂營·李淑英, 『中國高句麗學者與硏究綜述』, 吉林文史出版社, 2006 · 杜宇 編著, 「老嶺山區古道」『集安風景名勝史話』, 通化師範學院照排印刷中心, 1999

      • 리스트여닫기 관마산성; 관마장산성(關馬山城; 關馬墻山城) 출토지 집안시 열료향 (集安市 熱鬧鄉)연대 고구려 초·중기에 초축한 것으로 추정됨.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62길림성박물관 집안고고대(吉林省博物館集安考古隊)4월 15일에 길림성박물관의 진상위, 방기동 및 집안현문물관리소의 장사은, 조벽인 등이 참가하여 집안 전역의 유적과 함께 조사하였고, 『집안현지』(1932년) 및 현지 주민의 설명에 의거 각 방면의 성벽을 독립된 관애로 파악함. 1930년대까지는 북벽과 남벽만 알려져 있었는데, 이 때 동벽이 발견됨. 이 조사를 토대로 1962년 6월 15일에 집안현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됨.1963길림성박물관, 집안현문물관리소(吉林省博物館, 集安縣文物管理所)5월에 길림성박물관의 진상위, 방기동 및 집안현문물관리소의 장사은, 조벽인 등이 참가하여, 望波領關隘와 함께 관마산성을 집중 조사하였고, 각 방면 성벽의 연관관계를 정확하게 조사함. 집안현문물관리소, 1964 「吉林集安高句麗南道和北道上的關隘和城堡」『考古』1964-2에 발표함.1983집안현박물관문물조사대(集安縣博物館文物調査隊)4-5월에 성곽을 제원하고 성벽 축조상태 및 사진촬영을 하였으며, 『集安縣文物志』의 ‘관마산성’을 발표함.1983길림성문물고고연구실, 집안현박물관(吉林省文物考古硏究室, 集安縣博物館)7월에 길림성문물고고연구실의 방기동 및 집안현박물관의 임지덕, 경철화, 손인걸이 참가하여 집안현 경내 남북 교통로의 계통을 조사하였는데 이때 관마산성 북쪽 10㎞ 지점에서 대천초소를 새롭게 발견함. 『文物』1984-1의 「集安高句麗考古的新收穫」에 발표함.20세기 전반 『집안현향토지』(1915년)에서는 집안현성 서북 150리에 위치한 東橫路에 關馬牆이 있는데, “石牆 두 갈래가 있으며 서로 1리 정도 떨어져 있다”고 기재되어 있으며, 민간에는 342년 전연 모용황이 침공했을 때의 北置(北道)가 바로 이곳이라고 전한다고 함. 『집안현지』(1931년)에서는 古蹟 조항 〈古關隘〉 항목에 집안현성 북쪽 130리 거리의 蚊子溝門에 頭道關(속칭 頭道關馬牆子)으로 불리는 관애 2개가 있으며, 양자의 거리는 1리이고 모두 석장으로 축조되었다고 함. 또한 342년 전연 모용황이 침공했을 때의 北置(北道)가 바로 이곳이라고 파악함. 상기 지방지의 기록으로 보아 관마산성은 20세기 전반에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됨. 다만 당시에는 북벽과 동벽만 알려져 있었고, 아직 동벽의 존재는 파악하지 못함.구조특징 산성 또는 관애로 주위의 높은 산을 천연성벽으로 삼는 한편, 남북 협곡의 가장 좁은 곳과 동쪽의 목흔두자구 안쪽 115㎞ 지점에 각각 성벽을 축조하였음. 성벽 하나 하나는 마치 각기 독립된 관애처럼 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세 개의 성벽이 주변의 깎아지는 높은 산과 연결되어 하나의 성곽을 형성함. 평면은 인공성벽과 자연성벽이 결합하여 전체적으로 삼각형을 이루며, 규모를 보면 성곽 내부의 협곡은 남북 960m(『집안현문물지』/600m; 『고고』1964-2), 동서 120-340m(『집안현문물지』/70-250m; 『고고』1964-2)로서 비교적 평탄하여 대규모 군대가 주둔할 수 있음. 성벽은 대부분 무너졌으며, 특히 계곡물에 의해 성벽이 심하게 파괴되었고, 도로가 관통하는 곳도 많이 파괴되었음. 다만 북벽 서쪽 산록의 성벽은 원래 모습에 가깝게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함. 통화-집안 도로가 성곽 한복판을 지나가고 있기 때문에 비교적 접근하기 쉽지만, 여러 가지 제약으로 인해 현재의 성벽 보존 상태를 정확히 확인하기는 어려운 상태임.역사적 의미 주변의 유적으로 고분군과 군사시설이 있는데 고분군은 熱鬧鄕 동쪽 약 2㎞의 楊木橋子溝門 산기슭 아래에 대량의 고구려 고분이 분포해 있고, 서북 약 7.5㎞에 大川哨所 부근에 대량의 고구려 고분이 있음. 군사시설로는 서북 약 7.5㎞에 大川哨所가 위치하는데, 『집안현향토지』(1915년)와 『집안현지』(1931년)에 따르면 관마산성이 위치한 蚊子溝門 동쪽 산위에 ‘石頭城’이라고 불린 古城이 있었으며, 관마산성에서 淸河를 따라 북쪼긍로 20여리(10㎞ 전후) 내려간 楊木橋 부근에 土城이 있었는데 縣志 편찬 당시에는 이미 사라졌다고 함. 지정학적으로 집안시 소재지에서 53-54㎞ 떨어진 청하(葦沙河) 유역의 협곡에 위치하며, 혼강 본류에서 청하(葦沙河) 연안로를 거슬러 노령산맥을 넘어 집안분지로 향하는 교통로상에 위치함. 산성의 기능과 성격에 대한 견해로는 첫째, 군사방어성설로, 고나마산성은 혼강 본류에서 청하(葦沙河) 연안로를 거슬러 노령산맥을 넘어 집안분지로 향하는 교통로상의 험준한 협곡에 위치함. 형세가 험요하고 지키기는 쉬우나 공격하기 어려운 전략적 요충지로, 특히 성 내부의 지세가 평탄하고, 수원이 풍부하여 대규코 군대가 주둔할 수 있으나, 아직 건축 유적은 발견되지 않음. 세 성벽 가운데 남벽의 구조가 가장 간단한 반면, 북벽은 튼튼하게 구축했을 뿐 아니라 바깥쪽에 참호와 참호벽도 있음. 이는 관마산성이 청하를 거슬러 집안분지(통구분지)로 나아가는 적군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시설임을 반영하는데, 즉 남벽은 고구려 도성에서 오는 援軍과 輜重兵의 통로였기 때문에 성벽을 견고하게 쌓았을 뿐 아니라 바깥쪽에는 참호와 참호벽까지 구축했음. 동벽은 목흔두자구문에 축조했는데, 골짜기의 길이는 약 5㎞ 정도로, 골짜기의 양 옆은 매우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북쪽의 기다랗게 뻗은 산을 따라 1㎞ 정도 가면 양목교자구 골짜기로 통하는 높이 50m 정도의 완만한 산비탈이 있음. 동벽은 북벽을 공격하던 적군이 양목교자구를 따라 동쪽으로 향하다가 완만한 산비탈을 넘어 목흔두자구 방햐응로 진공하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한 것임. 관마산성은 북쪽 7.5㎞에 위치한 대천초소와 더불어 청하 연안로를 거슬러 고구려 두 번째 도성이 위치했던 집안분지(통구분지)로 향하는 적군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한 군사방어성으로 추정됨(『고고』1964-2). 둘째, 342년 전연과의 전쟁시 고국원왕이 피신했던 북도상의 요충지로 추정하기도 함. 당시 전연은 남도와 북도 두 길로 고구려를 침공했는데, 북도로 침공할 것이라는 고구려의 예상과 달리 모용황이 대군을 이끌고 남도로 공격했으며 북도로는 長史 王寓로 하여금 병사 15,000을 진군하게 함. 고국원왕은 王弟 武로 하여금 5만 대군을 이끌고 북도를 집중적으로 방허하는 한편, 자신은 적은 병력만을 데리고 남도를 수비함. 결국 고국원왕은 모용황의 4만 대군에게 대패했으며 도성인 환도성마저 함락당함. 반면 북도에서는 王弟 武가 전연군을 대파함. 이에 환도성이 함락당한 다음 고국원왕이 북도로 피신했을 것으로 파안한 다음 바로 관마산성으로 들어가 웅거했을 것으로 추정함(『집안현문물지』). 셋째, 환도성설으로, 동천왕대에 曹魏의 모구검이 고구려 환도성을 함락시킨 다음 환도산에 올라 자신의 기공비를 세웠다고 하는데, 관마산성은 관구검기공비가 발견된 石嶺(小板岔嶺)에서 가장 가까이 위치한 고구려 성곽이므로 환도성으로 비정할 수 있다고 파악함. 또한 고구려가 흘승골성(환인 오녀산성)에서 천도한 위나암성을 집안 패왕조산서응로 설정한 다음, 고구려는 초기에 대체로 동쪽 방향으로 천도를 했다고 파악하여 위나암성(집안 패왕조산성)에서 천도한 환도성도 패왕조산성의 동쪽에 위치했을 것으로 파악하고, 관마산성은 위나암성으로 비정되는 패왕조산성의 동쪽에서 약간 북쪽으로 치우쳐 있으므로 환도성으로 비정될 수 있다고 파악함. 그 뒤 동천왕대에 曹魏 모구검의 침공을 받아 환도성이 함락된 다음 남쪽에 위치한 평양성 곧 지금의 집안현성으로 다시 천도했으며, 그 뒤 환도성으로 재차 복귀했다가 342년 모용황의 침공을 받아 함락된 다음 집안현성보다 더 남쪽에 위치한 平壤東皇城 즉 현재의 평양으로 천도했다고 파악함(손진기, 왕선후, 풍영겸).자연환경 집안시 소재지에서 서북으로 약 53-43㎞(『集安縣文物志』/약 65㎞;『考古』1964-2) 거리에 위치하고, 노령산맥 북사면 끝나락의 淸河 유역으로 북쪽 1.5㎞ 熱鬧鄕 소재지에 위치하며, 집안-통화 도로가 북벽과 남벽을 통해 성의 한복판을 통과함. 서쪽, 동남쪽, 동북쪽 3면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협곡에 위치하며, 협곡 서쪽에는 높은 산이 우뚝 솟아 있고, 동쪽에는 가파른 낭떠러지와 절벽으로 된 木銑頭山과 撩荒頂子山(『集安縣文物志』/撂荒頂子山;『考古』1964-2)에 위치함. 이 사이에 木掀頭子溝(『集安縣文物志』/木銑頭溝;『考古』1964-2)라고 불리는 좁은 골짜기가 있는데, 폭은 80m 전후이고, 목흔두자구의 계곡물은 남변의 撂荒頂子山을 따라 서쪽으로 흘러가 淸河(葦沙河)에 유입됨. 청하 유역의 협곡을 나와 서북쪽으로 가면 熱鬧鄕 소재지가 위치한 河谷平原이 나오고, 熱鬧鄕 동쪽 약 2㎞의 楊木橋子溝門 산비탈 아래에 대량의 고구려고분이 분포해 있음. 1960년대 조사 당시 산성 북쪽 0.5㎞ 지점의 평지상에서 적석묘 3기가 확인되었으며, 서북 약 7.5㎞에 大川哨所가 설치되어 있는데, 부근에는 고구려 고분이 많이 있음.참고문헌 · 吳光國 編, 「地理」『輯安縣鄕土』, 1915 · 張拱垣 編, 「古蹟」『輯安縣志』, 1931 · 李殿福, 「1962年春季吉林輯安考古調査簡報」『考古』 1962-11, 1962 · 方起東, 陳相偉, 「吉林集安高句麗南道和北道上的關隘和城堡」『考古』 1964-2, 1964 · 方起東·林至德, 「集安高句麗考古的新收穫」『文物』 1984-1, 1984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4 · 孫進己·馮永謙, 『東北歷史地理』 (二), 黑龍江人民出版社, 1988 ·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 編, 「關馬山城」『吉林省志』 43(文物志), 吉林人民出版社, 1991 · 國家文物局 主編, 「集安市-關馬山城」『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李殿福, 「高句麗考古的回顧與展望」『遼海文物學刊』 1992-2, 1992 · 遲勇, 「高句麗都城的戰略防禦系統」『高句麗硏究文集』, 延邊大學出版社, 1993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王禹浪·王宏北, 「中國吉林省集安市關馬山城」『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1994 · 魏存成, 「城址·建築址」『高句麗考古』, 吉林大學出版社, 1994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北方史地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4 · 王綿厚, 「鴨綠江右岸高句麗山城硏究」『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余昊奎, 「集安 關馬墻山城」『高句麗 城』 Ⅰ(鴨綠江 中上流篇), 國防軍史硏究所, 1998 · 楊春吉·王曉南, 「高句麗疆域調査與硏究現狀」『高句麗歸屬問題硏究』, 吉林文史出版社, 2000 · 秦升陽, 「南北道上的關隘與城堡」『高句麗歷史與文化』, 吉林文史出版社, 2000 ·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魏存成, 「中期都城通往遼河流域的兩條道路與毌丘儉紀功碑」, 「山城的分布」『高句麗遺跡』, 文物出版社, 2002 · 杜宇 編著, 「老嶺山區古道」『集安風景名勝史話』, 通化師範學院照排印刷中心, 1999

      • 리스트여닫기 망파령관애, 왕팔발자령관애(望波嶺關隘, 王八脖子嶺關隘) 출토지 집안시 쌍차향 황외자촌 (集安市 雙岔鄉 荒崴子村)연대 3세기 중엽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62길림성박물관 집안고고대(吉林省博物館集安考古隊)4월 15일에 길림성박물고나의 진상위, 방기동 및 집안현문물관리소의 장사은, 조벽인 등이 집안 전역의 유적과 함께 조사함.1963길림성박물관, 집안현문물관리소(吉林省博物館, 集安縣文物管理所)5월에 길림성박물관의 진상위, 방기동 및 집안현문물관리소의 장사은, 조벽인 등이 망파령관애와 함께 관마산성을 집중 조사함. 다만 이때는 관애의 서북쪽 부분만 확인하고, 동남쪽 부분은 확인하지 못함(도면을 통한 추정임). 집안현문물관리소, 1964 「吉林集安高句麗南道和北道上的關隘和域堡」『考古』1964-2 에 발표함.1983집안현문물조사대(集安縣文物調査隊)5월 22일에 관애에 대한 실측, 기록, 사진촬영을 하고 1963년에 확인하지 못한 관애의 동남쪽 부분까지 확인함. 다만 동남단까지 완전히 확인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음(현지답사를 통한 추정). 『集安縣文物志』의 ‘망파령관애’로 발표했고, 이때의 조사결과를 토대로 1983년 10월 19일에 망파령관애를 집안현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함.1983길림성문물고고연구실, 집안현박물관(吉林省文物考古硏究室, 集安縣博物館)7월에 길림성문물고고연구실의 방기동 및 집안현박물관의 임지덕, 경철화, 손인걸이 집안현 경내의 남북 교통로의 계통을 조사하였고, 『文物』1984-1의 「集安高句麗考古的新收穫」을 발표함.1930년대 『集安縣志』(1931년 간행)에서는 〈疆域〉 조항에 “집안현성에서 120리 떨어진 망파령 산 위에 고성이 있다”고 나오며, 〈古蹟〉 조항에는 “망파령 위에 망파성이 있는데 당시에도 石垣이 잘 남아 있었다”고 함. 이로 보아 1930년대에 이미 망파령관애의 존재가 알려진 것으로 추정됨.구조특징 1963년 관애의 서북쪽 부분만 확인해 전체 길이를 260m로 파악함(도면을 통한 추정). 1983녀에는 동남쪽 부분까지 추가적으로 확인해 전체 길이를 750m로 파악함(도면을 통한 추정). 망파령 산줄기를 따라 관애의 성벽이 동남쪼긍로 계속 이어지고 있어 전체 규모를 완전히 파악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음(현지 답사를 통한 추정). 성벽 남단 90m 정도는 일찍이 보수한 흔적이 남아 있는데, 자갈로 쌓은 다음 진흙을 10-20㎝ 두께로 덧쌓았음. 성벽 남단은 크고 작은 7개의 산봉우리로 이어지는데, 산봉우리 사이의 구릉지에도 돌로 성벽을 축조한 흔적을 볼 수 있음. 1963년 조사 당시 용두령 남단과 망파령이 만나는 구릉 저지대의 관애 성벽이 도로에 의해 절단되면서 파괴되어 있었음. 1976년 삼가자댐 건설로 쌍차하(신개하) 계곡 동쪽에 위치한 용두령 서북쪽 성벽이 수몰되었고, 종래 도로가 지나가던 용두령-망파령 사이 구릉 저지대의 관애 일부도 수몰됨. 또 댐 건설 이후 도로를 신설하고 민가(휴게소?)를 지으면서 망파령 서북단의 관애가 상당 부분이 절단되고 파괴됨. 댐 건설과 도로 신설에 따라 수몰되거나 절단된 부분에 성벽의 단면이 잘 나타나 있음. 가령 본래 지방도로가 지나갔던 용두령-망파령 사이 구릉 저지대의 성벽은 일부가 수몰되어 있는데 댐 수위가 변동하면서 양측 성벽을 허물어뜨려 석축으로 축조한 성벽 단면이 완전히 드러나 있으며, 용두령 서북쪽의 수몰된 관애도 물가 가장자리에서 석축 상태의 성벽 윗면을 확인할 수 있음. 또한 망파령 서북단의 성벽도 도로 신설에 따라 완전히 절단되어 그 단면이 드러나 있으면 성돌의 일부가 도로 동남측에 쌓여 있음. 1963년 조사시 철제 화살촉(鐵鏃)이 출토했는데, 현지주민에 따르면 성벽 부근에서 철제 화살촉이 종종 발견되다고 함. 석제 절구(石臼)는 성벽 남쪽 0.5㎞의 경작지에서 출토되었는데, 거친 화강암의 평평한 면에 구멍을 뚫어 만든 것으로, 구경 20㎝, 깊이 20㎝임. 1983년 조사시에는 철제 등자(鐵馬蹬), 철제 자물쇠(鐵鎖), 토기편과 炭屑(숯가루) 등이 채집되었고, 현지주민에 따르면 종종 성벽 부근에서 등자와 함께 철제 화살촉 더미가 발견된다고 함.역사적 의미 주변 유적으로 망파령 남쪽 기슭에 적석묘 10여기가 있었으나 수몰되었고, 신개하 하구에 패왕조산성이 위치하며, 남쪽으로 쌍차하를 거슬러 올라가면 모구검 紀功碑가 발견된 소판차령이 나옴. 지정학적으로 집안현성(길림성 집안시) 서북쪽 50㎞ 거리의 三家子댐 부근에 위치하며, 혼강 유역에서 노령산맥을 넘어 고구려 두번째 수도가 있었던 국내성으로 향하는 교통로 가운데 가장 평탄한 신개하 연안에 위치하며, 관애는 신개하 연안로 가운데 지세가 가장 험하고 좁은 협곡과 산등성이를 가로질러 축조되어 있음. 산성의 기능과 성격에 대한 견해를 보면 첫째, 군사방어시설로 망파령관애는 험준한 산세를 따라 성벽을 구축하여 혼강에서 신개하를 거슬러 집안으로 통하는 교통로상의 요충지에 위치한 군사방어시설임. 이에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망파령관애가 신개하 하구에 위치한 패왕조산성과 함께 신개하 일대에서 고구려 도성(환도성과 국내성)의 외곽방어선을 구축했다고 추정함. 둘째, 남도상의 요충지로 모구검기공비가 망파령관애에서 신개하를 거슬러 집안으로 향하는 노령산맥상의 분수령인 小板岔嶺에서 발견되었는데 이에 3세기 중엽 제3현도군을 출발하여 소자하·혼강 유역을 거쳐 小板岔嶺을 넘어 환도성으로 진입한 魏 모구검을 비롯해 고구려 국내성을 침공하였던 중국측 침공군 가운데 상당수가 이 일대를 지나갔을 것으로 추정됨. 특히 342년 전연의 모용황 이 남도와 북도를 통해 동시에 고구려를 침공했는데, 망파령관애는 모용황이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침공했던 남도상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 추정됨(『고고』1964-2 외 다수). 셋째, 북도상의 요충지로 342년 전연 모용황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등장하는 남도와 북도가 신빈 永陵鎭에서 갈라진다고 설정한 다음, 남도를 소자하 지류인 二道河-渾江 지류인 六道河-渾江 하류-渾江口-압록강 본류로 설정한 다음, 蘇子河 본류-富爾江-新開河를 북도로 설정해, 망파령관애를 북도상의 중욯나 방어시설로 파악하기도 함(王線厚).자연환경 집안현성(길림성 집안시) 서북쪽 50㎞ 거리의 三家子댐 위쪽에 위치하고, 쌍차향 황외자촌에서 서북쪽으로 5㎞ 정도 떨어져 있는데(『집안현문물지』/ 쌍차향 소재지 서북 10㎞; 『고고』1964-2), 쌍차향과 台上鄕의 경계지점임. 관애가 지나가는 산줄기가 미치 자라처럼 생겼다하여 현지주민들은 望波嶺을 ‘王八脖子嶺’이라고도 부름. 노령 산줄기에서 발원한 쌍차하(신개하)가 구불구불하게 흐르다가 대상향과 쌍차향의 경계지점을 지날 무렵, 협곡의 폭이 좁아지고 양 옆의 산도 깍아지른 듯이 험준해짐. 북쪽 산비탈은 높고 가파른데, 아라로는 좁고 험준한 협곡이 내려다 보이며, 높이는 약 60m임. 망파령 산줄기는 대체로 동남-서북 방햐응로 뻗어 있고, 서북쪽 산줄기의 끝 지점에 龍頭嶺이라는 남북 방향의 작은 산줄기가 다시 솟아나 계곡 쪽으로 돌출하여 마치 병풍처럼 협곡을 가로막고 있음. 망파령관애는 바로 망파령과 용두령의 산마루를 따라 구축했음. 용두령 남단과 망파령이 만나는 지점에는 약간 낮은 구릉이 있는데, 현재 신개하 연안을 따라 개설된 지방 도로가 이곳을 뚫고 지나가고 있음. 또한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던 쌍차하(신개하)는 관애의 서북단을 지난 다음 방향을 동쪼긍로 꺾어서 흐르고 있는데, 그 양 옆으로는 깍아지른듯한 산이 계속 연이어짐. 1976년 바로 이 협곡을 막아 三家甸子댐을 건설했으며, 이로 인해 용두령 서북단의 관애와 용두령-망파령 사이 구릉 저지대의 관애 일부가 수몰됨.참고문헌 · 張拱垣 編, 「疆域志」「古蹟」『輯安縣志』, 1931 · 方起東, 陳相偉, 「吉林集安高句麗南道和北道上的關隘和城堡」『考古』 1964-2, 1964 · 方起東·林至德, 「集安高句麗考古的新收穫」『文物』 1984-1, 1984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4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 編, 「望波嶺關隘」『吉林省志』 43(文物志), 吉林人民出版社, 1991 · 國家文物局 主編, 「集安市-望波嶺關隘遺址」『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李殿福, 「高句麗考古的回顧與展望」『遼海文物學刊』 1992-2, 1992 · 遲勇, 「高句麗都城的戰略防禦系統」『高句麗硏究文集』, 延邊大學出版社, 1993 · 魏存成, 「城址·建築址」『高句麗考古』, 吉林大學出版社, 1994 · 余昊奎, 「集安 望波嶺關隘」『高句麗 城』 Ⅰ(鴨綠江 中上流篇), 國防軍史硏究所, 1998 · 楊春吉·王曉南, 「高句麗疆域調査與硏究現狀」『高句麗歸屬問題硏究』, 吉林文史出版社, 2000 · 秦升陽, 「南北道上的關隘與城堡」『高句麗歷史與文化』, 吉林文史出版社, 2000 · 王綿厚, 「高句麗南北二道上諸城」『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魏存成, 「中期都城通往遼河流域的兩條道路與毌丘儉紀功碑」『高句麗遺跡』, 文物出版社, 2002 · 杜宇 編著, 「老嶺山區古道」『集安風景名勝史話』, 通化師範學院照排印刷中心, 1999

      • 리스트여닫기 만구 ‘노변장’관애(灣溝 ‘老邊墻’關隘) 출토지 집안시 양수향 해관촌 (集安市 凉水鄉 海關村)연대 고구려 초중기(3세기 중엽-4세기 중엽)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3집안현문물관리소(集安縣文物管理所)전체 현황을 조사함.1983집안현문물조사대(集安縣文物調査隊)4월에 성곽의 전반적인 제원 및 간략한 지표조사를 함.구조특징 230˚방향으로 계곡 동안에서 시작하여 충적대지상에 수평으로 40여m를 쌓은 뒤 다시 산기슭을 따라 산중턱 가파른 수직 암벽까지 130여m를 축조했고, 河床의 붕괴로 인해 서단 20여m가 유실되었으므로 본래 성벽의 전체 길이는 200m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됨. 계곡 건너편 서안에도 성벽의 일부로 추정되는 돌무지가 남아 있고, 관애 남쪽 70여m 지점에도 보조 관애로 추정되는 석축 흔적이 남아 있음. 河床에 인접한 상벽은 거의 대부분 유실되었지만, 河床 동측과 산기슭 상의 성벽은 많이 허물어지기는 했지만 석벽 자체는 잘 남아 있는 상태이고, 관애 남쪽 70여m 지점의 석축 흔적도 허물어지기는 했지만 비교적 잘 남아 있는 상태임.역사적 의미 주변 유적으로 서쪽 13㎞ 거리에 칠개정자관애가 있고, 본래 남쪽 300m 거리에 고구려 고분군(적석묘)이 있었지만, 1983년 조사시에는 적석묘와 방단적석묘 등 3기만 남아 있었으며, 지금은 하류쪽의 댐으로 인해 압록강에 수몰되거나 경작에 위해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함. 지정학적으로 老邊墻關隘는 집안시 소재지에서 서남으로 55㎞ 떨어진 양수향 해관촌 북쪽 만구 골짜기에 위치해 있으며, 남쪽 4㎞에 압록강이 있음. 1931년에 간행된 『集安縣志』에 따르면, 상류 쪽에서 순조롭게 흐르던 압록강은 太平鄕 江口村에서부터 楡林河와 凉水泉子河 河口까지는 양안에 험준한 봉우리가 우뚝 솟아있고, 물살이 거세지며, 물결도 크게 일기 시작하고, 강물이 협곡 사이를 좌충우돌하면서 굽이쳐 흐르기 때문에 심한 소용돌이, 급한 물굽이, 암초 등을 만들며, 要孩子哨, 媽媽哨, 方車子哨, 老虎哨, 關門砬子 등으로 불리는 험준한 요해처가 생겨났음. 그리고 강물을 따라 수십리를 빙돌더라도 실제로는 1리 정도밖에 나아가지 못하게 됨. 그리하여 압록강 수운을 이용할 경우 운항 도중에 많은 위험이 따르게 됨. 그러다가 유림하와 양수천자하 하구부터 하류 쪽으로 강의 수면이 점차 넓어지고 강물의 흐름도 완만해지게 됨. 그리하여 예로부터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들은 대부분 外岔溝河나 凉水泉子河 일대에 정박한 다음, 육로를 이용하여 집안현성(집안시) 조재지로 나아갔다고 함. 그리하여 20세기 전반 外岔溝村 일대는 압록강 수로 교통과 집안지역 육로 교통의 結節點으로서 지금의 집안시 소재지보다 더 번성했다고 함. 특히 1888년 봄 外岔溝河에 주둔하던 청나라 군대가 지역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노령산맥에 老斧嶺 고갯길을 새로이 개설하여 외차구하 일대와 노령산맥 남쪽 사이뿐 아니라 노령산맥 북쪽 지역 일대와의 교통도 원활하도록 했음. 다만 1940년대 수풍댐이 건설된 다음 압록강 수로교통이 쇠퇴하면서 외차구촌 일대도 점차 쇠퇴하게 됨. 노변장관애의 기능과 성격은 바로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하면서 파악할 필요가 있음. 관애의 기능과 성격을 보면, 첫째, 압록강 수상 교통로를 통제하던 도성 외곽의 군사시설로, 만구노변장관애의 축성법은 망파령관애, 관마산성 등과 비슷하며, 특히 성벽 위에 진흙을 덮어 통로로 활용한 것은 망파령관애와 유사한데, 남쪽에 적석묘군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 시기의 군사시설로 추정됨. 21세기 전반 外岔溝 일대가 압록강 수상 교통과 육상 교통의 결절점이었던 것으로 보아 고구려 시기에도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됨. 이에 일반적으로 만구노변장관애가 서남쪽 13㎞ 거리에 위치한 칠개정자관애와 더불어 압록강 수상 교통로와 상륙로를 봉쇄하던 방어시설이었을 것으로 추정됨. 다만 관애가 위치한 만구 골짜기 자체가 주요 교통로로 활용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외형은 골짜기를 가로지른 관애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실제로는 성벽 안쪽의 골짜기를 군사시설로 활용하던 군사방어성의 성격을 띠었을 가능성도 상당히 높음. 둘째, 342년 남도상의 방어시설로, 342년 전연 모용황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등장하는 남도와 북도가 신빈 영릉진에서 갈라진다고 설정한 다음, 남도를 이도하를 거쳐 혼강 지류인 육도하와 혼강 본류를 따라 내려와 혼강구를 지나 압록강 본류를 거슬러 집안으로 향하는 노선으로 설정한 다음, 노변장관애를 이 남도상의 중요한 방어시설을 구성했다고 파악하기도 함(王線厚).자연환경 집안현성(길림성 집안시)에서 서남쪽 55㎞ 떨어진 양수향 해관촌 북쪽 通天嶺 동쪽 산기슭에 위치하고, 남쪽 4㎞ 거리에 압록강이 있으며, 동쪽 2㎞ 거리에 집안-환인 도로가 양수향 소재지를 통과하며, 남쪽 300m 거리에 海關 8隊가 있음. 만구 골짜기는 길이 3㎞ 정도로 남북으로 길게 펼쳐져 있는데, 양안은 가파른 절벽이다. 서쪽 산기슭에서 발원한 시냇물이 골짜기를 관통하여 해관촌 부근에서 凉水泉子河에 유입되어 남류하다가 압록강으로 유입됨. 관애는 만구촌 북쪽 200m 되는 지점에서 만구 골짜기를 가로질러 동서 방향으로 뻗어 축조했음. 관애 안쪽에는 서쪽과 북쪽이 깎아지른 단애로 이루어진 평탄한 대지가 있는데 성벽은 바로 이 대지의 동남쪽 가장자리를 따라 동북쪽 산중턱에서 서남쪽 계곡에 이르는 구간에 축조했음. 안쪽 대지는 병사 주둔지 등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음.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4 · 方起東·林至德, 「集安高句麗考古的新收穫」『文物』 1984-1, 1984 · 方起東·劉景文, 「吉林省近十年考古工作的主要收穫」『博物館研究』 1990-1, 1990 · 國家文物局 主編, 「集安市-“老邊墻”關隘遺址」『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辛勇旻, 「中國內 高句麗遺蹟의 현황과 과제(Ⅱ)」『湖巖美術館硏究論文集』 2, 湖巖美術館, 1997 · 余昊奎, 「集安 灣溝老邊墻關隘」『高句麗 城』 Ⅰ(鴨綠江 中上流篇), 國防軍史硏究所, 1998 · 王綿厚, 「高句麗南北二道上諸城」『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杜宇 編著, 「老斧嶺山路變遷」『集安風景名勝史話』, 通化師範學院照排印刷中心, 1999

      • 리스트여닫기 칠개정자관애(七個頂子關隘) 출토지 집안시 양수향 외차구촌 (集安市 凉水鄉 外岔溝村)연대 고구려 초중기(3세기 중엽-4세기 중엽)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3집안현문물조사대(集亞縣文物調査隊)4월에 집안현문물관리소가 집안현 경내의 유적과 유물을 일제히 조사할 때 칠개정자관애를 발견하였고, 기초적인 조사를 실시함.구조특징 칠개정자산을 旗竿頂子山이라고도 부르며, 관애 역시 ‘旗竿頂子關隘’라고 부름. 계곡을 횡단하여 자연 산돌로 관애를 축조하였고, 성벽 방향은 235˚이며, 계곡물보다 약 3m 높음. 관애 중앙으로 계곡이 관통하기 때문에 동벽과 서벽으로 나뉨. 1983년 조사 당시 성벽이 심하게 허물어져 성벽 단면을 정확히 알 수 없고, 돌들이 양쪽으로 많이 흩어져 외관상 둥그스럼한 돌무더기처럼 보였다고 함. 이 당시 동벽의 경우, 도로에 위해 잘려나간 서단을 제외하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다고 함. 그 뒤 동벽 동단의 산기슭 아래로 도로를 신설함에 따라 동단 부분도 많이 파괴되었고, 계곡 서안의 서벽 부분은 성벽 자체를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거의 사라진 상태이며, 특히 서벽 중앙으로 도로가 지나가고 있음.역사적 의미 주변 유적으로 동쪽 13㎞ 거리에 만구노변장관애가 있고, 관애 남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평지상에 고구려 적석묘가 여러 기 남아 있음. 지정학적으로 칠개정자산 계곡의 남단에 위치하며, 계곡 입구 바로 앞에는 압록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음. 외차구는 혼강 하구의 왼쪽 부근으로 북쪽으로 외차구하를 거슬러 大路鄕을 지나 掛牌嶺을 넘어서 욘여성 환인현으로 나아가며, 동쪽으로는 양수향, 유림향, 태평향을 지나 집안현성(길림성 집안시 소재지)에 도달함. 1932년에 간행된 『集安縣志』에 따르면, 상류 쪽에서 순조롭게 흐르던 압록강은 太平鄕 江口村에서부터 유림하와 양수천자하 하구까지는 양안에 험준한 봉우리가 우뚝 솟아있고, 물살이 거세지며, 물결도 크게 일기 시작하고, 강물이 협곡 사이를 좌충우돌하면서 굽이쳐 흐르기 때문에 심한 소용돌이, 급한 물굽이, 암초 등을 만들며, 要孩子哨, 媽媽哨, 方車子哨, 老虎哨, 關門砬子 등으로 불리는 험준한 요해처가 생겨났음. 그리고 강물을 따라 수십리를 빙 돌더라도 실제로는 1리 정도밖에 나아가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압록강 수운을 이용할 경우 항해 도중에 많은 위험이 따르게 됨. 그러다가 유림하와 양수천자하 하구부터 하류 쪽으로 강의 수면이 점차 넓어지고 강물의 흐름도 완만해지게 됨. 그리하여 예로부터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들은 대부분 외차구하나 양수천자하 일대에 정박한 다음, 육로를 이용하여 집안현성(집안시) 소재지로 나아갔다고 함. 20세기 전반 외차구촌 일대는 압록강 수로 교통과 집안지역 육로 교통의 결절점으로서 지금의 집안시 소재지보다 더 번성했다고 함. 특히 1888년 봄 외차구하에 주둔하던 청나라 군대가 지역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노령산맥에 老斧嶺 고갯길을 새로이 개설하여 외차구하 일대와 노령산맥 남쪽 사이뿐 아니라 노령산맥 북쪽 지역 일대와의 교통도 원활하도록 했음. 다만 1940년대 수풍댐이 건설된 다음 압록강 수로 교통이 쇠퇴하면서 외차구촌 일대도 점차 쇠퇴하게 됨. 칠개정자관애의 기능과 성격은 바로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하면서 파악할 필요가 있음. 관애의 기능과 성격을 보면, 첫째, 압록강 수상 교통로를 통제하던 도성 외곽의 군사시설로 관애 남쪽 계곡 입구에 적석묘군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 시기의 군사시설로 추정되고, 20세기 전반 외차구 일대가 압록강 수상 교통과 육상 교통의 결절점이었던 것으로 보아 고구려 시기에도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됨. 이에 일반적으로 칠개정자관애가 동남쪽 13㎞ 거리에 위치한 만구노변장관애와 함께 압록강 수상 교통로와 상륙로를 봉쇄하던 방어시설이었을 것으로 추정함. 다만 관애가 위치한 칠개정자산 골짜기 자체가 주요 교통로로 활용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외형은 골짜기를 가로지른 관애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실제로는 성벽 안쪽의 골짜기를 군사시설로 활용하던 군사방어성의 성격을 띠었을 간으성이 상당히 높음. 둘째, 342년 남도상의 방어시설로, 342년 전연 모용황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등장하는 남도와 북도가 신빈 永陵鎭에서 갈라진다고 설정한 다음, 남도를 이도하를 거쳐 혼강 지류인 육도하와 혼강 본류를 따라 내려와 혼강구를 지나 압록강 본류를 거슬러 집안으로 향하는 노선으로 설정한 다음 노변장관애와 더불어 칠개정자관애를 남도상의 중요한 방어시설을 구성했다고 파악하기도 함(王線厚).자연환경 집안현성(집안시)에서 서남쪽으로 65㎞ 떨어진 양수향 외차구촌 서쪽에 위치하고, 북쪽 200m 거리에 외차구촌(칠개정자) 6隊가 있으며, 관애는 칠개정자산 계곡의 남단에 위치함. 칠개정자산은 노령산맥의 주요 산줄기로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뻗어 있는데, 이 산줄기는 남쪽으로 압록강 北岸으로부터 시작하여 북쪽으로는 古馬嶺, 掛牌嶺 등과 연면히 이어지며 60여㎞ 뻗어나가 노령의 주맥과 연결됨. 칠개정자산에는 좁고 긴 계곡이 하나 있는데, 길이가 약 15㎞ 되며, 양사면의 계곡 물이 압록강으로 흘러들고 있음. 바로 이 계곡 입구에서 북쪽으로 300여m 들어온 지점에 위치함. 관애 남쪽 300여m 거리의 계곡 입구 바깥쪽에는 남북 너비 300-600m, 동서 길이 1,500m인 충적대지가 기다랗게 펼쳐져 있는데, 본래 강의 수면보다 4m 정도 높았지만 지금은 수풍댐이 만수위에 가까워지면서 충적대지가 물에 잠김. 계곡 입구에서 골짜기를 따라 북쪽으로 나아가면 관애가 위치한 지점에서 계곡의 폭이 좁아지고 산비탈이 가팔라지며 천연 방어물을 형성함.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4 · 方起東·林至德, 「集安高句麗考古的新收穫」『文物』 1984-1, 1984 · 方起東·劉景文, 「吉林省近十年考古工作的主要收穫」『博物館研究』 1990-1, 1990 · 國家文物局 主編, 「集安市-七個頂子關隘」『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余昊奎, 「集安 七個頂子關隘」『高句麗 城』 Ⅰ(鴨綠江 中上流篇), 國防軍史硏究所, 1998 ·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杜宇 編著, 「老斧嶺山路變遷」『集安風景名勝史話』, 通化師範學院照排印刷中心, 1999

      • 리스트여닫기 대천초소, 대천초잡(大川哨所, 大川哨卡) 출토지 집안시 청하향 대천촌 (集安市 淸河鄉 大川村)연대 고구려 초중기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3길림성문물고고연구실, 집안현박물관(吉林省文物考古硏究室, 集安縣博物館)7월에 길림성문물고고연구실의 방기동 및 집안현박물관의 임지덕, 경철화, 손인걸 및 길림사범대학 조정용, 길림성 철학사회과학연구소 주함강, 집안현 문물관리소 직원이 집안현 경내의 남북 교통로를 조사하다가 대천초소를 새롭게 발견하였고, 성곽의 전반적인 현황을 조사함. 『文物』1984-1의 「集安高句麗考古的新收穫」 및 『集安縣文物志』의 ‘大處哨卡’에 발표함.구조특징 성벽은 자연지세를 활용해 둥글게 석축 성벽을 축조하였고, 220˚방향이며 대략 원형 평면임.역사적 의미 주변 유적으로 大川村 동북 및 楊木橋子溝 일대에 고구려 고분이 다량 분포하고 동남 약 7.5㎞에 군사시설인 관마산성이 위치함. 지정학적으로 집안시 소재지에서 서부긍로 60여㎞ 떨어진 淸河(葦沙河)유역으로 혼강 본류에서 淸河(葦沙河) 연안로를 거슬러 노령산맥을 넘어 집안분지로 향하는 교통로상에 위치함. 대천초소의 기능과 성격에 대한 견해를 보면 첫째, 관마산성의 방어초소로 대천초소는 혼강 본류에서 淸河(葦沙河) 연안로를 거슬러 노령산맥을 넘어 집안분지로 향하는 교통로상의 험준한 협곡에 위치하고, 절벽 위에 위치해 있으며, 규모도 전체 둘레가 153m 밖에 안되기 때문에 독립된 성곽이라기 보다는 다른 성곽의 보조 방어시설로 추정됨. 바로 동남쪽 7.5㎞에 위치한 관마산성의 전방 초소로서 淸河(葦沙河) 일대에서 도성 외곽의 방어선을 구성했던 것으로 추정됨. 소규모 적군이 침공해오면 대천초서에서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저지할 수 있고, 대규모 적군이 침공해 오더라도 그곳에서 알단 한 차례 저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속하게 관마산성에 연락하여 적의 침공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음(이전복, 위존성). 둘째, 342년 對前燕戰時 북도상의 요충지로 추정됨. 342년 전연의 모용황은 남도와 북도 두 길로 고구려를 침공했는데, 북도로 침공할 것이라는 고구려의 예상과 달리 모용황이 대군을 이끌고 남도로 공격했으며 북도로는 長史 王寓로 하여금 병사 15,000을 진군하게 함. 고국원왕은 王弟 武로 하여금 5만 대군을 이끌고 북도를 집중적으로 방어하는 한편, 자신은 적은 병력만을 데리고 남도를 수비함. 결국 고국원왕은 모용황의 4만 대군에게 대패했으며 도성인 환도성마저 함락 당한 반면 북도에서는 王弟 武가 전연군을 대파함. 현재 남도와 북도의 경로에 대해서는 견해가 분분한데, 집안시 경내의 경우 대체로 혼강 유역에서 신개하를 거슬러 小板岔嶺을 통해 노령산맥을 넘는 루트를 남도, 혼강 유역에서 청하 연안로를 거쳐 노령산맥을 넘는 루트를 북도로 설정함. 이로 본다면 대천초소는 342년 북도상의 전략적 요충지였을 가능성이 높음(『集安縣文物志』, 遲勇, 魏存成).자연환경 집안현(집안시) 소재지에서 서북으로 60여㎞ 거리에 위치하고, 청하향에서 동쪽으로 2㎞ 떨어진 대천촌의 북쪽 절벽 위에 위치함. 남쪽으로 청하 본류와 400m, 통화-집안 도로와 550m 떨어져 있고, 동남쪽으로 약 7.5㎞ 거리에 관마산성(관마장산성)이 있음. 대천초소는 比高 약 20m 정도되는 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는데, 절벽은 동남 방향으로 돌촐하여 청하 河谷으로 뻗쳐 있어 주변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음. 통화-집안 도로가 본래 총하 북안에 개설되어 있었는데, 동북쪽으로 향하다가 초소가 있는 벼랑 아래를 지난 다음 동남으로 방향을 꺾어 관마산성을 관통하여 지나갔었음.참고문헌 · 方起東·林至德, 「集安高句麗考古的新收穫」『文物』 1984-1, 1984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4 · 方起東·劉景文, 「吉林省近十年考古工作的主要收穫」『博物館研究』 1990-1, 1990 ·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 編, 「大川哨卡」『吉林省志』 43(文物志), 吉林人民出版社, 1991 · 國家文物局 主編, 「集安市-大川城址」『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遲勇, 「高句麗都城的戰略防禦系統」『高句麗硏究文集』, 延邊大學出版社, 1993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王禹浪·王宏北, 「中國吉林省集安市淸河鎭大川村高句麗古城址」『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1994 · 魏存成, 「城址·建築址」『高句麗考古』, 吉林大學出版社, 1994 · 余昊奎, 「集安 大川哨所」『高句麗 城』 Ⅰ(鴨綠江 中上流篇), 國防軍史硏究所, 1998 · 楊春吉·王曉南, 「高句麗疆域調査與硏究現狀」『高句麗歸屬問題硏究』, 吉林文史出版社, 2000 · 秦升陽, 「南北道上的關隘與城堡」『高句麗歷史與文化』, 吉林文史出版社, 2000 · 魏存成, 「中期都城通往遼河流域的兩條道路與毌丘儉紀功碑」, 「山城的分布」『高句麗遺跡』, 文物出版社, 2002 · 杜宇 編著, 「老嶺山區古道」『集安風景名勝史話』, 通化師範學院照排印刷中心, 1999

      • 리스트여닫기 지구유적(地溝遺蹟) 출토지 집안시 유림향 지구촌 (集安市 榆林鄉 地溝村)연대 고구려 초기설과 고구려 중기 전후설이 있음. 고구려 초기설은 지구유적에서 출토된 ‘V’자형 보습날은 洛陽 燒溝 漢墓에서 출토된 후한대의 보습날과 형태가 비슷하다고 하는데, 이 견해에 따를 경우 지구유적 유물 가운데 일부는 고구려 초기의 것일 가능성이 높음(경철화). 고구려 중기 전후설은 지구 대지에 분포해 있는 고구려 고분군의 묘장 形制는 대부분 방단적석묘와 봉토통실묘로 시대는 약간 늦는데 이것으로 추론하면, 지구유적의 시기는 대략 고구려 중기 전후로 주정됨(『집안현문물지 』).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76 9월 30일에 쇠보습날 등 다수의 유물이 출토됨(『中國文物地圖集-吉林分冊』).1983집안현문물조사대(集安縣文物調査隊)봄에 地溝 대지 북부의 자연단면에서 고구려 시기 유물이 다수 분포된 유적층을 조사함. 『集安縣文物志』의 ‘지구유적’을 발표함.구조특징 두께 20㎝ 정도의 황갈색 경작층 아래에 두께 50㎝ 정도의 회갈색 유물 포함층이 있으며, 그 아래는 풍화된 모래가 섞인 황토로 이루어진 생토층임. 회갈색 문화층에서 고구려 시기 토기편, 숯덩이, 불에 탄 나무토막을 비롯하여 銅釜 2, 쇠보습날 1건, 쇠낫 5건, 唐·宋代의 동전 등이 출토됨.역사적 의미 주변의 충적대지에 고구려 고분군이 대량으로 분포하는데, 1962년 조사 때 약 100여기, 1983년 재조사 때 30여 기가 남아있었고, 대부분 방단적석묘와 봉토통실묘임. 유적에서 채집된 漢代의 유물은 대부분 중국대륙에서 고구려로 수입된 것으로 중국대륙에서 조금 늦게 수입되었거나 사용시간이 비교적 길었다고 추정하고 있음. 또한 지구촌 충적대지에 분포해 있는 고구려 고분은 대부분 방단적석묘와 봉토통실묘로 시대가 약간 늦다고 추정됨. 이에 지구유적의 연대를 고구려 중기를 전후한 시기로 파악함. 특히 주변 지역이 상당히 평탄하며 토질이 비옥하고 수원이 넉넉한 점으로 보아 사람이 거주하기에 매우 적합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보습날과 쇠낫 등 한대의 선진적인 농기구가 다수 출토되는 것은 이러한 자연지형과 밀접히 연관될 것으로 추정됨. 다만 보습날과 쇠낫 등이 後漢代에 중국대륙에서 직수입된 농기구라면 늦어도 3세기대에는 이 일대에서 이러한 농기구를 사용하여 농사를 지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러한 점에서 유적 형성의 상한은 고구려 초기로 소급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판단됨.자연환경 집안현성(길림성 집안시)에서 압록강을 따라 약 50㎞ 내려가면 유림향 지구촌 일대에 이르는데 지구촌의 충적대지 곳곳에서 유물이 출토된 바 있으며, 1983년에는 충적대지 북부의 자연단면에서 유적층이 확인됨. 지구촌 일대는 압록강 우안의 넓은 충적 대지로, 대지 범위는 동서 길이가 약 4㎞에 이를 정도로 광대한데, 남북 너비는 0.3-1.5㎞로 일정하지 않음. 충적대지의 북쪽은 유림령에 가까이 있고, 남쪽은 압록강에 잇닿아 있으며, 강 수면보다 5-15m 정도 높음. 지구촌은 각기 자연 촌락으로 이 대지 위에 산포해 있음.유물정보 토기편 1점, 보습날 1점, 철제 낫 5점, 동제 솥(銅釜) 2점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4 · 耿鐵華, 「集安高句麗農業考古槪述」『農業考古』 1989-1, 1989 · 國家文物局 主編, 「集安市-地溝遺址」『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리스트여닫기 채석장유적(採石場遺蹟) 출토지 집안시 (集安市)연대 고구려 초중기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0집안현문물관리소(集安縣文物管理所)집안의 채석공들이 綠水橋 일대에서 산돌을 채석하다가 거석상에서 일정하게 배열된 착흔을 발견하고, 고대인의 채석 흔적임을 확인했다고 함. 5-6월에 장설암, 손인걸 등이 여러 차례 조사하고, 표본을 채집하였으며, 『박물관연구』1992-1에 발표함.1983집안현문물조사대(集安縣文物調査隊)4월에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의 이전복 등이 유적의 전체 현황을 조사함. 『集安縣文物志』의 ‘採石場遺址’를 발표하고, 1983년 10월 19일에 집안현 문물중점보호단위로 지정됨.구조특징 채석장은 산기슭을 따라 동서로 길게 뻗어있는데, 길이 100m, 너비 100m로 면적은 10만여㎡에 이름(『博物館硏究』1992-1에는 남북 길이 1250여m, 도로에서 암벽까지의 너비 1000여m로 기술함). 채석장의 암질은 晶洞花崗巖, 中一細粒花崗巖 등으로 암질이 단단하며 성형이 좋아 대형 건축석재를 조성하는데 적합하다고 함. 채석장 내에는 거대한 돌들이 가득 널려 있는데, 대부분 고대 시기에 채석한 다음 아직 가공하지 않았거나 운반하지 않은 석재들임.역사적 의미 채석장의 석질은 “晶洞花崗巖”으로서 견고하여 가공했을 때의 모양이 좋기 때문에 대형 석조 건축물을 짓는데 사용하기에 적합하다고 하며, 이 석재는 고구려 왕릉으로 추정되는 장군총의 석재의 질과 동일하다고 함. 통구고분군에 본포한 벽화고분 석실에 사용된 석재 역시 재질상 동일하다고 함. 고구려 시기의 채석장 유적으로 파악되며, 특히 고구려 시기의 왕족이나 귀족들이 사용하던 석재 채석장이었음. 고구려 두 번째 수도였던 국내성 일대의 宮室, 무덤 및 기타 건축물을 조영하는데 필요한 석재를 이곳에서 채석했다고 추정됨. 다만 이런 류의 암석은 집안지역 곳곳에 분포되어 있기 때문에 고대 채석장이 다른 곳에서도 있었을 가능성을 계속 조사할 필요가 있음. 채석장은 통화-집안 도로의 동측에 위치하며, 이곳은 교통이 비교적 편리하기 때문에, 이런 石林은 봄, 여름, 가을에 채석해 겨울에 물이 얼면 빙판길에 굴림대를 이용하여 산계곡을 따라 도성과 그 근교까지 운반했을 것으로 추정됨. 석재 운송 노선은 두 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채석장에서 통구하를 따라 하류로 내려와 통구하 하구의 압록강에 이르러 두 길로 갈라짐. 한 길은 압록강 하류를 따라 내려가 마선구의 천추묘 등으로 운송하고, 다른 한 길은 압록강 상류를 거슬러 동으로 올라가 태왕릉과 장군총 등으로 운송함. 당시 압록강의 수면은 현재보다 넓고, 태왕릉과 장군총 남측에는 원래 압록강 지류가 있었으며 매년 여름에 비가 ㅁ낳이 올 때는 압록강 물이 하나로 변하고(지금 강 가까이 있는 묘 동남측과 태왕릉 서남에서 정류장까지 각각 큰 물웅덩이가 있다) 강물은 강 가까이에 있는 묘 비탈 아래까지 이름. 강면에서 태왕릉과 장군총 일대까지의 지세가 완만하여 운송에는 좋은 조건임.자연환경 집안현성(길림성 집안시) 북쪽 23㎞ 거리의 綠水橋 일대에 있고, 녹수교에서 북쪽 150m 거리의 집안-통화 도로의 동북측 산기슭에 위치하며, 채석장 앞의 小淸溝河와 통구하를 통해 고구려 두번째 수도인 국내성이 위치했던 통구분지 일대와 연결됨. 녹수교 일대는 산이 높고 숲이 울창하며, 거대한 바위가 우뚝 솟아 있고, 샘물이 졸졸 흐르는 곳으로서 경치가 매우 아름다우며, 우뚝 솟은 高山은 해발 고도가 무려 1,400여m에 이름. 채석장은 산세를 따라 동서로 길게 뻗어있는데 집안-통화간 도로가 채석장 앞을 지나가고, 도로 옆의 산기슭에 수많은 거석과 돌판이 널려 있음. 집안-통화 도로 아래로는 소청구하라는 작은 하천이 흘러가는데 동남으로 흐르다가 통구하와 합류하여 압록가응로 유입됨.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4 · 方起東·林至德, 「集安高句麗考古的新收穫」『文物』 1984-1, 1984 · 方起東·劉景文, 「吉林省近十年考古工作的主要收穫」『博物館研究』 1990-1, 1990 · 張雪岩, 「集安高句麗時期的採石場」『博物館研究』 1992-1, 1992 · 國家文物局 主編, 「集安市-綠水橋古代採石場遺址」『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李殿福, 「高句麗考古的回顧與展望」『遼海文物學刊』 1992-2, 1992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국동대혈(國東大穴)

      • 우산하 고분군(禹山下 古墳群)

      • 리스트여닫기 우산하 0000호묘(禹山下 0000號墓) 출토지 길림성 집안시 태왕진 (吉林省 集安市 太王鎮)조사내용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1989집안시문관소(集安市文官所)1989년 여름에 집안시 관계부서가 산정상에 열사탑을 축조할 때 시공과정 중에 발견됨. 市文管所가 소식을 듣고 현장에 도착했을 때, 무덤은 이미 대부분 훼손되어 겨우 북측과 동측 가장자리의 흔적만을 찾을 수 있었음.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이 무덤은 구릉 정상부의 남쪽 끝에 위치하고, 북면 약 30m 바깥에 구릉의 능선을 따라 무덤 3기가 배열되어 있었다고 함. 또한 무덤은 지표와 평행하고, 석재가 있었다고 함. 석재는 깨진 산돌과 강자갈이었고, 돌무지의 평면은 불규칙한 원형으로 직경은 10m 정도였다고 함.2003-2005 장복유, 손인걸, 지용이 참여하여 퇴적된 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