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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스키노발해성

출토유물의 고찰

3) 출토유물의 고찰

2008년도의 출토유물은 대부분 발해토기와 철기로 그 수량은 매우 많으며, 전반적인 유물에 대해서는 겔만, 이블리예프, 레센코 등의 논고가 제시된 바, 중요한 몇 개의 유물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한다.
① 연화문 수막새
먼저 연화문 무늬의 수막새를 보자. 이번 발굴에서는 2점이 출토되었는데, 그 형태는 거의 동일한 오엽연화문이 새겨진 막새다. 이러한 막새는 1994년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 발해 사원지 발굴에서 출토된 바 있으며, 나아가서 발해의 중심부인 발해 상경성 출토 녹유수막새와 매우 유사한 것이다. 이로써 이러한 형태의 기와가 발해의 사원지나 사원지가 속한 행정중심지에 사용된다는 점을 잘 알 수 있다. 크라스키노가 발해시기 행정구역상의 중심지였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이며, 크라스키노 성이 당시 발해의 중심부와 직접적인 관계였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2008년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한 콕샤로프카 성지의 경우 비교적 대규모의 건물지가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연화문의 막새기와를 비롯하여 발해의 중심부인 동경성과 직접적으로 비교할 만한 유물은 거의 나오지 않았음과 좋은 비교가 된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콕샤로프카 성지는 연해주의 중부에 위치한 평지성으로 발해가 북방지역으로 영역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거점성으로 추정된다. 즉, 중심부의 행정구역인 크라스키노성과 변방의 콕샤로프카성으로 대비되는 것이다. 이러한 발굴 자료의 증가는 매우 흥미로운 연구주제를 던진다. 즉, 연해주가 발해의 땅이라는 선언적인 주장에서 벗어나, 발해가 어떻게 주변지역으로 확산되어 갔는가이다.
이번에 발굴된 연화문 막새기와는 기존의 발해출토 연화문막새기와가 주로 사원지와 같은 특수 건물에서만 발견되었던 데에 반해서 일반 주거구역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번 연화문 막새기와의 발견지역은 제40구역으로 사원지에서 적어도 70m이상 떨어진 주거구역의 한 가운데이다. 2005~2007년 제34구역의 발해 상층문화층에서 대형주거지가 발견되었고, 이번 발견지점은 그 주거지의 담벼락에 해당하는 석열구조에서 발견된 것이다. 즉, 추론을 한다면 비교적 상층부가 거주하는 북서부에서 거대한 석담에 둘러쌓인 비교적 커다란 주거지를 썼던 것이다. 여기에 연화문 막새기와가 쓰였다는 점 그리고 연화문은 발해의 중심부에서만 발견된다는 점은 크라스키노 성지의 상층부가 발해의 중심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의미한다.
② 고위층 주거지의 출현
두 번째로 제40호 구역에서 발굴된 찰갑과 철촉을 들 수 있다. 막새기와와 함께 제5호 주거지의 주인공이 신분이 높았음을 예상할 수 있다. 주거지의 주변에서 발견된 돌담과 주거지의 존재 그리고 제40구역의 북편에서 확인된 저장공(또는 폐기공)에서 대량의 귀한 유물이 출토되었음은 사원구역과 인접한 북쪽 생활구역의 주민신분이 높았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물론 이러한 상황은 향후 성지의 다른 지역에 대한 발굴이 이루어질 때에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③ 명문토기의 해석
2008년 발굴에서는 ‘日?자가 새겨진 토기 동체부가 제40구역에서 발견되었으며, ‘도륭홍지(道隆弘知)’라고 하는 명문이 제41구역에서 발견되었다. 먼저 ‘日?자형 토기를 보자. 2007년도 출토유물에서는 ‘主’자가 저부에 새겨진 것이 출토된 바 있으며, 이외에도 명문이 새겨진 예는 많다. 토기에 명문을 새기는 전통은 일찍이 고구려에서 확인되는데, 발해의 독자적인 문자사용이라는 문제와 함께 발해의 문자체계에 대한 자료를 제공했다. 2007년도에 발굴된 토기 명문은 대체로 ‘王? 또는 ‘川?자와 비슷해서, 그 형태는 2008년도의 기호와 일맥상통한다. 단지, 2008년도 출토 ‘日?자형 명문은 만들어진 토기 위에 새긴 것이라면, 2007년도 출토품은 제작과정에 새긴 것이라는 차이가 있다. 어떤 경우라도 토기제작 과정에서 남겨진 특정한 장인들의 기호일 가능성, 또는 토기를 배분할 때에 소유자를 표시하기 위한 것일 가능성 모두 있다. 어쨌든, 이른 시기 문화층에서부터 토기를 전문적으로 제작하고 배급했었던 시스템이 크라스키노 성지에서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음으로 ‘道隆弘知’라는 명문이 새겨진 토기편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크라스키노 성지에서는 한 자가 마치 부호처럼 새겨진 명문만이 발견된 데에 반해서, 네 자가 한 번에 새겨진 것이라는 점에서 그 자료적 가치가 크다. 이 명문토기는 제8호 주거지의 서북쪽 모서리 근처에서 엎어진 채로 발견되었는데, 저부의 형태로 볼 때 대형옹으로 생각된다. 발굴 당시 문자의 존재를 알지 못했으나, 세척과정에서 희미한 글자가 확인되었다. 이 명문에 윗장에서 이블리예프와 이근우가 각각 상이한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이블리예프는 일본 승려의 가능성에 비중을 두지만, 이근우는 이를 인명이 아니라 수행을 위한 일종의 계언(戒言)으로 보고 있다. 보고자 역시 발굴 정황으로 판단할 때 인명보다는 수행을 위한 계언의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 이유로 첫 번째, 이 명문은 토기가 깨진 후에 쓰여졌다는 점이다. 즉, 상식적으로 완형인 상태에서 안으로 손을 넣어서 이런 글씨를 썼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보고자가 아는 한 동아시아 고대 및 중세의 토기의 안쪽 벽에 사람의 이름을 새겨 넣은 예는 없다. 상식적으로 토기의 주인을 구분하기 위하여 깨진 토기의 안에 이름을 넣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두 번째로 깨진 토기가 주거지 안에 엎어진 채로 발견되었다는 점에 주목하자. 발해의 행정구역인 염주성 안에 거주했던 사람들이 굳이 깨어진 토기를 재활용할 정도로 궁색했을 것 같지는 않다. 이전 크라스키노 발굴에서 구연부에 깨진 토기를 보수하기 위한 구멍으로 생각된 예는 있지만, 저부를 재활용한 것은 없다. 또한 재활용을 한다면 날카롭게 깨진 부분을 마연한다든지 약간의 재가공을 거쳐 사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토기는 그런 흔적이 전혀 없다. 한편 제41구역이나 제37구역에서 이 토기의 일부라고 생각되는 토기편이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이 토기는 폐기되기 오래 전에 이미 파손되었으며, 파손된 채 주거지 내부에 놓여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게다가 명문은 아주 날카로운 도구를 이용했지만 아주 희미하게 적었다. 따라서 기존에 발해에서 발견된 여러 문자들의 예와는 구분되는 특수한 경우라고 하겠다.
[그림 6] 명문토기 출토상황, 사진의 하단에 倒置된 토기
[그림 7] 명문이 새겨진 부분
[그림 8] 명문의 판독 예
깨진 토기의 내벽에 의도적으로 계언으로 생각되는 글씨를 쓰고 주거지 안에 두었다는 점은 분명하며, 이는 제8호 주거지의 위치와 연관지어서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다. 제8호 주거지는 사원구역과 바로 인접한 곳이다. 사원구역과는 의도적으로 공백지(제41구역 서편 구역)를 사이에 두고 축조된 첫 번째 주거지다. 여기에 조금 더 추측이 허락된다면, 이 명문을 남긴 사람은 사원에 관계된 사람이거나 불교를 신봉했던 사람일수도 있다. 유감스럽게도 제8호 주거지는 토기와 생활에 쓰여진 철기 이외에 별다른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추론은 불가능하다.
발해인은 한자를 자유로이 구사했으며, 또 자신들의 문자들도 만들어 썼다는 점은 역사기록에 잘 제시되어 있으며, 실제 동경성을 비롯한 여러 발해 발굴의 기와와 토기에서 발견된 바 있다. 하지만 기존의 명문은 토기의 소속을 표시하는 단문자에 불과했다는 점에서 제41구역 출토 명문은 발해문자 연구에 새로운 시사를 준다.
④ 토기의 시대별 변천
네 번째로 출토 토기는 대부분 발해 토기가 주를 이룬다. 이번 발굴에서 제37구역 최하층을 비롯하여 제8호 주거지 등 비교적 이른 시기의 문화층에서도 소위 ‘말갈계’ 토기는 극히 소량이다. 이는 기존 크라스키노 발굴의 결과와도 일치하는 부분이어서, 실제로 크라스키노 주민들은 말갈계의 문화가 거의 혼합되지 않은 채 생활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토기의 비율에 따른 말갈문화의 차이가 없음은 발해의 기층문화에 기여한 말갈문화의 영향이 러시아 학자들의 주장처럼 말갈계문화가 주축을 이룬 것이 아니며, 그러한 현상은 발해의 변방지역을 중심으로 조사했던 결과였음을 반증한다. 다음 장에서 살펴볼 바와 같이 크라스키노 성지의 연대는 지속적으로 발해 초기 또는 그 이전의 연대를 제공한다. 또한 매년 이른 시기의 문화층을 조사함에도 불구하고 말갈문화의 흔적은 전혀 없다는 점은 나아가서 고구려문화와 발해문화의 관계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근거가 됨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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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토유물의 고찰 자료번호 : kr.d_0006_0010_0030_005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