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크라스키노발해성

제41구역 서편구역

1) 제41구역 서편구역

① 고려인 경작층
서편구역은 다른 발굴과 마찬가지로 발굴 전 제초를 했으며, 1m별로 높낮이를 측량하고 자기탐사와 카파메트리를 측정했다(그림 28 제1평면도, 그림 38, 그림 39, 그림 56 제1평면도, 그림 72, 73). 하지만 기와실이 발굴된 제31구역 발굴지와 인접한 탓에 북벽의 표토부분은 많이 훼손된 상태였다(그림 5, 28, 29).
10~15㎝ 정도의 표토를 제거하자 바로 경작의 흔적이 나타났다. 크라스키노 성지 안은 평평한 대지로 이루어진 탓에 19세기 말부터 이 지역에 정착한 고려인들이 밭을 경작했다고 알려졌으며, 기존의 보고서 도면에서도 경작흔을 일부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 발굴에서 고려인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토기편은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크라스키노 성지 내에서 사람이 생활했던 시기는 고려인의 경작 이후 군부대가 훈련장으로 사용된 예밖에 없다. 고려인이 이주되기 전과 이주된 후로 이 지역은 경작된 적이 전혀 없다. 따라서 이 경작층은 고려인의 흔적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기존 러시아의 조사에서는 경작된 후표토 근처에 있는 탓에 기록을 남기지 않고 제거했으므로, 이번 발굴에서는 경작 윤곽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데에 주력했다. 경작층은 표토 약 20㎝를 제거하자 바로 그 흔적을 드러냈다. 이에 본 조사팀은 곧바로 바닥을 정리해서 전체 윤곽을 드러냈다. 경작흔은 남북방향으로 길게 나 있었고 이는 밭이랑의 흔적으로 추정된다. 각 이랑의 깊이는 약 15~8㎝정도이고 넓이는 21㎝정도이다. 이랑 내부는 암갈색 계통의 부식토로 충전되어 있었고 그 바깥쪽은 상대적으로 밝은 명갈색 점질토층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사진으로 보듯이 경작유구의 동북쪽에 남북방향으로 5~6개의 구상 흔적이 확인되었다. 그 간격은 약 17㎝이고 깊이는 5㎝ 이내로 매우 얕다. 따라서 이는 경작지로 보기는 어려우며 수레와 같은 교통수단이 지나간 흔적으로 보여 진다. 유감스럽게도 한국팀이 확인한 범위는 매우 좁기 때문에 전체 경작지의 범위나 농사방법 등의 정보를 얻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발해에 이어서 크라스키노의 성지에 거주한 사람들은 고려인들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한편 제41구역 트렌치를 사이에 두고 적석유구가 확인되었는데, 그 끝은 가운데의 둑으로 이어지는 형상이었다. 이는 이하에서 살펴볼 상부 문화층의 유구로 생각된다.
고려인 경작층은 러시아 발굴법에 따르면 제1분층과 제2분층의 상부에 해당한다.
표토와 고려인 경작층에서 출토된 유물을 보자. 표토에서는 자잘한 토기편 275점과 기와 47편이 출토되었다. 제2분층의 상부(그림 29 제2평면도, 그림 40)에서도 경작층이 완전히 드러났는데, 적석유구의 상부(Е, Ж-5)에서는 토기가 발견되었으며, 용도 미상의 토제품(Ж-4)(그림 138, 139)이 출토되었다. 또한 기와로 만든 장기알(Ж-1)(그림 140-1)도 출토되었다.
제2분층의 회갈색층은 제3분층에서는 비문화층인 모래층으로 바뀌었다(그림 31 제4평면도, 그림 44).
② 상부 문화층의 적석유구
경작층을 정리한 후 제1분층을 완전히 제거하자 경작층은 거의 사라졌지만, 황갈색 모래의 선상형태 간층으로 일부 남아있었다. Ж-4-5의 경작유구는 갈색 사질토층에서 적석유구가 좀더 확실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또한 Г-Д-1, 2구역에도 부식토에 가까운 갈색 사질토층이 드러났다. 이들 흔적은 군대의 경작흔이며, 전반적으로는 회갈색 사질토층이 드러났다(그림 30 제3평면도, 그림 41, 42a, b, c).
적석유구는 제2분층을 제거하자 10~50㎝의 돌이 부정형으로 노출되기 시작했다(그림 43). 적석유구는 노출되었을 때에 평면은 약 1.2×1m정도이며 유구를 완전히 노출시키자 동북-남서 방향의 장방형으로 그 크기는 1.5×1m정도로 넓어졌다. 높이는 약 60㎝이다. 그 내부에서는 발해토기가 대량 출토되었지만, 완형은 없으며 기타 유물은 거의 없었다. 동쪽 구역과 비교할 때 이 적석유구는 발해시기 상부 문화층에 속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적석유구와 관련이 있는 서편구역의 발해시기 상부 문화층에서는 제2분층에서는 서편 구역의 중앙부분에서 주로 출토되었는데, 토기편 697점과 기와 46점이 출토되었다. 또한 А-5에서는 토기로 만든 장기알이 출토되었다(그림 143-1).
적석유구의 밑으로 제3분층을 제거하자 회갈색의 비문화층인 모래층이 넓게 드러나기 시작했다(그림 31, 제4평면도, 그림 44). Е-Ж-4-6구역에 일부 갈색 사질토층과 적석들이 잔존했지만, 이는 상층의 적석유구가 남은 것이다. 회갈색 모래층에서 유물은 거의 출토되지 않았으며, 적석유구 주변에서 소량의 토기편이 출토되었을 뿐이다. 제3분층 이후 제4, 5분층에도 회갈색의 모래층이 계속 이어지며 적석유구도 바닥을 드러냈다(그림 32, 33, 45~50). 6분층에서는 제37구역의 숯이 섞인 간층의 레벨에 해당하는 깊이로 하강했다(-70~75㎝). 하지만, 인접한 제37구역과 달리 제41구역의 서편구역에서는 별다른 문화층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이는 이 구역의 조사에 앞서서 제37구역 북벽의 토층도 조사에서 충분히 예견된 것이었다. 즉, 제41구역과 제37구역의 둑을 경계로 서편은 황색계통의 비문화 사질토층이 뒤덮여 있었던 것과 이 구역에서 비문화층이 이어지는 것과 부합한다(그림 52~55).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제41구역 서편구역 자료번호 : kr.d_0006_0010_0020_002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