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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의 역사적 정황, 층위, 상대편년

1. 유적의 역사적 정황, 층위, 상대편년

발해사에 대한 기본사료는 11세기 초반에 편찬된 『新唐書』로, 이 책에서는 단지 발해의 東京은 “동남쪽으로는 바다에 접하는데, 이게 일본으로 통하는 길이다”주 007
번역주 007)
이 글에서는 여기에 인용되는 사료의 원전을 찾아서 직접 대조해서 수정하지 않고 러시아어 원문을 직역하겠다. 왜냐하면, 그를 통해 러시아 학계의 원 사료에 대한 인식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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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만 언급되어 있다. 이 책에서는 또한 “(예맥의) 고토에 (발해는) 龍原府라고 하는 동경을 세웠는데, 柵城府라고도 불리운다. 여기에는 4州인 慶, 鹽, 穆, 賀가 복속을 한다[新唐書/卷二百一十九/渤海傳]”라고 하였다. 1930년대 일본의 연구자들은 발해의 동경 용원부를 현재 길림성 혼춘시에서 동쪽으로 6㎞에 위치한 반랍성에 비정했다(齊藤, 1942;齊藤, 1978;鳥山, 1939). 『新唐書』에는 일본으로 가는 바닷길의 출발점이 동경에 속해 있는 어느 주인지 정확히 나와 있지 않다. 여기에 다른 사서기록을 참고해 보자. 926년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제국의 역사인 14세기에 편찬된 『요사』38권의 지리지에서는 과거 발해 동경에 속했던 주들을 나열하고 있다. 염주에 대해서는 특히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염주는 원래 발해의 郡인 龍河이며 그 안에는 4개의 縣인 海陽, 接海, 格川, 龍河가 있었으나 폐지되었다. 개주에 속하는 300戶는 그로부터 140리 정도 떨어져 있다”주 008
번역주 008)
참고로 원문은 다음과 같다. 鹽州本渤海龍河郡故縣四海陽, 接海, 格川, 龍河, 皆廢. 戶三百. 隷開州相去一百四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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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에 海陽, 接海군은 ‘태양(또는 북쪽)을 향하는 연해지역’, 그리고 ‘바다에 접한’ 등의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두 군은 동경에 속하는 군 중에서 유일하게 바닷가라는 뜻인 지명이다. 이는 곧 염주는 동경에서도 연해지역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孫進己, 1982 : 83). 중국의 史家들은 또한 동경(요대에는 開州라고 불리움)에서 염주까지는 140리(약 50~70㎞)정도 떨어져 있다고 했는데, 실제로 크라스키노 마을에서 琿春까지의 거리와 부합된다(東北歷史地理, 1989). 게다가 바로 크라스키노 성지가 있는 지역의 엑스뻬디찌이만은 남쪽으로 바다를 접하고 있어 ‘海陽’이라고 하는 지명과도 일치한다. 이와 같이 크라스키노 성지를 발해의 염주에 비정하는 것은 실질적인 근거가 있다.
『신당서』의 기록처럼 동경성이 일본으로 가는 길(일본도)였다면 크라스키노 성지는 곧 발해로 오는 일본사절이 뽀시에뜨만에 들어와서 맞게 되는 가장 큰 발해 행정중심지였을 것이며, 또한 반대로 일본으로 파견되는 발해사절단에게는 마지막 지점이었을 것이다. 8~10세기 사이에 일본으로 파견된 발해사절단은 35회, 발해로 파견된 일본사절단은 13회였으며, 그들은 대부분 동경을 거쳤다(朱國·魏國忠, 1984 : 259-269). 이는 곧 사절단들이 크라스키노 성지를 경유했음을 의미한다.
염주의 존속기간. 다음과 같은 사실에 주목해보자. 약 785~792년 사이에 발해의 행정수도는 동경으로 옮겼으며, 여기에서 794년까지 존속했다. 일본도에서 육상의 마지막 지점이었음이 분명한 염주 역시 당시 존속했었음이 틀림없다. 발해와 일본사이의 사절단 교환이 이미 727년에는 시작되었으며 대부분의 사절단은 동경에서 곧바로 동해를 거쳐서 상대국으로 갔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염주는 그보다도 이전에 이미 존속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한편 순수한 고고학 유물로만 본다면 다음과 같은 점이 주목된다.
- 성지의 자갈돌벽 근처에서 반달형의 무늬가 새겨진 開元通寶가 발견되었다. 이 동전은 唐代(7~10세기 초)에 속하는데, 대체로 8세기가 중심연대이다.
- 청자와 시유토기편 역시 당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 이 유적에서는 金代나 東夏國에 해당하는 어떠한 유물도 발견되지 않았다.
- 우물유적에서는 전형적인 거란의 토기가 출토되었다. Е.Г. 겔만에 따르면 이 토기는 태토의 성분이 발해의 것과는 아예 다르다고 한다. 아마도 이 토기는 926년에 발해가 거란에 의해 정복당할 때에 들어온 것 같다(볼딘 외, 2001 : 81).
- 크라스키노 성지에서 발견된 청동제 및 철제 요대장식과 버클들은 전형적인 발해시기의 것으로 발해 상경부 근처의 虹鱒魚場 고분군같은 다른 발해유적에서도 유사한 예를 흔히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일부 문양이 새겨진 요대장식 중에는 초기 요대에 속하는 거란의 무덤에서도 비슷한 예가 찾아진다. 하지만 12~13세기에 속하는 유물들은 발견되지 않는다.
- 크라스키노 성지 건축층 상층의 절터에서 발견된 막새기와는 연꽃잎의 개수나 사소한 문양의 유무를 제외하면 발해의 상경, 동경, 중경 등에서 발견된 막새기와와 완전히 일치한다.
- 기타 유물이나 유구 등도 발해의 중앙부에서 발견되는 것들과 유사하다.
- 1995년에 성지 내부에서 테스트 피트를 몇 군데에 넣어본 결과 문화층의 두께는 1.7~2.3m에 이름이 확인되었다. 이는 곧 이 유적이 장기간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유감스럽게도 지하수가 지속적으로 올라오는 바람에 두 번째 건축층보다 더 깊게 파는 것이 불가능하다. 현재로서는 내성과 사원유적 사이에 초심석 근처에서 유물이 발견된 것만이 확인되었다. 이 초심석들은 성벽의 기초보다 더 밑에서 확인되었다.
이 모든 사실들은 곧 크라스키노 성지가 8~10세기 초엽에 존재했으며, 발해가 거란에 멸망해서 발해주민들을 요하와 거란제국의 수도로 옮기는 과정에서 폐기되었다는 점을 설명한다.
크라스키노 성지에서 고구려의 문화층이 존재했는가는 꾸준히 제기되어온 문제이다. 실제로 성벽위에 토대를 쌓고 방어탑(치)을 만든 것은 고구려의 성지와 유사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고구려의 유적이 연해주와는 먼 길림성, 그것도 압록강, 휘발하, 송화강 등 서부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따라서 연해주지역에 고구려인이 있었을 가능성은 적다. 물론 『新唐書』에서는 東京을 柵城府라고 했으며, 책성이라는 지명은 고구려 때부터 쓰인 것이다. 그 때문에 길림성 문물지도에서는 두 개의 고구려유적이 고구려유적의 주요 분포지에서 한참 떨어진 연길시 근처에 표시되어 있다(中國文物地圖集吉林分冊, 1993 : 地圖 19). 아마도 이 유적들은 직접적으로 고구려의 것은 아니며 고구려에 복속했었던 옥저나 예맥의 것이었을 것이다.
현재까지 성지에 알려진 몇 개의 유구는 순차적으로 존속했던 것이 알려졌다.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는 성벽의 돌담, 사원의 초심석과 사원과 평행하게 서쪽으로 이어지는 돌담 등이 속한다. 사원지의 서쪽에서 발견된 기와가마는 아마도 사원의 상층 건축층이 지어지기 전까지 쓰였던 것 같다. 이 기와가마가 사용되었을 당시, 또는 그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그 근처에서 우물을 팠다. 그 다음에 사원의 건축부 상층이 형성되었다. 아마 그때에 사원 내에 종루와 남쪽 정원지가 축조된 것 같다.
다음 시기에는 기와벽 수혈이 만들어졌으며 마지막 단계에는 대형토기, 탈곡기 등과 온돌시설(깐)이 설치된 주거지가 축조되었다. 성지의 상부 건축층 위에 다른 후대의 유구가 들어선 흔적은 전혀 없기 때문에 상부 건축층은 성지가 폐기될 때까지 이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이러한 편년은 다분히 도식적인 것으로 몇몇 유구는 다른 유구들과의 상관관계가 규명되지 않아서 이 편년에 포함되지 않는다. 최근 2년간 발굴 XXXIV의 주거구역에 대한 발굴결과 주거지 중첩으로 볼 때 적어도 4시기로 나뉘어진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는 곧 크라스키노 성지가 장기간 지속되었으며 하나의 주거지가 세워진 곳에 수십년 또는 백여년 후에 똑같은 자리에 주거지를 다시 건축하는 등 주거구역의 전반적인 배치는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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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서는 여기에 인용되는 사료의 원전을 찾아서 직접 대조해서 수정하지 않고 러시아어 원문을 직역하겠다. 왜냐하면, 그를 통해 러시아 학계의 원 사료에 대한 인식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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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번역주 008)
    참고로 원문은 다음과 같다. 鹽州本渤海龍河郡故縣四海陽, 接海, 格川, 龍河, 皆廢. 戶三百. 隷開州相去一百四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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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의 역사적 정황, 층위, 상대편년 자료번호 : kr.d_0004_0030_002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