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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道의 출발지, 크라스키노성

 
 

2. 日本道의 출발지, 크라스키노성

 

이장에서는 발해의 대일 교통로 상에서의 크라스키노성의 위상에 대해 살펴보겠다. 발해의 주요 기간 도로인 新羅道를 비롯한 5道에 대해, 『新唐書』北狄列傳 渤海條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龍原의 동남쪽 연해는 日本道이고, 南海는 新羅道이다. 압록은 朝貢道이고, 長嶺은 營州道이며, 부여는 거란도이다.
 
이를 통해서 발해가 일찍이 중국, 거란, 일본, 그리고 신라 등 주변 제국으로 통하는 통로를 개설한 것을 알 수 있다. 동경 용원부는 현재 중국 길림성 훈춘현에 소재한 팔련성으로 비정되고 있는 곳이다.
여기서 먼저 발해 건국 이전 고구려의 對倭外交 루트에 대해 살펴보겠다. 고구려의 대왜 외교 개시 시기는 570년 遣使가 사실상 최초였다. 6세기는 고구려 측에서 보면, 신라에 의한 고구려 영역의 侵食과정이었다. 신라의 영역 확대 과정은 동해안 일대(505년) → 한강 하류(552년) → 가야제국(562년) → 함경남도 지방 濊族 거주지(568년) 등인데, 신라의 이런 영역 확대 과정은 가야제국을 제외하면 고구려와 직접적인 관계를 갖는 절실한 문제였다. 6세기 중엽 이후는 고구려의 최대 敵은 신라로, 반도에서 고구려의 영역은 거의 전역에 걸쳐 신라와 직접 국경을 접하여 군사적으로 대치하게 되었다. 요컨대 이러한 한반도의 상황을 고려하면, 고구려의 대왜 외교는 신라와의 군사적 대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추정된다. [주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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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成市, 1990, 「高句麗と日隋外交-いわゆる國書問題に關する一試論」, 『思想』795; 1998, 『古代東アジアの民族と國家』(岩波書店), 291~292쪽.


그렇다면 고구려는 대왜 외교를 6세기 후반부터 어느 곳에서 했을까? 유감스럽게도 여기에 대한 자료는 없다. 하지만 발해와 일본 간 항로를 통해 역추적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발해에서 일본으로의 항로에 대해서는 東海橫斷航路·韓半島東端航路·北回航路의 세 설이 있다. 동해 횡단 항로설은 沼田賴輔와 新妻利久를 필두로 하는 발해사 연구자가 주로 제기하였다. [주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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沼田賴輔, 1933, 『日滿の古代國交』(明治書院); 新妻利久, 1969, 『渤海國史及び日本との國交史の硏究』(東京電機大學出版局).

이 설에서는 발해에서 일본으로의 출항지는, 포시에트만과 경성의 두 군데로 동해를 횡단하여 能登·加賀·山陰을 목표로 한다고 한다. 出羽나 蝦夷(에미시) 지역에 도착한 것은, 항로를 잘못하여 漂着한 것이라 해석하였다.
한반도 동단 항로설은 森克己가 주장하였는데, 그는 遣唐使의 航路圖에 ‘渤海路’ 로서, 敦賀에서 山陰을 거쳐 한반도 동단을 북상하여 南京南海府에 이르고, 圖們江 하구 주변에 상륙하여 발해의 수도를 거쳐 장안에 이르는 경로를 주장하였다. [주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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森克己, 1955, 『遣唐使』(至文堂).

이 설의 배경에는 전기 견당사가 한반도 서해안에 연하여 북상하여 산동반도에 이르는 ‘北路’ 를 취하다가, 후기견당사가 규슈에서 동중국해를 횡단하여 강남에 이르는 ‘南路’ 로 변천하는 과정에 다수 조난자가 나왔고, 발해로의 항로도 비교적 안전한 한반도 동쪽을 항해하였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 설에는 발해선이 목표로 한 곳은 도읍에 가까운 敦賀이고, 出羽나 蝦夷 지역에 도착한 것은 漂着이라고 생각하였다.
북회 항로설 [주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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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內尾晋司, 1991, 「對渤海交渉と福良港」, 『客人の湊 福浦の歷史』; 新野直吉, 1992, 「古代日本と北の海みち」, 『藝林』41-1(藝林會); 古畑徹, 1994, 「渤海·日本間航路の諸問題』, 『古代文化』46-8; 小島芳孝, 1996, 「蝦夷とユ-ラシア大陸の交流」, 『古代蝦夷の世界と交流』(名著出版); 小島芳孝, 1997, 「日本海の島マと靺鞨·渤海の交流」, 『境界の日本史』(山川出版社); 小島芳孝, 2004, 「渤海と日本列島の交流經路」, 『歴史と地理』577(山川出版社).

은 도문강 하구 부근이나 연해주 지방 남부에서 북상하여 사할린 부근에서 동해를 횡단하여 사할린 혹은 홋카이도를 경유하여 혼슈에 도착하는 경로이다. 북회 항로설은 발해 사절이 出羽·蝦夷 지역을 목표로 항해한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漂着이라 해석하는 동해 횡단 항로설이나 한반도 동안 항로설과는 다르다. 발해 사절이 出羽나 蝦夷 지역을 목표로 한 배경으로, 古畑徹은 당시 항해 기술을 들었으나 [주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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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細散, 1994, 위의 논문.

小島芳孝는 7세기대 말갈과 에미시의 교역 활동을 고려하였다. [주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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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島芳孝, 1996, 앞의 논문; 小島芳孝, 1997, 앞의 논문.

이 설에서는 出羽·에미시 지역에는 코스를 북회하는 항로로 하고, 北陸이나 山陰으로 갈 때는 동해 횡단 항로를 사용했다고 보았다. 이외에도 발해 - 일본 간의 항로를 네 가지 경우로 나누어 살펴본 견해 [주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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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북부 횡단 항로는 일본과 발해 교섭의 초기에 주로 이용된 것으로 그다지 활발하게 이용되지 않았고, 동해 북부 사단 항로는 고구려 항로를 계승한 것으로 발해의 대일 사절단에 의해 거의 전 시기에 걸쳐 이용된 것으로 정치적인 루트였다. 동해 종단 항로는 일본에 도착하는 지역으로 보아 국제 교역의 성격이 강한 루트였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연해주 항로는 주로 말갈인들을 위주로 한 민간인들의 무역에 많이 이용되었다고 한다(尹明喆, 1999, 「渤海의 海洋活動과 동아시아의 秩序 再編」, 『高句麗硏究』6, 학연문화사).

도 있다.
이상의 세 가지 견해에서 필자는 북회 항로설 그 가운데서도 小島芳孝의 견해에 동의한다. 특히 이 견해는 6세기 후반 고구려의 대왜 교섭부터 발해 멸망 후까지의 한반도 동북 지방·러시아 연해주 지방과 일본과의 교류 양상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견해로 생각된다. 즉 발해 사절단 도착 지역의 분석을 통해 발해선이 목적지를 정하여 왕래하였다는 것과 加賀·能登에 가장 많이 도착한 것이 발해 건국 이전 고구려 사절단의 일본으로 가는 항로와 동일하다는 것 등이다. 나머지 두 설은 발해의 대일본 초기 교섭에 대해서 항해의 미숙이나 항로 설정의 오류 등으로 보았지만, 고구려 시기부터의 대왜 교섭을 고려하면 발해가 고구려의 대일 항로를 계승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그렇다면 6세기 후반 고구려 시기부터 발해 멸망기까지 일본 측 도착 지역이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본으로 가는 출발지는 고구려 시기부터 크라스키노성이라고 생각된다. 그 근거로 첫째, 당시 한반도의 정세를 들 수 있다. 고구려가 실질적인 대외 교섭을 시작한 570년 무렵 신라는 동해안가를 따라 북진하고 있었고, 황초령비(568년)와 마운령비(568년)는 그 결과물이었다. 앞서 살펴본 대로 고구려가 이러한 신라의 북진에 대응하기 위해 대왜 외교를 추진했다고 한다면, 한반도 동북 지방, 즉 함경도 지역인 북청·청진·함흥 등지에서 출발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신라가 바로 턱 밑까지 밀고 올라온 상황에서 국가의 전략적인 외교 사절단의 파견을 신라와의 국경 근처에서 했을 가능성은 낮기 때문이다.
둘째, 크라스키노성 북서쪽 절터에서 발굴된 목탄의 연대 측정 결과에 따르면, 그 상한 연대가 7세기 후반까지 올라간다. [주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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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문화재연구소 측정치에 따르면, 목탄 가운데 하나는 서기 680~970년으로 다른 하나는 680~890년으로 비정된다고 한다(문명대, 2004, 「크라스키노 사원지 서구역 및 2차발굴」,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 발해 사원지 발굴 보고서』, 고구려연구재단, 25쪽).

물론 고구려가 倭와 교섭한 시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충분한 가능성을 보여 주는 자료라고 생각된다.
셋째로 발해에서 일본으로 가는 日本道의 시작으로 여겨지는 東京은 고구려 시대의 책성이었다. 기존에는 고구려의 영역을 별다른 검토 없이 책성까지로만 표기했다. 하지만 일본 혼슈 서북부 지역과 홋카이도 남부 지역에서 나오는 많은 대륙계 유물 [주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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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청동 방울, 주석으로 만든 각종 장신구, 석실묘, 장례의 일종인 着火의식 등은 분명히 고구려계로 보인다. 이러한 유물들의 편년은 6세기부터 12세기까지로 비정된다(小島芳孝, 1997, 앞의 논문 참조). 일본 학계는 이러한 유물의 제작 장소를 대륙으로 보는 것은 동의하지만, 고구려나 발해 존속 시기가 아닌 경우에는 모두 말갈이나 여진의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別稿를 통해 발표할 예정이다.

들은 고구려 시기부터 북회 항로를 통해 교류가 이루어졌다는 유력한 증거가 아닐까 싶다.
이상을 정리하면 신라의 북진에 따른 한반도 정세의 긴장에 의한 고구려의 대일 교섭 추진 배경, 크라스키노성 내 절터 출토 목간의 연대, 기존에 고구려의 동쪽 변방으로 인식되던 책성이 발해대의 東京으로 일본으로 가는 길의 시발점이었다는 점 등을 통해 보았을 때, 고구려 후기부터 발해 전 시기에 걸쳐 크라스키노성이 대일 교섭의 중심지였음을 알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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