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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스키노발해성

성문

2) 성문

성문은 성 내외로 통하고 적의 침입을 막고 방어하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작용을 한다. 성문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성문 보호 시설을 설치하였는데 옹성, 적대 등은 대표적인 시설이다.방학봉, 2002, 『발해성곽연구』, 116쪽.
크라스키노성에는 門이 동, 서, 남의 3개 소에 존재한다. 이 중에서 1998년 이래 계속 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東門은 성벽 본체보다 뒤에 구축된 것이 확실하지만, 그 시기는 적어도 본체 성벽의 바닥면이 묻히기 이전의 일로 생각된다.クラスキノ土城發掘調査團, 2003, 「2002年度ロシア·クラスキノ土城發掘調査旣要報告』, 앞의 책, 24쪽.
성 본체의 성벽, 즉 처음의 石壁과 옹성 남벽과의 설치 부분을 파내려간 결과, 옹성 남벽의 가장 아래 부분의 돌이 처음 석벽의 土臺石 위에 있는 점이나, 이 두 개의 석벽의 돌의 재료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 밝혀졌다. 현재까지 얻은 자료에 의하면 옹성의 구축은 성 본체의 성벽 본체보다는 약간 늦은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田村晃一 外, 2002, 「2001年度ロシア·クラスキノ土城發掘調査槪要報告」, 앞의 책, 20쪽.
동문 남벽에서는 성벽 본체에 사용된 규조질 니암과는 다른 돌이 사용되고 있다. 석재만 아니라, 돌 쌓는 工法도 성벽 본체와는 다르다. 먼저 바닥 부분에는 약간 큰 돌을 걸쳐 놓고, 그 바로 위에는 크고 긴 돌을 가로 1열로 배치하여 가로로 갈라진 틈(가로줄눈, 橫目地)을 통과하고 있고, 그 위에 크고 작은 돌을 쌓아 올리고 있다. 그리고 바닥면에서 높이 1m 부근에서 다시 크고 긴 돌을 가로 1열로 배치하여 가로줄눈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동문 성벽을 쌓을 즈음에도 일정한 시공 단위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クラスキノ土城發掘調査團, 2003, 「2002年度ロシア·クラスキノ土城發掘調査槪要報告」, 앞의 책, 24쪽.
그런데 발해의 도성 중에서 길림성 돈화시에 있는 오동성에만 옹성의 흔적이 남아 있고, 크라스키노 성에서도 옹성이 설치되어 있다. 오동성이 발해 초기의 도성이고, 그 뒤를 이어 축조된 도성에서 옹성, 치 등이 없는 것을 발해 도성의 시기상 변화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면, 임상선, 2005, 「중국의 발해 도성 연구와 복원」, 『고구려연구재단 기획연구 05 - 중국의 한국고대문화연구 분석』; 고구려연구재단 및 임상선, 2005, 「발해의 都城體制 운영과 그 특징」, 『8-10세기 동아시아의 문물교류』(고려사학회 2005년 하반기 학술대회) 참조.이것은 크라스키노성의 축조 시기 이해에도 참고가 된다.
다시 말하면, 오동성과 마찬가지로 크라스키노성의 축조가 발해 초기로 소급될 것이며, 아울러 발해가 오동성 시기에 크라스키노 지역을 지배 하에 두었을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그렇다면 727년 발해가 일본에 사신을 처음 파견할 때도, 그 출발지가 크라스키노 지역이었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게 된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크라스키노성은 성벽이 먼저 축조되고 뒤이어 옹성, 치 등이 축조되었다. 이것은 처음 성을 축조할 당시에는 성벽만으로 충분하였지만, 그 후 외부 환경에 변화가 생겨 성벽과 성문에 추가적인 방어 시설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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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 자료번호 : kr.d_0003_0030_0010_002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