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넷

상세검색 공유하기 모바일 메뉴 검색 공유
닫기
리스트

크라스키노발해성

상세검색

닫기
제목
본문
보고서명
사료라이브러리 열기
  • 글씨크게
  • 글씨작게
  • 프린트
  • 텍스트
  • 오류신고

결론

 
 

 6. 결론

 

2004년도 크라스키노 성터 사원지 발굴은 10세기경 성터의 마지막 존재단계를 규정할 수 있게 하였다. 상부 2개층의 건축물 기단들이 이 시기와 상응한다.
3개의 커다란 토기단지들은 최고 상층과 관계가 있다. 이는 층위학적으로 근거가 있다. 전술한 항아리 중 하나가 기와벽실의 한쪽 벽쪽으로 파묻혔고 이로 인해 부분적으로 기와벽실의 벽을 파괴하였다.
전술한 바 있는 것처럼 그 시기에 상기 지역에는 절터의 생활사 구역이 위치해 있었다. 3개의 대용량 항아리들과 온돌이 갖추어진 주거지 외에도 이전에 절터 생활사 공간의 다른 지구에서 석재 절구와 땅 속에 묻혀진 4개의 커다란 항아리가 발견되었다. 이들은 식품의 장기간 보존을 위해 이용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한국의 시골마을에서 여전히 전승되고 있다. 한 가지 단서를 붙이자면 한국에서는 용량이 큰 저장용 항아리는 지표 층에 묻는다는 것이다.
주목해야만 할 사실은 이 모든 항아리들이 고의로 돌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뒤에 이어지는 건축물 층은 기와벽실과 관계가 있다. 이 유적은 정말 독특한 구조물이다. 극동지역에서 사상 처음으로 벽이 기와로 구축된 반지하형의 실건축물이 발견되었다. 얼마 전까지 한국에선 건축에 기와를 이용했었다. 한국의 민속박물관에는 생활사 건축물과 주거건물의 담장이 기와로 제작되어있다.
기와벽실의 외형을 고려해보고 이 실건축물의 성격과 용도에 관하여 생각해 볼 경우 이 구조물의 주변에 흙더미 제방이 있고 이 구조물이 사찰터에 있다는 사실은 잠정적이나마 이 구조물이 종교의식을 위한 용도로 이용되지 않았을까 추정하게 한다. 이 구조물이 불교탑들 아래 건설된 성소의 잔해일까 아니면 이 곳에 매장된 스님의 무덤일까. 후자가 더욱 설득력 있는 가정일 것 같다. 북동쪽 벽에 기와와 나란히 전체 열이 석재로 쌓여진 돌더미의 하부에 위치한 나무 깔판이 이러한 가정을 뒷받침해준다. 기와벽실의 크기와 규모 또한 고분의 구조에 부응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크라스키노 성터 인근 지역에서 발굴된 발해 고분의 경우 역시 기와벽실과 같은 방위 지향 구조를 갖고 있으며 내부의 여러 가지 특성들에 있어서 유사점을 보여주고 있다. 연해주 체르냐티노 고분에서 커다란 크기의 석관묘가 발굴되었으며 발해시기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들은 심하게 약탈되고 파괴되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우리들 발굴단이 보기엔 기와벽실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의견은 한국과 일본의 저명한 고고학자들인 이남석 박사와 고지마 요시다카 선생의 의견이다.
기와벽실내의 지층들과 관련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그들은 시간상으로 큰 차이가 없어 생활쓰레기의 폐기로 인해 형성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토기의 경우 동일한 기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크라스키노 성터의 2개의 각기 다른 후기 건축물 층을 특징을 구성하고 있다. 기와벽실에서 수집된 토기들은 단순히 거주지에서 유래된 생활 쓰레기가 아니라 전체 사찰터와 관계가 있다.
전체적으로 크라스키노 성터 사찰지에 대한 연구는 본 유적지의 존재와 관련한 후기 단계의 건축물 층의 흔적들, 흙 속에 묻혀버린 커다란 저장용 항아리들이 고의로 파괴된 사실, 이전에 알려진 적이 없던 기와벽실과 이전에 수집된 적이 없었던 일련의 유물들을 포함하는 흥미로운 자료들을 제공해 주었다. 기와벽실의 특징과 용도와 관련한 우리의 견해는 임시적이고 가설의 차원을 넘지 않는다.
주목해야만 할 사항은 이번 발굴에서 출토된 전체 유물들이 고구려 유적지에서 출토되는 유물들과 과하다 할 정도의 친연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화살촉과 토기(바닥에 큰 구멍들이 있는 토기들, 리본형 손잡이가 달린 토기들, 손잡이가 달린 뚜껑 등), 조임쇠들, 수레 바퀴 비녀못, 몇가지 기와, 못과 꺽쇠 등의 몇가지 양식에 근거한다. 석재를 이용해 성벽을 건설하는 고구려 건축술의 전통이 발해에서도 계속되었으며 물론 그 가운데 크라스키노 성터도 예외가 아니다. 분명 발해는 많은 고구려의 문화적 요소들을 계승한 후계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발굴지에서 출토된 풍부한 사실적 자료들은 절터 거주민들의 물질적, 정신적 삶에 관해 증언하고 있다.

 

태그 :

태그등록
이전페이지 리스트보기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