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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스키노발해성

유적조사의 현황

(도면 5, 사진 10-14)

3. 유적조사의 현황 (도면 5, 사진 10-14)

조사대상지역은 크라스키노 성지의 북단쪽에 위치한다. 성내의 지형은 비교적 평탄지를 이루지만 북단의 경우 표고가 약 3-5m 정도 높게 남았고, 동·서·남쪽에는 성문이 시설되었지만 북문은 없는데, 문지가 위치해야할 부분이 표고가 높게 자리하는 것이다. 이 높은 대지에는 러시아 연구소에서 조사한 사원지로 추정하는 건물지가 1동 자리하기도 한다.
금번의 조사대상지역은 이 사원지에서 서남으로 약 2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위치한다. 거의 평탄대지를 이루고 있지만 동에서 서쪽으로 미약하게 경사를 이루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지역은 일단 사원지와 관련된 유적이 존재할 것이란 추정은 충분하다. 그와 관련하여 러시아 연구소에서는 이 곳에서 기와편이 다수 출토되는 것, 소토 덩어리가 산견되는 것 등으로 미루어 기와를 굽던 가마가 존재할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였다. 때문에 이들 유물이 수습되는 범위를 고려하고, 가마의 규모를 고려하여 러시아 연구소에서는 10m×10m의 규모로 발굴 범위를 설정, 그리드의 설치와 함께 등고선 등의 측량작업을 마친 상태였다.
따라서 본 조사단은 이미 설정된 발굴범위를 대상으로 조사를 계획할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어떤 유구가 존재할 것인가, 규모는 어떠할까라는 의문을 전제, 추후 범위의 확대 혹은 축소할 것이란 계획 하에 주어진 범위에 따라 조사 작업을 진행한 것이다. 이에 따라 우선 그들이 와요지로 추정하고 1m 간격으로 그리드를 설정한 지점 한 가운데를 기준점을 삼으면서, 중앙에 각 50cm의 범위 즉, 1m 너비의 둑을 남기고 나머지 450cm의 구역을 피트로 설정하면서 10m의 범위 전체를 4분하여 각 방향을 피트로 구분하여 전면조사하기로 계획하였다. 그와 더불어 토층둑을 기준으로 검색 트랜치를 설치하였는데 바닥에 굵은 소토층이 형성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작은 석재들도 깔려 있어 단순히 기와를 굽던 요지와는 다른 유구가 있을 것이란 점, 그리고 유구의 범위는 보다 확대될 것이란 추 정도 하였다.
중앙의 십자둑을 중심으로 일단 조사구역을 구분하면서 각 10m의 피트를 남북으로 나누어 한국쪽이 남쪽 피트를 담당하고 북쪽은 러시아 측에서 담당하자는 제안을 받기도 하였다. 이는 하나의 유구를 러시아 연구소의 조사단과 우리 조사단이 각각 분담하자는 제안이었는데, 작업일정과 유구의 성격상 공동조사의 타당성이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발굴방법의 차이 등에 이견이 있으므로 불가능하였다. 결국 유적조사는 한국측이 담당하고, 자료를 공유하는 방식으로 타협을 이루었다. 이에 따라 피트의 명칭은 러시아 연구소에서 오래전에 조사하였던 사원지와 가깝게 있는 북단구역 서쪽의 범위를 1피트, 그리고 그 동쪽의 것을 2피트, 남쪽의 것을 3피트, 동단의 것을 4피트로 구분함과 더불어 트렌치 설치로 드러난 유구상황을 고려하여 조사범위도 북단의 경우는 약 5m 정도, 남단도 구역에 따라 5-10m 정도 확대하였다.
표토층의 제거 작업은 1·2피트 구역을 동시에 제거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였는데 표면층은 유기질이 부식된 검은 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아래에 근대에 경작층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층이 있는데 이 부분까지 제거하였다. 이 경작층의 아래에 있는 층위는 전체적으로 제 3층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황색모래에 점토가 약간 혼합되어 있으며 여기에 석재나 혹은 기와편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일단 유구 포함층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었다. 경작층은 20cm 내외의 두께로 있는데 몇 십년 전까지 주거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바, 무질서한 석재들이라던가 병조각, 그리고 부식되지 않은 가죽류가 출토되는 것으로 미루어 그러하다. 한편, 1피트의 경우 표면층과 경작층을 제거한 결과 제 3층으로 구분되는 곳에서 할석재의 판석 2매와 숫막새편, 그리고 완형 수키와 등이 노출되었는데, 석재는 지름 50cm 그리고 35cm내외 크기의 장방형이다. 더불어 이들 피트에 나타난 현황은 유구가 대체로 남쪽으로 치우쳐 있고, 보다 북쪽으로 가면서 유구는 물론 유물도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한편, 3·4피트의 표면토를 제거하는 작업도 함께 진행하였는데, 이 부분은 표면토와 약간의 경작토를 제거한 결과 다량의 부정형한 석재들이 노출된다. 특히 3피트는 전체 범위에 석재들이 조밀하게 밀집되어 있고, 그 남단으로 60cm 너비에 길이 250cm 정도의 석열도 노출되었다. 나아가 이들 석열의 외부 남쪽 구역으로 기와조각들이 무질서하게 와적된 형상이 드러나기도 한다. 우선 석열은 위에 덮여 있는 무질서한 석재로 규모나 성격을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일단 건물지의 흔적임은 알 수 있었다. 더불어 석열의 남쪽에 있는 와적층에서 완형의 수키와, 철정, 솥의 전부분이 함께 출토되었다.
표면토 및 그 아래의 경작층을 제거한 결과 드러난 유구는 중앙에 할석 혹은 강돌 형태의 부정형한 석재가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속에 규칙성이 보이는 석열이 드러난다. 그리고 이를 중심으로 1피트인 서북쪽으로는 잡석재가 흩어진 형상으로 있으면서 거기에 약간의 기와편이 포함된 것들, 2피트는 대체로 와적층을 이루고 있는 상태, 그리고 3피트는 부정형한 석재더미 및 와적된 것, 4피트는 중앙부 가까이에 부정형한 석재더미 및 그 외변에 와적으로 구분되는데, 전체적으로 중앙의 석재 및 와적을 중심으로 동단은 와적이, 서단은 석재의 밀도가 높은 형태로 노출되었다. 그 범위는 동서간 13m, 남북간 12m의 범위이며, 중앙의 석열은 동북-서남간으로 방향이 잡혀 있다.
이후의 조사는 와적층의 정리 및 석재더미의 정리 작업으로 이어졌다. 1피트의 경우 석재가 집중적으로 산란된 상태이나 여기에 기와편 혹은 연봉장식과 같은 유물도 포함되어 있었고, 2피트는 기와가 집중적으로 쌓여 있었는데 대체로 숫막새기와가 정연하게 남아 있기도 하였다. 한편, 4피트는 석재 무더기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석재의 상면에 와적층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으며, 3피트에서는 치미라던가 청동봉편과 같은 유물도 노출되었다. 한편, 4피트는 대체로 기와편이 쌓여 있었는데 외곽으로 바닥을 정리하면서 동쪽으로 바닥에서 소토편들이 부분적으로 드러난다.
[사진 10] 유물 출토광경 ①
[사진 11] 유물 출토광경 ②
조사는 표면 아래에서 드러난 유구와 유물을 전면 노출시키면서 중앙에 있는 석열을 노출시키기 위하여 일부 석재 및 와적층의 제거작업을 진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토층 둑도 아울러 제거하였는데 정리 결과 중앙에 정방형의 단칸 건물로 보이는 전각의 하단부가 그대로 노출되었다. 유구는 건물지의 하단부로 너비 약 1m 정도의 범위에 내외를 석축하고 그 안을 잡석으로 채운 형상으로 있고, 모서리에는 주초석으로 보이는 시설도 남아 있다. 더불어 건물은 서남변 중앙에 문지로 추정할 수 있는 공간도 드러났다.
이로써 조사된 유구는 정면, 측면 단칸의 정방형 건물지 임을 알 수 있었다. 드러난 유구가 건물의 하단이고, 벽체가 너비 1m 정도의 반담형태로 있다는 것, 입구가 마련된 건물이란 점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에 수습된 유물의 경우 연꽃 봉오리 장식이라든가 치미, 그리고 6종의 숫막새 기와로 미루어 건물자체가 매우 화려한 전각이란 것도 추정할 수 있었다.
한편, 이 전각 건물지의 동남쪽으로 조사범위를 확대하면서 바닥에서 드러난 불에 탄 흙덩어리라든가 불에 탄 층위를 확인하기 위하여 보다 동남쪽으로 구역을 확대하여 제토작업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이 범위에서 새로운 가마로 추정할 수 있는 구조가 드러났다. 가마의 흔적은 검은 재층이 와적층과 뒤섞인 형태로 노출되는데, 그 동남쪽 모서리 부분에 붉은 소토선이 드러나 확인된 것이다. 특히 검은 재층에는 식물의 줄기가 불에 탄 형태로 포함된 검은 덩어리가 다량으로 포함되어 있어 일단 이들이 가마의 벽체의 잔흔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나아가 건물지의 와적층과 가마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검은 재층이 서로 뒤섞여 있어 선·후 관계를 분명히 할 수 없었는데 건물지의 층위가 대체로 표면토 및 그 아래의 경작토 밑에 유구가 존재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가마가 있는 부분은 이들 토층보다 아래의 밝은 갈색 사질토가 자리하고 있어 일단 동시기 혹은 가마가 보다 이른 시기일 것이란 추정은 가능하다.
그러나 가마의 조사는 시간의 제약으로 전반적으로 진행할 수 없었다. 표면 제거와 함께 그 윤곽이 노출됨에도 전체 유구의 조사에 소요되는 제반 조건을 고려할 경우 전체 조사는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에 가마의 외변 구조의 조사와 더불어 소성실로 추정되는 중앙에 피트를 설치하여 개략 조사를 진행코자 하였는데, 소성실 중앙에 피트를 설치한 결과 내부에 소성중의 기와가 꽉 채워져 있어 이마저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조사는 그 개략 상황을 점검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
마지막으로 유물의 조사는 일단 유적에서의 노출상황 등의 점검은 한국 조사팀이 담당하였으나, 수습후의 1차 조사는 러시아 조사팀이 실시함으로써 시간의 제약으로 정확한 실측이나 복원, 그리고 정리에 적지 않은 문제가 노출되었다. 짧은 일정속에서 적지 않은 유물에 대한 실측 및 정리에 최선을 다하였으나 해외발굴 속성상 유물의 반출이 불가능한 형편에서, 수습된 치미라던가 혹은 연꽃봉오리 장식 등은 복원자체가 불가능하여 그 개략만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는 아쉬움도 있다.
[사진 12] 조사 후 전경
[사진 13] 건물지 전경
[사진 14] 기와요지 전경
[도면 5] 유구분포 현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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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조사의 현황 자료번호 : kr.d_0001_0020_003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