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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스키노발해성

유적조사의 배경

(도면 4, 사진 1-4)

1. 유적조사의 배경 (도면 4, 사진 1-4)

러시아 연해주 발해 유적의 조사는 1992년 러시아 극동지역 역사 고고민속학 연구소와의 교류를 기점으로, 1993년 크라스키노 고분, 코르사코프카 및 우스리스크 사원지의 발굴이 이루어짐으로써 그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이러한 조사는 물론 우리의 역사로서 발해사에 대한 관심의 고조와 올바른 인식을 위한 것임은 물론이다. 나아가 우리 고대사의 활동무대였던 만주대륙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서장에 불과하다는 것도 주지된 사실이다. 특히 우리의 고대사는 만주 대륙을 발판으로 태동하고 있기에 중국의 동북삼성지역은 물론, 러시아의 연해주, 나아가 멀리 내몽고 및 몽고 대륙까지도 우리의 관심에 두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오랜 역사가 만주대륙을 터전으로 영위되었음은 주지하는 사실임에도 역사의 굴절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가질 수 없음은 터전에 대한 접근의 어려움에 비롯된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역사자체의 왜곡도 적지 않다. 엄연히 우리의 역사임에도 발해가 중국의 역사로 치부되는가 하면, 고구려마저 중국사라는 망각적 인식이 그것이다. 우리 역사의 주체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우리 역사와 문화유산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함께 그 타당성의 담보가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1993년 발해 유적의 발굴은 그런 측면에서 대단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것이 건국 이후 첫 번째의 해외발굴이란 의의 외에 발해사의 구명을 위한 국제적 협조체제를 구축하는 등의 표면적 성과와 더불어 진정한 발해사의 이해를 위한 서막을 마련하였다는 점에 보다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발굴이지만 단위유적으로 사원지를 비롯한 고분의 확인은 일단 우리 역사의 범주에서 다루어져야 할 발해 유적을 우리 손으로 조사하였다는 커다란 의미 외에, 발해 유적 조사의 단초를 열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더불어 과거 발해 영역이었던 구역을 상당부분 점유하고 있는 중국에의 접근이 어려운 현실에서 한국과 러시아가 과거사의 올바른 규명을 위해 공동의 보조를 취하였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1993년 발해 유적의 발굴조사는 조사 성과가 적지 않지만 한계 또한 적지 않았다는 것도 충분히 인정될 수 있다. 발굴된 자료는 그것이 발해 유적·유물임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비교 검토될 자료가 부족하다는 커다란 문제가 대두된다. 특히 사원지의 조사 결과 드러난 유물은 발해의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것들로 채워져 있었지만, 크라스키노 고분의 조사 결과는 묘제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고, 출토유물도 빈약한 형편에서 그것이 정말 발해의 유적인가란 의문마저 제기될 정도였다.
1993년 조사된 크라스키노 발해 고분은 묘제의 기본 형식은 분구묘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과 분구는 확인되지 않고 매장부만 있는 것 2기가 중층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분구묘의 경우 지상에 분구를 올리고 그 정상에 매장부를 조성한 것인데, 매장부는 점토로 정리한 토광의 형태를 갖추었지만 매우 불규칙하다. 그러면서 분구의 외변에는 후대에 추가장 형태로 여러 기의 매장부가 남아 있지만 아무튼 발해묘제로는 처음 발견된 것이다. 그런데 매장부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매납 유물은 거의 찾을 수 없으며, 단지 매장행위과정에서 남겨진 삼채편이라던가 혹은 토기편만 있어 조성시기라던가 혹은 성격을 구체화하기에 어려움이 적지 않다. 물론 이러한 한계는 발해유적의 조사가 빈약한데 기인한 것이기에 보다 정치한 비교 검토 자료가 필요한 실정이었다.
한편, 크라스키노 지역은 역사 지리적 측면에서 보면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곳이다. 이 크라스키노 지역은 발해 16주 중의 하나인 염주로 비정되고 있는 곳이며, 특히 조사지역인 크라스키노 성지를 염주의 치소로 보고 있다. 더구나 크라스키노에서 서북으로 약 50 km 정도의 거리에 발해 도성이 있는 중국 훈춘이 자리하고 있어 도읍지와 가까운 거리이기도 하다.
1994년 크라스키노 성지의 발굴조사는 이처럼 1993년 발굴조사의 연속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면서 발해의 역사와 문화를 탐색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판단에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유적의 조사는 발굴 파트너인 러시아측의 여러 사정에 의해 조사지역이 선정된 까닭도 배제할 없지만, 우리로서는 1993년의 유적조사결과를 검증하고, 학술자료로 분명하게 담보할 수 있다는 전제 외에 크라스키노 지역이 발해의 유적지로서는 그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는 판단이 조사배경이었음을 밝혀둔다.
[도면 4] 크라스키노 성지와 발해고분들
[사진 1] 1993년 발굴조사한 발해의 무덤지역 전경
[사진 2] 1993년 발해무덤 조사 후 전경 ①
[사진 3] 1993년 발해무덤 조사 후 전경 ②
[사진 4] 1993년 발해무덤 조사시에 출토된 기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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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조사의 배경 자료번호 : kr.d_0001_0020_003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