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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한일관계 사료집

일본의 막부와 조선의 조정을 설득하여 양국의 좋은 결말을 도모하는 것에 동의하는 의견

一. 귀하의 서찰에서 ‘일본의 막부와 조선의 조정을 설득하여 양국이 좋은 결말을 맞게끔 하는 것은 쉬우나, 前 번주님과 가로들을 설득하여 적합하게 마무리 짓도록 하는 것은 만만치 않다’고 하신 부분을 읽고 더할 나위 없이 타당하다고 느꼈으며, 불현듯 잠시나마 슬피 울었습니다. 일이 끊임없을 테지만, 부득이한 이 상황은 유감스럽게도 만사가 위태하다고 생각합니다.
一. 前 번주님께서 이번에는 생각이 완고하신 듯 보이더라도, 에도 쪽에서 마고자에몬(孫左衛門)주 001
각주 001)
"마고자에몬(孫左衛門) : 쓰시마번 가로 히구치 마고자에몬(樋口孫左衛門, 1640~1702)으로, 본명은 나리마사(成昌). 성인이 되기 전부터 고고쇼(兒小姓)로서 소씨 가문을 모셨으며, 번주의 측근인 고요닌(御用人)을 거쳐 1680년에 가로가 되었다.(鈴木棠三 편, 「覺書」) 1687년 가시마가 번주 요시자네에게 직소하다 유배에 처해지는 계기가 되었던 「가시마 효스케 언상서(賀島兵介言上書)」의 제1조를 보면, “지금 쓰시마의 정사는 모두 마고자에몬에 맡기시어 시비・선악 모두 마고자에몬의 결정에 따르고 다른 가로들은 마고자에몬의 뜻을 살피는 형세이므로, (중략) 지금의 국정이 바람직하지 못하니, 마고자에몬의 탓입니다. 또한 주군께서도 마고자에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신 바가 있으니, 쓰시마의 정사가 나빠진 것도 필시 자세히는 알지 못하실 것입니다”라고, 마고자에몬을 총애하여 번의 정무를 일임하다시피 한 요시자네의 실정을 지적하고, 마고자에몬의 행실에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를 통해 마고자에몬이 번주 요시자네의 측근 중의 측근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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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나오에몬(直右衛門)주 002
각주 002)
"나오에몬(直右衛門) : 쓰시마번 가로 히라타 나오에몬(平田直右衛門, 1652~1722)으로, 본명은 사네카타(眞賢). 1681년 가로가 되어 1720년에 은거하였다.(鈴木棠三 편, 「覺書」) 겐로쿠다케시마잇켄 때 요시자네의 에도행에 동행하였으며, 요시자네의 지시하에 교섭의 경과를 로주 아베 마사타케에게 보고하고 자문에 응한 뒤, 막부가 기존 방침을 180도 선회해 향후 일본인의 죽도 도해를 금지한다는 취지와 이 사실을 조선에 전하라는 지시를 전달받았다. 울릉도쟁계 이후에도 주로 에도에 머무르면서 에도 저택의 관리나 막부를 상대로 한 교섭 등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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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이 무언가 아뢴다면 마음이 변하실지도 모릅니다. 그 밖에도 무언가 상황이 바뀌어 귀하의 의견이 성사되기 어렵다고 여겨지면 귀하의 충의와 성실함이야 하늘에 드러나는 것이니 꾀병을 부려서라도 물러나시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주 003
각주 003)
"이후 스야마는 에도행 도중 병을 칭해 교토에 체류하고 끝까지 요시자네를 수행하지 않았다. 그런데 에도에 도착한 요시자네가 히라타를 통해 로주(아베)에게 다케시마 잇켄에 대해 보고한 내용은 이전 다다에게 지시해 조선 측의 회답 서계 내용을 추궁한 ‘4개조의 항의문’의 내용과 크게 바뀐 바가 없었다. 즉 막부에 사건의 내막과 교섭 경과를 있는 그대로 보고할 것을 건의했던 스야마의 의견이 백퍼센트 관철되지는 않았던 것이다.(池內敏, 「竹島一件の再檢討」) 실제로 스야마가 병환이 심해져 에도에 동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벌어진 것인지, 아니면 이미 정세상 자신의 의견이 온전하게 관철되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꾀병을 칭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가시마의 충고와 같은 상황을 맞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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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사록(近思錄)』주 004
각주 004)
"『근사록(近思錄)』 : 송(宋)의 주희(朱熹)・여조겸(呂祖謙)이 1176년에 공동 편찬한 저서로 총 14권. 주돈이(周敦頤)・정호(程顥)・정이(程頤)・장재(張載) 등의 문장으로부터 일상에 긴요한 구문 622조를 발췌하여 초심자가 알기 쉽도록 14부문으로 분류한 책. 주자학에서는 『소학(小學)』과 함께 입문서로서 존중한다.(『廣辭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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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기를, “공명(孔明)은 반드시 일을 이루기를 원하여 유장(劉璋)을 취하였는데, 성인(聖人)이었다면 오히려 이루지 못했을 따름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이치도 지금 조금은 염두에 두셔서 근심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一. 귀하께서는 건강이 좋지 않은데 몹시 어려운 일을 맡게 되어 심력을 다하다가 지병이 재발하지는 않을지 염려됩니다. 공명도 건강을 잃어 병사하는 바람에 충공을 다하지 못했다 하니, 건강에 전념하시고 구구절절한 잡설 따위는 귀에 담지 마시기 바랍니다
一. 이신님의 전언을 통해 [前 번주님께서] 이번 사건의 결정에 관하여 두 사람에게 의지하고 계신 점을 제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물어볼 것도 없이 어떤 일이든 충의의 뜻에서 비롯되었다면 어떠한 부끄러운 일이라도 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두 사람주 005
각주 005)
"‘두 사람’이란 스야마의 서한에 나온 히라타 모자에몬과 다키 로쿠로에몬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 중에서 누가 연장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전부터 스야마와 의견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가시마가 다키의 언행을 간접적으로 겪어볼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가시마가 이야기하고 있는 인물평은 아마도 다키에 관한 것이라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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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성격에 관해서도 물으셨다고 이신님께 들었습니다. 연장자 쪽의 언행은 아직 확실히 듣지 못했기에 단정 짓기 어렵습니다. 다른 사람은 결단성이 있고 사리사욕을 부리지 않으나, 성실하지 못하며 경솔함이 있다고 짐작됩니다. 더욱이 아직은 나이가 어려 배운 바가 적고 지혜와 의리가 두텁지 않아 도리에 어긋난 행동도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확언을 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
 저는 근래 고겐지의 병을 크게 염려하여 신경을 쓰고 간호에 밤을 새우며 잠도 이루지 못해 이신님께서 보신 대로 심히 정신이 없어서 마음처럼 생각하는 바를 상세히 적을 수가 없었습니다. 문장이 겸손하지 못한 점 또한 많지만, 있는 그대로를 보내드리니 미루어 짐작하여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보내주신 서찰 13통은 남김없이 돌려드리니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건강하시고 경사스러운 귀가를 기다리겠습니다. 이만 줄이겠습니다.
  7월 13일
가시마 효스케
스야마 쇼에몬님께

  • 각주 001)
    "마고자에몬(孫左衛門) : 쓰시마번 가로 히구치 마고자에몬(樋口孫左衛門, 1640~1702)으로, 본명은 나리마사(成昌). 성인이 되기 전부터 고고쇼(兒小姓)로서 소씨 가문을 모셨으며, 번주의 측근인 고요닌(御用人)을 거쳐 1680년에 가로가 되었다.(鈴木棠三 편, 「覺書」) 1687년 가시마가 번주 요시자네에게 직소하다 유배에 처해지는 계기가 되었던 「가시마 효스케 언상서(賀島兵介言上書)」의 제1조를 보면, “지금 쓰시마의 정사는 모두 마고자에몬에 맡기시어 시비・선악 모두 마고자에몬의 결정에 따르고 다른 가로들은 마고자에몬의 뜻을 살피는 형세이므로, (중략) 지금의 국정이 바람직하지 못하니, 마고자에몬의 탓입니다. 또한 주군께서도 마고자에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신 바가 있으니, 쓰시마의 정사가 나빠진 것도 필시 자세히는 알지 못하실 것입니다”라고, 마고자에몬을 총애하여 번의 정무를 일임하다시피 한 요시자네의 실정을 지적하고, 마고자에몬의 행실에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를 통해 마고자에몬이 번주 요시자네의 측근 중의 측근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나오에몬(直右衛門) : 쓰시마번 가로 히라타 나오에몬(平田直右衛門, 1652~1722)으로, 본명은 사네카타(眞賢). 1681년 가로가 되어 1720년에 은거하였다.(鈴木棠三 편, 「覺書」) 겐로쿠다케시마잇켄 때 요시자네의 에도행에 동행하였으며, 요시자네의 지시하에 교섭의 경과를 로주 아베 마사타케에게 보고하고 자문에 응한 뒤, 막부가 기존 방침을 180도 선회해 향후 일본인의 죽도 도해를 금지한다는 취지와 이 사실을 조선에 전하라는 지시를 전달받았다. 울릉도쟁계 이후에도 주로 에도에 머무르면서 에도 저택의 관리나 막부를 상대로 한 교섭 등을 담당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3)
    "이후 스야마는 에도행 도중 병을 칭해 교토에 체류하고 끝까지 요시자네를 수행하지 않았다. 그런데 에도에 도착한 요시자네가 히라타를 통해 로주(아베)에게 다케시마 잇켄에 대해 보고한 내용은 이전 다다에게 지시해 조선 측의 회답 서계 내용을 추궁한 ‘4개조의 항의문’의 내용과 크게 바뀐 바가 없었다. 즉 막부에 사건의 내막과 교섭 경과를 있는 그대로 보고할 것을 건의했던 스야마의 의견이 백퍼센트 관철되지는 않았던 것이다.(池內敏, 「竹島一件の再檢討」) 실제로 스야마가 병환이 심해져 에도에 동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벌어진 것인지, 아니면 이미 정세상 자신의 의견이 온전하게 관철되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꾀병을 칭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가시마의 충고와 같은 상황을 맞게 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4)
    "『근사록(近思錄)』 : 송(宋)의 주희(朱熹)・여조겸(呂祖謙)이 1176년에 공동 편찬한 저서로 총 14권. 주돈이(周敦頤)・정호(程顥)・정이(程頤)・장재(張載) 등의 문장으로부터 일상에 긴요한 구문 622조를 발췌하여 초심자가 알기 쉽도록 14부문으로 분류한 책. 주자학에서는 『소학(小學)』과 함께 입문서로서 존중한다.(『廣辭苑』) 바로가기
  • 각주 005)
    "‘두 사람’이란 스야마의 서한에 나온 히라타 모자에몬과 다키 로쿠로에몬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 중에서 누가 연장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전부터 스야마와 의견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가시마가 다키의 언행을 간접적으로 겪어볼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가시마가 이야기하고 있는 인물평은 아마도 다키에 관한 것이라 추정된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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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막부와 조선의 조정을 설득하여 양국의 좋은 결말을 도모하는 것에 동의하는 의견 자료번호 : kn.k_0003_0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