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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스트여닫기 널길 전체 이미지 널길은 무덤의 묘도와 앞방 사이에 있는 작은 간이 통로이다. 널길과 묘도, 앞방 사이에는 육중한 돌문이 설치되어있다. 천정은 2단의 삼각 모줄임으로 축조되었으며, 덮개석 중앙의 연꽃표현은 보이지 않는다. 무덤의 널길 동서 양 벽에 의장대열이 그려져 있다. 이처럼 무덤입구의 널길에 의장대를 그려 넣은 것은 안악 3호분(安岳3號墳)에서만 보이는 특징이다.

    • 리스트여닫기 널길 동벽_의장대열 이미지 널길 동벽에 묘사된 의장대열(儀仗隊列)도이다. 창병이 일렬로 정면을 향해 사열하고 있는 모습으로 검은 방패와 붉은 술이 달린 창을 들고 서 있다. 창 윗부분에는 갈고리형의 날이 거꾸로 달려 있는데 이는 보병이었던 창병이 기마병을 말에서 끌어내리는데 사용하였다. 안타깝게도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방패와 창의 모습과는 달리 병사의 형태는 박락이 심해 거의 확인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의 역할은 무덤의 입구에서 묘주부부의 육신과 영혼이 안식하고 있는 거처를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다. 이 장면은 마치 현실 세계에서의 궁궐 문을 지키는 호위병이 그대로 연상되어 재미있다.

  • 리스트여닫기 앞방_전체 이미지 안악3호분(安岳3號墳)의 앞방은 일반가옥의 앞마당과 같은 역할을 하는 장소라고 말 할 수 있다. 먼저 입구 동편에는 화개, 깃발, 절(節), 도끼를 든 의장대 인물들이 출입문을 향해 들어오는 주인을 맞이하듯 예의를 갖추고 서있다. 서편에는 뜰 안에서 성대한 연회가 벌어지듯 악대들이 흥겹게 연주를 하고 있는 모습이 포착된다. 그리고 다른 한 편에서는 힘이 센 장사들이 서로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모습도 보여, 그야말로 성대한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장면을 상상하게 된다. 사랑방이라고 할 수 있는 서쪽 곁방에는 무덤의 주인공이 아랫사람들과 정사를 돌보고 있으며, 곁에서는 아름답게 치장한 부인이 이러한 광경을 흐뭇한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다. 문의 입구 양편에는 호위무사라 할 수 있는 장하독이 묘주 부부가 거주하고 있는 방을 지키고 서 있다. 서쪽 곁방에서 앞마당을 가로질러 동쪽 곁방으로 건너가면 주방, 방앗간, 육고, 차고, 그리고 마구간 등 한 집안의 살림 규모를 알 수 있는 장소들이 집합해 있다. 앞방의 형태는 긴 장방형이며 천장은 평행삼각고임으로, 중앙의 덮개석에는 붉은 연꽃이 아름답게 피어나 있다.

    • 리스트여닫기 앞방_동벽_전체 이미지 안악 3호분(安岳3號墳) 앞방의 동벽은 곁방으로 통하는 입구가 있으며 그 입구의 오른편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입구의 왼편은 회랑으로 연결되는 복도로 대규모의 출행도가 그려져 있다. 앞방 동벽의 벽화는 검은 먹 선에 의해 상하로 나누어진 2단의 화면 구성을 보여준다. 상단에는 두 명의 힘이 센 장사가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수박희 장면이, 하단에는 6명의 도끼를 든 부월수(斧鉞手)들이 동쪽 곁방 입구를 향해 일렬로 묘사되었다.

      • 리스트여닫기 앞방_동벽_상세_수박희 이미지 수박희(手搏戱)는 힘이 센 장사(壯士)나 역사(力士)가 손을 서로 부딪쳐서 승부를 내던 놀이로, 문헌 기록에 의하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모두 수박희를 즐겨 관람하였다. 수박의 기원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이러한 수박희가 성립되었는지 확실치 않으나, 안악 3호분(安岳3號墳)의 벽화 내용을 볼 때 고구려 시대에 이미 수박희가 유행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화면에는 삼각팬티형의 하의만 입은 두 사람의 힘센 장사가 맨 손으로 상대를 향해 힘을 겨루려는 순간이 해학적으로 표현되었다. 왼편의 장사가 먼저 앞발을 들어 공격의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오른 쪽의 또 다른 장사는 상체를 앞으로 당겨 오른 손으로 공격을 막으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수박희가 맨 손만으로 결투를 하는 권법(拳法)이라서 그런지 신체 부위 가운데 손이 유난히 크게 그려진 점이 특징이다. 긴장감이 느껴지는 싸움의 한 순간을 해학적으로 포착하여 표현한 고구려 화공의 익살스러움이 느껴지는 재미난 광경이다. 이러한 수박희 장면은 중국 집안에 위치한 각저총의 천장 벽화에도 등장해 고구려에서 수박희가 유행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앞방_동벽_상세_부월수 이미지

    • 리스트여닫기 앞방_서벽_전체 이미지 안악3호분(安岳3號墳) 앞방의 서벽도 동벽과 마찬가지로 중앙에 곁방으로 통하는 입구가 설치되어있다. 입구의 양편에는 각각 문지기 한 명이 입구를 향해 서있는 자세로 무덤 주인공 부부가 거처하고 있는 공간의 호위하고 있다. 이들의 머리 주변에는 묵서명이 보이는데, 입구 오른쪽 인물의 관모 옆에는 ‘장하독(帳下督)’이라는 관직명이 붉은 색 묵서(墨書)로 적혀 있으며, 입구 왼쪽의 인물 머리 위에는 ‘동수(冬壽)’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검은 색 글자의 긴 묵서명(墨書銘)이 보인다. 동수는 고구려 국왕인 고국원왕(故國原王) 이외에 안악 3호분(安岳3號墳)의 또 다른 피장자로 주장되는 인물이다.

      • 리스트여닫기 앞방_서벽(우)_장하독 이미지 서쪽 곁방 입구 오른편에 그려진 문지기 그림이다. 이 문지기 머리 위쪽에는 7행 67자로 이루어진 검은 색의 묵서명(墨書銘)이 보인다. 그 뜻을 풀이해 보면 영화 13년(357년) 여러 관직을 지낸 동수라는 자(者)가 69세의 나이로 죽었다는 내용이다. 동수는 중국 전연(前燕 : 중국 5호 16국 시대에 존재했던 왕조 가운데 하나)의 장수로 고국원왕(故國原王)대에 고구려의 낙랑(樂浪)지역으로 망명해온 귀화인이다. 이 명문의 내용으로 인해 안악3호분(安岳3號墳)의 피장자는 동수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북한 측에서는 주인공이 백라관을 쓰고 있고, 주인공이 앉아 있는 장막 옆에 높은 신분의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3단의 절이 세워져 있는 점 그리고 회랑 동벽의 출행장면에 등장하는 ‘성상번(聖上幡)’이라는 깃발을 근거로 이 무덤이 동수가 아닌 고구려왕의 능이라고 주장한다. 인물의 머리에는 무관용 책 즉 모자 뒤의 운두가 삼각형으로 뾰족하게 솟아 오른 검은 색의 책이 씌어져 있으며 검정 저고리에 흰 바지를 입고 있는 모습이다. 바지의 아랫단은 활동에 편리하도록 통이 좁게 디자인 되었다. 배꼽 위로 가지런히 포개어 겹친 두 손 아래에는 저고리 자락을 동여맨 허리띠가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회화적 표현을 살펴보면 굵은 적색 선으로 옷의 주름을 표현하고 있다. 눈썹은 길쭉한 반달형으로 굵게 처리되었으며, 가늘고 긴 눈에 팔자형의 날렵하게 뻗어나간 콧수염의 형태 등에서 안악 3호분(安岳3號墳)의 다른 벽화 인물들에게서도 보이는 공통적인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 리스트여닫기 앞방_서벽(좌)_장하독 이미지 서쪽 곁방 입구 왼편에 그려진 문지기 그림이다. 이 문지기 머리 위쪽에서 ‘장하독’이라는 붉은 묵서명(墨書銘)의 글자가 발견되어 이 인물이 단순한 문지기가 아닌 장하독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았던 호위무관임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시대에 장하독은 무관으로 왕이나 지위가 높은 장수의 군사지휘관 역할을 담당하였다. 인물의 머리에는 무관용 책 즉 모자 뒤의 운두가 삼각형으로 뾰족하게 솟아 오른 검은 색의 책이 씌어져 있으며 검정 저고리에 흰 바지를 입고 있는 모습이다. 배꼽 위로 가지런히 포개어 겹친 두 손 아래에는 저고리 자락을 동여맨 허리띠가 보인다. 허리띠에는 하트 모양의 금속장식물이 주렁주렁 매달려있는데, 이를 보더라도 이 사람이 단순한 문지기를 넘어서 신분이 높은 사람임을 직감할 수 있다. 회화적 표현을 살펴보면 굵은 적색 선으로 옷의 주름을 표현하고 있다. 눈썹은 굵은 반달형으로 검게 처리되었으며, 가늘고 긴 눈에 팔자형으로 날렵하게 뻗어나간 콧수염의 형태 등에서 안악 3호분(安岳3號墳)의 다른 벽화 인물들에게서도 보이는 공통적인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 리스트여닫기 앞방_남벽(입구동쪽)_전체 이미지 앞방의 남벽은 널길을 지나 무덤의 입구가 시작되는 곳으로 중앙에 큰 문이 설치되었다. 무덤 입구 좌우에는 각각 인물들을 그린 벽화가 장식되었다. 무덤 입구의 동쪽 벽에는 문관과 무관으로 구성된 의장대열(儀仗隊列)과 부월수(斧鉞手)가 묘사되었다. 인물들은 상하 2단으로 배치되었으며, 모두들 입구를 향하고 있는 모습이다.

      • 리스트여닫기 앞방_남벽(입구동쪽)_의장대열 이미지 앞방 남벽 무덤 입구의 동쪽 벽 상단에 그려진, 공손하면서도 절도 있는 모습의 의장대열이다. 모두 7명의 문무관들로 구성된 이 의장대열은 무덤의 입구를 향하여 서있는 자세로, 입구를 지나 무덤 안으로 들어오는 묘주를 제일 먼저 맞이하는 사람들이다. 이들 가운데 앞에 서있는 긴 두루마기를 착용한 4명의 인물이 문관이며, 그 뒤편에 나란히 서있는 짧은 저고리를 착용한 3명의 인물은 무관이다. 이들의 신분은 의복을 통해서도 알아 볼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이 쓰고 있는 관모와 손에 들고 있는 지물에서도 차이를 드러낸다.

      • 리스트여닫기 앞방_남벽(입구동쪽)_부월수 이미지 모두 네 명의 부월수(斧鉞手)가 양손으로 도끼를 세워들고 입구를 향해 일렬로 서있는 모습이다. 이들은 모두 머리에는 무관(武官)용 책(幘 : 문관이나 무관의 의례용 모자로, 뒷부분의 운두가 두 갈래로 갈라져 앞으로 구부러진 형태와 운두가 삼각형으로 뾰족하게 솟은 형태 두 가지가 있음. 전자는 문관(文官)용이며 후자는 무관용임)을 쓰고,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붉은 색 계통의 저고리에 흰색의 통이 좁은 바지인 궁고(窮袴)를 착용하고 있다. 저고리 가운데 닳아 헤지기 쉬운 목둘레와 소매, 아랫단에는 색깔을 달리하는 천을 덧대어 실용성과 장식성을 모두 살리고 있다. 이처럼 덧댄 천을 ‘선(襈)’이라고 부른다. 궁고는 대개 활동성이 뛰어나 고려시대의 무관이나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입던 바지이다. 원래 도끼는 고대로부터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데 의장용 기물로 많이 사용되었다. 이는 왕을 상징하는 한자의 王자가 바로 도끼를 상징하는 상형문자(象形文字)에서 유래하였다 사실에서도 잘 확인된다. 물론 도끼는 전투용 무기로도 지속적으로 사용되었으며 고구려 시대에도 전투용 무기로서의 역할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도끼가 실제 병기(兵器) 중 하나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삼국사기(三國史記)〉 눌최전에서도 확인된다. 신라 장군 눌최가 백제군과의 전쟁에서 도끼에 맞아 죽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도끼는 당시 고구려 뿐 아니라 삼국의 다른 나라에서도 무기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안악 3호분(安岳3號墳) 앞방 남벽에 그려진 부월수도 앞방 동벽에 그려진 부월수와 마찬가지로 의장대열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도끼를 든 부월수들이 묘주가 거주하는 공간 여기저기서 묘주를 호위하고 있다는 사실은 바로 묘주의 높은 권위를 상징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리스트여닫기 앞방_남벽(입구서쪽)_전체 이미지 앞방의 남벽은 널길을 지나 무덤의 입구가 시작되는 곳으로 중앙에 큰 문이 설치되었다. 무덤 입구 좌우에는 각각 인물들을 그린 벽화가 장식되었다. 무덤 입구의 서쪽 벽에는 뿔피리를 부는 사람과 북을 치는 악대들이 묘사되었다. 인물들은 상하 2단으로 배치되었으며, 모두들 입구를 향하고 있는 모습이다.

      • 리스트여닫기 앞방_남벽(입구서쪽)_뿔피리 부는 사람 이미지 앞방 남벽 입구 서쪽 벽의 상단에 그려진 뿔피리를 부는 사람이다. 인물은 두 손으로 활처럼 휘어진 뿔피리를 잡고 힘껏 입김을 불어넣어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상태이다. 의관을 살펴보면 머리에는 건(巾 : 고대 모자의 한 종류로, 천으로 머리 전체를 감싸고 뒤에서 묶었음)을 둘러쓰고, 몸에는 목둘레와 소매, 아랫단에 검은 색의 선(襈)이 둘러진 저고리와 발목으로 내려가면서 바지통이 좁아지는 궁고를 착용하고 있다. 인물의 발아래에는 전체 벽면을 2단으로 나누고 있는 검은 색 가로 먹선이 보인다. 마치 자를 대고 그은 듯 매우 반듯한 모습이다. 이 인물의 왼편 상단에도 벽화의 흔적이 발견된다. 가늘고 긴 관이 오른 편의 뿔피리와 대칭적으로 휘어져있는 모습이 또 다른 뿔피리가 아닌가 여겨진다. 다른 부분의 벽화가 모두 박락되었는지 현재는 흔적도 없이 훼손된 상태여서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두 사람의 연주자가 서로 마주 보면서 뿔피리를 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리스트여닫기 앞방_남벽(입구서쪽)_악대 이미지 앞방 남벽 입구 서쪽 벽의 하단에 그려진 악대이다. 모두 4명의 인물이 등장하고 있는데 소매가 넓게 제작된 두루마기를 입고 있다. 특히 두루마기가 화려하게 치장되어 여성으로 오인할 수도 있겠으나, 머리에 관모를 쓰고 있는 남성 악대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악대들은 대개 여성이 아닌 남성들로 구성되었다. 아마도 이 당시의 악기들이 북이나 뿔피리 등과 같이 힘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고, 악대들의 주요 역할이 병사들의 행렬을 인도하는 것이어서 더욱 그러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인물들의 자세는 무릎을 땅에 대고 반 쯤 서있는 자세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인물의 얼굴 등 상체의 박락이 심각해 각자 어떤 악기를 연주하는지는 파악할 수 없다. 다행히 맨 왼쪽 앞에 벽에 걸려있는 듯 한 북이 보인다. 만약 이 북마저도 훼손이 되었다면 이 그림이 악대를 표현한 것인지 도무지 그 정체를 알아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 리스트여닫기 앞방_북쪽_전체 이미지 안악3호분(安岳3號墳) 앞방의 북면은 널방의 남면과 경계가 지점으로, 4개의 독립된 돌기둥으로 이루어진 점이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널방과 앞방의 경계에는 벽체와 입구가 설치되어 공간을 가른다. 4개의 기둥 가운데 왼쪽에 있는 3개의 기둥은 팔각형의 잘 다듬어진 석재로 기둥의 상단에는 사각형의 주두[柱頭 : 원주나 각주, 벽기둥 상단에 얹혀 있는 건축 부재(部材)로, 처마도리나 위의 아치를 지탱하는 기능을 함]가 얹혀 있고 그 위로는 천정의 들보를 받치고 있다. 주두의 정면에는 귀면문(鬼面紋)이 그려져 있으며 측면에는 연꽃들이 묘사되었다. 4개의 기둥 가운데 맨 오른 쪽에 위치한 마지막 하나는 사각형의 기둥으로, 주두 위에 천정을 받들고 있는 두공이 올려 져 있다. 역시 정면에는 귀면문이 측면에는 연화문이 장식되었다. 이러한 건축형태와 벽화내용은 중국 산동성(山東省)의 한대(漢代) 기남(沂南) 화상석묘[畵像石墓 : 음각이나 양각으로 도상이 조각된 석재를 부재로 하여 축조한 무덤을 가리킴. 한나라 때 중국에서 매우 유행하였던 벽화무덤 양식]에서도 발견되어 양 지역 간의 영향관계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 리스트여닫기 동쪽곁방 이미지 안악 3호분(安岳3號墳)에서 주인공 생전의 거주 공간을 가장 잘 재현한 곳은 바로 동쪽 곁방이라고 할 수 있다. 동쪽 곁방에는 고구려의 주거문화를 짐작할 수 있는 다양한 장소들 예를 들면 주방, 육고, 차고, 방앗간, 우물, 외양간 그리고 마구간 등 고구려 저택의 내부 살림을 확인할 수 있는 소재들이 다채롭게 등장하고 있다. 동쪽 곁방은 남북 방향이 긴 장방형 모양으로 서쪽 곁방보다 약간 작은 규모이다. 우선 입구를 들어서면 정면에 있는 동벽의 좌로부터 세 명의 여인들이 분주히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 주방, 막 사냥에서 잡아온 들짐승들이 통째로 걸려있는 육고 그리고 묘주부부 행차 시 사용할 수레를 보관한 차고가 나란히 펼쳐진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동물들의 모습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동쪽 곁방의 북쪽에는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하여 두레박의 물을 길어 올리는 우물이 묘사되어 있으며 왼편의 서북 벽에도 역시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하여 만든 디딜방아간의 장면이 등장한다. 북벽과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는 남벽에는 여물을 먹고 있는 외양간이 묘사되었으며, 그 옆의 서남 벽에는 세 마리의 말이 말구유 앞에 서서 나란히 먹이를 먹고 있는 모습이 표현되었다. 이들 건물들은 모두 기와로 지어졌다.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시대에는 관청이나 왕궁, 사원 등 중요한 건물에만 기와를 사용하고 일반인들은 모두 초가집을 지어 살았다고 한다. 따라서 동쪽 곁방에 묘사된 기와집만 보더라도 묘주(墓主)의 신분이 높은 귀족계층에 속해있었음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동쪽 곁방에 그려진 각각의 장면들에 보이는 건축이나 인물, 동물들의 모습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마치 주인공 부부가 생전에 살던 집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이처럼 묘실 내부를 현실의 주거 공간처럼 풍요로우면서도 정성스럽게 묘사한 것은 바로 생전의 영화로웠던 삶이 내세에서도 이어지기를 바라는 고구려인들의 ‘계세적(繼世的) 내세관’을 반영한 것이다. 특히 이들 주거 장면들은 4세기 중엽 고구려인들의 생활상을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각자료로 평가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가치가 높다.

    • 리스트여닫기 동쪽곁방_동쪽_전체 이미지 동쪽 곁방의 입구를 들어서면 가장 정면에 보이는 것이 동벽이다. 동벽은 다른 벽면들에 비해 세배 가까이 길기 때문에 세 개의 소재를 한 화면에 표현하고 있다. 벽면의 가장 왼쪽에서부터 오른 쪽 방향으로 주방, 육고, 차고가 차례로 묘사되었다. 한 눈에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규모의 살림살이임을 알 수 있다. 부엌과 육고, 차고는 모두 기와로 지어져있다. 재래식 부엌에서는 여인들이 분주히 음식을 장만하고 있으며 부엌 앞마당에는 두 마리의 개가 어슬렁거리며 노닐고 있는 모습이 과거 속 어느 봄날 오후의 평화로운 광경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주인공 생전의 호화로웠던 삶을 짐작할 수 있는 좋은 벽화자료이다.

      • 리스트여닫기 동쪽곁방_동쪽_주방 이미지 동쪽 곁방의 동벽 왼편에 그려진 부엌의 벽화이다. 부엌에는 하녀로 보이는 세 명의 여인들이 각자 맡은 임무를 처리하느라 분주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시루 앞에서 정성스레 요리를 하고 있는 여인이다. 여인은 왼손의 주걱으로 밥이 잘 지어졌는지를 살피고 있으며 오른 손의 그릇에 퍼 담을 준비를 하는 듯하다. 시루의 크기로 보아 대식구가 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시루 옆 부뚜막에는 유리 단지로 보이는 투명한 그릇이 놓여 있다. 붉게 타오르고 있는 아궁이 앞에는 몸집이 작아 나이가 어려보이는 또 다른 하녀가 정성스럽게 불씨를 돌보고 있고, 그 옆에는 한 시녀가 소반 위에 포개 쌓인 칠기그릇들을 정리하고 있다. 지붕 끝에는 검은 새가 한 마리가 올라 앉아 있으며 아궁이 앞 부엌 앞에는 검은 개 두 마리가 한가로이 노닐고 있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풍요로운 귀족의 부엌 안살림을 엿 볼 수 있는 귀중한 시각자료이다.

      • 리스트여닫기 동쪽곁방_동쪽_육고 이미지 동쪽 곁방의 동벽 중앙에 그려진 육고(肉庫)이다. 육고는 고기를 저장하는 창고로 귀족계층의 집에서만 볼 수 있는 부속건물이다. 창고 안에는 사냥에서 잡아온 노루, 돼지 등의 산짐승들이 철제 갈고리에 통째로 매달려 있다. 부잣집의 풍족한 살림살이를 엿볼 수 있는 광경이다. 건물은 기와를 올린 구조에 통풍이 잘되도록 사방이 트여 있다. 재미있는 점은 고기 창고로 들어가기 위해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창고는 곡식이나 고기를 저장하는 곳으로 습기가 적은 쾌적한 환경이 최적의 조건이기 때문에, 이를 고려하여 지표면 보다 높게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창고 하나를 짓는 데에도 건물의 목적과 기능을 생각하며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피하도록 설계한 고대인의 지혜가 엿보이는 장면이다. 지붕 중앙에는 새 한 마리가 정면을 향해 앉아 있는 것이 포착된다.

      • 리스트여닫기 동쪽곁방_동쪽_차고 이미지 동쪽 곁방의 동벽 오른 편에 그려진 차고(車庫)이다. 차고는 수레를 보관하던 장소로 지금으로 치면 자동차를 세워두는 주차장과 같은 부속건물이다. 차고는 기와로 지어졌으며 모두 세대의 수레가 보관되어 있다. 한대는 묘주가, 다른 한대는 묘주 부인이, 그리고 나머지 붉은 색으로 치장된 가마형태의 수레는 다른 중요한 인물이 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을 통해 묘주부부 생전의 부의 규모를 능히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차고 바로 옆벽에는 수레를 끄는데 사용된 소들이 여물을 먹는 외양간의 모습이 등장한다. 차고 지붕의 용마루 양쪽 끝에는 마치 치미[鴟尾 : 고대의 목조건축에서 용마루의 양 끝에 높게 부착하던 장식기와로, 그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길상(吉祥)과 벽사(辟邪)의 상징으로서 의장(意匠)된, 상상의 새인 봉황에서 비롯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임]를 연상시키는 듯한 새 두 마리가 묘사되었다.

    • 리스트여닫기 동쪽곁방_서쪽_전체 이미지 동쪽 곁방의 서쪽은 앞방과 통하는 입구가 설치된 곳으로, 입구 좌우 벽에 벽화가 묘사되었다. 입구 북벽은 방앗간을 묘사한 장면으로 키질을 하고 곡식을 빻는 두 명의 여인이 등장한다. 입구 남벽은 마구간을 묘사한 장면으로 나란히 모여서 여물을 먹고 있는 세 마리의 말들이 보인다.

      • 리스트여닫기 동쪽곁방_서쪽_입구남쪽 이미지 동쪽 곁방의 서벽 입구 남쪽에 그려진 마구간 그림이다. 화면에는 세 마리의 말들이 나란히 서서 말구유에 있는 여물을 먹고 있는 순간이 포착되었다. 회화적 기법을 살펴보면, 우선 말구유와 말을 사선으로 처리하여 원근감을 암시하고자 하였다. 마구간 아래에는 철책을 설치하여 말들이 뛰어놀 수 있도록 방목장을 따로 마련한 것이 보인다. 이러한 말들은 귀족 남자들의 행차 혹은 사냥과 같은 일상생활에서나 전쟁과 같은 중요한 국가적 대사를 치를 때 요긴하게 사용되는 매우 중요한 동물이었다. 고대의 말은 이처럼 이동수단이나 전투마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게다가 북방기마민족의 후예인 고구려인들에게 말은 더욱 소중한 동물이었다. 말을 잘못 다루어 죽게 한 사람은 천민으로 전락되거나 중형에 처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 애지중지가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이 간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말들은 중앙아시아의 ‘한혈마(汗血馬)’와는 달리 몸집이 작은 편이었다. 그 크기가 얼마나 작았는지 과일나무 밑을 지날 수 있다 하여 ‘과하마(果下馬)’라고도 불렀다 한다. 또한 『삼국지(三國志)』에는 ‘말들의 키가 작아 산을 잘 오른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벽화의 말 그림과 문헌의 내용이 일치함을 엿 볼 수 있다.

      • 동쪽곁방_서쪽_입구북쪽(방앗간) 이미지

    • 리스트여닫기 동쪽곁방_남쪽_전체 이미지 동쪽 곁방의 남벽에 그려진 벽화이다. 남벽에는 외양간 그림만 묘사되었다. 당시 소들은 농사를 짓는데 동원되기 보다는 동벽의 차고(車庫)에 보관된 수레를 이끄는데 이용되었다. 한 마디로 수레의 동력 역할을 하는 것은 마로 이 소들이었던 것이다. 고구려 벽화에 등장하는 행렬도를 살펴보면 소들이 주로 수레를 이끄는데 동원되었는데, 아마도 말은 사냥마나 전투마로서의 역할이 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에 일상적인 수레는 소가 이끈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 리스트여닫기 동쪽곁방_북쪽_전체 이미지 안악 3호분의 동쪽 곁방 북쪽에 그려진 벽화이다. 이 장면은 우물가에서 물을 깃는 두 여인의 모습을 포착하여 화면에 담은 것이다. 우물 주변에는 다양한 종류의 물동이와 구유가 널려 있다. 화면의 왼 편에 묘사된 설치물을 보면, 당시의 물 깃는 방식은 두레박으로 퍼 올리는 것이 아니라 지렛대 원리를 이용하여 쉽게 물을 길어 올렸음을 알 수 있다. 용두레 우물의 원류를 찾아 볼 수 있는 귀중한 벽화자료이다.

  • 리스트여닫기 서쪽곁방 이미지 안악 3호분의 서쪽 곁방은 남북으로 긴 장방형으로, 동쪽 곁방보다 규모가 좀 크다. 이곳에서는 화려하게 그려진 묘주(墓主) 부부의 초상화가 발견되어 출행도가 그려진 회랑 동벽과 함께 안악 3호분의 무덤방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는 곳이다. 남자 묘주는 서쪽 곁방의 정벽인 서벽에 그려졌으며, 부인의 초상은 남벽에 단독으로 그려졌다. 북벽에서는 벽화가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동벽의 입구 양쪽에는 모두 문지기가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입구 북측에만 문지기의 형상이 남아있을 뿐이다. 서벽에 그려진 무덤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고국원왕(故國原王)으로 보는 입장과 동수로 보는 입장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심도 있는 논의를 해야 할 것이다. 서측실의 벽면 위 들보에는 식물의 넝쿨처럼 보이는 괴운문(怪雲紋 : 괴상한 구름형태의 무늬) 문양대가 돌려져 있으며, 삼각 모줄임 구조의 천정 중앙에는 붉은 연꽃이 화려하게 피어있다.

    • 서쪽곁방_동쪽_전체(문지기) 이미지

    • 리스트여닫기 서쪽곁방_서쪽_전체 이미지 무덤 주인공의 초상화는 서쪽 곁방의 정벽(正璧 : 입구에서 정면으로 마주 보는 벽)인 서벽에 그려졌다. 연꽃이 화려하게 장엄된 비단 장막아래에 평상(平床)을 깔고 앉아 있는 모습으로, 좌우에 관리들을 거느리고 정사(政事)를 보고 있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주인공과 좌우의 관리들의 크기가 서로 다르게 묘사되었다는 점인데, 이것은 인물을 묘사할 때 인물의 중요도에 따라 크기를 달리한 고대인의 인물화법이 적용된 것이다. 이러한 표현법을 ‘위계적 인물표현’ 또는 ‘계급적 스케일’이라고 부른다. 중앙의 주인공에게서 좌우로 멀리 떨어질수록 인물이 작게 그려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왼편의 시녀가 가장 작게 그려져 묘주 초상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가장 비중이 적은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고대 여성의 낮은 사회적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재미있는 장면이다.

    • 리스트여닫기 서쪽곁방_남쪽_전체 이미지 안악 3호분 서쪽 곁방의 남쪽 벽에 그려진 벽화의 전체화면이다. 벽면 중앙에는 묘주 부인으로 보이는 귀부인이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화려하게 치장된 장막아래에 묘주를 향하여 비스듬히 앉아 있다. 남자 주인공과는 달리 병풍을 치지 않고 있으며, 평상이 묘사된 벽화의 하단까지 잘 보존되어 있어 당시에 사용되었던 평상의 완전한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귀부인의 모습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좌우의 시녀들은 넓은 옷자락 안으로 양손을 마주 잡고 있거나 부채를 들고 있는 모습, 그리고 향로를 손에 받쳐 든 모습 등 다양한 형태로 등장한다. 묘주 초상과 함께 안악3호분에서 가장 뛰어난 화공이 공들여 그린 그림 가운데 하나이다. 벽면 위의 들보에는 식물의 넝쿨처럼 복잡하게 꼬인 구름무늬가 붉은 색과 흰색으로 장식되었다.

    • 리스트여닫기 서쪽곁방_천정_전체 이미지 안악 3호분 서쪽 곁방의 모줄임 천정 구조이다. 전체는 3단의 평행고임 위에 2단의 삼각고임이 올라간 평행삼각고임 구조이다. 화면에 보이는 장면은 2단의 삼각고임 부분으로, 잘 다듬은 사각형의 석재로 무덤방의 모서리를 덮어 올리면서 사방의 모서리를 줄였다. 일명 말각조정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러한 천정 구조는 서아시아에서 시작된 건축 양식으로 중앙아시아, 중국을 거쳐 고구려에도 소개되었다. 일찍부터 동서 문화의 교류가 이루어 졌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실증자료이다. 천정 중앙에는 사각형의 판석을 올려 무덤방을 덮었다. 천장석 중앙에는 붉은 연꽃이 활짝 피어있다.

  • 리스트여닫기 널방_전체 이미지 안악 3호분의 널방은 앞방과 기둥 4개를 경계로 나뉘어져 있다. 기둥이 설치된 부분이 남벽이다. 동벽은 회랑과 접하는 부분으로 천정까지 완전하게 막혀있다. 북벽도 회랑과 접해 있으나, 전체가 막힌 벽체가 아니라 벽면의 상단부에 4개의 기둥을 세워 회랑과 통하도록 한 독특한 형태이다. 서벽은 완전한 통벽이다. 천정은 역시 삼각형의 모줄임으로 축조되었다. 벽화는 널방의 동벽과 천장석 중앙에만 그려졌다. 서벽에는 서역인 무희가 악대의 음악에 맞추어 춤추는 모습이 그려졌으며, 천장석에는 만개(滿開)한 연꽃이 활짝 피어 있다. 서역계 무희의 모습에서 당시 활발했던 고구려의 대외 문화 교류를 짐작할 수 있다. 널방은 묘주 부부의 육신이 잠드는 곳으로, 은은한 악대의 음악소리와 하늘거리는 무희의 춤사위만이 묘주 부부를 지키고 있다.

  • 리스트여닫기 동쪽회랑_전체 이미지 안악3호분 동쪽 회랑의 동벽과 북벽에는 묘주의 출행장면을 담은 대규모의 벽화가 등장한다. 이 행렬도는 약 25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 화면에 보이는 출행도는 동벽에 묘사된 장면이다. 벽화의 내용은 주로 벽면의 상단부에 집중되어 있다. 묘주가 탄 소 수레는 행렬의 후반부에 등장한다. 주인공을 중심으로 바로 앞에는 악대가 노래와 연주, 춤을 추며 나아가고, 뒤쪽으로는 의장 기수, 시녀, 말을 탄 문관, 마상 악대 등이 뒤따르고 있다. 바로 옆에는 고구려의 병사들이 겹겹이 호위하며 묘주를 안전하게 수행하고 있다. 이처럼 웅장한 행렬은 당시 무덤 주인공의 지위가 매우 높았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초기 벽화무덤에 이러한 행렬도가 등장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당시 사람들의 사후세계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대인들은 비록 현세의 삶이 끝난다 해도 내세에서 또 다른 삶이 지속적으로 이어진다는 ‘계세적(繼世的) 내세관’을 믿고 있었다. 따라서 고대인들은 현세에서의 부귀영화가 내세에서도 이어지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이와 관련된 장면들을 무덤 내부에 장식하였던 것이다.

  • 리스트여닫기 북쪽회랑_전체 이미지 안악 3호분의 회랑은 ㄱ자형으로 동측 회랑을 지나 북측에 이르기까지 회랑이 이어진다. 이 회랑의 남쪽 벽면에는 고상식 건물이 그려져 있으며, 동쪽과 북쪽 벽면에는 행렬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행렬의 대부분이 훼손되어 그 형체를 파악하기 힘들고, 겨우 벽화가 있었던 흔적만이 발견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