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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회담외교문서

일본의 대미 GARIOA 및 EROA 채무 지불 교섭에 관한 요미우리 신문(1959. 10. 6. 석간) 보도내용 요약

  • 날짜
    1959년 10월 6일
  • 문서종류
    기타
  • 형태사항
    한국어 
일본의 대미 GARIOA 및 EROA 채무
지불 교섭에 관한 “요미우리” 신문(1959.10.6
석간) 보도 내용 요약
 일본미국점령 기간 중 받은 GARIOA 및 EROA 원조는 받을 당시의 “요시다” 내각에서 무상원조인지 나중에 대금을 보상할 것인지 알지 못하고 받아드린 모양이다. 그런데 1951년 “쌘.푸란시스코” 회의에 참석하였었던 당시의 “요시다” 수상은 이에 관하여 “이것은 정확하게는 채무가 아니나, 채무로 간주하여 가까운 장래에 보상할 것이다”라고 미국측에 언약하였는데 이는 흐릿한 채무이기는 하나 독립하려는 마당에 있는 일본이 대외신용을 향상하여야 한다는 저의(底意)에서 라고 볼 수 있었다.
 이에 따라 1954년 5월부터 본격적으로 동경에서 이에 관한 교섭이 시작되었으며 교섭 결과 일본의 채무액은 우선 18억 8천 9백만불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지불 조건의 문제에 있어서 미국측은 서독과 처리한 방식으로 총 채무액에 37.5%를 곱한 액수인 7억 8백만불을 요구한데 대하여 일본측은 5억 내지 5억 5천만불 정도를 고집하여 결국 “동남아세아제국에 대한 배상문제를 청산하기 전까지는 일본에 지불능력이 없다”는 것을 내세웠기 때문에 교섭은 일단 중단되어 버렸다.
 이 문제는 5년 후인 1959년 8월 미 재무장관이 일본정부에 대하여 “일본은 배상문제가 거의 해결되었고 경제발전도 현저하므로 이 문제를 빨리 교섭하자”는 내용의 서한을 보낸 것을 계기로 다시금 제기되었는데, 일본측은 이 이상 반제(返濟)를 연장시킬 이유가 없으므로 이에 응하게 되었다.
 일찍부터 이 반제자금을 원화(円貨)로 적립하여 일본동남아세아방위력 강화를 위한 근대식 무기의 생산에 사용토록 하여 보려는 일본재계(財界)에서는 즉시 이러한 정부의 움직임을 포착(捕捉)하여 정부에 맹렬한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이것은 좌절되고 대신 반제액을 미국으로 하여금 동남아세아로 투자케 하되 일본은 기술을 가지고 이에 참여하여 반제액의 상당한 부분을 다시금 일본에 환류(還流)케 하는 방침으로 대미 교섭에 나가도록 되었다.
 따라서 이 문제에 관하여 1959년 10월 2일 “워싱톤”에서 좌등(佐藤)-“앤더슨”이 회합하여 우선 세 가지 교섭 출발점이 합의되었다. 즉,
 (1) 18억 8천 9백만불이란 채무액을 무(無)로 하여 새로히 채무액을 정한다.
 (2) 확정된 채무의 지불은 3분지 1만을 지불하되 이는 서독방식인 5년간 거치(据置), 30년 년부(年賦)로 지불한다.
 (3) 일본은 반제자금을 동남아세아개발 또는 미, 일 공동 목적에 사용할 것을 희망하나 이는 채무지불의 조건이 되지 않는다.
 재개교섭은 1959년 년내로 동경에서 시작될 것이면 “사또” 재상은 채무총액 결정에 힘을 기우릴 작정이라고 하고 있다. 이에는 대미 채권(일본한국유구에 있는 미군에 납품한 물자의 대가 중 미제액―약 1억불 된다고 함)을 활용할 것이라고 전하여지고 있다.

색인어
지명
일본, 미국, 미국, 일본, 동경, 일본, 미국, 서독, 일본, 동남아세아, 일본, 일본, 일본, 일본, 동남아세아, 일본, 미국, 동남아세아, 일본, 일본, 워싱톤, 서독, 일본, 동남아세아, 동경, 일본, 한국, 유구
관서
일본정부
기타
쌘.푸란시스코” 회의, 좌등(佐藤)-“앤더슨”이 회합
오류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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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대미 GARIOA 및 EROA 채무 지불 교섭에 관한 요미우리 신문(1959. 10. 6. 석간) 보도내용 요약 자료번호 : kj.d_0010_0030_0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