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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란손의 보고서

 
  • 구분보고서
  • 저필자А. 플란손
  • 수신자А.П. 이즈볼스키
  • 발송일1907년 7월 26일
  • 문서번호АВПРИ,ф.150,оп.493,д.17,лл.135-138об.
  • 원소장처제정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
  • 현소장처외교사료관
  • 대분류외교(국제관계)
  • 세부분류국제관계/동맹·조약·협정
  • 주제어고종 퇴위, 군대 해산, 한일신협약, 헤이그 사건 
  • 색인어가츠라 타로, 데일리 메일, 박승환, 보호통치, 브린클리, 소시, 이즈볼스키, 플란손, 츠루하라, 하세가와, 하야시
  • 형태사항8 타이핑 러시아어 
 
№ 46

서울, 1907년 7월 26일

А.П. 이즈볼스키 각하께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각하

헤이그의 대한제국 사절단 사건은 일본인들에게 커다란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 사건은 문명화된 열강들에게 대한제국이 기대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인들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하는 문제를 확실하게 보여주었으며, 결국 이 문제는 일본인 자신들이 전혀 예기치 못하게도 그들에게 매우 유리하게 해결되었습니다.
한국에 대한 보호통치가 이루어지면서 일본인들의 주된 관심은 반도에서 자신들의 활동을 은폐하여 그에 관한 진상을 문명국의 여론이 최대한 알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는데, 이런 진상이 때 아닌 낭패를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이해가 걸려 있는 열강들과는 한 나라씩 차례로 개별 협정을 맺어 이 협정을 통해 반도에서 법률적 지위를 서서히 확고히 하고, 그 이전까지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한국에서는 만사가 훌륭하게 이루어지고 일본의 유일한 과업은 한국 인민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라는 확신을 유지시키려고 예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이런 선전을 대단히 솜씨 좋게 수행했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것은 한편으로는 이토 후작을 비롯한 일본 위정자들의 화려한 언사와, 다른 한편으로는 극동지역 언론 전체, 특히 대단히 재능 있고 일본인들에 충성하는 〈데일리 메일(Daily Mail)〉 대표이자 발행자인 브린클리(Brinkley)의 일치된 협조 덕택이었습니다.
헤이그에 대한제국 사절단이 돌연 나타나 큰소리로 폭로를 하면서 이 계획은 완전히 무산되었습니다. 때 이르게 속내를 드러내야 했으며, 중요한 것은 열강들이 간섭하여 한국에 대한 일본의 무제한적인 주인 노릇이 끝나지 않을까 하는 심각한 우려가 제기되었습니다. 때문에 헤이그에서의 폭로에 관한 소식을 듣자마자 일본인들은 정말로 당황했습니다. 허둥대는 모습은 언론뿐 아니라-언론에서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응징 방법을 날조해내기 시작했습니다-내각 내에서도 뚜렷이 나타났습니다-내각은 어떤 조치를 취할지 모르고 하야시 자작에게 이토 후작과 상의해보라고 명했습니다. 그가 서울에 올 때 결정된 어떤 훈령도 갖고 온 것이 아니며 [이 문제를] 상의하러 떠났다는 것은 이제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서 위기 상황은 해소되었습니다. 헤이그 회의 의장이 사절단 면담을 단호히 거절했던 것입니다. 러시아 제국 외무부는 일본 공사와 우호교섭을 계속 진행했으며 서울 주재 러시아 총영사관은 모든 정치 운동에서 물러서 있었습니다. 유럽 언론 쪽의 호응마저 일본에게 상당히 유리했습니다.
그러자 이토 후작은 더 이상 두려울 게 없다는 것을, 즉 아주 결정적인 행동을 취할 때가 왔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특유의 흔들림 없는 단호함으로 일에 착수했습니다. 하야시 자작이 도착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심지어는 그가 오기 전에 모든 일을 끝내려고 서두르듯이 이토 후작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대한제국 대신들을 통해, 자신을 그렇게 배려해주던 황제를 퇴위시키려 하였습니다. 대신들은 2주야(晝夜)를 거의 출입도 하지 않은 채 궁내에 머물면서 식사를 거부하며 자기 거처에 꿋꿋하게 버티고 있던 황제를 공동 협력해서 설득했습니다. 마침내 하야시 자작이 도착하기로 했던 7월 5일 목요일이 되었습니다. 그가 도착하기 2시간 전에 이토 후작이 직접 입궐하여 한 시간 이상을 보냈습니다. 저녁에 다시 대신들이 모여 거듭 강요를 하기 시작하여 7월 6일(19일) 3시 황제는 마침내 퇴위에 서명했습니다. 이것이 대한제국의 수동적 저항에 가한 첫 번째 타격이었습니다. 이것은 하야시 자작이 전혀 관여하지 않은 채 이루어졌습니다.
두 번째 타격은 7월 11일(24일)의 협정 서명인데 이에 의해 사실상 나라의 운영은 통감부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이토 후작의 협력자들은 이 협정안도 하야시 자작과는 같이 심의를 했으며 작성은 이토 후작이 했다고 제게 말했습니다.
세 번째 타격을 가하는 일, 즉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는 일이 남았습니다. 이 조치는 오래 전부터 일본인들이 계획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총무국장 츠루하라 씨는 어느 날 이를 솔직히 인정했는데, 이에 관해서 저는 3월 16일자 № 33에서 보고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인들을 멈추게 한 것은 다음과 같은 우려였습니다. 즉 그같이 단호한 조치는 이 나라 내부에서뿐 아니라, 특히 힘없는 한국이 호전적인 일본처럼 되지 않도록 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던 열강들로부터 아주 심각한 반발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이러한 개혁안은 더 좋은 시기가 올 때까지 미루어야 했습니다.
이제 그런 시기가 도래하자 일본인들은 거침없이 행동에 나서기로 결정했습니다. 일정 정도의 불필요한 잔혹함까지도 허용이 되었는데 이것은 이 개혁을 주도하고 실행한 것이 이토 후작이 아니라 군부 내의 인물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군인들에게서 무기, 견장, 탄약, 계급을 뺏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그들에게는 가혹한 충격일 것입니다. 한국에서 이런 충격은 재정 파산과 연관되어 더욱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라면 일정 기간 복무했다가 다시 이전에 하던 직업으로 돌아가는 병역 의무가 이곳에는 없습니다. 한국에서 군대는 거기에 헌신하는 사람들에게는 유일한 직업이고 존재 수단입니다. 그들에게서 군인 신분을 없애버리면 그와 더불어 그들의 유일한 돈벌이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군대 운영과 같은 개혁을 합리적으로 실행한다는 것은 복무와 퇴역 기간을 줄이는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거둔 성공에 다소 흥분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서둘렀으므로 적지 않은 걱정거리를 스스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7월 19일(8월 1일) 밤늦게 그들은 젊은 황제에게서 군대 운영에 관한 법령에 서명을 얻어내는데 성공했는데 그 때 주된 관심은 퇴위한 황제가 이를 모르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하세가와 남작 장군이 대한제국 군대의 장교들을 급히 불러서 그들에게 무기 없이 자기 부하들을 훈련원으로 즉시 데려가라고 명했습니다. 그곳에서는 군용품을 반납하고 약 50엔 정도의 봉급을 한꺼번에 지급받은 다음 해산하여 민간인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급속도로 진행한 것은 누구도 생각을 바꾸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리고 사실 대다수의 한국 군대는 병영에서 일사분란하게 나왔고 그 병영은 곧 바로 일본 군대가 차지했습니다. 궁궐수비를 하던 근위연대의 한 대대는 수모를 겪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하세가와 남작한테서 무기를 반납하라는 명령을 받고 병영으로 돌아온 대대장 [주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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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환(朴昇煥)을 말한다

이 이 명령은 이행할 수 없다고 대대에 선언하고 그 자리에서 자결했습니다. 대대는 무기를 들고 군인의 명예를 지키기로 결정했습니다. 끔찍한 학살이 시작되었습니다. 일본인들이 병영을 포위하고 기관총으로 사람들을 쏘았습니다. 가망 없는 전투는 두 시간 이상 지속되었습니다. 우리는 총영사관 건물 망루에서 그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전투는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한국인들은 패전했습니다. 그 일부는 살해되고 일부는 포로로 잡혔으며, 200명 정도는 달아났으며 그 중 상당수는 이웃한 한국인들 집에 숨어 추적을 피했습니다. 그 때 이 드라마의 가장 끔찍한 부분이 시작되었습니다. 도시를 돌아다니며 도주자를 수색하던 군대를 도우러 일본 깡패 소시 [주002]
번역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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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壯士) 즉 낭인무리를 말함

가 나타났습니다. 이들은 한국에서 그와 같은 소요 시에 항상 두드러진 역할을 하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한국 군인들을 집에서 끌어내 거리로 질질 끌고 다녔으며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몽둥이로 때렸습니다. 이같이 난폭한 행동은 밤늦게까지 이어졌으며 일본 경찰이 그들을 막는 데도 크게 애를 먹었습니다. 이 나라 안에서 한국 군대의 폐지는, 수집된 정보로 판단하건대, 예상보다 어렵지 않게 완료되었습니다.
지금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습니다. 이토 후작은 제반 사건의 경과를 보고하려고 며칠 예정으로 일본으로 떠났습니다. 그는 자신이 상황을 훌륭히 이용했으며 헤이그 사건 덕분에 일을 순식간에 크게 한 걸음 진척시켰다고 자신만만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 행보는 합병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합병이 본질적인 이득을 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대한제국 황제가 국가의 수장이라는 현재의 환상을 한국 인민이 보는 앞에서 없애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 상태의 편리한 점은 이제 패(牌)가 공개되었다는 것입니다. 일본인들이 한국에서의 활동을 그토록 열심히, 그토록 교묘하게 감싸두고 있던 안개는 흩어져버렸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숨길 게 없으며 이토 후작 자리에 카츠라 [주003]
번역주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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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츠라 타로(桂太郞)

자작이나 내놓고 활동할 다른 군 관계 인물을 임명하더라도 놀랄 일은 아닐 것입니다. 한국에서 일본은 오로지 유익하고 평화애호적인 과제를 수행한다고 누구보다 훌륭하게 증명할 재주가 있는 브린클리 같은 사람은 적어도 이제는 거리낌 없이 “한국은 일본의 전초기지”(7월 27일자 보고에서처럼)라는 견해를 표명하거나, 며칠 후에(8월 5일) 일본은 러시아 국경 근처인 한반도 북동부, 즉 회령과 나남에 두 개의 요새를 건설하기로 결정했으며 여기에 1천만 엔의 비용이 들어갈 것이라고 표명하고 있습니다.
깊은 존경과 충심을 다하여,

각하의 충복
А. 플란손
 

주 001
박승환(朴昇煥)을 말한다
주 002
장사(壯士) 즉 낭인무리를 말함
주 003
가츠라 타로(桂太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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