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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10월 16/29일자 구두보고서 첨부 서류

 
  • 구분보고서
  • 저필자페트로그라드 일본대사관
  • 발송일1915년 10월 16일
  • 문서번호АВПРИ,ф.126,оп.487,д.767,лл.28-31об.
  • 원소장처제정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
  • 현소장처외교사료관
  • 대분류사회운동/외교(국제문제)
  • 세부분류독립운동/외국인/이민(국외거주)
  • 주제어항일독립투사, 항일운동, 독립운동가 명단
  • 색인어이동휘, 강순기, 조창호, 조창원, 윤해, 허근, 계봉우, 오주혁, 김하구, 이갑, 이범윤, 이동녕, 이종호, 이종만, 이현재, 김도여, 안정근, 안공근, 정재관, 이위종, 김성립, 김성백, 최재형, 김진, 이강, 엄인섭, 이상설, 홍범도, 이병휘, 유상돈, 일본, 가츠라, 청도(靑島), 블라디보스토크, 니콜라옙스크, 노보키옙스크, 치타, 블라고베센스크, 하바롭스크
  • 형태사항7 타이핑 불어 
 
 

1) 이동휘

 

그는 대한제국의 독립을 회복하기 위하여 지지자들과 함께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14년 8월, 항일 한국인들에 대한 러시아 당국의 감시가 더욱 강화되자 그는 삼분구로 거주지를 옮기고, 일본에 대항하는 음모를 지속적으로 획책했다. 1914년 3월, 블라디보스토크에 체류할 당시 그는 항일혁명을 부추기는 노래를 작곡하였고, 모든 한국 학교에 그것을 퍼뜨렸다.
 

2) 이병휘

 

1914년 8월 1일 비극적으로 사망한 그 유명한 김난계가 대한제국의 독립 회복을 목적으로 주도적으로 꾸민 음모에 가입한 사람 중의 한 명.
 

3) 강순기

 

안중근 그리고 다른 이들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을 맹세한 사람 중의 한 명.
 

4) 조창호

 

이범윤 봉기의 총 책임자 및 비서. 여러 단체의 협력자. 그는 가츠라가 방문했을 당시 예비 조치로 블라디보스토크 경찰에 호출되었다. 그는 조창원과 결탁하여 일본 첩자로 여겨지는 사람들을 수색하여 체포한 뒤, 심문했다.
 

5) 조창원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의 절친한 친구. 여러 단체의 협력자. 그는 1910년 10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격렬한 항일 연설을 하였다. 가츠라가 방문했을 당시 예비 조치로 블라디보스토크 경찰에게 호출되었다. 그는 조창호과 결탁하여 일본 첩자로 여겨지는 사람들을 수색, 체포하여 심문하였다.
 

6) 윤해

 

통역사 및 교사.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지를 정한 이후 대한제국 매체를 통해 매우 격렬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가츠라의 방문 당시 예비 조치로 블라디보스토크 경찰에 호출되었다.
 

7) 허근

 

항일 봉기의 옛 우두머리인 그는 이동휘 및 다른 이들과 함께 대한제국의 독립 회복을 꿈꾸며, 그런 목적에서 폭동을 조직했다. 그는 솜씨가 매우 좋은 사격수이다.
 

8) 계봉우

 

교사와 목사, 그리고 청도(靑島)에서 발간된 잡지의 편집자인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일간지에 1914년 6월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을 예찬하는 글을 싣게 했다. 그 해 3월 이후 그는 고인이 된 안중근의 전기를 작성하는 한편, 이봉우(李鳳雨)와 함께 하마탕(蛤蟆塘)에 있는 교회와 초등학교를 담당하고 있다.
 

9) 오주혁

 

여러 항일단체에 가입되어 있고, 블라디보스토크 한인학교의 책임자. 1912년 체포되어 한국에서 2년 동안 수감되었다. 형 만기 이후[이하 누락]
 

13) 이동녕 또는 이의용

 

한일합병 당시 남작에 임명되었으나 그 명예를 거절하고, 청도로 거주지를 옮겨 대한제국 기독교인들과 만든 단체의 의장직을 수행했다. 그는 이민 온 한국인들의 상호 부조를 담당한다는 핑계로 비밀리에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하와이에서 발간된 대한제국 일간지를 가져와 지지자들 사이에 유포했다. 1월 29일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서부의 청도로 돌아갔다. 그는 중요한 한인 항일 운동가들을 연회에 초대하고, 일본에 대한 그들의 적대감을 부추기기 위해 그들을 지지자하는 이들의 러시아 내 활동을 과장하는 연설을 했다.
 

14) 이종호

 

일본의 한국 병탄에 분노한 그는 1910년 러시아에 입국하여 여러 단체에 가입했다. 1914년 8월 하바롭스크에 간 그는 거기서 이상설과 협력하여 전 세계에 일본의 압제에 대한 자신들의 분노를 알리고자 봉기를 일으켰다. 같은 해 8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사령관은 일본 당국의 부탁을 받아들여 요새 지역에서 이종호의 추방을 하명했다. 이후 그는 블라고베센스크에서 자신의 견해를 담은 일간지를 발행하려 했으나, 허가를 받지 못하여 포기해야 했다. 이후 그는 이동휘 그리고 다른 이들과 함께 지속적으로 봉기를 꾸몄다.
 

15) 이종만

 

형 이종호를 도와 항일운동에 전념했다.
 

16) 이현재

 

전직 지방공무원
 

17) 김도여

 

여러 단체의 회원 또는 회장
 

18) 안정근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안중근의 동생. 노보키옙스크에 거주할 당시 그는 이따금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했고, 그 지역에 거주하는 악의에 찬 한인들과 그곳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14년 그는 노보키옙스크로 향하여, 그곳에서 작은 상점을 운영하며 살았다. 같은 해 8월 10일 그는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하여 이봉우에게 자신의 형 안중근의 자서전과 관련된 자료들을 건넸을 것이다.
 

19) 안봉근

 

안정근의 동생이며, 가톨릭 신자이다.
 

20) 정재관

 

대한제국 일간지와 협력했으며, 여러 항일 단체에 가입했다. 그는 하얼빈에서 항일 단체를 설립했다. 이후 치타로 향하여 대한제국 한 일간지의 편집장이 되었다. 그는 이갑, 안창호, 그리고 여러 다른 사람들과 ‘사회주의’ 단체를 설립하면서 대한제국의 독립을 회복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1914년 11월, 그는 자신의 반대자들에 의해 일본의 첩자로 고발당해, 블라고베센스크의 러시아 경찰에게 호송되었으며, 2주 후에 풀려났다. 같은 해 11월, 그는 치타에서 매우 강경한 내용의 연설을 했고, 대한제국의 독립 회복에 필요한 기초자금 마련을 핑계 삼아 모금을 하는 천박한 사기꾼으로 몰려, 이강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러시아 헌병대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1915년 1월 22일 풀려났다.
 

21) 이위종

 

그는 프랑스에서 공부할 때 그곳에서 배운 무기들로 인해 몸에 생긴 흉터를 아직도 갖고 있다. 러시아 한국 사절단의 전직 고문인 그는 한국 사절단이 귀국할 당시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페트로그라드를 떠나지 않았다. 1907년 그는 이상설 및 다른 이들과 함께 헤이그에 밀사로 파견되었다. 1908년 그는 몸에 10,000루블을 지니고 노보키옙스크로 향했다. 이범윤, 오인섭 등과 만든 단체의 우두머리인 그는 한인들의 항일 반란을 부추겼다.
 

22) 엄인섭

 

그는 살인도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다. 놀라운 근력의 소유자인 동시에 아주 능숙한 권총사수이다. 1908년 이위종, 이범윤 등과 함께 노보키옙스크에서 단체를 설립했다. 같은 해 6월, 대략 360여 명의 반란군을 거느리고 이범윤의 지휘 아래 한국 북부 지역의 군(郡)을 공격했다. 그는 여러 항일 단체의 회원이다.
 

23) 이상설

 

한국 병탄에 매우 불만을 품은 그는 1905년 미국으로 도주했다가,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그는 헤이그에서 열린 평화회담에 밀사들을 동반했다. 1910년 8월,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학교에서 항일 연설을 했다. 여러 항일 단체의 주요 회원이며 설립자인 그는 〈권업신문〉의 편집장이었다. 이 신문은 항일운동 성향으로 인해 러시아 지방 당국에 의해 발행이 금지되었다. 1914년 7월까지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학교 장학사이기도 했던 그는 지금은 하바롭스크에 살고 있다.
 

24) 홍범도

 

대한제국의 독립 회복을 목적으로 꾸며진 음모의 구성원 중 한 명. 1908년 4월 그는 한국 북부의 여러 지역에서 반란군을 지휘하며 혼란을 일으켰다. 1909년 새롭게 반란군을 모으려 노력했으나, 결실을 맺지 못한 뒤 항일운동에 전념했다. 1911년 약 100명의 산적들로 구성된 군사작전을 지휘했다. 1912년 니콜라옙스크에서 어업으로 번 돈으로 치타에서 항일 정기간행물을 발간하려 했다. 1914년 12월 그는 대한제국 본토를 공격하려 했다.
 

25) 유상돈

 

일본제국 정부는 러시아 정부에게 유상돈의 인도를 요구했다. 러시아 당국이 이 도주범의 주거지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범인 인도는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는 대한제국 독립 회복을 목표로 계획된 음모의 구성원 중 한 명이다. 어떤 이들은 그가 지금 보다이보 [주001]
번역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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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러시아 이르크츠크 주 북부에 위치한 지역

의 금광에서 일하고 있다 하고, 다른 이들은 그가 노보키옙스크에 머물면서 독립된 대한제국의 정부 비용으로 사용될 자금을 마련하고자 모든 한국인들한테 10루블씩을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26) 김진

 

1911년 7월 블라디보스토크로 간 그는 학교 교사 및 ‘권업회’의 비서로 일했다. 그는 가츠라의 방문 당시 예비 조치로 블라디보스토크 경찰에 소환되었다. 이 때 그는 여자로 분장하여 음모자로 의심을 받았다.
 

27) 이강

 

안중근의 절친한 친구.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일간지의 공동제작자였던 그는 후일 치타에서 〈대한정교보〉를 창간하여 편집장이 되었다. 그는 종교를 핑계 삼아 항일운동에 전념했다. 그는 1914년 11월 러시아 헌병대에 체포되었으나, 1915년 1월 22/9 [주002]
각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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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라는 수는 러시아 구력에 따른 날자이다.

일 풀려났다.
 

28) 최재형

 

노보키옙스크에 거주하는 한족민회 회장이며, 일본에 대한 항쟁을 목적으로 15,000원을 모금한 항일단체 설립자 중의 한 명이다. 그는 ‘권업회’의 회장이었고, 여전히 대한제국의 독립 회복을 꿈꾸고 있다.
 

29) 김성립

 

그는 러일전쟁 전부터 형 김성백과 하얼빈에 거주하며, 일본에 대한 강한 증오심을 갖고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과 가츠라에 대한 음모에 형과 함께 연루된 것으로 보여 감시를 받았다. 그는 러시아 국적을 이용하여 아주 대담하게 행동했다. 안중근을 존경했던 그는 자신이 제2의 안중근이 될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했다.
 

30) 김성백

 

김성립의 형이며 한인학교의 교사이다. 1908년 대한제국 독립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를 설립하여 회장이 되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 암살의 공범으로 주목받았다. 그는 러시아 국적을 갖고 있어서 일본의 사법권 밖에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아무런 걱정 없이 추종자들에게 일본 고위층을 암살하라고 부추기고 있다. 일본 총영사가 김성백을 하얼빈 밖으로 추방해달라고 러시아 당국에 요구했기 때문에 그는 도시를 벗어나 도주했으나, 곧 다시 돌아왔다. 그 이후 그는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항일 단체들과 은밀히 교류하면서 일본을 상대로 한 다양한 모의에 전념하고 있다.

 

주 001
현 러시아 이르크츠크 주 북부에 위치한 지역

주 002
9라는 수는 러시아 구력에 따른 날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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