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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소장 근대한국문서

1898년 전후 한국에 관한 간략 보고

Записка о Корее до 1898-го года и после.
  • 구분
    보고서
  • 저필자
    베베르
  • 발송일
    1903년 4월 (1903년 4월)
  • 문서번호
    АВПРИ,ф.150,оп.493,д.14,лл.123-144об.
  • 원소장처
    제정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
  • 대분류
    외교(국제문제)
  • 세부분류
    국제관계
  • 주제어
    구한말 정치상황, 러시아 군사 교관단, 아관파천, 러시아 정책
  • 색인어
    개화파, 경부철도, 고무라, 그레이트하우스, 다이이치긴코(第一銀行), 독립협회, 러시아 학교, 러-청은행, 렘네프, 베베르, 브라운, 비류코프, 아관파천, 알렉세예프, 우체국, 원세개, 전신국, 청일조약, 포코틸로프, 하야시
  • 형태사항
    43  , 필사본  , 러시아어 
오래되고 높은 문화를 지닌 중국과 일본 사이에 놓여있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그리고 비옥한 토양과 천혜의 기후 때문에, 한국은 옛날부터 이 인접국들 사이에서 분쟁의 씨앗이 되어왔습니다. 이들로부터 자립적인 정치적 존립을 지켜낼 만한 충분한 힘과 굳건함을 갖고 있지 못했으므로 이 나라는 한때는 이쪽으로, 한때는 저쪽으로 번갈아 이끌리면서 대외정책이 더 강하거나 가장 공격적인 나라에 굴복했습니다. 따라서 수백 년 동안 국제관계에서 보여준 우유부단과 허약함이 이제는 몸에 붙은 나머지 외국 열강과 협약을 맺은 최근 시기에 한국은 자의든 타의든 독립국이 되었으면서도 새로운 상황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지난 세기[19세기] 70년대까지 한국은 중국의 반(半)속국 상태에 있었는데, 이것은 한국 궁궐이나 중국의 황궁에서 여러 사건이 있을 때 일정한 규범을 지키거나 중국력과 연호를 쓰는데서 나타납니다. 이 나라 자체는 종주국의 소형 복제본입니다. 그러나 종주국은 이 나라의 내정에 결코 간섭하지 않았으며 일본인의 침략에서 보호한 적도 드물지 않았습니다. 일본인들은 이 나라를 황폐화시켰고 한국 인민들로부터 불구대천의 증오심을 유발시켰습니다. 그 후 동양의 폐쇄성에 처음으로 돌파구가 열리고 서구 열강이 무역을 하려고 중국과 일본을 개국시키자, 그리고 러시아가 남우수리 지역(Южно-Уссурийский край)을 점령하면서 국경을 두만강까지 확장하자, 한국도 오랜 고립을 포기하고 문호를 개방해야 했습니다. 한국인들은 외국인들을 매우 친절하게 맞아들였으며 그들 중 상당수는 유럽 문명이 중국보다 우수하다고 확신하여, 구질서와 단절하고 그렇듯 성공적으로 진보의 길로 들어선 이웃 나라 일본을 모범 삼아 나라를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리하여 개화파가 형성되었는데 이들은 주로 일본인들에게 조언과 지지를 구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외국을 다녀왔거나 관립학교 및 미국선교 학교에서 외국어를 배운 청년들이 가담했습니다. 양반 관리들의 전횡과 권력남용에서 벗어나기를 바란 상당수 인민과 사회 하층계급이 이들에 공감했습니다. 하지만 구세대 보수층은 국가체제의 근간인 유교에서 벗어나면 나라가 망하고 자신들의 신분적 특권과 인민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할까 두려워서 중국과 더욱 긴밀한 동맹을 유지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중국은 절대주의와 노예제의 상징이 되었고, 일본은 진보, 문명, 자유에 대한 옹호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자유주의적인 친미파도 있는데 이들은 이른바 〈독립협회〉를 설립하고 한국인들에게서 적지 않은 인기를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협회의 회원들이 정치적인 사건들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려하고 미합중국의 것과 유사한 공화주의 체제와 기관을 도입하려고 하자 대한제국 정부는 이 협회에 대해 단호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협회가 해산되자 친미파는 영향력을 상실했습니다.
자유주의적인 지향과 보수적인 지향의 주창자들 사이에 투쟁이 전개되면서 한국에 영향을 미치려는 중국과 일본의 경쟁이 첨예화했으며, 그들에 이끌린 한국인들은 그들이 내정에 간섭하는데 필요한 충실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조만간 상호 경쟁하는 국가들의 충돌로 귀결될 터였습니다.
일본은 계속 증가하는 잉여인구와 상업 및 산업 발달로 돌파구를 찾아야 했으며 그 생명력은 본능적이고 자연스럽게 가장 저항이 약한 곳으로 향했습니다. 이주하기에 적합한 지역은 에조주 001
번역주 001)
1868년 이전 홋카이도의 옛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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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대만, 한국이었습니다. 그 전에 일본인들은 사할린에도 간 적이 있었으나 이 섬-나중에 이 섬의 남쪽은 쿠릴열도 대신 러시아에 넘겨 주었습니다-의 기후는 그들에게 너무 혹독한 것이었습니다. 정부 조치로 장려한 홋카이도의 식민화도 같은 이유로 더디게 진척되었습니다. 전에 중국 땅이었던 대만의 거의 열대 같은 자연도 마찬가지로 그들을 유혹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이제 남은 것은 가깝고 비옥하지만 힘이 약한 한국이었습니다. 이곳은 [18]90년대 초에 중국의 전(前)내각 총리대신이자 잘 알려진 지금의 직례성(直隷省 Чжилиская провинция)주 002
번역주 002)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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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인 원세개가 [한국주재]총리교섭통상사의(總理交涉通商事宜)를 맡아 영국의 지원을 받으면서 온갖 조치를 취해 중국의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조약체결 열강들과 이 나라의 대외관계를 자기 손에 쥐고 한국의 자립을 빼앗고 중국에 병합시키려던 곳이었습니다.
그 같은 상황에서 일본 정부는 경쟁자에게 따끔한 타격을 가해 중국을 한반도에서 밀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더욱이 일본 정부로서는 국민들의 관심을 당시의 국내 현안에서 돌릴 필요가 있었으며, 전투적인 당파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또한 유럽식으로 개조한 군대와 함대의 젊은 힘을 시험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주지하듯이 전쟁은 중국의 완전한 패배로 끝났습니다. 일본인들은 서울에서 조금 남쪽에 상륙한 청군을 패퇴시키고 한반도 북부 전역을 거쳐 만주까지 청군을 몰아갔습니다. 그리고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후에 이 나라 대부분 지역은 일본 군대가 점령하였고, 수도의 모든 관청과 한국 군대 및 경찰에는 일본인들이 고문관, 비서, 교관으로 배치되었습니다.
청일조약의 첫 번째 조항은 한국의 독립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1894년 후반과 1895년처럼 이 나라가 그와 같은 추악한 속박, 자신의 전제(專制)에 대한 그와 같은 침해를 당한 적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사실상 제도를 일부 개선하고 재정관리 체계를 세웠으며 경찰을 개조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본인들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너무나 발작적이고, 때로는 유치하기까지 한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개혁을 급격히 실행하면서 이 나라를 가능한 철저히 자신들에 이롭도록 이용하기 위해 이 나라에서 자신의 지배력과 영향력을 굳히려는 그들의 노력을 서투르게 밖에 가장(假裝)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횡포는 오래 존속할 수 없었습니다. 지역 주민에 대한 경멸적 태도와 후안무치, 옛날부터 형성된 무해한 풍속을 철폐하는 무례함은 초대하지 않은 문화담당자들주 003
번역주 003)
문화 보급이라는 미명 아래 약속민족을 억압하는 식민주의자를 일컫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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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культуртрегеры)에 대한 전반적인 불평과 불만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1895년 9월 26일 적극적이고 현명한 왕후가 자신들에게 보인 반감에 복수하려고 일본인들이 왕후를 짐승처럼 살해하자 마침내 고조된 불만은 심각한 전국적 소요로 변했습니다. 몇 달 뒤 국왕-국왕은 포로처럼 궁궐에서도 일본 보초가 딸려 있었습니다-은 왕세자와 애첩(지금의 엄비)와 함께 몰래 도망쳐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피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 날 아침 대격변이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고관대작과 수천 명의 한국인들이 우리 공사관 구역 안으로 밀려들어왔고 거기로 이어지는 모든 길은 자신들의 군주가 일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군주에게 경하를 드리고자 찾아온 환호하는 인민과 군대, 경찰로 가득 찼습니다. 이것은 인민의 축전(祝典)이었습니다. 우리 수비대가 수병 160명이고 이 도시에 주둔한 일본군이 1천 명 이상이었지만, 일본인들과 친일파-그 들 중 세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는 공황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기정사실(fait accompli) 앞에 성난 군중으로부터 서울 남쪽의 일본인 거주지역의 목조 가옥들을 방어하려고 그쪽으로 물러났고, 그리하여 그들의 영향력을 대신하여 우리 러시아의 영향력이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1884년 저는 러시아제국 정부로부터 한국과 러시아의 조약을 체결하는 전권을 부여받았고 이 조약은 같은 해 6월 25일 서명이 이루어졌습니다. 1885년 가을 조약 비준서 교환을 위해 다시 서울에 왔으며 우리 공사관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위치상 매우 훌륭한 구역을 얻어 정부에서 할당한 돈으로 매우 넓은 건물을 지었고, 이것이 나중에 그토록 유용하게 이용되었던 것입니다. 최초의 10년 남짓한 기간 동안 우리는 이 나라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다소 무관심하게 대했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오로지 중국 관계와 시베리아의 경제 상황 개선에만 쏠려 있었습니다. 그런 반면 한국 문제는 아직 전면에 나서는 것이 아니어서 당시 외무부에서는 〈우리는 전혀 한국에 관심이 없다〉는 견해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 때문에 공사관의 모든 활동은 한국 정부에게 이 나라의 자주성에 대한 중국인과 일본인의 지나친 침해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와 같은 아주 학술적인 조언과 우호적인 언급을 하는 것에 머물렀음은 당연한 것입니다.
1896년 1월 30일 공사관으로 국왕이 파천하면서 상황은 물론 첨예하게 변했습니다. 이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공사관 건물 위에서 펄럭이는 러시아 국기의 보호 아래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성격은 약하지만 마음 좋고 선한 국왕의 권위와 자유의지를 조금도 침해하지 않으면서 저는 거의 매일 밤늦게까지 이어진 저녁 담화에서 이런저런 조치의 타당성을 납득시키려 노력했습니다. 더욱이 모든 대신들이 우리 공사관에 사무실과 회의실을 두고 있었으며, 따라서 대신들이 나의 조언을 구하라는 명령을 국왕으로부터 받으면 사안의 세부사항을 그들과 함께 심의할 기회가 저에게 생겼던 것입니다. 어느 경우든 저는 일본인들의 무례한 행동방식-그들은 지체 없이 정확하게 실행해야할 개혁에 대해 기다란 지시 목록을 대한제국 정부에 내미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습니다-을 피하고 국왕이 개인적으로 제기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는 정도에서 그쳤습니다.
처음에 우리의 위치는 대단히 곤란했습니다. 공사관이 져야할 안전에 대한 책임-심지어는 국왕의 생명에 대한 책임까지도-이나, 인민과 일본인들 간에 거리에서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주 004
각주 004)
유감스럽게도 이 시기에 이 나라에서 불법으로 사업을 하던 일본인 약 40명이 살해당했는데 일본 공사관에서 이들에 대해 금전적으로라도 배상을 해줄 것을 요구하려고 했지만, 한국 정부가 내 충고에 따라, 그렇다면 왕후의 살해에 대한 배상을 요구할 것이라고 하자 일본 공사관은 그것을 포기했습니다. (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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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말할 것도 없고, 청군과 일본군의 습격이나 조국을 잘 알지 못하는 이질적인 사람들의 개혁 시도는 이 나라를 무정부적 혼란 상태로 빠뜨렸습니다. 지방에서 오는 수입이 서울에 이르지 못하는 것도 그러한 결과 중 하나였으며, 국고는 바닥이 나고 그 결과 그 이전, 즉 1895년 3월 25일에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에게 5년 동안 6% 이자로 3백만 엔(루블화로도 거의 같은 액수)을 대여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인들의 영향력이 약화된 후, 재정을 담당하던 사람들과 다른 고문들이 대부분 자진해서 자리를 떠나자 국고에 얼마가 있어야 하는지, 그것이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를 말해줄 수 있는 한국인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모든 관리, 특히 경찰과 군대 관리에게 봉급을 계속해서 지불하기 위해서는 탁지부의 상태를 즉시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저는 전하께 브라운 씨를 추천하였습니다. 그는 이미 해관의 주감독관으로 한국에서 봉직하고 있었는데, 그는 제가 가까이 알던 유일한 사람이자 동양에 대해 해박하고 그런 어려운 일을 맡을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이 일을 해내려면 많은 지식과 인내가 필요했습니다. 첫째로, 한자로 쓴 탁지부 서류와 회계장부를 파헤쳐야 했으며, 둘째로 한국 관리들의 저항을 이겨내야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하는 일들이 자기 재량대로 국고를 처리하려는 자신들의 약탈적 충동에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아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브라운 씨의 지칠 줄 모르는 활동 덕택에 지방에서 오는 수입을 정확히 입수하고 그것을 회계장부에 기입하며, 지출과 녹봉 지급에서 최대한 절약-이를 위해 모든 아문의 모든 관리에 대한 상세한 인명부가 작성되었고 그 직무와 숫자에 대한 통제가 확립되었습니다-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활동이 성공적이었다는 두드러진 증거는, 개혁을 하면서 지출이 증가했는데도 1896년, 그 해 말쯤이 되면 국고에서 1,660,000 엔이 절약되었습니다. 이 중에서 1백만 엔은, 이자와는 별도로, 3백만 엔의 일본차관을 변제하는데 사용되었고, [남은 차관 중] 1백만 엔은 이듬 해 가을에 변제했습니다.
공사관 근처에 짓고 있던 새로운 궁궐로 이주할 예정이던 국왕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군대 개조를 신경 써야 했습니다. 그래서 전하의 요청으로 우리 교관단이 시베리아에서 파견되었는데, 이들은 각각 1천 명 규모로 처음에 1개 대대, 그 후 다시 1개 대대를 편성하고 군사 업무, 특히 보초 직무를 교육했습니다. 우리 장교들과 하사관들은 직무를 아주 열심히 매우 훌륭하게 수행했습니다. 부하들을 극히 친근하게 대했고, 러시아의 예에 따라 중대에 독립채산제를 도입하여 그들의 생활 상태를 최대한 개선하였기 때문에 다른 부대의 군인들이 우리 대대로 들어오려고 애를 쓸 정도였습니다. 1897년 8월 말 제가 서울을 떠나기 전 사적으로 알현한 자리에서 폐하는 일 년 남짓한 기간 동안 공사관이 베풀어 준 환대와 여러 노고에 감사를 표하시고, 친위대를 만드는데 우리가 도움을 준 것에 고맙다는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국왕은 교관단 소환에 대해 내린 명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1898년 3월 5일주 005
번역주 005)
양력으로 3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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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군사 교관단의 부단한 노력 덕택에 우리 군인들이 전술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이것에 매우 만족한다. 이제 교관단이 우리를 떠나는 마당에 여러 부대의 장수들은 러시아 사람들에게 배운 규범과 방법을 면밀히 따르기를 바라노라.”
당시 실행된 개혁과 새로운 제도 중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도 지적해야 할 것입니다.
1896년 의정부 설립. 이 기구의 업무는 새로운 법령 공포, 비상조치 채택, 국가 세입세출표 검토, 전반적인 중대 사안 심의 등. 이 기구는 우리나라의 법제심의회(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совет)의 예를 따라 설치되었으며 그 규정이 의정부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1896년 7월 새로운 지방행정체제 도입과 기존의 행정구역을 13도 342군읍으로 편제.
1896년 8월 일본의 지도 아래 만들어진 재판제도에 관한 규정 개정과, 1896년 3월 23일과 6월 5일자 법령에 의한 형률 개정. 그 시행을 위임받은 사람은 전(前) 미국 총영사 그레이트하우스인데 그는 1890년부터 한국관직주 006
번역주 006)
내무협판(協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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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있던 인물로서 재판을 공정히 진행하고 심문 시 고문을 금지하도록 면밀하게 감독했습니다. 그는 왕후 살해 사건을 심리하고, 이 사건에 일본인들이 관여한 것을 밝혀내어 한국에서 일본인들의 정책에 대한 평판을 심하게 악화시켰습니다.
최초의 우체국 설립과, 청일전쟁 때 파괴된 서울-압록강, 서울-부산, 서울-원산 간 전신선의 대대적 수리.
서울에 러시아 학교 개교. 지금까지 비류코프(Н.Н. Бирюков)가 이 학교 교사를 맡고 있음.
몇 몇 외국인(일본인 제외)에게 철도부설권 및 광물과 식물 자원 채굴권을 부여. 그 중 두 개의 이권-한국 북동부의 석탄층 채굴과 두만강 및 압록강 유역의 삼림 벌채-은 러시아 회사들에게 부여되었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이권을 업자들이 행사한 적은 한 번도 없으며, 두 번째 이권에 대해서는 최근에 와서야 작업에 착수하였습니다. 그 밖에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 측의 경쟁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 케이제를링주 007
번역주 007)
겐리흐 구초비치 케이제르링(Генрих Гучович Кейзерлин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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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과 별도의 약정을 맺음이 없이 그가 한반도 동해안에서 포경사업을 하고 작은 만에 창고를 두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고 합의했습니다.
렘네프(С.П. Ремнев)를 서울 소재 병기창 관리 부서리로 임명.
최초의 한국 영사를 유럽에 파견. 러시아 황제 폐하의 대관식을 위해 러시아에 특별 파견.
서울과 그 인근에 주요 도로의 확장과 정비.
한국에 우리 재무부 관리 알렉세예프 씨를 파견. 아문들의 지출에 대한 상당한 통제가 이미 이루어진 때에도 궁내부만은 예산상 자신에게 배정된 액수를 맘대로 쓸 수 있었습니다. 이 돈은 대부분 궁내 고관들의 주머니 속으로 사라졌으며 부스러기만 국왕의 개인 용도로 떨어졌습니다. 이 때문에 궁내부에 입수되는 돈을 관리할 유능한 인물을 이곳으로 파견해달라고 제가 페테르부르크에 의뢰하겠다고 제안하자 국왕은 매우 기뻐했습니다. 이 결과가 알렉세예프 씨의 임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서울에 도착할 때 저는 이미 러시아로 귀국하는 중이었습니다.주 008
각주 008)
우리 재무부에서 발행한 명저『한국지 Описание Кореи』(1부, 75쪽)에 다음과 같은 부분, 즉 〈한국 정부는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특명공사 민영환을 통해 한국의 탁지부와 해관을 감독할 유능한 사람도 파견해달라고 러시아에 요청했다〉는 부분은 잘못 인용한 것이라고 지적하는 게 저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민영환 공사가 우리 재무부에 국왕의 요청을 전달했을 가능성도 농후합니다만, 그러한 요청을 하게 된 이유는 우리 관리에게 궁내부 하나의 재정만을 관리하도록 위임하려는 국왕의 개인적 바람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개항장의 세관과 탁지부 일을 그[우리 관리]가 관리할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이 나라와 인민을 더 가까이서 연구한 뒤인 다소 먼 미래의 일일 것입니다. (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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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정부가 그 당시 한국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는 것은 앞서 언급한 교관단과 알렉세예프의 파견, 공사관 정원 증원, 부영사와 무관 임명, 서울에 재무부 관리인 포코틸로프(Покотилов)씨 체류-그는 나중에 러-청은행 이사회로 하여금 한국에 지국을 개설하도록 만들었습니다-로 나타났습니다.
5년 반 전 제가 이곳을 떠날 무렵 서울 상황은 그러했습니다. 청국 지배와 일본 지배의 불안한 에피소드들과 그 뒤 한국 영토에서 벌어진 두 이웃 경쟁국들의 군사행동 후에 고요와 안정이 찾아왔습니다. 국왕은 더 이상 생명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동양에서는 너무나 일상적인 궁정 음모들은 우리 공사관에 들어설 여지가 없었으며, 한국의 고관대작들은 [인민의] 집요한 요구를 받은 나머지 개혁의 필요성을 어렴풋이 자각하고 스스로 개혁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렇지만 물론 우리는 여전히 정부 기구들에 만연한 상습적인 권력남용에 맞서, 관리들-이들은 자신들이 원치 않는 제도와 법질서를 도입하려는 우리의 노력을 매번 어렵게 만들었습니다-의 연고채용(緣故採用)과 뇌물수수에 맞서 싸워야 했습니다. 다른 한편 지나치게 급진적인 방법으로 조국을 되살리려고 꿈꾸는 젊은 조선당파의 고매한 꿈도 또 다시 자제하도록 만들어야 했습니다. 다행히도 국왕이 직접 지지한 덕분에 중도 자유주의적인 쪽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많은 시간 동안 떠나 있다가 작년 가을 저는 다시 한국에 왔습니다. 그러자 제 앞에는 정치생활뿐 아니라 사회생활에서도 뒤로 후퇴하는 매우 슬픈 광경이 보였습니다. 정부 내에서는 개혁 이전인 10년 전에 창궐했던 것과 똑같은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국가의 여물통(государственные ясли)에 더 가까이 있거나 국왕주 009
각주 009)
1897년 9월 31일 국왕은 황제 칭호를 채택했습니다. 제가 서울을 떠나기 전에도 국왕은 그런 의사를 꺼냈지만 저는 당시 국왕과, 새로운 칭호를 제안하여 국왕의 은총을 얻으려는 한국의 고관들을 감히 설득하여 이 문제를 호기가 올 때까지 연기하도록 했습니다. (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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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후의를 누리거나, 아니면 권력을 가진 다른 모든 사람들에 대한 똑같은 음모와 계략이, 똑같은 권력남용이 횡행했으며, 인민에게서 마지막 남은 생명력, 마지막 남은 곡식 한 톨까지 쥐어짜려는 똑같은 모습이 보였습니다. 이전에 비해 수가 배가된, 규율이 흐트러지고 복장이 빈약한 군인들은 불쌍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관직은 지식이나 경력, 공훈에 따라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연고(緣故)나 헌납할 수 있는 재산을 보고 임명합니다. 상업에서 이윤이 유통되는 자본의 회전속도에 직접 좌우되는 것처럼, 관직을 파는 자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관직을 산 자들을 그 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지 못하게 하고 그 자리를 더욱 빈번하게 교체하는 것입니다. 세금이 증가해도 국가의 창고(Государственное Казначейство)는 항상 돈이 없어 쪼들렸으며, 주민의 정신과 육체상태 개선, 학교와 기술교육 기관 건설, 양호한 교통로 건설 등에 쓸 자금은 없습니다. 관리, 병사, 포졸들의 녹봉에 들어가는 불가피한 지출을 제외하고, 수입의 상당부분은 무용하고 비생산적인 구매에 의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러나 앞의 것에 못지않게 last but not least, 황제의 변덕 충족, 사치스러운 행사, 궁궐과 사원, 왕묘 건립, 내시, 점쟁이, 무당-무당은 궁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의 부양을 위한 막대한 지출에 의해 탕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맨 뒤와 같은 정황이 생긴 이유는 황제-비록 이전보다 더 미신을 믿게 되기는 하였지만-의 탓이라기보다는 황제의 첩인 엄비 탓일 것입니다. 엄비는 평민 출신으로 유력 가문의 후원을 받지 못하므로 자기 목적을 위해 여성주술사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눈에 띄는 거의 유일한 진보는 우편-전신국(電信局)과 개항장에서 이루어지는 무역입니다. 우편 수입은 1896년 6,300 달러에서 1901년 27,130 달러로 증가했습니다. 이제 지방 주요 도시와 개항장을 수도와 연결시키는 전신망 수입은 1899년 50,687 달러에서 1902년 112,337 달러로 증가했습니다. 브라운 씨가 모범적으로 관리를 맡고 있는 해관 수입은 1895년과 1896년에 평균 약171,000 달러였지만 1902년에서는 1,204,776 달러였습니다.
한국의 정치상황에 관해서 말한다면 그 상황은 이 시기 현저히 악화되었습니다. 일본인들은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나라의 독립을 해치려 하면서도 그들은 독립을 유지하도록 보장할 것이라고 대한제국 정부를 항상 확신시키고 있습니다. 1896년 후면으로 물러서게 된 후 일본인들은 전술을 바꿨습니다. 이전에는 당연히 자신들의 물질적 이익은 조금도 잊지 않으면서도 어느 정도나마 한국의 행정체계 정비에 대해 신경을 썼지만, 최근에는 자신의 영향력 회복과 강화를 위해 이 나라를 정치적, 재정적으로 예속시키고 완전히 몰락시키려고 모든 조치를 다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원칙은 이렇습니다. 즉, 한국의 국내 상황이 악화되면 될수록, 또한 매수와 수뢰, 압제, 상호모략이 퍼지면 퍼질수록, 그들의 침해에 대한 이 나라의 저항이 더욱 더 무기력해질 것이라는 것, 그리고 국민들이 자기 정부에 대한 탄원이 확고하면 할수록, 국민들은 견딜 수 없는 압박에서 벗어나려고 더욱 더 자진해서 일본의 보호를 찾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행동 방식에서 생기는 모든 이득은 일본 쪽에 있습니다. 일본은 첨예하고 경솔한 행동으로 우리의 항의나 전쟁까지 초래하기를 원치 않으므로, 이곳 정부와 이 나라의 행복을 계략에 빠뜨릴 조용하고 꼼꼼하면서도 체계적인 막후 공작에 착수하였습니다. 그 공작은 너무나 조용해서 한국인들조차 이것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며, 러시아는 이런 공작을 중단시킬 합법적인 근거를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일본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하는 주요한 버팀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수많은 일본인의 거주. 개항장을 비롯해 이 나라에는 총 2만 명 이상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들 한 명에게 평균 약 5명의 한국인들-이들은 하인, 서기, 잡역부로 일하거나, 일본인들에게 물건을 납품하거나 그들에게서 물건을 받는 상인도 있으며, 혹은 일본인들이 개항장에 세운 학교와 병원에 다니는 학생과 환자들도 있습니다-의 생활이 달려 있다고 한다면, 일본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하도록 이렇게 저렇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머리에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2. 활발해진 일-한간 무역거래. 한국은 일본의 곡물창고이자 훌륭한 상품시장이 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항구에서 반출되는 가장 중요한 품목은 동양에서 매우 평가가 높은 한국 쌀, 그리고 그 다음으로 대두, 완두인데 그 양은 1897년부터 1901년까지(해당 년도 포함) 연간 총 반출량 평균 7,516,609 달러(귀금속 제외) 중에서 매년 6,629,346 푸드 5,322,976 달러어치가 [일본으로] 송출되었습니다. 동기(同期) 5년 동안 일본과의 무역거래 총액은 무역거래총액의 72%였습니다. 우리 시대에 상인은 장수와 같으며, 경제적 점령이 군사적 점령보다 더 확실하다는 말이 옳다고 한다면 한국에서 미미한 우리의 무역이나 얼마 안 되는 수의 러시아인, 일본과 같은 수단을 갖지 못한 우리 외교로서는 이곳에서 결투상대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들 때문에 페테르부르크의 우리 부처[외무부]에서 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1898년 4월 13일 도쿄에서 로젠 남작주 010
번역주 010)
로젠(Розен, Роман Романович). 일본 주재 러시아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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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일본 외무상 니시주 011
번역주 011)
니시 도쿠지로(西德二郞). 러시아 주재 일본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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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서명한 의정서에 대해 부정적인 발언을 했던 것입니다. 그 3조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한국에서 일본 상공업 회사의 폭넓은 발전과, 이 나라에 거주하는 일본 국민의 수가 상당함을 고려하여 러시아제국 정부는 일-한간 상업 및 공업 교류의 발전을 가로막지 않을 것이다〉. 공식 협정문에 이런 화려한 무구를 넣을 때는 그 문구가 우리에게 불리한 의미로 해석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즉 우리가 1896년의 정책과 당시 우리의 지배적인 위치를 포기하고 일본인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더 적합하게 이 나라를 경제적으로 점령하도록 만들고 있다는 점을 염려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3. 경부철도 건설. 이 이권은 1897년 8월 27일 일본 신디케이트에 부여되었습니다. 체결된 조약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3. 철도, 역, 창고 등을 건설하는데 필요한 모든 부지는 대한제국 정부가 철도회사에게 양도하며 이 회사 소유로 한다. §4.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곳에 건립할 역에는 국적이 다른 사람들의 거주를 금지한다. §7. 이 회사에 제공된 토지의 관리는 사규(社規)에 따라 행사한다. §15. 회사는 어떤 상황에서도 다른 외국 정부나 국민에게 주식을 팔아서는 안 된다.
일본인들은 그렇게 해서 이 철도가 외국인 손으로 넘어갈 가능성을 예방하였습니다. 그리고 역의 숫자는 제한을 두지 않고 역으로 배당된 곳에는 다른 외국인들이 거주하는 것조차 금지하고 있으므로 머지않은 장래에 일본인들의 식민지가, 철도를 따라 부산에서 서울까지 한반도 남부를 가로질러 단절 없이 촘촘히 이어지는 지대를 이루어 뻗어 가리라는 것은 쉽게 예상해볼 수 있는 일입니다. 이곳은 일본 법률, 일본 경찰이 지배할 것이고 결국에는 아마도 일본 헌병과 군인들이 지배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 철도에 첫 번째 역이 들어서면 그것은 이 나라가 일본화되는 시초가 될 것입니다.
4. 서울-부산 간 전신선. 이것은 한국과 다른 국가들 간의 유일한 연락통로입니다. 이전에는 의주를 거쳐 압록강과 만주로 이어지는 전신선이 있었지만 청일전쟁 때 파괴되었습니다. 1896년 6월 19일 복구되었으나 의화단이 1900년 7월 3일 만주지역 전선에 손상을 입히면서 전신 발송이 다시 중단되어 그 이후 복구되지 않았습니다. 세달 전 이곳 주재 중국공사 주도로 이 건에 관해 교섭이 시작되었는데, 중국공사는 이 때 대한제국 외부대신의 통고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 즉 의주선 건설에 중국전신회사가 차관형식으로 비용을 제공했다는 내용을 언급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회사의 소유권을 넘겨받아 관리하고 있는 중국정부가 [차관] 사실에 대한 인정만을 바랄 뿐 부채상환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과, 알려진 대로 한국인들이 이를 거부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교섭의 실패 책임은 주로 일본인들의 막후 모략으로 돌려야 합니다. 일본인들은 북부의 전신선(혹은 두만강의 경흥 시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지나는 전신선)이 복구되면 외국 정부와, 서울에 주재하는 그 대표들 사이에, 혹은 대한제국 정부 사이에 오고가는 지급공보를 통제할 가능성을 상실하게 될 것이며, 두 번째로 그들 소유의 전신에서 얻는 수입이 이로 인해 손해를 볼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5. 서울과 개항장에 일본은행 설립. 다른 은행들이 없으므로 일본은행은 제물포의 영국 상회(商會)-상해은행 지국으로서 중국 상인들과의 금전업무를 보고 있습니다-를 제외하고 유일한 신용기관입니다.
6. 한국에서 일본 민간은행 다이이치긴코주 012
번역주 012)
제일은행(第一銀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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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 지폐의 자유로운 유통. [18]80년대 초 당시 열강과 맺은 조약문에서 한국 정부는 상업적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통화제도가 없었으므로 관세를 멕시코 달러나 일본 엔화로 납부한다는 조항에 동의했습니다. 처음에 달러 유통은 더 늘어났지만 지난 10년대[90년대] 중반 한국에서 일본의 상공업 활동이 발달하면서, 그리고 은본위제가 쇠퇴하면서 달러는 엔화에 밀려났습니다. 1902년 4월부터 민간 제일은행은 자체 발행 태환권을 돌리기 시작했는데 한국에 있는 어느 지국에서나 소지자의 요구가 있으면 액면금액에 따라 해당금액을 일본 돈으로 지불할 책임을 졌습니다. 올해[1903년] 초에 이미 약 70만 엔의 태환권을 발행한 이 은행뿐만 아니라 일본 자신을 위해서도 이 태환권이 한국에서 통용되는 지폐가 되는 것이 바람직함은 물론입니다. 부산철도주 013
번역주 013)
경부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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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비용의 상당 부분을 지불하거나, 상품 또는 상업회사에 대출 등을 해줄 때 새로운 일련번호의 태환권을 발행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대한제국 정부는 이 은행권의 자유로운 유통을 허용해 달라는 것을 처음에는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압력을 가해 위협하는 일본 공사관의 끈질긴 요구에 굴복해야 했습니다.
이 곳 정부의 이해관계가 은행의 재정 상태와 너무나 긴밀한 연관을 맺게 되어, 은행주식이 하락하면 태환권의 가치가 떨어짐과 함께 국부가 줄어드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점은 이 나라에 그 돈이 범람하면서 나타나게 될 불가피한 후과(後果)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은행이 투기 실패나 동양에서의 정치적 긴장 때문에 지불을 중단하게 될 경우에는 담보 보증이 없는 지폐는 한낱 종잇장이 되고 말 것이며 한국은 파산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한국의 재정은 일본에 완전히 종속될 것이며, 외교에서 그들이 이것을 자기 목적을 위해 이용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한국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모든 요구에 동의하게 하려면 이 은행이 지불 불능 상태가 될지도 모른다고 위협하기만 하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재정적인 노예상태 뒤에 정치적인 노예상태가 따르게 될 것입니다.
7. 정기 연락선 취항과 범선의 우회. 연락선은 한국 항구와 동양의 다른 항구를 연결하는 기선으로 정부의 보조금을 받습니다. 1897년에서 1901년까지(해당 년도 포함) 외국 국기를 달고 한국을 방문한 선박 전체에서 일본 배가 숫자에서는 86%, 수용능력 면에서는 91%를 차지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완전히 일본인 소유이거나 부분적으로 일본인 소유이면서도 한국 국기를 달고 항해하는 선박-이렇게 하면 개항하지 않은 항구에도 기항할 수 있게 됩니다-은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주 014
각주 014)
1902년 우리 동청철도회사의 기선이 몇 척의 러시아 범선과 함께 한국 항구를 방문했는데 이것은 숫자로서는 외국 선박 전체의 3%, 수용 능력 면에서는 9%를 차지하였습니다. (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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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언급한 것 말고도 일본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하는 버팀대로서 덧붙여야 할 것은, 많은 한국청년들이 일본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점주 015
각주 015)
서울과 많은 항구에 일본 학교와 병원이 있으며 여기에는 한국인들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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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이 거주지 보호를 빌미로 서울, 부산, 원산에 주둔하고 있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사관과 모든 개항장에 있는 영사관, 매우 많은 수의 관리-이들은 별도로 잘 지어놓은 관사에 머물고 있습니다-를 두고 있는 우편지국입니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서라면 물질적 희생도 아끼지 않는 일본의 진취성과 능력, 열정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일본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달성한 결과에 만족할지도 모릅니다. 그 영향력은 다시금 지배적으로 되었으며 그리하여 한국정부는 때로는 굴욕적인 일본인들의 끝없는 요구에 맞서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다른 나라 대표들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일본인들이 간섭을 하게 허용하거나 일본인들의 충고를 따름으로써 스스로에 대한 모든 동정을 소원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이 우리의 위상을 약화시키고 러시아인의 활동을 무력화하려고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물론입니다. 그들은, 이런 저런 사안에 대해 우리에게 어떤 양보라도 한다면 한국인들에게는 비참한 결과가 초래되어 우호관계가 훼손되거나 일본으로 하여금 다른 더 중요한 이권을 요구하게 만들 것이라고 한국인들을 협박하고 있습니다.
우리 공사관이 이곳 정부에게 서울-경의선 철도 건설 이권을 러시아 국민에게 주라고 제안한 것에 대해 서울 주재 일본 공사가 대한제국 외부대신에게 보낸 올해 2월 4일(17일)자 통고문은 그들의 수법이 무례하다는 명백한 실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야시는 1899년에 한국 정부가 직접 철도를 건설하겠으며 외국인에게는 더 이상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주 016
각주 016)
실제로 1898년 1월 8일 외국 대표들에게 이런 공식선언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일본인들은 같은 해 8월 27일 부산 철도[경부선]에 대한 이권을 따낼 수 있었습니다. (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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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외부대신이 선언한 것처럼 서두를 꺼낸 후, 계속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어떤 강국(러시아를 의미합니다)이 자본을 제공하게 될 경우 이 나라는 귀국과의 무역 등 다른 어떤 교역에서도 아무런 이득을 얻지 못할 것이다. 요컨대 이것은 귀국에 대한 흉계가 아니면 재정 관리에 혼란을 일으키려는 악의적 의도로 행했을 것이므로 이것을 우리 정부는 결코 허용할 수 없다. 만일 귀정부가 몇 년 전에 행한 선언을 파기하고 우리 정부의 지시와 선의는 주목하지 않은 채 위의 요구에 동의한다면 우리 정부는 극동에서의 평화 유지를 위해 한 단계 더 엄중하게 귀 정부에게 요구를 제시할 것이다.... 어떤 국가가 제기한 요구도 완전히 불법이라고 간주해야 하며, 그것이 귀국가의 독립에 미칠 위험성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황제폐하의 고매한 이성과 귀 정부 고관들의 수완을 보건대 아마도 상기한 요구는 거부될 것이며 이것은 우리 정부의 견해에 따르는 것이기도 하다주 017
각주 017)
여기에 인용하는 번역문은 대한제국 외부에서 내가 입수한 각서를 우리 공사관 통역관이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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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일 일본이 이처럼 스스로 자기 정부의 이름으로 공식 통고문에서 러시아를 중상하고 〈흉계는 아닐지라도 악의〉의 책임을 러시아의 행동 탓으로 돌리는 것을 본다면, 그들이 한국인들과 개별적으로 대담할 때, 특히 일본 문제나 한국 문제를 얘기할 때 어떤 방법을 써서 겁을 주는지 쉽게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특히 순수하게 일본인들이나 한국인들에 대해 말할 때는 자신들이 제3국 정부의 명예를 모욕할 수도 있다는 우려는 하지 않는 것입니다. 철도에 대한 이권을 [다른 나라에] 주면 〈귀국의 독립〉에 위험이 있을 것처럼 말하면서 그것을 배려하겠다는 그들의 보증이 근거가 없다는 것은 다음 사실, 즉 외부가 러시아 국민에게 거절을 하고 난 뒤 그들 자신이 의주선 건설에 대한 이권을 자신들에게 주라고-다행히도 실패했지만-한국인들에게 성가시게 달라붙은 것에서도 나타납니다. 얼마 전에 그들은 또 적지 않게 음모를 꾸몄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특혜를 양보하는 것에 반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압록강에서의 벌목에 관한 옛날 협정이 실행되는 것에 반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와 같이 일본인들은 그들의 공격적이고, 드물지 않게 후안무치한 정책과 이곳 정부의 우유부단함과 허약함 덕분에 한국에서 자신의 배타적 지위를 확보했습니다. 한국 정부는 다른 나라, 즉 러시아가 실제로 지원해줄지 확신을 하지 못하므로 일본과의 심각한 충돌을 우려해 일본인들의 끈질긴 요구로부터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온건한 방책에 만족했습니다. 하나의 양보에 이어 다른 양보가 뒤따랐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요구가 이 나라를 정치적, 사회적으로 무기력한 상태로 몰고 가기 위한 것이므로 이곳의 질서가 점차 무너짐과 동시에 그들의 영향력은 확고해졌습니다.
최근에 일본인과 한국인의 상호관계에서 몇 가지 변화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성취에 취한 일본인들의 오만불손함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깊이 생각을 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이들은 보기에는 하찮은 양보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그리고 이미 부분적으로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더 분명하게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오랜 증오심이 더 강하게 깨어 일어나고 있으며 이 나라에는 파멸적인 쇠약한 현 체제에 대한 불만을 아주 공개적으로 표명하는 사람들의 무리가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한반도 상황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 즉 일본이 마침내 한국 점령에 성공하고 우리 국경선에 굳게 자리를 잡는다면 극동-남우수리지방과 우리의 영향권에 있는 만주-에서 우리의 이해관계에 어떻게 반영될 것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아야 합니다. 일본인처럼 그렇게 불안하고 야심차며 진취적인 민족과 근접한 이웃이 되는 것이 우리에게 반가운 것일까-이들은 틀림없이 즉 중국 북동의 상업을 장악할 것이며 게다가 이 지역에서 우리 위치를 강화하는데 더 많은 자금을 쓰도록 만들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바람직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근의 수동적이고 관망적인 정책을 버리고 한국이 일본에 지배될 가능성을 어떻게든 제거해야 합니다. 일본의 침해에 맞서 쇠약한 대한제국 황제와 그 정부를 실제로 지원하면 우리는 한국인들의 마음에 한국과 러시아의 이해관계가 일치한다는 확신을 불어넣게 될 것이며, 유감스럽게도 1898년 초 서울주재 전임 러시아 공사의 경솔하고 용서할 수 없는 행동 때문에 우리가 상실한 영향력을 회복하게 될 것임을 저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런 방향에서 우리가 취할 첫 번째 행동 중 하나는 일본 호위대와 헌병-이들은 전임 일본 공사 고무라와 제가 1896년 5월 2일 맺은 협정에 따라 이 나라에 평화와 질서가 회복되자마자 소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을 한국에서 철수하라고 요구하는 것일 것입니다. 이들은 이제 존재 이유(raison d'être)가 없으며, 그들이 주둔하여 주민과 마찰을 빚고 있으므로 한국인들은 그들의 철수를 매우 반길 것입니다.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일본인들이 다시 의주철도 공사를 따내려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 철도는 일본인들에게 필요할 경우 한국을 거쳐 만주 국경과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군대를 이동할 가능성을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밖에 우리의 위신을 유지하기 위해 배려해야 할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의 항구들(특히 제물포와 중국 무역이 이루어지는 곳들)과 대련(大連, Дальний), 지부(芝罘), 상해 사이에 최대한의 정기적인 연락선 유지와 우편물 발송.
제물포와 서울에 은행 설치. 이것은 우리 기선들과 더불어 중국 상인들-이들은 일본의 활발한 무역과의 싸움에서 우리의 훌륭한 동맹자입니다-의 이미 상당한 무역을 발전시키는 수단입니다.
광동성에 쌀 반출. 이곳은 현재 한국 쌀 보다 못한 통킹 혹은 시암주 018
번역주 018)
태국
닫기
쌀을 받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영자 정기 간행물 발행. 이는 극동에서 우리의 이익을 수호하고 러시아에 대한 이곳 신문들의 중상을 반격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한국 청년들의 러시아 육군유소년학교 및 여타 [교육] 기관 수용 간소화.
비서, 통역관, 의사, 학생을 위해 필요한 공간을 서울주재 우리 공사관에, 영사관 용 주택을 제물포에 건설하는 일입니다.
 
베베르
 
서울
1903년 4월

  • 각주 004)
    유감스럽게도 이 시기에 이 나라에서 불법으로 사업을 하던 일본인 약 40명이 살해당했는데 일본 공사관에서 이들에 대해 금전적으로라도 배상을 해줄 것을 요구하려고 했지만, 한국 정부가 내 충고에 따라, 그렇다면 왕후의 살해에 대한 배상을 요구할 것이라고 하자 일본 공사관은 그것을 포기했습니다. (원주) 바로가기
  • 각주 008)
    우리 재무부에서 발행한 명저『한국지 Описание Кореи』(1부, 75쪽)에 다음과 같은 부분, 즉 〈한국 정부는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특명공사 민영환을 통해 한국의 탁지부와 해관을 감독할 유능한 사람도 파견해달라고 러시아에 요청했다〉는 부분은 잘못 인용한 것이라고 지적하는 게 저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민영환 공사가 우리 재무부에 국왕의 요청을 전달했을 가능성도 농후합니다만, 그러한 요청을 하게 된 이유는 우리 관리에게 궁내부 하나의 재정만을 관리하도록 위임하려는 국왕의 개인적 바람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개항장의 세관과 탁지부 일을 그[우리 관리]가 관리할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이 나라와 인민을 더 가까이서 연구한 뒤인 다소 먼 미래의 일일 것입니다. (원주) 바로가기
  • 각주 009)
    1897년 9월 31일 국왕은 황제 칭호를 채택했습니다. 제가 서울을 떠나기 전에도 국왕은 그런 의사를 꺼냈지만 저는 당시 국왕과, 새로운 칭호를 제안하여 국왕의 은총을 얻으려는 한국의 고관들을 감히 설득하여 이 문제를 호기가 올 때까지 연기하도록 했습니다. (원주) 바로가기
  • 각주 014)
    1902년 우리 동청철도회사의 기선이 몇 척의 러시아 범선과 함께 한국 항구를 방문했는데 이것은 숫자로서는 외국 선박 전체의 3%, 수용 능력 면에서는 9%를 차지하였습니다. (원주) 바로가기
  • 각주 015)
    서울과 많은 항구에 일본 학교와 병원이 있으며 여기에는 한국인들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원주) 바로가기
  • 각주 016)
    실제로 1898년 1월 8일 외국 대표들에게 이런 공식선언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일본인들은 같은 해 8월 27일 부산 철도[경부선]에 대한 이권을 따낼 수 있었습니다. (원주) 바로가기
  • 각주 017)
    여기에 인용하는 번역문은 대한제국 외부에서 내가 입수한 각서를 우리 공사관 통역관이 번역한 것입니다.  바로가기
  • 번역주 001)
    1868년 이전 홋카이도의 옛이름바로가기
  • 번역주 002)
    지금의 하북성(河北省)바로가기
  • 번역주 003)
    문화 보급이라는 미명 아래 약속민족을 억압하는 식민주의자를 일컫는 말바로가기
  • 번역주 005)
    양력으로 3월 24일바로가기
  • 번역주 006)
    내무협판(協辦)바로가기
  • 번역주 007)
    겐리흐 구초비치 케이제르링(Генрих Гучович Кейзерлинг)바로가기
  • 번역주 010)
    로젠(Розен, Роман Романович). 일본 주재 러시아 공사바로가기
  • 번역주 011)
    니시 도쿠지로(西德二郞). 러시아 주재 일본공사바로가기
  • 번역주 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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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번역주 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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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번역주 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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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전후 한국에 관한 간략 보고 자료번호 : kifr.d_0004_0210_0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