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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소장 근대한국문서

구두로 전달된 후, 문서로 편집되어 일본 공사관이 수정한 1895년 10월 25일 총리대신 김홍집과 이노우에 백작간의 회의 의사록

Протокол свидания Первого Министра Ким-Хун-чжипа с Гр.Иноуе, 25 Октября 1895, Передан устно и замем, редактирован письменно и корректирован Японской Миссией.
  • 구분
    의사록
  • 문서번호
    АВПРИ,ф.150,оп.493,д.6,лл.230-232об.
  • 원소장처
    제정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
  • 대분류
    정치/외교
  • 세부분류
    왕실관계/외국인/국제관계
  • 주제어
    을미사변, 이노우에, 김홍집, 회의록
  • 색인어
    총리대신, 이노우에, 일본공사관, 미우라 자작, 대원군, 국왕, 왕세자, 스기무라, 왕후, 폐서인, 러시아 공사관, 미국 공사관, 군부대신, 시해, 박영효,
  • 형태사항
    6  , 필사본  , 러시아어 
부록 3.
№358에 첨부
서울, 1895년.
 
구두로 전달된 후, 문서로 편집되어 일본 공사관이 수정한 1895년 10월 25주 001
번역주 001)
러시아구력. 서양력으로는 11월 7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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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총리대신 김홍집과 이노우에 백작간의 회의 의사록
총리대신은 현재의 상황에 대한 이노우에 백작의 조문을 구하기 위하여 만남을 주선했다고 말했다.
이노우에 백작은 최근의 사태들과 그 사태들을 야기한 상황에 관하여 총리대신이 언급할 수 있는 것들을 총리대신으로부터 직접 경청하고 외국 대표들과 회담을 갖기 이전에는 아무런 조언을 제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답했다. 이노우에 백작은 자신이 입수한 모든 사실들에 입각하여 이미 실행된 유례없는 폭력에 대한 가장 엄밀한 판결을 끌어낼 수 있었으며, 왕후의 시해 그리고 그 직후 총리대신과 내각의 나머지 모든 새로운 대신들이 서명하여 공표된, 왕후의 폐서인에 관한 부끄럽고도 야비한 조령에 자신의 분노를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신랄한 발언을 생각해내지 못할 정도라고 했다.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암울한 오점으로 남을 이런 범죄는 모든 문명 세계의 분노를 야기했으며, 이 지구상에서 조선을 가장 야만적 민족의 수준으로 끌어내렸다고 했다. 이노우에 백작은 왜 총리대신이 이 추잡한 조령에 자신의 직인을 날인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다고 했다.
총리대신은 만약 자신이 서명을 거부할 경우, 자신을 살해하겠다는 협박과 힘에 의하여 강제적으로 그렇게 행할 수밖에 없었다고 답했다(다른 해석: 만약 자신이 서명을 거부할 경우 다른 심각한 분란이 초래될 수도 있다는 상황의 힘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총리대신은 조령의 공표를 박기 위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으나, 부대를 지휘하고 있는 장교들의 위협이 그 자신은 물론 심지어 군부대신주 002
번역주 002)
조희연(趙羲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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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 내각의 나머지 다른 대신들조차 그들의 요구에 동의할 수밖에 없을 만큼 그렇게 심각했다고 했다.
이노우에 백작은 총리대신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현재의 지위를 받아들일 당시, 총리대신은 이노우에 자신 앞에서도 자신의 충성스러운 신민의 감정과 국왕, 왕후 그리고 나라에 대한 자기 자신의 충성을 표명했으며, 국왕 전하와 왕후 그리고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고 성명했던 사실을 상기시켰다. 총리대신의 행동이 자신의 발언과 일치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현재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사건이 발생할 것이라는 사실에 관해 며칠 전에 이미 총리대신이 알고 있었다면(일본의 번역문에는 이 문장이 삭제되어 있다), 왜 총리대신은 그것을 예방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으며, 외국의 대표들에게는 왜 알리지 않으셨습니까?라고 문의했다. 이노우에 백작은 총리대신, 대원군 그리고 일본공사관 서기 스기무라(Сугимура)주 003
번역주 003)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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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 정변이 발생하기 3일 전에 비공식적인 회의를 가졌다는 명백한 증거가 존재하고 있음을 밝혔다. 총리대신이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전적으로 확인되었다(일본의 번역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대원군과 미우라 자작은 이 사건이 발생하기 이전에 이미 양자 간에 비밀회의를 가졌다는 사실이 익히 잘 알려져 있다.” 이후 이 문장은 재차 일본 원문에서 삭제되었다). 그러나 김홍집은 아직까지 총리대신의 직책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이노우에 백작은 총리대신이 이 사태를 개선하기 위하여 어떤 대책을 제안하려는 것인지 알아보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총리대신은 자신의 배신행위를 비난한 것에 대해, 자신은 죽어서 보다는 살아 있는 상태에서 훨씬 더 국왕을 잘 보좌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답했다.
이노우에 백작은 궁궐 내에 대원군이 배석해 있는 것은 국왕의 목숨을 지속적으로 위협하는 사안인 만큼, 이런 점을 고려하여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는 궁궐에서 제거되어야만 한다고 말했다.
총리대신은 대원군이 절대 국왕의 적이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로 대원군은 자신의 아들에게 모든 행복이 따르길 바라고 있을 뿐, 국왕에게 해악을 끼칠 생각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고 답했다.
이노우에 백작은 대원군이 자신의 아들 중 한 명을 살해했으며, 수차례에 걸쳐서 왕후를 시해하려 했고,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얼마 전에는 국왕을 폐위시키고 그 대신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손자주 004
번역주 004)
이준용(李埈鎔, 영선군/永宣君/. 1870-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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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즉위시키려 했음을 지적하면서, 그의 이러한 전력과 위와 같은 식의 성명은 일치하지 않는다고 했다. 피에 목마른 대원군의 천성은 과거 기독교도들을 대량으로 학살한 것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으며, 자신의 손자에 대한 사랑은 의심할 바 없는바, 이것은 국왕의 목숨에 대한 위험 요소라고 했다. 이노우에 백작은 한 명의 아들을 죽인 대원군이 주저 없이 다른 아들도 살해할 것인바, 가능한 한 조속한 시일 내에 대원군을 제거해야만 한다는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총리대신은 사안이 대원군의 제거와 연관되어 있는 만큼, 그의 제거가 만약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답했다. 그러나 군부대신이 제거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큰 난관이 수반될 것이라고 했다. 총리대신은 자기 자신과 마찬가지로 군부대신 역시 폭력의 희생자였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했다. 바로 그 9월 26일 그는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던 장교들에 의하여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군부대신의 직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교와 병사들은 개인적인 존경심에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의 사적인 안전을 위해서 군부대신에게 충성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즉 이 장교와 병사들은 군부대신의 체포가 자신들에 대한 치명타로 작용할 것으로 보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전력을 다하여 그의 체포에 대항할 것이며 군부대신을 체포하려 들 경우에는 아마도 싸울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후 계속해서 총리대신은 궁궐을 점령하려는 음모는 이미 내부대신 박영효주 005
번역주 005)
박영효(朴泳孝, 1861-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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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도주했던 당시부터 이미 수립되었던 것으로서, 이노우에 백작이 부재중이었던 시점에 박영효가 그 음모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덕분에 다행히 그것이 실패로 종결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계속된 총리대신의 발언에 따르면, 이 사건의 발생 이후 이노우에 백작이 이곳 조선으로 돌아와 체류하고 있을 당시 음모자들은 행동하기를 두려워했으나, 이노우에 백작의 후임으로 미우라 자작이 부임하자 소요가 끊이질 않았으며, 주모자들은 이때가 자신들의 음모를 실행하기에 가장 유리한 시점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총리대신은, 이 주모자들이 병사들과 경찰들 사이에 불화를 야기했으며, 부대의 해산과 관련된 소문을 유포함으로써 병사들을 선동하다가, 마침내 병사들이 궁궐을 장악하도록 설득했다고 했다. 또한 그 당시 [판독불가] 현재의 군부대신은 죽음의 공포 하에서 지금의 직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도주한 궁궐친위대의 주요 장교들을 체포하기 위하여 어떤 조치가 이루어졌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총리대신은 전국에서 그들을 수색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도 그들의 흔적을 밝혀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이노우에 백작은 일본에서도 경찰들이 그들을 추적하고 있는 만큼, 만약 그들이 언제든 일본의 항구에 입항하게 될 경우 체포될 것이라는 사실을 총리대신에게 미리 통보해 주었다.
총리대신은 위 말의 뒤를 이어 새로운 내각의 다른 모든 대신들을 다소간이나마 변명하기 시작했다. 즉, 그의 발언에 따르면, 신내각의 대신들은 폭동을 일으킨 장교들의 위협 하에 행동했던 것이며, 왕후의 서거를 인정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폐서인에 관한 조령을 발표한 것은, 만약 왕후의 서거를 공표할 경우 국상을 허락해야만 되는 상황이 발생하고 서거의 원인을 밝히는 동시에 죄인들을 처벌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유에 따른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또한 바로 이것이 대신들로 하여금 자신의 의지와는 상반되게 자신의 운명을 폭도들의 운명과 연계시키도록 만들었으며, 그들은 자기 자신을 구하고 결과를 덮어 버리기 위하여 왕후의 폐서인에 관한 조령에 서명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노우에 백작은 왜 궁궐 친위대가 최근 들어 두 배로 증강되었는지 그 이유를 문의했다.
총리대신은 궁궐로부터 국왕을 이어시키려는 음모가 꾸며지고 있는 듯이 보이며, 이 음모에는 일부 외국 대표들이 개입된 것으로 보이는 혐의가 있는데, 바로 그것이 친위대 증강의 원인이었다고 답했다. 즉 일부 조선인 관리들이 미국 공사관과 러시아 공사관에 숨어 있으며,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피한 이들 중 한 명은 서한과 유럽식 복장 두 벌이 들어 있는 꾸러미를 국왕께 발송했다는 사실이 알려졌으며, 그들은 국왕과 왕세자께서 그 옷으로 갈아입으신 뒤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피할 것을 요청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서한과 두 벌의 유럽식 복장은 대원군의 손에 들어갔고, 그에 따라 대원군은 러시아와 다른 열강들이 국왕과 왕세자를 조선인들의 감시 하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새로운 혼란을 조장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이노우에 백작은 그런 일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명명하면서, 총리대신이 제시한 증거들은 백작 자신이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외국의 대표들이 자신에게 제시한 정보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총리대신에게 언급했다. 어떤 것이든 조언을 원한다는 총리대신의 끈질긴 부탁에 대해 이노우에 백작은 현 시점에서 조언해 줄 수는 없으며, 이번 사태의 정확한 사실을 알고 있는 외국의 대표들과 대담을 나누는 것이 우선이어야만 하며, 총리대신이 자신에게 통보해 준 사실들을 신뢰할 수 없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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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용(李埈鎔, 영선군/永宣君/. 1870-1917)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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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효(朴泳孝, 1861-1939)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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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로 전달된 후, 문서로 편집되어 일본 공사관이 수정한 1895년 10월 25일 총리대신 김홍집과 이노우에 백작간의 회의 의사록 자료번호 : kifr.d_0004_0170_0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