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 보리소비치 공 각하
Милостивый Государь Князь Алексей Борисович
1896년 2월 1일
№301
서울, 1895년 11월 23일.
1월 31일 석판 인쇄됨.
로마노프 로스톱스키주 001 공 각하 수신
사적인 알현 석상에서 한 번은 국왕께서 우리 외국대표들을 상대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궁내부대신주 002-국왕의 형이자 대원군의 아들-이 공식적인 전체 알현에 우리들을 초청할 것이라는 사실을 통보하여 주셨습니다. 실제로 이틀이 지난 뒤 초청장이 배달되었으며, 모든 공사들이 궁궐에 모였습니다. 국왕께서는 우리를 인견하셨지만, 한마디 말씀도 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궁내부대신은 국왕의 이름으로 국왕께서 우리를 보니 매우 반가우시며, 왕후의 위호 회복에 관한 조령을 준비하여, 그것을 우리들 앞에서 낭독하기 이전에는 궁궐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셨다고 언급했습니다.
거의 한 시간을 기다린 후에야 그 조령을 가져왔으며, 군부대신 조주 003와 경무사주 004를 파면하는 어명과 함께 위 조령을 낭독했습니다. 이후 재차 국왕을 알현한 우리들은 국왕의 의지를 위와 같이 공식적으로 성명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안의 진상을 인지하고 있는 우리들은 왕후의 폐서인에 관한 조령을 단 한 번도 진본 문서로써 인정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밝혀야 할 것 같다고 성명했습니다.
외국 대표들 중에서 그 누구도 처음에는 내각에서 발생한 변화의 의미를 완전하게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변화의 진정한 의미는 금방 폭로되었습니다.
즉 국왕에 대한 감시는 더욱 삼엄해졌습니다. 그리고 국왕의 인근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신임 군부대신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반드시 국왕께서 외국 대표들과 해로운 만남을 지속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언급했습니다. 이후의 사건들은 새로이 선출되어 입각한 이들이 자신들에 대한 믿음을 제대로 된 것이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제가 11월 22일자 №297 급전을 통해 보고 드린 바와 같이, 왕후의 국상(國喪)이 이미 발표되었습니다(이것 역시 위에서 언급한 목적을 향해 직접적으로 방향 맞추어진 조치입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될 경우, 궁내부대신은 모든 국상 행사에 국왕께서 반드시 참석하셔야 한다는 핑계를 들어, 우리들의 국왕 알현을 거절할 수 있는 완벽한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즉 11월 24일 국왕을 현재 거처하시는 장소로부터 이어시켜, 유럽인 고문들이 근무하고 있는 건물로부터 먼 곳에 위치하면서 궁궐 내에서 가장 외지고 음침한 지역(북서쪽)으로 국왕의 처소를 옮긴다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신임 경무사주 005 또한 다른 이들에 못지않게 자신의 활동 영역 내에서 열성적이었습니다. 그는 집무를 시작한지 단 며칠 동안 조선의 역사에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활동을 정성껏 기록해 놓았습니다. 즉 왕후의 가능한 운명에 관하여 서로들 간에 논의하는 모든 사람들은 물론, 심지어 외국어로 말을 하거나 외국인과 친분이 있는 사람조차 모두 체포되고 있습니다. 조선의 왕후가 시해되었을 당시 수사의 흔적조차 없었던 것에 더하여, 지나간 근 두 달 동안 죄인들에 대한 처벌 역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전능한 대신, 즉 찬탈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반대하는 말 한마디만 해도 마치 국가 반역자 혹은 국왕 개인에 대한 반란으로 해석되고 있으며, 모든 새로운 수색, 체포, 고문, 사형 등이 그 결과입니다....
존경과 충성을 담아.
각하의 충복
베베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