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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드미트리 알렉세예비치 백작 각하 베베르 1895년 10월 20일 보고서

  • 로바노프-로스톱스키공이 히트로보에게 보낸 비밀 전문 사본 로바노프-로스톱스키 1895년 10월 27일 보고서

  • 로바노프-로스톱스키공이 베베르에게 보낸 비밀 전문 사본 로바노프-로스톱스키 1895년 10월 27일 보고서

  • 베베르의 비밀 전문 베베르 1895년 11월 7일 보고서

  • 1895년 9월 26일 서울에서 발생한 사건과 관련하여 일본 천황이 ... 일본 천황 1895년 10월 12일 서신

  • 베베르의 비밀 전문 베베르 1895년 11월 17일 보고서

  • 알렉세이 보리소비치 공 각하 베베르 1895년 11월 23일 보고서

  • 알렉세이 보리소비치 공 각하 베베르 1895년 11월 26일 보고서

  • 시페이예르가 М.Н. 무라비요프 공에게 보낸 보고서 시페이예르 1897년 11월 18일 보고서

  • 1895년 11월 28일 무명의 한국인으로부터 공사관 문지기에게 전달 ... 1895년 11월 28일 보고서

  • 1895년 10월 13일, 휴가에서 복귀한 미국 대표가 소집한 회의의 ... 의사록

  • 1895년 10월 24일, 일본공사관에서 개최된 일부 외국대표들의 비 ... 의사록

  • 1895년 10월 24일, 일본공사관에서 개최된 비공식적 회의에서 미 ... 단신

  • 1895년 10월 31일, 일본 공사관에서 개최된 일부 외국 대표들의 ... 의사록

  • 구두로 전달된 후, 문서로 편집되어 일본 공사관이 수정한 1895년 ... 의사록

  • 시페이예르 대리공사의 보고서 시페이예르 1896년 1월 2일 보고서

  • 대리공사 시페이예르가 A. 로바노프-보리소비치 공작에게 보낸 보고서 시페이예르 1896년 1월 2일 보고서

  • 대리공사 시페이예르가 A. 로바노프-보리소비치 공작에게 보낸 보고서 시페이예르 1896년 1월 10일 보고서

  • 4등관 베베르의 비밀 전문 베베르 1895년 9월 27일 보고서

  • 리스트여닫기 알렉세이 보리스비치 공 귀하 베베르 1895년 9월 27일 보고서 1895년 11월 28일№211.1895년 9월 27일, 서울.첨부 11개.그리고 평면도 1장1895년 12월 18일 석판인쇄됨А.Б. 로바노프-로스톱스키 러시아 외무대신. 알렉세이 보리소비치 로바노프-로스톱스키(Алексей Борисович Лобанов-Ростовский) 공 각하 수신실로 소름끼치는 묘사다! 황제가 친필로 직접 기록한 내용알렉세이 보리소비치 공 귀하,궁궐에서의 음모와 시해에 이번 9월 26일자 저의 비밀전문에 대한 추가하여 각하께 아래 열거된 이들의 증언을 동봉하여 발송해 드립니다.1. 국왕 고종을 말한다의 증언.2. 모든 급변하는 사건에 참석하지는 않았으나, 왕후 왕후 민씨. 후일의 명성황후를 에워싸고 있었던 궁녀들 중 한 명의 발언에 의거하여 서울주재 미국 대리공사에게 본 사건에 관해 이야기 한 국왕의 차남의 증언.3. 전 농상공부대신 이범진의 증언.4. 왕실경비대의 책임자 중의 한 명인 조선인 부령 이학균 이학균(李學均). 본문의 И-ха-кюн, 즉 이하균은 이학균의 오자로 보인다의 증언.5. 참령 현흥택 현흥택(玄興澤)의 증언.6. 음모자들이 궁궐을 침략할 당시 당직근무 차 궁궐에 체류 중이던 러시아 신민 세레딘 사바틴(Середин-Сабатин) 러시아의 건축 기사.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 사바틴(Афанасий Иванович Середин-Cабатин, 士巴津)의 증언 그리고7. 서울주재 프랑스 주교, 구스타프 뮤텔(Gustave Mutel)의 증언.전반적 상황을 가능한 한 가장 명백하게 밝히기 위하여 본 사건과 직접적인 관계를 지닌 일부 최근 문서들을 제시하는 것 역시 의미 없는 행위는 아니라고 사료됩니다. 이런 문서에는8. 서울주재 영국 총영사 힐리어 힐리어(Walter Caine Hillier, 禧在明.) 씨가 작성한 일본 영사 면회 기록.9-10. 9월 26 러시아력. 서양력으로는 10월 8일을 말함. 당시에는 을미사변이라는 명칭이 없었다. 따라서 베베르는 을미사변을 9월 26일, 즉 서양력으로 ‘10월 8일의 사건’이라고 칭했다일 사건과 왕후의 폐서인에 관한 조선 외부대신의 공식 통첩 2건 그리로 마지막으로11. 서울에서 발행되는 일조신문(Японо-корейская газета) 한성신보(漢城新報)를 의미하는 것 같다 사본각하께서 상기 언급된 문서들을 통해 인지하고 계시는 바와 같이, 일본군 분견대, 평복을 입고 일본도를 착용한 일본인들, 역시 일본인에 의해 훈련받은 조선의 신식 군대 훈련대를 말함 등이 모든 방면으로부터 궁중으로 접근하고 있던 약 밤 3시 무렵 임박한 사변에 관한 불안한 소문이 처음으로 궁중에 알려졌습니다. 음모자들이 동시에 서로 다른 방향으로부터 궁궐 내부를 향해 성벽을 넘기 위하여 심지어 사다리를 준비했을 정도로 그들의 계획은 어느 모로 보나 치밀했습니다. 새벽 약 5시 무렵 그들이 궁궐 안으로 침입했습니다. 수차례에 걸친 산발적인 총성과 그 뒤를 이어 몇 번의 일제사격이 있은 후, 초병 근무 중이던 수비대가 도주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음모자들이 두 개의 무리로 나뉜 것으로 보입니다. 즉 일본인들은 왕후께서 어디에 계신지 위협을 가하며 물어보면서 곧바로 왕후의 처소로 향했습니다. 조선인들은 주변의 궁궐을 따라 배치된 상태로 밖에 남아 있었습니다. 여기서 지적할 것은 조선인 중 단 한명도 그곳에 위치해 있는 궁궐 관리들이나 군인들에게 총격을 가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하늘을 향해 사격했으며, 대부분의 탄환은 가장 인접한 곳의 사람이 살지 않는 건물 위층에 떨어졌습니다.여인들의 처소를 침범했으나, 왕후의 얼굴을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일본인들은 무방비상태의 궁녀들, 특히 왕후와 연령이 비슷해 보이는 여인들을 무차별하게 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궁내부 대신 역시 그곳에서 살해되었습니다. 이후 이어진 사건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기가 현재로서는 곤란합니다. 그 이유는 다수의 상반되는 증언들로 인하여, 그것들을 충분히 검토하고 사실을 과장과 허구로부터 구별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훗날에도 현실적이고 완전하게 본 사건의 상황을 복구하는 것이 가능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런 증언들 중에서 확실한 것은 동일하게 주장되는 사실은, 오로지 일본인들만이 살해했으며, 그들은 다름 아닌 왕후의 살해가 자신들의 목적이라고 완전히 노골적으로 소리쳤다는 점뿐입니다.첫 번째 경보가 있었을 당시, 즉 아직 해가 뜨기 전에 전직 궁내부 협판이자 최근 농상공부 대신의 직책을 수행하면서 국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던 이 이범진(李範晉)가 성벽을 뛰어 넘어 어렵사리 궁궐을 탈출하여 찢어진 머슴 복장을 입고 우리 공사관으로 도주했습니다. 그는 일본인들이 궁궐에서 학살을 자행하고 있는데 아마도 왕후를 시해하려는 것으로 보이며, 국왕께서는 미국과 러시아 대표가 지원 차 입궐해 주시기를 애타게 원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단 두 마디로 통보해 주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그의 뒤를 따라 궁궐에서 당직근무 중이던 세레딘 사바틴이 달려와 사태에 관한 일부 상세한 내용을 전달해 주었습니다. 이에 미국 대리공사와 저는 시간을 아끼려고 복장을 제대로 갖추지도 못한 상태에서 서둘러 공궐로 향했습니다.우리는 입궐에 앞서 미우라 조선주재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자작을 방문했습니다만, 그를 만나지 못한 상태로 궁궐에 도착했습니다. 그 무렵 첫 번째 공포가 진정된 상태였습니다. 궁궐 내에서 우리는 미국인으로서 수석 군사교관인 다이 다이(W. M. Dye) 장군을 발견했습니다. 그 뒤를 이어 르장드르 르 장드르(Charles W. Le Gendre, 李善得) 장군과 그레이트하우스 그레이트하우스(Clarence Ridgley Greathouse, 具禮). 고종의 법률고문, 총세무사 브라운 존 브라운(John Mcleavy Brown 柏卓安) 씨 등과 같은 고문들과 몇 명의 조선인 고관들이 점차 모여들었습니다. 이에 우리들은 국왕을 알현했습니다(보고서 №214 참조). 그 이후 대원군을 만났는데, 그는 매우 자연스럽게 우리들을 맞이했습니다. 대원군을 만나고 나오면서 저는 일본 공사에 관해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이 그 역시 여기에 있다며 그 장소를 가리켜 주었습니다. 제가 그를 만나 지난 사건에 관하여 그에게 질문을 던지자, 그는 본 사안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이전에 있었던 조선의 신식훈련대와 경찰 간의 충돌에 관한 논의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반론을 제기한 뒤, 우리 모두가 주장하자 오후 3시 30분에 일본 공사관에서 우리를 맞이하는데 동의했습니다.아침에 우리와 함께 하지 못함에 따라 우리보다 늦게, 즉 약 오후 2시 무렵에야 국왕을 찾아볼 수 있었던 영국 대표와 독일 대표에게 모든 사실에 관하여 통보해 준 뒤, 우리들은 약 오후 12시 30분 무렵 퇴궐했습니다.일본 공사관에서의 만남에는 예외 없이 모든 대표들이 참석했습니다. 일본 공사는 매우 냉정하면서도 거리낌 없는 모습으로 끝없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중 그는 전혀 이번 사태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으면서, 조선이 신식훈련대와 경찰 간의 충돌로 인하여 궁궐에서의 모든 소요가 야기된 것처럼 재차 그 문제에 관하여 논의를 전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저는 궁궐 내에는 전혀 경찰이 존재하지 않았던 만큼, 그가 언급하는 것이 본 사안과 관련이 없음을 지적한 뒤 그리고 불확실하고 용인하기 어려운 원인에 의거하여 궁궐 내에 일본인들이 발견되었으며, 다름 아닌 바로 그들이 살인을 자행했다는 사실에 그의 관심을 환기시킨 후, 우리 모든 동료들의 이름으로 그의 이야기를 중단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당혹해 하던 미우라 자작은 일본의 관행에 따르면 군부대 내에는 몇 명의 마부들이 실제로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사실에 결정적인 의미를 전혀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언급한 뒤, 재차 이 문제에 관한 논의에서 또 다시 벗어나려 했습니다. 이에 저는 미우라에게, 사안이 몇 명의 마부에 관한 것이 아니라, 고상하게 차려입고 무장을 한 일본인 30-40명으로 구성된 패거리 전체에 관한 것으로서, 그들을 본 목격자도 있고 필요한 경우 심지어 그들 중 일부를 그림으로 묘사할 수도 있으며, 얼굴을 알아 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다 더 강하게 성명했습니다. 그 외에도 우리는 첫째, 궁궐에서 무례함과 살인을 저지른 일본인들은 누구인지 그리고 둘째, 사람들이 언급하는 바와 같이, 대원군은 조선 병사들뿐만이 아니라 일본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교외에 위치한 자택에서 서울로 이동한 바, 그런 대원군을 호송하는 사안에는 물론 궁궐 내에서의 사건에 일본 군부대가 참가한 사실 등에 관하여 미우라의 설명을 기다리겠다는 점에 일본 공사의 관심을 기울였습니다.아무런 답변을 찾지 못한 미우라 자작은 반드시 사건을 조사하겠으며, 궁궐 내에 완전한 안정이 정착될 수 있도록 배려할 것을 보장한다는 말뿐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궁궐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외관 상 실제로 질서가 회복되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공사관에서의 만남에 참석한 이후 모든 외국 대표들이 받은 전반적인 인상은 미증유의 소름끼치는 현 사건이 일본인들에 의하여 전적으로 자행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영국 총영사는 저와의 은밀한 대화에서 위와 같은 의미에서 이미 런던으로 전문을 발송했으며, 영국 정부가 일본인들의 행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비록 예견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그는 표명된 확신 중의 단 한마디도 포기하지 않기로 확고하게 결정했다는 사실을 저에게 통보해주었습니다. 그러자 미국 대리공사 서리 알렌 알렌(Horace N. Allen,安運) 박사는 자신 역시 위와 같은 의미에서 전문을 도쿄주재 미국공사에게 발송하여, 휴가차 일본에 체류 중인 서울주재 미국공사 베베르의 보고서에는 실의 직급이 'resident minister'로 되어 있다. 이것은 공사의 하나 아래 직급이면서 대리공사의 하나 위의 직급인 변리공사에 해당된다 실 실(John M. D. Sill)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는 사실을 영국 총영사의 발언에 추가했습니다.왕후의 죽음에 관한 증언을 설명한 것에 대해 불가피하게 지적해야 할 사실은 아직까지는 그 증언들 중의 단 하나도 전적으로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대원군도 그리고 일본인들도 왕후가 생존해 있으며, 심지어 왕후가 아무런 위험에도 처하지 않았다는 소문을 유포하기 위해 지나치게 관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왕후 일파는 왕후의 시해와 시체 소각에 대한 가장 완전하고 정확한 세부 사실을 주장하는 것처럼, 음모자들의 예민한 경계심과 분명해진 본성을 약화시킬 수 있는 다른 방법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본 보고서를 마치며, 현재 우리는 전 세계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그런 정도의 범죄적 상황에 관여해야 한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평화의 시기에 타국 사람들이 자국 공사관일 수도 있으나 여하튼 자국 군대의 비호 하에 그리고 심지어 어느 모로 보나 그 부대의 지휘 하에 무리를 이루어 왕궁을 침입하고 왕후를 시해하여 시체를 불에 태워버리고, 또 다른 비열한 살해와 폭력 등을 총체적으로 저지른 다음, 그에 더하여 모든 이들의 눈앞에서 자신이 저지를 사실을 부정하는 후안무치함까지 지니고 있는 것은 단 한 번도 아직까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조선에 대한 유럽 열강의 무관심과 처벌이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계산하여, 일본인들은 이미 어떤 법에도 자신을 구속시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깊은 존경과 충성을 담아각하의 충복베베르

  • 알렉세이 보리소비치 공 귀하 베베르 1895년 9월 28일 보고서

  • 리스트여닫기 알렉세이 보리소비치 공 귀하 베베르 1895년 9월 30일 보고서 №502с.ж.95년 12월 5일1895년 11월 28일№214.1895년 9월 30일, 서울.1895년 12월 15일 석판 인쇄됨첨부 2.로바노프-로스톱스키 러시아의 외무대신 알렉세이 보리소비치 로바노프-로스톱스키(Алексей Борисович Лобанов 공 각하에게9월 26일 아침 궁궐에 도착할 수 있었던 일부 유럽인들은(보고서 №211을 보시오) 국왕의 거처로 들어갔습니다. 무거운 침묵의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광경은 다른 그 어떤 표현보다도 실제 상황을 더 잘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지난밤의 사건으로 심대한 충격을 받은 국왕께서는 말씀하실 힘도 눈물을 참으실 힘도 잃어버리신 상태에서, 예법에 어긋남에도 불구하시고 한 사람에서 다른 사람에게도 돌아가며 다가가시어 손을 잡으셨습니다. 국왕께서는 오직 자신을 떠나지 말아달라는 한 가지 바람만을 표명하실 뿐이었습니다.제가 공관으로 돌아왔을 때, 공관에 머물고 있었던 이제는 현직에서 물러난 전 농상공부 대신 이범진은 자신이 입수한 소문에 따르면 자기가 궁궐로부터 탈출하기 몇 분 전에(아마도 일본인들이 여성들이 거처하는 곳에서 유혈 폭력을 자행하고 있었던 바로 그 시각인 것 같습니다) 미우라 자작과 대원군이 국왕을 찾아가, 왕후를 그 직위로부터 폐하여 서인으로 삼는다는 왕명을 이끌어내려고 노력했다는 소식을 저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국왕께서는 팔을 내밀어 자신의 손가락을 가리키시며 “과인의 손가락을 자르라. 만약 이 손가락이 서명할 수 있다면, 그대들이 내게서 원하고 있는 것에 서명하도록 만들라. 그러나 그때까지 과인의 손은 그런 짓을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다음날인 9월 27일 대원군의 성명이 발표되었으며(첨부 1), 왕후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는 것에 관한 국왕의 포고문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첨부 2). 여기 두 건의 문서를 번역하여 동봉합니다.각하께서 여기 동봉하는 두 번째 문서의 번역문을 통해서 인지하고 계시듯이, 이 문서는 내용상으로도 그리고 수치스러운 형태로서도 선례가 없었던 것으로서, 현재 국왕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있는 인물들은 심지어 위에서 언급된 국왕의 저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관보에 의하여 발표된 이 포고문에는 현존하는 모든 관습이나 규정에 반하여 국왕의 성명으로도, 대형 국가 옥쇄로도, 국왕의 성명이 들어간 소형 옥쇄로도 인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포고문에는 오직 대신들 전체의 직인만이 날인되어 있으며, 그나마 그중 일부는 강압에 못 이겨 서명했다가, 나중에 사직했습니다. 탁지부대신 어윤중은 국왕의 진실한 충복이었으며, 매우 단호한 성격의 소유자로 유명한 인물이었는데, 그 스스로 아래와 같은 내용의 호소문을 작성하여 자기가 근무하는 탁지부의 출입구에 게재했습니다. “만약 백성들이 자신의 어머니인 국모를 살해하고, 어떤 일당은 9월 26일 사건의 과정에서 사용되었던 것과 같은 그런 비열한 방법을 이용하고 있다면, 그런 백성은 마땅히 멸망되어야만 하며, 나 스스로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산속으로 사라질 것이다.”28일 저는 미국의 대리공사와 함께 다시 입궐했습니다. 국왕께서는 대원군의 아들 이재면과 일부 다른 조선인들이 배석한 상태에서 저희를 인견하셨습니다. 의도적으로 국왕 옆에 통역관을 배치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통역관의 영어 능력은 형편없었는데, 국왕께서는 우리에게 아무 말씀도 하실 수 없었습니다. 단지 자신에 대한 감시가 소홀해지는 틈을 타서 아무것도 할 수 없으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배신자들 앞에서는 아무 말씀조차 할 수 없으시다는 것을 몸짓으로 보여주셨습니다. 29일 조선말을 약간 이해할 줄 아는 미국 대리공사가 홀로 입궐했습니다. 국왕께서는 더 자주 그를 방문하여 주고 자신을 버리지 않기를 바라신다며, 그런 의지를 외국의 대표들에게 전달해 달라고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국왕께서는 실로 위험한 상황에 처해 계십니다. 현재까지 일본인들의 오만과 전횡으로부터 자신을 약간이나마 보호하기 위하여 국왕께서는 궁궐 내에 자신을 위한 증인 자격으로서 다이 다이(Dye, William. M. 茶伊). 프랑스 출신의 미국인으로서 조선의 군사교관 장군, 닌스테드 닌스테드(Neinstead, F. H. 仁施德) 대령 그리고 러시아 신민으로서 건축가의 신분으로 궁궐을 출입하다가 후일에는 다이 장군의 보좌관인, 당직사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던 세레딘 사바틴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 사바틴((Афанасий Иванович Середин-Cабатин, 士巴津). 러시아의 건축기사(Середин-Сабатин) 등 3명의 외국인을 두고 계셨습니다. 최근의 사태가 발발하기 하루 전에 닌스테드 대령은 갑자기 발병하여 제물포에 가고 없는 상태였으며, 세레딘 사바틴은 간밤의 살육이 있은 후 궁궐에서의 근무를 사절했습니다. 이와 같이 다이 장군은 궁궐에 남은 유일한 유럽인이 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유일하면서도 국왕에게 진실로 충성을 다하는 한 인간이자 모든 음모의 목격자로 남게 되었습니다.다이 장군을 방문한다는 구실 하에 많은 외국인들이 입궐한 뒤, 국왕까지 알현하는 일이 잦아지자, 조선의 새로운 주인들은 당연히 다이 장군을 상대로 전반적인 적개심을 갖게 되었으며, 결국 그는 파면되었습니다. 미국 대리공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국왕을 위하여 미약하나마 이런 정도의 지지 세력이라도 유지하길 원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다이 장군의 초빙은 사전에 우리들 간에 결정된 협의에 의거하여 워싱턴 정부를 통하여 이루어진 것인 만큼, 자신의 정부에 미리 통보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의 지위를 변화시키는 그 어떤 조치에도 동의할 수 없다고 답했습니다.알렌 알렌(Allen, Horace Newton, 安連) 박사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오늘(9월 30일) 이루어질 국왕 알현의 석상에 동석할 것을 저에게 요청했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슬픈 단막극이 이어졌습니다. 국왕께서는 자신에게 명령이 내려진 내용을 큰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이후 통역관이 국왕의 말씀을 통역하는 순간, 국왕께서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시어 자신을 엄중하게 살펴보는 감시인들이 앞으로 약간 튀어나온 병풍으로 인해 자신을 보지 못하도록 하신 뒤, 자신의 불만과 자신이 방금 언급한 사실에 대해 국왕 스스로는 동의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몸짓을 이용하여 열심히 보여주셨습니다.이런 무익한 형세가 어느 경계에 까지 다다를 것인지, 그 무엇으로도 제재되지 않고 있는 일본인들과 그 앞잡이들의 이런 파렴치함이 과연 언제고 전적으로 중단될 수 있을 것인지를 예견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지금이라도 불행한 조선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충분히 주의력이 깊고 강력한 어떤 열강이 조선을 받아들여서 조선에게 매우 진실로 불가피한 평온을 종국적으로 가져다주는 것이라는 점을 조선의 여론이 인식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깊은 존경과 충성을 표합니다.각하의 충복 베베르

  • Communication Japonaise(일본의 통보문) 1895년 9월 30일 보고서

  • 5등관 베베르의 비밀전문 베베르 1895년 9월 30일 보고서

  • Communication Japonaise(일본의 통보문) 1895년 9월 30일 보고서

  • 베베르가 А.Б. 로바노프-로스톱스키 공에게 보낸 보고서 베베르 1895년 10월 13일 보고서

  • 9월 26일 사건에 대해 1895년 10월 2일 외무부에 보낸 4등관 ... 베베르 1895년 10월 2일 보고서

  • 베베르의 비밀 전문 베베르 1895년 10월 14일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