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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소장 근대한국문서

≪한국문제의 현황에 대한≫ 중장 운테르베르게르의 보고

Из записки генерал-лейтенанта Унтербергера ≪О современном состоянии корейского вопроса≫
  • 구분
    보고서
  • 저필자
    운테르베르게르
  • 발송일
    1898년 1월 (1898년 1월)
  • 문서번호
    АВПРИ,ф.150,оп.493,д.8,лл.9-25об.
  • 원소장처
    제정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
  • 대분류
    정치/외교(국제문제)/경제/사회
  • 세부분류
    정치세력/외교정책/국제관계/왕실관계/사회정책
  • 주제어
    아관파천, 한국상황, 을미사변, 기독교, 청일전쟁
  • 색인어
    한국국왕, 열강, 왕후시해, 아관파천, 훈련대, 러시아교관, 푸탸타, 소시(낭인), 미우라, 오카모토, 스기무라, 이노우에, 철도부설권, 광산채굴권, 외국학교, 가톨릭, 프로테트탄트, 영미선교사, 서재필, 비숍, 청일전쟁, 그레이트하우스, 뮤텔주교, 제물포, 부산, 원산
  • 형태사항
    34  , 타이핑  , 러시아어 

한국문제의 현황

 
주변에 많은 섬들이 부속된 한국반도를 영토로 점유하고 있는 한국은, 최근 15~20년 동안 여러 차례 이 왕국의 이런 저런 것들에 관심을 갖는 여러 열강들의 활동과 입장교환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한 나라들 중 일본은 오랫동안 비밀스럽게 혹은 공공연하게 동방에서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한국왕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습니다. 상선을 보유한 유럽의 열강들과 미합중국도 처음에는 이 나라가 부유한 나라라고 생각하여 주로 자신들의 공산품을 판매하고 한국으로부터 쌀과 금을 반출할 목적으로 한국의 개방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외국과의 교역을 위한 원산, 부산, 제물포의 개항은 곧 한국이 아주 부유한 나라라는 추측을 산산이 부숴 놓았으며, 그곳과 통상관계를 맺고자 노력했던 여러 국가들의 관심도 급속히 위축되었습니다. 여타 열강들과 함께 우리도 그 무렵에 한국과 통상협정을 체결했지만, 우리와 이 나라의 통상관계는 상대적으로 소규모의 교역관계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현재까지는 대부분 우리에게 부족한 도축할 가축을 한국의 북부지역에서 우리 영토로 몰고 오는 정도입니다. 이와 같이 어떠한 유럽 열강도 그리고 미합중국도 한국에 대한 특별한 영향력을 확보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1880년대 후반에 우리는 그곳에서 단지 한국의 업무를 주관하는 청국대표와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청국대표에 대항하는 일본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청국은 한국을 자국의 속국으로 생각하면서 무엇보다도 자신의 자존심을 충족시키려는데 그 목적이 있는데, 이는 한국정부가 매년 한차례 북경에 사절단을 파견한다는 점에서 잘 나타납니다. 이와는 반대로 일본정부는 한국에 자국의 잉여인구를 이주시키고 한국의 모든 수출상품을 자신의 수중에 장악하기 위한 보다 신중한 목적 하에 오래전부터 기반을 구축해 나가고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근접성, 동일한 생활조건, 특히 한국의 남부지방과 같이 매우 유사한 기후는, 일본인들로 하여금 다른 열강들의 영향력이 그들의 목적에 방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열성적으로 행동하게 하는 충동제로 작용하였습니다. 이를 위하여 그들은 이런저런 여러 수단을 동원하여 한국에 대한 청국의 영향력을 마비시키고자 하였고, 이는 전쟁에까지 이르게 하였던 것입니다.
러시아 그리고 러시아와 한국과의 관계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는 청일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일관되게 한국의 내정에 대해 철저히 불간섭으로 일관했으며, 단지 이 국가의 독립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주시하는 정도였다는 점을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우리는 여타 열강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이 청국의 속국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약 14년 전 한국에 우리의 특별 외교대표를 임명하여 파견했습니다.
육로 국경지역에서 우리와 한국의 관계는 항상 우호적이었으며 심지어는 한국 북부에 기근이 있었던 1860년대 말과 1870년대 초에는 굶주림으로 러시아로 월경한 많은 사람들을 먹여주었으며, 또한 그들이 우리 땅에 정착하는 것까지도 허용하였는데, 그들과 그 후손들은 러시아국적을 가지고 현재까지도 우리 땅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요인들로 인해 우리에 대한 한국인들의 호감이 증대되고 있습니다. 이는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들이 국경너머 옛 조국의 동포들과 자주 접촉하면서 그들에게 자신들이 러시아에서 향유하고 있는 보다 좋은 삶의 환경에 대해 소문을 퍼뜨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난해 봄에 서울에 체류할 때, 1895년 봄 남우수리스크 지역에 머물면서 그곳에 있는 한국인 마을 곳곳을 방문하였고, 한국백성의 평안한 삶을 위해서는 러시아의 권력 하에 사는 것이 현재상태의 한국에 남아있는 것보다 낫다라고 결론내린, 유명한 영국인 여류여행가인 비숍주 001
번역주 001)
이사벨라 버드 비숍(I.B. Bishop)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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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전언이 야기시킨 신선한 감흥이 여전히 서울에 남아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청일전쟁 전까지는 한국의 독립적 지위를 지지하는 것은 한국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열강들에 의해 특별한 어려움이나 정치적 혼란 없이 성공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청일전쟁 이후 급속히 변화되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우위를 점하게 된 일본은 청국에게 강제로 이곳에서의 양보를 요구했고, 청국의 양보는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간섭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더불어 일본은 요동반도의 양도를 요구했는데, 일본이 이곳을 확보한다는 것은 일본이 아시아 대륙에서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나라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다 건너 한국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 일본이 우선 육로를 통한 청국의 지배로부터 한국을 분리시키고 가까운 장래에 이 나라를 완전히 자신에게 복종시키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근거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경우 우리는 육지에서 우리와 가까운 거리에 위협적이고 호전적인 이웃을 두게 되는 것은 물론, 일본이 대한해협 연안지역을 점유하게 되는바, 이것은 우리에게, 시베리아 철도의 출발점이 있기도 한, 태평양 연안지역에서의 발전을 마비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반발하여 러시아는 할 수 있는 한 강력한 반대를 표명하였고 프랑스와 독일의 지원을 받아 일본이 요동반도를 청국에 돌려주도록 압박을 가했습니다. 당시 승리의 환희에 차 있던 일본정부는 현명하게도 양보를 통하여, 성공적으로 끝난 전쟁에서 생긴 모든 과실(果實)을 잃을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혁명이 일어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파멸로부터 국가를 보호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 혁명 분위기는 청일전쟁 전에 이미 충분히 성숙되어 있었지만 전쟁의 성공에 의해 일시적으로 진정되고 있었습니다. 일본정부가 열강들의 요구를 이행함에 따라 국민들로부터 일본정부를 파멸시킬 수 있을 정도의 분노와 지탄을 받았으나, 일본국민은 국가적 이익을 위해 자신의 입장과 분노를 감수할 만한 정도의 시민적 현명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국민들의 분노한 격정은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감추어져 있으면서 때에 따라서 공공연하게 나타나는 모든 외국인들, 특히 우리에 대한 분노감은 일본국민들과 정부에 여전히 남아 있었으며, 최근에는 일본 평민들이 외국인들을 모욕하는 사례가 점점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청나라와의 평화협정 체결 시에 보여주었던 자제심을 잊고, 요동 반도와 관련한 양보를 최대한 만회하기 위하여 한국에서 격렬하고도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전쟁기간 동안, 일본은 한국정부에 대한 청국의 영향력을 완전히 없애고 서울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 다음, 한국에서 자신들의 지위확보를 위한 개혁조치를 급속하게 진행시켰습니다. 즉 일본 교관들이 한국군을 조직하고 교육하기 시작하였고 모든 부처에 일본인 고문을 앉히고 그들의 동의 없이는 크던 작던 간에 국가업무의 중요사안에 대해서는 어떠한 정책도 수행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이 고문들은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지방 관료들을 지원하기 위해 각 지방에 파견되었습니다. 궁정 외곽 수비대는 일본군의 감시 하에 임무를 수행했는데, 이는 왕실을 포로로 삼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관료대신들도 일본인들의 구미에 맞는 자들만 임명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의 외모를 자신들이 적응한 유럽풍으로 바꾸기를 원하여 한국인들의 상투(특별한 조발 양식)를 자르고 유럽식 의복을 입도록 강요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지역의 풍습과 전통을 무시하면서 한국인들의 자존심을 짓밟는 강제적 방식으로 매우 신속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과거부터 증오의 대상이었던 일본인들에 대한 분노가 끓어올랐으며, 나라의 여러 지역에서 폭동이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매우 조잡하게 조직되고 미숙하게 지휘되었던 이 폭동들은 기대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은 폭동을 제압하기 위한 충분한 수의 병력을 한국에 배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약한 성격의 국왕은 서울에 주재하고 있는 일본대표들의 무례한 압력에 대항할 힘이나 수단을 지니고 있지 못하고 자신의 처지와 삶을 걱정하면서 그들의 요구를 전적으로 따르고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신들은 일본인들의 하수인이었습니다. 정열적인 왕후만이 유일하게 그들에게 최후의 저항을 펼쳤습니다. 그녀는 처음부터 그리고 마지막까지 한국에서 자행되는 일본의 압제를 분쇄하려 하였으며,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일본인들에 대항하여 투쟁하였습니다. 그녀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의 평가에 의하면, 그녀는 타고난 명석한 지혜와 여성으로서의 날카로운 본능으로 한국의 행복은 전적으로 러시아와의 친선과 후원에 달려 있다고 굳게 확신하였으며, 이러한 생각을 어느 누구 앞에서도 숨기지 않은 채 자신의 삶을 마감할 때까지 견지했다고 합니다.
일본인들은 한국과 관련한 자신들의 의도를 실현하는 데 있어 그녀로부터 중대한, 하지만 아마도 유일한 저항을 받자, 당시 이미 그들이 의도한 목적들을 아무런 장애 없이 달성하기 위하여 그녀를 살해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왕후살해 결정은, 몇몇 사람들이 추측하는 것과 같이 ≪소시(соши)≫주 002
번역주 002)
일본어로는 장사(壯士)를 의미하는데 낭인(浪人)들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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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불리는 광신적 실패자들인 인민주의자들에 의해 내려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서울주재 일본대표인 미우라 자작의 집에서 열린 회의에서 결정된 것이었습니다. 이 회의에는 미우라 자작 외에도 한국의 군부 및 궁내부 고문인 오카모토주 003
번역주 003)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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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주재 일본 공사관 비서인 스기무라주 004
번역주 004)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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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 참석하였습니다. 시해를 실행하기 위하여 스즈키, 시케모토와 아오야마 겐조가 지휘하는 30~40인으로 구성된 소시 도당들이 이용되었습니다. 음모의 결행은 1895년 10월 중순으로 예정되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정부가 일본인 교관들에 의해 훈련된, ≪훈련대≫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한국군의 해산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자, 음모실행을 서둘렀습니다. 같은 해 10월 8일 새벽 일본군 병력이 소시 도당들과 함께 궁궐로 난입하여 궁궐 수비대 일부를 살해하고 이날 왕가가 머물고 있는 곳으로 급히 향했습니다. 일본군 병사들은 장교들의 지휘 하에 작은 궁궐을 신속하게 포위하고 무례하게도 검을 든 소시 도당을 투입하여 왕후를 찾게 했습니다. 궁녀들은 그들에 의해 머리채를 잡힌 채 끌려 나와 갖은 고초를 당했으며, 왕후가 어디 있는지 추궁 당했습니다. 국왕 자신도 세자와 함께 궁녀들과 마찬가지로 갖은 온갖 모욕을 당하였습니다. 그들의 눈앞에서 국왕에게 충성하는 인물로 알려진 궁내부대신주 005
번역주 005)
이경직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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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살해되었습니다. 마침내 소시들이 궁의 마지막 거처 중 한 곳에서 이불로 몸을 숨기려하고 있던 왕후를 찾아 공격하였습니다. 그녀는 자상(刺傷)을 입고 의식을 잃은 채 쓰러졌습니다. 당시 그들은 그녀를 널빤지에 눕혀 바로 그 이불로 덮은 채 마당으로 끌어냈습니다. 거기에서 즉시 가까운 공원으로 옮겼으며, 그녀의 몸에 작은 장작들을 던진 후 석유를 뿌리고 불태웠습니다. 시신 중에서 불에 타지 않은 일부 뼈만이 남았는데, 이 뼈 조각들 중 머리 앞부분과 손뼈가 약간 우묵하게 들어간 땅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비록 부상은 당했지만 살아있는 상태였던 그녀가 불을 피하기 위하여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땅에 얼굴을 파묻으려 했다는 추측을 확신하게 합니다. 이와 같이, 일본에 충성하는 일본공사의 음모에 따라 일본인들에 의해 야만적인 한국왕후 시해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추악한 행위를 표현할만한 적절한 단어는 없습니다.
이 사건에 일본인들이 주범으로 참여했음을 은폐하려는 미우라 자작의 모든 기도는 헛된 것이고, 일본정부는 이 범죄행위 참가자인 미우라 자작, 오카모토, 스기무라와 소시 도당 등에 대한 수사를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후에 공개된 일본법원의 판결문에는 미우라 자작, 스기무라, 오카모토 등이 한국 왕후를 살해하고자 음모를 꾸몄으며 이의 수행을 위해 일본군 병력의 호위 하에 소시 무리가 동원되었다는 사실이 아주 명백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판결문은 일본군 병력과 소시들이 궁궐로 난입하는 시점에서 갑자기 멈추고 있습니다. 그 다음 판결문은 이 범죄행위를 수행한 개인들에 대한 사실 확인, 즉 그들이 실제로 범죄를 저질렀는가에 대해, 그런바 없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법원은 그들 모두를 무죄로 방면했습니다.
일본법원이 이 사건과 관련하여 보여준 놀라운 후안무치는 일본인 자신들에 의해서도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후에 한국국왕의 명령에 따라 실시된 추가조사에서 이 범죄의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졌습니다. 한국의 외부고문인 K.R. 그레이트하우스가 직접 감독하는 가운데 조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왕후가 시해되기 한 달이 채 되기 전쯤 전(前) 공사인 이노우에 백작은 궁중에서 왕후가 위험성에 대해 말하자 이와 관련하여, 만약 누군가가 왕실에 반대하여 변화를 꾀한다면, 필요한 경우 일본정부가 무력으로 왕실을 보호할 것이라고 왕후에게 단언했다고 합니다. 한 달 후 왕후는 바로 이 일본공사의 음모에 의해 일본인들로부터 야만적으로 살해되었으며, 이 범죄는 일본군 병력의 호위 하에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여타의 문명국가 국민들과 문화적 수준에서 동등한 지위를 인정받으려 하는 이 민족이 보여 준 분개할 만한 배신행위, 이 사건과 관련하여 일본법원이 보여준 최고수준의 파렴치한 행위, 그리고 일상생활에서나 언론에서 행하는 외국인에 적대적인 일본인들의 방자함과 무례함은 일본에 살고 있는 유럽인들 사이에 자주 회자되는 주제이며, 일본에서 영사재판권이 종료되어 그곳에 살고 있는 문명국가들의 모든 국민들에게 일본법이 적용될 경우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왕후가 시해된 뒤 일본인들은 한국과 한국궁궐에서 보다 무도하게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국왕은 점차 더 자신의 목숨에 대한 위협을 느끼게 되었으며, 그는 일본 통치권의 압제에서 벗어남으로써 자신이 겪고 있는 극도로 끔찍하고 위험한 상황을 해결하고자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주변으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한 채 단지 일본인의 앞잡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국왕에게는, 재작년 2월 11일 그가 감행한 바와 같이, 궁궐에서 탈출하여 러시아의 보호 하에 있는 것만이 유일한 방안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측근들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매일 아침 궁궐에서 시내로 나가는 궁녀들을 나르는 여성용 가마를 이용해 왕세자와 함께 탈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의 풍습에 따르면 여성용 가마를 직접 확인해서는 안 되었기에 보초병들은 궁궐 문에서 그들을 쉽게 통과시켰습니다. 만일 보초병들이 살짝 엿볼지 모르기 때문에, 국왕과 왕세자가 뒤에 앉아있는 것을 숨기기 위해 각각의 가마 앞쪽에는 궁녀가 앉아 있었습니다.
한국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바로 그날 국왕은 보다 조용하고 안전해질 때까지 러시아 공사관에서 러시아의 보호를 받으며 머물 것이라는 성명문을 백성들에게 발표했습니다. 대신들 중 일부가 교체되었고 몇몇은 도주했는데, 그들 중 일본군과 소시들이 궁궐에 난입할 당시 왕후를 도주하지 못하도록 거짓으로 안심시킨 한 명은 일반 민중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그의 시신은 서울 거리에서 끌려 다니는 모욕을 당했습니다.주 006
번역주 006)
전 총리대신 김홍집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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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이 있은 후 일본인들의 영향력은 곧 감소되었지만, 그들의 정부는 요동 반도문제 때 보여준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자존심에 심각한 타격이 가해지지 않도록 현명하게 상황에 대처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상실한 것을 회복하기 위한 호기를 기다리며 자중했습니다. 국왕은 우리 공사관으로 도피한 직후 곧 러시아 교관들의 지휘 하에 한국군을 조직하기 위해 힘껏 움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침내 이곳에서의 교관파견 업무를 초기부터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문제를 연구하고 해결할 목적으로 한국으로 출장 왔던, 현재는 소장인, 총참모부 대령 푸탸타의 총지휘하에 프리아무르군관구에서 선발된 3명의 장교와 10명의 하사관으로 하는 자유고용형식의 교관단이 구성되었습니다. 우리의 교관들이 4개월간 일명 ≪국왕 호위대≫라 불리는 1,000명으로 구성된 대대주 007
번역주 007)
시위대를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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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훈련하여 이룬 훌륭한 결과를 보였지만, 푸탸타 대령은 공개적이고 비밀스러운 다양한 유형의 장애들과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저는 푸탸타 대령이 직접 기안한 러시아교관단의 기획안, 즉 군사 분야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면서 약 160명의 장교를 양성할 수 있는 소규모 사관학교 설립계획에 대해 소문을 들은 일본인들이 느끼는 불안과 우려를 전적으로 이해합니다. 이 계획은 재정적 능력과 현재의 군사 수에 부합하는 6,000명으로 구성된 새로운 군대를 창설하겠다는 한국정부의 염원을 시발점으로 삼고 있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국왕이 우리 공사관을 떠나 러시아교관들에 의해 훈련된 부대가 경비하는 새로 축조된 궁궐에 기거하면서 종결되었습니다. 이외에도 국왕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궁궐 내 자신의 숙소부근에 러시아 장교뿐만 아니라 낮은 직위의 러시아 교관들도 배치했습니다.
이렇게 국왕이 이미 우리의 직접적 영향력에서 벗어났을 때, 러시아 교관들의 초빙에 대한 문제가 내각회의에서 논의되었습니다. 비록 국왕과 군부대신이 이 계획에 찬성했지만 다른 대신들과 2년여 전 미국공사로 있던 외부대신이 이에 반대했습니다. 이러한 의견대립 원인은 무엇보다도 이 계획이 실현되었을 때 자신의 영향력이 가까운 장래에 심각하게 위협받을 것이라는 점을 완벽하게 자각한 일본의 간계에서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대표 가토주 008
번역주 008)
가토 마스오(加藤增雄), 주한 일본공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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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서울주재 열강대표들을 만나 적극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최소한 심정적 지지를 호소하면서 이 계획을 무산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협박이 시작되었습니다. 가토는 국왕을 찾아가 국왕에게 만약 이 계획이 채택되면 러시아는 그 교관들을 이용하여 짧은 기간 안에 한국군을 자신의 영향력 하에 길들이고 이 국가를 자의적으로 통치할 것이라고 확언했습니다. 마침내 서울 시내에는 만약 이 계획이 실현되면 일본군이 궁궐로 침입하여 러시아 교관들을 살해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소문을 퍼뜨리기 위해 일본공사관의 지시 하에 일본인 거주구역에 살며 한국인들과 관계를 가지고 있는 다양한 유의 많은 인력이 동원되었습니다. 주변으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일본인들로부터 국왕시해 등 각종 위협에 놀라면서도 국왕도 그의 측근들도 그리고 대신들도 이러한 소문들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외에도 러시아와 일본이 한국에 대한 양국의 의무에 대해 1893년 여름 체결한 협약이, 그 당시에 일본은 이 협약에 거의 어떠한 가치도 부여하지 않았었지만, 일본에게 적지 않은 위력을 높이는데 도움으로 작용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두려움이 궁정과 국가 전체에 다시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모든 간계 때문에 우리는 국왕과 대신들에게 교관에 대한 계획을 수락하는 것은 나라의 안녕과 국왕 및 국왕 가족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고, 이와 반대로 일본체제로 간다면 이와는 정 반대의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조용한 설명만으로 대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이익이 한국의 이익과 항상 일치하지는 않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상황이 닥치게 될 경우, 한국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이웃국가들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한국국왕과 대신들로 하여금 우리 교관들에 대한 계획에 회의적으로 임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러시아가 한국에서 스스로 물러날 경우에 나타날 일본으로부터의 심각한 불만과 협박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 대리공사에게 만일 계획전체를 성사시키기 어렵다면 부분적으로, 즉 교관의 수를 장교 3명과 하사관 10명으로 하고 그들에게 다시 한국군 부대의 훈련을 위탁하도록 한다는 교관 강화계획이 제시되었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대리공사가 받은 훈령이 얼마만큼 정확하고 명확한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제 견해로는 우리의 중앙정부에서 매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수행되는 업무의 방향을 올바로 잡기 위해서는 외교대표들의 보고서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중앙행정기관에 지역에 대한 개인적인 연구나 경험을 통해 동방의 상황을 자세히 아는 인물을 임명하는 것이 매우 유용할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짧은 시간이라도 해당국가에서 체류하는 것은 중요한 가치를 지닙니다. 단기 체류기간 동안 일어나는 주변 인물들과의 대화, 우연히 만나게 되는 일군의 외국인들 또는 그들과의 의도적 만남을 통한 대화는 지역문제 및 지역이익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곳에서, 말로는 전해지지 않는 커다란 인상을 얻을 수 있으며, 그에 더하여 그것들은 우리 지식의 범위를 확대시키는 동시에, 우리가 관심 갖는 다양한 대상 및 문제들과 접할 수 있게 해줍니다. 이렇게 해서 비록 짧은 기간 동안 획득한 것이라 할지라도 축적된 정보들을 만약 종이에 기록할 경우 매우 크고 두꺼운 책이 될 수 있을 것인바, 이는 아마도 주관적 관점에서 쓰여 질지 모르는 여타의 다른 보고서들과는 비교할 바가 못 될 것입니다. 저는 이와 관련하여 과거에 제 눈에 비쳤던 다음의 경우를 회상하고자 합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세스타코프(Шестаков) 장군은 1886년 수주일 동안 블라디보스토크에 체류하며 그곳의 해군 및 군사 분야를 접하였습니다. 처음 3일간 그는 업무에 관해 거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곧 전(前) 프리아무르관구 총독이었으며, 이미 고인이 된 시종무관장 코르프(Корф) 백작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제가 여기에 왔을 때 이 지방의 모든 서적을 접하였고, 심지어 저는 이 지방의 모든 유언비어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만일 한 눈으로만 지방을 바라본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는 가능한 한 이곳의 해군을 감축할 목적으로 여기에 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스스로의 과오를 인식할 만큼 충분한 시민적 현명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곳의 함대를 감축해서는 안 되며 이와 반대로 발트해에 있는 모든 최고의 함대를 태평양으로 이동시켜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점에서 우리와 일본을 비교할 때 일본은 커다란 우위를 점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매우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한국의 상황을 잘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일본의 전체관료들은 일본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국가들 간 국제관계의 모든 분야를 탐구했습니다. 따라서 한국에서 어떠한 상황이 전개되고 어떠한 사건이 발생한다 할지라도, 일본과 한국에 있는 일본대표들이 단 일순간의 지체도 없이 그것을 알아내고 또 그것에 어떻게 임해야 하는지 즉시 결정한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닙니다.
교관 문제로 다시 돌아가서, 비록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이웃나라들의 군사력 발전을 돕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상대적으로 이웃나라들에 이로운 것이고, 가까운 장래에 그 이웃과 영토문제를 필두로 하는 불화를 만들게 된다는 것을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정부의 행동양태로 판단하건데, 한국은 그러한 유형의 이웃에 포함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국이 독립적이도록 항시 배려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나라의 내부적 질서를 유지할 수 있고, 일본이 취하고 있는 한국에 대한 간섭 명분 중 하나인 일본공민들을 보호한다는 구실을 제거할 수 있는 일정한 군사력이 필수적입니다. 이와 함께 산악국가에서 6,000명의 잘 훈련된 병력은 침입하는 적들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현 왕조의 지지 세력으로 되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단호하게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국왕에게 부여할 것입니다. 이러한 군사력이 없으면 정부는 언제나 허약할 것이며 모든 외부의 영향에 종속될 것입니다. 일본이 한국과 오랫동안의 교역에 관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고, 특히 그 남부지방에 약 16,000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음을 염두에 둔다면, 이 나라에서 러시아와 일본의 영향력 분할은 도저히 성공할 수 없습니다. 참고로 토지의 비옥함과 거주의 안락함이라는 측면에서 한국의 남부지방이 압도적인 의미를 지니며, 북부지방은 훨씬 황폐하고 빈곤합니다. 따라서 1896년 일본과 맺은 조약에 명백하게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러시아로서는 한국의 독립원칙을 견지하고 내세우는 것이 유리하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입니다. 러시아가 자신의 의무를 양심적으로 견지한다면 일본도 동일하게 우리와 같이 양심적으로 행동할 것이라는 생각은 사실과 거리가 멉니다. 이와는 반대로 교관과 관련된 최근의 사건은 일본이 이 조약을 가지고 한국에서 우리 활동의 자유를 속박하고, 상황에 따라 일본에 보다 유리하게 작용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조약이 공표된 직후 서울의 일본공사는 즉각 이 조약 내용을 한국정부에 통지하였으며, 자신들에게 한국정부의 입장을 알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한국정부는 자신이 참여하지 않은 두 열강의 조약은 어떠한 구속력도 없으며, 한국정부는 앞으로도 활동의 자유를 유지할 것이라고 답하였습니다. 이러한 대답은 일본에게 유리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각 부처와 궁궐에서 상대적으로 주요한 영향력을 갖게 되는 자에게 한국을 제공한다는 것인데, 당시 서울에서 재차 증가되고 있었던 일본인들의 영향력은 이러한 흐름에 있어 앞으로의 성공을 약속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대항으로 한국 국왕과 과거 우리의 서울주재 대리공사 간에 만들어진 호의와 우애로운 관계가 버팀목으로 작용하였습니다.
지난해 4월 제가 국왕을 알현하였을 때, 그는 자신이 러시아 공사관을 피신처로 구할 수밖에 없었던 힘든 시기에 자신에게 보여준 호의와 지원에 대해 형용할 수 없는 감사를 각별히 언급했으며, 덕분에 현재 한국이 점차적으로 안정되고 질서가 유지되는 나라로 변하고 있다는 자기의 견해를 피력했습니다. 또한 국왕은 자기 자신과 한국에 대한 그와 같은 호의적인 관계와 함께, 처음부터 그와 서울주재 러시아대표 사이에 현재도 유지되고 있는 진심어린 관계를 부언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가 퇴각하고 일본의 무단통치 아래 완전히 함몰될 수 있다는 국왕과 대신들의 극심한 공포심이, 그들을 항상 우리가 원하는 대로만은 행동하지는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요즘 한국이 빈곤한 나라이며 한국백성들은 게으르고 만사태평하다는 말을 자주 듣고 있습니다. 그러한 이야기들은 이 나라에 외국인들이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고, 그들이 한국에서 얻을 수 있다고 상상하였던 터무니없는 부(富) 대신에, 이 나라의 보다 소박한 상황을 확신하고부터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나라는 산지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남부와 남서부에 곡물의 제왕인 벼농사에 적합한 토질과 기후를 지닌 매우 넓은 평지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쌀은 영양가치 상 세계 최고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그들이 자신들의 쌀 중 최고로 치는 질과 외관상 좋은 쌀은 고베 부근의 한 지역에서만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한국은 수출할 수 있는 특별한 품목이 없으며, 가장 주요한 수출 품목은 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이 나라의 문화적 발전수준이 낮은 단계에 머물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현재 이미 충분히 밝혀진 바로는, 이 나라는 금광과 석탄산업 발전과 목재수출의 큰 잠재력이 있습니다. 게다가 한국은 과거 도자기 생산이 활발하였고 이 도자기들은 일본으로 수출되었습니다. 서울의 모든 상품판매대와 가게들은 지역에서 생산된 빈약한 수량의 물품들만이 있고 도대체 외관상 볼품이 없어 큰 손상을 입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도처의 상품판매대에서는 외국제품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국내생산품의 비참한 상태는 부패한 행정관청이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대신들은 임명되면 최우선으로 자신의 부를 챙기고 자기의 친척과 측근들에게 부유해질 기회를 줍니다. 이전 관료가 해임되고 새로운 관료가 그 자리에 임명되면 그들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백성들을 착취합니다. 이들은 새로운 대신이 자리를 맡게 되면 자신들은 그 자리를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식으로 모든 관료들은 전횡을 저지르고 있는데, 이러한 간계는 궁궐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온 나라에서 자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그들이 생산한 대부분을 빼앗긴다는 것을 잘 알기에, 빼앗기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단지 살아가는데 필요한 만큼만 일하고 있습니다. 관료들의 이러한 행태는 백성들의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하게 만들어 때때로 한국의 여기저기에서 백성들이 봉기를 일으키게 하고, 잘 조직된 경찰과 군사가 없는 상황에서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 중앙정부를 분주하게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사실상 선량하며 외부의 낯선 영향력에 쉽게 굴복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선량함은 빈곤한 친지들 혹은 인척들에게 행하는 도움을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어떠한 상황 때문에 삶의 수단을 박탈당하면 그들은 비록 먼 친척일지라도 곧 보다 부유한 친척들 중 한 명에게 보내지며, 그곳에서 상황이 호전될 때까지 양육됩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에서 걸인을 만나는 경우가 매우 드문 이유를 설명해주는 중요한 사례 중 하나입니다.
한국이 외국의 열강들과 보다 가까운 관계를 형성하고 그 나라들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기 시작했을 때, 정부는 행정 구조를 정비하는 정책을 취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부는 이를 달성할 목적으로 군사교관으로 미국인을 초빙하는 등 다양한 정부기관들에 외국인 고문을 초빙했습니다. 대개의 경우 업무에 대한 외국인 고문들의 영향력은 그들의 개인적 자질과 자기 나라의 공사관이 지닌 영향력에 의해 크게 좌우되었습니다. 고문들의 조언이 대신들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는 경우는 아무런 결과를 내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여러 기관 중에서, 청국이 한국에 대한 영향력이 압도적일 때 설립된 한 기관은 국가의 재정상황을 실제적으로 호전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 기관은 유럽과의 교역을 위해 개방된 항구들에 설치된 세관들로 청국의 주요 관세행정기관의 감독 하에 청국에 있는 동일기관을 본떠 만들었습니다. 세관 관리들은 유럽인들로 임명되었습니다.
청일전쟁 이후 이에 대한 감독뿐 아니라, 한국에 관한 청국의 모든 영향력이 소멸되었습니다.
일본이 통치권을 행사할 때 고문 자리는 중앙 관청뿐 아니라 지방기관들까지 모두 일본인들 차지였습니다. 그들은 국왕이 우리 공사관으로 피신하자, 직책을 상실하였으며, 그 자리들에는 다시 유럽인들이 임명되었습니다. 어떠한 문제들, 특히 외국인과의 거래와 관련된 문제의 결정 시에는, 절차에 따라 한국의 대신들은 그들 기관에 소속되어 있는 고문들 뿐 아니라 서울에 주재하는 모든 열강의 대표자들로부터도 조언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들 모두는 제기된 문제를 자기나라에 유리한 방향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한국정부는 외국인과 관계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일정한 방향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오늘 실행하는 데 실패한 것이, 바뀐 상황 하에서는 이전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범위인데도 실행하는데 성공하기도 합니다. 한국의 중앙행정기관이 보여주는 이와 같은 신뢰성 부족과 자가당착은 그 직접적인 결과로 정부의 허약성을 야기하는 한편, 러시아가 이기적 목적으로 한국에 거의 손해를 입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러시아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는 한국국왕도 전적으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불안한 시기에 모든 나라의 대표자들은 자국민들에게 각종의 혜택이나 이권을 주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즉, 미국인들은 서울로 향하는 항구인 제물포부터 서울까지의 철도부설권을 획득하였으며, 프랑스인들은 서울에서 평양까지의 철도부설권을, 독일인들은 석탄광 개발, 우리는 한국 북부의 한 도주 009
번역주 009)
함경도를 의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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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압록강 및 두만강 연안의 금광개발과 삼림벌채권을 획득하였습니다. 제가 서울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블라디보스토크에 소재한 한 상업회사가 시도하던 원산 변방의 금광과 석탄광 채굴권을 획득하기 위한 노력과 한국의 항구와 연결되는 새로운 항해권에 대한 청원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당시 부산에서 서울까지의 철도부설권을 획득하려는 일본인들의 모든 움직임도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요구가 받아들여진다면, 일본은 한국에서의 활동을 위해 중요한 전략적 이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한국에 대하여 외국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는 또 다른 중요한 분야는 선교활동, 자선기관, 학교 및 일본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외국과의 교류입니다. 우선 한국의 일반백성들에게 자신의 영향력을 확산시키기 위해 강력한 도구인 선교사들을 보유한 파리 외방선교회(Societe des missions etrangeres)를 들 수 있습니다. 그 지도자는 강철 같은 의지와 놀랄만한 정열을 가지고 있는 뮤텔(Mutel) 주교입니다. 그는 한국, 특히 주로 남부지방의 각지에 있는 12개의 선교회를 통솔하면서 자신의 가톨릭 동료들과 함께 헌신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뮤텔은 20년 남짓 한국에 살면서 명민한 지혜를 가지고 한국과 한국 백성들의 성품에 통달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이미 3만여 명의 한국인이 가톨릭에 귀화하였으며, 다시 개종하는 경우는 매우 적다고 합니다. 이는 믿을 만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리에 충실한 가톨릭 선교사들이 청국에서 한 바와 같이 한국에서도 용의주도하고 철저하게 활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차례에 걸쳐 당했던,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버려야 했던 어떤 박해도 그들의 활동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으며, 현재 그들은 과거 어떤 때보다도 강화되어 있습니다. 저는 뮤텔 주교와의 대담을 통하여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화될 경우 가톨릭 선교활동이 심각한 장애를 겪을 수 있을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그가 러시아편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백성들에 대한 가톨릭 선교사들의 영향력은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은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며, 3만여 명의 개종자들이 이에 대한 절대적 원조자가 될 것으로 판단됩니다. 서울에는 뮤텔 주교의 감독 하에 300명의 빈곤한 한국 아이들을 위한 고아원이 있습니다. 이 기관의 운영자는 자원한 프랑스인 수녀들이었습니다. 이 수녀들의 활동은 진정으로 찬양할 만합니다. 고아원은 매년 단지 12,000프랑의 정기보조금을 받아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본적 자금 외에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기부금은 매우 적습니다. 그에 따라 그녀들은 평범한 한국의 부엌에서 사용하는 낮은 가격의 생활용품들을 가지고 좀 나이가 있는 고아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입니다. 자신들의 마지막 한 조각을 아이들에게 나누어주며, 유아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자신들에게 필수적인 것조차도 스스로 거절하고 있습니다. 수녀들은 보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소녀들 중에서 자신들의 어렵고 힘든 고아돌보기 업무를 보조해 줄 수 있는 보조원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그녀들은 고아원에 들어오는 젖먹이들을 양육하기 위해 첫해에는 한국 가정에 돈을 지불하고 젖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녀들은 한계를 모르는 인내, 사랑과 헌신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아무런 불평 없이 자신들의 일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과도하고 힘에 겨운 일, 부족한 휴식과 열악한 급식 등으로 건강을 해치고 매 순간의 긴장이 신경체계를 분열시킴으로써 자주 너무나도 빠르게 죽음을 맞이하며, 그로써 자기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헌신했다는 가장 큰 훈장을 지니게 되는 희생자를 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수녀들에게 스며들어 있으며, 그들만이 사람에게 헌신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가장 깊은 사랑과 헌신,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의 진정한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수녀들이 어떠한 인내심을 가지고 때와 질병, 오물로 뒤덮이고 벌레들이 득실대는 누더기를 걸친 아이들을 받아들여 보살피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아원에서는 일정한 연령에 도달한 남자들을 한국인 가톨릭교도들에게 노동자로 보냅니다. 여자들도 혼인연령이 되면 선교사들의 지명에 따라 가톨릭 교인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이 젊은 세대가 자신들의 선교사들의 동업자를 통해 부여되는 선교회의 지시를 절대 완수하는 규율을 지닌 맹신적 가톨릭교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울에 설립된 영국과 미국병원들에서도 빈곤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기관들의 경우 고아원과 크게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원한 모든 간호원들이 안락한 환경에서 활동하며, 이 기관들을 위한 재원도 매우 풍부하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개신교 선교사들, 특히 미국 선교사들의 활동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톨릭 활동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교리를 위해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모든 박해를 견디는 모습을 여기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자기 자신의 안녕을 염두에 두며, 선교회의 활동도 자신들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사업, 즉 잘 보장된 생계수단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 중에서 어떠한 특정한 신학교육도 받지 않은 채 일정한 실무적 준비만을 즉, 대체로 잘 설비된 학교에서 일할 준비만을 마친 사람들을 자주 만날 수 있습니다. 미국 선교조직들 중 다수가 풍족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파견되는 선교사들에 대해서도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선교조직들은 심지어 직책을 부여하면서 중년이면서 못생긴 여자친척, 혹은 조직의 유력한 인사와 가까운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는 의무사항을 제시하는 경우에도 이 직책을 바라는 사람이 항상 넘쳐납니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건 미국인 선교사들은 선교회에서 부여한 임무의 이해관계에 앞서 개인적인 이해관계 혹은 안녕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가톨릭 선교사들이 자신의 삶 중에서 가장 어려운, 심지어는 생명까지도 위협받는 상황에서 자신의 직분을 수행하고 있는 데 반하여, 미국인들은 최근 청일전쟁 당시 원산에서 자신에게 어떠한 심각한 위험이 발생하지도 않은 경우에도 본국으로 도주했습니다.
이제 한국에 대한 외국인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요 요소들 중 하나인 학교문제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 내 선교사들의 집결지에 있는 학교들을 제외하고도 서울에는 모든 유형의 학교가 설립되어 있습니다. 서울에는 남자와 여자를 위한 가톨릭 및 개신교의 선교학교뿐 아니라, 정부가 설립한 외국어학교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학교들로는 러시아학교, 프랑스학교, 영국학교, 미국학교와 일본학교가 있습니다.
정부는 이 학교들을 위해 건물, 교사들의 급료와 많지 않은 교육기재를 제공하고 있지만, 그 외의 사항에 대해서는 정부의 관여가 금지되어 있으며, 해당 열강의 대표자들이 관여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정부가 설립한 외국어학교에서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에 대해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는 현실입니다. 정부는 학교들을 설립하면서 모두에게 동일한 수준의 혜택을 제공하였는데, 아마도 그 결과를 기다리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떻든 한국정부가 얻는 가장 중요한 이익은 외국어 구사능력을 갖춘 일정 수의 한국인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각 학교의 학생들이 각 정파를 위한 인물로 교육되고 있으며, 거기에 더해 향후 분란의 씨앗이 준비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각 학교 학생들의 수는 40명에서 100명 정도입니다. 1896년 3월에야 설립된 러시아학교에는 1897년 4월에 11세에서 34세까지의 학생 44명이 재학 중이었습니다. 많은 수의 학생이 16세에서 21세 사이입니다. 1년 동안 학교에 다닌 학생들은 이미 러시아어로 말하고, 읽고, 썼으며, 산수의 4개 연산법과 일정한 지리적 지식을 습득했습니다. 학교에는 군사체조가 도입되어 있습니다. 프랑스학교에서는 프랑스어에 대한 동일한 결과를 볼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학교에는 군사체조가 도입되지 않았지만, 소년들은 나이에 따라 실외에서 다양한 놀이들을 했습니다. 한국인들을 위한 일본학교는 좋은 시설과 완벽한 교사들을 보유하고 있고, 교육 프로그램도 매우 충실했는데, 프로그램에는 군사체조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학교와 영국학교가 가장 양호한 상황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넓은 건물과 풍족한 교과서, 정돈된 학교시설과 잘 준비된 교사들은 이 학교들이 크게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는 영국학교가 특히 걸출하였습니다. 영국학교는 위의 예 말고도 모든 학생들이 영국식이지만 모자에는 국가휘장이 부착된 동일한 교복을 착용하고 있습니다.주 010
각주 010)
지금은 러시아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로 실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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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학교의 모든 학생들은 세련되고 깨끗하고 정돈된 복장을 하고 있으며 품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영국 공사관 소속의 위병 하사관이 군사체조를 담당하고 있으며, 저는 의욕적인 체육활동, 소총사용 및 열병의 정확성 등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학생들의 바른 자세와 동작은 군인과 완전히 동일했는데, 이런 사실은 그들이 훈련장에서 행군 연습을 할 때 보조를 유지하는 방법에서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그들의 훈련을 위해 보급된 소총은 레밍톤이었습니다.
외국인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서울 소재 학교들의 현재 상황은 한국에게 매우 유해한 결과를 불러 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모든 학교가 공통된 교풍과 방향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며, 어떤 학교들은 민족적 특징을 표방하고 있는 반면, 그와 정반대로 세계주의적인 모습을 보이는 학교들도 있습니다. 각 학교는 자기 고유의 목적을 추구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자신의 학생들에게 학교가 속해 있는 국가의 국가체제를 신봉하게 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 영국, 일본학교 등에서는, 한국 스스로가 자신의 문화적 발전단계에서 그러한 정치체제를 수용할 능력이 얼마나 있는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학생들에게 인민대표들의 감시에 기반을 두는 정치체제의 우월성을 주입시키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의 나약한 성격과 모든 외부적 영향력에 대한 그들의 순종적 태도, 그리고 다른 측면에서는 황인종 특유의 과격함과 성급함을 생각할 때 또한 사실상 학문적으로 어설픈 그 학생들이 나라 전반에 뿌리를 내리는 상황을 생각할 때, 서울의 학교들에서 그러한 상황이 지속된다면 머지않아 현재 각 학교에서 행하는 선전이 국가의 심각한 분란을 야기할 수 있음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외국 언론기관들도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영자신문인 『독립신문(Independent)』의 발간자인, 한국에서 출생하였으며 미국에서 수학한, 서재필이 서울에서 일어난 대규모 반정부 음모주 011
번역주 011)
1884년 갑신정변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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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중심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서울의 거리에서는 지금도 때때로 미국학교 학생들의 행렬을 만날 수 있으며, 그들이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에 대하여 일반 군중들에게 장황하게 연설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 있어 러시아학교는 학생들에게 단지 기초교육을 시키고 러시아어를 가르치는 등의 목적만을 추구함으로써 다른 외국학교들과는 구별되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외국학교들 이외에도 서울에는 모두 600명의 학생이 수학하고 있는 9개의 한국 소학교 그리고 장래의 한국인 소학교 교육자를 양성하는 소위 보통학교라고 불리는 학교에 70명이 수학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서울의 일본인 거주지에 일본인들을 위한 일본학교가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같이 교육받고 있으며, 4개 반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이곳의 수업은 매우 완벽하며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초급반에서 남자와 여자 학생들을 선정하여 산수 문제를 냈는데, 그들 모두는 계속 훌륭하게 대답했습니다. 다시 저는 상급반에서 제가 직접 지명한 16세가량의 여학생 두 명을 칠판 앞으로 오게 하여 한 명에게 소수의 나눗셈을 시켰는데, 그녀는 실수 없이 그것을 해냈으며, 다른 한 명은 지명을 넣지 않은 지리부도에서 다양한 나라들의 국경, 주요 도시들, 강 및 산맥 등등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다음의 대상자는 소규모 수공업자의 딸들이었습니다. 그녀들은 의복을 재봉할 능력을 지니고 있는가와 음식을 준비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체육시간에는 학교의 남녀학생들이 모두 한결같은 집중력을 가지고 전투에서의 행군연습에 참여하였는데, 이것이 그들의 몸과 마음에 잘 배어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가까운 고지에 대한 돌격 모습을 보여주기를 요청하였을 때, 여학생들은 한쪽에 서서 누가 정상에 가장 먼저 오르는지 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으며, 정상에 가장 먼저 도달한 학생에게 환희의 함성을 보냈습니다. 남학생들은 열정을 가지고 돌격준비를 하였으며, 즉시 학교는 깃발 몇 개를 준비하여 처음 도착하는 사람이 승리자로 인정되는 몇 곳의 고지에 설치하였습니다. 이러한 경기는 그들에게 일상적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실외에서 수행되는 체육연습 시간에는 한국 민중들이 낮은 담장을 둘러싸고 모여들어 이 연습을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곤 하였습니다. 제가 방문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일본학교들은 체육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모든 면에서 군사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모든 일본학교에서 여학생들도 체육활동에 참여하고 있었고 또한 거의 모든 학교들에 소총이 구비되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원산에서 남학생이 소총을 분해하고 결합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를 볼 때 머지않아 곧 학교에서 남학생들 뿐 아니라 여학생들까지도 사격을 가르칠 것이며, 여성을 포함한 모든 일본국민들에게 스며들어 있는 애국주의를 생각할 때 그러한 유형의 과목을 학교수업에 도입하는 것에 대해 모든 일본인들이 공감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일본을 제외하고 이 나라에서 외국 열강들이 얻는 교역상의 이익은 아직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외국과의 교역을 위하여 개방된 항구 즉 원산, 부산, 제물포에는 각각 일본 조계(租界)가 설정되어 교역에 종사하는 사람이 대다수를 이루는 일본인들만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항구들에는 일본 영사업무를 위한 2층짜리 건물이 건축되어 있습니다. 나머지 외국인들, 상선회사나 교역회사 주재원들의 거주지는 일본인 주거지들 사이에 있어 눈에 거의 띄지 않습니다. 개별적으로 지어진 세관 건물과 선교사들의 건물이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됩니다. 일본인들은 도처에서 매우 큰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모든 소형 상점들에서는 일본에서 수입된 상당히 많은 상품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주요 수출품목인 쌀 교역의 대부분이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청일전쟁 이후 급감한 청국과의 교역은 명맥만 근근이 이어가고 있습니다. 일본회사들이 한국의 항로를 대부분을 독점적으로 장악하고 있어서, 2주일에 1번 개항장을 방문하도록 되어 있는 우리 세벨료프 선박회사의 보조 항로만으로는 일본과의 경쟁이 불가능합니다. 일본인들은 비개항장까지 교역을 확대시키기 위하여 소규모의 근해 항해용 기선을 건조하였습니다. 이 선박들은 한국 국기를 게양하고 항해하고 있으나, 일부 항구에서는 일본 기선들이 교역을 목적으로 직접 일본 국기를 게양하고 비개항장에 입항하고 있으며, 그와 동시에 러시아가 동일한 행동을 취하지 못하도록 날카롭게 감시하고 있다는 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즉 세벨료프 선박회사의 기선이 한국 동부 연안의 만(灣)들 중 한 곳에 잠시 정박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데리고 온 한국인 승객들 중 일부를 하선시켰던 지난해 봄, 일본인들은 즉각 원산세관을 상대로 동일 선박이 그곳에 입항할 경우 억류시키고 4,000달러의 벌금을 부과해야 한다고 요청하였습니다. 한국인들의 눈에는 이 모두가 일본인들이 갖는 중요성과 영향력을 증대시키는 반면, 인민과 자신의 아시아 이웃을 우애롭고 부드럽게 상대하고 있는 러시아에 대한 호의를 무력화시키는 것입니다.
한국의 독립성을 위협하는 현황 요소들의 결과를 정리하면 위에 언급한 것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1. 일반 백성들의 복지를 좀먹는 행정관료 개개인들의 부패에 의해 국가의 내부질서는 매우 쉽게 문란해 질 수 있으며, 강력하게 조직된 경찰력과 군사력이 없는 상태에서의 재건은 종종 심대한 어려움에 봉착할 수 있다. 또한 민중의 소요가 있는 경우에는 외국 국민들의 신체적 및 물질적 이해관계가 훼손될 가능성이 있는바, 이는 한국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는 국가 혹은 열강들의 간섭을 야기한다.
2. 이미 3만여 명의 한국인 신도를 확보하고 있는 가톨릭의 선교활동은 가톨릭 선교사들이 신도들을 육성하는 맹목적 신념을 지니고 있으며, 그들이 엄격한 규율을 준수하고 있기 때문에, 가톨릭 선교회의 수장이 한국인 신도들을 가톨릭의 과업에 보다 유리한 방향으로 쉽게 유도할 수 있지만, 그것이 한국의 이익과는 부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위험한 현상이 되고 있다.
3. 한국은 다양한 자연자원 개발에 대한 이권을 허용하고 그와 동일하게 철도부설권 및 선박 항해권 등을 허락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산업과 교역을 발전시키는 한편, 외국인들에게 국가의 경제를 종속시키는 현상을 불러오기도 하는데, 특히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 그 위험성이 매우 크다.
4. 외국학교들은 한국인들에게 일반 기초교육을 확산시키는 데 유용하게 이용되고 있지만, 동시에 러시아를 제외한 모든 학교가 한국 스스로가 자신의 문화적 발전단계에서 그러한 정치체제를 수용할 능력이 얼마나 있는지에 대하여 전혀 평가하지 않은 채, 학생들에게 인민대표들의 감시에 기반을 두는 정치체제의 우월성을 주입시키고 있는바, 이는 사회적 분란을 발생시키는 토양을 조성하는 것이다.
5. 일본의 교역은 한국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점차 한국의 모든 경제활동체계를 장악해 가고 있다.
한국의 독립성을 저해하는 새로운 상황을 어떤 수준에서 진정시키며, 러시아가 이에 어떻게 조력할 수 있는지의 문제에 대하여 저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하고자 합니다.
한국의 국가재정을 호전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미 세입, 세출예산서를 작성함으로써 이와 관련된 첫 조치가 취해졌습니다. 참고로 세입, 세출 예산서에 의하면 1897년 세입은 4,191,192엔이었고 세출은 4,190,427엔이었습니다. 이외에도 예산집행에도 질서가 잡혀 부처의 어떠한 지출도 탁지부에 소속된 외국인 고문이 동의하지 않으면 실행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대신들이 임의대로 국고에서 사용할 수 있는 미통제 금액의 액수에도 한도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는 재정의 건전화를 위한 시작일 뿐입니다. 따라서 현재까지 전혀 엄두도 내지 못했던 세금 징수체계를 점진적으로 확립하는 등, 이 방향으로의 진전은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랫동안 약탈을 통해 확립된 한국의 재정관행을 단숨에 제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만큼, 완만한 해결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모든 관료들이 그에 대항하여 적대감을 가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납세자들에게 새로운 세금을 부담지우지 않으면서 다른 수입원을 찾는 데 관심을 가지는 것이 옳은 방향일 것입니다. 그 다음 현재까지 매우 미비한 한국의 도로를 건설하여 도로상황을 향상시키고 수상교통체계를 보수하며, 동시에 어업활동을 조절한다면 산업과 교역이 대폭 향상되면서 백성들의 구매력도 향상될 것입니다. 한국에는 1천만 명의 백성이 있으며 1년에 두 번의 수확이 가능한 남부지방의 토양 조건을 고려하면, 만약 제대로 징수할 경우 정부의 세입은 1897년 한국의 세입예산서에 기재된 4백만 엔을 훨씬 상회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학교 및 가톨릭 선교활동에 대항함으로써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실질적인 결과는 없을 것입니다. 학교뿐 아니라 선교활동에 있어서도 경험 많은 자들에 의해 구상되어 지지받고 있는 현 질서를 동요시키는 것은 힘들기 때문에 일정 시기까지는 당분간 그 질서를 받아들이는 한편, 러시아학교를 물질적 측면뿐 아니라 교사의 자질 면에 있어서도 훌륭하게 만드는 데 주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그곳에 우리의 선교회도 외관이 뛰어나게 설치해야 할 것입니다. 철도부설권, 선박항해권, 자원채굴권 등 한국정부가 양여하는 이권들에 대해 살펴보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유망한 러시아 기업인들이 이것들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한편,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외국인들, 특히 일본인들이 이 권리들을 가져가는 것에 대처해야 합니다. 이와 함께 비록 한국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한이 있을 지라도 한국 해안에서 우리 선박들의 항로를 확장시키는 것은, 우리와 한국을 경제적으로 가깝게 연결시키는 결과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한국에서의 금융업무가 일본인들 손에서 우리의 손으로 넘어오도록 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그럴 경우 한국에 대한 우리의 영향력이 급속히 신장될 것이라는 점은 증명할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조건들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국왕의 외국인 고문들을 점차 러시아인으로 교체하는 데 주력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강력하고 신뢰할 수 있는 교관단의 조직에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현재까지 얻은 결과는 일본이 우려할 정도로, 왕국의 일정한 기둥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만큼 한국군대를 교육하고 군기를 확립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며,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군대가 국내질서를 유지하기에 필요한 역량을 충분히 보유함으로써 한국 내정에 대한 외국 열강의 간섭 원인 중 하나를 제거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러한 방안들이 우리 정부에 의해 합리적이라고 인정된다면, 서울의 우리 공사관은 당연히 그런 방안 모두를 수행할 것이며, 그 경우 현재 대리공사와 비서만 주재하고 있는 서울주재 공사관의 인력을 보충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신뢰할 수 있고 충분히 교육받은 통역관 양성에도 신경을 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 공사관의 통역관 상황은 매우 암울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통역관들이 러시아어를 잘 알지 못하며, 교육 수준도 낮은 한국인들 중에서 선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들을 거쳐 중요한 외교적 대화를 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임이 분명합니다. 동방의 모든 곳에서는 외형적으로 당당한 풍채가 권력이나 가치와 비슷하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가톨릭 선교사들은 이 사실을 이전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 지역을 압도할 수 있을 만큼 성당을 높고 크게 건축하고 있으며, 건축물의 위풍당당한 외관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서울주재 공사관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지역에 건설되었으며, 건물의 완성도도 여타 열강들의 공사관에 비해 최고의 지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자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 공사관을 정상적으로 운영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자금이 제공된다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또한 그곳을 경비하는 수병들을 위해 적절한 숙소를 건설해야 하는바, 현재의 숙소는 매우 어둡고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함께 여러 군함에서 모집된 수병들로 구성되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교체되는 서울의 경비대를 지상에서의 활동에 보다 적합하고 보다 양호한 훈련을 제대로 수료한 보병부대로 교체하는 것이 보다 적합할 것입니다. 일본은 한국의 모든 개방된 항구들에 경비대를 배치함으로써 한국인들에게 자신의 특권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이 항구 중 한 곳만 방문해도 일본군 보병의 나팔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거리에서는 일본군 병사들을 목격할 수 있고, 위병들이 경비 중인 그들의 병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항구의 제일 좋은 지역에 일본인들의 정착지가 있는데, 그곳에서는 마치 한국이 아닌 일본에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갖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공사관이 수행하는 정보수집, 자신들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한 활동 등은 서울 이외 지역에 거의 아무런 기관도 가지고 있지 못한 우리에 비하여 훨씬 수월할 것입니다.
일본은 자신의 군대와 함대를 증강시키기 위하여 매우 시급히 서두르고 있습니다. 청일전쟁 이전 이미 일본군 병력 수는 적의 침략으로부터 자국방어를 위해 필요한 병력을 상당히 상회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을 침략한다는 생각은 어떠한 열강도 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일본이 보여준 일본 지역 여러 곳의 요새화와 육군 및 해군력의 증강은 일본이 침략적 목적을 추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상기와 같은 사실을 두고 판단할 때, 의심할 여지없이, 침략 대상은 한국이 될 것입니다. 한국은 과거부터 일본이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서 확보하고자 했던 곳으로, 일본이 한국을 점령할 경우 우리는 그들의 침략에 맞서야 하는 최전선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일본이 어떤 열정적 감정을 가지고 최근의 그리스-터키전쟁에서 발생한 모든 사건들을 주시했는지를 목격한 장본인입니다. 이 전쟁이 유럽전쟁으로 확대되었다면 일본은 즉각 한국으로 진출했을 것이라는 징후들을 당시에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은 자국군대를 1900년까지 재조직하려고 하고 있는데, 그 시기가 되면 전쟁이 발발할 경우 약 400,000명을 동원할 수 있게 됩니다. 동일한 시기 우리는 프리아무르관구에 약 70,000명을 보유하게 됩니다. 다음으로 만약 동방에 주둔한 우리함대의 증강이 지난해와 동일한 비율로 이루어진다면 1900년까지 우리 함대는 일본 해군력의 2/3수준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추측들을 종합하여 본다면 일본과의 불화 발생 시에 일본의 첫 번째 침략 대상은 한국이 될 것이며, 그 경우 우리 함대의 임무는 무엇보다도 먼저 일본 육군의 한반도 상륙을 저지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실에서 일본을 상대로 저항할 수 있는 힘을 보유하는 수준까지 러시아 태평양함대를 증강시켜야 하는 필요성이 강력하게 제기됩니다. 얼핏 보아 과거 청일전쟁 당시 러시아, 프랑스 및 독일의 한결같은 행동을 판단 요소로 고려할 때, 이 열강들이 협조함으로써 공동의 힘을 통해 일본의 침략적 행태를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측면으로는 극동에서 어떠한 복잡한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 우리 동맹국들은 그곳에서의 자신의 부분적 이해관계를 지키는 방향으로 다소간의 역량을 전환시켜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특히 산둥반도에 대한 일정한 영토적 획득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독일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를 볼 때 러시아가 1개 국가 혹은 나머지 2개 국가의 소규모 지원만으로 일본과의 전쟁에 임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러시아 태평양함대를 증강시키는 것은 블라디보스토크의 항구 시설을 확장시키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는데,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시설 확장은 이미 원칙적으로 우리 정부에 의해 결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군항으로써, 그리고 시베리아철도가 보루화 된 시점에서 블라디보스토크가 갖는 가치가 크지만, 러시아 연해지역의 국토를 수호하고, 일본인들의 한국 또는 청국 대륙에 대한 침략을 저지하는 방벽의 조성이라는 분야에서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다른 항구가, 특히 부동항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문제를 다루면서 우리 정부 내 고위부서의 향후 극동정책 방향과 관련된 견해를 밝히지 않을 것입니다. 단지 저는 여기서 우리의 권한 밖에 위치하고 있는 그런 항구를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그런 항구를 획득했을 경우에 우리에게 발생될 수 있는 이익에만 관심을 기울일 것이라는 단서를 붙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거 극동에서 분쟁이 발생하면 우리 함대는 언제나 미리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항하여 전장(戰場)에 보다 근접한 곳에 위치를 잡기 위하여 일본이나 청국의 연안 부근에서 대열을 정비하였습니다. 겨울이나 평시에도 함대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잘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긴박한 경우 블라디보스토크의 결빙된 항구에서 분함대를 출항시키는 데 2~3일이 걸리며, 복잡한 현대식 메커니즘으로 이루어진 선박들이 동절기에 완전한 전투준비 태세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외에도 과거에는 우리의 선박들이 도크, 특히 일본의 도크를 이용하는 데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근본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겨울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분함대가 출항하는 것은 위에 제시한 경우들 중 하나에 해당됩니다. 하지만 필요한 경우 일본의 도크를 이용한다는 생각은 완전히 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현재 우리와 일본과의 관계가 복잡해질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홍콩의 도크도 보기 좋은 핑계를 대면서 우리가 사용할 수 없게 함으로써 우리를 매우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분함대들의 전투준비 태세가 충분하다 할지라도, 예기되는 분란이 발생하는 경우에도 항상 선박 중 일부가 검사를 받기 위해 혹은 작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도크에 들어가야 할 절박한 필요성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과정 없이는 선박들의 전투준비 태세가 보장되지 않습니다. 이런 목적을 위해서는 그리고 겨울철에 군함들이 쇄빙선의 도움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입·출항하는 것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이는 어떤 경우이건 극단적인 어려움을 수반하기 때문에, 지금 어느 때보다 더 황해에 있는 부동항 중 하나를 우리의 완전한 관할 하에 두어야 하는 사활적 필요성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적들 역시 이러한 취약성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에, 분란이 겨울철에 발생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부동항을 언급하면서 강력한 군항의 건설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철도가 연결되어 있지 않은 항구는 항상 실질적 약점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철도로 연결되지 않은 항구는 설비와 무장을 위해 한꺼번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야 할 뿐 아니라, 경비 병력과 항구 설비에 매년 상당한 액수의 금액을 지출하도록 합니다. 따라서 아직까지는 창고, 작업장에 더해 우리의 군함뿐만 아니라 의용함대 중 대형 선박을 받아들일 수 있는 도크를 지닌 항구로 만족해야 합니다. 만약 정부예산이 직접 투입되지 못한다면 민간 기업이 참여함으로써 그런 항구는 건설되고, 이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경우 우리정부가 다수의 주식을 보유함으로써, 정부가 그곳에 건설된 도크와 작업장을 주도하여 운영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항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 평시에 그런 항구는 민간선박의 검사 및 선박수선 활동에 이용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의 전함과 의용함대 선박들을 도크에 정박시키는 데 우리가 매년 얼마를 지불해야 하는지에 관심을 갖는다면, 기업은 그런 구조 하에서도 충분히 보상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용함대 선박들은 일이 누적되어 있어 종종 주저하지 않고 불가능한 액수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러한 유형의 항구는 전쟁이 발발할 경우 그 항구가 민간 소유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거나 혹은 민간 소유물을 소중히 여기기를 원하지 않는 보다 강력한 해상의 적에 의해 파괴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항구에 투입된 대량의 자금은, 각각의 전쟁에 투입되었던 보다 막대한 액수의 자금과 비교할 때, 그런 항구를 보유함으로써 우리 함대가 항시적으로 가질 수 있는 완벽한 전투준비태세의 가능성이라는 점에서 백배를 보상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만(灣)이 항구 건설에 적당한가를 결정하는 것은 전문가들의 몫이기 때문에 위에 언급한 요구들을 만족시키는 항구가 어디에 건설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직접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만, 그럼에도 저는 황해에 적당한 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만(灣)을 선택하는데 있어 첫째,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철도로 수월하게 연결될 수 있는지, 둘째, 상황이 발생할 경우 군항으로의 용도변경이 가능한지 등의 여부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기 위하여 러시아가 협력할 수 있는 혹은 채택할 수 있는 방안을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국가의 재정적 상황과 행정조직을 강화, 향상시켜야 한다.
2. 외국인들, 특히 일본인들에게 다양한 유형의 이권이 제공되는 것을 저지해야 한다.
3. 한국의 항구들에 우리의 기선 항로를 개설한다.
4. 서울주재 우리 공사관을 강화하고, 동시에 공사관의 경비조직을 강화시켜야 한다.
5. 한국군에 대한 교관활동을 굳건히 수행하는 한편, 지속적으로 교관조직을 확충시켜야 한다.
6. 우리의 태평양함대 및 이와 관련이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의 항구설비를 증강시켜야 한다.
7. 가능한 시기가 되면 황해에 부동항을 확보해야 한다.
 
일본이 어려운 재정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함대와 군대의 증강을 서둘러 수행하는 모습을 보면, 제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이 모든 부분을 완수하는 순간 현재 일본이 보여주고 있는 침묵과 관망의 상황이 단숨에 변할 수 있음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때 우리가 수행해야 할 방책들은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완공 이전까지 완성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측면에서 우리의 준비는 일본인들의 호전적인 태도를 잠재워, 우리와의 평화적 교섭의 장으로 일본을 불러낼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으로 언젠가는 우리정부가 태평양함대를 어느 정도 규모로 구성할 것이며, 또 우리의 항구설비를 어디에 그리고 어떻게 확충시킬 것인가를 결정할 것이지만, 우리정부가 이 모두를 신속하게 완수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항구를 신속하게 건설하는

  • 각주 010)
    지금은 러시아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로 실행하고 있습니다. 바로가기
  • 번역주 001)
    이사벨라 버드 비숍(I.B. Bishop)을 말함바로가기
  • 번역주 002)
    일본어로는 장사(壯士)를 의미하는데 낭인(浪人)들을 말함바로가기
  • 번역주 003)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바로가기
  • 번역주 004)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바로가기
  • 번역주 005)
    이경직을 말함바로가기
  • 번역주 006)
    전 총리대신 김홍집을 말함바로가기
  • 번역주 007)
    시위대를 말함바로가기
  • 번역주 008)
    가토 마스오(加藤增雄), 주한 일본공사임바로가기
  • 번역주 009)
    함경도를 의미함바로가기
  • 번역주 011)
    1884년 갑신정변을 말함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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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제의 현황에 대한≫ 중장 운테르베르게르의 보고 자료번호 : kifr.d_0004_0150_0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