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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소장 근대한국문서

북경주재 러시아 제국 공사의 보고서

Императорская Российская Миссия в Пекине
  • 구분
    보고서
  • 저필자
    А. 보르
  • 수신자
    Д. 알렉세예비치
  • 발송일
    1894년 4월 10일(1894년 4월 10일)
  • 문서번호
    АВПРИ,ф.150,оп.493,д.4,лл.238-245об.
  • 원소장처
    제정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
  • 대분류
    정치/외교(국제문제)
  • 세부분류
    정치세력/국제관계
  • 주제어
    김옥균 살해사건
  • 색인어
    김옥균, 홍종우, 상해, 청불전쟁, 박영효
  • 형태사항
    16  , 필사본  , 러시아어 
1894년 4월 10일 발신.
북경, №138.
 
드미트리 알렉세예비치 백작 각하
 
지난 3월 16/28일 상해(Шанхай)에 거주하는 유럽인들은 그곳에서 발생한 정치적 살인 사건으로 인해 흥분하고 있습니다. 그 사건의 희생자는 조선인 망명자 김옥균(Ким-Ок-кюнь)입니다. 살해된 사람은 극동지역에서 아주 유명한 인물입니다. 최근 조선의 격동기를 대표하는 일련의 정치적 사건을 주도하면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그에게 모반자라는 명성을 안겨준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김옥균은 오랫동안 일본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일본어에 대한 지식과 천성적인 간사함으로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일본의 공식적인 지지를 이끌어냈습니다. 귀국 후 그는 국왕의 대단한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출신성분 상 중간층에 속함에도 외부협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사실 외부는 조선의 관습에 따르면 양반 특권층만이 관료층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김에 대한 국왕의 그런 특별한 배려는 일본인들의 도움으로 청국의 종속에서 벗어나려는 그의 계획에 대한 국왕의 동의를 의미합니다. 또 계획의 이면에는 서울에 있는 일본 대표 다케조에(Такезоя)주 001
번역주 001)
주 조선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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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김의 활발한 교류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청국에 대한 종속은 국왕에게는 고통스럽고 또 가끔은 솔직히 굴욕스런 현실이며 김옥균에게는 자신의 권력 장악을 방해하는 현실적인 제약이기도 합니다. 곧 김옥균은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청국당의 방해공작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김은 일본인들의 협력을 기반으로 하여 자신이 속한 사회 층을 중심으로 일차적인 권력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여기에는 김의 지지자들과 서울에 있는 일본 대표부 소속 일본 주둔군의 역할이 지대했습니다. 김옥균은 새 질서에 부합하는 개혁을 일으키기에 유리한 시점을 엿보았습니다. 그는 청국의 관심이 청불전쟁(Тонцинской войны)주 002
번역주 002)
청불 전쟁 혹은 중불 전쟁은 1884년 8월에서 1885년 4월까지 베트남 북부의 통킹을 프랑스가 차지하기 위하여 벌인 전쟁이다. 프랑스는 전쟁의 목표를 달성했으나 청국은 19세기에 외국과 겨룬 전쟁에 비교하여 훌륭한 전쟁을 수행한 편이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청나라가 외국의 적과 싸워 이긴 전쟁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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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집중되어 있는 시기를 이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김옥균은 속임수를 써서 현 대신들 대부분을 몰아내었고 자신을 호조참판으로 선포하면서 신 관료 조직을 구성했습니다. 그런데 민중들은 일본인들에 대해 역사적으로 뿌리 깊은 심각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일본인들의 협력이 전제가 된 개혁은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주둔군의 수자는 청국이 일본보다 훨씬 많습니다. 청국은 매우 유능한 조선 주재 청국 대표인 원세개씨의 진두지휘 하에 이런 조건들을 최대한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토착민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 군대를 궁궐과 도시에서 몰아냈습니다. 그 뒤 강제로 제물포로 퇴각시켰으며 그곳에서 일본공사, 김옥균, 그의 세 명의 지지자들을 일본으로 쫒아냈습니다. 이번 실패는 무사히 살아남은 몇몇 잔여군 뿐인 일본당의 완전한 분열을 초래했습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서둘러서 청국 편에 가서 붙었습니다. 나머지는 의정부와 러시아의 지지를 기대하고 있는 묄렌도르프(Меллендорф)의 주변에서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이후 묄렌도르프가 몰락하면서 조선에 대한 청국의 영향력 행사를 반대하던 이 소수의 사람들은 스스로 청국 당의 대열 강화에 앞장섰습니다. 사실 이 사건 이후 청국당은 전능함을 인정받게 되었고 전례 없는 아주 굳건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에 도착한 김옥균은 도쿄에 정착했으며 일본 정부의 연금을 받으면서 살아갔습니다. 그 이후 청국은 아주 집요하게 김을 내어 놓으라고 일본에 요구했지만 일본은 이를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비밀리에 파견된 살인자들을 통해 증오하는 적을 죽이려는 청국의 시도들은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김옥균을 상해로 유인한 뒤 그곳에서 살해했습니다.
살인을 둘러싼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김옥균과 그의 두 명의 동지, 도쿄 청국 공사의 통역관인 청국인 오보인(吳葆仁)주 003
번역주 003)
중국식 이름은 우바오런이며 일본 주재 청국 공사관 통역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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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살인의 주범인 조선인 홍종우(Хонь Цзинь-ву) 등은 유럽풍 옷을 입고, 일본인 안내자의 비호를 받으면서 무사히 상해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일본 호텔주 004
번역주 004)
동화양행(東和洋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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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묵었습니다. 확실한 자료에 의하면 그들의 도착 사실을 일본 영사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사건과는 관계가 없는 인물입니다. 도착 즉시 김옥균은 짠 푸인(Тянь-фынь)이라는 청국 기업주 005
번역주 005)
천풍보호(天豊宝號)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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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발행하는 어음 5천 원(йен)을 환불해달라고 홍에게 건넸습니다. 그런데 그 후 구금된 홍에게서 발견된 이 어음은 가짜로 판명되었습니다. 자세한 조사 결과 상해에는 그런 기업이 없었습니다. 청국인 오는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동료인 홍에게 김을 갑작스럽게 찾아가서 세발의 권총 사격으로 죽이라는 살인 계획을 위임했습니다. 그리고 즉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 후 지방 경찰에게 체포된 홍은 자신의 살해는 조선 국왕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고 솔직하게 털어 놓았습니다. 지방경찰서장의 출석 하에 청국 관리들에 의해 진행된 공식 심문에서도 똑같이 말했습니다. 그 당시 그에게 그의 증언에 대한 증빙 서류를 요구했습니다. 그는 서류는 도쿄에 남아있는 공범자주 006
번역주 006)
이일직(李逸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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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공범자는 도쿄에 남아 있었습니다. 홍의 살인 사건 공모자는 또 다른 조선의 정치적 망명자로 김옥균의 동지인 박영효를 살해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지방 감옥에 홍이 구금되어 있는 동안, 그 당시 상해에 있던 조선인 관료 한 명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홍에 비해 그의 관직은 상대적으로 높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 앞에서 몇 차례 절을 한 뒤 깊은 존경심을 표했습니다. 살인자의 재판 관할이 청국 정부로 넘겨짐에 따라 살인과 관련된 물품, 서류들도 함께 이송되었습니다. 그 서류 속에는 청국 공사의 도쿄 방문 서류도 있었습니다. 홍종우는 청국의 도대(Даотай)주 007
번역주 007)
중국 청나라 시대의 관직명으로 도대(道台)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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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소환해 갔는데 소문에 의하면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조선으로 송환되었다고 합니다.
살인자의 인물에 대해서 아직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처음 도쿄에 온 것은 1889년입니다. 김옥균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조선으로 귀국해서 개혁의 수장이 되라고 권유했다는 것만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김옥균은 이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이후 홍종우는 파리로 건너가서 4년 동안 체류했는데 어떻게 생계를 유지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에게서 발견된 서류 중 그의 파리 체류를 증명하는 편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전도사 Hyacinthe Louson의 후원을 받았습니다. 이 외에도 그에게서 홍콩의 프랑스 영사와 서울의 프랑스 대표에게 보내는 추천서가 발견되었는데 누군가의 명령으로 전달하지 않은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추천서를 제외한 모든 편지들은 홍이 파리에서 일본으로 돌아옴에 따라 도쿄 조선 영사관을 통해 그에게 전달되었습니다.
홍의 신빙성 있는 진술에 의하면 김옥균의 살인은 조선 정부에 의해 계획된 것입니다. 심지어는 청국인들이 주도했다는 결론까지도 가능합니다. 김은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청국인들의 영원한 적입니다. 그런데 조선에 대한 청국의 영향력이 막강하기 때문에 그런 결론도 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사건의 정황으로 보아 판단하건데 일본 정부의 개입 여부는 불확실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명확한 해명은 사건 규명의 중요한 한 축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김을 지지하지만 끊임없이 감시를 해 온 일본 정부가 그를 둘러싼 음모를 몰랐다고 가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만일 살인 계획을 알고 있었는데 이를 묵인했다면 이것은 그의 죽음이 일본 정부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정황 속에서 최근 상해에는 조선 쌀의 일본 반출 금지에 대한 대가로 일본인들이 김옥균을 팔아넘겼다는 소문이 널리 유포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합니다. 김옥균은 일본에 거주하면서 아직 조국에 남아있는 자신의 몇몇 지지자들과 교류를 유지하려고 애썼습니다. 그의 지지자들의 이름은 두 달 전 조선에서 발생한 개혁 당시 밝혀졌었습니다. 김옥균의 활동은 조선과 청국과의 관계 속에서 일본이 얻고자 하는 정치적인 목적과 거리가 멀었던 것 같습니다. 이는 구금된 김의 살인자가 심문 당시 했던, ‘일본 정부는 김의 음모로 인해 지쳤다’라는 말을 통해 확신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김옥균의 죽음은 일본에게는 유리한 사건입니다. 즉 일본은 조선에서 자신의 위치를 굳건하게 인정받으려 합니다. 한편 청국은 조선에서 무조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합니다. 결국 김의 죽음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일본과 청국의 사전 협약의 결과물 일 수도 있습니다.
 
각하에 대한 심심한 존경심과 충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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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불 전쟁 혹은 중불 전쟁은 1884년 8월에서 1885년 4월까지 베트남 북부의 통킹을 프랑스가 차지하기 위하여 벌인 전쟁이다. 프랑스는 전쟁의 목표를 달성했으나 청국은 19세기에 외국과 겨룬 전쟁에 비교하여 훌륭한 전쟁을 수행한 편이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청나라가 외국의 적과 싸워 이긴 전쟁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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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주재 러시아 제국 공사의 보고서 자료번호 : kifr.d_0004_005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