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러시아 소장 근대한국문서

플란손이 이즈볼스키에게 보낸 보고서

  • 구분
    보고서
  • 저필자
    플란손
  • 수신자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이즈볼스키
  • 발송일
    1908년 1월 18일(1908년 1월 18일)
  • 문서번호
    АВПРИ,ф.150,оп.493,д.30,лл.222-227об.
  • 원소장처
    제정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
  • 대분류
    외교(국제문제)
  • 세부분류
    외교정책/국제관계/이민(국외거주)
  • 주제어
    간도 영토문제
  • 색인어
    간도, 회령, 정주, 통감부, 용정, 사이토 대령, 두만, 북경정부, 한국인, 중국인
  • 형태사항
    11  , 타이핑  , 러시아어 
№7
서울, 1908년 1월 18일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이즈볼스키 각하께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각하주 001
번역주 001)
1908.2.18. 서울에서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이즈볼스키(А.П. Извольский)에게 보낸 보고서임
닫기
 
5등관 플란손은 1906년 8월 30일 №7과 지난해 9월 29일 №52로 보내드린 보고로 간도영토의 모든 역사와, 마찬가지로 그것의 귀속에 대한 중국과 한국 간 존재하는 논쟁의 전(全) 역사에 대해 각하께 이미 자세하게 알려드리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이 논쟁에서 일본인들은 현재 한국을 대신해 이미 아주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본 보고서에 보충으로 이 영토의 현재 상황에 대해 사이토 대령이 몇몇 일본신문사 대표들과의 대화에서 말한 몇 가지 정보를 말씀드립니다. 사이토 대령은 1906년 8월 21일 일본정부에 의해 간도로 파견되었으며, 현재 그는 일시적으로 도쿄에 머물고 있는데 그곳에서 그는 “간도관련 문제에 대한 사무소”를 열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자신의 임무수행을 위하여 1906년 8월 그곳에 도착하였을 때 날씨는 매우 더웠으며 온도는 화씨 112도(즉 35도 이상)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러한 더위로 인하여 회령에서 정주까지(44마일 거리) 짐마차로 이동하던 중에 그의 사람 몇 명은 실신하였답니다. 한편 그가 그곳[정주]을 떠나기 전 바로 며칠 동안은 온도계가 화씨 영하 25도(즉 -25도 이하)주 002
번역주 002)
화씨와 섭씨 중 하나가 오타로 보임
닫기
정도를 가리켰다고 합니다. 이들 관료들을 위한 집은 시험적으로 일본-중국식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이후 이어지는 시도는, 비록 어둡고 누추할 지라도 지역 기후에 아주 적합한 순수한 한국식 또는 중국식 형태로 지어졌답니다. 30마일의 거리인 회령에서 [일본] 통감부주 003
번역주 003)
일본 통감부 간도파출소를 말함
닫기
와 또한 헌병대 참모부가 있는 용정(Лун-чен)까지 이르는 길은 심지어 경철도도 없었답니다. 그 길은 황소가 끄는 중국식 짐마차를 이용하든지 또는 걸어서 이동해야 합니다. 게다가 이 수레들은 정말 온전하지 않고 지저분하며 부아가 치밀게 하는 늦은 이동속도는 모든 외국인들을 놀라게 한답니다. 각각의 수레에는 단지 3개의 자리만이 있답니다.
지난해 사이토 대령이 용정에 도착하였을 때 그곳에는 모두 95가구가 있었고 각각의 가구에는 약 5명이 살았다고 합니다. 현재 가구 수는 250까지 늘었고 아주 빠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답니다. 그는 가구 수가 연말에는 1천에 이를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 시골의 그러한 급성장의 원인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데에 있다고 합니다. 오랜 시간동안 간도의 주민들은 중국 행정부의 무거운 납세의무와 무자비한 강요의 억압 하에 있었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러한 가혹한 노예상태에서 헤어날 힘이 없었고 그들은 지난해까지 중국 관료들의 끊임없는 탐욕 하에 종속되어 있었답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들은 밤낮으로 자신들의 운명에 눈물 흘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지난해 여름 그들은 통감부(Генеральное Резидентство)가 자신들의 구원자임을 알았다고 합니다. 일본의 공평성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고 억압받는 주민들은 하나하나 뒤이어 자신의 주거를 용정으로 옮기기 시작하였답니다.
간도에서의 중국 관료들의 이전의 학정은 모든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답니다. 예를 들어 농촌의 주민이 어떠한 실수로 인해 유죄로 판명되면 그 농촌에서 좀 더 부유한 주민을 체포하였고 그가 상응하는 뇌물을 관료에게 주기 전까지는 그를 풀어주지 않았답니다. 그런 다음 부에 따라 그의 뒤를 이어 다음 주민을 체포하였고 관료는 마찬가지로 그에게 뇌물을 강요하였고, 이렇게, 단지 하나의 범죄행위를 대가로, 전 농촌마을이 극빈상태로 갈 때까지 [착취를] 계속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본관청이 설립됨에 따라 근본적인 변화가 중국 행정에 도입되었답니다.
북경정부는 이 영토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고 그곳으로 장쇼우친(Чжан Шоу-цин)씨를 파견하였는데, 그는 지체 없이 도착하여 다른 기존 관료들처럼 장차(Тян-ча)에 머물고 있답니다. 그는 현재 아주 열성적인 모습으로 일본에 기운 동정심을 확보하려고 노력하고 있답니다. 그는 특히 조심성과 신중을 기하여 모두를 설득시키려 노력하고 있답니다. 그는 자신의 관료들과 사람들, 마찬가지로 경찰들에게 어떠한 것이든 학대를 삼가하라고 명령하였다고 공개적으로 발표하였답니다. 여러 주요지역에서의 공고에 의해 주민들은 이전의 안 좋은 통치가 새롭고 보다 좋게 바뀌고 그들은 보다 평온하고 믿을 수 있게 되었으며 관료와 군인들에게 내는 지출로 인해 지금부터는 더 이상 그들로부터 협박당하지 않을 것이고, 그들 모두는 정부로부터 지불 받을 것이라고 알게 되었답니다. 몇몇의 지역에 두만강으로부터 북쪽에 이르는 땅은 중국에 속한다는 공고가 붙었답니다. 토착인들은 이러한 모든 개혁이 일본관청의 설립 결과라는 것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았고 진심으로 통감부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사려 깊은 조치들은 아직까지는 아주 조금 중국 군인들의 규율을 높였을 뿐이라고 합니다. 구력(아마도 중국력)으로 새해 전날에 군인들은 새해를 대접하는 의미로 각각의 집마다 주민들에게 “모찌”(쌀로 만든 과자)를 나누어주었고, 이와 함께 “여전히” 주민들에게 터무니없는 커다란 보답을 강요하였다고 합니다. 이들은 평소에 군인업무, 경찰업무를 수행하거나 또는 세를 거두는 일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자신들의 전통적인 [구식] 군인 600명과 경찰, 장교 및 하급관료 250명이 장(Чжан)과 함께 왔답니다. 지금까지 그곳에 모두 100명의 중국경찰이 있었는데 이렇게 하여 현재는 간도에 350명의 경찰이 있답니다. 일본 관료들이 여러 시골에 세운 국경초소들이 얼마 전 이 군인들에 의해 파괴되었고, 게다가 한국인 경찰 한 명은 제복이 벗겨져 그들에게 끌려갔답니다. 곧바로 중국 당국에 대한 강력한 항의가 발표되었고 중국 당국은 정중하게 사과하였답니다. 그러나 중국 군인들은 여전히 종종 가축용 사료를 기부 받는데 물론 이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적이 없답니다.
사이토 대령은 중국인들의 몰염치한 간책의 대표적 예로 다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용정에 있는 통감부 지부에서 따오(Тао)라는 성을 가진 사람의 재판이 있었는데 그는 도쿄에 있는 외무성와 북경정부의 합의에 따라 이미 이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핑계를 대며 자신을 즉시 방면할 것을 요청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이토 대령은 이 청원의 신뢰성을 의심하고 자신에게 제출된 청원을 거절하였답니다. 후에 조회하여 안 자료들은 그의 관점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주었답니다.
간도 주민들의 주식은 최우선으로 지역 농산물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수수와 함께 콩류와 야채랍니다. 그 다음으로는 쌀과 밀이 차지한답니다. 필수품의 가격은 이곳에 통감부 지부가 개설된 때부터 급격하게 올랐답니다. 예를 들면 계란은 이전에 개당 6전(錢)에 거래되었는데, 지금은 개당 10전을 한답니다.
현재 일본 사법권 하에 있는 영토의 크기는 대략 가로 50마일 세로 75마일이랍니다. 이 땅 모두 명목상으로는 중국인들에 속해 있으나 한국인들에게 임대되어 있답니다. 한국인들은 이 땅에서 얻은 것의 절반 이상을 이 땅의 주인인 중국인들에게 바쳐야만 한답니다.
이곳에 있는 일본 총 대표부로 사이토 대령이 보낸 소식들에 따르면 현재 간도에는 529개의 한국인 마을과 209개의 중국인 마을이 있고, 15,356개의 한국인 가구 및 3,074개의 중국인 가구가 있습니다. 한국주민은 72,076명(그 중 남자 39,523명과 여자 32,553명)이고 중국인은 21,983명(남자 13,623명과 여자 8,360명)입니다. 이와 같이 이 영토에 거주하는 한국인은 중국인보다 2배를 훨씬 넘습니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파견 예정된 2,000명의 헌병에 대해 일본의회에서 200,000엔이 할당되었는데, 이 중 50명은 자칭 한인 빨치산을 진압하기 위하여 간도로 보내질 예정입니다(그곳에 한인 빨치산은 전혀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한국인 334명이 그들을 중국공민으로 받아달라는 청원을 길림 장춘에 제출하였다는 전보가 상해에서 이곳의 일본신문인 게이조일보주 004
번역주 004)
경조일보(京兆日報)
닫기
로 왔답니다. 이것은 그들이 간도에서 일본체제 하에서 훨씬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이토 대령의 견해와 전혀 부합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생각건대 비록 일본신문들도, 중국정부가 간도를 분쟁의 여지없이 자신들의 것이라는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고 쓰고는 있을지라도, 일본인들은 매우 집요하게 이 분쟁영토를 자신의 것으로 확고히 하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즉, 그들이 당연한 듯이 말하는 것처럼 한국을 위하여). 예를 들면, 과거에 군사적 필요성에 의해 비워진 경성(鏡城)에서 3리주 005
번역주 005)
30리를 3리로 잘못 표기한 것으로 판단됨
닫기
(약 10베르스타주 006
번역주 006)
과거 러시아의 거리단위로 1베르스타는 1,067m 임
닫기
) 떨어진 구역인 나남(Нанам) 골짜기가 현재 주택건설을 위한 용도로 임대되고 있는데, 이로부터 미래의 도시(물론 일본의)가 형성된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최근 신문들에 일본인들이 도시 회령에서 간도의 바도우고우(Ба-доу-гоу)까지 경편철도를 깔려고 한다는 소문이 실렸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번 2월 10일 지역신문들 중의 한 신문에 중국 지방주지사가 2개 대대의 군사를 간도로 파견했다는 묵덴주 007
번역주 007)
지금의 심양을 말함
닫기
에서 온 전문이 실렸습니다. 게다가 제가 영광스럽게도 이번 달 16일 각하께 비밀전문으로 보고 드린 것과 마찬가지로, 이틀 전에 이곳 통감부의 공식기관은 외국과의 무역을 위해 간도를 개방한다는 중국정부의 결정이 있을 시에 일본정부는 그러한 기도가 실현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한국의 북쪽 강기슭에 군대를 파견할 것이라는 도쿄로부터 온 전문을 발표했습니다.
보건대 간도 문제는 어느 정도 첨예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각하께 깊은 존경과 진정한 충성심으로 영광을 표합니다.

  • 번역주 001)
    1908.2.18. 서울에서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이즈볼스키(А.П. Извольский)에게 보낸 보고서임바로가기
  • 번역주 002)
    화씨와 섭씨 중 하나가 오타로 보임바로가기
  • 번역주 003)
    일본 통감부 간도파출소를 말함바로가기
  • 번역주 004)
    경조일보(京兆日報)바로가기
  • 번역주 005)
    30리를 3리로 잘못 표기한 것으로 판단됨바로가기
  • 번역주 006)
    과거 러시아의 거리단위로 1베르스타는 1,067m 임바로가기
  • 번역주 007)
    지금의 심양을 말함바로가기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플란손이 이즈볼스키에게 보낸 보고서 자료번호 : kifr.d_0004_0010_0010